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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하나님은 없다. 六. 이삭의 역사

by 8866 2007. 6. 9.

 

  연재 27

 

 六. 이삭의 역사

 

 제1장 콩에서 콩 나고 팥에서 팥 난다

 

 1. 예물로 성사된 혼사.

 

 이삭은 나이가 40대가 되었으나 장가를 들지 못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의 여자를 며느리로 삼으려 하지 않는 아브라함의 고집 때문이었다. 기거하는 땅은 가나안인데 가나안 여자는 거부하니 장가들기가 힘들 것만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며느리감 물색차 늙은 종을 메소포타미아의 고향땅으로 떠나 보내면서 맹세하는 장면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24:3)

 

 가나안 땅은 언제까지나 아브라함에게는 략탈의 대상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독한 혈통론자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사실 이집트여인인 하갈을 첩으로 삼았다. 물론 그 같은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였으며 이삭을 낳자 금방 쫓아낸다.   

 그는 또 아내가 죽은 뒤에 아라비아사람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두라라는 여자를 후실로 맞아들여 슬하에 여섯 자식을 두었지만 그들을 모두 동방으로 보내어 이삭과 떨어져 살도록 한다.

 이처럼 그가 혈통의 정체성을 고집한 것은 단일민족국가의 건설을 염두에 두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아들을 홀아비로 늙게 할 수는 없었던 모양 그는 드디어 중매쟁이를 고향에 파견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가 늙은 가노더러 자신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하게 한 또 하나의 내용은 장가를 보내지 못할지언정 여자가 이 곳으로 오지 않으면 아들을 그 곳으로 데려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서 뜻을 이루어보려는 그의 결심이 얼마나 드팀없었던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리브가에게 오라비가 있어 이름은 라반이라(24:29)

 

 그가 그 누이의 고리와 그 손의 손목고리를  보고 또 그 누이 리브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 나아감이라(24:30)

 

 라반을 우물가로 달려나가게 한 건 금고리와 금손목고리 한쌍(24:22_)이었다. 우물가에 나타난 사람이 청혼당사자도 아닌 늙은 종이었으니 각별히 반가울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일가친척이 보낸 심부름군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종인만큼 체면을 구기며 우물가까지 달려나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집 안으로 맞아들이라는 분부만 내려도 그의 신분으로서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몸소 우물가까지 달려나간다. 뿐만 아니라 집 안으로 들어오자 종들을 시킬 대신 그가 손수 락타 등에 실은 짐을 부리고 짚과 보리를 락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종의 종이 된 노예의 발 씻을 물까지 떠주고(24:32)그들 앞에 음식상까지 차려준다. 라반은 그들의 내방에서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늙은이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임을 밝히지만 라반은 자신의 과분한 환대에 조금도 후회하는 기색이 없다. 고대사회에서는 주종간에 엄격한 차별이 있었다. 자칫하면 여기서는 라반이 종의 신분이고 늙은 종이 주인의 신분인 거처럼 착각할 정도이다.

 그런데 라반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늙은 종은 입을 열자 첫마디가 아브라함이 부자라는 사실부터 밝히고 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24:35)

 

 물론 그 재산들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또 라반도 그런 축재수단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라반이 아브라함에게서 바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일까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성경을 읽어내려가다보면 분명 리브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당시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리브가의 아버지 브드엘이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제24장 50절에서는 분명 "라반과 브드엘이 대답하여 가로되"라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번 혼사에 아버지 브드엘이 정면에 나서지 않고 오빠인 라반이 혼사주도권을 틀어쥐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라반은 아브라함의 풍부한 재물을 넘보고 혼사를 성사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인 브드엘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딸을 먼 가나안 땅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번 혼사를 반대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드엘은 왜 딸의 혼사를 끝까지 막지 않고 결국은 묵인했을까.

 

 라반과 브드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24:50)

 

 브드엘은 분명 태도표시를 유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하니 차마 막지는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번 혼사가 자신의 뜻대로 될 수 없음을 알자 당연히 행사했어야 할 결정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덕분에 결정권을 양도받은  라반은 이 혼사를 적극적으로 추진시킨다. 그는 혼사를 허락한 대개로 "보물"(24:53)을 받아 챙긴다.

