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전쟁사
대마도정벌 (對馬島征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일. 대마도 원정은 좁은 뜻에서는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한 일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고려 창왕(昌王) 때와 조선 태조(太祖) 때의 정벌까지도 포함한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의 해협에 위치하여 중개역할을 하는 특수한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하여야 하므로 고려 말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朝貢)의 형식을 취하여 그 대가로 미곡(米穀)을 받아갔으며, 조정에서도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우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대마도에 기근이 심할 때면 그들은 해적으로 돌변하여 해안을 약탈하므로 조정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다. ① 1389년(공양광 1) 2월에 박위(朴)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찾아왔다. ② 96년(태조 5)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③ 1419년(세종 1) 6월에 다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도주(島主) 소 사다시게[宗貞芽]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이었는데, 대마도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왜구는 대거 명나라 해안으로 향하던 중, 비인현(庇仁縣:舒川) 도두음곶(都豆音串)과 해주(海州) 해안을 약탈하였다. 조선에서는 왜구의 창궐과 행패가 새 도주 소 사다모리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하여 이종무를 삼군도제찰사로, 우박(禹博)·이숙묘(李淑畝)·황의(黃義)를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유습(柳濕)을 좌군도(左軍都)절제사,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 김을지(金乙知)·이순몽(李順夢)을 우군절제사, 도합 9절제사에게 삼남(三南)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을 주고 마산포(馬山浦)를 출발하게 하여 대마도로 진격시켰다. 당시 일본에서는 규슈[九州]의 제후(諸侯)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하게 하였으므로 원정군은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 수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해 6월에 회군하였다. 이 해가 기해년이었으므로 이 정벌을 일명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김해성싸움 (金海城-)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초기에 김해성에서 벌어진 싸움. 이때 김해성을 김해부사(金海府使) 서예원(徐禮元)이 지키고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거느린 왜군이 이 성을 공격하였다. 왜군은 성 밖에 있는 볏집과 보리를 베어다가 성의 높이만큼 쌓아놓고 그 위에서 김해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성 안에서 같이 싸우고 있던 초계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이 겁을 먹고 먼저 도망하자 다른 군사들도 따라서 도망쳤으며, 나중에는 부사 서예원도 도망쳐 진주(晋州)로 달아나버리니, 성은 결국 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사량진왜변 (蛇梁鎭倭變)
1544(중종 39) 사량진에서 왜인이 일으킨 약탈사건. 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부산포(釜山浦) 등의 삼포를 폐지하였으나, 왜인의 간청으로 12년에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왜인의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였다. 그러나 왜인의 행패가 여전히 계속되던 중, 44년 왜선 20여 척이 경남 통영시 원량면(遠梁面) 진리(鎭里)에 있던 사량진에 침입하여 사람과 말[馬]을 약탈해 갔다. 조정에서는 거듭되는 왜인의 조약위반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가 사량진의 왜변을 계기로 임신조약을 폐기하고 왜인의 조선 왕래를 엄금하였다.
녹둔도사건 (鹿屯島事件)
1587년(선조 20) 여진족(女眞族)이 녹둔도를 공격한 사건. 녹둔도는 조선과 청(淸)나라의 국경지대인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속한 섬인데, 83년(선조 16) 이후 당시의 감사 정언신(鄭彦信)이 군량(軍糧)을 비축할 목적으로 거기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86년에는 선전관(宣傳官) 김경눌(金景訥)을 둔전관으로 임명하고, 또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으로 하여금 둔전을 아울러 관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87년 가을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이 군대를 인솔하고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데, 추도(楸島)에 있던 여진족이 갑자기 침입하여 수장(戍將) 오향(吳享)·임경번(林景藩)은 전사하고, 이경록과 이순신이 겨우 적군을 격퇴하였다.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이경록·이순신에게 지우고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해임에 그쳤다.
건주여진정벌 (建州女眞征伐)
조선 전기에 남만주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한 일. 조선은 1403년(태조 3) 명나라가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해 그 거주지역에 건주위를 설치하자, 그 해 강계부(江界府)를 설치하여 여진을 통제하는 한편, 1406년에는 함경도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조공무역·국경무역을 허락하는 등 여진족에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폈다. 두만강·압록강 북안(北岸)의 산간부에서 농업·수렵·목축 등으로 생업을 영위하던 건주여진은, 관직·주택·토지를 주며 귀순을 장려한 조선의 회유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변방을 자주 침범하였고,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선이 설치한 4군 6진을 철폐한 뒤로는 더욱 침범이 심하였다. 명나라도 변방에서 준동하는 그들을 통제할 수 없어 조선에 여진을 정벌하자는 제의를 하게 되었다. 마침 67년(세조 13)에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토벌군(討伐軍)이 북진하였는데, 그 병란이 진정되었을 무렵 명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를 협격(挾擊)하자고 제의해왔다. 이에 세조의 명을 받은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은 군사 약 1만을 이끌고, 길주에서 북상하여 건주위의 본거지에 이르러 여진족을 쳐서 성을 함락시키고 이만주 부자(父子)를 죽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여진족은 수시로 조선의 북쪽 국경을 침입하였는데, 79년(성종 10) 명나라의 제의로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하여 군사 4,000이 공격하였으나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여진족 중의 일파인 건주좌위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17세기 초에 청(淸)나라를 세웠다.
삼포왜란 (三浦倭亂)
1510년(중종 5) 3포에서 일어난 일본인 거류민의 폭동사건. 경오(庚午)의 난이라고도 한다. 3포(부산포·내이포·염포)를 개항한 이래 일본인들의 무역·거류가 허가되고,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났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왜관을 두어 그들의 교역·접대 장소로 하는 한편, 여러 차례 그들의 귀환을 요구하고 통제에 부심하였다. 계해(癸亥)조약 체결 당시 60명에 한하여 허가한 거류민의 수가 세종 말년에는 약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교만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조정의 명을 어기고, 관리들도 이들을 압박하는 일이 생겨 상호간에 자주 충돌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제정(諸政)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1510년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통고하여 그들의 철거를 요구하고, 또 일본 선박에 대한 감시를 엄중히 하자 그들의 불평이 늘어갔다. 그러자 3포의 일본인들은 쓰시마 일본인의 원조를 얻어 4,000∼5,000명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한때 내이포·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 방비를 격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즉각 대응하였다. 황형(黃衡)·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이를 반격하여, 대파하고 곧 3포의 일본인 거류민도 추방하였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 간의 교통이 중단되었는데, 일본의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는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왔다. 이에 따라 계해조약을 개정하여 새로 임신(壬申)조약을 체결, 내이포만을 개항(開港)하였다.
을묘왜변 (乙卯倭變)
조선 명종 때 왜구가 전남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 조선정부는 삼포왜란(三浦倭亂:1510)·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1544) 등 왜구들의 행패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제재조치로 그들의 세견선(歲遣船)을 엄격히 제한하여 조선으로부터 물자의 보급을 받아야 하였던 왜인들은 이의 완화조치를 요구하여 왔으나 조선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조선정부의 통제에대해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명종 10) 배 70여 척으로 전남 연안지방을 습격, 먼저 영암(靈岩)의 달량성(達梁城)·어란포(於蘭浦), 진도(珍島)의 금갑(金甲)·남도(南桃) 등의 보루(堡壘)를 불태우고 만행을 자행하였고 장흥(長興)·강진(康津)에도 침입하였다. 이를 막던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사로잡혔다. 이에 조선정부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삼아 왜구를 토벌, 영암에서 이를 크게 무찔렀다. 왜구가 물러간 후 쓰시마[對馬] 도주(島主)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하였으므로 정부에서는 이를 승낙,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고, 임진왜란 발생 전까지 계속되었다.
