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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

[스크랩] [綠野]톨스토이 [Tolstoi, Lev Nikolaevich, 1828.9.9~1910.11.20]

by 8866 2005. 10. 24.
러시아의 소설가 ·사상가.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남러시아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
주요저서 《전쟁과 평화 Voina i mir》(1864∼1869)
톨스토이박물관 내부 / 러시아 모스크바.

남러시아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 출생.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임과 동시에 문명비평가 ·사상가로서도 위대한 존재였다.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1847년 대학교육에 실망을 느껴 카잔대학을 중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지주로서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실패로 끝나고 잠시 방탕생활에 빠졌다. 1851년 형의 권유로 군대에 들어가 카프카스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고, 다음해 처녀작 《유년시대 Detstvo》(1852)를 익명으로 발표하여 네크라소프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소년시대 Otrochestvo》(1854)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iskie Rasskazy》(1854∼1856) 등은 군에 복무하면서 집필한 작품들로서 1855년 군에서 제대하고 수도로 올라갈 무렵에는 이미 청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857년 서유럽 문명을 시찰하기 위해 국외에 나갔으나 실망하고 귀국하여, 인간생활의 조화를 진보 속에서 추구하던 그는 그 후 내성적인 경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62년 궁정 시의()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하고 문학에 전념하여 나폴레옹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 Voina i mir》(1864∼1869)를 발표, 이어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3∼1876)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에 대해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과학 ·철학 ·예술 등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종교에 의탁하였다. 이때가 그의 전향기로서 《교의신학비판()》(1880) 《요약 복음서》(1881) 《참회록 Ispoved’》(1882) 《교회와 국가》(1882) 《나의 신앙 V chem moya vera?》(1884) 등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체계화되어 갔다. 이 전향 후의 사상을 보통 ‘톨스토이주의’라고 한다.

그의 사상은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사해동포 관념에 투철한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하여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을 표방하는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자기 완성을 신조로 하여 사랑의 정신으로 전세계의 복지에 기여하려는 것이었다. 1882년 모스크바 빈민굴을 시찰한 후 사회조직의 결함에 깊이 생각이 미치자, 그의 사상적 번민은 종교적 ·윤리적 문제에서 사회제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 1885년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하여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 그 후 그의 일체의 저작권은 부인이 관리하였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와 친교가 있어 4,000명에 달하는 이 교도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부활 Voskresenie》(1899)이다.

그는 수년 전부터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를 집필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문학관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으나, 《부활》의 집필은 앞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동방정교회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는 이유로 1901년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부활》 이후의 주요작품으로는 《신부() 세르게이》(1898), 희곡 《산송장》(1900), 단편 《무도회의 뒤》 《병 속의 아료샤》(1905)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종교와 도덕〉(1894) 〈톨스토이즘에 대하여〉(1898) 〈현대의 노예제도〉 〈자기완성의 의의〉(1900) 〈유일한 수단〉(1901) 〈세 가지 의문〉(1903) 〈셰익스피어론()〉(1903) 〈유년시대의 추억〉(1904) 〈러시아 혁명의 의의〉(1906) 〈마을의 노래〉(1909), 그리고 최후의 대작 《인생의 길》(1910) 등을 들 수 있다.

전향 후 그의 생활신조는 전술한 대로 재산과 저작권의 포기는 가족에게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반면 세상에서는 그를 위선자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어 그가 성명했던 본래의 뜻대로 실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종종 한 집에서 기거를 같이했던 그의 고제() 첼트코프에 대한 부인의 질투와 증오도 가정생활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다. 1890년에 발표된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이러한 내적 고민을 선명하게 그렸다. 그는 자신의 가정생활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몇 차례 가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191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장녀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의 여행길에 올랐으나 도중에서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박물관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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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박물관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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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박물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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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박물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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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어떻게 살것인가?)

  중에서 발췌한 글

- 톨스토이 지음, 채수동 / 고산 옮김, 동서문화사, 2004. 3. 1. -

 

 1월

 

 1월 1일(p.71)

 

  그리 중요치 않은 평범한 것을 많이 알기보다는 참으로 좋고 필요한 것을 조금 아는 것이 더 낫다. - 톨스토이 -

 

 1월 3일(p.76 ∼ 77)

 

  지혜의 법칙을 아는 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보다 못하다.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보다 못하다. - 중국잠언 -

 

  인생의 목적을 단순히 일신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견디기 어려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현이, 그리고 우리의 이성, 우리의 심장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인생이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인생은 끊임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 톨스토이 -

 

 1월 4일(p.77)

 

  모든 사람은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저마다 결점을 가지고 있다. 남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대화하고 충고하면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 성현의 사상 -

 

 1월 5일(p.79 ∼ 80)

 

  논쟁에는 귀를 기울이되 거기에 끼어 들지는 말라.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말에도 격앙과 흥분을 경계하라. 노여움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옳은 일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노여움이 그 옳은 일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 고골리 -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물리리라 하였도다. - 시편 제 39편 1 -

 

 1월 6일( p.80 ∼ 81 )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 톨스토이 -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는 자제심이 가장 중요하다. 그 자제심은 되도록 일찍부터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어릴 때부터 그것이 몸에 배여 있으면 우리의 덕행은 견고한 것이 될 것이다. 덕행이 견고한 사람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 노자 -

 

  사람들이 그처럼 매혹되어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처럼 골몰하고 있는 것, 그러한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골몰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갈망하는 것 속에 자신들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다시 안절부절 못 하고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을 바라며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한다. 마음의 평화는 헛된 욕망의 충족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같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러한 헛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네가 오늘까지 쏟아온 노력의 반이라도 좋으니, 그러한 욕망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힘써 보라. 그러면 너는 곧 그렇게 함으로써 훨씬 더 많은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 에픽테토스 -

 

  만일 불쾌한 일이 자꾸 겹쳐서 분노와 격앙을 느끼거든 얼른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하여 자제심을 잃지 말도록 하라. 우리가 의지의 힘으로 평화로운 정신상태로 돌아가는 법을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 내부의 정신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능력은 커진다. - 톨스토이 -

 

 

  우리가 자신의 욕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여러 번 지에 빠지더라도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욕정과의 싸움을 계속하면 계속할수록 그 힘이 약해져서 쉽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

                                                                  - 톨스토이 -

 1월 7일(p.81 ∼ 83 )

 

  사람들에 대한 선의는 인간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선의로써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 톨스토이 -

 

  아무리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의 내부에도, 우리들 속에 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영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그래, 세상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니까 참아야지' 하고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드러낸다면, 첫째로 우리는 옳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둘째로 그들을 결사적인 싸움으로 유인하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우리와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현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면 좀더 잘해 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선의로 대하며, 그에게 다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쇼펜하우어 -

 

  악의 유혹에 빠진 사람을 잔인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남에게 위로 받은 적이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을 위로하기에 힘써라. - 성현의 사상 -

 

  어느 누구도 얕보지 마라. 이웃에 대한 악의와 시기심을 버려라. 남의 행위와 말은 언제나 선의로 해석하라. - 성현의 사상 -

 

  성인은 강직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성인은 자신의 열린 마음을 만인의 마음에 적응시킨다. 그래서 선덕이 있는 사람은 선덕이 있는 사람으로 대하고, 죄 많은 사람은 선덕의 가능성을 지닌 사람으로 대한다. - 동양의 잠언 -

 

 1월 9일(p.91 ∼ 92 )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색에 의하여 얻어진 것만이 참된 지식이다. - 톨스토이 -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진정한 인식은 시작된다. 어떤 것을 인식하려고 할 때, 그것과 자신의 관계가 학자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발짝도 그 인식에 다가갈 수 없다.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백지의 상태에서 거기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 소로 -

 

 

  끊임없이 남의 사상만 접하다 보면, 자기 자신의 사상은 방해를 받아 위축되고 만다. 게다가 그것이 장기화되면, 그 사상에 그와 같은 부자연스러운 영향에 반발할 만한 유연성이 없을 경우, 완전히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늘 책을 읽으며 공부만 하고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완전한 타인의 사상에 접하기 위해 너무 멋대로 자기의 사상적, 학문적 활동을 중단하는 일이 거듭되면, 자기 자신의 사상체계 또는 학문체계가 그 통일성과 관련성을 잃게 된다.

  책에서 읽은 사상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내쫓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당시의 여행자를 비난하여 말했듯이, 남의 땅이 보고 싶어서 자신의 땅을 팔아치우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항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남이 그것에 대해 쓴 책을 읽는 것도 유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타인의 견해와 타인의 태도가 그 사람의 머리 속에 끼어 들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에게는, 나태하고 무관심해서 스스로 노력하여 사색하기보다는 기존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끝내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습성이 뿌리를 내리면 이미 사상은 운하로 흘러드는 개울처럼 다만 일정한 통로로 나아갈 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독자적인 사상을 지닌 학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쇼펜하우어 -

 

  위대한 사상가가 위대한 까닭은, 그들이 그때까지 나온 책이나 전설과는 상관없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지, 자기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나 현재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따금 마치 불꽃처럼 마음속에 밝게 피어오르는 사상을 늘 주시하며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그 같은 내면적인 빛이, 반짝이는 별 같은 시인과 철학자들의 관찰과 연구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에머슨 -

 

  사상은, 자신의 지능에 의해 얻어졌거나 조금이라도 이미 마음속에 일어난 의문에 대해 답하는 경우에 비로소 인생을 움직인다. 이와 반대로 머리와 기억력만으로 받아들여진 남의 사상은,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거기에 반하는 행위와 태연하게 공존한다.

  더 적게 읽고 더 적게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라. 정말로 필요하고 진심으로 알고 싶은 것만을 스승이나 책에서 배우도록 하라. - 톨스토이 -

 

 1월 11일(p.95 ∼ 96)

 

  모욕을 당하고도 보복하지 않고 평온하게 그것을 참아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위대한 승리자이다. - 제네비오 란 -

 

 

  어떤 사람은 너를 비난하고 어떤 사람은 너를 칭찬한다. 너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너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멀리할지어다. - 탈무드 -

 

  자기에게 합당한 자리보다 낮은 자리에 앉으라. 아래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느니보다 위로 올라가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나으리라.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신에 의해 낮춰지지만 스스로를 낮추는 자는 신이 그를 높여주리라. - 탈무드 -

 

  한 순간 한 순간,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지배욕을 없애기에 힘써라. 영예와 칭찬을 찾지 말라. 그러한 것들에는 모두 너의 영혼을 파멸시킬 위험성이 있다. 정신 차려서, 나에게는 남에게 없는 미덕이 있다는 자기도취를 경계하라. - 성현의 사상 -

 

  현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남들한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운명에 빠진다. 활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궁수는 자신을 탓하지 남을 탓하지 않는다. 현자도 그처럼 처신한다. - 톨스토이 -

 

 1월 13일(p.98 ∼ 99)

 

  선한 인간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오직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선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신앙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양심, 즉 보편적 이성의 조화이다. - 중국불교 -

 

  사람들은 말한다. 인류 최후의 날, 심판이 열리고, 선하신 하느님도 대노할 것이라고 그러나 선한 신에게서는 선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두려워하지 말라. 최후의 날은 기쁨으로 충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떠한 신앙들이 있을지라도 진실한 신앙은 오직 하나,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신앙이 있을 뿐이다. 사랑에는 선 이외의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 페르시아의 잠언 -

 

 1월 17일(p.111)

 

  자신의 영혼을 더욱 개선하고 완성시키면서 평생의 일에 힘써라. 오직 그럼으로써만 가장 효과적인 형태로 사회 전반의 개선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 톨스토이 -

 

 1월 20일( p.114 ∼116 )

 

  죽음과 탄생은 두 개의 경계선이다. 이 경계선 너머에는 똑같은 그 무엇이 있다.

    - 톨스토이 -

 

  죽은 뒤에 영혼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한다면 태어나기 전의 영혼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대가 어딘가로 간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어딘가에서 온 것이다. 만일 그대가 죽은 뒤에도 산다고 하면 태어나기 전에도 살았던 것이다. - 톨스토이 -

 

  우리는 죽은 뒤에 어디로 가게 될까?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원래 왔던 곳에는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때 어디에 있었는지, 그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하는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죽은 뒤에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도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 자신들의 생활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 오직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나기 전의 우리에게 악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은 뒤에도 악이 존재할 리 없다는 것이다.

- 톨스토이 -

 

  사람이 선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오늘, 바로 지금이 행복이며 이 생활 뒤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죽음을 생각하더라도 현재의 삶이 좋은 것으로 미루어 죽은 뒤에도 역시 좋으리라고 믿을 것이다. 하느님은 선하며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왔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줄 거라고 믿는 것이, 천국의 모든 기쁨을 믿는 것보다 훨씬 견실하고 마음에 평화를 준다. - 톨스토이 -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의 영혼은 육체라는 관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관, 즉 우리의 육체는 서서히 허물어지는 반면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육체가 죽었을 때 영혼은 점점 더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육체가 죽었을 때 영혼은 완전히 자유로워는 것이다. - 헤라클레이토스 -

 

  이 세상의 삶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천착할 필요는 없다. 다만 현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이성과 심정에 의해 알고 있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분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 톨스토이 -

 

 1월 21일( p.116 )

 

  어떤 사람 속의 이성이 점점 강해져 번뇌가 점점 사라질수록, 그 사람 속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영혼의 생활이 해방된다. 의식적으로 그 해방에 협력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톨스토이 -

 

  실수와 착오가 일어나도 실망하지 말라. 자기의 실수를 깨닫는 것처럼 공부가 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자기를 교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 칼라일 -

 

 1월 23일(p.122 ∼ 124 )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분노를 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면 아무 것도 하지말고 가만히 있는 것, 걷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말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몸과 혀를 다스리지 못하면 분노는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세네카는 또 화내는 버릇을 없애려면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낼 때의 모습을 잘 살펴보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화를 내고 있을 때의 모습을 잘 살펴보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화를 내고 있을 때의 모습, 즉 마치 술 취한 사람이나 짐승처럼 붉어진 얼굴, 증오에 찬 추한 표정으로 불쾌한 목소리를 꽥꽥 지르며 더러운 말을 뱉어내는 모습을 보고, 나는 저런 추태를 부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 톨스토이 -

 

  사람들이 종종 분노에 사로잡혀 그것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분노 속에 일종의 남자다움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단단히 혼내 주겠다. 등등.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분노의 발작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 속에는 좋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는 것, 분노는 나약함의 증거이지 힘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를 내고 서로 멱살잡이를 하거나, 아이나 여자 같은 약자를 때리는 사람은, 강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나약함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 톨스토이 -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정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거나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 - 톨스토이 -

 

 1월 25일(p.127)

 

  단순히 지식을 수집하고 다니는 학자는 불쌍한 사람이다. 끝없는 지식욕에 쫓겨 스스로를 높이는 철학자들 또한 불쌍한 사람이다. 이 나쁜 부자들은, 옆에서 라자로가 계속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을 때, 날마다 그 지적 유희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들은 모두 헛된 지식으로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 있다. 그들의 쓸모 없는 지식은 한 사람 한사람의 내면적 완성이나 사회의 향상과 진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페늘롱 -

 

 

2월

 

 2월 1일(p.146)

 

  인간은 자기의 육체와 정신을 자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특히 젊었을 때는 육체에만 관심을 둔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배려해야 할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아니면 안 된다. 이 같은 사고방식을 길러 네 생명이 정신 속에 있다는 것을 자주 상기하여,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멀리하고,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유의하며 오히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네 사명을 다하고 기쁨이 충만한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2월 3일(p.151)

 

  영혼에 있어서의 선은 육체에 있어서의 건강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진실로 몸에 배어 있을 때 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 톨스토이 -

 

 2월 6일(p.161 ∼ 163 )

 

  지금은 혐오까지는 하지 않을지언정 전혀 관심을 느끼지 않는 많은 일들이, 지난날에는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던 일인지 생각해보라. 지금 너를 혼란시키고 있는 욕망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또 네가 여태까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다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상기해보라.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네 욕망을 달래고 가라앉혀라. 그것이 가장 유익한 일이고 또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 톨스토이 -

 

  만일 현재, 부자에 대한 공격과 현 사회체제를 개혁하여 부를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려는 노력에 소비되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자기 완성을 위해 소비된다면, 우리가 그렇게도 고대하는 국가적, 사회적, 도덕적 생활의 개선은 신속하게 실현될 것이다. 인류가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의 세상은 지금의 불행한 상태와는 완전히 반대로 행복한 것이 되리라.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진리를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익숙한 국가적, 종교적 미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 류시 말로리 -

 

  오로지 자신의 육체적 생활을 위해 쏟아 붓는 노력만큼 자신에게나 남에게 유해한 것은 없고, 자기 영혼의 개선을 위해 쏟아 붓는 노력만큼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유익한 것은 없다.

