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지방의 고대교통로
◎ 아래 글은 북경사회과학원역사소 우덕원, 윤균과 양씨의 저서<북경고대교통>을 근거로 三川先生이란 필명으로 어떤 지나 연구자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육로교통로만 발췌하여 번역해 보았습니다.
아래 글은 고대 북경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를 실제 전사를 들어서 자세히 분석한 것으로 생각되고, 고구려와 수나라 및 당나라간 일어난 전쟁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대로 번역하여 보았습니다. 대로 명칭분류와 옛 지명의 현재 지명 비정은 여러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지나 사가의 연구결과이므로 그대로 소개합니다. 오역이 있는 부분은 댓글로 교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 北京古代交通概说 作者:于德源 出处:历史地理 阅读:637 人次 powered by oldog studi o 北京古代交通概说 北京社会科学院历史所 于德源 尹钧科先生所著《北京古代交通》一书中,根据侯仁之先生的研究理论,指出古 代北京地区与外界的联系,存在着沿太行山东麓南北一线高地的南北通道,即"太行山东麓大道"
북경고대교통개설(북경사회과학원역사소 우덕원 윤균과 저<북경고대교통>(중략) 고대북경지구와 바깥지역의 연결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태행산 동쪽 기슭을 따라 남북으로 연결되는 일선고지대의 남북통도 즉 “태행산 동록대도”
;北京西北方向通向太行山以西及内蒙古草原的"居庸关大道" ;北京东北方向通向燕山腹地的"古北口大道";北京东北方向经燕山南麓或山海关 通向松辽平原的"燕山南麓或山海关大道"。
북경 서북방향에서 태행산 서쪽 및 내몽고 초원으로 통하는 “거용관대도”, 북경동북방향에서 연산의 중심으로 통하는 ‘고북구대도’, 북경동북방향으로 연산 남쪽기슭을 지나거나 또는 산해관을 통해 송료평원을 가는 ‘연산남록’ 또는 산해관대도’
笔者认为其说十分精辟,而北京地区与外界的其他交通路线实际上都是在这四大 干道的基础上衍生出的,兹结合史事分述如下。
필자는 그 말이 매우 정확하다고 여긴다. 북경지구와 바깥지역과의 기타 교통노선은 실제상 모두 이 네 개 대간을 기초로 갈라졌다. 역사적 사실과 결합된다.
一、秦汉至北朝时期的交通 公元前221年秦始皇最终灭山东诸国,建立了统一的封建政权以后,复于第二年( 前220年)在全国范围内广修驰道,"东穷燕、齐,南极吴、楚" 。
첫째, 진한에서 북조시기 교통은 서기전 221년 진시황이 최종적으로 산동제국을 멸하고, 통일 봉건정권을 세운 이후 이년째 되는 해(기원전 220년) 전국에 걸쳐 길을 넓히고 수리하였다. “동으로 연. 제, 남으로 오, 초를 통하였다.”
据史念海先生 的研究,这些驰道是以秦都咸阳为中心形成的向外辐射的交通网。其中一条就是 由咸阳东行,出函谷关(今河南灵宝县北,至三川郡(今河南洛阳市),然后东北经邺县(今河北临漳县西南)、邯郸(今河北邯郸市),再北经恒山郡(今河 北石家庄市),复东北至广阳郡蓟城(今北京)。
사념해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길은 진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교통망이다. 그 중 하나는 함양에서 동으로 가서 함곡관(현 하남 영보현 북, 삼천군(현 하남 낙양시)에 이름)을 나가서(역자 주 : 현재의 310번 공로와 일치한다.), 그 후 동북 업현(현 하북 임장현 서남), 한단(현, 하북 한단시)을 지나고, 다시 북으로 항산군(현 하북 석가장시)을 지나고, 또다시 동북 광양군 계성(현 북경)에 이른다.(역자 주 : 현재의 107번 공로와 일치한다.)
从广阳蓟城复东北,经无终(今天津蓟县)、令支(今河北迁安西)可达著名的碣石(今河北昌黎县境内) 。 《史记·秦始皇本纪》记载:"秦始皇三十二年(前215年),始皇之碣石……刻 碣石门。""秦二世皇帝元年(前209年),二世(即秦始皇之子,时即位,称二世 )东行郡县……到碣石,并海。"他们所经的就是这条交通路线。
광양 계성에서 다시 동북의 무종(현 천진 계현), 영지(현 하북 천안서)를 지나면 유명한 갈석(현 하북 창려현 경내)에 도달할 수 있다.(역자 주 : 현재의 102번 공로와 대체로 일치한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재되기를 : “진시황 32년(전 215년) 시황은 이 갈석에 ...갈석문을 새겼다” “진 이세황제 원년(전 209년), 이세(즉 진시황의 아들이 그때 즉위했는데 이세라 칭함)가 동쪽 군현을 가는데... 갈석과 바다에 도착하다” 그들이 지난 길은 이 길이다.
从北京通往太行山以西地区的通道前已说到"居庸关大道"。如唐武宗会昌五年( 845年)颁令毁灭佛教寺院、焚烧经籍,当时山西五台僧人大多逃亡幽州(治今北 京)。幽州卢龙节度使张仲武"乃封二刀付居庸(守官)曰:有游僧入境则斩之。
북경으로부터 태행산 서쪽지구로 가는 길은 이전부터 ‘거용관대도’라 불렀다. 당 무종 회창 5년(845년), 명을 내려 불교사원을 없애고, 경적을 불태웠다. 당시 산서 오대 승인들 대다수가 유주(치소 현 북경)로 도망갔다. 유주 노룡절도사 장중무는 이에 이도를 거용(수관)에 임명하면서 말하되: 떠돌이 승들이 경내에 들어오면 즉시 참하라고 하였다.
"由此可见居庸关是今北京通往山西地区的重要通道。不过,除了"居庸关大道" 之外,自北京 及河北地区通往山西的还有两条重要通道,就是河北的"井陉"和"飞狐口"。这两个关口都是太行山脉的比较宽敞的峡谷山口。"井陉"在今河北石家 庄市西北。
이로 미루어 볼 때 거용관은 현 북경에서 산서지구로 가는 중요 통도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용관대도’ 이외에, 북경 및 하북지구에서 산서로 가는 길은 두 개의 주요 통도가 더 있는데, 곧 하북의 ‘정경’과 ‘비호구’길이다. 이 두 개 관문구는 모두 태행산맥의 비교적 넓은 협곡산구이다. ‘정경’은 현 하북 석가장시 서북이다.(역자 주 : 현 307번 공로)
秦国灭亡,楚汉相争,刘邦建立西汉王朝之际,汉高祖刘邦三年(前 204年)十月,汉将韩信、张耳在平定河东(今山西地区)之后,东下井陉击赵( 都今河北邯郸),俘赵王歇 。由于这条大道十分重要,所以西汉在此设井陉县, 今其县名仍然存在不废。
진국이 멸망하고, 초한이 상쟁하여 유방이 서한 왕조를 건립하였을 때, 한고조 유방 3년(전 204년) 10월, 한나라 장수 한신, 장이가 하동(현 산서지구)을 평정한 후, 동쪽 경정으로 내려가 조나라(수도 현 하북 한단)를 공격하여, 조왕 헐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대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서한은 이 곳에 정경현을 설치하니 현재까지 그 현명이 그대로이다.
