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회화사
수나라(581∼618).
중국의 통일왕조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문제·양제(煬帝: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랜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
당나라 (618~8
당은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형성했던 중국의 통일 왕조로서 시기적으로 (7C~9C)에 이른다. 이 시기에는 ①동서의 문화교류를 통해 불교와 도교가 발달하였고, ②회화 개방의 시기로서 많은 화가를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③외래사상을 독창적으로 소화하여 체계적인 회화이론과 기교를 발전시켰다.
이리하여 당 회화의 특징은 ①회화 품격의 통일, ②파벌과 단체 조직의 융성, ③현실주의적 회화 발달, ④회화영역의 확대로 산수, 화조의 독립등으로 요약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당조의 회화는 세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①당 초기에는 (618~712)정치적 색채가 강하여 궁정 정치 방침에 배합하는 창작이 이루어져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크게는 염립본, 염립덕 형제를 대표로 하는 전통파이 귀족회화와 위지을승 등 불교사상을 가진 서역파가 대립되었는데, 특히 위지을승의 서역화풍은 사실주의적인 것으로 음영법이 사용되었다.
②중기에는 (712~762)종래의 세밀하고 정교하던 기법이 웅장한 풍으로 변화되었고, 서역화풍이 전래되어 새로운 화풍이 가미 되었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인물과 불상 위주이던 회화의 소재가 생활주변의 모든 것으로 확대되었다. 오도자와 같은 천재화가가 등장하여 수묵화의 시조가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 이래 태동된 산수화가 자리를 잡아 이사훈과 왕유라는 대가로 이어졌다. 이사훈은 이후 북종화의 시조로서 귀족화가로 청록산수를 그렸는데, 그는 산수화에 이상을 표현하였으며 유,불,도 삼교를 포용한 합일 사상을 지녔다. 왕유는 이후 남종화의 시조가 된 시문을 겸비한 승려화가이다. 당 중기 이후부터 정치가 쇠약해지고 호화로운 궁정생활이 궁핍해지자 선종이 흥하여 사대부들의 출세사상이 유행하고 은거하는 자가 많아졌다. 예술 또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수묵산수가 유행하게 된 것이니 왕유는 중국 문인화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그는 회화사상이 당초와 달라 작가의 감흥에 의해 그려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③당 말기에는 안녹사의 난 등 정치적, 정세적 불안으로 회화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시기이다. 오히려 여러 난을 거치면서 명화가 대중에게 보존되어 회화감상의 대중화 및 민간 회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말기의 인물화로 주방, 장훤의 그림은 규방생활을 주제로 귀족의 인물과 생활을 그려냈는데 부피와 운동감의 묘사가 뛰어났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할 것은 왕유의 수묵산수화 기법을 이어받은 발묵 산수기법으로 일품산수화가 8C 후반부터 등장했던 것이다. 일품산수는 전통산수화와는 상반된 필법으로 천재적 재주와 개성으로 즉흥적으로 그려낸 비전통화로서 당 말기에 점차 부흥되어 사실적 화풍을 사의적으로 변환시키고 오대 이후 화단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니, 북송의 미법산수에 계승된다. 일품산수화가로 왕묵, 장조, 장지화 등이 있다
일품화 : 8C후반 (당말기)등장.
