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공간에 대하여 1-2
(약탈경제, 수도의 위치, 농업생산 등에 대해)
김용만
고구려의 공간에 대하여 1-2
고구려가 건국할 때 상황을 보면 고구려는 적어도 부여의 문화, 고조선의 문화를 기반으로 했지만, 한(漢) 문화의 영향도 함께 받았다.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시 지역은 17세기 청이 건국되면서 약 200년 동안 봉금(封禁) 지대로서 사람이 살지 않았던 문화의 소외지역이었다. 명이 건국할 당시에도 만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낙후한 지역이었다. 집안과 환인 등지는 만주족의 중심지가 아니었으며, 명문화가 직접 들어오는 통로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지금도 집안시는 통화시를 통해 차가 들어갈 만큼 육상 교통에서는 매우 불리한 지역이다. 지금도 만주의 중심은 요하와 송화강에 인접한 지역과 단동, 대련 등 항구지역 등이 중심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역적으로 불리한 집안시 지역이 과거 고구려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농경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곳은 요하에서 한강에 이르는 비옥한 반달지대다. 하지만, 목축의 중심은 오히려 농안, 장춘, 하얼빈을 잇는 송화강 일대다. 이곳은 목축과 농경을 겸할 수 있어 국가가 탄생하기에 매우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곳은 초원지역과 연결이 되어 열린 사회 지대다. 반면 한반도 남부는 해상 교통의 중심에 서지 않으면 닫힌 구조로 전환될 수 있는 지대다.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에 둘러 쌓인 영남 분지는 대표적인 닫힌 구조다. 따라서 신라가 초기에는 늦게 국가적 성장을 이룬 것은 지리적 환경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위치한 곳은 결코 좋은 곳이 아니었다. 환인분지를 비롯한 몇몇 농사지을 곳이 있지만, 생산물은 부족하였다. 따라서 부여나 낙랑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은 부여에서 자라온 경험을 토대로 빠르게 고구려 사회를 변모시켜 나갔다. 작은 소국들이 난립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던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고구려는 천신의 후손이 세운 신정국가임을 기치로 내세우고, 고조선의 옛 영광을 되찾자는 깃발을 내걸면서 이웃한 비류국의 통합을 시작으로 주변의 나라들을 무력으로 정벌하기 시작한다. 고구려가 주변국에 비해 강력했던 것은 전사집단의 힘이다. 말 타고 활을 쏘는 전문 군사집단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척박한 영토에서 살아간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주었다.
고구려 초기의 성장은 약탈 경제의 힘이었다. 약탈을 통한 경제 발전, 그것은 척박한 유럽인들이 지역내 산업 혁명을 일으키기 전까지 사용했던 경제 발전 유형이다. 고구려가 약탈 경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거지에 대한 방어가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래도 열린 지역이었던 환인분지에 비해 더 닫힌 지역인 집안 지역으로 옮겨간 곳이다. 그렇지만, 집안 지역은 적이 쳐들어오기는 불편해도, 이곳을 토대로 외부로 진출하기에는 유리한 여러 교통로를 갖고 있었다.
고구려는 북쪽의 강국 부여국의 침입은 길림합달령을 방어막으로 이용하여 막았다. 반면, 보다 더 높은 고지대인 개마고원을 넘어서 동해바다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안주해있던 동예를 먼저 속국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동예를 지배함으로써 수산물과 소금, 노예, 식량 등을 공급받았다.
그렇지만, 속국으로 삼을 수 없는 강력한 세력, 즉 후한과 같은 나라와는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고구려는 양맥, 선비 등 주변의 족속들을 통합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이끌고 후한의 변경 지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정착 농경민인 후한은 평상시 방어력은 매우 약했다. 고구려는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저들의 대군이 오기 직전에 기습을 가했다.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고구려가 후한의 변경을 습격한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후한은 가끔씩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수도를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상황은 고구려의 공세와 후한의 방어였다. 모본왕의 경우는 북중국의 중심인 태원 지역까지 습격하기도 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기병대를 이용한 기습작전일 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한 전면전 혹은 영토확보를 위한 침략전쟁이 아니었다. 두 나라는 타협을 했다. 태원까지 습격해온 고구려에 대해 후한은 은의와 신의로서 화친을 시도했다. 즉 후한 물품의 무상 공급이었다.
또한 고구려가 후한의 백성들을 잡아가자, 농업 인구가 생명이었던 후한은 어른 1명당 비단 40필, 어린이는 그 반을 지불하고서 포로들을 돌려 받았다. 이것은 고구려 경제에 큰 활력소가 되었고, 중요한 국가 수입원이 되었다. 약탈은 고구려 사회에서 평상시 유휴인력인 좌식자들을 먹여살리는 중요한 경제활동이었으며, 고구려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컸다고 할 수 있다.