"飞狐口"在今河北涞源县北。西晋末年,并州刺史刘琨 在晋阳(今山西太原市南)屡为叛胡刘粲、石勒所败,建兴四年(316年)十二月 率余部自飞狐口进入幽州,与驻在蓟城的辽西鲜卑联合 。另外东汉初年,卢芳盘 踞高柳,与匈奴、乌桓相勾结,不断侵扰边地。建武十三年(37年)上谷太守王霸与将军杜茂“治飞狐道" ,并修亭障三百余里。可见"飞狐"早在西晋以前就是 一条与井陉同样重要的大道。
‘비호구’는 현재 하북 래원현 북쪽이다. 서진 말년, 병주자사 유곤은 진양(현 산서 태원시 남)에서 호의 반군 유찬, 석륵에게 패하였다. 건흥 4년(316년) 12월 잔병을 이끌고, 비호구에서 유주로 진입하여 계성에 주둔하고 있던 요서 선비와 연합하였다. 그 외 동한 초년, 노방반은 고류에 거하면서 흉노, 오환상구와 연합하여 변지를 자주 침입하였다. 건무 13년(37년) 상곡대수 왕태와 장군 두무는 ‘치비호도’와 정장 3백여리를 같이 수리하였는바, ‘비호’가 일찍이 서진이전에도 곧 정경과 더불어 중요한 대도임을 알 수 있다.
十六国时期自襄国(今河北邢台市)至蓟城(今北京)的交通大道即前述"太行山东麓大道"。建兴二年(314年)后赵石勒都于襄国,发兵奇袭驻在蓟城的晋幽州 牧王浚,其进军路线就是自襄国(今河北邢台市)出发,昼夜兼程,至柏人(今 河北内丘东北),渡易水,经范阳(今河北涿州市),晨至蓟城 。
16국시기 양국(현 하북 형태시)에서 계성(현 북경)에 이르는 교통대도는 즉 전술한 ‘태행산동록대도’이다. 건흥2년(314년) 후조 석륵이 양국에 도읍을 정하였다. 발병하여 계성에 주둔하고 있던 유주목사 왕준을 기습하였는 데, 그 진군노선은 양국(현 하북 형태시)에서 출발하여 주야로 길을 가서 백인(현 하북 내구 동북)에 도달하여 역수를 건너고, 범양(현 하북 탁주시)을 지나 새벽에 계성에 도착하였다.
此外,东汉初年,汉光武帝刘秀与部下王霸等受更始使者和蓟城豪强势力之逼, 自蓟城南逃,其所行路线是从蓟城至广阳城(今北京房山区广阳城村),然后西 南至卢奴(今河北定县),再东南至饶县(今河北饶阳东北),再西南渡滹沱河 至下曲阳(今河北晋县西北,复南至南宫(今河北南宫市西北),再东北至信都 (今河北冀县),得到当地豪强的支持,终于灭邯郸王郎 。
이외, 동한 초년에 한 광무제 유수는 부하 왕패등과 같이 처음 사자와 계성 유력세력의 핍박을 받아 계성에서 남쪽으로 도망하였는데, 그 행로는 계성에서 광양성(현 북경 방산구 광양성촌)에 이른 뒤, 남쪽 노노(현 하북 정현)에 이르고, 다시 동남 요현(현 하북 요양 동북)에 이르고, 다시 서남의 호타하를 건너 하곡양(현 하북 진현 서북, 다시 남쪽으로 남궁(현 하북 남궁시 서북)에 이르고, 다시 동북으로 신도(현 하북 기현)에 이르렀는바, 당시 지방 유력자의 지지를 얻어 종래에는 한단의 왕랑을 멸하였다.
这一时期自北京地区通向东北方向的路线,除古北口和山海关两线之外,还有卢龙塞一线。卢龙塞是燕山山脉的峡谷山口。东汉末年建安十二年(207年)曹操于 平定河北之后北征辽西三郡乌丸(即乌桓)。
이 시기(동한 광무제)에 북경지구에서 동북방향으로 가는 노선은 고북구와 산해관 두개 노선 이외에 노룡새 일선이 더 있다. 노룡새는 연산산맥 협곡산구이다. 동한말년 건안12년(207년) 조조는 하북을 평정한 후 북으로 요서3군 오환乌丸(즉 오환乌桓)을 정벌하였다.
《三国志·魏书·田畴传》记述说 :西汉时北平郡治所在平冈(今内蒙古宁城市西南),道出卢龙(今河北遵化北),达于柳城(今辽宁朝阳市)。自东汉初年以来已陷坏不通几二百年。曹操的 进军路线是从蓟城出发,至无终(今天津蓟县),向东北出卢龙塞(今河北遵化县冈至卢龙县一线),堑山堙谷五百里,经白檀(今河北滦平县北),历平冈(今内蒙古宁城市西南),东趋辽西乌丸驻地柳城(今辽宁朝阳市),在半途大败 乌丸于白狼(今辽宁建昌县西北) 。
<삼국지,위서,전주전>에 기술에는 : 서한시기 북평군치소는 평강(현 내몽고 영성시 서남)에 있다. 가는 길은 노룡(현 하북 존화 북쪽)을 나가서 류성(현 요녕 조양시)에 도착한다. 동한 초년 이래 무너지고 훼손되어 통행하지 아니한지 이미 이백년이 되었다. 조조의 진군노선은 계성에서 출발하여 무종(현 천진계성)에 도착하여 동북방향으로 노룡새(현 하북존화현강에서 노룡현에 이르는 일선), 산을 중단하고 계곡을 따라 오백리, 백단(현 하북 난평현북)을 지나고, 평강(현 내몽고 영성시 서남)을 지나, 동으로 요서 오환이 있는 류성(현 요녕 조양시)으로 추격해 가서 오환을 백랑(현 요녕 건창현 서북)에서 대파했다.
从田畴的叙述中,我们可以知道这条大道存在的历史十分久远,很可能早于"古北口大道"。今宁城附近有黑城子遗址,在那里曾发现大量汉代封泥,该处即西汉右北平郡城址。当时右北平郡与中原内地的 联系主要就是卢龙塞一线。
전주가 기술한 중에서 우리는 이 대도가 존재한 역사는 십분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고, ‘고북구대도’일 가능성이 크다. 현 영성부근에 있는 흑성자유지에서 일찍이 한 대의 봉니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바로 서한시의 우북평군성지일 것이다. 당시 우북평군과 중원 내륙 연계의 주요한 것은 곧 노룡새일선이다.
出卢龙塞还有一条南道,也可以抵达辽西。曹魏景初 二年(238年)司马懿受命平定辽东太守公孙渊,"遂进师,经孤竹(今河北卢龙 县),越碣石(今河北昌黎县北),抵达辽河。 "当年曹操平三郡乌丸时,军至 无终(今天津蓟县),正值天降大雨,大水漫溢,"傍海道不通" ,这才由田畴 为向导,出卢龙塞后从北道白檀、平冈、趋柳城(今辽宁朝阳)。
노룡새를 나가면 또다른 남도길이 있는데 또한 요서로 갈수 있다. 조조경초 이년(238년) 사마의는 명을 받아 요동태수 공손연을 평정하였는데, 군사를 이끌고 고죽(현 하북노룡현)을 지나, 갈석(현 하북 창려현북)을 넘어 요하에 도달하였다. “당년에 조조가 3군 오환을 평정시 군사가 무종(현 천진계현)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큰 비로 인해 홍수가 나서 ‘방해도’가 불통이 되었다. 이때에 전주가 길안내자가 되어 노룡새를 나온뒤 북도로부터 백단, 평강, 류성(현 요녕 조양)으로 나아갔다.
