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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문화

중국의 복식

by 8866 2009. 10. 6.

 

중국의 복식(服飾)

 

중국은 예로부터 예악의 나라요, 의관의 나라로서, 한(韓) 이래로 역대의 복식제도가 모두 역대사서나 문헌 가운데서 발견되고 있다. 복식은 입는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일종의 전례나 의식의 상징이기도 하다. 역대 복식의 제도와 색체 등의 제반 변화는 당시 사회의 생활상태, 정치, 경제, 학술 및 사상 등의 요소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시대별 중국 복식의 변천

 

1. 석기시대~ 은(殷)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인 상, 주 때에 마련되었다. 의복의 기본형은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이때의 복식은 중국후세복식의 자연적인 영향을 주었다.

은대의 복장문화는 견직물과 모직물 중심의 꽤 높은 수준이었으며, 마직물, 갈 등의 수피(樹皮, 나무껍질)로 섬유직물을 만들어 평직이나 사문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벌써 견직물, 모직물, 마직물이 생산되었고 의복 재료를 다양하게 이용할 줄도 알았으며 의상도 신분에 따라 갖추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은대에 복식의 형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복식의 형태는 상의하상 이외 바지 등의 기본 형태에서 다양하게 디자인 되었다. 소매형태나 문양 등이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의복 색에 있어서는 흰색을 숭상했으나, 녹색, 홍색 등도 사용하였다. 

 

2. 주(周), 춘추전국(春秋戰國)

중국 복식의 기본형이 확립된 시기. 은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주대에는 의례에 필요한 관복제도가 완비되었고, 이 시기에 완비된 관복제도는 이후 중국 관복제도의 기본적인 토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통일제국의 성립으로 인하여 황제의 복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동주 이후, 자유로운 창조적 예술정신이 싹터, 북방민족의 가볍고도 몸에 맞는 기마복식이 중원에 전래되었으며, 이는 한족과 호족의 복식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융합으로 기록된다. 위 진 시대에 현학이 유행되면서 자연의 본성을 추구하는 심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는 나라에 따라 각각의 습속이 달랐으나 공통적으로 성행했던 복식으로는 심의와 호복, 포가 있다.

"주례"에 근거하여 주나라의 관복제도를 보면 주대의 제왕과 백관은 모두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은 면류관과 곤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의식의 내용에 따라 복식도 구별되었다. 허리띠 아래에는 폐슬 이외에 면복을 입을 때는 적석(붉은 신)을 착용하였다.

 

3. 진(秦), 한(漢)

진나라는 주대의 제도를 답습했으며 서안 근방의 시황제묘에서 출토된 토용은 대부분 군복이다. 전한 창업의 초에는 일부 진대(秦代)의 제도를 그대로 습용했으며 사치가 심했다.

한의 수도 장안은 36년간 정치적, 경제적 및 문화의 중심도시로 전한, 후한 400년을 통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여러 민족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사회 풍속의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복식에 대한 욕구가 점차적으로 높아졌으며 옷차림이 갈수록 화려해 졌다.

후한의 영평 2년 (A.D. 59)- 최초로 복식제도를 공식으로 법제화. 주대의 관복제도를 바탕으로 황제 이하 문무백관 및 황태후, 황후 이하의 궁정부인의 관복이 확립되었다.

서민들의 복장은 일반적으로 간단했다.

 

남자 복식

의복- 포, 곤의

두식- 관, 건, 책

신발양식- 이

  

여자복식

부의대소(헐렁한 상하의), 부의박대(헐렁한 상의에 넓은 대)

저고리의 길이는 허리 아래 혹은 무릎 아래까지였다.

 

4.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이시기는 정치적으로 분란의 시기였으나 사회, 사상,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여러 민족이 섞이게 되고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따라서 복식도 다양하게 변화하였고 점차적으로 교류되는 시기였다. 즉 광대한 한족 착수단의(窄袖短衣)에 잔 걸음걸이, 요대 및 목이 긴 가죽 신발 등의 호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어 한족과 호족의 복식에 있었던 두 번째의 대융합이라 할 수 있다.

