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사전
노자 (老子)
노자는 현재 호남성 남부지방인 주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공자는 그에게 예(禮)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종래에는 노자를 최초의 중국 철학자로 인정했지만, 최근에는 노자를 공자의 뒷시대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들도 있다. 노자의 이름은 이이(李耳)이며, 자는 담(聃) 혹은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진정한 도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다. 즉 도는 이름붙일 수 없는 무명(無名)이지만, 모든 유명(有名)이 생기게 되는 원천이다. {장자}의 [천하] 편은 노자의 중심사상을 태일(太一), 유무(有無), 상(常)이라고 말한다. 즉 도라는 것은 하나, 전체라는 것이며, 또한 도는 변화하지 않는 항상성을 지니고 있다. 사물들을 지배하는 법칙, 그 항상적인 도는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이다. 우리는 이러한 법칙에 따라 행위해야만 하며, 그러한 행위가 바로 무위(無爲)이다. 무위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자연적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 행위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욕망이거나 지식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통치도 무위에 따라야 한다. 도가 모든 사물들이 각각 자기의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처럼 통치자 자신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백성들이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석가모니 (釋迦牟尼, 기원전 563∼기원전 483)
석가모니란 석가족 출신의 성자란 뜻이다. 성은 고타마이며, 이름은 실달다이다. 북인도 가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두었으나 무상(無上)을 느끼고 출가하여 고행생활에 들어간다. 고행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보리수 밑에서 명상에 들어가 연기(緣起)의 도리를 깨닫고 불타(佛陀)가 되었다. 이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함경(阿含經)}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 현상계에서의 괴로움과 그 원인, 그것을 극복하는 열반을, 십이인연(十二因緣), 사선삼명(四禪三明)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dharma)을 깨달았다.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直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러한 지혜는 공포나 고통에도, 나아가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不動)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 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공자 (孔子, 기원전 552∼기원전 479)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중니(仲尼)이고 이름은 구(丘)이다. {사기(史記)}는 공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자는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했지만, 노나라 관직에 투신하여 50세에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 모략으로 그 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3년간 정치적·사회적 개혁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노년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지 3년 만인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질서 있고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정명(正名)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정명이란 이름과 내실의 합치이다. 우리의 사회관계에서 이름은 각기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의미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공자는 인(仁)과 의(義)를 강조한다.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 있어서 우리는 올바른 것을 기꺼이 해야 한다. 그러한 올바름의 구체적 내용이 바로 인(仁),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의 실현은 충서(忠恕)의 원리로서 나타난다. 즉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으면 남도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충서(忠恕)이다.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 기원전 510∼기원전445)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만약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라는 대화록을 믿을 수 있다면 그는 기원전 510년에 태어났다. 파르메니데스는 몇몇 시를 남겼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보다 훨씬 철학적이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우리가 진리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성에 의지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무(無)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무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늘 존재해왔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것이 무로 변화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시작도 없고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하고 불멸해야 한다. 또한 실재는 연속적이어야 한다. 모든 공간은 꽉 차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변화하는 사물이나 운동은 불가능하다.
헤라클레이토스 (Herakleitos, 기원전 540∼기원전480)
에페소스 출생의 그리스 철학자. 그는 모든 만물은 유전한다고 주장한다. 즉 모든 사물들은 변화한다. 사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존재를 지속하는 한 잠시라도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사물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존재한다. 바로 이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을 불꽃에 비유한다. 불꽃은 그 자체 대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변화는 삶과 우주의 법칙이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는 로고스가 있다. 이 로고스, 이법을 통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제 질서 속에 있다. 강이 항상 변하지 않는다면 그건 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강임을 알고 있다.
피타고라스 (Pythagoras, 기원전 571-기원전496)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에 살다가 제자들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톤으로 이주했다. 그는 다방면에 천재적이었는데, 특히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수에 사각형, 정육면체라는 생각을 도입하면서 산수에 기하학적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닌 '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냈고 '코스모스'(cosmos)라는 말을 우주라는 의미로 쓴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채식주의자로 윤회를 믿었으며, 콩을 먹는 것은 죄악이라는 말했다. 피타고라스는 세계가 수(數)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리는 비례라고 했다. 그는 수학을 철학에 접목시킨 뛰어난 사상가이다. 그는 수학적 용어로서 우주 전체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기원전399)
아테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그는 키가 작고 들창코의 못생겼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논의를 우리 자신에 대한 논의로 변화시켰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계의 궁극적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에 대한 것이다. 선이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우리가 이러한 질문의 대답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몰랐다. 단지 어느 누구도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모든 것을 의문시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르쳤다. 이것을 '소크라테스식 대화법' 혹은 '산파술'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화법에 의해서 우리는 얼마나 무지한가를 자각하게 된다. 그는 진정한 도덕적 지혜는 자신 안에 있다는 것, 덕은 지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행위를 한다면 그는 그 행위가 잘못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진정하게 올바른 행위는 바로 앎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앎에 대한 추구와 덕에 대한 열망이 결국 동일한 것이다.