司马懿进军走的这条路线可能就是曹操当年的"傍海道"即南道。这条南道实际也就是后世的山海关大道。自辽西至今北京地区有三条大道。《资治通鉴·晋纪二十·穆帝永和 六年》记述说:永和六年(350年)二月前燕(都龙城,今辽宁朝阳市)主慕容儁 乘后赵内乱之机出兵伐后赵,分兵三路,令慕容霸率兵二万自东道出徒河(今辽 宁锦州市)、慕舆于自潟出蠮螉塞(今居庸关),自己率主力中军自中道出卢 龙塞。《晋书·慕容儁载记》中也记述说,燕王慕容儁率三军南伐,出自卢龙, 驻师于无终(今天津蓟县),复攻陷蓟城(今北京),斩后赵将军王他(一书佗 )。
사마의가 진군해간 길은 조조가 당년에 갔던 ‘방해도’ 즉 남도일 것이다. 이 남도길은 곧 후세의 산해관대도이다. 요서에서 현 북경지구에 이르는 길은 세 개 대도가 있다. <자치통감. 진기 20. 목제 영화 6년>에 기술되기를 : 영화6년(350년) 2월 전연(도읍 용성, 현 요녕 조양시)왕 모용준이 후조의 내란을 이용하여 병력을 세길로 나누어 모용패에게 병 2만을 이끌고 동도에서 나가 사하(현 요녕 금주시)로, 모여간은 서도에서 나가 의옹새?(현 거용관)로, 본인은 주력인 중군을 이끌고 중도에서 노룡새를 나갔다. <진서, 모용준 기재> 중에 또한 기술하기를, 연왕 모용준은 3만을 이끌고 남벌하였는데, 노룡에서 나와 무종(현 천진 계현)에 주둔하고, 다시 계성(현 북경)을 함락한 뒤 후조의 장군 왕타를 참하였다.
这三条大道,一条是前已述之的"居庸关大道",这需要从东部的今辽宁朝阳 北部出长城,自燕山北麓绕行到燕山西端,然后自居庸关而入。大概除了军事行 动需要,很少会有人选择这条路线。另两条路线,一是出徒河(今辽宁锦州市) ,一是出卢龙塞,并且以卢龙一线为主。 另外还有一条水路从今北京地区通往辽西,是东汉末年曹操消灭辽西三郡乌丸时 为运送粮草而开凿的。
이 세 개 대도, 하나는 앞에 기술한 ‘거용관대도’이다. 이 것은 동부의 현 요녕 조양 북부에서 장성을 나와 연산북록의 요행에서 연산 서단에 이르고, 그 후 거용관으로 들어온다. 대개 군사행동을 하는 필요이외에 사람들이 이길을 선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른 두 개 노선중, 하나는 사하(현 요녕 금주시)로 나가고, 다른 하나는 노룡새로 나가는데 노룡일선이 중요하다. 그 외 현 북경지구에서 요서로 통하는 다른 수로가 하나 있는데, 동한말년 조조가 요서 3군 오환을 멸할 때 양식과 마초를 운반하기 위해 개착한 것이다.
二、隋唐五代时期的交通 隋朝定都长安(今陕西西安市),自关中地区到太行山以东的今北京及河北地区 ,井陉大道仍是关键的枢纽。如隋仁寿四年(604年)七月,皇太子杨广弑父隋文 帝后篡位,即隋炀帝。杨广之弟汉王杨谅驻兵并州(治晋阳,今山西太原市南) 举兵讨伐。隋炀帝于是命令亲信李子雄驰往幽州(治蓟城,今北京)夺了隋幽州 总管窦抗的兵权,然后调发幽州兵马3万自井陉西讨汉王杨谅,与并州军相遇于井 陉抱犊山(今河北获鹿县西),大获全胜 。井陉的重要性可见而知。
둘째, 수당오대의 교통, 수나라는 장안(현 섬서 서안시)에 도읍을 정했다. 관중지구에서 태행산 이동, 현재의 북경 및 하북지구로 가는길은 정경대도가 여전히 주요한 중추이다. 수나라 인수 4년(604년) 7월 황태자 양광이 부친 수 문제를 시해하고 찬탈하니 즉 수 양제이다. 양광의 동생 한왕 양량은 병주(치소 진양, 현 산서 태원시 남)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거병하여 양제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수양제는 친히 신임하는 이자웅에게 명령하여 유주(치소 계성 현 북경)로 달려가게 하여, 수 유주총관 두항의 병권을 뺐았다. 그 후 유주 병마 3만을 징발하여 정경으로부터 서쪽으로 한왕 양량을 공격하였다. 병주군 대장과 정경 포독산(현 하북 ?록현 서)에서 조우하여 대승하였다. 정경의 중요성을 가히 알 수 있다.
另外,《隋书·炀帝纪上》记载:大业三年(607年)五月,征发河北10余郡的丁男凿太行山 ,达于并州(治晋阳,今山西太原市南),以通驰道。征发的是太行山以东的河 北丁男,要通的是太行山以西的并州,隋炀帝驰道明显是要横穿太行山,故称"凿 太行山",其地点大约也是在井陉,和前述东汉初年王霸"治飞狐道"是一个意思, 就是将原有的横穿太行山的井陉大道拓宽。
그 외, <수서, 양제기상>에 기재된 바, 대업3년(607년)5월, 하북 10여개 군의 장정을 징발하여 태행산을 뚫어, 병주(치소 진양, 현 산서 태원시 남)에 이르는 길을 닦았다. 징발한 것은 태행산 동쪽의 하북의 장정들이고, 개통하고자 한 것은 태행산 이서의 병주이다. 수양제의 치도는 명백하게 태행산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옛명칭은 “착태행산”이다. 그 지점은 대개 정경과 앞에서 말한 한초년 왕패의 “치비호도”와 같다. 곧 원래의 태행산을 가로지르는 정경대도를 넓히는 것이었다.
不过这样一来,隋炀帝改变了秦始皇 以来自西北至蓟城(今北京)的驰道,变得更为便捷。不过,沿太行山东麓的大 道始终是自蓟城(今北京)通往中原各地的重要交通路线,道路宽广、便畅。隋 朝末年,农民起义遍地而起,炀帝被迫逃往江都。
이뿐만 아니라, 수양제는 진시황 이래 서북에서 계성(현 북경)에 이르는 도로를 고쳐서 더욱 편리하고 빠른길을 만들었다. 태행산 동록대도를 따라 계성(현 북경)을 시작과 종점으로 하여 중원각지로 통하는 중요 교통노선, 도로를 넓히고 편리하게 하였다. 수조말년, 농민의거때 양제는 핍박을 받아 강도로 도망하였다.
大业十三年(617年)李密起义军围隋东都洛阳,隋涿郡(治蓟城,今北京)留守薛世雄奉命率蓟、幽精兵前去 解围。薛世雄率军3万人行至河间(治今河北河间市)遭到窦建德起义军的偷袭, 大败而归 。从蓟城到河间要经过涿县(今河北涿州市)、鄚县(今河北雄县南) 等地,正是太行山东麓一线。
대업 13년(617년)이밀 기의군이 수의 동도 낙양을 포위하였을때, 수의 탁군(치소 계성, 현 북경)유수 설세웅은 명을 받아 계, 유주 정병을 이끌고 포위를 해제시켰다. 설세웅은 3만 군인을 이끌고 하간(치소 현 하북 하간시)에서 두건덕의 기의군을 마주쳐 이를 대파하고 돌아갔다. 계성에서 하간에 이르자면 탁현(현 하북 탁주시), 막현(현 하북 웅현 남) 등지를 지나야 하는데, 바로 태행산 동록 일선이다.
隋代自蓟城(今北京)向辽西、辽东的交通路线仍 然主要是卢龙塞。隋炀帝为征辽东,在蓟城修建了行宫临朔宫,又在卢龙塞南端 近海的临渝关(今河北秦皇岛市西)修建了临渝宫。他自蓟地东行的路线就是经 无终(今天津蓟县)、卢龙(今河北卢龙县),然后东至临渝宫,出临渝关后东 抵辽水,渡辽水即可达辽东城(今辽宁辽阳市)。这条交通路线实际就是山海关 大道。
수대 계성(현 북경)에서 요서, 요동으로 가는 주요 교통노선은 여전히 노룡새이다. 수양제는 요동정벌을 위해, 계성에 임삭궁을 수축하였다. 또 노룡새 남단 근해의 임유관(현 하북 진황도시)에 임유궁을 수축하였다. 계성에서 동으로 가는 노선은 곧 무종(현 천진 계현), 노룡(현 하북 노룡현)을 지나고, 그 후 동으로 임유궁에 이르고, 임유관을 나가서 동쪽의 요수를 건너 요동성(현 요녕 요양시)에 도착한다. 이 교통노선은 곧 산해관대도이다.
