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洪範圖) 일지(日誌)를 통해 본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 4. <홍범도 일지>의 체재(體裁)와 구성 5. <홍범도 일지>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1) 홍범도의 유년(幼年)시절 및 청장년기(靑壯年期) (2) 홍범도 의병부대의 의병항쟁(義兵抗爭) (3) 홍범도의 만주, 연해주(沿海州)에서의 재기도모(再起圖謨) (4)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실상(實相)과 홍범도(부대) (5) 홍범도의 이념(理念)과 사상(思想) 6. 맺음말 1. 머 리 말 홍범도는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 특히 항일무장투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 인물로서 일반대중에게도 신화적 인물이나 전설적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 검토 연구 등은 우리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현재 국내외 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증대하고 있으며 근래에 발간되는 민족해방운동 관계의 각종 단행본 연구서적이나 자료집, 연구논문 등에서도 그와 관련된 사실이 적지 않게 언급되고 있다. 더우기 최근에는 연변과 소련 등지의 학자들과 교류가 가능하고 그곳의 연구성과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홍범도에 대한 연구는 종전보다 훨씬 좋은 여건을 조성하게 되었다. 홍범도와 그가 이끌었던 무장세력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남한과 북한, 중국 연변, 소련과 일본 등지에서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남한에서의 연구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지에서의 연구들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국에 산재한 연구자들이 서로 고립분산적으로 연구하였으므로 여러가지 문제점과 많은 제약 및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료의 부족과 이데올로기적 제약, 연구자 들의 현재적 입장과 사관(史觀)의 차이 등은 홍범도라는 역사적 인물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였고 경우에 따라 상이한 결론을 이끌어 내게 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해석과 평가에 있어서의 상이한 경향은 홍범도 자신의 다양한 편력과 광범한 범위에 걸친 행동반경, 그리고 거의 수십년을 헤아리는 장기간의 투쟁경력에서 연유하는 요소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우리나라의 함경도 지방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한 뒤 소련의 연해주 지방과 중국의 동북지방(만주)을 왕래하며 일제 및 반민족 매판봉건세력과 싸웠으며 또한 소비에트정권을 지원하는 적군(赤軍)(레닌 주도의 볼셰비키 세력)과 함께 러시아 백위파(白衛派)(반 볼셰비키파)를 상대로 투쟁하기도 하였고 만년에는 소련의 카자흐스탄 공화국(중앙아시아)에 거주하였으며 그곳에서 1943년 10월 임종하였던 것이다. 국내 연구자들이 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활약상을 고찰할 때 직면하는 곤란한 문제의 하나가 자료의 제약이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민족해방운동사 연구에서 부딪히는 곤혹스런 문제가 바로 운동주체측의 기록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이미 누누이 지적되어 온 바이지만 홍범도의 경우에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국내 연구자들은 대부분 일제 관헌측 자료를 토대로 한민족의 고난에 찬 '피와 눈물의 운동사'를 서술해 왔다. 가능한 한 이러한 한계는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몇 년전 홍범도의 사망설(死亡說)을 놓고 국내외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으나1) 소련측 자료가 공개 되면서 그의 일생은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재소(在蘇) 교포작가 김세일에 의해 그곳 교포사회의 한글신문 《레닌기치(1991년부터 고려일보로 제호(題號)를 바꿨음)》에 연재되었던 소설 <홍범도>가 1989년에 두 출판사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간행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2) 더욱 주목되는 사실은 작년(1990년) 가을에 국내 출판사에서 추가로 간행한 소설 《홍범도》의 수정본 말미에 <홍범도 일지> 필사본이 부록으로 실려 있었다는 점이다3) 그런데 필자는 이 소설책의 부록으로 소개가 되어 있는 <홍범도 일지> 필사본(이하 본문에서는 <일지>로 약칭함)을 검토해 본 결과 그것이 홍범도 자신의 생애를 새롭게 밝혀 주는 것은 물론 한민족의 무장투쟁사 규명에도 크게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필자의 과문일지도 모르지만 현재 국내외학계에서 이 자료에 관한 검토 분석이나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필자는 운동주체측의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일지>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소개, 검토하여 홍범도의 생애와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사 연구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자료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여러가지 사실들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며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이 어떠한 운동노선과 단계를 거쳐 다양하게 전개, 발전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최근 국내외 학계의 홍범도(부대) 연구 동향 홍범도의 치열하면서도 끈질긴 투쟁과 폭넓은 행적, 그리고 대중에게 강하게 부각된 명성과 인망 등은 근래에 이르러 국내외적으로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제고(提高)시키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홍범도는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소련과 중국을 오가며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한가운데서 굳건히 투쟁한 대표적 무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활약상을 조명해 보면 함경도 지역에서의 의병투쟁과 간도에서의 독립군 전투, 그리고 소련 연해주 지방에서의 한인 민족해방운동 등 한국 근대사 및 민족해방운동사 전반의 주요한 흐름을 연관시켜 거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유리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남한과 북한, 중국 연변과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방, 그리고 일본 등지에서도 각종 자료가 발굴되고 한국근대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홍범도에 관한 연구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1) 남 한 남한에서의 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활약상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활발하지 않았으며 심도있는 연구는 별로 없었다. 홍범도의 생애와 이념, 그가 지휘한 부대의 항일무장투쟁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였고 특히 홍범도 부대가 큰 역할을 한 청산리 전투에서는 그러한 사실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김좌진(金左鎭)·이범석(李範奭) 등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대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인 것처럼 왜곡되어 언급되고 있었다.4) 그리고 그가 소련에 들어간 이후에 보인 행적---예를 들면 적군(赤軍)과의 연합투쟁이나 러시아 공산당으로의 입당 등---은 의식, 무의식적으로 도외시되었으며 1920∼30년대 제3세계 식민지 피압박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코민테른이나 소비에트 러시아 당국의 국제적 지원과 관련이 있는 홍범도의 무장투쟁과 행적은 거의 실상이 밝혀지지 못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학계의 이데올로기적 편향, 그리고 우리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이 국제혁명 세력과 연계되고 세계사적 배경을 갖고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 학계의 낮은 연구수준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홍범도는 일반인들에게 소련에서와 같이 '혁명가-국제주의자' 나 폭넓은 사상적 편력을 가진 무장투쟁세력의 영도자로서보다는 단순히 투철한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일제와 싸운 의병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홍범도에 대한 이러한 지엽적 인식을 초래한 원인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은 저간의 국내 한국사 연구자들의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무관심과 그릇된 인식, 그리고 홍범도 자신의 기록이 거의 없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즉 홍범도 자신이 '무식한' 사람으로서 대다수 봉건적 유생출신의 지식층 의병장들처럼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는 문집(文集)이나 체계적인 글을 남길 수 없었던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에 당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였던 인사들의 의도적이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왜곡된 증언과 주장이5) 객관적 비판없이 학계에 수용된 현실도 있었던 것이다. 홍범도가 빈궁한 가정출신이며 광산노동자, 포수로 일하다가 의병과 독립군을 일으켜 싸웠던 걸출한 무장이었다는 점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요인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북한지방에서 출생하여 주로 북쪽지방에서 투쟁하였다는 점과 말년을 소련에서 보냈다는 사실, 또한 그가 사회주의를 포용하는 자세를 보였다는 점 등은 냉전적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종전의 학계에서 여러가지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6). 국내에서 홍범도 부대의 활약상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시기로서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부터이다. 신용하(愼鏞廈)와 박영석(朴永錫), 송우혜(宋友惠) 등이 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활동에 관한 연구업적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신용하는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큰 활약을 했다고 주장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7) 그 후에도 홍범도 부대의 의병투쟁과 독립군 전투 등을 상세히 규명하여 홍범도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8) 박영석도 홍범도 개인의 활동에 관한 논문과 글을 몇 편 썼으며9) 송우혜(宋友惠)도 기존의 일부 인사들에 의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며 일정한 부분에서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10). 대체로 이들은 홍범도를 투철한 민족애를 지닌 전형적 민족주의자로 이해하고 있다. 주로 위에서 언급한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홍범도의 생애와 그가 지휘한 부대의 활동상은 어느 정도 상세히 밝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운동 주체측의 자료가 거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실증적 연구라는 측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홍범도(부대)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많은 미해결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홍범도 자신과 그의 부대 구성원들의 항일무장투쟁의 투신 계기, 무장투쟁의 전략과 전술, 민족해방운동의 논리, 이념과 조국관, 민족주의 계열 및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자들에 대한 태도, 또 무장투쟁에 있어 인적 물적 기반이 되었고 투쟁의 주체였던 국내외 한인 대중과의 관계,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국가의 정체(政體), 그리고 투쟁시 동맹하려 했거나, 지원을 기대했던 운동세력 등을 밝혀야 할 과제를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부대 구성원들의 출신 배경과 계급적 성격, 지도부와 하층 참여층의 지향하는 목표는 동일했으며 계급적 이해관계는 일치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홍범도의 독립군 편성과 국내로의 진입작전은 1910년대 말기 연해주 지역의 복잡한 국제정세, 즉 러시아에서의 10월혁명과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 간섭군의 출동, 그리고 이에 편승한 일본제국주의의 재노(在露) 한인에 대한 대대적 탄압, 또한 약소 민족의 민족해방투쟁과 연계되지않을 수 없는 노농(勞農)러시아 당국의 한인 무장세력에 대한 정책 등을 도외시한채로 설명될 수 없다. 즉 이러한 국제적 정세와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체계적으로 구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종래 국내 학자들의 연구는 이와 같은 구조적, 포괄적 시야에서의 고찰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었고 그 결과 민족해방운동의 국제적 배경이 간과되거나 홍범도(부대원)의 투철한 애국심과 불굴의 의지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료부족에서 기인된 요소가 크다고 여겨지지만,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반봉건(反封建)투쟁적 성격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열거한 많은 문제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것 이다. (2) 북 한 홍범도는 의병활동 기간에는 주로 함경도 지방에서 투쟁하였으므로 이 곳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방에는 아직도 그에 관한 설화나 민요, 전승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11) 때문에 북한을 홍범도(부대)의 활동을 연구하기에 가장 알맞은 지역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연구는 예상보다 활발하지는 않은 듯하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에 관한 연구논문이 가장 일찍 나온 곳이 바로 북한이었다.12) 그런데 1960년대 중반이후에는 전문적 연구업적이 눈에 띄지 않고 다만 개설서나 대중보급용 역사서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이른바 '주체사관'의 영향이 아닌가 판단되지만 정확한 원인을 지적할 수는 없다. 이제 북한의 단행본을 중심으로 한 연구서에 홍범도(부대)의 활동상이 어떻게 서술 평가되고 있는지 검토해 보기로 한다. 북한의 연구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최근에 남한에서 의병운동을 '의병전쟁'으로 개념화하고 있는 데 대하여 '의병 투쟁'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과학원 역사연구소가 1958년에 간행한《조선통사(하)》에는 홍범도 부대의 활동이 '반일의병투쟁의 전국적 앙양' 이라는 소절(小節)에서 언급되고있으나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을 발췌해보면 아래와 같다. 그 중에서도 홍범도, 차도선이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후치령을 근거지로 하여 이를 넘나드는 일본인 장교와 영림창 관리배들을 저격하여 수많은 적들을 소탕하였고 11월 25일에는 북청수비대를 맞이하여 이에 섬멸적 타격을 가하는 한편 12월에는 삼수성을 점령하고 일제토벌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1908년 1월에는 적의 군대, 헌병, 경찰관으로 되는 소위 연합토벌대의 삼수공격에 앞서 동 의병부대는 적의 '토벌대'의 포위를 교묘하게 벗어나 갑산을 습격하여 적의 우편국과 경찰서를 소탕하는 등 적과의 전투에서 상승부대로서의 위명을 떨치였다.13) 약간 과장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실에 가까운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 시기 의병투쟁의 실패원인과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였다. 이에 따르면 실패원인은 첫째, 개별적 지방들에서 분산적으로 진행되는 혁명적 투쟁을 통일적으로 조직 지도하는 혁명적 당, 즉 지도자를 가지지 못한 데 있었고 둘째, 양반유생과 군관출신 등 의병부대 지도층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지도부에서 인민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투쟁구호를 제때에 제시하여 광범한 계층을 투쟁에 적극 동원하지 못했으며 셋째, 적과의 역량대비에 있어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국제적으로나 국내 통치계급으로부터 하등의 지원도 없이 순수한 인민 자신의 힘으로써 전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4). 