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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영고탑의 역사

by 8866 2010. 1. 30.

 

 

영고탑의 역사

 

1. 영고탑의 옛 성터 고성촌

 

 

 영고탑에는 멀리 4천여 년 전 석기시대부터 만족의 선민(先民)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명나라 초기에 야인들인 여진족이 해랑강(海浪河)에 이주하여 살면서 "동해와집부영고탑로东"海窝集部宁古塔路"라 불렸고 그 이후로 이곳 해랑강유역은 눌간도사(努儿干都司)관할하에 들어갔다. 1599년 누르하치는 영고탑에 병력을 부단히 증강하다가 1610년에 이르러서는 대장군 액역(额亦)을 파견하여 영고탑로를 통괄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영고탑에 군대를 파병하여 주둔시켰다. 아울러 1636년에는 영고탑에 성(旧城)을 축조했다.

 1662년 청정부는 영고탑장군을 앙방장경(昂邦章京)으로 삼아 영고탑일대를 지키도록 결정했다. 1636년부터 1666년까지 영고탑은 성경(盛京심양)과 더불어 동북의 중진으로서 군정대권을 총괄했다. 청정부는 영고탑을 기지로 삼고 여러 차례 흑룡강과 송화강일대에 군대를 파병하여 침략자 짜르군대를 타격했다.

지금의 흑룡강성 해림시 구가향 고성촌(古城村)이 바로 영고탑장군이 주둔하던 유적지이다.

 

 

 

 

 

 38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오늘 날 유적은 성 동쪽과 북쪽의 300여m 남짓한 무너진 성벽만 남았을 뿐이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성벽의 축조는 다진 황토 사이에 나무를 박고 기초는 돌로 쌓아올린 구조이다. 현재 성벽의 나무는 풍화작용으로 인해 이미 부식되고 구멍만 숭숭 뚫려 있을 뿐이다. 동남쪽 성벽 잔해에는 한 그루의 비술나무(느티나무과)가 자라고 있는데 나무둘레는 3m, 직경은 1m, 높이는 19m나 된다. 전문가의 감정에 따르면 수령이 300여 년이라고 한다. 1636년 영고탑에 성을 쌓던 그때부터 이곳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성경통지盛京通志》의 기록에 따르면 영고탑의 위치는 해란하(海兰河 현재의 海浪河)남안에 주변 1리의 석성을 쌓고 동서에 각각 문을 하나씩 냈다고 한다. 외성의 둘레는 5리 남짓하고 사면에 네 개의 문이 설치되었다.  앙방장경(昂邦章京)파하투(巴哈图)의 감독하에 축조했다.

 내성의 정중앙에 앙방장경의 오서정당(衙署正堂)이 자리잡았다.  5간 초가집이며 동서를 좌우로 하여 초가 상방(相房)이 각각 3간씩 있었다. 고목이 있는 성이 바로 내성이다. 성내의 앙방장경오서는 없어진 지 오래고 봄 농사철을 기다리는 밭뙈기만 있을 뿐이다. 성의 밖에는 현재 고성촌 주민들이 살고 있다. 240여호 민가 중 조선족은  140여 호이다.

 고목 아레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용의 형상을 한 산줄기가 바라보이는데 그 이름은 용두산(龙头山)이다. 영고대(宁古台)라고도 부른다. 청나라 초기 명성이 자자한 장진언(张缙彦), 방공건(方拱乾), 양병(杨宾) 등이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흑룡강의 대지에서 첫번째로 되는 시사(诗社)가 탄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영고탑장군부는 무엇때문에 고성에서 신성으로 천이했을까?

 토착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성은 해랑강을 마주하고 용두산을 등지고 있을 뿐 아니라 용의 머리가 성을 향하고 있다. 남쪽의 오랑캐인 만자(蛮子)무리가 들어와 용두산의 보물을 파내느라 용의 혈맥을 끊어놓아 영고탑은 해마다 태평하지 못했다. 파견된 장군이 죽지 않으면 주둔지에 화재가 발생하곤 했다. 그리하여 성을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사실상 1814년부터 1885년 사이 해랑강유역에는 열차례(10)나 되는, 크고 작은 홍수가 범람하여 성이 물에 침수되었다고 한다. 이에 영고탑장군 파해(巴海)는 부하들을 이끌고 영안시로 옮겨 새로운 성을 쌓게 된 것이다.

