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회화(송)
人物畵
1) 西蜀人物畵
당나라 말기에 전란을 파하려 희종을 따라 서촉으로 옮겨간 화가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하나의 화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이 중국 회화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의 특징은 아주 事實的(寫眞)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은 전래되지 않는다. 흔히 묘실 벽화의 의장대에서 인물화의 특징들을 볼 수 있다.
귀족인 풍채와 우아한 모습을 한 인물화는 南唐의 顧閎(굉)中, 周文秬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촉은 종교가 성행하였던 지역이다. 이로서 道釋의 壁畵가 유행하였다. 그 중에도 창조적인 道釋畵를 그린 인물로 관휴(貫休) 석각(石恪(삼갈각))이 유명하다.
一. 관휴 (832-912)
절강성 출신의 승려로서 詩書畵에 모두 능하다. 전해 오는 말로서 그는 성격이 아주 강직하고, 고집이 세며, 세상도 미친듯이 살았다고 한다.
대표작은 16 나한도 이다. 다양한 양상의 나한도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의 진적이라기보다는 후대에 모사한 그림이라고 한다. 그 중 일본의 왕실 소장 나한도가 원본에 제일 가깝다. 얼굴들은 기괴하고, 찌들어져 있으며, 고통스런 표정을 하고 있다. 당시의 폐불 정책으로 탄압받던 불교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당의 인물화의 특징이 귀족적이고, 우아한 모습이라면, 이 그림은 많이 일탈된 그림이다. 이것은 허위적인 귀족적 자세가 아니고, 내면의 진실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같이 표현주의적 기법의 그림은 중국 미술사에서 주류는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전통으로 하나의 맥을 잇고 있다.
관휴의 나한도는 세필로 윤곽선을 그린 형식의 그림이 아니고, 발묵 산수화에서 유래한 발묵의 기법으로 그렸다.(狂逸) 이런 형식의 그림은 모본으로 원본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어렵다.
二, 석각(石恪)
생졸이 미상이다. 오대 - 송초의 화가로 관휴 계통의 그림을 그렸다
석각은 촉의 유명한 도석화가인 張南本에게 배웠다.
* 唐朝名畵錄에 의하면 이들은 逸品화가로 꼽는다. 일품적 화법이란 주로 발묵적 기법을 사용하는 화법을 말한다. 예로서 물이나 불은 형상은 없지만 常理는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形似보다는 심중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형상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마음의 의도에 따라서 형상을 상상하여 그린다. 물과 불은 일정한 형상이 없으므로 常形없이 常理를 드러내는데 좋은 소재가 된다.
2) 南唐人物畵
남당의 인물화는 도석화는 거의 없고 귀족들의 유락생활을 주로 그렸다. 남당은 당이 망하자 그 유민 왕족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이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탓에 귀족들은 염세적이고, 향락에 빠져서 퇴폐적인 생활에 젖어 있었다.
남다의 인물화는 도석화 대신에 귀족의 인물화와 隱士, 高賢, 高士 등을 그렸다.
남당 인물화의 대표적 작품은 고굉중의 ‘한희재 야연도’이다.
一. 顧閎中
남당의 후주 李煜(이욱) 시대의 화원화가이다. 고굉중의 일생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대표작인 ‘한희재 야연도’가 유명하다.
남당의 왕 이욱이 정승인 한희재의 사생활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그의 사생활을 그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주문거와 같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송대 초상화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두루마리 양식으로 다섯 장면이 그려져 있다. 매 장면마다 한희재가 등장함으로, 이 그림은 이야기 형식(서사구조)을 띄고 있다.
세밀한 선과, 화려한 색채를 사용함으로, 당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송의 귀족 초상화로 연결이 되는 그림이다.
二, 周文秬
고굉중과 동시대 인이다. 궁락도가 있다. 사녀화에 능하다.
주방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三, 王齊瀚
남당 후주 시대의 화가이다. 도석인물화, 고사생활도에 능하다.
대표작은 勘書圖이다. 감서도의 도사 뒷 편에 산수화 3폭 병풍이 놓여 있다. 당시의 산수화양식을 엿볼 수 있다. 삼원법이 나타나 있다.
四, 기타화가
1) 조암(趙巖)
생몰년대 미상으로, 후량의 태조(907-911)의 부마도위이다.
대표작--八達遊春圖, 귀족의 유락생활을 보여준다. 화법이 정세하고, 풍려, 전아하여 당-송 지간의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완고(阮고)
대표작 --한苑女仙圖(낙관은 없다.) *한원-선인들의 전설상의 정원이다.
* 五代, 宋의 人物畵
중국 회화사에서 당 이전은 인물화가 최 우선이었다. 五代이래로 산수와 화조화가 유행하고, 인물화는 전문 장인들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한다. 이로서, 오대, 송의 인물화가 당에 미치치 못하였다고 하였다. (近不及古)
송대의 사회상이 文治에 흐르고 庶族地主와 市井 平民的 審美 意識이 변화함으로 미술사에서도 양식적인 변화가 나타난다.(近異族古)
당 이전의 인물화는 극단적으로 공리적이고, 이상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하였다. 즉 규범사회의 도덕적 행위를 위주로 그렸다. 오대와 송대에 이르면 각 계층의 실제 생활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왕실, 귀족, 문인사대부의 유락 생활과 평민들의 세속적인 생활 정경을 그렸다.
오대 시대의 도석 벽화는 인물화의 유명한 제재 중의 하나이었다. 특히 서촉과 하서회랑 지역에는 사원의 벽화룰 많이 그렸다. 일시적으로 불교의 탄압이 있었지만 송 왕실에 불교에 호의적이었으므로, 大相國寺를 지어서 화가들에게 대규모의 벽화를 그리게 함으로 도석 벽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도석화 양식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당의 전통을 따르고, 엄중격식화된 양식을 따랐다. 그러나 당대의 그림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종 불교가 발전함으로 자신의 정신적이고, 영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기법에서 완전히 벗어 났다. 기괴하고, 간솔하고, 은일적인 풍모를 그렸다. 따라서 점차 세속 생활화와 가까워지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왕실인물, 귀족, 공신들의 활동을 그린 것은 대체로 당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近不及古’라는 평을 들었다. 궁중인물화는 특히 남당(당의 귀족 세력이 집중하여 있었다.)은 문인사대부의 생활을 정조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문치적 시대의 정경을 표현한 것이다.
市井의 평민 생활을 그린 풍속화가 북송 후기와 남송 초기에 나타났다. 기본적으로는 시대가 평화롭다는 정치선전적인 그림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귀족들의 장원 생활을 주로 그리다보니 농민의 생활 모습을 표현한 것이 일반적인 양식이었다. 그러나 송대가 되면 상업이 발달하여 도시 생활이 주요 생활 모습이 되었다. 왕의 통치 기간이 태평성세라는 선전적 그림은 자연히 그 대상이 도시민의 생활이 되었다.
사원 벽화의 도석 인물화는 오도자 그림 양식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線描로 粉本(초벌그림=밑그림)을 그리듯이 그렸다. 이공린과 무종원의 그림이 이 양식을 본 받았다.
그 외에도 주방 양식의 ‘기라인물’도 그렸다.
벽화는 옆 면을 따라서 길게 이야기 형식으로 그렸다. 이 양식이 소폭의 권축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남송 후기가 되면 선종 불교의 영향으로 선화 양식의 감필, 발묵과, 그림자처럼 그리는 방식이 대 유행을 하였다. 말하자면 ‘得意忘象’의 종교적 체험을 표현한 것이지만, 일반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대는 기본적으로 산수화와 화조화가 중국화의 주류를 이룬 시기이다.
3) 北宋人物畵
북송의 인물화는 궁중화가들이 주로 그렸고, 오도자 격식(선묘로)으로 많이 그렸다.
