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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베리아 기원설

by 8866 2006. 11. 14.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

天下第一 大帝國 高句麗
 申光澈

목차.

1. 서론.
  왜 바이칼 호인가?
2.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의 근거.
  1. 고고학적 근거.
  2. 기타 학문적 근거.
  3. 역사·문화적 근거.
  4. 부리야트족을 중심으로.
3. 결론
  시베리아 기원설을 검토하면서.


1. 서론

왜 바이칼 호인가?

 왜 수많은 사람들은 시베리아를 민족의 기원지로 보고 그 중심지로 바이칼 호를 지적하는가? 그 이유야 물론 여러 가지 고고학적, 사회적, 인류학적 근거를 토대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그런 학문적인 근거를 떠나

 

확실히 오늘날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는 오늘날 달나라까지 갔다오는 인류에게 있어 지구상의 마지막 불가사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이다. 즉, 신비한 곳, 태초의 비밀을 간직한 그런 곳이다.

 

수질을 측정하기 위해 비커를 담그면 그 비커 때문에 수질이 오염되는 지극히 맑고도 맑은 곳으로 셀렝가강을 비롯해서 336개의 하천이 흘러 들어오지만 흘러나가는 강은 남서쪽 끝 근방의 앙가라강(예니세이강의 지류)뿐이다.


호수 안에는 27개의 섬이 있고 물범(물개) 등 특유한 생물이 많이 서식하는데

약 1200종의 동물종 중 바이칼호 고유의 동물이 3/4을 차지한다.

남한 면적의 1/3 에 달하는 거대한 이 호수에서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는다. 가히 인류의 시원지(始原地)라고 할 만한 지역이다.


민족의 기원지를 시베리아 바이칼 호로 선택한 것도 결코 허황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 퍼온이주: 밝달 -> 발 ㄱ달 -> 발 칼 -> 바이칼 로 된 것으로 보임.

즉 원래는 '밝달' 이었던 것으로 보임.


그리고 바이칼에서 내려온 한웅께서 곰(웅)족을 만나서 한민족의 원형을 이루신 것으로보임.

삼국유사에 나오듯이 곰(웅)족 또한 뛰어난 민족이고

고대 중국의 성웅 황제헌원씨 역시 유웅씨 (有熊氏) 이니 곰(웅)족 즉 동이東夷의 후손으로

황제헌원씨와 그의 후손...요임금 순임금등은 ...중국 지나족(화족)을 문명화시킨 실로 위대한 동이족 입니다.)

 

 오행 사상에 있어 그 시작은 수(水)라고 한다.

그렇게 봤을 때 바이칼 호가 주목받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각종 전설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 지역 사람들은 바이칼 호를 바다로 생각하고 있으며

태초에 물이 없던 시기에 바이칼 호가 생겨나 만물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봉우 권태훈 선생은 그의 저서 『봉우일기』에서 말하길 바이칼 호는 우리 조상의 발상지라고 적고 있다.


그밖에도 우리나라에서 시베리아 바이칼 호를 민족의 기원으로 보는 사람은 많은데 대표적인 사람이 『불함문화론』의 육당 최남선, 『조선사 연구』의 위당 정인보 등이며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는 파미르와 몽골 고원을 인류의 기원으로 보는 학설을 소개하고 있어 이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환단고기』 역시 시베리아 기원설을 따르고 있어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역사를 바이칼 호에서부터 보고 있다. 아울러 전 세계적으로도 동북아 인류의 기원을 바이칼 호로 보는 사관은 이미 19세기 러시아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어 주목할 만 하다.


  흔히 말하기를 우리 민족은 좁은 한반도가 아니라 드넓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이 활동 무대라고들 한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우리가 한때 만주에서 활동했다는 것 정도는 다 알고 있으며 고구려, 이 석자는 다 들어봤을 것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의 마음 속에 뭔가 모르는 민족의 원주지에 대한 생각이 본능적으로 전해 오는 것일까? 위당 정인보는 이렇게 말한다.


『삼국유사』가 없다고 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몰랐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대대손손 부모님(선대)의 가르침으로 전해지는 것이므로 굳이 문헌을 빌리지 않는다 해도 전해지는 사실들이라고 적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일까?


  문헌에 의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우리의 역사와 민족의 기원. 필자는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한 간단한 정리를 통해 그것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2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의 근거

  1. 고고학적 근거.
  
 뭐니뭐니해도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것이 바로 물적 증거일 것이다. 그것도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이고 확인과 검증이 가능한 확실한 증거물 말이다.


그렇게 봤을 때 과연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의 고고학적 근거는 어떤 것이 있을까? 시베리아에서 오래 전, 그러니깐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고 있다가 그들이 사방으로 퍼졌다는 것이 기본적인 흐름인데 실제 이런 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이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물이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을 꼽으라면 일상에서 가장 널리 쓰였고 연대 측정이 가장 정확하고 쉬우며 문화적 양상이나 문화 전파 경로 등을 잘 알 수 있는 '토기' 가 첫째이고 두 번째가 각종 '석기' , 세 번째가 '인골'  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골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어 실상 토기와 석기, 그리고 관련 유적들을 토대로 우리는 과거 인류의 이동 경로와 문화 전파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다.   


  신대륙에로의 인구 이동은 치아, 고고학적 근거, 언어학적 근거를 토대로 봤을 때 시베리아로부터다. 김원룡은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고고기행』에서 기원전 약 14,000년 전부터 6,000년 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인구 이동이 일어났다고 적고 있는데 그런 배경 속에서 중국 동북 3성과 난하, 요하, 대릉하,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예맥족의 고조선, 부여 ,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한국인이 단두(短頭)에 머리 높이가 높은 고두, 얼굴은 장안(長顔), 머리 부피는 큰 편, 뇌중량도 무거운 편, 몽고반점 등의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인종적으로 몽고 인종에 속하며 북으로는 퉁구스족으로부터 남으로는 일본의 긴끼(近畿) 지방까지 고루 퍼져 있다고 말한다. 즉, 이 모든 인종이 하나의 원류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흔히 고조선의 유물로 잘 알려진 비파형 동검은 현재 한반도 전지역과 중국 동북방의 요령성, 길림성 등에서 주로 나타나며 초기형은 요동 지방, 중기 이후부터는 요서에서 나타나고 있어 요동 지방의 문화가 후대 요서에 진출했으며 그 주체에 대한 인식도 산융(山戎), 동호(東胡)에서 예족(濊族)으로 옮겨가는 추세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예족을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킨 그는 내몽골 지방 오르도스, 길림성, 요령성 등지에 살고 있던 북방 민족이 흉노와 예맥족으로 우리 민족의 주체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동북 3성에 대해서는 오늘날 중국이 대단히 민감해하고 있는 지역인데 바로 조선족을 비롯한 여러 소수민들이 살고 있고 앞으로 한국과도 국경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동북 3성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지역이 우리 민족 문화의 활동 근거지였다는 사실은 이제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이미 50년대부터 고조선 관련 유적들이 그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는데 모두 고조선식 청동단검, 즉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용하는 소위 패수 문명권(요하, 대릉하, 대동강)이 우리 민족의 시작이며 그 주체는 고조선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조선 문명권으로 대변할 수 있는데 그런 고조선은 산동대문구 문화의 '아사달' 문양이나 팽이형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을 근거로 봤을 때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 발전했다고 한다.


