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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호, 숙신 그리고 朝鮮

by 8866 2006. 10. 5.
 

동호, 숙신 그리고 朝鮮



동호(선비족의 조상)와 조선, 조선과 숙신(여진의 조상)의 관계는 동이족 역사가 상고사에서 고대사로 넘어오는 과정에 있어, 고조선 예하의 동이 제족의 실체가 중국 역사가들에 의해 사실상 의도적으로 분산 축소기록 되어 각각 별개의 민족으로 인식케 함에 따라, 민족적 역량과 규모가 지나치게 축소 왜곡된 일면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모순된 사료들을 상호 대조하면서 그 실체를 규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기> 조선열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조선 왕 '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③처음 연나라가 전성기 때에 진번 조선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장새를 쌓았다. ①③④조선은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요동의 국경 밖에 속해 있었다. ①⑤한나라가 일어났지만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고치고,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니, '만'이 명령을 버리고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북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식으로 바꾸고 ⑥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났다. 그리고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 땅에 살면서 차츰 진번 조선의 만이들과 옛날 연나라,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원문인용 1)


여기서는 영토의 좌우 이동이 아주 중요한데, 요약하면 이렇다.


① ‘요동’은 패수를 중심으로 한 좌우 양안 일정지역을 일컸는다.<燕, 秦, 漢代의 지명>

   (‘燕이 망할 때, 패수와 空地 건너 조선은 ‘요동의 국경 밖’, ‘漢이 다시 요동의 옛 고새를 고치고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에 따라 판단)

② 패수 양안에 걸쳐 서쪽에 진번, 동쪽에 조선이(또는 진번조선이)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 조선이란 지역에 연이어서 동쪽에는 위만 할거 전 기준이 통치하던 ‘조선국’ 영역이 있었다.<사건 1 이전의 영역>

③ 멸망 전 연나라의 패수건너 국경은, 연이 전성기 때(BC307년 - 243년) 진번 조선을 공격하고 관리를 두어 장새를 쌓을 당시에 획정된 것이다.<사건 1, 조선후퇴>

④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BC222년에도 국경이 패수를 건너 일정거리 밖에 있었다.(사건1 이후 상황)

⑤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BC200년), 패수 동쪽이 통제할 수 없는 땅이라 하여 서쪽으로 후퇴하여 패수를 경계로 그 안 쪽(패수서쪽)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조선과) 대치하였다.<사건2, 조선진출>

⑥ 위만이 패수를 건너 거한 ‘상하장’은 당초 燕이 확보한 땅으로, 후에 한나라가 후퇴한 뒤 생긴 공백지대(즉 秦古空地) 중의 일정지역이다.<사건3, 위만의 조선변방 할거>


즉, 진한 교체기에 요동의 한복판에 있는 패수를 중심으로, 국경선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이며 이동하며 대치하였던 것이다.



당초 연나라가 전성기 때 진번 조선을 공격하였다는 사건은 ‘진개’에 의한 동호 침략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 관련 사적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기록에 모순이 생긴다.


우선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胡에 인질로 잡혀있다 돌아간 진개에 의해서 “동호를 습격하고 깨트려 1천여리를 물러가게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5군을 설치하여 胡를 방비했다”고 되어있고,(원문인용 2-1)


<위략>의 기록에는, “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2천여리의 땅을 취했다”고 되어있고,(인용 4)


그전 한나라 때 기록인 <염철론>에는 “동호를 습격하여 1천리를 물러나게 하고, 요동을 건너 조선을 공격했다”고 되어있다. 위략의 내용에 비해 상세하고, 전후 군사이동 관계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사기>가 동호 1천여리로 한정하여 기술하였다고 볼 수 있다.(인용 3)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보면, 진개가 동호 1천리를 침략했고, 다시 요동지역으로 나가 조선 1천리를 공격한 끝에 쌍방간의 공격과 역공이 반복된 뒤 종합 전적 1천여리 확보(조선의 전쟁초기의 失地는 대부분 회복)라는 내용이고, 그 때 형성된 전선이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BC222년의 국경, 즉 ‘패수 건너 일정거리 밖’이고, 후의 일이지만 흉노의 모돈선우가 동호를 또다시 공격하여 패주시키는 사건(BC209년 이후)이 일어난다. (인용 2-2)


<자치통감>의 기록에도 BC 243년 직전기사에 진개가 “동호 1천여리를 침략하고 5군을 두고 胡에 대비”했다고 말할 뿐, 이후의 조선 침공기사가 없다.  단지 <위략>의 2천여리 기록이 전황의 혼란을 주고 있을 뿐이다. (인용 8)



그렇다면, 조선쪽에 존재하는  ‘요동’의 위치가 어디쯤에 있으며, 조선 또는 동호가 상호 어떤 관계의 세력인가를 볼 필요가 있다.



‘동호’는 또 다른 ‘조선’의 이름


<사기> 소진열전(BC338년)에는 연나라 동쪽에 朝鮮、遼東(조선 요동)이, 북쪽에 林胡、樓煩(임호 누번)이, 남쪽에 ??、易水(호타 역수)가 위치하며(인용 5),


<자치통감> (BC307년)에는 조나라 동쪽에 齊, 中山(제나라, 중산국)이, 북쪽에 燕, 東胡(연나라, 동호)가, 서쪽에 樓煩(누번)이 위치하며(인용 6),  같은 사실을 기록한

<전국책> (BC307년)에는 조나라 동쪽에  齊, 中山(제나라, 중산국)이, 또 동쪽에 燕, 東胡(연나라, 동호) 국경이, 서쪽에 樓煩(누번), 秦, 韓의 국경이 있다하여(인용 7-1), 연과 동호의 위치가 상반되게 기록됐다. 바라보는 중심점에 따라 동쪽 내지는 동북쪽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기> 조세가(BC281년)에는, 혜문왕16년 당시 조나라 북쪽에 代지역과 東胡가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代郡지역은 산서성 항산산맥 남쪽, 태백산 서쪽에서 代縣에 이르는 지역이다.(인용 7-2)


<사기> 조세가(BC271년)에는 또, 혜문왕26년 조나라 북단의 代지방을 동호로부터 탈환한 내용으로 보아 조나라의 북쪽 또는 북동쪽에 동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인용 7-3)

  

<자치통감> (BC243년 직전기사)에는 조나라 북쪽에 林胡, 樓煩(임호 누번)이, 연나라의 북쪽東胡, 山戎(동호 산융)이 위치하며(인용 8),


<사기> 흉노열전에는 진개(BC243년 이전)가 ‘동호’를 밀어내고 ‘양평’까지 장성을 쌓아 ‘요동군’을 설치하는데 양평이 요동군에 속한다 했고(인용 2-1), 또한 흉노는 동호를 멸(BC209-201년중)하고 좌방왕 장의 치소가 상곡이며, 그 동쪽에 穢?、朝鮮(예맥, 조선)이 위치하며(인용 2-3),


<사기> 조선열전(연 멸망시인 BC222년)에는 ‘眞番、朝鮮(진번, 조선)’이 패수 양쪽에 걸쳐있는 요동지역이라 했고(인용 1),


<사기> 진시황본기(BC221년)에는 통일 진나라 강역이 동쪽海?朝鮮(바다와 조선), ... 북쪽에 황하를 의지하여 국경을 만들고, 陰山至遼東(음산에서 (나란히 하여) 요동에 이른다)이라 했다. (인용 10)

(그 주석을 달기를 ; 海란 발해남쪽에서 揚、蘇、台州 等에 걸쳐있는 동해라 했고, 동북쪽 조선은 왕검성이 있는 ‘고조선’이라 했다. 또 河란 靈、夏、勝州 等의 북쪽의 황하이고, 삭주 북쪽 변방에 음산이 있어, 황하 곁 음산을 따라 동쪽에 곧바로 요동에 이르는데, 장성을 쌓아 北界를 삼았다 했다)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는 의미는 아님>


따라서 요동이란 지도에서 발해만 만곡부 서쪽(오늘날의 하북성 천진시, 보정시, 백석산, 태백산 등)으로부터 북쪽(북경, 오대산, 대동, 장가구 등)과 동쪽(난하, 갈석산, 산해관 등)이라고 이들 사서가 친절히 설명하여 주고 있다.