옥포해전 (玉浦海戰)
경남 거제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의 함대가 일본의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기세에 전함을 버리고 수군(水軍) 1만을 해산시킨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충청 지방에 이르는 해로(海路)의 목줄인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에 응하여 이순신은 휘하의 판옥선(板屋船) 25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합세하기로 한 당포(唐浦) 앞바다에 이르자, 원균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70여 척의 전선을 모두 잃고 겨우 1척으로 합세하였다. 5월 7일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 앞바다에서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함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동서로 포위해서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함들에게 맹렬히 포격을 가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의 결과 아군은 별 피해 없이 적함 26척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려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하였으며, 이어 이날 오후 4시경에는 합포(合浦: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적의 대형함 5척을 발견, 이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경주싸움 (慶州-)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晉)이 경주를 수복한 싸움. 밀양부사(密陽府使) 박진은 임진왜란 초기에 영천(永川)의 왜군을 야습하여 패퇴시켰는데, 그 후 경상좌병사로 각지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경주의 왜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하였다가 다시 결사대 1,000여 명을 모집하여 경주성 밑에 잠복시킨 다음, 당시에 발명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경주를 회복하고 왜적을 울산 서생포(西生浦)로 쫓아냈다.
동래싸움 (東萊-)
임진왜란 때 왜군이 동래부(東萊府)를 함락한 싸움.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에 상륙하여 14일에 부산을 함락시키자, 동래에 머물러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 (李珏)은 왜군을 협격(挾擊)한다는 핑계로 소산역(蘇山驛)으로 물러갔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왜군과 반나절이나 역전 분투하였으나, 동래성은 함락되고 송상현도 전사하였다.
부산진싸움 (釜山鎭-)
임진왜란 때 부산진에서 왜군과 싸운 최초의 전투. 이 싸움의 결과로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주장(主將)으로 하고 소오 요시토모[宗義智]를 그 요장(僚長)으로 하는 왜군의 조선 침공 제1진은 1만 8000명의 병력을 700척의 전선(戰船)에 싣고 1592년 4월 13일 오후 4시경 부산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 이르러 부산성의 수비상황을 정찰하였다. 당시 부산지방을 지키던 부산진성에는 부산첨사 정발(鄭撥)과 부사맹(副司猛) 이정헌(李庭憲)이 이끄는 약 1,000명의 병력이 있었다. 왜군은 14일 아침 안개가 짙을 것을 이용하며 우암동(牛巖洞)으로부터 일시에 상륙, 부산진성을 겹겹이 둘러싸 3방면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다. 성안의 조선군은 활로써 왜군의 조총과 맞싸웠으나 무력과 숫자적으로 압도되어 군민이 일체가 된 분전 끝에 거의 순사(殉死), 성을 빼았겼다. 왜군은 이어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多大浦)의 성새도 함락하여 조선군의 제1선을 돌파, 동래를 향하여 북상하였다.
탄금대싸움 (彈琴臺-)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이 왜군을 맞아 탄금대에서 벌인 싸움.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이 양산(梁山)·밀양(密陽)을 거쳐 북상(北上)하자 조정에서는 황급히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 등을 보내어 왜군의 진로를 막게 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신립은 험준한 조령(鳥嶺)의 지형을 이용하여 적을 무찌르려고 하였으나, 이일이 상주(尙州)에서 패배하자 충주(忠州)까지 퇴각하였다. 4월 26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과 끝까지 맞섰으나 결국은 패하고(28일)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신립의 배수진에 대해서는 후일 전략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어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도 조령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지 않고 후퇴하여, 무모한 배수진을 친 행동을 탄식했다 한다.
양주싸움 (楊州-)
임진왜란 발발 이후 최초의 승리를 거둔 싸움. 1592년(선조 25) 5월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한강의 방어임무를 맡은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은 적에게 패하여 김명원에게 보고할 겨를도 없이 후퇴, 후방에서 흩어져오는 병사들을 수습하여 다음 싸움에 대비하고 있었다. 신각은 마침 함경병사 이혼(李渾)의 부대를 만나게 되어 양부대는 합세, 다시 진격하여 왜군을 양주 해현(蟹峴)에서 격파, 적 70여 명을 죽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김명원은 신각이 명령에 불복하고 한강 방어선에서 도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보고서에 따라 선전관을 급파하여 신각을 사형에 처하게 했는데, 그 뒤 신각의 공훈을 알리는 보고가 조정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급히 사자를 보내어 신각의 처형을 중지하게 하였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사천해전 (泗川海戰)
1592년(선조 25) 5월 29일 이순신(李舜臣)이 사천 앞바다에서 왜선(倭船)을 격파한 싸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요청으로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노량(露梁)으로 향하여, 경남 하동(河東)에서 원균이 거느린 전함 3척과 합류하였다. 이순신은 적선(敵船)이 사천 선창에 있다는 원균의 제보를 받고, 사천에 도착하자마자 장병들을 지휘하여 화살과 총통(銃筒)으로 왜적을 공격하였다. 그때 밀물이 들어와 배의 활동이 자유로워지자, 전함·거북선을 활용하여 왜함 10여 척을 전멸시켰다. 임진왜란 중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한 해전이다.
적진포해전 (赤珍浦海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지금의 경남 고성(固城) 근처 적진포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왜선(倭船)을 격파한 싸움. 1592년 6월 왜선이 적진포에 정박하고 있음을 알고 이순신이 거느린 함대가 이를 습격하여 대선(大船) 9척, 중선 2척을 불살랐다.
당항포해전 (唐項浦海戰)
1592년(선조 25) 6월 3일~5일 경남 고성군 당항포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왜(倭)의 수군을 격멸한 해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은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있었는데, 왜적이 당항포로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합세하여 왜의 전선(戰船)을 격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조선 수군은 적의 수군을 맞아 소소강(召所江)까지 일시에 추격하여, 적선 26척을 격파하였고 이어서 30여 척을 침몰시켰다. 이순신이 왜의 전선을 격파한 제2차의 승리이다.
용인싸움 (龍仁-)
1592년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서 벌인 조선군과 왜군의 싸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양으로 몽진한 임금을 구하고자,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이 이끈 관군 4만,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이 이끈 관군 2만, 경상도순찰사 김수(金?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합세하여 용인에 이르렀다. 6월 4일 이광은 곽영과 중위장(中衛將) 권율의 만류를 듣지 않고, 북두문산(北斗門山)의 왜군 보루를 공격하게 하였다. 첫날 약간의 전과를 올렸으나, 6일 구원병과 합세한 와키사카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끈 왜군에게 대군이 여지없이 궤멸하였다. 오직 권율만이 그의 군대를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후퇴하여, 7월 8일 이치(梨峙:배티)싸움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권율은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에 오르고 이광은 파직 유배되었다.