플라톤 (Platon. 기원전 429∼기원전 347)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다. 아테네 귀족 출신인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민주주의자를 증오하였다. 그는 아테네에서 아카데미아를 세웠고, 이데아 이론과 이상공화국을 주장했다. 이상공화국은 현명한 철학왕이 다스리는 조화롭고 완벽한 사회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의 세계와 경험적인 현상 세계가 있다. 경험적 세계는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이데아의 세계는 진정으로 존재한 실재 세계이다. 플라톤은 몇 가지 논거를 통해서 이러한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수학적 지식이 언제나 참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지식의 대상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상기를 통해 이러한 지식을 알게 된다.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추락하기 전에 이러한 영혼을 지녔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상기가 바로 배움의 모든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우리는 이데아 중의 이데아, 즉 선의 이데아를 보아야 한다.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기원전 490∼기원전 420)
그리스 소피스트의 한 사람이다. 덕은 과연 가르쳐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플라톤의 대화록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견해가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지혜에 대해서 경탄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유명한 주장은 바로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규범에 대한 상대주의적이며 회의주의적인 견해를 함축한다. 즉 세상에 객관적인 진리는 없으며 오직 인간의 제한된 믿음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그는 철학이란 사실 수사학이나 설득의 화술에 지나지 않으며, 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사람들을 선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자 (莊子, 기원전 369-기원전 289)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며, 몽현(蒙縣) 사람으로서 양(梁)의 혜왕(惠王)과 제(齊)의 선왕(宣王)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장자는 정부에서 경영하는 칠원(漆園)에서 관리인 노릇을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을 그만두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매우 가난했지만 벼슬자리조차 사양했다. 차라리 진흙탕 속에서 자유롭게 꼬리치며 노니는 거북처럼 살지언정 관직에 구애받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장자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를 추구했다. 그것은 그 어떠한 것에도 의존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 편리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 즉 기심(機心), 상대적인 지식 등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상대적인 마음을 장자는 성심(成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심제(心齊)와 좌망(坐忘)을 제시하고 있다. 사물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피론 (Pyrrhon, 기원전 365-기원전 270)
엘리스 출생의 회의론적 철학자이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병사였는데, 그와 인도 원정을 다녀온 적도 있었다. 여러 나라와 민족들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의견 차이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타당한 이유로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물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다. 이 설명이 저 설명보다 낫다고 단정 내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놓여져 있는 상황에서 유지되는 관습과 습관에 따르는 것이 진정 현명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 322)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를 떠나 아테네로 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 플라톤이 죽자 그는 아테네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거기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개인교사가 되어 그를 가르친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론이라는 학교를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저작을 남기고 있다. 물리학, 천문학, 발생학, 동물학, 정치학, 윤리학, 시학, 논리학, 형이상학 등에 걸쳐 다양한 강의록을 남기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형상과 질료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물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변화하고 운동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 방식을 개발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정의하려면 먼저 그것이 속해 있는 류(類) 속에 종(種)을 확정한 다음에 그 종류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종으로부터 그 종을 구별해주는 종차(種差)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러한 분류방식은 생물학자들에게 최초로 분류기법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개발하기도 했다. 삼단논법 등의 전통적인 연역논리학을 고안하는 한편 형상을 자연종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이런 종류를 밝혀내고 그 속성을 탐구하는 귀납법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주장한다. 사물의 변화는 질료원인, 형상원인, 작용원인, 그리고 목적원인의 네 가지 원인을 통해서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설명을 통한 세계는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실현해나가는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다르게 도덕을 지식의 문제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도덕은 습관과 기술의 문제이다. 우리는 중용을 선택하면서 규칙적으로 훈련을 받아 그러한 덕성을 스스로 실현해나가야 한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5∼기원후 65)
고대 로마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로마에서 자라면서 변론술과 철학을 배웠다. 웅변가로서 수사학적 문체에 뛰어났으나, 그 사상은 통일성이 결여되었으며, 감수성을 앞세우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스스로 세속에 물들면서도, 끝내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 때문이라는 것과 유일의 선(善)인 덕(德)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기원전 4∼기원후 30)
그리스도의 어원은 성유(聖油)를 머리에 부음받은 자로서 구세주, 왕이란 뜻이다. 유대왕 헤롯 시대에 목수인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다. 나자렛에서 살다 30세 때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40일간 황야에서 기도한 후에 신의 나라의 내림, 유대민족의 회개, 사해 동포주의, 정의와 사랑을 통한 신의 은총 등을 설파하였으며,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바리새인과 갈등을 빚고 제자인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승천했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으로써 인간을 위한 속죄의 희생으로 삼았다.