另外,大业八年(612 年)隋炀帝颁大赦诏书中说:凡是役丁夫匠至蓟城 (今北京)服役者免二年赋税,至临渝关以西者免三年赋税,至柳城郡(今辽宁朝阳市)以西者免四年赋税,至辽西泸河镇(今辽宁锦州市)、怀远镇(今辽宁 辽阳市西北)以西者免五年赋税,至通定镇(今辽宁沈阳市北)以西者免赋税七 年。
그 외, 대업8년(612년) 수양제의 대사령에 말하기를, 무릇 계성(현 북경)까지에서 노역한 사람은 2년간 면세하고, 임유관이서까지는 3년간 면세, 류성군(현 요녕 조양)이서 까지는 4년간 면세, 요서 노하진(현 요녕 금주시), 회원진(현 요녕 요양시 서북)이서 까지는 5년간 면세, 통정진(현 요녕 심양시북)이서 노역자는 7년간 면세한다고 하였다.
由此可以确认当时自蓟城(今北京)向东的交通路线主要是蓟城(今北京) --临渝关--柳城--泸河、怀远镇--通定镇(今辽宁沈阳市北)。自蓟城经临渝关 出至柳城(今辽宁朝阳市)只能是出卢龙塞大道。
이로 말미암아 알 수 있는바, 당시 계성(현 북경)에서 동쪽으로 가는 주요교통로는 계성(현 북경)--임유관--류성--노하, 회원진--통정진(현 요녕 심양시 북)이다. 계성에서 임유관을 경유하여 류성(현 요녕 조양시)에 가는 길은 노룡새대도를 나가는 길이다.
唐代卢龙塞大道仍然是被利用的主要交通路线。唐太宗贞观十九年(645年)东征辽东时行经路线就是自洛阳出 发,至定州(今河北定县),复北至蓟城(今北京),誓师于蓟城南,东渡辽水 围辽东城(今辽宁辽阳市)。其班师回京的路线是,入临渝关,至幽州蓟城,复 西至并州(治晋阳,今山西太原市南),返京师长安(今陕西西安市)。
당나라때 노룡새대도는 여전히 주요 교통노선으로 이용되었다. 당태종 정관 19년(645년) 동으로 요동을 정벌할 때 지난 노선은, 낙양에서 출발하여 정주(현 하북 정현)에 도착하고, 다시 북으로 계성(현 북경)에 도착하여, 계성 남쪽에서 맹세를 하고, 동으로 요수를 건너 요동성(현 요녕 요양시)을 포위하였다.
그 돌아오는 길은 임유관으로 들어와 유주 계성에 도착하여, 다시 서쪽 병주(치소 진양, 현 산서 태원시남쪽)에 도착하고 경사인 장안(현 섬서 서안시)으로 돌아왔다.
在此前 ,贞观十八年(644年)十一月,命英国公李责力为辽东道行军总管,出柳城(今 辽宁朝阳市) 。将以上记载汇总起来分析,当时太宗出发时的行军路线应该是自洛阳循太行山东麓大道至定州,然后北至蓟城(今北京)。其自今北京至辽东的 路线和隋代时一样,都是东经临渝关(唐称渝关)出卢龙塞,然后至柳城,再东 渡辽水至辽东城(今辽宁辽阳市)。
그 이전, 정관18년(644년) 11월 영국공 이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류성(현 요녕 조양시)을 출발하였다. 위에 기재된 것을 종합하여 분석해 보면, 당시 태종이 출발한 행군노선은 당연히 낙양에서 태행산동록대도를 따라 정주에 도착하고 그 후 북쪽 계성(현 북경)에 도착하였다. 현 북경에서 요동에 이르는 노선과 수대의 노선은 같은 바, 모두 동으로 임유관(당나라때 유관으로 부름)을 지나서 노룡새를 나와서, 그 후 류성에 도착하고 다시 동으로 요수를 건너 요동성(현 요녕 요양시)에 도착하는 것이다.
班师的路线从辽东至蓟城的一段没有变化, 只是自蓟城不再循太行山东麓走定州,而是西出居庸关或飞狐口或井径而至并州 晋阳(今山西太原市南--最大的可能是出井径,因为出居庸关过于迂曲,而出飞 狐口又过于狭隘--然后自晋阳,返回长安。可见自古至今井陉等大道和卢龙塞大道始终是今北京地区与外界联系的重要交通路线。
요동에서 계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변화가 없다. 단지 계성에서 또다시 태행산동록을 따라 정주로 가지 않고, 서쪽으로 거용관 또는 비호구 또는 정경을 나와서 병주 진양(현 산서 태원시 남-최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정경으로 나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용관은 돌아가야 하고, 비호구 또한 협소한 길을 지나--진양에 도착하고, 장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예로부터 현 정경등 대도와 노룡새대도는 시종 현 북경지구와 다른 지구를 연결하는 중요 교통노선이었다.
另外,前述唐武宗会昌年间灭 佛,幽州节度使张仲武命居庸关守兵斩杀山西五台山来奔的逃亡僧人一事,也可 以证明这一点。 隋唐时期今北京地区的陆路交通没有什么改变,最重要的变化在于水路,即前已 叙述过的隋代开凿并被唐朝继承下来的南北大运河。南起余杭(今浙江杭州市) ,北至涿郡蓟城(今北京)的南北大运河,是隋文帝、炀帝两代在不同时期,出 于不同的目的,分段开凿的。
그 외, 전술한 당무종 회창년간에 멸불시, 유주절도사 장중무는 거용관 수병에게 명하여 산서 오대산에서 도망오는 승인을 참살하라고 명한 사실은 또한 이점을 증명한다. 수당시기에 현 북경지구의 육로교통은 별로 변한게 없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수로이다. 즉 앞에 기술한 수대에 개착되고 당조에 승계된 남북대운하이다. 남쪽 여항(현 절강 항주시)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탁군 계성(현 북경)에 이르는 남북대운하는 수문제, 양제 양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목적으로 구분되어 개착되었다.
最终在隋炀帝大业六年(610年),完成了各段的连接 贯通,成为南北通途。最初,隋文帝开皇四年(584)为了京师漕运便利,命令太子左庶子宇文恺开渠,自大兴城(即长安,今陕西西安市)东至潼关入黄河,名 广通渠,从此关中地区漕运畅通。开皇七年(587年)隋文帝为了统一中国,平灭江南陈朝,又沿春秋时邗沟旧渎开凿山阳渎,南起江都(今江苏扬州市),北至山阳(今江苏淮安市),从而沟通江、淮两大水系,次年(588年)发兵灭陈。开皇九年(589年)正月陈朝亡,南北统一。
양제 대업6년(610년) 최종적으로 각 단계를 연접하여 관통하는 것을 완성하여 남북통도를 만들었다. 수문제 개황4년(584년) 수도의 조운을 편리를 위해 태자 좌서자 우문?에게 대흥성(즉, 장안, 현 섬서 서안시)에서 동쪽 동관에 이르러 황하로 들어가는 수로를 개통하라고 처음으로 명령하였으니 곧 ‘광통거’이다.
