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복식문화

高句麗 古墳壁畵를 통해 본 高句麗 服飾에 關한 硏究

by 8866 2009. 10. 7.

 

高句麗 古墳壁畵를 통해 본 高句麗 服飾에 關한 硏究

金美子(서울여자대학교 의류학과 교수)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기본복식과 원류                   
2. 우리나라 夫餘, 東濊와 三國의 服飾 

 

Ⅲ. 古墳壁畵에 나타난 高句麗 服飾    

 

1. 衣服                              

2. 頭飾                              
3. 帶                                

4. 신
5. 장신구

6. 織物 및 染采

 

Ⅳ. 三國時代  袴와 中國 袴褶과 日本 衣 

 

1. 韓國 民族의 原流와 古代文化
2. 中國의 袴褶
3. 日本의 衣

 

Ⅴ. 결론

 

Ⅰ. 서 론

 

 본 연구는 벽화 고분에 나타난 복식에 관한 연구로 남녀의 두식, 의복, 대, 신, 장신구, 두발장식, 차림새, 직물, 문양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고분 벽화에 관한 연구는 1947년 이여성이《朝鮮服飾考》를 발표한 이래 현재까지 남북한 학자들에 의해 우리나라 복식 분야 중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영역 중 하나이며, 특히 형태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그간의 연구를 총합하여 각 영역별로 요약하고, 몇가지 미연구 부분을 보충하며, 삼국시대의 기본복 중 유.고( .袴)와 중국의 고습(袴褶), 일본의 유곤(  )과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간의 복식 연구동향은 유형 연구와 신분별 복식 연구, 복식조형미 연구로 대별된다. 유형연구는 의복, 두식, 두발, 대, 신, 장신구의 양식 및 직물, 문양 연구로 구분되었고, 의복 영역은 유( ), 상(裳), 고(袴), 포(袍)의 양식연구가 주류를 이루며, 의복 구성 요소(옷깃, 섶, 소매, 선, 여밈법 등)의 형태연구와 차림새 양식 연구가 있었다.
 仙人服과 飛天衣는 제외하였다.
 북한학자들의 연구와 단행본도 포함하였다. 주는 꼭 필요한 부분만 달았고, 각 영역별로 요약한 말미에 참고문헌을 넣었다. 단행본은 영역마다 거의 중첩되므로 처음 들어간 곳에 한 번만 썼다.

Ⅱ. 본 론

 

1. 기본 복식과 원류

 

 우리나라의 古代 基本服飾은 李如星의 연구(도 1) 이후 정설로 정립되었으며 스키타이 복식(도 2)이며, 북방계 복식이다. 고구려인의 기본 복식은 남자는 고(袴: 바지) 위에 유( : 저고리)를 입고, 여자는 상(裳: 치마)을 입은 후 저고리를 입는 것이다. 이 위에 포(袍: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 띠(帶)를 두른다. 남자는 관이나 건을 썼으며, 발에는 리(履: 운두가 없는 신)나 화(靴: 장화)를 신고, 귀걸이, 목걸이, 팔지, 지환을 착용하였다.
 金元龍은 우리나라에 스키타이 文化가 들어온 것은 B.C 700∼B.C 600년 경 부터 러시아의 예니세이강 上流의 미누신스크 地方에서 內蒙古의 綏遠地方에 걸친 騎馬, 靑銅器人들의 南向移動이라는 큰 물결이 韓半島에까지 餘波가 미쳐 우리나라에 미누신스크〔Tagar 文化〕-스키타이 綏遠文化가 뒤섞인 複合文化〔즉 스키타이계 文化〕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鐵器時代 이전까지는 스키타이계 文化의 影響下에 있었으며 遺物을 통하여 證明된다.
 이후 紀元前 2世紀경부터 濊貊퉁구스〔韓民族〕들은 樂浪郡을 통하여 中國文化圈과 직접 접촉하게 되었고 급속도로 中國文化類形으로 轉換하게 되었다. 漢字가 들어오고 墓制가 바뀌고 佛敎가 들어오고 建築이 中國式으로 바뀌었다.
 佛敎의 普及은 샤머니즘 퉁구스의 死生觀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佛敎는 濊貊퉁구스의 佛敎로 變質하게 되고 政治, 文學, 藝術 등 각 방면에서 古代 韓民族文化의 강력한 推進體였다.
中國 史書에 고구려인들이 孔子 이전의 책인 《詩經》,《禮記》,《易經》과 《春秋》,《孫盛》,《史記》,《漢書》,《後漢書》,《三國志》,《玉篇》,《字統》,《字林》,《文選》 등을 읽었다고 전하고 있으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건국 초부터 중국 문자를 빌어 썼으며, 백권에 달하는《留記》라는 고구려의 역사책을 펴낼 수 있었다 한다.


2. 우리나라 夫餘, 東濊와 三國의 服飾

 

 古代國家 중에서 服飾에 관한 기록이 있는 夫餘, 東濊,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과 가시적 자료인 고분벽화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漢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 夫餘와 東濊의 복식
 夫餘는 B.C 4世紀경에 기록이 나타나는데 A.D 49년에 中國式 年號를 사용함과 동시에 中國에 사신을 보내는 등 中國과의 관계는 밀접했고, 後漢末 公孫氏가 요동에 웅거하였을 때에는 혼인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夫餘는 白衣를 숭상하여 白布로 만든 大袂袍와 袴를 입고 革踏을 신었고 國外旅行때는 繪繡錦 등의 비단옷을 입었는데, 大袂란 넓은 소매로 해석하거나 혹은 넓은 둥근 소매(도 3)로 해석 할 수 있는데, 모두 기본복의 소매와는 다른 것으로 漢의 影響을 받은 것이다.
 東濊는 북쪽이 沃沮〔咸興地方〕와 접하고 동쪽은 동해안에 면한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에 있었는데 임둔군이 있던 곳이다. 高句麗 太祖王(53-146?)때 高句麗에 복속되었다.
東濊는 高句麗와 같은 종족으로 언어 법속이 대개 같고 男女 모두 曲領을 입었다고하였는데 曲領은 表衣 안에 입었던 內衣의 一種으로 中國의 옷이다.

 

 2) 百濟와 新羅의 服飾
 三國의 衣服이 같다는 것은 文獻資料와 可視的 資料(도 4, 5)로 알 수 있다.

 ① 新羅 服飾
 新羅의 上流層 男子는 窄袖 와 廣袴 차림이고(도 4) 서민 男子는 窄袖 와 細袴이며, 서민 女子는 窄袖 와 裳차림이다.
 梁職貢圖에 보이는 新羅 使臣은(도 5) 窄袖長  右 에 廣袴이며 바지부리에는 넓은 異色 이 있는데 高句麗와 百濟의 使臣과 같은 服裝이며 冠만 다르다.
 즉 上流層은 基本服이되 다소의 변화가 있는 옷, 즉 廣袴,  이 없는  , 袖口가 넓은 소매의 長 를 착용하고 있다.《唐書》에 新羅人은 長 를 입었다는 記錄과 遺物이 일치한다.

 ② 百濟 服飾
 百濟의 衣服에 관한 記錄은《周書》《通典》《北史》百濟條에  의 길이가 길어 袍와 비슷하고〔衣似袍〕 그 소매가 넓지 않다〔袖微大〕라고 기록되어 있고,《梁書》에는 百濟人은 袴를  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에는 8代 古爾王 27年(260)에 品官의 服飾冠制를 制定했고 다음해 王은 紫大袖袍에 靑錦袴를 입고 金花飾鳥羅冠 素皮帶 烏韋履를 착용했으며 帶의 色에 따라 등급을 나누었는데 紫   靑 黃 白의 順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시적 자료는 武靈王陵에서 出土된,  와 廣袴를 착용한 琉璃童子像과 使臣圖가 있다.
현재 梁職貢圖는 原本은 없고 模寫圖만 3벌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宋時代의 模寫本은 南京博物館에 所藏되어 있으며, 35개국 중 13개국의 使臣圖가 그려져 있는 중에, 우리나라의 國使로는 百濟國使만 실려있다. 나머지 2벌의 模寫圖는 臺灣의 故宮博物館에 所藏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唐初期의 閻立本이 模寫한 것으로 여기에는 24개국 26명의 使臣圖가 있고, 다른 하나에는 南唐 顧德謙이 模寫한 32개국 35명의 使臣圖가 있다고 한다.  이 두벌의 模寫圖에는 우리나라 三國의 使臣이 모두 실려있다.
 최근 中共學者 金維諸는〈梁職貢圖의 時代와 作者-畵와 解說을 보고〉에서 南京博物館 所藏 職貢圖는 原本이라고 주장하였다. 