이 책은 이와 같이 그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의병투쟁의 의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즉 "이 투쟁을 통하여 선조들이 남긴 애국적 전통을 옳게 계승 발전시켰으며 우리의 용감성과 불굴의 투쟁성 그리고 조국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15)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주목되는 부분은 이 시기의 반일 의병운동을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 적 투쟁의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범도 의병부대에 관해서는 홍범도의 평민 의병장적 출신배경을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의병투쟁의 종합적 평가와 의미부여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며 기본적으로 위의 평가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조선통사》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운동에 대해서는 별로 비중을 두고 언급하지 있지 않다. 다만 그 약점에 대해서만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그 내용은 독립군운동이 비록 무장투쟁형태이기는 하였지만, 전략전술에 있어 조직적인 무장투쟁으로 되지 못하였고 또 노동자, 농민 등 각계 각층 인민의 혁명적 요구를 들고 광범한 인민대중의 혁명역량을 조직동원하는 대신에 몇몇 소수 민족주의자들의 분산적인 그룹조직으로 개별적인 테러전술에 가까운 투쟁형태를 취하였으며, 지방 할거주의적인 파벌대립과 갈등을 조성하였다고 혹평하고 있다.16) 따라서 이 책에서는 남한에서 높이 평가하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관한 서술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홍범도 부대 등의 독립군 조직이나 활동에 대한 서술도 일체 없다. 1961년에 역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편찬한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는 의병투쟁을 언급하면서 부분적으로 홍범도 의병부대를 서술하였다. 여기에서는 특히 홍범도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 책에서의 서술을 옮겨보자. 특히 홍범도(1868∼1943) 의병부대는 홍범도 자신이 갑산 고진동 광산노동자 출신으로 그 대오의 대부분이 엽사와 광산노동자로 구성된 점에서 의병투쟁사에서 이채를 띠고 있다. 그들은 1907년에'보국안민'의 슬로건 하에 기병한 후 동년 말 북청 후치령에서 일본 '토벌대' 관부산 부대를 전멸시킨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수 회의 전투에서 적을 전멸시켜 용맹을 날리고 침략자를 전율시켰다.17) 《조선근대혁명운동사》는 의병투쟁을 기본적으로 '부르죠아 민족운동' 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반제반봉건 투쟁으로 보고 있는 점은 《조선통사》와 같다. 의병운동의 실패원인과 의의에 대한 평가는 《조선평가》와 유사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우선 의병투쟁의 실패원인으로 토지혁명의 슬로건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제반봉건 투쟁이면서도 반봉건적 투쟁내용이 심화 확대하지 못했다고 지적하였고 또 의병부대 지도부와 기본 대중의 사상적 통일과 계급적 이해관계의 공통점이 없어 장병일치가 실현될 수 없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의의에 대해서는 일제의 조선강점정책을 1년정도 연기시켰다는 사실을 새로 추가하고 있어 주목된다.18) 《조선근대혁명운동사》는 그 이전 시기에 발간된 《조선통사》와는 달리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부대의 갑산, 혜산 등지의 습격작전과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간략히 서술하였다.19)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징적인 현상은 청산리 전투에 관한 기술에서 김좌진이나 북로군정서 등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남한과는 정반대로 홍범도 부대 단독 으로 수행한 전투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서술의 배경에는 홍범도와 김좌진의 계급적 출신배경, 그리고 활동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보였던 태도 등과 관련되지 않을까 짐작된다. 이 책의 독립군 운동에 대한 시각은 자못 부정적이다. 즉 애국적이기는 하지만 과거지향적이고 좁은 시야의 민족주의 사상에 의해서 지도되었기 때문에 독립군 운동은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고 파벌투쟁에 의해 상호대립하고 배척하여 독립운동을 분열시킴으로써 독립군의 세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1930년대에 일제에 투항하거나 항일 빨치산 투쟁에 합류하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20) 결국 이 책에 의하면 홍범도 부대는 대표적 독립군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많은 한계를 가진 무장세력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오길보는 홍범도 의병부대가 상이한 계급들로 구성되었지만 주력은 수렵과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빈한한 최하층 인민들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대상은 일제와 친일 주구, 의병들의 투쟁을 방해하는 개별적 지방봉건 세력이라고 하였으며 이들 의병부대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부대가 민족주의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의병투쟁의 혁명적 민주주의 강령을 가질수 없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홍범도 의병부대가 반일투쟁으로 '원수'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나 결국에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로 귀결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21) 최하층 빈민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어떻게 해서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않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반봉건(反封建) 투쟁적 성격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판단된다. 1962년 평양의 과학원출판사에서 간행한 《조선명인》이라는 책에 홍범도가 소개되어 있다는 글을 보았지만22)그 내용을 직접 조사하지는 못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87년에 《조선통사》하편 개정판을 출판한 것으로 알고있으나 1958년 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1979년에서 1982년까지 3년에 걸쳐 33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간해된 《조선전사》의 근대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전사》는 북한의 한국사 연구의 총결산과 체계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근대편은 3권으로 되어있는데 1980년에 출판되었고 제13권부터 15권까지이다. 홍범도 부대의 활동상은 근대 2∼3권에 부분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조선전사》 제14권(근대 2)은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약상을 비교적 큰 비중으로 취급하였다. 즉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약도를 한페이지 전체에 그려 넣고 약 한 페이지 절반가량의 분량으로 서술한 것이다. 주요 논점은 홍범도가 근로인민출신의 의병장이라는 점, 또한 1908년 이후의 의병투쟁을 가장 두드러지게 장식한 것이 바로 홍범도가 지휘하는 의병대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을 아래와 같이 높이 평가하여 서술하였다. 로동자 출신의 의병장인 홍범도는 인민들의 지지성원 속에서 의병대를 지휘하여 수많은 일제침략군과 그 주구들을 소탕하였으며 삼수, 갑산 일대는 물론 압록강, 두만강 안팎의 넓은 지대의 광범한 인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함경남북도의 넓은 지역에서 투쟁을 벌리던 이 의병대는 적들의 《토벌》공세가 극심해지는 조건에서 1910년 가을 압록강을 건너갔으며 그 후에도 계속 일제를 반대하는 치렬한 투쟁을 벌리였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의병대의 활동은 1910년을 전후한 시기 일제의 조선 강점책동을 반대한 우리 인민의 투쟁사를 빛나게 아로새긴 의의있는 투쟁이였다.23) 이 책도 그전에 나온 책들과 마찬가지로 의병투쟁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비슷하다. 예를 들면 "평민출신의 의병장들도 비록 견결히 싸우기는 하였으나 일제 침략자들을 타승하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정확한 방침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24)고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홍범도 의병부대에 대한 서술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의병운동의 의의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의 부르죠아 민족운동을 전민족적 규모의 반침략반봉건적 투쟁으로 벌어지게 하였다."25)고 평가하여 의병운동을 여전히 부르죠아운동으로 보고 있다. 《조선전사》는 1920년대 초반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즉 청산리 전투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며 투쟁의 주체인 독립군 부대의 명칭과 지휘관의 이름을 일체 명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가 큰 역할을 한 봉오동전투에 대해서는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이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홍범도와 김좌진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추정된다. 봉오동 전투에 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적들의 기도를 알아차린 홍범도의 독립군 부대는 《북로군정서》에 속하여 있던 다른 부대들과 련합하여 1920년 6월 4일 봉오골에 기여든 일제침량군의 일부를 유리한 지점으로 유인하여 호된 불벼락을 안기였다. 홍범도의 지휘밑에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일제침략군 120명을 살상하였다.26) 봉오동전투를 북로군정서 부대와의 연합전투로 서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또 청산리 전투에 대해서는 일제침량군을 유리한 지점에서 소탕하기 위하여 화룡방향으로 이동하던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 화룡현 청산리에서 불의에 적들과 맞다들게 되였다. 그리하여 이날 독립군과 일제침략군 사이에 청산리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을 발견한 일제침략군은 청산리를 3면으로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히면서 공격하여 왔다. 독립군 부대들은 적들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들은 용감히 싸워 련대장을 포함한 10여명의 장교들과 수백명의 일제침략군놈들을 격멸소탕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홍범도를 반일무장투쟁 방법론상의 한 조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초기에 소수의 무장성원으로 대오를 조직하고 부단히 적을 습격하는 과정에 무장대오를 확대하여 일제와의《결전》을 하자는 것이였다. 이러한 방도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은 홍범도 등이였다.”28)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전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활동에 관해서는 다른 독립군 부대와 달리 비교적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전체 부르조아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흑하사변을 계기로 독립군 운동이 전면적인 와해과정에 들어간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요원인은 독립군이 자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며 대변하는 민족주의 군대로서 광범한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자산계급 출신 지휘관과 노동자, 농민 출신의 병사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없었으며 상부와 하부 사이에 굳은 단결을 이룩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였다.29) 물론 이같은 평가는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일반에 대한 총제적 평가라고 여겨지지만 홍범도 부대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위에서 살펴 본 북한의 여러 연구성과들을 종합해 보면 홍범도 및 그의 부대의 활동에 관한 서술과 평가가 양면성을 띠고 있는 현실을 간파할 수 있다. 즉 의병운동과 독립군의 무장투쟁 전반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의 일반화된 평가와 이러한 경향과는 약간 구별이 되는 홍범도 부대에 관한 독립적, 개별적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물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범도 부대의 활동은 일반적 의병부대나 독립군 부대와 같이 일반화되어 그 한계가 지적되고 있다. (3) 중국 연변지역 한편 중국,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는 연변지방에서도 1980년대부터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면서 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활약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홍범도에 관한 전문적 연구논문은 80년대 중반까지는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대개 단행본에서 상당한 비중을 두고 서술되고 있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비교적 빠른 시기인 1982년 심양(瀋陽)에서 출판된 《조선족백년사화》제1집, 그리고 1984년에 연길(延吉)에서 나온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 1986년에 간행된 조선족의 대표적 정사라고 할 수 있는 《조선족략사》, 또한 1988년에 간행된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 및 《연변역사사건(延邊歷史事件) 당사인물록(黨史人物錄)(중문)》, 《조선족혁명투쟁사》 등에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모두 자랑스럽게 언급되고 있다. 특히《연변당사 사건과 인물》에 는 책제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봉오동 전투는 물론 홍범도 개인의 약전이 실려있고 청산리 전투가 '청산리 섬멸전' 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채롭다.30) 중국공산당 내부자료인《연변역사사건 당사인물록》에도 봉오동 전투는 상당한 분량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청산리 전투가 '청산리 전역(戰役)' 이란 개념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31) 또 한족(漢族)출신의 중국인 양소전(楊昭全)이 1988년에 간행한 《중조관계사론문집(中朝關係史論文集)(중문(中文))》에도 봉오동, 청산리전투가 설명되고 있는데, 주목되는 것은 홍범도를 민족주의계열 인물로 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거나 그것에 관대한 자세를 보였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인 조선혁명군의 양세봉(梁世鳳), 박대호(朴大浩), 최윤구(崔允龜) 등과 같이 분류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32) 이상에서 밝힌 책들은 대부분 청산리 전투를 홍범도 부대와 북로군정서, 최진동부대 등이 연합해서 싸운 전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에서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김좌진이나 이범석 등의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연변지역에서 발간되는 단행본들은 3·1운동 이후 중국 동북에서 전개된 민족주의계 독립군들의 운동에 대해서 그 한계를 언급하면서도 반일 무장투쟁 그 자체는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 연구자는 아래와 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침략군의 《경신년대토벌》을 맞받아 싸운 조선족인민들의 반일무장투쟁은 일제와 봉건군벌정부의 반동통치를 힘있게 타격하였고 전국 각민족 인민들의 반제반봉건투쟁을 진일보 앙양시켰다. 이번 전투에서 조선족반일무장대오들의 소수의 병력과 락후한 장비로 강대한 일본침략군과 싸워 이길 수 있은 원인은 주요하게는 전체 관병들이 강렬한 적개심을 품고 왕성한 사기로 영용완강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광범한 군중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그 다음으로는 조선족 반일무장대오가 기민하고 령활한 전략전술을 채용하였기 때문이었다33). 