 영고탑.

 3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해랑강과 용두산을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렸을 군인들과 정배살이 하던 옛 사람들은 총총히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 이 옛성에 남은 것은 무너진 성터 잔해와 말라 죽어가는 고목 한 그루뿐이다.           

 

 

2. 청나라의 유배지 영고탑

 

 

 인생의 천리 만리를
 슬프고 가슴 아프게 이별할 뿐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산도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닌 곳으로

 ......
 

 모든 화는 글을 읽은데서 시작한 것이니
 그대는 오계자를 보지 못하는가?

 

 이 [비가증오계자(悲歌贈吳季子)]라는 시는 청나라 초기의 유명한 시인인 오매촌(吳梅村)이 친구인 吳漢槎에게 써준 것이다. 오한사는 당시 영고탑으로 유배 가는 길이었다. 오한사는 '천당'이라고 불리우는 소주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재주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난세에 태어나서 명나라 황실이 몰락하면서 순치15년(1658년)에 강남과거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강남의 선비들과 함께 40대의 곤장을 맞고 영고탑으로 유배가게 된 것이다. 다음 해 윤3월 초3일, 오한사는 홑옷을 입고 북경을 떠나 변방으로 향했다.성경(심양), 선창(길림)을 지나 6월 21일 송화강을 건너고 7월 11일에 영고탑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영고탑까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4개월 간의 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그곳에서 23년 간 체류했다. 강희 20년(1681년)에 납란용약의 도움을 받아 비로서 남방으로 귀환했다.

 사실 영고탑은 塔이 아니다. 성의 이름이다. 이곳은 청나라 초기에 죄인들을 산해관 밖으로 정배살이를 보내던 유배지이다. 구성과 신성이 있는데 구성은 지금의 해림시 구가향 고성촌이다. 신성은 강희5년(1655년)에 옮겼는데 위치는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이다. 원래는 상경용천부가 있던 자리이고 지금의 영안시 동경성과는 3.5km 떨어져 있다.
 영고탑은 변방지역으로 옛날에는 환경도 열악하고 기후도 불안전하고 풀과 나무는 물론, 곡식도 자라지 않아
죄인유배장소로는 적격이었다.
 탑이 아니면서 탑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는 그럴 만한 원인이 있다. 만주어로 "영고"는 여섯"이라는 뜻이고 "탑"은 "개個"라는 뜻이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증조부 복만(福滿)의 여섯 명의 아들(누르하치의 여섯 명의 伯叔)이 이곳에서 살았던 연유로 지어진 이름이다. "여섯 명"이라는 의미가 있다.
 죄인들을 이곳에 유배시킨 목적은 죄인들(만족과 한족)이 고향을 떠난 고달픈 타향살이를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농사를 지어 이 지역을 개발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당시 오한사는 영고탑까지 4개월 간 걸어왔다. 영고탑은 청나라 때 유명한 유배지였다. 청나라 때 유배는 유방(流放), 적술(謫戌), 발견(發譴), 충군(充軍)이라고 불렸다. 죄인이나 그 가족을 변방지역에 보내어 관병의
노비로 삼는 것이다. 유배지는 주로 동북 지역과 신강 지역이었다.
 청나라 때 영고탑으로 유배온 명인들이 적지 않았다. 순치12년(1655년)에는 이과부급사관 팽장경, 일등자작
허이안은 도로곤의 명예회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형을 당하는데, 황제가 그들의 공을 감안하여 사
형을 면제하고 영고탑에 유배를 보냈다.
 강희제 때는 대명세의 남산집사건, 방효표의 진검기문사건이 발생하여 300~400명이 연루된다. 그들 중에는
황제의 심복인 강소 순무 장백형, 유명인사인 방포가 포함되어 있다. 강희제는 환갑연이 가까은 점을 고려하여 대명세만 사형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영고탑에 유배시킨다.
 이밖에도 청조통치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일어난, 삼번의 난, 강희 후기의 후계자 쟁탈, 옹정시기의 연갱요, 융과다사건 등에 연루된 사람들도 영고탑에 유배당했다.
 강희시대의 시인 정개(丁介)는 이런 시를 남겼다

