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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학

중국문학

by 8866 2009. 3. 26.

중국문학 (中國文學)

Chinese literature

1 개요

중국어로 씌어진 중국민족의 문학.

중국문학은 세계의 주요한 문학유산 가운데 하나로서 적어도 BC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3,000년이 넘는 지속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국문학의 매체인 중국어는 발음상의 점진적인 변화, 지역적인 방언의 존재, 문자의 구조적 표현상 몇 단계의 변화 등에도 불구하고 구어와 문어의 양 측면에 있어서 쉽게 변할 수 없는 특성을 간직해오고 있다. 심지어 이민족 집단이 상당 기간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중국을 지배했어도 이러한 연속성을 방해하지는 못했는데, 그것은 이민족 정복자들이 그들 자신의 문자를 갖지 못했던 까닭에 의사전달의 공식적인 매체로서 성문화된 중국어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결과 정복자들은 문화적으로 중국에 동화되었다.

2 일반적인 특징

중국문학은 문화적인 접촉을 통하여 다른 아시아 국가들, 특히 한국·일본·베트남의 문학전통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국가들은 중국어를 그들의 문언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작가들은 중국어로 문학작품을 짓기도 했다. 중국어의 기록 측면상 도화적(圖畵的) 특성은 중국문학과 그것의 전파에 다음의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중국문학, 특히 시가(詩歌)는 독자들에게 청각은 물론이고 시각적으로 심미적인 호소를 하는 데 뜻을 두었다. 둘째, 이러한 시각적 호소는 중국에서 서예의 지위를 높여주었는데, 서예는 최소한 지난 1,600년 동안 회화에 비견되는 훌륭한 예술로 여겨지고 있다. 셋째, 부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기록체계는 교육과 글자의 보급에 장애가 되어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독자수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넷째, 중국의 문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주변지역의 동화된 이민족 집단을 포함한 수많은 중국민의 문화적 단합을 계속 유지시키는 잠재역량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중국어의 발음 역시 중국문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단일 발음을 갖고 있는 각각의 글자는 하나의 문장 안에서 많은 동음이의(同音異義)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글자의 도움 없이는 말하거나 읽을 때 오해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법은 발음상 성조(聲調)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중국어의 이러한 음조상의 특징은 시가와 음악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맺게 했다. 중국시가의 모든 주요한 형식은 근본적으로 음악을 곁들여 노래되었다. 중국시가는 음률을 맞추기 위해 운율(韻律)과 협운(協韻)에 의존하는 것 외에 함축성과 간결성이 그 특징이다. 중국시인은 서정성을 강조할 때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환희, 영감의 높이와 슬픔, 연민의 깊이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대명사나 접속사는 생략하고 1~2개의 단어로 매우 복잡한 사고나 상황을 언급하곤 한다.

중국문학은 산문과 시가 사이의 한계선이 다른 나라의 문학에서보다 훨씬 불분명하다. 이러한 경향은 다음의 3가지 문학양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① (賦)는 시가와 산문의 경계선상에 있으며 그 양자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리듬과 음운, 그리고 드물게 대구(對句)를 사용하는 동시에 산문적인 특징도 갖고 있다. 그래서 '시적인 산문', '산문시', '서사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② 변려문(騈儷文)은 대구의 문장구조와 균형잡힌 음운 양식이 특징이다. 시가와 비슷한 음악적인 효과와 산문적인 설명 및 의론이 동시에 들어 있다 . ③ 팔고문(八股文)은 이러한 특성을 특이하게 변형시킨 것으로 대구의 구조와 대비적인 음운 양식을 최대한 활용했는데, 단어와 단어, 구와 구, 문장과 문장을 대응시켜 긴 문단을 이루는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 지금은 문학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지만 과거 수세기(1487~1901) 동안 과거시험생의 지침으로서 중국문단을 지배했다 .

중국산문은 크게 고문(古文:文言文)과 백화문(白話文:語體文)의 두 부류로 나뉜다. 고문은 고대 작가들이 수립한 문장규범과 풍격을 따르고 유가의 경전과 성현의 저술을 근거로 한다. 또한 과거시험의 수요와 문화상의 성취로 인해 전통적인 존중을 받았기 때문에 고문은 대부분의 산문작가들이 사용하는 어문(語文)의 도구가 되었다. 백화문은 고문과 판이하게 달라 작자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살아 있는 언어로 지은 문장이다. 이러한 문체는 전통적으로 낮게 평가되어오다가 송(宋)나라 말엽(13세기경)부터 비로소 소설가와 희곡작가들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되었다.

3 역사

3.1 기원(BC 1400~221)

중국 최초 문자기록의 실물은 은(殷:BC 18~12세기)나라 후기 300년 동안 거북등과 짐승뼈에 새겨놓은 복사(卜辭)이다. 이러한 복사는 당시 왕실에서 신에게 제사드리거나 점을 칠 때 사용하던 것으로, 너무 간단하고 단편적이어서 문학작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복사 중에서 이미 적지 않은 어휘가 발견되어 이것이 오늘날 중국문자의 근원임을 증명할 수 있다( → 갑골문).

3.1.1 신화의 문학가치

초기의 중국문학에는 신화지식을 구체화한 위대한 서사시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화자료 또한 개략적이고 단편적이어서 완전하고 체계적인 신화고사를 제공할 수 없다. 은나라 때의 자료에는 한계가 있으며, 주대(周代:BC 1111~256/255)의 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운용할 때는 한대(漢代:BC 206~AD 220)의 저작을 참고해야만 한다. 초기의 중국신화는 늦어도 주나라가 개국할 당시에 유행하던 종교적인 상황에서 형성되었으며, 주나라 말기에는 심오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초기의 신들이 전반적으로 새롭게 재해석되어, 일부 신들과 신화 속의 주인공들이 추상적인 개념이나 역사인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예를 들어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의 전쟁신화는 도교 고사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수호전 水滸傳〉·〈서유기 西遊記〉 같은 통속소설 창작에 부분적인 소재를 제공했다.