Ⅲ. 古墳壁畵에 나타난 高句麗 服飾

 

 高句麗에 관한 복식 기록은 新羅, 百濟와 같이 단편적이나 高句麗 壁畵와 일치하므로 壁畵를 중심으로 의복, 관모, 머리모양, 대, 신, 장신구, 직물과 염채 순으로 고찰한다. 
1990년까지 알려진 壁畵古墳은 65餘基이며 1997년 전호태의 연구에 의하면 91기이다. 필자는 文獻을 통하여 古墳壁畵 31基(표 1)에서 유 311벌, 고 216벌, 상69벌, 포117벌을 확인하였다.
古墳壁畵에는 여러 종류의 복식이 보인다. 벽화 중에서 우리나라의 基本服을 착용했는가 혹은 변화된 의복을 착용했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基本服을 착용한 것은 韓國的 要素가 강한 것으로, 漢化된 의복(변화된 의복)이 섞여 있는 것은 韓國과 中國의 요소 2가지가 섞여있는 것으로 구분했는데, 通構, 輯安地域 壁畵古墳는 韓國的 要素가 강했다. 이것은 연대적인 변화보다는 지방적 특성으로 생각되며 복식에서는 벽화의 편년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황해도 평안도 지역 古墳에서는 中國的 要素가 강했으며 中國的 要素와 韓國的 要素가 섞인 古墳壁畵도 있었는데 男子보다 女子들이 基本服을 많이 입고 있었다.
5世紀-6世紀 通構壁畵에 傳統服飾이 남아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傳統文化는 自然環境에 의해서 性格이 決定되는 것이며 어느 民族이 特定地域에서 統一, 單一體로 남아있는 이상 그 文化는 個性을 가진 民族文化로 保存되고 남아 있게 되는 것이며, 또는 小川의 停滯殘存의 원칙으로도 설명된다. 주로 지방적으로 偏在하고 있는 服飾이 文化의 主流가 時代와 함께 발전하여 가고 있는데에 對해서 그 지역에 정체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각 지역에 잔존하는 民族服飾이나 民俗服飾을 말한다".
반면 황해도와 평양지역의 衣服이 漢化된 이유는 평양천도(427)이후 안악 3호분(357)과 덕흥리 고분(408)의 影響이 컸다고 생각한다.
 먼저 壁畵에 나타난   袴 裳 袍, 착용방법의 양식, 반비, 하상, 갑옷을 요약하고 필자와 다른 견해와 아직까지 연구되지 않은 부분을 다룬다.

 [표 1] 고분별, 의복별 착용자수

 

1. 衣 服
 
 1)   (저고리)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의 기본형(도 1)은 前開左 窄袖에 옷길이는 둔부정도 길이(短衣)이고 옷깃, 섶, 밑단, 수구에 異色 이 둘러져 있고 허리에 帶를 매었다. 대는 보통 앞에서 여몄으나 옆 혹은 뒤로 매기도 하였다. 안쪽 옷에는 둥근깃(도 5)과 곧은 깃(도 6) 2가지 형태가 보인다. 기본형 이외에 右 (도 9)과 廣袖(도 5)와 長 (도 13)가 있다.
 上流層은 副 이 있는 것, 무늬가 있는 것, 색깔이 다양하고 짙은 것을 사용했고 서민은 주로 흑색이었다. 특히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 팔청리 고분에서는 기본형에 선이 부분적으로 둘러져 있어 다양한  의 형태가 되었다. 즉  이 옷깃에만 있는 것(도 7), 밑단에만 있는 것, 수구 옷깃 밑단에 있는 것, 선이 전혀 없는 것(도 8), 同色 을 댄 것도 있다. 또한 帶를 매지 않은 것(도 7)이 있는데 여기에는 작은 끈이나 매듭끈으로 고정시켰을 것이다.
 長 는 옷길이가 엉덩이를 완전히 덮고 무릎 위까지의 길이이다. 광수는 착수보다(손목의 2배) 2배 정도 넓어 보이고 무용복인 착수장수유(窄袖長袖 )는 소매 길이가 매우 길어 손끝에서 접혀져 팔꿈치에 못미치는 길이로 보인다. 사냥할 때는 소매나 팔뚝에 깍지나 헝겊을 매어 기능성을 살렸다.

 

 2) 袴 (바지)
 바지는 긴 것과 짧은 것이 있다. 긴 바지에는 廣袴와 細袴가 있다. 窮袴를 일반적으로 좁은 바지라고 하고있으나 바지 밑에  (밑바대, 무)이 있는 바지를 窮袴라는 설이 있어 좁은 바지의 명칭으로 細袴를 사용한다. 바지 부리에는 異色  혹은 同色 을 댄 것과 선이 없는 것이 있다. 좁은 바지는 그대로 입었고, 선이 없는 넓은 바지는 부리를 대님으로 매어 오므려서 입었다. 오므린 방법은 현대의 대님같이 맨 것,〈도 9〉같이 廣袴를 오므린 모양과 행전을 친 것(도 8)이 있다. 女子가 袴를 착용한 것을 장천 1호분(도 11)과 무용총에서 볼 수 있는데 시녀와 무희들이다.
 동암리 벽화에서 2人이 check 무늬 고(도 10)를 입고 있는데 무늬의 색은 홍, 남, 갈색, 미색이다.
삼실총의 역사의 바지(도 11)는 매우 넓고 얇아 주름이 많은 바지로 페르시아 바지를 연상시킨다. 서역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3) 裳   裙 (치마)
 치마는 땅에까지 끌리게 긴 것과 바지가 보이게 짧은 것이 있고, 주름치마와 深衣의 下裳과 같이 여러 쪽을 이은〈도 12〉쪽치마가 있다. 주름치마는 잔주름치마(도 6)와 넓은 주름치마와 색동치마(도 13)가 있다.《北史》〈列傳》高麗條에 婦人 裙加 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벽화에는 치맛단에 主 과 副 을 댄 것이 있다. 무용총의 무용인의 치마는(도 14) 치맛단에 선을 댄 것이고,〈도 15〉는 선있는 치마 위로 짧은 잔주름 치마를 입은 것같다.〈도 16〉은 밑단에 선이 있는 2개의 치마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안악 3호분의 디딜방아를 찧는 여인(도 17)은 中國의 여인과 같은 착장 방법으로서,   위에 치마의 윗쪽 부분만 주름잡은 치마(현재 우리 치마와 같음)를 입고  를 둘렀다.

