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회화사
서양에서 회화 예술이 변천해온 역사
평면 또는 입체의 표면에 안료로 그리는 회화는 2만 년에 걸쳐 존속해왔다. 회화는 자신의 개성표현이자 현세 너머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최초의 방식 중 하나였으며 오늘날의 우리가 1만 5,000년 전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벽화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모든 회화에는 보편적 미의 특질이 나타나 있다. 서구의 회화는 인간표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르네상스는 회화를 해부학과 광학에 연계시키며 균형·조화·원근법을 탐구함으로써 이 전통을 확장시켰다. 인물화에서 처음 탈피한 것은 17, 18세기에 들어 풍경화가 부상하면서부터였다. 풍경화·인물화의 전통은 19세기에 와서 빛과 색채의 상호작용인 '회화적' 특질 및 물감의 표현적 특질에 연관되어 발전했다. 이는 물감 및 그리는 행위와 형태를 통한 회화의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려는 20세기 추상 회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석기시대
구석기시대의 동굴화는 19세기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형태는 단순하지만 운동감과 생생한 느낌을 준다. 동물들은 설명적 의미 없이 개별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무리지어져 보이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 겹쳐 그려졌기 때문이다. 석기시대에는 인간보다 동물의 형상이 많이 나타나며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독창력이 우선시되었던 듯하다.
중석기시대의 동굴화는 구석기와 유사하나 최초로 설명적 의미가 나타나고 결국 인간은 서로 협동하는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집단이 살아 남고 번영하려면 사회적 단결이 필요했으리라 짐작된다. 신석기시대에는 처음으로 정착생활을 했으나 오히려 대형 벽화가 없는 대신 인간과 동물 형상이 가끔 나타나는 칠도기를 제작했다.
에게
BC 3000년경 에게 및 동지중해 지역에서는 크레타의 미노스 문화, 중부 에게의 키클라데스 문화, 그리스 본토의 헬라도스 문화를 꽃피웠으며 키프로스 문화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때 동세공품과 대다수의 회화 작품들이 제작된 곳은 지중해 지역이었다.
크레타에서는 벽 장식이 나타나지 않으며 도기는 3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는 단순한 직선으로 장식되었고 2단계(BC 2500~2200)에도 반점무늬를 포함하여 초기와 유사한 양식이 번창했다. 3단계(BC 2200~2000)는 대부분 검은 바탕에 흰색 및 크림색으로 장식되었다. 키클라데스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파거나 찍은 기하학적 문양이 대부분이었다.
중기 이후의 도기는 윤이 나는 물감으로 엷게 칠하거나 각진 패턴으로 장식되었다. 그리스 본토에서도 도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적었고, 기념비적 건물들이 꽤 있지만 벽 장식은 없다(→ 색인 : 그리스 도기, 장식예술). BC 2200년경 새로운 정착민들이 구세력을 무너뜨렸는데 단순한 형태의 도기들이 극소수나마 남아 있다.
BC 1600년경의 대형건물들에는 프레스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지진으로 인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항아리 장식이 발전되어 흰색·노란색·빨간색의 소용돌이 패턴이 쓰였다. 말기도 이와 유사하나 벽화는 기념비적 프레스코와 꽃·동물이 단순하게 그려진 배경에 치장벽토 부조로 이루어졌다. 중기 키클라데스와 중기 헬라도스에서는 단순한 도기의 토속 양식이 계속되었으나 말기에 보다 큰 문화적 세력권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에게의 분리된 세 지역들은 말기 청동기시대에 들어 서로 밀접한 관계와 문화적 확산을 보여준다. 장식적 풍경은 새와 동물, 꽃을 따는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거나 예식 및 궁정생활을 보여주는데 검은 윤곽선 드로잉 안에 칠을 메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부분만 남아 있으나, 테라의 아크로티리에 남아 있는 저택의 벽을 보면 원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으며 토속적인 도기 전통에도 불구하고 크레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 색인 : 벽화).
가장 놀라운 것은 항해하는 배, 해안의 사냥꾼들, 숲 등을 묘사한 긴 프리즈 부분이다. 또다른 그림은 이 시기에 처음 알려진 예로 종교적 축제 중의 여인들, 권투하는 두 소년, 낚은 고기를 보여주는 어부 등을 그린 것이다.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의 대저택들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다소 형식적이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에서 종교예식은 벽화가들의 중요한 모티프였던 듯하나 서아시아와 이집트의 저택과 사원에서 역사적·연대기적 장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에게 회화는 중부 유럽보다 과장이 적다고 볼 수 있다.
말기 미노스 문명에서 도기 양식은 처음(BC 1600경~1500경)에는 곡선 패턴과 단순한 식물 문양이 지배적이었으나 BC 1500~1450년 해양생물 모양이 나타나며 분방한 전면적 배열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 색인 : 머린 양식). BC 1450~1380(또는 1370)년 초기 미노스 양식의 자연성은 엄격한 형식성으로 진부해져 결국 말기 미노스 도기는 미케네 양식의 변형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의 키프로스 도기는 3종류로 나뉘는데, ① 갈색 유약을 발라 만든 것, ② 흰 점토에 검은 선 장식을 한 것, ③ 물레로 돌려 만든 것 등으로, 대체로 미케네 도기를 부분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그리스
그리스 예술은 인간존재에 대한 열망의 표현으로서 신적인 주제조차 인간의 행동방식으로 해석되었다 (→ 색인 : 미학). 헬레니즘기 이전까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개념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고 예술작품은 기능적이었으며 그리스어에서 예술과 공예간의 구별 없이 '테크네'라 불렸는데도 예술가들은 작품에 자부심을 가졌다. 화가들은 작품에 서명을 했으며, 새로운 표현수단을 탐구했고 때로 예술철학을 상세히 기록한 책을 쓰는 등 BC 5~4세기 화가들의 기법 이면에는 뚜렷한 철학사상이 있었다.
BC 5세기말경, 이는 철학자들에 의해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예술이론이 예술실기와 공존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회벽, 나무, 대리석 판에 그려진 그림들은 쉽게 지워져 대부분 소실되었다. 한편 그리스 공예 발전의 중요한 증거인 항아리 그림들은 고대 저술에서는 거의 언급되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수요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예술품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암흑기(BC 1200~900)
BC 13세기 에게 중심부가 멸망하자 청동기시대의 정교한 미는 사라졌다. BC 11세기 이전 당시 중요했던 아테네의 새로운 회화양식은 조화로운 원시기하학 양식이었고 붓과 컴퍼스 등 새로운 기구와 기법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었으며 그리스 도기화에서는 패턴의 단순한 정밀성이 두드러진 특성이다.
기하학기(BC 900경~700)
기하학 양식은 전통을 수용하는 가운데 뇌문·卍자형·총안무늬 등이 많고 BC 760년경이 되어서야 인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기념 항아리를 전문으로 그렸던 디필론 마스터에 의한 것인데 도식적인 모습이 전면적인 기하 문양을 거의 방해하지 않게끔 형식화되었다. 이후에 동물과 인물이 형식적 틀 속에 들어가게 되면서 기하학 양식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BC 8세기말 인물 형태는 훨씬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서아시아에서 들어온 꽃 문양과 결합되어 새로운 양식이 도래했으나 인물이 도입된 근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과거 영웅들의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고 보거나, BC 8세기의 특권계급과 영웅적 선조들을 동일시했다고 보고 있다.
동방화기(BC 700경~625)
BC 700년경 항아리 그림에는 시리아와 페니키아로부터 꽃·동물·괴물 등의 모양이 도입되어 기존의 기하 양식에 우아함을 가져온다. 이를 원시 아티카 양식이라 하며, 처음으로 영웅사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실루엣 그림자와 붓질은 대담하여 기념비적·인상적인 효과를 준다. 코린트에서는 원시 코린트라 부르는 세밀양식을 창조해냈다. 7세기말경 도입된 흑회식 기법 항아리들은 활발하게 수출되어 BC 7세기 후반에는 지중해 전역에 퍼졌다.
아케익기(BC 625경~500)
코린트는 BC 550년경까지 선도적으로 도기를 수출했지만 대량생산으로 급속히 질이 떨어졌다. BC 7세기말 아테네는 흑회식 기법뿐 아니라 코린트 양식 항아리의 양식화된 형상을 수용했다. 주요작가로는 엑세키아스, 아마시스의 화가 등이 있다. BC 530년경에는 흑회식 기법 대신 윤곽선만 그리고 세부를 붓질로 나타내는 적회식 기법이 등장했으며, 이것은 에우티미데스와 에우프로니오스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 바로 정착되었다.
적회식 기법으로는 선을 그을 때 물감의 양이나 굵기를 조절할 수 있었고 유약을 묽게 타서 색을 밝게 할 수도 있었다. 기념물에 그려진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코린트 이스트무스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에서 그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는 최초의 신전장식은 BC 7세기의 테르몬에 있는 아폴론 신전이다. 도기에 있어서는 섬세한 선의 표현에 가장 중점을 두었고 음영, 원근법, 환영적 처리에 대한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고전기(BC 500경~323)
초기 고전기(BC 500경~450)에서는 아케익적 요소가 사라지고 해부학적 요소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되지만 여전히 경직된 느낌이 남아 있다. 주요화가로는 파나이노스(회랑그림인 〈마라톤 전투〉를 그림)가 있다. 이 시기의 건축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기념비를 제작한 예술가들의 영향 아래 있던 도기 회화로 그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주요 벽화가로는 아테네와 델피에서 활동한 폴리그노토스· 미콘 등을 들 수 있다.