율포해전 (栗浦海戰)
임진왜란 때 통제사이순신(李舜臣)이 경남 거제시 동부면(東部面) 율포리 앞바다에서 왜함선을 무찌른 싸움. 1592년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앞바다에서 왜군의 대함 5척, 중형함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 율포만으로 쳐들어가 대함 2척, 중형함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나포하였다.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임진왜란 때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일본해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비보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함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다는 보고에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 40여 척과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전함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함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니 왜군은 득의양양하여 끝까지 쫓아왔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려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적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쏘아 적함을 격파, 분소(焚燒)한 것만도 66척,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져죽고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초식(草食)하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웅치싸움 (熊峙-)
임진왜란 때 전북 전주 외곽 웅치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싸움. 진안(鎭安)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로 들어가려는, 안고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가 지휘한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김제군수 정담(鄭湛),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등은 웅치에 진을 쳤다. 1592년(선조 25) 7월 7일 수천 적군을 맞아 첫날 분전 끝에 격퇴하였다. 8일 아침 왜군은 전병력과 화력(火力)을 동원 전면공격하여,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조선군 제1선, 제2선이 무너지고 마지막 제3선도 정담의 전사로 무너졌다. 싸움이 끝난 뒤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표목(標木)을 세워서 “조선의 충신 의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써 놓았다. 싸움의 승리로 왜군은 전주로 들어갈 길을 뚫었으나, 조선군의 기개에 눌려 전주성 밖에 머물다가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치싸움 (梨峙-)
1592년(선조 25) 7월 8일 권율(權慄)·황진(黃進)의 휘하 군대가 충남 금산(錦山) 밖 이치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대파하여 왜군의 전주(全州) 침공을 저지한 싸움. 전라도도절제사(都節制使) 권율은 금산성을 나와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과 더불어 향병(鄕兵) 1,500을 이끌고 그 길목인 이치에 목책을 쌓고 거마(拒馬)·녹채(鹿砦)·함정·납가새·말음쇠 등 방어시설을 갖추어 적을 기다렸다. 적은 7월 8일 새벽 아군을 압도하는 병력과 조총 등 신무기를 투입해서 조선군과 왜군은 이 날 저녁까지 일진일퇴의 혈전을 거듭한 끝에 왜군은 참패를 당하고 퇴각하였다. 특히 이 싸움에서 강궁(强弓)으로써 적을 떨게 한 황진의 무용은 두고두고 회자(膾炙)되었고 권율의 방어시설은 야전진지 방어의 모범이라 해서 높이 평가되었다. 이 싸움에서 적의 조총을 맞아 중상을 입은 황진은 뒤에 충청병사가 되어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이치싸움에서 참패하여 전라도 방면의 침공을 단념하여야 했던 왜군은 이 싸움을 조선 3대전의 하나로 꼽았다.
안골포해전 (安骨浦海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일본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 92년 7월 8일 이순신·원균·이억기(李億祺)는 한산섬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다음, 안골포에 왜군이 머무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일 새벽 일본군을 공격했다. 조선수군 이순신은 학익진(鶴翼陣)을 펴 맨 먼저 공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뒤를 따랐으며,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본대를 응원하였다. 왜선들은 모두 42척으로서 수군장 구키[九鬼嘉陸]와 가토[加藤嘉明]가 이끄는 제2의 수군부대였다. 조선수군은 여러 번 왜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하였으나 쉽게 응하지 않았다. 조선수군은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번갈아 포구에 침입하여 왜선을 공격하였다. 왜군이 응전하고 이에 이억기의 함대도 참가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하루 동안 계속된 싸움에서 왜군 250명이 사살되고 나머지 왜병들은 뭍으로 도망쳤다. 이 해전은 한산해전의 승리와 함께 왜 수군의 주력부대를 격멸했다는 의의가 있다
칠천해전 (漆川海戰)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칠천에서 벌어진 해전. 칠천량(漆川梁)해전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은 주색(酒色)에 빠져 군율(軍律)이 극도로 문란해졌다. 97년 7월 일본은 앞서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였던 한산도를 다시 공격하기 위하여 먼저 정탐으로 가나메 도키쓰라[要時羅]를 밀파하여 조선군을 유혹하니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원균을 불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원균은 전병력을 동원하여 7월 7일 다대포(多大浦)에서 일본군의 빈 군함 8척을 불사르고 서생포(西生浦)에 이르러 적의 주력함대를 만나 패전하고 일부 군사는 풍랑으로 표류하는 지경이 되었다. 간신히 가덕도(加德島)에 당도한 원균은 다시 일본군의 복병을 만나 막대한 손해를 입고 거제도 앞 칠천에 정박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태형(笞刑)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에 원균은 불만과 실의에 빠져 군사를 돌보지 않고 전략상 해전에 불리한 칠천에서 이진(移陣)도 않고 그대로 있다가 다시 일본군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부산에서 출진(出陣)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다다유타[島津忠豊] 등의 육군도 칠천으로 향하였으며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까지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결국 원균은 일본군의 수륙양면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도 육지로 탈출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한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의 용사가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만이 생존하여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하였다
명량대첩 (鳴梁大捷)
명량대첩 (鳴梁大捷)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명량에서 왜선(倭船)을 쳐부순 싸움.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왜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2척의 병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8월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55척의 왜선이 서진(西進)하면서 전위(前衛)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야반(夜半)에 이순신이 진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적함대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2척의 병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병선 31척을 무찔러 적함대는 패주하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제해권(制海權)을 회복하였다.
노량해전 (露梁海戰)
1598년(선조 31) 11월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왜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은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로 철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적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부대를 실은 왜선의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시킨 결과, 진린도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고니시는 경남 사천(泗川)에 주둔 중인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小) 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병선(兵船) 500여 척을 얻어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적병을 죽였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다가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觀音浦) 방면으로 패퇴하였다. 이순신은 적선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였다. 이 회전(會戰)에서 400여 척의 병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병선이 격파당하고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鄧子龍),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7년간이나 끌던 조선과 왜군 간의 전쟁은 끝났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대원군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5월 한국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국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청국 총리아문사무(總理衙門事務)의 공한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邊境)의 수비를 굳게 하였다. 9월 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이러한 경비태세에 불리함을 느꼈는지, 9월 25일 강류(江流)·연변만 측량하고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서적·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신헌(申櫶:申觀浩)·이기조(李基祖)·이용희·한성근(韓聖根)·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통진(通津)·문수산성(文殊山城)·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19일 일단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대령 올리비에의 지휘로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대기 중인 양헌수가 이끈 500명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사망 6, 부상 30여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정족산성에서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저상시켜, 로즈 제독도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개닫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銀金塊:당시 화폐로 환산하여 3만 8000달러)와 대량의 서적·무기·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구어,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구미열강은 이를 계기로 조선을 청국의 종속국가가 아닌 독립한 주권국가로 인식하여, 종래의 한·청 관계를 재검토하였다. 프랑스군이 탈취한 많은 서적·자료 등은, 뒷날 유럽사람들이 한국·동양을 연구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을미의병 (乙未義兵)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과 단발령(斷髮令)에 분격한 유생(儒生)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를 내걸고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킨 항일의병.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분함을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한술 더 떠 친일내각이 황후폐위조치를 내리자 유생들은 토역소(討逆疏)를 냄은 물론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였다. 11월에는 충청도의 제천과 유성에서는 유인석(柳麟錫)·문석봉(文錫鳳) 등이 중심이 되어 거의토적(擧義討賊)의 기치를 들었다. 그 위에 친일내각이 전국에 내린 단발령은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을 확산시키는 한몫을 하였다. 96년 1월 경기 지역에서는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하여 일어났으며, 충청 지역에서는 홍주의 김복한(金福漢)·이설(李) 등과 제천의 유인석과 그의 문인 서상렬(徐相烈) 등이, 강원 지역에서는 춘천의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이소응(李昭應)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뒤 이들은 합류하여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처치하고 충주부를 점거하여 관찰사 김규식(金奎軾)도 처단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산청에서 곽종석(郭鍾錫)이,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許蔿) 등이 기병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전라도 지역에서도 기우만(奇宇萬) 등이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고 곧 흩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선무사를 파견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혼란의 틈을 근왕세력인 이범진(李範晋) 등의 정동파(貞洞派)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으로써 친로내각(親露內閣)이 등장하였다. 새 내각은 단발령의 철폐와 의병의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냈으며, 이와 함께 각종 공세를 탕감하는 조치도를 취함으로써 의병봉기의 명분을 없애기에 노력하였다. 이후부터 의병활동은 사그러들었다.
