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복(僧服)
치의 . 염의.....물들인 옷
승복이라 함은 스님들이 입는 옷을 모두 말한다. 승의(僧衣)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가사만을 일컬었으나 흔히 스님들이 입는 일상 평상복인 한복 형태의 바지. 저고리를 승복이라고 한다.
이는 다분히 우리 나라 옷의 모양인데 다만 물들인 옷감을 사용하여 치의(緇衣), 염의(染衣)라 한다.
회색으로 물들인 옷은 우리 나라 일반인이 입는 흰옷(백의 민족)에 대비하여 출가 수도인을 표시하고, 수도에 전념하기 위해선 옷을 빨거나 손질하는데 수공을 들이지 않는 옷이며, 또 곱고 화려한 색깔을 피한 잡색인 회색 옷(먹물 옷)이 세상의 오욕락을 초월하는 수도자다운 옷이기 때문이다.
[다른설명]
승복(僧服)
우리는 스님의 옷을 승복(僧服)이라 한다.
승복이란 승려가 입는 의복으로서 승의(僧衣) 또는 법의(法衣)라고도 하는데, 법의(法衣)라는 말은 일찍이 당나라의 도의(道宜)가 지은 “석문장복의 제의석명편(釋門章服儀 制意釋名篇) 에 나오는 말로써 근래에는 대개 가사와 장삼(長衫)만을 가르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승복이란 "불제자(佛第子로서 그 교리를 믿고 지키며 포교하는 스님의 복식(服食)"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승복(僧服)이란 원래 불교도만이 갖는 가사(袈裟, kasya)를 가리키며, 인도에서는 Ti-Civara 즉 삼의(三衣)였던 것이 후대에 와서는 이 외에 가사 안에 입는 옷까지도 이 승복에 포함되게 되었다. 물론 인도에서도 후대에는 여러 가지 사정 아래 안에 입는 옷들이 생겼지만 차츰 추운지방인 중국 등지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그 나라의 풍토에 알맞은 승복이 고안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승려가 국가의 관직을 맡을 때는 그 관직에 맞는 복장(관복) 위에 가사를 드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가 인도에서는 단순한 옷이었는데 상징과 양식을 위한 하나의 피착물(被着物)로 바뀌면서 가사 안에 입고 있는 그 나라의 정식복장(正式服裝)이나 혹은 새로이 고안된 복장 따위가 후대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점차로 하나의 형식을 만들며, 승복 속에 포함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그 안에 입는 옷을 비롯하여 바지, 모자 등 승려가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을 다 승복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흔히 이 가사와 그 안에 입는 옷, 바지, 모자 등을 제외하고 옷으로서는 맨 겉에 입는 옷만을 “장삼(長衫)”이라 하며, 이를 법복(法服) 즉 승복이라고 넓은 의미로 칭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개 이 때에는 가사, 장삼하고 병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남방불교에서는 우리 나라처럼 가사 장삼의 구별이 없고 삼의(三衣)와 안에 입는 옷 즉 내의(內衣)를 모두 포함하여 승복, 법의(法衣)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승복이란 불교도 특유의 복장인 모든 옷으로 외형적으로 보아 불자임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승복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원래 승복으로 가사(袈裟)를 제정하여 기본으로 하였다.
당시 인도에서는 가사 하나로 사철을 지나던 승복이었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와서 기후와 옷 입은 관습에 따라 상의(上衣)로서 편삼(偏衫) 위에다가 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편삼은 중국 북위(北魏) 때에 혜광(慧光)이 승지지(僧祗支)에다 편수(偏袖)를 붙이고 옷섶을 단 윗옷인데 중국의 선가(禪家)에서 사용하여 내려 온 것으로 편삼에 군(裙)을 합쳐 장삼(長衫)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는 삼국의 중엽 이후부터 고려말까지 약 천년동안 불교문화시대에 법의인 흑장삼(黑長衫)과 붉은 가사가 중국으로부터 전래하여 전통적인 우리 옷 위에 착용하게 된 것이다.
가사(袈裟)는 범어로 kasaya 또는 가사야(袈裟野)라고 한다. 가사는 수행승이 입는 법의(法衣)의 하나로 애초에는 사람이 내버린 옷, 죽은 사람의 옷을 백팔염주를 본 떠서 백팔장(百八張)을 모아 불규칙하게 꿰맨 것이었다. 청, 황, 적, 백, 흑의 오정색(五正色) 이외의 잡색으로만 물들여 쓰도록 규정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승복의 재료를 의체(衣體) 또는 의재(衣財)라고 한다. 여러 개의 천을 직사각형이 되게 붙여서 만든다. 네 귀에는 일(日), 월(月), 천(天), 왕(王)이라는 수를 놓고 양쪽에는 끈이 달려 있으며 겹으로 하여 사방에 통로를 내었는데 이것을 통문(通門)이라고 한다. 콩알을 넣어 사방으로 굴려서 통해야 하며 만일 막힌 곳이 있으면 다음 생에 맹인보(盲人報)를 받는다고 한다. 가사를 입을 때에는 장삼을 입은 다음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끈으로 매어 고정시킨다. 그 규격에는 오조(五條, 一長日短)로 만든 것을 안타회(安陀會)라고 하고, 칠조(七條, 二長一短)으로 만든 것을 울다나승(鬱多羅僧), 구조(九條)·십일조(十一條)십삼조(十三條, 모두 이장일단), 십오조·십칠조·십구조(삼장일단), 이십일조·이십삼조·이십오조(사장일단)를 승가리(僧伽梨)라 한다. 이 삼의(三衣)는 본래 부처님이 더운 지방에 사는 이를 위하여 만든 법의(法衣)로서 이것만으로 몸을 가리기 때문에 의(衣)라고 하였으나, 우리 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추운 날씨 관계로 가사 아래 장삼을 입어 가사와 구별하였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가사를 만드는 재료가 풍부하고 다양해 짐으로써 다소 화려해 지는 등 법규에 어긋난 점도 없지 않았다. 신라의 법흥왕이 입었다는 피방포(被方袍) 역시 가사였는데, 그 후 승통(僧統)의 확립과 법계제도의 정착으로 승의제도(僧衣制度)도 확립되었고 승복도 화려해졌다. 불교를 국교로 했던 고려에서는 위로는 금란가사에서부터 아래로는 거사의 백저착의(白紵窄衣)까지 다양하였다고 한다. 백저착의는 원효대사가 속복으로 입었던 일과 차득공(車得公)이 시의(베옷)를 입었던 일과 같이 속복을 입은 거사들이 많았다. 고려시대의 승의제도를 살펴보면 국사(國師)와 율사(律師)는 장수편삼(長袖偏衫)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자상(紫裳)을 하였고, 대덕(大德)은 단수편삼(短袖偏衫)에 황토색의 괘의를 입고 황상(黃裳)을 하였으며, 비구는 황토색 포의(布衣)나 자의(紫衣) 또는 납의(衲衣, 누비옷)을 입었고, 재가신도는 백저착의에 검은 비단의 허리띠를 둘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승복제도는 별 차이가 없었는데, 다만 세종때 금령(禁令)으로 회색옷을 입지 못하게 하여 삼베의 빛깔인 시색의 승복을 착용하도록 했다. 이것은 회색이 옥색에 가깝고 고려시대의 구색(鳩色)과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오늘날 다른 우리 고유의 의상들은 사라졌지만 승복만은 오랜 전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법의(法衣)는 승려의 의복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규정한 불자에게 적합한 의복이다. 곧 여법의(如法衣), 응법의(應法衣)의 뜻으로 법복(法服), 승복(僧服), 승의(僧衣) 등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옷을 말하며 부처님이 정하신 의복에는 삼의(三衣), 오의(五衣) 등이 있다. 원래 이것을 법의라고 했는데,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에서는 기후와 풍토관계로 삼의가 형식화 되고, 또 가사 속에 옷을 입게 되어 가사와 옷도 합해서 법의라고 했으며 옷도 법의라고 했다. 또 선종에서는 법을 전하는 표시로 주는 금란의(金란衣)를 법의라고 하는 수가 있었다.