위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청산리 전투 등 무장투쟁을 단순한 반일투쟁으로서만이 아니라 반제반봉건투쟁의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남한학계에서는 주목하고 있지 않은 부분으로서 앞으로 실증적으로 재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동북이나 연변에서 간행된 단행본들을 검토할 때 우리의 우리의 관심을 끄는 또하나의 문제는 남한에서의 대부분의 연구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독립군 부대들의 시베리아로의 이동을 긍정적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연변학계에서는 독립군의 시베리아 지방으로의 이동과 소련 적군에 의한 무장해제, 그리고 그 이후의 적군으로의 편성을 무장독립투쟁에 있어서의 결정적 타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남한 학계와는 달리 그것을 오히려 사회주의 운동의 수용과 발전의 계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1919년부터 1920년에 이르는 기간에 조선족 인민들은 적아쌍방의 역량차가 너무 현저하고 또한 역사적 조건의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본지방에서 투쟁을 견지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시베리아로 전이해 가서 소련의 홍색유격대와 함께 싸웠다. 그들은 그곳에서 시베리아의 백비군을 숙청하며 일본침략군을 물리치는데서 공헌하였다. 동시에 시베리아로 전이해 간 조선족 중의 선진적 지식인들은 러시아 10월사회주의혁명의 영향하에 맑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혁명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하였으며 아울러 조선족 거주지구에 맑스---레닌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족 거주지구의 혁명투쟁은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34) 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은 인식의 차이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사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의 현재적 당파성의 반영에 다름아니다. 연변에서의 홍범도에 관한 대표적 연구업적으로는 한중광(韓俊光)의 <간도(墾島)에서의 홍범도(洪範圖)장군>이란 논문을 꼽을 수 있다.35) 한준광은 이 논문에서 홍범도가 조선의 걸출한 반일 명장일 뿐만 아니라 가장 일찍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 들인 애국장령이며 홍범도의 일생은 "민족독립활동가로부터 사회주의자로 성장하고 전변한 혁명적 일생이며 끝까지 민족절개와 계급절개를 훌륭히 지켜온 조선애국자의 본보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36) 고 주장하였다. 홍범도를 시종일관하게 민족주의자로 보고 있는 남한학계와는 매우 다른 주장인 것이다. 한준광은 더 나아가서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의 성원들이 간도지방에서 맑스주의 학설을 제일 먼저 수용하고 전파했다고 보고 있다.37) 이에 대한 시비문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우선 그의 주장을 더 상세히 살펴보자. 한준광은 홍범도가 1919년 12월에 "중노연합선전부(中露聯合宣傳部)" 에 참가하여 간도 선전지부집행군무사령관(宣傳支部執行軍務司令官)의 직책을 맡았는데 이 직책은 간도지방과 중소국경일대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무력으로써 반동부호(反動富豪)들의 재산을 분배하고 친일주구를 소탕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늦어도 이 때부터는 공산당 기관의 외위(外圍)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38) 한준광의 이러한 주장은 연변지역에서 발간되는 다른 단행본이나 연구논문에서는 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연변학계에서도 홍범도가 만년에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하는 사실은 알려져 있으나 1920년 전후 시기의 그를 전형적인 사회주의자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39)또 한준광과는 반대로 홍범도가 간도지방에서 활동할 때는 아직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하는 설도 있다. 어쨌든 연변학계에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연변에서 홍범도 연구의 권위자는 강용권(姜龍權)인데 그가 저술한 홍범도 전기가 완성되어 곧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40)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내외를 통틀어 연변지역에서 가장 먼저 홍범도에 관한 전기-단행본을 발간하는 셈이 된다. 청산리 전투에 대해서 한준광은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공동으로 일본군과 싸운 전투라고 보고 있다. 한준광은 청산리 전투 가운데에서 적에게 손실을 가장 많이 준 전투가 김좌진이 지휘한 백운평(白雲坪)전투, 홍범도가 지휘한 완루구(完樓溝) 전투라고 했으며 두사람이 지휘한 부대의 공동전투가 어랑촌(漁郞村) 전투라고 주장했다.41) 연변에서의 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활약상에 대한 연구는 남한 못지 않게 활발하며 오히려 더 적극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남한 학계와 차이가 나는 점은 3·1운동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무대를 국외, 특히 중국지역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홍범도 등의 무장투쟁이 중시되며 국내의 우익 민족운동은 전반적으로 민족개량주의 운동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42) 그리고 1920년대 민족주의계열 운동단체의 역사적 진보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성도 엄격히 지적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43) 그러나 연변에서의 연구는 몇가지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실예(實例)를 들면 대개의 개설서들이 독립군 부대들을 '반일무장대(오)'나 '반일부대'로, 독립운동단체들을 '반일 단체'로, 그리고 무장독립운동을 '반일부장운동 또는 반일무장투쟁' 등으로 표현하고 있어 '독립' 운동이나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재중 '조선족'의 민족운동을 어디까지나 중국내 소수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간주하려는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44) (4) 일 본 일본에서의 홍범도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으나 강덕상(姜德相)이 1978년 《계간 삼천리(季刊 三千里)》지 제14호에 기고한 <의병장(義兵將)·홍범도(洪範圖)의 생애(生涯)(일문(日文))>라는 글이 비교적 돋보이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45) 강덕상은 이 글에서 홍범도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투철한 애국심, 진솔한 인간성을 심층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일본군측의 '토벌'기록을 자료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이 밖에 김정미(金靜美)가 1984년 발간된 《조선민족운동사연구(朝鮮民族運動史硏究)》 제1호에 간략한 전기를 게재하였으나 분량의 제한으로 충분치 않다. 일본에서의 홍범도 연구는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즉 풍부한 일제 관헌측 자료를 잘 활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러시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상당수 있어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전후한 시기 연해주에서의 한인 민족운동과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후의 재소 한인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고 전문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데46) 그러한 연구성과들을 원용(援用)할 수 있다는 좋은 여건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앞으로의 연구성과가 기대된다고 하겠다. (5) 소련 소련, 그중에서도 특히 중앙아시아 지방은 홍범도가 만년을 보낸 곳이므로 그에 관한 많은 자료와 증인, 증언들이 남아 있을 수 있어 홍범도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데 중심지가 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본격적인 연구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전문적 연구자가 별로 없는 현실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추정된다. 192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10월혁명 10주년을 맞이하여 《10월혁명과 쏘베트 고려민족》이라는 109쪽 분량의 소책자가 발간되었다. 이 책은 한인들이 연해주에서 쏘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해 어떻게 싸웠는가 그리고 1927년 당시 그곳의 한인사회가 어떠했는지 밝힌 책이었다고 한다.47) 이 책은 연해주에서 처음으로 나온 한국어 자료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책의 제목을 보면 홍범도와 그의 부대의 활동상에 관해 서술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다. 한인에 의한 최초의 체계적인 재소한인 역사서는 1965년에 김승화가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서 발간한 《소비에트 한인들의 역사에 대한 소고》라고 할 수 있다.48) 김승화는 이 책에서 1860년대의 이주초기로부터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전까지의 시기를 주로 다루었다. 그는 여기에서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을 위해 투쟁한 한인들의 활동을 큰 비중으로 서술하였는데 홍범도 부대의 활동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간단히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과 방위에 한인들이 어느정도 공헌했고 당시 한인들이 소련 당국의 ‘훌륭한’ 정책에 충실히 순응하여 만족스럽게 살고 있으며 또한 사회주의의 종주국인 그들의 조국 소련에 얼마나 충성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약간의 비판적 안목으로 검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1979년 김 마뜨웨이 찌모페예워츠가 모스크바에서 출간한 《원동(遠東)에서 소비에트 주권을 위하여 투쟁한 조선인 국제주의자들(1918∼1922)》에는 홍범도의 간략한 전기가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72명의 한인 혁명가들을 서술하였는데 홍범도는 이동휘(李東輝), A. P.김에 이어 세 번째 순서로 언급되고 있으며 서술분량은 약 8페이지로서 역시 이동휘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49) 이 책의 홍범도에 관한 서술은 분량도 많지 않고 내용도 재검토 되어야 할 부분도 있으나 필자가 아는 범위안에서는 소련에서 나온 홍범도 관련 전기로는 가장 짜임새있는 글이라고 판단된다.50) 여기에서의 서술을 보면 의병투쟁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밝히고 있지만 1920년에 전개했던 봉오동(鳳梧洞),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아서 남한에서의 연구와 뚜렷이 대조가 되고 있다. 그리고 홍범도를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투신한 국제주의자와 혁명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김세일이 1959년부터 1965년까지 《레닌기치》에 홍범도에 관한 소설을 연재하였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한편 국내외를 포괄하여 최초로 1988년 12월 모스크바 소련과학원 동방학연구소에서 홍범도 탄생 120주년기념 학술발표회가 개최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즉《레닌기치》1988년 12월 27일자에 따르면 이 발표회는 한인계 학자들과 소련의 한국학 학자들, 또 홍범도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참가했다고 하는데 이때 모스크바대학교 박 미하일교수의 주제발표와 꼰쩨위츠(동방학연구소)의 <아부지와 홍범도 : 문금동의 실화기록> 소개 등이 행해졌고 김천수(전 교사) 및 송진파(《레닌기치》전 주필)의 회상, 그리고 유리 와닌(동방학연구소 아시아 사회주의국가 조선 문제연구부장)의 총설(總說)등이 있었다는 것이다51).
지금까지 국내외 각지에서의 홍범도(부대)에 대한 연구현황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각지에서의 홍범도에 관한 연구는 크게 보아 자료의 부족과 각지에서 수집 고찰하는 제한된 자료 자체의 내용의 차이, 그리고 연구자들의 시각의 상이함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남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문제는 홍범도 연구에 있어서의 다양한 논점의 차이를 야기하는 몇 가지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홍범도 및 그가 이끌었던 부대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수행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가 가능한 한 진실에 근접한 사료를 폭넓게 발굴, 정리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통감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새로 발굴된 <홍범도 일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3. <홍범도 일지>의 작성 및 국내 전파경위 약 2년전까지만 해도 국내학계에 홍범도 자신의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일본측의 관헌문서나 외무성, 육해군성 문서 등을 정리한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조선편(朝鮮編))》라는 자료집에 홍범도의 명의로 발표된 포고문이나 경고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국내에서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그의 참모들이 도움을 주어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자신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쓴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그가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활동을 문자로서 남겼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홍범도 자신은 비록 체계적인 학교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의사를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은 습득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행적을 진술한 최초의 기록은 1930년대 전반 연해주지방에 있을 때 써서 소련 당국에 제출했다고 여겨지는 자필(自筆)이력서와 자서전이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들 문서의 원본은 극동국립중앙문서보관소와 중앙아시아의 톰스크에 보관되어 있으며 사본이 크즐-오르다시의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52) 홍범도 스스로가 집필한 기록은 위의 종류 외에도 중앙아시아의 한인들 사이에서 <홍범도 일지>로 불리우던 것이 있었다. 이는 홍범도가 자신의 생애를 회상하며 정리한 회고록적 성격을 띠는 내용의 것인데 <일지>로 잘못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지>는 재소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뒤의 시기인 1941년 후반기에서 1942년 전반기에 걸친 어느 때에 홍범도가 희곡작가 태장춘의 권유를 받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53)<일지>는 앞의 이력서나 자서전 보다 훨씬 분량이 많고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史料的 價値)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력서와 자서전은 공산당 당국에 제출되었던 것이지만 <일지>는 주로 한인 대중을 의식하고 씌어진 것이므로 양자는 각각 집필목적과 동기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엄격한 비판을 거쳐서 상호 비교하며 대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홍범도가 의식적으로 자기의 생애를 과장해서 기록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내용에 약간 차이가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작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약 5∼10년 내외라는 집필시기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요소가 큰 것으로 보인다. <일지>의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는 1937년 9월 초순에 연해주를 떠나 그해 10월경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침껜트주 잔아릐크촌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홍범도는 이듬해 4월 초에 크즐--오르다로 다시이주하였는데 그 직후에 1929년부터 받기 시작한 연금을 다시 받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54) 홍범도의 생활은 물론 연금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었고 오히려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크즐--오르다의 조선극장에서 총연출가겸 희곡작가로 일하던 태장춘의 도움을 받아 극장의 수위장을 맡아 보게 되었다. 