시베리아 기원설이 바이칼 호에서 기원한 인류가 내몽고와 만주를 지나왔다는 것과 대비해 그는 동북방의 문화가 오히려 서방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약간 논제에서 벗어났지만 그 역시 동북 3성 지역이 우리 민족의 주 활동 무대였다는 사실만은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주목할 부분은 과연 동북 3성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주 활동 무대가 됐는지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듯 싶다. 시베리아 기원설의 요지는 바로 바이칼 호에서 이 지역으로 문화나 인류 등이 전파, 이동했다는 것인데 그 근거를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다.


  현재 내몽골 자치구 호화호트시 근처에서 전기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3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주 유물이었던 석핵석기는 경기도 연천 전곡리에서도 발견된 것들인데 러시아와 몽고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자갈돌 찍개 문화가 아프리카 - 유럽 - 시베리아(예니세이강 상류) - 몽고(알타이) - 내몽고 - 요령 - 한국의 순서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어 시베리아가 동북 문화, 인류의 기원이라는 설에 한층 힘을 실어주고 있다.


오늘날 시베리아에서도 바이칼 호, 레나 강 주변, 알타이 지방을 제외한 나머지에서는 구석기 시대 유물이 거의 전무한 상태인데 시베리아와 극동 지방의 전기 및 중기 구석기 자료를 봤을 때 전형적인 찍개 문화 전통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구석기 시대 말기로 갈수록 동북아시아 문화와의 상관성도 점점 높아진다. 현재 시베리아에 고인류가 살기 시작한 때를 두고 기원전 180만∼200만년 전의 유적을 토대로 말하기도 하지만 극히 제한적인 것이며 기원전 3만∼2만년으로 내려오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가능해지고 기원전 15,000∼16,000년으로 내려오면 체계적인 이해도 가능해진다.


  앞서 말했지만 구석기 말기에 와서야 동북아시아 문화와 시베리아 사이의 상관성이 높아지는데 현재 한민족의 직계 조상으로 신석기인을 논의하는 것도 이와 맞물린다고 할 수 있다. 흔히 『환단고기』의 역사를 사실이라고 규정된다면 환인 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와 같은 문제가 아닐까 한다. 환인부터가 우리 민족의 역사냐, 아니면 환웅, 아니면 단군 시대부터가 우리 민족의 역사냐 할 수 있는 문제 말이다.


  김정학은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의 기형이 기본적으

로 일치하고 있어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를 북방계로 보았으며 이는 시베리아의 고아시아족이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소리가 된다. 김정배 또한 한반도와 시베리아의 신석기 시대 토기의 유사성, 무덤에 매장된 시신의 머리 방향이 일치하는 점등을 들어 두 지역 간의 문화적 유사성에 대해 언급하였고 역시 시베리아 일대에 널리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이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원으로 들어왔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고아시아족이 사용했던 고아시아어가 고구려의 어휘 속에 남아 있는 일부 Giyark어와의 일치성을 찾을 수 있으며 웅녀 사상이 시베리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음을 근거로 '단군조선=신석기시대(문화)=고아시아족' 이라는 도식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무르강이나 쿠치엘라를 포함하는 알타이 지역에서는 현재 4∼5백점의 암각화가 발견되고 있는데 흡사 울주 반구대나 고령 양전동의 암각화와 주제가 비슷하다. 우코크에서 발견된 물고기 모양의 양탄자에서 신라의 곡옥 문양과 똑같은 물고기의 눈을 볼 수 있으며 신라의 많은 문화가 스키토 - 시베리아 동물문과 연관성이 있는 사실들은 확실히 우리 민족의 문화속에 그 지역의 문화가 녹아들어 있음을 알리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시베리아와 우리 민족의 연관성을 찾는 연구는 걸음마 수준이며 인류학, 고고학적 측면에서 주마간산격으로 처리되어 왔다. 석기 시대를 연구하는 가장 훌륭한 시료인 인골에 대한 연구도 드물었고 혹여나 인골을 토대로 한 논문이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종론을 거론할 정도의 수준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시베리아의 고아시아족이 알타이족으로 대체되고 이 와중에 고아시아족 일부가 동진(東進)하였고 훗날 그것이 퉁구스계로 대체되었다는 논지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시베리아 바이칼 호 주변 지역으로 설정하고 있으나 이선복은 이를 부정하고 민족의기원을 동북아시아의 어느 지점으로, 최정필은 발해연안설 또는 자체형성설을 주장하고 있다.


즉, 앞서 말한 근거들이 희박하고 편파적임을 이유로 한반도와 보다 가까운 지역에서 오늘날 우리 민족이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북아 어디가 우리 인류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앞서 말한 근거들을 완전히 무시해 재론의 여지조차 묵살하고 있으며 자체형성설은 오늘날 세계 5대 문명권에 대동강 유역이 편입되어야 한다는 북한 고유의 주체 사상과 연결된 국수주의적인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분명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몽골의 알타이 지역의 문화는 한민족의 것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증명하는 근거들이 있음에도 그것들을 단순히 보편적인 북방 인류 공통적 문화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시베리아에 살던 고아시아족이 동진을 거듭해 신석기 문화를 열었고 그런 신석기 문화는 앞선 문화와는 달리 농경, 수렵, 어로, 채집 등 정착 생활을 기본으로 인구의 급증, 각종 인종들을 동화, 흡수하면서 현성, 발전했을 것이며 그런 신석기 문화를 토대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됐기에 신석기인을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보는 주장에 필자도 동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신석기인의 원류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에서부터 온 세력이며 그런 그들과 우리가 오늘날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성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알아봐야 할 것이다.


  확실히 고고학이란 가장 확실하고도 뚜렷한 물적 증거를 토대로 논지를 전개하는 학문이지만 그만큼 문제점도 많다. 그것은 바로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과 유적을 토대로만 논지 전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정 고고학, 후기 과정 고고학 등 고고학 자체에서도 수정, 보완을 거듭했는데 고고학에서도 물적 증거만 가지고는 제대로 된 논지 전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대강의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오늘날 시베리아와 한민족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있느냐에 대해서 적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며 다음에서 좀더 자세하게 논의할 생각이다.
 