인도에서는 비구는 승가리(僧伽梨) 울다나승(鬱多羅僧), 안타회(安陀會)의 삼의, 비구니 이상의 승기지(僧祇支), 궐수나(厥修羅)를 더하여 오의를 입도록 정해지고, 여기에 츤의(속옷)를 입는 것을 허용했다고 한다. 삼의는 지벌나(支伐羅, 범어 civara의 음역으로 옷이라 번역)로 총칭되고, 또 그 염색을 가사(不正色, 아름답지 않은 탁한 빛)라 하고, 혹은 복전의(福田衣) 등이라고도 한다.
삼의의 승가리(僧伽梨)는 대의(大衣), 중의(重衣), 잡쇄의(雜碎衣), 고승의(高僧衣), 입왕궁위락의(入王宮聚落衣)라고도 불러 거리에 나갈 때나 입궐을 할 때 입고, 아홉조각 내지 스물 다섯 조각의 천을 이어 합해서 만들고 천의 조각수는 아홉 종류가 있기 때문에 구품대의(九品大衣)라고도 한다.
울다나승(鬱多羅僧)은 칠조의(七條衣), 상의(上衣), 중가의(中家衣, 삼의의 중의에 해당하기 때문), 입중의(入衆衣)라고도 하여 예송, 청강, 포살 등을 행할 때 입고, 일곱 조각의 천으로 만든다.
안타회(安陀會)는 오조의(五條衣), 내의(內衣), 중숙의(中宿衣)라고도 하고, 일상의 작업이나 취침시에 입고 오조의 천으로 만든다.
옷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십송율권이십칠(十誦律卷李十七)이나 사분율권사십(四分律卷四十) 등에 규정이 있어서 처음에는 작은 헝겊으로 나누고 뒤에는 이것을 꿰매어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곳에 유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와 같이 하여 의복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하고, 또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 인 듯 하다고 한다. 규정대로 만든 옷을 할절의(割截衣, 그렇지 않은 곳을 만의)라고 하고, 세로로 꿰매는 것을 수조(竪條), 가로로 꿰매는 것을 횡제(橫堤), 이에 따라 나눠진 모양이 밭과 같기 때문에 전상(田相)이라고도 한다. 꿰매는데도 법식이 있어서 직봉(直縫)을 금하고 천바탕이 얇은 경우에는 겹쳐 꿰매는 회수가 정해져 있었다.
색은 청, 황,적, 백, 흑의 오정색(五正色) 및 비(緋),홍(紅), 자(紫), 연(緣), 벽(碧)의 오간색(五間色)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천, 니(泥), 목란색(木蘭色)의 세 가지 색만 허락하여 이것을 삼여색법(三如色法)이라 한다. 단, 일성에는 청, 황, 적, 흑, 목란을 오여색법(五如色法)이라고 한다.
또한 착용법에도 규정이 있어 평상시에는 양끝을 어깨 위에서 겨드랑이 아래로 끌어서 끈을 걸지만, 좌선 등을 할 때 양 쪽 어깨를 덮는 것을 허락하고, 예불 등의 때에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또 입지 않고 휴대하고 다닐 때에는 의낭(衣囊)을 쓰고, 후세에는 삼의거(三衣거)도 썼다고 한다. 현재 삼의거는 경전 등을 넣는 거적(接僧匣)을 가리킨다. 삼의 외에 삼의 속에 입고 왼쪽 어깨 및 양 겨드랑이를 덮는 승기지(僧祇支, 보통 祇支라고 하는데 비구니의 다섯 가지 옷 중의 하나이다. 비구도 입는 수가 있는데 겨드랑이를 가리는 장방형의 속옷으로서, 가슴과 유방을 덮기 위한 것이며 왼쪽 어깨에서 허리 아래까지 이른다)이나 허리에 걸치는 궐수나(厥修羅), 등 여러 가지의 옷이 있었다.
출가한 사람은 평생 분소의만 입고 살아야 한다고 한다. 분소의는 다 쓰고 버린 헝겊 조각을 모아서 만든 옷으로 탐심(貪心)을 여의기 위해 검소함을 닦는 뜻으로 입는 법복(法服)이다. 이것이 비구가 입어야 할 본래의 의복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율장의 의건도에는 시체를 싸서 화장터에 내다버린 총간의(塚間衣)를 분소의로 들고 있는데 비구들이 서로 다투어 취하였기 때문에 공평하게 나누어 입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또 비구들에게 “분소와 시장에 떨어져 있는 헝겊은 원하는 만큼 갖도록 하라”고 한 기록도 있다. 이는 상점의 문 밖에 버려진 헝겊도 분소의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또한 비구들 중에는 귀족, 부호 출신도 많았는데, 그 비구가 주워가기 쉬운 곳에 헝겊을 두고서 주워가도록 하는 일까지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후대에 생긴 일들이며, 처음에는 출가의 원칙적인 의생활은 분소의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승가의 최초기에 붓다가 우루벨라에서 배화교도의 우두머리인 우루벨라 등 가섭 3형제를 설복, 교화한 일을 기록하는 가운데 부처님의 분소의를 얻어서 이를 세탁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이때 석제환인(釋帝桓因)이 붓다를 위하여 석지(石池)와 장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즉 성도 직후 부처님의 옷은 분소의 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비구의 옷은 한 벌의 삼의(三衣), 즉 단삼의(單三衣)이다. 부처님이 비구의 못을 단삼의로 정한 것과 옷의 재료에 대한 규정의 예외사항으로 보시를 받는 경우에는 비단 옷을 지어도 좋다고 한 전후 사정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소의라고 하더라도 형식만 그럴 뿐 실제로는 새옷에 가까운 것도 그 비율이 상당했던 것 같다. 의건도에 의하면 시체를 화장터에 내버릴 때 비구에게 공양할 목적으로 지은 고급의복으로 덮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파사익왕의 부인이 값비싼 옷을 찢어서 부정한 것을 바른 뒤 특정 비구에게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분소의 대신 시의를 입게 된 것은 상당히 일찍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건도에 의하면, 부처님이 이질을 치료한 의사 기바는 치료를 위해서 부처님의 분소의를 시비포(尸毘布)로 바꾸어 드리면서, 비구들도 거사의 옷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한 일이 있었다. 기바의 간청이 받아들여 짐으로써 여러 가지 옷, 견의(絹衣) 등을 보시받게 되었다. 사의법 중 분소의의 예외로서는 아마의(亞麻衣), 금의, 야잠의, 갈의, 지의 등 다섯 가지의 옷을 들고 있다.
