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복식
당대 복식의 영향 준 요소
-> 고려시대 복식에 영향을 끼친 요인은 기후, 지역과 같은 자연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요인에 큰 영향을 받음.
크게 초.중기와 후기로나눌 수 있다.
【제1기】 고려 초·중기 - 5대,송 복식 영향기
【제2기】고려 후기 - 몽고 복식 영향기
【제3기】고려말기 - 명(明)복식의 영향기
1. 고려초기, 중기(五代, 宋 복식 영향기)
통일신라시대 이후 복식이 이중구조를 형성하면서 고려도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외국과의 관계에서 그 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오대, 송과 평화적인 친교관계를 맺었다. 제 4대 광종은 고려 역대왕 가운데 가장 자주적인 정신을 가지고 왕권확립을 위하여 노력을 하였는데 대외적으로는 항시 대륙의 혼돈한 국제정세를 잘 관찰하여 후주와 송과 친선책을 취하면서 사색공복제도를 마련하여 백관의 공복을 정하여 등위를 가렸다.
또한 '고려사'에서 고려전기 관복의 사여표(賜與表)를 보면 한족이 아닌 거란족이나 여진족으로부터 관복의 사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들도 한족의 관복제도를 수용한 것이었으므로 형태상의 별 차이는 없다.
2. 고려후기(몽골 복식의 영향기)
제 23代 고종대에 몽골의 침입은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걸쳐서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고 29년간의 항전 끝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로 왕실 이하 귀족, 양반계급에서는 몽골풍을쫓는 풍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몽골풍의 영향에 대해 살펴보면 원은 중국에 동화되어 중국 조정에서 물려받은 관복을 사용하엿으며 고려에서도 백관복에서만은 그대로 중국제도를 답습하고 잇는데 그 일부인 몽골풍속과 복식은 한때 고려에서 유행을 하여 풍속에 많은 변용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는 원이 고려에 대하여 결혼정책으로 고려를 부마국으로 예속시켜 국혼관계를 유지하면서 강력한 동화정책을 써왔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원래 상고시대 몽골지역인 노인울라의 복식과 우리나라 삼국의 복식은 같은 알카이계통으로 호복(胡服)에 속해 비슷한 점이 많았으며 13세기 원 간섭기가 되면서 더욱 밀접해졌다고 하겠다.
복식에 몽골풍의 영향을 받은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체변발
머리 변두리를 갂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 남겨 땋아 늘린 것이다.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당시 원에 다녀올 때 변발호복으로 입국하여, 즉위 후에는 영을 내리어 모두 몽골의 의복과 개체변발을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일반서민이 모두 따른 것은 아니고 지배계급인 관료층과 출세를 희구하는 일부 지식층에서만 호응하였다.
-원의 고려에 대한 사복(賜服)
원도 고려초기 요(遼), 금(金), 송(宋)이 고려에 대하여 사여를 하였듯이 수차에 걸쳐 왕, 왕비, 신하들에게 의복의 사여가 있었는데 고려사에서 보면 원제(元帝)나 원의 황후가 고려의 왕, 왕비, 신하에게 사여한 의복 중에 옥대(玉帶), 탑자포(塔子袍), 금탑자(金塔子), 표리(表裏), 금포(金袍), 금단의(金段衣), 주사표리(注絲表裏)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무늬가 있는 비단옷감의 일종으로 모두 원의 복식이었다. 원의 복식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이 밖에도 충렬왕이 공주를 위하여 원으로부터 가져온 진주의(眞珠衣)가 있고 또 원에서 황제와 관원이 입는 질손(質孫)이 있다.
-질손(質孫)
질손은 원의 독특한 복색으로 원사 여복지에서 보면 한문으로 일색복(一色服)을 말하는 것이며 내정대연(內庭代宴)에서 입었고 여름옷은 동일하지 않아 정해진 제도가 없었다. 훈척(勳戚), 대신, 근시들도 이를 하사받아 입었는데 아래로는 악공, 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옷에 제도가 있어 상하의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질손을 내정대연에 입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종의 편복이라 할 수 있으며 천자는 질손으로 조복, 공복을 삼았고 백관의 질손에는 동복 9등, 하복 14등이 있었다.
원 간섭기에 고려의 복식이 그대로 원의 고유복식 일색으로 변모되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국속과 원제와의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면서 왕의 면복(冕服), 백관의 공복계통은 그대로 송제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사용하였다.