-정통화법을 벗어난 작가의 감흥과 호방한 개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그림
-주경현<당조명화록> : 신, 묘, 능 3품/일품
-일품이란 "상법에 어긋나는 것, 본법이 아닌 것, 예전에는 없던 것
⇒ 최하위 등급
-황휴복<익주명화록> : 송초
-일품에 최고의 평가 부여
①왕유의 수묵 산수기법을 이어받은 발묵산수 기법
②비정통화/ 즉흥적/ 광적 작화 태도
③당 말기부터 부흥 → 오대 이후 더욱 큰 영향
④사실적 화풍 전환 → 사의적화풍 ⇒ 문인화의 발달에 영향을 크게 미침
⑤6법중- 골법용필, 응물상형, 수류부채를 버리고 기운생동 중시 ⇒추상적 성격
⑥화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인정하는 새로운 회화의 길
⑦장자의 일(逸)철학과 상통
⑧당 → 왕묵, 장조, 장지화
오대 → 손위, 선월, 석각
⑨후대 영향 → 송: 미불부자 원: 고극공
목계 / 옥간 →조방필법
팔대산인 → 조방필법
오창석 / 제백석
회 화
남종화, 북종화의 개념 - 그림 그릴 때의 표현 방법의 차이, -산수화 기법의 완성
북종화 표현 : 정밀한 세필과 표현기법, 관념적이고 장식위주
남종화 표현 : 맑고 우아함, 먹의 농담변화의 삼묵법, 문인화
- 송 : 형호, 관동, 거연, 곽충서 미불, 미우인
- 원말 사대가 : 황공망, 예찬, 오진, 왕몽
- 명 : 심주, 문징명, 동기창
- 명, 청대에 남종화 전성기
오도자
오도자는 당대의 천재적인 화가였다. 그는 8C기에 주로 활동하였는데, 8C는 시기적으로 당 중기에 해당하며 당 초기의 회화가 정치적 색채를 띄고 작가의 갱성의 개입없이 궁정의 정치 방침에 배합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던 한계를 벗어나 소재의 폭을 넓히고 활발히 회화 활동이 전개 되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때에 오도자는 특히 도석 인물화로 유명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벽화가로서 벽화를 많이 남겼다. 그의 화법은 본래 장승요의 화법을 배우고 후에 섬세 화법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선미화법을 창안하였으니 이는 오대 당풍식이다. 그의 회화는 대중적이었으며 진실로 수묵화의 시조라 할 선묘방식을 사용하였다.
오도자의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고 산수화에 있어서도 탁월한 업적을 세웠으니, 이는 남북조 시대의 왕미, 종병으로부터 연유된 산수화를 확립하여 이사훈과 왕유로 연결시키는데에 공헌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당대에 확립된 산수화는 후에 중국회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잡아 발달하게 되니, 이것은 중국인들의 산수자연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상적으로 장자의 유철학, 선종의 도에 관한 희구로부터 기인한다 하겠다.
①천재적인 화가
②도석 인물화로 유명
③당대 최고의 벽화가
④장승요의 화법을 배우고 후에 섬세화법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선미화법 창안 → 오대,당 풍식
⑤대중적
⑥수묵화의 시조 →선묘방식 사용
⑦산수화 확립
⑧산수화 → 중국인들의 산수 자연에 대한 사랑을 의미
장자의 유(游)철학 선종의 도에 관한 희구에서 기인
이사훈 : 북화의 시조 -청록산수화 -작품 : 명황행촉도
①귀족화가 / 정통화가
②청록산수 / 북파의 시조
③산수화에 이상을 표현
④한 화면에 해수, 인마. 수림, 사관을 장엄하게 표현
⑤유, 불, 도 3교대파를 포용하는 '합일사상'
왕유 : 남화의 시조 - 관념적 수묵산수화 “화중유시 시중유화-소동파”
①수묵산수 / 승려화가 / 남화의 시조 / 은거
②당 중기 이후 선종의 출세사상
→ 은거자 다출
→ 수묵산수로 점차 변천
③시인의 바탕위에 회화적 예술성을 표현하는 서정예술 완성
④중국 문인화의 시조
⑤작가의 감흥과 흥취에 의한 창작 주장
이사훈과 왕유는 당 중기에 해당하는 18C전반에 활약했던 화가로서 중국 산수화 발전사를 이해함에 있어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이다.
본래 산수화는 남북조 시대에 왕미와 종병에 의해 태동 되었고 당의 오도자에 의해 확립되어 이사훈과 왕유에 의해 그 틀을 완성하고 오대, 송에 절정으로 꽃 피우게 된다. 특히 이들이 활동했던 8C는 당 초의 화풍, 즉 정치적 색채를 띄어 교화적이며 작가의 개성표출을 기대할 수 없던 회화풍이 면모하여 문인화의 터전이 성립되고 회화의 소재면에서 인물과 불상 위주로 한정되었던 것이 생활주변의 모든 것으로 확대 되었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사훈은 왕유보다 49세 연상이다. 그래서 왕유는 초년에는 이사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엄격히 이사훈과 왕유는 화법상 구분된다.
이사훈은 귀족화가로서 정통파 화가이다. 그는 청록 산수(금벽산수)로 유명하며 명대 동기창은 산수화를 남북종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북파의 시조가 바로 이사훈이다. 이사훈은 당 초기의 국위를 선양하려는 작품과는 달리 산수화에 이상을 표현하였으며, 한 화면에 해수, 인마, 수림, 사관을 장엄하게 표현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유, 불, 도 3대교파를 포용하는 합일사상을 갖고 있었다.