 

南國佳人多塞北
中原名士半遼陽
남방의 미인은 북쪽 땅에 많이 왔고
중원의 명인들 반은 요양에 왔다네

 

 《研堂见闻杂记》기록을 보면 당시 영고탑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죄인들은 유배지로 가는 도중 호랑이나 늑대의 먹이가 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당지 야인들에게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유배지까지 살아서 도착하는 죄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향양보尚阳堡(개원)라는 또 다른 유배지가 있었는데 향양보는 거처할 집도 있고 사람이 살 수 있어 영고탑에 비하면 천당과도 같은 곳이었다. 동북의 유명한 유배지로는 심양(성경盛京), 요녕의 개원开原(향양보尚阳堡), 치치할의齐齐哈尔(卜魁)등이 있다.
 중국고대의 형벌에는 타(打), 살(杀), 유배(流放) 세 가지가 있는데 매질은 경형轻刑이고 죽이는 것은 극형이며 유배는 경형도 중형도 아닌 중간 형벌이다.
 유배형은 온 가족이 가는 경우가 많다. 화가 친척이나 마을 전체에 미칠 때도 없지 않다. 그리하여 유배인원은 보통  십여 명에서 백여 명에 이르기도 한다. 재산도 없고 권리도 박탈당한 유배자들은 (어린 자식들도 포함하여)압송하는 병정들의 노예가 된다. 도중에 도망이라도 할까 우려되어 오라로 묶인 채 이동한다.  명나라 선덕8년, 180명의 죄인이 동북으로 유배될 때 이동 중 길에서 객사한 사람이 3분의 2나 되며 살아서 유배지에 도착한 인원은 겨우 50명이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우배지에 당도했다고 하더라도 이 노예들은 당지 주인들에게 분배 되었다. 주인들은 우선 예쁜 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하였다. 남편이 반발이라도 하면 그부터 가차없이 죽여 버렸다. 일부 여자노예를 골라 기생집에 팔았고 일부 남정들을 골라서는 말과 교환했다. 최고의 대우라 해보았자 이른바 “관장官庄”에서 노역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런 자유도 없었다.

 영고탑에 유배된 吴兆骞는 자신의 글에서 “관장官庄사람들은 죄다 마른 삭정이처럼 여위어 뼈만 앙상했다.......일 년 내내 농사일을 하지 않으면 울타리를 엮고 석회를 굽고 석탄불을 지펴야 했으므로 잠시도 한가할 때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绝域纪略》의 기록을 보면 여자들은 추운 겨울에도 맨발에 홑옷을 걸치고 물을 길어야 했다고 한다.
 청나라 때 동북으로 유배된 죄인은 그 수가 무려 150만 명을 상회한다.
 일가족이 세세대대로 유배생활을 한다면 그 가족으로 놓고 보면 불행이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동북의 개발과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다. 

      
3. 영고대宁古台

 

 

 영고대는 청대 첫번째 영고탑 8기병八旗兵주둔지이며 첫번째로 되는 영고탑장군의 주둔지인 영고탑구성旧城과는 2리의 거리에 있다. 영고대가 있는 이 작은 산, 용두산은 330여년 전 유명한 시인 吴兆骞 등 유배문인들이 자신의 시 속에 써넣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병부상서兵部尚书를 지낸 유명인사인 장진언张缙彦은 이 곳에 유배하고 "영고대"라는 글을 지어 그의 저서(영고탑산수화《宁古塔山水记》)라는 문집에 수록했다. 여기서 유배생활을 했던 장진언은 글에서 "기이하고 이상한 산의 모양은 코 같기도 하고 입 같기도 하고 귀를 닮기도 했다. 가랑머리나 사람 모양 또는 새의 형상과도 흡사하다. 게다가 앞뒤로는 다른 어떤 산줄기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동쪽의 용두산은 영고대와는 불과 10여m 상거하고 있지만 칼로 자른 듯 두 쪽으로 갈라져 아무 연관도 없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하다.