- 톨스토이 -

 2월 8일(p.164)

 

  무릇 비난은 부당한 비난뿐만 아니라 정당한 비난까지, 한꺼번에 세 사람을 해친다. 첫째로 비난을 받는 당사자에게, 그리고 비난의 말을 듣는 제삼자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난의 말을 하는 그 사람에게, "남의 잘못을 숨겨 주어라, 하느님은 너의 두 가지 죄를 용서할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 톨스토이 -

 

 2월 9일(p.165)

 

  전쟁에 의해 생기는 물질적 손해가 아무리 크다 해도, 선악에 관한 왜곡된 관념이 단순하고 생각하는 일이 적은 근로 대중의 정신에 미치는 해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톨스토이 -

 2월 14일(p.180 ∼ 181)

 

  이성은 선한 사람만이 밝힐 수 있으며, 이성이 밝아질 때에 비로소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선한 생활에는 이성의 빛이 필요하고, 이성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선한 생활이 필요하다. 이 둘은 서로를 돕는다. 그러므로 이성이 선한 생활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이성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한 생활이 이성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한 생활이 아니다. - 중국 금언 -

 

  옛날 로마에 세네카라는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도, 그의 가르침도 몰랐지만 인생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류칠리여(그것이 벗의 이름이었다), 자네가 자신의 힘으로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네, 누구든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가다듬을 수가 있네. 그러기 위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거나 우리가 하는 말이 더 잘 들리도록, 좀더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신전 문지기에게 사정할 필요는 없어. 신은 언제나 자네 가까이, 아니, 자네의 내면에 있다네. 친애하는 류칠리여, 나는 분명히 말하네만, 우리의 내면에 모든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증인이며 감시자인 성령이 살고 있네. 그리고 그 성령은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에게 다양하게 대응하지. '모든 선한 사람들의 내부에는 신이 살고 있는 걸세.' 자네 눈에 사람의 영혼이 보이지 않듯이 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신의 창조물 속에서 자네는 신을 볼 수 있다네. 그와 마찬가지로 자네는, 완전성을 지향하는 영원한 정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영혼의 신성한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걸세. - 톨스토이 -

 

 2월 15일(p.182)

 

  꾸민 듯한 태도나 유별난 행동, 특별히 사람의 눈길을 끄는 행동은 절대 삼가는 것이 좋다. 솔직한 만큼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것은 없다. - 톨스토이 -

 

 2월 26일(p.217)

 

  선량한 사람은 말다툼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말다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 선량하지 않다.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박식하지 않으며, 이른바 박식한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한 말은 종종 귀에 거슬리고, 귀에 듣기 좋은 말은 종종 진실하지 않다. - 노자 -

 

 2월 28일(p.221)

 

  종교적 가르침에 신비적인 요소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은 높은 가르침이며 그 반대 또한 진실이다. - 톨스토이 -

 

 

  부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인 현대의 예술은 창녀와 닮은 정도가 아니라 바로 창녀 그 자체이다. - 톨스토이 -

 

3월

 

 3월 1일(p.225 ∼ 226)

 

  죽음은 내일이 오는 것 보다, 낮 뒤에 밤이 오고, 여름 뒤에 겨울이 오는 것 보다 더욱 확실하게 찾아온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내일과 밤과 겨울에 대해서는 준비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죽음에 대한 준비는 오직 한가지, 선한 생활이 있을 뿐이다. 생활이 선하면 선한 만큼 죽음의 공포는 줄어들고 가벼워진다. 따라서 성자에게는 죽음은 존재하진 않는다. - 톨스토이 -

 

 3월 3일(p.228 ∼ 229)

 

  선한 일에 대해서 그 위에 또 어떠한 보답을 바란다는 말인가? 보답은 이미 인간이 선한 일을 행하면서 경험하는 그 기쁨 속에서 얻어지고 있다. 그 외의 모든 보답은 이 같은 기쁨을 말살하는 것이다. - 톨스토이 -

 

 

  남이 우리들에게 베푼 친절은 종종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지지만, 우리가 남에게 베푼 친절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일이 절대로 없다. - 성현의 사상 -

 

 3월 4일(p.235)

 

  남에게 대한 죄악과 자기 자신에 대한 죄악이 있다. 남에 대한 죄악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부에 있는 신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죄악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는데서 생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죄악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죄악이 바로 식탁이다. - 톨스토이 -

 

 3월 5일(p.237)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칭찬해도 안 되고 자신을 깍아 내려서도 안된다. 자신을 칭찬하면 사람들은 너를 믿지 않을 것이다. 또 자기를 깍아 내리면 그들은 너를 네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형편없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 톨스토이 -

 

 3월 10일(p.248)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고통을 두려워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속에 너 자신이 깃들어 살고 있음을 알라. 그들을 죽이거나, 괴롭혀서 죽음에 이르게 하지 말라.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네가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속에 너 자신이 깃들어 살고 있음을 알라. - 부처의 잠언 -

 

 3월 12일(p.256)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너는 울고 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사람들이 울고 너 혼자 웃도록 하라. - 인도의 잠언 -

 

  과거의 행위가 그 사람의 삶에 아무리 큰 영향을 미친다 해도, 인간은 역시 자신의 정신력으로 그 삶을 바꿀 수 있다. - 톨스토이 -

 

 3월 13일(p.257)

 

  뭔가 슬프고 괴로운 일이 일어났을 때는, 먼저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실지로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두 번째로 , 전에도 꼭 지금처럼 여러 가지 사건과 사정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했지만, 지금은 그 일을 돌이켜 봤을 때 아무렇지도 않고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너를 슬프게 하고 괴롭히고 있는 일은 하나의 시련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시련을 발판으로 정신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 - 톨스토이 -

 

 3월 18일(p.270)

 

  우리는 자주 남을 평가하며, 어떤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어떤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내일의 그는 이미 오늘의 그가 아니다. 어리석었던 사람이 현명해지고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며, 또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심판할 수는 없다. 심판한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변해 있을 테니까. - 톨스토이 -

 

 3월 20일(p.274)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은 좋은 감정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은 더욱 더 좋은 감정이다. - 톨스토이 -

 

 3월 21일(p.275 ∼ 276)

 

  사람들 속에서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는 자에게도, 혼자서 정신적인 목적을 위해 사는 자에게도 마음의 평화는 없다. 사람들 속에서 신에 대한 봉사를 위해 사는 자만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 톨스토이 -

 

  현재의 삶만이 진정한 삶이다.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순간을 잘 사는 것, 오직 그것에만 온 정신을 쏟아 노력하라. 내세를 위해 현세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은 현재의 이 삶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이 삶을, 이 삶의 한순간 한 순간을 가능한 한 잘 사는 것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 톨스토이 -

 

  인생은 고뇌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 톨스토이 -

 

 3월 29일(p.299 ∼ 300)

 

  젊은이여! 유흥이나 사치 등의 온갖 욕망의 만족을 멀리하라. 설사 온갖 욕망을 완전히 물리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커지는 즐거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관능의 향락을 절제하고 미룸으로써, 네 즐거움은 더욱 더 풍부해진다. 즐거움이 수중에 있다는 의식은 그 향락에 의해 채워진 감정보다 훨씬 풍요로운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즐거움은 욕망의 만족과 함께 당장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 칸트 -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정욕은 처음에는 거미줄 같지만, 나중에는 굵은 동아줄처럼 돼 버린다. 정욕은 처음에는 남과 같다가, 다음에는 손님처럼 되고, 마지막에는 그 집의 주인이 되어버린다. - 탈무드 -

 

 3월 30일(p.301 ∼ 302)

 

  죄 많고 거짓에 차 있으며, 특히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사람에 대해서도, 아니 바로 그런 사람에 대해서야말로, 그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 톨스토이 -

 

  만약 네가 누구하고 사이가 나빠져 그가 너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면, 또 네가 옳은데 그가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그와 얘기할 때의 네 태도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라. - 톨스토이 -

 

4월

 

 4월 1일(p.323)

 

  학문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그 어떤 학문에도 끝이 없으니,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도 다 파헤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며 어떤 것이 다음으로 중요한지, 나아가서 어떤 것이 그보다 덜 중요하고, 어떤 것이 가장 덜 중요한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모든 것을 다 배울 수는 없는 이상, 가장 중요한 것부터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 -

 

 4월 7일(p.334)

 

  이웃과 사귈 때, 그들에게 현재 상태에 걸맞은 태도로 대하는 것은 그들을 더 나쁘게 할 따름이다. 그들을 실제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대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보다 나은 인물로 만들 수 있다. - 톨스토이 -

 

 4월 13일(p.349)

 

  현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남에게 하라고 권하는 것은 스스로도 실천한다. 둘째,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셋째, 주위 사람들의 약점을 참을성 있게 견뎌낸다. - 톨스토이 -

 

  우리의 도덕적 감정과 지적 능력은 서로 굳게 얽혀 있으므로, 어느 한쪽에 손을 대면 반드시 다른 한쪽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지성도 도덕적 감정이 따르지 않으면 커다란 불행의 원인이 된다. - 존 러스킨 -

 

 4월 16일(p.369)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을 요구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이웃을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떠한 사람도 수단이나 목적이 될 수 없다. 바로 거기에 인간적 존엄성이 존재한다. 그가 어떠한 대가를 대신해서도 자기 자신을 팔아 넘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그것은 그의 인간적 존엄성에 어긋난다), 만인에 대한 평등한 존경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결코 면할 수는 없다. 바꿔 말하면 그는 만인 속의 인간적 존엄성을 실제로 인정하고, 만인에 대해 그 존엄성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 칸트 -

 

 4월 23일(p.390 ∼ 391)

 

  언어와 절제와 노력으로 네 이웃을 위해 봉사하라. 사랑의 사업을 하라. 행여 나쁜 말을 입에 담지 말고 나쁜 행위를 피하며, 필요하면 용기를 내고 잘못된 수치심을 극복하며, 해야할 말을 하고 좋은 일, 사랑이 넘치는 일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소한 일이요, 눈에 띄지 않는 일이지만, 이처럼 조그마한 씨알에서 온 세상을 그 가지로 가득 덮는 사랑의 거목이 자라난다. - 톨스토이 -

 

 4월 26일(p.395)

 

  현명하고 겸손한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지성이라 해도 인간의 지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 한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과 자신을 창조한 자에 대한 개념도, 결국 순수한 영혼만이 볼 수 있는 것처럼 똑똑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한계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그 개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참으로 높은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속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철학은 그 한계 안에서만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공허한 관념이며,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피하고 일반민중들은 애초부터 거리가 먼 것이다. - 루소 -

 

 4월 27일(p.398)

 

  인간은 항상 자신이 최선으로 생각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 만약 그 행동이 진정으로 그에게 최선의 것이라면, 그는 옳은 것이다. 또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는 그만큼 불행하다. 왜냐하면 모든 미망에는 반드시 고뇌가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이와 같은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있으면, 너는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분개하지 않고, 아무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으며,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 에픽테투스 -

 

 4월 29일(p.405)

 

  병이라는 것은, 거의 어떠한 경우든 육체의 힘을 빼앗아감으로써 정신의 힘을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식을 정신적인 영역으로 옮긴 사람에게, 병은 그의 행복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복을 증대시켜준다. -톨스토이 -

 

5월

 

 5월 2일(p.412)

 

  어떤 사람을 설득할 때는, 그 사람이 지닌 사상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즉 그 사람 안에 건전한 사려와 분별심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자신의 감정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 사람 속에 선량한 마음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아무리 악의 무서움을 애기 하고 선을 칭찬해도, 악에 대한 혐오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선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 칸트 -

 

교육 (p.420 ∼ 421)

 

  모든 인간은 제각각 특별히 타고난 재능과, 일정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내부에서 그 타고난 재능을 개발해 거기에 맞춘 교육을 펼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린이에게 인간으로서 유익한 공부를 다같이 시킨 뒤에는, 개개의 어린이 안에 있는 특별한 재능을 발전시키는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은 어린이에게 잠재된 능력을 찾아 키우는 것이지, 없는 능력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모든 어린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심어주는 것,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보내진 이 세상이 대체 어떤 곳인지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다.

  삶은 의무이자 과제이며 사명이다. 모든 성스러운 이름에 맹세코, 제발 어린이들에게 개인적인 또는 공공의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설교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개인적인 행복에 대한 신앙은 어린이를 이기주의로 만든다. 또 공공의 행복에 대한 신앙도 얼마 안가 그들을 이기주의로 이끌게 될 것이다. 그는 실현 불가능한 것을 꿈꾸며, 청년시절에는 그 불가능한 일을 실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이윽고 자신이 마음속에 그렸던 꿈이 쉽사리 실현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알면, 이번에는 자기만의 껍데기 속에 들어앉아 개인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 골몰한 나머지, 결국 이기주의의 늪에 빠지고 만다.

