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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스크랩]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부인과 자손들

by 8866 2006. 6. 12.

위안스카이는 1859년(청나라 광서 9년)에 하남성 항성현(項城縣)에서 태어났나.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서출이었으므로 모친의 장례문제로 배다른 형과 불화가 발생하여, 하남성 창덕부(彰德府, 현재의 안양시) 원상촌(洹上村)으로 옮겨서 살았고, 죽은 후에도 여기에 묻혔다.

 

위안스카이는 1처9첩을 두었다.

 

정실부인은 우씨(于氏)이다. 그녀는 하남의 재산가의 딸이었으나, 글을 몰랐고, 예절에 대하여도 잘 알지 못하여, 위안스카이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장자 위안커딩(袁克定)을 낳은 후에 그녀와 동거하지 않았고, 그녀를 단지 집안의 주부로만 대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손중산에게 양보받아 중화민국대총통에 오른 후에는 first lady의 역할을 도저히 우씨는 해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어느 나라의 공사부인이 우씨 부인앞에 와서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우씨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몰라 크게 놀라서 손을 뒤로 감추어버렸다. 상대방인 공사부인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후부터 위안스카이는 우씨부인을 공식장소에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대이태태(大姨太太)는 심씨(沈氏)이다. 그녀는 소주의 유명한 기녀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위안스카이가 명성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심씨가 위안스카이에게 자금을 지원해서 공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위안스카이는 그 정을 잊지 않고, 공을 이룬 후에 심씨를 이태태(姨太太, 정식 첩)로 삼았다. first lady인 우씨가 유약하고 무능하였으므로, 위안스카이는 심씨를 부인으로 대우하여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경우에 심씨가 부인의 신분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위안스카이는 또한 그녀에게 집안의 관리를 맡겼다. 심씨는 자녀를 낳지 못하였으나, 위안스카이는 모든 자녀들에게 심씨를 엄마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이이태태(二姨太太)는 이씨(李氏)이다. 조선 사람이다. 청나라 말기에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파견나가 있었는데, 그 때 조선왕비의 여동생인 김씨(金氏, 안동김씨로 보임)를 첩으로 들였다. 김씨가 위안스카이에게 시집갈 때, 두명의 시녀를 데리고 갔는데, 이씨와 오씨였다. 위안스카이는 첩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이 3명의 여자(김씨, 이씨, 오씨)를 모두 첩으로 삼았다. 그리고, 3명을 나이순서에 따라 이씨를 이이태태, 김씨를 삼이태태, 오씨를 사이태태로 삼았다. 이씨는 시녀로 김씨가 시집가는데 따라갔다가 졸지에 첩으로 지위가 격상되었으며, 이후 위안스카이와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녀 백정(伯禎, 후에 청나라의 양강총독인 장인준의 아들과 결혼함). 오자 극권(克權, 후에 청나라 양강총독인 단방의 딸을 처로 삼음), 칠자 극제(克齊, 훙 중화민국총리를 지낸 손보기의 딸을 처로 삼음), 십자 극견(克堅, 중화민국의 섬서독군인 육건장의 딸을 처로 삼음), 십이자 극도(克度, 부유한 상인인 나운장의 딸을 처로 삼음), 육녀 녹정(菉禎, 중화민국총리를 지낸 손보기의 아들과 결혼함)이 그들이다.

 

삼이태태(三姨太太)는 김씨(金氏)이다. 조선의 귀족집안출신이고, 원리 위안스카이의 '정실'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시집가자마자 자신을 따라온 시녀들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첩이 되었다. 그리하여 매일 우울하게 지냈다. 그녀는 위안스카이와의 사이에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차자 극문(克文), 삼자 극량(克良), 삼녀 숙정(淑禎), 팔녀 (어릴 때 사망), 십녀 사정(思禎)이 그들이다.

 

사이태태(四姨太太)는 오씨(吳氏)이다. 김씨를 따라 온 두 시녀중의 하나인 오씨는 원래 김씨를 따라온 시녀였는데, 생각지도 않게 위안스카이에 의하여 첩으로 지위가 오르게 되고, 김씨와 지위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나중에 위안스카이에 의하여 하마터면 비빈으로 책봉될 뻔하였으니, 그녀에게는 위안스카이의 총애가 놀라운 것이었을 것이다. 위안스카이와의 사이에는 4명의 자식을 두었다. 사자 극단(克端), 차녀 중정(仲禎, 양강총독 단방의 조카에게 시집감), 사녀 (어릴 때 사망), 칠녀 복정(復禎). 오씨는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을 맡고 있을 때였다.