홍범도는 이를 계기로 매월 80루블의 연금 외에 따로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제법 넉넉한 정도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또한 연극을 구경하며 노년을 여유있게 지내게 되었고 태장춘과 비교적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55) 그런데 1941년 6월 독소전쟁(獨蘇戰爭)이 일어나게 되면서 소련 내에서는 전쟁을 지원하는 일이 온 국민의 지상과제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재소한인의 대표적 문화단체라 할 수 있는 조선극장도 독소전쟁과 관련된 연극을 공연하여 재소한인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민중들에게 항전의지를 고취하고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로 있는 조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생생히 묘사하여 재소한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하며 민족적 동질성을 제고(提高)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태장춘은 자기와 친분이 있는 홍범도를 지켜보면서 적대국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과의 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의 공연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배경에서 태장춘은 항일무장투쟁의 원훈(元勳)인 홍범도에게 그의 생애와 투쟁 사실을 직접 집필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연극을 공연하면 어떻겠느냐고 권하게 되었다. 홍범도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태장춘의 강력한 권유와 당시의 전쟁무드에 힘입어 자기의 간난한 생애를 회고하며 <일기>를 쓰게 되었던 것으로 전한다.56) 홍범도가 그동안 틈틈이 기록, 보관해오던 단편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손수 쓴 <일지>는 곧바로 태장춘이 완성한 희곡 <홍범도>의 대본이 되었고57) 또 후일《레닌기치》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 《홍범도》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일지>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당일 일어났던 사건을 그때 그때 기록한 일지(日誌)나 일기(日記)적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시기에 과거의 행적을 되돌아 본 회고록적 성격을 띠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명칭을 <홍범도 회고록(回顧錄)> 또는 <홍범도 회상록(回想錄)>으로 고쳐 불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홍범도가 쓴 <일지>의 원본은 김세일에 의해 장편소설 <홍범도>가 탈고된 뒤인 1965년을 전후한 시기에 애석하게도 소실(消失)되고 말았다. 즉 태장춘 아니면 홍범도의 상의(上衣) 호주머니에 든 <일지>를 태장춘의 부인 이함덕(인민여배우) 혹은 홍범도의 부인 이인복 여사가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빨래를 함으로써 원본이 물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58) 이렇게 해서 <일지>원본은 없어졌지만 무척 다행스럽게도 이함덕이 1958년에 <일지>를 손으로 베껴 쓴 등사본(騰寫本)이 남아 있어서 홍범도의 생애와 행적을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함덕이 등사한 <일지>는 이인섭(李仁燮)59)에게 전해졌는데 다시 이 등사본 <일지>가 교포작가 김세일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즉 1959년 여름 재소 한인의 혁명운동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이인섭이 홍범도 전기의 집필을 부탁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는 김세일을 방문하면서 등사본 <일지>를 전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세일은 이인섭을 통해 <일지>뿐만 아니라 의병투쟁 및 여러 민족운동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의 각종 수기나 회상기, 기타 사료들을 전해 받게 되었다. 김세일은 이인섭으로부터 전달 받은 여러 자료들을 기초로 교포신문 《레닌기치》에 소설 <홍범도>를 1959년부터 1965년까지 연재하여 교포들의 많은 성원과 격려를 받았다. 홍범도가 쓴 <일지>의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게된 주요한 계기는 고송무(高松茂)의 소련방문이었다. 고송무는 1989년 5월 23∼26일 사이에 소련 과학원 동방학연구소 초청으로 모스크바와 중앙아시아를 여행하였다. 이 때 그가 모스크바에서 김세일의 집을 들렸는데 소련에서 단행본을 출판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김세일이 국내에서의 출판을 조건으로 《레닌기치》에 연재했던 소설 <홍범도>의 수정가필본과 기타 홍범도 관계자료를 고송무에게 넘겨 준 것이었다.60) 이 과정에서 김세일은 이함덕이 쓴 <일지>를 1989년 중반경 다시 등초하여 그것을 고송무에게 함께 주었다. 김세일이 왜 다시 등사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김세일이 소설을 쓰면서 다시 정서하지 않았나 생각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갖고 있던 원본(이함덕의 필사본)의 제공을 주저하여 베낀 것을 고송무에게 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경과를 거쳐 결국 1990년 11월 국내에서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제4. 5권이 출판되면서 부록으로 <일지>의 내용이 영인(影印)게재되어 비로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4. <홍범도 일지>의 체재(體裁)와 구성(構成) 국내에 입수된 등사본 <일지> 영인본은 국판(菊版)(가로15, 세로21cm가량)정도의 노트에 손으로 빽빽히 쓴 것으로서 29페이지 분량이다. 이를 200자 원고지 매수로 환산하면 약 112매 내외가 된다. 이 <일지>는 홍범도가 쓴 것을 이함덕이 베껴쓰고 다시 김세일이 옮겨 쓴 것이니 전사(轉寫)과정에서 오자(誤字)나 탈자(脫字)가 있을 수 있고 또 베껴 쓴 사람들의 주관(主觀)이 작용하여 첨삭(添削)을 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일지>의 맨 마지막에는 두사람의 ‘그대로 등사한 것’임을 강조하는 문구가 있고 이함덕과 김세일의 친필 싸인도 있어 나름대로 충실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 두사람의 서명과 부기(附記)를 빼면 <일지>의 실제내용은 28페이지 반(200자 원고지 매수로는 약 108매 가량)의 분량이 된다.61) <일지>는 순한글로 기록되어 있고 한자(漢字)나 외국문 철자는 일체 없다. <일지>를 기록한 홍범도 자신이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지>를 검토해 보면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많이 눈에 띄고 함경도 지방의 방언이나 속어, 틀린용어나 한자어 등도 상당수 발견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런 점이 이 자료가 갖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서투르나마 사실을 그대로 고백해나간 흔적이 엿보이는 것이다. <일지>에서 홍범도의 유년과 청장년기를 서술하고 있는 분량은 단지 한 페이지를 약간 넘고 있다. 이는 전체 분량의 3.5% 비중이다. 그러나 홍범도의 의병항쟁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약12페이지 반으로서 전체의 43.9%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재기도모시기의 비중은 3페이지 반으로 전체의 12.3% 정도, 가장 중요한 시기인 간도에서의 독립전쟁기는 5페이지 절반 분량으로 19.3% 이다. 소련에 온 이후의 만년에 해당하는 시기의 비중은 약 6페이지로서 거의 21%의 비중이다. 이와 같이 <일지>의 집필 비중을 분석해 보면 분량이 가장 많은 부분이 의병투쟁시기로서 전체의 절반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이 집필시기와 가까운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서의 만년기, 그 뒤를 이어서 노년기 분량에 거의 필적하는 비슷한 분량의 간도에서의 독립전쟁 전개 시기이다. 결국 우리는 홍범도가 의병투쟁에 관한 부분을 가장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회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을 초래한 배경에는 어쩌면 태장춘의 요구가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궁극적으로 만년의 홍범도가 자신의 생애 가운데 자신있게 확실히 기억하고 있던 시기는 의병투쟁 시기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국내 진입작전과 간도에서의 무장투쟁 비중이 의병투쟁기보다 작은 이유는 투쟁전개시기의 장단(長短)이라는 요인(要因)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의병대장으로서 활약했던 시기가 독립군이나 한인 빨치산 대장으로서 활동했던 시기보다 더 길었던 것이다. 또 <일지>를 집필한 시기와 가까운 소련에서의 노년기에 대한 서술 내용이 두번째로 많은 이유는 아무래도 홍범도가 살고 있던 당시와 근접한 때에 일어났던 사건과 행적을 기억하기 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5. <홍범도 일지>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問題) <일지>를 검토해 볼 때 제기 되는 문제를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은 홍범도 생애의 다섯 시기, 그리고 홍범도의 이념과 사상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기로 한다. (1) 홍범도의 유년시절(幼年時節) 및 청장년기(靑壯年期) 홍범도의 탄생연도에 대해서는 1868년설과 1869년설이, 그리고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평안북도 자성, 평안남도 양덕, 평양 등의 여러 설이 있으나 <일지>에는 1868년 평양에서 출생했다고 밝혀져 있다. 또 흔히 홍범도가 평양의 진위대(鎭衛隊)에서 복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지>에는 진위대라 하지 않고 우영(右營) 제일대대라고 밝히고 있다.62) 홍범도는 <일지>의 맨 앞부분에서 자기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868년 고려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하여 모친은 칠일만에 죽고 아버지품에서 여러분의 유즙(젖 : 필자)을 얻어먹고 자라 초 구세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니 남의 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로 고생하면서 십오세가 되므로 나이 두살을 올려 평양 중국의 보단(步段)으로 호병정(胡兵丁) 설(設)할 때 우영(右營) 제 일대대에서 코코수(나팔수:필자)로 사연을 있다가(복무하다가:필자) 사연을 치고 도망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 종이뜨는 지막 제지소(製紙所:필자)에 와서 종이뜨기를 배워 삼년을 뜨다가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병술(丙戌:1886년) 정해(丁亥:1887년)쯤 되었다. 그때 고려나라 동학이 불일 듯 할 때입니다.(필자가 내용을 왜곡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현대 문법으로 원문을 약간 수정하고 한자를 괄호에 집어넣었음 : 이하 일지의 인용문도 동일). 위의 기록에 따르면 홍범도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홉살 때 아버지마저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홍범도가 말하는 '중국의 보단으로 호병정 설할 때'란 어떤 시기를 말하는 것일까? 이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군제(軍制)가 청(淸)의 영향아래 중국식으로 개편되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즉 임오군란 직후 청군이 출동하여 조선에 주둔하게 되면서 조선봉건 정부는 신건친군(新建親軍)이라는 새로운 청식 군제를 시행하였는데 1884년 민응식(閔應植)이 평안감사로 부임한 뒤 감영을 개편하고 훈련방식도 중국식으로 바꾸었으며 종래의 평안감영은 친군서영(親軍西營)으로 개편되었던 것이다.63) 따라서 종래의 대부분의 논문이나 단행본에서 홍범도가 평양 진위대에서 한때 복무했었다고 한 기록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진위대는 1895년 군제개편때 비로소 등장한다. 우리는 위의 짧은 <일지>의 내용을 통해서도 홍범도가 거의 5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황해도 수안군의 총령에서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으로 일했다는 <일지>의 내용도 거의 확인된다고 하겠다. 즉 국내의 한 간행물에 의하면64) 총령은 수안군 천곡면에 있으며 바로 옆의 대오면은 닥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한지(韓紙) 제조업이 성하다고 조사되어 있는 것이다.
홍범도가 신계사에 있으면서 지담대사를 모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왜냐하면 홍범도는 이 시기에 신계사는 물론 근처에 있는 유점사 등 금강산에 있는 사찰의 의병적(義兵的) 전통(傳統)에 접했을 뿐만 아니라 지담대사의 훈도를 받아 의병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지담대사의 속성(俗姓)이 덕수(德水) 이씨(李氏)였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요소를 갖고 있다. 덕수 이씨는 저 유명한 임전왜란 때의 명장 이충무공(이순신(李舜臣))을 배출한 가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지담대사는 비록 속세를 떠나기는 하였지만 홍범도에게 이순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신계사와 깊은 관계가 있고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유점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僧軍) 의병을 일으킨 사명당(四溟堂 : 유정(惟政))이 있었던 절이었고 그곳에는 사명당의 일화와 유품이 남아 있었으며 묘향산 보현사에서 승군 의병을 일으켰던 서산(西山)대사(유정의 스승)의 부도(浮圖)도 세워져 있는 등67) 의병과 관계있는 유서깊은 절이었다. 그리고 신계사는 물론 금강산에 있는 장안사, 표훈사, 원봉사, 고승사 등에도 임진왜란 때의 승군 의병과 관련된 일화나 전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장과정을 주의깊게 고찰해 보면 우리는 홍범도가 '무식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봉기를 주도하여 치열하게 투쟁하고 그 뒤에는 독립군을 조직해서 끈질기게 무력항쟁을 추구했던 배경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홍범도는 신계사에 있을 때 깊이있는 공부는 하지 못했을지라도 간단한 한자나 한글은 깨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68) (2) 홍범도 의병부대의 의병항쟁(義兵抗爭) <일지>의 의병항쟁 관련부분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다. 첫째, 홍범도의 의병항쟁 전개시기의 기점문제(起點問題)가 있다. 그는 <일지>에서 1895년 함경도와 강원도의 접경지역인 철령(鐵嶺)에서 김수협이란 사람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일병(日兵) 12명을 처단하였고 그 뒤 함경도 안변 학포에서 14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석왕사(釋王寺)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석(柳麟錫) 의진(義陳)과 합세, 세번을 같이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고 기술하였다.69)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이가? 이러한 홍범도의 의병봉기 주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인석 의진에 합류해서 같이 싸웠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실제로 유인석 의병부대는 1896년 중반경 강원도의 강릉, 횡성, 인재, 춘천, 화천, 양구, 회양 등을 거쳐서 음력 7월 2일(양력 8월 5일)에 함경도 안변의 영풍(永豊)에 주둔하였고 그 이후에는 평안남도 양덕과 맹상 등지를 거쳐 북상하였던 것이다. 특히 유인석 의병부대가 철령을 넘어 영풍에 주둔할 때 주민들이 점심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등 유인석 의진을 크게 환영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홍범도의 주장이 뒷받침될 수 있는 개연성도 있다.70) 둘째, 종래 대부분의 국내 학자들은 홍범도(의병부대)의 투쟁대상이 주로 일본군과 일진회원(一進會員) 등으로 한정된 것처럼 인식하였고 투쟁의 성격도 주로 반일투쟁, 다시 말하면 반제(反帝)투쟁으로서의 성격만을 강조해온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일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반일투쟁 못지 않게 친일매판적인 관료나 부호, 지주 등에 대한 응징과 군자금 징수, 봉건적 수탈에 대한 반대투쟁 등의 사례가 많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반봉건(反封建) 투쟁과 계급투쟁으로서의 성격을 띠는 투쟁형태가 상당수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된 타격의 대상이 어떤 세력이었고 또 그러한 투쟁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된다. <일지>에 보이는 이같은 사례를 들어보자. 1) "지소주 이놈은 자본가입니다. 삼년 고삯(임금)에서 일곱달 고삯을 못찾고‥‥‥(중략)‥‥‥야간에 그 놈의 집에 뛰어들어 그놈들을 다 죽였습니다."- 1면 2) "덕원읍 좌수로 있는 전성준 놈의 집에 야밤에 달려들어 일본돈 팔천 사백 팔십원을 달래가지고 무달사 어귀에서 전성준 놈을 쏘고‥‥‥"- 2면. 3)"(1907년) 십이월 십사일 삼수성(三水城)을 점령하고 일대(일본제 총) 이백구십사 병(자루)과 탄환 백육십궤(상자)를 빼앗아 가지고‥‥‥삼수부사(三水府使) 유등을 목을 베어 쑥꽂대에 달고(효수하고) 삼수읍 군주사를 죽이고‥‥‥"- 4면 4)"함흥 초리장 유채골 동네에 와 밤에 달려들어 부자놈 아들놈 붙잡아다가 일화(일본돈) 이만 팔천 구백원을 빼앗아 군비에 쓴일이 있습니다."- 8면 5)"28일에 함흥 동고촌 신성리를 앗아가지고 그놈 (박면장)의 맏자식이 함흥 일본놈의 군대에 소대장으로 있더니 제집에 의병들이 재산을 탈취한다는 소문을 듣고‥‥‥일병 왔던 군사가 사분지일이 살지 못하고 회진(回陣)하고 박면장의 식솔은 하나도 남지 않고 구족(九族)이 멸망하였습니다."- 8∼9면. 6)"18일에 홍원읍 앞 전진포(前津浦)의 홍가집에 달려들어 홍원군수 홍가자(홍승규?)