3. 고려말기(明복식 영향기)
-고려왕조의 자주성 모색
원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고려는 자주성을 발휘하여 명과 친근을 도모하여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31代 공민왕 때에는 복구적인 중흥정책을 행하였다. 복식에 있어서도 왕 자신은 제복(祭服)인 면복(冕服)에 있어서 구류면 구장복(九旒冕九章服) 대신에 중국황제와 동격의 십이류면 십이장복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문무백관은 흭의, 청립으로 하고 승복은 흑건대관(黑巾大冠)으로 하며 여복(女服)은 흑라(黑羅)로 고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음양오행설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배원향명(背元向明)의 새로운 움직임 속에서 자주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明) 복식의 영향
명에 관복을 청하여 사여를 받음으로 새로운 주변증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는데 명의 관복제도는 원의 구제와 당, 송의 제도를 참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 31대 공민왕 때에 사여받은 왕의 면복, 원유관포(遠遊冠袍) 및 군신의 배제관복(陪祭冠服)은 중국에 비하여 2등체강 원칙을 적용하여 왕복은 중국의 친왕례에 따른 것이다. 제32대 우왕때에도 명(明)으로부터 국왕의 조복, 제복과 배신(陪臣)의 제복의 사여가 있었고 명의 제도에 따라 관복을 착용하였다. 다만 편복(便腹)은 구제를 따랐고 관원은 입자(笠子)를 썼으며 백성들은 원조때와 같이 끈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러한 명(明)의 복식영향은 조선왕조에 들어가서 국가정책에 의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반적 자료(개괄적으로 정리됨)
고려의 문화는 건국 초기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남아있던 신라적인 요소와 외국(唐당·宋송·遼요·元원)과의 관
계를 통한 영향을 다각도로 받으면서 다채롭게 형성, 발전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은 복식에도 반영되어 우리 고유복식과 중국복식과의 이중구조가 공존하였다. 고려시대의 복식이 주로 바뀐 계층은 지배층으로서 이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제도상의 변천에 불과한 것이며 서민층은 상대사회의 복식과 같은 우리나라의 고유의 복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복식에 관한 유물이나 문헌이 적어 거의 형태를 알기 어렵지만, 백저 반수포가 1973년 발굴된 이래 온양 민속박물관과 해인사에서 복식과 직물이 발굴되어 연구에 활력이 되고 있다.
아래에서는 고려시대 양반, 서민들의 의복과 왕의 의복중 특색있는 것들을 살펴보았다.
1) 쓰개
▣몽수(蒙首) - 고려의 부인들은 나들이 할 때 쓴 개두(蓋頭). 검은 나(羅)로 만들었으며 3폭에 길이 8척의 것으로 이마에서부터 머리를 내려 덮고 얼굴과 눈만 밖으로 나오게 하였으며 나머지는 땅에서 끌렸다. 주로 오호(五胡)의 서역 부녀가 사용하였으며 가격이 비쌌다. 서민층의 여인들은 아래로 내리지 않고 머리위로 접어올렸다고 하는데 이는 일할 때의 거추장스러움을 덜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길이가 짧아지면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너울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입(笠) - 귀부인들이 외출할 때 몽수밑에다 쓰고 말을 탈 때 쓰인 것으로 왕비는 홍색으로 된 것을 썼다.
▣족두리(簇頭里) - 원에서 들어온 관모. 고고리(古古里)라고 하였는데 원의 것은 형태나 기본구조는 같지만, 각이 첨예하며 위가 벌어지고 적우(翟羽)를 꽂았다. 원에서는 남녀가 모두 착용하고 특히 부녀의 외출용으로 쓰였는데 고려에서는 화관과 함께 예모(禮帽)로 쓰였다.
▣화관 - 신라 문무왕 때 당의 제도를 따른 데서 통일신라시대의 궁양(宮樣)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고려에 전승되어 귀족,양반계급,부녀자 예복에 쓰는 관모가 되었다.
2) 의복
▣포(袍) - 포는 주로 흰색이었으며 이를 백저포(白紵袍)라고 한다. 이 포에 감람나무 문양이 있는 허리띠를 매었고 허리띠에는 5색의 찬란한 채조로 금방울을 매달았으며 또한 사향과 같은 향료를 넣은 금낭을 찼다. 포를 입을 때는 이러한 패물이 많은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고 한다.
▣유·상 - 포를 벗고 있던 평상시에 입었던 옷. 상(裳)은 부녀들이 입는 치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을과 겨울에는 주로 노란색이었다. 부녀자들의 평상복은 백저의(白紵衣)에 황상(黃裳 )이었다.
▣고(袴) - 고려의 귀부녀들이 주로 입었던 이 바지는 치마 안에 속옷으로 입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바지만으로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바지는 안을 생초로 바치고 겉을 문릉 같은 견직물로 짠 통 넓은 관고로서 겹바지였다.
▣말·이(襪·履) - 포(布)와 위(韋)로 만들어 발에 맞추어 신고 묶지 않았다. 천한 계층에 속하였던 사람은 소가죽을 사용하였고, 귀한 계층에 속한 사람은 사슴가죽을 사용하였다. 버선의 형태는 오늘날과 비슷하며 신은 가죽신으로 그 모습에 있어서는 조선시대 여인용 온혜(溫鞋)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3) 왕의 복식
▣면복 - 왕의 공식관복으로 원구(圓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에 제사 지낼 때 착용하였다. 면류관의 구성은 면판과 면류관으로 구성되었으며, 청색의 '진'과 '광'은 귀곁까지 드리웠다. 이외에 청색의 조영(組纓), 굉(紘)을 늘어뜨렸으며, 또한 서잠도(犀簪導)도 꽂았다. 면복에 있어서의 의복을 곤복(袞服)이라고 하며 의(衣), 상(裳), 중단(中單), 폐슬(蔽膝), 혁대(革帶), 패옥(佩玉), 대대(大帶), 수(綏), 말(襪), 석, 규(圭)로 구성된다.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원(元)에서 벗어나기 위한 복구적 중흥정치(復舊的 中興政治)와 자주성의 발휘로 십이류면 십이장복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조복(朝服) - 왕(王)이 나라의 백관(百官)과 사(士), 민(民)을 접견할 때 착용한다.