플로티누스(Plontinus, 205∼270)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신플라톤주의의 시조이다. 플라톤의 철학을 철학으로 체계화시켜 발전시켜 그리스 철학을 통일된 하나의 체계로 완성시킨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이 하나, 일자(一者)인 신에 의해서 나왔고 그것으로 되돌아간다. 이 신은 말로 표현될 수 없으며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이 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호메트 (Mahomet, 570∼632)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를 알라의 마지막이며 가장 위대한 예언자, 사도로 여긴다. 메카에서 태어나 백부 밑에서 자랐다. 40세 무렵 알라신의 계시를 받아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마호메트가 전한 신의 계시를 뒷날 편집한 것이 {코란}이다. 이슬람교의 신인 알라는 최고신으로 숭배되어왔는데, 마호메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모든 피창조물에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다.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92)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모랄리스트이다. 어린 시절부터 라틴 작가들을 가까이 하였고, 자라서 철학과 법학을 배워서 사법계에 몸을 담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독서와 성찰의 은둔 시간을 보냈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추구한 {수상록(Les Essais)}을 집필하였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회의적 태도를 거쳐서 자연과 인간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홉스 (Thomas Hobbes, 1588∼1679)
신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법에 저촉을 받고 생명까지 위험스러운 시대에 홉스는 유물론 철학을 주장한다. 그는 존재하는 전체는 물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러한 물질은 마치 기계처럼 작용한다. 인간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는 이유는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 각자는 서로 계약을 맺어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계약은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법을 강제하고 처벌과 통제를 할 수 있는 강력한 권위에 권력을 인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은 곧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이며, 대륙 합리론의 시조이고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지칭된다.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 기하학의 창시자이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을 비판하면서,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의 본질은 연장이며, 또한 물질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을 주장하였다. 그의 철학, 형이상학은 방법적 회의에서 출발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한다. 세계의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코기토(cogito) 명제가 확립된다. 이 확실성으로부터 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존재 근거로서 무한한 완전자로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성을 통하여 물체의 존재가 증명된다. 물체와 구분되는 정신은 그 본질이 사유로서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며 불멸하다.
스피노자 (Benedict Spinoza, 1632∼77)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생의 철학자이다. 그는 정통 유대교 교육을 받았지만, 그것에 어긋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24세 때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났다. 그는 고독한 삶을 살면서 렌즈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부에서 제의한 교수직도 그는 거절하였다.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마음과 일치하도록 혼자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해 발견된 {에티카}는 유클리트의 기하학적 방식에 따라 철학 전체에 대한 체계적 해명을 시도하였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의 데카르트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일원론을 주장한다. 유일한 실체는 바로 신이다. 신은 실체로서 그 자체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는 외부의 것을 전혀 갖지 않는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신은 모든 것과 동일한 가치를 지녀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신은 곧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사상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낭만주의 사상에 의해 커다란 주목을 받는다. 그렇지만 낭만주의자와 다르게 스피노자는 인간의 행위가 자신의 통제를 넘는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 스스로 자유로운 행위자로 여기는 우리의 일상 감각 대부분은 망상이다. 이것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해방될 수 있다.
로크 (John Locke, 1632∼1704)
영국 경험주의의 철학자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과 과학을 배웠고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로크는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그 한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로크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지식과 생각은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 백지 상태로 태어난 우리 인간은 경험과 반성을 통해 단순관념으로부터 복합관념을 형성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유관념(innate idea)은 없다. 나아가 우리가 백지 상태에서 태어났다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백지 상태의 인간이 어떻게 교육받는가 하는 것이다. 본유관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로크는 보편자, 혹은 보편관념도 단지 우리가 고안한 창조물, 기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은 우리에게 어떤 관념을 주는 원인이다. 로크는 대상 자체가 지니고 있는 속성을 일차성질이라고 하며, 그러한 대상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각적 성질을 이차성질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이차성질을 통해 일차성질을 추론한다. 그러나 일차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물 그 자체를 우리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이 점은 우리의 궁극적 자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다양한 지각 내용뿐이다. 따라서 이것이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심적 실체로서 자아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버클리 (George Berkeley, 1685∼1753)
버클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나중에 주교가 된 영국 경험론의 철학자이다. 그가 불과 나이 20세에 손수 출판한 저서들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버클리는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을 충실하게 계승한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적 원천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가 감각하고 경험할 수 없는 사물 그 자체가 존재하는가? 버클리에 의하면 그러한 사물은, 그러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일차성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차성질이다. 오히려 존재는 지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버클리는 신과 타인의 정신을 인정함으로써 지각과 경험이 주는 주관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버클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그는 주관적 관념론자로 평가된다.