전성기(BC 450경~400)의 그리스 도기 장식은 대부분이 선묘이며 회화기법에 있어서는 아테네의 화가 아폴로도로스가 스키아그라피아라는 음영법을 도입함으로써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후기 고전기(BC 400경~323)의 짧은 기간 동안 제욱시스· 아펠레스· 파라시오스 등 유명한 화가들의 활동을 통해 회화기법이 상당히 발전했다. 기념물로는 마케도니아의 레우카디아 거대 묘가 있으며 파라시오스의 특징인 선묘는 레우카디아에 있는 헤르메스 상과 펠라에 있는 사자사냥 및 디오니소스 모자이크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헬레니즘기(BC 323경~100)
이 시기의 미술은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요화가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던 아펠레스가 있다. 중요 기념물로는 베르기나의 거대 묘(BC 336~317)로, 정면은 아펠레스 양식의 거대한 벽화로 사자사냥이 묘사되어 있다(→ 색인 : 그리스 예술, 장식예술).
에트루리아
BC 8~7세기경 그리스인들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할 줄 알았던 에트루리아인들과의 무역을 확장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했다. 아케익기에 정착하여 지금의 토스카나와 로마 등지에 흩어져 있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장차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될 도시국가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커다란 분묘실에 안치했는데, 대부분 분묘의 벽을 석회로 바른 후 그 위에 생생한 장면들을 그려넣었다 (→ 색인 : 벽화).
이러한 프레스코들의 내용은 그리스 신화로부터 빌려온 것이 대다수였으나 에트루리아인들의 생활을 묘사한 것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는 장례행렬로서, 타르퀴니의 아우구르스 분묘벽화가 유명하다.
BC 5세기경 아테네의 양식이 전파됨에 따라 에트루리아에서도 고전기를 맞이했으며, 그리스 본토에서 사용된 새로이 발견된 음영, 명암, 단순한 공간표현 등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에트루리아에서는 고전기에 벽화가 활기를 띠지 못했고 오히려 헬레니즘기 동안 로마의 정치적·문화적 영향이 밀려오면서 회화가 부흥하게 되었다.
로마
BC 6세기말경 로마 공화국이 설립된 후에 로마인들은 정치적 목적을 지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에트루리아 양식을 부활시키고 에트루리아 화가들을 고용했다. 고대의 저술가들은 당시 로마의 화가들로서 전쟁의 장면을 묘사했다는 메트로도루스와, 풍경화와 로마의 저택장식을 즐겨 그렸다는 데미트리우스 이외에도 파비우스 픽토르· 파쿠비우스· 리콘 등의 이름이 전해지나, 이들의 작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BC 2세기경 폼페이에서는 개인 저택의 실내 벽화장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른바 외피 양식 또는 제1양식으로 알려진 대리석의 채색 치장벽토 모방방식이 사용되었다. BC 1세기 중반에는 갑자기 로마와 그 주변도시들에서 소위 제2양식이라 불리는 화려한 벽화들이 나타났는데, BC 1세기경에 제작된 〈오디세우스의 일행〉처럼 벽면 전체를 깊이·분위기·빛이 묘사된 정교한 회화적 방식으로 그린 풍경화들로 채우는 것과 BC 50년경 폼페이의 일명 '신비의 별장'에 그려진 '디오니소스 입문의식과 신부의 혼전의식'처럼 벽을 마치 그 안에서 의식이 거행되고 있는 좁은 무대처럼 다룬 것들이 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퍼진 제3양식에서는 벽 위에 걸리는 중앙 패널화가 창문을 통해 보는 듯한 풍경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칸막이 및 태피스트리에 삽입되거나 그대로 벽에 장식용으로 걸리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끝나면서부터 폼페이의 멸망까지 성행했던 제4양식은 이전의 양식들과는 달리 좀더 차분하고 사실적인 건축 구도와 무대배경을 모방한 듯한 건축의 윤곽선, 그리고 벽면 전체가 평평하고 중립적인 흰색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로마의 초상화들은 사실성과 기교면에서 초상조각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흥미로운 것은 금과 유리의 메달에 그려넣은 초상화들로서, '부네리우스 케라무스 가족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세련되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 16세기 유럽의 세밀화 양식에 견줄 만하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
초기 그리스도교 회화는 AD 2세기말에 와서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화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혹은 유대교적인 알레고리의 개념이 합법성을 얻게 된 것은 3세기에 이르러서였고 그나마 그리스도의 모습을 승리에 찬 태양신으로 묘사하는 등 절충적인 양상을 보였다. 즉 새로운 요소들은 형태보다 내용면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의 공적·사적 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됨에 따라 종교적 요소들이 중요하게 되었지만, 이교적인 장면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타콤베의 천장과 벽에는 새, 동물, 큐피드, 계절의 이미지 등에 관련된 모티프들로 이루어진 미묘한 선묘가 나타나며, 그밖에도 기도하는 사람들과 어깨에 양을 메고 가는 목동, 즉 '선한 목자'가 종종 그려졌다.
3세기 중반에는 이러한 중립적 주제들이 순수하게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지닌 장면에 결합되었다. 이러한 그림들의 양식적 특징은 매우 다양했는데, 여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가벼운 필치와 우아함을 지닌 매력은 이전의 훌륭한 이교적 회화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비잔틴
4세기초 비잔티움의 자리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세워짐에 따라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예술 중심지역이 탄생했다. 비잔틴이란 대개 330~1453년에 존재했던 그리스 정교회의 동로마 제국 및 이 도시의 예술을 말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 비잔틴 세계와 서유럽 세계 사이에는 명백한 종교적·정치적 차이점들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상이점들을 광범위하게 반영하는 지중해 예술은 결과적으로 두 극단으로 분리되었으나 실제로는 예술적인 접촉이 빈번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예를 들어 비잔틴의 영향은 12세기경 시칠리아와 베네치아의 회화들에서 발견되며, 러시아, 불가리아, 서부 발칸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던 정교회 국가들로도 전파되었다.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의 성모〉는 1130년경 러시아의 후원자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하여 가져간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비잔틴 화가들은 정교사회의 독특한 종교적 내용과 양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나, 서유럽의 화가들보다 그리스·로마의 전통에 더 충실했다. 회화의 종류로는 성인들을 묘사한 성상들이나 패널화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모자이크 장식벽화도 교회마다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채색필사본은 제작이 제한되었으며, 주제 영역 또한 서유럽에서보다 한층 더 제약을 받았다 (→ 색인 : 사본장식). 필사본에서 즐겨 다룬 주제는 〈신약성서〉의 내용 및 그 인물들과 초대교회사 등이었으나, 후기 비잔틴의 필사본들에서는 후원자인 덕망 높은 귀족의 생애를 다룬 삽화가 그려지기도 했다.
비잔틴 회화는 신앙심과 정신성을 표현하는 고도로 효과적인 그리스도교 예술이었다. 전체적으로 비잔틴 예술은 자연주의적인 설명을 제시하기보다는 초자연적이고 초시간적인 신앙의 영역에 대한 존재의 암시를 더 강조했다. 화가들이 고전 고대의 회화적 방법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세계에 대한 좀더 추상적인 해석을 그려내는 데 목표를 두었다. 결과적으로 비잔틴 예술은 자연주의적인 표현방식과 추상적인 표현방식 사이에서 항상 일종의 긴장감을 지니고 있었다.
초기 중세
서유럽의 고대 로마 문명은 6세기 후반경에 침몰되었으며, 이후 암흑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가지 근본적인 변화들이 발생했다. 수세기에 걸친 지중해의 예술전통은 거의 모두 소멸했고 북부 유럽의 문화적 구조는 점차적으로 새로운 부족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북유럽에서 7세기경에 회화가 다시 부활한 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요인에 기인했다.
첫째, 새로운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로 전향하여 광범위한 그리스도교 도상과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발전시켰고, 둘째, 그들에게는 회화가 발달했던 후기 로마 문화를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나무판자 위에 인물을 약간 그려넣는 것 이외에, 건물 벽에 그리는 대형벽화와 필사본에 그려넣는 소형 삽화들이 있었다. 이 그림들은 서로 분리된 전통을 갖고 있었고 서로 다른 기법을 사용했다.
거의 모든 교회와 공공건물에서 발견될 법한 벽화들은 의외로 극소수만이 남아 있으며, 반면 채색필사본들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중세의 화가들은 복음서와 〈구약성서〉, 그리고 교회에서 필요로 했던 예배 및 헌신과 교리용 책들을 그림으로 장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색인 : 사본장식).
교황의 본거지였던 로마에서는, 고대 전통의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 동안 계속되었으나 600년경부터 약화되면서 비잔틴 양식의 영향과 함께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물들을 그리는 양식이 등장했다. 7~8세기에는 동방의 여러 가지 회화 전통이 전파되어 엄격하게 대칭적인 구성, 엷게 칠하는 미묘한 채색, 그리고 모델링 없이 경쾌하고 유연한 선들을 사용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6, 7세기경에 수도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수도원 내의 공방에서 필사본들이 정교한 양식으로 복제·장식되었다 (→ 색인 : 스크립토리움). 영국 제도의 화가들은 교차되어 엮어진 때와 뒤섞인 동물, 그리고 크게 확대시켜 그린 머리글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보통 ' 카펫 페이지'라고 불리는 풍부한 장식기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필사본들은 켈트족의 전통과 6세기경 영국에 정착한 앵글로색슨족이 가져온 금속 제련기술의 전통, 그리고 지중해 전통의 복합적인 영향을 받아 독특한 장식체계를 갖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 있어서 초기의 채색필사본들은 프랑크 왕족 중의 메로빙거 왕조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필사본들의 장식은 상징적인 주제를 많이 담고 있었다 (→ 색인 : 메로빙거 왕조 미술).그 예로 머리글자의 획은 비둘기 또는 물고기의 모양을 하고 있거나 단순한 장식적 모티프들로 채워져 있었다.