宋의 건국 초기에는 불교를 숭상하여 불교를 국가에서 많이 지원하였다. 송의 통치자는 자신의 위치를 굳게 하기 위해서 회화를 정치-종교의 선전용으로 많이 활용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원에 종교용 벽화를 많이 그렸다.
건국 초기에는 高益, 高文進이 유명하다.
一, 고익
도석화를 잘 그렸고, 태종때에 화원 대소로서 칙명으로 상국사 벽화를 제작하였다.
二, 고무진 (생졸미상)
아버지가 서촉의 도석화가이다. 도석화를 잘 그렸다. 상국사 벽화를 그렸다.
三, 武宗元(?-1050)
송의 통치자는 道敎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특히 태종, 眞宗, 徽宗 3대에 )
오도자 방식의 그림을 그리면서, 특히 도석화에 솜씨가 뛰어났다. 그러나 벽화가 점차 卷軸畵로 바뀌는 경향이 나타났다. 권축화를 남겼다.
대형벽화를 그렸다. (玉靑召應宮 벽화)
朝元仙仗圖 -- 白描로 그렸고, 색채는 사용하지 않았다. 옷주름은 긴 線條로 처리하였다.
4) 北宋 後期-南宋 初期
북송 후기에 이르면 산수화와 화조화가 발달하는 대신에 인물도석화는 조금 쇠퇴한다.
이공린은 오도자의 화풍에 조금의 변화를 주었다. 벽화에서 卷軸으로 바뀌면서 인물화도 문인적 분위기에 맞게 전아하고, 평담의 필묵 형식을 취하였다. 도석화도 예전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 띈다. 道에 가치를 두는 그림 양식을 선호하였다.
일반 서민들의 희노애락이 담긴 생활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가 나타나는 것도 이 시대의 하나의 특징이다. 송대 이전에는 그림에서 이상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송대에는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린 것이다.
一, 이공린(1049-1106)
하위 관료직 생활을 하면서 여기 저기로 옮겨 다녔다. 서화에 깊이 빠져서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면서 살았다. 나중에는 오른 손의 마비가 왔다.
말그림을 잘 그렸다. 당의 한간의 기법으로 그렸다. 前人의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그리지 않고, 자신의 기법을 개발하였으며,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 이공린을 두고 수묵 백묘 양식을 완성한 화가로 말한다.
문인들이 특히 이런 그림을 좋아하였다. 권축 백묘는 원래 벽화를 그릴 때 밑그림으로 그린 것이었는데, 나중에 독립하여 하나의 그림 양식으로 卷軸畵가 되었다. (원래는 布에 그림을 그린 후에 벽에 옮겨서 벽화를 완성하였다.) 朝元仙仗圖는 이런 양식으로 그린 것이다. 왕유의 영향이 나타나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백묘법에 의한 그림은 형태와 정신을 결합하는 형식으로 나아갔다.
이로서 宋代의 화가들이 숙달된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形似보다는 常理에 무게를 두는 그림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공린의 그림은 전문화가가 그린 전통 채색화와 일격의 수묵화에 대한 반동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대의 전문화가들이 이 양식을 많이 따라 그렸다. 문인화가들이 그리기에는 어려운 그림이다.
말그림은 唐代에 최고조에 달했다. 이공린은 당대의 말그림 전통을 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말이 영웅적 기상이 흐르는 힘찬 말인 반면에 이공린의 말은 전아하고 문인적 기질이 베여있다.
이공린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당대의 웅혼한 상무적 기질과는 다르다. 문인사대부의 정조가 있다.
대표작은 五馬도, 조원선장도, 臨韋匽放牧圖, 八十七仙女圖가 있다.
二, 喬仲常
생몰년대가 미상이다. 북송 말기 휘종 시기에 활동한 화가이다. 왕유, 이공린 화법을 이었다.
대표작으로 後赤壁賦圖로서 산수인물화이다. 여러 화면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따라서 同一人이 그림에 반복하여 등장한다. 전해오는 적벽부도 중에는 제일 오래 된 것이라고 한다.
백묘로 그렸고, 색채는 사용하지 않았다. 용필은 아주 간결하고, 비백적 건필을 사용하였다. 이공린의 화풍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화가라고 한다. 이후에 원대의 문인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
호족들이 누린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 풍물을 그린 그림이다.
5) 南宋 後期이 인물화
남쪽으로 밀려내려간 송은 사대부의 생활에 변화가 나타나서 관휴적인 禪畵가 유행하였다.
선종의 교리를 드러내고, 유희적 요소가 가미된 그림이 남송조에 유행하였다. 대표적 화가는 양해와 법상(묵계)이었다.
一, 梁楷(양해)
영종 (1201-1204) 때 화원 待소이다. 술을 마시고, 자유를 만끽면서 삶을 미친듯이 살았다. 시대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었다.
도석 인물화를 잘 그렸고, 화조, 산수화도 잘 그렸다. 이공린의 백묘 기법을 익혔다. 그림은 간결하고, 조금 조잡해보이기도 한다. 감필법, 발묵법 등을 사용하였다.
그의 그림은 이공린의 영향으로 정묘한 부분도 있고, 화원화가 李唐의 영향으로 원체풍의 그림도 보인다.
더 나아가서 발묵법으로 모호한 양태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寫意法)
二, 法常(牧谿 1207-1281)
양해의 화법을 이어받아 선화에 이름을 날렸다. 文同의 영향도 받았다. 蜀 사람이다. 몽고가 침입하자 (1231) 항주로 피난하였다. 불승이 되어서 그곳에서 살았다.
인물화에 뛰어 났고, 용호, 화조, 산수에 능하였다.
양해, 관휴적 선화풍과 문인화풍과,, 이공린적 요소마저 갖추었다.
6) 기타 인물화
一. 절함도 (작가 미상)
한나라 때 실제로 일어났던 古史를 그린 것이다. (일종의 고사인물도이다.)
한 成帝 때 왕의 뒤에 웅크리고 서있는 사람은 간신 장우이다. 충신 주운은 간신 장우를 사형에 처하라고 끊임없이 요구를 하였다. 는 내용이다. 다분히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림의 구성이나, 기법, 정원의 풍경(아마 궁중의 정원인 것 같다.) 등 양식이 팔달유춘도를 닮았다. 인물화 그림에서 배경을 실외로 하여 그린 것은 유럽보다 빠르다.
二, 조길(북송의 휘종)
휘종이 신하들에게 거문고를 들려주는 내용을 자신이 그린 일종의 자화상이다
간결한 배경, 명확한 묘사 등이 염입본, 장훤, 주방의 영향을 보여준다.
인물들이 우아하고, 고귀한 품격을 갖추도록 표현하였다. 귀족적인 문화를 보여준다.
중국의 인물화
회화는 線, 面, 色으로 이루어 진다., 회화사적으로 보면 선으로 표현한 것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고대의 인물화는 대부분이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의 목적이 형태를 아름답게 하여 완상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 내용의 전달을 위한 ‘문자적 목적’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예 : 고사인물도)
의미의 전달을 좀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선의 사용법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국 회화사(특히 인물화의)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관점에서 고개지를 제대로 된 순수 회화를 남긴 최초의 화가로 꼽는다.
불교가 들어와서 ‘도석화’가 발달하면서 인도의 평면화된 색면 회화를 도입하였다. 따라서 인물화가 큰 발전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염립본은 선묘에다 화려한 색을 가하므로 線과 色을 결합시킨 인물화를 그렸다. 선과 색이라 두 요소가 인물화에 도입되면서 인물화가 두 방향으로 흘러가는 발전의 단계가 나타난다. 즉 선묘로만 그리는 인물화와 선묘에 색을 도입하여 화려하게 그리는 인물화의 두 방향이 나타났다.