 

 4) 袍
 袍를 착용한 사람은 왕, 관리, 귀족 등 대부분 上流層으로, 의례용으로 착용되었으며  袴나  裳 착용 모습보다는 적다.
 우리나라 袍의 기본형(도 1)은 길이가 종아리 이하 길이인데 壁畵에는 주로 女子(도 15,16)가 입고 있다. 袍의 소매가 넓은 것, 副 을 대거나 팔뚝과 어깨에  을 대어(도 14)치장한 것도 있으며 쌍영총 여주인(도 21)은 길과 同色 을 댄 소매 넓은 基本袍形을 입고 있다. 漢化된 袍를 입은 女子(약수리고분 덕흥리고분 안악 3호분(도 18) 감신총(도 19) 쌍영총 등)도 많은 편인데 대부분 폐슬을 했다. 안악3호분 여주인은 반비와 폐슬과 下裳을 착용하였다. 팔뚝에 선을 댄 옷은 B.C 3∼5세기 사카족 부족장 분묘인 이즈크고분 출토 황금 上衣가 있다. 팔뚝의 선은 스키타이계통임을 말해준다.
 上流層 男子는 대부분 漢化된 袍를 입었는데 이에는 3가지 樣式이 보인다. 첫째 上下가 허리에서 연결되고 수구 옷깃 밑단에 異色 이 있고 소매에 袂가 있는 袍이다. 이러한 형태의 것은 덕흥리 고분의 주인, 幽州 13郡 太守, 수산리 고분 주인(도 20), 안악 3호분 주인 등의 袍에서 볼 수 있다.
 둘째 소매가 넓고 上 下衣가 이어지고 同色 을 댄 袍이다. 이러한 형태의 袍는 쌍영총(도 21)의 주인, 매산리 사신총 태성리 제1호분 약수리 고분의 주인이 입었다.
 셋째 소매가 좁고 上.下衣가 이어진 것같고 옷깃 수구 밑단에  이 있는 袍이다. 이것은 안악 3호분 주실회랑 행렬도의 男子(도 22)들과 덕흥리 고분의 男子 등이 입었다.
 넷째 옷깃과 섶에  이 있는 基本袍는 무용총 벽화의 스님 2人(도 23)이 입었는데 袍 밑으로 주름치마가 보인다.

 

 5) 착용법
 上下 二部式 차림새의 樣式에는 男子의 窄袖短 細袴(도 7)와 窄袖短 廣袴(도 9), 女子의 窄袖短 細袴와 窄袖短 裳의 基本形과 窄袖短 廣袴(도 11), 窄袖短 長裳(도 6) 長 長裳(도 13)의 차림새가 있다.(短 의 길이는 엉덩이까지의 길이로 함)  .裳의 실루엣은 홀쭉한 형과 A-Line이 있다.
 一部式 차림새의 樣式에는 女子의 基本袍(도 15), 男子의 漢化된 袍의 차림새(도 20)가 있다. 女子 袍의 실루엣은 A-Line이다.

 

 6) 기 타
 (1) 半臂
벽화에 옷깃과 소매가 없는 상의가 겉옷으로 착용된 것이 있는데 반비 혹은 수굴이라고 한다. 반비를 착용한 모습은 안악 3호분, 무용총, 삼실총에서 볼 수 있고, 안악3호분 여주인은 蔽膝과 下裳(袍 밑으로 보이는 주름)을 착용했다고 본다.
 안악3호분 여주인이 착용한 반비는 옷깃은 V형이고 팔뚝과 밑단에 흑색 선
이 있으며 재료는 무늬 있는 자색 옷감이다. 이 반비를 천석근은〈도 24〉와 같이 보았다. 본 연구자는 폐슬을 반비 위에 입은 것으로 생각한다.
 덕흥리 고분(408년)에서 牛轎를 따라가고 있는 시녀 2人(도 11)의 반비는 팔뚝에 연두색 선이 있으며 길이는 짧은지 긴지 확실하지 않다.
 무용총의 彈琴神白虎圖에서 가야금을 타고 있는 여인이 치마를 위에 입고, 위에 팔뚝에 선이 있는 짧은 반비를 입었는데 전형적인 漢式 착용법이다.
삼실총의 주인이 착용한 반비는 분명하지 않아서
 ① 팔뚝에 선이 없고 옷깃과 밑단에 선이 있는 반비를   위에 입거나
 ② 옷깃과 밑단의  이  에 있는 것이라면  이 전혀 없는 반비를 간단히 걸친 것이 되며
 ③ 어깨에 이색(異色)천을 댄 것으로 해석하는 설도 있다.

 (2) 下裳
 안악 3호분 여주인(도 18)의 袍 밑으로 보이는 주름은 예복용 裳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下裳은 이미 漢代의 女子가 착용하고 있었으며 北朝時代 皇后禮佛圖〔龍門賓陽洞〕에서도 3사람이 예복 밑에 착용하고 있다.
 下裳은 男子도 착용하여, 東漢 末年 山東에서 발견된 石像의 인물에서도 裳을 착용하고 있고, 隋代와 唐代의 冕服과 唐代의 文官俑(도 57)과 泰陵과 健陵의 文官石像 2人의 朝服 밑으로 下裳을 착용한 것이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下裳이 전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안악 3호분 여주인과 統一新羅時代의 十二支護石像이 입었다. 또한 주름을 따로 잡아서 포 밑단에 붙인 것이라고하는 설도 있다.

 (3) 갑 옷(도 25)
 갑옷의 양식에는 갑옷, 저고리(甲衣)와 갑옷바지(甲袴)가 다 있는 것과 갑옷 저고리만 있는 것이 있다. 아래 위 갑옷이 다 있는 것은 다시 소매가 있는 것, 소매가 없는 것, 또, 소매 길이 등에 의하여 세 가지로 구분된다. 즉 소매가 손목까지 오는 것(도 25-6), 팔꿈치까지 오는 것(도 25-1,2,3,4), 소매가 전혀 없는 것(도 25-5) 등이 있다.
 소매가 없거나 팔꿈치까지만 있는 갑옷을 입은 경우는 따로 토시를 꼈다. (도 25)의 인물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모두 목도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특이한 것은 (도 25-1)의 경우 세 개의 방울을 앞가슴에 드리우고 있는 것은 고급 무관들의 위엄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도 25〉의 갑옷은 모두 찰갑이다. 찰갑은 작은 철편을 꿰매어 만든 것이므로 전체가 몸에 잘 맞을 수 있고, 갑옷을 입고도 굴신 동작을 비롯한 각종 전투 행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 찰갑은 출토되는 신라 갑옷과 문헌에 보이는 백제 갑옷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기병을 핵심으로 보병을 배합한 당시의 군대조직과 당시 3국이 처한 역사적 환경이 유사하고, 동일한 고조선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데서 온 것이다.

 

 2. 頭 飾

 

 夫餘人의 "帽子는 金銀으로 장식하였다"는《三國志》東夷 夫餘傳의 기록으로 보아 우리민족은 일찍부터 햇빛과 비를 가리기 위해, 방한용, 신분장식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벽화에는 대부분의 남자가 여러 종류의 관모를 썼다. 우리나라 관모 중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弁形帽이며 이 쓰개가 스키타이계임을 나타낸다. 변형모를 가리키는 기록에는 折風, 蘇骨, 弁이 있다. 弁字는《釋名》에서 "弁字는 양손을 합장할 때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弁字의  은 양손을 합장할 때의 모습 즉 좌우가 평면이고 앞뒤로 봉합선이 있는 형상이며 여기에 끈을 달아 매면 弁형상이 된다. 변의 우리말인 고갈(=곳갈, 곳=첨각, 갈=관모)에서도 그 형상을 유추할 수 있다.

 1) 冠帽
 (1) 折風, 蘇骨(도 26)
折風, 蘇骨은 문헌에 나타난 우리나라 최초의 관모 名稱이며, 고구려 독자의 쓰개이다. 이들은 材料나 修飾에 서로 차이가 있었으니 대체로 折風에는 皮革이나 布帛이, 蘇骨에는 紫羅, 靑羅, 緋羅, 絳羅가 사용되고, 각기 修飾으로는 自然鳥羽나 金屬製 鳥羽飾을 삽식하였던 것 같다.
 이여성은 문헌에 나타난 고구려 관모와 계급을 정리하고,《北史》와《周書》의 모순된 두 기록을 분석함으로서, 절풍과 소골은 혼돈될 만큼 近似한 것이며 적어도 기본형태는 동일한 것이었음을 지적하였고, 소골은 寫音對字로서 Sok-Got이라는 음으로도 되며, 속은 솟(Sot)의 변음으로 용립의 뜻이고 곳(Got)은 갓(Gat)의 轉訛로 관모의 뜻이니, 속곳은 용립한 관모라하여 삼각형 관모라고 하였다.
 김진구는 '折風이라는 어휘는 古代 漢人이 그들의 言語로는 弁이라고 불렀다. 折風의 형태는 끝이 뾰족한 冠帽였으며, 재료는 가죽을 사용하였다. 漢人의 절풍은 高句麗人의 折風과  을 포함한 것이었고, 그들은 고구려인 보다 折風이라는 말을 더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 고구려인이 折風이라고 불렀던 冠帽이름은 漢人이 折風이라고 사용했던 범위에서 소위 고구려인이  이라고 불렀던 冠帽 즉 一梁折風(漢人의 명칭)을 제외한 折風 즉 一梁以上의 弁形冠帽만을 折風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인의  은 一梁折風이었다. 一量冠帽라 하여도 梁이 前後로 있을 때와 左右로 있을 때가 있고 梁이 前後左右의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서 冠帽의 모양이 달라지게 된다.'고 하였다.