3.1.2 시가

중국 최초의 시가 총집인 〈시경 詩經〉은 민간가요인 국풍(國風), 조정음악인 아(雅), 묘당음악인 송(頌)으로 이루어진 고대시집으로 모두 305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일반적으로 주나라 초기(BC 1122)에서 춘추시대 중엽(BC 570)에 이르는 시기에 북방의 황허 강[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형식은 4언(四言)을 위주로 하며 내용은 서사성보다 서정성을 중시한다. 또한 음악적인 효과를 위해 협운을 강조하며 음악에 배합하여 노래를 부를 수 있는데, 특히 송은 가무(歌舞)를 겸할 수 있다. 〈시경〉은 5경(五經:〈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가운데 하나로서 대대로 숭고한 지위를 누려왔는데, 그것은 〈시경〉이 가장 고전적인 문학작품이며 일찍이 공자가 친히 시를 산정(刪訂)하여 유가의 중요한 경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경〉은 후대 중국 시가문학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시경〉과 대략 같은 시기에 나왔지만 또다른 체재를 갖춘 시가가 〈초사 楚辭〉이다. 〈초사〉는 '초나라 사람의 노래'라는 뜻으로 남방의 양쯔 강[揚子江] 유역을 중심으로 한 초나라에서 흥기했다. 그것은 〈시경〉과 마찬가지로 구말(句末)에 협운을 했지만 문체는 서로 다르다. 구절이 비교적 길고 불규칙적이며 보통 한 구절의 중간에 혜(兮)자를 집어넣어 감탄의 어기를 강조한다. 이러한 유의 초기 작품은 중국문학사상 최초의 위대한 천재시인인 굴원(屈原:BC 4~3세기)의 것이 대표적이다 . 그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25편 중에서 가장 장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소 離騷〉이다. 〈이소〉는 굴원 자신의 가계(家系)를 밝히고 임금과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심과 국사에 대한 걱정을 표현했다. 또한 참소를 당하고 떠돌아다니는 자신의 슬픈 심정을 달래기 위해 먼 이역과 하늘나라에서 펼친 상상의 여행을 묘사했다. 굴원이 창시한 이러한 양식은 이후 5세기 동안 계승·발전되었다.

3.1.3 산문

이 시기의 중국산문은 크게 역사산문과 철리산문으로 나뉜다. 역사산문은 한 나라나 여러 나라의 역사사실을 기술한 것으로 〈서경 書經〉·〈좌전 左傳〉·〈국어 國語〉·〈전국책 戰國策〉 등이 있다. 철리산문은 제자백가(諸子百家) 각각의 학술과 사상을 설파한 것으로 〈노자 老子〉·〈논어 論語〉·〈맹자 孟子〉·〈장자 莊子〉·〈묵자 墨子〉·〈한비자 韓非子〉 등이 있다. 〈서경〉은 서사(誓辭)·정령(政令)·서찰 등과 단편적인 사건기록을 포함한 고대국가의 정부 문건을 모아놓은 것이다. 〈좌전〉은 노(魯)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각국의 역사사실을 기록한 편년체의 사서이며, 〈국어〉·〈전국책〉은 각국의 대사를 나누어 기술한 국사별(國史別) 사서이다. 〈노자〉는 〈도덕경 道德經〉이라고도 하며, 노자 학설의 요체로서 운(韻)이 들어 있는 간결하고도 정련된 산문이다. 〈논어〉는 공자 학설의 정수로서 공자와 제자들 사이의 문답을 기술한 것이다. 〈맹자〉·〈장자〉는 각각 공자와 노자의 학설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문장이 훨씬 길어지고 가다듬어졌으며, 우언고사(寓言故事)를 잘 운용하여 문학성이 증가되었다. 〈묵자〉는 묵가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논리학에 뛰어났으며, 〈한비자〉는 법가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그밖에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을 종합하고 많은 민간전설을 담고 있는 〈여씨춘추 呂氏春秋〉는 이 시기 산문의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3.2 진· 한대(秦漢代:BC 221~AD 220)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룩한 진나라와 이를 이어받아 더 강력한 제국을 유지한 한나라에서는 새로운 방향의 문학활동이 시도되었다.

3.2.1 시가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부는 시와 산문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시가형식으로 초사체(楚辭體)와 직접적인 계승관계가 있는 문체이다. 보통 한대 초기에 유행한 소체부(騷體賦)와, 경제(景帝) 때 일어나 무제(武帝)·선제(宣帝) 때 흥성한 산체장부(散體長賦)의 2종류로 나뉜다. 특히 후자는 길게 늘여서 꾸미는 포장(鋪張) 수법과 조탁에 힘을 기울여 한나라 궁정의 오락문학이 되었으며, 귀족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묘사하거나 도성의 성대하고 화려한 경관을 노래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때문에 동방삭(東方朔)·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같은 유명한 부 작가들도 모두 궁정의 배우와 비슷하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부(漢賦)는 독특한 풍격을 지닌 문체로 인정받고 있다.