흄 (David Hume, 1711∼76)
흄은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온다는 경험주의의 원칙을 아주 철저하게 적용한 철학자이다. 이미 버클리가 보여준 것처럼 외적 사물 자체의 존재는 경험주의의 원칙에 따라 거부될 수밖에 없었다. 흄은 더 나아가 버클리가 존재한다고 당연하게 가정했던 신과 타인의 마음의 존재, 더 나아가 우리 마음의 실체성을 의심하고 부정한다. 우리의 내성을 통해 우리를 관찰한다고 해도 우리는 단지 지각의 다발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각의 주체를 결코 관찰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아란 단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존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 관찰 경험의 증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그러한 증거는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제시했던 세 가지 기본적 실체, 즉 신, 물체, 정신 등을 흄은 모두 부정한다. 흄은 더 나아가 귀납과 인과의 원리조차 경험주의의 원칙에 따라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귀납이나 인과의 원리는 모두 우리의 주관적 믿음이며 습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회의주의자로서 흄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사물의 지각에 맞추어 살아갈 뿐 다른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흄은 주장한다. 우리의 행위는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정념과 욕구의 지배를 받는다. 오히려 이성도 정념의 노예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모든 행위를 삼간다는 것을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이론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중하며 온건한 관용일 것이다.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칸트는 동프로이센의 쾨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명성과 다르게 젊은 시절에는 거의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57세에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했는데 그 책이 불후의 명저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을 썼다. 이 책들에 나타난 칸트의 철학을 비판철학이라고 한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하여 극복하였다고 평가된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험론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비록 우리의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성립되지만 그럼에도 경험으로부터 오지 않는 지식의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비경험적 지식의 요소는 합리론이 주장하듯이 그 자체 절대적 지식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결합되어 성립된다. 가령 순수수학이나 순수물리학의 지식은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종합적인 것이지만, 그러한 지식이 갖고 있는 필연성과 보편성은 비경험적인 근원, 즉 순수오성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형식과 범주라는 오성형식을 통해서 인식한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거기 그렇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감성형식과 오성형식을 통해서 우리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한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인식의 필연성과 보편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 형식으로부터 벗어나 존재하고 있는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식 형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진정한 자아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은 바로 우리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만약 합리론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지식을 이곳에로 확장하는 경우에는 오류추리가 발생한다. 따라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우리의 지식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를 확립하는 동시에 우리 지식의 한계를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지식의 영역에서 부정되었던 형이상학적 신념들에 기능을 부여한다. 우리의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 즉 무조건적 명령인 '정언명령'이 가능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 자아의 불멸성, 그리고 자유의지가 요청된다. {판단력비판}이 필연적인 자연법칙과 당위적인 의무로서 도덕법칙의 조화 문제를 탐색하고 있다.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이 총체적인 실재와 인간의 전 역사에 관한 궁극적 진리를 밝혀준다고 생각했다. 실재는 고정적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발전 과정에 있는 유기체적 전체이다. 이러한 발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승인과 자기 이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 전체를 헤겔은 셸링(Schelling)처럼 자연 자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도덕적이며 정신적 사건이다. 정신이나 마음은 생명 없는 자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존재하는 것, 실재성으로 구성된 역사적 과정 주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헤겔은 이 모든 역사적 과정의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 어떤 원동력을 절대정신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존재의 궁극적인 본질인 현존의 근거이다. 역사의 전 과정은 바로 이러한 자기 의식과 자기 지식을 향한 절대정신의 발전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와 조화롭게 하나가 된다. 헤겔은 자신의 이러한 철학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합시킨다. 모든 존재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처럼 변화, 발전한다. 모든 복합적인 상황은 그 안에 갈등적인 요소, 즉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계속 지속될 수 없다. 그 모순은 해결책을 얻을 때까지 스스로를 끌고 간다. 그리고 새로운 해결책은 새로운 상황을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변화의 근본원리이며, 헤겔은 이러한 원리를 변증법으로 체계화한다. 이러한 법칙 때문에 모든 것들은 스스로 동일하게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은 종교, 사상, 예술, 경제, 제도, 사회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이러한 변화의 최종 목적지는 개인이 조화롭게 전체의 부분으로 기능하는 유기적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가 형이상학적 국가이다.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55)