 (2)  (도 27)

 역시 折風과 더불어 문헌에 나타난 쓰개인데, 蘇骨, 鳥羽冠, 金屬製의 冠(金冠) 등은 이 두 관모( 과 折風)를 기본으로하여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책은 우리 쓰개 중에서도 민족적 특성이 강한 것으로서, 중국의 책과는 달리 애초부터 독립적인 관모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도 27)은 완성된 冠帽로서 독립적인 쓰임새를 보이고 있으나 중국의 책에 있는 收와 屋이 없는 臺輪狀의 것이 대부분인데, 後頭部가 유난히 솟아있고 어떤 것은 角이 2,3가닥으로 나뉘어 있는 것(도 27-1,2,3)도 중국의 책과는 다른 점이다. 즉 고구려의 책은 중국의 책에 비하여 보다 경쾌한 형상으로 고구려 독자의 특징을 보이고 있음에 유의해야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用途와 신분에 따라 책의 색을 구분한 예가 있는데, 고구려 벽화에도 대부분 흑색이지만 안악 3호분에 赤色의 책이 나타나 있는 즉, 색깔에 의한 신분상의 차이는 고구려의 책에도 반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鳥羽冠
 위에 조우를 揷飾한 모습은 고구려 벽화 중에 많이 보인다. 관모의 재료는 皮나 羅이었으니, 통칭 조우관이라는 것은 바로 皮나 羅로 만든 절풍이나 소골을 모체로 하여 여기에 조우를 加飾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우관(도 9)에는 천연의 鳥羽 두 개를 꽂는 것이 일반적인 듯 하나, 鳥尾를 加飾한 예(조미관, 도 28)도 있고, 또 조우나 帽體를 금, 은으로 장식하거나 金銀의 鳥羽狀 및 鹿耳狀 장식으로 帽體를 꾸미는 일도 행해지고 있었던 것같다. 물론 이러한 금속제의 조우관은 貴族에 한하고 하급 관리는 천연조우를 꽂거나 조우장식이 없는 절풍을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덧관(도 29)
 벽화에는 책같은 관을 쓴 위에 비치는 관을 덧쓴 그림이 여러개 보인다. 북한학자들은 《고구려문화》에서 덧관이라고 불렀다.
 ① 白羅冠
 고구려왕은 오채복(五采服)에 백라관(金 白羅冠)을 썼다는《新唐書》기록을 해석할 때 안악3호분 남자주인공의 관을 백라관(도 29-1)이라고 지적하며 또한 백라관을 썼기 때문에 안악3호분이 왕릉임을 증명하는 단서로 되고 있다. 임영미는 롱관(籠冠)이라고 하였다.
 ②黑羅冠
 쌍영총 주인의 관(도 29-3)은 흑라관으로 그물 모양의 표현으로 보아 성긴 라로 만든 덧관이다. 팔청리 벽화무덤의〈도 29-4〉의 관과 안악3호분〈도 29-2〉의 관은 뒤쪽 부분이 높은(後高)덧관이다.

 (5) 패랭이(도 30)
 패랭이는 위가 둥글고 채양이 넓은 조선왕조의 패랭이와 비슷한 것으로(지금의 밀짚모자와 같음) 햇빛, 눈, 비를 가리는 蔽陽笠形의 일종이다. 패랭이는 감신총 벽화(도 30-2)와 안악1호분 벽화(도 30-1) 중 사냥인이 쓰고 있다.
 김문자는 梅原夫治가 금령총 출토 笠形弁形帽의 부속품들을 모아 복원한 白樺樹皮製笠形弁形帽의 복원도를 제시하면서 "笠形弁形帽"라고 하였다.

 (6) 巾
 ① 男子 巾
 고구려의 벽화에는 巾을 쓰고 있는 남자가 다수 보인다. 즉 軍樂隊 중 一部 북치는 사람과 말타고 악기를 든 사람, 步行人, 수렵인, 記錄人, 競技人, 侍從 등이 착용하였으며,  이나 折風 등에 비교해 보면 보다 낮은 계층에서 사용된 쓰개였음을 알 수 있다. 흑색 옷감으로 머리를 덮고 뒷통수에서 바짝 치켜맨 다음 그 끝을 내려뜨렸다.(도 7)

 ② 女子 巾 (머리수건)
 벽화에는 巾을 쓰고 있는 부인의 모습이 있는데, 3가지 형태가 있다. ① 무용총 부인이 쓴 머리수건(도 16)은 백색 헝겊을 넓게 편 채 이마와 두정을 덮어 뒤쪽에서 고정시킴으로서 정면에서 보면 頂部가 위로 조금 솟아 있는 형상이다. ② 삼실총 여인이 쓴 머리수건(도 32)은 정수리 부분이 4각형으로 평평하게 보이게 되었다. ③ 쌍영총 여인의 머리수건(도 6)은 帶狀으로 접어서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 위를 둘러 뒤에서 고정시킨 모습이다.
 巾은 신분이 높은 귀부인들에게서 사용된 예가 많으며 계급에 관계없이 맨머리였던 점을 미루어 보면, 남자의 頭飾이 오랫동안 의례와 신분 표시의 기능을 착실히 수행한 것과는 달리 上代의 여성 쓰개는 신분표시의 기능과는 무관했으나 의례의 기능은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7) 사각형관
 벽화에는 사각형관을 쓴 모습이 많은데 반드시  .袴 위에 썼다. 무용총의 주인과 기마인물이 썼고, 동암리 벽화(도 33-1)의 4人, 장천 2호분(도 15)과 삼실총(도 33-2), 무용총의 남자가 썼다.
 면류관(도 34-1)은 집안5호분5호묘의 선인이 썼다. 통구사신총의 선인은 류가 없는 면관을 썼다. 또한 톱날 모양의 관(도 34-2)은 집안5호분5호묘와 감신총에서 보인다.

 2) 머리모양 (髮樣)
 벽화를 보면 남자인물들은 대부분 冠帽를 착용하였으므로 남자의 상투와 쌍상투의 모습을 手搏하는 사람, 씨름꾼, 力士의 머리에서 알 수 있다. 여자들은 관모를 쓰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다양한 머리양식을 살필 수 있다. 고구려 여인의 발양은 집안지역 벽화에서 볼 수 있고 평양, 황해도 지역에서는 외래 양식의 발양이 많았다.
 ① 얹은머리(도 35-1)는 앞머리 위로 감아 돌리어 머리 위에 얹은 형태로 대개 자기 머리로 올리므로 별로 높지 않다. 이러한 얹은머리는 삼국 공통의 양식이며 조선왕조까지 계속된 머리형태이다.
 ② 쪽머리는 쪽을 뒷통수에 낮게 트는 양식이다.
 ③ 묶은머리는 고구려 벽화에 많이 보이는 머리로 고구려 여인의 독특한 양식이다. 머리를 뒤에서 하나로 모아 반으로 접어 올리고 접은 부분을 묶는데 위의 머리를 약간 남겨놓고 묶으면〈도 11, 35-2〉와 같이 남은 머리가 뒤로 약간 젖혀진다.
 ④ 늘인머리(푼기명머리)는 양볼에 두발의 일부를 늘어뜨린 모양(도 34-2)으로 이여성은《朝鮮服飾考》에서 푼기명머리라고 하였다. 본 연구자는 이해하기 쉬운 적당한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적당한 명칭을 찾을 수 없어 늘인 머리라고 했다. 연구할 과제이다.
 ⑤ 건귁(도 18)은 가발로 만든 장식품으로 건귁을 사용할 때는 모자처럼 머리 위에 얹는 것이다.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에 많다. 그동안 건귁을 머리수건이라고 하였으나 수정되어야할 사항으로 본다.
 ⑥ 털모자(도 32-2)는 안악2호묘 벽화에 여자 3인이 모자를 쓰고 있는데《고구려문화》에서는 털모자라고 하였다.