8세기 중반경에 새로운 세력을 얻게 된 프랑크 왕국은 서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인 샤를마뉴 대제의 치하에서 후기 고대 로마나 동시대 비잔틴 문화에 버금 가는 궁정문화를 이루었다 (→ 색인 : 카롤링거 왕조 미술). 화려한 장식의 복음서를 만들어낸 샤를마뉴 궁정화파는 매우 창조적이며 기지에 찬 장식을 보여주었고, 〈성 마르코>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 표현의 경우 밝은 색채와 정교하게 주름 잡힌 의복 묘사, 주의 깊게 그려진 팔다리 등을 통해 능숙한 인체묘사를 나타냈다.
당시 영국에서는 예배의식에 사용되는 책들을 상당수 제작했는데, 그 책에는 번쩍거리는 황금색채와 휘날려 헝클어진 옷주름을 지닌 활기찬 인물들을 가득 담고 있다. 서술적인 구성과 머리글자 양식은 수많은 나뭇잎들로 가득 찬 황금막대, 아치형 또는 4각형의 돌출된 격자 모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0세기말경 교회 내의 개혁정신을 반영하는 북부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유입한 기운찬 윤곽선 양식이 발전되고 있었다.
독일의 경우 작센 오토 왕조 치하에서 통합된 왕족과 교회의 후원을 배경으로 커다란 예술부흥이 있었다 (→ 색인 : 오토 왕조 미술). 10세기 후반에는 ' 그레고리 등기소의 거장'이라고 알려진 화가가 유명했는데,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카롤링거 왕조 필사본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회화 양식을 개발했으며, 상세하고 부드럽게 모델링한 인물들을 정확하게 계산된 배경에 배치했다. 그의 제자들은 밝은 빛을 받은 인물들이 황금색 바탕과 색띠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장중함을 나타내는 일련의 장식본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로마네스크
11세기 후반에는 유럽 전역에서 구성상 좀더 도식화되고 대담한 형상을 표현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선과 색채가 강하고 추상적인 구조가 지배적이었다. 인물표현에 있어서 여러 겹의 복잡한 주름들과 반복된 평행선들의 강조는 정교하고 유형화된 당시의 비잔틴 회화가 서유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는 1060년경에 데시데리우스 대수도원장이 비잔틴 미술가들을 불러들여 사원을 장식하게 함에 따라 동서 전통의 융합을 이루게 되었다.
12세기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점차로 고대 로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실제로 고전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구성형식 및 모티프들, 심지어는 복고풍의 부활이 일어났다. 12세기초에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일어난 화파들이 클뤼니의 대(大)베네딕투스 대수도원과 시토 수도원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프랑스의 초기 로마네스크 벽화 중 가장 완벽한 것으로 전해지는 것은 생사뱅쉬르가르탕프 교회에 있는 그림들로서 생생한 서술성과 창조성을 보여준다. 그당시 영국의 화가들은 필사본을 통해 비잔틴 회화의 영향과 대륙 회화의 영향을 받아 좀더 유기적인 인물형태를 표현했다. 1130년경에 제작된 '베리 성서'의 필사본 삽화에서 볼 수 있듯이 팽팽한 옷주름은 3차원의 형태를 묘사하고 있으며, 얼굴은 전보다 더 짙게 모델링되어 있고 표정과 몸짓 또한 날카롭고 강렬하다.
11세기 후반 영국 남부와 프랑스 북부에서는 사람·괴물·짐승·새 등이 뒤엉켜 있는 머리글자 유형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죄악 및 악마와 끊임없이 갈등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필사본은 자세한 표현의 배경에다 복잡한 도상을 가득 그리는 형식이 주를 이루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영국 필사본의 영향을 받아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인물과 비현실적인 풍경을 그렸으며, 비잔틴 양식을 연상시키는 얼굴 묘사를 보여주었다.
스페인의 경우 산클레멘테 교회 제단벽화로 그린 프레스코에서 볼 수 있듯이, 인체의 형태와 인체를 둘러싸고 있는 경직된 옷주름들이 동시대 유럽의 다른 지역 회화보다 더 이상화·추상화되어 있었다.
12세기 후반에는 서유럽 전역을 통해 벽화와 필사본 장식에서 다음과 같은 2가지 발전을 이루었다. 첫째, 형태가 더 부드러워지고 자유로운 흐름을 갖게 되었으며 추상성과 유형화된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을 대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서유럽의 화가들이 비잔틴 회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정교하게 유형화된 각진 옷주름의 직선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그대신 옷 속의 단단한 신체를 나타내주는 잔물결과 불규칙한 파동들로 대치되었다 (→ 색인 : 물덴스틸). 이러한 부드러운 양식은 독일의 라인 강 중부지방과 레겐스부르크에서 제작된 세밀화들에서도 발견된다.
1200년경 비잔틴의 모자이크 화가들은 베네치아와 시칠리아로부터 많은 제작 의뢰를 받았는데, 이것은 서유럽의 화가들로 하여금 비잔틴 미술을 직접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유입된 비잔틴 미술은 북부 유럽, 특히 잘츠부르크 화가들과 라인 강 북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딕
고딕 초기에는 비잔틴의 영향에서 벗어난 좀더 부드럽고 사실적인 필사본 양식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부드럽고 우아한 회화양식이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그대신에 비잔틴 전통을 계승한, 소위 '톱니 양식'(Zackenstil)이라 불리는 뒤틀리고 각이 진 양식이 발전했다. 전성기 고딕 회화는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러한 사실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 성 루이의 시편집 삽화이다.
또한 프랑스의 생샤펠에서 사용했던 복음서집을 보면, 초기 고딕의 회화적 양식이 크고 각진 주름들을 통합하는 착의 양식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명암을 통해 착의와 형상을 취급하는 방식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회화 발전으로부터 자극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이러한 ' 빛의 발견'은 1270~80년경에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에 활동했던 마스테르 오노레라는 파리의 장식가에게서 두드러졌으며, 14세기 중반 장 퓌셀의 책에서는 '빛의 사용'뿐 아니라 이탈리아 회화의 원근법을 연상시키는 공간 표현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프랑스 양식은 영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고 영국에서는 여기에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을 덧붙였다. 14세기 전반 이후의 영국 시편들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모두 가장자리 장식을 한 화려한 양식을 보여준다.
다른 곳의 고딕 미술이 그러했듯이 이탈리아에서도 사실주의적 경향으로의 변화를 겪고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 장식화로 두초 디 부오닌세냐가 그린 〈마에스타 Maestà〉에 잘 나타나 있다(→ 색인 : 벽화, 이탈리아 고딕 양식). 당시 이탈리아 회화의 원근법과 빛의 탐구는 주로 프레스코 같은 대형 그림들에서 이루어졌으며,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는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걸작을 남긴 조토 디 본도네를 들 수 있다.
조토 디 본도네의 뒤를 이은 피렌체와 시에나의 화가들도 사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에나 화가인 시모네 마르티니의 그림은 〈수태고지 Annunziazione〉에서 볼 수 있듯이, 우아함과 기품을 지니고 있어 북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암시하지만 세부에 대한 관심은 두초 디 부오닌세냐를 상기시키며 주의 깊은 배경 구조는 조토 디 본도네를 상기시킨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탈리아에서 비잔틴의 전통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사실적인 풍경화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관습적 표현을 버리고 시각적 체험을 토대로 하는 과정을 통해 천천히 이루어졌다.
14세기 후반과 15세기초에 우세했던 유럽의 회화양식은 국제 고딕이라고도 불린다. 대부분 궁정의 후원 아래 실행된 국제 고딕 양식의 공통된 특징은, 우아하고 기품 있으나 동시에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지닌 인물표현이었다. 독일어권 지역과 라인란트, 그리고 파리의 화가들은 카를 4세의 후원 아래 테오도리크가 '부드러운 양식'과 얼굴 표정에 강조를 두는 ' 보헤미아 양식'을 계속했다.
그러나 1370~1410년경에 활동했던 ' 나르본 장식의 대가' 공방의 화가들은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작업했다. 그들의 그림에 나타난 인물들은 우아한 반면 눈에 띄게 표현적인 얼굴을 갖고 있었다. 또한 배경에 대한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인물들을 3차원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암시해주었으며 초기 이탈리아 회화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게 되었다.
3차원적 공간의 묘사에 대한 관심은 매우 인상적인 풍경화와 건축적인 배경을 그렸던 15세기초의 필사본 화가들에게도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 예로 베리 공작의 후원을 받은 림뷔르흐 형제는 〈베리 공작의 귀중한 성무일과〉에서, 귀족과 농부들의 계절에 따른 활동을 풍경화와 함께 묘사하여 일종의 달력 그림을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의 국제 고딕 화가로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를 들 수 있다. 그의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보면 얼굴과 착의 묘사는 부드럽고 둥글게 모델링되어 있으며, 어느 정도 북유럽의 '부드러운 양식'을 상기시킨다.
