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2
“해금연주는 훑고 떨고 비벼주기를 잘해야 된다.”
등 뒤에서 내 손을 잡고 연주법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시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전에서 들렸다.
이럴 수가?!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해금이 아닌가.
의식이 기억의 폐허를 뒤지는 순간에도 시선은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물을 포착해나갔다. 콩코드광장에 우뚝 솟은 뤽서 오벨리스크는 거대한 장검처럼 장엄한 모습이다. 높이 23m, 무게 230톤이나 되는 연분홍 대리석비면에는 고대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3세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상형문자는 3000년이나 되는 이 유물의 신비함을 더해준다.
56번국도변의 그 허름한 민박…
의식은 짓궂은 시선의 낙서를 외면하고 또다시 사라지려는 기억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한사코 늘어진다. 그 밤이 없었다면 오늘 나는 은정과의 통화 때문에 내 의지를 상실하고 선택 앞에서 망설이지는 않았을 터인데…
시골행차를 틈타 그녀와 섹스 같은 걸 벌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 자신도 그녀와의 정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지금까지도 어리둥절할 뿐이다.
“엄마가 오늘 밤 공연이 있어서 그러니 너희들이 엄마 대신 할머니생신축하차 강원도에 다녀오너라.”
의대를 금방 졸업한 은정과 음대졸업생인 나는 각자 장래진로를 고민하며 집에서 취직 전의 한가한 시간을 소일하던 참이었다. 그즈음 정 교수는 벌써 나를 사윗감으로 지정해놓고 있었다.
은정은 불복했지만 결국 엄마의 권위와 위엄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나 역시 내키지는 않았지만 집에 있어보았자 저녁에는 국악공연을 관람해야겠기에 그것이 싫어서 그녀와 동행하기로 했다.
6번국도, 44번국도, 56번 국도를 번갈아 달리는 동안 우리들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나는 좌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느긋하게 잠이 들었고 그녀는 묵묵히 운전에만 열중했다. 솔직히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은정의 모친에 의해 인연의 매듭이 간신히 이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보여준 국악의 『천부적 재능』이 정 교수를 감동시켰고 그 감동이 딸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관심이 없다고 해서 서로를 싫어하거나 냉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세상 인연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좋아하는 것은 남의 것이 되고 자신에게 차례지는 건 사랑이 없는 인연 뭐 이런 거.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날 아침부터 눈발이 더욱 굵어지더니 하늘이 무너질 듯이 폭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국도를 벗어나 강원도 오지의 산골비포장도로에 들어서니 벌써 눈이 발목까지 깊이 쌓여 주행이 힘겨웠다. 귀경길이 막히지나 않을까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와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았기에 침묵 속에 깊숙이 묻어버린 화제를 파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우리를 함께 하게 한 것은 은정에게는 엄마의 강요였고 나에게는 국악공연으로부터의 도피였다. 그것으로 족했다. 정말이지 비상상황을 악용하여 정사 같은 걸 가져보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눈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우려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골민박집에서 체류하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아침의 기상정보는 어제부터 내리던 눈은 오늘 오전까지만 눈발을 뿌리고 오후에는 개일 것이라고 했으니까.
솔레르노교는 교각이 두 개뿐인 소박한 다리이다. 강남 쪽에는 인상파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오르세미술관이 보이고 이쪽 기슭에는 밤나무들과 라임나무숲이 우거진 튈르리정원이 펼쳐져있다. 기하학적 대칭구조의 정원에는 청동조각상들이 햇빛을 붉게 반사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 모든 풍경들은 내 기억 속에 어떠한 흔적이나 낙서도 남기지 못하고 의식의 봉쇄된 성문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인가. 그 수많은 낙서들- 할머니의 꿈, 은정의 전화, 민박에서의 어리둥절한 정사, 마르셀교수의 질책…
내 몸은 센 강변을 걸어가고 내 시선은 강변의 풍경을 포착하고 내 의식은 과거의 추억을 �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과연 나 자신의 의지의 결단에서 행해지는 걸까?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감시하고…
강설과 어둠이 내린 밤길도 마다하고 당일로 상경을 강행하게 된 이유는 10여 호의 노인들만 모여 사는 산골동네의 편벽함과 적막함도, 시골집의 잠자리가 불편해서도 아니었다. 장래손자사위라며, 어미한테서 벌써 전화연락이 왔다며 솔 껍질 같은 손으로 연신 내 손과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도를 넘는 친절에 부담을 넘어 불쾌감까지 들었고 마치도 옥살이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한 눈길로 TV브라운관만 쳐다보았을 뿐이다. 오후에는 갠다던 천기는 갑자기 대설경보로 바뀌었고 그래서 강원도산악지대와 대관령에는 타이어에 체인을 장착하고서도 차의 운행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내세운 상경이유는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자칫 하다가는 이곳에 갇혀 가도오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날 은정이 팔소매만 슬쩍 당겼어도 민박집의 그 질탕한 정사는 없었을 것이다. 출발의향을 밝히는 나를 제지할 대신 그녀 역시 말없이 극구 만류하는 할머니와 작별하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진작 적설에 산길이 두절되었을 거라거나 날이 너무 어두웠다거나 나의 무리한 강행을 설득할 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나의 상경제의에 묵언으로 동조했던 그녀의 속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산골의 먹물 같은 어둠 속에 눈발까지 촘촘해 시창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인적이 뚝 끊긴 산골길은 수레바퀴자국 하나 없이 비단 필 같은 숫눈이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타이어는 자꾸만 공회전을 하며 비탈에서 줄줄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은정은 묵묵히 운전에만 신경을 쏟았다. 가끔 내가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길에 내려서 차를 밀어야만 했다. 그럴 때도 둘의 의사표현은 말이 아닌 눈치에 의거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밤의 눈길을 헤치고 민박집의 정사에로 향해가고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냥 그 운행은 단순히 상경길이였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는 끝내 56번 국도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길가의 눈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추위는 뼈를 엘 듯 엄습하고 게다가 카 히터마저 고장 나 눈 내리는 깊은 산골에 오도가도 못하고 발이 묶이고 말았다. 여기서 대책 없이 어물거리다가는 동상을 입을 위험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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