단삼의라는 것은 비구의 옷으로는 하의(安陀衣, antaravasa), 상의 및 외의의 삼의 한 벌(단삼의)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 이상을 소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의는 치마 모양의 옷인데, 청소 및 잡무를 할 때는 이것만 입는다. 상의는 하의 위에 입는 옷으로 실내에서 좌선을 하거나 강의를 들을 때 입는다. 그리고 외출을 할 때나 정장차림을 할 때는 상의, 하의 위에 다시 외의를 착용한다. 삼의 중에 외의는 2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삼의를 다 착용하면 전부 네 가지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의건도가 전하는 바로는, 부처님이 바이샬리의 고타마묘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밤 동지의, 8일제와 8일제 사이 15일 동안을 노천에 앉아 지내면서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의복의 정도를 시험해 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무리 추운 경우라 하더라도 네 겹의 옷이면 충분하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런 까닭에 한 벌 삼의 이상을 갖고 있으면 장의(長衣)라고 하였던 것이다. 장의를 열 벌이상 소유하고 있으면 장의계를 범하는 것이 되고, 또 하룻밤 동안이라도 삼의 중 어느 하나를 지니지 않으면 이의숙계(離衣宿戒)를 범하게 된다.
그런데 교단이 대정사를 갖게 되자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걸식만으로 생활하고 분소의를 입는 것으로 산림에 은둔하여 물자를 희사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비구라든가, 혹은 분소의를 입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 된 것 같다. 그러한 사람들은 출가행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찬탄되었다. 예컨대, 불멸 후 100년이 지나 제2결집에 인도 전역에서부터 700의 대비구가 모였는데 그들 중 최고위원으로서 또 장로로서 존경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걸식을 하고 분소의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정자가 있는 승가에서는 신자로부터 옷이나 옷감을 받는 수납(受納)비구, 그 저장을 책임지는 수장(收藏)비구, 창고로 지정된 건물과 그 창고를 지키는 수고(守庫)비구가 있었다. 그리고 옷감을 분배하는 분의(分衣)비구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승가 전체 중에서 그러한 일을 행할 능력이 있는 비구로서 선출되었던 것이다. 신자로부터 받은 시의를 사용하게 되면 새로 지은 옷, 화려한 옷이 된다. 그래서 분소의에 가까운 색으로 괴색(壞色)하여 쓰게 되었다. 비구의 옷을 가사(袈裟, kasaya)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괴색이라는 의미이며 가사로 한다는 것은 천한 색으로 물들이는 것으로 이를 색천(色賤)이라고 한다. 색천할 때 색의 배합은 율장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모란색(木蘭色), 니색(泥色) 또는 천색이었다.
오늘날 남방불교 비구의 옷은 황색인데, 이는 색천의 색 중 천색 계통이 아닐까 한다. 또 분소의는 원래 조각조각 찢어진 천을 붙여서 만든 것이다. 시의의 경우도 그와 유사하도록 만들어서 착용했다. 긴 헝겊과 짧은 헝겊으로 잘라서 서로 잇대어 깁는다. 이를 색천에 대하여 도천(刀賤)이라 한다. 즉 도천은 길고 짧은 헝겊조각을 계속 잇대어서 조포(條布)로 만들고, 그것을 몇 조각이든 가로로 잇대어 깁는다. 그렇게 해서 다 만들어진 옷은 조의 수에 따라서 몇 조라고 칭한다.
예컨대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삼의 중에서 하의를 긴 헝겊 한장과 짧은 헝겊 한 장을 1조로 하여 다섯 조를 합하여 5조 가사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상의는 대게 7조, 외의는 9조에서 25조까지인데, 7조 등의 각 조는 양장일단(兩長一短)이 아니면 삼장일단을 만들고 있다. 이 도천의 방식은 부처님이 논에 심어진 벼의 정연한 모습을 보고서 정한 것이라고 한다. 갠지스강 유역에는 논농사가 발달해 있었으므로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도천이나 색천으로 미루어 볼 때, 비구 본래의 삼의가 분소의였다는 점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율장에는 옷감으서의 가치를 없게 하여 보는 사람들이 도심(盜心)을 일으키지 않도록 삼의에 색천과 도천을 하였다 한다. 또한 부처님은 분소의가 내버려진 것이므로 ‘얻기 쉽다’고 하는 호용성을 서술하고 있으며 “분소의거나 시의거나 만족할 줄 알면 된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삼의를 형식화한 여러 가지 가사가 만들어 졌으며, 속에 있는 법의도 가지각색을 사용함으로써 옷 천이나 색채가 차츰 화려하게 되었다. 가사에는 안타회(安陀會)의 변형으로서 오조가사(五條袈裟), 첩오조(疊五條), 두타대(頭陀袋) 그 변형인 윤가사(輪袈裟) 등을 비롯해서 괘자(掛子), 위의세(威儀細), 종자가사(種子袈裟), 결가사(結袈裟), 삼서가사(三緖袈裟), 소오조(小五條) 등이 있다. 울다나승(鬱多羅僧)은 칠조(七條), 승가리(僧伽梨)를 구조(九條)라 하고 이에는 평가사(平袈裟), 갑가사(甲袈裟), 원산가사(遠山袈裟), 납가사(衲袈裟) 등의 종류가 있다.
우리는 스님의 옷을 승복(僧服)이라 한다. 승복이란 승려가 입는 의복으로서 승의(僧衣) 또는 법의(法衣)라고도 하는데, 법의(法衣)라는 말은 일찍이 당나라의 도의(道宜)가 지은 “석문장복의 제의석명편(釋門章服儀 制意釋名篇0 에 나오는 말로써 근래에는 대개 가사와 장삼(長衫)만을 가르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승복이란 ”불제자(佛第子로서 그 교리를 믿고 지키며 포교하는 스님의 복식(服食)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승복(僧服)이란 원래 불교도만이 갖는 가사(袈裟, kasya)를 가리키며, 인도에서는 Ti-Civara 즉 삼의(三衣)였던 것이 후대에 와서는 이 외에 가사 안에 입는 옷까지도 이 승복에 포함되게 되었다. 물론 인도에서도 후대에는 여러 가지 사정 아래 안에 입는 옷들이 생겼지만 차츰 추운지방인 중국 등지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그 나라의 풍토에 알맞은 승복이 고안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승려가 국가의 관직을 맡을 때는 그 관직에 맞는 복장(관복) 위에 가사를 드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가 인도에서는 단순한 옷이었는데 상징과 양식을 위한 하나의 피착물(被着物)로 바뀌면서 가사 안에 입고 있는 그 나라의 정식복장(正式服裝)이나 혹은 새로이 고안된 복장 따위가 후대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점차로 하나의 형식을 만들며, 승복 속에 포함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그 안에 입는 옷을 비롯하여 바지, 모자 등 승려가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을 다 승복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흔히 이 가사와 그 안에 입는 옷, 바지, 모자 등을 제외하고 옷으로서는 맨 겉에 입는 옷만을 “장삼(長衫)”리아 하며, 이를 법복(法服) 즉 승복이라고 넓은 의미로 칭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개 이 때에는 가사, 장삼하고 병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남방불교에서는 우리 나라처럼 가사 장삼의 구별이 없고 삼의(三衣)와 안에 입는 옷 즉 내의(內衣)를 모두 포함하여 승복, 법의(法衣)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승복이란 불교도 특유의 복장인 모든 옷으로 외형적으로 보아 불자임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승복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원래 승복으로 가사(袈裟)를 제정하여 기본으로 하였다. 당시 인도에서는 가사 하나로 사철을 지나던 승복이었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와서 기후와 옷 입은 관습에 따라 상의(上衣)로서 편삼(偏衫) 위에다가 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편삼은 중국 북위(北魏) 때에 혜광(慧光)이 승지지(僧祗支)에다 편수(偏袖)를 붙이고 옷섶을 단 윗옷인데 중국의 선가(禪家)에서 사용하여 내려 온 것으로 편삼에 군(裙)을 합쳐 장삼(長衫)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는 삼국의 중엽 이후부터 고려말까지 약 천년동안 불교문화시대에 법의인 흑장삼(黑長衫)과 붉은 가사가 중국으로부터 전래하여 전통적인 우리 옷 위에 착용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장자(長子) 종단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승복은 가사와 장삼, 장삼안에 입는 옷(평상복), 행전, 모자 또는 관, 신과 버선, 주장자와 불자(拂子), 두루마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가사는 대가사, 칠조가사, 오조가사로 나누고 있다.