이때부터 관중지구의 조운이 막힘없이 통하게 되었다. 개황7년(587년) 수문제는 통일중국을 위해 강남 진조를 멸하고, 또 춘추시의 간?구(옛 독)를 따라 산양독을 개착하니, 남쪽 강도(현 강소성 양주시)에서 시작하여 북쪽 산양(현 강소성 회안시)까지 구통강, 회 양대 수계를 통하게 하였고, 그해(588년) 진을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 개황9년(589년) 정월 진조를 패망시키고 남북을 통일하였다.
隋炀帝大业元年(605年)开凿通济渠,自东都洛阳西苑引谷、洛水达于黄河,再自板渚引黄河水南通淮河,从而南至 山阳,沟通洛水、黄河、汴水、淮河。从此,自大兴城可东至洛阳,再南至山阳 、江都。大业四年(608年)隋炀帝为发动辽东之役,收复辽东失地,又开凿北方 永济渠,利用沁水入白沟、清河和曹操开凿的平虏渠,北至涿郡蓟城(今北京)。大业六年(610年)隋炀帝又在长江以南自京口(今江苏镇江市)引江水南入钱 塘江,抵达余杭(今浙江杭州市)。
양제 대업원년(605년) ‘통제거’를 개착하였다. 동도 낙양 서원인곡, 낙수를 끌어들여 황화에 도달하고, 다시 판저에서 황화수를 끌어들여 남으로 회화를 통하고, 남으로 산양, 구에 이르러 낙수, 황하, 변수, 회화에 통하였다. 이곳에서 대흥성에서 동으로 낙양에 이르러 다시 산양, 강도에 이르렀다. 대업4년(608년) 수양제는 요동전쟁을 일으켜 요동실지를 수북하기 위해, 또다시 남북 ‘영제거’를 개착하였는바, 심수를 이용하여 백구로 들고, 청하와 조조가 개착한 ‘평노거’ 는 북으로 탁국 계성(현 북경)에 이르렀다. 대업6년(610년) 수양제는 또 장강 이남 동국(현 강소 진강시)에서 강물을 끌어들여 남으로 전당강으로 들어가, 여항(현 절강 항주시)에 도달하였다.
总结以上各节所述,我们可鎰出以下大致的认识:古代北京与东北部地区的联 系,主要是东北出古北口、东出卢龙塞和东南出渝关(又书榆关)3条交通路线。 其中以出渝关的山海关大道最为方便,可通车马,傍山临海。其次则是出卢龙塞 至松亭关即东经天津蓟县、河北遵化、宽城,北至平泉县的所谓卢龙塞北路,或 者是东经天津蓟县、河北玉田至卢龙县,然后北至松亭关的所谓卢龙塞南路(即 宋使所谓平州路)。
이상 각절에서 기술한 것을 총결하면, 다음과 같은 개략적인 인식을 도출할 수 있다. : 고대 북경과 동북지구의 연계는 주요한 것은 동북으로 나가는 ‘고북구’, 동으로 나가는 ‘노룡새’와 남으로 나가는 유관(한서에는 榆关) 3개의 교통노선이다. 그 중에서 유관으로 나가는 ‘산해관대도’가 가장 편리하였다. 수레와 말이 지날 수 있고, 산을 끼고 바다를 면하였다. 그 다음은 노룡새로 나가는 것이다. 송정관 즉 동으로 천진 계현, 하북 존화, 관성을 지나서 북으로 평천현에 도달하는 소위 ‘노룡새북로’, 혹자는 동으로 천진 계현, 하북 옥전을 지나 노룡현에 도달하고, 그 후에 북으로 정정관에 이르는 소위 ‘노룡새남로’(즉, 송나라 사신이 말한 평주로)를 들기도 한다.
如果不是为了直接到达内蒙古东部地区,古北口一线则不可 取。 古代北京与太行山以西的古代河东地区的联系则西北有居庸关大道,西南有飞狐 口和井陉可通。根据宋使的记载可知,居庸关大道最为宽阔,可通车马,其他山 口只能通人骑。也正因为如此,隋炀帝曾凿太行,以拓宽井陉的交通道路。
만약, 내몽고 동부지구로 직접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고북구 일선은 취할 수 없다. 고대 북경과 태행산 이서의 고대 하동지구의 연계는 즉 서북의 거용관대도, 서남의 비호구와 정경으로 통할 수 있다. 송나라 사신의 기재한 바에 의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용관대도는 가장 넓고 크며, 수레와 말이 지날 수 있고, 기타 산구는 단지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있을 뿐이다. 이와같기 때문에 양제는 일찍이 태행을 뚫고 정경을 개척하여 교통로를 만들었다.
不过 ,以上路线中仍以居庸关最为重要。隋代,大业三年(607年)东突厥首领启民可 汗率部民自其驻帐之地刈除杂草开道数千里东达蓟城(今北京),以供隋炀帝北 巡,其中必经过居庸关。所以说,居庸关也是北京通往西北草原地区的重要交通 路线。金朝末年蒙古成吉思汗数次发兵攻打金中都(今北京),都是先克居庸关 ,然后南下北京平原。金将胡沙虎也是建议死守居庸关,或移守南口(今北京昌 平区南口镇,古称下口,又书夏口)。更早的北魏末年六镇起义浪潮中,杜洛周 起义军也是自塞北东南攻破居庸关,进据蓟城(今北京)。
그러나, 이상 노선 중 여전히 거용관은 가장 중요하다. 수대 대업3년(607년) 동돌궐 수령 호민가한이 부족민을 이끌고 그 주거지구에서 잡초를 베고 도로를 내어 수천리 동쪽 계성(현 북경)에 도달하였는데, 양제가 북순하는데 제공하고, 그 중 필경 거용관을 지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거용관은 여전히 북경에서 서북초원으로 통하는 중요 교통노선이다. 금나라 말기 몽고의 징기스칸은 수차 발병하여 금나라 도성 중도(현 북경)를 공격하였는데, 모두 먼저 거용관을 점거하고 그 뒤 북경평원으로 남하하였다. 금나라 장수 호사호 또한 거용관을 사수하거나, 또는 남구{현, 북경 창평지구 남구진, 고칭 하구(下口), 한서에는 하구(夏口)}로 옮겨 지키라고 건의하였다. 이보다 일찍이 북위 말년 6진이 의거할 때 두락주의 군사는 장성 북에서 동남으로 거용관을 격파하고, 계성(현 북경)을 점거하였다.
太行山东麓大道自秦汉以来就是北京与中原内地联系的重要交通线。自北京南经 房山、涿州、邯郸、邢台、安阳可直至开封。自开封可以西至洛阳、西安等古代 所谓关中、关东之地。郭沫若先生在考证北京八宝山出土的东汉书佐秦君神道石 阙上的铭记时,曾指出当时自洛阳沿此官驿道抵达今北京只需10天的时间 。
태행산동록대도는 진한때부터 북경과 중원내륙을 연결하는 중요 교통선이다. 북경에서 남으로 방산, 탁주, 한단, 형태, 안양을 지나서 곧바로 개봉에 도착할 수 있다. 개봉에서 서쪽으로 낙양, 서안 등 고대의 소위 관중, 관동지구로 도달할 수 있다. 곽말약선생은, 북경팔보산에서 출토된 동한좌진군신도석에 명기된 것을 보면, 당시 낙양에서 이 관도를 따라 현 북경에 도착하는 데는 단지 10일이 걸렸다고 고증하였다.