<현 주류사학계는 위의 글들을 덮어 두고, 당시의 요동 역시 현재의 요하 동쪽 지금의 요양, 심양 등을 포함한 요동반도 지역이라 하여 정설화 하고 있음>

 



조나라와 연나라는 좌우사방의 지역변동을 고려해 볼 때, 시기가 지남에 따라 이동하는 양상이 뚜렷하다. 즉 조나라는 북진 후 서진의 형태이고 연나라는 북진 후 동진 한다. 즉, 연나라는 前338년 북쪽에 임호, 누번이었던 것이 前243년에는 동호 산융으로 나타나고, 조나라는 前307년에 북쪽에 연, 동호이고 서쪽에 누번 이었는데 후에 조나라가 북방 이동함에 따라 동호와는 동서로 마주보게 되었고, 前243년에는 북쪽이 임호, 누번인 것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조나라, 연나라, 동호의 상대적 위치를 보면, 당초 연나라의 북쪽에 동호가 있고 연나라 남쪽에 조나라가 있던 것이, 조나라의 북서진에 따라 연나라는 남쪽 남서쪽 서쪽에 걸쳐 조나라와 국경을 마주해야 했고, 동호 또한 조나라와 동서로 연접하게 된다. 동호가 代 자방에 세력을 확장하면서부터는 조나라의 동북쪽 또는 북쪽에 동호가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조선과 연, 제, 통일진나라의 상대적 위치를 보면, 연나라의 동쪽 요동방향은 동호가 아닌 조선이 있고, 흉노 동쪽에 예맥 조선이 있고, 연나라 멸망시에는 동쪽에 진번조선이, 진나라 통일강역으로 볼 경우에는 진나라 수도(함양)을 중심으로 동쪽에 또 다른 조선이 나타난다. 이곳은 산동반도 안쪽의 제나라 동쪽 또는 동남쪽이다.

즉 조선은 흉노, 동호, 연나라, 제나라, 통일진나라의 동쪽에 균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각 시기(前338, 307, 243, 222, 221, 209)에 걸쳐 동북 방면의 조선 명칭이 변경되는데, 즉

① 338년에 연나라 동쪽에 조선, 요동

② 307년에 조나라 북쪽(또는 동쪽)에 동호(연나라가 병치됨), 동쪽에 齊, 中山

③ 243년에 연나라 북쪽에 동호, 산융

④ 222년에 연나라 동쪽에 진번, 조선

⑤ 221년에 통일秦 북계인 음산의 동쪽에 요동

   221년에 통일秦 동쪽에 해, 조선

⑥ 209년에 흉노   동쪽에 예맥, 조선(상곡 동쪽) 으로써


西 → 東으로는 진번(예맥) → 예맥(진번) → 조선 → 요동의 순서이고,

南 → 北으로는 齊, 중산(②) →海, 朝鮮(⑤) → 연, 동호(②)→ 요동(⑤) → 조선, 요동(①) → 진번, 조선(④) → 연, 동호(②) → 동호, 산융(③) → 예맥, 조선(⑥) 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북을 축으로 볼 때 ‘조선’의 명칭산동반도 북부 인근, 발해만 만곡부(중산국 인근), 계(現 북경 일대), 상곡 동쪽의 어양, 북쪽의 조양 부근에서 산견되고 있다.


아래 그림은 북경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재로 쓰이고 있는 <중국고대사 교학참고지도집> - 북경대학출판부(교재표지사진) 내용 중에 있는 ‘전국(전국시대) 형세도’ 위에

이제까지 원전를 인용하여 설명한 각 세력 위치와 조선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을 조선산견지역으로 별도 표시하여 보았다.(정확한 위치 확정은 추후 연구 대상임)

 





[제나라 인근의 : <사기> 진시황본기 중 海?朝鮮의 조선 지역

 중산국 인근의 : <사기> 소진열전 중 朝鮮、遼東, <전국책> 중  燕, 東胡의 조선지역

 後期연 동쪽의 : <사기> 조선열전 중 ?番、朝鮮의 조선지역

 흉노국 동쪽의 : <사기> 흉노열전 중 穢?、朝鮮의 조선지역]



중산국과 산융이 동이 또는 북적 계열로 분류됨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진번과 예맥은 조선의 별칭임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륙 동부 산동반도의 조선과 발해만 인근의 조선과 요동(現 북경 좌우)의 조선, 그리고 흉노와 상곡에서 동접하고 있는 조선 사이에 나타나는 동호는 무엇인가? 전후좌우가 조선 또는 조선 계열의 동이족군으로 둘러 쌓인 동호는 다름 아닌 조선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동호의 영토는 당초 흉노로부터 1천여리를 잃기 전에는 연나라 멸망 당시의 연 북쪽 영토와 흉노가 조선과 접한 상곡을 포함하여 연나라에 빼앗긴 1천여리 이상 서쪽지역을 포괄하는 영역(雲中, 代, 上谷郡)이었다. 그 남, 동, 북쪽에 ‘조선’이 감싸고 있었다는 말이 되니 결국 동호로 분류된 영역을 포함하여 조선의 영역은 패수에서 서쪽으로 1천리 이상의 영역과 그 남동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 지도는 현 사학계에서 교육하고 있는 기원전후의 동호, 예맥, 숙신의 개괄적 위치 지도입니다.

그리고 예맥이 고조선의 중심세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전부터 고조선은 존재하였었고 동호는 기원전 300년 전후부터 나타납니다. 또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고조선의 영역을 결정해 주는 중요기준이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와 지석묘의 산재 지역입니다.



김운회 교수의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인용된 글을 재인용하면 이렀습니다.

미국 댄버대학의 인류학자 사라 넬슨에 의하면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Sarah M. Nelson, 『The Archaeology of Korea』1993, 133쪽>


비파형 동검의 사방 한계를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음의 지도에서 보듯이 “북쪽은 장춘과 길림의 송화강 유역에 이르고, 남쪽은 한반도 남부 전라도 경상도의 해안지역, 동북쪽은 우수리강(오소리강), 서남쪽으로는 북경과 천진을 넘어 망도(望都) 지역에서까지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의 통치력이 때에 따라서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중남부에까지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대부분 지배계층의 무덤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 대개 국경보다 다소 안쪽에서 출토된다고 보는 것이 순리”<윤내현,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2006, 68쪽> 라 고 하는 최근 고조선 강역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도 있습니다.



고조선의 특징적 유물로 규정하는 비파형동검의 출토지로부터 외곽으로 확대된 일정지역이 고조선의 강역이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합니다.


또한 고인돌의 분포지역을 보면 동요하의 동쪽 전역, 남만주, 요동반도, 북만주 길림 장춘, 한반도 전역으로 요하 서쪽을 제외하곤 비파형동검의 출토지역과 큰 차이 없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사학자 하문식의 고인돌 분포에 따른 고조선 강역인식입니다.

 


결국 고조선의 역사 후기에 예맥이니 동호니 하는 명칭들이 나왔고, 두 지역은 고조선의 지배하에 있던 주 강역인데 언제부터 고조선의 정치권력과 백성은 온데 간데 없이 증발하고, 갑자기 동호가 등장하여 우리하곤 무관한 민족이라 하며, 현 학계에서는 서쪽은 동호, 동쪽은 예맥으로 철조망을 처 놓고 두 족속이 섞이기라도 하면 무슨 큰 일 날것처럼 묘사합니다.


마치 중국인들이 동이족을 九夷다, 四夷다, 숙신이다, 예맥이다, 동호이다 하여 군소 약체 유목부족처럼 분산 배치시켜 연방국가 고조선의 실체를 교묘하게 숨긴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류 학자들 중국인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한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합니다.