문학사상 한나라 때 이룩한 또다른 공헌은 무제 때인 BC 126년(元朔 3)에 정식으로 악부(樂府)를 세운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미 악부령(樂府令)이라는 관직이 설치되기는 했지만 무제 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비되어 담당관리가 시가를 채집하고 악기에 맞추어 음악화했다. 묘당(廟堂)의 교사(郊祀)나 연사(燕射)류의 송가(頌歌) 외에도 각 지방에서 채집한 민가가 보존되어 있는데, 서정적인 시가를 포함한 아름답고 애잔한 가요 등은 모두 묘당문학에 비해 매우 진지하고 활발한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고아행 孤兒行〉·〈맥상상 陌上桑〉· 〈공작동남비 孔雀東南飛〉·〈고시십구수 古詩十九首〉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공작동남비〉는 초기 중국문학에서 가장 긴 장편의 시가로서 총 353구로 되어 있다. 악부시가, 특히 민가는 대부분 5언(五言)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후대 5언시의 기원이 되었다.

3.2.2 산문

산문은 진·한대에 이르러 더욱 크게 발전했는데, 사전문학(史傳文學)의 쌍벽인 〈사기 史記〉·〈한서 漢書〉가 가장 뛰어나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는 장장 18년이 걸려 완성된 것으로, 전설상의 제왕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한 무제까지 약 2,000년간의 역사 사실과 인물에 관한 사적을 기전체(紀傳體)로 기술했는데, 총 130권 50여 만 자에 이른다. 이 책은 중국 최초의 통사(通史) 대작으로서 후대 정사(正史)의 전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마천이 죽고 나서 100여 년 후 반고(班固)에 의해 지어진 〈한서〉는 전한(前漢)의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총 80여 만 자에 이르는데, 체제와 규모면에서 〈사기〉에 다소 뒤지기는 하지만 중국 단대사(斷代史)의 효시로서 가치가 높다. 그밖에 비교적 중요한 산문작품으로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회남자 淮南子〉를 들 수 있는데, 전국시대 제자서(諸子書)와 비슷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3.3 육조·수시대(六朝隋時代:220~618)

한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장기간의 분열상태(220~589)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정치와 사회가 불안했지만 문학상으로는 오히려 발전했다. 그 이유는 불교문학의 영향으로 중국어의 음률미가 강화되었으며, 북방 이민족이 세운 북조(北朝)와 한족 중심의 남조(南朝)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문학적 다양성이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3.3.1 시가

남방과 북방이 서로 다른 풍격을 띠고 있는데, 남방은 대부분 서정시 위주이고 북방은 전쟁의 강인한 기운이 비교적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 조식(曹植:192~232) 과 도연명(陶淵明:365~427) 이 대표적이다. 조식은 서정적이고 우아한 5언시에 뛰어났으며, 그의 부친 조조(曹操)와 형 조비(曹丕) 및 동시대의 시인들과 함께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풍격을 창시했다. 도연명의 시는 특히 담백하고 자연스런 특색을 갖추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시풍은 후세의 많은 시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가 전원에 은거한 후에 지은 〈귀거래사 歸去來辭〉와 술 마신 뒤에 쓴 〈주 酒〉 12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대표작품이다.

3.3.2 산문

이 시기의 문학은 정통 유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도가(道家)와 외래 불교문학의 영향을 점차적으로 받았으며, 조화로운 음률과 아름다운 수식을 강조한 변려문이 산문형식의 주류를 이루었다. 동진(東晉) 초기(4세기 중엽)의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육기(陸機)가 지은 〈문부 文賦〉는 문장을 지을 때 창조성을 중요시했으며, 이전 사람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인습에 반대했다. 남조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세설신어 世說新語〉는 후한말부터 동진까지의 유명한 지식인들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기록한 것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청담(淸談)의 기풍이 잘 반영되어 있다. 양(梁)나라의 유협(劉 )이 지은 〈문심조룡 文心雕龍〉은 최초의 전문적 문학비평서로서 당시에 유행하던 변려체로 되어 있다. 북조의 대표적인 산문작가와 작품에는 양현지(楊衒之)의 〈뤄양 가람기 洛陽伽藍記〉와 역도원( 道元)의 〈수경주 水經注〉 등이 있다. 또한 후한 이래로 계속된 불교경전의 번역이 이 시기에는 질과 양 면에서 모두 증가하여 중국문학의 발전에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 끼쳤다.

3.4 당· 오대 시대(唐五代時代:618~960)

중국문학은 당대(618~907)에 이르러 황금시대를 누렸다.

3.4.1 시가

시가는 특히 이 시기에 대단히 번성했다. 이전의 시체(詩體)가 모두 사용·개량되었으며, 아울러 새로운 형식인 근체시(近體詩)도 형성되었다. 근체시는 구법(句法)상 5언과 7언, 체제상 절구(絶句)와 율시(律詩)의 구별이 있는데 엄격한 격률이 그 특징이다. 율시는 오언율시·칠언율시 모두 8구로 이루어지는데, 평측(平仄)과 압운(押韻)을 쓰는 외에 제3·4구와 제5·6구가 서로 대구를 이루어야 하며 이를 따로 '함련'( 聯)과 '경련'(頸聯)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구는 오언절구·칠언절구를 막론하고 율시의 앞 4구, 뒷 4구, 중간의 4구 또는 맨 처음과 마지막의 각 2구를 절취한 형식이며, 격률은 율시의 규정과 같다. 이 시기에는 위대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호방한 기질로 낭만적인 정감을 노래한 시선(詩仙) 이백(李白:701~762)과 자신이 처한 정치와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성(詩聖) 두보(杜甫:712~770)가 가장 유명하다. 그밖에 산수전원의 아름다움을 그림같이 그려낸 왕유(王維), 변새의 쓸쓸한 풍정을 담아낸 고적(高適)과 잠삼(岑參), 두보의 시풍을 이어받아 왜곡된 사회문제를 평담한 언어로 고발하고 신악부시(新樂府詩)를 제창한 백거이(白居易) 등도 이름이 높았다. 청(淸)나라 때 편찬된 〈전당시 全唐詩〉에는 2,200여 명의 시인들의 작품 4만 8,900여 수가 실려 있다.