당나라 때의 오도자는 인물화의 대가이다. 그가 그린 그림을 白描라 하여 線만 사용하면서도 회화적 표현을 능숙하게 하여 중국 회화사에 크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선만으로도 운동감과 절주감을 강조함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정감을 표현하였다. 그의 묘법은 철선처럼 단일한 선을 그으므로 鐵線描라 하고, 초서의 기법으로 그린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붓질을 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의 그림은 먹만으로도 표현의 효과가 거의 완벽하게 나타남으로 색채를 더하면 오히려 표현에 방해가 되었다.
채색도 인도의 회화(불교 회화에서 색면을 단일하게 채색하여 평면으로 보이도록)에서 변화를 꾀하여 음영을 주어 입체감을 나타내었다.
중국의 회화는 線描가 중심이다. 선묘는 벽화의 밑그림으로 그린 粉本에서 발전하여, 채색을 하지 않고 선만으로 표현하는 白描로 발전하였다. 백묘를 본격적으로 그린 화가가 고개지와 오도자이다. 따라서 오도자의 그림을 백묘가 아닌 白畫라고 말한다. 백묘가 분본적인 요소가 강하다면 백화는 회화적 요소가 강한 畵格을 갖춘 본격적인 그림으로 취급한다. 이후 옅은 선염을 가하기도 하였다.
고개지-오도자로 이어지는 이 계열의 그림은 이공린이 계승하였다.
임물화의 한 흐름은 선묘에다 채색을 가하는 표현 방법이다. 염립본-장훤과 주방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궁중의 생활을 소재로 함으로 채색이 화려해지고, 완상적이고 장식적인 효능이 강한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고사 인물도 같이 계도적인 기능도 물론 가지고 있다.)
불교가 도입되면서 ‘도석화’가 많이 그려졌다. 일반적으로 인물화는 세밀하고, 꼼꼼하게 그렸다. 그러나 도석화 중에는 붓질을 거칠게 하고, 과감한 생략과 간결한 표현의 인물화가 나타났다. 왕유의 유마힐에서 관휴-석각으로 이어지는 계보이다. 남송 때의 양해가 대표적인 화가이다. 대담한 필치로 거칠게 붓질을 하여 대상과 닮지는 않지만 내용의 전달을 강렬하게 하였다. 이런 류의 그림을 ‘減筆畵’라고, 화가들을 粗派 화가라고 불렀다. 이런 류의 그림은 이공린의 선묘와는 반대되는 양식의 그림이다
양해나 목계는 채색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먹만으로 면을 표현하는 수묵화 계열의 선묘로 그렸다. 자유분방하고, 거친 용필과 바른 속도의 필력으로 그려서, 그의 개성미를 표현하였다. (양해의 그림 중에 세밀하게 그린 것도 있다. 목계(法常)가 그의 기법을 따랐다.
빠른 붓질로 거칠게 그리는 인물화는 남송 마하파의 하규에게도 나타났다. 이후 청초의 四僧畵家에게도 나타나고, 양주팔괴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계열의 인물화도 중국 회화사에서 한 흐름을 형성한다.
7) 풍속화
송의 崇文抑武 정책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인 부를 누리게 되었다. 시장 경제가 발달하면서 서민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따라서 서민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풍속화가 발달하였다.
중국에서는 서민들의 생활이나 유락을 표현하는 전통이 이어져 왔으나, 당대에 귀족문화가 발달하면서 주춤하였다. 생활도도 귀족의 생활이 중심 소재가 되었다.
송대에는 다시 서민들의 생활 모습이 그림의 소재가 되므로 풍속화가 성행하였다. 풍속화가 극성기를 이룬 시기는 북송 말기-남송 초기이다. 북송의 汴京(오늘의 개봉으로 북송의 수도였다.)와 남송의 臨安(오늘의 항주, 남송의 수도)였다. 이곳에서 풍속화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一, 張擇端의 ‘淸明上河圖’
장택단의 개인 기록은 거의 전해오는 것이 없다. 휘종 시대에 화원화가 이었다.
특히 界畵에 능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청명상하도가 있다. 淸明은 초봄을 가르키기도 하고, 태평성세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비단 바탕에 옅은 채색을 한 두루마리 형 그림이다. (卷軸畵) 변경시민들의 일상을 다룬 그림으로서, 도시의 풍경이 파로나마처럼 펼쳐지고,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의 모습이 아주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長卷 형식에 조감도식 시선으로 그렸고, 투시법으로 표현하였다. 工細筆畵法으로 그렸다.
청명상하도는 비단 바탕에 옅은 채색을한 두루마리 양식의 그림이다.내용은 북송의 수도 변량(오늘의 개봉)의 시민들의 일상 생활을 담고 있다.
전체 그림에는 인물이 약 559여 명이 담겨 있다. 선박, 교량, 성곽, 가옥, 상점 등 수많은 정경들이 담겨 있다. 두루마리 그림은 主線을 강으로 삼아 전개해가는 양식이다. 감상자의 당시의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주선을 따라 가면서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분잡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교외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면 그 시대의 모습이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강의 선박과 뱃사람들의 활기찬 모습, 강을 넘어가는 홍교를 시나 성내로 들어서면 변화한 시가지가 펼쳐진다. 시가지에는 白貨를 파는 상가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술집과 찻집, 약품점, 수레를 수리하는 집, 칼 등 철물을 파고 있는 상점, 행각 승려도 보인다. 유유히 지나가는 선비와 작은 가마를 타고 가는 부녀자의 모습도 보인다. 열심히 손님을 부르고 있는 상가에 고용된 사람을 보면 끈끈한 삶의 일면이 피부에 와 닿는다.
배가 정박해 있는 강변에도 삶의 활기가 넘쳐난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서 살아 있는 도시의 모습을 볼뿐더러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宋史 등 여러 문헌 기록에도 청상상하도에서 보여주는 정경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그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명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단순히 계절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고, 태평성대를 상징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통치자가 자신의 통치를 선전하기 위해서 그린 그림이 아닐까 라고 한다.
어쨌든 이 그림은 당시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값진 그림이다. 한편으로는 사실성을 무시하는 중국 회화에서 송대에는 사실주의 그림이 유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청말-민국 시대가 되면 중국 회화에 대한 반성으로 서양식 사실주의적 표현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때 당송 회화를 예로 많이 들고 있다.
二, 갑구반차도(閘口盤車圖) -- 傳韋賢)
이 그림은 당시에 국가가 운영하든 밀방아간을 그린 그림이다.(물레방아이다.)
그림의 양식은 청명상하도와 같다. 시민들이 일상생활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나타내고 있다.
三, 蘇漢臣
남송시대 화원화가로서, 도석인물, 특히 어린이 그림을 잘 그렸다. 채색을 진하게 하여 그림이 선명하다. 특히 어린이들이 놀고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당시의 풍습에 七夕에 이런 그림을 사는 것이 성행 하였다.
四, 朱銳 --盤車圖, 溪山行旅圖
五, 閻次平 -- 牧牛圖
六, 王居正 -- 紡車圖
七, 李嵩 -- 생졸년대가 미상인 화가이다. 길거리의 생활상을 그렸다. 기예인들의 기예장면,
서민들이 행상 모습 등을 그렸다.
八, 李唐 --- 북송 말기 ~ 남송초기에 활동한 화가이다.
역사화는 인물화를 나타내는 하나의 양식이다. 진, 한의 전통을 이어받아 ‘成敎化’와 ‘助
人物‘의 선전용으로 그렸다.
이당은 남송 정부의 굴욕적인 외교 정책에 크게 실망하여 ‘고사 인물도’를 더 많이 그렸
다고 한다.
후대의 화가들이 이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九, 馬和之의 詩經圖
남송 중기(1131-1161)에 활동한 화가라고 한다. 과거 출신 관료 사대부이다.
