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김일성의 연쇄회담 통한 「공산당 골격짜기」
1945년 10월 8일 저녁. 개성(開城) 근처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장에서는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소련군 장성도 낀 이날 회의에는 남북한의 공산당 리더들이 모여 있었다. 회의의 중심인물은 바로 박헌영(朴憲永)과 김일성(金日成)이었다.
무수한 역경을 이겨내며 국내파 공산주의세력의 대부로 인정받던 45세의 박헌영과 막강한 소련진주군의 비호를 받고 있는 33세의 빨찌산 출신 김일성―. 이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이날 비밀회동에는 소련군사령부 로마넨코 민정사령관과 두 사람의 직계 7명도 참석, 해방조선에서 공산당 조직의 건설과 전략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은 남한과 북조선에 있어 공산당 조직의 연계성, 위상 등에 관해 담판을 벌인 것이다. 양측의 담판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두 사람은 해방 후 역사의 향방(向方)을 결정짓는 하나의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내용은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북조선분국의 지위와 역할은 당시 서울에 있던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속하되 이북 5개도당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중간기구」로 결정됐다.
두 사람은 이날의 첫 만남을 시발로 박헌영이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46년 가을 월북(越北)할 때까지 여섯 차례 비밀회동을 갖고 그때 그때의 정치현안을 깊숙이 논의했다. 지금까지 박헌영이 45년 말께, 그리고 46년에 평양을 방문했다는 사실 정도만 확인되고 있어 朴·金 6회 회동은 실로 중대한 역사적 사실의 발굴이다.
북한에 있을 때 소위 박헌영 사건에 연루된 남로당 출신들이 쓴 자술서를 검토한 前 노동당 고위간부 서용규씨는 이 같은 충격적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월북 후 메크레르와도 대좌(對坐)한 박헌영
지금까지 박헌영이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과 회동을 가졌다는 대목에 대해선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다만 박헌영이 비밀리에 북한에 갔다온 적이 있다는 견해만 여러 곳에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前 남로당당원 박갑동씨는 그의 저서 『박헌영』에서 『박헌영은 평양에서 신탁통치 찬성의 지시를 받고 46년 1월 1일 밤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밝히고 있다. 조선공산당의 조사연구기관인 조선산업노동조사소 서기장으로 근무하는 등 좌익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고준석(高峻石)씨(82)도 박씨와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스칼라피노, 이정식교수는 공저(共著)『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 다른 시기의 박헌영 월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좌우합작으로 조선공산당의 내부적 문제들이 고조될 때인 46년 6월 박헌영은 북한에서 5주간 머물렀다. 이 기간 중 박헌영과 소련군정 간에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 대해 소련군사령부 정치장교였던 메크레르의 증언.
『45년 말이나 46년 초로 기억됩니다. 평양에서 박헌영을 단독으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열강 속의 한반도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8시간 노동제, 남녀평등, 토지개혁, 의무교육 실시 등이 시급하다고 강조하더군요. 한마디로 「준비된 공산주의자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유 등으로 그를 고위직에 등용시켜야 한다는 보고서를 쓴 적이 있죠.』
서씨의 이번 증언은 이 같은 단편적인 내용들을 뒷받침하면서 두 사람의 비밀회동이 해방 2개월 후인 북조선분국 창설 당시부터 벌써 이뤄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하고 있다. 서씨의 당시 상황으로 두 사람이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해방과 함께 38선이 그어지고 미군, 소련군이 각기 남·북에 들어옴으로써 판이한 정세가 조성됐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으로 흩어져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전략·전술 면에서 공동보조를 맞춰야 하는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 거죠.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도 이 같은 분위기에 따라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김일성과 박헌영의 1차 비밀회동은 어떤 경위로 이루어졌고 어떻게 진행됐을까. 김일성이 빨찌산파가 들어온 후 북한지역의 공산주의 세력간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김일성을 축으로 한 빨찌산파와 오기섭(吳淇燮)·정달헌(鄭達憲) 등 박헌영의 서울중앙을 지지하는 국내파 간에 첨예한 대립이 나타난 것이다. 서울의 조선공산당과는 별도의 조직을 북한에 설치하려는 김일성파의 의도 때문이었다.
