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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스크랩] 시베리아 역사

by 8866 2005. 10. 23.
시베리아역사 | 징기스칸아시아
2005.09.07


 

러시아 연방의 고고학자는 시베리아의 거주 흔적을 이미 구석기 ·신석기시대로 인정하고 있다. BC 2세기에 훈족(族)이 민족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종족으로서 비로소 등장하고 있다. 6세기에 시베리아는 투르크계(系) 국가 영토의 일부가 되었으며, 13세기에는 칭기즈칸이 지휘하는 몽골제국에 정복되었다. 몽골제국의 분열 후 형성된 킵차크 한국(汗國)으로부터 15세기에 시비르 한국이 분열되어 나왔으나 1598년에 소멸되고, 16세기부터는 러시아인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스트로가노프 등 상인이 지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윽고 동진하는 러시아 세력과 원주민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카자크가 사용되었으며, 그 대장 예르마크는 시비르 한국을 격파하였다. 드디어 그 동진정책은 황제정부의 보호하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자극을 촉진한 것은 모피였으며, 이로 인해 모피의 채집과 야사크라고 하는 중세(重稅)는 원주민을 크게 괴롭혔다.

16세기 말부터 러시아 농민의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었고, 이에 의하여 원시 농업의 수준이 자연 높아졌다. 17세기에는 탐험가에 의한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제쥬네프, 하바로프(1649∼52) 등의 개인탐험에 이어 나중에는 정부에 의해서 조직된 파견탐험대(리트케, 브랑겔리)에 의해서 지리와 천연자원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투메니(1586) ·토볼리스크(1587) ·톰스크(1604) ·크라스노야르스크(1628) ·야쿠츠크(1632) 등 외에 은(銀) 기타의 광산을 개발하여 그곳에 유형수를 보내 노역을 시켰으며, 후에는 사금의 채굴도 행해졌다.

19세기 초에는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 전토를 지배하였으나 원주민의 저항과 남쪽의 유목민에 대한 방어책으로 자바이칼과 아무르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고 카자크 군대로 더욱 수호를 굳건히 하였다. 아울러 광산개발과 더불어 시베리아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강제적인 이주를 추진시킨 결과 시베리아는 역사상으로 러시아 본국에서의 사상범의 유형지(流刑地)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사할린 ·아무르 지역 ·연해지방까지도 획득하였다.

청(淸)나라와의 관계는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서 굳혀졌는데, 이것은 청국과 유럽 열강과의 사이에 체결된 최초의 평등조약으로 청국측에는 프랑스의 예수회 수사가 협력하였다. 그 후 1858년에 아이훈조약이 체결되고, 다시 60년에 베이징[北京]조약에서 시베리아가 러시아령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청국과의 교역 중심지는 캬흐타였다. 이윽고 시베리아의 경제개발을 위해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시베리아 철도가 1891∼1905년에 건설되었다.

10월 혁명 후 1918년의 2월 중순까지 시베리아에는 소련 정권의 세력이 구석구석까지 미쳤으나, 18년 봄부터 제국주의 세력의 무대가 되어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 군대가 개입하고 5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軍團)이 시베리아 철도를 지배하였다. 같은해 11월에는 코르차크의 반혁명 군사정권이 조직되었으나 19년에는 적군(赤軍)에 의해서 시베리아 진압이 거의 달성되었다. 이듬해 4월에 동시베리아는 극동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소련 정권하에서 시베리아는 경제 ·문화면에서 향상되고, 천연자원의 종합적 연구와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뒤져 있던 시베리아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쿠즈바스 탄전은 소련에서 세번째의 콤비나트가 되었으며, 처녀지(處女地)의 개척이 진전되어 1954∼58년에만 800만 ha의 토지가 개척되었다. 또한 새로운 도시로서 마가단(1933) ·노릴스크(1935) ·콤소몰스크(1952) 등이 건설되었다. 현재 시베리아는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이 발견되었고, 중요한 광공업과 발달된 농업으로 이목을 끌고 있으며, 시베리아와 극동이 전국의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1958∼64년의 7개년 계획의 완성과 그 후의 장기계획에 의해서 더욱더 방대해지고 있다.


 
출처 : 한마루 |글쓴이 : 한마루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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