  삶은 사명 또는 의무로서만 의미를 가지며, 삶이라는 여로를 가끔씩 비춰주는 행복의 태양이 그에게도 미소를 지어줄지 모르지만, 만약 그때가 오면 순수하게 그것을 기뻐하며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두리번거리며 행복을 찾아다니는 것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고, 언젠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조차 빼앗아갈 것임을 어린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나아가, 인류의 진보와 완성을 위해 도덕적 또는 지적인 자기완성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의무라는 것, 먼저 진리를 추구한 다음, 언어로 또 그것을 두려움 없이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진리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지침, 즉 자신의 마음과 양심, 그리고 선인의 가르침, 다시 말해 전 인류의 예지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 주세퍼 마치니 -

 

 5월 13일(p.446)

 

  벗을 찾아 헤메는 자는 가련하다. 왜냐하면 참으로 충실한 벗은 자신뿐이며, 밖에서 벗을 찾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참으로 충실한 벗일 수 없기 때문이다. - 소로 -

 

 5월 14일(p.447)

 

  너는 자신이 얌전하게 있으면 사람들이 너를 얕보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공정한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너를 얕볼 리가 없고, 공정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면 되지 않는가. 그들의 말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솜씨 좋은 목수는 가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솜씨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들이 너를 해칠지 모른다고 걱정하지 말라. 과연 네 영혼을 해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나는 나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를 속으로 비웃는다. 그들은 내가 누구라는 것도, 내가 선과 악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내 것이며 내 삶의 근원을 이루는 것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 에픽테토스 -

 

 5월 17일(p.452 ∼ 453)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말에 따르면 완전한 기쁨은, 부당한 비난을 참고 거기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을 견뎌내며, 그 비난과 고통을 가져다 준 자에게 적의를 품지 않는 데에 있다. 그런 완전한 기쁨은 사람들의 악도 자기 자신의 육체적 고통도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진정한 신앙과 사랑의 의식 속에 있다. - 톨스토이 -

 

  선행 때문에 비난을 받아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숭고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그것을 슬퍼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선덕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 중국 금언 -

 

  변명할 수도 없는 비방과 모함을 받는 것은 선을 배우는 가장 좋은 공부이다. - 톨스토이 -

 

  사람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이 아니라, 자신을 단련하고 자신의 오만함을 없애기 위해, 오히려 매도와 굴욕과 억울한 모함을 기대하는 습관을 길러라. - 톨스토이 -

 

  광신과 같은,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은, 그것이 사람들의 나쁜 행동을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잘못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신과 이웃에 대한 자신의 사랑의 유일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톨스토이 -

 

 5월 18일(p.453 ∼ 455)

 

  자기 영혼의 신성에 대한 의식이 우리에게 힘을 준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 의식은 우리를, 강하다거나 약하다는 관념조차 없는, 즉 힘에 대한 관념이 없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려준다. - 톨스토이 -

 

  어떻게 신을 알고 있느냐고 묻거든 신이 내 마음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완전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 시공을 초월한 존재자를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라. 자기 자신을 모르는 자가 어찌 신을 알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것이 바로 신을 아는 것이다. - 페르시아 금언 -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다. 또는 알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마음, 인간의 양심에는 신성이 있다는 것, 악을 거부하고 선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자신이 신이 된다는 것, 사랑으로 인한 인간의 기쁨, 분노로 인한 인간의 괴로움, 부정을 볼 때의 인간의 분노, 자기희생을 완수했을 때 스스로 느끼는 영광 같은 것은, 모두 인간과 최고의 주인 신의 합일을 흔들림 없이 영원히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 존 러스킨 -

 

 5월26일(p.473)

 

  죽음을 준비하라.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죽음에 임해서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이나 사업의 정리라는 의미에서의 준비가 아니라, 최선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 즉, 네가 이미 다른 세계의 존재가 되어 너의 말과 태도가 뒤에 남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엄숙한 죽음의 순간을 충분히 활용할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 톨스토이 -

 

소크라테스의 변명(p.475 ∼ 476)

 

  나는 오늘까지 전 생애를 통해, 무척 중요한 국면은 물론이고 평범한 일상사에서도, 늘 마음속에 있는 신비한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가 나에게 경고하며 불행을 부르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이끄는 대로 행동해 왔소. 보시는 바와 같이, 오늘 나에게 일반적으로 가장 큰 불행으로 간주되고 있는 사태가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내가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도, 이 법정에 들어왔을 때도, 또 이렇게 애기하고 있는 지금도, 조금도 경고를 발하지 않고 제지도 하지 않고 있소.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악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오. 사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둘 중에 하나,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처럼 영혼이 변화하여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오. 만약 죽음이 완전한 의식의 소멸이고,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든 밤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의심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그렇게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날 밤과, 자신이 현실 속에서 또는 꿈속에서 경험한, 여러 가지 공포와 불안과 불만에 찬 밤을 비교하면, 누구든지 꿈도 꾸지 않고 잔 밤만큼 행복한 날 행복한 밤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할 것이오. 그러므로 만약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고, 저 세상에는 우리보다 먼저 죽은 현자들과 성자들이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저 세상에서 그분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소? 그런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나는 한번이 아니라 백번이라도 죽을 수 있소. 그러므로 재판관 당신들이나 시민 여러분도 결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선한 사람에게는 삶 속에도 죽음 속에도 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심판한 사람들의 의도가 나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었다 해도, 나는 그들은 물론 나를 고발한 사람들에게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오. 자, 이제 헤어질 시간이 왔소. 나는 죽기 위해 가고, 당신들은 살기 위해 가고 우리 중 누가 더 행복한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오. -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6월

 

 6월 4일(p.512)

 

  어떤 사물, 어떤 습관, 어떤 법률이 존중받으면 받을수록, 정말로 그것이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 톨스토이 -

 

 6월 6일(p.515)

 

  적에 대해서도 악을 행하지 말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덕이다. 남을 멸하려는 자는 반드시 스스로 파멸한다. 악을 행하지 말라. 가난은 악을 정당화 할 수 없다. 만일 악을 행한다면 더욱 가난해지리라. 사람들은 적의 악의에서 비롯되는 악으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지만 자신의 죄악에서 생기는 악으로부터는 결코 달아날 수 없다. 그것은 물체에 따르는 그림자처럼 그들의 뒤를 따라와서 결국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슬픔에 쫓기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남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

만일 자신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작은 악일지라도 행해서는 안 된다. - 인도의 쿠랄 -

(역주-이 경우의 '적'이란 이민족, 외국인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옛날에는 이민족은 언제나 적으로 간주되었다.)

 

 6월 7일(p.517 ∼ 518)

 

  만약 네가 지난 날 성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성현이 산 것처럼 살지 않아서, 자신이 성현의 명예를 얻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자존심에 고통을 느낀다면, 그런 것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도록 생각을 고치는 것이 좋다. 네가 성현으로서의 평판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다. 또 만일 지금 당장 네 양심이 요구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굴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굴욕은 겸허와 결합된 온갖 정신적 행복에 의해 몇 갑절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 톨스토이 -

 

 6월 8일(p.519)

 

모든 악은 나약함에서 생긴다. - 루소 -

 

 6월 9일(p.520)

 

  정신적, 육체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배반하는 삶을 살아온 현대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이 가장 참된 삶이라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현재, 문화라고 불리고 있는 것, 즉 학문, 예술, 온갖 형태의 진보와 발단은 모두 인간의 정신적 요구를 기만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 톨스토이 -

 

 6월 10일(p.526 ∼ 527)

 

  나는 현존하는 모든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의 전승과 교육의 영향에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평생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깊이, 우리의 삶의 법칙에 대해 생각해 왔다. 나는 그것을 인류의 역사와 나 자신의 의식 속에서 탐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에 도달했다. 즉,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생명은 원래 영원한 것이어야 하며, 늘 그 자리에 있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생명의 법칙이라는 것, 우리 안에는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는 높은 사상과 동경이 있다는 것, 우리 안에 있는 그러한 동경은 우리의 감성을 통해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런 사실들이야말로, 그것이 세상 밖에 있는 세계에서 우리 안에 들어왔으며, 세상 밖에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 이 세상에서 멸망하는 것은 물질의 온갖 형태뿐이며, 우리의 육체가 멸망하니까 우리도 멸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동자가 사용하는 연장이 닳아서 못쓰게 되었다고 해서 노동자도 죽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주세페 마치니 -

 

 6월 11일(p.529)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소로 -

 6월 12일(p.531)

 

  마음이 괴로울 때도 결코 약해져서는 안 된다. 신 이외의 누구에게도 고백해서는 안 된다. 침묵을 지키며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고통이 타인에게 옮아 그들을 괴롭히는 결과가 되기도 하고, 네 속에서 다 타버려 너를 더욱 높이고 더욱 완전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 톨스토이 -

 

  선덕과 정신력은 불행과 고뇌와 질병 속에서 강화되고 완성되어간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신에게 찾아올지도 모르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의연하게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 온갖 시련이 너희를 더욱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줄 것이다. - 성현의 사상 -

 

 6월 15일(p.535 ∼ 536)

 

  신에 대한 참된 사랑은 최고선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감정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사랑은 덕, 정의, 선의에 대한 사랑과 완전히 일치한다. - 채닝 -

 

  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람을 속이는 자이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 톨스토이 -

 

 6월 19일(p.558 ∼ 559)

 

  양심! 너, 신성하고 영원한 하늘의 목소리여! 너, 무지하고 유한한 자, 그러나 이성을 갖추고 자유가 주어진 존재의 유일한 바른 지도자여! 너, 선에 대한 실수 없는 심판자여! 너만이 인간을 신과 닮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인간 본성의 탁월함과 그 행위의 도덕성은 모두 너에게서 나온다. 네가 없으면 내 속에는 무질서한 판단과 나침반 없는 이성이 작용한 결과, 갖은 미망에 빠지는 슬픈 특성말고는, 나를 동물보다 높여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 루소 -

 

  아직 젊은 너는 쾌락과 방종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때는 너는 무엇보다 먼저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양심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색욕에 빠지고 방종에 몸을 맡김으로써, 또는 세속의 가르침과 관습(설령 그 관습을 사람들이 법률이라 부르더라도)에 굴복함으로써, 양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항상 이것이 내 양심과 일치하는지 자문하라. 양심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용감해지고 스스로를 버리고 뛰어들라. 사람들의 의견과 달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 파커 -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배후에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볼 수 없다. 그 목소리는 온갖 나라의 언어로 말하며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지만, 일찍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그가 올곧게 그 목소리에 따르고 그 목소리를 자신 속에 받아들여 한시도 그것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그 자신이 그 목소리이고 자신과 그 목소리가 하나가 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 목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는 더욱 더 많은 예지를 얻게 되고, 그 목소리는 위대하고도 장엄한 외침이 되어 그에게 최고의 행복으로 가득한 삶을 계시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속의 일에 골몰해, 모든 행위가 추구해야 할 목표인 진리를 소홀히 한다면, 그 목소리는 희미해져서 모기 소리처럼 약해지고 말리라. - 에머슨 -

 

  우리의 양심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도, 거기에 귀 기울여 그 빛을 받는 것도 모두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양심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해도,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거나, 양심이 우리에게 줄곧 경고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에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면, 그 목소리는 서서히 약해져서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항상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사소한 죄를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쉽사리 커다란 죄에 빠질 수 있다. 사소한 죄야말로 우리에게 온갖 위험한 습관을 심어 놓는다. 아직 우리의 내부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 전에 싹을 도려내도록 하자. 선과 악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비례해 성장한다. - 성현의 사상 -

 

 6월 22일(p.563 ∼ 564)

 

  종교의 차이라니, 이 얼마나 기묘한 표현인가! 물론 종교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시대에서  시대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신앙은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다베스타(페르시아의 고대 경전), 베다(바라문의 경전), 코란과 같은 여러 가지 종교 서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진실한 '종교'는 오직 하나뿐이다. 여러 가지 신앙도 다만 진정한 종교에 대한 보조 수단 외에 아무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그 보조 수단은 우연히 출현한 것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 칸트 -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두고, 그들은 이 종교를 믿고 있다거나 저 종교를 갖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지나친 존경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은 어떠한 종교도 모르고 있고 또 탐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종교라는 말은 교회의 교의에 대한 신앙일 뿐이다.

  그처럼 자주 세계를 뒤흔들고 피로 물들인 종교 전쟁이라는 것도, 교회 신앙에서 오는 싸움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종교적 억압에 항의한 사람들은, 사실은 자신들의 신앙이 방해를 받은 것에 항의한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그것은 어떠한 외적인 힘으로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자신들이 그 교회 신앙을 공공연하게 내세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한 것이다. - 칸트 -

 

  너는 그르고 나는 옳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가장 잔인한 말이다. 특히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런데 종교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잔인한 말을 서로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 - 톨스토이 -

 

 6월 25일(p.582)

 

  입을 다물고 있어도 비난하고 말이 많아도 비난하며 또한 말이 적어도 비난한다. 세상에 비난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법구경 -

 

 6월 28일(p.589)

 

  가족에 대한 사랑 속에는 자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의미의 선악이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은 어느 쪽이나 다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가족에 대한 사랑도 자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한계를 넘어서면 죄악이 될 수는 있어도 절대로 선이 될 수는 없다. - 톨스토이 -

 

 6월 29일(p.590 ∼ 591)

 

  모든 것이 어둡게 보이고 모든 사람이 나쁘게 여겨지고, 아무한테나 욕을 퍼부으며 심술을 부리고 싶어질 때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때는 자신을 주정꾼을 보듯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런 상태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빨리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주정꾼이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말짱해지는 것과 같다. - 톨스토이 -

 

 

  나는 인간은 행복하고 만족하다는 것을 첫 번째 명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만을 느낄 때는 나쁜 짓을 했을 때처럼 부끄러워해야 하고, 내 주위나 내 마음속에 무엇인가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애기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것을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 톨스토이 -

 

 6월 30일(p.593)

 

  온갖 집단의 흥분한 외침 속에서 진리의 목소리를 가려듣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 실러 -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 속에 혼자 있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 베르시에 -

 

  만약 사람들이 세계를 구원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고, 인류를 해방시키는 대신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은 세계를 구하고 인류를 해방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 게르센 -

 

7월

 

 7월 5일(p.618 ∼ 620)

 

  너에게는 너의 영혼 외에 진정한 소유물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단호하게 최상의 생활 방식을 선택하라. 습관은 너의 생활을 쾌적한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부(富)란 믿을 것이 못 되며, 명예는 그 이상으로 믿을 만한 대상이 아니다. 육체도 권력도 이 세상의 명예도 마찬가지로 모두 허무하고 모두 무력하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로지 선덕만이 있을 뿐이다.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것은 선덕 뿐이라는 것이 바로 신의 법칙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 피타고라스 -

 

 

  만일 네가 불행을 두려워한다면 너는 이미 불행하다. 그리고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항상 그것을 두려워한다. - 중국속담 -

 

 

  악은 자신의 행동 속에만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불행도 그가 누리고 있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행복에 비한다면 지극히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 - 톨스토이 -

 

파스칼(p.626 ∼ 631)

 

  이를테면 사소한 허영심이나 공명심, 명예욕, 아무튼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그러한 인간적 명성에 대한 모든 욕망만큼, 사람들을 오랫동안 그 지배 하에 두고, 이 세상의 거짓된 삶의 공허함을 철저히 숨기며(종종 그것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사람들이 삶의 의의와 그 진정한 행복을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

  모든 욕망은 그 자체 속에 벌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만족에 따르는 고뇌는 그 공허감을 폭로한다. 그리고 모든 욕망은 해가 갈수록 쇠퇴하지만, 명예욕은 반대로 갈수록 커진다. 또 무엇보다 인간적인 명예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사람들에 대한 봉사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사람들의 찬사를 구하면서, 자신은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칭찬해주는 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가장 사악하고 위험한 이 욕망은, 다른 어떤 욕망보다 뿌리뽑기가 어렵다. 이 욕망에서 해방되려면 그야말로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강인한 정신력은 그들에게 빠르게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강인한 정신력은 그들에게 명예의 허망함을 가르쳐준다.

  네델란드의 신학자 얀센이 쓴 《내면적 인간 혁명》이 있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거론돼 있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 번뇌 외에 지식욕의 만족이라는 정신적 번뇌가 있는데, 그 밑바닥에는 다른 모든 번뇌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와 자기애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러한 표면상으로 고상한 번뇌야말로 무엇보다도 인간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책은 파스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위대한 정신에서 볼 수 있는 진실성에 의해 그 말이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을 느낀 파스칼은 결심했다. 학문 연구와 그에 결부된 명예를 포기하는 것은 그로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으나, 아니 오히려 매우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유혹하는 학문 연구를 과감히 포기하고, 더욱 강하게 마음을 사로잡게 된 신앙 문제에, 자신을 위해 또 타인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로 한 것이다.

  젊은 파스칼의 가장 절실한 관심은 학문 연구와, 그것이 그에게 주는 명예에 대한 욕구, 그 학문의 공허함과 무가치, 명예욕의 유혹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모든 힘을 오로지 신을 위한 봉사에 바치고 싶다는 욕구, 이 두 가지 욕구의 갈등과 투쟁에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 유명한 '공기의 비중'에 관한 발견을 한다. 그 발견으로 그는 다시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수많은 학자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방문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인간적 명예에 대한 유혹과의 싸움이 더욱 더 힘들어졌다.