덴마크 코펜하겐 출생의 철학자이다. 그는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당시의 주도적인 사상이었던 헤겔의 철학을 비판한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개별적인 것인데, 헤겔은 모든 개별적인 존재를 모호한 절대 이념으로 환원시켜 설명하였다. 헤겔의 추상화와 일반화는 이러한 개별적인 실재와 공존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이 존재하는지 이해하기 원한다면 고유한 개별자에게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주장한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은 추상적인 유기적인 실재, 즉 국가에 포섭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최소의 도덕적 실재는 바로 구체적인 개별자로서 개인이다. 우리가 삶을 창조하고 자신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은 종교적 함축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 영혼과 신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인생의 세 가지 단계를 도출한다. 첫째, 인간이 단지 상상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심미적 단계이다. 둘째, 인간이 실재적 삶을 살고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감을 발전시키는 윤리적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당면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딜레마를 해결해야 만하고 궁극적으로 유한성 대신에 영원성을 선택해야만 하는 종교적 단계이다.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83)
프로이센 라인 트리어에서 태어난 독일의 사회이론가이며 사회철학자이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다가 철학과 역사로 전공을 바꾸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헤겔 좌파로 출발했지만, 역사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모형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의 철학은 독일의 관념론과 영국의 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독창적으로 혼합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는 진보의 이야기로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인 것에 불과했다. 의식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의식을 결정한다. 따라서 역사는 추상적인 관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아니라, 현실적인 모든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증법적 투쟁이다. 마르크스는 또한 경제 결정론자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믿음과 활동은 궁극적으로 물질적 힘에 의해서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체계의 경제적 토대인 하부 구조가 상부 구조를 만들고 결정한다. 자본주의의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즉 허위의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인간으로부터 소외당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혁명을 주장한다.
딜타이 (Wilhelm Dilthey, 1833∼1911)
해석학의 방법론을 확립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1831년 헤겔 사후에 독일 관념론은 실증주의 사조에 밀려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한다. 개별과학들은 자연과학을 토대로 독자성을 찾아가고 철학도 전문화의 경향을 띠고 있었다. 심지어 역사학이나 심리학도 자연과학의 영향 아래에서 재구성되어가고 있었다. 딜타이는 이 무렵 헤센 주 비브리히에서 출생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딜타이는 헤겔의 절대이성을 비판하는 한편 칸트의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분을 비판한다. 우리의 인식은 삶과 통일성을 이룬다. 딜타이에 의하면 정신과학은 그 대상과 방법에 있어서 자연과학과 다르다. 인간의 삶에 근거하고 있는 정신세계는 개념이나 논리적 체계로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정신세계는 기본적으로 역사와 심리학을 기초로 삼아야 하며, 이해의 방법에 근거해야 한다. 심리학주의를 비판하는 후설의 자극으로 딜타이는 삶의 체험과 표현과 이해의 범주에 그의 이해론을 집중시킨다. 딜타이는 하이데거, 가다머 등으로 넘어가는 현대 해석학의 발전에 중요한 출발점을 마련했다.
제임스 (William James, 1842∼1910)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이다. 분트의 요소 심리학을 비판하면서 의식의 흐름을 강조하였다. 또 신경 생리학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기능심리학의 길을 열었다. 종교체험을 연구하면서 종교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말년에는 퍼스와 듀이와 함께 미국 실용주의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제임스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에 일치하고 다른 알려진 진술과 법칙에 부합하며 비판에 견뎌낼 수 있으며 유용한 통찰과 예측을 할 수 있는 진술과 이론이 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임스의 주장을 무엇이든지 실용적 역할을 하는 것이 참이라고 해석하였고, 나아가 이러한 오해는 종교를 믿음으로써 어떤 혜택을 입을 수 있다면 그 종교는 정당하다는 제임스의 주장 때문에 더욱 가중되었다. 제임스는 끝없이 반복되는 논쟁에 실용주의 분야를 결국 떠났다.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엄격한 루터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그는 기독교에 반감을 가졌다. 문헌학자로 수많은 고전을 섭렵한 니체는 수동적인 고통과 죄악, 저주에 열광하는 기독교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세계에 더 많은 가치와 의의를 부여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현명하게 운명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삶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고결한 삶을 낳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고 우리는 의지라는 비합리적인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실재의 세계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그 자체 충실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따라서 신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이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바로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약자, 정의, 겸손을 옹호하는 노예와 군중의 도덕이다. 니체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뛰어 넘는 초인과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한다.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하는 인간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이다. 이러한 권력에의 의지를 지닌 초인은 모든 가능성과 창조성을 발휘할 것이다. 또 이러한 존재는 자기 실현을 위한 삶을 영위하면서 개인적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며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 최면에 의한 신경증 환자의 치료에서 카타시스적 요법을 발전시켜 자유연상법에 의한 정신분석학을 확립하였다. 또 환자의 꿈에서 자유연상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발견하여 심리학적 질병을 푸는 단서가 꿈에 있으며, 꿈을 통해서 나타나는 무의식의 세계가 환자의 행동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임상실험을 통해 중요한 기억의 대부분이 성적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주장하였다. 즉 우리의 무의식은 성적인 구조를 지닌다. 프로이트는 문명화 자체가 성적 충동을 무의식의 수준에서 억압함으로써 이룩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은 객관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던 서양철학의 기반을 흔들어놓았다.