한편 당말 오대 때 '' (詞)라고 하는 일종의 새로운 시가형식이 생겨났는데 , 그것은 음악에 맞추어 노래 부를 수 있는 더 자유스러운 형식이었다. 각 구의 자수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장단구(長短句)라고도 부른다. 사는 민간의 악부시가에서 기원하여 중당(中唐) 때 이미 〈억강남 憶江南〉 등과 같은 사 작품이 창작되었으며, 만당(晩唐)에 이르러 비로소 시인들의 주목을 받았고, 오대(907~960)에는 마침내 시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된 지위를 형성했다. 만당의 시인 온정균(溫庭筠:812~870)은 사의 창작에 힘을 쏟은 첫번째 문인으로 '화간파'(花間派)라는 사풍을 창도했다. 오대 남당(南唐)의 군주 이욱(李煜:937~978)은 오대 사단(詞壇)의 대표적 작가로서 초기에는 주로 남녀간의 농염한 애정을 묘사했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는 고국을 그리는 애상을 침울한 어조로 노래하여 과거 화간파의 사풍과는 다른 풍격을 보여 주었다.

3.4.2 민간문학

당말에는 또다른 문학형식인 '변문' (變文)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불교 포교와 관련된 것으로 산문과 운문을 적절히 섞어 강창(講唱)하는 매우 색다른 형식이다. 처음에는 주로 부처의 일생에 관한 일화를 강창했으나, 나중에는 중국의 역사고사와 민간전설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뽑아 강창했다. 변문은 후대 소설과 희곡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4.3 산문

당대에는 산문 방면에 중대한 변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고문의 대가인 한유(韓愈:768~ 824)가 창도한 '고문운동'이다. 그는 1,000여 년 동안 숭상해온 변려체 문장을 일소하고 '문장복고'(文章復古)와 '문이재도'(文以載道)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지만 사실상 문장을 엄격한 형식의 틀에서 해방시켜 자연스러움으로 되돌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같은 시대의 유종원(柳宗元:773~819)은 고문운동의 또다른 대표자로서, 고문체를 운용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애독되는 훌륭한 산수유기문(山水遊記文)과 소품문(小品文)을 창작했다. 고문운동은 또한 당대 '전기'(傳奇)의 발전을 촉진했다. 전기는 수·당 교체시기에 생겨나 당대 중엽 이후에는 매우 번성했다. 일반적으로 고문으로 기술하는데, 편폭은 짧지만 구성이 비교적 짜임새 있으며 애정고사·협의(俠義)고사·신선전기·귀신지괴(志怪) 등의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이공좌(李公佐)의 〈남가태수전 南柯太守傳〉, 원진(元 )의 〈앵앵전 鶯鶯傳〉, 백행간(白行簡)의 〈이와전 李娃傳〉 등을 들 수 있다. 일부 작품은 후대에 소설과 희곡으로 개편되기도 했다. 또한 전기를 진정한 중국소설의 시작으로 여기는 주장도 있다.

3.5 송대(宋代:960~1279)

송나라는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한 나약한 제국이었지만 문학방면은 매우 발전했다. 이러한 문학의 발전은 주로 인쇄술의 발달과 많은 국립학교 설립에 따른 것이었다.

3.5.1 산문

당나라 때 한유가 제창한 고문운동은 북송에 이르러 고문의 대가인 구양수(歐陽修:1007~72)와 소동파(蘇東坡:1037~1101) 등에 의해 계속 이어져 더욱 활발해졌다. 송대의 고문운동은 그후에도 저명한 역사가이자 철학가인 사마광(司馬光:1019~86)과 이학가(理學家)인 주희(朱憙:1130~1200) 등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유미주의적인 문학에 반대하고 꾸밈없는 질박한 고문작품에 찬성했다.

소설방면에서는 판이하게 서로 다른 2가지 추세가 있었는데, 그것은 문언소설(文言小說:고문소설)·화본소설(話本小說)이다. 문언소설은 당의 전기를 답습하여 별다른 창의성이 없었다. 반면에 화본은 민간에서 구어로 이야기를 강창할 때 사용된 대본으로 송대 소설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백화체의 화본은 후대 중국소설의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3.5.2 시가

송시는 우선 내용과 형식에서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는데, 당시(唐詩)와 비교하여 그 특징을 간추리면 철리화·산문화·평담화(平淡化)·통속화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탁월하게 일가를 이룬 시인들이 많이 나왔다. 북송에는 시문의 대가인 소동파와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대표작가인 황정견(黃庭堅) 등이 있으며, 남송에는 우국충정을 노래한 애국시인 육유(陸游:1125~1210) 등이 있다. 특히 육유는 2만 여 수(현존하는 것은 약 9,000여 수)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을 남긴 보기 드문 다작가이다.

송대에는 시인들이 대부분 사를 짓는 데도 뛰어났는데, 사는 일반 문인들과 민간의 중시를 받아 마침내 당당히 송대 문학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인(詞人)으로는 북송의 유영(柳永)·소동파·주방언(周邦彦)과 남송의 이청조(李淸照:1108~ 55?)·신기질(辛棄疾:1140~1207) 등이 있다. 그중 이청조는 중국문학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여류 사인이다. 그밖에 소동파와 신기질은 모두 사의 풍격이 호매(豪邁)하고 의경(意境)이 청신하여 '소·신'으로 병칭된다.