정미의병 (丁未義兵)
1907년(융희 1)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확대된 의병전쟁. 1905년(광무 10) 통감부 설치 이후 조선병합을 서두르던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인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군인들은 해산당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을 계기로 서울·원주·강화 진위대 등지에서 무장봉기를 하는 한편, 무기를 가지고 각지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는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상태에 있던 후기 의병활동을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전환기를 맞게 하였다. 우선 후기의병은 해산군인의 참여로 무기와 병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또 전술의 발전도 가져왔다. 특히 일본군이 조선의 지형에 어두운 점을 이용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벌인 게릴라전술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무력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로 크게 고양된 후기 의병은 일제가 1910년 10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이기까지 전민족의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후 의병구성에서도 종래의 유생 중심에서 벗어나 농민·하급 해산군인·천민·노동자 등도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소사싸움 (素沙-)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군사가 왜병과 싸워 대승한 전투. 평양·행주(幸州)의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의 육상(陸上)3대첩이라 한다. 1597년(선조 30)에 전라도 전주에서 합류한 왜병(倭兵) 중 모리[毛利]의 군사와 가토[加藤]의 군사는 공주(公州)를 거쳐 전의(全義)·진천(鎭川)에 이르고, 그 일부인 구로타[黑田]의 군대는 직산(稷山)까지 북상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양호(楊鎬)는 부총병(副總兵) 해생(解生)·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 등을 남진하게 하여 9월 5일에 직산 북쪽 소사평(素沙坪:弘慶院)에서 구로타가 인솔한 왜병과 충돌하여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왜군은 하루 6번의 회전(會戰)에 매번 패하고 6일 새벽에 전세의 만회를 꾀하다가 또다시 패하여 목천(木川)·청주(淸州)를 거쳐 도주하였다. 다른 전투는 공성(攻城)이나 수비(守備)였음에 비해 일대 회전(會戰)이었다는 점이 이 전투의 특징이고, 왜군은 이로써 진군의 계획이 어긋났으며 더 북진할 의욕을 잃게 되었다.
강도실함 (江都失陷)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청(淸)나라 군대에게 함락된 일. 1637년(인조 15) 청나라 군대의 침입으로 봉림(鳳林)·인평(麟平) 등 왕자와 세자빈, 그리고 원임(原任:前任)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을 비롯한 조정의 전직·현직 고관 등 많은 사람이 강화도로 피난하고, 검찰사 김경징(金慶徵)과 유수(留守) 장신(張紳)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이때 강화도 방위의 총사령관 김경징은 앞서 고려 때 원(元)이 고려 전국을 휩쓸고도 강화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북방민족이 수전(水戰)에 능하지 못한 때문이라 속단하고, 방비를 허술히 하였다. 그러나 청의 구왕(九王:睿親王)은 수만 명의 군사와 수십 척의 삼판선(三板船)으로 쳐들어왔는데, 특히 그들의 홍이포(紅夷砲)의 위력과 통솔력이 없었던 김경징 때문에 사기가 떨어졌던 수장(守將)들은 싸우기도 전에 달아나 버렸다. 이에 봉림대군이 적접 군사들을 모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여 연기성(聯騎城)에서 청의 구왕과 만나 항복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찾아왔다. 봉림대군은 뒤에 남한산성에 들어가 싸우다가 부왕 인조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문수산성싸움 (文殊山城-)
조선 고종 때 강화도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軍)과 충돌한 사건.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제독 로즈가 거느린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였다. 이때 초관(哨官) 한성근(韓聖根)이 문수산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산성의 남문(南門)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진주성대첩 (晉州-)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 특히 제1차의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제2차의 진주싸움은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알려진 싸움이다. ① 제1차 진주싸움:1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약 2만은 수천 죽제(竹梯: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아 죽제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10월 10일에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는데, 이 싸움에서는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응원이 적과 아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② 제2차 진주싸움: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 3만 7000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이계련(李繼璉)·민여운(閔汝雲)·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끈 3,400 병력과 6∼7만 일반민이 있어, 피아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龜甲車)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행주대첩 (幸州大捷)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水原城)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을 시켜 행주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목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는 금주(衿州:始興),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江華),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金浦)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의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 여러 겹으로 성(城)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이때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는데,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당시 행주산성의 싸움은 치열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금산싸움 (錦山-)
1593년(선조 26) 8월 조헌(趙憲)이 거느린 의병과 왜군과의 싸움. 임진왜란이 교착상태에 들어가 강화를 교섭하던 중 왜군의 일부는 전라도 금산에 주둔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의병들이 이들을 치다가 여러 번 패하였으나 의병장 조헌은 승장 영규(靈奎)와 함께 관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7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단독으로 금산성 밖 10리 되는 곳까지 진격하였다.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알아차린 성내의 왜군은 군대를 몰래 뒤로 보내어 길을 차단하는 한편, 좌우에서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병력수의 열세로 조헌·영규 이하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때 전사한 700의사의 무덤을 ‘금산 700의총(錦山七百義塚)’이라고 한다.
남원싸움 (南原-)
정유재란 중인 1597년(선조 30) 8월에 일본군과 조선·명나라의 연합군이 벌인 싸움.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 요시토모[宗義智]·시마스 요시히로[島津義弘]·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군대가 구례(求禮)에서 합류하여 수군장(水軍將)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과 연락하기 위해 일부는 남원성의 동북으로, 또 다른 일부는 서남으로 육박해 왔다. 이때 남원성은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군대 3,000명을 거느리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과 함께 지키고 있었는데 광양현감 이춘원(李春元),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등이 후원하러 왔고, 명나라의 유격장(遊擊將) 진우충(陳愚衷)이 약 2,000명을 거느리고 전주에서 성원하였다. 일본군은 진을 친 후 양원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글을 보내고, 8월 15일에 성을 포위하여 퇴로를 차단한 후 성을 공격하다가 야음을 틈타 성을 넘어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크게 패하여 명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摠) 장표(蔣表)·생승선(生承先)과 조선의 이복남·이춘원·김경로,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부사(府使) 임현(任鉉), 판관 이덕회(李德恢),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진안현감(鎭安縣監) 마응방(馬應房) 등이 전사했으며 양원은 도주하였다.