듀이 (John Dewey, 1859∼1952)
듀이는 미국의 위대한 실용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버몬트 주의 벌링톤에서 태어나 버몬트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존스 홉킨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윌리엄 제임스로부터 심리학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실용주의 철학을 체계화시켰고 이를 실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철학이 시대와 문화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언제나 문제 상황에 직면하며, 이러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시대와 문화에 의존한다. 바로 여기에서 철학은 단순한 지혜의 사랑에서 벗어나 문제 해결을 의도하는 포괄적인 지성적 노력이다. 따라서 논리학이나 우리의 사유는 문제 해결을 위한 탐구를 목적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험은 단순히 지식이나 인식보다 포괄적인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 행동적으로 파고드는 탐구의 과정이다. 우리의 가치나 윤리도 문제 상황 속에서 우리의 평가에 의존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력을 지닌 가치나 윤리는 점진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며, 이것이 민주주의 실현과정이다.
후설 (Edmund Husserl, 1859∼1938)
현상학의 창시자이다. 원래 수학을 공부했지만, 수학적 지식의 기초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심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현상학을 주장한다. 브렌타노(F. Brentano)가 주장하는 지향성의 개념에 따라 의식에 나타난 내용을 순수하게 기술하는 현상학의 방법을 주장한다. 모든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의식의 내용과 그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판단중지와 괄호 치기의 현상학적 환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을 거쳐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 기껏해야 선험적 자아의 유아론이 남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서 후설의 후기 현상학, 즉 삶의 세계의 현상학이 시작된다. 후설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1936)에서 학문의 위기뿐만 아니라 유럽 인간성 자체의 위기를 지적해 낸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가져야 할 학문의 의의가 상실되고 이것은 근대 과학이 물리주의적 객관주의로 흘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객관주의는 갈릴레이에 의한 '자연의 수학화'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이야기하는 객관성이란 우리의 직관적 경험의 세계에, 즉 생활세계에 이념의 옷이 입혀진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기반인 생활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 생활세계가 모든 객관적 확증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프레게 (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1848∼1925)
1848년 11월 8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에서 출생하였다. 명제논리와 술어논리를 공리체계로 해서 조직화하여 기호논리학의 길을 열었고, 1879∼1918년 예나 대학 교수를 지냈다. 수학은 논리학을 기초로 하여 도출하려는 논리주의를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이러한 프레게의 주장과 시도 때문에 프레게는 근대철학의 인식론 중심에서 벗어나 의미론 중심의 현대 철학의 초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언어 표현에 대해서 그 지칭대상과 의미를 명백하게 구분하였다. 그는 또한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외연과 내포의 구별을 명제로까지 확장하여 명제의 내포를 명제의 의미로, 그리고 명제의 외연으로 진리치를 주장하여, 외연 논리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개념적 표기법}(1879), {산술의 기초}(1884), {산술의 원리}(1893) 등이 있다.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러셀은 화이트헤드와 공동으로 방대한 {수학원리}를 집필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러셀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 서 있는 논리적 원자론자였다. 세계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식은 모든 것들을 그 구성요소로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 사유에서 가장 기초적인 개별적 요소들은 바로 우리 정신에 나타나는 감각자료이며, 이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실들에 의해서 생겨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는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일상언어는 아주 명백한 논리적 언어로 분석되어야 한다. 러셀은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기술이론을 주장한다. 즉 우리가 이름처럼 간주하는 어떤 언어표현들은 논리적 분석을 통해 볼 때 단순히 기술에 해당된다.