 해랑강에 인접한 영고대는 천연적으로 20~30m 높이의 천애절벽으로 형성되어 매우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절벽이고 동북쪽은 완만한 비탈이어서 도보로 등산을 할 수 있다. 남쪽 벼랑 아래에는 한 줄기의 도랑이 있는데 옛날 군인들이 구축했던 참호처럼 보인다. 동북쪽 산 아래 지형은 울퉁불퉁한 몇 개의 흙더미들이 있는데 옛 토성의 흔적을 방불케 한다.  이 모든 것은 용두산이 명, 청대의 중요 군사거점(초소)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일찍이 금왕조金王朝가 아습하阿什河강변에 건국하기 전에 해랑하지역에는 우림달乌林达 등 부部의 여진인들이 생활했다. 우림달부는 금나라시대의 10대 여진부 중의 하나이다. 우림달부의 여진과 금조金朝황족인 완안부完颜部는 혼인관계가 있다. 금나라의 제4대 황제 세조완안옹世宗完颜雍의 황후인 소득昭德황후가 바로 우림달 씨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림달여진인들은 천여 년 전부터 이곳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림달부 외에도 협곡부夹谷部、영고탑씨宁古塔氏、영가씨宁佳氏 등 여진부족들도 누루하치의 통일이전부터 (17세기초) 모두 이곳에서 생활했던 여진족들이었다.

 16세기 이전부터 몇 갈래의 여진부족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영고대, 영고탑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영고탑장군부가 영안으로 천이한 뒤 이곳 주민들은 구성旧城을 구가旧街라 불렀다.
 영고탑이 자리했던 고성촌의 옛 성터는 장진언의 "석성石城"이라는 글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해랑강은 고대에 해라수孩懒水, 해란수海兰水 등으로 불렸다. 동북의 원주민인 mohe인들과 후세의 여진인들이 부르던 이름이다.

 孩懒水、海兰水는 비술나무라는 의미이다. 강변에 자생하는 수 많은 비술나무들에 의해 얻어진 이름이다. 해랑강의 상류와 중류는 장광재령의 심산 구역인데 고대 여진인들은 이 일대의 장광재령을 해란와집海兰窝集이라 불렀다. 여진어와 만족어에서 와집은 바로 삼림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비술나무가 많이 자란다. 1천년 전 우림달부와 금나라를 건립한 안출호수완안부按出虎水完颜部의 통혼으로 이 일대의 우림달 등 여진부는 금왕조의 건립에 참여하여 북중국통일대업에 공헌했다.
 해랑하하류의 사호촌沙虎村 역시 옛성터 자리이다. 금나라 제5대 황제에게 "소요순小尧舜"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가진 금세종완안옹金世宗完颜雍의 소덕황후우림달씨昭德皇后乌林答氏가 바로 사호沙虎에서 태어났다.

 흑룡강성 동부, 연해주의 넓은 지역은 동북여진족의 3대집단 중의 하나인 동해여진호이합와집부东海女真虎尔哈窝集部가 생활했던 지역이다. 해랑하 일대는 그 4대 부 중의 하나인 영고탑로이다. 17세기 초기 요동의 건주여진인의 수령 누르하치가 동북 각 지의 여진부를 통일하여 후금국을 건립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영고탑에 주둔시켰다. 1636년 영고탑주둔기지를 세웠다. 주둔군장령은 매륵장경梅勒章京,심양(성경)소속의 앙방장경昂拜章京이었으며 후금왕조의 북부지역을 관할했다. 17세기 30년대를 기점으로 짜르러시아군이 끊임없이 흑룡강유역을 침입해 영고탑은 국방전초기지로 부상했다.

 1653년 청정부는 동북지역를 두 부분으로 분리하고 영고탑을 앙방장경(만주어로 장군이라는 뜻. 정1품)을 설치하고 지금의 요녕성 서부, 동부, 북부, 바이칼호수 동쪽, 외흥안령 이남과 사할린도, 일본해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통괄하도록 했다.
 1662년 (강희원년)한족식으로 진수영고탑등처장군(镇守宁古塔等处将军)이라 개칭했다.