  2. 기타 학문적 근거.

 앞서 우리는 고고학적 근거에 대해서 알아봤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문화적 흐름이 한반도로 내려오고 있으며 그것은 일본열도에까지 이어진다. 물론 고고학적으로 당시 사회를 규명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 할때는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인류학, 유전학, 생물학, 사회학, 언어학 등이다.


특히 유물과 유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원시 시대, 상고사를 논할 때는 인류학과 사회학이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민족의 기원이나 인구의 이동 현상 등을 논할 때는 생물학과 유전학이 많이 이용되고 있다. 언어학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김원룡은 언어학적으로 봤을 때 한국에는 두 가지 언어 계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원시한반도어와 알타이어가 바로 그것인데 원시한반도어는 아무르강 하구에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인 길랴크인들의 언어로 현재 우리 언어의 기층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 후 알타이어의 한 계통인 퉁구스어가 이를 대체하여 오늘날 한국어, 만주어, 일본어의 모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5,500∼6,200년 전이며 한국어와 일본어의 직접 분리는 약 4,600년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원시한반도어는 빗살무늬의 신석기시대, 알타이어는 청동기시대와 일치하고 있어 한국인은 처음 고아시아족의 한 지파였다가 훗날 북방 퉁구스계와 혼혈하여 오늘날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김주원 역시 「한국어의 계통과 형성에 대한 연구사적 고찰」에서 유럽인들의 고전어인 희랍어나 라틴어가 유사한 것, 그 하위어들이 유사한 것에 대해 별 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가 유럽어와 현저하게 유사한 것에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얘기하고 있다.


즉, 이런 유사한 언어들은 동일한 기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한국어의 기원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이 앵글로색슨족, 즉 북부게르만을 모체로 하는 노르만 프렌치(북부 프렌치와 스칸디나비아적 요소의 혼합체), 스칸디나비아, 켈트, 선켈트족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예를 들면서 언어와 민족의 관계는 필연적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라고 적고 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얼마든지 다른 문화와 접촉, 흡수, 혼합되어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 같다.


  또한 이기문은 한국어가 알타이 조어와 자매 관계에 있을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김방한은 원시한반도어가 어떤 고아시아어와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한국어를 두고 알타이 계이면서도 비(非) 알타이어인 원시 한반도어의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이 높다고 한다.


이들에 의하면 한국어의 계통에 대해서 확립할 단계는 아니지만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읍루어에 대해서도 드러나는데 읍루어가 확실히 부여, 고구려어와 달랐으며 그 읍루를 이기문은 퉁구스의 선조, 김방한은 고아시아족의 하나인 길랴크족의 선조 등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봤을 때 분명히 한국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계통이 혼성되어 전해져 내려왔음을 알 수 있지 않나 한다.


  한영희는 Gm 유전자형을 혈액응집저지시험 방법으로 분석했을 때 몽골 인종은 백인종와 흑인종에게는 보이지 않는 몽골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같은 몽골계 인종이라도 사는 지역마다 유전자의 빈도수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특히 ab³st 인자는 바이칼 호 주변의 북방계 몽골인이 가장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그 빈도가 낮아지는데 순서를 보면 부리야(0.307∼0.272), 야쿠트(0.267), 일본인(0.2609), 알라스카 에스키모(0.254), 아이누(0.252), 한국인(0.231) 순으로 나타난다.


이에 덧붙여 몽골 인동은 척추끝의 엉덩이에 보이는 몽골 반점이 두드러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윗눈꺼풀이 아래로 겹쳐진 것들이 다른 인종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대개 북방 몽골족은 한반도 이북, 남방 몽골족은 화남(華南) 지방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민족들로 볼 수 있다. 이것만 봐도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올수록 몽골 인종 고유의 특징이 많이 감소함을 알 수 있다.


  이 빈도 수치가 곧 인구 이동 경로와도 연관지어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봤을 때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수치가 낮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강 순서를 그리자면 시베리아 - 일본 - 한국 - 북중국의 순서인데 이것은 시베리아로부터 일본까지 인구 이동이 1차 진행되고 그 다음에 중간 기착지인 한국과 북중국은 일본보다 주민 이동에 따른 혼혈이 더욱 활발했기 때문이다.


이런 Gm 유전자설을 통해 시베리아로부터의 1차 주민 유입 시기를 3만년∼1만년 전까지 2만년간으로 보고 있으며 이 기간을 세석기 문화의 확산 시기에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유전자방법에 의한 인종 이동 루트의 고찰은 그 비교 유전자의 자료가 모두 현대인간에게서 추출된 만큼 어느 시기에 어떤 유전자를 가진 인종이 들어왔는지 그 유입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유전학, 의학, 민속학, 농학, 지구과학, 식생활, 문화·경제·형질·언어 인류학·고고학 등 관계 학문의 공동 연구 속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적고 있어 총체적인 방법으로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논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근래 인류학자가 '분자 시계' 로 불리는 DNA 조사(각 민족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비교하여 그들의 조상이 어떻게 갈라져 나왔는지 추적하는 방법)를 통해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얻었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7만∼5만년 전쯤 몽골에 도착했으며 이들은 세 갈래로 퍼졌으니 한 갈래는 러시아와 베링 해협을 거쳐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갔으며 다른 한 갈래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으로 갔는데 우리 민족은 바로 이 몽골 계통이라는 것이다.


현재 한반도로 전해지는 경로에 대해서도 몇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시베리아 -

