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한인사회 '중심축' 최재형 연해주 의병조직의 ‘물주(物主)’ 최재형(최표토르 세메노비치·1962년 독립장)을 빼놓고는 연해주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사를 논할 수 없다. 구한말 함경도 일대 일본군을 괴롭혔던 연해주 의병의 조직책이자 재정적 후원자요 재러 한인 사회의 지도자 및 교육자, 언론인, 상해임시정부가 추대한 재정총장 등으로 그는 남이 흉내낼 수 없는 활약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 함께 활동했던 이상설, 홍범도, 안중근만큼 부각되지 못했던 데에는 활동하고 묻힌 곳이 러시아라는 특수성 때문이었다는 데 있다. 즉 공산국가가 돼 버린 러시아에 남한의 냉전논리에다 최재형과 관련된 러시아 자료 접근이 쉽지 않았던 이유에서다. ◇드라마 같은 어린 시절 최재형은 1860년 8월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 최형백의 둘째 아들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9살이 되던 해 최형백은 기근과 봉건 지주들의 탄압을 피해 큰 아들 내외를 데리고 러시아 국경을 넘어 연해주 지신허에 둥지를 틀었다. 최재형은 2년간 형수 밑에서 살았다. 어려운 살림에 식충이로 구박 받던 최재형은 결국 집을 나온다. 걷다 지친 그는 포시예트라는 작은 항구에서 잠이 들었고 정박해 있던 상선의 선원들에 의해 발견된다. 선장 부부는 거지 행색이지만 최재형의 총명한 눈빛에 매료돼 그를 자신들의 항해에 동참시킨다. 최재형은 9년간 러시아 전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남부 해안 등을 항해하며 근대 문명을 온몸으로 체화한다. 1877년 정기 항해를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 3년간 한 사업가 밑에서 많은 재산을 모았고 가족들이 살고 있다는 안치헤 마을을 찾아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주 한인들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 ◇재러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성장 1890년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는 한인들의 숫자가 증가하자 한인촌락들이 생겨났다. 러시아 정부는 1895년 크라스키노 안치헤 마을을 중심으로 첫 한인자치기관을 만들고 최재형을 책임자(도헌)로 임명했다. 지난날 전세계를 누비며 근대문명을 습득한 최재형은 조선인 학교 설립과 재러 동포들의 교육지원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는 크라스키노에 고등소학교(6년제)를 설립해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을 골라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이르쿠츠 등으로 유학을 보냈다. 여기엔 한명세, 오하묵, 최고려, 김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등 내로라 하는 공산주의 운동가도 포함돼 있다. 한인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해선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에 무기와 양식, 옷가지 등을 공급하면서 자금력을 갖추게 되고 이는 곧 연해주 한인민족운동과 의병활동을 통한 조국독립운동 자금으로 전용됐다. 1919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는 연해주에 있던 그를 임정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할 정도로 자금 조달력과 애국심이 인정을 받았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언론활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러시아 한인 신문으로 1908년 11월18일 창간됐다가 3개월도 채 안돼 재정문제로 폐간 위기에 몰린 ‘대동공보’를 재발간했다. 또 안창호, 이종호, 김병학 등과 더불어 ‘대양보’를 발간해 사장을 역임했다. 최재형은 한인 사회의 실업을 권장하기 위해 조직된 권업회 회장에도 선출됐다. 표면적인 목적은 일자리 권장과 교육 보급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기관이었다. 1911년 창설 때 300명이던 회원은 3년여 만에 8,579명에 달했다. ▶ 왼쪽부터 최재형, 조카 레브 최, 형 알렉세이(1915년) ◇의병조직부터 빨치산 운동까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내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최재형은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조직해 대일투쟁을 전개했다. 1908년에는 러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총재로서 국내진공작전을 주도했다. 동의회(회장 이위종)는 1905년 이후 러시아 지역에 있는 모든 항일의병세력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최재형이 이끈 의병부대는 안중근, 엄인섭 등의 지휘하에 1908년 7월 두만강 연안 신아산 부근 홍의동을 공격해 100여명의 일본인 사상자를 냈다. 회령 근처 운성산과 부령읍 인근 배상봉에 주둔한 일본군도 크게 격퇴하는 등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최재형은 500명에 이르는 병사들의 이름과 출신 등을 알고 있을 정도로 대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지도자였다”고 입을 모은다. 