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지리지
번역문
<지리지(地理志) 서문>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겸(兼)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 봉(奉) 교수(敎修)】
생각건대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三面)이 바다에 가리워지고 한 구석이 육지(陸地)에 연접하여 땅의 넓이가 거의 만리(萬里)나 된다. 고려 태조(太祖)가 고구려의 땅에서 일어나 신라에게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 도읍하고 삼한(三韓)의 땅을 통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방(東方)을 처음 평정하여 경리(經理)할 겨를이 없었더니 23년에 이르러 비로소 여러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명호(名號)를 고치고 성종(成宗)은 또 주(州)․부(府)․군(郡)․현(縣)․및 관(關)․역(驛)․강(江)․포(浦)의 명호(名號)를 고쳐서 드디어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하고 12주(州)에다 각기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그 10도(道)는 1은 관내도(關內道) 2는 중원도(中原道) 3은 하남도(河南道) 4는 강남도(江南道) 5는 영남도(嶺南道) 6은 영동도(嶺東道) 7은 산남도(山南道) 8은 해양도(海陽道) 9는 삭방도(朔方道) 10은 패서도(浿西道)이며 그 관할하는 바 주(州)․군(郡)은 모두 580여 개가 되니 동국(東國) 지리(地理)의 성대(盛大)함이 이에서 최고였다. 현종(顯宗) 초에 절도사(節度使)를 폐지하고 5도호(都護)․75도(道)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가 이어 안무사(安撫使)를 파하고 4도호(都護) 8목(牧)을 두었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5도(道) 양계(兩界)로 정하니 양광도(楊廣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교주도(交州道)․서해도(西海道)와 동계(東界)․북계(北界)로 총괄(總括)하면 4경(京)․8목(牧)․15부(府)․129군(郡)․335현(縣)․29진(鎭)이 되어 그 사방의 경계는 서북(西北)의 당(唐) 나라 이후로는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고 동북(東北)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境界)를 삼으니 대체로 서북(西北)의 경계(境界)는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東北)은 이에서 지났다. 이제 대략(大略) 사책(史策)에 보이는 연혁에 의거하여 지리지(地理志)를 만든다.
왕경 개성부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으로 신라가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 태조(太祖) 2년에 도읍을 송악(松嶽)의 남쪽에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지었다.【회경전(會慶殿): 뒤에 승경전(承慶殿)으로 고침. 응건전(膺乾殿): 봉원전(奉元殿)으로 고침. 장령전(長齡殿): 천령전(千齡殿)으로 고침. 함경전(含慶殿): 향복전(向福殿)으로 고침. 건명전(乾明殿): 도상전(儲祥殿)으로 고침. 명경전(明慶殿): 금명전(金明殿)으로 고침. 건덕전(乾德殿): 대관전(大觀殿)으로 고침. 문덕전(文德殿): 수문전(修文殿)으로 고침. 연영전(延英殿): 집현전(集賢殿)으로 고침. 선정전(宣政殿): 광인전(廣仁殿)으로 고침. 선명전(宣明殿): 목청전(穆淸殿)으로 고침. 함원전(含元殿): 정덕전(靜德殿)으로 고침. 만수전(萬壽殿): 영수전(永壽殿)으로 고침. 중광전(重光殿): 강안전(康安殿)으로 고침. 연친전(宴親殿): 목친전(睦親殿)으로 고침. 오성전(五星殿): 영헌전(靈憲殿)으로 고침. 자화전(慈和殿): 집희전(集禧殿)으로 고침. 정양궁(正陽宮): 서화궁(書和宮)으로 고침. 수춘궁(壽春宮): 여정궁(麗正宮)으로 고침. 망운루(望雲樓): 관상루(觀祥樓)로 고침. 의춘루(宜春樓): 소휘루(韶暉樓)로 고침. 신봉문(神鳳門): 의봉문(儀鳳門)으로 고침. 춘덕문(春德門): 체통문(通門)으로 고침. 대초문(大初門): 태정문(泰定門)으로 고침. 창합문(闔門): 운룡문(雲龍門)으로 고침. 회일문(會日門): 이빈문(利賓門)으로 고침. 창덕문(昌德門): 흥례문(興禮門)으로 고침. 개경문(開慶門): 황극문(皇極門)으로 고침. 금마문(金馬門): 연수문(延水門)으로 고침. 천복문(天福門): 자신문(紫宸門)으로 고침. 통천문(通天門): 영통문(永通門)으로 고침. 경양문(景陽門): 양화문(陽和門)으로 고침. 안우문(安祐門): 순우문(純祐門)으로 고침. 좌․우승천문(左右承天門): 통가문(通嘉門)으로 고침. 좌․우선경문(左右宣慶門): 부우문(敷祐門)으로 고침. 좌․우연우문(左右延祐門): 봉명문(奉明門)으로 고침. 연수문(延守門): 교화문(敎化門)으로 고침. 장령문(長寧門): 조인문(朝仁門)으로 고침. 선화문(宣化門): 통인문(通仁門)으로 고침. 흥태문(興泰門): 분방문(芬芳門)으로 고침. 양춘문(陽春門): 광양문(廣陽門)으로 고침. 대평문(大平門): 중화문(重化門)으로 고침. 백복문(百福門): 보화문(保化門)으로 고침. 통경문(通慶門): 성덕문(成德門)으로 고침. 동화문(東華門): 경도문(慶度門)으로 고침. 서화문(西華門): 향성문(向成門)으로 고침. 대청문(大淸門): 청태문(淸泰門)으로 고침. 영안문(永安門): 흥안문(興安門)으로 고침.】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구분하여 오부(五部)로 나누었다.
○ 광종(光宗) 11년 개경(開京)을 고쳐 황도(皇都)라 하였다.
○ 성종(成宗) 6년에 다시 오부(五部) 방리(坊里)를 정하고 14년에 개성부(開城府)라 하여 적현(赤縣) 6과 기현(畿縣) 7을 관할하였다.
○ 현종(顯宗) 9년에 부(府)를
폐지하고 현(縣)을 두어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 3현(縣)을 관할케 하고 또 장단 현령(長湍縣令)으로 송림(松林)․임진(臨津)․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 7현(縣)을 관할케 하여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直屬)하게 하고 경기(京畿)라 하였다.
○ <현종(顯宗)> 15년에 또 경성(京城)의 오부(五部) 방리(坊里)를 정하였다.【동부(東部)는 7방(坊) 70리(里)로 안정방(安定坊)․봉향방(奉香坊)․영창방(令昌坊)․송령방(松令坊)․양제방(楊堤坊)․창령방(倉令坊)․홍인방(弘仁坊)이며, 남부(南部)는 5방(坊) 71리(里)로 덕수방(德水坊)․덕풍방(德豊坊)․안흥방(安興坊)․덕산방(德山坊)․안갑방(安甲坊)이며, 서부(西部)는 5방(坊) 81리(里)로 삼송방(森松坊)․오정방(五正坊)․건복방(乾福坊)․진안방(鎭安坊)․향천방(香川坊)이며, 북부(北部)는 10방(坊) 47리(里)로 정원방(正元坊)․법왕방(法王坊)․흥국방(興國坊)․오관방(五冠坊)․자운방(慈雲坊)․왕륜방(王輪坊)․제상방(堤上坊)․사내방(舍乃坊)․사우암방(師于岩坊)․내천왕방(內天王坊)이며, 중부(中部)는 8방(八) 75리(里)로 남계방(南溪坊)․흥원방(興元坊)․홍도방(弘道坊)․앵계방(溪坊)․유암방(由岩坊)․변양방(變羊坊)․광덕방(廣德坊)․성화방(星化坊)이다.】
○ <현종(顯宗)> 20년에 경도(京都)의 나성(羅城)을 쌓았다.【왕이 처음 즉위하여 정부(丁夫) 304,400인(人)을 징발하여 이를 쌓아 이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니 성(城)의 주위가 29,700보(步)에 나열된 전각(殿閣)이 13,000간(間)이요 대문(大門) 4개․중문(中門) 8개․소문(小門) 13개로 자안문(紫安門)․안화문(安和門)․성도문(成道門)․영창문(靈昌門)․안정문(安定門)․숭인문(崇仁門)․홍인문(弘仁門)․선기문(宣旗門)․덕산문(德山門)․장패문(長覇門)․덕풍문(德豊門)․영동문(永同門)․회빈문(會賓門)․선계문(仙溪門)․태안문(泰安門)․앵계문(溪門)․선엄문(仙嚴門)․광덕문(光德門)․건복문(乾福門)․창신문(昌信門)․보태문(保泰門)․선의문(宣義門)․산예문(猊門)․영평문(永平門)․통덕문(通德門)이다. 또 황성(皇城)이 2,600간(間)으로 문(門)이 20개이니 광화문(廣化門)․통양문(通陽門)․주작문(朱雀門)․남훈문(南薰門)․안상문(安祥門)․귀인문(歸仁門)․영추문(迎秋門)․선의문(宣義門)․장평문(長平門)․통덕문(通德門)․건화문(乾化門)․금요문(金曜門)․태화문(泰和門)․상동문(上東門)․화평문(和平門)․조종문(朝宗門)․선인문(宣仁門)․청양문(靑陽門)․현무문(玄武門)․북소문(北小門)이며 혹은 말하기를 정부(丁夫) 238,938명과 공장(工匠) 8,450인명이 동원되고 성(城)의 둘레는 10,660보(步), 높이 27척(尺), 두께 12척(尺) 낭옥(廊屋) 4,910간(間)이라고 한다.】
○ 문종(文宗) 16년에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하여 상서도성(尙書都省)이 관장(管掌)한 11현(縣)으로 모두 소속시키고 또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 임내(任內)의 우봉군(牛峯郡)을 분할하여 이에 예속시켰다.
○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부윤(府尹) 이하의 관(官)을 설치하여 도성(都城) 안을 관장케 하고 별도로 개성현(開城縣)을 두어 성밖을 관장케 하였다.
○ 공민왕(恭愍王) 7년에 송도(松都) 외성(外城)을 수축(修築)하였다.
○ 공양왕(恭讓王) 2년에 경기(京畿)를 나누어 좌․우도(左右道)로 삼아 장단(長湍)․임강(臨江)․토산(兎山)․임진(臨津)․송림(松林)․마전(麻田)․적성(積城)․파평(坡平)을 좌도(左道)로 삼고 개성(開城)․강음(江陰)․해풍(海豊)․덕수(德水)․우봉(牛峯)으로 우도(右道)로 삼았다. 또 문종(文宗)의 구제(舊制)에 의하여 【문종(文宗) 23년 정월(正月)에 양광도(楊廣道)의 한양(漢陽)․사천(沙川)․교하(交河)․고봉(高峯)․풍양(豊壤)․심악(深岳)․행주(幸州)․해주(海州)․견주(見州)․포주(抱州)․봉성(峯城)․김포(金浦)․양천(陽川)․부평(富平)․동성(童城)․석천(石泉)․황조(荒調)․황어(黃魚)․부원(富原)․과주(果州)․인주(仁州)․안산(安山)․금주(衿州)․남양(南陽)․수안(守安)과 교주도(交州道)의 영흥(永興)․토산(兎山)․안협(安峽)․승령(僧嶺)․삭령(朔嶺)․철원(鐵原)과 서해도(西海道)의 연안(延安)․백주(白州)․평주(平州)․협주(俠州)․신은(新恩)․우봉(牛峰)․통진(通津)․안주(安州)․봉주(鳳州)․서흥(瑞興) 등 주현(州縣)을 경기(京畿)에 소속시켰다.】 양광도(楊廣道)의 한양(漢陽)․남양(南陽)․인주(仁州)․안산(安山)․교하(交河)․양천(陽川)․금주(衿州)․과주(果州)․포주(抱州)․서원(瑞原)․고봉(高峯)과 교주도(交州道)의 철원(鐵原)․영평(永平)․이천(伊川)․안협(安峽)․연주(漣州)․삭녕(朔寧)을 좌도(左道)에 소속시키고 양광도(楊廣道)의 부평(富平)․강화(江華)․교동(喬桐)․김포(金浦)․통진(通津)과 서해도(西海道)의 연안(延安)․평주(平州)․백주(白州)․곡주(谷州)․수안(遂安)․재령(載寧)․서흥(瑞興)․신은(新恩)․협계(俠溪)를 우도(右道)에 소속시켜 각기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두고 수령관(首領官)으로써 보좌하게 하였다. 왕도(王都)의 진산(鎭山)은 송악(松嶽)이며 【일명 송악(松岳)이라 하나니 산마루에 신사(神祠)가 있다.】 또 용수산(龍岫山)․진봉산(進奉山)․동강(東江)【정주(貞州)에 있음.】 서강(西江)【예성강(禮成江)】 벽란도(碧瀾渡)가 있다. 1군(郡)과 12현(縣)이 속해있다.
§ 개성현(開城縣)
본래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에 고쳐 개성군(開城郡)으로 삼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개성부(開城府)를 폐지하고 개성 현령(開城縣令)을 두었으며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 3현(縣)을 관령(管令)케 하여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直屬)시켰다.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개성부(開城府)로 도성(都城) 안를 관장(管掌)케 하고 별도로 개성현(開城縣)을 두어 성(城)밖을 관장케 하였다. 우물[井]이 있어 이름을 대정(大井)이라 한다.【세상에 전하기를 의조(懿祖)가 용녀(龍女)에게 장가들어 처음 개성산록(開城山麓)에 이르렀을 때 은그릇으로 땅을 파니 물이 따라 솟았으므로 이로 인해 우물로 삼았다고 한다.】 기평도(岐平渡)가 있다.
우봉군(牛峯郡)
본래 고구려 우잠군(牛岑郡)【혹은 우령(牛嶺) 혹은 수지의(首知衣)라고 한다.】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평주(平州) 속현(屬縣)으로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구룡산(九龍山)【국조(國祖) 성골장군사(聖骨將軍祠)가 있다. 그러므로 또 이름은 성거산(聖居山)이라고도 한다.】 과 박연(朴淵)【상․하(上下) 연(淵)이 있는데 모두 깊이를 알 수 없으며 가뭄을 당하여 비를 빌면 곧 반응이 있었다. 상연(上淵)의 한복판에 반석(盤石)이 있어 올라가 관람할 수 있다. 문종(文宗)이 일찍이 그 위에 올라갔더니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반석(盤石)이 진동하여 문종(文宗)이 놀라 두려워하였다. 애때에 이영간(李靈幹)이 왕을 모시다가 글을 지어 용(龍)의 죄(罪)를 헤아려 연못에 던지니 용(龍)이 곧 그 등을 나타내거늘 이에 매를 치니 못물이 이 때문에 다 붉어졌다.】 이 있다.
§ 정주(貞州)
본래 고구려의 정주(貞州)로 현종(顯宗) 9년에 개성현(開城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예종(睿宗) 3년에 승천부(昇天府)로 고쳐 지부사(知府事)를 두었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강등(降等)하여 해풍군(海豊郡)으로 삼았다. 백마산(白馬山) 장원정(長源亭)【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말하기를, ?서강(西江)가에 군자(君子)가 말[馬]을 세워두는 명당(明堂)의 땅이 있어 태조(太祖)가 통일한 병신년(丙申年)으로부터 120년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나아가 궁궐을 지으면 국가(國家)의 대업(大業)이 연장할 것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문종(文宗)이 태사령(太史令) 김종윤(金宗允) 등에게 명(命)하여 땅을 살피게 하여 서강(西江) 병악(餠岳)의 남쪽에 궁궐을 지었다.】 하원도(河源渡)【주(州)의 남쪽에 있음.】 중방제(重房堤)【중방비보(重房裨補)라고 칭하며 매년 봄가을에 반주(班主)가 부병(府兵)을 거느리고 수축(修築)하였다.】 가 있다
§ 덕수현(德水縣)
본래 고구려의 덕물현(德勿縣)【인물현(仁物縣)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개성현(開城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0년에 현내(縣內)에 흥왕사(興王寺)를 세우기 위하여 현치(縣治)를 양천(楊川)으로 옮겼다. 16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강도(祖江渡)와 인녕도(引寧渡)가 있다.
§ 강음현(江陰縣)
본래 고구려의 굴압현(屈押縣)으로【강서현(江西縣)이라고도 하였음.】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송악군(松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개성현(開城縣)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장단현(長湍縣)
본래 고구려의 장천성현(長淺城縣)【야야(耶耶)라고도 하고 야아(夜牙)라고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우봉군(牛峯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목종(穆宗) 4년에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 외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단주(湍州)로 삼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다시 현령(縣令)으로 삼아 상서도성(尙書都省)의 관할이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장단도(長湍渡)【양안(兩岸)에 청석(靑石)이 수십리(里)나 벽립(壁立)하여 마치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다. 세상에 전하기를 태조(太祖)가 노닐던 곳이라 하여 지금도 민간(民間)에 그 가곡(歌曲)이 전한다】
§ 임강현(臨江縣)
본래 고구려의 장항현(獐項縣)【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우봉군(牛峯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영통사(靈通寺)【산수(山水)가 아름답기로는 송경(松京)에서 제일이다. 곧 아간(阿干) 강충(康忠)과 보육성인(寶育聖人)이 살던 마아갑(摩阿岬)의 땅이다.】 가 있다.
§ 토산현(兎山縣)
본래 고구려의 오사사달현(烏斯舍達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임진현(臨津縣)
본래 고구려의 진림성현(津臨城縣)【오아홀(烏阿忽)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개성군(開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여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신경(新京)의 옛 터【공민왕(恭愍王)이 도읍을 남경(南京)으로 옮기고자 하여 전 한양 윤(前漢陽尹) 이안(李安)을 보내어 그 성궐(城闕)을 수축(修築)하게 하니 백성이 심히 괴로워하였다. 이에 태묘(太廟)에 점(占)을 치니 불길하다하므로 옮기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친히 행차하여 땅의 형상을 살피고 드디어 궁궐을 건축하여 이 때의 사람들이 신경(新京)이라고 하였다.】 가 있고 임진도(臨津渡)가 있다.
§ 송림현(松林縣)
본래 고구려의 약지두치현(若只豆恥縣)【지섬(之蟾) 또는 삭두(朔頭)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현(縣)의 이름을 여비(如)라 고쳐 송악군(松岳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는데 광종(光宗)이 그 땅에 불일사(佛日寺)를 세우고 현치(縣治)를 동북(東北)으로 옮겼으며 현종(顯宗) 9년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오관산(五冠山)【세상에서 전하기를 효자(孝子) 문충(文忠)이 이 산 밑에 살았다하며 악부(樂府)에 <오관산곡(五冠山曲)>이 있다.】 이 있다.
§ 마전현(麻田縣)
본래 고구려의 마전천현(麻田淺縣)【이사파홀(泥沙波忽)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임단(臨湍)이라고 고쳐 우봉군(牛峯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현종(顯宗) 9년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이어 적성현(積城縣)에 병합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다시 감무(監務)를 두었다.
§ 적성현(積城縣)
본래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중성(重城)으로 고쳐 내소군(來蘇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현종(顯宗) 9년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감악(紺嶽)【신라 때부터 소사(小祀)로 산 위에 사우(祠宇)가 있어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였다. 현종(顯宗) 2년에 거란군(契丹軍)이 장단악(長湍嶽)에 이르매 신사(神祠)에 정기(旌)와 사마(士馬)가 있는 것 같아 거란군(契丹軍)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한 까닭에 수리(修理)를 명하여 신사(神祠)에 보답하였다. 민간에 전하는 말로 신라 사람이 당(唐) 나라 장수 설인귀(仁貴)를 제사하여 산신(山神)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있다.
§ 파평현(波平縣).【파(波)는 파(坡)로도 쓴다.】
본래 고구려의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소군(來蘇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는데 현종(顯宗) 9년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을 영평(鈴平)이라 한다.
양광도(楊廣道)
§ 양광도(楊廣道)
본래 고구려와 백제의 땅으로【한강(漢江) 북쪽은 고구려의 땅이고 남쪽은 백제땅이다.】 성종(成宗) 14년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道)로 삼아 양주(楊州)와 광주(廣州) 등 주현(州縣)으로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키고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현(縣)으로 충원도(忠原道)를 삼고 공주(公州)와 운주(運州) 등의 주현(州縣)으로 하남도(河南道)를 삼았다가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로 삼았고 명종 원년(元年)에 나누어 2도(道)로 삼았다가 충숙왕 원년(元年)에 정하여 양광도(楊廣道)로 삼고 공민왕(恭愍王) 5년에 충청도(忠淸道)로 삼았다. 1경(京)․3목(牧)․2부(府)․27군(郡)․78현(縣)을 관령(管領)하였다.
§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 양주(楊州)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남평양성(南平壤城)이라 하였음.】 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이를 취하여 25년에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이곳에 도읍을 옮겼는데 개로왕(蓋鹵王) 20년에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한성(漢城)을 포위하였으므로 개로왕(蓋鹵王)이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 해에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뒤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15년에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국경을 정하고 17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창설(創設)하여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4년에 고쳐 한산군(漢山郡)으로 삼았는데 고려(高麗) 초에 또 고쳐 양주(楊州)로 삼았고 성종(成宗) 14년에 비로소 10도(道)를 정하매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이름을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하고 해주(海州)와 더불어 좌우(左右) 2보(輔)를 삼아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켰다가 현종(顯宗) 3년에 2보(輔)와 12절도(節度)를 폐하고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내렸다가 문종(文宗) 21년에 올려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삼고 이웃 군민(郡民)을 옮겨 살게 하여 이를 채웠다. 숙종(肅宗) 원년(元年)에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가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의거하여 도읍을 남경(南京)으로 옮기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양주(楊州)에 목멱(木覓) 땅이 있어 도읍지가 될만한 곳입니다.?
고 하니 일관(日官) 문상(文象)이 이 말에 찬동하였으므로 숙종(肅宗) 4년 가을에 왕이 친히 행차하여 둘러보시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그 건축공사[役事]를 감독하게 하니 숙종(肅宗) 5년이 걸려 완성하였는데 왕이 드디어 친히 행차하여 보았다.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고쳐 한양부(漢陽府)로 삼았다. 별호(別號)을 광릉(廣陵)【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삼각산(三角山)【신라 때 부아악(負兒嶽)이라 하였다.】 ․한강(漢江)【곧 사평도(沙平渡)임】 ․양진(楊津)【신라 때 북독(北瀆)인 한산하(漢山河)를 중사(中祀)로 올렸다】 이 있다. 3군(郡)과 6현(縣)이 소속되고 1도호부(都護府)․2지사군(知事郡)․1현령관(縣令官)을 관령(管領)하였다
○ 교하군(交河郡). 본래 고구려의 천정구현(泉井口縣)【굴화군(屈火郡) 또는 어을매관(於乙買串)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을 선성(宣城)이라 한다. 오도성(烏島城)【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의 하류가 여기에서 만난다.】 과 낙하도(洛河渡)【현(縣)의 북쪽에 있다.】 가 있다.
○ 견주(見州). 본래 고구려의 매성군(買省郡)【창화군(昌化郡)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내소군(來蘇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포주(抱州). 본래 고구려의 마홀군(馬忽郡)【명지(命旨)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견성군(堅城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을 청화(淸化)【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라 한다.
○ 행주(幸州).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
을 우왕(禑王)【왕봉(王逢)이라고도 하였음.】 이라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를 덕양(德陽)【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 봉성현(峯城縣). 본래 고구려의 술미홀현(述彌忽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신우(辛禑) 13년에 고쳐 서원 현령(瑞原縣令)으로 삼았다.
○ 고봉현(高峯縣).【봉(峯)은 봉(烽)으로도 쓴다.】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심악현(深嶽縣). 옛 보신향(寶薪鄕)으로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을 칭하고 내속(來屬)하였다.
○ 풍향현(豊壤縣).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황양(荒壤)이라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하였다가 뒤에 포주(抱州)로 이속(移屬)하였다.
○ 사천현(沙川縣). 본래 고구려의 내을매현(內乙買縣)【내이미(內爾米)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견성군(堅城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 수주(樹州)
본래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장제군(長提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수주(樹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폐지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치고 의종(毅宗) 4년에 다시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삼았으며 고종(高宗) 2년에 또 고쳐 계양 도호부(桂陽都護府)로 삼았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길주목(吉州牧)으로 올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지함에 내려 부평부(富平府)로 삼았다. 6현(縣)이 속해 있다.
○ 금주(衿州).【금(衿)은 금(黔)으로도 쓴다.】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곡양(穀壤)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피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을 시흥(始興)【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양화도(楊花渡)가 있다.
○ 동성현(童城縣). 본래 고구려의 동자홀현(童子忽縣)이【일명 당산현(幢山縣)이라고도 하고 구사파의(仇斯波衣)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장제군(長堤郡)의 영현(領縣)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 통진 감무(通津監務)를 두어 현(縣)을 이에 소속시켰다.
○ 통진현(通津縣). 본래 고구려의 평회(平淮)【회(淮)는 유(唯)로도 씀.】 압현(押縣)【일명 북사성(北史城)이라고도 하고 또 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분진(分津)이라고 고쳐 장제군(長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
○ 공암현(孔巖縣). 본래 고구려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는데 충선왕(忠宣王) 2년에 고쳐 양천현(陽川縣)으로 삼고 영(令)을 두었다.
○ 김포현(金浦縣). 본래 고구려의 금포현(黔浦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장제군(長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신종(神宗) 원년(元年)에 왕의 어태(御胎)를 현(縣)의 북쪽에 묻었으므로 올려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 수안현(守安縣). 본래 고구려의 수이홀(首爾忽)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수성(戍城)으로 고쳐 장제군(長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소속하였는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공양왕(恭讓王) 3년에 처음으로 통진 감무(通津監務)를 두매 현(縣)이 이에 속해있다.