 

오이태태(五姨太太)는 양씨(楊氏)이다. 위안스카이가 처첩들중에 가장 총애한 사람은 대이태태와 오이태태이다. 대이태태 심씨는 위안스카이가 실의에 빠져있을 때의 지기이며, 심씨는 영웅을 알아보는 혜안을 가져서 위안스카이의 총애를 받은 것이다. 오이태태가 위안스카이로부터 총애를 받은 것은 심씨와는 달랐다. 그녀는 미모로서 총애를 받은 것도 아니고, 위안스카이의 예전부터 알던 지기도 아니고, 그녀의 장점은 집안관리였다. 그녀는 말재주가 있고, 총명하였으며,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위안스카이는 그녀에게 일상생활에 관한 것을 모두 맡겼을 뿐아니라 그녀엑 원씨집안 전체의 관리도 맡겼다. 하인은 물론 위안스카이의 자식들 그리고 6, 8, 9의 세 이태태도 모두 그녀의 관리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집안 사람들은 모두 양씨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녀는 원씨집안의 왕희봉(王熙鳳, 홍루몽에 나오는 집안관리능력을 가진 여자)이었다. 그녀는 위안스카이와의 사이에 6명의 자식을 두었다. 육자 극환(克桓), 팔자 극진(克軫), 구자 극구(克久,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여원홍의 딸과 결혼), 십일자 극안(克安), 오녀 계정(季禎), 십오녀 (어릴 때 사망)이 그들이다.

 

육이태태(六姨太太)는 엽씨(葉氏)이다. 그녀는 원래 남경 조어항의 기녀였는데, 위안스카이에게 시집간 것은 순수하게 오인때문이었다. 원래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을 하고 있을 때, 둘째 아들인 원극문을 남경에 보내서 일을 처리하게 했는데, 원극문은 그 때 조어항에서 기녀인 엽씨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 마음에 들어 결혼하기로 하고, 엽씨는 원극문에게 자신의 사진을 준다. 원극문이 돌아와서 부친에게 일처리를 보고하는 중에 부주의로 엽씨의 사진을 떨어뜨리게 된다. 위안스카이가 뭐냐고 묻자 얼떨결에 원극문은 "제가 남경에서 부친을 위하여 예쁜 여자를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가지고 왔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사진을 보니 예쁜 것이 마음에 들어 "좋다. 좋아"라고 하게 된다. 사람을 남경에 보내서 엽씨를 데려오는데, 엽씨는 첫날밤에 비로소 남자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이태태는 모두 5명의 자녀를 둔다. 십사자 극첩(克捷), 십칠자 극우(克友), 구녀 복정, 삽일녀 기정, 십이녀 서정.

 

칠이태태(七姨太太)는 장씨(張氏)이다. 그녀는 하남 사람으로 자식이 없다. 원씨 집안의 법도에 따르면 자식을 낳지 못하면 그저 아가씨(姑娘)로 불리울 뿐, 이태태로 불리울 수도 없고, 이태태로서의 대우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장씨는 위안스카이가 매우 아껴서 이태태로 대우하여주었고, 이태태로 불리웠다. 청말에 위안스카이가 하남에 머물때 그녀는 화장(花匠)과 바람을 피우다 들켜, 위안스카이에 의하여 음독자살을 명받아 죽는다. 원씨 집안 사람들은 그녀가 병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팔이태태(八姨太太)는 곽씨(郭氏)이다. 그녀는 원래 소주의 기녀였다. 위안스카이가 군기대신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소주에서 그녀를 사서 바쳤다. 그녀는 세 자녀를 두었다. 십삼자 극상(克相), 십오자 극화(克和), 십사녀 고정. 고정은 중화민국총리를 지낸 조곤의 아들과 결혼하나, 후에 이혼하고 미국으로 이주한다.

 

구이태태(九姨太太)는 유씨(劉氏)이다. 그녀는 위안스카이의 최후의 가장 나이어린 첩이다. 그녀를 첩으로 취할 때 위안스카이는 50여세였고, 그녀는 갓 스물이었다. 그녀는 원래 오이태태 양씨의 시녀였는데, 성년이 된 후에 위안스카이가 첩으로 삼는다. 구이태태는 일남일녀를 두는데, 십육자 극번(克藩)은 요절했고, 십삼녀 의정(儀禎)은 오이태태의 딸인 계정의 뒤를 이어 소주의 육장원 집안에 시집간다.

출처 : 중국,북경,장안가,에서
글쓴이 : 중은우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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