왕유는 초년에는 이사훈의 금벽산수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수묵법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사훈의 북화에 대해 남화의 시조라 한다. 그는 본래 승려출신으로서 은거하는 예술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당 중기 이후 정치의 쇠약으로 호화로운 궁정생활이 궁핍해지자 선종이 유행하게 되었다. 본래 선종의 교리는 완전히 현실 인생의 일상 생활에 돌아가 웃고, 울고, 화내는 동안에 도를 깨칠수 있다고 가르치며 곧 종교적 속박을 벗어나 현실 인생으로 귀의 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같은 선종은 장자의 ( )철학과 함께 산수화의 발달에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쨌든 당시의 선종의 유행은 사대부들의 출세사상을 흥하게 하여 은거하는 자가 많았다. 예술도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사훈식 귀족취향의 금벽산수는 왕유이래 수묵산수로 점차 전환하게 되었다. 왕유는 그러므로 수묵산수의 시조로서 시인의 바탕위에 회화적 예술성을 표현하는 서정 예술을 완성하였으니 중국 문인화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그는 당 초기의 경직된 화풍과는 달리 작가의 감흥과 흥취에 의한 창작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지식인의 호감을 얻어 널리 발전하였다.
염입본 : ‘역대제왕도’ 13명의 제왕 배경 없이 인물위주
장훤 : 괵국부인 유춘도 - 가는데 마다 있다.
한간 : 말그림 “조야백도권”
미술 이론서
장언원 : 역대 명화기 최초의 회화사서
벽화 :돈황, 장회태자묘, 영태공주 묘
건축 : 대자은사(대안탑, 삼장법사지은탑), 천복사(소안탑, 의정스님)
공예 : 당삼채 녹, 황, 남색의 유약으로 배합, 장안과 낙양에서 많이 제작, 부장품
서예 : 안진경 -힘이 넘침. 1000년동안 중국 과거 시험장 표본글씨
오, 송대 미술
황실화원, 화학의 발전, 문인 사대부 회화, 민간수요에 다른 상품성, 산수화와 화조화 독립
오대 (907~960)
오대 ; 인물초상화 궁정화원이 황실의 귀족의 초상화제작과 향락적 생활을 그린 ‘고굉중’(남당화원의 대조 지냄)
산수화
화북지역: 큰 산이 많아 높은 산고 험한 고개가 겹겹이 쌓인 그림. - 형호, 관동
강남지역: 중원의 회화전통을 계승한 종교화화 화조화, 인물화, 산수화 발달, 산은 대부분 완만한 흙 둔덕처럼 묘사함. 동원 거연
피마준(마,산능선), 부벽준(도끼, 암벽), 절대준(ㄱ,ㄴ 꺾어,강언덕 바위), 하엽준(연잎의 맥, 산), 우점준(빗방울 모양/산,언덕)
산수화의 이론서 : 필법기 (물체의 근원을 분명히 해야함. - 형호가 지음)
①형호의 일생동안의 산수화 창작경험과 기교의 전수, 비평표준 수록
②유가, 도인적 사상이 주축
③'도가'의 자연주의 사상에 영향
④회화의 본질: 진(물상속에 내재하는 진실)
⑤산수의 형상은 기세(불질의 생명력)가 살아 있어야 한다.
⑥"육요": 산수화 창작의 여섯가지 기준.
→기, 운. 사. 경. 필. 묵
(신의 표현) (구사활동) (정확한 표현) (용필, 용묵)
→진실을 표현하는 것
→관찰 체험으로 가능 : 사물을 파악할 때까지 체험과 모사 활동을 할 것
정치적으로 불안 →은거자 다출, 선종사상
순수회화에의 관심 증가 →산수화 발전
수묵산수: 사실화풍에서 사의화풍으로의 전환을 의미
*형호
① 은거한 선비 → 화북지방
②<필법기>: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저술
③"육요"; 기,운,사,경,필,묵
→산수화 창작을 위한 여섯 가지 기준.
④이론과 실기면에서 가장 완벽한 산수를 그림 →동양산수화의 시조.