대가사는 위의대가사(威儀大袈裟)라고도 하는데 samghati(승가지 또는 승가리)로서 9조에서 25조까지로 되어 있는데 이는 승려의 법계(法階)에 따라 구분하여 착용한다. 주로 대법요시(大法要時)에 착용하되 인도에서 와는 달리 통견(通肩, 양 어깨를 덮는 것)하지 않고 편단우견(偏袒右肩,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두르기 때문에 오른쪽 어깨는 들어내 놓는 착용법)하며, 가사가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고리와 매듭을 가사에 달았다. 가사는 주로 겹가사인데 여름철에는 홑가사를 사용하며, 가사에는 일(日) 월(月) 등의 첩상(貼相, 부착물)이 없고 네 귀에는 가사가 터지지 않도록 첩(帖)은 있지만 가사와 같은색일 뿐 예전처럼 천(天) 왕(王) 또는 옴(Om) 자는 없다.
칠조가사(七條袈裟)는 의식복가사(儀式服袈裟)라고 하는데 인도의 중의(中衣, Uttarasanga)로서 원래의 크기는 대가사와 비슷하였는데, 지금은 길이와 폭을 줄였으므로 반가사(半袈裟), 략가사(略袈裟)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두종류가 있는데 윗쪽에 끈을 달아 대가사처럼 편단우견(偏袒右肩)하는 것과 오조(五條)가사처럼 위 양쪽을 끈으로 연결하여 왼쪽 어깨에 둘러 메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은 우리나라에 없었고, 일본의 오조가사를 본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칠족사는 낮은 법계(法階)에 속하는 스님은 착용하지 못하며, 사찰 주지 이상의 법사(法師)가 설법시에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오조가사(五條袈裟)는 Antaravasa(안타회)로서 하의인네 승원내의 일을 할 때 입었으나 당나라의 칙천무후가 이 오조가사를 작고 네모지게 하고 선종스님에게 준 것이라고 하는데 위쪽에 띠를 달아 목에다 걸고 두 어깨를 통하여 가슴 앞에 걸치는 것이므로 이름을 괘(掛) 혹은 자라고 한다. 이 자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것인데 해방후 인본의 선종계통의 임제종의 것을 본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가사의 색상은 갈색(褐色)인데 1962년 문공부에 등록한 이후에 새로 제정한 것이며, 종래에는 지금 태고종에서 사용하고 있는 적색가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갈색이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빛깔이 아니라고 하여 남방불교에서 사용하는 주황색의 가사를 입기도 한다. 그리고 재료는 일반적으로 합성섬유를 사용하지만 일부에서는 견(絹)을 사용하기도 한다.
장삼(長衫)은 중국의 심의(深衣)나 표의(表衣)인데 예복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것은 편삼과 군(裙)을 당대에 직철(直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편삼은 울다나승(鬱多羅僧)인 칠조와 복견의(覆肩衣)가 합쳐진 것이며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반면, 이 장삼은 두루마기처럼 오른 쪽으로 여미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삼(衫), 즉 적삼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해 편삼이 아래로 길게 느려졌다는 뜻에서 장삼이라고 하는 것이다. 직령교삼(直領交衫)의 대구수(大口袖)로서 허리 부분은 군(裙) 즉 치마(裳)를 이어 붙인 형태인데 이 치마 부분은 커다란 주름이 앞 뒤쪽에 8개 잡혀 있고 깃은 허리부분까지 이르고, 오른쪽 깃 끝과 왼쪽 겨드랑이 안에 고름을 달아서 매도록 되어 있으며, 겉에는 가는 고름을 달아 묶도록 되어 있다. 옛날에는 세조대(細條帶)를 달아서 가슴 부분에 묶었다고 하는데 오조락자(오2條絡子)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약 8㎝ 넓이 정도의 장삼과 같은 색의 띠를 매도록 되었다고 한다. 이 띠는 대가사나 칠조가사를 입을 때는 가사 안에 매고, 오조락자의 착용시에는 밖으로 묶어 락자(絡子)를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장삼의 색상은 근래에 와서는 적갈색의 장삼을 입는 스님도 있다. 이는 1958년 세계불교도대회에서 불교색으로 권장된 색이라고 한다. 장삼의 재료는 합성섬유가 주이지만 여름에는 마포(摩布), 저포(紵布)에 먹물을 드려서 입기도 한다고 한다. 장삼안에 입는 옷은 평상복이라고도 하는데 장삼을 겉옷 또는 외의라고 한다면 그 안에 입는 옷은 마땅히 내의(內衣)라고 해야 하지만, 종래에는 츤신의라고 하여 속옷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 속옷은 인도와는 달리 전통적인 한국복장인 저고리와 바지를 입는다. 얼마전까지는 조끼를 입었으나 근래에는 조끼 대신 저고리에다 호주머니를 달아 입는다. 색상은 주로 회색인데 근래에는 장삼처럼 적갈색으로 지어 입기도 한다. 재료는 합성섬유인데 여름철에는 마나 모시를 이용하기도 하고 겨울철에는 누비옷을 입기도 한다.
행전(行纏)은 승복의 일부분은 아닌데 조선시대에 관복이나 예복 또는 군복의 바지에 보행 등의 활동에 편리하도록 무릎 아래의 정강이에 꿰어 매는 일종의 각반(脚絆)이다. 행전은 조선중엽이후 불교수난기에 승려들이 군인대신 성을 지키고 성을 쌓는 등 온갖 잡역을 떠맡아 할 때에 착용한 것이 운수행각을 하기에도 편리하므로 지금까지 전승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행전의 색은 바지 색과 같은 회색이거나 적갈색이며, 재료는 주로 합성섬유이다.
모자(帽子)나 관(冠)은 옛날에 송낙이나 승관(僧冠)을 섰으나 근래에는 쓰지 않는다. 다만 종정취임식 등에 최고법계자들이 비로관(毘盧冠)을 섰다고 하지만 요즘엔 보가 드물다. 일반 승려들은 제정된 모자가 없으므로 여름의 외출시에 밀짚모자를 쓰고, 겨울철에는 털실로 승관처럼 짜서 머리를 보호하고 다닌다.
스님의 신이나 버선은 1940년대까지는 짚신에 버선을 신었다고 하는데 해방이후에는 검정 고무신에 버선을 신었으며, 근래에는 흰 고무신에 양말이나 운동화 종류를 신고 있다.