§ 인주(仁州)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미추홀(彌忽)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소성(邵城)이라 고쳐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樹州) 임내(任內)에 소속하였다가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 황비(皇) 인예 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경원군(慶源郡)으로 삼았고 인종(仁宗) 때 황비(皇) 순덕 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지주사(知州事)로 삼았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에 올려 경원부(慶源府) 【왕이 처음 즉위하여 주(州)의 호장(戶長)에게 홍정(紅)을 내려 주었다.】 로 삼았다. 자연도(紫燕島)․삼목도(三木島)․용류도(龍流島)가 있고 1군(郡)과 1현(縣)이 소속하였다.
○ 당성군(唐城郡). 본래 고구려의 당성군(唐城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당은군(唐恩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옛 이름을 복구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의 속군(屬郡)으로 삼았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16년에 홍다구(洪茶丘)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삼았으며 뒤에 다시 올려 강녕 도호부(江寧都護府)로 삼았다가 34년에 또 올려 익주목(益州牧)으로 삼았는데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함에 내려 남양부(南陽府)로 삼았다. 대부도(大部島)․소우도(小牛島)․선감미도(仙甘彌島)․영흥도(靈興島)․소물도(召勿島)․승황도(承黃島)․인물도(仁物島)․이칙도(伊則島)․잡량곶도(雜良串島)․사야관도(沙也串島)․난지도(難知島)․목력도(木力島)가 있다.
○ 재양현(載陽縣). 옛 안양현(安陽縣)으로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을 칭하고 수주(水州) 임내(任內)에 속하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 수주(水州)
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고 태조가 남정(南征)하니 군(郡) 사람 김칠(金七), 최승규(崔承珪) 등 200여 명이 귀순하여 힘썼으므로 공(功)으로써 올려 수주(水州)로 삼았다. 성종(成宗) 14년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폐지하고 현종(顯宗)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복구하였는데 원종(元宗) 12년에 착량방수(窄梁防戍)의 몽고군이 대부도(大部島)에 들어가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섬 사람들이 분노하여 몽고군을 죽이고 반란하거늘 부사(副使)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평정하니 공(功)으로써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를 삼았고 뒤에 또 올려 수주목(水州牧)으로 삼았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함에 내려 수원부(水原府)로 삼았고 공민왕(恭愍王) 11년에 홍건적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양광도(楊廣道) 주군(州郡)을 초유(招諭)하여 항복케 하니 수원부(水原府)가 가장 먼저 맞아 항복하였다. 드디어 내려 군(郡)으로 삼으니 군(郡)의 사람들이 재신(宰臣) 김용(金鏞)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다시 부(府)가 되었다. 별호(別號)를 한남(漢南)【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수성(隋城)이라고도 한다. 7현(縣)이 속하였다.
○ 안산현(安山縣).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장구군(獐口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고쳐 안산군(安山郡)으로 삼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문종(文宗)이 탄생하신 곳이라 하여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 영신현(永新縣).【오타(五朶) 또는 영풍(永豊)이라고도 함.】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쌍부현(雙阜縣). 옛 6포(浦)로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용성현(龍城縣). 본래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차홀(車忽)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거성(車城)으로 고쳐 당은군(唐恩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정송현(貞松縣). 옛 송산부곡(松山部曲)으로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을 칭하고 내속(來屬)하였다.
○ 진위현(振威縣). 본래 고구려의 부산현(釜山縣)【옛 연달부곡(淵達部曲)으로 금산현(金山縣) 또는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성군(水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소속하였는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올려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 양성현(陽城縣). 본래 고구려의 사복홀(沙伏忽)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적성(赤城)으로 고쳐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5년에 내속(來屬)하고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강화현(江華縣)
본래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갑북고차(甲北古次)라고도 함】 으로 바다 가운데 있어 정주(貞州)의 서남쪽 통진현(通津縣)의 서쪽에 위치하여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해구군(海口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현종(顯宗) 9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고종(高宗) 19년에 몽고군을 피하여 도읍이 들어오매 올려 군(郡)으로 삼고 이름을 강도(江都)라 하였다. 37년에 중성(中城)을 쌓아 둘레가 2,960여 간이 되었다. 원종(元宗) 원년(元年)에 다시 송도(松都)【부(府) 동쪽 10리(里) 지점인 송악리(松嶽里)에 옛 궁터가 있다.】 로 돌아오매 충렬왕(忠烈王) 때에 인주(仁州)에 합쳤다가 이어 복구(復舊)하였고 신우(辛禑) 3년에 올려 부(府)로 삼았다. 마리산(摩利山)은 부(府)의 남쪽에 있다. 산정상에 참성단(塹星壇)이 있어 세상에서 단군(檀君)의 제천단(祭天壇)이라 전한다. 전등산(傳燈山)【일명 삼랑성(三郞城)으로 세상에서 단군(檀君)이 세 아들을 시켜 이것을 쌓았다고 전한다.】 이 있고 구음도(仇音島)․파음도(巴音島)․금음북도(今音北島)․매잉도(買仍島)가 있다. 3현(縣)이 속해있다.
○ 진강현(鎭江縣). 본래 고구려의 수지현(首知縣)으로 강화도(江華島) 안에 있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수진(首鎭)이라 고쳐 해구군(海口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속해있다. 안도(鞍島)와 장봉도(長峯島)가 있다.
○ 하음현(河陰縣). 본래 고구려의 동음내현(冬音奈縣)【아음현(芽音縣)이라고도 함.】 으로 강화도(江華島) 안에 있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호음(陰)이라 고쳐 해구군(海口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하였다가 뒤에 개성현(開城縣)에 소속하였다. 주을질도(主乙叱島)가 있다.
○ 교동현(喬桐縣). 본래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일명 대운도(戴雲島) 혹은 고림(高林) 혹은 달을참(達乙斬)이라고도 함.】 으로 바다 가운데 있어 강화현(江華縣)의 서북쪽 염주(鹽州)의 남쪽에 위치하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해구군(海口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소속하였는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송가도(松家島)가 있다.
§ 광주목(廣州牧)
처음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한(漢) 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에 나라를 세워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13년에 이르러 한산(漢山) 밑에 나아가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 민호(民戶)를 옮겨 드디어 궁궐을 세우고 살다가 이듬해에 도읍을 옮기고 이름을 남한산성(南漢山城)이라 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5년에 이르러 도읍을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 옮겼고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에 이르러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이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군사가 돌아가고 문무왕(文武王)이 점차로 그 땅을 수복하여 고쳐 한산주(漢山州)로 삼았다가 또 고쳐 남한산주(南漢山州)로 삼았는데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이름을 한주(漢州)로 고쳤고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 12목(牧)을 두니 광주(廣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여 관내도(關內道)에 소속하였다가 현종(顯宗) 2년에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 그대로 목관(牧官)을 삼으니 별호(別號)를 회안(淮安)【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일장성(日長城)【신라 문무왕때 쌓은 바로 즉 주장성(晝長城)이다.】 이 있다. 4군(郡)과 3현(縣)이 속해있다.
○ 천녕군(川寧郡). 본래 고구려의 술천군(述川郡)【생지매(省知買)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소천군(川郡)【소(訴)는 기(沂)으로도 씀.】 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진강도(鎭江渡)가 있다.
○ 이천군(利川郡). 본래 고구려의 남천현(南川縣)【남매(南買)라고도 함】 으로 신라가 병합하여 진흥왕(眞興王)이 올려 주(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황무(黃武)로 고쳐 한주(漢州)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할 때 군(郡) 사람 서목(徐穆)이 인도하여 쉽게 건널 수 있었던 까닭으로 이름을 이천군(利川郡)이라 부르고 그대로 소속하였다가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高宗) 44년에 영창(永昌)이라 불렸으며 공양왕(恭讓王) 4년에 조비(祖) 신씨(申氏)의 향(鄕)이므로 올려 남천군(南川郡)으로 삼았다.
○ 죽주(竹州).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개산군(介山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음평(陰平)【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연창(延昌)이라고도 한다.
○ 과주(果州).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동사혜(冬斯)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율진군(栗津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부안(富安)【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부림(富林)이라고도 한다. 관악산(冠嶽山)【충렬왕(忠烈王) 10년에 주(州)의 용산처(龍山處)를 올려 부원현(富原縣)으로 삼았다.】 이 있다.
○ 지평현(砥平縣). 본래 고구려의 지현현(砥峴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신우(辛禑) 4년에 유온(乳) 장씨(張氏)의 향(鄕)이므로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이를 파하였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철장(鐵場)을 현경(縣境)에 설치하매 감무(監務)를 두어 이를 겸하게 하였다.
○ 용구현(龍駒縣). 본래 고구려의 구성현(駒城縣)【멸오(滅烏)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거서(黍)로 고쳐 한주(漢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올려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 양근현(楊根縣). 본래 고구려의 양근군(楊根郡)【항양(恒陽)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빈양(濱陽)으로 고쳐 소천군(川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옛 이름으로 복구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고종(高宗) 44년에 영화(永化)라고 칭하였다. 원종(元宗) 10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익화 현령(益和縣令)으로 삼았고 공민왕(恭愍王) 5년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모향(母鄕)이므로 올려 양근군(楊根郡)으로 삼았다. 용문산(龍門山)이 있고 용진도(龍津渡) 【공민왕(恭愍王) 5년에 보우(普愚)가 미원장(迷元莊)의 소설암(小雪庵)에 우거(寓居)하였으므로 장(莊)을 올려 현(縣)으로 삼고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이어 땅이 좁고 사람이 희소하였으므로 도로 현(縣)에 소속하였다.】 가 있다.
§ 충주목(忠州牧)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미을성(未乙省) 또는 완장성(長城)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여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중원경(中原京)을 삼았으며 태조(太祖) 23년에 또 고쳐 충주(忠州)로 삼았는데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니 충주(忠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창화군(昌化軍)이라 부르고 중원도(中原道)를 칭하였는데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삼고 9년에 정하여 목(牧)을 삼으니 8목(牧)의 하나가 되었으며 고종(高宗) 41년에 올려 국원경(國原京)으로 삼았다. 양진명소(楊津溟所)와 양진연소(楊津衍所)가 있으며 별호(別號)를 대원(大原)【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예성(蘂城)【고종(高宗) 42년 다인(多仁)의 철소(鐵所) 사람이 몽고군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소(所)를 올려 익안현(翼安縣)으로 삼았다.】 이라 한다. 1군(郡)과 5현(縣)이 소속하였으며 1지사군(知事郡)을 관령(管領)하였다.
○ 괴주(槐州). 본래 고구려의 잉근내군(仍斤內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괴양군(槐壤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시안(始安)【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 장연현(長延縣). 본래 고구려의 상모현(上芼縣)으로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을 칭하고 내속(來屬)하였다. 온천(溫泉)이 있다.
○ 장풍현(長豊縣). 고구려 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음죽현(陰竹縣). 본래 고구려의 노음죽현(奴音竹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개산군(介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음성현(陰城縣).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청풍현(淸風縣). 본래 고구려의 사숙이현(沙熟伊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제군(柰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4년에 현(縣)의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됨으로 인하여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월악(月嶽)【신라에서는 월형산(月兄山)이라 칭하였다.】 이 있고 풍혈(風穴)이 있다.
§ 원주(原州)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삼았는데 고종(高宗) 46년에 주(州)가 왕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므로 내려 일신현(一新縣)으로 삼았다가 원종(元宗) 원년(元年)에 다시 지주사(知州事)로 삼았다. 10년에 임유무(林惟茂)의 외향(外鄕)이므로 정원 도호부(靖原都護府)로 올렸는데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을 막아낸 공이 있었으므로 고쳐 익흥 도호부(益興都護府)로 삼았고 34년에 원주목(原州牧)으로 올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지함에 내려 성안부(成安府)로 삼았으며 공민왕(恭愍王) 2년에 주(州)의 치악산(雉岳山)에 어태(御胎)를 안장(安藏)하였으므로 다시 원주목(原州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평량경(平凉京)이라 하며 또 호(號)를 평량(平凉)【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2군(郡)과 5현(縣)이 속해있다.
○ 영월군(寧越郡).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쳤고 고려에 이르러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1년에 향(鄕)의 사람 연달마실리원사(延達麻實里院使)가 명(明) 나라에 있으면서 우리 나라에 공(功)이 있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 제주(堤州).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奈吐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내제군(奈堤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의천(義川)【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하며 또 호(號)를 의원(義原)이라 한다.
○ 평창현(平昌縣). 본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우오현(于烏縣) 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백오(白烏)라고 고쳐 내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충렬왕(忠烈王) 25년에 현령(縣令)을 두었고 신우(辛禑) 13년에 총신(寵臣) 이신(李信)의 내향(內鄕)이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가 뒤에 내려 현령(縣令)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노산(魯山)이라 한다.
○ 단산현(丹山縣).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적성현(赤城縣)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때 내제군(柰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충주(忠州)에 옮겨 속하게 하였다. 합단(哈丹)의 난(亂)에 현(縣) 사람들이 능히 적을 막아내었으므로 그 공로를 상을 주어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숙왕(忠肅王) 5년에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올렸다. 죽령산(竹嶺山)이 있다.
○ 영춘현(永春縣).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자춘(子春)이라고 고쳐 내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주천현(酒泉縣).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를 학성(鶴城)이라 한다.
○ 황려현(黃驪縣).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황효(黃驍)로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황리현(黃利縣)이라고도 함.】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44년에 영의(永義)라 칭하고 충렬왕(忠烈王) 31년에 황비(皇) 순경 왕후(順敬王后) 김씨(金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여흥군(驪興郡)으로 삼았고 명(明) 나라 홍무(洪武) 21년에 이르러 거짓 임금 신우(辛禑)를 군(郡)으로 옮기매 올려 황려부(黃驪府)로 삼았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다시 내려 여흥군(驪興郡)으로 하였다. 여강(驪江)이 있다.
§ 청주목(淸州牧)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으로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처음으로 서원 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서원경(西原京)으로 올렸는데 태조(太祖) 23년에 고쳐 청주(淸州)라 하였고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니 청주(淸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전절군(全節軍)이라 이름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소속하였다가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하였고 9년에 정하여 목(牧)으로 삼으니 8목(牧)의 하나가 되었다. 2군(郡)과 7현(縣)이 소속하였고 1지사부(知事府)․2지사군(知事郡)․2현령관(縣令官)을 관령(管領)하였다.
○ 연산군(燕山郡).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46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문의현(文義縣)으로 삼고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충렬왕(忠烈王) 때에 가림현(嘉林縣)에 합병하였다가 이어 원래대로 나누었다.
○ 목주(木州).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嶽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대록군(大麓郡)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신정(新定)【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 진주(鎭州). 본래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만노군(萬弩郡) 또는 수지(首知) 또는 신지(新知)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흑양군(黑壤郡)【흑(黑)은 황(黃)으로도 씀.】 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강주(降州)라 칭하였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고종(高宗) 46년에 임연(林衍)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창의현(彰義縣)으로 삼아 영(令)을 두었고 원종(元宗) 10년에 또 임연(林衍)의 일로 지의령군사(知義寧郡事)로 올렸다가 임연(林衍)이 죽임을 당함에 미쳐 다시 내려 지금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별호(別號)를 상산(常山)【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태령산(胎靈山)【신라 때 만노군 태수(萬弩郡太守) 김서현(金舒玄)의 아내 만명(萬明)이 김유신을 낳고 태(胎)를 현의 남쪽 15리(里)에 묻으니 변하여 신(神)이 되었다. 이로 인해 태령산(胎靈山)이라고 이름하였다. 신라때부터 사우(祠宇)를 두고 봄과 가을로 향(香)을 내려 제사를 지내니 고려(高麗)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이 있다.
○ 전의현(全義縣).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금지(金地)로 고쳐 대록군(大麓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청천현(淸川縣). 옛 살매현(薩買縣)으로 고려에 이르러 지금 이름을 칭하고 내속(來屬)하였다.
○ 도안현(道安縣). 본래 고구려의 도서현(道西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도서(都西)라고 고쳐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청당현(靑塘縣). 일명 청연현(靑淵縣)이라고 하였는데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을 칭하고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도안현(道安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 연기현(燕岐縣). 본래 백제의 두잉지현(頭仍只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목천 감무(木川監務)가 와서 겸임하게 하였다. 원수산(元帥山)【충렬왕(忠烈王) 때 한희유(韓希愈)와 김흔(金) 등이 현(縣) 남쪽의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합단적(哈丹賊)을 크게 패배시켰으므로 세속에서 군사를 주둔시킨 곳을 이름하여 원수산(元帥山)이라고 하였다.】 이 있고 웅진(熊津)【즉 신라 서쪽의 개천 웅천하(熊川河)로 중사(中祀)에 실려있다.】 이 있다.
○ 회인현(懷仁縣). 본래 백제의 미곡현(未谷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매곡(昧谷)이라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회덕 감무(懷德監務)로 와서 겸임하게 하였다가 신우(辛禑) 9년에 별도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 공주(公州)
본래 백제의 웅천(熊川)으로 문주왕(文周王)이 한성(漢城)으로부터 이곳에 도읍을 옮겼고 성왕(聖王)에 이르러 또 도읍을 남부여(南扶餘)로 옮겼다가 신라(新羅)가 당(唐)과 더불어 협공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당(唐)이 웅진 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군사를 머물러 두어 지키게 하다가 당(唐) 나라 군사가 이미 물러가니 신라가 그 땅을 모두 거느리게 되었으며 신문왕(神文王)이 고쳐 웅천주(熊川州)로 삼아 도독(都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또 웅주(熊州)로 고쳤다.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매 공주(公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안절군(安節軍)이라 칭하고 하남도(河南道)에 소속하였다가 현종(顯宗) 3년에 절도사(節度使)를 폐하였다.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내렸고 충혜왕(忠惠王) 후2년에 원(元) 나라의 활활적평장(闊闊赤平章)의 아내 경화 옹주(敬和翁主)의 외향(外鄕)이므로 올려 목(牧)으로 삼았다. 계룡산(鷄龍山)【즉 신라의 서악(西岳)으로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과 웅진연소(熊津衍所)【상류는 금강(錦江)이 된다.】 가 있다. 별호(別號)를 회도(懷道)【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명종(明宗) 6년에 주(州)의 명학소(鳴鶴所) 사람 망이(亡伊)가 무리를 불러모아 공주(公州)를 쳐 함락시키자 조정에서 그 소(所)를 올려 충순현(忠順縣)으로 삼고 영위(令尉)를 두어 이를 무마하였다가 뒤에 내리니 다시 반란하였으므로 이에 이를 삭제하였다.】 라 한다. 4군(郡)과 8현(縣)이 속해있다.
○ 덕은군(德恩郡). 본래 백제의 덕근군(德近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덕은군(德殷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견훤(甄萱)의 묘(墓)가 있다.
○ 회덕군(懷德郡). 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후천(朽淺)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비풍군(比豊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계족산(鷄足山)이 있다.
○ 부여군(扶餘郡). 본래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사비(泗)라고도 함.】 으로 백제 성왕(聖王)이 웅천(熊川)으로부터 와서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는데 의자왕(義慈王) 때에 이르러 신라가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唐) 나라 군사가 이미 떠나매 신라는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고 문무왕(文武王) 12년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는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천정대(天政臺)․조룡대(釣龍臺)․낙화암(落花巖)이 있다.
○ 연산군(連山郡). 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황산군(黃山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개태사(開泰寺) 【태조(太祖)가 이미 백제를 평정하여 황산곡(黃山谷)에다 큰 절을 세우고 산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開泰)라 하였다.】 가 있다.
○ 시진현(市津縣). 본래 백제의 가지내현(加知柰縣)【가을내(加乙乃) 또는 신포(薪浦)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덕은군(德恩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시진포(市津浦)가 있다.
○ 덕진현(德津縣). 본래 백제의 소비포현(所比浦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적오(赤烏)로 고쳐 비풍군(比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진잠현(鎭岑縣). 본래 백제 진현현(眞峴縣)【진(眞)은 정(貞)으로도 씀.】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진령(鎭嶺)으로 고쳐 황산군(黃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유성현(儒城縣). 본래 백제의 노사지현(奴斯只縣)【사(斯)는 질(叱)로도 씀.】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비풍군(比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는 옛 이름 그대로 내속(來屬)하였다. 온천(溫泉)이 있다.
○ 석성현(石城縣). 본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석산(石山)으로 고쳐 부여군(扶餘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이를 폐지하였다. 공민왕( 20년에 부여 감무(扶餘監務)로 와서 겸임하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다시 감무(監務)를 두었다.
○ 정산현(定山縣). 본래 백제의 열기현(悅己縣)【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열성(悅城)으로 고쳐 부여군(扶餘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이산현(尼山縣). 본래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웅주(熊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신풍현(新豊縣). 본래 백제의 벌음지현(伐音支縣)【무부현(武夫縣)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청음(淸音)으로 고쳐 웅주(熊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홍주(洪州)
성종(成宗) 14년에 운주 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3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으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태조실록(太祖實錄)》 10년 3월에 「왕이 운주(運州)에 들어가다」 의 주(註)에 말하기를 「곧 지금의 홍주(洪州)이다」라고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목(牧)으로 삼았고 17년에 지주사(知州事)로 내렸으며 20년에 다시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안평(安平)이라 하고 또 해풍(海豊)【모두 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으며 또 호(號)를 해흥(海興)이라 한다. 3군(郡)과 11현(縣)이 속해있다.
○ 혜성군(城郡). 본래 백제의 혜군(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19년에 현(縣) 사람 복규(卜奎)가 합단(哈丹)을 막아낸 공(功)이 있었으므로 올려 현령(縣令)으로 삼았고 뒤에 또 지면주사(知沔州事)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마산(馬山)이라 하고 또 호(號)를 해종(海宗)이라 한다.
○ 대흥군(大興郡). 본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금주(今州)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임성군(任城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당(唐) 나라 소정방(蘇定方)의 사당(祠堂)이 대잠도(大岑島)에 【봄과 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드린다.】 있다.
○ 결성군(結城郡). 본래 백제의 결기현(結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결성군(潔城郡)이라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감무(監務)를 두었다.
○ 고구현(高丘縣). 본래 백제의 우견현(牛見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목우(目牛)로 고쳐 이산군(伊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보령현(保寧縣). 본래 백제의 신촌현(新村縣)【사촌현(沙村縣)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신읍(新邑)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란도(高鸞島)가 있다.
○ 흥양현(興陽縣). 옛날에는 원군(遠軍)이라 불렀고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을 칭하고 내속(來屬)하였다.
○ 청양현(靑陽縣). 본래 백제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청무(靑武)로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 임내(任內)에 속하였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 신평현(新平縣). 본래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덕풍현(德豊縣). 본래 백제의 금물현(今勿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금무(今武)로 고쳐 이산군(伊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이산현(伊山縣). 본래 백제의 마시산군(馬尸山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가야산(伽倻山)이 있다.
○ 당진현(唐津縣). 본래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縣)【부지군(夫只郡)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여미현(餘美縣).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여읍(餘邑)으로 고쳐 혜성군(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여양현(驪陽縣).【여(驪)는 여(黎)라고도 씀】 본래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사라현(沙羅縣)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신량(新良)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감무(監務)를 두었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정해현(貞海縣). 세상에 전하기를 태조(太祖) 때 몽웅역리(夢熊驛吏) 한씨(韓氏)가 큰 공(功)이 있어 대광(大匡)의 호(號)를 내리고 고구현(高丘縣)의 땅을 베어 현(縣)을 두어 그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천안부(天安府)
태조 13년에 동․서두솔(東西兜率)을 합하여 천안부(天安府)로 하고 도독(都督)을 두었다. 【속담에 전하기를 술사(術師) 예방(藝方)이란 사람이 태조(太祖)에게 말하기를 ?삼국의 중심이며 오룡(五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세이니 만약 대관(大官)을 두면 백제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태조(太祖)가 이에 산을 올라가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부(府)를 두었다고 한다.】 성종(成宗) 14년에 고쳐 환주 도단련사(州都團練使)로 삼았다가 목종(穆宗) 8년에 단련사(團練使)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옛 이름을 복구하여 지부사(知府事)로 하였다. 고종(高宗) 43년에 몽고군을 피하여 선장도(仙藏島)로 들어갔다가 뒤에 출륙(出陸)하였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지하매 부(府)를 고쳐 영주(寧州)라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11년에 다시 천안부(天安府)라 하였다. 별호(別號)를 임환(任歡)이라 하며 1군(郡)과 7현(縣)이 속해있다.
○ 온수군(溫水郡).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올려 주(州)로 삼아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뒤에 주(州)를 폐하고 군(郡)으로 삼았으며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온천(溫泉)이 있다.
○ 아주(牙州). 본래 백제의 아술현(述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음봉(陰峯)이라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고쳐 인주(仁州)라 하였는데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자사(刺史)를 폐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영인(寧仁)이라 【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한다.
○ 신창현(新昌縣).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기량(祈梁)이라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현(縣) 서쪽의 장포(獐浦)에 축성(築城)하고 부근 주현(州縣)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배에 싣고 서울로 운반케 하니 비로소 만호(萬戶)를 두어 감무(監務)를 겸하게 하였다. 도고산(道高山)이 있다.
○ 풍세현(豊歲縣).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순치(馴雉)라 고쳐 대록군(大麓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를 자천(川)이라 한다.
○ 평택현(平澤縣). 옛 하팔현(河八縣)으로 고려에서 지금 이름을 칭하고 내속(來屬)하였다.
○ 예산현(禮山縣). 본래 백제의 오산현(烏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산(孤山)이라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태조(太祖) 2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직산현(稷山縣).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나라를 열고 도읍을 세웠다가 뒤에 고구려가 이를 취하여 고쳐 사산현(蛇山縣)이라 하니 신라도 이에 그대로 두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려는 하양창(河陽倉)을 고쳐 경양현(慶陽縣)으로 삼고 영(令)을 두어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하게 하였다.】
○ 안성현(安城縣). 본래 고구려의 내혜홀(奈兮忽)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백성군(白城郡)이라 하였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송도(松都)에 들어와 왕이 남쪽으로 피하니 적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양광도(楊廣道)의 주군(州郡)을 항복시키고자 하니 이르는 곳마다 감히 그 기세를 꺾지 못하였으나 오직 안성현(安城縣) 사람만이 거짓 항복하는 체 하고 잔치를 베풀어 먹이고는 그 취한 틈을 타서 우두머리 6명의 목을 베니 적이 이로 말미암아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11년에 공(功)으로써 지군사(知郡事)로 올리고 수원(水原) 임내(任內)의 양량(陽良)․감미탄(甘彌呑)․마전(馬田)․신곡(薪谷)의 네군데의 부곡(部曲)을 베어 주었으나 뒤에 김용(金鏞)이 뇌물을 받았으므로 세 부곡(部曲)을 도로 수원(水原)에 소속시켰다.