<위략>에 서방 이천리를 취했다 함은, <사기> 흉노열전에 “... 동호와 흉노지간에 버려진 땅이 있어 거주할 수 없는 (황지가) 1천여리(與匈奴閒,中有棄地,莫居,千餘里)”이고 흉노 “모돈 선우가 발병하여 동호를 대파멸시켰다(冒頓以兵至?,大破滅東胡)”는 대목에서 이 흉노의 군사작전을 이미 망해버린 나라 연나라 진개의 행위로 이해하고, 또 <사기> 흉노열전에 “...연 진개가 동호를 습격하여 1천여리를 물러나게(燕...秦開,...襲破走東胡,東胡?千餘里.)” 한 기사를 덧붙여 [아무튼 사실상 동호가 조선임을 익히 알았을 중국인의 인식이] 조선 서방 2천리로 부회했을 개연성도 있으며,


<한서> 지리지 현토의 주석에 “조선은 호국이다(玄?注, ‘朝鮮胡國’)”하여 조선을 胡로 인식(즉 胡를 조선과 병치)하였음이 명백하며,


덧붙여, 사학자 나동현 선생의「중국북방 이족과 조선상고사」조선 동호 편을 인용하면,

“진나라 진시황제 때 조선의 인식은 북방의 조선으로 인식하지 않고 동쪽의 조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영토가 동으로 바다와 함께(바다에 이어) 조선까지(地東之海?朝鮮)이라 함은 당시의 발해를 동쪽으로 보기 보다는 진시황제의 순수 내용으로 보아 산동반도를 포함한 남쪽의 양자강 지역까지를 海 즉 東海로 보고 있으며, .... 북쪽의 조선에 대한 진의 침략은 <사기> 조선열전과 <염철론> 벌공편의 (조선 침공기사를 북쪽의 조선으로 본 기사) 내용이라 하고 있음은, 중국의 동쪽과 북쪽 지역에 조선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회남자> 인간훈에 ‘몽공(몽염)을 시켜 ... 성을 축조하게 하여 서쪽은 유사(사막)에 속하고, 북쪽은 요수에 격하고, 동쪽은 조선을 얽었다(...使蒙公...築脩城西屬流沙北擊遼水東決朝鮮 ...’ ”하였고, “그러므로 전국시대 말기로부터 진나라 통일 때까지 조선은 발해를 끼고 북쪽에서 산동반도 아래 淮垈(태산과 회수 사이) 지역까지 세력을 형성하였다” 고 했다. 탁견이라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3편 삼조선 분립시대’에서 말하길,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번조선)만을 조선(朝鮮)이라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호(東胡)라 일컬어서 흉노(열)전에 넣었다”고 하여 3조선[신조선(진조선 ; 동호 포함), 불조선(위만조선), 막조선(마한조선)]을 설명한 바 있다.


동호의 실체가 중국 사가들이 진실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서로 모순되게 기록한 단서들에 의해 진실의 실마리가 제공되었고, 한국의 민족사학자들의 역사추적을 통하여 동호 즉 조선의 실체가 드러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사실들은 한민족 조상의 역사서에 의한 것이 아니고 분명히 우리 민족을 경원시 하던 중원 땅의 걸출한 사학자들이 기록한 역사서를 바탕으로 역사 추적을 하여 본 결과,


제 민족도 못 알아보는 못 난 사학자들로부터 그릇되게 배워 알고 있는 요동이 현재 요동반도 동쪽 압록강 쪽이 아닌 중원 깊숙한 하북성, 산서성 부근 이동지방 이라는 것과, 조선의 위치가 대동강 평양에서 기껏해야 현재 요동반도 심양 정도가 아니고 발해만, 산동반도, 회수 태산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록과 유물, 그리고 동호가 우리와는 체질적으로 다른 오랑캐 示 하던 야만의 국가가 아니라 고조선의 영역 내에서 활동하던 우리의 직접선조 내지는 방계의 한겨레이었다는 사실이다.   

 


‘숙신’, ‘직식’, ‘식신’, ‘주리진’, 그리고 ‘조선’


청나라 고종(1735년 ∼ 1796년) 즉 건륭제乾隆帝는 우리 역사로 치면 조선 세종대왕의 치세와 견줄 만한 업적을 남긴 걸출한 국가 지도자였다. 1644년 漢族의 명나라를 중원 땅에서 몰아내면서 만주족(여진족)의 국가 淸이 세워진 이래 계속된 한화漢化 정책으로 민족의 정체성 상실에 고심하던 건륭제의 결단은 ‘만주지역의 역사 기원에 대한 역사서를 집필함으로써 여진족의 조상 숙신족肅愼族의 東夷意識의 고취(주1)’로 결론지어 간다. 이의 결과로 나온 역사서가 다름 아닌 1778년에 편찬된 <滿洲源流考>이다.

 

(주1) 방경일,「만주원류고」에 나타난 청고종의 동이의식, 만주학회 제11차학술대회논문, 2005



<만주원류고> 부족1 숙신편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있다.

“삼가 생각하건데 숙신(肅愼)의 이름은 주나라 초기에 기록되었는데,...사기 우제기(순임금본기)에 또한 북발식신(北發息愼)이라 했고, 정원주에 이르길 식신(息愼) 혹은 숙신(肅愼)이라 했다. 주서 왕회해에는 또 직신(稷愼)이라 했는데, 息과 稷은 모두 숙(肅)음이 전성된 잘못된 것이다....금나라의 성씨는 주리진(朱里眞)인데, 무릇 북방의 말이다. 肅자는 읽을 때 모름지기 朱와 동음이다. 이진(里眞) 두자는 합하여 읽으면 愼에 가깝다. 대개 肅愼이 전성된 소리이다. 국초에 옛 명칭인 所屬(管境;국가의 영역 또는 國號)을 주신(珠申)이라 했는데, 이 또한 肅愼의 전성된 소리이다.  한족들이 그 본질(본래소리와 뜻)을 몰랐(기에 여러 소리로 기록했)다....오히려 직신(稷愼) 혹은 식신(息愼)이란 것이 사실은 하나이다.” (인용 11)

   

결국 시대를 달리하며 중원의 사서에 기록된 식신, 북발식신, 직신, 주리진, 주신 등은 본래 한족의 사학자들이 만주지방의 언어에 관하여 음운학에 대한 소양이 없어 제 멋대로 기록하였지만, 이 모든 것은 숙신(肅愼)이란 족명에서 분화 또는 와전된 것이라고, 만주출신 지배자와 지식인들은 자신의 민족명칭을 천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숙신이란 민족은 어떤 지역에서 나타나는가?


우선, 주나라 춘추시대 서적인 <國語> 魯語편에 “공자가 진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싸리나무 화살이 꽂힌 매 한 마리가 진후(진 혜공)의 정원에 떨어져 죽자, 혜공이 사람을 시켜 중니(공자)가 머무는 집(영빈관)에 가서 묻게하니 중니가 말하길, ”매가 날아 온 곳은 아주 멀다! 이것은 숙신씨의 화살이다. 옛날에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니 구이와 백만으로 길이 통했다....“ (인용 12)

 



<대쥬신을 찾아서>의 사진을 다시 한번 인용하여 설명하면, 춘추시대 陳나라의 중심지는 지도에서 보듯 하남성 개봉(카이평) 지역이다. 매가 강력한 숙신의 화살을 맞고 얼마나 날아 가겠는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후대의 기록처럼 숙신의 지역이 지금의 길림성 지역이라면 말이 되질 않는다. 이 기록은 초기 숙신의 영역을 밝혀주는 자료로 종종 학계에서 인용되곤 한다. 즉 멀리 잡아도 숙신의 영역은 산서지방이나 하북(허베이)지방이란 이야기가 된다. 혹자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다음 세 자료를 더 제시한다.


첫째, <국어> 위 문장의 숙신을 설명하는 주석에 “숙신은 북이(北夷)의 나라이다. 따라서 새매는 멀리서 왔다. (左)傳에 이르길 ‘숙신 연 박(?) 지역은 우리의 북쪽지역이다 ’ ’‘ 하며, 또 구이 백만을 설명하길 ”구이는 동이 9국이다. 백만의 만(蠻)에 백읍(百邑)이 있다“(인용 12)라고 했다.. <<邑은 邦>國>邑 차례 수준의 영지를 의미한다.>> 또한 <좌전>에도 ”숙신은 연박(燕?)에 있으며, 우리(한족)의 북쪽 땅“이라 했는데, 당나라의 학자 공영달(孔潁達:574 - 648)은 연박(燕?)을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 인근이라고 했다. 즉 옛 고조선의 강역을 지칭하고 있다.


둘째,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蒲姑(포고)를 설명하길, “포고는 즉 호고(毫姑)、박고(薄姑)이며,옛 나라이다. 현재 산동성 박흥(博興) 동남지역이다. 주나라가 여상(강태공)을 여기에 봉했다.” (인용 14)라 했다.


셋째, <사기> 주본기에  “주공이 회이, 람이를 정벌하고 그 왕을 박고(薄姑)로 옮겼다.” 하고 박고를 설명하길 “제나라 땅이다. 괄지지에서는 : ‘박고 옛성이 청주(靑州) 박창현 동북 육십리에 있는데, 박고씨는 은나라가 임명한 제후로 이 지역에 봉했었는데, 주나라가 이를 멸했다’ 한다” (인용 15)


즉, 여기에 등장하는 박고, 호고, 포고는 다름 아닌 박(?)을 의미하는데, 은나라 조상이 하북성 발해만 연안의 제수(濟水) 인근에서 발상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산동성 제나라 청주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연나라는 익히 알듯이 산서성에서 하북성으로 이동하며 (고)조선과 세력을 다투다가 진시왕에게 망한 국가이다. 이런 연나라와 박고와 병치되어 북쪽에 존재한 공자 당시의 숙신국은 연나라와 박(?) 인근지역 즉, 하북성 내지는 산서성 권역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중원 25사의 기록에 나타나듯이 숙신은 산서, 하북 요서, 요동, 요동반도, 압록강 북단, 길림, 연해주 등지의 동북방향으로 지명이동 되면서 그 이름이 중원 역사서에 찍히게 된다.



