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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마광수/초상화

by 8866 2009. 4. 27.

 

 

마광수/초상화 

고풍(古風)스런 성(城)이 한 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이 성을 건립할 당시만 해도 성주(城主)는 온갖 권세와 부(富)를 동원하여 무궁한 쾌락을 맛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이 성은 폐허처럼 황량한 분위기를 전해 줄 뿐이다. 무표정한 대리석 벽돌들로 쌓아 만들어진 육중한 성벽은 이미 죽은 빛이 났다. 다만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 덩굴의 안쓰러운 생명력만이, 이 성이 지금껏 겨우겨우 살아 숨쉬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하지만 성은 역시 웅장하고 화려했다. 지금이 낮시간이라 그렇지, 밤이 되면 희뿌연 달빛과 함께 성채 전부가 휘황하고 요요(夭夭)한 빛을 내며 새롭게 살아나서 꿈틀거릴 것도 같다. 한밤중엔 야성적인 눈빛을 한 드라큐라 백작과, 백작에게 피를 빨리우면서도 그 황홀한 쾌락을 못 잊어 결국 백작의 귀첩(鬼妾)이 되기를 자원한 수많은 미녀들이 한꺼번에 서로 물고 빨면서 광란의 축제를 벌일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성의 주변에는 거울같이 맑은 수면을 자랑하는 하늘빛 호수가 빙둘러져 있었다. 호수의 차고 맑은 수면 위로 햇볕이 은빛으로 반사되어 더욱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럴 때의 성은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 속에 나오는 신데렐라가 화려한 야회복으로 차려입고 잘생긴 왕자님과 춤을 추고 있는 환상의 성인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남자와 여자는 한동안 숨을 죽인 채 성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거대한 성채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그들의 신분이나 복색이 너무 초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흡사 두 사람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버티고 있는 푸른빛의 호수가, 그들에게 이상한 현기증을 불러일으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신혼여행중이었다. 긴 연애기간 동안 두 사람은 정말로 기억에 남을 만한 환상적이고 로맨틱한 신혼여행을 꿈꿨다. 그래서 그들은 심사숙고 끝에, 이 오래된 성채를 일주일 동안 빌려서 묵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열리고, 성채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다리를 건너 호수 위를 통과하여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 성의 주인은 옛날 영화롭던 시절의 성주는 이미 아니었다. 귀족이라는 칭호와, 선조가 물려 준 이 성 한 채가 그의 재산의 전부였다. 별다른 수입이 없었던 그로서는 이 성을 스스로의 사저(私邸)로 쓸 수 있는 여유가 도저히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내에 거주하면서 작은 사업을 하고, 한 늙은 관리인에게 이 성을 맡겨 호텔 영업 비슷한 것을 음성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성 안으로 들어가 관리인과 인사를 했다. 성의 내부는 비록 퇴색되어 버린 흔적이 역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했다. 옛날 그 상태대로 보존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현대의 인공적으로 조작된 화려함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였다. 중앙 홀에 늘어뜨려진 샹들리에, 서쪽 벽면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벽난로...... 홀의 양쪽 계단으로 이어진 2층에는 수많은 방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옛날 귀족부인들이 그 긴 비단 옷자락을 질질 끌며 애인들과 거닐었을 법한 화려한 문양으로 조각된 베란다가 방마다 붙여져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마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을 느끼면서, 여기저기 다니지 않고 이곳 한군데만 빌려 신혼여행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썩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1층에서 2층으로 통하는 중앙홀의 양쪽 계단 옆의 벽면에는 이 성의 역대 성주들과 그 부인들, 그리고 가족들의 초상화가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걸려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 표정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약간 무서운 느낌을 줄 정도였다. 여자와 남자는 2층의 전망 좋은 방하나를 택하여 짐을 풀었다. 그리고 샤워를 했다. 그러자 아래층에서 저녁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두 사람은 나이트가운 차림 그대로 식당으로 갔다. 손님은 남녀 둘 이외에 한 사람도 없었다.

늙은 관리인과 하녀 서너 사람이 두 사람의 식사시중을 들어 주었다. 늙은 관리인은 한평생을 이 성안에서만 살았고, 앞으로도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식사 도중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늙은 관리인은 마치 기나긴 역사를 가진 이 성채의 산 증인 이기라도 한 듯, 가끔씩 성안의 이곳 저곳과 창밖의 먼 숲속을 주시할 때마다 힘없어 보이는 눈동자에서 이상한 광채가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저넉식사가 끝난 뒤 하녀들은 각기 제 방으로 돌아가고, 남녀 신혼부부는 2층으로, 그리고 늙은 관리인은 성 뒤뜰에 있는 조그마한 별채로 사라졌다.