 사실 이 혼사는 라반의 독단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리브가의 어미도 예물은 받았지만 혼사에 대한 태도 표시는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브드엘은 아예 예물조차 거절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그번 혼사는 예물에 의한, 일종의 매매 비슷한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결론은 절대로 근거없는 추측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30~31장에서 야곱을 대하는 라반의 행위에서 우리는 그가 금전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부모가 반대하는 여동생의 혼사를 혼자서 결정했을 거라는 가설이 충분한 설득력을 얻는다.

 

 2. 민족간의 갈등과 분쟁은 하나님이 운명지어 준 것이다              

 

 성경을 보면 민족간의 대립과 갈등, 형제간에 서열이 뒤바뀐 것은  모두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하는만큼 어떤 과정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따를 수는 없지 않는가.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지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25: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세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사물의 산생과 발전과정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 최초의 충격만 주었을 뿐 그 후의 운동과정에 대해서는  사물발전의 자체법칙에 맡겨두는가 하는 의문이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사물의 변화과정은 하나님에 의해  미리 계획되고 그의 의지대로, 지정된 코스를 따라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예를들면 이스라엘백성이 이집트에서 겪게 되는 400여 년 간의 종살이가 그러하다.

 그러나 제25장 23절을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로 되어있다. "있다"와 "있구나"가 나타내는 의미는 분위기가 다르다. "있다"는 관찰자의 긍적적 판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관찰자가 "있게" 된 것의 원인제공자로도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있구나"라는 표현은 긍정판단이라는 점에서는 "있다"와 뜻이 다를 바 없지만 "있구나"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긍정판단의 확실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경우 판단은 근근히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있다"는 있다는 사실에 대해 판단자가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반면 "있구나"는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의 확실한 정보가 없는 추측이 현실적 증명을 얻고서야 비로서 확인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까 하나님은 이삭의 아내의 복중에 두 민족의 쌍둥이가 있다는 걸 리브가가 물어서야 비로서 관찰하고 알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물의 발전은 하나님의 의지와는 별도로 독립적 존재 말이 된다.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니까 말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보장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미리 계획되고 그 대본대로  연출된 드라마에 불과하다는 종교적 판단을 긍정해야만 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틀림없이 민족의 갈등과 분쟁, 종족차별, 형제불화와 같은 세상의 온갖 죄악들이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미리 계획되고 그 각본대로 연출된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와 동시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결국 죄악의 원인제공자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견해 역사 성서학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지만 어찌됐든 그들은 상술한 두 가지 관점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아무튼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하나님이 원인제공을 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25:28)

 

 그러나 창세기의 집필자는 형제갈등의 원인으로 하나님이 아닌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의 자식에 관한 편애로 떠넘기고 있다. 사실 그들의 편애가 아니더라도 형제갈등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리브가의 복중에서 운명지워진 것이 아닌가. 그 원인은 그들 두 아이가  서로 다른 두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갈등이 하나님이 제공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세상은 하나님의 의지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고 하나님은 무능하게 옆에서 그 움직임을 예측하고 순종할 따름이라는 불행한 사실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들 형제는 직업에서부터 귀천이 갈라진다.

 형 에서는 들에서 수렵을 하는 사냥꾼이 되었고 동생 야곱은 편안하게 장막에서 거하는 귀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귀여워했다. 그 까닭은 에서의 인격이나 품위보다는 그가 좋아하는 들짐승고기를 사냥해오기 때문이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자는 품행 같은 게 문제시 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아벨을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양을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며 (아벨의 믿음이 총애의 근본이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박한 바 있다)마찬가지로 이삭이 에서를 좋아한 원인도 그가 먹기 즐기는 들짐승을 사냥해 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한 선택조건은 지극히 물질적이며 이기적인 차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이러한 총애에는 그나마 까닭이라도 있지만 리브가가 야곱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조차 없다. 야곱이 막내아들이어서 귀여워 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 뿐이다.

 

 3. 곤궁에 빠진 형제를 도와줄 대신 그것을 악용한 야곱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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