숙신, 명칭의 변경


숙신이라는 명칭은 서기전 2,000년경부터 나타나서 기원 전후에 잠시 사라졌다가 서기 554년까지 계속 사용되었고 물길이란 명칭은 572년까지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563년부터 말갈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말갈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기도 전인 5대 10국 시대에 여진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북한사회과학원 저, <발해국과 말갈족> 중심 ; 2001년)


이러한 명칭의 혼란을 야기하는 이유는, “유목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족 역사가의 눈에는 이들이 요서지역에 출몰하면 동호(東胡)가 되고 요동지역에 출몰하면 예맥이 되”는 것이고 “그러다가 한참 밀려가서 두만강 유역에 나타나면 읍루가 됩니다. ... 실재로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하북(성) 지역과 남만주에서 나타나고 있고, 한나라 이후에는 흑룡강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나라 이전 숙신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대부분 겹치고 있으며, 조선과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대쥬신을 찾아서> 예맥=동호=숙신 : 범쥬신 편)



숙신은 조선의 또 다른 이름


하북성 내지는 산서성 인근에 그 존재를 보이기 시작한 숙신이 시대를 달리하여 동북방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하북성 (고)조선 요동지역과 일치하며, 물길은 요하지역 고구려 주강역 중심에 나타나고, 말갈은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한 북만주 길림지역에 또한 발해가 더욱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한 연해주(동해안 연안) 및 내륙에 나타난다. 사실상 이 모든 지역이 고조선, 고구려, 발해 지역과 상당부분 겹치는 강역인 것이다.


<만주원류고> 卷首 凡例 에 의하면, “무릇 옛날의 숙신은, 한(漢)나라 때는 삼한(三韓)으로, 위진(魏晋)시대에는 읍루로, 북위(北魏) 때는 물길로, 수당(隋唐) 때는 말갈, 신라, 발해, 백제로 칭하였다. 이 모든 나라들이 금나라 초기에는 완안부이고 명나라 때에는 건주위가 된다” (인용 16) 하여 숙신의 별칭들과 한민족의 조상국가와의 관련성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과 숙신 또는 식신이 치환되어 나타나는 기록을 보면 조선과 숙신의  관계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우선 朝鮮을 기록한 춘추시대초기(BC7세기)의 서적인 <관자> 권24 경중갑편을 보자.

제나라 환공이 관자에게 해내의 귀중한 일곱 가지 예물이 무엇인가 묻자 관자는 그 가운데 하나로 “발조선의 범가죽(發朝鮮文皮)”을 들어 조선과의 교역 필요성을 역설한다. 또 다른 기록인 <사기> 오제본기에는 “북쪽에는 산융과 발식신 등이 있는데 정현이 주해하여 말하길, 식신 또는 숙신이라 하는데 이들은 동북이 라고 한다(北山戎發肅愼 註 鄭玄曰 息愼或謂之肅愼, 東北夷)”하고 한나라의 또 다른 서적 <대대례기>에는 ‘발식신(發息愼)’으로 되어있다.


또한 공자가 언급했다는 말을 보자. <좌전>에 “구이(九夷)가 숙신이 되었는데, 그것은 본시 동이(東夷)이다 라고 공자가 일찍이 말했다(九夷者爲肅愼 本東夷也 孔子先言)”한다.


관자가 활동한 BC660년대에는 환공이 패업을 이루어 동북으로 고죽, 산융, 영지를 정벌하는 시대이다. 이때 산융과 동시 언급된 발숙신 동북이는 발조선을 지칭하는 국명교체의 다름 아닌 것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겠으나, 보충하는 의미로 다음의 몇 가지 사례 추가한다.


<만주원류고>에 또 이르길, “숙신, 부여, 삼한, 말갈, 백제, 신라, 발해, 여진 등의 여러 나라로 변천해 온 연혁을 증거 댈 수 있으며, 회남자에 동방에 군자국이 많다는 것은 믿을 만하고, ... (이들 나라가) 숙신으로부터 시작하여 거듭 변하였다” (인용 17) 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학자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에서 위에 언급된 내용들을 종합하여 말하길, “ ‘조선’이라는 말의 옛 음이 중국의 옛글에는 식신(息愼), 숙신(肅愼), 조선(朝鮮), 직신(稷愼) 등으로 쓰여 졌으나, 이것은 모두가 한 가지 말의 여러 가지 번역이요, 또 관자의 발조선(發朝鮮), 사기의 발식신(發息愼), 대대례의 발숙신(發肅愼)이 모두 다같이 한 가지 말이다” 했다.


사학자 안재홍은 <조선상고사감>에서 “숙신이 조선의 같은 말에 대한 다른 글자임은, 이제 학계의 일반 상식이다. ... 죽서기년의 식신, 사기의 숙신과 발식신, 급총주서 왕회해의 직신, 오월춘추의 주신, 기지(其地) 조신(鳥愼)과 여신(女愼)의 원형인 주리진(朱里眞)은 모두 조선과 함께 주신(賜原義:내려 주신의 원 뜻)에서 구을러 된 것으로 볼 것이요, 진한 12국 중에도 주선국(州鮮國)이 있어 역시 동일어음으로 되어있다. 만주원류고에 숙신은 주신(珠申)의 전음이오, 珠申은 만주어에 ”소속(所屬)“이니 즉 ”관령(管領)“이라, 우리 금어(요즘 말)에 ”주신“의 ”賜하신“의 뜻됨이 흥미 있는 자이지만, 어찌하였든 신시천강(神市天降)의 민속신앙을 갖게 된 고대의 진인(震人)이 그 관령을 ”주신“의 조선으로 일컬어서, 숙신 식신 직신 조신 주신 혹은 주신(주신) 등의 문자를 보이게 된 자, 고숙신성(옛 숙신의 성)이 즉 고조선성(옛 조선 성) 됨을 의심할 바 없다.” 하였다. 


사학연구가 김운회는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숙신이 조선에서 나온 9가지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를 간단히 인용하고 부연 설명하면,


첫째,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이라는 말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다.”

[조선은 요임금 25년 BC2333년에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등장하고, 반면 숙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죽서기년>에 순임금 25년에 식신이 활과 화살을 선물했다고 기록되어있다(帝舜有虞氏二十五年, 息愼氏, 來朝弓矢).]


둘째,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이라는 말보다 훨씬 범위가 큰 말이라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라는 명칭은 BC 7세기경에 저술된 <관자>에 나타나 있으나 숙신이라는 명칭은 그 보다 2백년 뒤인 BC 5세기경에 씌어진 <상서>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관자>에는 ‘밝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發朝鮮文皮 : 권23 揆道篇)’이라는 말이 있고, <상서>에는 ‘(주나라) 무왕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이 와서 이를 하례하였다(武王伐東夷肅愼來賀 : 書序)’ ”했다. 

숙신의 다양한 이칭을 동일 종족명으로 볼 때, 사기에 발식신, 급총주서에 직신, 공자가어에 숙신 등의 명칭들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넷째, “ 쥬신의 고유 영역이나 종족을 의미하는 알타이, 알탄, 아이신, 아사달, 아사타라, 아시나, 아사밝, 아사다께 등의 말에서 조선이 파생되는 과정은 유추하기 쉽지만 숙신은 유추하기가 다소 어렵다 ... 쥬신의 고유 영역이나 종족을 의미하는 말에서 쥬신, 즉 조선이 나오고 이 조선이라는 말에서 숙신 직신 주신 등은 쉽게 나올 수가 있는 말”이라 한다.


다섯째, “조선과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은 조선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 ... 즉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하북) 지역과 남만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한나라 이후에는 흑룡강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 그런데 한나라 이전 숙신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대부분 일치”한다.