 

 3. 帶 (띠)

 

 帶는  나 袍에 둘러 여미는 역할을 하는 기능적인 것과 예의를 갖추기 위해 띠 위에 첨가하는 대가 있다. 문헌에는 가죽제품(주33 참조)이 대부분이고, 벽화에는 대부분 포백대(布帛帶)가 보이나 속대와  帶도 있다. 포백대는 전후좌우 자유자재로 매었으며 색은 黑, 白, 紅, 藍,  綠色 등이다. 포백대의 넓이는 좁은 것과 넓은 것(도 14, 15) 등 다양하다. 역사의 허리에 맨 대(도 36)는 옷감 폭 한폭을 그대로 사용한 것 같다.
 속대는 덕흥리 고분의 사냥인(도 37)이 현대 가죽 belt와 같은 것을 띠고 있는데 임의로 속대라고 정의하였다. 帶는  板을 연결하고 중앙에서  具로 잠그며 밑에는 가죽이나 布帛을 댄 것이다. 또한 金, 銀, 金屬制 과판마다 腰佩를 매달 수 있게 되었다.《고구려문화》에서는 과대를 돈띠라고 하였다. 즉 돈띠란 천이나 가죽띠 위에 금, 은, 철, 등 금속제 장식물을 붙인 것이다. 돈띠의 모습은 미천왕무덤 서쪽 곁간 입구 바른쪽에 그린 「장하독」과 행렬도 중의 말탄 인물과 앞간의 戰吏라고 쓴 글자 아래에 줄지어선 인물 중 장폭기를 든 인물은 돈띠를 매었다. 돈띠는 방형의 띠돈으로 연결되었는데 대개 띠돈 밑에는 살구잎 모양의 장식물을 달았다.(도 38) 또한《조선미술사》에서는 같은 그림을 설명하면서 과대를 금띠라고 하였다.
〈도 38〉을 보면 左側人의 과대는 사각형의 과판을 연결하여 만들었고 살구잎형의 요패가 달려 있고 右側人은 요패가 없는 과대를 띠고 있다.

 

 4. 신

 

 벽화에 보이는 신은 형태상 靴와 履로 대별된다. 靴는 목이 높은 신으로 현대 장화와 유사하다. 화의 재료는 문헌에 黑, 黃, 赤色 가죽이다. 화의 형태는 앞부리가 뾰족하고, 목이 길어 종아리 정도이거나 무릎 밑까지 오는 것도 있다. 쌍영총 주인공 부부가 평상에 정좌한 앞에 부부의 화(도 39)가 놓여 있고, 매산리 사신총에도 주인과 세 부인이 모두 평상에 정좌한 앞에 부부의 화가 놓여 있다. 쌍영총의 수렵도 중 기마 인물(도 9)과 무용도 중에 포를 입은 여자 무용인(도 14)이 화를 신었다. 안악3호분의 행렬도 중 군사가 무릎길이의 화를 신었다.
 履(도 40)는 목이 없는 신으로 남자 고무신과 유사하며 3가지 양식이 보인다. 첫째, 가장 일반적인 리의 형태는 무용인(도 40-3)의 신이다. 둘째, 통구 삼실총 제2실 서벽 갑옷 입은 武人의 신은 운두가 얕은 리인데 신바닥에 못을 박은 스파이크식(도 40-1)으로된 신이다. 현대 golf화의 밑바닥에 징을 박은 모습과 유사하다. 셋째, 통구 제 17호 고분 연도 동벽의 守門神將의 履(도 40-2)는 둥근 앞부리가 위로 올라간 신(高頭履)이다.

 

 5. 장신구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인물이 착용한 귀고리는 안악3호분 주인 남자의 귓불에 찍힌 홍색 점으로 추측했고 쌍영총 여인(도 6)의 목선에 보이는 가는 선을 목걸이를 착용한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팔찌는 집안12호분 여인(도 41)이 착용하였는데 이 팔찌는 긴소매 속에 감추어졌을 것이나 손을 치켜들었기 때문에 팔찌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통구사신총 역사들 중 1人(도 42)이 귀고리를 했고, 2人이 팔찌(도 36)를 했다. 삼실총의 천장을 떠받들고 있는 역사들 4人이 팔찌를 하고 있는데 1人은 양쪽에 다 하였다. 3人은 右측에 팔찌를 하였는데 좌측 팔 부분이 보이지 않아 팔찌를 끼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반면,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류에는 귀고리와 팔찌 외에 지환과 머리식품(비녀)이 있다. 특히, 고구려 장신구류 출토품 중 그 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귀고리인데, 주로 金과 金銅製品으로 된 것이다. 팔찌는 룡강군 후산리 내동 제4호묘와 법동리 하구비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지환은 은가락지가 대부분이며 머리장식 비녀도 많다.

 

 6. 織物 및 染采

 

 高句麗의 染采는 그 문헌과 고분벽화를 통하여 볼 때 발전하였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직물 생산에 대해서는《魏書高句麗》,《北史高句麗》에 토지가 척박하여 양잠과 농사가 부족하나 그것으로서 자급자족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에서도 양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직물에 관한 문헌을 보면, 絹은《通典高句麗》, 羅는《通典高句麗》,《北史高句麗》 ,錦은《魏書高句麗》,《北史高句麗》,《南史高句麗》《通典高句》,  日은《翰苑高麗》, 白疊布는《翰苑高麗》, 布는《北史東夷傳》, 細布는《隋書》,《北史東夷傳》, 麻는《魏書高句麗傳》《三國史記高句麗本記》, 帛는《三國史記高句麗本記》, 綿은《三國史記高句麗本記》, 繡는《三國志魏志東夷傳》, 錦은《三國志魏志東夷傳》,《三國史記高句麗本記》, 靑錦은《三國史記高句麗本記》, 雲布錦은《翰苑高麗》, 五色錦은《翰苑高麗》등에 나타나 있다.
 고구려에 紫地 文錦, 五色錦, 雲布錦, 등을 짰다는《翰苑高麗》의 기록이 있고, 일본 천평대의 등대사 헌물장에 高麗錦이 있고, 일본 정창원에 高句麗錦이 소장되어 있다. 최원희는 안악 3호 무덤 벽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부인도 운포금을 연상시키는 저고리를 입었고, 그 우에 자지힐문금을 연상시키는 등거리를 덧입었다.고 하였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인물들 중 극히 신분이 낮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물색 옷을 입었으며 무늬 있는 옷을 입었다. 색은 원색과 간색을 사용하였으며 홍색계열에도 진홍빛(緋色), 자지빛(紫色), 붉은빛(赤色)의 구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양한 색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염색 및 날염 기술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무늬도 역시 다양하였는데 벽화에 보이는 문양과 색에 대한 조사를 1947년에 이여성이, 1963년에 최원희가, 1974년에 김원용이 한 것을〈표 2〉로 만들었다.
점무늬는 의복 전체에 있고 계급과 신분에 관계 없이 널리 사용하였으나 다른 무늬들은 주로 겉옷이나 저고리, 겉옷의   등에 사용하였다. 반면 여자의 치마는 대개 무늬가 없다.
벽화에 나타난 의복에 표현된 각종 문양은《조선민속자료집》(도 43)에서 전재하였다.