▣연복(練服) - 평상시 궁내에 거할 때의 의복. 일반서민과 다름없는 급건에다 백저포를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고려가 중국제와의 이중조직 속에서 국속복식(國俗服飾)의 의례를 행해야 했기때문이다. 백저포는 고려시대의 기본 포제로서 관수(寬袖) 일 때는 포가 되고 窄袖(착수) 일 때는 의(衣)가 되어 상하, 존비를 구분하였다. 직령(直領)의 영향을 받은 포로 변하여 조선말의 주의(周衣), 현재의 두루마기로 이어지고 있다.
◈특징
▶고려시대때에는 주위의 여러나라 복식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몽고의 풍속은 강력한 동화정책과 함께 고려 복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우리 민족이 원나라와 비슷한 북방계 기마민족이었다는 점, 그래서 그 유사성을 더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점과도 연결되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영향을 보여 주는 현상으로는
첫째, 여자의 복식에 있어서 몽고풍이 두드러져 짧고 좁은소매의 저고리가 유행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방한구와 예장에서 많이 보이는데 족두리와 신부복식의 도투락 댕기는 당시 몽고 기혼녀의 복식이었던 도톨이의 유속이었다. 그러나, 저고리에서 형태는 그대로이면서 길이만 짧아진 것으로 보면 그다지 많은 변화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셋째, 현재 우리 옷인 한복의 특징 중의 하나인 동정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여겨진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백저포나 저고리의 깃, 도련, 수구, 치마단 등에 둘려져 있었던 선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정은 여자저고리의 끝동과 함께 상대 사회의 선의 유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몽고풍속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행한 것을 몽고풍이라고 하며, 반면 고려의 풍속이 원나라 사회에 전파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는 것, 이를 당시 원나라에서는 고려양이라고 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의복이 몽고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현상은 고려가 정치적으로 몽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양국의 민족교류가 이루어진 데서 오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하겠다.
계층별로 확실히 구별할 때
1. 왕복
1) 공복 :
왕이 사신을 접견할 때 착용하던 복장. 자색공복에 옥대를 띠고 상홀을 들었다.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둥근 깃에 소매가 넓으며 옷깃과 수구에 이색 선이 둘러져 있으며
홀을 들었다.
2) 상복 :
왕의 사무복이다.
담황색의 소매통이 좁은 포를 입었으며, 자색라로 한 늑건을 띠었다.
2. 왕비복
1) 홍색예복 :
왕비복은 홍색이며,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았다. 홍색포 위에 주황색 반비를 입고,
녹색 표를 둘렀다.
3. 귀족여자
1) 자적포 :
곧은 깃에 앞 길이가 뒷길이보다 짧은 예복이다.
상의와 치마를 입은 위에 중의를 입고 자적포를 맨 위에 입었다.
2) 수월관음도의 귀부녀 :
붉은 치마에 꽃무늬가 있으며 저고리는 길이가 길며 옆이 트여져 있다.
4. 관복
1) 공복 :
곡령대수의 옷깃에 수구에 이색선이 없는 공복은 18대 의종조때 최윤의가 정한
상정고금례에 정해진 공복이다.
2) 백관 공복 :
고려 도경에 나타난 백관공복으로 복두를 썼고 대수의 비색 단령포를 입었다.
옷깃과 수구에 검은 선을 둘렀다.
5. 서민남자
1) 요선철릭 :
허리부분에 선을 넣어 장식한 것으로 옷감은 모시, 명주, 비단, 라를 착용하였다.
2) 철릭 :
중국 원에서 들어온 것으로 중국의 백과 사전인 삼재도회에 고려인을 소개할 때,
철릭을 입고 있는 것과 같이 서민이 많이 입은 옷이며 조선말기까지 입었다.
3) 직령 :
머리에 발립을 쓰고, 홍색직려에 사대를 띠고 화를 신었다.
직령은 조선왕조에 전해져 말기까지 계속 착용되었다.
형태는 옷깃만 곧은깃이 단령과 다르고 다른 부분은 단령과 같다.
4) 답호 :
고려후기, 조선초기에 상류층 남자의 평상복으로 흑립과 첩리 위에 답호를 착용하였다.
6. 서민여자
: 방배동에서 출토된 목우상을 재현하였는데, 황상을 많이 입었다는 고려도경에 의하여,
황상에 연분홍 저고리로 하였다. 머리는 낮게 얹은 머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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