울산싸움 (蔚山-)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울산 도산성(島山城)을 중심으로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왜군이 벌인 싸움. 97년 조선을 재침략한 왜군 가운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약 1만 군대는 울산 도산에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 4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측 권율(權慄) 휘하의 군대 1만과 합류하여 새재[鳥嶺]를 넘어 경상도에 들어갔다. 12월 23일 성곽 준공이 거의 끝난 도산성을 포위해서 공격하였다. 10여 일 간의 격전으로, 왜군은 양식이 떨어지고 우물이 바닥나는 악조건 속에서도 몇 차례 위기를 넘기며 악전고투하다가, 많은 구원병의 도착으로 끝내 성을 지켰다. 1월 4일 조·명 연합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경주지방으로 철수하였다. 98년 9월 22일 마귀는 군사 2만 4000명을 이끌고,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가 이끈 1만 5000명과 합류하여 다시 울산 도산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년(인조 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하고, 랴오둥[遼東]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明)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島)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므로, 명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27년 l월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軍)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龍川)·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安州)·평산(平山)·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란하였다. 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①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②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①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②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③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나선정벌 (羅禪征伐)
조선 후기에 청나라의 요청으로 2회에 걸쳐 조선군(軍)이 러시아군을 정벌한 일. 나선은 러시안(Russian)의 음역(音譯)이다. 러시아는 13세기 이래 몽골의 지배 아래에 있다가 15세기 말부터 독립하여 시베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들은 곡식을 생산할 땅과 광물자원을 찾아서 헤이룽강[黑龍江] 쪽으로 남진하였는데, 1644년에 포야르군프, 49년에는 하바로프의 탐험원정대가 헤이룽강에 이르러 그 지세 등을 조사하였다. 51년 헤이룽강 북쪽인 야커싸[雅克薩] 하구에 알바진성(城)을 건설하여 군사·식민의 근거지로 삼았다. 하바로프가 알바진성에서 다시 헤이룽강 동쪽을 따라 내려와 52년(효종 3) 우쑤리강[烏蘇里江] 하구에 아찬스크(지금의 하바로프스크)성을 구축하자 그 지방의 원주민인 아창족(阿槍族)과 충돌하였다. 아창족은 당시 그들을 통치하고 있던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청나라와 러시아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때 청은 중국 본토의 공략에 몰두하고 있어서 만주 수비가 허술했던 관계로 1차의 원병은 러시아군에게 패퇴당하였다. 러시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남진을 계속하자 청나라는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조선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효종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에 따라 원병을 보내기로 하고 함경도 병마우사 변급(邊)을 사령관으로 삼았다. 변급은 정예 조총군(鳥銃軍) 150여 명을 거느리고 54년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너 영고탑(寧古塔:寧安)에서 출발하여 후퉁강[厚通江:混同江]에 이르러 러시아군과 접전, 호통(好通:依蘭)에서 격파한 뒤 그 자리에 토성을 쌓고 같은해 7월에 돌아왔는데,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58년(효종 9) 3월에 청나라는 재차 구원병을 요청해 병마우후 신류(申瀏)가 선발된 정예군 200여 명을 인솔하였다. 조선군은 청군과 합세하여 같은해 6월 10일에 헤이룽강에 진주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적선(敵船) 10척을 불태우고 적군 270명을 사살하였다. 신류는 일단 쑹화강[松花江]으로 철수하였다가 조정의 명령으로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2차 나선정벌이다. 당시 효종은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씻을 생각으로 북벌계획을 추진중에 있었는데, 2차례의 나선정벌은 조선의 군사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비록 파견된 군사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 조선군의 사기와 사격술이 뛰어났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2차례의 나선정벌 후에도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당시 대(對)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주청전권공사 F.F.로우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를 본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포함 2척을 앞세우고 육전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단호한 쇄국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아직 봉건적 체제에 머물러 있던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반침략 의지 때문이었다.
을사의병 (乙巳義兵)
1905년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독립국으로서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양반유생과 민중이 일으킨 항일 무력투쟁. 처음으로 봉기한 지역은 원주·제천·단양에서 을미의병 때 유인석(柳麟錫) 부대에서 활약한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이며, 다음으로 홍주의 안병찬(安炳瓚)·민종식(閔宗植) 등이 봉기하였고, 전남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이 거의(擧義)하였다. 영남 지역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의 의병부대와 정환직(鄭煥直)·용기(鏞基) 부자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봉기하였다. 원용석의 의병부대는 원주진위대와 일진회(一進會)의 급습으로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고 말았으나 홍주의 민종식·안병찬 부대는 초기의 홍주성 공략에는 실패하였지만 민종식이 재조직한 의병부대는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이를 근거지로 성이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최익현 부대는 무력활동면에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지만, 그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신돌석의 부대는 규율이 엄하고 유격전술에 뛰어나 많은 전적을 올렸으며, 정환직 부자도 계속적인 항쟁을 벌였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무기가 없는 훈련받지 못한 민병을 주축으로 하였기 때문에 항전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후 의병다운 의병으로서 활동하게 되는 것은 군대해산에 따른 정식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부산포해전 (釜山浦海戰)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李舜臣)이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의 전선을 격파한 싸움. 이순신은 부산 부근의 서평포(西平浦)·다대포(多大浦)·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왜군 전선 24척을 격파한 뒤, 침략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과 일본 본국과의 연락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먼저 부산포 내의 왜군의 상황을 정찰하였는데, 왜군 전선 470여 척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았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선두로 하고 전함대를 동원하여 왜군을 쳤는데, 그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에 상륙하여 대항하였으므로 전선 100여 척을 격파한 뒤, 왜군과의 응전을 중지하고 여수(麗水)로 돌아갔다. 조선군이 육지에 올라간 왜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육전이 해전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측에서도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벽제관싸움 (碧蹄館-)
임진왜란 때 벽제관에서 일어난 명나라와 왜(倭)의 싸움.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한 왜군은, 1593년(선조 26) 평양에서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나라 군대에 대패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은 황해도로 진격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후퇴하였다. 왜군은 고바야가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등을 선봉(先鋒)으로 하여, 다시 총력을 기울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명나라 군은 평양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진격한 뒤, 1월 25일 서울로 남진하여 왜군의 주력부대를 격멸할 작전을 세웠다. 이때 왜군은 명나라 군을 맞아 싸울 생각으로 북상 중이었으며, 그 선봉은 여석현(礪石峴)에 진을 쳤다. 명나라의 선봉장 사대수(査大受) 등이 왜군 선봉과 최초로 회전하였는데, 명나라 군이 패하여 벽제역(碧蹄驛)까지 후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여송은 혜음령(惠陰嶺)을 넘어 벽제관으로 급행, 망객현(望客峴)으로 진격하였으며, 여기서 명·왜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왜군의 대부대는 3대(隊)로 나뉘어 명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며, 미처 포군(砲軍)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다만 기병(騎兵)만으로 싸우던 명나라 군은 결국 왜군에 포위되어 조총(鳥銃)의 집중사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때 늦게 도착한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이 거느린 화군(火軍)의 도움으로, 명나라 군은 간신히 왜군의 추격을 막고 일단 파주(坡州)로 후퇴하였다가 개성으로 물러갔다. 명나라는 평양에서의 승전으로 왜군을 얕잡아보아,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고 서둘러 진격하다가, 평양에서의 대패전을 설욕(雪辱)하려는 왜군의 맹공격을 받고 패전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명나라 군은 이비어(李備禦)·마천총(馬千摠) 등 많은 전사자를 냈고, 이후 왜군과의 전투에서 적극성을 잃어 왜군의 주력부대를 섬멸할 기회를 놓쳤다. 이 싸움에 동원된 명나라 군 병력은 4만 3000명, 왜군 병력은 7만 l000명이었다.
가덕도해전 (加德島海戰)
1597년(선조 30) 6월 19일 원균(元均)이 부산 가덕도 근해에서 왜(倭)의 수군과 벌인 해전. 왜군이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수군통제사 원균으로 하여금 이를 막도록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육상병력이 안골포쪽을 먼저 공격함으로써 왜군의 진로를 막아주기를 희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군의 공격이 지연되자, 조정에서는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을 한산도로 내려보내 원균의 출전을 촉구하였다. 6월 18일, 원균은 남이공과 함께 1백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 그 다음 날 안골포로 쳐들어갔다. 안골포에서는 조선 수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숨어 있던 왜군의 급습을 받았으나, 원균 등은 이를 물리치고 가덕도 방면으로 전진하였다. 여기에서 시마즈[島津義弘]와 다카하시[高橋統增]가 거느리는 왜군을 만나, 전투를 벌였으나 원균은 패하고 말았다. 이 해전에서 평산포 만호 김축(金軸)이 부상하고,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원균 등은 칠천량(漆川梁)으로 되돌아왔다.