*관동 : 형호와 함께 '형관파'
①형호의 제가
②이성, 범관, 관동 → 북송초 3대가
형호, 관동, 동원, 거연 →중국 산수화의 4대종사
③거비파
④산의 골격, 형태, 신운등 '산수화의 삼미'터득
⑤추산, 한림즐김
→이성, 범관, 관희, 황공망, 문징명, 당인에게 전해짐
송나라(960-1279)
직업화가 활약, 궁정회화 융성, (한림도화원, 화학설립), 사대부회화형성, 제재와 화풍의 다양성, 화사, 화론의 저술(도화견문지,곽약허), 곽희(임천고치),
북송의 산수는 대산대수식 고원 산수화이며 위압적이고 장대한 느낌의 수묵산수인데 반해 남송의 산수는 변각구도의 소경산수이며 서정적, 부드러운 느낌의 평원산수로서 청록산수이다. 송대에 완성된 산수화는 문인화가 계열의 북송회화는 원4대가를 거쳐 명대 오파에게 이어졌고 남송 원체화풍은 명대 절파에게 이어졌다.
북송의 산수 ①문인화가의 전성기였으면서도 ②도화서의 설립과 함께 화원들에 의해 ③회화 기법이 현저하게 진보하였으며, ④사실과 사의의 완벽한 조화로 인해 ⑤중국회화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북송 산수화의 특징은 남송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형식적으로는 대산대수식 산수와, 왕유 이래의 수묵 산수계열이 유행하였고, 중심 세력은 문인화가가 많았다. 그 화풍의 느낌은 웅대하고 장엄한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성 , 범관 등의 거비파 화가, 곽희, 동원, 거연, 미불, 미우인 등이 있다
인물화 - 양해, 선종 남송화가, 술을 좋아하고 기이한 행동을 함, 감필화, 일필로 사의 인물화 양식 창조- 원,명대에 사의 인물화 선구자, - 발묵 선인도
송대 풍속화 : 장택단 - “청명상하도” - 송대 풍속화 대표걸작. 수공업과 상업 무역활동 풍경.
산수화 : 곽희 (산수화 이론의 완성자) - 조춘도, 임천고치 - 산수훈, 화의, 화결, 화격습유, 화제
삼원법 : 고원법, 심원법, 평원법
화조화 : 송휘종(신종의 아들) - 문화제를 수집 보화하고 서화원을 설치, 궁정서화가를 양성, 예술의 황금기를 이룸
남송의 산수는 ①소경산수요, ②평원산수였다. 북송대에 왕유이래의 수묵산수가 유행하였다면 남송대에는 ③이사훈 계열의 청록산수가 유행하였고, 북송대에 주로 문인화가들에 의해 주도 되었다면 남송대에는 ④화원들에 의해 이른바 원체화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송의 대표적 화가로서 ⑤이당, 마원, 하규, 유송년, 목계, 옥간 등일 것이다.
남송 사대가 : 문인 사대부 마음 속의 형사(사의), 흉중에 있는 물상(문동-검은대나무)
이당(의사진료모습-적애도, 웅건한영향), 유송년(전아한느낌, 수묵산수, 청록산수), 마원(그림에 제화시를 처음 사용), 하규(패방한 나라 산천을 그림, 처량한 분위기)
원나라(1271-1368)
조맹부 : 남종 문인화 발전, 송설체 탄생, 우리나라 고려부터 조선까지 영향 미침
원말 사대가 : 몽고족의 탄압을 피해 자연 속의 고요함을 추구함. 북송 산수화풍의 양식이안 묘사형식에서 벗어나는 계기 마련.
황공망 - 천강산수화, 적묵산수법 창시
예 찬 - 단순한 화법 맑고 청일, 은둔생활에서 오는 사의적이며 추상적 화풍
오 진 - 묵죽과 묵매에 능함, 형상에 구애됨 없이 자기 사의에 치중
왕 몽 - 강남의 습한 풍경, 기괴한 고원산수, 예찬과 대조 이룸
원4대가들은 송대 그림에 비해 더욱 추상적으로 진일보하여 그야말로 꿈결처럼 허영한 초탈의 경지를 보여준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이들 4인중 3인이 은거생활을 몸소 실천한 선비들로서 선사사상에 깊은 이해가 있었으니 이로서 수묵산수발전에 성과가 큰 것이다. 원4대가는 도가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으니 초형상적 그림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원대에는 고극공이 그린 미법산수가 있다. 그는 북송 미불부가의 미법산수를 배워 산의 묘사가 다채로운 다양한 회화를 남겼다.