 [표 2] 고분벽화에 나타난 염채


Ⅳ. 三國時代  袴와 中國의 袴褶과 日本衣   

 

 현재 우리 나라 남자의 바지. 저고리는 우리 民族의 傳統服으로 전통성이 매우 깊은 세계에서 오래된 옷 중의 하나로, 우리 나라 남자들이 오랜 기간 계속 입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 민족인 東夷族은 중국 동북방에 BC 2000년대 이전에 이미 거주하여 黑陶文化를 주도했으며 중국의 殷王朝는 동이족의 한 분파였다. 戰國時代 이전에 동이족은 중국 민족과 해상 또는 육로로 교류하였다.

 

 1. 韓國 民族의 源流와 古代文化

 

 한국 고대문화의 성격과 중국의 殷을 세운 東夷族, 즉 한국 민족과 주변국과의 관계를 《한국 사회 풍속서 연구》에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고대 문화의 基盤은 첫째로 韓國 新石器時代의 古아시아系 櫛文土器人, 둘째로 古아시아文化系 東夷族, 셋째로 東夷系 濊貊族에 직결된 無文土器人의 生活 속에는 中國의 戰國時代를 基點으로 前期는 主로 北方系 文化要因과 後期는 中國系 文化要因이 각각 작용하였다. 또한 韓國 古代社會는 廣意의 Tungus族(原蒙古族)에 시원을 두고 新石器時代부터 수차에 걸친 波狀的 民族移動과 더불어 北方의 胡狄 騎馬族과 혼합 또는 파생하여 하나의 生活文化圈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複合性을 가진 韓國 古代文化의 始原的인 主役은 先秦 中國文獻에 나오는 東夷 또는 濊貊이다.
 韓民族은 原蒙古 내지 Tungus族과 同系로 간주되며 中國 학자 傳斯年은 夏는 西方系이며 彩陶文化의 主人이고, 殷은 東夷의 한 分派이며 黑陶文化의 主役이라 하였고, 中國의 考古學者 李濟는 山東半島가 中國 初期文化의 중심지요, 殷王朝의 發祥地인 동시에 殷族보다 先住했던 種族이 黑陶文化를 특징으로 한 東夷族이었다고 하였다. 夏王朝로 추정되고 있는 黑陶를 가진 龍山文化는 대략 BC 2000年代로 보고 그 이전 中國 東. 北方에는 이미 東夷族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臺灣의 학자 文崇一은 黃河流域의 諸部族이 결합하여 中國民族을 형성하기 이전 이미 山東半島 遼東 韓半島에는 貊人이 거주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濊貊은 小 (三皇五帝時代)와 同一族이며 후일 虞舜 및 殷族과 同系集團에서 濊貊이 出自한 것이라 하였다.
 결국 中國 北方에서 이미 BC2600年代인 新石器時代에 夷, 濊, 貊,  ,   등의 稱號를 사용하였고 이는 東夷族을 뜻하며 또한 東夷族은 夏, 殷, 周代인 古代 中國 北方에서 渤海灣 遼東灣을 중심으로 海上 또는 陸路로 東進 혹은 西進을 통하여 中國과 교류가 있었다.
 戰國時代인 周代 이전에 山東, 河北, 江蘇地方 一圓은 주로 東夷族이 분포되었고 陝西 山西 河南에는 漢族의 분포지역이었다.

 

 2. 중국의 袴褶

 

 중국의 전통복은 深衣制로 上衣와 下裳이 허리에서 연결된 원피스 형태인데 趙 武靈王이 胡服 袴褶을 채용한 것은 中國 衣服史上 획기적인 일이다.
 중국에서 胡服에 관한 最古의 기록은《史記》로, "趙의 武靈王 19년(BC 307)에 이르기를, '燕나라의 東에는 胡(東胡國)의 憂患이 있고 國防은 아직 未備하다. 世俗과 다른 것을 행하면 반드시 禍가 미치는 법이지만, 胡服을 채용해서 騎射를 백성에게 가르쳐 나라 힘을 길러야 하겠다'고 하여, 신하들에게 朝廷에서 胡服을 착용토록 하는 令을 내려 施行하였다". 여기서의 東胡란 북방 유목민족의 총칭이라는 설, 흉노라는 설, 貊과 穢貊(조선)이라는 설이 있다. 중국에서 夷와 胡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구별되어 사용하였으나 엄밀히 구별할 수 없게 혼용하였는데, 이유 중의 하나는 북방 유목민족의 갈래와 세력의 부침이 심했고 복잡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魏晉南北朝史에 의하면 일찍이 중국에서 戰國時代 匈奴之屬 등이 있었고, 殷代에 苦方, 土方, 周代에 諸戎, 春秋時代에 山戎, 白狄, 赤狄이라 하여 有名한 胡服騎射를 愛用했던 趙 武靈王은 비록 「胡」라 칭하였으나 「戎」이라 하지 않았다는 등 胡, 戎, 狄을 同系 同一視한 中國 측의 北方 遊牧 騎馬民族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해 왔다"고 하였다.
 그러면 《史記》의 胡와 胡服은 어떻게 해석될까?
 첫째, 東胡가 匈奴라면, 武靈王이 匈奴를 막기 위해 胡服을 채용할 때 적군인 흉노복을 채용했을 리는 없고 東夷族의 옷, 즉 韓國의  .袴(도 1)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 나라의  . 袴와 중국의 袴. 褶에서 보편성을 찾을 수 있는데, 특수성은 여밈이 깊고 길이를 길게 한 것이다. 또한 東夷族은 한반도로 이동하기 전 BC 2600년대(신석기시대)에 중국 북방에서 살았었고, 戰國時代인 周代 이전에는 山東 河北 江蘇地方 一圓에 살면서 중국과 교류하였으므로 (주45 참조) 東夷의 服飾을 채용할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둘째, 동호가 貊, 穢貊(조선)이라면, 한국 기본복인  . 袴를 채용하되  의 여밈은 깊게, 길이는 무릎까지 길게 하여 적군과 구별하였다.
 셋째, 동호가 북방 유목민족의 총칭이라면, 모든 민족이  . 袴를 착용한 것이 된다. 한 때 東夷와 東胡가 같은 생활문화권에 살면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므로 의복을 뚜렷하게 구별하기 힘들었다. 즉 곧은 깃 상의와 함께 둥근깃 상의도 혼용한 것 같다. 노인우라에서 출토된 흉노족의 袴는 같으나 上衣의 깃은 둥근 것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겠다.

 1) 袴褶의 형태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
 김문자는 "胡服이란 周邊國家의 服裝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趙 武靈王이 채택한 袴褶은 스키타이계이며, 우리 나라의 基本服과 같다"고 하였다.
 周錫保는 "趙 武靈王이 채택한 胡服은 山西候馬 出土品의 胡人陶范(도 44)과 같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胡人陶范의 出土時期는 東周末春秋 시대로 武靈王(BC 307) 때보다 빠르다. 左  와 袴를 입고 양손을 높이 들고 무릎을 꿇고 있어 胡人 포로라고 생각한다. 趙 武靈王이 改革한 袴褶은 窄袖, 短衣, 左 이며 袴를 착용한 것으로 당시의 東胡族의 袴褶의 형태와 유사하다.《史記》〈趙世家〉에서 唐代 張守節 正義에 이르길 趙 武靈王이 胡服騎射로 개혁하고 上衣 下裳의 제도를 폐지했다고 했다. 《急就篇》(漢代)에 의하면 褶은 겹쳐 입는 옷의 外衣로서 袍 같으나 短身에 廣袖이다. 또 좌임의 袍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李肖 은 "袴褶이라는 명칭은 漢末에 보이며, 趙 武靈王이 胡服(즉 袴褶服)으로 개혁한 이유는 全軍 上下 모두가 騎射를 연습하기 위함이었다. 호복은 窄袖, 短衣, 몸에 꼭 끼며 革靴 등의 복식은 작전과 활동에 매우 편했다. 호복의 영향은 대단히 커서 많은 지역의 민간 모두에게 퍼졌다. 《事物原會》에서 인용하기를, 《與服雜事》에 趙 武靈王 때 袴褶이 있었다. 武靈王의 복식 개혁은 공헌도가 상당히 크며, 중국의 복식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胡服은 (도 44)과 같다."고 하였다.
 杉本正年은 "出土品을 통해 보면 중국인과 북방민족과의 접촉은 殷代 이전부터였으며, 중국 변방에서는 이미 胡服이 수렵용. 노동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戰國時代(BC 4-5세기) 墓에서 출토된 人物俑 중에는 노예인 듯한 胡人들이 많은데 이것은 王侯들이 북방민족을 포로로 하여 노예로 쓰고 있었던 데에 기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 연구자는 袴褶의 형태는 우리 나라의 기본복(도 1)인  袴와 같고 東夷族인 우리 나라가 중국에 전했다고 본다. 이유는 우리의 기본복  袴와 중국 袴褶에서 보편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① 袴위에  를 입으며 ②  의 옷깃은 곧은 깃이며 ③  에는 帶를 매어 꼭 여민다.
 차이는  의 길이를 길게 하고 폭을 넓게하여 褶이라는 용어로, 겉옷으로 착용하였을 뿐이고 서민은 길이가 짧고 폭이 좁은 우리 기본복을 착용하였기 때문이다.