무어 (George Edward Moore, 1873∼1958)
20세기 철학에 미친 무어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관념론 논박](1903)에서 관념론을 비판하여 러셀과 함께 20세기 실재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철학자의 과제는 어떤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진술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많은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사용의 오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어의 이러한 주장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통해서 영미 분석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무어의 {윤리학 원리}(1903)는 주요한 윤리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거기에서 무어는 직관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연주의 윤리학을 비판하는 자연주의 오류를 소개하고 있다. 선(善)은 정의할 수 없으며, 가치를 자연적 속성으로부터 해명하려는 입장은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한다. 무어는 메타 윤리학(meta-ethics)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
독일 태생의 미국 신학자이다. 이성은 계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초자연주의 신학과 계시를 이성을 통해 이해하려는 자연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인간의 역사적 실존과 성서적 진리를 문답의 상관 관계에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
현대 독일의 철학자이다. 하이데거는 1933년 프라이부르그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 연설에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찬양하였다. 때맞추어 그의 유대인 스승이었던 후설과 거리를 두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하이데거는 은둔하면서 그의 철학을 소수의 학생들에게 지도한다. 하이데거의 주저는 바로 {존재와 시간}(1927)이다. 그 자신 '실존주의자'임을 철저하게 부정하였지만, 그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하면서 하이데거는 의식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는 인식론적이고 논리적인 구성 개념을 폐기하고 있다. 객관적인 세계를 증명해야만 하는 주체 존재, 세계를 관망하는 존재로서 주체를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오히려 그러한 존재는 인간 현존재(Dasein)에 대한 분석과 서술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 현존재는 세계에 참여하고 그러한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미 '세계 내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자신의 접근을 '기초존재론'이라고 부른다. 데카르트나 후설의 자아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의 현존재는 의식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와 현존은 무의 경험으로부터 온다. 이러한 무에 직면할 때 비로소 우리의 본래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대중사회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인간들은 이러한 본래성과 마주하기를 회피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출생하였다. 생존 중에 출판된 저작은 1921년에 간행된 {논리철학논고} 뿐이지만, 그가 현대 철학 특히 영미 분석철학에 미친 영향을 대단하다. 그는 언어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논리철학논고}에 의하면 언어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짓는 것이 바로 철학의 과제이며, 언어의 의미, 즉 말할 수 있는 세계는 세계와 언어의 공통 형식인 논리적 형식을 통해 마련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언어를 그림언어, 혹은 과학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논리적 실증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논리적 실증주의의 주장에 찬동하지 않았다. {논리철학논고} 이후에 철학을 떠나서 오스트리아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논리철학논고}를 비판하면서 그의 후기 철학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후기 철학이 나타난 {청갈색책}(the Blue and Brown Books)과 {철학적 탐구}(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이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일반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논리적 원자론이 주장되었으나, 그의 후기 철학에서는 인공언어에 의한 철학적 분석방법에 대해서 의문을 표현하면서 일상언어 분석에서 철학적 의의를 발견한다고 평가된다.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
1929년경 모리츠 슐릭을 중심으로 결성된 빈학파가 주장한 철학적 방법과 주장이다. 슐릭과 루돌프 카르납을 중심으로 해서 오토 노이라트, 쿠르트 괴델 등을 회원으로 하여 1922년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하다가 나치의 탄압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1938년에 해체되었다. 빈학파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 등 다양한 전공자들이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기본 동기는 형이상학적 철학에 대한 반발에 있었다. 특히 이들은 헤겔의 관념론이 형이상학적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논리실증주의는 과학적이며, 인식적이고 또 유의미한 것은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라고 주장한다. 수학이나 논리학 등의 형식과학에서 볼 수 있는 분석명제는 언어적 규약을 통해 그 참과 거짓이 규정된다. 내용과학에서 볼 수 있는 종합명제는 그것은 경험을 통해 검증될 때 비로소 참과 거짓이 확인된다. 이렇게 참과 거짓을 확정할 수 있는 분석명제나 종합명제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비과학적이며, 비인식적이고 또한 무의미하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진술, 신학적 진술, 윤리적 진술, 미학적 진술들은 비과학적이며, 비인식적이고 무의미하다.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의 주장에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고, 그러한 비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의미와 논리, 과학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철학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80)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로서 실존주의를 대표한다. 인간은 의식을 지닌 대자 존재로서 세상에 내던져 졌으며, 자신을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해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 실존의 결단과 행위 속에 인간의 절대적 자유와 책임이 존재하며, 그것은 모든 가치의 근원이다. 또 문학자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면서, 사르트르 자신도 온갖 탄압과 부정에 저항하면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61)
메를로 퐁티는 현상학과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에 편력하면서 그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그는 데카르트 이후에 중요한 철학적 물음인 의식과 대상의 관계에 주목하고, 인간과 세계, 타인과의 상호 관계 등에 대해서 치밀한 현상학적 고찰을 보여준다. 그는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에콜 노르말을 졸업하고 리용,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가르쳤고,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라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주저인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확고한 위치를 확보한 후에 1952년 베르그송의 후임으로 프랑스 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사고로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메를로 퐁티는 데카르트의 의식, 즉 코기토에 대한 대안으로서 육화된 코기토, 몸주체를 주장한다. 의식, 세계, 몸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지각 체험을 인식의 근원으로 상정하면서 이에 입각하여 인간과 세계, 의식과 대상의 관계를 새롭게 탐구한다. 나아가 그러한 지각의 현상으로부터 언어와 문화, 이성, 예술, 종교 체험에 대한 탐구로 확대되고 있다.