남자복식의 대표적인 옷은 삼(衫)이다. 삼은 홑, 겹 두 종류이다. 상류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넓은 형의 삼(衫)과 대수(大袖)를 좋아했다. 이 시기는 큰 소매와 나막신이 유행하였다. 여자복식은 대부분 한나라 시대의 것을 이어받았는데 심의가 유행하였고 신발과 머리장식은 더욱 화려해졌다. 불교의 성행으로 불교문양 복식이 가미되었고 주변국의 장식풍이 받아들여졌다. 머리에 매는 복건은 한대에 시작한 것으로 위 진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다.

일반 여자는 머리에 가발을 사용하여 머리를 높이 세워 장식했다. 불교의 영향으로 많은 부녀자가 머리를 정수리 중앙에 높이 올려 만드는 형식을 하여 이를 비천(飛天)이라 하였다.

 

5. 수(隋) 당(唐)

수, 당시대는 문학, 예술, 의학, 과학기술의 여러 분야에서 전성기를 이루어 복식은 더욱 개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주대에는 방직기술과 염색기술이 발달하였다. 수대의 복식은 대부분 한의 제도를 따랐고 당나라 복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호복제도는 잘못된 것이라 하여 개정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견직물과 모직물이 전파되었고 연화문, 당초문 등의 문양이 전래되어 서역풍이면서 정교하고 화려한 당의 복식을 만들었다. 외국과의 내왕이 빈번해지자, 당의 복식은 마침내 중외의 한복과 호복을 함께 받아들여 더욱 참신하고 아름다워졌을 뿐만 아니라 대담해지고 국제화되었다.

남자- 복식, 원령포삼(단령포삼)/ 두식- 복두, 건자/신- 오피와. 복두와 단령의 착용시에는 오피육합화.

여자복식- 유군복, 반비, 피백, 남장, 호복, 삼.

 

6. 오대(五代), 송(宋)

송인은 복식에서 하늘이나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 의식 때 입는 예복은 화려한 기품을 추구하는 한편, 일상복은 간단하고 소박하였다. 일반적으로 송의 복식제도는 검소함을 숭상했기 때문에 보수적이며 색채도 수수하고 자연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왕은 대례복으로 원령난삼을 착용했다. 난삼은 당나라 때부터 입혀지다가 송나라 때에 가장 유행한 것으로 상급관리부터 하급관리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착용하였다. 사대부가 일상복으로 모삼을 입었고 복두는 송나라 사람이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백관의 공복은 색에 따라 계급이 달랐고1) 허리에는 어부2)를 한다. 복건은 서민은 많이 쓰지 않았으나 일반 문인, 유생들이 썼다. 송대의 황후는 적의, 대, 수, 환패, 구룡화채관을 착용하였다. 송대의 부녀복식은 일반적으로 유, 오, 삼, 배자, 반비, 배심, 피백, 군을 입었다. 개두건은 검정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여자의 나들이용 얼굴가리개로 사용하였고 화관과 패식은 남녀 모두 각자의 신분에 맞게 사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제도와 같았다.

 

7. 요(遼), 금(金), 원(元)

한족(漢族)과 경제 문화 방면에서 서로 교류한 것이 의관 복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요의 태조 초기에는 의관제도가 없었으며 조복으로 갑주를 입었다. 중원으로 입성한 이후 한족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곧바로 의관을 중국풍으로 고쳐 북반(거란인)은 국제, 남반(한인)은 한제(漢製)로 하도록 하였다.

거란족의 복식의 특징은 곤발(髮)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빛나게 모두 깎아 머리 양쪽 혹은 이마 부분에만 머리를 약간 남겨둔다. 어떤 것은 이마 위에 머리를 모아 짧게 자르고 어떤 것은 귀 옆에 머리카락을 흘러내리게 한다. 또 좌우 40가닥의 두발을 가위로 정리하여 특수한 형태로 만들어 어깨 위에 드리운다.

금대 복식은 기본이 여진의 복식이다. 복식제도는 거란 복식과 비슷하나 흰색을 좋아했다. 송의 북부의 땅을 얻은 후에 송 제를 참작하여 관복제도를 제정했다. 금대 남녀복식으로 남자는 깃은 원령이며 착수로 된 포를 입었다. 여자는 장군(長裙:긴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좌임 착수포를 입었다.