3.6 원대(元代:1279~1368)

북방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한족의 문화와 문학을 천시했기 때문에 자연히 전통문학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반면에 민간문학의 성격이 짙은 희곡과 통속소설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3.6.1 희곡

원대에는 서로 다른 민족들이 한데 섞이게 되자 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언어로부터 일종의 새로운 곡조가 생겨났으며, 아울러 새로운 문학양식의 흥기를 촉진했다. 원대의 희곡(보통 '雜劇'이라고 함)은 과거에 이미 있어왔던 골계희(滑稽戱)·참군희(參軍戱)·괴뢰희(傀儡戱)·영자희(影子戱) 등의 기초 위에 인도 등지 희곡양식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한 작품이 4절로 이루어지고 창(唱:노래)·과(科:동작)·백(白:대사)의 3요소를 갖추고 있다. 비록 당시의 문인들이 다투어 작품을 짓기는 했으나 아직은 정통문학평론가의 중시를 받지 못해 많은 작품들이 미처 기록으로 보존되지 못한 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 총 167편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원래의 1/10도 안 되는 분량이다.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에는 관한경(關漢卿)의 〈두아원 竇娥寃〉,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 漢宮秋〉, 왕실보(王實甫)의 〈서상기 西廂記〉 등이 있다.

3.6.2 시가

원대에는 ' 산곡'(散曲)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가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사의 형식을 타파한 것으로 잡극과 관련성이 있다. 산곡은 잡극보다 늦게 생겨났으며 그 중요성도 잡극에 미치지 못한다. 원곡의 주요작가들은 대부분 산곡에도 뛰어났다.

3.6.3 통속 소설

이 시기의 소설은 당·송대의 소설과는 아주 다른 특성을 지녔다. 우선 작품의 편폭이 전대에 비해 매우 길어졌으며 완전히 백화체를 사용했다. 가장 뛰어난 장편 통속소설가로는 원말 명초의 나관중(羅貫中)을 들 수 있는데, 그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삼국지통속연의 三國志通俗演義〉· 〈수호전〉은 널리 전해내려오는 중국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역사적인 사실과 수백 년 동안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가공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창작된 것으로, 명대의 〈서유기〉·〈금병매 金甁梅〉와 함께 중국의 4대기서(奇書)로 꼽힌다. 또한 명·청대의 장회체(章回體)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3.7 명대(明代:1368~1644)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몽골족의 지배하에서 억압당했던 한민족의 문화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전통적인 시문이 다시 그 중요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과거시험에 사용되었던 팔고문은 그 형식이 너무 까다로워서 시문의 자유로운 발전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3.7.1 전통문학

명대의 문인들은 시·사·산문의 방면에 있어서 대부분 복고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여 '문은 반드시 진·한을 따르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좇는다'(文必秦漢詩必盛唐)는 의고주의(擬古主義)가 팽배했다. 이러한 복고운동은 모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창의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그 성취는 사실상 당·송대의 고문운동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다. 이른바 '전·후 칠자'(前後七子)를 중심으로 한 의고주의 문학은 대체로 진·한의 문학을 숭상하는 진한파와 한유의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주장을 강조하는 당송파로 대별된다. 이러한 의고주의 문학사조는 명대 전체를 휩쓸다가 명대 말엽인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원씨(袁氏) 3형제(袁宗道·袁宏道·袁中道)가 주도한 공안파(公安派)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문학의 진화성을 주장했으며 훌륭한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성령'(性靈)을 강조했다. 공안파와 그뒤를 이은 종성(鍾惺)·담원춘(譚元春)이 중심이 된 경릉파(竟陵派)의 영향으로 명말에는 청신하고 미려한 소품문(小品文)이 창작되었다.

3.7.2 통속문학

명대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통속문학인 희곡과 백화소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희곡은 ' 전기'(南曲이라고도 함)가 매우 성행했는데, 전기는 송대의 희곡인 '희문'으로부터 발전해온 것으로, 북곡(北曲)인 잡극과 구성상 많은 차이가 있다. 전기는 원래 민간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후로 점차 문인들의 지지를 받아 잡극을 누르고 희곡문학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초기의 전기 작품으로는 고명(高明)의 〈비파기 琵琶記〉가 가장 유명하다. 〈비파기〉 이후로 전기는 잠시 침체하기도 했으나 곧 다시 성행했다. 이러한 전기의 부흥은 여러 지방의 서로 다른 곡조를 개량하여 '곤강'(崑腔)이라는 새로운 곡조를 만들어낸 위양보(魏良輔)와 곤강을 사용하여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고 이를 널리 유행시킨 양진어(梁辰魚)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곤강은 감미로운 노래와 섬세한 음악성 때문에 그후 18세기말까지 중국 극단을 지배했다.

명대 중엽 이후에는 소설 창작도 크게 진전되었다. 우선 장편 백화소설의 대표작으로 오승은(吳承恩)의 〈서유기〉와 작자 미상의 〈금병매〉를 들 수 있다. 〈서유기〉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玄)이 천축국(天竺國: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고사에 근거하여 100회의 장회체 신마소설(神魔小說)로 확대·부연한 것이다. 〈금병매〉는 100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인공인 서문경(西門慶)과 그 처첩들의 음탕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일찍이 음서(淫書)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통속소설과는 달리 철저하게 현실사회를 다룬 사실주의적인 묘사수법은 중국소설사에서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밖에 단편 백화소설도 크게 유행했는데, 송대의 화본을 모방했다 하여 '의화본'(擬話本)이라 부른다. 그 대표작품에는 풍몽룡(馮夢龍)의 3언(三言:〈喩世明言〉·〈警世通言〉·〈醒世恒言〉)과 능몽초(凌 初)의 2박(二拍:〈初刻拍案驚奇〉·〈二刻拍案驚奇〉)이 있다.