여섯째, “숙신과 조선이라는 말이 서로를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즉 <관자>에 발조선(發朝鮮)이 <사기>에서는 산융 발숙신(發肅愼)으로 <대대례기>에는 발식신(發息愼)이 나와 조선이 들어갈 자리에 숙신 식신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일곱째, “조선과 숙신에서 파생된 말이 조선과 숙신과 유사한 말의 변화를 보인다는 점”이다.  즉 조선 ≒ 조신 ≒ 주신 ≒ 숙신 ≒ 식신 ≒ 직신 ≒ 주리진 등이 조선과 숙신을 중심으로 어형변화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덟째, “밝조선 이전에 조선이 이미 성립될 정도로 조선이라는 말의 연원이 깊다는 것 ... 즉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보다는 오래전에 나온 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나오는 조선이라는 말이 밝조선(發朝鮮)으로 되어있는데 ... 이라는 말이(을) 단독적으로 사용한 예를 찾기가 어려우나 ... 조선이라는 말은 독립적으로 사용 ... 따라서 조선이라는 개념은 밝조선 보다는 훨씬 큰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한다.

   

아홉째, “쥬신계의 건국신화를 보면 고구려와 숙신계의 건국신화가 많은 공통성이 있다는 것 ...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고구려의 주도세력을 숙신으로 보기도 한다.” 했다.



동호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중원 고래의 역사책과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산서성 하북성에서 그 명칭이 알려지기 시작한 숙신, 그리고 그 후신 말갈, 여진이 결국 (고)조선에 그 뿌리를 둔 한민족의 조상이었음이 고증이 되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민족의 직계 조상과 분리되어 즉 방계의 역사를 이루며 역사가 흘러왔다.


여진의 직계 후손이라는 청나라의 지배자들이 <만주원류고>에서 언급하듯이 자신들의 혈통이 한민족의 조상인 고구려 백제 발해 신라 등과 민족적 동질성과 친연성이 있음을 구구절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민족의 과거 조상들은 중화사상 아니 모화사상에 물들어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멸시받던 자신들의 한심한 처지도 모른 채, 우리에게 동족의식을 갖던 숙신의 후예 여진(금나라, 청나라)을 오랑캐라 비하하며, 국제정세도 모르고 제 주제도 모르면서 명분론에만 사로잡혀서....  그래서 나라를 망친 경우가 부지기 수 아니었던가?



한족을 사모하여(모화사상) 매달렸으나 오랑캐 취급에 틈만 나만 역사왜곡을 당하였고, 그나마 동족의식 내지는 한 뿌리의식을 갖던 신흥 강국 북방민족에게는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멸시 내지는 무시하며 오랑캐라 손가락질 하다 화를 자초했던 과거 역사들 ...., 이러한 주체성 없는 얼치기 조상들 때문에 당당해야할 민족의 자존심은 심각히 훼손되었고, 사대주의 의식이 자연스런 생존방식이 되었고, 그런 근성이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과오를 인식하지 못하면, 현재와 미래에는 그 과오의 역사를 또다시 반복할 뿐이다.

그러하므로 왜곡되어 잘 못 알려진 역사는 복원되어야만 한다.

     

 


고조선 계열의 민족 흥망사


이상 거론된 고조선과 결부되어진 동호와 숙신의 실체는 당시 단편적으로 분산 기록되어진 역사기록과 이에 따른 지리고증을 통하여 충분하지는 않지만 각 족속 계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결국 북으로 흉노로부터 남으로는 연나라와 자웅을 겨루던 동호는, 고조선 강역의 서부 변방에 자리 잡은 진번조선(번조선) 또는 그 이후 정권을 탈취한 소위 위만조선의 토착민과, 과거에 뿌리를 같이 했던 진조선(신조선)의 서부지역 일부세력을 지칭하고 있으며, 숙신은 고조선의 초기(BC2,200여년전 순임금 제위시 이후)부터 현 하북성 인근에 위치하여 중원 제국과 무역과 외교관계를 지속하고 3代(夏 殷 周) 및 춘추 전국시대를 지나 진한교체기에 이르는 동안 동북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이름을 달리하여(숙신, 식신, 직신, 주신, 물길, 말갈, 여진 등) 나타나는 세력으로서 이는 다름 아닌 고조선에 뿌리를 둔 동이족 내지는 동이를 조상으로 표방하는 방계집단으로 주 활동무대에 따라 한족사가들에 의해 각기 달리 이름 붙여진 세력인 것이다.


상고 역사에 있어서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던 고조선이 어찌하여 중원의 역사책에는 소규모 족속의 국가 형태로 여러 책에 산발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가? 이는 다름 아닌 중원에 세워진 화하족 계열의 국가가 미미했기 때문에 그들의 기록에서 자신들과 견주어 그 실체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다음의 現代 漢族 史家의 글로서 이해가 되리라 본다. 


임혜상의 <중국민족사> 상권 제2장 제2절에 기록하길, “황제(헌원) 때부터 순임금과 우임금에 이르기까지 묘족과의 전쟁이 자주 있었다. 주나라 무왕이 지금의 중국 섬서성 장안(長安)을 서울로 삼고, 이것을 서경이라, 또 자기 나라를 서주(西周)라 하였다. 서주때에는 화 하계가 여러 민족들과 전쟁하고 접촉함으로써 혼합 동화하여, 점점 불화가 커졌다.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동이, 서융, 남만 및 북적이 중국에 있어서 화 하계를 억누를뿐더러, 그 세력이 크게 번성하였다. 주나라 무왕 성왕 및 주공 때는 중국의 땅이 가장 좁았다. 중국 하남성 낙양을 동경이라 하였는데, 이 동경만 하더라도, 동이족인 내이, 모이, 개이, 여이가 차지하였고, 또 기도(杞都), 옹구(雍丘), 및 변주(현 개봉) 땅에 예속된 邑들이 또한 동이의 예법을 썼으며, 또 노나라에 예속된 주(?)나라 또한 동이라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 중국이라는 것은 홀로 진, 위, 제, 노, 송, 정, 진, 허 등의 지방만으로서 전부 10주들에 지나지 못하여, 중원(中原) 전체의 5분의 1밖에 되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서량지의 <중국사전사화> 164, 267쪽에 기록하길, “세석기시대의 문화부족이 처음 현 바이칼호 근방에 살았는데, 그것은 중국의 전설에 있는 염제 신농의 본 부족(조상)이다. 그런데 그것은 서경 우공편에서 말한 도이, 우이, 내이 및 회이와 은나라 갑골문에 적힌 이방, 토방, 길방, 괴방 및 강방과, 주나라 때의 이(夷), 적(狄) 및 엄윤과,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호(胡), 초(貂) 및 흉노와, 또 끝으로 위나라와 진(晉)나라 때의 오환과 선비(鮮卑) 등의 본 종족까지 된다. ... 이 여러 가지를 보아, 은나라와 주나라의 앞 시대와 또 그 당시에 있어서 동이족(東夷族)의 활동면을 가히 알 수 있는데, 그 때 동이족의 활동지가 실상으로 지금의 산동성, 하북성, 발해연안, 하남성의 동남부, 강소성의 서북부, 안휘성의 중북부, 호북성의 동부 및 요동반도와 조선반도(한반도) 등을 포함한 아주 넓은 지역이요, 또 그 중심지는 지금의 산동성이다.” 하였다.


중원대륙에서 활동하던 구이(九夷)인 동이족과 진시황 이후의 동북이(東北夷) 즉 만주 한반도의 동이족을 별개의 민족으로 취급하려는 의도 하에 한족 사학자 부사년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등 여러 학설을 기점으로 하여 先秦(진나라 이전) 동이는 중원 땅에 녹아든 민족으로, 진한(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동이는 순수 한민족의 조상으로 한정 지으려고 중국인 자신들은 교묘한 학설을 내세웠으나, 서량지는 실상 중원과 만주와 한반도를 망라하여 광범위하게 분포하여 활동하던 하나의 민족으로 동이민족을 규정하고 있다.



한족(漢族)의 세력 규모라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명함도 못 내미는하찮은 수준이라는 것을 후세 그네들 사학자들이 명증했고 그 옛날, 명함거리가 되지 못할 바에는 인근의 동이국가를 잘게 분산하여 본질을 흐릴 필요가 있었으리라. 그래야 그들의 규모와 비슷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조선의 실체는 사라지고, 동이, 흉노, 동호, 숙신, 4夷, 중산, 산융, 고죽 등으로 산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 서술이 소위 중국 역사가들의 화이(華夷)사관 또는 춘추필법(중국을 위하여 이 민족의 역사는 간략히 축소하여 기술한다)  이었으니까 말이다.