  그 싸움을 위해 파스칼은, 안쪽에 못이 많이 박혀 있는 허리띠를 차고 다녔다. 그리고 자신을 칭찬하는 편지를 읽거나 찬사의 말을 듣고 마음속에 명예욕과 자만심이 고개를 들고  일어날 때마다, 그는 팔꿈치로 그 허리띠를 강하게 눌렀다. 그러면 못이 그의 몸을 찌르고, 그때마다 그는 명예욕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준 사상과 감정의 흐름을 다시 상기하곤 했다.

  종교적 감정에 더욱 강하게 사로잡힌 파스칼은, 1655년에는 완전히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포르루아얄의 얀센 교단 본부로 옮겨서, 그곳에서 거의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면서 저서를 구상하고 준비했다. 그 저술에서 그는 첫째, 인간의 이성적 생활을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 둘째, 그 자신이 믿는 종교의 진실성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인간적 명예에 대한 유혹이 파스칼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모든 생활은 이미 신에 대한 끊임없는 봉사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는 빈틈없이 생활의 규칙을 정해 엄격하게 그것을 지키며, 게으름에 의해서든 병에 의해서든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이야말로 선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파스칼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최소한 필요한 몇 가지만으로 생활했다. 그는 병에 걸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만 하인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주거지는 먹을 것, 입을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검소했다. 그는 손수 방을 치우고 자기가 먹을 음식은 직접 날랐다.

  날이 갈수록 병이 악화돼 끊임없이 고통을 받았지만, 그 고통을 옆에 있는 사람도 놀랄 만한 인내로 참고 견뎠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제발 나를 가엾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병을 앓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에게 어울리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병에 걸렸을 때야말로 그리스도교인은 그 본래의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우리에게 모든 세속적인 행복과 육체적 쾌락을 포기하는 것을 가르치고, 한평생 우리를 지배해 온 욕정을 억제하도록 가르치며, 명예욕과 물욕을 극복해 언제라도 죽음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동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를 사랑하는 친지들이 몰려와 그를 위해 제공하려 한 사치는 오히려 그를 괴롭히기만 했다. 그는 누이동생에게 자신을 가난한 불치병 환자들이 있는 병원으로 옮겨, 생애의 마지막 며칠을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누이동생이 그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아 결국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 몇 시간 동안 의식을 잃고 있다가, 드디어 숨을 거두기 직전에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참으로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주여, 저를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1662년 8월 19일이었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신앙이 필요하다. 하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는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생에 대한 가장 좋은 가르침을 '발견하는' 일이다.

파스칼은 첫  번째 신앙을 누구보다 잘 수행했다. 그러나 운명은, 신은, 그에게 두 번째를 허락하지 않았다.

  목이 말라 다 죽어 가는 사람이 눈앞에 물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떤 물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달려들 듯이, 파스칼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분간할 새도 없이, 그가 그 속에서 자란 가톨릭에 진리와 인간의 구원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만 있으면 된다! 신앙만 있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한 셈이다.

  물론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권리는 아무한테도 없지만, 저 천재적이며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파스칼이 가톨릭을 믿는다는 것은 약간 믿기 어려운 느낌이다. 그는 신앙의 절대적 필요성을 증명하면서 발휘해야 했던 사상의 힘으로 가톨릭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마음속에는 가톨릭만이 완전무결한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톨릭에 대해 탐구하기도 전에 그냥 그것에 의지했다. 오직 가톨릭 속에 있었던, 그리고 영원히 이어지는, 진실한 것에 기댄 것이다. 그는 가톨릭에서 자기완성을 위한 정진, 유혹과의 투쟁, 부에 대한 혐오, 그가 임종을 맞아 자신의 영혼을 맡긴 신의 자비에 대한 굳은 신앙을 획득한 것이다. - 톨스토이 -

 

 7월 8일(p.634 ∼ 635)

 

  어떻게 불쾌한 마음을 극복할 것인가? 무엇보다 먼저 '겸허'한 태도로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적한다고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지적하는 쪽이 친절하지 않다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음은 냉정한 '판단'으로 극복해야 한다. 누가 지적하든 안 하든 역시 원래 너 그대로이며, 만약 네가 자신을 지나치게 존경하고 있다면 자기 평가를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이웃이 아무리 불친절해도 실제의 우리는 어디까지나 실제의 우리이다.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에 의한 극복이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선으로 대하고 선으로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극복함으로써, 그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는 있다. - 아미엘 -

 

  말없는 가운데 친절한 배려라는 향유(香油)가 아니면 상처에서 독침을 뺄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악의와 배은망덕, 질투, 심지어는 교활함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인가? 말다툼이나 불평, 처벌에는 끝이라는 것이 없다. 가장 간단한 것은 마음속에서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모욕, 비방, 분노는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러한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불은 물질계의 모든 것을 정화하지만 사랑은 정신계의 모든 것을 정화한다. - 아미엘 -

 

  만일 네가 의식적으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친절하지 않다면, 종종 무의식적으로 많은 사라들을 잔인하게 대할 것이다. - 존 러스킨 -

 

 

  인간은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고통을 많이 받고, 사랑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을 적게 받는다. 모든 활동이 사랑으로 충만한, 완전히 이성적인 생활에서는 고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고통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세계의 삶을 연결하는 쇠사슬을 끊으려 할 때 느끼는 아픔이다. - 톨스토이 -

 

  네가 괴로울 때, 사람들이 두렵고 자기 자신이 두려울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스스로에게 인생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자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그대는 즉시 고통이 사라지고, 두려움도 해소되며, 방황도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 톨스토이 -

 

 7월 11일(p.640)

 

  모든 선한 일은 자비이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것도 자비이다. 길에 굴러다니는 돌을 치우는 것도 자비이다. 선덕을 베풀라고 이웃에게 권하는 것 역시 자비이다. 나그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도 자비이다. 이웃의 얼굴을 보고 미소짓는 것 또한 자비이다. - 마호메트 -

 

 7월 12일(p.641)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조화롭게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모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것은 악하고 추한 것이다. 이 진리는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잘 알고 있다. - 톨스토이 -

 

7월 23일(p680 ∼ 682)

 

  덕행은 자신의 의무로 인정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천이 결코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의무로 인정하는 것을 실천하는 습관이 붙으면, 그의 마음에 새로운 의무에 대한 요구가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 - 칸트 -

 

  자신이 불행할 때 자신을 나무라지 않고 운명을 탓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구제할 길이 없다. "상대가 그렇게 불쾌하게 나오지 않았으면 좀 더 친절하고 선량하게 행동했을 텐데. 그렇게 바쁘지만 않았으면 좀 더 신앙에 관심을 기울였을 텐데. 몸만 건강하다면 참을성이 더 강할 수 있었을 텐데. 더 유명하다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등."

  만약 우리가, 자신이 지금 처한 입장을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어떠한 입장에 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려움을 자신의 선량함과 흔들림 없는 굳센 마음으로 제거하라고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의 입장이 암울한 것은, 우리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노력으로 그 암울함에 하느님의 빛이 비칠 수 있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또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강한 인내심으로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고 견뎌내라고 주어지는 것이고, 유혹은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극복하라고 주어지는 것이다. - 마르티노 -

 

  그 육체가 안일과 사치의 늪에 빠져 있을 때도 정신적으로 고상한 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는 언제나 영혼의 첫 번째 제자이다. - 소로 -

 

  우리는 자신이 놓인 상황에 대해 화를 내고 슬퍼하며 어떻게든 그것을 바꾸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상황은 우리에게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시일 뿐이다. 만일 건강하거든 너의 힘을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쓰도록 힘써라. 네가 병을 앓거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네가 부유하거든 부유한 것에서 도망치도록 노력하라. 네가 가난하거든 가능한 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네가 만일 수모를 당했어도 그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힘써라. 네가 남에게 잘못했으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라.

- 톨스토이 -

 

7월 27일(p.688 ∼ 689)

 

  지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 톨스토이 -

 

  "아, 나처럼 불행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훌륭하고 유익한 책을 읽고 싶은데 그것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귀찮은 인간의 부탁이나 들어 줘야하다니."

"하지만, 과연?" 하고 나는 거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누군가가 너에게 도움을 청할 때 책만 읽고 있는 것이 네가 할 일이란 말인가? 네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신은 지금 네가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하지 않기를 원하는가 하는 사실이다. 신은 조금 전까지는 네가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앞으로의 선행을 준비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오늘은 너에게, 네가 행동으로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을 너에게 보냈다. 그 일에 대해 신은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 너는 이제 고독에서 나와 그동안 배운 바를 실천을 통해 보여주어라. 왜냐하면 지금이 바로 네가 읽고 사색한 내용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귀찮아하지 말라. 사람들이 네가 책을 읽는 것을 방해한다고 불평하지 말라. 만약 그들이 없으면, 도대체 너는 누구에게 봉사해야 한단 말이냐? 무엇을 위해, 어떻게 더 많은 사람에게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해 쓴 책을 읽는단 말이냐? - 에픽테토스 -

 

 7월 30일(p.696)

 

  자신의 허물을 알고 있는 자만이 남의 허물에 너그럽다. - 톨스토이 -

 

  아들들아! 만약 누군가가 너희를 모욕하는 말을 하거든, 아랑곳도 하지말고 생각도 하지 마라. 그러나 만약 너희가 남을 모욕하는 말을 하였다면 "우리가 못할 말이라도 했단 말이냐? 아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된다.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너희들 자신의 기도나 친구의 중재에 의해 너희가 모욕한 자와 완전한 화해를 이룰 때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 탈무드 -

 

8월

 

 8월 2일(p.703)

 

  우리의 육체에는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정신적 본원이 담겨 있다. 이 육체라는 집은 마치 그릇이 그 안에 담긴 액체와 기체에 일정한 형태를 주듯이, 거기에 사는 정신적 본원에 형태를 준다. 그릇이 깨지면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흘러버린다. 그것이 뭔가 다른 것과 결합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육체라는 집이 부서졌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았던 때의 모습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담겨 있던 것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사후의 영혼은 뭔가 지금까지와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 톨스토이 -

 

 8월 11일(p724)

 

  인간에게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만이 진정한 자신의 것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 자기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함께 성장하는 것 외에는, 결코 영원한 선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에머슨 -

 

 8월 17일(p.742 ∼ 743)

 

  네가 좋다고 여기는 일을 할 경우에도, 남에게 적의를 느끼거나 남이 자신에게 적의를 느낀다면 즉시 그 일을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하다. 결국 너는 아직 그 일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무슨 일을 하면서 신체의 어딘가가 아프다면, 너는 그 일을 잠시 중단하고 어떻게 하면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지 연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너에게 그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다는 증거이므로 더 배워야할 필요가 있다. - 톨스토이 -

 

 8월 21일(p.752 ∼ 753)

 

  원래 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뭔가를 소망할 필요가 없다. 만약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일 뿐이고, 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불신의 결과이므로,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변해야 한다는 증거이다. - 톨스토이 -

 

  끊임없이 기도하라. 가장 필요하고도 어려운 기도는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신에 대한, 그리고 그 법칙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떠올리는 일이다. 놀라거나 화내고 곤란을 겪거나 무언가에 열중할 때, 곧 자신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라. 그것이 기도이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노력하면 곧 습관이 될 것이다. - 톨스토이 -

 

 8월 26일(p.765)

 

  과녁을 명중시키려면 그 과녁보다 위를 겨냥해야 하듯이 공정하려면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 즉 자기 자신에게는 오히려 불공평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공정하려고만 하면 결국 자신에게 관대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공정하게 되어버린다. - 톨스토이 -

 

 8월 27일(p.767)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적 세계는, 너무 넓어서 연구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 큰 바다와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속에 들어가 그때까지 헛되이 외부 세계에서 찾아 헤맸던 하늘의 은신처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 류시 말로리 -

 

9월

 

 9월 2일(p.782)

 

  사람들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그 반대 또한 진리이다. - 톨스토이 -

 

 9월 25일(p.848 ∼ 849)

 

  노동은 선은 아니지만 선한 생활의 필수 조건이다. - 톨스토이 -

 

  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노동과 걸식과 도둑질이다. 만약 노동자의 몫이 적다면 그것은 거지와 도둑의 몫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헨리 조지 -

 

  놀고 먹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가혹한 노동을 하고 있다. 배불리 먹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굶주리고 있다. - 톨스토이 -

 

 9월 28일(p.853)

 

  사람들의 대부분의 행위는 이성에 의한 것도 아니고, 감정에 의한 것도 아니며, 거의가 무의식적인 모방이나 암시에 의한 것이다. - 톨스토이 -

 

 9월 30일(p.884 ∼ 885)

 

<고독해질수록 신의 목소리가 잘 들린다>

오로지 침묵하고 감추어라

너의 감정도, 꿈까지도!

네 영혼 깊이

그것을 키우고 심화하라.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그것을 사랑하며 침묵하라!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누가 이해하랴 네 마음을

누가 이해하랴 네 생명을

언어는 사상을 속이는 것을

샘물은 흐림을 꺼리는 것을

오직 침묵하고 헤아려라!

 

이젠 고독을 배울지어다

네 마음에는 한없는

만다라의 세계가 펼쳐지거늘

떠들썩함은 마음의 귀를 빼앗고

드러난 빛은 눈을 빼앗도다.

침묵 속에 마음의 노래를 들어라.  - 추체프 -

 

 

  남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 자신은 남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 톨스토이 -

 

10월

 

 10월 1일(p.887)

 

  참된 지혜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고 무엇이 그보다는 덜 좋은 것인지, 따라서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 톨스토이 -

 

 10월 2일(p.888 ∼ 889)

 

  부처는 말했다. "세상에 어려운 일은 수없이 많다. 가난하면서도 자비심이 깊은 것, 부와 명예 속에 있으면서도 종교적인 것, 육욕과 번뇌를 억제하고, 좋은 것을 보아도 탐하지 않는 것, 모욕을 받아도 참는 것, 모든 것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 무지한 사람을 멸시하지 않는 것, 싸움과 말다툼을 피하는 것, 아욕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음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것이 그것이다."라고. - 중국 불교도의 말 -

 

 10월 6일(p.895)

 

  병자가 생활을 완전히 중단하고 질병 치료에만 전념하는 것보다는, 불치병이든 나을 수 있는 병이든, 병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하고 평소대로 생활하는 것이 낫다. 설사 그것 때문에 생명이 단축되는 한이 있더라도(이것은 크게 의심스럽지만) 그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두려워하고 걱정하지 않는 만큼 훨씬 나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 톨스토이 -

 

 10월 11일(p.920)

 

  자신의 어리석음을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지혜가 있지만, 자신의 현명함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지혜는 존재하진 않는다. - 부처의 잠언 -

 

 10월 16일(p.939)

 

  만일 괴로울 때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 어딘가에 반드시 신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인식하기만 하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고 사랑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 톨스토이 -

 

 10월 19일(p.943)

 

  자신의 일을 찾아낸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이제 다른 행복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일이 있고 인생의 목적이 있다. - 칼라일 -

 

 10월 20일(p.945)

 

  이 세상의 아주 사소한 일 속에서도 신의 힘이 번뜩임을 인식하는 사람은 지극히 높은 이해력과 지극히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도 타인도 존중하며, 사소한 것도 가볍게 보지 않고, 그러한 것들도 모두 하느님의 힘이 나타난 것으로 본다. - 페르시아의 젤라레딘 루미 -

 

 10월 26일(p.961)

 

  자신이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을 사소한 일이라 하며 하지 않는 사람은 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알고 보면 그것이 그에게 너무 작은 일이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큰일이기 때문이다. - 표치 -

 

  너는 일을 완성시킬 의무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회피해서도 안 된다. 너에게 일을 맡긴 신은 너의 일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 탈무드 -

 

 10월 28일(p.971 ∼ 973)

(1910.11.07. 톨스토이가 임종을 앞두고 딸 따쟈나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한 내용)

 

  고통의 감각이 우리 육체의 보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인 것처럼, 마음의 고뇌는 우리 영혼의 보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 톨스토이 -

 

  만약 대기업의 압력이 없다면 우리의 몸이 파열하는 것처럼, 인생에 빈곤과 가혹한 노동, 그 밖의 여러 가지 불행한 운명이 찾아드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의 오만은 계속 기승을 부리다가 비록 파열하는 위험에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급기야 비할 데 없는 어리석음과 광기의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 쇼펜하우어 -

 

  의사는 이 병자에게는 이 처방을 내리고 다른 병자에게는 다른 처방을 내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은 우리에게 질병과 상처, 또는 극심한 손실 같은 처방을 내린다.