주장자를 불가(佛家)에서는 선종에서 설법시 사용하던 것이며 불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주장이라는 것은 스님이 외출 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로 선종(禪宗)에서 사용하는 것은 아래에서 2자 정도 부분에 작은 가지가 붙어 있으며, 주장자의 상단을 정두(淨頭)라고 하고 하단을 촉두(觸頭)라고 하며 소지(小枝)는 개울을 건널 때 물의 깊이를 재는데 사용하므로 심수(深水)라고도 한다.
두루마기는 평상시 외출할 때 겉에 입는 옷으로서 두루마기를 입는다. 장삼이 법의이기 때문에 법회나 예불을 드릴 때가 아니면 입지 않는 것으로 두루마기는 한복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도포는 소매가 길고 넓은데 반하여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다. 또한 도포에는 락조대를 매었는데 두루마기에는 띠가 없고 옷고름으로 대신한다. 두루마기의 색상은 회색이며 재료는 합성섬유이고 여름에는 마나 모시를 사용하고 겨울에는 누비 두루마기를 입는다.
그러나 한국 불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어서 각 종단 마다 각기 다른 형식의 승복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각 종파 표방하는 교리에 따라 스님들이 입는 옷의 모양도 달라진다. 지금까지 설명한 승복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스님들이 입으시는 옷이다.
중국의 승복(법복)
第二節漢族僧伽聽衣的造形探源及其他
前文第四章第一節曾敘述:佛教傳漢二千年來,漢族僧伽的聽衣先後有頭衣、覆肩衣、袍服、偏衫、直綴、立播衣、褌褲、裙、襪、鞋等等。但遍考佛教文獻,除了上衣、下裳和「羅漢鞋」以外,罕見有頭衣、褌褲、鞋、襪的紀述。想必這些衣物更是聽衣中的聽衣了!因而,本文對此姑置不論,只就「上衣」[1] 、「下裳」[2] 和褲三項來進行研究,探索上述諸聽衣的造形與淵源。
道宣《感通傳》說:「人以束帶為彝章,道則冠而不帶;人以束髮為華飾,釋則落而不容。」[3] 就此揣摩道宣這種說辭,可知:僧、道衣裝各有取捨。其大意是:俗世以帶飾作為冠服規章,而道家取冠不取帶;世人束髮而華麗其身,釋家卻捨落而不容華靡。因此之故:上述三衣、袍、衫、直綴……等等,正是取決於這樣的標準而產生的僧伽服裝。
然而,中國幅員廣大,歷史悠久,又且經過數千年的胡漢交融,致使所有服飾的形、名之間多有流變,名稱亦有所異。例如「衫」原是無袖端飾的單層內短衣;如今,已不知其所以然,而通稱單層衣為衫;甚至稱衣長至踵的外衣為長衫。又如古代「深衣」制度,有一定的規制,而《方言》卻稱:「襌衣江淮南楚之間謂之褋;(函谷)關之東西謂之襌衣;有深袌(大襟)者,趙、魏間謂之褋;無袌者,謂之裎衣。古謂深衣。」[4] 如此紀載的內容,實在非常複雜,且互有差別。因此,後文所敘「漢族」固有的各類服裝,也只是一般行之成俗的大略,僅此求得漢族僧伽諸聽衣的來歷已足。
壹、上衣
一、袍
袍,原本是上自肩頭下至足上的長身衣,舊制歸類屬於上衣,這是因為它自上至下,一直到底,不將衣身作上下兩截的分裁。《儀禮》〈士喪禮〉疏:「袍,連衣裳故也。」[5] 並且須是內襯綿絮(古乏木棉,用蠶絲)的才叫袍,又分別將新絲鋪襯的叫「繭」,舊絲的才叫「袍」。[6] 但後世已無此分別,甚至擴充「袍」的範圍,即:凡是長身衣,不論單、袷、綿都稱袍,而分稱單袍、夾袍或綿袍。凡此等等,在故籍文獻的紀載乃浩如煙海,目不暇接,在此很難錄敘,又且數千年時間錯雜難於完整歸納。
可是,這種被常民視為禮服的袍服,卻是早古士大夫以上內襯的褻衣(平民不限),所以士大夫以上並不能以袍見客或外出,而必須外加上衣下裳的「弁服」。直到後漢建國後,才將袍升格得與深衣同列為朝服,袍服才得躋於禮服之林。[7] 從漢人開始出家的可能時間來推斷,開始有漢族僧伽時,袍早已成為禮服之一了。而自魏嘉平二年(250A.D.)佛教戒律儀式傳入漢地後,漢族僧應該會更重視佛教的儀式活動,很可能就以漢俗袍服作為僧伽袍服參考的依據。
袍制,一般是寬廣的衣身,寬廣的袖。別有一種似袍,單層而窄袖的則為「〔袖-由+溝-水〕」。《釋名》說:「〔袖-由+溝-水〕,襌衣之無胡者也,言袖夾直,形如溝也。」[8] 既然如此,袍的身和袖當然也就有寬、窄之分了。再考據歷代雕刻、俑、繪畫中長身衣的形象,的確有如此寬、窄不等的造形。再則,漢俗婦女,甚至早在漢代以前婦女已有穿著長袍──或窄袖,或廣袖,也都有具體實物的資證(如圖4-2.1a、4-2.1b)。換言之:漢俗不論男女,自古都有服用袍服的史實,其袖襱或廣或窄不等,而廣袖是禮服,窄袖是常服,這是不爭的實象實史。
圖4-2.1a 婦女著袍服圖之一
圖4-2.1b 婦女著袍服圖之二
綜上而言:佛教東傳入漢而及漢地,僧和尼的聽衣都有袍,也是非常自然。如圖4-1.17,4-1.18,4-1.19,4-1.20。再則其中袖襱寬廣的袍服,在僧服中稱為「海青」(圖4-2.2)。考「海青」的得名,乃出自唐人李白的詩文:「翩翩舞廣袖,似鳥海東來。」[9] 《秕言》載:「吳中稱衣之廣袖者謂之海青。」[10] 《秕言》作者無可考,但可判定晚於李白。換言之:漢僧的海青,就是廣袖的袍服。