원나라는 몽고족의 나라로 몽고족의 복식은 자기부족 고유의 복식 위에 고구려, 요, 금의 복식제도를 답습하였다. 의복재료로는 피혁이나 털가죽을 사용했다. 원대의 두발형태는 남자는 모두 머리 양쪽 가장자리를 깎아 내렸다. 머리의 뒤쪽도 똑같이 두상까지 깎아 내렸다. 전면에는 한 다발의 털만 남겼으며 남은 한 다발의 털은 눈썹 있는 곳까지 드리우고 좌우양쪽에 있는 머리털을 땋아서 귀 있는 곳에서 변발했다.

 

8. 명(明)

주원장이 1368년에 명을 건립하여 한족이 실권을 잡자 원대에 행해졌던 언어풍습복식 등을 모두 금하고 순수한 한족의 문화를 정착시켜 한(漢), 당(唐), 송(宋)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따라서 명대에는 중화사상이 절정에 달해있었고 전통적인 한족 문화와 복식이 소생하였다.

명대복식은 당(唐), 송(宋)대에 이미 수립되었던 복식제도가 원(元)대에 문란해졌기에 건국후 한족의 의례를 회복해 관복제도를 재정비했다.

제도개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 복식도 구체적으로 제한되었는데 이때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식이나 복식도안, 색 등에서 엄격한 제한과 구별이 있었다. 명대에는 황제가 현의된 면복을 별로 착용하지 않았으며, 상복에 12장문을 베풀어 곤복으로 입었다. 관리의 조복 규정을 대단히 엄격하였다. 명대의 관리상복으로는 반령포(半嶺袍)를 입었으며 반령포에는 가슴 앞과 등 뒤에 보자를 달았는데 보자문양으로서 신분의 등급을 구분하였고 동물을 표지로 삼았다. 보자와 관복의 문양도 등급간에 차이를 두었는데 이 규정은 정하는 때에 따라 바뀌어지기도 하였으나 아주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

 

편복(便服)은 각 신분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종류는 포(袍), 단의(短衣), 군(裙) 등을 입었다. 사인 등 선비는 사령대금관수삼을 입었는데 이것은 우임으로 된 큰 깃이 사선으로 여며지고 소매가 넓은 포의 형태이다.

 

여자복식 관복

황후, 왕비, 명부 - 홍색의 대수삼, 심청색의 배자, 채색의 수를 놓은 피자, 주옥금봉관, 금수화문리.

평민 여자의 의복 - 편복, 배자, 비갑, 수전의

 

9. 청(靑)

만주족의 청이 중원에 들어온 초기에는 민심을 모으기 위하여 명의 복식제도인 한인의 의관을 계승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한족과 만족의 신하들이 두열로 열립하였다. 순치 2년에 만청의 제업이 날로 공고해지자 두발을 깎게 하고 복식을 바꾸려는 정책을 강행하였으나, 한인의 완강한 저항으로 점차 물러서게 되었다. 이어 명대 말엽의 유신이던 김지준이 건의한 "십부종"이 받아들여지면서 한인들은 부분적이나마 전통 복식과 의례, 풍속들을 계속 보존할 수 있었다.

청대는 만주족이 설립한 왕조로 건립초기에는 한족 진압정책을 강경하게 실시하였다. 따라서 의복이나 두식 또한 한족의 양식을 금지하였으며 만주족의 양식대로 머리를 깎게 하고 복식을 바꾸도록 하였다. 이 시기는 한복과 만주족이 혼거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형태와 양식이 생겨났으며 서양문물의 도입으로 인하여 의생활 또는 서양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남자복식- 황제의 조복 : 용포 / 일반 관원들 : 화의

일반 남자복식- 포, 마괘, 오, 마갑, 삼, 고.

 

여자복식- 황후 조복 : 조관, 조포, 조군, 조괘 .