§ 가림현(嘉林縣)
본래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가(加)를 가(嘉)로 고쳤고 성종(成宗) 14년에 임주 자사(林州刺史)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영(令)을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2년에 원(元)의 아패해평장(阿海平章)의 아내 조씨(趙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지임주사(知林州事)로 올렸다. 1군(郡)과 4현(縣)이 속해있다.
○ 서림군(西林郡). 본래 백제의 설림군(舌林郡)【남양(南陽)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도 이에 그 이름을 그대로 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에 현(縣) 사람 이언충(李彦忠)이 충선왕(忠宣王)에게 공로가 있어 지서주사(知西州事)로 올렸다. 웅진명소(熊津溟所)가 있다.
○ 비인현(庇仁縣). 본래 백제의 비중현(比衆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도 이에 그대로 두었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홍산현(鴻山縣). 본래 백제의 대산현(大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한산(翰山)이라 고쳐 가림군(嘉林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하였다가 명종(明宗) 5년에 한산 감무(韓山監務)로 와서 겸임하게 하였다.
○ 남포현(藍浦縣). 본래 백제의 사포현(寺浦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신우(辛禑) 6년에 왜구로 인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공양왕(恭讓王) 2년에 이르러 비로소 진성(鎭城)을 두고 유망민을 불러 모았다.
○ 한산현(韓山縣). 본래 백제의 마산현(馬山縣)으로 신라도 이에 그대로 두고 가림군(嘉林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고 고려는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하였다가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올려 지한주사(知韓州事)로 삼았다.
§ 부성현(富城縣)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부성군(富城郡)으로 하였고 고려에서도 이에 그대로 두었는데 인종(仁宗) 22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명종(明宗) 12년에 현(縣) 사람이 영위(令尉)를 핍박하여 가두매 유사(有司)가 아뢰어 관호(官號)를 삭제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10년에 현(縣) 사람 대호군(大護軍) 정인경(鄭仁卿)이 공(功)이 있어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로 올렸다. 34년에 올려 서주목(瑞州牧)으로 삼았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지함에 내려 서령부(瑞寧府)로 삼았고 뒤에 또 지서주사(知瑞州事)로 내렸다. 2현(縣)이 속해있다.
○ 지곡현(地谷縣). 본래 백제의 지육현(知六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지육(知育)으로 고쳐 부성군(富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
○ 소태현(蘇泰縣). 본래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부성군(富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하였는데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에 소속하였고 충렬왕(忠烈王) 때에 환자(宦者) 이대순(李大順)이 원(元) 나라의 총애가 있어 현(縣)으로써 거향(居鄕)을 삼으니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올렸다.
경상도(慶尙道)
§ 경상도(慶尙道)
삼한(三韓) 때에는 진한(辰韓)이 되고 삼국(三國) 때에는 신라가 되며 태조(太祖)가 신라와 백제를 통합함에 이르러 동남도 도부서사(東南道都部署使)를 두어 경주(慶州)에 관사(官司)를 두었고 성종(成宗) 14년에 경계(境界)를 나누어 10도(道)로 정할 때 상주(尙州) 관할지역을 영남도(嶺南道)로, 경주(慶州)와 금주(金州) 관할 지역을 영동도(嶺東道)로, 진주(晉州) 관할지역을 산남도(山南道)로 삼았다.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경상 진주도(慶尙晋州道)라 칭하였고 명종(明宗) 원년(元年)에 나누어 경상(慶尙)과 진합주(晋陜州) 양도(兩道)로 삼았다가 16년에 경상주도(慶尙州道)로 삼았고 신종(神宗) 7년에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로 삼았으며 그 뒤에 또 고쳐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로 삼았다. 고종(高宗) 46년에 화(和)․등(登)․정(定)․장(長) 4주(州)가 몽고군에게 점령되어 도내(道內)의 평해(平海)․덕원(德原)․영덕(盈德)․송생(松生)을 분리하여 명주도(溟州道)에 예속(隸屬)시켰고 충렬왕(忠烈王) 16년에 또 덕원(德原)․영덕(盈德)․송생(松生)을 동계(東界)로 옮겨 예속(隸屬)시켰으며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에 경상도(慶尙道)로 정하게 되었다. 1경(京)․2목(牧)․3부(府)․30군(郡)․92현(縣)을 관령(管領)하였다
§ 동경 유수관(東京留守官) 경주(慶州)
본래 신라의 고도(古都)로 시조(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이 나라를 열어 도읍(都邑)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耶伐)이라 하였으며 혹은 사라(斯羅)로 칭하고 혹은 사로(斯盧)로 칭하다가 뒤에 신라라고 불렀다. 탈해왕(脫解王) 9년에 시림(始林)에 계괴(鷄怪)가 있어 다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그대로 두어 국호를 삼다가 기림왕(基臨王) 10년에 다시 나라이름을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태조(太祖) 18년에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여 나라를 없애고 경주(慶州)라 하였는데 23년에 올려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았고 그 주(州)의 6부(部)의 이름을 고쳐 양부(梁部)를 중흥부(中興部)로, 사량부(沙梁部)를 남산부(南山部)로, 본피부(本彼部)를 통선부(通仙部)로, 습비부(習比部)를 임천부(臨川部)로, 한기부(漢祗部)를 가덕부(加德部)로, 모량부(牟梁部)를 장복부(長福部)라 하였다. 성종(成宗) 6년에 고쳐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삼았고 14년에 유수사(留守使)를 칭하고 영동도(嶺東道)에 소속시켰으며 현종(顯宗) 3년에 유수관(留守官)을 폐하고 내려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삼았고 5년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로 고쳤다가 21년에 다시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삼았다. 때에 예방(銳方)이 올린바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고려(高麗)에 삼경(三京)이 있다?는 글이 있었으므로 다시 둔 것이다. 신종(神宗) 5년에 동경 야별초(東京夜別抄)가 난을 일으켜 주군(州郡)을 공격하였으므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는데 7년에 동경(東京) 사람들이 신라를 다시 일으킨다는 말을 지어 상(尙)․청(淸)․충(忠)․원주도(原州道)에 격문(檄文)을 전하고 난(亂)을 꾀하였으므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내리고 관내(管內)의 주(州)․부(府)․군(郡)․현(縣)․향(鄕)․부곡(部曲)을 빼앗아 나누어 안동(安東)과 상주(尙州)에 예속시켰다가 고종(高宗) 6년에 다시 유수(留守)로 삼았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계림부(鷄林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우(辛禑) 2년에 부(府)가 금주(金州)와 더불어 영(營)이 되고자 다툴 때에 도평의사(都評議使)가 아뢰기를,
?금주(金州)의 적(賊)이 안렴(按廉)을 죽였고 또한 영(營)을 설치한 기간이 계림(鷄林)에 미치지 못하며 하물며 바다에 가까워 왜적이 두려우니 바라건대 계림(鷄林)에 옮겨 설치하소서.?
하니 우왕(禑王)이 이를 따랐다. 별호(別號)를 낙랑(樂浪)【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혁거세왕릉(赫居世王陵)과 김유신묘(金庾信墓)가 있고 또 첨성대(瞻星臺)【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축성(築成)한 것이다.】 와 봉덕사(奉德寺)【신라 혜공왕(惠恭王)이 주조(鑄造)한 대종(大鐘)은 무게가 동(銅) 120,000근(斤)이고 치는 소리가 100리(里)에 들리었다.】 가 있다. 4군(郡)과 10현(縣)이 소속하고 5군(郡)【방어군(防禦郡) 4개와 지사군(知事郡) 하나.】 을 관령(管領)하였다.
○ 흥해군(興海郡). 본래 신라의 퇴화군(退火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의창군(義昌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민왕(恭愍王) 16년에 국사(國師) 천희(千熙)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곡강(曲江)이라고 하고 또는 호(號)를 오산(鰲山)이라 하였다.
○ 장산군(章山郡). 본래 압량소국(押梁小國)【압독(押督)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新羅) 지미왕(祗味王)이 취하여 군(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장산군(獐山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왕의 이름과 같은 것을 피하여 경산(慶山)으로 고쳤고 충숙왕(忠肅王) 4년에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므로 올려 현령관(縣令官)을 삼았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왕비(王妃) 노씨(盧氏)의 고향이므로 올려 지군사(知郡事)를 삼았다. 별호(別號)는 옥산(玉山)이다.
○ 수성군(壽城郡). 본래 신라(新羅) 위화군(火郡)【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수창군(壽昌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해안현(解顔縣)을 겸임하였다.
○ 영주(永州). 고려(高麗) 초에 신라 임고군(臨皐郡)을 합하여 도동(道同)․임천(臨川) 2현(縣)을 두었다【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함】 성종(成宗) 14년에 영주 자사(永州刺史)로 삼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후에 올려 지주사(知州事)를 삼았다. 별호(別號)를 익양(益陽)【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는 호(號)를 영양(永陽)【고려말에 이지은소(梨旨銀所)를 올려 현(縣)으로 삼았다.】 이라 하였다.
○ 안강현(安康縣). 본래 신라 비화현(比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義昌郡)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취하여 음즙벌화현(音汁伐火縣)을 두었고 뒤에 현(縣)에 합속(合屬)하였다.】
○ 신녕현(新寧縣). 본래 신라 사정화현(史丁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임고군(臨皐郡) 영현(領縣)으로 삼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경덕왕(景德王)이 매숙차현(買熟次縣)을 고쳐 구백현(龜白縣)으로 삼았는데 뒤에 현(縣)에 합속(合屬)하였다.】
○ 자인현(慈仁縣). 본래 신라 노사화현(奴斯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장산군(獐山郡) 영현(領縣)으로 삼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하양현(河陽縣). 성종(成宗) 14년에 하주 자사(河州刺史)가 되었고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청하현(淸河縣). 본래 고구려 아혜현(阿兮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해아(海阿)로 이름을 고쳐 유인군(有隣郡)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연일현(延日縣). 본래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오량우(烏良友)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임정(臨汀)이라 고쳐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관군 만호(管軍萬戶)가 이를 겸임하였다.
○ 해안현(解顔縣). 본래 신라의 치생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수성 감무(壽城監務)가 이를 겸임하였다.
○ 신광현(神光縣). 본래 신라의 동잉음현(東仍音縣)【신을(神乙)이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기계현(杞溪縣). 본래 신라의 모혜현(芼兮縣)【화계(化)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다.
○ 장기현(長縣). 본래 신라의 지답현(只沓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기립(立)으로 고쳐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울주(蔚州)
본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취하여 현(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하곡(河曲)【하서(河西)라고도 함.】 이라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경덕왕(景德王)이 우화현(于火縣)을 우풍현(虞風縣)으로 고치고 율포현(栗浦縣)을 동진현(東津縣)으로 고쳐 모두 합속(合屬)시켰다. 태조(太祖) 때 군(郡) 사람 박윤웅(朴允雄)이 큰 공(功)이 있어 이에 하곡(河曲)․동진(東津)․우풍(虞風) 등의 현(縣)을 병합하여 흥례부(興禮府)를 두었고 뒤에 내려 공화현(恭化縣)으로 삼았다가 또 지울주사(知蔚州事)로 고쳤다. 혹은 말하기를 신라(新羅) 말에 학(鶴)이 와서 울었으므로 신학성(神鶴城)이라 칭한다 하고 또는 계변성(戒邊城), 또는 개지변(皆知邊)이라 하고 또는 화성군(火城郡)이라고도 한다.】 별호(別號)를 학성(鶴城)【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2현(縣)이 소속하였다.
○ 동래현(東萊縣). 본래 신라의 거칠산군(居柒山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동래군(東萊郡)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온천(溫泉)이 있다.
○ 헌양현(陽縣). 본래 신라의 거지화현(居知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양주(良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뒤에 언양(彦陽)으로 고쳤다.
§ 예주(禮州)
본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유인군(有隣郡)으로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고종(高宗) 46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박송비(朴松庇)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덕원 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삼았고 뒤에 올려 예주목(禮州牧)으로 삼았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하매 고쳐 영해부(寧海府)라 하였다. 별호(別號)를 단양(丹陽)【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관어대(觀魚臺)가 있다. 1부(府)․3군(郡)․2현(縣)이 속해있다.
○ 보성부(甫城府).【재암성(載岩城)이라고도 함】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칠파화현(柒巴火縣)을 고쳐 진보현(眞寶縣)이라 하고 또 고구려의 조람현(助攬縣)을 고쳐 진안현(眞安縣)이라 하였는데 고려(高麗) 초에 2현(縣)을 합하여 부(府)를 두었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영양군(英陽郡).【영(英)은 연(延)으로도 씀】 본래 고은현(古隱縣)으로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고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익양(益陽)이라 한다.【수비부곡(首比部曲)은 원래 현(縣)에 속해 있었는데 문종(文宗) 때에 울진(蔚珍)으로 이속(移屬)하였다가 부근(附近)이 되므로 환속(還屬)하였다.】
○ 평해군(平海郡). 본래 고구려의 근을어(斤乙於)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현(縣)의 사람 첨의 평리(僉議評理) 황서(黃瑞)가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갔을 때 왕을 잘 보필하여 돌아오니 공(功)으로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기성(箕城)이라 한다. 온천(溫泉)이 있다.
○ 영덕군(盈德郡). 본래 고구려의 야시홀군(也尸忽郡)으로 신라가 고쳐 야성군(野城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다시 고쳐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 청부현(靑鳧縣). 본래 고구려의 청이현(靑已縣)으로 신라(新羅)에서 이름을 적선(積善)으로 고쳐 야성군(野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부이현(鳧伊縣)이라 하였다가 또 고쳐 운봉현(雲鳳縣)이라 하고 성종(成宗) 5년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송생현(松生縣).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금주(金州)
본래 가락국(駕洛國)으로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18년에 가락(駕洛)의 족장인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등 9명이 그 부민(部民)을 거느리고 계음(飮)하는데 구지봉(龜旨峰)을 바라보니 이상한 소리가 있는지라 나아가 보니 금합(金)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속에 금색의 알[卵]이 있어 둥글기가 해[日]와 같았다. 아홉 사람이 절하고 신기하게 생각하여 받들어 아도간(我刀干)의 집에 두었는데 이튿날 아홉 사람이 모두 모여 궤를 열고 보니 한 동자(童子)가 알을 깨고 나타났는데 나이 15세 가량 되었으며 용모가 심히 위대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예(禮)를 극진히 하여 절하였다. 동자(童子)는 날로 준수하게 자라 10여 일을 지나매 키가 9척(尺)이나 되었다. 이 달 보름에 아홉 사람이 드디어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곧 수로왕(首露王)이다. 국호(國號)를 가락(駕洛)이라 하고 가야(伽倻)라고 칭하니 뒤에 고쳐 금관국(金官國)이 되었다. 사방 경계(境界)를 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며 서남쪽의 대해(大海)에 접하고 서북쪽은 지리산(智異山)으로 경계로 하였다. 즉위한 지 158년만에 훙(薨)하였다. 9대손(孫) 구해(仇亥)에 이르러 국탕(國帑)과 보물(寶物)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수로왕(首露王) 이후로 거증왕(居登王)․마품왕(麻品王)․거질미왕(居叱彌王)․이시품왕(伊尸品王)․좌지왕(坐知王)․취희왕(吹希王)․질지왕(知王)․겸지왕(鉗知王)․구해왕(仇亥王)【해(亥)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충(衝)으로 썼음.】 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가짐이 무릇 491년으로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미 항복을 받고는 객례(客禮)로써 대우하고 그 나라로써 식읍(食邑)을 삼아 금관군(金官郡)이라 불렀다. 문무왕(文武王)은 금관 소경(金官小京)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은 김해 소경(金海小京)으로 삼았으며 태조(太祖) 23년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고치매 김해부(金海府)라 하였고 뒤에 내려 임해현(臨海縣)으로 삼았다가 다시 올려 군(郡)으로 삼았고 성종(成宗) 14년에 고쳐 금주 안동 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삼았으며 현종(顯宗) 3년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원종(元宗) 11년에 방어사(防禦使) 김훤(金)이 밀성(密城)의 난(亂)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올려 금녕 도호부(金寧都護府)로 삼았고 충렬왕(忠烈王) 19년에 내려 현(縣)으로 삼았다가 34년에 올려 금주목(金州牧)으로 삼았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지하매 다시 김해부(金海府)로 삼았다. 수로왕묘(首露王墓)【주(州)의 서쪽에 있음.】 , 초현대(招賢臺)【주(州)의 동쪽에 있음. 세상에 전하기를 가락국(駕洛國)의 거증왕(居登王)이 이 대(臺)에 올라 칠점산(七點山)의 참시선인(始仙人)을 초대하니 참시선인(始仙人)이 배를 타고 왔음으로 해서 이름 지었다고 한다.】 가 있고 또 삼분수(三分水)【부(府)의 동쪽 황산강(黃山江)이 50여 리(里)를 흐르다가 삼포(三浦)로 나눠져 바다에 들어가니 속칭 삼차수(三叉水)라 한다.】 가 있고 2군(郡)과 3현(縣)이 속해있다.
○ 의안군(義安郡). 본래 신라의 굴자군(屈自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8년에 다시 이름을 의창(義昌)이라 하고 올려 현령(縣令)으로 삼으니 원(元) 나라 세조(世祖)의 동정(東征)에 기여한 공로를 상주기 위한 것이었다. 별호(別號)를 회산(檜山)이라 한다.
○ 함안군(咸安郡). 본래 아시량국(阿尸良國)【아라가야(阿那加耶)라고도 함.】 으로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를 멸망시키고 군(郡)으로 삼았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에 함주 자사(咸州刺史)로 삼았다가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복구하여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22년에 현(縣) 사람 주영찬(周英贊)의 딸이 명(明) 나라에 들어가 관인(官人)이 되었으므로 드디어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하였다, 별호(別號)를 금라(金羅)라 한다.
○ 칠원현(漆園縣).【원(園)은 원(原)이라고도 씀】 본래 신라의 칠토현(漆吐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칠제(漆堤)로 고쳐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구성(龜城)이라 한다.
○ 웅신현(熊神縣). 본래 신라의 웅지현(熊只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다.【고려에서 성법부곡(省法部曲)을 올려 구산현(龜山縣)으로 삼아 금주(金州) 임내(任內)에 소속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때에 칠원(漆原)에 이속(移屬)하였다.】 가덕도(加德島)가 있다.
○ 합포현(合浦縣). 본래 신라의 골포현(骨浦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8년에 다시 이름을 회원(會原)이라 고치고 올려 현령(縣令)으로 삼으니 원나라 세조(世祖)의 동정(東征)에 기여한 공로를 상(賞)주기 위해서였다. 별호(別號)를 환주(還珠)라 한다. 월영대(月影臺)가 있다. 【고려(高麗)가 완포향(莞浦鄕)을 올려 현(縣)으로 하였다.】
§ 양주(梁州)
신라 문무왕(文武王) 5년에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베어서 삽량주(良州)를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양주(良州)라 하여 9주(州)의 하나로 삼았다. 태조(太祖) 23년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뒤에 원(元) 나라 중서성(中書省)이 우리 나라의 관(官)이 번잡하여 백성에게 폐(弊)가 됨을 말하는 까닭에 밀성(密城)에 병합하였다. 그러나 주현(州縣)이 수재(守宰)에게 명(命)을 받고자 오고감이 번거로워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 충렬왕(忠烈王) 30년에 이르러 다시 복구하였다. 별호(別號)를 의춘(宜春)【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순정(順正)이라 한다. 가야진(伽倻津)과 황산강(黃山江)【무안(務安)의 용진강(龍津江)과 광양(光陽)의 섬진강(蟾津江)와 함께 배류(背流)하는 삼대강(三大江)이라고 칭하였다.】 이 있다. 또 가야진연소(伽倻津衍所)가 있다. 2현(縣)이 속해있다.
○ 동평현(東平縣). 본래 신라의 대증현(大甑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동래군(東萊郡)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다. 절영도(絶影島)가 있다.
○ 기장현(機張縣). 본래 신라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동래군(東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뒤에 이속(移屬)하였다가 현종(顯宗) 9년에 또 울주(蔚州)로 이속(移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거성(車城)이라 한다.
§ 밀성군(密城郡)
본래 신라의 추화군(推火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나 성종(成宗) 14년에 밀주 자사(密州刺史)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를 칭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에 군(郡) 사람 조천(趙仟)이 군수(郡守)를 죽이고 진도(珍島)의 반역 무리 삼별초(三別抄)에 호응하였으므로 강등하여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삼아 계림(鷄林)에 소속시켰다. 이에 앞서 대성(臺省)이 여러 번 군(郡)의 이름을 내릴 것을 청하였으나 일을 맡은 자가 읍인(邑人)의 뇌물을 받고 매양 저지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극론(極論)하여 이에 따랐으나 뒤에 다시 밀성현(密城縣)으로 칭하게 되었고 11년에 올려 군(郡)으로 삼았다가 또 내려 현(縣)으로 삼았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증조(曾祖) 익양후비(益陽侯妃) 박씨(朴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밀양부(密陽府)로 삼았다.【고려에서 수산부곡(守山部曲)으로 수산현(守山縣)을 삼았다.】 2군(郡)과 4현(縣)이 속해있다.
○ 창녕군(昌寧郡).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比自火郡)【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함】 으로 진흥왕(眞興王) 16년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26년에 주(州)를 폐지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화왕군(火王郡)이라 하였으며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창성(昌城) 또는 하성(夏城)이라 한다.
○ 청도군(淸道郡).【도주(道州)라고도 함.】 고려(高麗) 초에 신라 대성군(大城郡)의 오악(烏岳)․형산(荊山)․소산(蘇山) 3현(縣)을 합쳐 군(郡)으로 삼아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4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혜왕(忠惠王) 후4년에 군(郡) 사람 상호군(上護軍) 김선장(金善莊)이 공(功)이 있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가 이듬해에 다시 감무(監務)로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15년에 군(郡) 사람 김한귀(金漢貴)가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다시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 현풍현(玄豊縣).【풍(豊)은 풍(風)으로도 씀】 본래 신라의 추량화현(推良火縣)【추(推)는 삼(三)으로도 씀】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다시 현효(玄驍)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밀성(密城)의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을 베어 이에 소속하였다.
○ 계성현(桂城縣).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15년에 영산(靈山)에 이속(移屬)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환속(還屬)하였다.
○ 영산현(靈山縣). 본래 신라의 서화현(西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상약(尙藥)으로 고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으며 충경왕(忠敬王) 1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온천(溫泉)이 있고 또 가야진명소(伽倻津溟所)가 있다.
○ 풍각현(豊角縣). 본래 상화촌현(上火村縣)으로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다
§ 진주목(晋州牧)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거타(居)라고도 함.】 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3년에 취하여 주(州)를 두었고 신문왕 4년에 거타주(居州)를 나누어 청주 총관(菁州摠管)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강주(康州)라 하였고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청주(菁州)라 하였으며 태조(太祖)가 또 강주(康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니 주(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호(號)를 진주 정해군(晋州定海軍)이라 하고 산남도(山南道)에 소속시켰다가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하였으며 9년에 목(牧)으로 정하니 8목(牧)의 하나가 된다. 별호(別號)를 진강(晋康)【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그 호(號)를 청주(菁州)라 하며 또 호(號)를 진양(晉陽)이라 한다. 화개(花開)․살천(薩川) 두 부곡(部曲)【그 장(長)은 모두 머리를 깎고 있었기 때문에 칭하기를 중의 머리[僧首]라 하였다.】 이 있고 또 창선도(彰善島)【섬[島]은 본래 신라의 유질부곡(有疾部曲)으로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고 올려 현(縣)으로 삼아 주(州)에 소속시켰으며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매 왕의 이름자(字)를 피하여 흥선(興善)으로 고쳤는데 뒤에 왜구로 인하여 인물(人物)이 함께 망실(亡失)하매 직촌(直村)이 되었다.】 가 있다. 2군(郡)과 7현(縣)이 소속하였고 1지사군(知事郡)과 3현령관(縣令官)을 관령(管領)하였다.
○ 강성군(江城郡). 본래 신라의 궐지군(闕支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궐성군(闕城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고쳐 강성현(江城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올려 군(郡)으로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하동군(河東郡). 본래 신라의 한다사군(韓多沙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청하(淸河)라고 한다.
○ 사주(泗州). 본래 신라의 사물현(史勿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사수(泗水)라 고쳐 고성군(固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으며 현종(顯宗) 2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악양현(岳陽縣).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하동군(河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영선현(永善縣). 본래 신라의 일선현(一善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상선(尙善)으로 고쳐 고성군(固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다
○ 진해현(鎭海縣).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팔진(八鎭)【우산(牛山)이라고도 함】 이라 하였다.
○ 곤명현(昆明縣). 신라 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반성현(班城縣). 신라 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의령현(宜寧縣). 본래 신라의 장함현(獐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함안군(咸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신번현(新繁縣)에 소속시켰다.
§ 합주(陜州)
본래 신라의 대량주군(大良州郡)【양(良)은 야(耶)로도 씀.】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강양군(江陽郡)으로 삼았는데 현종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써 즉위하였고 또 황비(皇妃) 효숙 왕후(孝肅王后)의 향(鄕)이므로 지합주사(知陜州事)로 올렸다. 12현(縣)이 속해 있다.
○ 가수현(嘉樹縣).【수(樹)는 수(壽)라고도 씀】 본래 신라의 가주화현(加主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강주(康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다. 별호(別號)를 봉성(鳳城)이라 한다.