약탈경제를 위해서는 도리어 집안지역이 유리했다. 지역적 환경에 맞는 경제활동을 한 나라는 고구려만이 아니었다. 비옥한 농경지를 갖지 못한 유목국가일수록 약탈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이 크다. 그들은 평상시에 수렵을 통해 전쟁기술을 연마하여 농경민으로부터 식량을 약탈하거나, 농경민을 포로로 잡아와서 유목지역에서 초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노예로 삼기도 한다. 고구려도 초기에는 이러한 유목국가, 약탈국가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환인지역에 수도를 선정했고, 나중에는 보다 더 국가적 성격에 맞는 집안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설지란 자가 유리명왕에게 국내위나암으로 천도를 제안한 말을 들어보자.
“산수가 깊고 험하고 땅이 오곡 농사에 알맞고, 또 사슴과 고기 자라의 생산이 많으니, 왕이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시면 백성들의 이익이 무궁할 뿐만 아니라, 병란을 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ꡓ
국내위나암 즉 집안지역은 산과 강이 깊고 험한 곳이다. 또 수렵에 적합하며, 기본적인 농사도 할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전쟁의 화를 면할 만큼 적이 공격하기 어려운 곳이다. 풍수지리적 조건, 물자 수송, 국토의 중앙 등의 조건을 내걸어 수도를 정하고자 했던 조선시대와는 완연히 다른 기준이 적용됨을 볼 수 있다.
혹자는 집안이 지나치게 외진 곳이라서 고구려의 장지(葬地)라고 말하지만, 왕의 무덤이 있는 장지는 곧 수도 또는 수도 인근지역이지, 결코 수도와 임금의 장지가 멀 수는 없다. 신라, 백제, 고려, 조선 그 어떤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임금의 장지가 수도에서 먼 곳은 없다. 집안이 장지라면 수도는 그 부근이어야 하지, 요하일대 등에서 새로운 수도를 찾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언제까지 약탈경제를 고집할 수는 없다. 약탈경제는 불안정한 경제구조다. 언제 적이 강해져서 약탈이 불가능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며, 때로는 이쪽의 피해가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가 점차 강성해져서 주변의 작은 소국들에 대한 통합이 완료되가면서 약탈의 대상지가 점차 적어져갔다. 이제 약탈의 대상은 후한과 같은 강력한 국가들 뿐이다. 따라서 초기처럼 약탈이 수월하지는 않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왕들은 위험한 약탈보다는 보다 안정적인 수입원이 필요해졌고, 그 해결책은 농경지의 확보였다.
6대 태조대왕은 서기 55년 요서 지역의 10성을 쌓고 요서 지역을 차지하고자 했지만, 이때는 후한의 세력이 막강하여 고구려에게 과대팽창이었던 셈이 되었다. 고구려는 요서 일대를 지배할 힘이 아직 없었다. 그럼에도 10성을 쌓으려고 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농경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의지라고 보인다.
서기 2세기까지만 해도 요동 일대는 아직 고구려의 확실한 지배의 권역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잦은 전쟁으로 인해 요동지역의 농업적 기반은 기원전후 시기에 비해 쇄락해져갔다. 고구려가 이때 선택한 곳은 새로운 배후 농경지의 확보였다. 남쪽의 낙랑일대를 지배하려던 대무신왕의 노력이 실패로 끝났고, 북쪽에도 부여가 아직도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선택은 오직 한 곳 지금의 연변자치주 일대인 동부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길 뿐이었다. 고구려가 이 곳을 집중 개발한 시점은 서기 98년이었다. 고구려의 요서지역에 대한 약탈이 집중되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약탈이 힘겨워지던 시기였다.
고구려는 2세기 초 후한을 거듭 습격했다. 후한은 습격을 막고 변경에 사는 자국인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기 위해 고구려가 원하는 후한의 물건에 대한 독점적 교역권을 주었다. 그것이 곧 책구루다. 즉, 조선이 삼포를 개방하여 일본과의 교역을 제한하면서도 통제했듯이 후한도 고구려의 습격을 막기 위해 책구루를 설치하여 고구려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해주고, 침략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농경민과 유목민의 관계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후한은 고구려가 적대적으로 나오자, 후한과 화친한 부여에게 무역의 권한을 주었다. 현도군에 옥갑을 놔두고 가져가게 했다는 기록이 그와 같은 것이다.