除了陆路交通外,曹操所开凿的平虏渠、泉州渠、辽西新河及隋炀帝最终完成的 南北大运河,是比陆路交通更为重要的水路交通线,它们为北京城市的发展起到 了无可替代的重要作用。 至于元、明、清三代北京对外的交通路线,历代《一统志》和方志中都有详细记 载,兹不赘述。 -- 时光流走在永恒的河里 往事在烟云里独自苍老 信仰者和彼岸的灯 历史的胡同里 彼此守望 祷声如仪 孤标傲世偕谁隐,一样花开为底迟
육로교통외에 조조가 개착한 평노거, 천주거, 요서 신하 및 수양제가 최종 완성한 남북대운하는 육로교통에 비하여 더욱 중요한 수로 교통선이었다. 그것들은 북경성시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원, 명, 청 3대에 이르러 북경의 대외 교통노선은 역대 <일통지>와 방지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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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산책 (2005-11-20 11:22:29)
자료 찾고 번역하시느라 애 많이 쓰셨네요.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그런데 번역과는 무관하게 원 사료라 할 수 있는 대륙사서들에 문제가 많습니다.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면 강단성향의 연구가들(학자 포함)은 너무나 당연시하는 숱한 지명들이 대륙에서 동으로 '대폭' 옮겨져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어느 시기에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게 보입니다.
지금 위의 글에서도 인용된
<광양 계성에서 다시 동북의 무종(현 천진 계현), 영지(현 하북 천안서)를 지나면 유명한 갈석(현 하북 창려현 경내)에 도달할 수 있다.(역자 주 : 현재의 102번 공로와 대체로 일치한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재되기를 : “진시황 32년(전 215년) 시황은 이 갈석에 ...갈석문을 새겼다” “진 이세황제 원년(전 209년), 이세(즉 진시황의 아들이 그때 즉위했는데 이세라 칭함)가 동쪽 군현을 가는데... 갈석과 바다에 도착하다” 그들이 지난 길은 이 길이다.>
이런 구절들인데, 진의 시황이 통일하고 나서 오늘날 하북성의 동부까지 왔다거나, 그 아들 호해가 전국을 순력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지요. 이게 그들 역사조작의 머릿말처럼 등장하는 상투적 문구지요. 진이 통일한 강역이란 연, 조, 제의 영역 밖으로 미칠 수가 없을 텐데...전국연은 산서성 정도고, 조는 하북성 서남부 정도, 제는 산동성 서부 정도예요. 이들 세 나라의 영역 밖은 여전히 조선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전한 무제가 조선과 전쟁도 한 것이겠지요?
이런 조선이 망한 후 기원전 2말1초 정도(BC108?)에 연인 위만이 진에 망한 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위만조선을 세웠다는 것이지요. 그곳이 난하 일대 정도 아닐까 생각되거든요. 동으로 당겨도 창려 정도로 보이고...
그런데 진시황이든지 호해든지 누가 지금의 북경을 넘어오고 양자강 하구 남쪽 회계까지 가고 그럴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겁니다. 안 그래도 폭정으로 암살을 두려워 해서 수레를 다섯 대 씩 끌고 다녔다는데...그러다가 하남성 박랑사에서 후에 유방의 참모가 된 장량이 창해역사 여홍성과 모의하여 격살 시도하다 실패했지요. 대륙인들 보면 출신지명으로 별명을 곧잘 지어부르는데 출신지가 창해인지...발해만 맨 서안...조선유민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데...시황 아들도 마찬가지로 돌아다니지도 못한 걸 엄청나게 과장한 것으로 봅니다.
왜 이렇게 과장을 했을까? 후대 사가들이 사서를 변조하면서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했다던 진시황 때부터 이렇게 대단했다"는 식으로 기술을 하기 시작하면 후대에 지명들을 동으로 옮긴 것도 자연스럽게 인식될 수 있다는 계산에 나온 거지요. 진황도는 조작이고 갈석산 등도 옮겨진 지명으로 봅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위에서 교통로를 분석한 저 내용은 사서에 현재 실려있는 내용들을 분석한 것이니 겉보기로 크게 틀린 것이야 없을 겁니다. 문제는 사서들이 변조, 위작이 되어있어 탈이지요.
윗글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흔히 <섬서성, 산서성, 하남성 등등 그들의 수도들을 두고 있던 대륙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땅들도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웬일인지 하북성의 북경만 지나면 지금의 요동까지 마치 날아다닌 듯이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 요수 건입니다. 산책이 보기에, 4세기까지만 해도 요수가 북경 근방의 서북에서 동남으로 흐르는 강들 넷 중에 하나라는 겁니다. 이것을 수많은 연구가들이 지금의 요하로 보고 있으니 문제라는 겁니다.
바로 아래 '서진군국도'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문제지요. 이게 중세까지만 해도 지금의 하북성(만리장성과 산해관)을 벗어나면 하북성 印은 그들의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지금은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확대해 놓고 있다는 거지요. 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조작입니까.
그래서 4세기까지도 하북성에 있던 요수가 언제 지금의 요하로 바뀌었으냐 하는 시기를 파악하는데 크게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요수, 요하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 모아놓고 그와 연관되는 지명들도 모아놓고 같이 한 번 분석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면 분명히 "기록들에 단층이 지는 시기"가 드러나지 않을까 추정됩니다.
아래 서진군국도 지도 해설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만, 삼국사기 기록에 4세기초인 고구려 미천왕 때만 해도 하북성을 고구려가 다 차지하다시피 했잖아요. 요동, 현토, 낙랑, 대방을 쳐서 빼앗고 평주가 없어지다시피 했지요. 자사가 도망을 올 정도로....그런데 이것을 한일양국 학계의 통설로는 지금의 요동과 평안도, 황해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북성을 요동, 평안도, 황해도까지로 옮겨놓고 있는데 그 기준이라는 게 <요수와 평안도 낙랑>이거든요. 난하의 서에 있던 낙랑군을 평안도로 인식하고 그 서남에 있던 대방군을 황해도로 인식하니...
통설이 얼마나 어거지인지 요즘은 현토군을 사람도 안사는 개마고원에 가져다 두고 있을 정도예요.
고대사산책 (2005-11-20 11:57:53)
(以+東) 두 자가 印자 한 자로 바뀌네요. 프로그램에 문제 있음.
지명을 동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는 사례 중에 산책이 밝힌 것을 들어보면 모용씨 연의 수도 龍城을 들 수 있지요. 이것은 하북성의 북 예맥고지의 지명이예요. 난하 이서에 있던 낙랑군에서 비교적 가까운(낙랑이 금성을 몇 번이나 쳐들어온 기록이 사기에 있고) , 아마도 천진 북방 정도 아닌가 생각되거든요. 북경과도 가깝고...신라 석씨집단은 예인인데 이 용성이 신라 석탈해의 출신지로 나오잖아요. 그래서 용성은 초기신라 수도 금성과 같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선도성모 이름 분석한 것 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직필 못하고 암호화하여 삼국유사에 다 들어있어요. 김부식이 송에 사신으로 가다가 우신관에서 머물 때 선도성모 상을 보았다고 했는데 바로 그곳이 '금성=용성=매소성' 근방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신 가다 머문 숙소니 북경 근방이겠지요. 그 길을 燕山道라 하는지 뭐라는지 모르겠지만...그런데 이 용성을 지금의 요서지역 조양에다 갖다두고 있지요. 말도 안되는 얘기지요.
만약에 이게 맞다면 신라가 지금의 요서에 있고 그 동쪽 경계가 단단대령인데 그 너머 고구려가 있었다는 식인데...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는 강이 없어요. 太白山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니....말이 전혀 안되지요. 그런 신라와 고구려의 남에는 낙랑군이 있엇다? 아무 데도 둘 데가 없어요. .
이상한 게 고려의 사서들은 하나같이 대륙사를 절사하거나 알아보기 어렵게 숨겼고, 그 반면에 대륙사서들은 지명들을 대폭 동으로 옮겨놓아 두 나라 사서들이 대체로 아귀가 맞는 것처럼 되어있다는 것...여기에 모종의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고대사산책 (2005-11-20 12:51:29)
양측 사서들의 이러한 이상한 기술태도를 예로 들어보면
1. [후한서]나 [삼국지]의 예전을 보면 낙랑군 25현 중에 영동7현을 '포기했다', '고구려에 속했다'고 하여 간접화해놓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한 술 더 떠 '漢人之女 雉姬'로 의인화되어 있어요. 사실은 전한과 고구려가 전쟁을 하여 고구려가 빼앗은 땅인데...