를 붙들어 일화 31,000원을 빼앗아가지고 그 날밤으로 함흥 덕산관 함영문 그놈의 집에서 '너는 시 좌수로 있고 또 군주사로 있는 놈이니까‥‥‥ 일화 3십만원을 바치라' 한 즉‥‥‥3만원을 내어 다 주고‥‥‥" -12∼13면 이러한 사례들은 주로 군자금 모집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부호나 관료, 하급관리 등에 대한 투쟁사례에서 보듯이 홍범도 의병부대가 단순히 반일투쟁만을 전개하지 않고 매판적 봉건 세력과 부호층을 주요 타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셋째, 대부분의 기존 연구들은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상을 논하였지만 이 의병부대가 다른 의병부대와는 달리 비교적 오랜 기간을 활동하며 국내외에서 투쟁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던가, 다시 말하면 강한 실질적 전투력을 보유하면서외세와 봉건세력에 큰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투쟁의 전략과 전술, 운동의 논리가 어떠했는가를 심층적으로 해명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지>는 일정한 부분에서나마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일지>는 홍범도 의병부대가 1908년 5∼6월 경을 분기로 하여 투쟁의 전술을 달리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이전은 홍범도 휘하의 비교적 많은 병력이 함께 기동하며 유격전식 전법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이후에는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 공세에 직면하여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어 각지의 주요 근거지를 중심으로 매복전과 기습전을 병행하는 등의 형태로 전술에 변화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홍범도는 <일지> 10면에서 장진 연화산(높이 2,335미터) 병풍바위 밑으로 행군하여 사방에 있는 군대를 불러 모아 놓고 군사정구한 즉 1,864명이고 중대장 11명 소대장 33명으로 고쳐 편성할 때 제일중대장 원창복(일명 원기풍(元基豊)으로 일체측 자료에 나옴)으로 장진 청산령(높이 2,084미터)을 지키고(일본군) 장진 군대가 삼수로 넘나드는 놈을 목잡고 있다가 불시에 쏘고 몸을 피하였다가 경부로 비밀히 군사 먹을 것을 걱정하라고 시키고 제이중대장 최학선(崔學善:일제측 자료에서 이름이 확인된다.)으로 매덕령을 지키고 갑리로 드나드는 놈과 앞에서 지시한 대로 하게 하고, 제삼중대장 박용락으로 안장령을 지키게 하고 함흥 장진으로 넘나드는 놈과 싸우게 하고, 제사중대(장) 조병영으로 조개령을 지키고 삼담(三潭:삼지연?) 단천으로 넘나드는 (일본)놈과 앞에서 지시한대로 하게하고, 제오중대(장) 유기운(劉基云)으로 새일령을 지키고 통피장골 북청을 넘나드는 놈과 (앞대로)좇아 하게하고, 제육중대장 최창의로 (북청) 후치령(높이 1,335미터)을 지키고 앞에서와 같이 하게 하고, 제칠중대장 송상봉(宋相鳳)을 불러서는 부걸령을 지키게 하되‥‥‥남시령을 지키고 길주 갑산으로 드나드는 (일본)놈과 싸우게 하고, 제팔중대장으로 삼수 신파 부근 압록강으로 내려가는 것을 쏘게 하고, 제구중대장으로 (북청의) 통팔령(높이 1,445미터)을 지키고 홍원 북청으로 드나드는 놈과(싸우게 하였다.)‥‥‥그대로만 하면 우리는 성공할 것입니다. 라고 하여새로운 작전계획의 수립을 기록하고 있다. 정세의 변화에 따른 유연한 전술의변화,이것이 홍범도 의병부대가 오랜 기간 생존하며 넓은 지역에서 투쟁할 수 있었던 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다만 위에서 홍범도가 밝힌 의병부대의 숫자 1,864명은 약간 과장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일제측자료의 한 의병 심문조서에는 1908년 5월 말경 홍범도 의병부대의 규모를 650여명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 참고가 된다(물론 이 진술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72) 홍범도 의병부대가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함경도 산간지역 주민들과의 밀접한 연계가 중요한 자산이 되었음을 <일지>는 밝히고 있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는 의병들의 주민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그에 상응한 주민들의 자발적인 협조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즉 <일지> 11면에는 "갑산 간평에 내려와서 귀밀밥을 얻어먹고 모두 취하여 고생하는 중에 길주서 넘어오는 일병 80명과 접전하여‥‥‥전쟁에 죽은 동포의 가솔을 살려 주어야 되겠는데 한가정에 150원씩 분배시키고 도합을 놓으니 116천 898원으로 분배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민들의 의병부대에 대한 지원사례를 보여 주는 것이며 또한 의병들의 주민에 대한 피해보상의 사례를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뒤의 친일 매판적 부호(富豪)나 봉건적 수탈에 앞장선 관리 등의 재산을 몰수하여 의병 관련 주민들에게 분배(활빈-活貧)한 사례는 반봉건(反封建)투쟁과 계급투쟁으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자료 <일지>를 통해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에 대한 실상을 보다 더 상세히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일지>에 보이는 홍범도의 진솔한 고백을 통하여 의병부대의 눈부신 활약에 의한 승전의 경우는 물론이고 일제와 부일배의 연합세력에 의한 참담한 패배상황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홍범도는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전설적 명장으로서 그 명성이 잘 알려져 왔고 또한 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상승군(常勝軍) 으로서의 전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대부분의 국내외 학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거의 대부분의 연구논문이나 단행본에서 홍범도 의병부대는 패배를 모르는 불퇴전(不退戰)의 용맹한 의병부대로서 그려졌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대체로 사실에 가까운 것이지만 과장된 측면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홍범도는 <일지>에서 자기의 화려한 과거만이 아니라 어쩌면 부끄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약간의 비판적 안목을 필요로 하면서도 <일지>의 진실성을 믿게 되고 홍범도가 의병투쟁을 전개하면서 거둔 커다란 전과와 또 한편으로는 그에 못지 않을 수도 있는 피해상황도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보면, 그는 (1908년) 5월 초 2일 구름물령(운파령(雲波嶺)?) 넘어오다가 일병 32명이 오는 것을 목잡고 기다리다가 일시에 쏘아 한놈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이고 총 30개, 군도 두개, 탄환 300개, 단총 네개 빼앗아 가지고 갑산 청지평 싸움에서 의병 11명 죽고 일병 90명을 즉살시켰다.‥‥‥안변 덕원 영풍 등지에서 수십번 전쟁하던 노희태(盧熙泰) 군대 540명과 연합하여 정평 한대골 어구에서 접전하여 일병 190명 잡고 의병 4인이 죽고 한명 팔맞아 중상되어 고생하였다. 라고 하여 빛나는 승전 사실을 기록하였고 시월 초구일에 후치령 말리에서 일병 일천사백명과 전쟁을 하여 일병이 반수 이상이 죽고 우리 의병 김춘진, 황봉준, 리문협, 조강록, 임승조, 임사존 죽고 제 일등 포수들 여섯사람이 죽었습니다. 처음이 되어서 총들을 뿌려던지고 싹 도망하고 한 놈없이 우리 부자(父子)만 남았습니다. ·····갑산읍에 정월 19일 밤중에 달려들어 일본군 109놈 죽이고 상한 놈 38명이었다. 의병 48명이 죽고 또 패진하여 사방으로 헤어진 동무들을 다시 모집하여 가지고‥‥‥약철(탄환)이 없어 일본군과 싸움도 못하고 일본군이 온다고 하면 도망하여 매번 꿩이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73) 라고 하여 의병투쟁에서의 패배사실과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 놓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일지>를 통해 홍범도의 러시아령 연해주로의 망명경위와 그의 부대의 독립군(빨치산)으로의 발전 전환과정을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아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리얼하면서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다. (1908년) 2월 18일 (음력:필자) 일진회 회원조수하는 놈 임재덕,김원홍,최정옥이 소위 귀순시키느라고 일병 103명과 고려 보조원 80명을 데리고 내 처와 내 아들을 잡아가지고 농구 창평리에 들어와서 주둔하고 내처가 지식있는 줄을 알고‥‥‥(중략) 저 악독한 놈들이 발가락 두 사이에다 심지에 불을 달아끼우고 반죽음시켜도 끝내 항복하지 않으므로 갑산읍으로 잡아들여 보내고‥‥‥ ‥‥‥정평 바맥이에서 50명 일병과 싸움하여 101명 잃고 내아들 양순이 죽고 거차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되기가 8명이 되었다. 그 때 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아들 양순이 죽었다.74) 위의 기록은 모두 관련 자료로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일본군은 1908년 5월 12일의 한문서에서 “현재 구류중인 일군 김기학 김좌봉 및 홍범도의 처자(일군(一群) 김기학(金基學) 김좌봉(金佐鳳) 및 홍범도(洪範圖)의 처자(妻子))등은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응하여 마음대로 사용할 것을 허용한다. 단 도망하지 않는 확증이 없는 한 그들을 마음대로 석방하면 안된다.”75)고 지침을 시달하고 있다. 또 간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회장(會長) 구춘선(具春先)이 1920년 8월 17일자로 연길(延吉) 도윤(道尹)에게 보낸 편지에 “홍범도 군은 조국을 위해 헌신적 사업을 기도한 이래 일가(一家)가 모두 왜적의 독수에 죽고 겨우 이 용환(龍煥)군 한 아들이 있을 뿐인데 ‥‥‥”76)라고 하여 홍범도의 가족이 용환이라는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일제의 마수에 희생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3) 홍범도의 만주 연해주(沿海洲)에서의 재기 도모 <일지>에서 홍범도는 종전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러시아로의 망명경위와 1910년대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떠한 방식으로 무장투쟁의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는지 서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이 시기의 그의 행적은 물론 1910년대의 연해주 지방의 정세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을로 판단된다. <일지>에서 주목되는 점은 홍범도가 무기 등을 구입하려는 과정에서 그 자금을 둘러싸고 이전에 연해주로 망명하여 이미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이범윤(李範允)과 심각한 갈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홍범도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김충열, 조화여 두사람으로 20천원의 돈과 노자로 백원을 주어 강동(두만강 동쪽) 연추(煙秋:러시아령 노우키에프스코에를 칭함) 리범윤한테 서신을 써서 보냈더니 (이범윤 등) 험한 놈들이 다 잘라먹고 오히려 일본 정탐꾼으로 몰아 가두고‥‥‥1908년에 연추 나가서 리관리(李管理:이범윤을 지칭)라 하는 자를 보고 조선서(온) 김충열, 조화여 두 사람을 어떻게 일본 탐정으로 보셨는가요 물어본즉 그자의 말이 나는 그런줄 저런줄 모르노라고 한즉‥‥‥ 연추 주민들이 이범윤 죽일놈이라고 누구든지 아니 욕할자가 없었다.77) 이러한 기술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홍범도가 사건의 발발 시기를 잘못 기억했거나 아니면 이범윤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이 무렵 연해주에서는 일본정부의 압력, 그리고 일제와 야합한 일부 귀화 한인의 농간 등으로 극동 러시아 정부당국에서 한인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일대 탄압조치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0년 9월 초에 극동 러시아 당국은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이범윤과 홍범도 등에 대한 이르쿠츠크로의 추방령을 내리기도 했던 것이다.78) 그리고 홍범도와 이범윤 두사람은 1910년대 전반기 연해주 지역의 대표적 민족운동 단체라고 할 수 있는 권업회(勸業會)의 주요 간부로 선임되어 있었고 1919년 2월에 결성되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도 두사람은 상당한 역할을 하며 관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홍범도의 회고 대로 위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선임되었다고하더라도) 양인이 같은 단체에서 간부로 일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1910년대 홍범도의 활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철저한 무력항쟁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의 시기였다. 그는 이 때 블라디보스톡 항구의 부두노동자, 금광의 광산노동자, 농장의 농부 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하면서 재기를 위한 군자금과 군인 모집에 총력을 다 하였다.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 그의 <일지> 17면 적기(摘記)해 보면 아래와 같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톡)와서 부리딴(부두?)에서 커우대(작업도구의 일종)매기 시작하여 삼사삭을 벌어 먹다가 금점 딴뚠에 들어가 양년(2년)을 금전하여 번돈이 1,400원(루블)인데 (그것을) 갖고 나와 추풍 (秋豊 : 연해주의 코르사코프카의 별칭) 당어재골(다자구(多子溝))에서 약담배(아편?)도 심고 곡식도 심다가‥‥‥돌아다니며 번돈 3,050원(루블)을 가지고 이만 나와서 오연발(총) 한 개에 탄환 100개씩 끼워 9원 씩 주고 사서 중국놈에게도 사고 고려놈에게서도 사고 러시아에서도 사서 의병을 모집하여 11개를 싸메고 봉밀산(蜂蜜山:중국령 밀산(蜜山)) 김성무(金成武) 집팡(농장)에 가서 고려로 나가지 못하고 1915년 7월 26일부터 산지 작록(사슴?)을 잡아먹기 시작하여 해수로 이태 반을 사냥하다가 (나머지) 총을 밤으로 운반하여 추풍 당어재골짜기 최의관(崔醫官) 병준(丙俊)집에다 묻어 놓고 농사를 시작하여 한 해 농사짓고‥‥‥ 홍범도의 이와 같은 회고는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관련 자료로 거의 검증될 수 있다. 즉 홍범도가 <노동회(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일하면서 임금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한다고 하는 일제측 정보문서가 있고79) 또 권업회(勸業會)의 간부로 있던 이종호(李鍾浩)가 러시아 당국과 교섭하여 이만 강변의 국유지를 한인 신규 귀화자에게 분배하여 개간케 했는데 그 결과 이 지역에 한인 집단 거주지가 조성되었다는 러시아측 자료가 있는 것이다. 80) 그리고 봉밀산 김성무 농장의 존재는 김성무가 1911년과 1912, 1914년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된다.81) 홍범도는 1910년대의 행적을 자기중심적으로 회상하고 있기 때문에 권업회(勸業會)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대하여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요한 내용은 거의 권업회 및 대한국민의회라는 조직과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1910년대 연해주에서의 한인 민족운동사에서 이 두 단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홍범도는 권업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82) 역시 대한국민의회에서도 선전부(宣戰部)(후에 군무부(軍務部)로 개칭됨)에 참여하여 부하들과 함께 이 부서의 중요한 구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위에서 말하는 추풍 당어재골 최병준이란 사람은 대한국민회의 접제원(接濟員)으로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83) 김세일에 따르면 홍범도는 소부대를 이끌고 1913년부터 1915년 7월까지, 그리고 1917년 11월 부터 1919년 8월 8일까지 블라디보스톡과 니콜리스크, 추풍 등 연해주에 있었다고 하며 위의 일지에서도 일부 확인 되는 바와 같이 1915년 7월부터 1917년 11월까지는 만주의 밀산 십리와라는 곳에 있던 권업회의 농자에서 일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에 몰두했다고 한다.84) (4)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실상(實相)과 홍범도(부대) 가. 홍범도 부대의 출정과 간도로의 이동 <일지>는 다른 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홍범도 부대의 출정과 간도로의 이동 경위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새로운 연구과제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한 과제들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홍범도가 노령(露嶺) 추풍에 있다가 무장세력을 형성하여 재차 봉기하는 배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홍범도는 “18년전 고려 독립만세가 불일듯 하므로 농사고 무어고 나가자 하고 묻어 두었던 총을 끄집어 내어 일면 닦으며 일면 의병 모집과 탄환 모집과 일면 원조(요청)하여 의병들 입힐 것과 천리경(망원경)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1919년 8월 8일 밤에 떠나 앵덕이 106인이 무장을 메고……"85) 라고하여 자기의 독자적 움직임을 위주로 설명하고 있다. 종래의 연구는 이러한 홍범도의 회고와 유사하게 대부분 홍범도의 무장세력 형성과 간도로의 이동, 그리고 국내 진입작전과 간도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주로 홍범도 등 독립군 지도자 한 개인의 뛰어난 애국심과 투철한 의지에 기인된 것처럼 설명해 온 경향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도자들의 개인적 업적은 도외시되어서는 안되지만 1910년대 말기에서 1920년대 초기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노령 연해주, 간도,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의 흐름 등이 거시적 시야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홍범도의 재봉기와 간도로의 이동 배경은 그의 <일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국내에서의 3·1운동의 폭발과 간도, 연해주로의 전파였다고 하겠다. 