성은 곧이어 적막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너무나 조용해서 가끔씩 촛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묵고 있는 방은 큰 더블베드와 화려한 화장대, 그리고 욕실이 있었다.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과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붉은 황혼빛이 한데 어우러져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에로틱한 느낌을 더해 준다. 방안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남자와 여자는 비로소 옷올 벗고 양가죽 모포가 깔린 커다란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그리고 뜨거운 포옹으로부터 시작하여 부드러우면서도 열렬한 애무를 시작해 갔다. 두 남녀의 나신은 방안의 화사한 분위기와 하모니를 이루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남자의 가슴에 안기어 이미 촛점을 잃어버린 눈으로 창 밖의 저녁 노을을 응시하며 신음하던 여자는, 한바탕의 격렬한 극치감 끝에 어느새 새근새근 코를 골고 있었다.

남자는 가운을 걸치고, 잠들어 있는 여자의 배꼽 위에 가벼운 키스를 보낸 후 이불을 덮어 주고 베란다로 나왔다. 남자는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길게 한모금 빨아들인 후,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붉은빛 황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토록 기대해 마지 않았던 첫날밤의 정사가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만 것 같아 약간 씁쓰름한 기분이 들었다.
담배를 끄고 나서 그는 침실을 통해 다시금 복도로 나왔다.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역대 성주들의 초상화들이었다. 어두운 복도에서 초상화 속의 남녀들은 하나같이 그를 음탕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랫층으로 빠지는 계단의 중간쯤을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남자는 어느 한 그림 앞에 서서 눈동자를 뗄 줄 모르고 망연히 서 있었다. 속이 다 드려다보이는 흰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침대 귀퉁이에 흰 팔을 뻗친 채 비스듬이 기대어 있는 어느 여인의 초상화였다.
초점을 잃은 동공으로 무언가를 애타게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눈동자가 비수처럼 남자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그 여자의 눈에서는 금세라도 눈물방울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오똑한 코와, 붉디붉은 장미빛 입술, 정말 기가 막히게 요염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무언가 음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마치 강렬하고 변칙적인 사랑의 행위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남자는 초상화 속의 여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금 발길을 돌려 옥상으로 향했다. 이제 황혼빛도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칠혹 같은 어둠과 함께 세찬 바람만이 그의 주위를 감싸돌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 순전히 자신의 뜻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感知)해 낼 수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일까. 웬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지면서, 아름다우면서 사악한 열정에 대한 일탈(逸脫)욕구가 그의 호기심을 한껏 부채질해 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손길이 그의 어깨 위에 부두럽게 와 닿았다. 남자는 순간 고개를 돌려 자신의 시선을 손길의 임자를 향해 고정시켜 보았다.
그러자 그는 <악>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아까 그림에서 보았던 그 여인이 바로 그림 속에서와 같이 속살이 훤히 다 비치는 흰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그의 목을 어루만지며 서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애타게 갈망하는 듯한 눈길로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잠시뿐, 얼마 안 가서 그의 마음 속에서 공포심은 사라지고, 마치 그 여자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 같은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그는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고 싶어 라이터를 켜들고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그녀를 찾아 온 성 안을 미친 듯이 헤매었다. 그러다가 결국 다시 그 그림 앞에 이르렀다. 그 여자는 여전히 전과 같은 포즈로 변함없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남자가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여자는 애교섞인 표정으로 그의 입술에 따뜻한 입맞춤을 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게을러요? 당신은 너무 늦게 일어나셨어요>
하며 여자는 장난끼 어린 목소리로 응석부리듯 그에게 말을 건냈지만, 남자는 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두 남녀는 늙은 관리인의 안내를 받으며 성 안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여자는 생글거리며 한껏 신이 나 있었지만, 사내는 계속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일행은 성의 옥상 위에 이르렀다. 넓은 옥상은 마치 운동장을 방불게 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성 주변의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옥상 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던 중, 남자의 발길에 채이는 물건이 있었다. 바로 어젯밤에 그가 떨어뜨린 라이터였다. 그는 라이터를 집어서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순간 남자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기쁨이 한데 엇갈리며 지나갔다.
관리인은 이윽고 수많은 초상화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여자의 초상화 앞은 그냥 본 체도 않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그 까닭이 무척이나 궁금했으나 관리인의 굳어진 표정 때문에 도저히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자 다시금 성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침실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의 행위를 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남자한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오늘은 긴히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먼저 자도록 해. 정말 미안해.>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휭하니 방을 나가 버렸고, 여자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 표정이 되었다.

남자는 관리인의 숙소를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자 관리인이 나와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술을 내왔다. 한참 후 남자는 그 여자의 초상화에 대해서 늙은 관리인에게 물어 보았다. 순간 노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연거푸 술잔을 일속에 가져다가 퍼 넣었다. 그리고나서 잠시 후 노인은 입을 열었다.

