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3
“여기서 얼마 가지 않으면 56번 국도가 나타날 거야.”
“마을 쪽이 더 가까울 것 같은데.”
나라고 왜 모르랴. 그러나 설령 이 자리에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은정의 할머니가 사는 10호 동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은정과 행선지를 두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독단을 부려 혼자 국도 쪽을 바라고 생눈길을 헤쳐 나갔다. 금시 눈가루가 구두 안에 가득 들어찼다.
은정도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으므로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기가 힘든지 자주 눈길에 넘어지며 휘청거렸다.
보기가 안쓰러운 나머지 한마디 했다.
“내 등에 업혀.”
평소라면 그 말은 결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상상황에서는 결례가 아닌 자연스러운 호의로 들렸다. 그것은 깊은 계곡의 칠흑 같은 어둠과 폭설만이 줄 수 있는 용기였다. 그 용기의 이면에는, 밤중에 그녀를 업고 눈길을 헤쳐가야 하는 간고함이 있을지언정 몸의 밀착을 통해 짜릿한 흥분을 맛보려는 음심 같은 건 없었다. 환경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임을 그때 알았다.
“힘들 텐데....오빠가...”
날씬한 몸매인지라 무거울 리는 없다. 종아리를 치는 적설을 헤쳐야 하는 노고를 감안한 우려가 아니면 미안함의 완곡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녀는 호의를 외면하지 않고 순순히 내 등에 업혔다.
문득 뭉클하고 등에 와 닿는 그녀의 터지도록 익은, 탄력 있고 한껏 부푼 가슴이 싱싱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냥 정 교수의 금쪽같은 공주님이고 정 교수가 반 강제로 맺어준 연인일 뿐 성적 자극을 주는 이성까지는 아니었다. 눈부신 미모와 요란한 가문, 남자친구에 대한 그녀의 초연하고 심드렁하고 심지어는 무심하기까지 한 태도… 이런 것들은 나에게 유혹과 매력이기에 앞서 부담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밤, 이 폭설 속에서 느닷없이 은정이 섹시한 이성으로 느껴져 나는 잠시나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잠시였을 뿐 나는 그녀를 업고 생눈길을 헤쳐야 하는 육체적 고통 속에 금시 빠져들고 말았다. 이처럼 힘겨운 노정이 운명의 어떤 숙명적인 정거장에 이를지 전혀 모른 채 미지의 어둠 속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었다. 다행이도 나의 신체적 잠재력은 그만한 고통을 감당하기에는 족했다. 저기 어둠 속 깊은 곳에 누추한 시골민박이 정욕의 향연이 펼쳐질 돗자리를 깔아놓고 숨어서 우리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르야왈교와 카르젤교 그리고 아르교에 이르는 긴 거리를 걷는 동안 세계최대의 웅장 화려한 루브르박물관의 건물이 끝없이 이어진다. 철제구조물로 건축된 아르교 밑으로 거대한 유람선 바토무슈가 천여 명의 관광객을 싣고서 객석의 유리지붕에 햇빛을 번뜩이며 통과하고 있었다. 선상의 관광객들이 즐거운 듯 둔치를 향해 손을 젓고 있는 모습이 의식에게 무시당한 시선을 유혹한다. 알렉산더3세교에서 퐁 뇌프교에 이르는 길이 약 3 리 정도의 강변로의 풍경은 언제나 나의 시선을 농락하고 의식의 지배에서 유혹해가곤 한다. 한강보다는 작지만 육중한 콘크리트구조물로 차단되어있지 않고 강기슭에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친환경적분위기가 유다른 정취를 맛보게 한다. 거기에 가미된 역사적 건축물들과 유물들은 마치도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을 방불케 하고 있다. 경박함과 조잡함과 오만함에 가득 찬 서울과는 다른, 파리만이 거느리고 있는 이끼 푸른 중후함과 깊은 정취에 흠뻑 도취되는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는 밀려드는 졸음을 물리치느라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졸음은 아직도 지남 밤 숙면을 약탈했던 할머니의 꿈 장면을 꽁무니에 길게 거느리고 공격해온다.
나는 방구석에 몸을 옹송그린 채 숨을 죽이고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병풍 뒤에는 망자亡者의 시신이 안치되었고 마당에는 죽은 자의 옷과 가마니를 말아 만든 영돈영혼이 세워져 있었다. 떵떵거리는 징소리, 깽깽거리는 해금소리, 덩더꿍거리는 장구소리, 넋풀이를 하는 할머니의 무가巫歌와 푸념조의 사설소리… 나에게는 지옥에서의 귀신놀음 같아 보여 소름이 끼쳤다.
눈 같이 하얀 무복巫服차림에 지전을 들고 너울너울 굿춤을 추는 할머니는 무시무시한 유령 같았고 소복차림의 귀신같기도 했다. 병풍에 매달려 너풀거리는 종이 넋이며 지방紙榜들, 망인의 음울한 영정影幀은 공포의 분위기를 더해준다.
어, 신인 줄 몰랐더니
오늘 보니 신이로세
넋일랑은 오시거든
넋 당삭에 모셔놓고
신일랑은 오시거든
신상에 담아놓고
악절 첫마디에 강박强拍이 온 뒤로는 급격한 하강음으로 곤두박질하는 계면조의 구슬픈 멜로디는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피를 토하는 듯한, 숨이 꺽꺽 막히는 듯한 진양조장단의 느린 지속음들과 4도, 5도 음정 내의 꺾음 소리에 나는 저도 모르게 전신에 식은땀을 질퍽하게 흘렸고 숨이 막혀 얼굴색마저 하얗게 질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은정의 전화벨소리에 공포의 꿈속에서 깨어났기에 망정이지 그대로였다면 숨 막혀 죽었을지도 모를 번했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벌써 내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찾아뵙지 않았으니 인연이 단절된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는데 왜 아직도 꿈속에 자꾸만 나타나는 걸까? 게다가 꼭 무당의 모습, 굿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니 이 또한 영문을 알 길이 없다.
56번국도변의 무슨 리里라고 하는 자그마한 시골동네에 당도했을 때는 자정도 가까운 깊은 밤이었다. 멀리 동네 끝에 여관 간판이 눈발 속에 희미하게 보였지만 눈길을 헤치고 나오느라 탈진할 대로 탈진한 나는 이제는 한걸음도 더 옮길 수 없을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대로 길섶의 어느 가까운 민박으로 들어갔다.
추위에 꽁꽁 언 은정은 몸을 화들화들 떨고 이까지 덜덜 맞부딪쳤다. 나도 그녀를 등에서 내려놓고 국도를 걸어오는 사이 어느새 전신을 흠씬 적셨던 땀이 식으며 오한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늙은 노파가 하반신을 이불 속에 들이민 채 숙박료를 챙기더니 퉁명스레 한마디 내뱉었다.
“아무 데나 마음에 드는 방에서 자게나.”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다는 얘기다. 단 둘만의 세상. 조금은 야릇한 분위기이기 십상일 법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한을 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우선 필요했다.
그러나 어느 방이든 썰렁하고 한적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게다가 한기에 꽁꽁 얼어붙어 몸을 녹이기에는 아예 틀렸다. 보일러를 고온에 작동시켰지만 한 시간 안에는 방안에 깊숙이 도사린 동기冬氣를 몰아낼 것 같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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