후기 고딕이라 불리는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선구자는 투르네의 로베르 캉팽이었다. 그와 그의 제자였던 반 데르 웨이덴,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은 15세기를 통틀어 막강한 영향력을 남겼다. 초기 플랑드르 화가들은 얀 반 에이크의 〈롤린 대주교와 성모〉에서 볼 수 있듯이 빛이 형태·형상·질감 등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과, 풍경화의 경우 빛이 분위기를 나타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으로 일부 개별적 화가들은 그로테스크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러한 예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동산〉을 들 수 있다.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대체로 1400~1600년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 기간은 고전 고대 미술에 비견되고자 하는 태도의 탄생 또는 부활로 특징지어진다 (→ 색인 : 휴머니즘). 고전 문학과 그림은 이러한 새로운 목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때 이후 예술에 대한 이론적 저서들은 인간 자신이 바로 지배적인 주제임을 암시했으며, 종교화에서조차도 드라마와 감정은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 색인 : 종교예술). 회화는 종종 스스로에게 불리할 정도로 점점 더 지적(知的)으로 변해갔으며, 교훈이나 장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아각성과 자아확신의 표현형태로 바뀌었다.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1420경~95)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는 각 예술가들의 개별적인 양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맞은 피렌체는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지적·문화적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피렌체 산타마리아델카르미네 교회의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린 마사초의 프레스코 〈봉헌금 The Tribute Money〉은 성 베드로의 생애를 서술적인 연속장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마사초는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택해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감동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는 작품과 관람자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원근법의 발명에 근거한 것이었다. 원근법 체계에 의하여 회화의 소우주와 관람자의 실제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15세기초 이탈리아의 화가들빛의 효과, 인체의 해부학과 비례, 세계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로는, 마사초를 비롯해 세속성과 부드러움을 지닌 마돈나를 그린 프라 필리포 리피, 최초의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zione)를 보여준 프라 안젤리코, 원근법의 실행자 파올로 우첼로, 마사초로부터 영향을 받아 조각적인 인물묘사와 빛에 대한 관심, 합리적으로 고안된 공간을 창조하려는 열망을 지녔던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를 들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책형〉에서 볼 수 있듯이, 명확하고 합리적인 공간을 통해 수학·원근법·비례 등 15세기초의 관심을 요약해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 있다.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가 보여주었던 낙관주의, 합리성, 조용한 인간적 드라마 등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를 통해 좀더 개인적·표현적·선적인 양식으로 이어졌다.
1465~75년경 피렌체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화가들이 부각되었다. 폴라이우올로는 움직이는 근육의 표현을 강조했으며, 보티첼리는 〈봄 The Primavera〉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럽고 우아한 선의 움직임을 통해 세련된 양식을 창출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페루지노의 스승으로 알려진 베로키오, 프레스코 기법을 피렌체 화가들에게 전해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있었다.
15세기초 피렌체의 발견과 혁신들은 15세기 중반경에 다른 중심지들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파도바에서는 안드레아 만테냐가, 베네치아에서는 조반니 벨리니가 피렌체로부터 온 영향에 부드러운 빛의 효과를 더함으로써 독특한 양식을 이루어냈다.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에 있어서 고전기라 불리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은 조화와 균형을 성취하려는 열망과 더불어 15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운동감이 매우 중요한 필수 요소였던 반면 구성은 상당히 자제되었으며, 알베르티가 말한 '더하거나 덜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닌 부분들의 조화'를 실현하고 있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우르비노 태생의 라파엘로, 그리고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이 있다.
풍부하고 다양한 15세기의 피렌체 회화는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나타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변형되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연구함으로써 얻은 모든 지식은 그의 예술을 풍부하게 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특징인 피라미드 구도를 도입한 〈동굴의 성모 Madonna in the Rock〉는 피라미드 구도의 안정감 속에 운동감과 장엄함,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미묘한 모델링과 암시적인 안개 낀 분위기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그가 명암을 이용하여 구성적 요소를 통일시킨 점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유화 재료로만 가능했다. 유화는 그림에서 분위기의 명암의 통일성을 이룰 수 있는 투명성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회화기법을 벽화라는 까다로운 장르로 옮겨보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도는 〈최후의 만찬 Last Supper〉이라는 승리이자 비극을 낳았다. 즉 벽화에 유화 기법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영구적이지 못한 것이어서 그의 생전에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리스도의 안정된 피라미드 구도와 원근법적 실내묘사, 동요된 제자들의 모습과 감정 및 운동감 표현 등의 새로운 종합을 보여주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모범으로 삼아 성공한 화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라파엘로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굴의 성모〉로부터 새로운 마돈나 유형을 발전시켜 부드러운 풍경을 배경으로 성모를 그렸다. 교황 서명실의 벽화 〈아테네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에 속한다(→ 색인 :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 프레스코).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인물의 운동감과 균형 및 질서를 성취했으며 공간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라파엘로가 교황궁의 서명실에서 작업하던 당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장식을 맡기로 수락했다. 그는 천지창조 장면부터 그리도록 요구받았는데, 창세기의 연대적 순서와 상관없이 제단의 끝부분에 〈술 취한 노아〉를 그렸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당대에 이미 걸작으로 유명해졌고, 그는 '신(神)의 미켈란젤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1513년경 율리우스 2세가 죽고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피렌체·로마의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은 그 원래의 모습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었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들은 〈헬리오도로스의 성전 추방〉에서처럼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로마의 약탈과 종교적 체험들은 그로 하여금 미학적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했다. 그러한 사건들의 공포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에 나타나 있다.
15세기 후반경 베네치아의 회화는 피렌체에서처럼 전성기 르네상스로 향하고 있었으며, 한편에서는 여전히 순수하게 베네치아적인 취향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성모와 성자들에는 '성스러운 대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 벨리니에게서 배운 조르조네는 목가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스승을 능가했다.
〈전원의 합주〉· 〈폭풍〉에서 그는 베네치아인들의 질감 표현과 부드럽게 확산되는 빛, 전원풍의 효과를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풍경 속에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조르조네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은 티치아노는 〈바코스 축제〉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적인 색채와 질감을 통해 신화적 주제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16세기말 베네치아에서 가장 뛰어났던 화가로는 베로네세와 틴토레토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티치아노의 양식을 받아들여 그것을 발전시켰다. 베로네세는 티치아노에게서 배운 풍부한 색채와 복잡한 구성으로 유명하다. 틴토레토라고 불린 자코포 로부스티는 1594년의 〈최후의 만찬〉에서 대각선 구도를 사용하고, 극적인 효과와 명확한 형태를 나타내도록 빛을 잘 구사했다.
마니에리스모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에 대한 반작용이 1515~24년 피렌체와 로마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전성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자연주의로부터 약간 벗어난 이러한 양식을 '마니에리스모'라 한다. 그후 유럽 전역으로 퍼진 로마의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예술적 기교, 우아함과 유용함에 대한 자기확신과 세련됨, 이상스러운 것에서 느끼는 체변적인 즐거움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었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에 관한 바사리의 표현을 들자면, 인물 양식에서 형식적인 복합성의 기준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설정된 것이었고 이상화된 미(美)는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취한 것이었다. 또한 예술기법상의 복잡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는 데 큰 가치를 두었으며, 완성된 작품에는 제작과정에서 고심한 흔적이 드러나지 않아야 했다.
로마에서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폰토르모, 로소 피오렌티노 등이 형태와 색채의 조화 속에서 미묘하고 모호한 감정적 긴장을 나타냈으며, 파르마 출신의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은 가늘고 섬세한 우아함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한편 피렌체에서는 코시모 메디치의 궁정화가였던 바사리와 브론치노가 우아하고 세밀한 형태의 초상화로 명성을 떨쳤다 (→ 색인 : 이탈리아).
이탈리아 밖에서의 르네상스
16세기초 스페인에서는 페르난도 야녜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적인 작품을 제작했으며, 후안 데 마시프와 그의 아들 후안 데 후아네스의 작품들이 베네치아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스페인의 마니에리스모는 페드로 캄파냐와 알론소 산체스 코에요의 그림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엘 그레코는 〈성모승천〉에서 보여주듯이 인체의 형태를 길게 늘인 로마의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생생하고 감동적인 색채를 구사함으로써 베네치아 미술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 및 이론을 깊이 이해했던 독일 최초의 주요예술가였다. 뒤러의 그림들은 〈네 사도〉에서 볼 수 있듯이 북유럽인들의 세밀묘사 취향을 드러내고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이탈리아적인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16세기 독일의 르네상스 회화는 뒤러에 의해 완성된 양식을 따랐는데, 그중 루카스 크라나흐는 공들여 충실하게 묘사하는 전신 초상화를 발전시켰으며, 한스 홀바인은 후에 영국에 정착하여 모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16세기초 플랑드르에서는 ' 안트웨르펜 마니에리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화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과장적·환상적 구성은 후기 고딕 예술의 장식성을 물려받은 것이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건축가·금세공인들의 책을 통해 전달된 이탈리아적인 묘사도 지니고 있었다. 얀 호사르트( 마뷔즈라고도 함),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 얀 반 스코렐, 메르텐 반 헴스케르크, 안토니 모레 경 등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곳의 양식을 흡수하여 자신들의 독특한 예술을 만들어냈다.
피테르 브뢰헬은 1551~53년에 이탈리아를 방문했는데,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알프스 북부의 시골풍경화를 꾸준히 그리면서 대중적 주제와 일상생활, 농부들을 다루었다. 그러한 예로 1568년의 〈농부의 춤〉을 들 수 있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와는 달리, 플랑드르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소화되기 시작했다. 바사리와 함께 수학한 프레데리크 수스트리스, 추카리의 동료였던 헨드리크 골치우스, 요한 폰 아헨,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게르 등이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북유럽의 마니에리스모를 발전시켰다.
바로크
바로크란 16세기말 이후 18세기초까지의 유럽의 미술사조에 적용되는 명칭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63)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예술을 교회와 교리에 대한 믿음을 심화시키는 수단으로 삼았다(→ 색인 : 반종교개혁, 전도예술). 바로크 회화는 감각적인 동시에 정신적이어서 자연주의적 표현으로 종교 이미지를 쉽게 이해시키며, 동세 및 감정표현을 강조하는 극적이며 착각적 효과로 신앙심을 고무했다.