그는 이러한 거족적 민족운동의 고양(高揚)에 크게 고무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무장부대의 편성과 간도로의 이동 경위는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1918년 8월 일본군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탄압하고 한인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연해주 지방에 대거 침입하였다. 그 결과 이곳의 한인 민족운동 세력은 주요 활동무대를 옮기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10월학명을 옹호하고 볼셰비키 정권을 후원하고 있던 혁명세력은 일본군 및 백위파(白衛派)와 투쟁하면서 한인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한인 민족운동 세력은 혁명파와 결합하여 반일(反日)·반(反)백위파 투쟁에 동참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한 한인 빨치산(의용군(義勇軍)) 부대가 형성되었다. 특히 혁명파는 1919년 3월 올가에 '빨치산 제부대(諸部隊) 임시혁명 본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민족부(民族部)'를 두어 한인 등 무장세력의 활동을 원조하였다.86) 말하자면 홍범도의 부대편성과 간도로의 이동은 이러한 연해주의 정세와 러시아 혁명파의 지원이라는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홍범도 부대에 참여한 대부분의 구성원은 과거 의병투쟁에 참여하였던 동지들이었으리라고 추측되지만 상당수의 대원들은 백위군(白衛軍)의 강제 징집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귀화 한인들이었으리라는 점이다.87) 후자의 동기로 홍범도 부대에 참여한 병사들은 혁명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회주의 사상을 어느 정도 수용했을 것으로 판단되다. 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의 하나는 홍범도 부대 병사 및 무기, 장비의 모집과 무장에 대한 국민의회의 핵심멤버로 활동하고 있던 이동휘(李東輝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한국민의회 조직과도 연계되고 있던 홍범도 등이 간도로 갔던 이유는 지정학정 이점(利點) 이외에도 대한국민의회의 간도지부(지부장은 구춘선(具春先), 후일 대한국민회 회장)와 훈춘지부라는 대중적 기반의 존재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88) 홍범도는 이 때 형성된 부대의 규모를 106명이라고 명시하였으나 명칭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필자의 견해로는 연해주에서 구성된 부대의 성격은 아직 '독립군'이라고 하기 보다는 홍범도의 표현대로 '의병'이나 빨치산(의용병) 부대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둘째, 홍범도는 그의 부대가 간도로 이동하면서 러시아 적군(赤軍)을 지원하여 10월혁명의 반대세력인 백위파군(白衛派軍)을 타도하는 전투에 동참하였다는 것을 직접 기술하고 있고 또 그 전투 이후 자기부대에 러시아 적군 출신 빨치산 3명 청산리 전투가 벌어지기 얼마전인 1920년 9월까지도 동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홍범도 부대가 간도로 이동하면서 러시아 혁명을 지원하는 적군과 같이 싸웠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지게 된 것이다. 홍범도는 이 부분에 대하여 ‥‥‥ (노령) 아인덕에 도착하니 저녁때가 되므로 거기서 자고 가려고 하는 때 (갑자기) 러시아 빨치산 6명이 우리 머무르는 곳에 도착한 즉‥‥‥ (백군)13명이 죽고 말 세필 죽고 그놈들이 퇴진하여 양재거우등으로 도망하는 것 보고‥‥‥ 성명을 물은 즉 이바노비치 와씰리, 꼬싸, 까리멘니츠‥‥‥ 89) 라고 회고하였다. 종전의 연구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홍범도 부대의 러시아 적군과의 공동투쟁은 홍범도의 사상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그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은 자신들의 운동을 지원하는 국제세력과 자연스럽게 연계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일지>를 통해 우리는 홍범도 부대의 이동경로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간도로의 월경(越境) 직후 중국 마적들을 소탕하였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다. 즉 <일지> 18∼19면에 따르면 홍범도 부대는 노령 추풍을 떠나 아인덕, 소왕영(蘇王領 : 우수리스크라고도 함)을 거쳐 중소 국경지대의 중국령 따차무정재(草帽頂子), 하마탕(蛤莫塘) 등을 경유해서 마침내 봉오동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홍범도 부대는 따차무정재에서 중국 마적(홍호자(紅胡子)) 백 수십명을 처단하고 총 50자루, 탄환 1,300발 등을 노획했다고 하는데 이같은 마적 소탕은 간도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을 수호함으로써 그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본다. 나. 봉오동 전투 홍범도가 언제부터 자기 휘하의 부대 명칭을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라고 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관련 자료로 확인하면 대략 1919년 후반경이 아닌가 추정된다. 즉 그해 12월 홍범도는 '대한독립군 의용대장(義勇大將)' 명의로 간도 일대의 주민들에게 독립군의 성립과 무장투쟁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 유고문을 발표하였던 것이다.90) 봉오동 전투는 주로 홍범도 부대의 활약에 의한 것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전투는 홍범도 부대 단독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최명록(최진동(崔振東))·안무(安武)부대 및 신민단(新民團) 독립군 부대와 연합해서 수행한 전투였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홍범도 자신도 그의 <일지>에서 "봉오골 최진동진과 연합하여"라고 하여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봉오동 전투는 선학(先學)들에 의해 이미 훌륭한 연구업적이 나와 있으므로 구체적 전투경과의 서술은 생략하기로 하고 <일지>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만 간단히 검토해 보자. 첫째, 봉오동 전투의 개념에 대한 것이다. 즉 봉오동 전투는 일반적으로 '봉오골'에서의 전투 이전에 벌어진 삼둔자(三屯子) 전투와 후안산(後安山) 전투를 포함한 광의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일지>에서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가 끝난 직후에 다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 졌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봉오골 최진동 진과 연합하여 1920년 4월 초 3일(음력) 일병(日兵)과 접전하여 일병 310명 죽고 저녁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어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끼었는데 일본후원병(증원병) 100여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뒤에로 영상(嶺上)에 올라서자 봉오골서 싸움하던 남은군사 퇴진(退陣:철수)하여 오던 길로 못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쪽 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도착)하니까 내려다 총진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맞총질한즉······(일본군병이) 속사포(기관총)로 내려다 쏘니 신민단 군사 한사람도 없이 죽고 일병이 수백명 죽고 서로 코코(나팔)소리 듣고 총소리 끊어졌다. 그 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명 죽었다‥‥‥.91) 여기에서 홍범도는 전투가 벌어진 지명을 예시하고 있지 않으나 연변의 연구자 한준광(韓俊光)에 따르면 이것이 '비파정(琵琶頂)'전투라고 한다. 한준광은 연변지방 노인들의 증언을 근거로 들면서 봉오동전투 이틀 후인 6월 9일에 이 전투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92) 따라서 필자는 홍범도의 <일지>와 연변지방 노인들의 증언이 일치하기 때문에 이 '비파정 전투'도 봉오동 전투의 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비파정 전투의 주역은 <일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홍범도 부대와 연합했던 신민단 군사였다고 하겠다. 봉오동 전투를 청산리 전투와 같이 '독립전쟁'의 개념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93) 필자는 이에 대해 전투의 성격 자체를 그렇게 보는 것은 동의하지만 원론적 입장에서 전투의 규모와 기간을 따져본다면 '전쟁'의 개념으로 보는 데는 약간 무리한 측면이있다고 생각한다.94) 위의 <일지>에서 홍범도가 신민단 독립군이 거의 전멸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약간 오해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홍범도는 전투의 치열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 측의 기록을 보면 신민단 군대가 전멸한 것은 아니였다.95)
<봉오동전투상보> 6면에는 6월 7일경 봉오동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의 규모가 경찰관을 합쳐 25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참고는 된다하겠다. '토벌대'의 기록을 맹신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임정측의 발표도 일정한 비판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홍범도의 <일지>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위에서 홍범도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310명이 죽었다고 한 것은 약간 과정된 서술로 판단되나, 출동한 일본군의 규모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 필자는 홍범도의 이같은 회고를 숫자 그 자체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승전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강조하고 싶어하는 심정의 표현이라고 보고 싶다.97) 국내의 한 저술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쉽게 섬멸한 것처럼 서술하였지만98) 위의 <일지>인용 부분을 보면 이 전투가 그렇게 쉽사리 끝난 전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군(특히 신민단) 측도 상당한 피해가 있었던 것이다. 홍범도가 회고하고 있는 <일지>의 사실성은 <봉오동전투상보>와 비교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즉 위의 자욱한 안개 운운하는 부분이 <상보>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봉오동 전투의 의의를 일본군 몇명 사살했다는 단순한 전투성과의 대소(大小)에서 찾는 것 보다는 독립군 각 부대들의 최초의 연합작전에 의한 승전이었다는 점에서 찾는 것,99) 그리고 이를 계기로 더욱 무장투쟁이 고양되었다는 입장에서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 청산리 전투와 홍범도 부대의 활약 청산리 전투는 1920년대 독립군의 대표적 무장투쟁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역시 이에 관해서도 상당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으므로 쟁점(爭點)이 될 수 있는 부분만 점검해 본다. <일지>는 청산리전투에 관해서도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과는 물론 마적과도 싸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100) 이는 그때 참가했던 일본 낭인 중야청조(中野淸助)의 기록 <천락각서(天樂覺書)>를 통해서도 증명된다.101)
홍범도는 <일지> 22면에서 "‥‥‥군정서가 청산리에 있다 하니까 연합하여 고려(한국)로 나갈까 하고 찾아 가는 길에 어구의 큰 길에 나가 서자마자 보초병이 뒤물러 서면서 일병이 수천명이 당금 당진하였다 한즉 할 수 없이 고려나가 쓰자고 하던 뿔리묘트(기관총)를 걸고 일병 대부대에다 내두르니 쓰러진 것이 부지기수(不知其數)로 자빠지는 것을 보고 도망하여 오른 길로 산폐로 들어와‥‥‥”라고 쓰고 있다. 더구나 위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홍범도가 국내로의 진입작전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는 내용이 확인되는 점이다. 이는 그가 함경도에서의 의병투쟁 경험을 되살려 1920년대의 투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청산리 전투의 패배--일본군 ‘토벌’ 작전의 실패-- 사실을 당시의 일본군이나 현재의 상당수 일본인 학자들은 시인하고 있지 않다.103) 그러나 일부 양심적인 일본인 학자들은 이 때 일본군의 큰 피해를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한 연구자는 1920년 10월 22일 봉밀구에서의 일본군의 사상자가 74명으로 조사되어 있는 일본 육군성 내부자료를 인용하여 이 전투가 일본군이 큰 타격을 받은 ‘격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104) 필자가 아는 한 이 통계가 일본군측 손실이 가장 많이 조사된 수치이다. 이 봉밀구에서의 전투에 홍범도 부대가 단독으로 참전하였는지, 아니면 북로군정서 단독으로 수행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공동으로 수행했는지 <일지>의 내용 만으로는 아직 명확히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랑촌 전투가 북로군정서 군대와 홍범도 부대가 공동으로 수행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측 자료에 나오는 봉밀구 전투가 곧 어랑촌 전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넷째,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많은 전과를 거두며 일본군측에 심대한 피해를 주었지만 홍범도 부대도 많은 손실을 입었음을 <일지>는 담담히 고백하였다. 이는 홍범도 부대의 위명을 일정하게 손상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이부분에 관한 이범석의《우등불》과 일부 일본군측 자료에 실린 내용이 부분적으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홍범도는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우두양창으로 안도현을 향하여 가다나니 날이 저물어지므로 우두양창 막치기에서 불을 놓고 유(留)하게 되니까 내가 분부하되 우등(불) 앞에서 불쬐지 말고 대(먼)거리마다 쬐되 등하불명(燈下不明) 이므로 도적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명심하여라고 명령하고 밤을 지내는 때 마침 일병(日本)이 뒤를 쫓아오다가 홍우재(紅胡子:마적)를 만나 ······같이 뒤를 쫓아와서 우등(불)에다 속사포를 놓으니 우둥 앞에 불 쪼이던 군사는 씨도 없이 다 죽고 그 나머지는 사방으로 일패 도주하니 다시 갱무여망(更無輿望)이 되었다. 숱한 탄환을 피하여 산간으로 기어 올라간 즉‥‥‥”105) 홍범도 부대가 여기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았지만 궤멸적 손실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지>를 보면 이 사태 직후에도 200여명의 군세를 유지하고 있고 안도현으로 가면서 계속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며 일본군을 습격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홍범도는 자기의 패배 사실도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일지>의 신뢰도는 높다고 말할 수 있다. (5) 홍범도의 이념과 사상 홍범도는 청산리 전투 이후 밀산을 거쳐 연해주로 나아갔고 1921년 6월에는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다른 부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 반하여 홍범도가 이끈 부대는 거의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앉았다. 이는 그가 노령(露領) 자유시에서 벌어진 한인 공산당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파 양파의 대립 한 가운데서 엄격히 중립을 지켰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홍범도가 상해파 독립군을 심판한 재판부의 재판장으로 있었다고 한다.106) 하지만 이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홍범도는 1927년에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하였다(당증 번호 578492).107) 그의 입당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홍범도는 <일지>를 기록하였으나, 자기의 입당사실과 입당의 동기를 일체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는 1922년 1월 하순에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일명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였던 사실과 1921년 11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직속 한인 여단으로 개편된 독립군 부대의 대표자격으로 레닌을 만났던 사실은 자랑스럽게 언급하고 있다.108) 한준광은 간도에서의 홍범도 부대가 반제투쟁은 물론 반봉건투쟁과 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의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았는데,109) <일지>에서는 이 문제를 전혀 언급도 하고있지 않다. 대신 홍범도는 일제와 친일 매판·봉건적 수탈세력과의 투쟁사실을 위주로 <일지>를 서술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범도의 사상적 편력에 대하여는 구구한 학설이 있다. 