일반 여자복식- 하피, 봉관하피, 고자, 운견, 치파오.젨젨

 

10. 20세기(복식의 혁명)

수천 년에 걸친 봉건왕조의 복식제도가 격심한 변화를 겪는시기.

남성

의복- 장포(長袍)마괘(馬)중산복(中山服)양복(洋服)

신- 포혜(布鞋), 면화(棉靴), 가죽구두.

기타- 예모(禮帽)

젊은 학생들은 주로 목깃이 세워져 있고 가슴에 주머니가 있는 일본 제복과 비슷한 복장을 했다. 중산복은 이 학생복을 기초로 개혁한 것으로 손(孫中山)선생이 솔선하여 착용했으므로 그 이름을 얻게 된 것.

 

저고리- 5권 분립을 상징하는 5개의 단추, 4유(維)를 상징하는 4개 주머니

소맷부리- 삼민주의를 상징하는 3개의 단추

차양이 있는 운형의 모자를 썼다.

이처럼 이 시기의 복식은 정치사회적인 환경만큼이나 변화가 심했으나 노인, 농민이나 외진 지역에서는 여전히 변발을 하고 전통 복식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군경복

영국식, 미국식 등 여러 형식이 복합된 형태. 가슴에 다는 패장이나 모자, 군복의 색깔 등은 계급에 따라, 전투시나 평상시의 상황에 따라 달랐다.

 

여성들

저고리와 치마.

굽이 높은 구두, 스타킹, 짧은 파마머리, 팔찌나 시계 등, 중국과 서양이 결합한 신선한 멋을 창조.

또한 비녀, 팔찌 등 이전의 번거로운 장신구와 번잡한 도안을 탈피, 간편함을 추구해 1920년대 이후의 복식은 그 이전과 구별되었고 이를 문명신장이라 하였다.

 

1949년 이후

변형된 중산복과 인민해방군의 복장이 유행.

문화대혁명(1966 - 1976) 기간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화려한 옷을 배격, 평등과 투쟁의 이념 하에 해방군복을 입는 풍조가 지배적.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종식과 더불어 점차 쇠퇴.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개방 시작, 양복과 양장이 크게 유행하게 되자 중산복과 인민해방군 복장은 구세대를 상징하는 전유물로 남게 되었다.

 

현재

남성- 와이셔츠에 넥타이, 양복정장

여성- 스커트나 바이 정장, 나풀거리는 원피스, 짧은 미니스커트,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 등 다양.

한동안은 스타킹을 반쯤 걸쳐서 신는 등 어울리지 않는 모습도 눈에 띄었지만 이제 중국의 복식문화는 완전히 현대화•서양화되었다.

 

※중국 소수민족 복식

 

중국의 지폐를 보면 간혹 색다른 모습의 남녀가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 내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모습으로 그들의 전통복식은 한족과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모두 민족의 전통, 기후, 지리적 환경, 생활습관에 따라 각양각색의 특징을 보여주며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중국은 56개의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로서 변방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각 소수민족은 그 고유의 다양한 복식문화를 보유하고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므로 이 역시 중국 복식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1. 춘추전국시기의 호복기사(胡服騎射)

중국은 예로부터 다민족 국가이므로 다원성이 중국문화의 특징이며 복식문화 또한 예외는 아니다.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 소수민족이 끊임없이 중원지역을 침범하여 중원지역과 소수민족간의 정치경제문화교류를 촉진시켰는데, 이 중에는 복식문화의 교류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문헌들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국민족의 복식습관은 매우 이른 시기에 소수민족 복식습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소수민족의 복식 또한 한족복식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설명한다.

 

2. 소수민족 복식의 지역별 특징

중국 56개 소수민족의 복식은 일종의 문화부호이기도 하여 우리들은 그것을 통해서 각각의 민족을 식별해 낼 수 있다.

현재 민족복식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중국 소수민족의 복식을 각 민족의 주거환경생산방식생활방식민족의 심미안 등의 차이에 따라서 북방민족복식남방민족복식과 산지민족복식 등으로 나누어서 소개하여 보기로 한다.