3.8 청대(淸代:1644~1911/12)

청은 이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였지만 역대 군주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학술·문학 등을 옹호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청대의 문학은 고증학으로 대표되는 학술 조류의 영향으로 복고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이전 시대의 모든 문학양식이 고루 발전했다. 특히 고전문학에 대한 정리와 연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3.8.1 시문

청대의 시단에는 전체 문학의 복고적인 조류 속에서 여러 유파가 생겨났으나, 대체로 당시를 숭상하는 종당파(宗唐派)와 송시를 숭상하는 종송파(宗宋派)로 나눌 수 있다. 오위업(吳偉業)이 창시한 종당파는 그후 왕사정(王士禎)·원매(袁枚)·심덕잠(沈德潛) 등이 각기 다른 시론을 내세워 발전시켰으며, 종송파는 전겸익(錢謙益)이 주도했다. 또한 이러한 유파와는 달리 자신의 창의와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풍을 세우려던 시인들도 있었다. 청말에는 황쭌셴[黃遵憲]을 중심으로 한 ' 시계혁명'(詩界革命)이 일어나 이제까지의 복고주의적 성향을 타파하고 전통적인 중국시의 내용과 형식을 개혁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후대 백화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는 청대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이하여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으며 사에 관한 이론·평론도 활발했다. 초기에는 납란성덕(納蘭性德)이 사단을 대표했고, 그후로 주이존(朱彛尊)·진유숭(陳維崧)·장혜언(張惠言) 등이 각기 다른 사풍의 작품을 지었다. 산문 방면은 당시의 학술 조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고증을 중시하고 실질을 숭상했다. 특히 방포(方苞)·유대괴(劉大)·요내(姚 )를 중심으로 한 동성파(桐城派)가 청말까지 문단을 지배해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

3.8.2 소설

소설은 청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소설의 형식과 내용이 모두 발전했는데, 일부 문언소설이 창작되기도 했지만 그 주류는 역시 장편 백화소설이었다. 포송령(蒲松齡)이 지은 〈요재지이 聊齋志異〉는 중국 문언소설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여우·혼령·신선·기인·동식물·꿈 등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431편을 모은 것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요물들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어서 친근감을 주기도 하며, 봉건예교와 정치를 완곡하게 비판한 것도 있다. 오경재(吳敬梓)가 지은 〈유림외사 儒林外事〉는 55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거제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관료정치제도의 모순과 사회의 부패 등을 주로 묘사하여 풍자소설의 걸작으로 꼽힌다. 조설근(曹雪芹)이 지은 〈홍루몽 紅樓夢〉은 총 120회이며, 관료집안인 영국부(寧國府)와 영국부(榮國府) 두 가문의 몰락과 가보옥(賈寶玉)을 중심으로 12명의 미녀들이 펼치는 애정고사를 묘사한 것으로 중국 인정소설의 최고작이다. 〈홍루몽〉에 관한 비평과 연구는 대단히 활발하여 '홍학'(紅學)이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이다. 청말에는 주로 조정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을 신랄하게 질타하는 이른바 '견책소설'(譴責小說)이 유행했는데, 유악(劉 )의 〈노잔유기 老殘遊記〉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3.8.3 희곡

희곡은 명대 전기의 발전을 계승, 청대 중엽에 대단히 성행하여 홍승(洪昇)의 〈장생전 長生殿〉, 공상임(孔尙任)의 〈도화선 桃花扇〉 같은 명작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후로는 새로운 곡조인 피황조(皮簧調)가 유행함에 따라 곤강에 의거한 전기는 급속히 쇠퇴하고 여러 지방희(地方戱)가 대두했으며, 이를 통합·발전시킨 경극(京劇)이 마침내 탄생되었다.

3.8.4 번역문학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서유럽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자연히 서양의 학술서적과 문학작품이 들어와 번역되기 시작했다. 서양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번역소개한 사람은 옌푸[嚴復]였다. 특히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천연론 天演論〉은 당시의 지식인과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문학작품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린수[林 ]인데, 그는 외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의 구술에 의지해 무려 170여 권에 달하는 각국의 작품을 번역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고문의 명수였기 때문에 그들의 번역서는 모두 미려한 고문으로 씌어졌다.

3.9 현대(1911/12~)

3.9.1 5·4시기(1912~27)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다음해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문학을 개혁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신문학혁명을 주장한 첫번째 주자는 후스[胡適]였다. 그는 1917년 1월 〈신청년 新靑年〉이란 잡지에 〈문학개량추의 文學改良芻議〉를 발표하여 구문학의 병폐를 지적한 이른바 '팔불주의'(八不主義)를 주장했다. 다음달 천두슈[陳獨秀]는 〈신청년〉 2월호에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여 후스의 주장을 발전시켰다. 1918년 7월 후스는 다시 〈건설적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여 '국어의 문학, 문학의 국어'(國語的文學文學的國語)를 주장하고 신문학운동의 요지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신문학운동은 1919년 5월 4일에 일어난 5·4운동의 영향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5·4운동은 정치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굴욕적인 외교에 대한 항의가 발단이 된 학생운동이었으나, 그 정신적인 배경은 문학혁명을 포함한 신문화운동이었다. 1920년대 초기에는 뜻을 같이 하는 작가들이 모여 문학단체를 결성했는데, 그중 문학연구회(1921. 1 설립)와 창조사(1921. 7 설립)가 대표적이다. 문학연구회는 저우쭤런[周作人]·마오둔[茅盾] 등이 발기하여 '인생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사실주의적 문학을 제창했다. 창조사는 궈모뤄[郭沫若]·위다푸[郁達夫] 등이 발기하여 초기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낭만주의적 문학을 제창했으나, 후기에는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궈모뤄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문학의 계급성을 논한 '혁명문학'을 주장했다. 이로써 창조사는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 문학이론을 수용한 문학단체가 되었다. 이 시기는 사실상 이 두 문학단체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시기의 소설은 루쉰[魯迅]의 〈광인일기 狂人日記〉(1918)· 〈아큐정전 阿Q正傳〉(1921)을 비롯해 위다푸의 〈침륜 沈淪〉(1922) 등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광인일기〉는 한 정신병자의 일기를 빌려 중국사회를 비판한 문학혁명운동 최초의 결실이며, 〈아큐정전〉은 우매한 주인공 아큐를 통해 중국 민족성의 약점을 폭로하고 중국혁명의 근본적인 과제를 파헤친 작품으로 중국 현대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시에서는 최초의 백화시집인 후스의 〈상시집 嘗試集〉(1920)이 나온 이래 주쯔칭[朱自淸]·궈모뤄·쉬즈모[徐志摩] 등이 각자 시집을 발표하여 신시의 내용과 형식을 발전시켰다. 연극에서는 톈한[田漢]이 수준 높은 많은 극본을 창작하여 신극 발전에 공헌했다.