중서부 지방 - 한강, 남부 지방 - 일본 규수로 이어지는 경로이며 다른 하나는 동북부 지방 - 두만강, 연해주 지방으로 이어지며 나머지 하나는 서북부 지방 - 요령성과 길림 지방 계열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강원도 사학과의 주채혁은 '몽골' 이라는 이름이 '맥(貊)고올리 - 몽(蒙)고올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4세기 무렵에 고구려에 복속했던 흥안령 지역의 실위(室韋)를 원(原) 몽골족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를 두고 맥구루, 맥고리 등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대강 언어학적, 유전학적으로 알아봤는데 고고학적 근거와 마찬가지로 북방 계통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아시아족이 먼저 남하하고 그 뒤를 이은 북방 퉁구스계가 고아시아족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양쪽의 언어가 혼합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현상이 남아 있다는 것과 유전학적으로 봤을 때 그 자세한 이동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시베리아 바이칼 호, 몽골 고원의 알타이 지역부터 동북아 각 지역의 민족들이 서로 밀접한 유사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언어학적으로 봤을 때 그것이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와도 맞물려 고고학적 측면과도 연결되고 있음을 상기했을 때 우리 민족의 기원을 북방계에서 찾는 것은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당시 사회를 오늘날 고찰했을 때 문화의 흐름이나 인구의 이동 등이 모두 시베리아에서 동진 혹은 동남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과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불함문화론을 주창한 최남선은 몽고어에 신불(神佛)을 통틀어 부리칸이라 하고 있으며 악륜춘인(顎倫春人)의 집집마다 팔납우(八拉 )의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색륜인(索倫人)의 집에는 반드시 보로한을 모셔 놓았고 길리악에서는 산신(山神)에 바드란 이름이 있고 조선에서는 부군(府君) 존숭, 일본에서의 신도 제파(神道 諸派), 유구(琉球)에 있어서의 햇님 신앙들을 통틀어 제민방(諸民邦)에 현재까지도 은연중 공통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백두산을 만주어로 불함산, 즉 불칸산으로 인식해 몽골부터 만주, 한반도 등을 불함문화권이라는 독특한 하나의 문화권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흑해에서 카스피해를 거쳐 파미르 북동 갈래인 천산 산맥으로 하여 알타이 산맥, 사얀 산맥, 야블로노이 산맥, 흥안령 산맥, 대행 산맥 이동의 땅, 조선, 일본, 유구를 포함하는 일선에 밝(Park) 중심의 신앙, 사회 조직을 가진 민족이 분포하여 하나의 연쇄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럼 이런 학문적인 것 이외에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에 대해 근거가 될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우선 현재를 토대로 과거를 거꾸로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문화' 라는 것에 대해 비교·검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고학적 근거는 과거 사람들의 살았던 흔적이기에 확실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땅을 파헤칠 수도 없는 일이며 파괴된 문명도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못 한다.


언어나 유전자 역시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간의 상관성에 대해 알려주고 있지만 역시 확실한 것만은 아니다. 언어는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여러 문명의 요소들이 녹아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가지고 민족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흡사 족보를 가지고 민족에 대해 논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전자는 상관성만을 알려줄 뿐, 그 정확한 전파 경로나 자세한 유입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기 때문에 이것들만으로 시베리아와 한민족의 상관성을 설명하기에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게 봤을 때 필자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전설이나 문화 현상, 각 지역간의 문화 교류 현황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비교·검토하는 것이 시베리아와 한민족간의 상관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막연히 단군을 알고

 지내며 단군 신화와 웅녀 설화처럼 전승 등을 알고 있는 것이 곧 과거의 사실, 역사를 대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역사·문화적 근거.

 위당 정인보는 그의 저서 『조선사 연구』에서 말하기를 단군과 민족의 시원에 대해서는 문헌이 굳이 존재하지 않아도 대대로 전승된 사실들이 바로 그것들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그의 논지는 오늘날 우리가 전설이라고 알고 있고 신화로 알고 있는 것들, 즉 활문헌(活文獻)이 바로 가장 확실하게 전해지는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살아있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에 문헌이 없다해도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이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현전하는 문헌 사료를 부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에 각종 문헌 사료에 나오는 역사적인 근거에 대해서 적어볼까 한다.


과연 북방 초원의 흉노, 동호, 돌궐, 선비 등의 민족들이나 동북방의 숙신, 말갈, 거란, 여진, 만주족 등은 우리 민족과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역사적으로 어떤 교류를 했는가에 대해서 알아본다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각 민족들을 토대로 동북방의 민족에 대해서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우리 민족에 대한 최초의 정치 집단으로 단군조선, 흔히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문명을 꼽는다. 혹자는 1만년 전부터 존재했던 환인, 환웅 시대의 문명 역시 우리 역사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세계 최초라고도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과연 그 문명들이 세계사인가, 한국사인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봤을 때 단군의 역사는 분명히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환인, 환웅 시대에 대해서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 하고 있다.


  그럼 우선 단군조선(이하 고조선으로 지칭하겠다)에 대해 알아보고 나서 환인, 환웅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인보는 조선의 옛 음은 중국 문헌에 등장하고 있는데 『사기』〈우제기〉의 식신(息愼), 『공자가어』〈상서전〉, 『사기』〈공자세가〉, 『대대례』,『회남자』의 숙신(肅愼), 『관자계도』, 『경중』, 『전국책』, 『사기』〈열전〉조선(朝鮮), 『급가주서왕회해』의 직신(稷愼) 등이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국초에 소속(所屬 : 관경, 거느린 바)이라고 불리던 것이 주신(珠申)으로 불렸고 이것이 전해져 숙신이 되었으니 중국인들은 그 이유를 몰랐으나 사실은 직신과 숙신은 본시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신, 직식, 숙신이 하나라는 말은 곧 조선과도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를 두고 이(夷)라고 함은 널리 알려진 일인데 그것은 중국에서 부르는 명칭이지 우리의 본디 명칭은 조선이라는 것이다.


고조선 강국론(强國論)으로 유명한 윤내현은 고조선이 난하 이동은 물론 한때는 난하 이서까지 진출해 다스렸다고 하면서 신용하는 그런 고조선을 '고조선 문명권' 으로 표현하고 그 서쪽은 산동 지방까지 다다랐다고 적고 있다.


  그밖에 신채호도 주신(州愼)은 곧 숙신, 직신이며 혹 식신이라고도 하는 바 바로 조선이라고 하며 전세계 공통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는 대홍수때 조선의 단군 왕검이 지나(중국)의 수재를 도와줬음을 주장한다. 『환단고기』에도 나와 있고 중국 사서에도 등장하는 이 기록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지는데 동이에게서 중국이 치수하는 법을 배워 황하를 다스렸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용하는 당시 최고의 문명권은 바로 고조선의 것이었고 산동 지방 등지에서 고조선의 문화를 전수받은 중국 문명이 그로 인해 성장했다고 한다. 아울러 권태훈은 한국에서 건너간 600개 자원(字源)이 중국에서 몇만자로 불어난 것이라 하여 치수법 뿐만 아니라 문자까지 넘어갔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중국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한문과 황하 치수에 성공한 하우(夏禹)가 모두 동이족, 고조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고 앞서 고고학적 근거를 살필 때도 약간 언급했었지만 고조선이 오늘날의 동북 3성과 한반도, 중국 대륙 동부 지역을 영향권으로 설정해 존속했다는 것은 문헌적인 기록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 바 있는 사실들이다.