채색을 한 그림을 그렸으므로 화원화가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도석인물, 산수, 화조 모두에 능하다. 대표적인 그림인 시경도는 그의 작품 중에 8-90% 를 차지한다고 한다. 詩經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역사화의 범주에 넣기도 하나 일반 역사화와는 차이가 있다.
기타 인물, 역사화
9) 山水畵槪述
唐代의 회화를 요약하면 화려하고, 깔끔한 표현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물화와 청록 산수화에서 더 뚜렷하였다. 筆線의 변화가 적고, 선명하다. 색채도 변화가 적다.(청록산수) 唐代의 기법으로는 원근, 부피감, 질감을 표현해내기가 어렵다.
당 후기로 가면서 당대의 특징들에 변화가 나타난다. 섬세하고 가늘은 線描로 깔끔한 인상을 주었던 회화가 破墨과 潑墨과 峻法을 도입하면서 水墨山水畵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五代나 宋代의 화가들이 탐색한 것은 회화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색채를 회화의 부수적인 요소로 배제한 것도 회화를 하나의 통일체로 이루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당나라 때는 개개의 사물을 하나, 하나 조합하는 형식이라면, 송대의 회화는 화면 전체가 하나의 그림을 구성하는 통일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먼 곳은 희미하게 표현하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유대감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중간을 감추는 연기와 안개를 사용하였다. 화면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원근법의 방법으로 三遠法을 사용하였다. 이제는 화면 전체가 하나의 풍경으로 통일이 되었다.
이때는 筆墨이 산수화 기법에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用筆에서도 서예의 용필과는 차이가 나는 峻法이 발명되었다.
一, 형호(荊浩-870?-940?, 855?-915?)
唐末에 태행산 홍곡에 은거하여 살았다. 대표작으로는 광려도(匡慮圖)가 있다. 여산을 그린 것으로 高遠法과 平遠法을 모두 사용하였다.
한폭에 전경을 담아내는 형식을 취하였다. 세부는 꼼꼼하게 묘사하였다. 全景을 화폭에 담는 양식으로 두루마리(卷軸)을 이용하였다.
구도는 밑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방법으로 전개하면서 아래 부분은 세밀하게 묘사하고, 위쪽은 멀고, 높은 산을 웅장하게 그렸다. 구륵, 준법, 선염의 세 요소를 모두 구사하였다.
평원과 고원의 멀고 높은 산의 층차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線描를 하지 않고 중간 부분에 구름이나 안개로 감추어버리는 방법을 이용하여 화면의 통일감을 유지하였다.
형호는 선묘(오도자)와 筆墨(정용)을 모두 사용하였다. 평원의 묘사로 세밀한 樹石圖 양식을, 고원의 산은 雲中山頂을 그렸다.
사람은 적게 하고, 배경인 산수를 크게 하므로, 초기 산수화가 인물의 배경의 역할을 한 반면에 산수가 주가 되고 인물이 산수에 종속되는 양식의 산수화로 독립시켰다.
그가 쓴 ‘筆法記’에서 그림의 사실적 묘사를 강조하고 있다.
형호는 북방 山水畵派의 뿌리가 되었다. 그의 제자인 관동, 이성, 범관은 북송의 3대 산수화가로 불린다.
대표작으로 광려도가 있다.
山水畵論
北宋 산수화의 특징은 산을 강조하는 것이다. 主山이 화면의 가운데에 우뚝 솟아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산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낮은 산들이 주산을 옹호하듯이 배치하는 것이 기본 구조이다. 주산은 마치 유아독존적 존재로 보이게 하여 왕권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산수화를 ‘大山山水’라고 하고, 북송 산수화의 특징으로 꼽는다.
동양 회화에서 산수에 대한 접근은 감성적인 것이 기본이었고, 기본 바탕을 통하여 철학적 해석을 하였다. 산수는 인간의 정서를 일으키는 그 무엇이었다. 바라보기를 하거나, 머물러서 살고 싶은 정감적인 것이었지, 삶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서 분석하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중국인의 독특한 서정성에 儒의 美觀과 老莊의 自然主義 사상이 보태져서 主情的 개념의 미의식과 자연주의적 성향의 미술이 유행할 수 있었다. 즉 人間의 감정을 자연에 이입시키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자연의 인격화, 인격의 자연화가 일어났다.
山水 자체는 하나의 형상을 갖춘 物이지만 物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神明의 상태를 지향하는, 즉 영혼이랄 수 있는 그 무엇이 合一되어 있다는 자연관을 가졌다. 山水는 하나의 형이하학적 ‘器’로서 우주의 자연 법리와 인생의 當爲原則이 담겼다. 따라서 인격의 수양과 道의 수련장이 되었다.
위진 시대의 현학 사상은 노장사상을 끌어들였고, 중국 회화이 전통을 이루던 인물화에서 산수화로 바뀌었다. 도연명이 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전원시를 높이 평가함으로 점차 산수화가 중국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산수화에는 위진 시대의 혼란함을 피하여 은거하여 살았던 사대부의 은일 사상이 도입되었다.
山川은 물질이 아닌 영적 세계로서 賢者는 산천을 통하여 道에 다다른다는 개념을 형성하였다. 즉 산이라는 물질 세계를 통하여 道라는 정신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확립하였다. 神 즉 道는 형태 속에 깃든다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神은 道와 동의어이고, 虛는 곧 無이다, 라는 사상으로 하여 유교적 요소에 도교적 요소가 함입되었다.
이러한 사변 형성을 통하여 山水는 사변적 성격에서 다시 생활적 성격으로 환언될 수 있었다. 역사성으로 따져서 초기의 산수는 ‘地理圖經’에서 보듯이 실용적인 용도이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를 거쳐서 다시 삶의 부분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二, 관동(關仝 -- 생졸년대 미상)
오대에서 북송 초기에 활약한 산수화가이다. 형호에게 배웠으나 형호보다 뛰어났으므로 關家山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표작은 關山行旅圖, 山溪待渡圖가 있다.
멀리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웅장하고, 계곡은 화면의 후, 상면으로 시선을 깊숙하게 이끌고 있다.(화면의 통일감을 준다.)
가까운 곳은(平遠)은 작은 다리, 초가집, 나그네와 상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붓질은 간략하게 하였지만 힘이 넘친다. 그림 속의 나무는 가지만 있고, 둥치는 없다. 당나라 이래로 평원에서 수석을 선명하게 그리는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웅장한 산세는 북방 산수화의 전통을 나타내고 있다.
산수 속에 인물을 點景으로 표현핢으로 당시에 유행한 풍속화와 차이가 나타난다. 인물화도 村居野渡와 幽人隱士를 표현하므로 풍속화와는 다른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峻法의 표현도 형호보다는 한 단계 발전하였다.
형호의 筆法記
형호는 당과 송을 이어주는 오대의 산수화가로서 필법기라는 회화 이론서를 썼다. 필법기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는 筆과 墨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림를 그리는데에 붓의 사용법을 강조하였으나, 묵을 언급한 것은 형호가 처음이라고 하였다.
형호는 산서성 태행산 홍곡에 살면서 산속에서 노인을 만나, 회화에 대하여 나눈 대화 형식으로 필법기를 썼다. 그는 필과 묵의 사용을 통하여 산세를 닮게 그리고(관찰을 통하여), 형상 속에 작가의 정신을 담아야 한다(傳神)고 하였다. 묵의 사용은 물체에 입체감과 명암 관계를 드러내는 색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그림에는 形이 이치에 어긋나서도 아니되지만, 작가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것을 살려내지 못하면 그림의 두 가지 병이라고 하였다.(二病 卽 有形之病 無形之病)
형호의 제자로 관동을 꼽는다. 즉 형호의 광려도 양식이 관동에게 이어지면서 중국 북방 산수화의 전통을 형성한다고 하였다.