○ 삼기현(三岐縣). 본래 신라의 삼지현(三支縣)【마장(麻杖)이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강양군(江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공민왕(恭愍王) 2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산음현(山陰縣). 본래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궐성군(闕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산양(山陽)이라 한다.
○ 단계현(丹溪縣). 본래 신라의 적촌현(赤村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단읍(丹邑)으로 고쳐 궐성군(闕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강성현(江城縣)으로 이속(移屬)하였다.
○ 가조현(加祚縣). 본래 신라의 가소현(加召縣)【방언(方言)이 서로 가까운 말이므로 인하여 소(召)를 변하여 조(祚)로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함음(咸陰)으로 고쳐 거창군(居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옛 이름을 복구하여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고 뒤에 거창(居昌)에 환속(還屬)하였다가 원종(元宗) 12년에 거제(巨濟)에 이속(移屬)하였다.
○ 감음현(感陰縣). 본래 신라의 남내현(南內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여선(餘善)으로 고쳐 거창군(居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의종(毅宗) 15년에 현(縣) 사람 자화(子和) 등이 정서(鄭敍)의 처(妻)가 현리(縣吏) 인량(仁梁)과 더불어 임금과 대신을 저주한다고 거짓으로 아뢰어 자화(子和)를 강에 던지고 현(縣)을 내려 부곡(部曲)으로 삼았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다시 감무(監務)를 두어 이안현(利安縣)을 이에 소속시켰다.
○ 이안현(利安縣). 본래 신라의 마리현(馬利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천령군(天嶺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음(感陰)으로 이속(移屬)하였다.
○ 신번현(新繁縣). 본래 신라의 신이현(新縣).【주오촌(朱烏村) 또는 천천현(泉川縣)이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의상(宜桑)으로 고쳐 강양현(江陽縣)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다
○ 야로현(冶爐縣). 본래 신라의 적화현(赤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고령군(高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 하였다.
○ 초계현(草溪縣). 본래 신라의 초팔혜현(草八兮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팔계(八溪)로 고쳐 강양군(江陽郡)의 영현(領顯)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3년에 현(縣) 사람 정수기(鄭守琪)․변우성(卞遇成)이 공이 있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청계(淸溪)【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라 한다. 황둔진(黃芚津)이 있다.
○ 거창현(居昌縣). 본래 신라의 거열군(居烈郡)【거타(居)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함양현(咸陽縣).【함성군(含城郡)이라고도 함】 본래 신라의 속함군(速含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천령군(天嶺郡)이라 하였고 성종(成宗) 14년에 올려 허주 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를 삼았다가 현종(顯宗) 3년에 내려 함양군(咸陽郡)【뒤에 함(含)을 고쳐 함(咸)으로 함】 으로 하여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내려 현(縣)으로 삼아 감무(監務)를 두었다.
○ 고성현(固城縣). 본래 소가야국(小伽倻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여 고자군(古自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다. 성종(成宗) 14년에 고주 자사(固州刺史)로 삼았다가 뒤에 내려 현(縣)으로 삼았다. 현종(顯宗) 9년에 거제(巨濟)에 속하였다가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원종(元宗) 7년에 군(郡)으로써 올려 주(州)를 삼았고 충렬왕(忠烈王) 때에 남해(南海)에 병합하였다가 이어 복구하였다. 별호(別號)를 철성(鐵城)이라 한다.
§ 남해현(南海縣)
본래 바다 가운데 섬으로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남해군(南海郡)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7년에 왜구로 인하여 땅을 잃고 임시로 진주(晉州) 임내(任內)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옮겨 살았다. 2현(縣)이 소속하였다.
○ 난포현(蘭浦縣). 본래 신라의 내포현(內浦縣)으로 남해도(南海島) 안에 있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高麗) 초에도 이에 그대로 두었는데 뒤에 왜구로 인하여 인물(人物)이 함께 모두 없어졌다.
○ 평산현(平山縣). 본래 평서산현(平西山縣)【서평(西平)이라고도 함.】 으로 또한 남해도(南海道)에 있으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남해군(南海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이에 그대로 두었는데 뒤에 왜구로 인하여 인물(人物)이 함께 모두 없어졌다.
§ 거제현(巨濟縣)
본래 바다 가운데 섬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처음으로 상군(裳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거제군(巨濟郡)이라 하였는데 현종(顯宗) 9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원종(元宗) 12년에 왜구로 인하여 땅을 잃고 임시로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에 옮겨 살도록 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관성(管城)에 병합하였다가 이어 복구하였다. 북가도(北加島)와 조음도(助音島)가 있고 3현(縣)이 소속하였다.
○ 아주현(鵝洲縣). 본래 신라의 거로현(巨老縣)으로 거제도(巨濟島) 안에 있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도 이에 그대로 두었다
○ 송변현(松邊縣). 본래 신라의 송변현(松邊縣)으로 역시 거제도(巨濟島) 안에 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남수(南垂)로 고쳐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옛 이름을 복구하여 그대로 소속하였다.
○ 명진현(溟珍縣). 본래 신라의 매진이현(買珍伊縣)으로 역시 거제도(巨濟島) 안에 있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이에 그대로 두었다
§ 상주목(尙州牧)
본래 사벌국(沙伐國)으로 신라 첨해왕(沾解王)이 취하여 주(州)로 삼았는데 법흥왕(法興王)이 고쳐 상주(上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고 진흥왕(眞興王)이 주(州)를 폐하여 상락군(上洛郡)으로 삼았다가 신문왕이 다시 주(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상주(尙州)라 하였으며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사벌주(沙伐州)라 하였다. 태조(太祖) 23년에 다시 고쳐 상주(尙州)라 하였고 그 뒤에 다시 고쳐 안동 도독부(安東都督府)로 삼았다가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니 상주(尙州)는 곧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호(號)를 귀덕군(歸德軍)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소속시켰고 현종(顯宗) 3년에 절도사(節度使)를 폐하매 다시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삼았으며 5년에 고쳐 상주 안무사(尙州安撫使)로 삼았다가 9년에 정하여 목(牧)이 되매 8목(牧)의 하나가 되었다. 별호(別號)를 상락(上洛)【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상산(商山)【속담에 전하기를 주(州)의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의 사람으로 성(姓)이 태(太)란 자가 도적을 잡은 공이 있었으므로 그 촌(村)을 올려 영순현(永順縣)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라 한다. 낙동강(洛東江)이 있고 또 큰 제방이 있어 이름을 공검(恭儉)【명종(明宗) 25년에 사록(司錄) 최정분(崔正)이 옛 터를 따라 축조(築造)하였다.】 이라 하였다. 7군(郡)과 17현(縣)이 소속하였고 2지사부(知事府)를 관령(管領)하였다.
○ 문경군(聞慶郡). 본래 신라의 관문현(冠文縣)【관현(冠縣)이라고도 하고 또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관산(冠山)이라 고쳐 고령군(古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고쳐 문희군(聞喜郡)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가은현(加恩縣)을 이에 소속시켰다.【현(縣)의 북쪽에 주흘산(主屹山)이 있다.】 지세가 험한 곳이 세 곳 있으니 초점(草岾)【현(縣)의 서쪽에 있음.】 ․이화현(伊火峴)【현(縣) 서쪽에 있음.】 ․관갑천(串岬遷)【현(縣)의 남쪽에 있음.】 이다.
○ 용궁군(龍宮郡). 본래 신라의 축산(竺山)【원산(園山)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성종(成宗) 14년에 올려 용주 자사(龍州刺史)로 삼았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였고 현종(顯宗) 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하풍진(河風津)이 있다.
○ 개령군(開寧郡). 본래 감문소국(甘文小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였다. 진흥왕(眞興王)이 군주(軍主)를 두어 청주(靑州)라 하였으며 진평왕이 주(州)를 폐하였고 문무왕이 감문군(甘文郡)으로 삼았으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보령군(報令郡). 본래 신라의 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삼년군(三年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보령군(保寧郡)이라 고쳤다.【뒤에 그 이름이 바뀌어 지금 이름으로 되었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속리산(俗離山)【신라때 속리악(俗離岳)이라 칭하여 중사(中祀)로 삼았다.】 이 있다.
○ 함창군(咸昌郡).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欖郡)【고릉군(古陵郡)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삼았는데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고령군(古寧郡)이라 하였고 광종(光宗) 15년에 함령군(咸寧郡)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영동군(永同郡). 본래 신라의 길동군(吉同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14년에 올려 계주 자사(稽州刺史)로 삼았으며 목종(穆宗) 8년에 자사(刺史)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6년에 올려 현령(縣令)으로 하였고 뒤에 다시 감무(監務)로 삼았다가 이어 파하였다.
○ 해평군(海平郡).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인종(仁宗) 21년에 일선현(一善縣)으로 이속(移屬)하였다.
○ 청산현(靑山縣). 본래 신라의 굴산현(屈山縣)【돌산(山)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기산(耆山)이라 고쳐 삼년군(三年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여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상주(尙州) 주성부곡(酒城部曲)을 쪼개어 이에 예속(隸屬)시켰다가 11년에 환속(還屬)하였다.
○ 산양현(山陽縣). 본래 신라의 근품현(近品縣)【품(品)은 암(巖)으로도 썼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가유(嘉猷)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명종(明宗) 10년에 이를 폐지하였다,
○ 화령군(化寧郡). 본래 신라의 답달비군(達匕郡)【답달(沓達)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화령군(化寧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며 뒤에 현(縣)이 되어 내속(來屬)하였다.
○ 공성현(功城縣).
본래 신라의 대병부곡(大幷部曲)으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단밀현(單密縣).【단(單)은 단(丹)으로도 씀】 본래 신라의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갈동미지(曷冬彌知)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비옥현(比屋縣). 본래 신라의 아화옥현(阿火屋縣)【병옥(幷屋)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안정현(安定縣).【정(定)은 정(貞)으로도 씀】 본래 신라의 아시혜현(阿尸兮縣)【아을혜(阿乙兮)라고도 썼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안현(安賢)으로 고쳐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비옥현(比屋縣)을 겸임하였다.
○ 중모현(中牟縣). 본래 신라의 도량현(刀良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도안(道安)으로 고쳐 화령군(化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호계현(虎溪縣). 본래 신라의 호측현(虎側縣)【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고령군(古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어모현(禦侮縣). 본래 신라의 금물현(今勿縣)【음달(陰達)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다인현(多仁縣). 본래 신라의 달이현(達已縣)【혹은 다이(多已)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 이르러서는 그대로 소속하였다가 뒤에 보주(甫州)로 이속(移屬)하였다. 별호(別號)를 인양(仁陽)이라 한다.
○ 청리현(靑理縣). 본래 신라의 음리화현(音里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청효현(靑驍縣)이라 하여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시켰다.
○ 가은현(加恩縣). 본래 신라의 가해현(加害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가선(嘉善)으로 고쳐 고령군(古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문경(聞慶)에 이속(移屬)하였다.
○ 일선현(一善縣). 본래 신라의 일선군(一善郡)으로 진평왕(眞平王)이 올려 주(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신문왕이 주(州)를 폐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숭선군(嵩善郡)으로 하였는데 성종(成宗) 14년에 선주 자사(善州刺史)로 하였다가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인종(仁宗) 21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뒤에 올려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다. 별호(別號)를 화의(和義)라 한다.【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금오산(金烏山)이 있다.
○ 군위현(軍威縣). 본래 신라의 노동멱현(奴同覓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숭선군(嵩善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인종(仁宗) 21년에 일선군(一善郡)에 환속(還屬)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효령현(孝靈縣)을 겸임케 하였다.
○ 효령현(孝靈縣). 본래 신라의 모혜현(芼兮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숭선군(嵩善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가 인종(仁宗) 21년에 일선군(一善郡)에 환속(還屬)하였다,
○ 부계현(缶溪縣).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선주(善州)에 이속(移屬)하였다. 별호(別號)를 부림(缶林)이라 한다.
§ 경산부(京山府)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뒤에 고쳐 벽진군(碧珍郡)이라 하였다가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경종 6년에 내려 광평군(廣平郡)으로 삼았고 성종(成宗) 14년에 대주 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를 칭하였으며 현종(顯宗) 3년에 단련사(團練使)를 폐하였고 9년에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로 고쳤다가 충렬왕(忠烈王) 21년에 올려 흥안 도호부(興安都護府)로 삼았다가 34년에 또 올려 성주목(星州牧)으로 삼았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정리하매 내려 경산부(京山府)로 하였다. 가야산(伽倻山)이 있다. 1군(郡)과 14현(縣)이 소속하였다.
○ 고령군(高靈郡).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으로 시조(始祖) 이진아시왕(伊珍阿王)【내진주지(內珍朱智)고도 하였음.】 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무릇 16대(代) 520년으로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이를 멸망시키고 그 땅으로 대가야군(大伽倻郡)을 삼았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약목현(若木縣). 본래 신라의 대목현(大木縣)【칠촌(七村)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계자(谿子)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인동현(仁同縣).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약목현(若木縣)을 이에 소속시켰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말하기를 성산군(星山郡) 안의 수동현(壽同縣)은 본래 신라의 사동화현(斯同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바꾸었으나 지금 상세하지 않다. 지금의 경계로 나눈 것을 생각하면 수동(壽同)을 고쳐 인동(仁同)으로 고친 것이 아닌가 한다.】
○ 지례현(知禮縣). 본래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구성(龜城)이라 한다.
○ 가리현(加利縣). 본래 신라의 일리군(一利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성산군(星山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를 기성(岐城)이라 한다.
○ 팔거현(八縣). 본래 신라의 팔거리현(八居里縣)【북치장리(北恥長里) 또는 인리(仁里)라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8리(里)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고쳐 팔거(八居)【뒤에 거(居)의 음이 와전(訛轉)되어 거()로 되었음.】 라 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를 칠곡(七谷)이라 한다.
○ 금산현(金山縣). 본래 신라의 금산현(金山縣)으로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도 옛 이름을 그대로 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금릉(金陵)이라 한다.
○ 황간현(黃澗縣). 본래 신라의 소라현(召羅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영동군(永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공민왕(恭愍王) 3년에 다시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관성현(管城縣). 본래 신라의 고시산군(古尸山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관성군(管城郡)이라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인종(仁宗) 21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명종(明宗) 12년에 현(縣)의 향리(鄕吏)와 백성이 현령(縣令) 홍언(洪彦)을 잡아 가둔 일을 유사(有司)가 아뢰어 관호(官號)를 삭제하였다. 충선왕(忠宣王) 5년에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올려 경산부(京山府) 소속의 이산(利山)․안읍(安邑)․양산(陽山) 3현(縣)을 베어 이에 소속시켰다.
○ 안읍현(安邑縣). 본래 신라의 아동혜현(阿冬兮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안정(安貞)이라 고쳐 관성군(管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양산현(陽山縣). 본래 신라의 조비천현(助比川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관성군(管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6년에 현령(縣令)를 두었다.
○ 이산현(利山縣). 본래 신라의 소리산현(所利山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관성군(管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대구현(大丘縣).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인종(仁宗) 21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 화원현(花園縣). 본래 신라의 설화현(舌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대구(大丘)에 이속(移屬)하였다. 별호(別號)를 금성(錦城)이라 한다.
○ 하빈현(河濱縣). 본래 신라의 다사지현(多斯只縣)【답지(沓只)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대구(大丘)에 이속(移屬)하였다.
§ 안동부(安東府)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古耶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고창군(古昌郡)이라 하였다. 태조(太祖) 13년에 후백제왕 견훤(甄萱)과 더불어 이곳에서 싸우다가 패하니 이 군(郡)의 사람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이 태조(太祖)를 도운 공이 있어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임명하고 권행(權幸)과 장길(張吉)은 각기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군(郡)을 올려 안동부(安東府)로 삼았다가 뒤에 고쳐 영가군(永嘉郡)으로 삼았다. 성종(成宗) 14년에 길주 자사(吉州刺史)를 칭하였고 현종(顯宗) 3년에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가 9년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고쳤고 21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명종(明宗) 27년에 남적(南賊) 김삼(金三), 효심(孝心) 등이 주군(州郡)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니 사신(使臣)을 보내어 무찔렀는데 안동부(安東府)가 공(功)이 있어 올려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 신종(神宗) 7년에 동경 별초(東京別抄) 패좌(佐) 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니 안동부(安東府)가 이를 막아낸 공(功)이 있어 올려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았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고쳐 복주목(福州牧)으로 삼았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남으로 행차하여 이곳에 머무르며 주(州)의 사람이 진심으로 받들어 모셨으므로 다시 올려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삼았다.【충렬왕(忠烈王)이 가야향(加也鄕) 사람 호군(護軍) 김인궤(金仁軌)가 공이 있었으므로 그 향(鄕)을 올려 춘양현(春陽縣)으로 삼았고 충선왕(忠宣王)이 경화 옹주(敬和翁主)의 고향인 덕산부곡(德山部曲)을 재산현(才山縣)으로 삼았고 충혜왕(忠惠王)은 내시[宦者] 강금강(姜金剛)이 원(元) 나라에 들어가 특별히 수고한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 고향인 퇴곶부곡(退串部曲)을 올려 내성현(奈城縣)으로 삼았고 뒤에 다시 길안부곡(吉安部曲)을 올려 현(縣)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능라군(陵羅郡)․지평군(地平郡)․석릉군(石陵郡)․일계군(一界郡)․화산군(花山郡)․고장군(古藏郡)【모두 신라(新羅) 때의 이름이다.】 이라 한다. 3군(郡)과 11현(縣)이 속해있다.
○ 임하군(臨河郡). 본래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곡성군(曲城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예안군(禮安郡). 본래 고구려의 매곡현(買谷縣)으로 신라가 이름을 선곡(善谷)이라 고쳐 내령군(奈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신우(辛禑) 2년에 그 태(胎)를 현(縣)의 안에 묻었으므로 올려 군(郡)으로 삼았다가 이어 올려 주(州)로 삼았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선인현(宣仁縣)을 이에 소속시켰다.
○ 의흥군(義興郡).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선주(善州) 임내(任內)의 부계현(缶溪縣)을 이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의성현(義城縣)에 이속(移屬)시켰다. 별호(別號)를 구산(龜山)이라 한다.
○ 일직현(一直縣). 본래 신라의 일직현(一直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직녕(直寧)으로 고쳐 고창군(古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옛 이름을 다시 썼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은풍현(殷豊縣). 본래 신라의 적아현(赤牙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은정(殷正)이라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감천현(甘泉縣). 신라 때에 명칭은 알 수 없으나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봉화현(奉化縣). 본래 고구려의 고사마현(古斯馬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옥마(玉馬)라 고쳐 내령군(奈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봉성(鳳城)이라 한다.
○ 안덕현(安德縣). 본래 고구려의 이화혜현(伊火兮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연무(緣武)라 고쳐 곡성군(曲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공민왕(恭愍王) 18년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을 올려 의인현(宜仁縣)으로 삼아 안동(安東)에 소속시켰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에 예안(禮安)에 이속(移屬)시켰다.】
○ 풍산현(豊山縣). 본래 신라의 하지현(下枝縣)【하지산(下枝山)이 있는데 일명 풍악(豊岳)이라고도 함.】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영안(永安)으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태조(太祖) 6년에 현(縣) 사람 원봉(元逢)이 귀순한 공(功)이 있어 올려 순주(順州)로 삼았으나 13년에 견훤(甄萱)에게 함락되었으므로 다시 내려 하지현(下枝縣)으로 삼았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기주현(基州縣). 신라 때 이름은 알 수 없으나 혹은 기목진(基木鎭)이라고도 한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을 칭하여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소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또 감무(監務)를 두고 은풍현(殷豊縣)을 이에 소속시켰다. 별호(別號)를 영정(永定)【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며 또 안정(安定)이라고도 하였다.
○ 흥주(興州). 본래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급산군(山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순안(順安)으로 이속(移屬)하였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이 태(胎)를 묻으매 고쳐 흥령 현령(興寧縣令)으로 삼았고 충숙왕(忠肅王)이 또 태(胎)를 묻으매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올렸고 충목왕(忠穆王)이 태(胎)를 묻으매 또 올려 순흥부(順興府)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순정(順政)【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소백산(小白山)이 있다.
○ 순안현(順安縣). 본래 고구려의 내기현(奈己縣)으로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이를 취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내령군(奈靈郡)이라 하였다. 성종(成宗) 14년에 강주 도단련사(剛州都團練使)를 칭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인종(仁宗) 21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고 고종(高宗) 46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의 내향(內鄕)이므로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구성(龜城)【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지세가 험한 곳으로 마아령(馬兒嶺)이 있다.
○ 의성현(義城縣). 본래 소문국(召文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였다.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문소군(聞韶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올려 의성부(義城府)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인종(仁宗) 21년에 현령(縣令)을 두었고 신종(神宗) 2년에 일찍 적(賊)에게 항복하였으므로 내려 감무(監務)로 삼았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대구(大丘)에 병합하였다가 이어 복구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말하기를, ?경덕왕(景德王)이 구화현(仇火縣)을 고쳐 고구현(高丘縣)을 삼았다가 뒤에 현(縣)에 합속(合屬)하였다.?고 하였다.】 풍혈(風穴)이 있고 빙혈(氷穴)이 있다.【입하(立夏) 뒤에 얼음이 처음 얼어 더위가 최고일 때 굳어진다. 겨울이 되어도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 기양현(基陽縣).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예천군(醴泉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이름을 보주(甫州)라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明宗) 2년에 태자(太子)의 태(胎)를 묻으매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올려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으며 신종(神宗) 7년에 남도 초토병마사(南道招討兵馬使) 최광의(崔匡義)가 동경적(東京賊)과 더불어 현(縣)의 땅에서 싸워 크게 이겼으므로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청하(淸河)․양양(襄陽)【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전라도(全羅道)
§ 전라도(全羅道)
본래 백제의 땅으로 의자왕(義慈王) 19년에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드디어 그 땅을 병합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나누어 전주(全州)․무주(武州) 두 주(州)의 도독부(都督府)로 삼았다. 진성여왕(眞聖女王) 5년에 서면 도통(西面都統) 견훤(甄萱)이 백제의 옛 땅에 웅거하여 후백제왕을 칭하였으나 태조(太祖) 19년에 친히 정벌하여 이를 통합하였다. 성종(成宗) 14년에 전주(全州)․영주(瀛州)․순주(淳州)․마주(馬州) 등의 주현(州縣)으로 강남도(江南道)를 삼고 나주(羅州)․광주(光州)․정주(靜州)․승주(昇州)․패주(貝州)․담주(潭州)․낭주(朗州) 등의 주현(州縣)으로 해양도(海陽道)를 삼았다가 현종(顯宗) 9년에 합하여 전라도(全羅道)라 하니 2목(牧)․2부(府)․18군(郡)․82현(縣)을 관할하였다.
§ 전주목(全州牧)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하였음.】 으로 위덕왕(威德王) 원년(元年)에 완산주(完山州)로 삼았다가 11년에 주(州)를 폐지하였다. 의자왕(義慈王) 19년에 신라가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드디어 그 땅을 차지하였는데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26년에 주(州)를 폐하였다. 신문왕(神文王) 4년에 다시 완산주(完山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5년에 또 전주(全州)라 칭하였다. 뒤에 견훤이 도읍(都邑)을 세웠으나 태조(太祖)가 이를 멸하고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23년에 도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칭하였고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매 이름을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소속시켰다가 현종(顯宗) 9년에 안남 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올렸고 13년에 또 전주(全州)라 이름하였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使臣) 야사불화(思不花)를 잡아 가둠으로써 내려 부곡(部曲)으로 삼았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로 하였다. 별호(別號)를 완산(莞山)【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견성(甄城)이라 하였다. 신창진(新倉津)이 있다. 1군(郡)과 11현(縣)이 소속하였고 1지사부(知事府)․1군(郡)․4현령관(縣令官)을 관령(管領)하였다.
○ 금마군(金馬郡). 본래 마한국(馬韓國)【후조선왕(後朝鮮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리를 피하여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으로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이를 병합하니 그 뒤로부터 이름을 금마저(金馬渚)라 하였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다. 충혜왕(忠惠王) 후5년에 원(元) 나라 순제(順帝) 때 기 황후(奇皇后)의 외향(外鄕)이므로 올려 익주(益州)라 하였다. 미륵산 석성(彌勒山石城)이 있다. 【언전(諺傳)에 기준(箕準)이 처음 쌓았기 때문에 기준성(箕準城)이라고도 한다.】 또 후조선(後朝鮮)의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무덤이 있다.【속호(俗號)를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하는데 혹은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의 이름[小名]을 서동(薯童)이라 한다.】
○ 낭산현(朗山縣). 본래 백제의 알야산현(閼也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야산(野山)이라 고쳐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여량 감무(礪良監務)로 와서 겸무(兼務)케 하였다.
○ 옥야현(沃野縣).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내속(來屬)하였다.
○ 진안현(鎭安縣). 본래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월량현(月良縣)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장계군(長溪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공양왕(恭讓王) 3년에 마령(馬靈)을 겸무(兼務)하였다. 마이산(馬耳山)【신라는 서다산(西多山)이라 칭하고 소사(小祀)에 올렸다.】 이 있다.
○ 우주현(紆州縣).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우(紆)는 오(汚)라고도 씀】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다.
○ 고산현(高山縣). 본래 백제의 고산현(高山縣)【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때에 내속(來屬)하여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진동(珍同)을 겸임케 하였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또 운제(雲梯)를 겸하게 하였다.
○ 운제현(雲梯縣). 본래 백제의 지벌지현(只伐只縣)【지실지(只
失只)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덕은군(德殷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다.
○ 마령현(馬靈縣). 본래 백제의 마돌현(馬突縣)【마진
(馬珍) 또는 마등량(馬等良)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다.