除了衣身和袖的寬窄有些不同外,袍服自古至今最大的變化應該是前襟──領形的設計。根據王師宇清的研究,認為:中國歷代袍服造形的領形,曾有兩次變革,有三種不同的主要形態。其一是當前漢族僧伽仍沿用的「曲領右衽」,或稱「交領右衽」(圖4-2.3)。這也是目前所知袍服最原始的領形。歷代出土的人物圖像和實物,幾乎都是如此。且這種領型不只用在袍服,包括前文說過的深衣制和弁服制也都是如此(圖4-2.4)。唐代,因受到胡人風俗影響產生第二類的領形──「盤領」(圖4-2.5)。清代,又將曲領和盤領複合形變成「圓領」,如圖4-2.6。雖然,後兩者一一被漢人採用,[11] 但漢族僧伽的袍服卻未曾變化,而一直保持曲領右衽的造形。可是,近代漢族僧伽的長身衣中,還有一種對襟的袍服,稱為「太虛褂」或「羅漢褂」(圖4-2.7),據傳這是太虛法師所創。可知在此之前,還沒有這樣的僧服造形。而此種領形也是中國固有,上文《秕言》所謂「無深袌」的造形,便是對襟的長衣。然而,今日僧伽服裝的前襟都是以三層大小不同的布片作成(圖4-2.8),據說是表徵「佛、法、僧」三者,所以又稱「三寶領」;但就實用功能來看,似乎有便於拆換的作用。[12] 而領上的車縫線又有「善才童子五十三參」的說法,或表示割截縫合的意義。而這是何時?又究竟為何如此製作?一時尚難釐清。
圖4-2.3 「曲領」袍服
圖4-2.4 「曲領」深衣
圖4-2.5 「盤領」袍服
圖4-2.6 「圓領」袍服
圖4-2.7 太虛褂
圖4-2.8 三寶領
二、偏衫和直綴
「偏衫」與「直綴」兩者分立,應是兩類不同的衣物;再依中國傳統造字六法來觀字形,求字義,「偏」和「直」的形態距離很大,也應是兩物。然而不然,在佛教故籍中卻說:直綴是偏衫與裙縫合而成。兩者似非截然不同,而有密切的關係。由於偏衫主要是由三衣轉變而來,如果後者屬實,那直綴也會是印度三衣衍生的漢式聽衣,否則它將另有根源。
考之故籍文獻,千古中國的官民世俗中,未曾見有「偏衫」其名其物;要是有,這也是始自漢族僧伽的服裝。「直綴」則不然:世俗確有其物其名,但卻不是僧衣。然而,在佛教的文獻中,卻說這是僧衣,而不及於世俗。再則直綴的形成,也有不同的紀錄,僧俗不同。如此分岐互異,真是莫衷一是。這在本文,可就非得追根究柢弄個明白不可。
(一)偏(褊)衫
先說偏(褊)衫,比較簡單。就筆者所知,「偏衫」最早紀錄在宋以來的文獻,如《大宋僧史略》、《釋氏要覽》和《資持記》等。其內容都紀載著:偏衫的形成是為補救初始傳自印度,偏袒右肩的僧衣而作成。[13] 因其偏掩,所以取名「偏衫」或「褊衫」。《僧史略》說:「後魏宮人,見僧偏袒右肩,乃一施肩衣,號曰偏衫。全其兩扇衿袖失衹支之體,自魏始也。」[14]──原來這是後魏時僧人入宮衣著偏袒引發而成的。再引《釋氏要覽》指稱這種偏衫是近身衣,是「三衣」的內襯:「偏衫,古僧衣律制只有僧衹支,此長覆左膊及掩右腋,蓋襯三衣故即天竺之儀也,竺道祖魏錄云:魏宮人見僧袒一肘,不以為善,乃作偏袒縫於衹支上,相從因名偏衫。今開脊接領者,蓋遺魏制也。」[15]又《翻譯名義集》卷第七:「竺道祖云:魏時請僧於內自恣,宮人見僧偏袒,不以為善,遂作此衣施僧,因綴於左邊衹支上,因而受稱,即偏衫右邊。今隱衹支名,通號兩袖,曰偏衫。今作時須開後縫截領,以存元式故也。」[16]
綜上而言,初始漢僧的近身衣僅有「衹支」而袒其右肩;後來由於後魏宮人惡其放恣,而加覆右肩;使衹支加縫覆右肩的衣,名之為「偏衫」,如若需著三衣時,就以三衣加覆在偏衫之上。且宋代所見的偏衫,乃是魏時期偏衫「開領接脊」的結果。如此反覆探究,這就瞭如指掌了。
那麼,除了知道「衹支」在右,「覆肩衣」在左之外,[17] 兩者如何縫合才能成為偏衫?古籍中並無明確說明。筆者不才,研考這些文獻之後,竊以為:從偏衫的組成要件「僧祇支」和「偏袒」來看:[18] 「僧祇支」梵語:Saṅghāṭi,意譯為「偏袒」[19] 、「覆肩衣」[20] 、「掩腋」[21] 、「覆腋衣」[22] ;或稱作「僧卻崎」、「竭支」等[23] 。是印度僧伽聽衣的一種,和三衣一樣都是一長方型的布塊。原來是在穿著三衣之前,先將它從右腋下繞身,交搭於左肩上,這可避免胸部暴露。但如果說「偏袒」就是「僧衹支」,那《釋氏要覽》:「作偏袒縫於衹支上」[24] 一語,就令人無法理解了。但且不論組合成偏衫的左右兩衣是否相同,從《釋氏要覽》〈偏衫〉的註腳「開脊接領」[25] 又可以判斷:所謂「開脊」,就是這兩者的縫合線。那麼,縫合線就應該順著脊線,垂直於地面了。而且,因是「綴於左邊祇支上」[26] ;所以,祇支在右,覆肩衣(偏袒)在左。
接下來的疑問是,該如何縫合兩者呢?兩者的接縫位置正好都在兩件衣的邊緣嗎?筆者嘗試了以下三種不同的假設,並繪圖說明。圖4-2.9,(A)代表僧祇支;(B)代表覆肩衣;(C)代表縫合線。
(A)僧祇支 (B)五條衣 (C)縫合線
圖4-2.9 偏衫製法探討之一
假設(1)兩者不重疊,成一直條,如圖:4-2.10
圖4-2.10 偏衫製法探討之二
假設(2)兩者重疊,但留一邊不縫合,如圖:4-2.11
圖4-2.11 偏衫製法探討之三
假設(3)兩者重疊,兩布邊緣都縫合,如圖:4-2.12
圖4-2.12 偏衫製法探討之四
再分別將上述作成的衣,將祇支置於右手邊,覆肩衣於左邊。以覆肩衣的一邊,先從右腋繞身一匝,再將衣角披覆左肩的方式,來比較其結果,發現:
圖4-2.13 偏衫與直綴形成之推論之一
假設(1)和(3)的效果是相近的,只是新合成的衣的長度不同。都無法達到披覆右肩的效果。只有假設(2)有可能達成圖像圖4-1.12、4-1.13或4-1.14的效果。此推論過程可以圖4-2.13表示,和圖4-2.14一般日本學者的推論是不同的。
圖4-2.14 偏衫與直綴形成之推論之二
(二)直綴
其次說直綴:這就相當複雜而更難於求得謹嚴的暸解,令人困惑不已!直綴之名,在諸多故籍中,又作「直掇」或「直裰」。這就等於中國古織物的「緙絲」之又作「刻絲」、「刻色」等名,乃因其年代久遠,時空不同以及輾轉傳抄所形成。若是從字形來究詰字義,可就頗有差距;又因為此差異形成的先後無從考證,愈發增加研考的困難。
在字書中的訓詁,僅就和服裝相關或相近的領域來查證字義:「綴」是緝而連接之意,《說文解字》:「綴,合箸也,……連之以絲也。」[27] ;讀音「ㄓㄨㄟˋ」Chui4。「掇」是採拾之意,讀音「ㄉㄨㄛˊ」TO2。《說文解字》:「掇,……拾取也」,又「拾,掇也。」[28] 可見「掇」與「拾」通意,似覺不合直綴的由來。而「裰」字在字書上的解釋則如下:《廣韻》載:「裰,補裰破衣也。」《韻集》也說:「裰,補也。」為破衣補縫之意,讀音同「掇」。[29]
依「直綴」的來由看,它並不如納衣般由許多布片縫補而成,而是強調──縫合上衣下裙。所以惟有「緝而連接」之意的「綴」為合理近實,應當以「直綴」為是──這是初名。為什麼必得為此探究字義?乃是為究詰破除後文所遇的困擾,求取正確的答案而設。不過,這在後段對諸多引文所稱的「用途」方面沒有關連,只有在「造形」上有其據以判別的準繩。這是不得不預為聲明的。