최재형을 이야기할 때 안중근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은 단독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생존해 있는 최재형의 막내딸 엘리자베트의 회고록에 보면 “동의회 일원이었던 안중근 의사는 아버지와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에 앞서 우리 집에 머물면서 사격 연습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안치헤 집행위원장이었던 최재형은 빨치산을 조직하고 연해주 해방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인 빨치산 부대 조직과 특별임무를 띠고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하는 활동을 했다. 일본은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 지역에서 빨치산에 대한 일제 ‘토벌작전’을 펼쳤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연해주지역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본군이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 만행을 자행한 ‘4월 참변’을 일으켰을 당시 일본군에 납치된 후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4월5일 총살됐다. 독립기념관의 박민영 연구원은 “최재형은 초기 연해주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에서 중심축 역할을 했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연해주라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그의 공과가 일반인에게 덜 알려져 있다”고 평가했다. ‘최재형 손자’ 최발렌틴 인터뷰 최발렌틴(사진)은 최재형의 셋째 아들 소생이다. 최재형의 4남7녀 중 막내딸 엘리자베트 표트로브나(93)가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 생존해 있지만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모스크바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맡고 있는 최발렌틴을 포함해 손자 4명이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67세로 유족 중 가장 젊은 발렌틴과의 만남은 지난달 22일 모스크바 시내 독립유공자후손협회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말문을 열었다. 성격이 약간 급한 듯 했지만 시종일관 웃는 모습에서 선한 사람일 거란 느낌이 들었다. 발렌틴은 지난 10년간 이범진, 김경천, 허위, 이동휘, 김규면 등 굴지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 22명이 회원으로 있는 모스크바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맡아 왔다. 현지 러시아고려인연합회 신문기자와 카자흐스탄의 고려일보 모스크바 주재기자로 일하고 있다. 발렌틴은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에는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맞아 오랫동안 숙원하던 ‘사진으로 본 러시아 한인의 항일 독립운동’을 펴냈다. 모스크바 근교 세르비카 마을에 있는 고려인 공동 묘지에 스탈린의 숙청으로 처형 당한 이들을 위한 기념비도 제작해 그들의 넋을 달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오는 9월엔 공산주의 운동가 한명세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그의 일대기를 그린 책을 펴낼 예정이다. 발렌틴은 할아버지 최재형을 재조명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고 있다. 2000년엔 최재형 선생 탄생 140주년을 맞아 직접 그의 전기를 펴냈다. 그의 부친으로 동명인 발렌틴(1994년 사망)이 최재형의 일생을 정리해 둔 노트와 사료 등을 참고해 모스크바와 알마아타 2곳에서 출판했다. 지난해엔 한국외국어대 반병률 교수와 함께 우수리스크(볼로가르크코보 거리 28번지)에 있는 조부의 생가터를 70여년 만에 처음 발견하는 기쁨도 맛봤다. 그는 “고려인 국회의원 장류보미르와 고려인협회, 고려인 민족 자치회의 후원으로 생가터에 푯말을 세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렌틴에게 조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최재형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일본인들의 손에 사살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 엘레나 페트로브나(1952년 사망)로부터 들은 조부의 나라사랑은 어린 발렌틴에게 ‘할아버지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갖게 했다. “할아버지 집은 연해주에서 가장 부자였다더군요. 그러나 가족들은 맘놓고 돈을 쓰지 못했었대요. 집, 땅, 무기, 배 등 전재산을 다 팔아 의병들과 빨치산 대원들 먹여 살리고 나니 남은 것은 먹고 살 걱정을 하는 가족들뿐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가세가 심하게 기울었다고 들었습니다.” 발렌틴은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이들 가족은 집단 농장을 전전하며 입에 풀칠을 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모두들 훌륭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을 잊지 않으며 떳떳하게 살았다고 발렌틴은 전했다. 발렌틴은 1900년대 초 ‘재러동포사회의 중심축’ 역할을 했던 조부의 뒤를 이어 재외동포 규합에도 힘쓸 예정이다. 그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들과의 국제적인 만남도 준비하고 있다”며 “개최지로는 러시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우수리스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심희정 기자/경향신문 |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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