 

영고탑장군: 1. 吴巴海、2. 沙尔虎达、3. 巴海、4. 萨布素  

 

 

 

 

 张缙彦이 저술한 《宁古塔山水记》표지

 


4. 신성新城


 영고탑의 구성旧城은 지역이 협소하고 인구가 적은 데다가 유배살이하는 죄인들이 많아 도시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할 뿐만 아니라 지세가 낮아 수해가 잦다는 이유 때문에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결국 구성의 남쪽으로 50여리  상거한,  목단강(穆丹, 牡丹)에 새로운 성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이고 지면이 수면보다 높아 수재의 위험도 없으며 기후도 습윤했다.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는 고각라성古觉罗城이 있는데 이 성은 청황실의 애신각라씨족爱新觉罗氏族의 선조가 백두산 기슭으로 천이하기 전에 살던 곳이다. 서쪽으로는 멀지 않은 곳에 의란강依兰岗, 모란牡丹 등 옛 집락들이 산재해 있다. 이런 연유로 영고탑장군 파해巴海는 이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병정들을 보내 2년 동안에 걸쳐 세로운 성을 쌓도록 했다. 1666년(강희5년)영고탑장군오문衙门은 정식으로 신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영안시 경내이다.
 천이 후 구성旧城은 “구가旧街”라고 불렀다. 신성은 소나무와 흙을 다져 축조했다. 높이는 20척 남짓했으며 내성과 외성으로 분리했다. "영안현지"에 의하면 내성의 둘레는 585,00척이고 동, 서, 남쪽에 세 개의 문이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문은 得胜, 서문은 望阙, 남문은 迎薰이라고 한다. 내성에는 장군의 오서衙署가 있고 외성에는 동서대가东西大街가 있다.
 장군의 오문은 비록 흙벽돌에 초가이영이지만 위풍이 있었다. 내성의 북쪽에는 장군의 오서衙署가 자리하여 북문은 내지 않았다. 장군오서의 삼진문三进门에 들어서면 동서상방厢房이 있고 정방은 도통都统(将军)부이다. 대청은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내성에는 장군의 경호부대와 대문을 지키는 수비대가 주둔했다. 내성과 외성은 담벽으로 분리되었다. 외성 안에는 창고, 군영, 각 기旗의 좌령佐领들과 가족 그리고 주택이 있었다. 그밖에도 기인旗人의 수공업작업장과 군사시설이 있었다. 구가旧街에서 옮겨올 때 수 많은 유민들이  함께 이동했음으로 동서방향에 두 개의 성을 쌓고 그들을 안치했다. 기록에 의하면 한인汉人은 동쪽의 서문 밖에 거주했다고 한다. 삼번의 난(三藩之乱)이후 팔기병의 대부분이 남방으로 이동하자 성내는 텅텅 비었다. 이리하여 서성문西城门 밖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성내로 이주하여 살도록 했다.
  영고탑에는 인구가 증장하며 상업도 점차 발달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1694년의 饮铺、杂货铺의 탄생을 시작으로 훗날의 烧锅、皮铺、当铺、票号 등 상업과 무역활동이 나날이 활기를 띠디가 가경嘉庆연간에 이르러서는 10여 종에 달하는 상업항목으로 발전했다.  영고탑의 관리들은 "사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상업무역활동을 격려"했다. 
  1676년 영고탑에는 “용성서원龙城书院”이라는 만주학원满洲学院을 설립했다. 이 학원은 흑룡강에서 가장 이른 서원书院이다. 1723년에 이르러 좌우익만주관학左右翼满洲官学으로 개칭했다. 각 기旗마다 기인旗人자제 6명씩을 추천했으며 학도가 36명이었다. 서원과 관학에서는 모두 한만문화汉满文化를 가르쳤다.
  도로驿道개발도 사통팔달했다. 길림과 이어진 고역도古驿道와 의란依兰과 통하는 수로와 육로를 선후하여 닦았다. 영고탑에는 여러 곳에 역참驿站이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항구와 수로를 건설해 의란과 흑룡강연안의 각 지역을 연결시켰다.  
  유민의 증가로 인구는 날따라 늘어났고 성 주변에도 수 많은 촌락들이 생겨났다. 농민들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곡물, 갈대, 석탄, 숯을 관청에 공물로 납부했다.