유목 국가의 경우 지도자는 외부의 물건을 얻어서 이를 분배하는 가운데 왕권을 강화시킨다. 고구려도 같은 과정을 거쳐 부족 연맹체의 장의 역할을 하던 왕이 점차 강력한 군주로 변모해갔다. 하지만 2세기를 지나면서 약탈에서 얻은 물건을 분배해주는 왕의 기능은 축소되어 갔다. 대신 왕은 새로운 농업 기반을 향상시켜 토지의 분배로서 왕의 권위를 강화시켜갔다. 고국천왕이 좌가려의 난을 진압하고 을파소를 등용하여 진대법을 시행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흥한 것이다. 2세기말 3세기초에 고구련는 이미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적 기반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을파소의 진대법 실시로 고구려에서 농민이 살기 좋아지자, 외부에서 농민들이 집단 이주해 오기도 한다. 이 점이 고구려의 경제 발전의 방향이 바뀌게 된 원인이다. 고구려는 이 시점에서 평안도 일대와 요동일대를 개발하는데 적극적 노력을 기울인다. 이 과정에서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노력은 중단되지 않는다.
고구려의 농업이 발전하게 된 것은 2세기말에서 3세기 무렵에 우경(牛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미천왕은 고구려의 경제적 성장에 맞추어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요동진출과 낙랑군 병합이라는 2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고구려가 지속적인 영토 확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태조대왕 시기에 확보한 동부지역의 철산지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두만강 일대의 무산 지역의 철광산을 확보하여 철기병을 편성하게 되었다. 동천왕 20년인 246년 고구려는 5천의 철기병으로 위나라와 싸운다. 5천의 철기이 말까지 중무장한 중갑기병이라고 할 때 이때 사용된 철은 일인당 30kg 정도로 그 양이 15만톤이나 된다. 고구려가 중갑기병을 활용하여 그 힘을 과시한 것은 광개토대왕 시기였다.
3세기에 두드러진 것은 북쪽의 부여방면으로의 진출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명마의 확보와 또 다른 농경 중심지의 확보를 위한 것이다. 3세기에 고구려는 식량을 충분한 지역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교역은 물론 국제 교역도 본격화했다. 때문에 낙랑군과 같이 중원의 물품을 중계해주는 교역지의 위상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낙랑 등지를 영역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4세기 고구려는 평양 지역을 새롭게 개발했다. 고구려가 더 욕심을 낸 곳은 황해도 은율의 철광산 지대다. 그런데, 이곳을 놓고 백제와의 경쟁에서 고구려는 4세기에는 일방적으로 패배를 했다. 반면, 4세기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연변자치주에 대한 지배권을 고구려가 동부여에 내주었다는 점이다. 비록 고구려의 속국으로 동부여가 서기 280년대에 자리하기는 했지만, 동부여는 4세기에 들어와 점차 자립된 국가가 된다. 따라서 연변자치주 일대의 생산력은 4세기에는 고구려의 힘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동부여가 완전히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또한 344년 모용선비족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요동 지역의 확보에도 실패했었다. 하지만, 350년대를 지나서 모용선비가 고구려를 굴복시킨 여세를 몰아 중원지방으로 가서 전연을 건국하고, 370년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확보한 요동에서 중요한 곳은 안시성 인근의 무순 광산이다. 당시 고구려는 요동의 농업지대를 전부 확보하지는 못했을 것이나, 천산산맥에서 요하에 이르는 평원지대를 점차 확보해 식량생산을 늘렸다고 보겠다.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은 요동과 황해도는 물론 부여지방과 동부여 일대에 대한 지배력을 다시 한번 확보하여 고구려의 중요한 생산기지를 완전히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고구려가 생산력 기지를 모두 확보한 후에는 북중국의 패자인 북위와 겨룰 만큼 강력한 생산력을 갖게 된다. 고구려 후기에는 은광산을 개발하여 화폐로도 사용했다. 또한 철 생산력이 많아져 거란과 실위에 철을 수출할 정도였다.
이런 경제적 변화에 맞추어 고구려는 농업의 중심지인 평양지역으로 수도를 옮긴다. 이제는 단순히 방어에 유리한 집안지역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경지를 개척하고 밖으로 팽창하기 위해서는 해상교통이 유리하고 농업의 중심지가 될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국가발전에 유리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남진을 위해 수도를 옮겼다는 것은 한반도와 만주를 분리해서 보려는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의미 없는 주장이다. 고구려에게 남진과 서진의 구분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된다.
평양은 중원지역과 비견될 수 있는 동방의 비옥한 반달형 농경지대의 중심지다. 요하에서 한강에 이르는 농경지대는 해안을 끼고 발달된 전형적인 농경지대다. 이곳을 전부 차지한 고구려가 농업국가로서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구려는 수, 당과의 전쟁을 위한 엄청난 군량을 축적해두었다.