三, 곽충서(郭忠恕 930-977)
雪霽江行圖
四, 동원(董源( ? - 962)
강소성 남경 사람이다. 왕유의 수묵과 이사훈의 청록을 모두 습득하였다. 형호-관동 회화에 비하여 輕淡的이다. 연기와 이내가 흐릿하게 끼어 있는 양식 즉 若隱若現의 筆墨 기법으로 그렸다.(안개가 많이 끼는 양즈강 지역이 풍경이기도 하였다.) 이로서 동원은 형호-관동의 북방 산수화에 대비되는 江南畵派의 시초가 되었다.
북송 중기 이후에 중국 문화가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문화의 중심지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로서 중국 문화는 남, 북으로 이분화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남방 문화가 북방 문화보다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다가, 마침내는 중국 문화의 주류가 된다
元 이후가 되면 동원의 산수화가 중국 산수화의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다.
中晩唐 이래로 남쪽의 절강성 주위에는 張志和, 頂容에 의한 逸品적 畵風(有墨無筆)이 유행하고 있었다. 발묵법에 의하여 형상을 모호하게 표현하는 이 방법은 화면이 흐릿하고 불명확하였다. 이 기법은 근경보다는 원경의 표현에 유리하다.
이로서 勾, 點, 俊, 染의 표현이 형-관에 비하여 명확하지 못 하였다. 이러한 표현법은 강남의 실경을 산수로 표현하는데는 오히려 적합하다.
동원과 거연의 산수화는 근본적으로 수묵 산수화이다. 북종의 초기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거연은 동원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동원에게도 그의 작품에 산세를 험준하게 그리고, 착색을 함으로 북종화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의 작품은 여럿ㅇ 전래되고 있으나 양식에 차이가 보이므로 진위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五, 거연(巨燃 - 생졸미상, 오대--북송 초에 활동)
강소성 남경인으로서 동원에게 배웠다.
북송 초기에는 남종화는 배제당하였으나 거연만은 인정받았다. (이 시대에는 이성과 범관을 최상위로 꼽았다.)
秋山間道圖, 山居圖 -- 수묵화로 산봉우리가 험하고 높다. 산봉우리가 달걀모양을 닮았다. 동원의 그림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이외에도 북종화의 좋은 점은 수용하였다. 그래서 당시에도 좋은 평을 받았다.
물가의 표현 등, 강남지역의 평원적 구도는 동원의 영향을 나타낸 것이지만, 높고, 험한 산봉우리, 深遠적 표현으로 북방 산수화와 연관도 많다.
六, 위현(衛賢 -- 서안인, 생몰년대 미상)
본래는 樓臺殿宇, 盤車水磨 등에 능하다. 강남화파적 산수화를 그렸다.
七, 趙幹(조간--강소 남경인 , 생졸년대 미상
강남의 경치를 많이 그렸다. 江行初雪圖가 있다.
10) 北宋前期山水畵
송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翰林圖畵院을 설립하여 인물과 화조를 그리게 함으로서 미술에서 이 장르가 발전하였다. 산수는 교화성에서도, 장식성에서도 떨어지므므로 이 분야의 수요는 많지 않았다.
산수화에서도 북방 산수화가 우대를 받았다. 송은 북방 문화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방 산수화는 인문 정신을 표현하는 표징으로 떠오르면서 점차 우대를 받았고, 나중에는 중국 전통을 잇게 되었다.
그러나 북송 초기에는 북방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이성과 범관이 대표적 화가로 꼽는다.
一, 李成(919-967)
북송의 前-中期에는 李成畵派가 산수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형호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성은 당 왕실의 후예이고, 이성의 아들은 송의 초대 황제에게 경전을 가르킨 사대부 집안 출신이다. 그는 당과, 송의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는 사대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형호-관동과 차이는 강남 산수화인 ‘담묵과 엷은 안개를 결합하여 북방 산수화인 高山의 구성에 균형감과 여유를 주는 전통을 세웠다. 이 양식은 1127년, 북송의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이성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晴巒芬寺圖(청만분사도)와, 武林遠岫圖(무림원수도)가 있다. 이성의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과 마을, 절, 다리, 탑, 누각, 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상상력 속의 경관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함으로, 마치 분재의 느낌을 준다.(盆景)
그러나 화면의 구성은 중앙에 높은 산을 배치하고, 좌우에 낮은 산을 두므로 송왕조의 천자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한 점의 티끝이나 무질서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은 평온하고, 인자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이성의 그림은 북의 형호-관동 양식과 남쪽의 동원-거연 양식을 바탕으로 하였다 한다. 이성의 후계자들(연문귀, 허도녕, 곽희, 이공년)은 산수화의 규범을 보여주면서 그의 전통을 12세기까지 이어간다.
이성은 돌을 움직이는 구름처럼 그렸다.(卷雲皴)
이성화파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근경에 잎이 진 나무를(寒林) 높고, 크게 그리고, 산이 그림의 중심이 아니다. (준령을 그리지 않았다.) 山石은 마치 솜이 펼쳐져서 구멍이 숭숭 난듯이 그렸다. 묵은 연하게 사용하고, 선염도 약간 하였다.
이성의 산수화는 노장사상의 道者적 경지를 표현하였다.
* 이성화파 -- 허도녕, 이종성, (중기 이호에는) 곽희, 왕선
허도녕(태종-진종시대) 이종성(허도녕-곽희 사이) 곽희(북송 후기)
許道寧 (태종-진종 년간에)
이성의 영향을 받은 화가이다.
대표작 -漁夫圖
李宗成
三, 范寬
이성과 형호에게 배웠다. 대표작 - 溪山行旅圖
범관은 깊은 산중에 은거하여 진짜 山人으로 살았다고 한다.
먹을 많이 사용하여 화면 한 가운데에 큰 산을 그리므로 거비파라는 이름도 듣는다.
그림의 전체적 인상은 어둡게 보인다. 아래의 近景은 비교적 세세하게 그렸다. 山이 主이고 나무는 부수적으로 그렸다.
이성의 그림이 남방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고 있다면 범관의 산수는 웅장하고, 강력하여 북방적 요소가 강하다. 산은 흙과 바위, 심지어는 나무와 돌의 구분도 불분명하다.
四, 燕文貴(연문귀) -- 절강인, 생졸미상, 노예계급이라고 한다.
五, 高克明 -- 생졸미상
11) 北宋後期山水畵
이 시기의 북방산수화가로는 곽희와 왕선이 있다. 남방 산수화가로는 趙今穰, 米友仁 부자(아버지는 米芾)가 있다.
一, 郭熙(곽희 1000?-1087?)
이성의 그림을 따랐다.
살아 있는 당시에는 크게 예우를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북송의 3대가(동워, 범관, 이성)에 끼이지도 못 하였다.
대표작 --- 早春圖, 關山春雪圖
북송의 영토는 비가 적고, 땅이 거칠고, 추운 북방 지역이므로 자연히 寒林圖가 유행하였다. 곽희는 선대 화가인 이성과 범관의 화풍에서 장점을 받아 들였다. 三遠法은 물론이고 거대한 山峰과 계절의 변화를 범관의 모호한 표현을 받아들여서 모사하였다. (雲頭皴)
나무 가지는 게발같이 표현하였고(해묘준) 산세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이 하였다.
곽희 화풍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화가에게 미친 영향이 크다.
곽희의 대표적 작품은 早春圖이다. 이른 봄날의 정경을 그린 산수화이다. 조춘도를 보면 웅장한 산세 때문에 이른 봄의 따뜻한 정취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게 동양미술사를 가르티는 교수는 타이페이의 고궁 박물관에서 보름 동안 계속하여 조춘도를 바라보았더니 흐릿한 아지랑이 속에 묻혀 있는 봄의 모습이 떠오르더라고 하였다. 오래 동안 바라봄으로 그림 속에 몰입되어가는 것도 감상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그림은 곽희 화풍을 언급하는 대표적 그림으로 수없이 언급한다.