      1846년(도광道光26년)영고탑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원래의 토목건축들과 오문은 모두 소각되고 말았다.
  흑룡강지역에서 한 도시의 역사가 340년이 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복규卜奎(齐齐哈尔)도 영고탑의 역사보다는 50년 뒤진다. 할빈시도 청말에 도치道台를 설치하고서야 비로소 발전한 도시이다. 아성, 의란도 그 역사가 백년이 채 안 된다.
 1904년, 근대에 이르러 동청철도东清铁路(中东路)가 개통되면서 장춘, 치치할, 할빈은 고속도로 발전한 반면 영고탑은 도리어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30년 대에는 도문--가목사철도가 개통되며 목단강시가 설립되먄서 영고탑은 상대적으로 침체에 빠져들었다.  
 1874년(동치同治13년)8월 21일 금광의 노동자인 공유재孔有才가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인솔하여 기의를 일으켜 영고탑성을 공격했다. 부통수副统帅 쌍수双寿는 성을 버리고 액목额穆으로 도망갔다. 기의군은 입성한 후 관청건물과 감옥, 부도통副都统의 저택 등을 소각했다.
 1900년(광서光绪26년) 8월12일 짜르군대가 영고탑성을 침입했다. 수비군과 의용군은 보름간 항전했지만 수적인 열세로 인해 20여 명의 청군清军과 의용군은 전원 장렬하게 희생했다. 8월 29일 러시아군대는 성안으로 진입했다. 영고탑부도통오문의 중요문서와 문물들을 약탈했고 서각西阁과 장군분묘를 파괴했다. 1950년대에 외서야 노획품들을 돌려받았다.
  1916년(민국5년)에 영안성 내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동로야묘东老爷庙에서 시작된 불길은 현청을 한입에 삼킨킨 뒤 남쪽의 강 연안까지 번져 강에 정박해 있던 배까지 불태워버렸다. 성 내의  庙宇、상가 및 민가의 대부분이 타버렸다. 그 번 화재에 성 내의 3분의 2가 소각되었다.

 

 

영고탑에서의 이동녕
  

 

5. 영고탑 인명소사전   


 1. 유배자流人
 
 方拱乾:1596-1667년


 시인. 애명: 책약策若. 자: 숙지肃之. 호: 단언坦庵 甦庵 등. 안휘성 동성桐城사람.
 명나라 숭정崇祯대의 진사进士. 순치16년(1659년)온 가족이 영고탑으로 유배.
 방씨 부자는 영고탑에서 시인 吴兆骞와 교분이 두터웠다.  늘 그와 더불어 천하를 논하고 시를 읊었다. 그들 사이에 주고 받은 시가집《质集》은 흑룡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인多人시집이며 문집《何陋居集》은 흑룡강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시집이다. 그의 아들 다섯은 모두 시인이다. 그들의 작품은 《其旋堂草》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흑룡강의 산천경개와 사회생활을 묘사한 최초의 시집 중의 하나이다.  方拱乾의 다른 저술로는 《绝域纪略》(일명《宁古塔志》)이 있는데 동북지방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순치18년(1661년)방씨부자는 정배살이에서 풀려나 남방으로 귀환한다. 정배살이를 함께 하던 시우诗友 18명은 영고대에서(용두산龙头山)방씨부자를 송별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모두들 기분이 한껏 격앙되었을 때 누군가 꿩 한 마리를 잡았는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方拱乾은 측은한 마음에 벼랑 가에서 그 꿩을 방생했다. 그로 인해 그 벼랑은 “放雉崖”로 불렸다. 남방으로 귀환한 方拱乾은 붓글씨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강희6년(1667년)가난과 병환으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장진언张缙彦:1599-1672년.

 

 시인. 자: 坦公,호: 外方子 등 하남성 신향新乡사람.
 명나라 숭정崇祯대의 진사. 병부상서. 청이 입관한 후 산동 우포정사右布政使에서 공부시랑工部右侍郎으로 승진. 순치16년 “煽惑人心”, “巧辩欺饰” 등의 죄명으로 영고탑으로 유배당했다. 강희4년(1665년)유배된 7명의 시인들과 더불어 영고탑에 흑룡강성 최초의 詩詞단체인 “칠자지회七子之会”를 설립했다. 신성으로 옮길 때 함께 이주했다. 张缙彦은 일생 중 수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그 중에 《宁古塔山水记》, 《域外集》 두 책은 흑룡강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밖에도《杜诗分类》,《怀旧诗集》,《菉居文集》,《依水园文集》,《归云轩稿》,《天下名山胜概记》 등 많은 저작들이 있다.