청산리전투 (靑山里戰鬪)
1920년 9월 10∼12일,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2,500명 독립군이 만주 허룽현[和龍縣:三道溝]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의 3차에 걸친 전투에서 5만의 왜군을 대파한 싸움. 20년 8월 하순,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훈춘[琿春]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張鼓峰)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羅南)의 제21사단이 도문강(圖門江)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滿鐵)의 수비대가 쑹화강[松花江]을 건너 서진하여 3면으로 북로군정서군을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때문에 대일(對日)관계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근거지를 옮겨 장백산(長白山)으로 입산하여 낭림산맥(狼林山脈)을 타고 게릴라전을 펼칠 계획이던 북로군정서군은 1,500명으로 편성된 전투대대인 제2제대(梯隊:李範奭 지휘)와 비전투요원 1,000명으로 구성된 제1제대(김좌진 총사령관 겸임 지휘)로 하여금 180량의 치중차(輜重車)를 이끌고 대이동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은 장장 80리의 골짜기에 100 m 내외의 밀림으로 자연성을 이룬 청산리의 백운평 골짜기로 제대를 진출시켜 우진(右陣:李敏華 지휘)·좌진(左陣:韓根 지휘)·중우진(中右陣:金勳 지휘)·중좌진(中左陣:李馭成 지휘)의 기습포진을 펴고 적을 기다렸다. 9월 10일 아침, 적의 척후가 나타나 식은 말똥을 만져보고 아군이 이 백운평을 지나간 지 오래된 것으로 오인, 전위사령(前衛司令)을 선두로 기마대·보병·공병의 1만 혼성여단이 골짜기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아군은 적이 함정 속으로 다 들어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이범석이 쏜 총이 전위사령을 거꾸러뜨림과 동시에 공격을 퍼부어 3차로 적의 부대가 몰려들 때까지 적 2,200명을 사살하고 아군 20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타격을 받은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자, 아군은 주력 부대가 그대로 백운평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밤 사이 120리를 강행군하여 갑산촌(甲山村)에 도착함으로써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이어 아군은 시마다[島田]가 지휘하는 120기병 중대가 한국인 촌락인 천수평(泉水坪)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집단병력을 투입해서 도망자 4명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고 시마다 중대장이 가노[加納] 연대장에게 보내는 정보문서를 입수, 19사단의 2만 병력이 어랑촌(漁郞村)에 있음을 알고 기선을 제압,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馬鹿溝)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부터 만 2주야에 걸친 혈전을 통하여 2,000명의 아군 병력은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이용해 2만의 적병 중 1,000여 명을 전사케 하고 90명의 아군 전사자를 내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5만 병력을 2,500명으로 맞아 3,300명을 죽인 청산리 3차의 싸움은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大捷)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왜적은 그 보복으로 만주 전역의 우리 동포에게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하기 시작, 간도(間島)동포 참살 사건 등을 빚어냈다.
청주성싸움 (淸州城-)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이 충북 청주를 탈환한 싸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서남지역에 1,600명의 의병을 모은 조헌은, 1592년(선조 25) 7월 하순 청주성 교외에서 승장(僧將) 영규(靈圭)가 이끄는 약 1,000명의 승병과 방어사(防禦使) 이옥(李沃)의 500관군을 거느리고, 8월 1일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가 지휘하는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청주성을 공격하였다. 이날 종일 계속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왜군은 밤 사이에 성을 버리고 퇴각했다.
평양성싸움 (平壤城-)
임진왜란 때 조·명(朝明)연합군과 왜군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공방전. 1592년(선조 25) 5월 서울을 함락시킨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봉은 6월 11일 평양에 무혈(無血) 입성하였다. 조선측의 요청으로 원군 3,000을 이끌고 온 명나라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은 7월 17일 밤 적의 계략에 빠져 평양성에 입성하였다가 매복한 적의 기습을 받고 사유(史儒)·대조변(戴朝弁) 등의 장수를 잃고 참패하여 겨우 잔병을 수습하여 퇴각하였다. 명나라의 군대를 격퇴하고도 추격하지 않는 왜군의 동태를 살핀 조선측은 적의 병세(兵勢)가 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순안(順安)의 이원익(李元翼), 강동(江東)의 이일(李鎰), 강서(江西)의 김응서(金應瑞)·박명현(朴名賢), 대동강 수군(水軍)의 김억추(金億秋) 등이 평양 서윤(庶尹) 남부홍(南復興)이 모병한 2만 병력을 이끌고 8월 1일 4면에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도 일진일퇴만 거듭하였을 뿐 평양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양측은 9월 1일부터 10월 20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하였다. 1592년 12월 말 압록강을 건너온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4만 병력과 조선측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휘하의 8,000병력, 승장(僧將) 휴정(休靜:西山大師)·유정(惟政:四溟堂)이 이끄는 2,200병력은 1월 6일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싸움은 주야 3일간 혈전을 거듭하여 4일째인 1월 9일, 적은 1만 5000의 병력 가운데 1만 명의 전사자를 버려 두고 퇴각하였다. 이로써 평양성은 실함된 지 7개월 만에 재탈환되었다.
운요호사건 (雲揚號事件/운양호사건)
1875년(고종 12) 9월 일본 군함 운요호의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조선군과 일본군의 충돌사건. 강화도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측의 대일문호개방(對日門戶開放)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일본은 열강세력에 앞서 조선에의 진출을 시도한 계획이 지연됨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30척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무력위협정책의 일환으로 운요호를 조선연해에 파견, 8월 21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초지진 포대에서는 포격을 가하고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여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그들에 비해 떨어지던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고 그들의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첨사(僉使)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에 이르는 수비병은 모두 패퇴하였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그 밖에도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나 일본측은 2명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씌워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힐문함과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 간에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개국이 이루어졌다.
부차의패전 (富車-敗戰)
1619년(광해군 11) 조선과 중국 명(明)나라의 연합군이 부차에서 후금(後金:뒤의 淸)의 군대와 맞선 싸움. 임진왜란 이후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세력이 점점 커져, 16년 자립하여 후금국의 한(汗)을 자칭하였다. 곧 명나라의 변경을 침략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대하여 구원병을 청하였다. 처음 광해군은 응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18년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구원병 약 1만 3000을 보냈다. 강홍립이 거느린 군대는 요동성(遼東省) 관뗀[寬甸]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부차(지금의 老城 60리 지점)에서 후금과 회전하였으나, 명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조선군도 포위되었다. 강홍립은 후금에 대하여 조선군의 출정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알린 뒤, 후금에게 항복하였다. 강홍립의 항복은 출정 전에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당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명·후금의 세력 교체기 때 이러한 양면외교정책으로, 광해군 때에는 외침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 때는 이를 이용하지 못하고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봉오동전투 (鳳梧洞戰鬪)
1920년 6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참패시킨 싸움. 20년에 들어서 만주 독립군부대의 국내 진입 무장활동이 활발해지자, 국경의 일본군 수비대가 수세에 몰렸다. 그해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싸움에서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가 패하자, 함북 나남에 주둔한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가 인솔한 1개 대대로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였다. 독립군을 추격하여 간도로 들어간 추격대대는, 6월 7일 안산(安山) 후방고지에서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허룽현 봉오동까지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당시 봉오동에는 독립군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연합부대를 편성, 주둔하고 있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부장(府長) 최진동(崔振東)과 부관(副官) 안무(安武)가 정치를,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部長) 홍범도(洪範圖)가 군사를 맡았으며, 봉오동 골짜기와 주변 산에는 약 700~900명의 독립군이 집결하였다. 일본군 1개 대대가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에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은 홍범도는 봉오골의 주민을 대피시키고 포위망을 구성한 다음,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李化日)에게 고려령(高麗嶺)에 대기하여 일본군을 유인해오도록 하였다. 고려령에서 일본군 전위중대(前衛中隊)가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지만, 본대는 대오를 정비하여 봉오동 골짜기의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홍범도의 공격 명령에 따라 매복한 독립군이 3면에서 집중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3시간 가량 응사하다가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강상모(姜尙模)가 지휘한 제2중대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또다시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이었지만,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으로 경미하였다. 이로써 독립군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의 사기가 크게 앙양되었고, 독립군의 군세가 더욱 증강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이 싸움의 참패에 충격받은 일본군은 관동군까지 동원하는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흑하사변 (黑河事變)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한국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라고도 한다. 1920년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노령(露領)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일단 미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독립군은 다시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문창범(文昌範)과 자유대대(自由大隊)의 오하묵(吳夏默)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을 자유시에 집결해,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崔振東) 등의 총군부(總軍府), 안무(安武) 등의 국민회군(國民會軍), 홍범도(洪範圖) 등의 독립군, 서일(徐一) 등의 군정서(軍政署)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林彪)·고명수(高明秀)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상하이파[上海派]의 이동휘계인 박애 등이 장악했던 극동공화국 한인부에서는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그 관할 아래 두도록 하였다. 박창은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자 한인부는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6월 27일 사할린의용대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고려의 전쟁사
거란의침입 (契丹-侵入)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親宋政策)과 정안국(定安國)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l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사건.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 요(遼)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하였다.