정세판단에 인식差 보이는 국내파와 빨찌산파(派)
국내파는 일국일당(一國一黨)주의라는 공산당조직의 원칙을 고수하며 김의 구상에 제동을 걸었다. 옥신각신 끝에 양측은 일단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10월 10일 개최키로 하고 이에 앞서 예비회의를 5일부터 개최키로 합의했다. 예비회의에는 57명의 지도급 공산주의자들이 참가했다. 정세 및 각 지방당의 조직과 활동방안에 대한 토론은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조직노선에 관한 토론에서 양측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김일성이 북부5도당을 지도할 수 있는 중앙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회의장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김일성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발한 것이다.
서용규씨는 그 대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오기섭·김재갑(金載甲)·정달헌·이주하(李舟河) 등 국내파들은 「서울에 엄연히 당중앙이 있는데 이북에 당중앙을 별도로 만드는 것은 분파행동」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김일성은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치자 이를 돌파하기 위해 결심한다. 박헌영을 만나 담판을 짓기로 한 것이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은 예비회의에서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자 국내파에게 「당신네들이 정 그렇다면 박헌영 동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주영하(朱寧河)·장순명(張順明)동지를 서울에 보내겠다」고 제의합디다. 김일성은 이들 밀사에게 「박헌영 동지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얘기가 잘 안되면 38선 인근에서 나와 만나자는 말을 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두 밀사는 10월 6일 저녁 소련군 지프를 타고 38선을 넘어 서울로 잠입, 박헌영을 만나다. 그러나 박은 김일성을 만나기 전에는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두 밀사는 이러한 박의 뜻을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통해 전문으로 보냈다.
그러자 김일성은 개성 북방 소련군 38경비사령부에서 만나자는 답신을 보냈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첫 비밀회동이 10월 8일 열리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다음날 새벽까지 일반정세·정치노선·조직노선에 대해 노론을 벌였다.
다시 서씨의 증언―.
『박헌영사건 연루자의 자술서를 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정세판단을 놓고
인식차이를 보였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이북에서는 소련이 공산당을 주권당으로 보장하고 있으나 이남에서는 미국이 공산당을 탄압하고 있으니
남북공산주의운둥은 전반적인 보조는 맞추되 당활동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해야한다」고 주장한 거죠. 그러나 박헌영은 미·소는 같은 진보적 민주국가라는
견해를 갖고 있어 金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朴·金회담에서 로마넨코가 중재 역할
박헌영의 주장은 바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에 근거한 그의 「8월 테제」에 따른 것으로 여기서 그는 진보적인 민주주의국가로 蘇·英·美·中을 들고 있다.
金과 朴은 당중앙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 북조선분국을 설치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완전히 의견이 갈렸다고 서씨는 증언했다.
『김일성은 당중앙의 위치는 당연히 해방지구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박헌영을 설득했으나 朴은 지역적 개념에 의거, 서울이 중앙이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그러자 로마넨코가 나서서 朴에게 공산당중앙을 이북에 둘 것과 朴도 이북에 올라와 활동하라고 권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朴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선 결론에 이르지 못했죠.』
두 사람은 이어 이날 비밀회동의 핵심 과제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특히 이 대목은 김일성으로 보나, 박헌영으로 보나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토론은
불이 붙은 수밖에 없었다.
서씨는 『박헌영사건에 연루된 한 사람의 자술서를 보면 「새파란 젊은이의 논리에 박헌영은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 했다」고 쓰고 있었다』고 했다. 김일성은 필사적으로 북조선분국을 밀어부친 것이다.
『이북의 공산당을 끌고 나갈
수 있는 조직을 설치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에 박헌영은 일국일당원칙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다 朴은 「정 그렇다면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처럼 서울의
중앙당에 북부지도국을 하나 두고 김일성동지는 서울에 내려와 당비서 겸북부지도국장을 맡는게 어떠냐」고 역제의를 했지요.
그러자
김일성은 허허 웃으면서 조선과 소련의 사정은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소련은 땅이 넓고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중앙위원회가 일일이 지도할 수 없어
별도의 조직을 설치했으나 조선은 그럴 여건이 아니라는 거였죠.
논쟁이 끝없이 계속됐지요. 박헌영은 동석한 로마넨코의 견해를
물었습니다. 로마넨코가 「김일성동지와 같은 생각」이라고 하자 그제서야 朴은
「그러면 중앙당에 속하되 북부지역 공산당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간기구로서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고 물러섰어요. 분국 설치의 합의에 이른 것입니다.』
박헌영으로서는 북조선분국을 중앙당에
소속시켰기 때문에 나름대로 얻은 것은 얻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박헌영은 당중앙의 책임자로서 북조선분국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이로써 북한의 공산당 조직은 김일성이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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