 대략 강희11년(1672년)병환으로 영안시의 신성에서 74살에 죽었다.
   
 吴兆骞:1631-1684년.

 

 저명한 시인. 자: 汉槎. 절강성 오강吴江사람.

 어려서부터 시를 짓고 읆었다. 청년시대에는 陈维崧, 彭师度와 더불어 당시 시단의 원로 吴伟业으로부터 “江左三凤凰”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순치16년 영고탑에 유배되었다. 앙방장경昂帮章京 파해巴海(후에는 장군으로 개칭)의 파격적인 배려로 가정교사로 채용되어 자식들을 가르쳤다. 아울러 张缙彦 등 사람들과 함께 “칠자지회七子之会”를 설립했다. 그는 영고탑에서 창작한 시작들을 정리해 《秋笳集》을 엮어 세상에 공개했다. 조정의 많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강희28년(1681년)7월. 정배살이에서 풀려나 9월에는 23년 간이나 지속된 영고탑과의 정배살이와 고별하고 온 가족이 남방으로 귀환했다. 북경에 돌아온 온 후 빈궁과 병환으로 고달픈 세월을 보내다가 강희23년(1684년)에 숨을 거두었다. 吴兆骞는 평생 믾은 저작을 남겼지만 대부분 유실되었다. 현존하는 것들로는 《归来草堂尺牍》,《秋笳集》두 책뿐이다. 영고탑에서 사는 동안 부인이 출산한 셋째아들 吴桭臣이 뒷날 《宁古塔纪略》을 저술해 흑룡강성지방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杨越:1622-1691년.

 

 시인. 자: 友声. 절강성 산양山阴사람.

 명나라 말기 강희원년(1662년)영고탑에 유배되었다. 杨越은 영고탑에서 사람들을 인솔하고 산에 들어가 채벌을 하여 집을 지었다. 중원에서 가지고 온 衣裘, 布帛, 丝絮 등 물건들을 진열하고 팔았다.  당지 사람들은 중원시장의 비단과 세포의복细布衣服을 마포麻布, 털가죽과 교환했다. 그는 또한 교육을 제창하고 만한자제满汉子弟들에게 글자를 배워주었다. 뿐만아니라 중원의 장례, 혼례 등 문화를 전달하는데도 공헌했다.
   
 杨宾:杨越의 아들. 1650-1720년.

 

 강희28년(1689년)

 만리 길을 걸어 영고탑으로 와서 양친부모님을 만나고 3개월 후 귀환했다. 강희30년.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떴다. 관례대로라면 유배죄인의 장례는 고향에서 치를 수 없었다. 杨宾은 몸에 수의를 입은 채 입경하여 형부와 병부 앞에 꿇어 엎드려  청원했다. 끝끝내 동생杨宝가 부모님의 영구를 고향으로 모셔와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 받은 대신 杨宾은 영고탑에 수개월 동안 남아 있어야만 했다.  이때 지은 글이  《柳边纪略》이다. 청나라 초기의 성경盛京, 영고탑宁古塔, 애휘瑷珲(훗날 흑룡강으로 개칭) 등 세 개의 장군관할지역의 자연과 사회현황들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2. 지방관驻防官
   
 额亦都:1562-1621.

 

 누르하치의 수하의 장군. 제1임 영고탑지방관. 성은 钮钴禄氏. 조상의 거주지 백두산. 19살에 누르하치를 따라 천하를 누비며 공을 세움. 명나라 만력38년(1610년)부대를 거느리고 동해와집부东海窝集部 영고탑 등 4로四路 (즉 영고탑)에 주둔했다. 천명天命6년(1621년)요양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0살이었다. 생전에 일등자작子爵 작위가 내려졌고 좌리오대신佐理五大臣반열에도 올랐다.
   