【고려와의 관계】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出伏部)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이들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진화(振化)·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제1차 침략】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朴良柔)·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이와 함께 고려는 소손녕의 요구에 따라 항복하든지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나왔고, 후자가 유력했으나 서희·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서희가 소손녕을 만나기로 하였다. 여기서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한 이유로 첫째, 고려가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땅인 고구려를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이웃인 거란을 버리고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고 했으므로 요의 동경(東京)도 고려의 땅이며 둘째, 압록강 유역도 고려 땅인데 고려가 요와 교류하고자 해도 여진이 있어 불가능하므로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확보하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를 얻었고, 송나라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고려는 흥화진(興化鎭)·통주(通州)·구주(龜州)·곽주(郭州)·용주(龍州)·철주(鐵州) 등을 획득하여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결국 요의 제1차 침략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예를 받아 침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북진정책의 일환으로서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에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요는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제2차 침략】 1010년(현종 1) 11월 요의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母后)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는데, 요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략한 것이다. 이는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침략의 실제적인 목적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요는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자, 통주로 진군하여 고려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곽산·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하자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요는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구주·통주·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제3차 침략】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흥화진에서 소배압의 군대를 막아내자 이를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다음 해 정월에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다가 구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구주대첩이다. 이로써 전쟁은 끝나고 1019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데 그치고, 요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으며, 요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구주대첩 (龜州大捷)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구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에 의한 거란의 제1차 침략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江東) 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 곳에서 패배하고 자주(慈州)에서도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구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여진정벌 (女眞)
숙종(肅宗) 때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 북간도(北間島)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소[烏雅束]는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였다. 이때 고려에 복속한 여진인으로 완옌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무리가 있어 우야소는 이들을 추격, 함경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고려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어 우야소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尹瓘)을 보내 겨우 화맹(和盟)을 맺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정평·장성 외의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면서 기병(騎兵)의 양성, 군량(軍糧)의 비축 등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기군(神騎軍:騎兵)·신보군(神步軍:보병)·항마군(降魔軍:승려부대)으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특별부대로 훈련시켰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都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을 동원,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北靑)까지 진출하여 함주(咸州)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 또한 남방의 민호(民戶)를 옮겨 9성에 이주시켰으며, 특히 길주성(吉州城) 안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창건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개평싸움(開平-)
1216년(고려 고종 3) 9월 개평역(開平驛:평북 寧邊)에서 벌어진 거란군과의 싸움. 걸노(乞奴)가 이끈 거란유민은 감국(監國)을 칭하여 거란부흥운동을 벌이는 한편 고려가 그들이 요구한 군량미 제공과 그들 황제의 조칙을 거부하였다 하여 9만 대군을 이끌고 1216년 8월 압록강을 건너 대부영(大夫營)으로 진격했다.
이어 거란군은 영주(寧州)·삭주(朔州)·의주·운주(雲州) 등지를 공격하여 재물·곡식·가축 등을 빼앗으며 계속 남하, 북계(北界)지역은 거란군과 그들이 데리고 다니는 처자들로 가득하였다. 이에 고려조정은 노원순(盧元純)을 중군병마사, 오응부(吳應富)를 우군병마사, 김취려(金就礪)를 후군병마사로 하는 중군·우군·후군의 3군을 편성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같은 해 9월 고려 3군은 연주(延州)에 주둔하며, 개평역과 원림역(原林驛)에 주둔하고 있던 거란군과 세 차례에 걸친 접전을 전개한 끝에, 특히 후군병마사의 큰 활약으로 거란군을 섬멸했다.
이 싸움에서 사로잡히거나 죽은 거란군은 2,400명에 이르렀고 도망하다 남강(南江)에 빠져 죽은 자만도 1,000명을 헤아렸다. 이 싸움은 고려와 거란유민군이 싸운 최초의 대규모전으로, 이로부터 양군은 김취려가 1218년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의 잔당을 무찌를 때까지 3년간 몇 차례의 대접전을 치렀다.
강동성싸움 (江東城-)
1218년(고려 고종 5) 고려·몽골·동진(東眞)의 연합군이 고려의 강동성(평양 동쪽)에서 거란[契丹]의 잔적(殘賊)을 쳐부순 싸움. 오랫동안 고려를 침범하여 괴롭혀 왔던 거란을 완전소탕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1218년 9월 거란군이 은주(殷州:殷山)로부터 남하하여 강동성에 입거(入據)하자, 몽골은 원수 합진(哈眞)이 이끄는 1만의 군대와 동진의 장수 완안 자연(完顔子淵)이 이끄는 2만 명의 병력을 연합하여 “거란군을 토멸하고 고려를 구한다”고 성언(聲言)하고 동북면으로 내려와 적의 거성(據城)인 화주(和主:永興)·맹주(孟州:孟山)·덕주(德州:德川)·순주(順州:順川)를 차례로 쳐부수고 적의 주력이 있는 강동성으로 쳐내려왔다. 그러나 때마침 많은 눈이 내려 군량의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동의 적은 성벽을 굳게 닫고 공격군을 피로하게 하려 하므로 몽골 장수 합진은 서북면원수부(西北面元帥府)에 사람을 보내어 군량을 요구하면서, 거란을 소탕한 뒤에 여·몽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을 것을 약속하는 통첩을 칭기즈칸의 이름으로 전해 왔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그들의 참뜻을 의심하여 공동작전을 하는 데 주저하였으나, 다음해인 19년(고종 6)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 윤공취(尹公就) 등이 화의를 맺자는 첩문(諜文)을 가지고 몽골군영에 가고, 몽골에서도 답례의 사자를 보내어 서로 동맹의 뜻을 굳게 하였다. 또한 서북면원수 조충(趙?은 십장군병(十將軍兵)·신기(神騎)·대각(大角) 및 내상(內廂)의 정병을 거느리고 몽골군과 합세하였다. 강동성의 포위작전에 있어 적의 도피를 막기 위하여 미리 성 주변에 너비·깊이 각 10자의 못을 파고 공격하자 적장 등 40여 명이 성을 넘어 연합군에 항복하는 바람에 성 안의 적의 괴수 함사(喊舍:王子)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그의 관인(官人)·장졸(將卒)·부녀 등 5만여 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조충은 거란 포로들을 각 도로 보내어 인구가 적고 개간이 덜된 곳에 나누어 집단으로 살게 하면서 농경을 업으로 삼게 하였는데, 이들의 집단구역을 속칭 거란장(契丹場)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시간적으로 전후 3년, 지역적으로는 압록(鴨綠)·정평(定平) 이남, 죽령(竹嶺) 이북의 지역을 짓밟았던 거란을 강동성에서 큰 희생도 없이 정벌하였는데, 이로써 형성된 양국의 관계는 이후 고려사의 기점이 되었다.