한 폭의 그림에 三遠(高遠, 深遠, 平遠)法을 동시에 담아서 그렸다. 어둠과 밝음(明暗0, 아침과 저녁의 미세한 빛의 변화를 표현해내는 능력은 곽희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곽희의 화론을 아들인 곽사가 편찬한 책이 林泉高致集이다. 이 책은 중국화론사상 가장 중요한 저서가 되어 있다.
곽희는 그의 화풍을 이성을 이었다. 이둘을 합쳐서 이곽화풍이라고 하며, 중국 회화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후 중국 회화사에서 이곽화풍이라는 말이 무수히 나온다)
그는 거대한 산봉우리를 구름이 휘감고, 구름이 엉티듯이 그렸다.(雲頭皴法) 나뭇가지는 게발처럼 구불구불하게 그렸다.(蟹爪描-해조묘) 화폭에 삼원을 모두 담아낸 것도 특징이다.
그는 三遠法과 더불어 산, 나무, 사람의 비례에 의하여 그린 三大法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三遠, 三大를 이용하여 그린 산수화는 곽희가 창시자이다.
실제로 삼원법은 이미 그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고원법은 제일 오래 된 것이었고, 평원은 당나라 때 그려졌으며, 이성이 하나의 양식으로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심원은 남송의 원체화에서 적용하여 그렸다.
곽희는 이 모두를 한 화폭에 담아내었다.
곽희의 화풍은 조선 초기에 우리나라 회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대표적인 이곽화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三遠법이란?
우리는 서양화의 일시점 그림에 익숙해 있으므로 동양화의 그림 구도를 이상하게 본다. 일시점이란 사진을 찍을 때처럼 바라보는 곳을 한 곳에 고정하여 보이는 대상을 화폭에 옮긴다. 그러면 먼 곳은 작고, 희미하게, 가까운 곳은 크고 선명하게 나타난다. 물론 방해물에 의해서 가리워지면 그림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모습이란 한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여러 곳에 바라 본 것을 한 화면에 담으므로 자연 대상을 좀 더 사실에 가깝게 나타낼 수 없을까를 고민한 결과로 다시점 회화가 나타난 것이다. (입체파 회화이다.)
여러 곳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 화폭에 담아내는 그림의 이론을 곽희가 삼원법으로 표현하였. 삼원법은 삼시점 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高遠은 산 밑에서 높은 봉우리를 올려다 볼 때 보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곽희의 임천고치에서 처음으로 고원, 평원, 심원이라는 말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그보다 훨신 더 전에 있었다.
深遠은 시선을 앞으로 바라 볼 때 산 사이로, 계곡 아득히 멀리 보이는 경관을 그린 것이다. 먼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거리감의 표현이 중요한 기법이 된다. 당나라 때에 이미 나타난다고 하였다.
平遠은 가까운 거리의 모습을 눈 높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법이다. 일반적으로 근경에 위치한 고목이나, 수풀 너머로 보이는 누각, 배, 다리 등등, 바로 눈 앞에 전개되는 풍경을 그린다.
북방 산수화가 이성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정비되었다. 이후에 남쪽 지역의 평활한 평야와 강변의 풍경을 그리기에 적합하여, 남쪽의 산수(남송의 산수화)화에 응용되어서 많이 그렸다.
거의 평면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조용하고, 고요하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표현에 적합하다.
二, 王詵(왕선 1048-1104)
공신의 후예로 부마도위가 된 사대부이다.
북송의 중기 이후로는 숭문 사상이 팽배하였다. 아취적 분위기를 찾는 귀족 문화가 대두하였다. 雅와 俗을 분류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신(왕안석), 구(사마광)의 당쟁이 치열할 때에 구파에 속하였다. 휘종 황제가 화조를 좋아한 반면에 왕선은 산수를 좋아 하였다.
곽희가 장식적 요소가 강한 그림을 그렸다면 왕선은 유희적이고, 심경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長卷적 배치는 어떤 법칙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문인들이 좋아한 구도 였다,
왕선 화파는 처음에는 이성에게 배웠으나, 나중에는 이사훈의 화풍도 곁들였다. 먼저 먹으로 윤곽을 그린 후에 수묵의 준법으로 그렸다. 마지막에 선염도 하였다.
三, 趙今穰(1041-54?--1098-1101?)
태조 조광윤의 5세손으로 왕손이다.
小景 山水의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四, 米芾(미불 또는 미패)
북송 초기에는 관료 문인이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북송 중기 이후로는 많이 참여하였다. 미불도 관료 문인으로 米點峻法과 潑墨法 즉 수묵점염의 산수화를 창시하였다.
그의 아들, 米友仁과 더불어 二米라고 칭한다. 그의 화법을 米家法, 米氏雲山法, 美家雲烟法 이라고 한다.
송대의 화원화가들은 일반적으로 形似와 格式은 주장하여 사실법에 몰두하였다. 그는 형사보다는 物像을 빌어 마음을 그렸다고 한다.(借物寫心)
거대 산수화가 아닌 小景 위주의 산수화를 그렸다. 세세하고, 사실적인 그림은 아니다. 동원이 산수를 흐릿하게 그린 것하고 관련이 있다. 강남의 산수를 평원산수화의 구도로 청진펑담하게 그렸다.
그는 문동, 소식과 더불어 수묵문인화의 기초이론을 확립하였다. 글씨도 잘 썼다.
五, 미우인(1086-1163)
미불의 장남이다. 미불의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반면에 미우인의 미점 산수가 많이 남아 있다.
宋은 당, 남당의 화원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화원을 두었다. 화가들의 대우도 좋았으므로 화가들은 화원 화가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시험을 치루고 뽑았으며, 우두머리를 대조(待詔)라고 하였다.
화원 화가는 대상을 닮게 그렸고(形似), 규범성에 준하여 그렸다.(格) 따라서 화원화가들은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고, 규범적 격식에 얽메이므로 화원 양식을 만들어 내었다.
이때 일부 화가들은 화원의 규범적 양식을 따르지 않고 문인사대부들의 墨戱를 쫓아서 그림을 그렸다. 文同, 소식, 미불이 대표적 화가이다. 이들은 形似彩色보다는 氣韻生動을 중시하였다.
미불은 산수화를 먹이 종이에 번지듯이 하는 기법으로 그렸다. 연기는 산허리를 감아 돌게 그렸고, 수목은 아주 간략하게, 붓으로 먹점을 찍듯이 하였다. 초서와 행서의 서예적 용필법으로 붓을 사용하였다. 平遠山水의 구도로 그리므로 험준한 산봉은 전혀 없는 산이 연기, 안개, 구름 등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그림이 호화찬란하지 않고 天眞平淡하였다.
그의 아들인 미우인이 아버지의 기법을 이어 받아서 발전시켰다. 따라서 이런 류의 산수를 미점산수라고 하였고, 이런 기법을 二米法이라고도 한다.
미점산수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겸제 정선의 인왕산제색도, 단원 김홍도의 총석정도도 미점산수로 그렸다.
현대 화가로는 청전 이상법이 대표적인 미점산수화가이다. 변관식, 허백련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조길
趙佶(조길-1082-1135)
신종의 열 한 번 째 아들로서 왕위 계승에는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북송의 마지막 황제 휘종이 되었다.
왕자 시대에는 황제로서 수업을 받지 않고 문학, 미술, 도가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18세에 황제가 됨으로 영광과 좌절의---. 더욱이 한 인간으로서 인생 여정을 볼 때 황제의 길이 그의 삶에 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자취를 남겼다.
아버지 신종 때는 신, 구파의 당쟁으로 시끄러웠고, 부패는 만연해 있었다. 그런 왕국을 물려받은 휘종은 자신이 재능을 나타낸 회화 분야에 관심을 쏟았다. 화원 제도를 확립하고 회화를 다른 기술 분야보다 우위에 두었다.