 吴巴海:?—1647.

 

 영고탑 지방관. 성: 瓜尔佳氏. 조상은 오라乌喇(현재의 길림시)에서 살았다. 누르하치 수하에서 명나라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좌령佐领을 제수 받았다. 1636년에는 부도통이 되고 남작에 봉해졌다. 훗날 본기本旗의 범인을 비호했다는 죄로 부보통직을 파면당하고 영고탑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영고탑에서 수년 동안 지냈다.

 

沙尔虎达:1598-1659.

 

 영고탑 앙방장경昂邦章京. 성: 瓜尔佳氏. 조상이 살던 곳은 흑룡강 중류 虎尔哈部이다. 어려서 아버지 桂勒를 따라 누르하치의 부하로 들어갔다. 30년간 많은 전공을 세워 순치4년 부도통에 임명되었고 순치9년(1652년)에는 영고탑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 앙방장경으로 개명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짜르러시아가 미친듯이 동북을 침략하던 비상시기였다. 그는 군민을 이끌고 침략자들과 맞서 싸워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순치14년(1657년) 스테판노프가 코사크군을 이끌고 상견우흑尚坚乌黑으로 달려들었으나 그에 의해 격멸되었다. 순치15년 7월 스테판노프일당 500여 명은 또다시 송화강 하구로 침입해 들어왔으나 전원 섬멸되었다. 두목 스테판노프는 전투 중에 사살되었다. 하바로프가 동북에 침입한지 8년 만에 청군이 이룩한 최초의 완벽한 승리였다.

 순치16년(1659년)영고탑에서 병사했다.
   
 巴海:?—1686.

 

 

 

 영고탑장군. 沙尔虎达의 맏아들. 순치16년(1659년)1등남작의 작위를 세습하고 부친을 이어 영고탑앙방장경으로 취임했다. 수 차례나 출전하여 러시아군대와 전투했다. 순치17년 부도통尼哈里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흑룡강하류 古法坛设伏(하바로프스크 북쪽)으로 급행군하여 침입한 러시아군을 순식간에 포위했다. 러시아군은 황망히 배를 타고 도망했지만 죽은 자가 50여 명에 이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많았다. 동시에 많은 군수물자도 노획했다.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古法坛大捷이다. 스테판노프군을 섬멸한 이후 두 번째로 되는 대첩이다.

 다음 해에는 古法坛전투에서 청군이 다섯 척의 전함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파해의 남작작위와 云骑尉직위를 파면당했다. 강희원년(1662년)영고탑 앙방장경을 진수영고탑등처장군으로 개칭하고 파해가 중임되었다. 강희3년 파해는 재차 군대를 이끌고 동정했다. 대설을 무릅쓰고 黑喇苏密(흑룡강하류. 현재의 러시아 아무르강 일대)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강희5년(1666년)파해는 신성으로 천이했다. 강희15년(1676년) 파해는 乌拉鸡陵(현재의 길림시)으로 이주하여 여전히 镇守宁古塔等处将军으로 재직했다.강희25년(1686년)파해는 몽골에서 도통으로 재임중 병사했다.

 영고탑장군으로 재직하는 동안 파해는 반러전투에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존중하고 유배자들을 배려했다. 吴兆骞를 가정교사로 임용하고 문객들을 청해 군정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그는 “칠자지회七子之会”의 창립과 활동을 지지했고 문인들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창작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덕분에 영고탑에서는 대량의 시와 문학작품들이 생산될 수 있었으며 문화의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이 시기는 흑룡강 문학사상 하나의 문예부흥시기로서 이는 파해의 공로와 무관하지 않다.    
 
 萨布素:1629-1701.

 

 영고탑부도통. 흑룡강장군. 영고탑 사람. 성: 傅察氏.
 파해의 수하 장군. 후에 영고탑부도통으로 승진. 강희23년(1683년)러시아군 일부가 雅克萨城을 출발하여 흑룡강하류로 침범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부대를 거느리고 출병하여 전원 소멸한 공을 인정받아 흑룡강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강희24년雅克萨城을 공격했다. 다음해(1686년)러시아군이 다시 雅克萨성을 차지하자 재차 성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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