○ 여량현(礪良縣).【양(良)은 양(陽)으로도 썼음.】 본래 백제의 지량초현(只良肖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덕은군(德殷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高麗初)에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낭산현(朗山縣)을 겸임하였고 또 공촌(公村)과 피제(皮堤)의 권농사(勸農使)를 겸하였다.
○ 이성현(利城縣). 본래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다.
○ 이성현(伊城縣).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왕무(王武)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두성(杜城)이라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소속시켰다.
○ 함열현(咸悅縣). 본래 백제의 감물아현(甘勿阿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임피군(臨陂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함라(咸羅)라고 한다.【충숙왕(忠肅王) 8년에 현(縣)의 도내산(道乃山) 은소(銀所)의 사람 백안부개(伯顔夫介)가 원(元) 나라에 있을 때 고려에 공(功)이 있었으므로 소(所)를 올려 용안현(龍安縣)으로 삼았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인 풍저(豊儲)를 여기에 주었다.】
§ 남원부(南原府)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으로 후한(後漢) 건안(建安) 년간에 대방군(帶方郡)이 되었다가【후한(後漢)의 헌제(獻帝) 건안(建安) 년간에 공손강(公孫康)이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은 지금의 봉산지방(鳳山地方)으로 남원(南原)에 대방군(帶方郡) 또는 남대방(南帶方)을 설치하였다 함은 최치원(崔致遠)의 마한 고구려설(馬韓高句麗說)에서 나온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잘못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 역자주(譯者註)】 위(魏) 나라 때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고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매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유인궤(劉仁軌)로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를 삼았다. 신문왕(神文王) 4년에 소경(小京)을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남원 소경(南原小京)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3년에 고쳐 부(府)로 삼았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대방군(帶方郡)이라 하였고 뒤에 고쳐 남원군(南原郡)이라 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9년에 올려 부(府)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용성(龍城)이라 하였다. 지리산(智異山)【지리(地異) 또는 두류(頭流) 또는 방장(方丈)이라고도 하며 신라는 남악(南嶽)이라 하여 중사(中祀)에 올렸으며 고려도 이에 좇았다.】 순자진(子津)이 있다. 2군(郡)과 7현(縣)이 속해있다.
○ 임실군(任實郡). 본래 백제의 임실군(任實郡)으로 신라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며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순창군(淳昌郡). 본래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순화군(淳化郡)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縣)으로 삼아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에 승려 국통(國統) 정오(丁午)의 고향이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옥천(玉川)이라 하고 또 오산(烏山)이라 하였다.【옛적에는 속현(屬縣)으로 복흥(福興)이 있었다.】
○ 장계현(長溪縣). 본래 백제의 백해군(伯海郡)【해(海)는 이(伊)로도 썼다.】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벽계군(壁溪郡)이라 칭하였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 하였다가 뒤에 장수현(長水縣)에 이속(移屬)하였다.
○ 적성현(赤城縣).【적(赤)은 적() 또는 적()으로도 썼다.】 본래 백제의 역평현(礫坪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순화군(淳化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순창군(淳昌郡)에 환속(還屬)하였다.
○ 거령현(居寧縣).【거(居)는 거(巨)로도 씀】 본래 백제의 거사물현(居斯勿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청웅(靑雄)으로 고쳐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내속(來屬)하였다.
○ 구고현(九皐縣). 본래 백제의 돌평현(坪縣)【돌()은 누(淚)로도 썼다.】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순화군(淳化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3년에 현(縣)의 사람으로 원(元) 나라 사신이 된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나라에 공을 세워 올려 군(郡)으로 삼았다.
○ 장수현(長水縣). 본래 백제의 양평현(兩坪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택(高澤)으로 고쳐 벽계군(壁溪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3년에 장계(長溪)를 겸임하였다. 요해처(要害處)로 육십현(六十峴)이 있어 현(縣)으로부터 동쪽으로 경상도(慶尙道)에 이르렀다.
○ 운봉현(雲峯縣). 본래 신라의 모산현(母山縣)【혹은 아영성(阿英城) 혹은 아막성(阿莫城)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천령군(天嶺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아용곡 권농병마사(阿容谷勸農兵馬使)를 겸하였다. 요해처(要害處)로 팔량현(八良峴)이 있어 현(縣)으로부터 동쪽으로 경상도(慶尙道)에 이르렀다.
○ 구례현(求禮縣).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仇次禮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곡성군(谷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여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봉성(鳳城)이라 한다. 요해처(要害處)로 잔수진(潺水津)과 미초율현(未草栗峴)이 있어 모두 현(縣)으로부터 순천(順天) 지역으로 가는 길목이다.
§ 고부군(古阜郡)
본래 백제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19년에 영주 관찰사(瀛州觀察使)를 칭하였고 광종(光宗) 2년에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가 되었다가 현종(顯宗) 10년에 지금 이름으로 복구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영광(靈光)에 병합하였다가 이어 복구하였다. 1군(郡)과 6현(縣)이 속해있다.
○ 보안현(保安縣). 본래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희안(喜安)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으며 뒤에 부령 감무(扶寧監務)로써 와서 겸무(兼務)케 하였다가 신우(辛禑) 12년에 각각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낭주(浪州)라고 한다. 변산(邊山)이 있고 위도(島)가 있다.
○ 부령현(扶寧縣). 본래 백제의 개화현(皆火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 이르러 그대로 소속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보안현(保安縣)을 겸임케 하였다가 신우(神禑) 12년에 각각 감무(監務)를 두었다.
○ 정읍현(井邑縣). 본래 백제의 정촌현(井村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대산군(大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대산군(大山郡). 본래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인의현(仁義縣)을 겸임하게 하였다가 현종(顯宗) 10년에 각각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3년에 현(縣) 사람으로 원(元) 나라 사신이 된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나라에 공(功)이 있어 올려 군(郡)으로 삼았다.
○ 인의현(仁義縣). 본래 백제의 빈굴현(賓屈縣)【또는 부성현(富城縣)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무성(武城)으로 고쳐 대산군(大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여 대산 감무(大山監務)로 와서 겸무(兼務)하게 하였다.
○ 상질현(尙質縣). 본래 백제의 상칠현(上柒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 이르러 그대도 소속하였으며 뒤에 이름을 장덕(章德)【장(章)은 창(昌)으로도 썼다.】 이라 고쳐 감무(監務)를 두어 고창현(高敞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매 왕의 이름을 피하여 흥덕(興德)이라 고쳤다.
○ 고창현(高敞縣). 본래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무령군(武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상질 감무(尙質監務)로 와서 겸무(兼務)하게 하였다.
§ 임피현(臨陂縣)
본래 백제의 시산군(屎山郡)【흔문(文) 또는 소도(所島) 또는 실오출(失烏出) 또는 피산(陂山)이라고도 하였다.】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내려 현(縣)으로 삼아 영(令)을 두었다. 별호(別號)를 취성(鷲城)이라 한다. 4현(縣)이 속해있다.
○ 회미현(澮尾縣). 본래 백제의 부부리현(夫夫里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서도 이에 그대로 두었다
○ 부윤현(富閏縣). 본래 백제의 무근촌현(武斤村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무읍(武邑)으로 고쳐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다. 뒤에 만경현(萬頃縣)에 이속(移屬)하였다.
○ 옥구현(沃溝縣). 본래 백제의 마서량현(馬西良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도 이에 그대로 두었다.
○ 만경현(萬頃縣). 본래 백제의 두내산현(豆乃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진례현(進禮縣)
본래 백제의 진내군(進乃郡)【진잉을현(進仍乙縣)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진례군(進禮郡)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내려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충렬왕(忠烈王) 31년에 현(縣) 사람 김신(金侁)이 원(元) 나라에 벼슬하여 요양행성 참정(遼陽行省參政)이 되어 나라에 공이 있었으므로 지금주사(知錦州事)로 올렸다. 5현(縣)이 속해있다.
○ 부리현(富利縣). 본래 백제의 두시이현(豆尸伊縣)【부시이(富尸伊)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이성현(伊城縣)으로 삼아 내속(來屬)하였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청거현(淸渠縣). 본래 백제의 물거현(勿居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 시켰고 고려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며 충선왕(忠宣王) 5년에 고쳐 용담현(龍潭縣)으로 삼았으며 영(令)을 두었다. 별호(別號)를 옥천(玉川)이라 하였다.
○ 주계현(朱溪縣). 본래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단천(丹川)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서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 명종(明宗) 6년에 무풍 감무(茂豊監務)로 내겸(來兼)하게 하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 무풍(茂豊)에 병합하였다.
○ 무풍현(茂豊縣). 본래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명종(明宗) 6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주계현(朱溪縣)을 겸임하게 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 주계현(朱溪縣)을 합하여 속하게 하였다. 상산(裳山)이 있다.【사면이 벽들로 둘려져 층층이 가파른 것이 사람의 치마[裳]와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옛 사람이 험한 곳을 따라 성(城)을 쌓고 겨우 두 길로만 올라 갈 수 있게 하였는데 성 가운데는 평평하고 넓으며 샘물이 네 곳에서 솟아 나왔다.】
○ 진동현(珍同縣). 본래 백제의 진동현(珍同縣)【동(同)은 동(洞)으로도 썼음.】 으로 신라(新羅) 때 황산군(黃山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때 내속(來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고산 감무(高山監務)로 와서 겸무하게 하였다. 별호(別號)를 옥계(玉溪)라 하였다.【옛적 속현(屬縣)에 강산(山)<현(縣)>이 있었다.】
§ 김제현(金堤縣)
본래 백제의 벽골군(碧骨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김제군(金堤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전주 속현(全州屬縣)이 되었다가 인종(仁宗) 21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벽골제(碧骨堤)가 있다.【신라 흘해왕(訖解王) 21년에 처음으로 열어 방죽의 길이가 1,800보(步)였다.】 1현(縣)이 속해있다.
○ 평고현(平皐縣). 본래 백제의 수동산현(首冬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전주 속현(全州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다시 내속(來屬)하였다.
§ 금구현(金溝縣)
본래 백제의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전주(全州)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의종(毅宗) 24년에 이의방(李義方)의 외향(外鄕)이므로 올려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봉산(鳳山)이라 하였다. 1현(縣)이 속해있다.
○ 거야현(巨野縣). 본래 백제의 야서이현(也西伊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야서(野西)로 고쳐 대산군(大山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가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는데 뒤에 김제현(金堤縣)에 속하였다가 또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 나주목(羅州牧)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금산군(錦山郡)이라 하였고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후백제왕을 칭하여 그 땅을 모두 거느렸으나 얼마 되지 않아 군(郡)의 사람들이 후고구려왕 궁예(弓裔)에게 의지하매 궁예가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어 해군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여 빼앗아 고쳐 나주(羅州)라 하였는데 성종(成宗) 14년에 처음으로 10도(道)를 정하매 진해군 절도사(鎭海軍節度使)를 칭하고 해양도(海陽道)에 속해있다. 현종(顯宗) 원년(元年)에 왕이 거란(契丹)의 군사를 피하여 남으로 피난하여 주(州)에 이르러 열흘을 머물다가 거란군(契丹軍)이 패하여 물러가니 왕이 이에 개경(開京)으로 돌아갔다. 9년에 올려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통의(通義), 금성(錦城)【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금성산(錦城山)【산에 신사(神祠)가 있다.】 남포진(南浦津)과 흑산도(黑山島)【섬 사람이 육지에 나와 남포강변(南浦江邊)에 많이 거주하여 영산현(榮山縣)이라 칭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12년에 올려 군(郡)이 되었다.】 가 있다. 5군(郡)과 11현(縣)이 소속하였고 1지사부(知事府)․4군(郡)․4현령관(縣令官)을 거느렸다.
○ 무안군(務安郡). 본래 백제의 물아혜군(勿阿兮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갈았고 혜종(惠宗) 원년(元年)에 물량군(勿良郡)으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0년에 다시 지금 이름을 칭하고 내속(來屬)하였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성산(城山)과 극포(極浦)의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 담양군(潭陽郡). 본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추성군(秋成郡)으로 삼았고 성종(成宗) 14년에 담주 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라 하였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공양왕(恭讓王) 3년에 원율(原栗)을 겸임하였다.
○ 곡성군(谷城郡). 본래 백제의 욕내군(欲乃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승평군(昇平郡)의 속군(屬郡)이 되었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욕천(浴川)이라 한다.
○ 낙안군(樂安郡).【양악(陽岳)이라고도 하였다】 본래 백제의 분차군(分嵯郡)【분초(分抄)라고도 하였다.】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분령군(分嶺郡)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지군사(知郡事)를 삼았으며 장도(獐島)가 있다
○ 남평군(南平郡).【영평군(永平郡)이라고도 하였음.】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현웅(玄雄)으로 고쳐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에 화순 감무(和順監務)로 와서 겸무(兼務)하게 하였다.
○ 철야현(鐵冶縣). 본래 백제의 실어산현(實於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도 이에 그대로 두었으며 뒤에 능성현(陵城縣)에 속해있다.
○ 회진현(會津縣).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도 이에 그대로 두었다
○ 반남현(潘南縣). 본래 백제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반남군(潘南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내려 현(縣)으로 삼아 내속(來屬)하였다.
○ 안로현(安老縣). 본래 백제의 아로곡현(阿老谷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야로(野老)로 고쳐 반남군(潘南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복룡현(伏龍縣). 본래 백제의 복령현(伏齡縣)【배룡(盃龍)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용산(龍山)으로 고쳐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는데 고려에서는 옛 이름을 복구하여 내속(來屬)하였다.
○ 원율현(原栗縣). 본래 백제의 율지현(栗支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율원(栗原)으로 고쳐 추성군(秋成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여황현(餘縣). 본래 백제의 수천현(水川縣)【수입이(水入伊)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소속시켰다.
○ 창평현(昌平縣).【명평(鳴平)이라고도 하였음.】 본래 백제의 굴지현(屈支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기양(祈陽)으로 고쳐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현리(縣吏) 차자보(車自寶)가 남적(南賊)을 막아낸 공이 있어 올려 현령(縣令)으로 삼았다고 한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장평(長平)과 갑향(甲鄕)의 권농사(勸農使)를 겸하게 하였다,【갑향(甲鄕)은 본래 속현(屬縣)이었는데 뒤에 나주(羅州)로 이속(移屬)하고 또 광주(光州)로 이속(移屬)하였다가 이에 이르러 다시 내속(來屬)하였다.】
○ 장산현(長山縣).【안릉(安陵)이라고도 하였음.】 본래 백제의 거지산현(居知山縣)【거(居)는 굴(屈)로도 썼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안파(安波)로 고쳐 압해군(壓海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고참도(古參島)․신이량도(新伊良島)․상어도(上於道)․안창도(安昌島)․아어도(阿於島)․송도(松島)가 있다.
○ 진원현(珍原縣). 본래 백제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갑성군(岬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화순현(和順縣). 본래 백제의 잉리아현(仍利阿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여미(汝湄)【해빈(海濱)이라고도 하였음.】 로 고쳐 능성군(陵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능성현(陵城縣)에 환속(還屬)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남평(南平 현(縣) )을 겸임(兼任)하게 하였다.
장흥부(長興府)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고쳐 정안현(定安縣)으로 하여 영암(靈岩) 임내(任內)에 소속시켰으며 인종(仁宗) 때에 공예 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고향이므로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올렸고 원종(元宗) 6년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올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내려 장흥부(長興府)로 삼았으며 뒤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내지(內地)로 옮겨 살게 하였다. 별호(別號)를 정주(定州)【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라 하고 또 호(號)를 관산(冠山)이라 하였다. 천관산(天冠山)【옛 이름은 천풍(天風)이다.】 이 있다. 4현(縣)이 속해있다.
○ 수령현(遂寧縣).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마읍(馬邑)으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영암(靈巖)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 회령현(會寧縣). 본래 백제의 마사량현(馬斯良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대로(代勞)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득산량도(得山良島)가 있다.
○ 장택현(長澤縣). 본래 백제의 계천현(季川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계수(季水)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 탐진현(耽津縣).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영암(靈岩)으로 이속(移屬)하였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를 오산(鼇山)이라 하였다. 부홍도(富島)․은파도(恩波島)․벽랑도(碧浪島)․선산도(仙山島)가 있고 또 완도(莞島)가 있다.
§ 영광군(靈光郡)
본래 백제의 무시이군(武尸伊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무령군(武靈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별호(別號)를 오성(筽城)이라 한다. 대가질지도(大加叱知島)․진인이도(珍人伊島)․생의도(省衣島)․아질마도(阿叱島)가 있다. 2군(郡)과 8현(縣)이 속해있다.
○ 압해군(壓海郡). 【압(壓)은 압(押)으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아차산군(阿次山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고려(高麗) 초에 나주(羅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다. 지상도(只上島)․도사도(道沙島)․근참도(斤斬島)․술지도(述只島)․모야도(毛也島)․팔흠도(八欠島)․청안니도(靑安尼島) 가 있다.
○ 장성군(長城郡). 본래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갑성군(岬城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위령(葦嶺)이 있다.
○ 삼계현(森溪縣). 본래 백제의 소비혜현(所非兮縣)【소을부현(所乙夫縣)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갑성군(岬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다.
○ 육창군(陸昌縣). 본래 백제의 아로현(阿老縣)【갈초(葛草) 또는 가위(加位)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갈도(碣島)로 고쳐 압해군(壓海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비이도(比島)․류도(島)․신위도(神葦島)․청도(靑島)․독도(禿島)․백양도(白良島)․자은도(慈恩島)․암타도(墮島)․앵도(櫻島)․취도(鷲島)․내파도(乃破島)가 있다.
○ 해제현(海際縣). 본래 백제의 도제현(道際縣)【음해(陰海) 또는 대봉(大峯)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무안군(務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다. 황저도(荒楮島)․두지도(豆知島)․율도(栗島)․능도(島)․독저도(禿楮島)가 있다.
○ 모평현(牟平縣). 본래 백제의 다지현(多只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다기(多岐)로 고쳐 무안군(務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를 모양(牟陽)이라 한다.
○ 함풍현(咸豊縣). 본래 백제의 굴내현(屈乃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무안군(務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영풍(永豊)․다경(多景)․해제(海際)의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별호(別號)를 기성(箕城)이라 한다.
○ 임치현(臨淄縣). 본래 백제의 고록지현(古祿只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염해(鹽海)라 고쳐 압해군(壓海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북사자도(北師子島)․남사자도(南師子島)․개요지도(開要只島)․마지도(知島)가 있다.
○ 장사현(長沙縣). 본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무령군(武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이를 따랐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어 무송(茂松)을 겸임케 하였다.
○ 무송현(茂松縣).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무령군(武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이를 따랐으며 뒤에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와서 겸임케 하였다.
§ 영암군(靈巖郡)
본래 백제의 월내군(月柰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갈았고 성종(成宗) 14년에 낭주 안남 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9년에 다시 내려 영암군(靈巖郡)으로 하였다. 월출산(月出山)이 있다.【신라때 월내악(月柰岳)이라 칭하고 소사(小祀)에 올렸으며 고려(高麗) 초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칭하였다. 산에 구정봉(九井峰)이 있어 그 밑에 움직이는 돌 셋이 있었는데 홀로 층암(層岩) 위에 있어 높이는 몇 장(丈)이 되고 둘레는 10위(圍)가 되며 서쪽으로 산골(山骨)에 이어지고 동쪽으로 끝없는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한 사람이 흔들면 곧 떨어 질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2군(郡)과 3현(縣)이 속해있다.
○ 황원군(黃原郡). 본래 백제의 황술현(黃述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다. 삼내도(三內島)․죽도(竹島)․노도(露島)가 있다.
○ 도강군(道康郡). 본래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양무군(陽武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금릉(金陵)이라 한다.
○ 곤미현(昆湄縣). 본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서도 이를 따랐다.
○ 해남현(海南縣). 본래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침명(浸溟)이라 고쳐【투빈(投濱)이라고도 하였음.】 양무군(陽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죽산현(竹山縣). 본래 백제의 고서이현(古西伊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안(固安)【고(固)는 동(同)으로도 썼음.】 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보성군(寶城郡)
본래 백제의 복홀군(伏忽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14년에 패주 자사(貝州刺史)를 칭하였다가 뒤에 다시 보성군(寶城郡)으로 하였다. 별호(別號)를 산양(山陽)이라 한다.【선종(宣宗) 5년에 지주부곡(池州部曲)을 올려 도화현(道化縣)을 삼고 또 고흥현(高興縣)은 본래 고이부곡(高伊部曲)인데 고이(高伊)란 것은 방언(方言)으로 고양이이다. 때에 묘부곡(猫部曲)의 사람이 조정(朝廷)에 있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언이 있었는데 유비(柳庇)가 통역관으로서 원(元) 나라에 간 공이 있었으므로 충렬왕(忠烈王) 11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올려 감무(監務)로 하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또 원(元) 나라에 벼슬한 내시 이대순(李大順)의 청으로 식촌부곡(食村部曲)을 올려 풍안현(豊安縣)으로 삼았다.】 7현(縣)이 속해있다.
○ 동복현(同福縣). 본래 백제의 두부지현(豆夫只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곡성군(谷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다가 세상에 전하는 말에 승려 조염(祖琰)의 고향이므로 올려서 감무(監務)로 삼았다고 한다.
○ 복성현(福成縣). 본래 백제의 파부리군(波夫里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부리(富里)로 고쳐 능성군(陵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조양현(兆陽縣). 본래 백제의 동로현(冬老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분령군(分嶺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어산도(語山島)와 토도(兎島)가 있다.
○ 남양현(南陽縣). 본래 백제의 조조례현(助助禮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충렬(忠烈)이라 고쳐 분령군(分嶺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춘자도(春子島)가 있다.
○ 옥과현(玉果縣). 본래
백제의 과지현(果支縣)【과혜(果兮)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추성군(秋成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여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소내오도(小乃烏島)․대내오도(大乃烏島)․절음도(折音島)가 있다.
○ 태강현(泰江縣). 본래 백제의 비사현(比史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백주(栢舟)로 고쳐 분령군(分嶺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두원현(荳原縣).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강원(薑原)으로 고쳐 분령군(分嶺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뒤에 내속(來屬)하였고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승평군(昇平郡)
본래 백제의 감평군(平郡)【감()은 사(沙) 혹은 무(武)로도 썼다.】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14년에 승주 연해군절도사(昇州海軍節度使)【승화(昇化)라고도 하였음.】 라 하였다가 정종(定宗) 2년에 다시 승평군(昇平郡)으로 하였고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에 승주목(昇州牧)으로 올렸다가 2년에 내려 순천부(順天府)라 하였다. 4현(縣)이 속해있다.
○ 부유현(富有縣). 본래 백제의 둔지현(遁支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곡성군(谷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였다.
○ 돌산현(突山縣). 본래 백제의 돌산현(突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여산현(廬山縣)으로 삼아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서 다시 옛 이름으로 부르고 그대로 소속(所屬)하였다. 안록도(安鹿島)와 감물도(甘勿島)가 있다.
○ 여수현(麗水縣). 본래 백제의 원촌현(猿村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해읍현(海邑縣)이라 하여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으며 충정왕(忠定王) 10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오도(吳島)․이오도(伊烏島)․우근도(斤島)․안재도(安才島)․복도(僕島)가 있다.
○ 광양현(光陽縣). 본래 백제의 마로현(馬老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희양현(晞陽縣)이라 하여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 섬진(蟾津)이 있고 대안도(大安島)가 있다.
○ 해양현(海陽縣).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노지(奴只)라고도 하였음.】 로 신라가 백제를 취하여 그대로 도독(都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6년에 고쳐 무주(武州)라 하였으며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에 견훤(甄萱)이 빼앗아 머물며 후백제를 칭하다가 이어 전주(全州)로 도읍을 옮겼다. 뒤에 후고구려왕 궁예(弓裔)가 태조(太祖)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해군을 거느리고 점령하여 주(州)의 경계를 정하였으나 성주 지훤(池萱)이 견훤의 사위로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太祖) 23년에 광주(光州)를 칭하고 성종(成宗) 14년에 내려 자사(刺史)를 삼았으며 뒤에 또 내려 해양 현령관(海陽縣令官)을 삼았다. 고종(高宗) 46년에 김인준(金仁俊)의 외향(外鄕)이므로 지익주사(知翼州事)로 올렸고 뒤에 올려 광주목(光州牧)으로 삼았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내려 화평부(化平府)로 삼았고 공민왕(恭愍王) 11년에 무진부(茂珍府)【혜종(惠宗)의 이름을 피하여 무(武)를 무(茂)로 고쳤다】 로 고쳤다가 22년에 다시 광주목(光州牧)으로 하였다. 별호(別號)를 광산(光山)이라 하고 또 호(號)를 익양(翼陽)이라 하였다. 무등산(無等山)【무진악(武珍岳)이라고도 하고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 소사(小祀)가 되었고 고려에서는 국제(國祭)를 지냈다.】 이 있다.
§ 진도현(珍島縣)
본래 백제의 인진오군(因珍烏郡)으로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무안군(務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는 나주(羅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정왕(忠定王) 2년에 왜구로 인하여 내륙지방으로 옮겼다. 대진(大津)이 있으며 목지도(目只島)가 있다. 2현(縣)이 속해있다.
○ 가흥현(嘉興縣). 본래 백제의 도산현(徒山縣)【원산(猿山)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진도계(珍島界)에 있었던 것이나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뇌산군(牢山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가서도(加西島)․골응도(鷹島)․미포도(米浦島)․월량도(月良島)가 있다.
○ 임회현(臨淮縣). 본래 백제의 매구리현(買仇里縣)으로 또한 진도계(珍島界)에 있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첨탐(瞻耽)이라 고쳐 뇌산군(牢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양도(壤島)와 파질마도(巴叱島)가 있다.
○ 능성현(陵城縣).【능(陵)은 또한 능(綾)으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이릉부리군(陵夫里郡)【죽수부리(竹樹夫里) 또는 인부리(仁夫里)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능성군(陵城郡)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는 나주(羅州)에 속하였다가 인종(仁宗) 21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인물도(仁物島)가 있다.