2. [삼국지] 한전에는 '韓濊彊盛', '辰韓八國'.'二郡遂滅韓' 등으로 나와있는 초기신라가 삼국사기에는 '북명인(석탈해)'이 예왕인을 바쳤다 하여 박씨신라가 濊를 흡수한 것을 역시 은유적으로 기술해 두었고...낙랑과 직접 충돌을 많이 하고 있고, 대방도 등장하고...예인과 관련된 내용은 석씨로 분식하여 기술해두고...사기나 유사는 전부 숨겨두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기술하게 된 사정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조작의 실체를 확실히 밝힐 수 있게 될 겁니다.
3. 초기신라와 고구려가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북명인'이 고구려사(북명인 괴유)와 신라사(예왕인을 바친 북명인)에 동시에 등장하고 '태백산'이 양쪽에 각각 두 번씩이나 등장해요.
4. 고구려 주몽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을 보면 말갈, 비류수, 비류국(다물도),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 북옥저 등이 있고, 유리기에 등장하는 이름으로는 선비, 국내(위나암성), 기산, 부여, 예맥, 한의 요서대윤이란 직책도 나오고, 양맥, 고구려현 등의 이름들이 있고...대무신기에는 비류수, 북명, 赤谷(이게 赤峰 아닌지?), 갈사수, 압록곡, 북명산, 개마국, 구다국, 옥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낙랑왕 최리, 20년기에 낙랑을 쳐서 편입하는데 7년 후에 후한의 유수군이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쳐서 낙랑을 도로 탈환해갔고, 이 경우도 고구려가 낙랑을 쳐서 빼앗았으므로 후한 광무는 고구려를 친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유수군이 낙랑을 쳤다고 간접화해 놓았고...이때 살수 이남이 한의 땅이 되었다 하였으니...살수는 난하의 서쪽 지류이거나 지금의 천진으로 흘러드는 강 중에서 제일 동쪽 강의 지류로서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강일 것이고...
지금 여기 대충 열거한 초기 고구려의 이름들은 전부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지요(주로 하북성 동부 낙랑군 주변). 비류수 같은 경우도 난하의 상류의 지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기에 또 압록곡이란 이름도 등장하여 지금의 난하가 압록수가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하고....
이 정도 되니 얼마 후 모본기에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요동이란 지명들이 대거 戰場名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지명들은 초기고구려가 하북성 동부 정도 있어야 말이 되는 지명들 아닙니까. 사정이 이렇게 돼 있는데 아직도 초기고구려가 지금의 요동반도 압록강 중류 북쪽쯤에 있었고 수세기를 힘도 제대로 못썼다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학설이라고도 할 수 없는 허황한 주장이 버젓이 통설로 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대사산책 (2005-11-20 13:45:43)
대륙사서 기술태도 중에 문제가 되는 사례를 또 들어보면
조조의 오환정벌이나 사마의의 공손연 토벌을 들 수 있는데, 오환은 하북성의 북 예맥고지의 서쪽 정도 돼요. 이게 연도가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하북성의 북 금 내몽골 예맥고지에는 신라가 있다가 경초중(238~9년 정도)에 대방과 낙랑에 망했다고 [삼국지] 한전에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오환이 그보다 동쪽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조조가 오환 추장인가 누군가를 지금의 조양에서 죽였다? 이 조양이 모용씨 수도 용성을 가리킨다면 초기신라 근방 즉 천진 북방 정도까지 추격하여 죽였다는 뜻이예요.
공손씨가 度/康/淵 3대에 걸쳐 후한말 조위초에 요동을 근거로 위의 요동태수도 하고 그러다가 거기서 燕王을 자칭하면서 독립하려고 하자 사마의가 친 거거든요. 그게 서기 237년이예요. 그리고 나서 바로 낙랑, 대방 두 군의 군사를 동원하여 초기신라를 친 것이 [삼국지] 한전의 '二郡遂滅韓'이란 기사예요. 이게 조위 景初中이라 했으니 서기 238~239년이예요. 그리고는 240년대 중반에 하북성 동부 난하의 동편에 있던 고구려를 친 것이 관구검이 동천왕을 친 겁니다. 이게 245년이지요.
전쟁을 한 시기와, 세 세력(공손씨 燕國, 초기신라, 고구려)을 공격한 순서 즉 중원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친 흐름이 그대로 일치하잖아요. 그런데 조위의 대방군과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냐? 이건 산책이 이미 다 밝혀두었지요. 3세기 조위의 대방군은 하북성 중남부, 낙랑군은 그에 인접한 하북성 동부 난하이서, 요동군은 북경과 천진 정도....이 요동군은 어째 보면 형식적인 것 같기도 해요. ...237년에 공손연이 망하면서 폐지되고 초기신라를 공격은 대방과 낙랑 두 군만 참가한 건지....
조조와 사마의의 원정을 동으로 대폭 연장한 것과 꼭 마찬가지 사례를 그 선대에서 찾아보면 전국시대에 제의 환공이 산융과 고죽을 정벌했다는 기사를 들 수 있는데 지금 이것을 하북성 동부 난하이동으로까지 보고 있는 설들이 많아요. 이런 것이 동으로 연장한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하는데...
산융은 하북성의 북 예맥을 가리키고...이때 山이 바로 후대의 燕山이라는 의미로 봅니다. ...하북성 일대에서 산지는 북의 내몽골 연산밖에 없지요. 이들이 남으로 아마도 북경, 천진 방향으로 뻗어왔을 때 위협을 느껴 원정을 하지 않았나 짐작되는데, 이때 고죽도 쳤다는 등 그러지요. 孤竹은 북경 정도로 봐요. 이 역시 원래 고조선땅이고...이 고죽성이 竹軍城(사기 지리지 帶方州), 竹覃城(유사 북대방조), 모용씨의 宿軍城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모용씨가 근거한 곳이 초기신라의 강역이므로('용성=금성'으로 보일 정도로), 하북성의 북부 정도거든요. 이런 환공이 하북성의 동부 요서지방까지 원정을 왔다 하니...보통 뻥이 아니지요. 북대방이든 남대방이든 대방은 하북성을 벗어날 수 없고요, 북대방은 [삼국지]에 공손강이 3초에 설치한 대방군을 가리키는데 이게 공손연이 연국이라 한 곳이고 위에서 산책이 북경과 천진 사이라 한 곳이예요.
예를 들어 조조나 환공이 지금의 요하 바로 서쪽 요서까지 원정을 왔다면 그 나라 자체가 남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다른 나라가 가만 두었겠습니까...나라가 비었을 때 잡아 먹어버리지....