 

1) 북방 민족의 복식

중국 북방에 거주하는 종족-몽고족(蒙古族)어른첸족어원커족허저족까자흐족따지크족끼르키스족장족 등.  그들은 넓은 토지에 거주하면서, 물과 풀을 찾아 삼림과 초원에서 유목하는 목축수렵생활을 해오고 있다. 몽골족의 복식문화는 유목생활의 필요에 적응하는 몽골족 복식의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생산방식에 의거하여 복식은 가죽옷을 위주로 입으며, 유목생활의 필요에 적응하기 위해 몽골족 남녀는 모두 장포 입기를 즐겨하고 긴 비단으로 요대를 삼아 허리를 묶는다. 노루와 사슴이 많아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데 그 고기를 주식으로 하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며 모자는 여우담비의 모피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2) 남방 민족의 복식

남방지역의 무더운 기후와 넘치는 강우량 등 지리환경의 원인에 따라 이러한 지역의 민족은 대부분 농업생산에 종사하는데 북방 유목민족이 생활하는 자연환경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어 완전히 다른 복식현상을 엿볼 수 있다.

남방 농경민족은 의류와 일상용품의 원료를 스스로 생산하고 수직기를 사용하여 직조해 왔다. 남방민족 중 짱족묘족뚱족타이족 등은 모두 스스로 방적하고 직조나염이라는 특수한 공정기술을 터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녀자들은 통 모양인 통군과 주름치마인 습군을 입는 것을 그 특색으로 한다. 습군은 귀주성 일대 소수민족 부녀의 복장으로 그 중에 묘족의 주름치마가 가장 특색있다. 이 치마의 주름은 매우 섬세하게 잔주름이 잡혀 있어 백습(百褶)이라고 부르며, 실제로 주름이 500개 이상에 달하는 치마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복식은 모두 농경민족의 특징을 나타내주는데, 안정된 정착생활환경 속에서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민족복식이 서로 비슷하며 닮아가는 현상은 농업경장 환경 아래에서 각 민족이 서로 어울려 생활하고 있음으로 상호 교류와 영향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산간 민족의 복식

산간 민족으로는 이족나시족프미족 등을 들 수 있다. 지리적 위치와 기후는 추운 산지여서 북방민족이 거주하는 자연환경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민족의 생산방식은 원래의 유목생활에서 반농반목생활로 전환되었다.

이 지역의 복식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것은 남자와 부녀의 "피전(披氈, 망토형식)"이다. 가령 이족 남자의 "찰이와(察爾瓦)"는 흑색의 양모로 제조한 피전이다. 이것은 도련에 술 장식이 달려있고, 어떤 것은 정교하게 주름을 잡아 만들기도 하는데 야간에는 침구가 되기도 한다.

중국 소수민족의 복식문화는 하나의 방대하고도 복잡한 문화지식 계통이다. 중국 각 민족의 복식은 천차만별천태만상임에도 불구하고 각 민족이 장기간의 역사발전 과정 중에서 비교적 인근 민족간에는 복식문화의 상호교류가 있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3. 북방복식과 남방복식의 비교

중국 소수민족의 복장을 남방과 북방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비교분석해 보면 그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실상을 몇 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북장(北長)남단(南短)

이 개념은 남방에서는 단장(短裝)으로 상의와 하의를 입고 있는데 반하여 북방에서는 주로 장의(長衣)인 장포(長袍)를 착용한다는 것이다.

 

2) 북변(北)남계(南)

북방민족은 고대로부터 변발 혹은 변자라 하여 두발을 길러 여기에 색포나 색사를 넣어 땋아 뒤로 늘어뜨리고 다녔다. 남방민족은 보편적으로 두발을 틀어 올려 반계(盤)한다. 즉 두발을 길게 길러 두정으로 끌어 올려 계()를 만드는데, 민족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다.

 

3) 북모(北帽)남파(南)

중국 소수민족의 쓰개를 보면 일반적으로 북방지역에서는 모자를 쓰고, 남방지방에서는 두건을 두른다. 이러한 쓰개가 발달한 이유는 북방에서는 방한이 특히 중요하고 남방에서는 차양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4) 북화(北靴)남혜(南鞋)

신발은 일반적으로 방한이나 보호를 위한 실용적 가치와 장식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다. 북방민족은 생활환경에서 화 즉 목이 긴 신발을 발달시켰고, 남방민족은 혜 즉 단화를 신어왔다.