송왕실의 조씨 가문은 회화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조금양은 휘종의 사촌이다.) 더욱이 회화에 대해서는 자신이 이념을 관철시키려 세가지 조건을 요구 하였다. 그러나 회화의 발전보다는 오히려 제한을 가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첫째 ; 자연에 대한 세밀한 관찰에 의거한 사실주의 회화를 요구하였다.
후대의 화가들이 당송의 그림을 배운다고 할 때는 사실주의 그림을 지칭한다.
둘째 ; 과거의 회화 전통을 연구하였다. 이로서 산수화는 이성을, 인물화는 이공린을, 화조 화은 서희와 황전을 최고로 꼽으므로 송대 회화를 하나의 틀 속에 가두는 역할을 하였 다.
셋째 ; 寫意畵를 요구하였다.
그는 중국화의 오랜 전통인 시, 서, 화의 三絶이라는 전통을 확립함으로 중국 문인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의 그림인 청금도는 사실적인 표현을 하면서도, 우아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학도’는 궁궐의 지붕 위로 학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그렸다. 사실적인 그림이지만 송왕조의 비상을 나타낸 것이므로 사의성이 넘치는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성이 강하므로 문인화의 사의성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에는 우아함과 서예적인 아름다움으로 시적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회화 개념을 보여준다. 과거의 전통, 사실적 관찰, 시적 이상에 뿌리를 둔 고전적 아름다움이 넘쳐난다. 이것은 이 시대의 예술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사상이 중국 회화사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휘종은 준비가 안된 황제이었다. 정치는 혼란했고, 부패는 만연하여 나라의 운명은 풍정등화와 같았다. 그는 황제로서의 능력도 준비도 없었던 탓에 비극의 종말을 맞이 하였다. 북쪽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처들어 와서 휘종은 포로가 되었다. 초원지대를 이리저리 8년간이나 끌여다니다가 찬바람이 몰아치는 북방의 황량한 땅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아들인 고종은 남쪽으로 도망가서 항주를 수도로 정하고 남송을 이어갔다. 이제 중국 회화는 남쪽의 부드럽고, 온화한 산천을 배경으로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된다.
六, 王希盟 생졸미상 휘종시대
千里江山圖 - 설색산수로 이사훈의 영향이 보인다.
12) 南宋的 山水畵
一, 趙佰驅, 趙佰蕭
송태조의 7세손으로 왕실 후손이다. 이들은 송이 남쪽으로 쫒겨갈 때 같이 남으로 내려왔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종실화가들이 대부분 청담을 우선시 하던 때였다. 이들은 청록산수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二, 李唐 , 생졸미상
휘종시기에 남송으로 피난와서 거리에서 그림을 팔며서 살았다. 소문이 나서 왕실에 불려가서 화원의 대조가 되었다.
초기에는 이사훈의 청록산수 경향으로 그렸으나, 다시 형호-범관 양식으로 그렸다. 즉 초기에는 북종화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남으로 와서 점차 남쪽의 풍경을 그리므로 서서히 그림의 경향에 변화가 왔다.
이때는 형호-관동, 동원-거연, 이성과 차이가 분명하게 나도록 그렸다. (邊角風光)
그림의 전경을 함축적으로 그리므로(세세하게 그리지 않고 생략을 많이 하는) 감상자의 상상력을 통하여 전체를 그려보도록 하였다.
三, 蕭照(소조) 생졸미상
이당에게 배웠다.
그의 그림은 좌변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오른 쪽에는 물의 정경을 멀리까지 그렸다.
四, 馬遠 생졸미상이다.
광종, 영종, 리종 때 화원 대조이다. 화가의 집안으로 6대가 화원화가이다. (5명이 대조) 그의 아들 마린도 유명한 화가이다.
모든 장르의 그림을 다 잘 그리나, 산수화가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小景畵를 잘 그렸고, 이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가계의 화푸을 이어 받았고, 이당에게 배워서, 이를 결합함으로 독창적인 마원화풍을 형성한다. 그의 화풍은 남송의 원체화 양식이 성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규와 더불어서 마하파라고 한다. 이 양식은 중국회화사에서 아주 중요한 화풍이 된다.
그는 남송의 특징을 잘 살린 南宋院體畵風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남송의 산수화는 북송의 산수화에 비하여 더 관념적이고, 여성적이다. 남송의 4대 화원화가로는 이당, 유송년, 마원, 하규를 꼽는다.
그들은 자연과 인물을 비교적 객관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림을 더욱 아름답고, 더욱 시적이고, 서정성이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이들을 서정파 또는 낭만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1) 관념산수와 실경산수를 잘 조화시켜서 그렸다.
2) 더욱 아름답게, 시적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3) 질은 수묵 산수화로 나무는 단단하고, 구부러지게 (쇠처럼) 하였다.
4) 바위와 산-- 대부분 준법에 의하여 그렸다.
5) 조감도 양식 대신에 대부분 수평 내지 앙시로 그렸다.
6) 극도의 생략으로 감상자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7) 馬之一角(그림이 한쪽에 치우치게), 邊角之經, 殘山剩水를 특징으로 말한다.
또 이런 양식을 회화사에서 水墨蒼勁派라고도 부른다.
마원의 그림은 대부분이 중국의 강소성과 절강성의 수려한 풍경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후대의 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들이 마린으로 같은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 중국의 산수화는 오대와 남북속에 이르러서 救世主義에서 避世 내지 超世 사상을 나타낸다. 이때는 산림문학이 발달하였고
선종사상이 유행한 것이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한다.
六, 夏珪
6) 하규 -- 생졸미상, 남송후기
이당의 영향으로 산수화를 잘 그렸다. 후세 사람들은 그이 화풍을 마원과 동일하다고 보고고 ‘마하파’라고 칭한다.
몇 종류의 화풍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一角半邊取景이다. 근경은 농묵으로 원경은 담묵으로 처리하였다.
13) 花鳥畵
五代-宋의 숭문사상은 인격도야의 방편으로 수요가 많았다. 또 왕상 귀족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용가 많았다. 특히 오대의 서촉과 남당의 통치자들이 좋아하였다. 여러 꽃이나, 새, 서수들이 부귀, 영화, 권세, 풍류, 장수 등을 상징함으로수요가 많았다.
특히 북송 중기 이후로는 문인화풍이 풍미하면서 더욱 성행하였다. 당의 말기에 정부가 사천으로 피난가면서 많은 화가들도 사천으로 옮겼다. 양즈강 유역의 남경에는 당의 유민이 남당(937-975)을 세우고 당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화원제도를 두므로 미술이 크게 크게 성행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의 문화를 계승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서 오대-송의 화조화는 사천과 남당에 뿌리를 둔 2대 조류가 형성되었다.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황전(黃筌)과 서희(徐熙)였다.
황전은 아들 황거보, 황거채와 송의 원체 화풍을 형성하였다면, 남당의 서희는 화원 바깥에서 또 하나의 화풍을 형성하였다.
一, 황전(903?-975)
서촉의 성도 출신이다. 서촉 화원의 대조가 되었다. 황전은 충실한 사실적 표현을 강조하여 形似에 중점을 두었다. 담묵으로 먼저 형상의 윤곽을 그린 후에 담채를 사용하였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형사만이 아니고 생명력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구륵진채의 사실주의 화풍이라고 한다.)
아들인 황거보와 황거채는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받았다. 이들의 화풍은 후대에 화원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二, 황거채(933 - 993)
황전의 3子로서 황전의 그림을 이어받았다. 이들의 화풍은 화원화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三, 徐熙 생졸미상(885? - 975)
대대로 남당에서 벼슬한 남경출신이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로서,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운 일이 없다.(독학)
서희는 선묘보다는 묵과 색채를 사용하여 그리므로, 농담을 중요시하였다.