고대사산책 (2005-11-20 13:49:23)
초기신라와 고구려가 단단대령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있었기 때문에 대무신 20년기에 고구려가 낙랑군을 쳐 흡수하자 낙랑인 5천이 바로 이웃한 초기신라로 망명한 것이 삼국사기 신라 유리 14년기예요. 초기신라와 고구려는 낙랑과 인접해 있었으니까요.
sumer (2005-11-20 22:41:08)
존경하는 고대사산책님의 장시간에 걸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오랜세월 지나의 제후국으로 자칭하면서 지낸 기간이 너무 길고, 우리 조상의 역사를 함께 잃어버린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 과거를 찾아보려고 하니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어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요양, 요주의 지명이 현 산서성 좌권현에서 동쪽 요녕성으로 옮겨졌다는 좌권현의 기록을 보면, 지나에서 변방을 정복할 때 주민이동, 행정구역 및 지명변경이 수시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좌권현의 기록과 신당서, 한서 지리지의 기록을 볼 때 요수 또한 이동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1. 신당서의 기록.(列传 第一百四十五 东夷)
高丽,本扶馀别种也。地东跨海距新罗,南亦跨海距百济,西北度辽水与营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谓长安城,汉乐浪郡也,去京师五千里而赢,随山屈缭为郛,南涯浿水,王筑宫其左。又有国内城、汉城,号别都。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고구려, 본래 부여의 일파임. 지역 동쪽은 바다를 걸치고 신라와, 남쪽 또한 바다를 걸쳐서 백제가 있고, 서북은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하고, 북에는 말갈이 있다. 그 임금은 평양성에 있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한의 낙랑군이다. 경사에서 5천리 남짓하다. 산을 따라서 굽이져 성곽을 쌓았다. 남쪽 언덕은 패수와 닿았다. 왕궁은 그 왼쪽에 있다. 또한 국내성, 한성이라 부르는 별도의 도성이 있다. 강은 대요, 소요가 있다. 대요는 말갈 서남산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난다. 소요는 요산 서쪽에서 출발하여 또한 남쪽으로 흐르고, 새외로 흘러 나가는 양수가 있는데 서쪽으로 흐르다가 소요와 합한다.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출발하는데 그 색이 오리머리 같아서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을 흘러 염난수와 합하여 서남쪽의 안시에 도달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平壤)은 압록의 동남에 있다.
2. 한서(漢書) 권 28하, 지리지 제8하( 卷二十八下 地理志 第八下)
玄菟郡,武帝元封四年开。高句骊,莽曰下句骊。属幽州。户四万五千六。口二十二万一千八百四十五。县三:高句骊,辽山,辽水所出,西南至辽队入大辽水。又有南苏水,西北经塞外。上殷台,莽曰下殷。西盖马。马訾水西北入盐难水,西南至西安平入海,过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현토군, 무제 원봉 4년 개설. 고구려(망은 하구려라 함). 유주에 속함. 4만 56호, 인구 22만 1천 8맥 45명. 현 3개, 고구려, 요산(요수는 이곳에서 출발하여, 서남의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는 서북에서 새외 밖을 지난다. 상은태(망은 하은이라 함). 서개마가 있다. 마자수는 서북쪽에서 염난수(鹽難水)에 들어와 서남 쪽 서안평(지금의 대련시)에 이르러 바다로 든다. 두 개 군을 지나 이천 일백리를 흘러간다.
3. 좌권현 소개 홈페이지
左权县古称阳,战国时期先属韩,后属赵. 当然还有不少传说性的记述,如《元丰九域志》云:“辽阳城乃颛顼之子祝融所建也。”《辽县志》还认为春秋古战场箕在今左权县东南的箕山。
좌권현의 고칭은 요양. 전국시기에는 처음 한韩에 속하다가 뒤에 조赵에 속함. 많은 전설적 성격의 이야기가<원풍구감지>에 실려있는바:“요양성은 전욱의 아들 축융이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요현지>에는 “춘추시의 옛 전장터인 기箕가 현 좌권현 동남의 기산에 있다.”고 하였다.
北魏时期,由于少数民族政权更迭,胡汉译言讹化“”为“辽”。孝昌二年(526年)复置为辽山县,北齐废。隋开皇十年(590年)复置为辽山县。辽山,为今左权县东北部山地的统称,俗称了则山、人头山。十六年,在辽山县置辽州,下辖辽山、交漳、东山3县。其中的交漳县是从辽山县分置,县治所在今左权县的交漳村,因地处清漳东源和清漳西源交汇处,故名。大业初,废辽州并罢交漳县。
북위시기, 소수민족정권으로 자주 바뀜, 호胡를 한역음화하면 요遼?, 요辽가 된다. 효창2년(526년) 요산현을 다시 두었다. 북제때 폐함, 수개황 10년(590년) 다시 요산현을 둠, 요산, 좌권현 동북부 산지를 통칭하여 요측산, 인두산으로 부른데서 기임함, 16년, 요산현에 요주를 둠. 그 아래 요산, 교장, 동산 3현을 관할, 그 중 교장현은 요산현을 나눈 것임. 현 치소는 현 좌권현 교장촌, 그 곳에 청장 동원과 청장 서원이 교차하기에 이름지어짐. 대업초, 요주를 폐하고 교장현도 철폐함
唐武德三年(620年),复置辽州,治所在乐平县。这年,辽山县城因附近枯河暴涨而被冲毁,遂移建至今左权县城处。六年,辽州治所迁至辽山县。八年,因与李世民克辽东城新置辽州(今辽宁辽阳市)重名,遂改辽州为箕州,以境内有箕山而得名。先天元年(712年),为避李隆基讳,改箕州为仪州,以当地夷仪岭而得名。中和三年(883年),因辽东的辽州已废,才复名辽州。
당 무덕3년(620년), 다시 요주를 둠, 치소 낙평현, 이해에, 요산현성 부근 고하가 폭우로 넘쳐 훼손됨으로 현좌권현성터로 옮김. 6년, 요주치소를 요산현으로 옮김, 8년, 이세민이 요동 신성을 함락하고 요주를 설치(현 요녕 요양시). 이름이 중복되자, 요주를 기주로 고침. 경내의 기산이 있어 얻은 이름임. 선천원년(712년) 기주를 의주로 고침. 그 곳에 있는 이의령에서 얻음 이름임. 중화3년 (883년) 요동의 요주를 폐하자 다시 요주로 고침.
金天会六年(1128年),又因与东京道辽州(今辽宁新民县)重名,改为南辽州。天德三年(1151年),东京道辽州废,方复名辽州。明初辽山县废入辽州,辽州辖榆社、和顺二县,直至清末。
금 천회6년(1128년), 동경도 요주(현 요녕 신민현)와 이름 중복되어 남요주로 개명. 천덕3년(1151년) 동경도 요주를 폐함, 다시 요주로 고침. 명초 요산현을 폐하여 요주에 편입. 요주 관할에 유사, 화순 두 개 현을 두고 청말까지 이름.
1912年,山西省裁府州,改辽州为辽县。1942年,八路军副总参谋长左权在辽县十字岭壮烈殉国,为此改辽县为左权县。1912년, 요주를 요현으로, 1942년 8로군 부총참모장 좌권이 요현 십자령에서 순국한 것을 기념하여 요현을 좌권현으로 개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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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그런데 위 좌권현의 홈페이지 기록은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당초 좌권현의 이름이 요양이었고, 요산현이 있었다. 좌권현 동북부 산지를 통칭하여 요측산으로 불렀고, 요산현은 요측산의 이름에서 비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정복하여 신성을 요양으로 고치면서 이름이 중복되자 요주를 기주로 고쳤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 요주라는 명칭은 최고 변방이란 뜻의 사실상 일반명사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료遼의 글자 뜻 자체가 멀 료자입니다. 우리가 삼수 갑산, 인제 원통을 간다고 할 때, 삼수갑산, 인제 원통은 오지중의 오지를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 한서 지리지의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고, 요수가 요산에서 나온다.”(高句骊,辽山,辽水所出)는 기록은 요수가 현 산서성 좌권현에서 출발하는 영정하를 가리킨 것으로 보입니다.
신당서에서는 고구려의 강으로 대요, 소요가 있고, 대요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발원하고, 소요는 요산의 서쪽에서 발원한다. 남쪽으로 흐른다.(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고 하여 한서 지리지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요수가 두 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요는 요산의 서쪽에서 발원한다고 하여 한서지리지의 요산과 같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추측되는 것은,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여 이제 요주가 변방이 아닌 내지가 되자 요양이란 명칭과 요주라는 이름을 최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강이름도 옮기는데 새로 옮긴 곳의 강은 대료로, 기존의 료수는 소료로 불렀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따라서, 신당서의 대료는 현 요하, 소료는 현 영정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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