 

5) 북 원색(原色)남 흑색(黑色)

북방의 겨울은 매우 춥고 길며 여름은 짧은 무미건조한 자연환경 속에서 북방인들은 대비가 강렬한 색채를 선호하였으므로 황녹홍색의 원색이 복식에 주로 선택되었다. 이에 반하여 남방인은 아열대의 온난한 기후 속에서 언제나 황색의 토지와 녹색의 전답에 둘러싸여 있어, 오히려 복색에 있어 청남흑색 등의 수수한 색깔을 선호한다.

 

6) 북피(北皮)남방(南紡)

북방은 삼림 속에서 수피를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목축 지방에서 목축피모를 생산할 수 있다. 북방지구의 민족은 수피나 어피가공에 능하여, 고도의 박피와 숙피 기술로 유명하다. 물론 여기에는 기후관계상 직물을 짤 수 있는 섬유를 구할 수 없다는 원인도 있다.

한편, 남방에서는 방직할 수 있는 섬유재료를 재배할 수 있어 남방 소수민족은 방직에 능하여 가정의 주요 부업이기도 하다. 고대부터 소위 "남경여직(男耕女織)"은 남녀의 노동분업을 말하는 것으로, 부녀들이 방직에 능함을 설명해 주고 있다.

 

※결론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국 복식의 기본적인 형태는 중국의 광활한 대륙과 유구한 역사,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하여 각 민족의 풍습이나 사상, 관습이 복식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각 시대나 민족에 따라 같은 명칭의 복식이라도 색채나 형태에 있어서 각각의 특징적인 미의식을 갖추고 있는데, 이로써 우리는 복식문화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발전해 나간다기보다 그 나라의 문화와 맥을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복식

명(明)

 

주원장이 1368년에 명을 건립하여 한족이 실권을 잡자 원대에 행해졌던 언어·풍습·복식
등을 모두 금하고 순수한 한족의 문화를 정착시켜 한(漢), 당(唐), 송(宋)을 능가하는 대제국
을 건설하였다. 따라서 명대에는 중화사상이 절정에 달해있었고 전통적인 한족 문화와 복식
이 소생하였다.

명대복식은 당(唐), 송(宋)대에 이미 수립되었던 복식제도가 원(元)대에 문란해졌기에 건국
후 한족의 의례를 회복해 관복제도를 재정비했다.
제도개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 복식도 구체적으로 제한되었는데 이때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식이나 복식도안, 색 등에서 엄격한 제한과 구별이 있었다. 명대에는 황제가
현의된 면복을 별로 착용하지 않았으며, 상복에 12장문을 베풀어 곤복으로 입었다. 관리의
조복 규정을 대단히 엄격하였다.명대의 관리상복으로는 반령포(半嶺袍)를 입었으며 반령포에
는 가슴 앞과 등 뒤에 보자를 달았는데 보자문양으로서 신분의 등급을 구분하였고 동물을
표지로 삼았다. 보자와 관복의 문양도 등급간에 차이를 두었는데 이 규정은 정하는 때에 따
라 바뀌어지기도 하였으나 아주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

편복(便服)은 각 신분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종류는 포(袍), 단의(短衣), 군(裙)
등을 입었다. 사인 등 선비는 사령대금관수삼을 입었는데 이것은 우임으로 된 큰 깃이 사선
으로 여며지고 소매가 넓은 포의 형태이다.