동호(東胡)는 흉노 모돈 선우의 기습공격(BC209년 이후)으로 패주하여 오환산과 선비산에 의지하여 그 족속을 유지하는데(<후한서> 오환선비열전에 ; 오환은 본래 동호이다. 한나라 초에 흉노의 모돈이 그 나라를 격파하니 잔여 무리가 오환산에 의지해 족속을 유지하니 그로 인해 이름을 삼았다. 선비는 또한 동호의 한 가지인데, 선비산에 의지한 고로 이름을 얻었다.) (인용 18),


고조선의 멸망에 따라 그 족원을 상실하고 현 요서지방과 그 이북 내몽고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예맥족으로 분류된 부여 및 고구려의 국가와는 그 근원을 같이 하면서도 현실 정치와 외교적 역학관계에 의하여 쟁패와 협력을 반복하며 중원지역에 진출하게 된다.


동호의 후예인 오환과 선비 특히 선비족은 AD89년∼93년 후한과 남흉노와의 연합에 의한 북흉노 공략을 기점으로 중원무대에 본격 진출하여, 흉노를 대신하여 중원 북쪽을 석권하였다. 선비의 단석괴가 죽은 후에 선비는 10여개 주요세력(모용, 탁발, 우문, 독발, 걸복, 단, 토욕혼, 거란, 해 등)으로 갈라져 중원 북방을 차지하였으며, 공손씨 계열의 燕으로 활동하고, 선비(우문, 단, 모용, 탁발)의 주요세력이 되어 고구려와 처절한 투쟁과 연합을 하였고, 4C∼5C 140여년간(304년∼439년) 소위 5胡 16國 시대를 주도하게 되는데 남북조, 남송시대에 중원을 장악, 한족계열의 남쪽을 강력하게 위협하였다.


특히 선비족 계열이 ‘남량, 서진, 전연, 후연, 남연, 북위, 북주’ 등의 국가를 창업하였고, 특히 탁발선비의 북위(386년∼534년)는 5胡 제 국가를 깨뜨리고 강력한 전제국가로 北朝를 리드하게 된다.


또한 수나라 문제 양견은 선비족 국가 북주의 외척으로 선비와의 혼열로 알려져 있으며, 당나라 고조 이연 및 태종 이세민 또한 선비와의 혼열로 알려져 있다. 결국 통일국가 수나라 당나라 지배자의 족원은 멀리 선비계열로 분류된다.


5대10국의 국가들도 대부분 돌궐계열의 북방민족의 국가이었으며, 특히 거란의 요나라(907년∼1064년, 1065년∼1125년) 또한 선비족으로부터 분화되고 고구려적인 전통을 가진 전형적인 북방계열이었다.



숙신(肅愼)은 기원후 위진시대에는 읍루로, 남북조시대에는 물길로 또 563년부터는 말갈이란 명칭으로 동북방 만주 길림 연해주 등지에서 등장한다. 중국사서에는 563년 이후로 말갈이 등장하나, <삼국사기> 기록의 경우에는 말갈의 명칭이 백제 온조왕대부터 등장하여 고구려와 군사행동을 같이 하거나 단독 활동하는 고구려의 속민으로 인식되어졌고, 또한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고구려 북방과 남방(신라 백제의 접경)의 지역에 거주하는 국가 구성원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 멸망 후에는 발해국 건국과 주민 구성원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거란의 요나라를 중원에서 밀어내고 건국한 금나라는 숙신의 후예(<금사>세기曰 ; 금나라의 선조는 말갈씨에서 나왔다. 말갈의 본 이름은 물길이다. 물길은 옛 숙신의 땅이다.) 국가로서 그 시조가 발해 및 고려와의 연대를 강하게 표명한 국가(<금사>세기又曰 ; 금나라의 시조의 휘는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나왔다. ... 여진과 발해는 동본일가이다(女直、渤海同本一家.))였고,


후에 건국되는 청나라(1616년∼1912년) 또한 금나라의 전통을 이어 당초엔 후금을 칭했으며, 그 지배계층의 족원을 <만주원류고>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듯이 한민족의 조상국가인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및 발해 등의 국가와 강한 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결국 연방국 형태의 고조선으로부터 파생된 동호, 숙신, 예맥 족속들은 오환 선비 몽골이 되고, 식신 읍루 말갈 여진이 되고, 예족과 맥족과 한(韓)족과 왜(倭)족이 되어 동이민족의 후계민족 족원을 구성하게 된다. 이들은 힘이 약화되면 북방에 물러나 부족단위로 유목 내지는 반목생활을 영위하나, 민족에너지의 결집으로 세력을 형성하였을 때에는 중원을 침범하여 대제국을 세우고 한족을 압박하였고, 또 한 부류는 요서와 만주와 한반도에 정주국가를 형성하여 민족정체성을 보존하여왔다. 또한 일본의 경우는 북방 기마민족 계열의 남하와 백제계열의 일본열도 도래(이주)로 형성된 범 동이 계열로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다.

  

한족 또는 화하족으로 대표되는 중국인의 조상이 중원대륙을 석권한 기간이 얼마나 될까? 한족조상의 지배체제라고 인정되는 국가라면, 황제∼요임금(약455년이나, 동이족 계열로 보는 경우도 있음 : 후에 논함), 춘추시대 진(晋: 약320년), 한(漢:BC200 ∼220 약420년), 촉한(蜀漢:221∼263 43년), 5호16국 시대의 북제(北齊:550∼577 28년), 족원이 의심되는 당(唐:618∼907 290년), 5대10국 시대의 후주(後周:951∼959 9년), 송(宋:960∼1279 320년), 명(明:1368∼1644 277년),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1911∼2006 96년) 정도이다. 황제 헌원 이후 4700년 기간 중 2258년이다. 물론 중원을 강력히 지배하던 북방민족이 건재하던 중복된 기간과 동이족 계열로 보는 황제 이후 약 455년, 족원이 의심되는 당나라까지 넓게 포함해준 기간이므로 실재로는 2000년이 채 안될 것이다.  


나머지 2700여년 이상의 기간은 한족과 전혀 관계없는 북방민족이 중원에 진출하여 열국시대(9夷, 춘추전국, 삼국, 5호16국, 5대10국 등)를 이끌었거나 강력한 통일제국(秦, 隋, 遼, 西夏, 金, 元, 淸)을 형성하여 한족을 속박하였고, 만주와 대륙 동부연안과 요동 요서 지방과 한반도 및 일본열도에서는 諸부여, 동예, 옥저, 낙랑,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 일본, 발해, 고려, 조선, 한국, 북한 등이 대륙과 만주에 진출과 후퇴를 반복하며 정통의 줄기와 방계의 가지로 역사를 전개하여왔다.  


이처럼 통일 (고)조선에 뿌리를 둔 동이 제족(혹자는 ‘범쥬신’이라 칭)은 동북아시아 광역지역을 무대로 세력확장을 통한 중원제국 지배와 북방패주의 부침을 거듭하였고, 종족의 멸절 또는 타민족에 흡수 동화 되었으며(흉노, 선비, 여진, 내몽골, 만주족 묘족 등 중국내 소수민족), 현실국가에 와서는 정치 외교적 갈등과 반목(북한, 한국, 일본, 외몽골, 조선족등 재외 소수민족)으로 同本同族的 전통은 무의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 전개 또한 여전히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역사일 따름이다. 마치 북방민족과 중원 한족이 일정기간을 두고 주기적으로 반복했던 정복과 속박, 진출과 후퇴의 역사 처럼 말이다. 동북아에 어떤 미래가 도래할 것인지 몇 사람이나 예측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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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인용자료>


<사기> 권115 조선열전 (인용 1)

朝鮮[1]王?者,故燕人也[2]. 自始全燕時[3] 嘗略屬?番[4]、朝鮮[5], ?置吏,築?塞. 秦滅燕,屬遼東外?. 漢興,?其遠難守,複修遼東故塞,至浿水?界[6], 屬燕. 燕王盧?反,入匈奴,?亡命[7], 聚黨千餘人,?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8], 稍役屬?番、朝鮮蠻夷及故燕、?亡命者王之,都王?[9].

(주석)

[1]正義潮仙二音. 括地志云:?高驪都平?城,本漢樂浪郡王?城,又古雲朝鮮地也.?

[2]索?案漢書,?,燕人,姓衛,?破朝鮮而自王之. 

[3]索?始全燕時,謂六國燕方全盛之時. 

[4]集解徐?曰:?一作『莫』. 遼東有番汗?. 番音普寒反.?索?徐氏?地理志而知也. 番音潘,又音盤. 汗音寒.

[5]索?如淳云:?燕嘗略二國以屬己也.?應?云:?玄?本?番國.?