關於「直綴」的故籍文獻比偏衫為多。在後文的引用中對「綴」、「掇」或「裰」各依原文不改。北宋高隱之士林和靖名浦寄李山人的詩句中有云:「身上衹衣粗直掇。」北宋蘇軾所作孔平仲惠蕉布詩:「更得雙蕉縫直掇,都人渾作道人看。」明人王世貞《觚不觚錄》:「腰中間斷,以一綫道橫之,謂之程子衣,無縫者,別謂之道袍。又直掇;此燕居之所常用也。」[30] 現就上引的詩文試加分析,可以得到以下幾點認識:(一)直綴,一作直掇,(二)腰中間斷而復合,而有線道的名程子衣,不中斷而無線道的叫道袍,一名直掇。換句話說:直掇是上下通直不別衣裳的長形袍。(三)這種直掇,乃是士人家居時所常用,但也是「道人」的常服──值得注意的是:「道人」不是「僧人」。其名為「道袍」,而不是「僧袍」,兩者有別。(四)參擬上引的《魏錄》,早在魏代已有直掇,歷經多年承傳,直到宋代,還在一貫服用中。可是,另有其他的文獻,卻與上說不同。據稱:直掇,是偏衫和裙的複合物。在《望月佛教大辭典》和《佛光大辭典》的〈直綴〉條引說較詳,並有附圖。玆為利於追蹤研判,不妨抄錄它的全文如後,載:
「『直綴』又作直裰。綴,縫合之意。係僧侶之法衣。即將偏衫與裙子合綴而成之僧服。我國唐代中世以來,即盛行於禪家。日本法衣最早之形式即為直綴。關於直綴之源始,據盛冏之《傳通記糅鈔》卷二十六載:『唐代新吳百丈山慧海大智禪師始將上下連綴,而稱之為直綴。』或謂東晉佛圖澄創制。然事實不詳。《敕修百丈清規》卷五直裰條(大四八。一一三九上):『相傳,前輩見僧有偏衫而無裙,有裙而無偏衫,遂合二衣為直裰。』(《古尊宿語錄》卷五臨濟義旋禪師〈濟北集〉卷九直裰辨,《禪林僧寶傳》卷十七〈浮山法遠禪師〉)」[31]
在此依於以上引文及附圖也試加分析,可得的幾點是:(一)直綴,那是偏衫和裙兩者的複合,而其造形略同於早在先秦就已存在的「深衣」型。(二)這是僧伽的衣。(三)這在唐代已盛行於僧侶,或早在東晉創於佛圖澄但無可考。(四)因其盛行於唐代,曾經傳到道日本被仿行。(五)全然是僧衣,不及於俗世。(六)如是云云那和依於前文引錄林甫、蘇軾以次詩文所作分析的內容全然不同,究竟誰是誰非?這就百思不得其解了!
其間最大的距離是直綴的造形──前者是袍形,後者是深衣形,目前日本學者也多將這種似「深衣制」的僧服稱之為直綴,[32]如圖:4-2.4。所不同的「袍」是上下通直不別衣裳;「深衣」上下分裁而合縫。其次是前者兼用於「道人」,不及於僧侶;後者僅用於僧侶,而不及於世俗。凡此等等各說各話。或者可能如筆者所推測的偏衫,加縫下裙而成;那就既不是袍,也不是深衣制了。這其間的關係錯綜複雜,又沒有足夠的史料證明,因此仍無法確知。
三、立播衣
雖然「立播衣」在漢籍中甚少有紀載,目前僅見義淨《南海寄歸內法傳》中有所紀錄,并有仔細的描述,據云:立播衣原是作為裹腹保暖之用的,因此意譯為「裹腹衣」,它的造形是「去其正背,直取偏袒一邊。不應著袖,唯須一幅,纔穿得手。肩袖不寬,著在左邊,無宜闊大。右邊交帶,勿使風侵。多貯綿絮,事須厚煖。亦有右邊刺合,貫頭紐腋,斯其本製。」[33] 且還強調這是他所親自目睹的。日本學者井筒雅風在其《法衣史》的研究中就以圖4-2.15a、4-2.15b為立播衣。
圖4-2.15a 「立播衣」
圖4-2.15b 「立播衣」圖示
但今人王邦維教授在《南海寄歸內法傳》的注解中卻說:「『梵云立播者,譯為裹腹衣。』此字未能還原為梵文。高楠提出兩個梵文詞:repha和lepa,亦存疑。但據Monier-Williams所編A Sanskrit-English Dictionary, repha和lepa沒有與衣服有關的任何意思。」[34] 也就是說,有些學者甚至懷疑有這樣的服裝存在。筆者也因研究資料的有限,尚無法對此作深入探究。因此,在上一節的內容中,完全未提及其沿革。在此僅能針對義淨所描述的內容稍作理解。
貳、下裳
「裳」讀音「常」,《說文解字》說:「裳,常或從衣。」[35] 而「常」是「下裙也」。可知「裳」和「常」原來是通用的,只是後來習慣上都用「裳」,也就不見世俗再以「常」字來表示下裙了。
裙在印度僧伽原是聽衣之一,只是印度裙的造形和漢人有些不同。但不論是印度或漢族的裳,都是由布片圍裹的下衣。印度的裙,通常是由一片長方形布塊,如圖4-2.16,此圍繞腰際,再將腰間多餘的布反摺,夾在腰際;或者,以腰繫帶於腰部固定,再將腰帶上的布往外摺(圖4-2.17)。即使僧伽拾取糞掃衣,往往無法得到完整的布塊,也會將若干小塊布,拼合成一大塊長方形的裙。
古代漢族的「裳」有兩類,一是「帷裳」,為禮服;一是「非帷裳」,是常服。[36] 雖然,文獻上並沒有太多有關下裳的紀載;但是,根據王教授宇清的研究,帷裳是由兩片布分別從身體後、前圍繞形成;不但是一定要前片三幅,後片四幅布;在尺寸和打襉方面,也有嚴謹規定。如圖4-2.18,延伸於裙身之外的腰帶,正好有固定的功能。[37] 非帷裳造形不如帷裳來得嚴謹圖4-2.19。
圖4-2.16 印度式裙之一
圖4-2.17 印度裙腰帶
圖4-2.18 漢式裙之一──「帷裳」
圖4-2.19 漢式裙之二──「非帷裳」
然而,漢族僧伽所穿的裳,是和印度一樣只是一片布作成,或者如漢人一樣,以裙頭上縫有腰帶的兩片布形成的呢?因為,比丘像或羅漢像的裙頭往往被外面的袈裟所覆蓋;從圖像上實在很難辨識。幸而有些傳世物得以了解,法門寺地宮的出土物中,也有僧伽的裙(圖4-2.20),這屬漢傳密教的法服之一,但仍可作為一種參考。從圖像來分析,會發現:這件裙雖然和印度僧伽原來所穿的裙一樣都是一片布所作成;但是,在裙頭兩邊各縫有一布條。可以判斷它的穿法應該和印度的穿法已經不同。倒比較像漢族「帷裳」的造形。可見,這又是一個印度和漢族文化融合的產物。其次,漢族僧伽還有一種裙名為「圌衣」這是因為它的造型像是一貯米的圓形容器圌。[38] (圖4-2.21)
圖4-2.20 法門寺「地宮」出土的「裙」
圖4-2.21 漢族僧伽之裙──「圌」
參、褲
除了「上衣」和「下裳」以外,僧伽聽衣的內容還包括「頭衣」、「脛衣」、「足衣」等等。這些服裝通常較無一定的規制,又且文獻資料也非十分充足,因此姑且不加以探究。但因「褲」對漢族僧伽來說,是十分重要的聽衣之一,因此將略探求其淵源。