○ 탐라현(耽羅縣). 전라도(全羅道) 남해 바다 가운데에 있다.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태초에 사람도 생물도 없었다.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나【그 주산(主山) <한라산의> 북쪽 산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毛興)이라 하는데 이것이 그 곳이다.】 첫째를 양을나(良乙那)라 하고 둘째를 고을나(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하였다. 세 사람이 인적 없는 황량한 곳에서 사냥질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 하루는 자주색 봉인한 나무상자 하나가 바다를 떠서 동쪽 바닷가에 이르거늘 가서 열어보니 상자 안에는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허리띠에 자색옷을 입은 사자(使者) 한 사람이 따라 왔다. 석함(石函)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셋과 망아지, 송아지, 오곡(五穀)의 종자(種子)들이 나타났는데 이에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日本國)의 사신(使臣)입니다. 우리 임금님이 3명의 딸을 두셨는데 말씀하시기를 「서쪽 바다 가운데 악신(嶽神)이 신자(神子) 세 사람을 내려보내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配匹)이 없다」라고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3명의 딸을 모시고 가게 하였나이다. 부디 배필(配匹)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루도록 하소서.?라고 하고는 사자(使者)는 문득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순으로 나누어 장가가서 샘물이 달고 토지가 비옥한 곳에 나아가 화살을 쏘아 땅을 점치고 양을나(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1도(都)라 하고 고을나(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2도(都)라 하고 부을나(夫乙那)가 사는 곳을 제3도(都)라 하여 처음으로 오곡(五穀)을 씨뿌리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 날로 살림이 풍부하여 갔다. 15대손(孫)인 고후(高厚)와 고청(高淸)에 이르러 곤제(昆弟) 3인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니 때는 신라의 번성하던 시기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쪽 방향에 나타나므로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이국인(異國人)이 내조(來朝)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신라에 들어오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첫째를 성주(星主)【그 성상(星象)을 움직인 때문에】 라 칭하고 둘째를 왕자(王子)【왕이 고청(高淸)으로 하여금 넓적다리 사이로 지나게 하여 사랑하기를 친자식과 같이 한 까닭으로 그 이름을 지었다.】 라 칭하고 막내를 도내(都內)라 하였으며 읍호(邑號)를 탐라(耽羅)라 하니 그것은 올 때 처음 탐진(耽津)에 상륙하였기에 때문이라 각각 보개(寶蓋)와 의대(衣帶)를 주어 보냈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공손히 신라를 섬기니 고을나(高乙那)로 성주(星主)를 삼고 양을나(良乙那)로 왕자(王子)를 삼고 부을나(夫乙那)로 도상(徒上)을 삼았고 뒤에 또 양(良)을 고쳐 양(梁)으로 하였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를 실어 9한(韓)을 열거하니 타라(羅)가 4번째에 있다. 백제 문주왕(文周王) 2년에 탐라국 사자에게 은솔(恩率)로 벼슬 주고 동성왕(東成王) 20년에 탐라(耽羅)가 공물과 부역을 바치지 않음으로 왕이 친히 징벌하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耽羅)가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거늘 이에 중지하였다 하고 주(註)에 말하기를, ?탐라(耽羅)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이미 망하매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元年)에 탐라국왕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太祖) 21년에 탐라국 태자(太子) 말로(末老)가 내조(來朝)하매 성주(星州) 왕자(王子) 작(爵)을 내렸고 숙종(肅宗) 10년에 타라(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하였고 의종(毅宗) 때에 현령관(縣令官)으로 하였으며 희종(熙宗) 7년에 현(縣)의 석천촌(石淺村)으로 귀덕현(歸德縣)을 삼았다. 원종(元宗) 11년에 역적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들어와 난을 일으키매 4년 후에 왕이 김방경(金方慶)에게 명하여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에 원(元) 나라가 목마장(牧馬場)으로 하였다. 20년에 왕이 원(元) 나라에 들어가 탐라(耽羅)를 돌려 줄 것을 청하니 원(元) 나라의 승상(丞相) 완택(完澤) 등이 아뢰어 황제의 승인을 받아 탐라(耽羅)를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다음해 을미(乙未)에 고쳐 제주(濟州)라 하고 처음으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고 26년에 황태후가 또 황실의 말[馬]을 놓아 먹였고 31년에 우리에게 돌려 주였다. 충숙왕(忠肅王) 5년에 초적(草賊)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키니 이 지방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병사를 일으켜 모조리 죽이고 원(元) 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1년에 원나라에 소속되기를 청하니 원나라가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로 탐라 만호(耽羅萬戶)를 삼아 본국(本國) 천예(賤隸)인 김장로(金長老)와 더불어 제주(濟州)에 이르러 만호(萬戶) 박도손(朴都孫)을 던져 바다에 넣었고 16년에 원(元) 나라가 제주(濟州)를 다시 내속(來屬)시켰다. 때에 목호(牧胡)가 강하게 자주 국가에서 보낸 목사 만호(牧使萬戶)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김유(金庾)가 토벌함에 미쳐 목호(牧胡)가 원(元) 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두기 청하니 왕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스스로 관청을 두게 하고 목호(牧胡)가 기른 말을 가려서 바치기를 이전과 같이 하겠다.?
하니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18년에 원(元) 나라 목자(牧子) 합적(哈赤)이 발호(跋扈)하여 관리(官吏)를 살해하매 6년 후 8월에 왕이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을 보내어 합적(哈赤)을 무찌르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 진산(鎭山) 한라(漢拏)는 현남(縣南)에 있다.【두무악(頭無岳) 또는 원산(圓山)이라 하니 그 산마루에 큰 연못이 있다.】 또 추자도(楸子島)가 있다.【무릇 탐라(耽羅)에 가는 사람은 나주(羅州)를 출발하면 무안(務安)의 대굴포(大堀浦)와 영암(靈岩)의 화무지와도(火無只瓦島) 해남(海南)의 어란량(於蘭梁)을 지나 무릇 칠일 밤낮 만에 추자도(楸子島)에 이르고 해남(海南)에서 출발하면 삼재포(三才浦)로부터 거요량(巨要梁)과 삼내도(三內島)를 지나고 탐진(耽津)에서 출발하면 군영포(軍營浦)로부터 고자황이(高子黃伊)․노슬도(露瑟島)․삼내도(三內島)를 지나 모두 삼일 밤낮 만에 추자도(楸子島)에 이른다. 우(右) 3처(處)의 배들은 모두 이 섬을 지나며 사서도(斜鼠島)와 대소화탈도(大小火脫島)를 지나 애월포(涯月浦)의 조천관(朝天館)에 이르르니 대개 화탈도(火脫島) 사이에는 2수(水)가 서로 섞여 흘러하여 파도가 흉흉하여 모든 오고가는 사람이 이를 어렵게 생각하였다.】
교주도(交州道)
§ 교주도(交州道)
본래 맥(貊)의 땅으로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신라를 지나 고려에 이르러 성종(成宗) 14년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삼으매 춘주(春州) 등의 군현(郡縣)을 삭방도(朔方道)에 소속시켰다가 명종(明宗) 8년에 비로소 춘주도(春州道)라 칭하였고 뒤에 동주도(東州道)라 칭하였다가 원종(元宗) 4년에 교주도(交州道)라 칭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에 회양도(淮陽道)라 칭하였고 신우(辛禑) 14년에 령(嶺)의 동서를 병합하여 교주 강릉도(交州江陵道)라 하고 충주(忠州) 관할의 평창군(平昌郡)을 내속(內屬)시켰다. 8군(郡)【1방어군(防禦郡)․2지사군(知事郡)․5속군(屬郡)】 과 20현(縣)을 관령(管領)하였다.
§ 교주(交州)
본래 고구려의 각련성(各連城)【각(各)은 객(客)으로도 씀.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연성군(連城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이물성(伊勿城)이라 칭하였으며 성종(成宗) 14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단련사(團練使)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고쳐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충렬왕(忠烈王) 34년에 철령구자(鐵嶺口子)로 방어하는 일에 공이 있어 회주목(淮州牧)으로 올렸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폐할 때에 내려서 회양부(淮陽府)로 삼았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 있으니 철령(鐵嶺)․추지령(楸池嶺)과 또 의관령(義館嶺)․덕진(德津)․명소(溟所)【사전(祀典)에 실려 있음.】 이다. 2군(郡)과 4현(縣)이 속해있다.
○ 장양군(長楊郡). 본래 고구려의 대양관군(大楊管郡)【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대양군(大楊郡)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금강산(金剛山)이 있다.【풍악(楓岳)이라고도 하며 개골(皆骨)이라고도 한다. 천봉(千峰)이 눈[雪]을 이고 서 있어 높고 준엄하며 기이한 절경을 이룬다. 사찰이 심히 많아 이름이 중국에 알려졌다.】
○ 금성군(金城郡). 본래 고구려의 모성군(母城郡)【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익성군(益城郡)이라 하였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올려 군(郡)으로 삼았다가 뒤에 내려 현(縣)으로 하여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영(令)을 두었고 고종(高宗) 41년에 다시 내려 감무(監務)로 하였으며 44년에 또 도령(道寧)이라 칭하였다.
○ 남곡현(嵐谷縣). 본래 고구려의 적목현(赤木縣)【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단송(丹松)이라 고쳐 연성군(連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하였다.
○ 통구현(通溝縣).【구(溝)는 구(口)로도 썼음.】 본래 고구려의 수입현(水入縣)【매이현(買伊縣)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기성군(岐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기성현(岐城縣). 본래 고구려의 동사홀군(冬斯忽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이르러 내려 현(縣)으로 삼아 내속하였다. 보제진(菩提津)이 있다.
○ 화천현(和川縣). 본래 고구려의 수성천현(藪川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수천(藪川)으로 고쳐 대양군(大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춘주(春州)
본래 맥국(貊國)으로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6년에 우수주(牛首州)【수(首)는 두(頭)로도 썼음.】 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고 문무왕(文武王) 13년에 수약주(首若州)【수차약(首次若) 또는 조근내(鳥斤乃)라고도 하였음.】 라 칭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삭주(朔州)라 고쳤다가 뒤에 광해주(光海州)라 고쳤는데 태조(太祖) 23년에 춘주(春州)라 하였고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칭하고 안변부(安邊府)에 속하였다. 주(州)의 사람들이 길이 험난하여 왕래하기가 어려움으로 신종(神宗) 6년에 이르러 최충헌(崔忠獻)에게 뇌물을 주고 올려 안양 도호부(安陽都護府)로 삼았으나 뒤에 지춘주사(知春州事)로 내렸다. 별호(別號)를 수춘(壽春)【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봉산(鳳山)이라 한다. 소양강(昭陽江)이 있다. 2군(郡)과 9현(縣)이 속해있다.
○ 가평군(嘉平郡).【가(嘉)는 가(加)로도 썼다.】 본래 고구려의 근평군(斤平郡)【병평(平)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하였다. 화악산이 있고 또 청평산(淸平山)이 있다.
○ 낭천군(狼川郡). 본래 고구려의 성천군(川郡)【야호매(也戶買)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고 양구(楊口)를 겸임케 하였다.
○ 기린현(基麟縣). 본래 고구려의 기지군(基知郡)으로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하였다.
○ 조종현(朝宗縣). 본래 고구려의 심천현(深川縣)【복사매(伏斯買)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준천(浚川)으로 고쳐 가평군(嘉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인제현(麟蹄縣). 본래 고구려의 저족현(猪足縣)【오사회(烏斯回)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희제(蹄)로 고쳐 양록군(楊麓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회양(淮陽)에 속하였으며 공양왕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횡천현(橫川縣). 본래 고구려의 횡천(橫川)【어사매(於斯買)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황천(潢川)으로 고쳐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다시 횡천(橫川)을 칭하여 그대로 소속하였다가 뒤에 원주(原州)에 속하고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화전(花田)이라 한다.
○ 홍천현(洪川縣). 본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녹효(綠驍)로 고쳐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하였는데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화산(花山)이라 한다.
○ 문등현(文登縣). 본래 고구려의 문견현(文見縣)【근시파혜(斤尸波兮)라고도 하였음.】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대양군(大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회양(淮陽)으로 이속(移屬)하였다.
○ 방산현(方山縣). 본래 고구려의 삼현현(三峴縣)【밀파혜(密波兮)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삼령(三嶺)으로 고쳐 양록군(楊麓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회양(淮陽)에 속하였다.
○ 서화현(瑞禾縣).【화(禾)는 화(和)로도 썼음.】 본래 고구려의 옥지현(玉枝縣)【개차정(皆次丁)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치도(馳道)로 고쳐 양록군(楊麓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회양(淮陽)에 속하였다. 별호(別號)를 서성(瑞城)이라 한다.
○ 양구현(楊溝縣). 본래 고구려의 양구군(楊口郡)【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양록군(楊麓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으며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어 낭천 감무(狼川監務)로 와서 겸임(兼任)하게 하였다.
§ 동주(東州)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鐵圓郡)【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철성군(鐵城郡)이라 하였는데 뒤에 궁예가 병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점령하고 송악군(松岳郡)으로부터 와서 도읍(都邑)하여 궁궐을 지어 사치를 다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태조(太祖)가 즉위함에 미쳐 도읍을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철원(鐵原)을 고쳐 동주(東州)라 하였다【궁예(弓裔)가 지은 궁궐의 옛터는 동주(東州)의 북쪽 27리(里) 풍천원(楓川原)에 있다.】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고 현종(顯宗) 9년에 지동주사(知東州事)로 고쳤다가 고종(高宗) 41년에 내려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으나 뒤에 올려 목(牧)으로 하였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없애니 내려 철원부(鐵原府)로 하였다. 별호(別號)를 창원(昌原)【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육창(陸昌)이라 하였다. 보개산(寶盖山)이 있다. 1군(郡)과 7현(縣)이 속해있다.
○ 금화군(金化郡). 본래 고구려의 부여군(夫如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부평군(富平郡)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여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화산(花山)이라 한다.
○ 삭녕현(朔寧縣). 본래 고구려의 소읍두현(所邑豆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삭읍(朔邑)으로 고쳐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승령 감무(僧嶺監務)로 하여금 겸임(兼任)하게 하였다.
○ 평강현(平康縣).【강(康)은 강(江)으로도 썼음.】 본래 고구려의 부양현(斧壤縣)【어사내현(於斯內縣)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광평(廣平)이라 고쳐 부평군(富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금화 감무(金化監務)로 하여금 겸임한 바 되었으나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나누어 감무(監務)를 두었다. 분수령(分水嶺)이 있다.
○ 장주현(州縣).【장()은 장(獐)으로도 썼음.】 본래 고구려의 공목달현(工木達縣)【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공성(功城)이라 고쳐 철성군(鐵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으나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 5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승령(僧嶺)을 겸임(兼任)하게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매 왕의 이름을 피하여 고쳐 연주(漣州)라 하였다. 별호(別號)를 장포(獐浦)【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라고 한다. 징파도(澄波渡)가 있다.
○ 승령현(僧嶺縣). 본래 고구려의 승량현(僧梁縣)【비물(非勿)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동량(梁)으로 고쳐 철성군(鐵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시켰으며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어 삭녕(朔寧)을 겸임하게 하였다.
○ 이천현(伊川縣). 본래 고구려의 이진매현(伊珍買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화산(花山)이라 한다. 온천(溫泉)이 있다.
○ 안협현(安峽縣). 본래 고구려의 아진압현(阿珍押縣)【궁악(窮岳)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9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동음현(洞陰縣). 본래 고구려의 양골현(梁骨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견성군(堅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원종(元宗) 10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강윤소(康允紹)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영흥 현령관(永興縣令官)으로 삼았다.
서해도(西海道)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스스로 능히 지키지 못하니 신라가 드디어 병합되었다. <신라> 말엽에 이르러 궁예(弓裔)의 주둔한 바 되었고 태조(太祖)가 이미 나라를 세워 그 땅을 다 차지하여 성종(成宗) 14년에 경내(境內)를 구분하여 10도(道)로 삼고 황주(黃州)와 해주(海州) 등의 주현(州縣)을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고쳐 서해도(西海道)로 삼았다. 뒤에 수안(遂安)․곡주(谷州)․은율(殷栗) 등의 현(縣)을 원(元) 나라에 빼앗겼다가 충렬왕(忠烈王) 4년에 이르러 원(元) 나라가 이에 돌려주었다. 1대도호부(大都護府)․1목(牧)․6군(郡)․16현(縣)․1진(鎭)을 관할(管轄)하였다.
§ 안서 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
본래 고구려의 내미홀(內米忽)【지성(池城) 또는 장지(長池)라고도 하였음.】 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폭지군(瀑池郡)이라 하였고 태조(太祖)가 폭지군(瀑池郡)의 남쪽이 바다에 닿아있으므로 이름을 해주(海州)라 내렸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설치했을 때 해주(海州)는 그 하나가 되었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우신책군(右神策軍)을 칭하고 양주(楊州)와 더불어 좌우보(左右輔)가 되었으며 현종(顯宗) 3년에 절도사(節度使)를 없애고 9년에 4도호부(都護府)를 정하여 설치하매 고쳐 해주 안서 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라 하였고 예종(睿宗) 17년에 또 올려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였으며 고종(高宗) 34년에 해주목(海州牧)으로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22년에 왜구가 침입하여 목사(牧使) 엄익겸(嚴益謙)을 죽였으므로 이에 주리(州吏)로써 목사(牧使)를 구하지 않은 자를 죽이고 해주(海州)를 내려 군(郡)으로 삼았다가 뒤에 다시 올려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대령서해(大寧西海)【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라 하고 또 호(號)를 고죽(孤竹)이라 하였다. 수양산(首陽山)․대수압도(大首島)【수압(睡鴨)이라고도 한다. 아래도 이와 같다.】 ․소수압도(小首島)․연평도(延平島)【평(平)은 또한 평(坪)으로도 썼음.】 ․용매도(龍媒島)가 있다. 3현(縣)이 소속하였고 1방어군(防禦郡)․1현령관(縣令官)․1진(鎭)을 관령(管領)하였다.
○ 염주(鹽州). 본래 고구려의 동음홀(冬音忽)【음(音)은 삼()으로도 썼고 혹은 고염성(鼓城)이라고도 하였음.】 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해고군(海皐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초에 방어사(防禦使)를 폐하고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4년에 거란군(契丹軍)을 막은 공이 있어 올려 영응 현령관(永膺縣令官)으로 삼았고 고종(高宗) 46년에 현(縣)의 사람 장군 차송우(車松祐)가 위사(衛社)의 공이 있어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올렸고 원종(元宗) 10년에 또 위사 공신(衛社功臣) 이분희(李汾禧)의 향(鄕)이므로 고쳐 석주(碩州)라 하였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또 올려 온주목(溫州牧)으로 하였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없애니 내려 연안부(延安府)로 하였다. 별호(別號)를 오원(五原)【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큰 제방이 있어 이름을 남대지(南大池)라 하였다. 주(州)의 동쪽에 전성(氈城)이 있어 옛적 제천단(祭天壇)이다.
○ 백주(白州). 본래 고구려의 도랍현(刀臘縣)【치악성(雉嶽城)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구택(澤)으로 고쳐 해고군(海皐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평주(平州)에 속하였다가 의종(毅宗) 13년에 토산(兎山)의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하매 지개흥부사(知開興府事)로 올렸다가 뒤에 옛 이름을 복구하여 내속(來屬)하였다. 고종(高宗) 46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이인식(李仁植)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충익 현령관(忠翊縣令官)으로 삼았고 원종(元宗) 10년에 또 위사 공신(衛社功臣) 조오(趙)의 내향(內鄕)이므로 지복흥군사(知復興郡事)로 올렸으며 공민왕(恭愍王) 18년에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의 이름을 피하여 도로 백주(白州)라 칭하였다. 별호(別號)를 은천(銀川)【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온천(溫泉)이 있다.
○ 안주(安州). 본래 고구려의 식성군(息城郡)【한성군(漢城郡) 또는 한홀(漢忽) 또는 내홀(乃忽)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중반군(重盤郡)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초에 방어사(防禦使)를 폐하고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4년에 거란군(契丹軍)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올려 재령 현령관(載寧縣令官)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안릉(安陵)【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안풍(安風)이라 한다.
§ 풍주(豊州)
본래 고구려의 구을현(仇乙縣)【굴천(屈遷)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14년에 올려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가 현종(顯宗) 9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서하(西河)【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라 하였다. 초도(椒島)와 석도(席島)가 있다. 1군(郡)과 5현(縣)이 속해있다.
○ 안악군(安岳郡). 본래 고구려의 양악군(楊岳郡)으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목왕(忠穆王) 4년에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양산(楊山)이라 한다. 아사진(阿斯津)․생초곶(省草串)과 아사진(阿斯津)․도곶(桃串)이 있다.【모두 사전(祀典)에 실려 있다. 군(郡) 소속으로 연풍장(連豊莊)이 있는데 공양왕 2년에 장(長)을 두고 연풍장장(連豊莊長)으로 감무(監務)를 겸할 것을 명하였다.】
○ 유주(儒州). 본래 고구려의 궐구(闕口)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46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유경(柳璥)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문화 현령관(文化縣令官)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시령(始寧) 【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구월산(九月山)【세상에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전한다.】 , 장장평(莊莊坪)【세상에 단군(檀君)이 도읍한 곳으로 전하니 곧 당장경(唐莊京)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 하겠다.】 , 삼성사(三聖祠)【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祠堂)이 있다.】 가 있다.
○ 은율현(殷栗縣). 본래 고구려의 율구(栗口)【율천(栗川)이라고도 하였음.】 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청송현(靑松縣). 본래 고구려의 마경이(麻耕伊)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해안 현령관(海安縣令官)으로 왜구의 침탈로 인하여 신우(辛禑) 9년에 현(縣)에 소속하였다.】
○ 가화현(嘉禾縣). 본래 고구려의 판마곶(板麻串)으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고 영강 감무(永康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였다.
○ 영령현(永寧縣). 본래 고구려의 웅한이(熊閑伊)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신천(信川)으로 이속(移屬)하였다.
§ 옹진현(瓮津縣)
본래 고구려의 옹천(瓮遷)으로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기린도(騏麟島)․창린도(昌麟島)․어화도(魚化島)․고도(孤島)․모도(謀島)가 있고 2현(縣)이 속해있다.
○ 장연현(長淵縣).【장담(長潭)이라고도 하였음.】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신라 및 고려에서 모두 옛 이름을 그대로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장산곶(長山串)【봄과 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내며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백사정(白沙汀)【3면(面)이 바다에 접하여 있다.】 이 있다.
○ 영강현(永康縣). 본래 고구려의 부진이(付珍伊)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어 가화(嘉禾)를 겸임하게 하였다
§ 백령진(白翎鎭)
본래 고구려의 곡도(鵠島)로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진(鎭)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진장(鎭將)을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6년에 뱃길이 험난하므로 육지로 나와 문화현(文化縣) 동촌(東村)에 교우(僑寓)하다가 이어 땅이 매우 좁음으로 진(鎭)을 폐하고 장차 문화현(文化縣) 임내(任內)에 소속시키려 하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혁파하여 직촌(直村)으로 삼았다. 대청도(大靑島)【충목왕(忠穆王) 4년에 원(元) 나라가 위왕(魏王) 아목가(阿木哥)를 이곳에 유배하였다가 10년에 불러 들였고 11년에 패라 태자(刺太子)를 이곳에 유배하였다가 16년에 소환하였으며 17년에 도우첩목 태자(陶于帖木太子)를 이곳에 유배하였다가 충숙왕(忠肅王) 후 원년(後元年)에 소환하였다.】 와 소청도(小靑島)가 있다.
§ 황주목(黃州牧)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하였음.】 로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고쳐 취성군(取城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니 황주(黃州)는 그 하나이다. 성종(成宗)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천덕군(天德軍)이라 칭하여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켰다가 현종(顯宗) 3년에 폐지하여 안무사(安撫使)로 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8목(牧)을 정하여 두니 그대로 목(牧)으로 하였다. 고종(高宗) 4년에 거란군(契丹軍)을 능히 막지 못함으로써 지고령군사(知固寧郡事)로 내렸다가 뒤에 다시 황주목(黃州牧)을 칭하였다【철도(鐵島) 사람이 육지로 나와 주(州)의 서촌(西村)에 우거(寓居)하매 충숙왕(忠肅王) 후7년에 철화현(鐵和縣)이라 칭하고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이를 혁파하였고 또 주(州)의 속진(屬鎭)으로 장명진(長明鎭)이 있어 공양왕(恭讓王) 2년에 장명(長命)과 연풍(連豊)을 겸임한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제안(齊安)【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용흥(龍興)이라 불렀다. 아사진(阿斯津)과 송곶(松串)【사전(祀典)에 실려있다.】 이 있고 요해처(要害處)로 극성(棘城)이 있다. 2군(郡)과 1현(縣)이 소속하였고 2지군사(知郡事)와 1현령관(縣令官)을 관령(管領)하였다.
○ 봉주(鳳州). 본래 고구려의 휴암군(郡)【조파의(租坡衣) 또는 휴류성(城)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천암군(岩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초에 방어사(防禦使)를 폐하고 내속(來屬)하였고 충렬왕(忠烈王) 11년에 다시 방어사(防禦使)를 칭하였고 이어 지봉양군사(知鳳陽郡事)로 하였다. 별호(別號)를 지하(池河)【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라 한다.
○ 신주(信州). 본래 고구려의 승산(升山)으로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초(初)에 방어사(防禦使)를 폐하고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신안(信安)【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한다. 온천(溫泉)이 있다.
○ 토산현(土山縣). 본래 고구려의 식달(息達)로 헌덕왕(憲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충숙왕(忠肅王) 9년에 공신(功臣) 평양군(平壤君) 조인규(趙仁規) 할머니의 고향이므로 올려 상원군(祥原郡)으로 하였다. 가수굴(嘉殊窟)이 있다.