[6]集解漢書音義曰:?浿音傍沛反.?索?浿音旁沛反. 正義地理志云浿水出遼東塞外,西南至樂浪?西入海. 浿普大反.

[7]正義命謂?令. 

[8]索?案:地理志樂浪有雲?. 

[9]集解徐?曰:?昌黎有???也.?索?韋昭云?古邑名?. 徐?曰?昌黎有????. 應?注?地理志遼東???,朝鮮王舊都?. 臣瓚云?王?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사기> 권110 흉노열전 (인용 2-1)

宣太後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遂起兵伐殘義渠. 於是秦有?西、北地、上郡,築長城以拒胡. 而趙武?王亦?俗胡服,習騎射,北破林胡、樓煩. 築長城[4], 自代?[5] 陰山[6]下,至高闕?塞[7]. 而置雲中、?門、代郡. 其後燕有賢將秦開,?質於胡,胡甚信之. ?而襲破走東胡,東胡?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 燕亦築長城,自造陽[8] 至襄平[9].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當是之時,冠??國七,而三國邊於匈奴[10].

(주석)

[4]正義括地志云:?趙武?王長城在朔州善陽?北. 案水?雲白道長城北山上有長垣,若??焉,沿谿?嶺,東西無極,蓋趙武?王所築也.?

[5]集解音傍,白浪反. 

[6]索?徐?云:?五原西安陽?北有陰山. 陰山在河南,陽山[在河]北. ?音傍,白浪反.?正義括地志云:?陰山在朔州北塞外突厥界.?

[7]集解徐?曰:?在朔方.?正義地理志云朔方臨戎?北有連山,?於長城,其山中斷,?峰?峻,土俗名?高闕也. 

[8]集解韋昭曰:?地名,在上谷.?正義按:上谷郡今?州. 

[9]索?韋昭云:?今遼東所理也.?

[10]索?案:三國,燕、趙、秦也. 


(인용 2-2)

東胡王愈益驕,西侵. 與匈奴閒,中有棄地,莫居,千餘里,各居其邊??脫[2]. 東胡使使謂冒頓曰:?匈奴所與我界?脫外棄地,匈奴非能至也,吾欲有之.?冒頓問群臣,群臣或曰:?此棄地,予之亦可,勿予亦可.?於是冒頓大怒曰:?地者,國之本也,柰何予之!?諸言予之者,皆斬之. 冒頓上馬,令國中有後者斬,遂東襲?東胡. 東胡初?冒頓,不?備. 及冒頓以兵至?,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産. ??,西?走月氏,南?樓煩、白羊河南王[3]. (侵燕代)悉複?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與漢?故河南塞,至朝○、膚施[4], 遂侵燕、代. 是時漢兵與項羽相距,中國罷於兵革,以故冒頓得自彊,控弦之士三十餘萬.

(주석)

[2]集解韋昭曰:?界上屯守?.?索?服虔云?作土室以伺漢人?. 又纂文曰??脫,土穴也?. 又雲是地名,故下云?生得?脫王?. 韋昭云?界上屯守?也?. ?音一侯反. 脫音徒活反. 正義按:境上斥候之室??脫也.

[3]索?如淳云:?白羊王居河南.?

[4]集解徐?曰:?在上郡.?正義漢朝○故城在原州百泉?西七十里,屬安定郡. 膚施,?,[因]秦(因)不改,今延州膚施?是.


(인용 2-3)

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6] 以往者,東接穢?、朝鮮;右方王將居西方,直上郡[7] 以西,接月氏、?、羌[8] ; 而?於之庭直代、雲中[9] :

(주석)

[6]索?案:姚氏云?古字例以『直』?『値』. 値者,當也?. 正義上谷郡,今?州也. 言匈奴東方南出,直當?州也.

[7]正義上郡故城在涇州上?東南五十里. 言匈奴西方南直當綏州也.

[8]索?西接?、羌,案:風俗通云?二?,本西南夷種. 地理志武都有白馬??. 又魚?魏略云?漢置武都郡,排其種人,分竄山谷或號??,或號白??. 纂文云??亦羊稱?. ?文云?羌,西方牧羊人?. ?漢書云?羌,三苗薑姓之別,舜徙於三危,今河?之西南羌是也?.

[9]索?案:謂匈奴所都???庭?. 樂産云??於無城郭,不知何以國之. 穹廬前地若庭,故云庭?. 正義代郡城,北狄代國,秦漢代?城也,在蔚州羌胡?北百五十里. 雲中故城,趙雲中城,秦雲中郡,在勝州楡林?東北四十里. 言匈奴之南直當代、雲中也.


<염철론> 伐攻篇 (인용 3)

大夫曰 : 齊桓公越燕伐山戎, 破孤竹, 殘令支. 趙武靈王逾句注, 過代谷, 略滅林胡·樓煩. 燕襲走東胡, 闢地千里, 度遼東而攻朝鮮.


<위략> (인용 4)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사기> 권69 소진열전(연 문후 BC 338년) (인용 5)

?燕文侯曰:?燕東有朝鮮[1]、遼東,北有林胡、樓煩[2], 西有雲中、九原[3], 南有呼?、易水[4], 地方二千餘里,?甲數十萬,車六百?,騎六千匹,粟支數年[5]. 南有碣石[6]、?門之饒[7], 北有棗栗之利,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주석)

[1]索?潮仙二音,水名. 

[2]索?地理志樓煩屬?門郡. 正義二胡國名,朔、嵐已北.

[3]索?按:地理志云中、九原二郡名. 秦曰九原,漢武帝改曰五原郡. 正義二郡?在勝州也. 雲中郡城在楡林?東北四十里. 九原郡城在楡林?西界.

[4]集解周禮曰:?正北曰?州,其川呼?.?鄭玄曰:?呼?出鹵城.?索?按:?遝,水名,?州之川也,音呼?. 又地理志鹵城,?名,屬代郡. ?遝河自?東至參合,又東至文安入海也. 正義呼?出代州繁??,東南流?五台山北,東南流過定州,流入海. 易水出易州易?,東流過幽州?義?,東與呼?河合也.

[5]索?按:?國策?車七百?,粟支十年?. 

[6]索?(?國策)碣石山在常山九門?. 地理志大碣石山在右北平驪城?西南.

[7]正義?門山在代,燕西門. 


<자치통감> 신정왕 8년(BC307년) (인용 6)

王(무령왕)自往請之,曰:“吾國東有齊ㆍ中山,北有燕ㆍ東胡,西有樓煩ㆍ秦ㆍ韓之邊. 今無騎射之備,則何以守之哉?


<전국책> 권18 조책(무령왕 BC307년) (인용 7-1)

今吾國東有河、薄洛之水〔11〕,與齊、中山同之,而無舟楫之用。自常山以至代、上黨,東有燕、東胡之境,西有樓煩、秦、韓之邊〔12〕,而無騎射之備。故寡人且聚舟楫之用,求水居之民,以守河、薄洛之水;變服騎射,以備其〔13〕參胡〔14〕、樓煩、秦、韓之邊〔15〕。且昔者簡主不塞〔16〕晉陽,以及上黨,而襄王〔17〕兼戎取代〔18〕,以攘諸胡,此愚知之所明也 。

(주석)

〔11〕鮑本史記,安平涇縣西有?水,津名薄洛津。後志,安定烏枝谷名。補曰:淮南子,「嶢山崩而薄洛之水?」,注謂薄洛在馮翊臨晉。今按本文,謂在趙東,與齊、中山同之,恐皆非。此所指未詳。

〔12〕鮑本補曰:正義云,東胡,烏丸之先也,後?鮮卑,在匈奴東,故曰東胡。括地志云,東胡,漢初冒頓滅之,餘保烏丸山,因號烏丸。又曰,林胡樓煩?嵐、勝之北也。嵐、勝以南石州、離石、藺等,趙邊邑也,秦隔河也。晉、洛、潞、澤等州皆七國時韓地,趙西境也。

〔13〕鮑本「其」作「燕」。○補曰:史作「燕」,姚引。 

〔14〕姚本續云:史,備燕、三胡、秦、韓之邊。 

〔15〕鮑本言參錯居其邊地。正曰:「參」,史作「三」,因音而訛也。據上文,則「參」當作「東」,字訛。 

〔16〕鮑本「不塞」者,志在遠略。 

〔17〕鮑本「王」作「主」。○札記丕烈案:「主」字是也。史記作「主」。 

〔18〕姚本集、劉、錢作「簡主實晉陽,而襄主兼戎取代」。


<사기> 권43 조세가 혜문왕16년(BC281년) (인용 7-2)

秦以三郡攻王之上?[5], 羊腸之西[6], 句注之南[7], 非王有已. 踰句注, 斬常山而守之, 三百里而通於燕, 代馬胡犬不東下[8], 昆山之玉不出,

(주석)

[5]正義秦上?郡今?、潞、儀、沁等四州之地, 兼相州之半, 韓?有之. 至七?時, 趙得儀、沁二州之地, 韓猶有潞州及?州之半, 半?趙、魏. 沁州在羊腸坡之西, 儀、?、代三州在句注山之南. 秦以三郡攻趙之?、潞, 則句注之南趙無地. 然秦始皇置上?郡, 此言之者, 太史公?引前書也. 他皆倣此.