피라미드 구조와 명확한 회화공간으로 대변되던 르네상스 회화는 이제 대각선으로 밀려드는 복잡한 구도로 바뀌고, 역동적·극적인 세계관으로 인하여 다수인물, 표현적인 제스처와 동세로 구성에 활력을 주며 풍부한 색채, 명암의 대비, 하일라이트로 선명하고 강렬한 묘사를 추구했다.
이탈리아의 초기 및 전성기 바로크
예술은 교회에 봉사하는 하인이라는 중세적 개념과 주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작품의 질적 저하를 초래했으며, 교황 파울루스 4세와 피우스 5세 치하의 로마· 피렌체·밀라노 등지의 16세기 양식은 반종교개혁적인 사실주의로 나타났다. 16세기 베네치아에서는 틴토레토 등 반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17세기초에는 카라바조, 안니발레 카라치,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대표적 화가로 활동했다.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활동했고 그의 에나멜 같은 색채, 강렬한 명암법인 테너브리즘, 기교적 세부묘사 등의 엄격한 사실주의는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와 산타마리아델포폴로 교회 등에서 더욱 성숙하게 나타났다 (→ 색인 : 테너브리즘). 그는 평범한 서민을 모델로 삼아 진지하고 극적인 감정묘사를 나타냄으로써 17세기초 로마와 이탈리아 외부까지 영향을 미쳤다.
카라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두 대립개념인 소묘(designo)와 색채(colore)를 통합하여, 중부 이탈리아의 조형성과 베네치아의 색채를 결합했다. 로마 파르네세 궁의 회랑 천장장식(1597~1604)이 그의 대표작이다. 루벤스는 라파엘로, 티치아노,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로마의 산타마리아인발리첼라 교회 제단화에서 보듯이 풍부한 색채, 극적인 명암법으로 바로크 회화에 기여했다.
로마의 산타비비아나 교회에 있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파사드와 비비안나상, 그리고 비비안나의 생애를 그린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거대한 프레스코 연작은 그 환상적·극적 효과로 17세기 장식양식의 국제적인 모델이 되었다.
1640년대는 고전주의가 주도했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간의 논쟁이 벌어져 안드레아 사키와 니콜라 푸생을 포함한 고전주의자들은 하나의 장면은 각기 명확한 역할을 하는 최소한의 인물로 묘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회화의 구도를 비극문학의 구성에 비유했다. 반면에 바로크파는 풍부하고 다양한 전체를 위해 종속적 일화들이 덧붙여지는 서사적 구성이 올바른 회화라는 점과 프레스코의 장식적 풍부함을 강조했다.
클로드 로랭의 정적 풍경화는 바로크 고전주의의 최고 걸작이었다. 17세기 중반에는 카라치의 강한 조형성을 떠나 부드러운 색조의 자유로운 양식을 추구한 구이도 레니, 고전주의적 시각의 게르치노, 베네치아의 도메니코 페티, 로코코를 예고한 만토바의 조반니 카스틸리오네 등이 활동했다.
이탈리아 전성기 바로크의 말기 경향은 17세기말 로마의 프레스코에서 볼 수 있다. 베르니니의 역동적이며 극적인 장식은 그의 감독하에 바티스타 가울리( 바치차)가 제작한 로마의 제수 교회 본당 천장(1674~79)에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 프레스코는 이미지가 틀 밖으로 터져나와 시각적 압권을 보여주고 회화적 공간은 천장의 금박 벽토세공장식 위로 넘쳐 교회 공간으로 확산된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간의 논쟁은 가울리와 마라타를 중심으로 한동안 계속되었다. 후기 바로크 회화는 마티아 프레티가 그린 발몬토네의 팜필리궁 프레스코(1661)에서처럼 역동적 구조 대신 전체적 통일성과 장식성에 치중하게 되었다.
후기 바로크 및 로코코
1648년 30년전쟁 이후 교황과 스페인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대신 프랑스와 로마의 정치적·예술적 영향력이 커졌다. 이무렵 회화는 마라타의 제자 베네데토 루티와 프란체스코 트레비자니에 의해 우아하고 매끄러운 로코코 고전주의로 전환되었다. 18세기초 프란체스코 솔리메나는 코르토나의 장엄양식과 17세기말 조르다노의 베네치아풍 색채를 결합했다.
볼로냐와 베네치아에서 후기 바로크 고전주의로부터의 탈피가 시도되어 주세페 마리아 크레스피, 조반니 바티스타 피아체타 등에 의해 경쾌하고 활기 있는 베네치아 장식화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베네치아 풍경화 양식인 베두타가 널리 퍼졌으며, 풍속화가 카날레토, 서정적인 로코코 양식을 발전시킨 프란체스코 구아르디 등이 그 대표적 화가이다. 로마에서는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의 정확한 베두타와 낭만주의적인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베두타가 대조적 경향을 띠며 나타났다.
17세기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리베라, 벨라스케스의 초기 보데곤(일상생활의 장면을 그림)은 리얼리즘에 속하나 벨라스케스가 1629~31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작품을 접한 후에는 색채구사와 성격분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스페인의 통치를 받던 포르투갈에서는 경제적 여건이 좋아진 주앙 5세 때 예술후원이 활발해져 프란시스코 비에이라 데 마토스가 화가로 활동했지만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작품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1566년 네덜란드는 민족주의적 신교적 우상파괴주의 폭동을 일으켜 1600년경 남부( 벨기에)와 북부(네덜란드)로 양분되었다 (→ 색인 : 베넬룩스 3국). 1610년 이전의 남부 회화는 보수적인 초기 이탈리아식 사고와 후기 고딕 전통을 결합했다. 1608년 알베르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된 루벤스의 그림에 나타난 모뉴멘털리티는 즉흥적인 드로잉, 운동감, 극적인 조명과 함께 북유럽 구교지역의 전성기 바로크를 가리키는 시금석이 되었다. 안토니 반 데이크는 보다 내향적인 초상화가였고, 피테르 브뢰헬과 얀 브뢰헬, 아드리안 브라우어의 풍속화, 표현적 풍경화, 그밖에 정물화·동물화도 정착되었다.
16세기말 하를렘을 중심으로 마니에리스모 회화가 번성했던 북부지방은 아브라함 블루마르트가 리얼리즘 양식을 도입한 후 큰 영향을 미친 카라바조 회화의 조명과 서민풍 모델 등으로 위트레흐트 화파가 등장했다. 프란스 할스는 초상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렘브란트는 카라바조풍의 강한 명암대비로 바로크 양식을 발전시켜 1630년대말 절정에 달했고 1656년 파산 후 말년의 작품에서는 극적인 겉치레 대신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공감을 보여주는데, 이는 특히 자화상에서 잘 드러난다. 이때 이젤화가 가정의 장식용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는 양식과 취향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는데 1620년대 이전에는 단순한 리얼리즘으로 선명한 부분색, 공간의 통일성 부족, 상이한 평면간의 급작스런 전이, 높은 시점 등의 특징을 보여준 반면 1620년대에는 제한된 색조의 사용, 색채의 강도와 범위의 축소, 통일된 분위기를 지향했고 풍경화에서는 지평선이 낮아지고 일관성 있는 공간감이 나타났다.
17세기 중엽까지 영웅적 고전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었고, 야코프 반 로이스달 작품에서의 잿빛 하늘과 같은 모뉴멘털한 풍경화와 화려한 정물화가 공존했다. 17세기말과 18세기에는 에나멜 광채와 세부묘사의 정물화가 선호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시몽 부에가 카라바조풍에서 1620년경 절충적 고전양식으로 전향했고 푸생은 고전주의 취향을 형성했다. 1648년 샤를 르 브룅은 로마 전성기 바로크와 프랑스 고전주의의 절충으로 베르사유궁을 대표로 하는 루이 14세 양식을 창조했다. 17세기말에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장식화들이 그려졌고, 18세기초부터 시작된 로코코 양식은 근본적으로 실내장식으로서 일종의 2차원적 가구로 의도된 것이다.
앙투안 와토는 우아한 인물, 섬세한 스케치풍의 기법으로 페트 갈랑트라 불리는 장면으로 로코코 회화를 창조했고 장 바티스트 파테르, 프랑수아 부셰의 에로티시즘과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풍경 속의 남녀의 유희장면에 영향을 주었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정물화와 실내풍경들은 침착한 색채와 구도, 평범한 주제, 시각보다 마음에 호소하는 표현의도를 보여준다. 18세기 초반 프랑스 미술에서는 풍속화가 가장 성공적이었고 18세기 중엽에는 친밀한 분위기를 그린 초상화가 많았다.
17세기 영국 미술은 루벤스나 반 데이크와 같은 외국 초상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해양화의 전통도 시작되었고, 1688년 명예혁명 직후 장식적 회화가 한동안 유행했다. 18세기의 윌리엄 호가스의 우의적 그림은 조지 1세와 조지 2세 시대 영국의 현실을 잘 묘사했고, 그는 교훈적인 세속적 희비극 서사화와 판화를 제작했다. 조슈아 레이놀즈는 이탈리아 대가들에 필적할 만했고,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초상화에서 로코코풍을 선호했으며 후기에는 풍경화를 제작했다. 초상화는 18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였다.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는 1760년경 시작되어 1780, 1790년대에 그 절정에 달하고, 185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회화는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로마 신화에서 그 주제를 많이 선택하고 엄격한 선묘와 명암법을 사용하여 마치 조각의 부조처럼 표현했다. 신고전주의는 귀족적이고 장식적인 로코코 미술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발굴된 폼페이와 헤라쿨라눔의 유적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 색인 : 고고학).