질박하면서도, 간결하고, 세련된 수법으로 수묵 담채라는 독특한 풍격을 창조하였다. 먼저 먹으로 가지와 잎, 꽃, 꽃술 등을 그린 후에 담채를 입혀서 그림에 생기가 돌게 하였다. 황전이 풍만한 체를 높이 쌓았다면(즉 용묵과 설색을 진하게 하였다) 서희는 옅은 색을 사용하여 가볍게 처리하였다.
서희의 그림을 水墨淡彩, 沒骨畵法, 徐体, 野逸体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원화가를 지배하였던 황전은 서희의 그림을 낮게 평가하였으나, 화원 바깥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하나의 화풍을 형성하고 있었다.
四, 徐崇嗣
서희의 아들로서 황전의 법을 따랐다. (아마 화원화가로 일하기 위해서 일거라고 한다.)
몰골법도 한 점 전해 온다.
五, 최백(崔白(1050-1080)
14) 宋代
중국의 시대의 특징을 육조의 書, 당의 詩, 송의 繪畫라고 일컫는다.
당과 송을 다시 비교하면 당은 인물화와 우마화가 뛰어났고, 송은 화조화와 산수화가 뛰어났다.(곽약허의 도화견문지) 즉 사회생활(인물화)을 반영한 그림이라면, 송은 자연미를 반영한 그림을 그렸다.
송대 미술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문인화와 문인화론이 나타난 것이다. (文同, 蘇軾, 黃廷堅, 米芾)
화조화도 황전은 궁전에서, 서희는 재야에서 맥을 이어갔다. 최백은 이둘을 결합하였다. 궁전 화원에서는 관동과 황전이 차지한 반면에 재야 미술에서는 사대부와 승려들에 의해서 이상주의적 화풍이 성립되어 갔다.
송대는 귀족 문화가 발달하여 장식화가 발달함으로 화조화가 유행하였다.
* 북송
북송 회화의 일반 경향이 사실주의를 따랐다. 사실주의 회화는 정밀하고, 숙련된 기교를 요구한다. 화조화에 영향을 미쳐서 정밀하게 그렸다.
* 화조화의 발달 시기
1) 북송 초기 화원에서 후촉과 남당의 화가들이 들어와서 사생과 채색을 하였다.
2) 中期로서 形寫를 중시하는 그림에서 정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해 갔다.
필묵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내적 표현을 강조하였다. 최백이 대표화가이다.
3) 3기는 휘종 때 사실주의 회화가 극치를 이룬 시기이다.
一, 崔白(1050-1080경에 활동하였다.)
신종 때의 화가이다. 화조화를 통하여 상징적 비유로 표현하였다.(두 마리의 까치를 그리고, 까지는 즐기다의 喜와 발음이 같으므로 즐거움이 두 배라는 식으로 상징하였다.)
그는 그림에서 운동감(생명력)을 표현하였다. (이전 시기에는 정적인 표현으로 거의 볼 수 없었다.) 황전의 정적인 그림에서 한 단계 발전한 그림이라는 평을 듣는다.
二, 휘종(趙佶 1082-1135)
신종의 11번 째 아들로 왕자 시절에는 황제가 되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므로 그림에만 몰두하였다. 예상 외로 황제가 되었지만 그림의 취미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림을 후원하였다. 자신도 많은 그림을 남겼다. 李瑋, 王詵에게 그림을 배웠다.
三, 유채(劉菜(? -1123)
생명감이 넘치는 물고기를 그렸다.
중국인들은 魚樂圖라고 하여, 물고기의 여유로움을 노장사상의 상징으로 생각하여 이상향적 생활의 상징으로 그렸다.
* 남송
화원화가들이 전통적인 화조화의 기법으로 깔끔한 양식의 그림을 그린 반면에 화원 바깥에서는 사군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런 유형의 그림을 그린 대표적 화가가 왕정균이다.
대체로 영종시기(1196-1223)를 경계로 정밀한 운필과 색채화에서 단순하고, 거칠어진 화풍으로 변하였다. 색상도 眞彩에서 淡彩로 바뀌었다. 남송 말에는 선종 불교가 성하여서 화조화도 영향을 받아 常形보다는 常理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황전 화풍에서 야일한 서희 화풍을 바뀌어 갔다. 대표 화가는 양혜와 묵계이다.
고종이후(남송의 초대 황제) 산수화와 인물화에서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1) 화폭이 축소되고, 團扇扇面과 서화첩이 유행하였다.
2) 구도의 제재를 취사선택함으로 간결해지고, 절지 화조가 나타났다.
3) 채색이 담채화함으로 수묵과 조화를 이루었다.
4) 命題가 접차 詩意化 해졌다.
一, 왕정균(王廷筠
고목과 죽석을 잘 그렸고, 수묵화 양식으로 그렸다. (墨戱라고 함)
二, 李迪(이적 1100-1197)
송대의 궁정회화 양식으로 그렸다.
三, 마원(1150-1223)
四, 양혜
五, 牧溪
15) 文人畵
송대에 100여년에 걸쳐서 태평성세가 이어졌다. 유교적 폐단이 가시화되면서 왕안석의 개혁파와 사마광의 구파 사이에 심한 당쟁이 일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문인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우울한 심사를 시나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화원화가들이 그린 산수화나 화조화와 다른 화풍으로 그렸다. 枯木竹石, 宋蘭水仙 등에 함축된 의미를 담아서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남겼다. 소위 墨戱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남송의 수묵 산수화와 미불의 미점 산수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대표적 화가는 문동과 소식이다.
1)당쟁의 와중에 놓여 있는 문인, 사대부들이 주로 그렸다.
2) 수묵적 逸品 양식을 선호하였다.
3) 수묵 중에도 강남적 전통인 동원-서희의 영향을 받았다.
4) 만당의 수묵 일품의 화풍인 禪畵의 영향을 받았다.
5) 엄격한 서법으로 붓 다루기가 익숙한 문인들이 쉽게 그렸다.
6) 枯木竹石은 문인들의 의취를 다루기 좋은 소재이었다.
一, 文同(1018-1079))
사천성 사람으로 북송 말기에 당쟁이 치열하였던 시기에 살았다. 정치 성향은 소식과 조금 달랐다. 그는 신당이 득세할 때 그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았다.
그가 그린 묵죽화는 이 시대를 살아간 그의 고민과 우울함이 표출되어 있다고 한다.
문동은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다. 문인화풍의 그림은 실제의 형사보다 물상이 담고 있는 常理를 추구하였다.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빠른 붓질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형사가 아닌 의취를 나타낸다고 믿었다.
소식은 문동을 이런 이유로 높이 평가하였다.
二, 소식(1037-1101)
사천성 사람으로 호는 동파(東坡)이다. 일찍 관리가 되었으나 당쟁 때문에 감욕을 가고, 귀양을 가고, 사면도 임종 직전에 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림에서 진적을 남긴 것은 거의 없으나 중국 미술사에서 문인화론을 주창함으로 아주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교 사상과 도교 사상을 모두 수용하였다. 유가에서는 그림을 교화용으로 이용하였으나 소식은 단지 즐거움을 취하는 것으로 이용하였다.
그는 자연 현상에 상형은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常理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문인들은 자연 경관을 물상으로 대할 때는 완벽한 교양을 구사하여 눈에 보이는 물상 뒤에 있는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읽어내어야 한다. 즉 형상을 넘어서 상리를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식의 이런 주장은 송대의 사실주의적 화풍에 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외형의 형상만 모사한 송대의 화원 화가 작품은 가치를 폄하당하고, 문인화풍이 새롭게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그림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문인화가들은 흔히 쓸쓸하고, 간략하고, 심원하고, 심오하며, 청신함, 담백함, 평담천진을 추구하였다.
출처: 수필과 그림/이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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