 1) 중국 袴褶의 변천
 趙武靈王이 袴褶을 戎服으로 채용했던 당시의 형태는〈도 44〉와 같이 길이는 한국의  보다 길어 엉덩이를 덮었고, 여밈도 깊었을 것이며, 옷깃은 곧은깃이다.
 秦代의 戎服은 小口袴 위에 엉덩이를 덮는 短褶 착용은 계속되며 무릎길이로 길어진 長褶을 小口袴 위에 착용한 것과 袍 위에 長褶(도 45)을 겹쳐 입는 것이 새로 생겼다. 부리에는 행전을 쳤다.
 漢代 戎服(도 46-1)은 秦代와 같이 小口袴를 착용한 후 袍 위에 短褶을 겹쳐 입은 입음새가 계속된 반면 기병과 서민의 小口袴 短褶(도 46-2) 착용으로 褶의 길이가 秦代보다 짧아졌다. 또한 小口袴 위에 深衣形 上衣를 착용했다. 바지에 대님은 모두 매지 않았다.
 晉代의 戎服은 小口袴 短褶 착용이 계속되면서 大口袴(도 47)의 착용과 廣袖褶의 착용이 많았다.
南北朝時代에는 大口袴와 廣袖褶(도 48), 小口袴와 廣袖褶, 大口袴와 短褶, 小口袴와 短褶(도 48)이 모두 착용되었으며 바지를 무릎 밑에서 묶은 것은 戎服用이고, 묶지 않은 것은 便服用이다. 새로 생긴 것은 廣袴 위에 착용한 短團領(도 50)이다.〈도 50〉의 옷깃을 여미면 단령이 된다.
 隋代에는 南北朝時代와 같은 廣袖褶大口袴는 문관과 무관복으로 계속되었고 袴褶(窄袖 小口袴)은 戎衣이었다.(무릎 밑에서 묶음)
 唐代 武官은 小口袴 廣袖褶(도 51)을 착용했고, 小口袴 短褶은 속옷으로 들어가고 小口袴 短褶 위에 半臂와 團領을 착용하게 되었다.

 3) 한국의  袴와 중국의 袴褶 비교
 한국  는 보편적으로 여밈이 깊지 않은 엉덩이 길이의 窄袖 인 기본  가 4∼6C에 착용되었고, 6C에는 엉덩이를 덮는 정도의 長 를, 7C에는 廣袖를 착용하였다. 廣袖에는 소매 전체가 넓은 소매와 수구 쪽만 넓은 소매가 있었다.
 중국  는 보편적으로 여밈이 깊어 가슴 전체를 덮었고, 엉덩이를 덮는 短 .窄袖 이다. 廣袖를 5C에 입었고, 大口袴가 晉代(4C)에 생겼으며, 수구 쪽만 넓은 소매는 7C까지 보편적으로 입었다.
특수성은 短團領이 5∼6C에 생긴 것이다.
한국 袴는 부리에 대님을 매며, 대님을 매지 않는 袴는 細袴이다. 넓은 선을 댄 廣袴는 대님을 매지 않는다. 광고의 넓이는 중국보다 좁다.
 중국 袴는 大口袴, 小口袴의 무릎 밑에서 대님을 묶으며, 戎事에 묶는다. 무릎 밑에서 묶지 않을 경우는 便服이다. 大口袴의 넓이는 치마같이 넓으며 한국 廣袴보다 넓다.

 

 3. 日本의 衣 

 

 日本에서는 古代에 持續的으로 移住한 韓民族 大集團을 渡來人이라 하며, 그들은 日本 각지에 정착하여 그 지역의 개발과 생산에 진력하여 日本 古代文化 藝術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日本의 基層文化의 形成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日本人은 흔히 韓國人의 日本으로의 渡來를 4段階로 나눈다. 제 1단계는 紀元前 200年 이래로 彌生文化 成立에 決定的 影響을 미친다. 제 2단계는 5世紀 前後에 세습왕권에 대한 정치적 신분질서라든가 氏, 姓 등의 부족사회 형성기에 도래자가 격증한다. 제 3단계는 5世紀後半부터 6世紀初에 걸쳐 韓國의 南部로부터 新技術을 가진 集團이 移住하였고, 특히 新羅, 高句麗의 압박을 받은 百濟人의 多數가 移住하였다. 이들은 大和정부의 기구를 강화하는 밑거름 역할을 담당하면서 古墳時代 後期의 민중생활에 크게 작용하며 佛敎도 전래된다. 제 4단계는 7世紀 後半으로 韓國南部에서 大量으로 移住하였다. 이때 2-3千名씩 건너간 身分이 그리 낮지 않은 百濟流民들은 中央에 居住하고 高句麗, 新羅人들은 地方에 居住하였다. 일본의 衣 은 도래인이 입고 간  袴라고 생각한다.