  그럼 고조선에 대한 것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는 환인, 환웅에 대한 것을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일단 우리는 고조선이 우리 민족의 확실한 역사이며 그 세력권은 현재의 동북방을 아우르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럼 『삼국유사』나 여타 사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권태훈의 주장처럼 환인(그는 이를 두고 백두산족의 시조인 대황조 한배검이라고 지칭한다)은 정말로 지금으로부터 10,000년 전에 북만주 장춘의 장백산(長白山)에서 태어나 흥안령을 넘어 바이칼 호에 정착한 뒤 인민들을 본격적으로 교화(敎化), 이화(理化), 치화(治化)하였을까? 그리고 이스라엘족도 단군의 후손이며 단군의 이런 가르침은 중국, 인도, 이스라엘, 아프리카까지 퍼져 나갔을까? 


  『환단고기』 역시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동안 인류의 흐름이 시베리아 바이칼 호부터 만주 지역까지 내려왔다고 적고 있다. 그 당시 환인이 다스렸던 환국이 동서 2만리에 남북으로 5만리나 되었다고 하니 그 판도가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전 아시아를 포함하는 광활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한영희는 신석기 시대의 종족들이 영토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을 떠나서라도 과연 1만년 전에 이 정도의 세력 판도를 가질 정도의 인구, 문화, 사회 조직, 도구 등이 있었을까가 의문이다. 하지만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여기서는 『환단고기』의 흐름이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과 일치한다는 것만을 짚어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현재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라면 중국 사서에 여럿 등장하고 있고 열국시대 이후로도 계속 나타나고 있어 그 관점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 자료는 비교적 풍부하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상고사, 더 나아가 선사 시대는 얘기가 달라진다. 우선 『규원사화』는 제쳐두고서라도 『환단고기』가 상고사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사서이며 『삼국유사』에도 그 내용이 잠깐만

 언급되어 있을 뿐 자세한 것은 아니다. 『환단고기』가 세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사료의 부족에 목말라하는 현실에서 이 책은 그야말로 한 방울의 생명수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환단고기』의 흐름과 같은 맥락의 자료를 몇 개 더 소개할까 한다.


  우선 대황조 한배검으로 유명한 봉우 권태훈이 있다. 그는 단군을 두고 신이 아닌 높은 경지에 오른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한배검이 바이칼 호에서 정착한 이후 다시 장춘으로 돌아와 이룩한 것이 바로 아사달, 신시(神市), 평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화랑도를 관계로 진출하기 위한 8가지 도인 화도(花道), 무기를 다루는 무예인 낭도(浪道), 정신 수련의 신선도인 도도(道道)로 이해한 것은 물론 고구려 동명성왕은 바로 한배검의 가르침을 받은 선가(仙家)이자 낭도이며 단학가(丹學家)로 이해하는 것이 독창적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백두산족이라는 표현을 쓰는 그는 이스라엘족은 물론 유태족 최고 유일신인 '여호와(야훼)' 역시 인간 역사 최초의 1대 단군인 복희씨의 여동생이자 여자 단군인 여와씨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 사학자들이 이스라엘과 우리 민족간의 상관성을 예로 들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후손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만 그 주체가 다를 뿐이다. 양측 다 고대에 하나의 원류가 있었고 거기서 세계 각지로 뻗어나간 여러 갈래들이 오늘날의 세계를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은 변함이 없다.


  불함문화론의 육당 최남선이나 위당 정인보 역시 이와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둘의 차이점을 꼽으라면 육당은 단군을 원시시대 무속의 일종으로 보고 아시아적 정체사회의 마술 종교로 규정한데 반해 위당은 고조선을 고대 종교,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 문화로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위당의 생각에 동조하는 바가 큰데 오늘날 샤머니즘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단순한 원시시대 무속의 일종으로 보기에는 빈약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는 무속 신앙, 샤머니즘에 대해 글을 쓸 생각인데 앞서 말했지만 문헌적인 근거도 부족하고 고고학적 증거도 없는 이상,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나 문화, 그 중에서도 무속 신앙이야말로 시베리아와 우리 민족의 관계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무(巫)에 대해 간단히 적자면 이기백, 이병도 등은 신석기 시대, 즉 고조선 시대를 무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김병모는 기원전 1,000년 청동기 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계통은 북방계이며 기마 민족이 만주와 한반도로 신앙을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근거로 신라의 금관 문화를 예로 들고 있다. 그렇지만 한양대 인류학과의 조흥윤 교수는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샤머니즘으로 봤을 때 한국 무의 기원을 고조선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바 있다.


그는 고조선 이후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된 우리 민족에 대한 서술, 특히 소도와 솟대, 천제 기록 등을 토대로 논지를 전개했으며 그 요지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샤머니즘의 밀접한 관련성에 있다고 하는 바 필자가 지금 시베리아와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샤머니즘에 초점을 잡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주채혁은 약간 다른 소재로서 사상적인 유사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버드나무(유화)와 용(거북이)이다. 현재 바이칼 호의 올혼섬에서부터 몽골 초원, 만주 초원 및 압록강과 한반도 전체를 봐도 버드나무는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있다는 것이다.


울란우데 지역에는 붉은 버드나무 산맥이라는 곳도 있고 시베리아 - 몽골 - 만주의 접경 지대인 훌룬보이르호수 일대에 오면 다시 거대한 붉은 버드나무 떼를 만날 수 있다. 만주를 거쳐 압록강까지 버드나무가 널려 있는데 이것들이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해서 많이 심어놓은 것일까? 그는 바로 이 버드나무를 중심으로 부르칸이즘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최남선이 부르칸(불함)을 '밝음' 으로 해석했지만 동시대 몽골의 언어학자 베·에린친은 부르칸을 버드나무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실제 러시아 '나나이족' 의 사전에는 부르칸이 말 그대로 '버드나무' 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버드나무를 주채혁은 『몽골비사』 초두의 몽골 여시조 알랑·고아 - 북부여 동명왕의 어머니 고리제국 궁중 시비 - 추모왕의 어머니 유화 -알타이초원 파지리크 고분의 여사제 미이라 얼음공주 등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면서 버드나무와 하늘, 샤머니즘, 천제(天祭) 등과 관련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버드나무와 함께 등장한 것이 바로 거북이, 즉 용인데 거북이(龜) 역시 물이 있는 곳이면 대부분 살고 있고 몽골 초원에 현재 산 거북은 없지만 여러 거북이 관련 지역이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용왕이 사는 용두천은 미르내, 미르내가 흘러 이루는 버드나무 벌판을 미르벌, 즉 한반도 남단의 밀양으로 추정하는 그는 과거 거대한 역사적인 전통 신앙의 중심이 알타이 초원 - 시베리아 오비강, 예니세이강, 앙가라강, 바이칼 호 - 동북 몽골의 훌룬호와 보이르호 - 만주의 흑룡강, 눈강, 송화강, 우수리강, 두만강 및 압록강 - 한반도의 밀양을 축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최남선이 우리 사람의 고도리는 '얼' 이라고 하면서 역사상 이 '얼' 의 신장과 위축이 곧 우리나라의 흥망성쇠와 연관 있다는 말처럼 주채혁도 북방을 이어주는 신앙적 전통이나 그 흐름의 중심을 부르칸이즘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원(原)고구려 세력이 통합·분열되는 과정에서 맥고올리 -> 맥고려 -> 맥고리 -> 몽고올리 -> 몽골칸국이 이뤄진 것이라 말하는 그는 동시베리아에서 서시베리아까지 이르는 광활한 타이가와 스텝 지역 역시 부르칸이즘과 연결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답사길에 올혼섬의 집에 물고기(魚) 궤짝과 함께 마당에 양(羊)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선(鮮)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으며 현재 선족(鮮族)이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버드나무, 거북이와 같이 또 하나의 동물을 꼽으라면 단연 곰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으로서 단군을 낳은 '웅녀'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사실 곰이 여자로 화(化)하고 그 몸에서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은 비과학적, 비합리적인 내용일 것이다.