[6]正義太行山阪道名, 南??州, 北??州.

[7]正義句注山在代州西北也. 

[8]正義言秦踰句注山, 斬常山而守之, 西北代馬胡犬不東入趙, 沙州崑山之玉亦不出至趙矣. 郭璞云:?胡地野犬似狐而小.?


<사기> 권43 조세가 혜문왕26년(BC271년) (인용 7-3)

二十六年, 取東胡?代地[6].

(주석)

[6]正義今?州也.  索?東胡叛趙, ?略代地人衆以叛, 故取之也.


<자치통감> 소양왕 4년 이전(BC 243년 직전 기사) (인용 8)

趙北有林胡ㆍ樓煩之戎;燕北有東胡ㆍ山戎;各分散居溪穀,自有君長,往往而聚者百有餘戎,然莫能相一. 其後義渠築城郭以自守,而秦稍蠶食之,至惠王遂拔義渠二十五城. 昭王之時,宣太後誘義渠王,殺諸甘泉,遂發兵伐義渠,滅之;始於?西ㆍ北地ㆍ上郡築長城以拒胡. 趙武靈王北破林胡ㆍ樓煩,築長城,自代?陰山下,至高闕爲塞,而置雲中ㆍ雁門ㆍ代郡. 其後燕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東胡?千餘裏;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穀ㆍ漁陽ㆍ右北平ㆍ遼東郡以距胡.



<사기> 권88 몽염열전(BC 221년) (인용 9)

始皇二十六年,蒙恬因家世得?秦將,攻?,大破之,??內史. 秦已?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衆北逐戎狄,?河南[1]. 築長城,因地形,用制?塞,起臨?[2], 至遼東[3], 延?萬餘里. 於是渡河,?陽山[4], ?蛇而北. 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

(주석)

[1]正義謂?、勝等州. 

[2]集解徐?曰:?屬?西.?

[3]正義遼東郡在遼水東,始皇築長城東至遼水,西南至海(之上). 

[4]集解徐?曰:?五原西安陽?北有陰山. 陰山在河南,陽山在河北.?


<사기> 권6  진시황본기 (인용 10)

地東至海?朝鮮[7], 西至臨?、羌中[8], 南至北嚮戶[9], 據河爲塞,?陰山至遼東[10].

(주석)

[7]正義?,其記反. 朝音潮. 鮮音仙. 海謂渤海南至揚、蘇、台等州之東海也. ?,及也. 東北朝鮮國. 括地志云:?高驪治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卽古朝鮮也.?

[8]正義?,吐高反. 括地志云:?臨?郡卽今?州,亦古西羌之地,在京西千五百五十一里羌中. 從臨?西南芳州扶松府以西,?古諸羌地也.?

[9]集解吳都賦曰:?開北戶以向日.?劉逵曰:?日南之北戶,猶日北之南戶也.?

[10]集解地理志西河有陰山縣. 正義塞,先代反. ?,白浪反. 謂靈、夏、勝等州之北黃河. 陰山在朔州北塞外. 從河傍陰山,東至遼東,築長城爲北界.


<滿洲源流考> 부족1 숙신편 (인용 11)

“謹按肅愼之名, 著於周初....史記虞帝紀亦稱北發息愼, 鄭元注曰息愼, 或謂之肅愼. 周書王會解, 又作稷愼. 息稷, 與肅音轉之訛....金之姓爲朱里眞. 夫北音. 讀肅爲須須朱同韻, 里眞二字, 合呼之音近愼. 蓋卽肅愼之轉音....國初, 舊稱所屬曰珠申, 亦卽肅愼轉音. 漢人不知原委....猶之或爲稷愼, 或爲息愼. 其實一也.”


<國語> 권5 魯語 19 (인용 12)

仲尼在陳,有?集于陳侯之庭而死,?矢貫之,石?其長尺有咫[1]. 陳惠公使人以?如仲尼之館問之[2]。仲尼曰:「?之來也遠矣!此肅?氏之矢也[3]。昔武王克商,通道于九夷、百蠻[4],使各以其方賄來貢[5],使無忘職業。於是肅?氏貢?矢、石?,其長尺有咫。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以示後人,使永監焉[6],故銘其?曰『肅?氏之貢矢[7]』,以分大姬,配虞胡公而封諸陳[8]。古者,分同姓以珍玉,展親也[9];分異姓以遠方之職貢,使無忘服也。故分陳以肅?氏之貢[10]。君若使有司求諸故府,其可得也[11]。」使求,得之金?,如之[12]。

(주석)

〔1〕?,?鳥也。?,木名。?,鏃也,以石?之。八寸曰咫。?矢貫之,墜而死也。

〔2〕惠公,陳哀公之孫、悼太子之子吳也。館,仲尼所舍也。案:「惠公」,攷異卷二據史記陳杞世家說當作「?公」。

〔3〕肅?,北夷之國,故?來遠矣。傳曰:「肅?、燕、?,吾北土也。」

〔4〕九夷,東夷九國也。百蠻,蠻有百邑也。

〔5〕方賄,各以所居之方所出貨賄?貢也。

〔6〕監,視也。

〔7〕刻曰銘。?,箭、羽之閒也。

〔8〕分,予也。大姬,武王元女。胡公,舜後,虞?父之子胡公滿也。諸,之也。

〔9〕展,重也。玉,謂若夏后氏之璜也。

〔10〕陳,?姓也。

〔11〕故府,舊府也。

〔12〕?,?也。金,以金帶其外也。如之,如孔子之言也。


<사기> 권47 공자세가17 (인용 13)

仲尼曰:??來遠矣, 此??之矢也[3]. 昔武王克商, 通道九夷百?[4],

(주석)

[3]正義???記云:???, 其地在夫余?東北, (河)[可]六十日行. 其弓四尺, ?勁弩射四百?, 今之靺鞨?方有此矢.?

[4]集解王?曰:?九夷, 東方夷有九種也. 百?, 夷狄之百種.?


<중국고금지명대사전> 蒲姑 (인용 14)

蒲姑???毫姑、薄姑,古國,在今山東博興東南。被周公所滅。周封呂?於此。


<사기> 권4 周본기 (인용 15)

成王旣遷殷遺民,周公以王命告,作多士、無佚.召公爲保,周公爲師,東伐淮夷,殘奄[1], 遷其君薄姑[2]. 成王自奄歸,在宗周[3], 作多方[4].

(주석)

[1]集解鄭玄曰:?奄國在淮夷之北.?正義奄音於險反. 括地志云:?泗(水)[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卽淮夷也. ?州曲阜縣奄里,卽奄國之地也.?

[2]集解馬融曰:?齊地.?正義括地志云:?薄姑故城在靑州博昌縣東北六十里. 薄姑氏,殷諸侯,封於此,周滅之也.?

[3]正義伐奄歸鎬京也. 

[4]集解孔安國曰:?告衆方天下諸侯.?


<만주원류고> 卷首 凡例  (인용 16)

凡在故爲肅愼, 在漢爲三韓, 在魏?晋爲?婁, 在元魏爲勿吉, 在隋?唐爲靺鞨?新羅?渤海?百濟. 諸國在金初爲完顔部及明代所設建州諸衛


<만주원류고> 卷1 부족1  (인용 17)

 “肅愼?扶餘?三韓?靺鞨?百濟?新羅?渤海?女眞 諸國 沿革可徵, 淮南子云 東方 多君子國 信矣. ... 自肅愼爲始而仍變”


<후한서> 卷90 烏桓鮮卑列傳 第八十 (인용 18)

烏桓者,本東胡也。漢初,匈奴冒頓滅其國,余類保烏桓山,因以?號焉。... 鮮卑者,亦東胡之支也,別依鮮卑山,故因號焉


출처 : 우리역사문화아카데미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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