 1) 古墳時代(3C∼7C)의 衣 
 古墳時代의 服飾 자료는 出土品, 壁畵 및 하니와(埴輪, はにわ)가 있다. 
出土品은 裝身具에 관한 것이 主이며 壁畵는 數도 적고 자세하지 않으므로 하니와는 현재 古墳時代 衣服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의 考古學的 資料로서 인정되고 있다.
 하니와에 관한 文獻은 논문, 보고서, 기록, 단행본 등 450여 편으로 이후 계속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니와 服飾을 요약하고, 小堀榮壽의 하니와의 樣式分類圖와 江馬務의 風俗史圖錄중   에 관한 것만 우리나라  .袴와 비교 분석한다.
 하니와 중에 正裝이라고 생각되는 정비된 복장을 보면 男女 모두 筒袖의 어느정도 긴 上衣에 男子는  , 女子는 裳을 입고 있다. 즉 투피스 형식이다. 上衣의 襟은 盤領(도 52)과 垂領(도 53)의 두 형식이 있는데 盤領 左 이 많다. 옷깃과 허리 부근 2개소에 끈〔紐〕으로 매었는데 1개나 3개를 사용한 것도 있다. 男子는 모두 衣위에 帶를 띠고 小刀 등을 매달았다. 帶는 좁거나 넓은 布帛帶이다.
 넓은 바지는 걷기 쉽게 무릎아래를 묶었으며(足結) 鈴을 달고 있는 것도 있다.〈足結의 鈴〉은《万葉集》에도 노래되고 있으므로 그 풍습은 오래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농부는 長 만을 입고 있다..
 人物 하니와와 한국  袴와 비교하면
 ① 공통점은
 衣의 형태(前開窄袖左 短衣)와  의 형태(廣袴, 넓은 단을 댄 廣袴) 및 행전을 친 것  은 같다.
 ② 차이점은
 가. 둥근 깃을 많이 착용하고 있다. 하니와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둥근 형 옷깃에 대하여 杉本正年는 중국으로부터 胡服인 盤領袴褶(도 50)이 들어왔다"고 하였고 藤木悅子는 "지배계급은 胡服系의 盤領樣式을, 民衆은 남방계의 方領樣式을 착용하였는데 속옷으로는 지배계급도 方領을 입었다"고 하였으며, 小川는 "胡服이란 胡人 衣服의 총칭으로 朝鮮반도 를 통해 들어 왔으며 형태는 5C 경의 中國 北魏의 石刻畵에 나타나는 盤領袴褶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中國에서는 趙 武靈王이 垂領袴褶을 채택한 이후로 5世紀까지(도 44∼49, 51 참조) 계속 垂領袴褶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盤領袴褶이 들어왔을 때도 함께 착용했었다.
 衣 時代는 中國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던 때로 日本에서 遣隋使가 607년 처음 파견된 이후 3차례 보냈고, 遣唐使는 630∼894년 까지 18회 파견되었다. 그러므로 하니와의 둥근 깃 상의는 韓國에서 건너간 三國時代 옷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니와의 둥근 깃에 대해서 다음 두가지 가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우리나라 사람들이 基本服 속에 입었던 內衣가 日本에서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表衣化한 것이다. 三國時代 壁畵를 보면  의 안에는 반드시 內衣를 겹쳐 입었는데 곧은 깃 (도 18)과 둥근 깃(도 6) 두 가지가 보인다. 이 때의 內衣의 개념은 현대의 속옷이라는 개념이 아니고 저고리를 2개 혹은 3개 겹쳐 입은 것이다. 日本에 건너간 집단 중에서, 노동층은 처음에 입고 갔던 우리나라 基本服을 계속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처음에는 基本服을 입었으나 차차 하류계급과는 다르게 입어야할 필요성을 느껴 둥근 형이 겉으로 나왔고 여기에 장식성이 첨가되었다고 생각해 본다. 둘째, 둥근 깃의 옷은 伽倻人의 옷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伽倻에 관한 의복자료가 별로 없으므로 앞으로 연구할 과제이다. 
 나. 옷을 여밀 때 작은 끈으로 매어 여몄는데 끈을 사용한 것은 多濕한 기후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  의 무릎밑을 끈으로 묶거나(도 53) 행전을 쳤다.(도 56)
 라. 농부들은 長  하나만 입었다. 농부가 長 만을 입은 것은 多濕한 氣候와 관계가 크다고 생각한다. 江戶時代에도 노동자나 천민층은 長 만을 착용한 경우가 많았다.

 

 2. 飛鳥時代의 衣 

 

 飛鳥時代의 官人과 貴族의 服裝은 天壽國 曼茶羅 繡帳으로 알 수 있는데 2부식의 복장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다. 이것은 성덕태자의 죽음(622)을 애도하여 妃인 橘大郎女의 發願으로 만든 極樂淨土의 광경으로, 밑그림은 東漢末賢 漢奴加己利와 함께 高句麗 화공 加西溢이 그렸다고 하며 采女에게 자수를 놓게 한 것으로 원래 사방 3m 크기의 繡帳이었으나 지금은 단편만이 남아 있다.
 男子(도 55)는 길이가 조금 긴 盤領 上衣에 帶를 매었고, 그 아래에 주름이 있는 히라미(습, ひらみ)가 보이며 넓은 단을 댄 袴(도 54)를 입고 있다. 이 褶을 高橋健自는 男子用 裳이라고 했다.《古史記》에는 "伊耶那岐〔男神〕가 부정하고 더러운 나라를 다녀왔으므로 몸을 깨끗이 씻고 부정을 없애기 위해 帶 裳 衣   冠을 벗어버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隋書》〈倭國傳〉는 "男女 모두 裙  를 입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男子들이 裳을 입었던 때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며〈도 54〉는 男子의 裳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資料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褶은 裳이 짧아진 것이 아니고 中國의 禮服用具의 하나로 褶과 下裳이 함께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唐의 文官(도 57)이 褶과 下裳을 함께 착용하고 있으며 또한 褶만을 착용한 文官과 武官, 춤추는 俑 2人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 褶은 袴와 함께 착용하는 上衣이다. 唐의 文官(도 57) 上衣 밑에 보이는 주름을 중국에서 부르는 명칭은 잘 모르겠으나 일본에서는 褶이라고 한다. 
天壽國繡帳과 하니와를 비교하면
 공통점은 유의 둥근깃과 異色 이 옷깃 수구 옷섶 밑단에 둘러져 있는 점과 바지 부리에 異色 〔紅色〕이 있는 점이다. 특수성은 褶을  밑에 입고 있는 점이다. 高句麗 古墳壁畵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章懷太子墓의 高句麗계 사신이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보아 禮服用이라고 생각한다.

 

Ⅴ. 결 론

 

 ①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의복은  .袴.裳.袍 등의 기본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② 그러나 주변국과의 정치.경제.외교.전쟁 등의 끊임없는 접촉으로 인한 문화교류가 이     루어져 일찍부터 기본복에 외국 요소가 가미되었으며 상류층에서는 외국의 옷도 입게     되었다. 외국옷의 영향으로 기본복이 넓어진 것, 길어진 것,  이 없어진 것, 袴의 부     리에 선이 첨가된 것, 帶를 매지 않은  가 착용되었다. 외국 의복으로는 袂가 있는      袍, 上衣下裳이 연결된 袍, 반비, 위쪽에만 주름 있는 치마, 예복용 下裳 등이 있었       다.   위에 裳을 입는 착용법도 있었다.
 ③ 여성의 입음새는 A-line으로 속옷을 많이 입어 치마를 부풀렸다. 추위를 위한 속옷      착용이 아니고, 美를 위한 속옷이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입음새     이다.
 ④ 袴의 부리를 오므리는 방법은 대님 매는 법, 행전을 치는 법, 끈을 끼워 바지 안측에     서 고정시키는 법 등 다양하다.
 ⑤ 한국의 기본복인  .袴는 중국의 조무령왕이 고습으로 채용하였다고 생각하며 일본에     는 도래인이 입고 들어간 옷이라고 본다. 또한 유고는 4C∼7C의 한국, 중국, 일본에     서 입었는데 각 나라마다의 기후, 풍토, 정치, 경제 가치관에 따라 특수성이 나타났다.
한국의 특수성은 ① 6C에는 엉덩이를 덮는 정도의 長 를, 7C에는 廣袖를 착용하였다.  廣袖에는 소매 전체가 넓은 소매와 수구 쪽만 넓은 소매가 있었다. ② 넓은 선을 댄 廣袴는 대님을 매지 않으며 광고의 넓이는 중국보다  좁다. 중국의 특수성은 ①  는 여밈이 깊어 가슴 전체를 덮었고, 엉덩이를 덮는 短 .窄袖이다. 廣袖를 5C에 입었고, 大口袴가 晉代(4C)에 생겼으며, 수구 쪽만  넓은 소매는 7C까지 보편적으로 입었다. ② 袴는 大口袴, 小口袴의 무릎 밑에서 대님을 묶으며, 戎事에 묶는다. 무릎 밑에서 묶지 않을 경우는 便服이다. 大口袴의 넓이는 치마같이 넓으며 한국 廣袴보다 넓다.  ③ 短團領이 5∼6C에 생겼으며 袴褶과 공존하였다. 일본의 특수성은 ① 는 둥근 옷깃를 곧은 깃보다 많이 착용하였으며 유에는 작은 끈을 달아 여몄다. 농부는 장유만을 입었다. 長袖廣袴는 상류층이 착용하였다. ② 袴의 대님을 무릎에 매었다. ③ 예복용구인 褶을   밑에 착용하였다.

'복식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鞋문화발전사 (중국)  (0) 2009.10.27
중국고대복식사  (0) 2009.10.21
중국의 복식  (0) 2009.10.06
중국고대군융복식中国古代的军戎服饰  (0) 2009.06.17
중국복식변천사 5 (명대 2)  (0) 2009.06.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