여자복식 관복은 황후, 왕비, 명부가 모두 착용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홍색의 대수삼, 심
청색의 배자, 채색의 수를 놓은 피자, 주옥금봉관, 금수화문리을 착용하였다. 피자는 당에서
도 성행했던 피백을 칭하는 것으로 송에서도 피백으로 사용하였는데 명에서는 피자라고 하
여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채색구름, 바닷물, 붉은 태양 등을 수놓기도 하였는데, 피자의 무늬
는 품계에 따라 달랐다.편복은 명부의 한거사와 평민 여자의 의복으로, 기본적인 것은 당송
의 옛 제도를 따랐다. 일반 부녀는 대부분이 자화조포로써 옷를 지었는데 금의 사용을 허가
하지 않았다. 배자의 형식은 송나라의 배자와 그 형태가 비슷하나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였
다. 비갑은 원래 유목 민족들이 경쾌하게 입던 겉옷으로서 명대 여인들이 경쾌하게 즐겨 입
었다. 군자는 치마로서 그 안에는 슬고를 덧입었다. 군자의 양식은 8내지 10폭의 재료를 사
용하였는데, 허리에 수십가락의 주름을 잡기도 하였다. 그외에 명대 여자복식에 수전의가 있
는데, 수전의는 명대 여성의 전형적인 복식으로 여러 가지 색깔을 섞어 이어서 만든 민간부
녀의 예술품으로 백가의에도 사용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조각보와 유사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청(淸)

 

청대는 만주족이 설립한 왕조로 건립초기에는 한족 진압정책을 강경하게 실시하였다. 따
라서 의복이나 두식 또한 한족의 양식을 금지하였으며 만주족의 양식대로 머리를 깎게하고
복식을 바꾸도록 하였다. 이 시기는 한복과 만주족이 혼거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형태와 양식이 생겨났으며 서양문물의 도입으로 인하여 의생활 또는 서양
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남자복식에서 황제의 조복은 용포로서, 용포는 청대에 황제만이
입었던 관복이었다. 일반 관원들은 화의라고 부르는 망포를 입었다. 이것은 관원과 명부가
외괘 안에 입던 복식이었으며, 이들의 등급은 망수나 망조수로 구별하였다.남자복식도 만주
족과 한족의 복식이 함께 혼용되었는데 청대의 남자복식은 포(袍), 마괘(馬 ), 오( ), 마갑
(馬甲), 삼(衫), 고(袴)를 입었다. 모든 복식은 소매를 좁게 하고 몸통도 불필요한 여분을 착
수통신(窄袖筒身)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주로 광활한 대륙의 기마생활에 편리하게 정착된 양
식으로 볼 수 있다. 의금은 단추로 매게 되었고, 령구는 무령에다 령의를 더하는 식으로 변
하였다. 청대에는 일상복에 직접 방형 또는 원형을 상의에 수놓는 특별한 보자의 양식을 취
하였는데 이것은 보복(補服)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붙이는 보자의 양식은 명대의 것과는 차
이가 있다. 보복은 청대 관복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포보다 약간 짧으며 대금, 수단이 평
평한 것으로 앞에 보를 수놓은 것이었다. 이때에도 등급에 따라 보자의 도안이 달랐다. 포와
오는 일종의 상의의 겉 옷으로 대부분이 개차였는데, 황족은 사차(四 )였고 평민은 불개차
(不開 )를 입었다. 그중 개차대포는 전의라고 불렀는데 수구 밖으로 돌출한 전수는 그 모양
이 말발굽과 비슷하였기 때문에 속칭 마제수(馬蹄袖)라고 하였다. 그 모양의 연원은 북방의
악천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한데 있으며 수렵을 하고 활을 쏠 때에는 걷을 수 있어서 행동에
장애를 받지 않았다. 결금포(缺襟袍)는 말타기에 편리하도록 전금의 아랫폭이 갈라졌고 오른
쪽이 왼쪽에 비하여