출판물을 통해서 동판화로 소개된 그리스 로마 고전미술의 유물들은 예술가들의 고대 고전미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독일의 고고학자인 빙켈이 1764년에 쓴 〈고대미술사〉도 신고전주의 회화 발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건축과 조각은 고대 고전시대의 유물이 있어서 모방이 가능했으나, 그림은 폼페이 유적이 발굴되기 이전에는 소수의 장식적인 작품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조제프 마리 비앙과 같은 초기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고대 조각과 도자기 그림에서 인물의 자세와 배치 등을 본뜨기도 했지만 당대 회화 양식의 영향도 남아 있었다.
보다 엄격한 신고전주의 회화 양식은 프랑스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이상적인 미보다는 서사적인 그림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고대 로마 역사에서 교훈적인 주제를 끌어내고 형식은 단순하고 엄격하며 내용은 영웅적·금욕적인 고대 로마적 특성을 찬양했다. 그가 1784년에 그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고대 로마 비극에서 끌어낸 주제를 장중함과 품위, 과장된 동작, 고대 조각의 영향을 받은 옷주름 표현을 통해 보여준다.
다비드의 이러한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양식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다. 1790년대 무렵의 신고전주의는 명암보다는 선을 강조했다. 그 요인은 고전 조각과 그리스 도기화를 모사한 판화가 보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선묘 기법은 헨리 푸젤리와 윌리엄 블레이크 등으로 이어진다. 고전을 소재로 한 그림은 특히 그 배경과 의상의 고증이 요구되었다. 당대의 인물화인 〈레카미에 부인〉(1800,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고대의상으로 그려서 성공한 드문 예이다.
신고전주의의 소재로는 고대역사와 신화, 특히 호메로스의 시가 중요시되었으며 그밖에 가타 오시안의 시, 중세 역사, 단테의 작품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 색인 : 고전문학). 그리고 신고전주의는 그 후기에 표면상 반대경향으로 보이는 낭만주의와 공존했다. 그 좋은 예가 앵그르인데, 그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선적인 역사화를 그렸지만 낭만주의 양식의 관능적 여인 누드도 그렸다.
영국의 신고전주의 화가로는 해밀턴, 웨스트, 카우프만 등이 있으며, 시인·화가인 블레이크도 어느 정도는 신고전파이다. 프랑스에는 비엥, 그뢰즈 등이 있으나, 가장 뛰어난 신고전주의 화가는 다비드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진정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작품은 1780, 1790년대의 작품들이다.
앞서 언급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당시의 젊은 세대로서 서정적인 신고전주의 화가 프뤼동도 여기에 포함된다. 독일에서는 1755년 드레스덴의 궁정화가가 된 안톤 라파엘 멩스가 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로코코와 신고전주의를 절충한 뛰어난 화가 폼페오 바토니가 있었다.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대개 19세기 초반의 예술운동이라고 간주되지만 그 전후를 포함하여 1760~1870년경 사이의 약 100년에 걸친 유럽 예술의 변화를 나타내는 말이다. 낭만주의는 18세기의 물질주의·이성주의 등에 대한 반동으로서, 개성·주관성·비합리성·상상력·자발성·감정·환상·초자연성을 강조한다 (→ 색인 : 개인주의).
낭만주의는 문학에서 시작되었으므로 낭만주의 회화도 문학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 당시에는 문학과 회화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상호교감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외젠 들라크루아는 그림과 음악의 유사성을 탐구했다.
낭만파 화가들은 내적 감동의 체험을 창조의 원천으로 생각하고 기존 사상과 제도화된 미적 가치를 불신했다 (→ 색인 : 미학). 또한 예술적 천재를 찬양했는데 예술가는 각자 개인적인 미의 기준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들 작품의 주제로서 비극적인 것과 중세 문화에 대해 흥미를 가졌으며 자연을 찬미했다.
자연에는 신성한 정신이 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에서 자연 속의 순간적 광선, 대기, 그리고 그것들이 풍경에 주는 효과를 연구했다. 낭만파 화가들은 19세기의 사회적 격동기에 혁명에 참여하고 약한 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고무했다.
영국
1760년대말과 1770년대에 로마에서 활동한 영국의 화가 헨리 푸젤리, 조지 롬니 등은 이미 아카데미의 규범이 부적절함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림의 주제로서 비극적·영웅적인 것, 특히 푸젤리는 악마적·초자연적인 주제를 선호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독창적인 개인적 우주론을 표현하기 위하여 상상력에 의한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는 유화물감·템페라·수채물감을 사용하여 선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작품 〈연민〉(1795,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서처럼 하늘로 떠오르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그림자 없는 세계를 묘사했다. 그가 합리주의와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자연주의를 경멸한 것은 '시적인 천재'만이 영원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대표적 풍경화가인 존 컨스터블과 윌리엄 터너는 예술 활동의 원천은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믿었으며 자연에 대하여 신비적인 공감을 느꼈다. 그들은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대기와 광선을 표현했다. 컨스터블은 스스로를 자연의 화가로 간주했듯이 상상력보다는 정확한 묘사에 능했다.
터너의 작품에서 빛은 대상을 점차 흩어지게 만들었고, 그의 '숭고' 개념은 문학적인 거친 바다, 폭풍 그리고 대화재 등의 주제를 심화시켰다. 터너의 기법적인 혁신은 영국에서보다 프랑스에서 더 잘 받아들여졌다. 후일에 클로드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터너의 빛의 표현을 흠모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독일
1800년경에 활동한 독일 화가들이 고전주의와 아카데미에 대한 반동을 나타냈지만 작품보다 이론이 선행했다. 1797년에 빌헬름 하인리히 바켄로더가 쓴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승의 심정 토로〉는 이당시 널리 영향을 미쳤다. 그는 초기 독일 거장들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지지했으며, 예술가에게 개인적 감정을 통한 신성한 영감의 해석자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필리프 오토 룽게는 17세기 독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고 자랐으며, 18세기말에 드레스덴에서 독일의 탁월한 풍경화가인 카스파어 다피트 프리드리히와 친밀한 교류관계를 맺었다. 또한 룽게는 프리드리히처럼 풍경의 상징적·우의적 힘에 흥미를 가졌으며 이를 종교적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는 프리드리히와 같은 범신론적 자연관을 지녔다.
1803년에 그린 〈밤〉은 선묘 디자인 같은 반면, 만년에는 사실적인 인물화도 그렸으며 독일의 우화·신화·민담 등을 종합한 작품을 그렸다. 프리드리히는 지극히 종교적인 인간으로서 자연에 내재한 신의 정신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풍경화를 통해 창조주의 영원한 존재를 암시함으로써 감상자에게 종교적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1809년 빈에서는 '성 루가 길드' 그룹이 생겼는데 수도승 같은 그들의 생활방식 때문에 ' 나자렛파'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그룹의 주도자는 요한 프리드리히 오버베크였으며, 이들은 이탈리아식 풍경을 거부하고 주변의 시골풍경과 독일의 회화 전통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들의 풍경화는 후에 낭만주의적 사실주의,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세속적 역사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화가들 사이에서는 당대의 사건을 묘사하는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들은 자크 루이스 다비드가 보여준 선례에 따라 현대적 영웅주의를 지지하고 제국의 영광을 찬양하기를 요구한 나폴레옹 1세의 뜻에 부응하여 정확한 기록화를 그렸다. 그러나 앙투안 장 그로는 스승인 다비드를 떠나 낭만주의의 선봉이 되었다.
그가 자파에 가지 않고 제노바에서 본 페스트의 회상에 의존해 그린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하는 나폴레옹〉(1804)에서, 그는 나폴레옹을 권위와 낭만주의적 영웅의 특징인 인도주의적 감수성을 지닌 존재로 표현했다. 빛나는 색채와 새로운 감정적 분위기 등의 낭만주의 회화의 특징은 테오도르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 이후, 그림으로 당대의 사건을 다룬 화가는 제리코뿐이었다. 그가 1819년경에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사건을 집단적인 비극으로보다는 개인적 고통으로 해석한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형태는 카라바조파의 영향을 반영한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지도자인 들라크루아의 그림들은 1820, 1830년대의 살롱전에 전시되었는데, 그 격정적인 색채와 감정적 에너지로 파문을 일으켰다. 1815년 이후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프랑스가 중산층 사회로 변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결과로 이 시대의 미술은 우울하고 이국적인 주제 선택과 사회의 하층 계급에 대해 고조된 관심을 보여준다.
들라크루아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문학적·역사적 주제에서 죽음·패배·고통 같은 인생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과 놀라운 기법으로 낭만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그의 힘찬 화법과 뛰어난 색채 사용은 이후 프랑스 회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1824년에 그린 〈키오스 섬의 학살〉은 당대의 사건을 비극적인 허구의 영역으로 전환시켰다.
눈부신 색채와 용솟음치는 형태를 보여주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에서는 고대의 전설적 주제가 채택되었다. 이 두 작품의 동양적 주제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먼저 1808년에 그린 〈발팽송의 욕녀〉에서 그 선례를 볼 수 있다. 앵그르는 이외에도 서정적인 여인 누드화들을 그렸으나 라파엘로의 영향으로 아카데미적 규범으로 돌아갔다. 또한 그의 순수한 선적 양식은 영국의 블레이크 등과 비교할 수 있다.