그것은 고대에서 곰이란 것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신적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구 시베리아족이라 할 수 있는 축치족, 캄차달족, 길리약족, 코리약족, 유카길족은 물론 신 시베리아족인 퉁구스족, 핀족 등은 모두 곰 숭배 풍습이 있었다. 문헌으로도 곰 숭배에 대한 기록은 여럿 볼 수 있는데 일본 훗카이도의 아이누족은 오늘날도 웅제를 지내고 곰을 산신으로 숭배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아이누족도 고아시아족의 하나로 동시베리아에서 사할린을 거쳐 일본 동북 지방으로 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 시베리아족이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고 마을 어귀에 나무나 돌로 곰의 형상을 새겨 놓았으며 그것이 지금의 토템 폴(Totem pole)이라는 것은 결고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신용하의 원고구려 세력의 통합·분열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적고 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는 흉노 묵특선우의 공격으로 동호가 패하여 그 세력이 오환(烏桓), 선비(鮮卑), 해(奚)로 분화했는데 이 세 부족을 보면 동호가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알 수 있다고 해서 고조선과 북방 초원 세력간의 연계성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또한 흉노의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해 훈족으로 불리며 활동하고 훈족의 평원이 오늘날 헝가리 평원으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흉노 이후 오환과 선비가 잠깐 북방 초원을 지배하는 거대 세력이 됐지만 곧 오호십육국이라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화북으로 그 주무대가 옮겨지게 된다. 그 후 북방을 차지한 것은 유연(柔然)으로 당시 유연의 영토는 『위서』에 이르기를 동쪽은 조선, 서쪽은 언기, 북쪽은 한해(바이칼 호), 남쪽은 고비 사막 시대까지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유연은 그 후 서쪽으로 이동해 아발족(Avars)으로 불리며 활동했고 그 후 북방은 고조선의 변방 후국으로서 고조선 멸망 이후 고조선의 왕족 후손인 '아사나' 씨족이 왕족이 되어 이룩한 돌궐(突闕)이 차지하였다. 그 중 서돌궐은 아나토리아반도로 이동해 고대 오트만 터기 제국을 건설했으며 뒤를 이어 위구르(Uighur)가 천산 산맥을 중심으로 왕국을 이룩해 북방을 지배했었다.


카자흐(Kazak)는 과거 중국사서가 적고 있는 오손족과 강거족이 중심이 되어 서방의 원주민과 융합하여 형성된 것이며 키르기츠(Kirghiz) 역시 돌궐이 한 갈래이고, 불가리아(Bulgaria) 역시 고대 국가를 이룩했던 불갈족 혹은 불족이 송화강 유역에서 서방으로 여러 단계 이동하면서 흑해 연안까지 도달한 동방 민족이라고 덧붙였다. 명대 북방의 지배자였던 달단(   : 타타르)은 물론 핀란드의 핀족 역시 북흉노의 한 갈래이며 헝가리, 마자르족의 대부분은 말갈족의 일부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 역시 고조선의 후손들로 『위략』에 이르기를 왜인의 구어(舊語)를 들으니 스스로 태백의 후손이라고 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구주 지방과 기내 지방의 한반도 계열의 세력들이 자리잡은 곳이라고 적고 있다. 아울러 그가 말하기를 고조선의 제 1 유형 후국들은 맥, 예, 부여, 옥저, 구려, 진, 숙신, 읍루 등으로 고조선어를 모두 자기 언어로 사용하였거나 공통언어로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발전해 온 것이며 제 2 유형 후국들인 동호, 오환, 해, 유연, 산융, 돌궐, 오손, 실위 등은 고조선 출신이나 두만들의 통치 하에서 고조선어를 공통언어로서 각자의 언어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봤듯이 주채혁과 신용하의 의견대로라면 저 멀리 시베리아에서부터 내려온 하나의 사상, 부르칸이즘을 가진 민족 혹은 세력이 동북방에 정착했으며 단군조선 시절에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했던 그들은 단군조선 해체 이후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는 것이다.


앞서 봤지만 모든 북방 초원 세력들은 다 우리 민족과 연결지어 볼 수 있으며 그들은 유럽의 헝가리, 핀란드, 불가리아, 마자르족, 터키 등등과도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즉,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도 고구려의 후손이 될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는 좁은 한반도가 아니라 광활한 대륙 벌판이며 이 모든 민족이 우리 민족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민족은 물론 우리 민족의 원류를 찾는데 있어서 그 주체는 바로 우리 민족이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몇 가지로 나눠 분류별로 시베리아 기원설의 근거로서 쓰이는 것들에 대해 정리해 봤다. 과거로부터의 유물이나 유적, 각종 문헌 기록들, 현재인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검사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봤을 경우 시베리아와 우리 민족, 더 넓게는 몽골 인종은 깊은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현재 바이칼 호 부근에 살면서 우리 민족과 유사한, 또한 과거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부리야트족의 전통과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4. 부리야트족을 중심으로.

 부리야트(Buryat) 전설을 보면 바이칼 호에 대해 단적으로 알려준다. 옛날에는 바이칼 바다가 없었고 오로지 땅만이 있었는데 불을 토하는 산이 무너지더니 물로 변해서 커다란 바다로 변했고 그것이 바로 바이 갈(Bai Gal), '서 있는 불' 이었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북으로 티벳고원, 히말라야의 눈 덮인 봉오리들과 북경 원인의 고향인 북인도, 거친 자갈돌과 찍개를 최초의 도구로 사용한 미지의 소안인(Soan)이 살았던, 인류 최초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의 지역과 접해 있었고 남으로는 몽골 초원으로부터 고비(Gobi) 사막으로 열려 있었던 지역이다. 당연히 고대로부터 이 지역은 사람이 살기 더 없이 좋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1,000년경 초부터 동부 아시아의 청동주조의 중심지로서 이웃 몽골은 물론 멀리 중국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칼과 단검들이 이 지역에서 수없이 출토되고 있으며 파편조각, 돌, 곡괭이, 망치 등과 함께 청동주물이 발견되기도 한다.