구주싸움 (龜州-)
1231년(고려 고종 18) 살리타[撒禮塔]가 이끈 몽골군의 제1차 침입 때 박서(朴犀)·김경손(金慶孫)이 항전한 싸움. 구주는 북으로 삭주(朔州), 동으로 태천(泰川), 남으로 정주(定州), 서로는 선천(宣川)과 연결된 요충지로서 고려시대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이 거란군을 물리친 구주대첩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몽골은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세계제국건설을 목적으로 금(金)나라 정복을 단행하고 살리타에게 동정(東征)을 명하였다. 살리타는 대군을 거느리고 함신진(咸新鎭)·삭주·철주(鐵州)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이어 구주에 임하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박서와 정주·삭주·위주(渭州)·태주(泰州) 등 제성(諸城)의 수령과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모여들어 방전(防戰)하였다. 적은 맹공격을 가해왔으나 번번이 패하고 물러갔다. 이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박서와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 김경손이었다. 몽골군이 공격기구인 누차(樓車)와 우피(牛皮)로 싼 목상(木床)에 군사를 싣고 성 밑에 굴을 파는 등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박서는 용맹과 기지로 방어하였다. 김경손은 남문으로 공격하는 몽골군을 12명의 결사대와 함께 막아내어 성을 고수하였다. 몽골군은 30일 동안이나 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31년 9월 마침내 물러갔고 다시 북계제성(北界諸城)의 항졸(降卒)을 모아 그 해 10∼12월 수차례에 걸쳐 큰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박서와 김경손은 결사적으로 적군을 격퇴하였다. 이 무렵 개경에서는 몽골군의 권항사(勸降使)를 접견하고 종실(宗室) 회안공(淮安公)을 살리타의 본영인 안주(安州)에 보내 강화를 교섭할 때였다. 살리타는 통역관 지의심(池義深)과 강우창(姜遇昌)을 시켜 회안공의 서(書)를 가지고 박서에게 재삼 항복을 권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더욱 방비하였다. 32년 1월 강화가 성립되자 왕은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 등을 구주성에 보내 강화의 성립과 3군 항복의 소식을 전하고 정전(停戰)과 출항(出降)을 권유하였으나 박서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민희·최임수(崔林壽)의 설득과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마침내 항복하였다. 구주싸움의 전황을 돌아본 몽골의 한 노장(老將)은 “내가 천하에 종군하여 무수한 공성전(攻城戰)을 보았으나, 이와 같이 맹렬한 공격을 받고도 끝내 항복을 하지 아니한 사례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몽고의 침입
1차 침입 고종18년(1231), 몽고의 장군 살리타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귀주에0서 박서가 항전하였으나 수도가 포위되자 화친을 요청하였고, 몽고는 서북면에 다루가치를 설치한 후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고가 고려에 대하여 더욱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고 관리의 횡포가 심하여지자, 최우 정권은 항전을 결의하고 고종 19년(1232)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몽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2차 침입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하였으나 살리타가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3차~6차 침입 몽고는 금을 멸한(1234)뒤에 여러차례 고려에 침입해 왔다. 그때마다 고려는 항쟁을 계속하여 몽고의 침입을 약 40년간이나 막아 냈다.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천민들이 용감히 싸워줌으로써 관악산, 충주 등 여러 곳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개주전투(价州戰鬪)
몽골군의 제3차 고려침입 때 평남 개천지역에서 고려군이 승리를 거둔 싸움. 1235년(고종 22) 고려에 대한 제3차 침공을 감행한 몽골군은 그 이듬해 6월 의주강(義州江)을 건너 가주(嘉州:평북 嘉山)·안북주(安北州:평남 안주)·박주(博州:박천)·선주(宣州:선천)·구주(龜州)·곽주(郭州:곽산)·신주(信州:신천)·안주(安州)를 유린하고 7월에는 드디어 개주에 이르렀다. 이때 경별초교위(京別抄校尉) 희경(希景)과 개주중랑장(价州中郞將)이 이끄는 고려군은 복병(伏兵)으로써 몽골군을 요격(邀擊)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였고, 몽골군의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다. 이 싸움은 승승장구하던 몽골군을 고려정규군이 무찔렀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합단의침입 (哈丹-侵入)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의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 원나라의 반군(叛軍)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는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 우군만호 김흔(金H)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禁忌山洞)·이천현계(伊川縣界)·권가현계(拳縣界)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雙城)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登州: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의 양근(楊根)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파란하는 한편으로 원주별초(原州別抄) 소속의 원충갑(元沖甲)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무리들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렬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韓希愈)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老的)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의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동녕부정벌 (東寧府征伐)
중국의 원(元)·명(明) 교체기의 공백상태를 이용하여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일으킨 원나라 정벌. 1368년(공민왕 17)에 원나라 순제(順帝)는 주원장(朱元璋)의 군대에게 쫓기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기황후(奇皇后:고려인) 소생인 소종(昭宗)이 즉위하였으나 소종도 주원장의 군대에 쫓겨 외몽골에 있는 화북(和北)으로 도망쳐 간신히 원나라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간파한 공민왕은 먼저 원나라의 연호(年號) 사용을 정지하고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제정한 관직명을 개정하는 한편, 명나라와도 통호(通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원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역대 조상의 숙원인 북진정책을 강행하여 고구려의 구강(舊疆)을 회복하려는 의사표시였다. 이즈음에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 웅거, 그의 부친 기철(奇轍)이 고려에서 참형당한 것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고 고려의 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에서는 69년 12월에 이성계(李成桂)를 동북면원수(元帥),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원수로 삼아 군사 1만 5000을 주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이성계는 70년 1월에 동북면에서 황초(黃草), 설한(雪寒)의 두 영(嶺)을 넘고 압록·파저(婆猪)의 두 강을 건너 동녕부의 동지(同知)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지용수와 합세하여 랴오둥[遼東]의 중심지인 랴오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추위와 기근으로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동녕부를 정벌만 하였을 뿐 장기적으로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처럼의 정벌은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결국 랴오허[遼河] 동쪽의 땅은 명나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홍산대첩 (鴻山大捷)
1376년(우왕 2)에 최영(崔瑩)이 충남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싸움. 이 해 7월 왜구가 충남 연산(連山)에 있는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여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를 죽이는 등 행패가 심하자 최영은 자진해서 출정하여 왜구를 거의 전멸시켰다. 그 공로로 시중(侍中)의 관직을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 싸움에서 최영은 몸에 적의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부하들을 진두 지휘하였으며, 이 싸움 후부터 왜구들은 최영을 백수 최만호(白首崔萬戶)라 불렀다고 한다. 토로 남게 되었다.
황산대첩 (荒山大捷)
1380년(우왕 6) 9월 이성계(李成桂)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구(倭寇)를 격퇴시킨 싸움. 이보다 앞서 1376년 홍산(鴻山)싸움에서 최영(崔瑩)에게 대패한 왜군이 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침입하였고, 80년 8월에는 진포(鎭浦:錦江入口)에 500여 척의 함선(艦船)을 이끌고 침입,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때, 원수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이 화통(火?·화포(火砲)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순찰사(慶尙都巡察使)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咸陽)·운봉(雲峰) 등의 험지(險地)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南原)에서 배극렴(裵克廉)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이를 계기로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花水里)에 세워졌다.
출처 : 네이버 지식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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