  의사의 처방이 병자의 건강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는 것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건강회복과, 그의 고립된 존재와 인류 전체의 삶의 연대성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네가 짊어져야 할 모든 운명을 병자가 의사의 약을 받듯이 받아들이도록 하라. 육체의 건강 회복, 그것이 쓴 약이 가지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병자에게 육체의 건강유지가 중요한 것처럼, 보편적인 세계 이성에는 이성을 가진 하나 하나의 존재가 자신의 사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너는 네 몸에 일어나는 일은 아무리 괴롭더라도 기꺼이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의 궁극적 의미는 전 세계의 건강과 안전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작용은 이성적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어김없이 모든 존재자의 합일을 위해 작용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고뇌는 활동에 대한 박차(拍車)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활동 속에서 생명을 느낀다. - 칸트 -

 

  지상의 삶에서 갖가지 불행을 겪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를 신성한 정신적 고독 속으로 이끌어, 자신이 고향에서 쫓겨난, 어떠한 지상적 기쁨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행위의 동기는 순수하고 행위 자체도 올바른데, 여기저기서 그를 반박하고 비난하거나 나쁘게 생각하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 일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 허망한 명예에 대한 해독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는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당하고, 버림받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 사는 신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토마스 아 켐피스 -

 

  만약 신이 우리에게 분명히 신이 보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지도자를 준다면, 우리는 기뻐 춤을 추며 그의 말에 따를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지도자와 스승이 이미 있다. 그것은 빈곤, 또는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일들이다. - 파스칼 -

 

  폭풍 속에서 비로소 항해사의 솜씨가 발휘되고, 싸움터에서 비로소 군인의 용감성을 시험할 수 있듯, 인간으로서의 용기는 그가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위험한 상황과 직면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 다니엘 -

 

  우리가 행복이라고 일컫는 것도, 또 불행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도, 만일 우리가 그것을 시련으로 받아들인다면 똑같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 톨스토이 -

 

  순탄한 환경에 길들지 말라. 그것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가진 자는 잃는 것을 배우고, 행복한 자는 고생하는 것을 배워라. - 실러 -

 

  이 세상의 삶에서 자신을 따로 떼어놓고, 자신의 죄가 이 세상에 고뇌를 초래한 것은 생각하지 않으며,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이 이 세상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에 화를 내는 자, 그런 자만이 괴로움과 고뇌를 경험한다. - 톨스토이 -

 

  형벌로서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계속 살도록 운명지어진 방랑하는 유대인의 전설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형벌로서 아무 괴로움도 모르는 일생을 보내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의 전설이 있다면, 그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톨스토이 -

 

11월

 

 11월 1일(p.981)

 

  학문을 쌓는 자는 점점 학자의 모습을 갖추어, 사람들의 눈에 갈수록 더 훌륭하게 보인다. 도를 닦는 자는 점점 작아져서 사람들의 눈에 낮아 보이게 된다. 그는 완전히 겸허해질 때까지 자꾸만 작아져 간다. 그리하여 완전한 겸허에 이르면 그는 마침내 자유로워져서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사람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 노자 제 48장에서 -

 

 11월 4일(p.1025)

 

  누군가가 너희를 슬프게 하거나 모욕을 줄 때는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는 반박하지 말 것이며, 꼭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정신적 동요부터 가라앉혀라. - 성현의 사상 -

 

 11월 7일(p.1032)

 

  설사 영혼은 불멸이라고 믿는 내 생각이 틀렸다 하더라도, 역시 나는 행복하고 내가 틀린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나에게 이토록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과, 이토록 충실한 만족감을 주는 그 신념을 나한테서 빼앗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 키케로 -

 

  죽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물음은 물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죽음 뒤의 세계를 얘기하는 것은 시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인데, 우리는 죽음과 함께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톨스토이 -

 

 11월 8일(p.1032 ∼ 1033)

 

  신을 섬기는 방법은 딱 한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고 이성이 주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사를 가지면서도 역시 정의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신이다. 대체로 우리의 마음이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인식을 이성에 전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어려운 일이다. 또 과연 이성은 마음 없이 저 혼자 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신을 인식해야 비로소 이성이 그것을 탐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리히텐베르크 -

 

 11월 13일(p.1051 ∼ 1052)

 

  누구나 자기를 학생이며 제자라고 생각하라. 공부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거나, 자신은 이미 충분히 성숙하고 발달했고, 자신의 성격과 영혼은 이미 훌륭하여 더 이상 훌륭해질 여지가 없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도에게 졸업이라는 것은 없다. 그는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학생이다. - 고골리에 의함 -

 

  어리석은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이기주의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만족을 늘리고 싶거나 자신을 과시하고 싶고,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애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을 때는 조용히 자제하라. 남을 위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하지 말라.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 톨스토이 -

 

  생애를 자기완성을 위해 바친 사람은 언제나 앞만 보고 있다. 멈춰서 있는 자만이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는 법이다. - 톨스토이 -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은 이성적인 생활의 필수조건이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을 단련하는 동기가 된다. - 톨스토이 -

 

 11월 14일(p.1053 ∼ 1054)

 

  지극히 풍부한 학식을 갖고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것보다, 건전한 상식을 조금 가지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낫다. 학문이 꼭 나쁜 것은 아니며, 어떤 지식이든 지식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순결한 양심과 선한 생활은 모든 지식보다 위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된다.

                                                  - 토머스 아 캠피스 -

 

  우리가 교사에게 기대하는 바는, 그가 자기의 학생을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 판단하는 인간으로 만들고, 다음에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만들며, 마지막으로 학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설사 학생이 마지막 단계까지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사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지만), 역시 그의 공부는 학교를 위해서는 아니라도 인생을 위해 그를 훈련시켜줄 것이다.

  만일 이와는 반대의 방법으로 한다면, 학생은 판단력을 기르기 전에 이성 비슷한 것을 붙잡고, 배움에서는 진정으로 몸에 배어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수박 겉핥기식의 학문을 터득함으로써, 그의 정신력은 여전히 불모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허망한 학문에 의해 완전히 손상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판단력도 이성도 없는 학자, 아니 지식장사꾼을 만나고, 또 학문의 전당에서 다른 어떠한 사회적 계층에서보다 훨씬 많은 어리석은 인물들이 생산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 칸트 -

 

  좋은 행위를 하는 자가 바로 좋은 학자라고 할 수 있다. - 인도의 기로파제예 -

 

  지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습관이 확립되지 않으면 바른 의지도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능의 습관이 의지에 무엇보다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능의 습관은 그것이 인생의 영원한 법칙 전체에 바탕을 둔 것일 때, 비로소 가장 좋은 것이 된다. - 세네카 -

 

  지자(知者)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비록 그의 행위가 그 가르침에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은 배워야 한다, 비록 그 가르침이 벽에 씌어 있다할지라도. - 사디 -

 

 11월 17일(p.1061)

 

  지난날의 기억에 괴로워하거나 미래가 불안해 마음이 무거울 때, 인생은 오직 현재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너의 온 힘을 현재에 투자하라. 그러면 너의 지난날에 대한 고뇌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해소되어 자유와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 톨스토이 -

 

 11월 19일(p.1071)

 

  언제나 지독한 우울 속에 있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려는 듯, 특별히 불행한 생활 속에 자신을 가두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언제나 기를 쓰며 집요하게 움직이고 돌아다닌다. 이 사람들의 가장 큰 만족, 가장 큰 요구는, 삶의 기쁨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거기에 집요하게 우울한 작용을 하여 그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매우 불행하지만, 그 불행의 책임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톨스토이 -

 

 11월 21일(p.1074 ∼ 1075)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특별한 위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전 생애가 위업이 아니면 안 된다. - 톨스토이 -

 

  인간의 선덕은 그 사람의 특별한 노력이 아니라 하루 하루의 행위에 달려있다. - 파스칼 -

 

  매일 아침의 여명이 우리의 삶이 시작이 되게 하고, 매일 저녁의 일몰이 삶의 마지막이 되게 하라. 그 짧은 삶의 하나하나에,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사랑의 행위의 각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선한 노력의 각인이 남도록 하라. - 존 러스킨 -

 

  인생의 의의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실천하는 데에 있다.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양심이 그것을 지적해 줄 테니까. 그러므로 오로지 양심에 귀 기울이며 그것을 더욱 더 예민하게 가꿀 필요가 있다.

- 톨스토이 -

 

 11월 22일(p.1076 ∼ 1077)

 

  인간은 스스로 만족하는 일이 적어서, 자신의 내면적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외면적, 사회적 생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 톨스토이 -

 

  만약 장로들이 너에게 "파괴하라"고 말하고, 젊은이가 "건설하라"고 말하거든 건설하지 말고 파괴하라. 장로들이 말하는 파괴는 건설이고 젊은이가 말하는 건설은 파괴이므로.

                                                          - 탈무드 -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지배할 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을 지배할 권리도 없다. -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 -

 

 11월 24일(p.1080 ∼ 1081)

 

  비방과 험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비로운 사람이다. - 톨스토이 -

 

  자신의 이웃이 죄악에 빠진 것을 보고 화를 내고, 선을 사랑한다는 명분아래 그에게 악의를 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신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자비심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모두 평화와 관용의 각인이 찍혀 있어, 우리의 눈을 우리 자신의 결점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 성현의 사상 -

 

  자비와 온유와 자기부정에 의해 너는 모든 적의 무장을 해제할 것이다. 장작이 떨어지면 어떤 불이라도 꺼지고 만다. - 실론 불교 -

 

  네가 범한 수치스러운 죄의 기억을 어둠 속에 숨기지 말고, 오히려 이웃을 심판하게 되었을 때 네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해 두어라. - 톨스토이 -

 

 11월 28일(p.1095)

 

  하루의 고뇌는 그 날 하루로 족하다. 자신의 삶을 의혹과 공포 속에서 낭비하지 말라. 현재의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 앞으로의 몇 시간 또는 몇 세기를 위한 최선의 준비임을 믿고, 열심히 자신의 일에 종사하라.

  지금의 우리에게 미래는 언제나 환상처럼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삶의 영혼의 행위처럼 영혼으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삶을 살고 있을 때 시간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하게 하여, 그들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느끼게 했다. - 에머슨 -

 

 11월 29일(p.1097)

 

  어떠한 말도 그것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밖에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파렴치한 사람에게 염치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고, 사랑과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의 의미를 설명할 수도 없다. 이러한 말들의 의미를 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염치와 사랑을 표현하는 말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 존 러스킨 -

 

 11월 30일(p.1098)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은 없지만,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물을 이길 수는 없다. 약한 것이 흔히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흔히 단단한 것을 이긴다. 천하에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도 없다. - 노자 -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억지로 저항하는 자는 상황 쪽에서도 그에게 저항하고, 거기에 양보하는 자는 상황도 역시 그에게 양보한다.

  만약 네가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거기에 저항하지 말고 물 흐르듯 되는 대로 맡기는 것이 좋다. 상황을 거스르는 자는 상황의 노예가 되지만, 거기에 순응하는 자는 그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 탈무드 -

 

12월

 

 12월 4일(p.1119)

 

  말은 그 빼어난 다리의 힘으로 적에게서 달아날 수 있다. 말이 불행한 것은 수탉처럼 울지 못할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 즉 그 다리를 잃었을 때이다. 개는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다. 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후각을 잃었을 때는 불행하지만, 새처럼 날지 못한다 해서 불행하지는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또한 곰이나 사자나 흉악한 사람을 힘으로  이기지 못했을 때 불행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 즉 선함과 분별심을 잃었을 때 비로소 불행해진다.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불행하고 동정 받아야 할 존재이다.

  인간이 죽는 것이나 돈과 집과 재산을 잃는 것은 그리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일들은 원래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재산, 즉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슬퍼해야 할 일이다. - 에픽테토스 -

 

 12월 5일(p.1120)

 

  현대는 그야말로 비판의 시대이다. 그런데 종교와 입법은 일반적으로 비판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종교는 그 신성함의 힘을 빌리고, 입법은 그 외면적인 위대함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와 입법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의혹을 부채질해 사람들의 참다운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성은 자유롭고 공개적인 판단을 거친 것만 존경하기 때문이다. - 칸트 -

 

 12월 6일(p.1122 ∼ 1123)

 

  우리가 미망에 빠지는 것은 올바르게 생각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릇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 -

 

  무지는 절대로 악을 낳지 않는다. 가장 무서운 것은 미망이다. 사람들이 미망에 빠지는 것은 무지 탓이 아니라 자신을 유식한 자로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 루소 -

 

  인간의 나쁜 습관의 하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소중히 하며,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위대해지고 싶지만 자기가 왜소하다는 것을 안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불행하다는 것을 안다. 완성된 인간이 되고 싶지만 자신이 매우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지만, 그의 결점이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경멸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안은 것을 알면 그는 극도의 죄악에 빠진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탐탁하지 않은 진실을 증오하게 되어 그 진실을 말살하려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가능한 한 자신의 마음과 타인의 가슴속에서 하다 못해 진실을 왜곡하려고 기를 쓰게 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결점을 타인으로부터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숨기려는 것이다. - 파스칼 -

 

<열두 사도의 가르침> 서문(p.1128 ∼ 1130)

 

  1883년 그리스의 대주교 브리에니는 콘스탄티 노플에서 고대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고문서 속에서 '열두 사도의 가르침' 또는 '열두 사도에 의해 사람들에게 전해진 주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했다. 교회의 일부 성직자들로부터 신성시되고 있는 이 글은 그때까지는 제목만 알려져 있었다.

  이 글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들어 있는데,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루가복음> 제6장 가운데에 기술되어 있는 진리와 가르침이 다른 말로, 그리고 약간의 보충과 설명을 덧붙여서 기록되어 있다. 이를테면 구하는 자에게는 주라는 가르침에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계율에 좇아 주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의인(義人)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는 자는 불행하다. 가난하여 받는 것은 죄가 없지만 가난하지도 않은데 받는 자는 무엇을 받았는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자선은, 땀을 흘린 손에서 나올 때만, 즉 주는 자의 노동에 의한 것이 주어질 때만 진정한 자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제4장에서 더욱 분명하게 얘기되고 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교도는 어떠한 것도 자신의 재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오직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 글 속에는 그리스도교도는 사람들에 대해 각자의 정신상태에 따라 어떻게 접해야 하는지, 복음서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 '누구도 미워하지 말라. 그러나 어떤 자는 충고하고, 어떤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며, 또 어떤 자는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자에게는 충고하라는 가르침은 명백하게, 지금은 무지나 유혹 때문에 미망에 빠져 있지만 충고의 말로써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또 기도하라는 것은 충고하고 훈계해도 효과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그것은 분명히 복음서 안에서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그 사상이 더욱 부드럽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그러한 사람도 완전히 외면하지는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즉 그들의 진정한 행복을 기원하며, 그들이 마음을 연다면 언제라도 손을 내밀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르침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은, 동일한 신앙으로 맺어져 있는 사람들의 경우가 분명하다.