<그렇게도 궁금하시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못 믿으시겠지만 난 어젯밤 옥상에서 분명히 그 여자를 보았어요.>
그러자 노인은 더이상 숨길 수가 없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무척이나 오래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 성의 주인이신 백작님은 이 나라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 성공했지요. 과연 그녀는 아름다웠고 고혹적이었요. 섬뜩하리만치 요염한 얼굴 표정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주눅들어 버리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보통 여자완 달랐어요. 하도 많은 예찬자들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보다는 자기를 경멸해 주고, 육체적으로 강팍하게 유린해 주는 남자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백작님은 허약한 체질인데다가 성격도 온순하신 편이셨기 때문에 마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마님은 남편에게서 얻을 수 없는 성적 기쁨을 당시 이 성의 집사로 있던 한 건강한 청년과의 정사로 풀곤 했지요. 그 청년은 상당한 새디스트였습니 다. 부인과 밀회를 즐길 때마다 온몸에 상처자국을 내곤 했습니다. 그것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마님도 무척 조심을 했는데, 어느 날 그만 너무나 열렬히 정사를 벌이던 나머지 벽난로를 지피는 데 쓰는 가느다란 쇠막대기로 그만 마님의 가슴에 뚜렷한 상처를 남기고 말았답니다.
그러자 백작도 눈치를 채게 되어 그 집사를 쫓아내 버리고, 부인 또한 쫓겨나 숲속의 오두막에서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몇달 후,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녀의 시체 옆에는 갓 낳은 듯한 핏덩어리 어린애가 울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만 거지요. 아이도 얼마 후 죽고 말았습니다.>

노인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는 다시금 노인에게 물어 보았다.

<노인장께서는 이 성에 꽤나 오랫동안 살고 계셨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노인은 또다시 한동안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술을 들입다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거칠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내어 뱉었다.

<난 바로 그 젊은 집사였소. 난 그 여자를 아직도 못 잊어요.이 성에서 쫓겨난 후 수없이 많은 여자들을 상대해 가며 그 여자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해 왔지만 잘 잊어지지가 않습디다. 그 여자만큼 완벽한 관능의 화신은 없었으니까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집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후 사정 얘기를 다 해주었다. 백작은 부인과 아이가 죽은 후 곧 성을 팔아 버리고 이사를 했다. 집사는 한참 후 새 주인에게 부탁하여 다시 집사가 되었는데 그 까닭은 부인의 초상화라도 실컷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주인이 서너 번 바뀔 때까지 그는 계속 이 성의 관리인으로 있었고 매일같이 그녀를 바라보는 낙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젠 너무 늙어 버렸소. 그 여자는 내게 싫증이 났는지 내 앞엔 한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지. 그런데 어젯밤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니, 어지간히 당신에게 반한 모양이오. 당신이 부럽군. 잘해 보시오.>
이렇게 말하며 늙은 관리인은 구슬픈 얼굴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남자는 그 초상화 앞에 가서 다시금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전에는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부분에 가느다랗게 불에 데인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초상화는 그녀가 집에서 쫓겨나기 직전에 그려진 것일까?

그 성에 들어온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남자는 여자와 더이상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남자는 저녁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방을 나섰고, 이튿날 새벽이 되어서야 쾌감과 고통이 한데 섞여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는 녹초가 된 채 비실비실 걸어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피곤한 듯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을 자는 것이었다. 여자는 점점 자존심이 상했고, 더이상 같이 있고 싶지도 않았다.

신혼여행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남자는 저녁을 먹고 나서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 물고는 깊은 생각 속에 잠겨 있었다. 여자는 앙탈을 부리며 그에게 쏘아대었다.
< 더이상 못 참겠어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그리고 밤새도록 대체 무엇을 하는 거예요? 이젠 당신 얼굴만 보아도 무섭고 징그럽다는 생각만 들어요.>
여자가 따지듯 물어댔지만, 대답도 없이 방문을 나서는 남자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다. 마치 몽유병자와도 같았다. 입가에는 이상하게도 한줄기 음산한 미소조차 감돌았다.

남자가 나간 뒤 여자는 문득 호기심이 생겨, 촛불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는 계단을 내려서는가 싶더니 그 뒤론 자취를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추적하던중 여자는 드디어 그 여인의 초상화가 있는 계단에까지 오게 되었다. 무심코 그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름답고 선정적인, 그리고 무서우리만치 요염하면서도 슬퍼보이는 표정을 지닌 그 여인의 초상화 속에서, 남자는 벌겋게 달구어진 쇠막대기를 든 채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광수 소설집 <사랑의 학교>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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