1830, 1840년대에 오노레 도미에는 사회 하층계급의 체념적인 인고를 그렸으며, 반대로 특권계급의 오만과 악덕을 비판하기도 했다. 1848년 이전의 사실주의는 다소간 낭만주의적이었으나 1848년 혁명과 공화정 공포를 계기로 본격적인 사실주의로 변모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는 농민들의 생활을 주제로 삼아 거기에 영원성을 부여했다. 귀스타브 쿠르베는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돌 깨는 사람들〉(1849) 같은 그림으로 표현했다. 〈오르낭의 매장〉은 고향의 장례식 풍속을 그린 것인데, 당시의 교회를 비판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1830, 1840년대에 프랑스 풍경을(그때까지 많은 프랑스 화가들은 로마에 가서 로마 풍경을 그려 가지고 왔음) 그리는 민족 풍경화파가 있었다. 그중에서 퐁텐블로 숲에서 그림을 그린 일단의 자연주의 화가들을 바르비종파라고 한다. 이들은 자연에 가까이 접근하면서 순간적인 광선효과에 흥미를 가졌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 화가인 테오도르 루소는 "우리의 예술은 오로지 진실을 통해서만 그 페이소스를 획득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린 황량하고 우울한 석양 풍경은 그의 기질을 반영한다.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는 광선과 대기의 일시적 효과를 포착했다. 명멸하는 석양, 물 위에 반사된 광선 묘사는 컨스터블의 표현기법을 반영한 것 같다.
카미유 코로의 작품은 고전주의적이지만 자연주의적 감각에 의해서 생기를 얻었다. 결과적으로 바르비종파는 인상주의 혁명의 기초를 마련했지만 낭만주의의 자연미에 대한 이해와 대상과의 정서적 교감을 잃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이 일어나 18세기말 이후 낭만적 사실주의 회화를 고무시켰다. 벤저민 웨스트는 신고전주의 화가였지만 당대의 현실적 주제를 다루어 서사화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현대
현대미술은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에서 시작되어 점차적으로 국제화된 회화 및 기타 시각예술의 혁명적인 발전양상을 가리킨다. 현대성은 명암체계에 기초하는 르네상스의 전통을 거부한다. 이때까지도 관전에서는 모방양식이 계속되었지만 지난 150년간 현대에 적합한 회화의 주요흐름이 항상 있어왔다.
19세기 중반부터 그림은 교회와 궁정의 후원에서 벗어나 중·상류층 계급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현대에 알맞는 미술을 창조하기 위하여, 사진기술의 출현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연을 모방하는 대신 비재현적인 추상미술이 중요시되는 회화 조류가 형성되었다.
인상파에서 시작된 회화혁명은 후기 인상파의 폴 세잔, 고갱, 빈센트 반 고흐에 의해 생겨났으며 20세기 미술의 주관적·개인적인 시각이 채택되었다. 현대미술운동은 야수파·입체파에서 시작하여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를 거쳐 다시 추상표현주의와 팝 아트, 미니멀리즘과 신표현주의 등으로 변천하여 추상과 구상, 전위주의와 복고주의가 공존하면서 교대로 화단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의 원천
현대미술의 원천은 19세기 중반경 인상주의를 주로 하되 낭만주의·사실주의에서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1846년 샤를 보들레르가 현대미술에서 색채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은 적절했지만 나중에 현대적 주제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빗나간 말이었다. 에두아르 마네에 대한 공감을 나타낸 에밀 졸라의 비평은 1866년 이후 인상파 그룹의 출현에 이바지했다.
진정한 현대미술의 출발점은 1863년 마네가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풀밭 위의 식사〉를 낙선전에 출품했을 때였다. 이 낙선전에는 마네, 얀 바르톨트 용킨트, 카미유 피사로, 세잔 등이 함께 참가했다. 〈풀밭 위의 식사〉는 기존의 윤리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림 중앙에 남녀 인물을 흑백으로 대조시킴으로써 조형적으로 뛰어난 현대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외젠 부댕과 용킨트가 대기를 표현한 해양화에서 영향받은 모네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와 함께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그렸다. 젊은 화가들에게는 반(反)아카데미즘이라는 입장과 대기, 빛, 그리고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 등에 대한 공동인식이 뚜렷했다. 새로운 양식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쿠르베의 가시적 세계의 절대적 수용, 바르비종파의 외광회화, 들라크루아의 순수색채와 점묘법 등을 들 수 있다. 인상주의는 1860년대말이 지나서야 뚜렷한 집단적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인상주의는 19세기 사실주의의 결과로 간주되나 역설적으로 표현수단인 색채 그 자체를 더 중요시함으로써 르네상스 전통의 사실주의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인상주의를 현대회화의 출발점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 사실주의 때문이 아니라 색채와 그 처리법의 전면적인 균질성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르네상스 회화체계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버릴 수가 있었다.
마네의 인물화들, 예를 들면 〈피리 부는 소년〉(1866)에서 장식도 없이 비워버린 배경 공간도 르네상스 전통을 이탈함을 뜻한다. 이 추상적인 공간은 프란시스코 호세 고야의 그림에서 이미 사용된 것이다. 마네의 평면적 색채배치 기법은 후기인상파인 고갱에 의해 완전한 색면화법으로 발전했다.
1846년 보들레르가 현대미술의 특성으로 지적한 정신성과 영원에 대한 동경이라는 특성은 인상파와는 다른 경향인 상징주의에서 발전되었다 (→ 색인 : 상징주의운동).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는 낭만주의 회화의 환상적인 경향을 추구했다.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은 벽화로 자신의 뛰어난 상상력을 표현했다.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이며 인상주의의 조형 일변도의 그림에서 내용과 아카데미즘에로의 기법의 환원을 의미한다.
체계적인 인상주의 양식은 1866~69년에 모네·르누아르·피사로 등이 그린 풍경과 인물에서 밝고 강한 원색, 점묘법 또는 가볍고 유연한 색점을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인상주의 회화양식은 1874년 모네와 그의 동료화가들이 첫 그룹전을 개최했을 무렵에 확립되었다. 인상주의라는 말은 모네의 〈해뜨는 인상〉에서 비롯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등의 그림은 찰나적이고 스케치풍이며, 광선효과로 인하여 오브제의 형체가 소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1886년 마지막 인상파 전람회까지 계속되었으나 르누아르는 1879년 이후 고전주의적인 형태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후퇴한다. 모네만은 〈생라자르 역〉(1877)·〈건초더미〉(1891)·〈수련〉(1926) 등의 연작에서처럼, 광선과 대기의 시인답게 오브제가 소멸하는 광선효과를 생의 마지막까지 추구했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피상적·감각적인 세계를 떠나서 본질적인 형태구조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 중반경에 조르주 쇠라, 고갱과 같은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이 탄생했다. 쇠라는 신인상주의의 창시자이다. 그는 모네의 직관적인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과학적인 점묘법과 기하학적 질서가 있는 구도를 추구했다. 고갱은 인상주의의 피상적인 광선표현 대신 신비적인 내용을 갖는 상징주의로 전향했다.
상징주의는 1890년대의 전위미술이었다. 나비파(Nabis)라는 상징주의 화가 그룹의 이론가인 모리스 드니는 중세 회화에서 평면적인 원리를 발견하여 "회화는…… 근본적으로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의 평면이다"라고 말했다. 나비파 화가에는 폴 랑송,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오딜롱 르동 등이 있으며, 특히 르동은 환상적·비합리적인 이미지를 주제로 석판화를 제작했다.
고갱은 1888년 퐁타방에서 검은 윤곽선을 둘러친 평면으로 채색한 클루아조니슴( 종합주의) 기법을 사용하여 상징주의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지나친 자연 모방을 경계하고 상상력으로 그리기를 권했다. 폴 세뤼지에는 고갱의 지도하에 거의 추상적인 〈사랑의 숲〉을 그렸다.
189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 확산된 아르 누보는 회화·건축·공예를 통합한 전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자연형태에서 나온 곡선을 주로 사용한 구스타프 클림트는 대담하고 강한 대조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장식적인 그림을 그렸다.
19세기말
쇠라는 색채들의 상호작용과 기하학적인 형태, 구조에 기초를 둔 새 양식을 창안했다. 그의 점묘주의 기법은 폴 시냐크 등이 신인상주의라는 이름으로 발전시켰다. 반 고흐가 1886년 파리에 왔을 때는 신인상주의가 한창 확산하는 시기였다. 고흐는 순색을 강한 필치로 그리는 격렬한 감정표현으로 20세기 표현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앙리 마티스는 신인상주의 양식을 거친 후 점차 2차원적 색면을 사용함으로써 20세기 추상미술의 기반을 마련했다. 세잔은 자연에서 푸생의 고전주의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수욕도〉 연작과 〈생트빅투아르 산〉 연작에 심취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표현적인 드로잉과 평면회화 기법을 적용한 석판화를 남겼다.
프랑스 화가 이외의 19세기말 화가로는 에드바르트 뭉크, 야코프 엔소르, 페르디난트 호들러 등이 있다. 특히 뭉크는 아르 누보적인 곡선으로 현대인의 불안을 표현하여 20세기초 독일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1903년경 상징주의는 쇠퇴하고, 새로운 화가들은 원시성에서 미술의 원천을 찾고자 했다. 앙리 루소의 그림의 순진성은 그림에 착상의 대담성을 부여했다. 고갱은 만년에 원시미술의 예언자적 존재가 되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와 앙드레 드랭은 거칠고 조야한 양식으로, 마티스는 보다 신중한 태도로 원시미술에 접근했다.
1905년에 이 3명의 화가는 '야수파'라고 불리게 된다. 파블로 피카소는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원시미술의 영향으로 유럽 미술의 전통을 변혁시켰다. 독일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태평양제도의 미술을 발견하여 야수파와 비슷한 원시주의적 회화를 그렸다. 20세기초에는 '예술은 표현'이라는 사고가 프랑스와 독일에 널리 퍼져 있었다. 마티스는 표현을 조화로운 화면구성으로 보았고 키르히너는 이것을 불안한 감정의 표출로 보았다.
