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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현대사]소련군의 경제적 수탈 실태

by 8866 2006. 6. 19.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위대한 해방군을 자처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 극동군 연해주군관구 제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의 일성 또한 “우리는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해방자로서 이곳에 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붉은 군대를 미화하기에 급급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붉은 군대는 배고픈 정복자로서의 실체를 드러냈다. 그와 함께 그들에 대한 북한 주민의 반응도 싸늘해졌다. 북한 점령 초기 소련군의 경제적 수탈 실태를 살펴보면 해방공간에서 소련군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 북한 공업시설은 소련의 ‘전리품’

 

소련이 북한 공업시설을 전리품으로 여긴 것부터가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선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12월 소련 외무부 극동 제2국 참사관 수즈달레프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에 그 같은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보고서는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붉은 군대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을 위해 봉사했고 또 붉은 군대의 엄청난 희생으로 쟁취한 것이므로 전리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보고서는 이어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의 일부로, 또 소비에트 러시아가 출발한 이후 현재까지 일본이 소련에 끼친 엄청난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소련으로 이송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북한주재 소련대사를 지내기도 했던 수즈달레프의 이 보고서는 소련이 처음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기획하고 실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경제전문가로 구성된 ‘朝鮮그룹’

 

그에 앞서 1945년 9월 소련 국방부는 전권대표인 사브로프 대장이 이끄는 ‘조선그룹’을 파견해 북한의 산업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다. 약 80명의 경제전문가들로 구성된 이 그룹은 곧 138명으로 늘어나 그해 11월 초까지 조사를 마쳤다.

 

그들 역시 북한 내 각종 공장의 생산력을 전면 가동해 생산물을 소련으로 가져갈 것을 건의했다. 비교적 발전된 공업설비는 소련으로 반출하고, 북한에 필요한 원료와 반제품을 소련으로부터 수입할 것도 건의했다.

 

조선그룹의 건의는 대부분 즉각 실현됐다. 1945년 11월 20일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는 북한 내 갑종(甲種) 중공업공장들의 생산개시 명령서를 내려 보냈다. 이에 따라 소련점령군 사령부는 후방국장 체렌코프 등에게 구체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흥남화학공장을 비롯한 38개 중공업공장에 배치된 177명의 소련 공업기사들이 소련으로 가져 갈 공업제품의 생산을 위한 공장 복구와 가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진주와 동시에 시작된 설비반출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의 논문에 따르면 1946년 5월 1일까지 금 은 구리 등 광물을 포함한 3460만엔 상당의 전리품과 신상품이 소련으로 반출됐고, 각종 공장과 광산의 창고엔 1억4600만엔 상당의 재고품이 반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2·4분기엔 1억9420만엔 상당의 신상품이 생산될 계획이었는데, 그것도 모두 소련으로 반출될 예정이었다.

 

공업설비의 철거와 반출은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북한주재 소련 민정청의 문서들은 1945년 8월과 9월에 이미 금속가공공작기계, 발전설비, 기계제작설비와 아오지인조연료공장의 검사측정기 등을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해 갔음을 입증하고 있다.

 

당시 민정청 교통부장의 보고서는 ‘1946년 2월 말까지 북한의 철도운수는 공업설비와 전리품의 반출 및 군부대 수송에 전적으로 복무했으며, 북한 인민경제를 위한 화물수송과 여객수송은 전면 중단됐다’고 기록했다.

 

 

● 쌀 소 돼지와 예금도 공출했다

 

소련은 북한주민의 생필품까지 공출했다. 1947년 미국의 웨드마이어 육군중장이 대통령 특사로 방한했을 때 북한에서 넘어와 서울에서 활동하던 조선민주당 인사들이 전달한 ‘북조선실정에 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 말까지 소련이 북한으로부터 빼앗아간 물품은 7억∼8억달러에 이른다. 거기에는 쌀 250만섬, 소 15만마리, 돼지 5만마리 외에 북한주민들의 은행예금도 포함돼 있다.

 

이 보고서는 수풍발전소 발전기 3대, 원산 석유회사 및 청진 제철공장과 제련소의 모든 기계, 함흥 화학회사의 6만kW짜리 변압기도 소련이 가져갔다고 적고 있다. 실제 수풍발전소 발전설비 철거는 미-소간에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1945년 11월 미국이 항의각서를 전달하자 소련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한 것. 하지만 당시 수풍발전소에 남아 있던 일본인 기술자는 수풍발전소 발전기 제3, 4, 5호기가 철거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 휴지나 마찬가지였던 ‘붉은 지폐’

 

자연히 북한주민들 사이에서 소련의 북한정책에 대한 불신이 확산됐다.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인 스티코프의 특별보좌관이 작성한 보고서는 북한의 반소 정서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북조선 인텔리는 소련군사령부를 신뢰하지 않고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개혁조치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하였다.’

 

소련점령군 사령부가 남발한 군표(軍票)도 북한주민들을 자극했다. 소련점령군 사령부는 소련 정부가 책임을 질 것이므로 군표를 조선은행권과 똑같이 안심하고 사용해도 된다고 공표했으나 현실은 달랐기 때문이다.

 

흔히 ‘붉은 지폐’라고 불린 군표를 받고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한 사람들이 그것을 은행에서 현금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이다.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학생들의 반공시위도 민심악화가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발표한 호소문에 ‘소련군의 군사력을 악용한 약탈’이라는 문구가 있다.

 

 

● 발뺌하던 소련의 북한정책 변화

 

반면 소련점령군 사령부는 북한의 기계와 설비를 반출해 갔다는 주장이 소련에 대한 의도적인 중상이라고 몰아붙였다.

 

조선공산당도 거들었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1945년 10월 3일자 사설에서 ‘(소련이) 중공업 부문에 속한 기계를 뜯어간다느니, 고주파공장의 기구를 가져간다느니 하는 얘기는 허무맹랑한 소리이며 계급적으로 반동을 획책하려는 모략’이라며 소련을 감쌌다.

 

그렇지만 소련도 북한 주민들의 반소 정서를 더 이상 방치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1946년 6월 12일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조선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산업시설을 조선 인민에게 넘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해 7월 27일 소련 각료회의는 스티코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제가 만든 산업시설을 북조선인민위원회로 이관하기로 결정했다.

 

 

● 수탈의 주체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그해 8월 10일 ‘산업·교통·운수·체신·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이 공포
되고, 그해 10월 이들 산업시설의 이관이 완료된다. 그러나 121개의 광산을 포함해 상당수 산업시설과 북한에서 송환된 일본인들의 소유재산은 아직 소련군 관할 하에 있었다.

 

어쨌든 산업국유화 이전까지 북한은 일제강점 때와 다름없이 소련의 경제적 수탈에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었다. 다만 수탈의 주체만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결코 해방군이라고 할 수 없었다. 특히 초기의 소련점령군은 전리품을 탐하는 정복군에 훨씬 근사한 모습이었다.

 

 

 


출처 : 밝은 미래 건설
글쓴이 : 무영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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