남한 학계에서는 대체로 홍범도를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에 연변과 소련 등지의 일각에서는 그를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거병하여 일제와 싸우다가 나중에 사회주의자로 전향 발전한 모범적 사례로서의 영웅적 인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대하여 확실한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 . 그러나 홍범도의 출신 성분과 성품, 행적을 미루어 추측해 볼 때 그가 체계적으로 완비된 사회주의 이론이나 사상에 입각하여 행동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이념에 동조할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본다. 더구나 그가 공산당에 입당하였음을 상기해보면 이 문제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그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구태어 무리하게 재단하기보다는 그의 철저한 항쟁과 투철한 애국심이 어디서 연유하고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겠느냐 하는 것을 규명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홍범도는 이론이나 사상을 앞세우고 행동한 사람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실천적 투쟁으로써 구국항쟁의 대열에 앞장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범도(부대)와 싸웠던 일본군마저도 그에 대하여“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金佐鎭)과 같은 재질이 있는 인물이 아닌 듯 하고‥‥‥ 일반 조선인, 특히 그 배하에 있는 자로부터 하느님과 같은 숭배를 받고‥‥‥”110) 고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 6. 맺 음 말 지금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홍범도 및 그가 이끌었던 무장세력에 대한 연구현황과 그가 쓴 <일지>를 중심으로 새로이 제기되는 문제를 훑어 보았다. 최근 국내외 각지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폭넓게 끌고 있는 홍범도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 각 지역별로 상이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근래에는 각 지역간의 교류가 활성화 되면서 여러가지 제약이 어느정도 해소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홍범도의 <일지>가 알려지면서 새로운 연구과제가 부각되었다. <일지>는 홍범도가 1940년대 초에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회상하여 기록한 <회고록>적 성격을 띠는 중요한 기록물이었다. 특히 우리가 고찰한 것처럼 <일지> 는 특정 사건의 발생 연도나 극히 일부분적 대목에서의 오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서술내용은 대단히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일지>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자료라는 점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지>를 통해 홍범도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을 살펴보면서 제기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둘째, 의병항쟁 부분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는 1895∼6년 전후 시기에 홍범도(부대)가 유인석(柳麟錫) 의진(義陣)과 함께 의병투쟁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추후 구체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홍범도(의병부대)의 활동은 단순히 반일 투쟁의 성격만을 띤 것이 아니었고 상당한 비중의 반봉건투쟁과 계급투쟁적 성격을 반영하는 사례가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홍범도(부대)의 만주 및 연해주로의 망명과 재기 도모 시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홍범도가 권업회(勸業會)나 대한민국의회(大韓國民議會)와 같은 민족운동 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특히 이동휘(李東輝)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연해주에서 간도로 오면서 홍범도 부대는 러시아 적군(赤軍)과 함께 싸웠으며 구성원중 일부는 사회주의 사조(思潮)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넷째, 홍범도 부대의 간도에서의 활동은 홍범도(부대)만의 고립된 세력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었고 국내와 연해주, 간도의 민족운동 세력, 그리고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노농러시아 당국이나 코민테른 등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검증할 수 있었다. 특히 청산리 전투에 홍범도 부대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는 사실도 <일지>에서 명백히 확인되었으며, 홍범도 부대가 한때 큰 타격을 받았다는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였다. 이는 항일무장투쟁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가를 통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우리는 <일지>를 통하여 홍범도가 사회주의 사상에 폭넓은 자세를 취하였고 비교적 늦은 시기인 59세때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사회주의 이론이나 사상에 깊은 조예가 있는 투철한 '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는 그가 이론가(理論家)가 아니라 철저한 실천가(實踐家)였다는 입장에서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여섯째, 우리는 <일지>를 통해 홍범도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희생해가면서 항일무장투쟁의 실현에 몰두하였는가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일지>를 보면서 그의 비범한 일생을 재발견하게 되고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한 위대한 인간 -영웅- 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일지>의 홍범도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은 편협한 이념에 구애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로 폭넓게 전개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민족운동가들의 위상을 분류·구분하는 자세를 지양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홍범도 일지>는 앞으로 폭넓은 자료로 검증해 가면서 정교(精緻)하게 비판(批判)·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 주 석 * * 본연구소 연구원 1) 국내에 홍범도에 관한 소련측 자료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주로 고송무(高松茂-핀란드 헬싱키대 교수에 의해서였다. 고송무는 김 마뜨웨이 찌모페예워츠의 저서 《원동에서 소비에트 주권을 위하여 투쟁한 조선인 국제주의자들(1918∼1920)》에 실린 홍범도 관계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행되는 교포신문 <구주신문> 제33호(1985년 5월 31일일자)에 <소련에서 보는 홍범도>라는 제목의 글로 발표했다. 그 뒤 그는 <홍범도에 대한 새로운 조명(자료적 측면에서)>이라는 제목의 글을 1988년 3월과 6월에 각각 네덜란드와 한국에서 발표하여 홍범도에 관한 새로운 자료와 사실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그해 10월에는 <한국일보>에 '홍범도 장군 북간도에서 병사했다.'는 제목으로 연변측 인사들의 주장이 보도 되었다. 그리고 월간지 《사회와 사상》은 동년 11월호와 1989년 3월호에 <실록 홍범도 장군>을 연재하여 1943년 홍범도가 연변에서 병사했고 묘도 그곳에 있다는 복정섭, 황현걸, 김파 등 연변측 인사들의 주장을 소개했다. 이에 대해 소설가 송우혜(宋友惠)는 <최근의 홍범도 연구, 오류·헛점많다>라는 글을 《역사비평》1988년 겨울호에 게재해서 연변측 인사들의 주장을 통박하였다. 한편 재소 교포작가 김세일도 《경향신문》 1988년 12월 21일자와 1989년 3월 20일자를 통해 이를 비판하였고 소련의 교포신문 《레닌기치》는 1989년 4월 11일자에서 <홍범도장군의 전투경로와 소련에서의 만년생활>이라는 특집 기사를 꾸며 연변측 인사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여기에는 홍범도가 직접 썼다는 이력서와 자서전이 실려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증언도 있다. 또한 고송무는 《경향신문》1989년 4월 10일자에 홍범도의 사망증명서를 공표하여 복정섭 등을 비판하였고 중국 연변 역사연구소의 강용권도 <가짜 홍범도 홍종학의 진면모>라는 글을 《레닌기치》1989년 8월 23일과 26일, 29일자에 연재하여 복정섭 등의 설을 부정하였다. 2) 신학문사에 의해 1989년 6월 말에 《장편소설 홍범도》라는 제목으로 세 권으로 간행되었고 동년 11월 중순 제3문 학사에 의해 《역사기록소설 홍범도》라는 제목으로 일부(제 5편까지)가 역시 세 권으로 출판되었다. 신학문사에서 간행한 것은 김세일이 <레닌기치>에 연재했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고 제3문학사에 출판한 책은 고송무가 수집 제공한 사진과 해설이 첨부되어있으며 김세일이 여러 자료와 증언 등을 토대로 후일에 수정을 가한 것이었다. 3) 제3문학사는 1990년 11월 초에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의 4, 5권을 속간했다. 이는 1∼3 권과 마찬가지로 김세일이 수정 증보한 소설이었는데 4권의 말미에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시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있는 홍범도 관계문서 철복사본을 싣고 한편에는 고송무가 번역한 내용을 실었다. 그리고 5권에는 홍범도가 썼다고 하는 일지의 필사본을 역시 부록으로 게재하였다. 4) 이러한 사실은 해방 직후인 1947년에 공보처에서 발행한 채근식(蔡根植)저 《무장독립운동비사(秘史)》 85∼88면, 그리고 1960년대의 대표적 독립운동사 저술로서 1965년에 간행된 김승학(金承學)의 《한국독립사》414∼416면을 보면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또 1973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독립운동사(제5권 상)》 380∼395면에서도 이같은 경향을 재확인할 수 있다. 5) 대표적인 사례로 이범석의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는 초대 내각의 국무총리겸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는데 일찌기 광복군 장교시절인 1941년 중국에서 《한국적(韓國的) 분노(憤怒)》라는 백화문 책을 출판하여 중국인들에게 청산리 전투를 ‘대첩’이라하여 널리 선전 홍보하였다. 그는 그 뒤 국내에서 각종 일간신문은 물론, 《사상계》나 《신동아》등의 잡지에도 청산리 전투에 관한 글을 수차례 실었으나 이 전투에 홍범도 부대가 참전했던 사실을 일체 밝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본군측의 보고문서 등 비밀기록이 국내에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홍범도 부대가 참전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1971년 《우등불》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홍범도 부대가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일본군의 포위 공격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입고 궤주하고 말았다고 기술하였던 것이다. -송우혜,<이범석의 ‘우등불’>, 《역사비평》1991년 여름호 참조. 6) 위에서 언급한 《우등불》63면에서 이범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후일 홍범도씨는 러시아 이만시로 군대가 넘어가자 러시아에서 일크스크파의 공산당원이 된 사람들의 권유를 들어 공산당원이 되었다. 하나 그는 그속에서 할일도 없었고 이름만 빌려준 셈이 되었다. 그후 그는 자유시 ‘브라고베센스크’ 부근에서 방황하다가 병들어 불쌍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 이범석의 이같은 서술은 당시 일반인들의 사실인식보다는 앞서는 수준의 것이었으나 역시 잘못된 사실파악과 편견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이범석의 이러한 인식과 주장은 학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7) 신용하는 1985년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라는 저서를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의 <독립군의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의 연구>라는 논문에서 ‘청산리 독립전쟁’에서의 홍범도 부대의 활약상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강훈(李康勳)등 일부 인사들은 계속 북로군정서 단독전투를 고집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정설로 수용되고 있다. 8)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1집, 1986.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한국학보》 제43집, 1986. 9) <재조명(再照明)해본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항일투쟁(抗日鬪爭) , 《신동아》1985년 12월호. <홍범도장군 연구>, 《재만한인 독립운동사연구》, 일조각, 1988. <홍범도>, 《독립운동가 열전》, 한국일보사 ,1989. 10) <청산리전투와 홍범도장군>, 《신동아》1984년 9월호. <북간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조직형태에 관한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집, 1986. <최근의 홍범도 연구, 오류. 헛점많다.>, 《역사비평》 1988년 겨울호. 11) 함경도 지방에는 홍범도 의병부대를 칭송하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주민들 사이에서 불리웠다고 한다. “홍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오연발 탕환에는 군물이 돌고 화승대 구심에는 내굴이 돈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이하생략)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전사》제14권(근대2), 푸른숲, 1989 재간본, 191, 305면. 12) 오길보, <홍범도 의병대에 대한 연구>, 《력사과학》 1962년 제6호. 13)《조선통사(하)》, 오월, 1989 재간본, 112면. 14) 위의 책, 114∼116면. 15) 위의 책, 116면. 16) 위의 책, 136면 17) 《조선근대혁명운동사》, 한마당, 1988 재간본, 124면. 18) 위의 책, 126∼130면. 19) 이 책의 202면(한마당 재간본)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1919년 8월 홍범도는 200여명의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갑산, 혜산 등의 지방에 있는 일본인 수비대를 습격하고 토벌하면서 수일간 그 지역에 있는 일본제국주의 통치제도를 마비시켰다. 1920년 6월에는 동남만 왕청현 봉오동으로 침투하여 일본군 토벌대 300여명을 포위 전멸시키고 1920년 10월 하순에는 동만 화암현 청산리 부근에서 3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적과 여러 날에 걸쳐 투쟁을 전개하면서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 20) 위의 책, 203면 21) 오길보, 앞의 논문 32∼34면. 22) 신학문사에서 출판한 《장편소설 홍범도》제 1권의 부록에 실려있는 《레닌기치》1989 년 4월 11일자에 그러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23) 《조선전사》근대 2, 푸른 숲, 1989 재간본, 191면. 24) 위의 책, 198면. 25) 위의 책, 199면. 26) 위의 책, 186면. 27) 위의 책 근대 3, 푸른 숲, 1989 재간본, 187면. 28) 위의 책, 69∼70면. 29) 위의 책, 190면. 30) 김동화·김철수·리창역·오기송 편저, 《연변당사사건과 인물》, 연변인민출판사, 24∼25 면, 500∼504면. 31) 중공연변주위(中共延邊州委) 당사공작위원회(黨史工作委員會) 당사연구소(黨史硏究所) 편(編), 《연변역사사건(延邊歷史事件) 당사인물록(黨史人物錄)》, 15∼17면. 32) 《중조관계사논문집(中朝關係史論文集)》, 북경(北京), 세계지식출판사(世界知識出版社), 331, 334∼335, 391면. 33) 황용국·신일호·최홍빈·황유복·문숙동, 《조선족혁명투쟁사》, 심양 료녕민족출판사, 1988, 75면. 34) 조선족략사편찬조, 《조선족략사》.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86; 백산서당, 1989 재간본, 71∼72면. 35) 이 논문은 1988년 11월 12일부터 13일까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던 “한국무장독립운동에 관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되었다. 그후 한국독립유공자협회에서 간행한 《한국무장독립운동에 관한 국제학술대회 논문집》에 재수록되었다. 그리고 1989년 12월에 일본에서 발간된 《조선민족운동사연구(朝鮮民族運動史硏究)》제6집에도 일본어로 번역되어 수록되었다. 