3.9.2 좌련시기(1927~37)

1927~28년 일본에서 돌아온 신진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제3기 창조사와 1928년에 결성된 태양사(太陽社)가 혁명문학의 창작방법과 문학의 대중화 문제를 둘러싸고 루쉰·마오둔 등의 진보파를 포함한 기성문단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서 1927년부터 국민당이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자, 1930년 마침내 혁명문학파와 기성문단의 진보파가 연합하여 루쉰을 대표로 하는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약칭 좌련)을 결성했다. 좌련은 '문예대중화논쟁'과 같은 내부의 논쟁과 '문예자유논쟁'과 같은 외부와의 논쟁을 거치면서 1930년대 중국문학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소설작품은 다음과 같다. 마오둔은 1930년대 상하이[上海]를 무대로 기업자본가들의 행태를 통해 당시 중국사회의 경제적·사회적 혼란상을 묘사한 〈자야 子夜〉(1933)를 발표했다. 라오서[老舍]는 군벌통치하의 베이징[北京]을 무대로 한 젊고 순박한 인력거꾼의 비극적 생애와 몰락을 묘사하여 냉혹하고 암담한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한 〈낙타상자 駱駝祥子〉(1936)를 발표했다. 바진[巴金]은 5·4시기 봉건대지주 가정의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을 묘사하여 봉건예교를 비판한 〈집 家〉(1931)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시는 쉬즈모·량스추[梁實秋]·원이둬[聞一多] 등을 대표로 한 신월파(新月派:1928 〈신월〉 창간)와 다이왕수[戴望舒]를 대표로 한 현대파(現代派:1932 〈현대〉 창간)의 시인들이 크게 활약했다. 신월파는 시의 음률미와 형식미를 추구했으며, 현대파는 프랑스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 암시성이 강한 창작경향을 보였다. 그후 신월파의 영향을 받은 장커자[臧克家]와 아이칭[艾靑]은 아름다운 음률과 형식 속에 현실문제를 과감하게 투영하여 중국 현대시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연극에서는 1928년부터 남국사(南國社)라는 연극단체를 결성하여 연극운동을 직접 실천하면서 많은 극본을 창작한 톈한, 관료자본가 가정의 몰락을 통해 착취계급의 죄악과 빈민의 비참한 운명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뇌우〉의 작자 차오위[曹 ]대표적이다. 특히 〈뇌우〉는 중국 현대연극사상 불후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산문에서는 루쉰이 이른바 '루쉰 필법'이라고 부르는 비수처럼 예리한 필봉으로 수많은 잡문(雜文)을 써내어 현실을 비판·풍자했다.

3.9.3 항전시기(1937~49)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맺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다. 이에 따라 문인들도 1938년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약칭 문협)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1939년 국공합작이 결렬됨에 따라 중국은 국민당 통치구와 옌안[延安]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통치구로 나뉘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초기의 항일열기가 점차 시들어가자, 1942년 5월 마오쩌둥[毛澤東]은 '옌안 문예좌담회상의 강화'[在延安文藝座談會上的講話:약칭 문예강화]에서 예술성과 정치성의 통일을 전제로 노동자·농민·병사를 위한 문학을 창조해야 한다는 문예노선을 확정하여 공산혁명을 위한 문예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중국의 문학은 문예강화의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창작되고 전투적인 임무를 수행한 것은 보고문학(reportage)으로, 국민들에게 항일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민당 통치구에서는 아이칭·마오둔·바진·라오서·차오위 등이 시·소설·연극 분야에서 대부분 항일을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했다. 공산당 통치구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오수리[趙樹理]·딩링[丁玲]·저우리보[周立波]를 들 수 있다. 자오수리는 문예강화의 정신을 최초로 실현해낸 작가로 농촌의 계급투쟁을 진실되게 반영한 〈리유차이의 노래 李有才板話〉(1943)를 창작했으며, 딩링과 저우리보는 1946년에 시행된 공산당의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제재로 하여 장편소설 〈태양은 쌍간 강에서 빛난다 太陽照在桑乾河上〉(1948)·〈폭풍취우 暴風驟雨〉(1948)를 지었다. 또한 중국 고유의 민족풍격을 지닌 최초의 대형가극 〈백발의 아가씨 白毛女〉가 창작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서북부의 농촌에 전해오던 '백발선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3.9.4 1949년 이후의 중국문학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의 중국문학을 보통 당대문학(當代文學)이라 부르는데, 당대문학은 다시 제1기(1949~ 66)·제2기(1966~76)·제3기(1976~)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는 사회주의 문학의 개척과 전진시기이다. 1949년 제1차 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의 문예강화가 정치와 문학을 결합한 최고의 문예방침으로 확인되었다. 1953년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제창되었고, 1957년에는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이라는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곧 반우파투쟁으로 이어졌다. 1960년에는 '혁명적 리얼리즘과 혁명적 로맨티시즘'이 문학과 예술의 일반적·보편적인 법칙으로 제기되었다. 제2기는 문화대혁명 기간으로 문학의 불모시기였으며 다만 혁명적 현대 경극만이 성행했다. 제3기는 이른바 신시기문학의 시기이다. 옛 작가들의 복귀와 함께 류신우[劉心武]의 〈담임선생 班主任〉(1977), 루신화[盧新華]의 〈상흔 傷痕〉(1978)과 같은 단편소설이 일제히 나와 문화대혁명 기간에 당했던 상처와 비극을 폭로함으로써 '상흔문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조성했다. 1981년부터는 신시기 개혁운동을 고취시키는 일련의 작품이 또하나의 조류를 형성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중기부터는 개방이라는 사회 분위기와 함께 문단에서도 다양한 창작방법과 조류가 대두되고 있다.