§ 평주(平州)
본래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영풍군(永豊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9년에 정하여 지주사(知州事)로 삼았고 원종(元宗) 30년에 복흥군(復興郡)에 병합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때에 복구하였다. 별호(別號)를 연덕(延德)이라 하였고 또 동양(東陽)이라 불렀다. 저천(猪淺)【패강(浿江)이라고도 하였음.】 이 있고 온천(溫泉)이 있다. 1현(縣)이 속해있다.
○ 동주(洞州). 본래 고구려의 오곡군(五谷郡)【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오관군(五關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초(初)에 방어사(防禦使)를 폐하고 내속(來屬)하였다. 원종(元宗) 때에 임금의 태(胎)를 모신 곳이므로 올려 서흥 현령관(瑞興縣令官)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농서(西)【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라 하였다. 요해처(要害處)로 절령(嶺)【즉 자비령(慈悲嶺)이다.】 이 있다.
§ 곡주(谷州)
본래 고구려의 십곡성(十谷城)【덕돈홀(德頓忽) 또는 곡성현(谷城縣) 또는 고곡군(古谷郡)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진서(鎭瑞)로 고쳐 영풍군(永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9년에 지군사(知郡事)로 정하였다. 별호(別號)를 상산(象山)【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2현(縣)이 속해있다.
○ 신은현(新恩縣).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고종(高宗) 46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이공주(李公柱)의 내향(內鄕)이므로 지담주사(知覃州事)로 올렸다가 뒤에 옛 이름을 다시 쓰고 환속(還屬)하였다. 별호(別號)를 신성(新城)이라 하였다.
○ 협계현(俠溪縣). 본래 고구려의 수곡성현(水谷城縣)【매차홀(買且忽)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단계(檀溪)로 고쳐 영풍군(永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縣宗) 9년에 내속(來屬)하여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북소궁궐(北蘇宮闕)의 옛 터가 있다. 【북소(北蘇)는 곧 현(縣) 북쪽의 기달산(箕達山)으로 신우(辛禑) 때에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의거하여 권중화(權仲和) 등을 보내어 찾아 얻었다. 좌소(左蘇) 백악산(白岳山)과 우소(右蘇) 백마산(白馬山)과 더불어 3소(蘇)라고 한다.】
○ 수안현(遂安縣). 본래 고구려의 장새현(獐塞縣)【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때에 천암군(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곡주(谷州) 임내(任內)에 속하였다가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원(元) 나라 폐환(嬖宦) 이대순(李大順)의 청으로 올려 수주(遂州)【일설(一說)에는 군(郡) 사람 이연송(李連松)이 나라에 힘써 일함이 있어 올려 군(郡)으로 삼았다.】 로 삼았다.
동계(東界)
§ 동계(東界)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성종(成宗) 14년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정할 때 화주(和州)와 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를 삼고 정종(靖宗) 2년에 동계(東界)【북계(北界)와 더불어 양계(兩界)가 됨.】 라 칭하고 문종(文宗) 원년(元年)에 동북면(東北面)【혹은 동면(東面), 동로(東路), 동북로(東北路), 동동북계(東北界)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라 칭하였고 뒤에 함주(咸州) 위의 북쪽지역이 동여진(東女眞)에 빼앗겼으므로 예종(睿宗)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쳐서 쫓고 9성(城)을 설치하고 비(碑)를 공험진(公鎭)의 선춘령(先春嶺)에 세워 경계로 삼았으며 명종(明宗) 8년에 이르러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칭하였다. 고종(高宗) 45년에 몽고의 군사가 쳐들어 왔을 때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배반하여 병마사(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죽이고 화주(和州) 위의 북쪽지역으로써 몽고에 귀부(歸附)하니 몽고(蒙古)에서 이에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를 화주(和州)에 두고 조휘(趙暉)로써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卓靑)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고종(高宗) 46년에 충청도(忠淸道)의 영월(寧越)과 평창(平昌)이 속하였다가 뒤에 그 도(道)로 돌려 속하게 하였는데 원종(元宗) 4년에 강릉도(江陵道)를 칭하고 충렬왕(忠烈王) 16년에 영월(寧越)과 평창(平昌)이 다시 내속(來屬)하여 공민왕(恭愍王) 5년에 강릉 삭방도(江陵朔方道)라 칭하였다. 7월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보내어 쌍성(雙城)을 공격할 때 지도(地圖)를 상고하여 화(和)․등(登)․정(定)․장(長)․예(預)․고(高)․문(文)․선(宣) 등의 주(州) 및 선덕(宣德)․원흥(元興)․영인(寧人)․요덕(耀德)․정변(靜邊) 등의 진(鎭)의 여러 성(城)을 되찾았다. 이에 앞서 삭방도(朔方道)에서 도련포(都連浦)로 경계를 삼아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정주(定州)․선덕(宣德)․원흥(元興)의 3관문(關門)을 설치하였던 것이 원(元) 나라에 빼앗기게 된 지 무릇 99년만에 이에 이르러 비로소 수복되어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으로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삼아 강역(疆域)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東北面)이라 불렀으며 공민왕(恭愍王) 9년에 삭방 강릉도(朔方江陵道)라 칭하니 이로써 생각하건대 철령(鐵嶺) 위쪽 북쪽은 삭방도(朔方道)가 되고 그 남쪽은 강릉도(江陵道)가 될 것이다. 고려 때에 혹은 삭방도(朔方道)를, 혹은 강릉도(江陵道)를, 혹은 합하여 삭방 강릉도(朔方江陵道)라 하고 혹은 강릉 삭방도(江陵朔方道)라 칭하였으며 또 혹은 연해 명주도(沿海溟州道)라 칭하여 한번 나누어졌다가 한번 합해지고 하여 비록 연혁(沿革)과 칭호는 같지 않으나 그러나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진(公鎭)의 남쪽과 삼척(三陟)의 북쪽을 통칭하여 동계(東界)라 말하였다. 1도호부(都護府)․9방어군(防禦郡)․10진(鎭)․25현(縣)을 관령(管領)하였으며 예종(睿宗) 때에 1대도호부(大都護府)․4방어군(防禦郡)․6진(鎭)을 설치하였고 공민왕(恭愍王) 이후로 2부(府)를 설치하였다.
안변도호부
본래 고구려의 비열홀군(比列忽郡)【천성군(淺城郡) 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진흥왕(眞興王) 17년에 비열주(比列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초에 등주(登州)라 칭하고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고종(高宗) 때에 정평(定平)의 남쪽 여러 성(城)이 몽고군의 침입을 입어 강릉도(江陵道) 양주(襄州)로 옮겨 임시로 거하다가 다시 간성(杆城)으로 옮겨 40년 가까이 있다가 충렬왕(忠烈王) 24년에 각기 원래의 성(城)으로 돌아갔다. 별호(別號)를 삭방(朔防)【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국도(國島)가 있다. 7현(縣)이 소속하였고 9방어군(防禦郡)․10진(鎭)․8현령관(縣令官)을 관령(管領)하였다.
○ 서곡현(瑞谷縣). 본래 고구려의 경곡현(谷縣)【수을탄(首乙呑)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삭정군(朔庭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유시켰다.
○ 문산현(汶山縣). 본래 고구려의 가지달현(加支達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정산(山)으로 고쳐 삭정군(朔庭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시켰고 뒤에 문산(文山)으로 고쳤다.
○ 위산현(衛山縣). 고구려 때의 칭호는 알 수 없다. 현종(縣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익곡현(翼谷縣). 본래 고구려의 어지탄현(於支呑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익계(翊谿)로 고쳐 삭정군(朔庭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
○ 파천현(派川縣). 본래 고구려의 기연현(淵縣)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금양군(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학포현(鶴浦縣). 본래 고구려의 곡포현(鵠浦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금양군(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상음현(霜陰縣). 본래 고구려의 살한현(薩寒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삭정군(朔庭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시켰다.
○ 화주(和州).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혹은 장령진(長嶺鎭)이라 칭하고 혹은 당문(唐文) 【당(唐)은 당(堂)으로도 썼음】 이라 칭하고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칭하였는데 고려(高麗) 초에 화주(和州)로 삼았다가 성종(成宗) 14년에 화주 안변 도호부(和州安邊都護府)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내려 화주 방어사(和州防禦使)로 삼아 본영(本營)으로 삼았다. 고종(高宗) 때에 몽고에 빼앗기게 되어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가 되매 주(州)를 그대로 두고 등주(登州)에 합쳤으나 아직 방어사(防禦使)를 칭하다가 뒤에 통주(通州)에 병합하였고 충렬왕(忠烈王) 때에 복구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5년에 군사를 내어 되찾아 화주목(和州牧)으로 삼았고 18년에 올려 화령부(和寧府)로 삼아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횡강(橫江)이 있다.
○ 고주(高州). 옛 덕녕진(德寧鎭)【홍원군(洪源郡)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성종(成宗) 14년에 고주 방어사(高州防禦使)로 삼았고 현종(顯宗) 19년에 봉화산(鳳化山) 남쪽에 성(城)을 쌓고 주치(州治)를 옮겼으며 공민왕(恭愍王) 5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
○ 의주(宜州).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21년에 이곳을 취하여 고쳐 정천군(井泉郡)이라 하고 고려(高麗) 초에 용주(湧州)라 칭하였으며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고 예종(睿宗) 3년에 책성(策城)하였다. 별호(別號)를 동모(東牟)【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라 하며 또 호(號)를 의춘(宜春) 또는 의성(宜城)이라 하였다. 요해처(要害處)로 철관(鐵關)이 있고 해도(海島)로 죽도(竹島)가 있다.
○ 문주(文州). 옛적에는 주성(姝城)이라 칭하였다. 성종(成宗) 8년에 문주 방어사(文州防禦使)로 삼았다가 뒤에 의주(宜州)에 합쳤고 충목왕(忠穆王) 원년(元年)에 다시 나누어 두었다.
○ 장주(長州). 【가림(林) 또는 단곡(端谷)이라고도 하였음.】 현종(顯宗) 9년에 장주 방어사(長州防禦使)로 삼았다가 뒤에 고쳐 현(縣)으로 삼고 정주(定州)에 소속시켰다.
○ 정주(定州). 옛 칭호(稱號)는 파지(巴只)【선위(宣威)라고도 하였음.】 로 정종(定宗) 7년에 정주 방어사(定州防禦使)로 삼고 관문(關門)을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5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하였다.】
○ 예주(豫州). 예종(睿宗) 11년에 예주 방어사(豫州防禦使)로 삼았다가 뒤에 정주(定州)에 소속하였다.
○ 덕주(德州). 문종(文宗) 9년에 처음으로 선덕성(宣德城)을 쌓아 진(鎭)으로 삼았고 뒤에 덕주 방어사(德州防禦使)를 칭하였다.
○ 원흥진(元興鎭). 정종(靖宗) 10년에 생천(川)에 성(城)을 쌓고 진(鎭)으로 삼아 진사(鎭使)가 있었다. 이하의 진(鎭)의 경우도 동일한 경우다.
○ 영인진(寧仁鎭).【청원(淸源)이라고도 하였음】 현종(顯宗) 22년에 두었다.
○ 요덕진(耀德鎭). 일명 현덕진(顯德鎭)이라고도 하는데 현종(顯宗) 3년에 처음으로 성보(城堡)를 쌓았다.
○ 장평진(長平鎭). 옛 이름은 고질달(古叱達)로 광종(光宗) 20년에 처음으로 성보(城堡)를 쌓고 진장(鎭將)이 있었다. 이하의 진(鎭)의 경우도 동일한 경우인데 공민왕(恭愍王) 6년에 진(鎭)을 고쳐 현(縣)으로 삼아 영(令)을 두었다.
○ 용진진(龍津鎭). 옛 호포(狐浦)로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진(鎭)으로 삼았고 목종(穆宗) 9년에 성(城)을 쌓았다. 뒤에 문주(文州)에 속하였으나 신우(辛禑) 5년에 나누어 현령(縣令)을 두었다. 별호(別號)를 용성(龍城)이라 하였다.
○ 영흥진(永興鎭). 옛 이름은 관방수(關防戍)로 문종(文宗) 15년에 처음으로 성보(城堡)를 쌓았다.
○ 정변진(靜邊鎭). 현종(顯宗) 22년에 두었다. 비류수(沸流水)가 있다.【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하였다.】
○ 운림진(雲林鎭). 현종(顯宗) 6년에 성보(城堡)를 쌓았다.
○ 영풍진(永豊鎭). 본래 증대이(甑大伊)로 목종(穆宗) 4년에 두었는데 뒤에 고쳐 현(縣)으로 하였다.
○ 애수진(隘守鎭). 옛 칭호는 이병(梨炳)으로 성종(成宗) 2년에 축성(築城)하였다. 처음 문주(文州)에 예속(隸屬)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9년에 고주(高州)에 소속하였다.
○ 진명현(鎭溟縣). 원산현(圓山縣)이라고도 하고 또 수강(水江)이라고도 이름하였는데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고 뒤에 의주(宜州)에 소속하였다.
§ 명주(溟州)
○ 명주(溟州)는 본래 예국(濊國)【철국(鐵國) 또는 예국(濊國)이라고도 함.】 인데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군대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정복하고 그곳에 4군(郡)을 설치하였을 때 임둔(臨屯)으로 하였고 고구려는 하서량(河西良)【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함.】 이라고 불렀다. 신라 선덕여왕은 소경(小京)으로 삼아 사신(仕臣)을 두었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5년에 말갈(靺鞨) 지역과 연결되어 경(京)을 폐지하고 주(州)를 만들어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에 다시 옛 이름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19년에 동원경(東原京)이라고 부르다가 23년에 다시 명주(溟州)로 하였다. 성종(成宗)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고 불렀고 5년에 명주 도독부(溟州都督府)로 고쳤고 11년에 다시 목(牧)으로 삼고 14년에 단련사(團練使)로 하였다가 뒤에 다시 방어사(防禦使)로 고쳤다. 원종(元宗) 원년에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올려 경흥 도호부(慶興都護府)라 하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강릉부(江陵府)로 고쳤으며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올렸다. 별호는 임영(臨瀛)이다. 여기에는 오대산【다섯개의 봉우리가 서로 둘러 서 있는데 크고 작음이 서로 비슷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서쪽 봉우리 아래에 샘물이 솟는데 곧 한수(漢水)의 발원지이다.】 대령(大嶺)과 경포(鏡浦) 등이 있으며 3현(縣)이 소속해 있다.
○ 우계현(羽溪縣). 본래 고구려의 우곡현(羽谷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삼척군(三陟郡)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는 옥당(玉堂)이다.
○ 정선현(旌善縣). 본래 고구려의 잉매현(仍買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명주(溟州)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시켰고 뒤에 올려 군(郡)으로 삼았는데 별호는 삼봉(三鳳)이다. 풍혈(風穴)이 있다.【여름이 지나도록 이곳에 얼음을 저장하여 둔다. 또 그 곁에 수혈(水穴)이 있는데 남강(南江) 물이 이곳에서 갈라져서 땅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 연곡현(連谷縣). 본래 고구려의 지산현(支山縣)이다. 신라 경덕왕은 옛 이름을 그대로 두고 명주(溟州) 영현(領縣)으로 삼고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부르고 그대로 소속 시켰다.【이 현(縣) 사람들이 전하기를 옛날 양곡현(陽谷縣)이라고 한다.】
§ 금양현(金壤縣)
본래 고구려의 휴양군(休壤郡)【금뇌(金惱)라고도 함.】 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초에 현령을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 11년에 통주 방어사(通州防禦使)로 삼았다. 난도(卵島)가 있고 3현(縣)이 소속해 있다.
○ 임도현(臨道縣). 원래 고구려의 도림현(道臨縣)【조을포(助乙浦)라고도 함.】 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금양군(金壤郡) 영현(領縣)으로 삼고 고려에 와서도 그대로 소속시켰다.
○ 운암현(雲岩縣). 본래 고구려의 평진현현(平珍峴縣)【천현(仟縣)이라고도 함.】 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편험(偏險)으로 고쳐서 고성군(高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와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내속(來屬)하였다.
○ 벽산현(碧山縣). 본래 고구려의 토상현(吐上縣)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제상(堤上)으로 고쳐서 금양군(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고 고려에 와서도 그대로 두었다.
§ 흡곡현(谷縣)
본래 고구려의 습비곡현(習比谷縣)【곡(谷)은 탄(呑)으로도 쓴다.】 인데 신라 경덕왕은 습계(習磎)로 고쳐서 금양군(金壤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 와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으며 고종(高宗) 35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별호(別號)는 학림(鶴林)이라 한다. 천도(穿島)가 있다.
§ 고성현(高城縣)
본래 고구려의 달홀(達忽)인데 신라 진흥왕(眞興王) 29년에 주(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다. 고려에 와서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는 풍암(豊巖)이다. 삼일포(三日浦)와 온천(溫泉)이 있다. 2현(縣)이 소속되었다.
○ 환가현(縣). 본래 고구려 저수혈현(猪穴縣)【오사압(烏斯押)이라고도 함.】 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고성군(高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 와서도 그대로 소속시켰으며 문종(文宗) 때에 현치(縣治)를 양촌(陽村)으로 옮기고 해적(海賊) 방어의 요충지로 삼았다.
○ 안창현(安昌縣). 본래 막이현(莫伊縣)이다. 현종(顯宗) 9년 지금의 이름을 불렀고 내속(來屬)하였다.
§ 간성현(杆城縣)
본래 고구려의 수성군(城郡)【가라홀(加羅忽)이라고도 함.】 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수성군(守城郡)으로 고쳤다. 고려가 다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삼았다가 다음에 군(郡)으로 올려 고성(高城)을 겸임하게 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2개의 군(郡)으로 나누었다. 별호(別號)는 수성(水城)이라 부른다. 1현(縣)이 소속해 있다.
○ 열산현(烈山縣). 본래 고구려의 승산현(僧山縣)【소물달(所勿達)이라고도 함.】 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동산(童山)로 고쳐서 수성군(守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 와서 지금 이름으로 갈아 그대로 소속시켰다. 별호는 봉산(鳳山)이다.
§ 익령현(翼嶺縣)
본래 고구려의 익현현(翼峴縣)【이문현(伊文縣)이라고도 함.】 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수성군(守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현종(顯宗) 9년에 현령(縣令)을 삼고 고종(高宗) 8년에 능히 거란(契丹)의 침입을 막아 내었다 하여 양주 방어사(襄州防禦使)로 올렸다가 41년에 낮추어서 현령(縣令)을 삼고 44년에는 적(賊)에게 항복하였다 하여 다시 낮추어 덕녕 감무(德寧監務)로 하였으며 원종(元宗) 원년(元年)에 지양주사(知襄州事)로 높혔다. 별호(別號)는 양산(襄山)이다. 동해 신사(東海神祠)가 있고 1현(縣)이 속해 있다.
○ 동산현(洞山縣). 본래 고구려의 혈산현(穴山縣)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갈아 명주(溟州)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 삼척현(三陟縣)
본래 실직군(悉直郡)인데 신라 파사왕(婆娑王) 때에 항복하여 왔으며 지증왕(智證王) 6년에 주(州)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다. 성종(成宗) 14년에 척주 단련사(陟州團練使)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내려서 현령(縣令)으로 하였으며 신우(辛禑) 3년에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별호(別號)는 진주(眞珠)이다. 태백산(太白山)【신라 때에 오악(五岳)에 비교하여 북악(北岳)으로 삼았다.】 과 황지(黃池)【낙동강(洛東江)의 발원지이다.】 가 있다
§ 울진현(蔚珍縣)
본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고혜이군(古兮伊郡)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내려 현(縣)을 삼아 영(令)을 두었다.
울릉도(鬱陵島)가 있다.【현(縣)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 우산국(于山國)이라 칭하고 무릉(武陵) 또는 우릉(羽陵)이라고도 하였다. 넓이가 100리(里)이며 지증왕(智證王) 12년에 항복하여 왔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 백길사두(白吉士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바치게 하였다. 의종(毅宗) 11년에 왕이 울릉도(鬱陵島)는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옛적에 주현(州縣)을 두었으며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니 김유립(金柔立)이 돌아와 아뢰기를, ?섬 가운데 큰 산(山)이 있어 산정(山頂)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가면 바다에까지 10,000여 보(步)가 되고 서쪽으로 향해 가면 13,000여 보(步)가 되고 남쪽으로 향해 가면 15,000여 보(步)가 되며 북쪽으로 향해 가면 8,000여 보(步)가 되며 촌락(村落)의 기지(基址)가 7개소 있으며 석불(石佛)․철종(鐵鐘)․석탑(石塔)이 있으며 시호(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가 많이 나서 있으나 그러나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하니 드디어 그 의론을 중지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 함주 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
○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하고 있던 곳으로 예종(睿宗) 2년에 원수(元帥)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고 3년에 주(州)를 두어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고 진동군(鎭東軍)이라 하였으며 큰 성(城)을 쌓고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948명을 옮겨 살게 하였다가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았겨 합란부(哈蘭府)라 칭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에 옛 땅을 다시 찾아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으나 이어 만호부(萬戶府)로 고치고 영(營)을 두어 강릉(江陵)․경상(慶尙)․전라(全羅) 등의 도(道)의 군마(軍馬)와 방수(防守)를 모았으며 18년에 올려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함평(咸平)이라 하였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 있으니 함관령(咸關嶺)【부(府)의 북쪽에 있다.】 과 대문령(大門嶺)【홍헌(洪獻)에 있다.】 이다.
○ 영주(英州).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이름을 안령군(安嶺郡)이라 하였으나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 웅주(雄州).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이름을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였으나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 길주(吉州). 오래 여진(女眞)의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궁한촌(弓漢村)이라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6년에 중성(中城)을 쌓았으나 이어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해양(海洋)【해양(海陽)이라고도 하였다 함.】 이라 칭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때에 옛 땅을 되찾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웅․길주 등처 관군민 만호부(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두었다.【길주(吉州)는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 난도(卵島)가 있다.
○ 복주(福州).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고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았으나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독로궤(禿魯)라 칭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미쳐 옛 땅을 다시 찾고 신우(辛禑) 8년에 단주 안무사(端州安撫使)로 삼았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 있으니 이판령(伊板嶺)【주(州)의 동북(東北)에 있으니 즉 마천령(磨天嶺)이다.】 과 두을외령(豆乙外嶺)【주(州)의 남쪽에 있으니 즉 마운령(磨雲嶺)이다.】 이다.
○ 공험진(公鎭). 예종(睿宗) 3년에 성(城)을 쌓고 진(鎭)을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았고 6년에 산성(山城)을 쌓았다.【일설에는 공주(孔州)라 하고 또 광주(匡州)라고도 하며 일설에는 선춘령(先春嶺) 동남(東南) 백두산(白頭山) 동북(東北)에 있다 하며 또는 소하강변(蘇河江邊)에 있다고 함.】
○ 통태진(通泰鎭). 예종(睿宗) 3년에 성(城)을 쌓고 진(鎭)을 두었으며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평융진(平戎鎭). 예종(睿宗) 3년에 성(城)을 쌓고 이를 두었다.
○ 숭녕진(崇寧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진양진(眞陽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 선화진(宣化鎭). 예종(睿宗) 4년에 성(城)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다시 찾아 길주(吉州)에 병합(倂合)하였다.
○ 구사(舊史)를 상고하면 9성(城)의 땅은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하여 거주한 곳으로 예종(睿宗) 2년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에게 명하여 군사 17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여진(女眞)을 쳐서 쫓고 군사를 나누어 땅을 경략(經略)하니 동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며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러 이것을 우리 강역(疆域)으로 삼고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곽(城廓) 990간(間)을 쌓아 이름을 영주(英州)라 하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간(間)을 쌓아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간(間)을 쌓아 이름을 복주(福州)라 하였다. 궁한촌(弓漢村)에 670간(間)을 쌓아 이름을 길주(吉州)라 하였다. 3년 2월에 함주(咸州) 및 공험진(公鎭)에 성(城)을 쌓고 3월에 의주(宜州)․통태(通泰)․평융(平戎) 3성(城)을 쌓으니 이에 여진(女眞)이 그 살아갈 곳을 잃고 맹세코 보복하고자 하여 이에 먼 곳의 여러 추장(酋長)을 먼 곳에서 불러와 해마다 침략해 와 우리 군사 가운데 죽거나 다친 사람 또한 많았다. 또한 땅을 개탁(開拓)함이 이미 넓고 9성(城)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여진(女眞)이 자주 병사를 숨어 지키게 하여 오고 가는 사람을 약탈하니 국가에서 여러 모로 군사를 징발하여 중앙과 지방이 시끄러웠는데 4년에 여진(女眞)이 또한 사신(使臣)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였다. 이에 비로소 길주(吉州)로부터 점차로 9성(城)의 전쟁물자와 군량을 내지(內地)로 거두어 들이고 드디어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진(鎭) 및 영주(英州)․복주(福州) 두 주(州)의 성(城)을 철수하고 또 함주(咸州)․웅주(雄州) 두 주(州) 및 선화진성(宣化鎭城)을 철수하여 이를 돌려 주었다. 이것으로 생각할 때 함(咸)․영(英)․웅(雄)․복(福)․길(吉)․의(宜) 6주(州)와 공험(公)․통태(通泰)․평융(平戎)의 3진(鎭), 이것이 9성(城)의 수(數)에 들어간다. 그 성(城)을 철수하고 여진(女眞)에게 돌릴 때에 의주(宜州) 및 공험(公)와 평융(平戎) 2진(鎭)이 없고 숭녕(崇寧)․진양(眞陽)․선화(宣化) 3진(鎭)이 이에 더 나타나고 배치한 호(戶)의 숫자 또한 각각 같지 않으니 이것이 의심스러운 일이다【예종(睿宗) 3년 2월에 도령할(都鈴轄) 임언(林彦)이 영주기(英州記)를 지어 말하기를,
?이제 6성(城)을 새로 설치하니 첫째 진동군(鎭東軍) 함주 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이니 병민(兵民)이 1,948정호(丁戶)이며, 둘째 안령군(安嶺軍) 영주 방어사(英州防禦使)이니 병민(兵民)이 1,238정호(丁戶)이며, 세째 영해군(寧海軍) 웅주 방어사(雄州防禦使)이니 병민(兵民)이 1,436정호(丁戶)이며, 넷째는 길주 방어사(吉州防禦使)이니 병민(兵民)이 680정호(丁戶)이며, 다섯째는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이니 병민(兵民)이 632정호(丁戶)이며, 여섯째는 공험진 방어사(公鎭防禦使)이니 병민(兵民)이 532정호(丁戶)이다.?