  6장에 얘기되어 있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박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에 대한 가르침 또한 중요하고 새롭다. '실천할 생각이면 다 실천하지 않으면 거짓이다'라고 그들은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전부를 실천해야 한다면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신의 가르침을 반대로 설명해 너를 그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자에게는 마음을 허락하지 말라. 네가 주의 멍에를 지겠다면 너는 완전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라.'

  이러한 여러 가지 새롭고 훌륭한 가르침 외에, 이 글에는 세례를 주는 것에 대한 명확한 지시도 들어 있다. 즉 위에서 말한 가르침을 상대에게 말하고(따라서 세례를 받는 자는 성인이 아니면 안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또 성찬식에 대해서도 그것은 공동의 식탁에서 바쳐지는 감사의 기도이며, 특별히 신비적인 의미는 없다는 것이 설명되어 있다.

  기도에 대해서도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하라고 했다. 또한 사제나 부사제를 뽑는 것도 단순히 교단의 임원을 뽑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 사람을 성직에 서임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그 밖에도 사도와 예언자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정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현재의 교회의 규정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의 책, 즉 <루가복음>보다 훨씬 오래되고 <요한복음>과 동시대의 그리스도교적 문헌으로 인정된 것이 세상에 나왔다. 이 글은 원시그리스도교 시대의 사람들의 목소리이며,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실천적 측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올바르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해명하고 보강하는 것으로, 많은 점에서, 또 가장 본질적인 점에서, 현재의 무너져 가는 교회의 가르침과는 일치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가? 그러한 역사적 문서의 발견은 당연히 그리스도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교도들은 당장 이 글에 달려들어, 내용을 검토하고, 그 진의를 파악하여 자신들의 교의와 대조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 교의를 수정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이 글을 수백만 부 인쇄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교회 안에서도 그것을 읽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열명 가량의 학자가 이 글을 교회사와 일반역사의 입장에서 조사하고, 거짓해설을 전문으로 하는 몇몇 신부들이 몇 가지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 의견에 따르면, 현재의 교회의 교의가 옳고 이 글에 적혀 있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결국 '12사도에 의해 사람들에게 전해진 주의 가르침'의 발견, 즉 원시그리스도교 시대의 성인들의 목소리는 그리스도교계에, 어느 발굴에서 비너스상의 조각이 발견되었을 때보다 훨씬 미미한 인상밖에 주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머리가 이상해진 가련한 니체나 베를렌 같은 사람의 유고(遺稿)인지 뭔지가 발견되었다면, 몇 십만 부씩 인쇄되어 전 세계에 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신앙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발견되면, 우리는 그저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빨리 거기서 달아나려 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성서의 말과 같다.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이사야서 제 6장 9∼10절, 마태복음 제13장 15절)

  그러나 다행히도 일반 대중 가운데, 그 1세기 무렵의 이 목소리를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고, 그 속에 그들의 생활을 비춰보아, 그들에게 힘을 주는 진리가 한결 선명하고 한결 정확하게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다. - 톨스토이 -

 

<열두 사도에 의해 사람들에게 전해진 주의 가르침>(p.1131 ∼ 1134)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또 하나는 죽음의 길이다. 그 두 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중 생명의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너를 창조한 신을 사랑하라.

  둘째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따라서 남이 너에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 행동은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

  이 두 마디에 들어 있는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계율 - 너를 창조한 신을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의 적을 위해, 너희를 공격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단식하라. 왜냐하면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하는 것은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느냐? 그들은 자민족을 사랑하고 타민족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적이 있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할 때 너희에게는 적이 없을 것이다.

  육체적, 세속적 자극을 경계하라.

  만일 네 오른뺨을 치는 자가 있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라. 그러면 너는 완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너에게 자기와 함께 1베르스타의 길을 갈 것을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2베르스타의 길을 가거라. 만일 네 겉옷을 빼앗는 자가 있거든 속옷도 내주어라. 만일 너에게서 네 것을 가져간 자가 있거든 도로 찾아오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해서는 안될 짓이기 때문이다. 너에게 구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어라. 그리고 그것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말라. 아버지이신 신은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준 것을 모든 사람이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계율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의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히 받고자 하는 자는 불행하다. 왜냐하면 가난하여 받는 자만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으면서 받는 자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받았는지를 밝혀야 한다. 마몬(재물의 신 - 역주)의 그물에 걸린 자는 자신이 한 행위 때문에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것을 버릴 때까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씌어 있다. 너의 자선은 네가 그것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알기 전에 네 손에서 땀처럼 떨어지게 하라고.

 

2

  두 번째 계율.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바꿔 말하면, 남이 너에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 행동은 너도 남에게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어린아이의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 방탕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요술을 하러 가지 말라, 독살하지 말라, 낙태하지 말라, 갓난애를 죽이지 말라, 더러운 말을 입에 담지 말라, 더러운 생각을 품지 말라, 두 마음을 가지지 말라,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말라, 일구이언은 죽음의 그물이다. 거짓되고 공허한 말을 하지말고, 항상 진심으로, 해야 할 말만 하라. 탐내지 말라, 빼앗지 말라, 속이지 말라, 음울하지 말라, 오만하지 말라, 네 이웃에게 악의를 품지 말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어떤 자는 충고하고, 어떤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며, 어떤 자는 진심으로 사랑하라.

 

3

  나의 자녀들이여! 모든 악과 악에 가까운 것을 피하라. 성내지 말라, 노여움은 살상으로 이어진다. 격정에 사로잡히거나 말다툼을 하고 흥분하지 말라. 이러한 모든 것에서 살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나의 자녀들이여! 색욕을 피하라, 색욕은 방탕으로 이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지 말며 너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보지 말라, 이것은 간음으로 이끈다. 나의 자녀들이여! 점을 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우상숭배로 이끌기 때문이다. 요술을 부리지 말라, 마술을 부리지 말라, 주술을 부리지 말라, 또 그와 비슷한 일에 끼어 들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이여! 속이지 말라, 속이는 건 도둑질로 이끌기 때문이다. 탐욕과 허영에 사로잡히지 말라. 이러한 것도 마침내는 도둑질로 이끈다. 나의 자녀들이여! 불만을 품지 말라, 불만에서 욕지거리가 나온다. 자기 만족에 빠지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 이러한 것도 욕지거리로 이끌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이 되어라. 온유함이야말로 땅을 이어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을성 있고 자비로우며 독실하고 겸손하며 선량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어떠한 때이건 네가 들은 이 말들을 경건하게 상기하라. 자기를 높이지 말고 자기의 마음속에 교만심을 키우지 말라. 네 마음을 높은 사람이나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향하지 말고, 올바르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향하라. 무슨 일이든 신의 뜻임을 알고,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행복으로 알라.

 

4

  나의 자녀들이여! 너에게 신의 말씀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밤이고 낮이고 떠올리며, 그를 주님처럼 공경하라. 왜냐하면 너에게 주에 대해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 주님도 계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성자들을 찾아 그들의 말속에서 네 마음의 평화를 찾아내기 위해 그들과 교류하라. 사람들의 분열을 바라지말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라. 정의에 의하여 그들을 판단하여, 지체의 높고 낮음에 구애받지 말고 솔직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하라. 한 입으로 두말 하지 말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받을 때는 손을 내밀지 말고, 줄 때는 손을 오그리지 말라. 네가 네 손으로 번 것을 자기 죄의 속죄로서 남에게 주어라. 주기를 망설이지 말라, 그리고 한 번 주었거든 아까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는 네 선에 대해 무엇이 그 좋은 보상인지를 알 것이므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얼굴을 돌리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를 네 형제들과의 공유물로 생각하며, 어느 것 한 가지도 내 것이라고 부르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 가운데 불명의 것이 공유되고 있다면, 너희에게 육체적인 것은 더더욱 공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들 또는 딸의 지도를 게을리 하지말고, 어릴 때부터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길러주어라. 아랫사람들을 턱으로 부리지 말라. 그들도 너와 같이 신을 믿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포자기한 나머지 그들과 너희의 위에 있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명령하지 말고, 너의 영혼이 지정하는 자에게 명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위선과 신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미워하라. 주의 계율을 저버리지 말고, 네가 받은 계율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며 아무것도 빼지 말라. 죄를 저질렀으면 신을 믿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을 참회하고, 마음에 악의를 품은 채 기도하려 하지 말라.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5

  죽음의 길은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불행과 더러움과 추악함으로 가득 차있다. 살인, 간음, 음탕, 방종, 도둑질, 우상숭배, 요술, 독살, 약탈, 기만, 위선, 두 마음, 교활, 오만, 증오, 도취, 탐욕, 더러운 말, 선망, 거만함, 거드름, 허영, 선인의 박해자, 진리의 증오자, 허우의 애호자, 정의에 대한 보상을 인정하지 않는 자, 선을 붙잡을 줄 모르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줄 모르는 자, 선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나쁜 일에 생각을 달리는 자, 온유와 인내를 모르는 자, 하찮은 일에 매달리는 자, 세속적인 대가를 바라는 자,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지 않고, 괴로운 사람과 함께 괴로워하지 않는 자, 자신들을 창조한 창조자를 모르는 자, 아이들을 죽이거나 유혹하는 자, 신의 얼굴을 파괴하는 자,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친 사람에게 더욱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는 자, 부자에게 아첨하고 가난한 사람을 부당하게 심판하는 자 - 가는 곳마다 죄인들로 넘치고 있다.

  나의 자녀들이여,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라!

  아무도 너를 이 가르침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

 

서로 사랑하라(어느 청년단에 보내는 메시지)(p.1134 ∼ 1143)

 

  마지막으로 작별함에 있어서 나는(내 나이가 되면 사람들과의 만남은 모두 마지막 작별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악이고 슬픔이 아니라, 신이 원하고 있고 우리 모두가 원하고 있는 것이 되기 위해, 바꿔 말하면,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선이고 기쁨이기 위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내 의견을 간단하게 얘기할까 합니다.

  그것은 요컨대,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나'속에, 즉 이반과 페트르와 마리아 속에 주어져 있고, 무릇 인생의 주안점은 그 자신의 '나'에게, 즉 이반과 표트르와 마리아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인생은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불행한 것,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 불행하고 왜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가능하면 많이 가지기를 원하고 있는 그 행복은,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에 결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을 위해 산다면, 서로 다투고 증오하며 싸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있어도 그 욕망에는 한계가 없어서, 더 많이 얻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애써 손에 넣은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손에 넣은 사람들을 시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저마다 자신의 육체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의 생활은 불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현재 그런 사람들에게는 인생은 불행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인생은 그런 것, 즉 불행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어져 있고 우리도 모두 인생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우리의 진정한 생명은 결코 육체 속에 있지 않고, 육체에 깃 드는 정신 속에 있다는 것, 우리의 행복은 육체에 아첨하며 육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도 다른 모든 사람들 속에도 깃들어 있는 동일한 정신이 원하는 대로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정신은 자신의 행복을, 즉 정신의 행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 정신은 모든 사람 속에 있으며 동일하기 때문에, 또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원하게 되는 거지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원한다는 것은 만인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사랑하면 할수록, 그 인생은 자유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육체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에 필요한 것은 언제나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손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서는 타인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합니다. 정신에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며, 사랑을 위해서는 누구하고도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람들과 친해지게 됩니다. 그렇듯 누구도 사랑을 방해할 수는 없고, 어떤 사람이든 사랑하면 할수록 스스로 행복과 기쁨을 맛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과 기쁨을 주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마지막으로 작별함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미 모든 성인들과 현인들, 그리고 그리스도까지, 요컨대 전 세계의 성현들이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 즉, 우리의 생활이 불행한 것은 우리 자신 탓이라는 것,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힘, 우리가 신이라 부르고 있는 힘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원하는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행복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나쁘다,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고 불평을 하며, 사실은 세상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술에 취한 사람이 술집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취해버렸다고 불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은 그와 같은 술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술집이 늘어난 것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인생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 다만 그것을 위해서는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질투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인생은 모든 사람에게 한없는 행복이 될 것입니다.

  지금 곳곳에서 끊임없이 지금의 세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도 잘못되고 불행해졌으니까, 세상을 몽땅 개조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생활도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그런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체제만으로 자신들이 행복해지고 불행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체제를 개조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다르고, 갑론을박, 어떤 자가 이런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자는 다시 그것을 반박하여, 자신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안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설사 가장 좋은 체제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최선의 대안이라는 것을 모두가 인정한다 해도, 모두가 그 체제에 따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두가 잘못된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서, 잘못된 삶의 방식을 사랑하고 있을 때, 어떻게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우리는 잘못된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서, 잘못된 삶의 방식을 사랑하며 우리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체제가 좋아지면 우리의 삶도 좋아질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올바르지 않은데 어떻게 좋은 체제가 성립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러한 가장 좋은 체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성립시키려면 사람들 자신부터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지금처럼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 그 좋은 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사람들과 투쟁하며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한다면 - 바꿔 말하면, 여러분 자신이 지금보다 더 잘못된 인간이 된다면, 그 뒤 멋진 삶이 찾아올 거라고 약속하는 실정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런 말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생활이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사람들 자신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좋아지면, 저절로 좋은 사람들의 좋은 사회가 출현할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좋은 사회체제를 통해 사악한 사람들을 선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해왔습니다.(썩은 밀로 좋은 빵을 구울 수 있는 것처럼). 이 잘못된 생각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쳐왔고, 실제로 지금도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전에는 그러한 기만행위를 하는 것은 권력자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재산몰수니 감금이니 사형 같은 온갖 폭력행위를 통해, 나쁜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평화로운 사회로 만들려고 노력해 왔고(적어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해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혁명가들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그들은 여러분에게 혁명에 대한 참여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절대로 거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황제나 대신, 경감이나 순경 같은 권력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나쁜 짓을 하게 내버려두십시오. 여러분은 지금까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어디까지나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그것과 동시에 혁명가들의 유혹에 넘어가 폭력행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은, 죄 많은, 폭력적인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신의 혁명 속에 있습니다. 그러한 정신혁명에 의해서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또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이 바랄 수 있는 한의 최대의 행복, 최선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간절히 원하는 진정한 행복은, 미래의,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체제 속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어디서나, 또 생사의 어느 순간에나, 사랑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옛날부터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우리의 생활의 추악함과 괴로움이 극에 달하여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진정한 그리스도교가 이제 더욱 더 명확해져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시기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제 오직 하나, 다음과 같은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즉, 우리의 진정한 생명은 우리의 육체 속이 아니라, 우리 속에 사는 신의 영혼 속에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의 육체적 생활(개인적 생활이든 사회적 생활이든)의 개선에 기울려 온 노력을,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단 한가지 -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도 말했듯, 모든 사람에 대한, 특히 우리가 모르는 사람,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까지 마음에 키우는 일에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생활의 실상은 그 일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맨 먼저 자신의 모든 노력을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익숙하지 않은 단 한가지 일, 즉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향해 기울이라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 대한 사랑조차 이웃과의 싸움과 그들에 대한 증오에 비하면 인간의 영혼에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적이라는 증오에 찬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인생관의 변화는 단순히 불가능하지 않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변화만이 사람들을 그들을 괴롭히는 불행에서 구원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왜,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까? 부디 여러분에게는 최대의 행복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은 모두 -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쉽고, 참으로 간단하고, 참으로 기쁜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가난하고 괴로워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좋을지 모르지. 부자와 권력자에게는 적이 자신들의 권력에 복종하는 한 그들을 사랑하는 것도 쉬울 테니까. 하지만 우리처럼 고통 받고 있는 자, 학대받고 있는 자에게는 그건 어려운 일이야"하고.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인생관을 바꾸는 것은 권력자와 부자에게나, 노예와 가난한 자에게나, 모두 필요한 일입니다. 오히려 노예와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더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와 가난한 자는 자신의 처지를 바꾸지 않고도, 다만 사랑에 반하는 일만 하지 않으면, 나아가서 그러한 폭력적 행위에 가담하지만 않으면 되며, 그러면 현재의 사랑에 반하는 체제는 저절로 쓰러질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자에게는 이 사랑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권력과 부의 유혹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가난한 사람과 노예에게는 단지 새로운 폭력행위를 하지 않기만 하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낡은 폭력행위에 가담하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인간이 성장하듯이 인류도 성장합니다. 사랑의 의식은 지금까지도 성장해 왔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생활의 기초가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는 데까지 성장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추악하고 폭력적이며 사랑에 반하는 삶의 단말마 같은 경련입니다.