16세기 초인 중종 , 명종 당시 1년 전세 수세액은 26만석에서 27만석이었는데, 당시 국가의 녹봉 지출은 1년에 14만석이었다. 군수곡도 군자비축이 조선 초기에는 50만석, 세종 때 20만석, 문종 때 10만석에 불과했다. 세조 때에 군자가 90만석으로 올랐으나, 성종 때 50만석 정도였다. 중종 때 조선의 삼창(三倉)의 저장한 곡식이 203만석, 임란 직전에는 50만석에 불과했다.
도량형 가운데 미곡의 표준량은 세종때나 고려 문종에서 후기 신라에 이르기까지 표준량이 같았다. 1석은 15두로 4,476.7㎤이 된다. 고구려척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 요동성에 비축된 군자곡만 50만석, 개모성과 같은 작은 성에도 10만석의 식량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당나라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나, 조선과 비교해 보면 고구려의 변방에 위치한 성에서 축적된 군량의 규모가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조선에 비해 식량생산이나 그 축적된 양이 컸다는 것에 의심을 품을 수는 있다. 무엇보다 조선이 농법의 개량으로 단위당 생산량이 더 높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농경지역이 경상, 전라, 충청 등 남부지역이 중심이었다. 일제시기에 황해도 일대는 가장 많은 식량을 생산한 곡창지대였다. 그러나 조선은 황해도, 평안도 지역의 인구가 적어 조선초기에는 그 식량생산이 남부지역에 비해 현저하게 적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당시 경상도는 17,3757명이 거주한 조선 최고의 도였다. 하지만 토지는 30만 1147결로 평안도의 30만 8751결보다 적었다. 전라도는 27만 7588결, 충청도 23만 6300결, 경기도 20만 347결과 비교해보아도 평안도는 최고였다. 황해도는 10만 4072결로 함경도 13만 413결과 함께 수치가적어 강원도 6만 5916결을 제외하고는 조선 8도 가운데 가장 적다.
하지만 황해도는 연백평야를 비롯한 비옥한 농지가 많아서 일제때에는 황해도가 가장 많은 양의 식량을 수탈당한 곳이기도 했다. 고구려 시기에 황해도에는 장수산 밑에 한성이 위치하여 10만 이상의 인구가 거주했던 곳으로 여겨질만큼 농업생산이 풍부했던 곳이다. 평안도는 당연히 고구려시대에 최고의 생산력을 발휘했다고 보여진다.
평안도, 황해도 일대가 고구려시대에 조선시대보다 더 개발되었다고 한다면 만주의 그 넓은 평야지대를 가진 고구려가 조선보다 식량생산이 더 많았다고 보는 것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연해주 지역, 연변지역, 농안-장춘 일대, 요하 지역, 요동반도 남단의 평야지역 등은 지금도 비옥한 농경지대다. 게다가 고구려는 수렵 등 부수적인 식량생산이 조선보다 많았으므로 농법이 덜 발달되었다고 조선보다 식량생산이 적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특히 조선의 경우 소가 부족하여 우경이 제대로 실시 되지 못한 농경지가 많았던 것에 비한다면 고구려는 소 때문에 우경이 실시되지 못하지는 않았다. 고구려는 소가 풍부한 나라였다. 이 점도 고구려를 보는 시각에 교정을 요한다.
고구려는 풍부한 농경지와 이들 지역을 보호하는 주변지대를 확보함으로써 문명의 중심지로서의 역량을 확실하게 갖출 수 있었다. 식량 생산량이 많아짐에 따라 대규모 무역 거래도 일어난다. 요서의 조양지방에는 거대한 국제시장이 있었다. 상인 2만 명이 한번에 몰려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고려시장이 있었다. 고구려는 충분한 농업생산물로 유목국가와 교역하고, 말이나 초피와 같은 유목의 생산품을 남조에 수출하기도 했다. 고구려의 종이, 금, 은, 철, 약재 등은 매우 중요한 수출품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각종 수공업 제품, 비단과 모직 제품, 가구, 책 등도 수출품이었을 것이나, 기록에는 의외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각궁과 천리마와 같이 특별한 선물로 보낸 것을 수출품이라고 분류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매우 적었다고 봐야 한다.
고구려가 거래한 나라중에 주목할 국가는 유연이다. 유연은 북위와 오랜 시간을 대치중이었고, 수시로 전쟁을 치루었다. 때문에 농경국가로부터 얻어야 할 식량 등의 산물을 얻는 것에 곤란을 겪었다. 이때 가장 유용한 교역국가로 등장한 것이 고구려다. 고구려가 유연과 오랜 평화, 동맹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서로간의 경제적 이해가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농경국가로서 위상이 확고했기 때문에 5-6세기에 유연을 동맹국으로 삼아 북위를 견제하고, 송과도 교역하는 등 국제관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일본과 만주족과 일부 제한된 교역을 하고, 명과 교역에 의존했던 조선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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