하였고 또 민지(閔漬)의 찬(撰)한 바 강목(綱目)에는 말하기를,
?윤관(尹瓘)이 9성(城)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으로 채우니 함주(咸州)를 이름하여 진동군(鎭東軍)이라 하고 13,000호(戶)를 두고 영주(英州)를 이름하여 안령군(安嶺軍)이라 하고 웅주(雄州)를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0,000호(戶)를 두고 복(福)․길(吉)․의(宜)의 3진(鎭)에는 각각 7,000호(戶)를 두고 공험(公)․통태(通泰)․평융(平戎)의 3진(鎭)에는 각각 5,000호(戶)를 두었다.?고 하였다.】 또한 의주(宜州) 땅은 정주(定州) 남쪽에 있어 반드시 여진(女眞)을 쳐서 쫓은 뒤에 설치한 것이 아니어서 이후에 설치한 것이다. 꼭 이에 이르러 성곽을 새로 건축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함께 9성(城)으로는 칭하였으나 철거한 수(數)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북청주부(北靑州府)
○ 오래 여진(女眞)의 점거한 바로 9성(城) 때에 이름은 상세하지 않으나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삼산(三散)이라 불렀고 공민왕(恭愍王) 5년에 옛 땅을 다시 찾아 안북 천호 방어소(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고 21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만호부(萬戶府)를 삼았다.
§ 갑주부(甲州府)
본래 허천부(虛川府)로 오래 여진(女眞)의 점령한 까닭에 여러 번 전쟁을 겪고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공양왕(恭讓王) 3년에 처음으로 갑주(甲州)라 부르고 만호부(萬戶府)를 두었다. 봉천대(奉天臺)【혜산(惠山) 동쪽에 있음.】 가 있다.
북계(北界)
§ 북계(北界)
본래 조선(朝鮮)의 옛 땅으로 3국(國) 때에는 고구려의 소유였고 보장왕(寶藏王) 27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唐) 나라 장수 이적(李勣)과 더불어 협공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드디어 그 땅을 병합하였으며 효공왕(孝恭王) 9년에는 궁예(弓裔)가 철원(鐵原)에 웅거(雄據)하여 후고구려왕이라 스스로 칭하고 패서(浿西) 13진(鎭)을 나누어 정하였다. 성종(成宗) 14년에는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정할 때 서경(西京) 관할로써 패서도(浿西道)로 삼았고 뒤에 북계(北界)라 칭하였으며 숙종(肅宗) 7년에 또 서북면(西北面)을 칭하였으며 뒤에 황주(黃州)․안악(安岳)․철화(鐵和)․장명진(長命鎭)을 내속(來屬)시켰다. 신우(辛禑) 14년에는 다시 서해도(西海道)에 소속시켰다. 1경(京)․1대도호부(大都護府)․25 방어군(防禦郡)․12진(鎭)․10현(縣)을 관령(管領)하였는데 고려 중엽 이후로 설치한 것이 2부(府)와 1군(郡)이다.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지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와 국인(國人)을 세워 임금으로 삼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여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며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을 치고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封)하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 되며 41대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 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무리 1,000명을 모으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도읍을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쓰니 즉 평양(平壤)이다.】 에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그 손자(孫子) 우거(右渠)가 조칙(詔勅) 받들기를 즐겨하지 않아 한(漢) 나라 무제(武帝)는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사군(四郡)으로 정하고 왕험성(王險城)으로 낙랑군(樂浪郡)을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도읍을 옮겨 보장왕(寶藏王) 27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唐) 나라와 더불어 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땅이 드디어 신라에 편입되었다. 태조(太祖) 원년(元年)에 평양(平壤)이 황폐함으로써 남(藍)․백(白)․황(黃)․해(海)․봉(鳳) 등 여러 주(州)의 백성을 대량으로 이주시켜 이를 채우고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西京)으로 삼았는데 광종(光宗) 11년에 서도(西都)라 개칭하였고 성종(成宗) 14년에 서경 유수(西京留守)라 칭하였으며 목종(穆宗) 원년(元年)에 또 호경(鎬京)으로 고쳤다가 문종(文宗) 16년에 다시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을 칭하고 경기(京畿)와 4도(道)를 두었다. 숙종(肅宗) 7년에 문무반(文武班) 및 5부(部)를 설치하였다. 인종(仁宗) 13년에 서경(西京)의 승려 묘청(妙淸) 및 유참(柳)과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반역을 꾸며 군사를 보내어 절령(嶺)길을 끊었다. 이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 등에게 명하여 3군(軍)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게 하고 유수(留守)․감군(監軍)․분사(分司)․어사(御史) 외의 모든 관반(官班)을 없앴으며 이어 경기(京畿)와 4도(道)를 삭제하고 6현(縣)을 두었다. 원종(元宗) 10년에 서북면 병마사영 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과 삼화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유수(留守)를 죽이고 서경(西京) 및 여러 성(城)으로써 반역을 꾸며 몽고(蒙古)에 귀부(歸附)하니 몽고(蒙古)가 서경(西京)으로 동녕부(東寧府)를 삼아 관리(官吏)를 두고 자비령(慈悲嶺)을 구획(區劃)하여 경계(境界)를 삼았는데 충렬왕(忠烈王) 16년에 원(元)이 우리의 서경(西京) 및 여러 성(城)을 돌려주니 드디어 다시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으로 삼았고 공민왕(恭愍王) 18년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였다가 뒤에 고쳐 평양부(平壤府)로 삼았다. 대동강(大同江)【즉 패강(浿江)으로 또 이름을 왕성강(王城江)이라고도 한다. 강의 하류는 구진약수(九津弱水)가 된다.】 이 있다. 대성산(大城山)【구룡산(九龍山) 또는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하는데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말하기를 ?평양성(平壤城) 동북(東北)에 노양산(魯陽山)이 있다?함이 곧 이것을 말함이다. 산정(山頂)에 연못이 세 개 있다.】 ․옛 성(城)터 2개【하나는 기자(箕子) 때 쌓은 것으로 성내(城內)의 구획(區劃)에 정전제(井田制)를 쓰고 있다. 하나는 고려 성종(成宗) 때 쌓은 것이다.】 ․기자묘(箕子墓)【부성(府城)의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다.】 ․동명왕묘(東明王墓)【부(府)의 동남쪽 중화경(中和)의 경계, 용산곡(龍山谷)에 있는데 이름을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또 인리방(仁里坊)에 사우(祠宇)가 있어 고려에서 때로 어압(御押)을 내려 행제(行祭)하고 삭망(朔望)에 또한 그 관(官)으로 하여금 제(祭)를 행하게 하여 읍인(邑人)이 지금에도 일이 있으면 곧 기도를 하는데 세상에서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라고 전(傳)한다.】 ․을밀대(乙密臺)【대(臺)는 금수산(錦繡山) 마루에 있다. 대(臺) 아래의 층층 낭떠러지 곁에 영명사(永明寺)가 있으니 곧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으로 안에 기찬굴(麒贊窟)이 있고 굴(窟)의 남쪽에 백은탄(百銀灘)이 있으며 바위가 조수(朝水)에 출몰함이 있는데 이름을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한다.】 가 있다. 4현(縣)이 속해 있다.
○ 강동현(江東縣). 인종(仁宗) 14년에 경기(京畿)를 나누어 6현(縣)으로 삼았는데 잉을사향(仍乙舍鄕)․반석촌(班石村)․박달관촌(朴達串村)․마탄촌(馬灘村)을 합하여 본현(本縣)으로 삼고 영(令)을 두어 그대로 속현(屬縣)으로 삼았는데 뒤에 성주(成州)에 속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 다시 영(令)을 두었다.
○ 강서현(江西縣). 인종(仁宗) 14년에 경기(京畿)를 나누어 6현(縣)으로 삼았는데 이악(梨岳)․대구(大垢)․갑악(甲岳)․각묘(角墓)․독촌(禿村)․증산(甑山) 등의 향(鄕)을 합하여 본현(本縣)으로 삼아 영(令)을 두고 그대로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 중화현(中和縣). 본래 고구려의 가화압(加火押)으로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고쳐 당악현(唐岳縣)으로 삼았고 고려에 이르러 서경(西京)의 속촌(屬村)으로 삼았다가 인종(仁宗) 14년에 경기(京畿)를 나누어 6현(縣)으로 삼음에 황곡(荒谷)․당악(唐岳)․송곶(松串) 등의 9촌(村)을 합하여 본현(本縣)으로 삼아 영(令)을 두고 그대로 속현(屬縣)으로 삼았는데 충숙왕(忠肅王) 9년에 태조의 통합 공신(統合功臣) 김락(金樂)과 김철(金哲)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군(郡)으로 삼아 영(令)을 두기를 전과 같이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20년에 또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 순화현(順和縣). 인종(仁宗) 14년에 경기(京畿)를 나누어 6현(縣)으로 삼았는데 추자도(楸子島)․앵천촌(櫻遷村)․용곤촌(龍坤村)․화산촌(禾山村)을 합하여 본현(本縣)으로 삼아 영(令)을 두고 그대로 속현(屬縣)으로 삼았는데 뒤에 상원(祥原)에 속하였다가 충혜왕(忠惠王) 2년에 삼화(三和)로 이속(移屬)하였다.
§ 안북 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
본래 고려의 팽원군(彭原郡)으로 태조(太祖) 14년에 안북부(安北府)를 설치하고 성종(成宗) 2년에 영주 안북 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를 칭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안북 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를 칭하였으며 고종(高宗) 43년에 몽고군(蒙古軍)을 피하여 창린도(昌麟島)에 들어갔다가 뒤에 출륙(出陸)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18년에 안주 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가 뒤에 올려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안릉(安陵)【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청천강(淸川江)【옛적에는 살수(薩水)라 불렀으니 곧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 나라 백만대군을 격파한 곳이다.】 이 있다. 25 방어군(防禦郡)․12진(鎭)․6현(縣)을 관령(管領)하였다.
○ 구주(龜州).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으로 성종(成宗) 13년에 평장사(平章事)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쳐서 쫓고 구주(龜州)에 성(城)을 쌓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고종(高宗) 3년에 거란병(契丹兵)이 침입하여 주(州)의 사람들이 대항하여 싸워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심히 많았다. 18년에 이르러 몽고병(蒙古兵)이 침범하니 병마사(兵馬使) 박서(朴犀)가 힘을 다하여 이를 막다가 힘이 꺾여서도 오히려 항복하지 않으니 공(功)으로써 올려 정원 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를 삼았다가 뒤에 도호부(都護府)로 삼고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쳤다.
○ 선주(宣州). 본래 안화군(安化郡)으로 고려(高麗) 초에 고쳐 통주(通州)로 삼았고 현종(顯宗) 21년에 선주 방어사(宣州防禦使)를 칭하였으며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자연도(紫燕島)에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였다. 목미도(牧美島)가 있다.
○ 용주(龍州). 본래 고려의 안흥군(安興郡)으로 현종(顯宗) 5년에 용주 방어사(龍州防禦使)를 칭하였고 뒤에 고쳐 용만부(龍灣府)로 삼았는데 충선왕(忠宣王) 2년에 용주(龍州)를 칭하였다.
○ 정주(靜州). 본래 고려의 송산현(松山縣)으로 덕종(德宗) 2년에 성(城)을 쌓고 민호(民戶) 1,000호(戶)을 옮겨 채웠는데 문종(文宗) 32년에 또 정주(靜州) 등 5성(城)이 성(城)은 큰데 백성이 적으므로 내지(內地)의 민호(民戶)를 각각 100호(戶)를 옮겨 이를 채웠다.
○ 인주(麟州). 본래 고려의 영제현(靈蹄縣)으로 현종(顯宗) 9년에 인주 방어사(麟州防禦使)를 칭하였고 21년에 영평진(永平鎭) 백성을 옮겨 채웠다. 고종(高宗) 8년에 반역(叛逆)으로 인해 내려 함인(含仁)이라 칭하였고 뒤에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옛날 장성(長城)의 터가 있다.【덕종(德宗) 때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쌓은 것으로 주(州)의 압록강(鴨綠江) 입해처(入海處)로부터 시작하여 동계(東界)의 화주(和州)의 바닷가에 이른다.】
○ 의주(義州).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으로 또 이름을 화의(和義)라고도 하였다. 처음 거란(契丹)이 압록강 동쪽에 성(城)을 쌓고 보주(保州)라 칭하였는데 문종(文宗) 때에 거란(契丹)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여 포주(抱州)【파주(把州)라고도 하였음.】 라 칭하였다. 예종(睿宗) 12년에 요(遼) 나라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도통(都統) 야위영(耶寧) 등과 더불어 금(金) 나라 군사를 피하여 바다로 도망가면서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공문을 보내어 내원성(來遠城)과 포주(抱州)를 우리에게 돌려 주거늘 우리 군사가 그 성(城)에 들어가 병장기와 전곡(錢穀)을 거두어 들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쳐 의주 방어사(義州防禦使)로 삼고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추쇄(推刷)하여 이곳을 채웠다. 이에 다시 압록강(鴨綠江)으로 경계를 삼고 관방(關防)을 설치하니 인종(仁宗) 4년에 금(金) 나라가 또한 주(州)를 돌려보내었다. 고종(高宗) 8년에 반역(叛逆)으로 인해 내려 함신(咸新)이라고 칭하였다가 이어 옛 이름으로 돌렸고 공민왕(恭愍王) 15년에 올려 목(牧)을 삼았으며 18년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다. 별호(別號)를 용만(龍灣)이라 한다. 압록강【마자수(馬水)라고도 하고 청하(靑河)라고도 한다.】 이 있다.
○ 삭주(朔州). 본래 고려의 영새현(寧塞縣)으로 현종(顯宗) 9년에 삭주 방어사(朔州防禦使)를 칭하였고 뒤에 올려 부(府)로 삼았다.
○ 창주(昌州). 본래 고려의 장정현(長靜縣)으로 정종(定宗) 원년(元年)에 재전(梓田)에 성(城)을 쌓고 민호(民戶)를 옮겨 창주 방어사(昌州防禦使)로 삼았다.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의 침입을 입어 성읍(城邑)이 빈터가 되었다.
○ 운주(雲州). 본래 고려의 운중군(雲中郡)【옛 원화진(遠化鎭)이라고도 함.】 으로 광종(光宗) 때에 위화진(威化鎭)이 되었고 성종(成宗) 14년에 운주 방어사(雲州防禦使)를 칭하였다.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여 가산 서촌(嘉山西村)에 우거(寓居)하여 연산부(延山府)에 예속(隸屬)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21년에 다시 군(郡)으로 되었다. 별호(別號)를 운중(雲中)【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 연주(延州). 본래 고려의 밀운군(密雲郡)【안삭군(安朔郡)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광종(光宗) 21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지주(知州)로 삼았고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로 삼았으며 공민왕(恭愍王) 15년에 연산부(延山府)로 올렸다.
○ 박주(博州). 본래 고려의 박릉군(博陵郡)【옛 덕창(德昌)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성종(成宗) 14년에 박주 방어사(博州防禦使)를 칭하였고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여 가주(嘉州)에 속였다가 공민왕(恭愍王) 20년에 군(郡)의 이름을 회복하였다. 별호(別號)를 박릉(博陵)【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다. 대령강(大寧江)【속칭(俗稱)으로 박천강(博川江)이라고도 부른다.】 이 있다.
○ 가주(嘉州). 본래 고려의 신도군(信都郡)【옛 덕현(德縣)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광종(光宗) 11년에 습홀(濕忽)에 성(城)을 쌓고 올려 가주(嘉州)로 삼았으며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칭하였다. 고종(高宗) 8년에 반역(叛逆)으로써 내려 무령(撫寧)이라 칭하였고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였다. 태(泰)․박(博) 무(撫)․위(渭) 등의 주(州)가 모두 본군(本郡)에 소속하여 5성 겸관(五城兼官)이 되었다가 뒤에 태(泰)․무(撫)․위(渭) 3주(州)를 따로 두고 오직 박주(博州)만은 그대로 속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20년에 이르러 또 박주(博州)를 따로 두게 되었다.
○ 곽주(郭州). 본래 고려의 장리현(長利縣)으로 성종(成宗) 13년에 평장사(平章事)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쳐서 쫓고 곽주(郭州)에 성(城)을 쌓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고종(高宗) 8년에 반역(叛逆)으로써 내려 정양(定襄)이라 칭하였다.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여 수주(隋州)에 예속(隸屬)하였고 공민왕(恭愍王) 20년에 군(郡)의 이름을 회복하였다.
○ 철주(鐵州). 본래 고려의 장령현(長寧縣)【동산(銅山)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현종(顯宗) 9년에 철주 방어사(鐵州防禦使)를 칭하였다.
○ 영주(靈州). 현종(顯宗) 21년에 흥화진(興化鎭)으로 올려 주(州)로 삼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 맹주(孟州).【맹(孟)은 맹(猛)으로도 썼다.】 본래 고려의 철옹현(鐵瓮縣)으로 현종(顯宗) 10년에 맹주 방어사(猛州防禦使)를 칭하였고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가 44년에 은주(殷州)에 병합되었고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여 안주(安州)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 따로 현령(縣令)을 두었다.
○ 덕주(德州). 본래 고려의 요원군(遼原郡)으로 일명 장덕진(長德鎭)이라고도 하였는데 목종(穆宗) 4년에 덕주 방어사(德州防禦使)를 칭하였고 원종(元宗) 원년(元年)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안주(安州)의 노도(蘆島)에 들어 갔다가 뒤에 무릇 다섯번이나 옮겨 충렬왕(忠烈王) 6년에 이르러 옛 땅을 회복하고 성주(成州)에 속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20년에 따로 지주사(知州事)를 삼았다.
○ 무주(撫州). 본래 고려의 운남군(雲南郡)【옛 청성(靑城)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성종(成宗) 14년에 무주 방어사(撫州防禦使)를 칭하였고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여 위주(渭州)와 고성(古城)에 위치하여 가주(嘉州)에 속하다가 공민왕(恭愍王) 18년에 태주(泰州)에 이속(移屬)하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따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 순주(順州). 본래 고려의 정융군(靜戎郡)으로 성종(成宗) 2년에 순주 방어사(順州防禦使)를 칭하였고 고종(高宗) 44년에 덕주(德州)에 병합하였다가 뒤에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 위주(渭州). 본래 낙릉군(樂陵郡)【옛 덕성(德城)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를 삼았고 문종(文宗) 4년에 축성(築城)하였다.
○ 태주(泰州). 본래 고려의 광화현(光化縣)【영삭(寧朔)이라고도 하고 연삭(連朔)이라고도 하였다.】 으로 광종(光宗) 21년에 태주 방어사(泰州防禦使)를 칭하였고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여 가주(嘉州)에 속하였고 공민왕(恭愍王) 15년에 무주(撫州)․위주(渭州) 두 주(州)를 군(郡)에 소속시켜 태주사(泰州事)를 칭하였는데 신우(辛禑) 7년에 따로 무(撫)․위(渭) 두 주(州)를 두었다.
○ 성주(成州). 본래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의 고도(故都)로 태조(太祖) 14년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고 현종(顯宗) 8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를 삼았다가 뒤에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송양(松讓)【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고 온천(溫泉)이 있다.
○ 은주(殷州). 본래 고려의 흥덕군(興德郡)으로 일명 동창군(同昌郡)이라 하며 성종(成宗) 2년에 은주 방어사(殷州防禦使)를 칭하였고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섬[海島]으로 들어갔다가 뒤에 출륙(出陸)하여 성주(成州) 속현(屬縣)이 되었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숙주(肅州). 본래 고려의 평원군(平原郡)으로 태조(太祖) 11년에 진국성(鎭國城)을 옮겨 쌓게하여 이름을 통덕진(通德鎭)으로 고치고 성종(成宗) 2년에 지금 이름을 칭하여 방어사(防禦使)로 삼았고 뒤에 다시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 자주(慈州). 본래 고려의 문성군(文城郡)으로 태조(太祖) 22년에 고쳐 대안주(大安州)로 삼았고 성종(成宗) 2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가 뒤에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 영덕진(寧德鎭). 문종(文宗) 10년에 거란(契丹) 흥종(興宗)의 이름을 피하여 진(鎭)을 고쳐 성(城)으로 하니 진자(鎭字)는 진자(眞字)를 종(從)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진사(鎭使)가 있었다. 이하의 진(鎭)도 동일하다.
○ 위원진(威遠鎭). 현종(顯宗) 20년 유소(柳韶)를 보내어 옛 석성(石城)을 고쳐 쌓게하여 이를 두었고 진(鎭)은 흥화진(興化鎭)의 서북(西北)에 있다.
○ 정융진(定戎鎭). 현종(顯宗) 20년에 유소(柳韶)를 보내어 옛 석벽(石壁)을 고쳐 쌓게 하여 진(鎭)을 두고 영평성(永平城) 백성을 옮겨 채우니 진(鎭)은 흥화진(興化鎭)의 북쪽에 있다.
○ 영삭진(寧朔鎭). 옛 진전(榛田)으로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문종 4년에 축성(築城)하였다.
○ 안의진(安義鎭). 현종(顯宗) 9년에 축성(築城)하였다.
○ 청새진(淸塞鎭). 고종(高宗) 4년에 거란병(契丹兵)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위주 방어사(威州防禦使)로 올렸으며 뒤에 거란(契丹)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배반하였으므로 희주(熙州)로 개칭(改稱)하며 개주(价州)의 겸관(兼官)으로 삼았다. 묘향산(妙香山)【즉 태백산(太伯山)】 이 있다.
○ 평로진(平虜鎭). 정종(靖宗) 7년에 최충(崔忠)에게 명하여 축성하였고 뒤에 유원(柔遠)으로 고쳤다.
○ 영원진(寧遠鎭). 정종(靖宗) 7년에 최충(崔忠)에게 명하여 축성(築城)하였다.
○ 조양진(朝陽鎭).【진장(鎭將)이 있었음. 이하의 진(鎭)도 동일함】 태조(太祖) 13년에 마산(馬山)에 성(城)을 쌓고 이름을 안수진(安水鎭)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연주 방어사(連州防禦使)【연(連)은 연(漣)으로도 썼음.】 로 고쳤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진(鎭)으로 삼았다. 고종(高宗) 2년에 거란병(契丹兵)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다시 연주 방어사(連州防禦使)를 칭하였고 4년에 고쳐 익주 방어사(翼州防禦使)로 삼았다가 뒤에 또 개주(价州)로 고쳤다.
○ 양암진(陽岩鎭). 태조(太祖) 21년에 축성(築城)하였다.
○ 수덕진(樹德鎭). 성종(成宗) 2년에 축성(築城)하였다.
○ 안융진(安戎鎭). 광종(光宗) 25년에 축성(築城)하였다.
○ 통해현(通海縣). 태조(太祖) 17년에 축성(築城)하였으며 고종(高宗) 43년에 현령(縣令)을 파하고 안인 진장(安仁鎭將)으로 이를 겸임(兼任)하게 하였다.
○ 영청진(永淸鎭). 옛날 정수현(定水縣)으로 뒤에 용강(龍岡)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고종(高宗) 43년에 현령(縣令)을 파하고 안인 진장(安仁鎭將)으로 이를 겸임(兼任)하게 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7년에 다시 따로 현령(縣令)을 두었다.
○ 함종현(咸從縣). 본래 고려의 아선성(牙善城)으로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 용강현(龍岡縣). 본래 고려의 황룡성(黃龍城)【군악(軍岳)이라고도 하였음.】 으로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 삼화현(三和縣). 인종(仁宗) 14년에 서경(西京) 기내(畿內)를 나누어 6현(縣)으로 삼았는데 금당(金堂)․호산(呼山)․칠정(漆井)의 3부곡(部曲)을 합하여 본현(本縣)으로 삼고 영(令)을 두었다.
○ 삼등현(三登縣). 인종(仁宗) 14년에 서경(西京) 기내(畿內)를 나누어 6현(縣)으로 삼았는데 성주(成州) 소속의 신성(新城)․나평(蘿坪)․구아(狗牙) 등 3부곡(部曲)을 합하여 본현(本縣)으로 삼고 영(令)을 두었다.
○ 강계부(江界府). 공민왕(恭愍王) 10년에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를 칭하였고 18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만호부(萬戶府)로 삼았다.
○ 이성부(泥城府). 공민왕(恭愍王) 18년에 이성 만호부(泥城萬戶府)를 두었다.【임토(林土)와 벽단(碧團)은 본래 모두 여진(女眞)이 살고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 6년에 이성 만호(泥城萬戶) 김진(金進) 등을 보내어 쳐서 쫓고 임토(林土)를 고쳐 음동(陰潼)이라 하고 벽단(碧團)을 예속(隸屬)시키고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초출(抄出)하여 채웠다.】
○ 수주(隨州).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이 창주(昌州)를 함락시킬 때 주(州)의 사람들이 자연도(紫燕島)에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여 곽주(郭州) 바닷가에 거주하게 하였는데 주(州)의 사람들이 땅을 잃었으므로 곽주(郭州) 동쪽의 16촌(村)과 및 곽주(郭州) 소속의 안의진(安義鎭)을 베어 이들에게 주고 지수주사(知隨州事)를 칭하고 그대로 곽주(郭州)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20년에 다시 따로 곽주(郭州)를 두었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2 (0) | 2012.04.15 |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1 (0) | 2012.04.15 |
조독수호조약朝德修好條約 (0) | 2010.01.25 |
한일의정서 (0) | 2010.01.25 |
압록강의 역사 (0) | 2009.1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