콰인 (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
1908년 6월 25일 오하이오 주 애크런에서 출생하였다. 하버드 대학을 나왔으며, 교수로 재직하였다. 논리학의 성과를 철학에 응용하는 데 주력했으며, 논리적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의 경험론적 전통을 결합하여 미국 분석철학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고수하였다. 그는 러셀의 전통에 따라 논리학의 체계를 세련되게 만들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단칭명제는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경험론의 두 독단]에서 콰인은 분석과 종합의 이분법과 환원주의를 공박하면서 전체적 믿음체계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인식론으로 발전하였으며, 하나의 문장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번역 불확정성의 논제를 주장하였다. 콰인은 내포적 논리학의 가능성을 부정했으며, 무엇이 존재하는지 말할 수 있는 규준으로, 또 실재론자와 유명론자를 구분하기 위한 규준으로서 "존재는 변항(variable)의 값"이라고 주장했다.
오스틴 (John Langshaw Austin, 1911∼60)
영국의 랭커스터에서 출생했으며 195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일상언어의 치밀한 분석을 통하여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구분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다. 그는 서술적(constative) 발화와 수행적(performative) 발화를 구분하면서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일종의 행위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을 더욱 발전시켜 언어행위(speech act) 이론의 발전에 기초적 역할을 하였다. 저술에는 {말과 행위(How to Do Things with Words)}(1962)가 있다.
로티 (Richard Mckay Rorty, 1931∼ )
로티는 1931년 뉴욕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을 다녔고 예일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후 잠시 모교에서 가르치다가 1962년에서 82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에서 재직했다. 로티의 철학은 신실용주의(Neo pragmatism)라고 일컬어진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로티는 표상으로서 지식의 개념과 외부 세계에 대한 심성적 거울로서 마음의 개념이라는 근대 철학의 핵심적 전제들을 비판하고 있다. 전통 철학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뿌리박고 있는 이러한 비유를 해체함으로써 우리는 역사주의와 자연주의의 실용적 종합으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노 (Jacques Lucien Monod, 1910∼76)
자크 모노는 파리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생물 생리연구소에서 대장균의 적응 효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파리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세균의 유전현상을 연구하여 효소의 합성을 제어하는 유전자, 즉 오페론(operon))의 존재를 확인하고 구조를 해명한 오페론설을 주장했다. 1965년 A.르보프, F.야코브 교수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모노는 그의 {우연과 필연}(1970)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라고 주장한다. 그는 분자생물학의 지식을 이용하여 인간은 우주 속에서 우연적으로 출현한 존재이며, 이러한 존재가 자기와 개인을 초월하여 어떤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 필연이라고 주장한다.
리쾨르 (Paul Ricoeur, 1913∼ )
리쾨르는 데카르트, 베르그송, 가르브엘 마르셀, 메를로 퐁티로 이어지는 프랑스 철학의 정통적인 맥을 계승하는 독창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저술 작업을 했다. 방대한 두 권짜리 저서인 {의지의 철학}을 비롯하여 {악의 상징주의}, {프로이트와 철학}, {시간과 서사} 등의 책을 썼다. 그의 철학적 작업은 일종의 철학적 인간학으로서 우리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근본적 능력과 한계를 고찰하고 있다. 자아의 이해를 목표로 하면서 리쾨르는 데카르트의 투명한 자아를 공박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철학적 인간학을 실존현상학, 현상학적 해석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수행하고 있다.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 )
데리다는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푸코 등을 배출한 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데리다는 서양철학의 구조적 해체를 겨냥한다. 서양의 모든 철학은 로고스 중심주의의 철학이다. 이 이성중심주의 철학은 문자언어로 무장되어 나타난다. 데리다는 이 문자언어로서 나타난 이성중심주의를 그 기원으로부터 해체하려고 한다. 이성중심주의는 현전(presence)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다. 사물의 현전, 의미나 관념의 현전, 의식 자체의 현전은 어떤 의미에서 서책(livres)의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오직 음성언어만이 자체의 직접적인 현전이다. 그러나 문자언어는 음성언어에 저항하면서 그것에 폭력을 가한다. 이 폭력이 서양철학의 합리적 담화와 이성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을 해체하는 것이 바로 데리다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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