1척 정도가 짧았다. 이것을 행장(行裝)이라고도 하였으며,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짧은 앞
쪽을 옷 사이로 단추로 잠갔다. 매괘는 길이가 허리보다 짧은 웃옷으로 소매는 팔꿈치 정도
길이로 행괘(行 )라고도 하며, 여밈은 주고 끈을 사용하였다. 예복용으로는 심홍, 장자, 심
합, 논, 회 등의 색을 사용하였고, 황색은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것 이외에도 착용할 수가 없
었다. 마갑은 소매가 없는 짧은 옷으로 배심 또는 감견이라고도 하였으며, 남녀가 모두 입었
고 처음에는 속에 입었지만 후대에는 겉에 착용하였다. 령의는 일종의 깃의 형태로 령이 없
는 예복에 달았던 것을 말한다. 모양이 소의 혀와 같아서 우설두라고도 하였다. 여름에는
사, 겨울에는 가죽,또는 융을 사용하였으며, 단추로 매어 사용하였다. 피령은 목과 어깨에 두
르는 것으로 관원들이 조복 위에 둘렀던 것으로 수를 놓아 장식하였다. 청대의 남자들의 바
지는 허벅지가 넓은 장고를 주고 착용하였고 퇴대를 매었다. 수복은 량모와 난모가 있었고
관원들은 관정을 보석으로 장식하여 등급을 구별하였다. 여자복식은 남자복식과는 달리 한
족과 만주족의 복식이 각각 유지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한족의 여자복식은 만주족의 여
자복식에 융화되어 특유의 청대복식을 만들어갔다. 황족명부예복은 기본적으로 남자의 조복
과 같으나 하피만을 여자전용으로 더 입었고 봉관을 썼다. 하피는 청대에 이르러서는 배심
과 같이 넓어졌고 가운데 금수를 놓아 등급을 구별하였으며, 아래에는 술을 달았다. 봉관하
피는 평민 여자가 결혼할때에도 입을 수 있었다. 청대의 황후 조복은 조관, 조포, 조군과 조
괘로 구성되어 있다. 조포는 명황색 단으로 만들고, 위에는 구룡과 구름을 함께 수놓았으며
바닷물과 팔보를 함께 수놓았다. 목둘레와 소매는 석청색을 이었고 금으로 연을 둘렀고, 조
포 의 어깨위에는 용문을 수놓은 피령을 덧둘렀다. 조포 위에 입은 조괘는 소매 없는 대금,
무령으로서 그 형태가 배심과 유사하며, 겉에는 용, 구름, 팔보 등을 수놓았다. 고자는 일반
여성들이 입었던 것으로

허리띠를 왼쪽으로 늘어뜨렸는데 초기에는 좁았으나 후기에는 넓고 긴 것을 좋아하였으며,
띠 끝에 꽃무뉘를 수놓아 장식하였다. 운견은 청 초기에는 부녀들이 예를 행하거나 신혼때
의 복식으로 입었고, 말기에는 어깨에 늘어뜨리는 형태가 되었는데, 이것은 의복이 더러워지
는 것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정말부터 입기 시작한 치파오는 태평천국, 중화민국을
거쳐 현재까지도 민속복으로 입고 있다.

 

지금까지 알아본 중국의 역사를 장식하였던 나라들의 복식문화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중국
은 오랜 문명국 가운데 하나이며, 땅이 광활하고, 인구가 많고,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렇기에
문화, 과학기술 등의 큰 성과를 축적되어 왔고, 그 연원이 유구하다.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
의 지표가 되는 복식은 특히 전형적인 동방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며 세계복식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다. 중국 복식의 기원은 대단히 빠르며 인류의 탄생을 따라서 형성되기 시작하
였으니 400만년 이전으로 추산할 수 있다. 만약에 실물로부터 살펴볼 수 있는 산정동인(山
頂洞人)의 목걸이 장식을 근거하면, 18,000년이 되며 오랜 옛 선민의 전설에 이르면 더욱 뜻
이 있고 흥미가 있다. 중국복식 품격은 광활한 강역을 바탕으로 하여 지역의 차이를 형성하
였으며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국민생활 수준이 대폭적으로 높아지
게 되면서 복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요구를 하게 되었다. 청년은 현대화를 추구하고, 중년은
몸에 맞는 아름다운 복식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식미를 주장하는 사조가 전국을 퍼
지게 되었다. 90년대의 복식을 전망하면 실용성보다는 미를 중시하고, 공통성보다는 개성을
중시하고, 서양의 모방보다는 시대감각을 구비한 민족성을 중요시할 것이다. 그리고그들 새
로운 복식의 재료는 물론 새로운 디자인이 끊임없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복식은 예술품으
로 민족 문화의 상징이며, 생활의 새로운 광채를 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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