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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할빈조선족백년사화(7)-괴뢰만주국 통치하의 조선인 이민

by 8866 2006. 11. 27.
할빈조선족백년사화(7)-괴뢰만주국 통치하의 조선인 이민

 

1931년 9.18사변후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나라 동북을 침략하고 1932년 3월 1일에 식민지정권 위만주국을 세웠다. 침략군은 그 먼저 2월 3일에 벌써 할빈을 점령하였다. 이때로부터 할빈시의 조선인 이민은 일제와 괴뢰만주국의 통치를 받게 되였다.

만주국이 건립될 당시 전 만주국의 총인구는 3000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넓은 만주땅에 인구가 너무도 적었고 만주를 발전시키려면 많은 로동력이 수요되였다. 일제가 작성한 만주국 ‘전국선언'에는 원유의 한족, 만족, 몽골족, 일본인, 조선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도 영구히 거주를 원하는 자는 모두 받아주겠다고 하였다. 이런 정신에서 1936년 8월 괴뢰만주국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협의를 맺고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공동히 제정하였다. 이 요강에는 매년 조선으로부터 만호, 5만명을 만주국에 이민시키고 조선인 이민을 만주국의 구성분자로 만들계획이였다.

1938년 7월부터는 조선이민의 류형을 집단이민, 집합이민, 분산이민으로 나누어 적극적으로 동원, 이민의 속도를 가속하였다. 할빈으로 오는 이민은 도시이민인것만큼 분산이민의 류형에 속했다. 이리하여 할빈시의 조선인 인구는 만주국의 건국초기인 1932년의 340호, 1405명으로부터 1935년에는 1215호, 5631명으로 늘어났고 1940년에는 8962명으로 늘어났으며 1945년 해방될 때는 2만97명으로 14년사이에 14배로 증장하였다.

할빈시의 조선인 이민은 갖은 환난속에서 내 힘으로 살아나가는 리념에서 근면하게 일하고 같이 살아보자는 정신으로 서로 도와주는데서 생존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만주국 국무원에서 강덕 4년에 출판한 ‘통계회지’ 제17호에 의하면 1937년 할빈시 조선인 인구는 6066명이였다. 그들의 직업구조를 보면 농업에 591명, 어업에 6명, 광산업에 8명, 공업에 294명, 상업에 911명, 교통업에 104명, 공무와 자유직업에 296명, 기타 직업에 325명이였고 무직업자도 있었다. 이 수자를 보면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것으로 60%이상을 차지하였다.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나갈수 있으나 무직업자는 생활을 유지해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약담배장사를 하는 사람은 있어도 거리바닥에서 빌어먹은 거지나 도적질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9.18사변으로 하여 북만 각지에서 토비들의 폭행을 피하여 피난민들이 할빈에 있는 3개 피난민수용소에 모여들었다. 1932년의 통계만해도 여러 수용소에 들어있는 난민이 5023명이나 되였다. 수많은 난민들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어나갔다.

1938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노화교육체제를 실시하였다. 조선인 중소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문의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조선력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등 강박적 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1938년 6월 일본관동군은 할빈 평방구에 731세균부대를 세우고 조선인 ‘반일분자’를 세균부대에 이송하여 생체실험용 ‘마루다’로서 세균과 독가스 실험을 진행하였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에서는 ‘창씨개명’의 법령을 내려 조선인에 대한 창씨개명을 강제적으로 실시하여 조선인의 전통적인 조상의 성씨를 일본성으로 고치게 하였다. 할빈에서는 1940년 2월부터 시작하여 창씨개명을 추행하는 황민화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조선민족을 일본인의 ‘반도인’, ‘선계’, ‘선인’으로 개칭하도록 강박하는 민족차별시 정책을 썼다. 1941년에는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일본관동군에 징용하여 강박적으로 전쟁터로 내몰아 대포밥으로 만들었다.

1942년 1월 1일부터 할빈시에서는 생필품 배급제도가 실시되고 5월 1일부터는 미곡배급제도가 실시되였는데 조선인의 배급통장에는 ‘선계’라는 도장을 찍어놓고 2등공민으로 일본인보다 입쌀을 적게 주었다.

할빈시의 조선인민들은 일제의 백색테로하에서도 일제를 타도하고 민족해방과 조선독립을 위한 반일운동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1930년대 초 할빈에 있는 중국공산당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 양림과 그의 처 만주성위 부녀사업책임자 리추악은 각지의 항일무장대오와 반일단체들을 조직지도한 렬사들로서 지금 동북렬사기념관에 그들의 사적을 전시하고있으며 많은 신문과 서적에서도 양림과 리추악의 혁명업적을 소개하고있다. 1943년 연안에서 동북으로 파견되여온 김택명은 할빈에서 비밀리에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할빈을 중심으로 한 각 현에 독립동맹세포조직을 발전시키고 반일사상교육과 각종 형식의 반일활동을 조직 지도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통치하에서도 조선민족은 민족차별시와 사회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나갔고 ‘조선민족은 정복할수 없는 민족이다’라는것을 세상에 알려주었다.

출처 : 마음의 보름달
글쓴이 : 문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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