36) 《한국무장독립운동에 관한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155면. 37) 위의 책, 186면. 38) 위의 책, 161면. 39)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의 홍범도 약전에는 1921년 이후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자유시사변》후 홍범도는 쏘련홍군 제5군단 소속하에 있는 조선 독립려단의 한 대대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쎄믜노브백파군과의 싸움에서 공훈을 세웠다. 192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인들의 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레닌의 접견을 받았으며 1927년 볼쉐위크당에 가입하였다." - 위의 책, 503면. 40) 1991년 9월 13일 필자와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연구원 김춘선(金春善)과의 대담에서 청취. 41) 《한국무장독립운동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181면 42) 왕건(王建), <1919∼1945년(年) 조선자산계급민족독립운동특점초탐(朝鮮資産階級民族獨立運動特點初探)>,《조선문제연구총서(朝鮮問題硏究叢書)》 제2집,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소편, 45∼51 면; 강만길,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의 우익 독립운동사 인식>, 《연변조선족자치주연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88, 126면에서 재인용. 43) 양소전(楊昭全)은 《중조관계사논문집(中朝關係史論文集)》 378∼390면에서 중국동북지구에서의 민족주의계열단들의 역사적 진보성으로 1)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고 2)반일독립사상을 선전하고 조선족 교포의 사상을 각성시켰으며, 3) 학교를 널리 설립하여 독립사업의 후비역량(後備力量)을 길렀고 4)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중국동북 인민의 항일투쟁을 지원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한계로서 1) 좌익단체를 배척하고 타격하여 조선반일 독립운동의 영도권을 다투었고 2) 조교(朝僑)민중과 유리되었으며 3) 파벌투쟁이 격렬하여 서로역량을 허비하였으며 끝내 분열와해되었고 4) 중국인민 및 그 진보역량과 장기단결합작하여 중국혁명투쟁에 적극 참가할 수 없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44) 최근 연변 학계에서 종래의 연구경향을 비판하는 소장학자들의 견해가 대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청산(朴靑山), <조선족력사연구에서 나타난 폐단에 대하여 ㅡ출판물에서 본 폐단을 중심으로ㅡ>, 1991년 7월 코리아학소장학자 국제학술토론회 발표문(이는《역사비평》 (1991년 겨울호에 재수록외었다. ) 김춘선(金春善), <1920년대 한민족무장독립운동(韓民族武裝獨立運動) 연구(硏究)에 대한 제문제(諸問題)ㅡ봉오동(鳳梧洞),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중심(中心)으로ㅡ>, 1991년 10월 제4회 한국 민족운동사 국제학술심포지엄 발표문 등 참조. 45) 이 글은 강덕상이 1984년 동경(東京) 청옥서점(靑木書店)에서 출판한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の진상(眞相)》이라는 단행본에 <의병대장(義兵大將). 홍범도(洪範圖)の생애(生涯)>라는 제목으로 재수록되었다. 46) 대표적 연구로는 아래의 성과를 들 수 있다. 원휘지(原暉之), <ロッア혁명(革命), ッベリア전쟁(戰爭)と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ロッア혁명론(革命論)》, 국지창전(菊地昌典) 편(編), 전전전서점 (田鈿畑書店), 1977. _____________, <일본(日本)の극동(極東)ロッア군사간섭(軍事干涉)の제문제(諸問題)>, 《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 478호(號), 1980년(年) 3月(월). 유효종(劉孝鐘), <극동(極東) ロッアにおける조선민족운동(朝鮮民族運動)>, 《조선사연구회논문집(朝鮮史硏究會論文集)》22집(輯)1985. _____________, <극동(極東)ロッアにおいけゐ10월혁명(月革命)と 조선인사회(朝鮮人社會)>, 《ロッア연구소(史硏究)》45호(號) 1987. 화전춘수(和田春樹) ,<ロッア영극동(領極東)の조선인(朝鮮人) 1863∼1937>, 《사회학연구(社會科學硏究)》 40권(卷) 6호(號)(1989년(年) 3월(月)) 목촌영양(木村英亮) ,<소련극동지방(蘇聯極東地方)1987년(年)>, 《역사평론(歷史評論)》447 , 1987년(年) 7월(月) 47) 고송무, <쏘련 동유렵 몽고에서의 한국학 배경빛 현황>, 《슬라브학보》 제2권, 1987, 129면. 48) 이 책은 《신동아》 1981년 7월호에 <소련속의 한국인 사회>라는 제목으로 초역(抄譯)되었다. 또 정태수(鄭泰秀)에 의해 《소련한족사》라는 제목으로 편역(編譯)되어 1989년 서울의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출판되었다. 49) 이 책은 1990년 8월 이준형의 번역으로 역사비평사에서 출판되었다. 필자는 이 책을 참고하였다. 50) 홍범도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소련측의 논문으로는 아래의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논문들을 직접 검토하지는 못했다. Ⅰ.바비체프(Babichev), <극동지방 내전에 참전한 중국과 조선의 노동자들>, 타쉬켄트, 1959. S.한(Khan), <극동지방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에서의 조선인 빨치산들>, 《전사잡지》 제5호, 1963. s.쯔이프긴(Typkin), <극동지방 간섭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에 참전한 조선의 노동자들>, 《역사의 제문제》 제 11호, - 역사비평사,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1990, 127면 참조. 51) 고송무, 《쏘련의 한인들》, 이론과 실천사 1990, 38∼39면. 52) 홍범도 자필 이력서와 자서전의 내용은 《레닌기치》 1989년 4월 11월자에 번역되어 수록되었다. 또 제3문학사에서 1990년 간행한《역사기록소설 홍범도》제4권의 말미에도 부독으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고송무가 번역한 것이다. 53) 《역사기록소설 홍범도》, 제5권 245∼246면 참조. 《레닌기치》 1989년 4월 11일자에서 쏘련 기자동맹 맹원이고 작가인 김기철은 희곡 <홍범도>의 완성시기를 1940년 12월 15일, 연극 <홍범도>의 초연일을 1941년 1월 16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김세일은 1942년에 희곡이 씌어졌고 연극도 동년에 공연되었다고 회상하였다.(《역사기록소설 홍범도》 제1권, <작가의 말>, 16면) 독소전쟁(獨蘇戰爭)의 발발이 1941년 6월인 점을 고려하면 김세일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54) 《역사기록소설 홍범도》 제5권 부록, 자료 <홍범도의 일지> , 26면. 《레닌기치》1989년 4월 11일자에 실린 자필 이력서 참조. 55) 《레닌기치》1989년 4월 11일자 56) 위의 책 본문, 244∼246면. 56) 위의 책 본문, 244∼246면 한편 김세일에 의하면 홍범도가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후에 계봉우(桂奉瑀)가 홍범도를 방문하여 회고록 등의 집필을 권한 적이 있었으나 홍범도가 거절하였다고 한다. 계봉우는 1880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북간도 소영자에 광성중학을 설립하였으며 《동국사(東國史)》와 《동국지리(東國地理)》등의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임시정부에도 한때 참여했으나 1921년 상해 한인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37년 중반까지 연해주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조선역사(1~3부)》등의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으나 극서들은 출판되지 못하였고 그는 1959년 별세했다 (《역사기록소설 홍범도 》제5권 부록, 267~268면 참조). 《의병전》을 지은 '뒤바보'는 계봉우의 필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57) 원래 태장춘이 1942년에 완성한 희곡의 제목은 <의병들>이었는데 홍범도가 1943년 사망한 뒤에 <홍범도>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레닌기치》1982년 11월 30일자 : 이문웅(李文雄),<중앙(中央)아시아 한인사회(韓人社會) 의 민족예술활동(民族藝術活動)> 《동아연구(東亞硏究)》제2집 (1983.6월), 서강대 동아연구소, 170면에서 재인용. 58)《레닌기치》1989.4.11자 참조. /이 신문에서의 특집기사 필자 김기철은 <일지>의 원본이 누구에 의해서 소실(消失)되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59) 이인섭은 188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여하였고 1919년 11월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그는 1937년에 크즐-오르다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1952년에 우즈벡 공화국으로 옮겼다. 이인섭은 그곳에서 한인 민족해방운동사를 쓰기 위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1967년 적기훈장을 받았고 1979년 사망했다고 한다. 김세일, 《역사기록소설 홍범도》재5권, 280~282면. 60) 고송무, <김세일 저 장편소설 《홍범도》가 나오게 된 경위>, 《역사기록소설 홍범도》 제1권, 4면 참조. 61) 《역사기록소설 홍범도》 제 5권, 301∼329면, 자료 <홍범도의 일지>참조. 이하에서 <일지>의 면수(面數)는 책의 부록으로 영인된 <일지>자체의 면수를 쓰기로 하며 <일지>는 곧 부록으로 영인 수록된 자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다. 62) 원동 국립중앙문서보관소와 톰크스에 있는 홍범도의 <자서전>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나,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 조선 평양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5살까지 삼촌 집에서 살며 일했다. 1883년부터 1887년까지 보병 부대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1888년부터 1893년까지 황해도 수안 지방 부근의 총평 동네 종이공장에서 일했다." -《역사기록소설 홍범도》 제4권 부록, <자서권> 263면. 63) 육군본부, 《한국군제사(韓國軍制史) - 근세조선후기편(近世朝鮮後期便) - 》 1977, 323∼325면. 6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제13권, 1990, <수안군>조(224,227 면). 65) 앞의 <자서전>에는 1888년부터 1893년까지 5년동안 종이공장에서 일했다고 했으나 <일지>에서는 삼년을 일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일지>의 기록에 따르면 절에 있었던 시기는 1891∼2년 경이 된다. 6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권, <신계사>조(674)면. 67)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제16권, 동아출판사, 1987, 570면 68) 홍범도가 한문(漢文)이나 한자(漢字)가 섞인 글을 몹시 혐오했고 반대로 한글로 쓰인 글을 좋아했다는 기록 홍상표(洪上杓),《간도독립운동소사(間島獨立運動小史)》, 평택 한광(韓光) 중고등학교, 1966, 51∼51면)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문이나 한자를 전혀 몰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69) 홍범도는 다른 기록인 <자서전>에서 1894년 이후 강원도 철원에서 최초로 '일본놈'에 대항하는 300명의 의병대를 조직했다고 하였는데 의병조직 사실은 확인할 수 없지만 부대의 규모는 과장된 듯하다. 70) 원용정(元容正)등, <의암(毅菴) 유선생서행대략(柳先生西行大略) >,《독립운동사자료집》제1집, 1970, 525∼539면. 71) 《의암집》권(卷) 16서(書)에는 <여홍여천범도(與洪汝千範圖)(1908년 12월 2일)>, <답홍여천(答洪汝千)(1910년 정월 28일, 동년 2월 24일)> 등 세 편의 서신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72) <변해룡(邊海龍) 청취서(聽取書)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의병편》 제12권, 국사편찬위원회, 1983, 278면 73) <일지> 3, 5, 13면, 74)<일지> 5∼6, 12면. 75) <폭도토벌경황(暴徒討伐景況) 제83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제11권, 국사편찬위원회, 1983, 174∼ 175면. 76)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제(第)27집(輯), 동경(東京)みすず서방(書房),1970, 121면. 77) <일지>13∼15면. 78) 유효종(劉孝鐘), <극동(極東)ロシァにぁ조선민족운동(朝鮮民族運動)>, 《조선사연구회논문집(朝鮮史硏究會論文集)》 22집(輯), 142면. 유효종은 이 논문에서 러시아측 자료에 근거하여 문창범(文昌範)이 니콜리스크 지역에서 비밀리에 무장집단을 조직하여 한-러 국경지대의 의병대를 습격하기도 했고 러시아 당국과 민족운동세력 사이를 이간시키고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나 필자는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79) 강덕상(姜德相), 〈의병대장(義兵大將)·홍범도(洪範圖)の생애(生涯)〉,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の군상(群像)》, 91면 참조. 80) 유효종, 주 78)의 논문, 154면 참조 81)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산자료(島山資料)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1990년 11월 《도산 안창호자료집(1)》로 영인하였는데 여기에 김성무가 보낸 편지 8통이 수록되어 있다. 82)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가 1912년 11월에 조사한 《재외조선인 결사단체상황(在外朝鮮人 結社團體狀況)》에는 홍범도가 권업회의 부회장으로 되어있으나 (유효종 주 78)의 논문, 151면에서 재인용) 독립기념관 소장 도산(島山)자료 (1911.12.29 백원보(白元普)→안창호(安昌浩)편지)에는 그가 권업회의 사찰부장(査察部長)으로 되어있다. 83) 뒤바보 , <아령실기(俄領實記)>,《독립신문》 1920.4.8일자. 뒤바보는 여기에서 선전부 부장은 이동휘(李東輝)였고 추풍 다아재골이 그 근거지 였다고 하였으며 이 부서의 구성원이 나자구(羅子溝)사관학교 학생들과 홍범도의 부하 들, 그리고 황병길(黃丙吉), 이명순(李明淳), 최경천(崔敬天) 등이 거느리고 온 군인들이었다고 하였다. 84) 고송무, 《쏘련의 한인들》, 37면. 85) <일지> 17면. 86) 원휘지(原暉之). <ロッア혁명(革命), ッベリア전쟁(戰爭)と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ロッア혁명론(革命論)》, 194∼195 면. 87) 위의 논문, 196면. 88) 김정명(金正明)(편(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제3권, 동경(東京) 원서방(原書房), 1967, 59면에는 이동휘가 밀산(密山)과 연해주 등지에서 군자금모집과 병사의 징집에 노력하고 있다는 일제측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또 앞에서도 밝힌 바 있는 뒤바보의<아령실기(俄領實記)>에 이동휘가 홍범도와 같이 대한국민의회의 선전부(宣戰部)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기록도 뒷받침된다. 89) <일지>18면. 90) <유고문(諭告文)>,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년 1월 13일자(37호) 3면. 91) <일지>19면. 92) 한준광, 앞의 논문, 176면. 93) 김춘선, 앞의 논문, 86면. 94) 전투, 전역(戰役), 전재의 개념을 엄밀히 軍史적 입장에서 구별하면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에 대하여는, 이재(李宰) 외 《한민족(韓民族) 전쟁사(戰爭史) 총론(總論)》 교학연구사(敎學硏究社), 1988, 33∼38면 참조. 95) <봉오동전투상보(鳳梧洞戰鬪詳報)> (복사본) 참조. 신민단 독립군에 관해서는 신용하, <대한(大韓) 신민단(新民團) 독립군(獨立軍)의 연구(硏究)>, 《동양학(東洋學)》제18집,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 1988, 221∼248 면 참조. 96) 《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자(4면). 97)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의 1920. 6. 4조에는 일본군의 사자(死者)가 12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간도지방의 민족운동가이자 역사가인 김정규(金鼎奎)는 그의 일기(日記)에서 봉오동전 투시 일병(日兵) 400명이 출동하여 독립군과 싸웠으나 100여명이 죽었고 사상자가 심히 많았다고 하였다. (《김정규일기(金鼎奎日記)》 권(券)16, 1920년 4월 23·26일조. 구체적 내용은 본 논문집의 <용연(龍淵) 김정규(金鼎奎)의 생애(生涯)와 『야사(野史)』>참조). 이로 미루어 보아도 <일지>의 전과 기록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뒷받침된다. 98) 홍상표, 앞의 책, 49∼50면 참조. 99) 김춘선, 앞의 논문, 85면. 100) <일지> 22면. 101) 《독립운동사자료집》 제 10집 (독립군전투사 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의 <천락각서(天樂覺書)> 211면에는 마적과 일본군 연합부대가 안도현(安圖縣)에서 홍범도를 ‘놓쳤다’고 명기되어 있다. 102) <일지> 22면 103) 대표적 예로 좌좌목춘륭(佐佐木春隆), 《조선전쟁전사(朝鮮戰爭前史)としての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の연구(硏究)》, 동경(東京) 국서간행회(國書刊行會), 1985를 들 수 있다. 104) 원휘지(原暉之), <일본(日本)の극동(極東)ロッア군사간섭(軍事干涉)の제문제(諸問題)>, 《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 478호, 6면. 105) <일지> 22∼23면. 106) 김 마뜨웨이 찌모폐예워츠, 앞의 책, 반병률 해제 참고. 107) 그의 자필 <이력서>와 <자서전>참조 108) <일지> 24면. 109) 한준광, 앞의 논문, 161면. 110) <간도 출병후의 불령선인 단체상황>,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의 1920. 6. 4조에는일본군의 사(死)가 12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간도지방의 민족운동가이자 역사가인 김정규(金鼎奎)는 그의 일기(日記)에 봉오동 전투시 일병(日兵) 400명이 출동하여 독립군과 싸웠으나 100여명이 죽었고 사상자가 심히 많았다고 기술하였다. (《김정규일기(金鼎奎日記)》 권(券)16, 1920년 4월 23·26일조. 구체적 내용은 본 논문집의 <용연(龍淵) 김정규(金鼎奎)의 생애(生涯)와 『야사(野史)』>참조). 이로 미루어 보아도 <일지>의 전과 기록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뒷받침된다.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0집 (독립군전투사자료집), 237~238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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