1907~14년 뮌헨은 유럽 전위미술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1911년에 프란츠 마르크, 파울 클레,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 등과 함께 '청기사파'를 창립하고 추상적인 형태와 색채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서정적인 추상회화를 〈즉흥〉·〈컴퍼지션〉 시리즈를 통해 발전시켰다. 이것은 1940년대 이후의 서정 추상을 예고했다.
입체파와 그 이후
피카소는 세잔의 미술과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하에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인물과 배경 모두가 변형되었지만, 특히 화면 오른쪽의 과격한 인물표현은 관객을 당황하게 하고, 전통미, 주제, 그리고 모방 등의 전통적 가치를 붕괴시켰다. 조르주 브라크는 이 그림의 영향을 받아 변형이 심한 누드를 그렸으며 이후 피카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공동으로 입체주의 회화혁명을 주도했다.
1910~12년 피카소와 브라크는 대상의 형태를 작은 단면으로 분해한 후 이것을 평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화면 전체가 거의 추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했다. 기하학적 구성으로 귀결된 이 시기의 그림들은 입체파 회화의 목표가 화면구성 그 자체이며 그림은 화가의 독자적 현실성의 창조라는 현대미술의 개념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1912~14년 종이 또는 입체적 오브제를 화면에 직접 도입한 파피에 콜레와 콜라주 기법이 개발되었다. 그려진 대상의 형상이 회화적 기호로서 부분적으로 반복되고 색채도 다시 사용된다. 입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과 동시에 그 종말을 고했다. 1912년 입체파에서 분파된 섹시옹도르(Section d'Or) 그룹전이 피카소와 브라크를 제외한 신세대 입체파 화가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피트 몬드리안은 1917년 테오 반 두스뷔르흐와 함께 기하학적 추상미술운동인 데 스테일을 조직했다. 1909년 이탈리아에서 필리포 마리네티에 의한 미래파 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들은 운동감과 기계의 힘을 찬양했고 이것을 회화의 주제로 삼았다. 화가로는 카를로 카라, 움베르토 보초니, 자코모 발라 등이 있고, 이들의 분절된 연속적 이미지는 고속사진과 유사하다.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2년에 '미래파적 입체주의' 회화를 그렸다. 1913년 흰색 바탕에 검은 정방형을 그리고 1915년에 절대주의 회화 선언을 발표했다. 러시아에서는 혁명 초기에 전위미술에 사회적 기능을 부여했으나 1922년 이후 전위화가들은 분산되었다. 입체주의가 소홀히 여겼던 조형요소인 색채를 그림의 중심과제로 삼은 화가는 로베르 들로네였다. 그는 '색채는 형태인 동시에 주제'라고 믿고 1911년 〈동시성-창문〉 연작에서 광선과 색면을 병치한 추상적인 구성을 제작했다.
환상과 비합리성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중 취리히에 피난온 화가 장 아르프, 문인 트리스탄 차라, 휴고 발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예술운동이다. 그것은 당시 기존체제에 대한 환멸과 방황을 반영했다. 이들은 전통파괴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연주의적인 유화를 파괴했을 뿐이며, 오히려 예술의 영역을 확대시켰다.
아르프는 우연의 원리에 입각한 추상 콜라주를, 프란시스 피카비아는 신랄한 재치가 있는 기계조립의 그림을, 쿠르트 슈비터스와 막스 에른스트는 폐품을 이용한 콜라주와 프로타주 작품을, 마르셀 뒤샹은 일상적인 오브제를 선택한 뒤 그 위에 서명하여 예술품으로 변환시키는 '레디메이드'를 발명했다. 조르조 데 키리코가 1910~14년 파리에서 그린 환상적인 풍경과 오브제 그림들은 불합리성을 기본태도로 한 그림으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해 ' 형이상학적 회화'라고 명명되었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이 선언문을 발표함과 함께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나오는 무의식의 원리에 입각한 자동기술법을 시와 그림에 적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1950년경까지 중요한 전위운동으로서 지속되었다. 이것은 낭만주의·상징주의와 마찬가지로 문학에서 시작하여 회화로 확산되었다. 그림에서는 초기에 앙드레 마송의 자동주의적 소묘, 에른스트의 콜라주와 프로타주 작품, 후안 미로의 환상적인 기호로 된 인물 등이 유명하다.
1930년대에는 키리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 그리고 이브 탕기의 사실주의 기법에 의하여 꿈의 세계를 그리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무의식의 표현적인 경향이 주류가 되었는데 이것은 잭슨 폴록를 비롯한 전후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신즉물주의는 1918년 이후 복고적 분위기에서 사실주의적 경향의 사회비판적 내용을 담은 그림을 말하지만, 주관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주요 미술가로는 전쟁을 고발한 오토 딕스, 노동자를 옹호한 조지 그로스, 그리고 악몽 같은 세계를 그린 막스 베크만 등이 있다.
1930년대 파리 화단에는 초현실주의와 동시에 추상미술과 표현주의 경향이 공존했다. '에콜 드 파리'로 지칭되는 일군의 외국인 화가들이 내적인 감정세계를 격렬한 주관적 표현으로 나타냈다. 생 수틴은 유대 민족의 비애를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와 격렬한 필치로 표현했다. 마르크 샤갈은 개인적인 환상적 경향으로, 조르주 루오는 소박하고 힘찬 표현으로 종교적 감정을 그려냈다. 라울 뒤피는 경쾌하고 장식적인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피카소는 1930년대에 다시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갔으며 〈게르니카〉는 입체파 양식으로 그린 표현주의 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멕시코 표현주의 화가들 사이에는 사회의식을 고취시키는 벽화운동이 성황을 이루었다.
1930년대를 중심으로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초기 추상의 선구자들은 계속 작업을 했고, 추상미술 운동인 '추상창조' 그룹 등을 통해 200여 명의 추상화가군이 새로 배출되었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기하학적 추상을 실험했고, 클레는 시적·환상적인 작품을, 몬드리안은 말년에 뉴욕에서 역동적인 리듬감을 표현한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에 새로 배출된 추상화가로는 영국의 벤 니콜슨, 독일의 빌리 바우마이스터 등이 있었다.
1945년 이후
표현주의의 전통은 1948년 파리에서 결성된 북유럽 출신 화가들의 단체인 ' 코브라'에 의해 부활되었다. 이 그룹의 아스거 외른과 카렐 아펠의 그림에서는 자유로운 즉흥적 필치에서 우연히 형상이 떠오름을 볼 수 있다. 전쟁 전의 기하추상에 대한 반발로 전후에 자유추상이 나온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장 포트리에는 물감의 자발적 제스처에 의존하는 비정형적 추상화인 〈인질〉 연작을 그렸다.
니콜라이 드 스탈은 기하추상에서 서정추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추상을, 알프레드 마네시에와 에스테브 등은 자연에서 출발하여 구성의지가 강한 서정추상을, 조르주 마티외와 피에르 술라주, 한스 아르퉁은 액션을 강조한 추상화가로 알려졌다.
뉴욕의 추상표현주의에는 전쟁중에 미국에 체류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마송의 자동주의적 필법이 중요한 영향을 발휘했다. 폴록이 1949년에 시작한 드리핑 기법은 이성적 통제를 초월하여 그리는 행위 속에의 몰입을 보여준다. 이에 대하여 헤럴드 로젠버그는 이후 "캔버스는…… 행위를 위한 장이 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결과로서의 그림보다 행위 자체가 더 중요시되는 이러한 그림은 이후 액션 페인팅이라고 불린다. 그외에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빌렘 데 쿠닝과 프란츠 클라인을 들 수 있다.
1954년에 마티스가 개발한 종이오리기 기법은 하드에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마크 로스코의 단순하며 울림이 큰 색채의 조합, 바넷 뉴먼의 장엄한 엄격성은 독자적인 출발이었으나 이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구상회화도 새로운 자유를 획득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장 뒤뷔페 등의 작품은 시각 효과, 충격적인 표현, 재료와 기법 면에서 새로운 자유를 표현했다.
1960년대는 미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극단적 실험이 많았다. 이브 클라인은 단일 청색만으로 모노크롬 회화를 제작했고 애드 라인하르트는 검은 그림 연장에서 지속적 뉘앙스를 추구했다. 모리스 루이스의 우연적인 얼룩으로 된 염색 캔버스도 새로운 모험이었다. 팝 아트는 대중소비사회의 대중문화를 반영했다.
오브제와 그림을 병치한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콤바인페인팅, 과녁, 미국 국기 같은 기존 디자인을 그린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의 토마토 수프 깡통,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확대 그림, 클라스 올덴버그의 오브제 조각 등 팝 아트는 귀족적이며 난해한 추상미술과 대조적으로 매우 대중적인 면모를 특징으로 한다. 미니멀 아트는 영미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최소한의 기본형태의 조형적 가능성을 탐색한 작업이다. 그들은 극도로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의 입체를 단독 또는 반복적으로 배치한다.
개념예술은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작업이며, 기존의 미술작품 개념을 파괴하고 작품 자체의 가치보다는 문제제시적 의의를 갖는다. 대지예술도 작품이 남지 않고 사진자료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허무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한다. 아틀리에 작업이라는 전통적 회화방식에 대한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셈이다.
1980년대에 등장한 신표현주의 회화는 구상회화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시켰다. 동시에 전통적 재료인 유채를 사용하고 내용이 중요시되는 회화로 복귀한 것이다. 독일 신표현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점에서 20세기초의 독일 표현주의와 연결된다. → 회화
Macropaedia| 정병관(鄭秉寬) 참조집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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