  부리야트인들은 이미 1세기 이상 몽축업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무덤 속에 무기와 도구들을 놓고 무덤 주위에 거대한 돌들을 둘러놓았다. 그리고 그런 돌 위에 '사슴 암각화' 로 잘 알려진 그림을 새겨 놓기도 하였다.


다리는 접고 뿔은 뒤로 제껴진 채 달리는 사슴의 모티프는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양식' 인데 황금뿔을 가진 이 사슴은 오래 전부터 태양으로 상징화되어 동과 서를 매일매일 건너 다니는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에 암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암각화 제작자들은 끌과 페인트를 사용할 줄 알았는데 현재 그런 암각화들은 바이칼 호를 중심으로 주변 강가에 넓게 위치하고 있다. 이 그림들의 반복되는 주제 중 하나라면 손을 맞잡은 사내아이들이 머리 위로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모습일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부리야트족 신화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암각화를 새기던 청동기 시대의 부족은 현재 사라졌지만 일부는 오늘날의 부리야트 족이 되었을 것이고 일부는 후대에 그 지역으로 들어온 훈족(흉노)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갔을 것이다.


  그들은 기원전 250년 무렵에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훈족이 자바이칼 지역으로 찾아와 대연합을 이루었다고 적고 있다. 샤뉴이 모데(Shanyui Mode)라는 인물이 아버지 샤누이 투만과 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으며 그는 스스로 샤뉴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24개의 부족이 그를 통치자로 인정했으며 몽골 전지역과 자바이칼의 남쪽은 훈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훈족의 유적지는 자바이칼 지역과 바이칼 근방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볼가(Ivolga)는 철 제련로, 요새화된 정착지, 80여채의 주거지 유적, 해자 등등이 발견되는 지역인데 이 지역은 불탄 흔적들이 곳곳에 있어 전쟁의 흔적을 알게 해 준다.


  그런 훈족을 동쪽에서 공격한 부족 중에 샨비(syanbi)족이 있는데 이 부족은 훈족에게 패해 뿔뿔히 흩어졌던 둔크후(Dunkhu) 지역 사람들을 대표하는 두 부족 중의 하나라고 하고 있다. 이 샨비족이 자바이칼 지역과 북부 몽골 지역에 정착해 토착인과 섞이는데 이 새로운 인종 형성이 북부 몽골 부족의 일부라고 한다. 당시 선비족은 흉노를 정벌해 10만 여가를 수용하고 그 세력이 급증해 단번에 북방의 강자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이루어진 민족 융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6∼10세기부터는 쿠리칸(Kurikan)족이 바이칼 부근에서 수도 많고 힘도 센 종족이 된다. 그들의 땅은 바이칼 이웃에 있었으며 목축과 사냥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셀렝가 하류 지역과 바르구진 계곡의 암각화는 그들의 예술 문화를 쿠룸친 문화는 그들의 고도로 숙련된 제철 기술을 대변해준다.


이렇게 번성했던 쿠리칸족은 10∼11세기에 몽골족의 압박으로 일부는 북쪽으로 이동했고 나머지는 몽골족과 섞이거나 자바이칼 지역에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11세기까지 몽골어를 쓰는 부족들은 서로 느슨한 관계에 있었을뿐 통일된 정치 집단은 아니었다. 13세기 초 쓰여진 『가장 깊은 전설』이라는 몽골 연대기에 의하면 1206년 칭기즈칸이 '숲 지대 사람들'을 정복하기 위해 장남 드즈후치(Dzhuchi)를 보냈는데 몽골군에게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그들 중에서 부리야트족이 끼어 있었다. 물론 이 말은 부리야트족이 13세기 이전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칭기즈칸의 가계를 보면 그의 선조로서 알란-고아(Alan0goa)라는 여자와 그녀의 아들 보돈차르(Bodonchar)가 언급되고 있다. 그로부터 10세대가 지나 칭기즈칸까지 오면서 가계가 분리되었는데 이 말은 9세기 말에 알란-고아가 살았으며 그녀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을 비롯한 부족 집단이 존재했고 그들이 부리야트족의 핵심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부리야트의 선조와 부리야트족은 모두 '숲사람들' 로 불렸는데 바이칼 호 근처 타이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몽골의 전설적인 선조 알란-고아가 살았던 지역도 바로 이 곳이며 같은 시기 부리야트족의 선조들 역시 이 곳에서 수렵과 어업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살펴본 결과 우리는 앞서 봤던 몇몇 근거들과 맞물리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흉노와 몽골로 대표되는 북방 세력이 바로 바이칼 호와 끊임없이 연결되고 있으며 그 말은 곧 우리 민족과의 연결성을 계속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바이칼 호 근처에서 사는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부리야트족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과거 우리 민족에 대해 알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부리야트족은 나무를 신성하게 여긴다. 삼목, 전나무, 소나무, 낙엽송을 신성하게 여기며 특히 자작나무는 어머니 나무라고 여기며 신성시여긴다. 이 자작나무가 없으면 샤먼을 신성하게 정화하는 의식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들은 이 자작나무로 신성한 작업을 수행하는 한편 생활의 모든 도구들을 이 자작나무로 만든다. 활과 화살, 양동이, 욕조, 여물통, 받침 접시, 잔 등등 생활의 도구들이 모두 자작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나무를 신성시여기는 문화는 곧 조각 문화와도 직결되기 마련이다. 나무 속의 혼령이 살아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있어 조각이란 단순한 장식(Decoration)이 아닌 그들의 의식 속의 작업이며 신성한 작업,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생활 공간이자 문화 공간인 유르타 역시 나무요, 마구(馬具)도 모두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부리야트족의 생활 곳곳에 그들이 신성시여기는 나무가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런 부리야트족에게 있어 불이란 아주아주 오래전, 기억할 수조차 없는 오래 전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불꽃이었다. 부리야트족은 불을 아주 신성시 여겼기 때문에 불에 관련된 규칙이나 습관이 매우 많다. 그들의 유르타는 가운데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어 그 곳으로 나가는 연기로 하늘과 연결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불에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고 날타로운 것으로 불을 뒤적여도 안 되며 불을 향하여 발을 뻗어서도 안 되고 발로 석탄을 건드려서도 안 된다. 깨끗하지 않은 손으로 장작을 패서 그것으로 불을 지피는 것은 불을 모독하는 행위로서 금기시하기도 할 정도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불은 또 하나의 영적 존재였고 사냥이 주업인 그들에게 당연히 제사 의식은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제단·사원인 오보, 그들의 수호신인 오곤, 하늘과 연결되는 샤먼 이 세가지 조건이 그들의 제사 의식을 치루는 필수 요소였다. 부리야트족은 대강 18세기부터 불교(라마교)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웃 국가인 몽골이 당시 완벽한 불교 국가였기 때문이다.