  무엇보다 현재, 이러한 모든 싸움과 모든 증오, 모든 폭력기구가 단지 인류를 불행에 빠뜨리는 무의미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불을 보듯 명백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불행으로부터의 간단하고 쉽고도 유일한 구제법은 모든 사람의 삶의 근본원리인 사랑을, 조금도 무리하지 않고도 필연적으로 최대의 악을 최대의 선으로 바꾸는 사랑의 원리를 의식하는 것임이 명백해지지 않았습니까?

  사도 요한이 최고령에 달했을 때, 사랑의 감정에 휩싸여, 쉬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되풀이하여 그 감정을 표현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노령이, 바꿔 말하면 일정한 한계까지 산 한 인간의 생명이 그런 표현을 한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이 일정한 한계에 달한 인류의 생명도 그렇게 표현할 것입니다.

  참으로 간단명료한 얘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살아갑니다, 즉 태어나서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고, 마침내 죽습니다. 과연 우리의 일생의 목적이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대답은 단 한 가지, 나는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참 살면서 한참 생각하면 스쳐 지나가는 생명, 죽어 가는 존재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무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해보고서야, 나는 나의 사랑의 대상이 실은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생명이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타인을, 이웃을 친구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면 될까요? 처음에는 그것이 사랑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첫째로 불완전한 존재이며, 두 번째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이며, 무엇보다도 죽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사랑해야 할까요?

  대답은 단 한 가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랑의 근원을 사랑하는 것, 사랑을 사랑하는 것, 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사랑 자체를 위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깨달으면 인생에서의 악은 당장 소멸하고, 인생의 의미가 명료하고 기쁜 것이 될 것입니다.

  "야, 그것 참 좋은 일이다, 그보다 더 좋은 얘기는 없을 거야" 하고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사랑하는 것, 사랑을 위해 사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 하지만 나는 사랑하고 살며 모든 것을 남에게 주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 자신의 육체만을 위해 산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게다가 나만이 아니야,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사랑에 대한 설교는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아무도 실천하지 않았잖아. 또 실천할 수도 없어.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 건,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모두가 일제히 지난날의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생활을 영적이고 정신적인 생활로 바꿨을 때 비로소 가능한 거야. 그렇지만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으니 결국은 말뿐이지. 사실은 공허한 설교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며 여전히 그 잘못된 낡은 생활에 만족하려 합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마음속으로는 그들도 자신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잘못되어 있는 것인가 하면, 세속적, 육체적 생활을 위해서는 모두가 일제히 자신의 생활을 바꿀 필요가 있지만, 정신적인 생활과 신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결과에 따라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 의해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남이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 일반적으로 현상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행복을 줍니다. 사랑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인간은 사랑함으로써 신과 하나가 되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전 생명을 남에게 주기를 바라며, 그렇게 자신을 신에게 바치는 것에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의 행위가 거기에 영향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신에게 맡기는 것, 신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사랑이고,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원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자신의 계율을 지킴으로써 소멸하기를 원할 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있어도 소멸하지 않습니다. 또 설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죽는 일이 있다해도, 그의 죽음은 그 자신에게는 기쁘고 사람들에게는 의미 깊은 죽음이며, 세속적인 사람들의 경우처럼 절망적이고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고 나 한 사람만 그렇게 하는 거라면 사랑에 몸 바치지 않겠다는 것은, 잘못된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도 일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의 생활을 우리의 내부에 있는 사랑의 강화에 두고, 세상은 세상이 원하는 대로, 즉 하늘이 명하는 대로, 즉 하늘이 명하는 대로 그 길을 걸어가도록 맡겨둡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최대의 행복을 주고, 사람들에게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선을 베풀게 되는 것임을 믿으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간단하고 쉽고 기쁜 일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오직 사랑하기만 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특히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것처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면, 우리의 인생은 끝없는 기쁨이 되어, 미망에 빠진 사람들이 헛되이 폭력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문제 같은 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가는 것을 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만이 자신의 내부에 영원한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는 성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무릇 사물은 그것을 실생활에서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좋고 나쁨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누가 농부에게 호밀은 이랑을 파고 파종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거나, 양봉가에게 벌통은 틀을 만들어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 현명한 농부와 양봉가라면, 정말로 그런지 실험해보고, 그 결과에 따라 그 말에 따르고 따르지 않고를 결정할 것입니다.

  실생활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사랑의 가르침을 실생활에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지 한번 실험해 보십시오. 무엇보다 일단 직접 해볼 일입니다. 일정한 기간이라도 좋으니까, 아무튼 모든 것에서 사랑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맹세를 세워보십시오. 무슨 일에서나 무엇보다 먼저 상대가 도둑이든 주정꾼이든, 횡포를 부리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모든 사람과 접촉할 때 애정을 잃지 않고, 상대와 교류할 때 자신에게가 아니라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그렇게 일정한 기간 살아본 뒤에, 그동안 자신이 괴로웠는지 어땠는지, 자신의 생활이 더 나빠졌는지 아니면 좋아졌는지 자문해 보고, 그 결과에 따라 실제로 사랑의 실천이 우리의 생활을 행복하게 하는지, 아니면 그저 말뿐인 것인지 하는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부디 시험해보십시오. 자신에게 가해지는 악에 대해 악으로 갚는 대신 부디 선으로 악을 갚도록, 남의 험담을 하지 않도록, 가축과 개에게도 잔인하게 대하지 않고 친절과 사랑을 담아 접하도록 노력해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하루, 이틀 또는 그 이상(실험이라 생각하고) 해보고, 그동안의 여러분의 정신상태를 지난날의 정신상태와 비교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전의 우울하고 화나고 무겁던 기분에서 밝고 즐겁고 기쁜 기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부디 그것을 한 번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랑의 가르침이 단순한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중요한 일,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이해하기 쉽고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톨스토이 -

 

 12월 9일(p.1144 ∼ 1145)

 

  오늘날 애국심은 모든 사회악과 개인의 추행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고 있다. 우리는 조국의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그 조국을 존경할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을 거부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우리는 애국심이라는 이름 아래. 개개인을 타락시키고 국민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모든 파렴치한 행위에 종사해야 한다. - 비처 -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많은 악을 저지르고, 가족을 위해 더욱 많은 악을 저지르지만, 애국심을 위해서 가장 무서운 잔학행위, 이를테면 간첩행위, 민중에 대한 가렴주구, 비참하기 그지없는 살육의 전쟁을 저지르면서, 심지어 그것을 자행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잔학행위를 자랑하기도 한다. - 톨스토이 -

 

 12월 10일(p.1147)

 

  벗어나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죄 많은 직무에 묶에 두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부끄럽게 여기지만, 곧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지고, 나중에는 죄에서 벗어나면 세상의 여론 속에서 자신이 멸망하게 될 거라고 여기게 된다. 죄의 첫 번째 계단에서 멈추지 않는 자는 결국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가게 되는 법이다. - 박스터 -

 

 12월 11일(p1149)

 

  시장에서 빵을 사는 사람은 어버이를 잃은 갓난아기에 비유할 수 있다. 많은 유모가 그에게 젖을 주지만 갓난아이는 여전히 배가 고파 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이 경작한 밀로 만든 빵을 먹는 자는 어머니의 따듯한 품안에서 자라는 갓난아이와 같다.

- 탈무드 -

 

 12월 13일(p.1153)

 

  세속적인 명예나 외면적인 신성함을 위한 종교 행사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고행처럼 자신을 학대하고 남을 학대하는 행사도 잘못된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육체의 참회는 정결이고, 언어의 참회는 항상 선의로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며, 사상의 참회는 정결이고, 언어의 참회는 항상 선의로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며, 사상의 참회는 자기를 다스리고 영혼을 정화하며 선에 마음을 바치는 일이다. - 마하바라타 -

 

 12월 14일(p.1156)

 

  만약 네가 무언가를 원하고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네가 자신 속에 사는 사랑의 신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그것을 믿고 있다면, 너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네 속에 사는 신이 원하는 것은 모두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너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게는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 -

 

 12월 15일(p.1157)

 

  완전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언제나 온갖 종류의 모순 대립하는 욕구가 있으며, 그것이 서로 싸우면서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므로, 그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 -

 

 

 

세계평화 확립협회의 회원에 의해 채택된 강령선언(p.1161 ∼ 1164)

(1838년, 보스턴에서)

 

  우리는 그 어떤 인간적인 지배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류에 대한 유일한 왕, 유일한 입법자, 유일한 심판자, 지배자만을 인정할 뿐이다. 우리는 전 세계를 조국으로 인정하고, 전 인류를 형제로서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들도 사랑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이익과 권리는 우리에게 전 인류의 이익과 권리 이상으로 중대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애국심이 우리 민족에게 가해진 모욕과 손해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상의 모든 정부는 신에 의해 수립되고 축복 받았으며, 미합중국과 러시아, 터키 등에 존재하는 정부는 모두 신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신성모독인 동시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의 창조주는 공정하지 않은 존재, 악을 내세우고 이를 장려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어떤 나라의 정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외적에 대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행동한다고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권 활동은 신의 용인을 받지 못하며, 따라서 그들의 정권은 신에 의해 수립된 것이 아니므로, 이를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사람들의 정신적 갱생에 의해 타도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전쟁 자체 - 침략전쟁이든 방위전쟁이든 - 뿐만 아니라, 모든 군비, 즉 모든 병기창의 설치, 요새의 구축, 군함건조 따위도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또 불법적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모든 상비군, 모든 군사령부의 존재, 전승, 곧 적군의 패배를 축하하는 기념비 종류, 모든 전리품, 모든 공훈축하행사, 모든 무력에 의한 합병이 비 그리스도교적이고 불법적임을 인정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민중에게 병역을 요구하는 모든 국가적 법규가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불법적임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모든 이유에 의해 우리는 병역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투옥 또는 사형의 위협 아래 사람들을 멋대로 지배하는 직무에 종사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나아가, 모든 국가적 기관과 관계를 끊고 모든 정치, 모든 세속적 명예와 지위를 거부한다.

  스스로 국가기관 내의 직무에 종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는, 마찬가지로 타인도 그 자리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또 우리는 타인이 우리로부터 빼앗은 것을 되찾기 위해, 사람들과 법정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야"(마태복음 제5장 40절) 하며, 그에 대해 결코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의 계율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폐기되었다는 것, 그리고 신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 모든 신봉자에 대해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 없이, 적에게 복수하는 대신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믿는다. 강제적으로 금전을 강요하고, 투옥하고, 유형 또는 사형에 처하는 것은 명백하게 용서가 아니라 복수이다.

  인류의 역사는 육체적 폭력이 도덕적 갱생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범죄에 빠지기 쉬운 경향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억제된다는 것, 악은 오직 선을 통해서만 멸할 수 있다는 것,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안전보장은 오직 선과 인내와 자비 속에 있다는 것, 온유한 자만이 땅을 이어받을 것이며, 칼을 들고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것, 그러한 모든 것의 증거로 가득 차있다.

  그러므로 생명과 재산과 자유와 사회의 평화와 개개인의 행복을 가능한한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서도, 또 왕 중의 왕, 주 중의 주인 지상자(至上者)의 뜻을 준수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마음을 다해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수용하고, 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이 가르침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어, 궁극적으로는 모든 악의 힘을 이길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혁명적 교의를 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혁명의 정신은 복수와 폭력과 살육의 정신이다. 그것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다는 우리의 기본적 계율에 따르는 한, 우리는 음모를 획책하고, 반란을 기도하며, 폭력에 호소할 수 없다. 우리는 복음서의 요구에 반하지 않는 한, 모든 정부의 법률과 명령에 따를 것이다. 우리의 저항은 다만 우리의 불복종에 대해 내려질 형벌에 흔쾌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모든 공격을 저항하지 않고 견디려 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도 이 세상의 악을, 사회의 상층에서든 하층에서든, 정계에서든 정부 내에서든, 또는 종교계에서든, 끊임없이 공격하며,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지상의 모든 나라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나라에 통합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와 그 정신에 어긋나는 것, 그래서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것은, 지금 당장 모두 폐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칼을 쟁기의 보습으로, 창을 낫으로 다시 벼릴 때가 올 거라는 예언을 믿는 이상, 우리는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능력에 따라 지금 당장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에게 모욕과 박해, 고난, 심지어 죽음조차 부를지도 모른다. 오해와 매도와 비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폭풍에 직면할 것이다. 오만과 위선과 야심과 잔인성이, 모든 지배자와 권력자들이, 모조리 한 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멸하려 할 것이다.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따르려하는 구세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으로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공포 앞에 주춤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전능한 주에게 매달릴 뿐이다. 우리가 인간의 비호를 거절하는 이상, 오직 하나 '세상을 이기는 신앙' 외에 무엇이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으랴!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는 시련에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주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모든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신께 맡기고,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집과 형제자매와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식, 또는 전답을 버리는 자는, 그것의 백배를 돌려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한 복음서의 말을 믿는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선언문에 표명된 주의(主義)와 강령이, 우리를 방해하려는 모든 세력을 타파하고, 반드시 전 세계의 승리를 가져올 것임을 확신하고, 또 인류의 이성과 양심에, 특히 우리의 몸을 맡기는 신의 권능에 기대를 걸면서 여기에 서명하는 바이다.