3.9.5 1949년 이후의 타이완 문학

국민정부가 타이완으로 옮겨온 이후 10년 동안은 전형적인 반공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품에는 장아이링[張愛玲]의 〈앙가 秧歌〉(1954)와 창궤이[姜貴]의 〈선풍 旋風〉(1959) 등이 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 모더니즘 문학이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여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 영향을 미쳤다. 바이셴융[白先勇]의 〈유원경몽 遊園驚夢〉(1982)이 이 시기의 대표작품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이른바 '향토문학'(鄕土文學)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의 문학조류를 형성했다. 향토문학은 본래 향토성·소박성·민속성을 띤 따뜻하고 흙 냄새 풍기는 문학으로 출발했으나, 1970년대 초기 국내외의 정치적·사회적 여러 요인으로 말미암아 현실참여와 비판을 주장하는 문학으로 변모했다. 황춘밍[黃春明]의 〈한 마리 고양이의 익사 溺死一隻老猫〉(1980)가 대표작이다. 한편 197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 본토의 문학작품이 타이완의 잡지에 때때로 등장하기도 한다.

3.10 참고문헌

중국문학

  • 3.10.1 개론·역사

    • 중국문학서설 : 전야직빈, 김양수·최순미 공역, 창, 1992
    • 중국신화전설(대우학술총서 53) : 원가, 전인초·김선자 공역, 민음사, 1992
    • 중국문학사 전2권 : 김영덕 외 편저, 청년사, 1991
    • 중국문학사 : 차상원·차주환·장기근 공저, 명문당, 1990
    • 중국문학사 : 김학주, 신아사, 1989
    • 중국속문학개론 : 김학주·이종진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 출판부, 1987
    • 중국고대문학사 : 허세욱, 법문사, 1986
    • 중국문학사 전2권 : 김학주·이동향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 출판부, 1986
    • 중국고대문학사(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5) : 김학주, 민음사, 1984
    • 中國文學史 : 吉川次郞述, 黑川洋一 編, 岩波書店, 1974
    • 中國新文學運動史 全2卷 : 尾坂德司, 法政大學出版局, 1957, 1965
  • 3.10.2 운문학

    • 중국당시선주 : 유성준 선주, 송산출판사, 1991
    • 중국고대명시선(혜원세계시인선 22) : 도연명 외, 허세욱 역주, 혜원출판사, 1990
    • 중국시가예술 연구 : 원행패, 강영순 외 역, 아세아문화사, 1990
    • 중국현대명시선 1·2(혜원세계시인선 23) : 류타바이 외, 허세욱 역주, 혜원출판사, 1990
    • 당송사 일백수 :, 안의운 역, 정우사, 1988
    • 중국 시경의 이해와 감상 : 김한룡 편, 대일출판사, 1988
    • 중국역대시가강독 : 김학주·이영주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 출판부,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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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역대시선 : 허세욱 편주, 신아사, 1983
    • 屈原(岩波新書) : 目加田誠, 岩波書店, 1966
  • 3.10.3 산문학

    • 중국고전소설작품선 하(중국문학작품선독 2) : 서경호 편, 지식산업사, 1991
    • 원·명·청 희곡선 : 강계철 편주, 명지출판사, 1990
    • 중국우언전기연구 : 안병설, 국민대학교 출판부, 1988
    • 중국역대산문선독 : 최완식·이영주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 출판부, 1987
    • 중국소설사략 : 魯迅, 정범진 역, 학연사, 1987
    • 중국역대정기문선 : 강계철 편, 명지출판사, 1986
    • 중국현대산문선 : 김시준 편주, 신아사, 1986
  • 3.10.4 현대문학

    • 중국 현대문학의 이해(한길인문사회과학기초지식 13) : 김하림·유중하·이주로 공저, 한길사, 1991
    • 중국당대문학사(중국학술사상 14) : 김종수·최건 공저, 청년사, 1991
    • 중국현대문학발전사 : 황수기, 고려대학교 중국어문연구회 역, 범우사, 1991
    • 중국현대문학사(비평총서 38) : 권철·김제봉 공편저, 한겨레, 1989
    • 중국현대문학운동사 1(중국청서 3) : 주덕발 외 편, 임춘성 역, 전민, 1989
    • 중국현대문학작품선 : 김시준·박운석 공편, 지식산업사, 1989
    • 중국현대문학론 : 김시준·이충양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 출판부, 1987
    • 중국신문학사화 : 김철수 역주, 동화출판공사, 1983
    • 老舍小說全集 全10卷 :, 蘆田孝昭·竹中伸ほか 譯, 學習硏究社, 1981
    • 中國現代文學選集 全20卷 : 小野忍ほか 編, 河出書房新社, 1971
  • 3.10.5 사전

    • 중국문학사전 1 :, 연세대학교 중국문학사전편역실 편역, 다민,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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