고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부리야트족의 제사 의식 또한 불교식으로 많이 바뀌었는데 선택적으로 수용해 부리야트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그들의 불교는 몽골이나 티벳의 것과 또한 많이 다르다.


불교 수용 시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부리야트식 불교는 현재 대단히 번창했으며 또한 생활에 밀접하게 투입되어 있다. 그들은 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은 대지의 젖통에서 나온다." 라고 말이다. 유목민은 자고로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잘라 '툰토' 라 불리는 지역에 묻으며 사람이 죽으면 '땅에게 요청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즉 대지는 사람을 낳고 사람이 죽으면 받아들이는 어머니같은 존재와도 같다. 부리야트족이 신는 장화 '구탈' 의 끝이 위로 구부러져 있는 이유도 평평한 땅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뾰족한 것으로 땅을 긁지 못 하게 가르치는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불교에 따르면 대지의 본질은 흰색, 정의의 여신, 정의의 어머니인데 부리야트족에게 있어 흰색은 성스러운 색이다. 그런 부리야트인에게 대지라는 의미는 초원과 직결된다. 그것도 단순한 초원이 아니라 사람, 동물, 새 등등 모든 자연이 찾아와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부리야트인의 대지다.


  앞서 부리야트인의 거주지가 오래 전부터 청동주조의 발흥지였으며 이 곳에서 퍼져나간 주조 기술이 각지에 영향을 끼쳤음을 거론했었다. 그들에게 있어 대장장이 일은 신의 선물로써 영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전설에 의하면 그들의 대장장이 신은 각종 망치, 부젓가락, 풀무 등을 지니고 부리야트 땅의 각 지역으로 하강했다고 한다. 20세기 중반까지 부리야타에는 지역마다 각각 다른 다르한(darhan : 인간 대장장이)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들은 항상 칼 손잡이의 문양을 어느 정도 바꿀 줄 아는 창조자였으며 유목민들이 생각하는 하늘의 상징, 하늘로부터 주어진 재능을 가진 집단이기 때문이다. 암각화, 나무 조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예술과 생활은 이제 제철까지 이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암각화, 각종 나무 조각, 쇠 장촉 하나부터 금은 줄세공, 샤먼의 의례용 춤 등이 모두 인간의 창조주이자 유일한 신인 하늘을 빛나게 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부리야트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신적,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리야트인에게 있어 물 역시 신성한 것이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필자가 보기에는 이 물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한다. 지금까지 계속 언급해왔던 바이칼 호와 관련된 전승이나 전통이 부리야트에는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수많은 동식물이 살고 생명의 근원, 풍부한 자원을 간직한 이 곳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은 쿠리칸의 거주지였으며 쿠리칸은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목축, 사냥, 어로, 농경을 일으키고 인공 관개 시설과 건초지, 성곽과 섬 전체에 걸쳐 직선으로 둘러싸인 논밭을 건설했다. 현재 올혼섬의 쉬베테이(shibetei)에는 길이 250m, 높이 2.5m에 달하는 성벽이 남아 있는데 5∼11세기경 유목 민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서 쌓은 것이라고 한다.


  세계 담수량의 1/5를 보유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담수호, 지극히 깨끗하고 맑은 물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정화,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는 담수호. 이 귀중한 지구상의 샘물은 바로 부리아티아의 여러 강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부리야트족은 물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서 숭배해 왔었다. 강과 호수들은 제각기 물의 신을 가지고 있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이 신들은 바로 부리야트족을 보호해주고 부리야트족에게 숭배받았던 것이다.


3. 결론

시베리아 기원설을 검토하면서.


 필자는 앞에서 고고학적, 유전자적, 인류학적, 문헌적인 검토등을 거쳐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해 봤다. 필자 개인적으로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몰랐던 바 이번 기회를 통해 나름대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로 인해 고고학부터 각종 학문에 대해 폭넓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는데 각종 근거를 토대로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이 단순한 추측이나 상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방 전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버드나무(이를 비롯한 모든 나무를 신성시 여기는 사상, 앞서 말한 우주목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와 곰, 사슴, 새, 거북이(용) 등의 애니미즘, 흡사할 정도의 사상 체계, 동일한 유전자형, 비슷한 생활 양식, 언어적인 유사성, 신체적·생물학적 유사성, 역사적인 연계성 등등 우리 민족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를 중심으로 한 모든 세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우리 민족이 고리족부터 이어져 내려오면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비롯, 흉노, 돌궐, 선비, 오환, 거란, 여진, 몽골, 유연, 만주족까지 하나의 연결선상에서 이해된다면 한국사는 물론 북방 유목민족사도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분명 참신하고도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아직 시베리아 기원설을 정설화시키기에는 문제점이 없지 않다고 본다.


  앞서 한번 거론했지만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시대로 내려오면서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와 만주까지 남하해 전파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그것을 증명하기는 현재 어려운 일이며 고고학적 증명이 어려우니 그것을 토대로 한 당시 사회, 사상 체계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더더욱 무리다. 한영희는 이선복이나 최정필이 이런 이유로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을 부정하는 것을 지적했지만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는 이것이 전혀 쓸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불분명한 것만

은 사실이다. 문헌 자료는 없고 오직 고고학 자료만 남아 있는 현재 선사 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무리없이 연결시키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이 하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말은 곧 결정적인 근거만 하나 나타난다면 이것이 곧 정설화될 수 있을만큼 설득력 있다는 소리가 된다.


우리가 막연히 꿈꾸는, 만주 벌판에서 뛰놀던 자랑스럽고 되찾고 싶은 역사를 바로 아는데 앞서 우리 민족의 기원까지 되찾으려는 방법의 하나가 이 시베리아 민족 기원설이 아닐까 하는데 우리가 흔히 이민족, 야만인으로 치부하는 북방 세력이 우리 민족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접하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현재 우리의 상고사를 알려주고 있는 유일한 사서라 할 수 있는 『환단고기』에 앞서 그것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상고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학설이라고 생각하며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한 학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나와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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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 대한민국
글쓴이 : 아침햇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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