其實,原來印度僧伽也有穿褲的情形,但多為比丘穿著,比丘尼是以著裙為主。但印度僧伽的褲仍是由一塊長方形的布塊作成。在佛教傳入漢地以前,漢人也早有穿褲的習慣,那時的褲,除了有褲管長短不同的種類以外,有些褲有褲襠,有些褲卻無褲襠。根據文獻上的紀錄漢人的褲共有以下幾種主要類型:1.開襠褲,2.緄襠褲,3.犢鼻等。且這些褲在佛教傳入漢地之前都已被漢人使用,一直到近代,直到受西方風俗的影響,褲的造形也與時俱變。筆者並不企圖說明這些褲形的形成先後順序,但希望藉著概略澄清各種褲的造形與用途,以作為判斷漢族僧伽褲子的款式。
首先說明這三種褲的造形:開襠褲的主要特徵就是只有褲管,但無褲襠的褲形。有的在腰頭的地方有布條接合兩褲管;有的則無,稱為「套褲」。犢鼻是短褲,言兩褲皆似牛之鼻。緄襠褲和開襠褲的差別,就在於褲襠的有無。其造形有四類,其一是直統長褲管,又稱為褲;其二是倒頓。這是在原來極大的褲管上之末端,用布條等束縛在膝下的腳脛。其三為[袖-由+交][袖-由+了],是一種較合身的短褲,這是漁民便於涉水所常用。[39] 其四為褌褲;義淨《南海寄歸內法傳》說:「且如神州衹支偏袒覆膊,方裙、襌」[40]王邦維注:「『襌』為訛誤,應為『褌』[袖-由+夸]」[41];可知唐代以前,漢族僧伽曾穿過這種短的緄襠褲。至於其它褲形,是否被採用,由於和裙一樣,都被外衣遮住了,還無法證明。但從古籍的紀載得知:漢代雖然已經有了緄襠褲,但士大夫多以無襠的褲為主;自唐以後,逐漸盛行高座,士大夫才愈趨穿著緄襠褲。這是因為,士大夫多穿長袍或深衣,席地而坐也不怕會暴露下體。以佛教對肢體暴露程度的觀念來判斷,印度僧伽褲裝尚且將下體完全覆蓋,漢族僧伽也穿著滿襠褲的可能性就比較高。又,祥雲法師曾說:比丘的褲通常不處理成合乎腰圍的尺寸,而是將寬鬆的褲頭,向身體前方中央集中,再反摺固定,以蔽著下體。[42] 如此再一次證明,僧伽應該是穿著有襠的褲子。
由此可知:本節所探討的漢族僧伽之聽衣中,上衣的袍、下裳的漢式裙和褲都是在佛教傳漢前早已形成的服裝。且袍與褲更是一直沿用持續至今天。印度式的裙是隨著西方僧伽進入漢地而傳入,它與漢式裙究竟何時才不再被使用,目前尚無法肯定,但可能當偏衫不再被穿著時,它就隨著不再被使用了。至於偏衫形成的時間可以確定是魏,并可能終止使用於直綴形成的時間;而直綴又是何時形成?因有不同的可能,所以也難以確定,就目前一般學者的看法是在唐代;否則,若如筆者的推測──直綴是「深衣制」的一種,那它也是早在佛教傳漢以前就已存在了,後來才有些改變。如下圖4-2.22所示:
圖4-2.22 漢族佛教僧伽各種聽衣的發展
[1]) 許 慎(東漢)。《說文解字》。p.169。
原文:「衣,依也,上曰衣;下曰裳。」
劉 熙(漢)。《釋名》。p.22。
原文:「凡服:上曰衣,……下曰裳。」也就是指穿在上身的衣,如袍服、偏衫之類。
[2]) 許 慎(東漢)。《說文解字》。p.158。
原文:「裳,常或從衣。」而「常」是「下裙也」。
[3]) 道 宣(唐)。《道宣律師感通錄》。p.458c。
[4]) 楊 雄(東漢)。《方言》。p.10。
[5]) 鄭 玄(西漢)。《儀禮》(注述補正)〈士喪禮〉卷三十五。p.4。
[6]) 鄭 玄(西漢)。《禮記》(注述補正)〈玉藻〉卷二十九。p.16。
原文:「纊為繭,蘊為袍。」古無木棉,但用蠶絲。
[7]) 王宇清(1994)。《中國服裝史綱》。p.13。
[8]) 劉 熙(漢)。《釋名》。p.22。
[10]) 林尹高明(1973)。《中文大辭典》。p.1223。
[11]) 王宇清(1994)。《中國服裝史綱》。p.14。
[12]) 吳修興(1993)。《台灣佛教顯宗及其僧侶服裝之研究》。p.73。
1993年訪問祥光精舍祥雲法師所述。
[14]) 贊 寧(宋)。《大宋僧史略》卷上。p.238a。
[15]) 道 誠(宋)。《釋氏要覽》卷上。p.270b。
[16]) 法 雲(宋)。《翻譯名義集》卷第七。p.1171c。
[17]) 因偏袒縫於左邊衹支上。
[18]) 道 誠(宋)。《釋氏要覽》卷上。p.270b。
〈偏衫〉:偏衫是「偏袒縫於祇支上」。
[19]) (未詳)《翻梵語》卷第三。p.1005a。
[20]) (未詳)《翻梵語》卷第三。p.1005b。
[21]) 法 雲(宋)。《翻譯名義集》卷第七。p.1171c。
[22]) 法 雲(宋)。《翻譯名義集》卷第七。p.1171c。
[23]) 法 雲(宋)。《翻譯名義集》卷第七。p.1171c。
[24]) 道 誠(宋)。《釋氏要覽》卷上。p.270b。
[25]) 道 誠(宋)。《釋氏要覽》卷上。p.270b。
原文:「『魏宮人見僧袒一肘,不以為善。乃作偏袒縫於僧祇支上,相從因名偏衫。』」其註腳說:「今開脊接領者,蓋遺魏制也。」
[26]) 法 雲(宋)。《翻譯名義集》卷第七。p.1171c。
[27]) 段玉裁(清)。《說文解字注》。p.745。
[28]) 段玉裁(清)。《說文解字注》。p.611。
[29]) 林尹高明(1973)。《中文大辭典》。p.11158。
[30]) 林尹高明(1973)。《中文大辭典》。pp.1048-1049。
[31]) 釋慈怡(1989)。《佛光大辭典》。p.346。
[32]) 井筒雅風(成平六年)。《法衣史》。p.52。
[33]) 義 淨(唐)。《南海寄歸內法傳》卷第二。p.920b。
[34]) 王邦維(1995)。《南海寄歸內法傳校注》。p.90。
[35]) 許 慎(東漢)。《說文解字》。p.169。
[36]) 王宇清(1983)。《周禮六冕考辨》。p.102。
[37]) 王宇清(1983)。《周禮六冕考辨》。pp.102-104。
[38]) 道 誠(宋)。《釋氏要覽》卷上。p.270b。
[39]) 王宇清(1989)。《中國服裝史綱》。pp.128-130。
[40]) 義 淨(唐)。《南海寄歸內法傳》卷第二。p.919b。
[41]) 王邦維(1995)。《南海寄歸內法傳校注》。p.90。
[42]) 1993年訪談得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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