 

 12월 16일(p.1165)

 

  사랑이라는 것은 위험한 말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사악한 행위가 저질러지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사악한 행위가 자행되며,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큰 사악한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사랑이 인간 생활에 의의를 주고 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지만,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동서고금의 현자들에 의해 해답이 제시되어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답이었다. 즉, 흔히 사랑이라 불리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 톨스토이 -

 

 12월 17일(p.1168 ∼ 1169)

 

  큰 가지에서 잘려나간 작은 가지는 결국 나무 전체에서 잘려나간 것이 된다. 사람도 남과 불화를 일으키면 인류 전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그러나 작은 가지는 사람에게 잘려 큰 가지에서 잘려나가지만, 사람은 자신의 증오와 악의로 인해 스스로를 이웃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인데, 사실은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인류 전체에서 떼어놓는 것인데, 사실은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인류 전체에서 떼어놓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한 형제로서 공동의 삶으로 초대한 신은, 불화 뒤에도 다시 화목할 수 있는 자유를 그들에게 주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자기 존재의 행복을 느끼지 않는, 하늘과 땅을 창조한 신은, 다음에는 그 행복을 느끼는, 사색하는 많은 구성분자로 이루어진 전체적 존재를 창조하고자 했다. 인간은 모두 그 존재의 구성분자이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사와 전체적 존재를 다스리는 보편적인 의사의 일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인간은 종종 자신이 속한 전체적 존재를 보려 하지 않고, 자신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을 중심적 존재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전체에서 떨어져 나간 신체의 일부분과 같은 것으로, 이미 생명을 잃고 항상 미망 속에 있으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게 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그는 자신으로 돌아가서, 자신은 전체가 아니라 전체적 존재의 한 구성분자라는 것, 구성분자라는 것은 전체적 존재의 생명을 통해, 또 그 생명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전체적 존재에서 떨어져 나간 구성분자의 생명은 죽어서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로지 그 전체적 존재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그것 속에, 또 그것을 통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어떠한 애정을 가져야하는지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전체적 존재를 이루는 구성분자이므로 사색하는 구성분자들로 이루어진 전체적 존재를 먼저 마음에 떠올리고, 그 뒤 각각의 구성분자로서 어떻게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전체로서의 신체는 손을 사랑하고, 손에도 의지가 있다면 신체 전체를 사랑하듯 자신도 사랑할 것이다. 거기서 도를 넘은 사랑은 모두 부당한 사랑이다. 만약 손과 발에 자신의 의지가 있다면, 전체로서의 신체에 따라 움직여야 비로소 질서 있는 움직임이 나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혼란과 불행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손발은 신체 전체의 행복을 원할 때 비로소 자신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 구성분자는 자신들의 일치의 행복과 놀라운 협조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이 얼마나 고심하여 그들에게 협조의 정신을 불어넣고, 그들의 성장과 존재를 위해 배려하고 있는지 느끼지 못한다. 만약 그들에게 마음이 주어져서, 그 마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을 자신만이 독점하고 다른 구성분자에게 주지 않는 데 악용된다면, 그것은 부정할 뿐만 아니라 불행하며, 서로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증오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행복과 의무는, 그 들이 함께 거기에 속하며, 그들을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하는 전체적인 영혼과의 조화로운 활동에 있다. - 파스칼 -

 

 

 12월 19일(p.1172 ∼ 1173)

 

  자신의 생명을 정신적 자기완성 속에 두는 사람은 불만을 느끼는 일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 파스칼 -

 

  두 종류의 행복이 있다. 하나는 정신의 평화(결백한 양심), 또 하나는 언제나 밝은 마음이 그것이다. 전자는 사람이 자신에게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고, 세속적인 행복이 덧없음을 똑똑히 의식할 때 생기는 정신상태이며, 후자는 자연이 준 선물이다. - 칸트 -

 

 12월 21일(p.1177)

 

  인간은 그 의식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고독하다. 그 고독은 때로는 이상하고 낯설며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생각이 부족한 사람은 여러 가지 기분전환을 시도하며, 괴로운 고독의 의식에서 도피하고자 의식의 높은 곳에서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만다. 이에 반해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그 높은 곳에 계속 머물러 있다. - 톨스토이 -

 

 12월 22일(p.1180)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 국민이 되어야 한다. 선을 대하듯 법률에 대해 존경심을 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법률은 결코 사람들을 더 정의롭게 만들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중시한 결과 선량한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 소로 -

 

 12월 23일(p.1194)

 

  현명한 사람은 박학하지 않고, 박학한 사람은 현명하지 않다. - 노자 -

 

 12월 24일(p.1196)

 

  스스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라. 그것이 인생을 사는 길이다. - 톨스토이 -

 

 12월 25일(p.1197 ∼ 1198)

 

  자선은 내 집에서 시작된다. 만일 자선을 행하기 위해 어딘가로 갈 필요가 있다면, 네가 하려는 자선은 진정한 자선이라고 할 수 없다. - 톨스토이 -

 

  물질적으로 돕는 것은 희생이 동반되어야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물질적 도움을 받은 사람은 정신적 도움을 받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희생행위가 아니고 그저 남는 것을 준 것뿐이라면, 그것은 받는 사람을 화나게 할 뿐이다. - 톨스토이 -

 

 12월 26일(p.1198 ∼ 1199)

 

  인간은 어린 시절에 가장 암시를 받기 쉽다. 논리는 어른이 실제로 보여주는 본보기에 비하면 천분의 일의 영향력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린이가 보는 앞에서 잘못된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그들을 훈계하는 것은 헛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 톨스토이 -

 

  어린이의 종교는 부모가 말로 하는 설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실제 행동에서 나온다. 그들의 생활을 움직이는 내면적이고 무의식적 이념, 그것이 어린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모두 잔소리와 설교, 또는 욕설까지 어린이에게는 그때 그뿐이다. 어린이는 부모의 신앙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그것을 꿰뚫어본다.

  어린이는 우리가 아무리 겉모습을 꾸며도 우리의 실체를 다 간파하고 있다. 어린이가 관상쟁이라는 말을 듣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근본은 먼저 자기 자신을 교육하는 것이며, 어린이의 의지를 지배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첫 번째 원칙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 아미엘 -

 

  욕망을 줄이는 것, 누가 뭐래도 그것을 청년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을 단련시켜야 한다. '욕망이 적으면 적을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옛날부터 변함 없는 진리이다. 그런데도 아직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 리히텐베르크 -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성향만큼 인간에게 불행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어린이에게 일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이다. - 칸트 -

 

 12월 27일(p.1120)

 

  하늘과 땅은 위대하다. 거기에는 색깔과 형체와 크기가 있다. 그런데 인간의 내부에는 색깔도 형체도 수도 크기도 가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 무언가는 이성을 갖추고 있다.

  만약 이 세계가 스스로 이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세계에 있어서 이성은 인간의 이성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세계는 무한하고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전 세계의 이성일 리는 없다.

  따라서 세계는 이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 이성은 무한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 공자 -

 

 12월 28일(p.1202 ∼ 1203)

 

  학문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유익하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우리는 이러이러한 것을 연구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반드시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말하고 있다. - 톨스토이 -

 

  우리에게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조차 없다. 그것을 알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자. 육체에는 장소, 시간, 운동, 온도, 빛, 음식물, 물, 공기, 그 밖의 많은 것이 필요하다. 자연계에서는 삼라만상이 모두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를 구명(究明)하지 않고서는 다른 하나를 알 수 없다. 전체를 알지 못하면 부분도 알 수 없다.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이해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았을 때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삼라만상을 모두 다 구명해야 한다. 그러나 삼라만상은 무한하며, 인간은 무한을 구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 파스칼 -

 12월 29일(p.1203)

 

  폭력과 강제가 있는 한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무저항, 그것에 대한 불참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 톨스토이 -

 

 12월 30일(p.1211)

 

  도덕을 얘기하면서 너희의 의무를 너희 가족과 조국의 범위 안에 한정하는 사람들은, 그 범위의 크기와 상관없이 너희에게도 타인에게도 해로운 자기애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조국은 더 큰 원, 전 인류라는 원 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넘어가야 할 두 계급이기는 하지만, 그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 주세페 마치니 -

 

  모든 사람들 속에 사는 동일한 신적 본원의 인식에서 나오는, 전 인류와 자신의 합일에 대한 인식은,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는 내면적이고 사회적으로는 외면적인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 의식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국가적 미신, 민족적 미신, 계급적 미신, 종교적 미신이다. 오직 진정한 종교만이 그 의식을 확립할 수 있다. - 톨스토이 -

 

 

 

 


◈ 삶과 죽음 - 톨스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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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善)을 믿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 어떤 선행이 어떠한 목적 아래에 행하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선행이 아니다. 목적이 전혀 없을 때에 비로소 참된 선행이 되는 것이다.
★ 착한 사람이란, 자신의 죄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자신의 선행은 곧 잊어버리는, 그러한 사람이다. 그릇된 사람이란 그 반대다. 자신의 선행은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면서 자기가 저지른죄는 곧 잊어버리고 마는 그러한 사람이다. 인생의 길
★ 겸손이란 자신을 죄 많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자신의 선행을 자신의 덕(德)으로 돌리지 않는 것에 있다. 인생독본
★ 전혀 믿지 않는 일이나 의심스럽게 여기는 일을,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에게 설교해서는 안 된다. 특히 그것을 의심할 바 없이 신성한 진리로 다루며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행위는 커다란 죄악인 것이다. 인생독본
★ 인간이 행하는 대부분의 악은, 나쁜 의지(意志) 때문에 비롯됨이 아니요, 맹신(盲信)된 그릇된 사상에서 비롯된다. 인생독본
★ 인간이란 나쁜 짓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안하도록 할 수는 있지만, 나쁜 짓을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할 수는 없다. 인생의 길
★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업이요, 자기의 죄를 정당화시킴은 악마의 업이니라. 인생의 길
★ 사람들이 현인(賢人)에게 말했다. '당신은 악인이라고 오인되고 있소.' 현인은 답하여 가로되, '그들이 아직도 나를 낱낱이 알지 못하니, 고맙기 한이 없소. 그러지 않았던들, 그들은 나에게 더욱혹독한 말을 했을 테니까'. 인생독본
★ 삶은 끊임없는 기쁨일 수 있고, 또한 항시 그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생독본
★ 사망과 출생은 두 한계다. 이 두 한계의 저쪽에는 동일한 '그 무엇인가'가 엄존한다. 인생독본
★ 생사 문제에 관해서, 자기 이외의 일찍이 살아 있던 현인들의 대답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러한 해답과 인식은 역시 그 사람 여하에 따라 각기 다른 법이다. 인생독본
★ 죽어가는 사람의 행동은 사람들에 대해서 위대한 힘을 갖는다. 그러므로 훌륭하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훌륭하게 죽는다는 것은 거의 그에 못지않게 중대한 일이다. 보기 흉하고, 순종적이 아닌 죽음은 훌륭한 삶의 영향을 약화시킨다. 훌륭한, 순종적인, 확고한 죽음은, 그릇된 삶을 변상하는 것이다. 인생독본
★ 그녀는 이 인생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위대한 사업을 수행했다. 즉 후회도 없이 공포도 없이 죽어간 것이다. 유년시대
★ 죽음을 망각한 생활과 죽음이 시시 각각으로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과는 두 개의 서로 완전히 다른 상태이다. 전자는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후자는 신의 상태에 가깝다. 인생의 길
★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된 관념에 의해 국한된 삶의 작은 부분을 인생이라고 착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인생론
★ 생은 사멸할 수 없는 것이다. 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그러므로 죽음은 한갓 생의 형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승에 있어서 나타난 생의 형체를 중절(中絶)시킬 수가 있을 뿐인 것이다. 자살에 관해서
★ 죽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덮어 씌우고 있는 바깥 껍질의 변화다. 바깥 껍질과 그 속에 있는 알맹이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인생의 길
★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그들에게 공허와 암흑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허와 암흑을 보는 것은 참된 생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생론
★ 죽음의 공포는 그 자체의 공포가 아니라, 그릇된 삶의 공포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가장 적절한 증거는 인간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곧잘 자살한다는 것이다. 인생론
★ '죽이지 마라'라는 말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서 일컬어진 말이다. 이 훈계는 돌에 새겨지기 전에 이미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었다. 인생의 길
★ 사람은 홀로 죽어가듯이, 내적(內的)인 영혼의 생활에 있어서도 항시 홀로 살아간다. 인생독본
★ 인간이 만약에 완전히 도덕적이라면, 결코 진리를 배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생독본
★ 신(神)이란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신을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같은 일이다. 신이란 생(生) 그 자체인 것이다. 인생독본
★ 자신 속에서만 신을 인식할 수가 있다. 자신 속에서 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신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인생독본
★ 인류는 끊임없이 진보한다. 이 전진 운동은 신앙의 분야에도 있어야 한다. 인생독본
★ 모든 신앙의 근본은 전적으로 똑같다. 인생독본
★ 참된 신앙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생의 길
★ 자신의 신앙을 의심한다면, 이미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란, 어쩌면 나는 거짓을 믿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절대로 떠오르지 않는 경우에만 신앙인 것이다. 인생의 길
★ 신앙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사람의 생활은 흔들림이 없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생활은 동물들의 생활과도 같다. 인생의 길
★ 참된 신앙을 위해서는 교회당도, 화려한 장식도, 노래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모임도 필요하지가 않다. 그와 반대로, 참다운 신앙은 언제나 정적과 고독의 자리에서만 우리들의 마음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것이다. 인생의 길
★ 참된 신앙은, 어느 요일엔 어떤 음식을 먹고, 어느 요일엔 교회에 가서 어떤 기도를 드리는가 함을 아는 데 있지 않다.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좋은 삶을 영위하며, 자기가 남에게 기대하는 것을 이웃에 베푸는 데 있다. 인생의 길
★ 인간이 미래에 있어서의 외면적인 행복만을 찾아 신앙을 갖는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라 타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항시 불확실한 타산이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현재에 있어서만 행복을 주는 것이요, 미래에 있어서의 어떠한 외면적인 행복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
★ 우리는 이성(理性)에 의해 신앙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은 남이 설교하는 신앙을 검토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인생의 길
★ 신앙은 삶의 힘이다. 참회록
★ 가장 야만적인 미신의 하나는, 인간은 신앙 없이 살 수 있다는 독단(獨斷)에 대해, 현대의 학자들 대다수가 지니는 독단이다. 인생독본
★ 신앙에 의하여, 또는 남이 용서해 준다고 해서, 죄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함은 크나큰 잘못이다. 그 무엇으로도 죄를 모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죄를 인식하고 다시는 죄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삼가하고 애쓸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의 길
★ 교회는 그 교사들이 끈기 있게 참고, 또한 괴로워하는 동안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쪄서 번들번들해지자, 그들의 교육적 활동은 끝났다. 인생의 길
★ 종교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교육의 기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이 가르쳐지고 있다. 그런데 아동들은 통찰력이 뛰어나 있으므로, 그것을 꿰뚫어보고는 자기네에게 가르쳐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네를 교육하는 사람들마저 믿지 않는다. 인생독본
★ 그 무엇도 주지 못하는 종교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티켓을 내건다. 인생의 길
★ 종교가 없으면, 자연의 온갖 세력을 정복하는 막강의 힘을 지닌 인간은, 이를테면 화약이나 폭발 가스가 장난감으로 주어진 애들 같은 존재다. 회개하라
★ 사람들은 자칫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지로는 그 반대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만이 말을 바꾸어, 우리가 '나', 즉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생의 길
★ 인간은 육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산다. 사람들이 만약 이것을 인식하여,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다 일생을 내맡긴다면, 설사 쇠사슬에 묶이고 쇠문 속에 갇히더라도, 그는 역시 자유의 사람인 것이다. 인생의 길
★ 나는 괴롭다. 나는 신에게 도움을 애걸한다. 신을 섬기는 것이 나의 업이지만, 신의 업은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이 한 가지 일을 상기하면, 대번에 나의 고통은 가벼워지고 만다. 인생독본
★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하고도 무궁한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상기하여, 자신의 과거 및 미래의 행위를 그 법칙에 맞추어 측정함을 뜻한다. 이것을 되도록 자주 행함은 유익한 일이다. 인생독본
★ 신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셨는데, 악마는 요리사를 주었다. 인생독본
★ 만일에 속죄나 기도 등에 의해서 자신의 영혼을 구제할 수가 있다면, 그에게 선행(善行)은 이미 쓸 데가 없다. 인생의 길
★ 모두가 똑같은 치명적인 두 가지 미신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신의 본체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미신과 신의 힘은 과학적 검토에 의해 설명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미신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독본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나이 어린 사람들조차 그 참뜻을 이해할 수 있는, 알기 쉬운 가르침이다. 다만 그리스도교도인 체하거나, 그렇게 자칭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이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독본


 
출처 : 幸福/LOVE/成功/詩/經營/文學/藝術/旅行 |글쓴이 : 綠野GreenField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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