원대 문인화의 융성은 명 초에는 직업화가풍의 유행으로 잠시 맥이 끊어지는 듯 하였으나 오파의 등장과 함께 후대에 이들의 문기와 높은 화격을 따르는 이가 많았다.
공예 : 경덕진요 - 한 대 진대부터 도자기 시작, 북송 때 전성기, 전국도자공예 중심지
중국 화원제도 : 송(한림도화원), 원(어국사, 수묵산수화, 고득공), 명, 청(여의관-선교활동 외국인)
명나라(1368-1644)
회화는 명대에 들어 급속히 복고운동이 진전되어 원대에 폐지된 화원(畵院)을 재건하여 궁중화가를 양성하고 화가를 우대하여 작품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선덕제(宣德帝) 이후 많은 유명화가가 활약하여 마원(馬遠) 계통의 예단(倪端), 하규(夏珪) 계통의 주문정(周文靖), 후에 절파(浙派)의 개조(開祖)가 된 대진(戴進) 및 이재(李在) 등이 당시의 화단을 주도하였다. 절파의 화풍은 마원 ·하규의 송나라 원체화(院體畵)에다 원나라 초에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린 수묵체(水墨體)를 배합한 거친 필법으로 다룬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빈약하고 형식에 치우쳐 퇴색하였다.
한편 당초에는 화원의 후원자였던 명나라의 황제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가의 자유를 속박하였기 때문에 화가의 활약도 점차 침체되었다. 이러한 화원의 어용화가(御用畵家)와는 달리 재야의 화가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 명대의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는데 그 중 손꼽히는 화가는 구영(仇英)이다. 그는 남송화원(南宋畵院)의 화가 진각(陳珏)을 개조로 하는 원파(院派)에 속하여 그 정통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이당(李唐) ·마원 ·하규와 문인화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양식을 배합하여 원파의 영역을 벗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재야 화가 속에서 문인화(文人畵)가 크게 발흥한 것도 이 시기이다. 화원이 쇠퇴하고 원파의 형식화가 굳어져 가자 이에 대항해서 문인화가들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선두에 나선 것은 심주와 그 제자인 문징명(文徵明)으로 이들은 원대의 4대가(黃公望 ·吳鎭 ·倪讚 ·王蒙)와 북화(北畵)의 필법을 조화해서 명대 남화를 부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들은 원대의 4대가에 비해 기술 ·기백에서 매우 뒤졌다. 가정제(嘉靖帝) 이후 17세기 중엽까지 문인화는 전성기를 맞아 많은 문인화가를 배출하였으나, 뛰어난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문징명 이후의 문인화가로는 문백인(文伯仁) ·동기창(董其昌) ·예원로(倪元璐) 등이 알려졌다.
-중국회화 발전의 절정기라 하면 송대이고 그 이후는 점차 쇠퇴일로라 할 수 있었다. 명대에는 파벌이 많이 등장하였으나 창조적 회화운동이 적었고 전대의 화풍을 임모하는 모방의 전성시대요, 창작쇠미시대였다. 명대는 전반적으로 원파, 오파, 절파의 대립양상으로 전개되다가 명 말기에 개성파 화가들이 등장함으로서 짧지만 활기를 띄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원파는 주신을 시조로 하고 구영, 당인등을 대표로 하는 고답주의 화풍으로 송인의 화풍을 모방하여 화의가 면밀하였다.
절파는 대진을 시조로 하여 오원, 남영으로 연결되는 대표적인 직업화풍이다. 이들 중 대부분이 절강지방 출신이라 붙여진 이름이 '절파'이다. 이들은 마하파등 남송원체화풍에서 출발하여 이들보다 웅위, 장엄한 예술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화원과 원파화가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고, 회화 기법상 진일보하게 하는 업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직업화가들의 기교를 표면화하여 결과적으로는 감정이 없이 과장된 표현만 남았으니, 자유성의 표현이 결핍되어작가의 개성신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표현을 강조하는 문인화가들은 절파를 배척하였고 '광태사학'이라 칭하여 비판하였다. 절파화풍에서는 여기화가들의 기품을 기대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중국산수화의 이상주의 성격의 결핍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절파화풍은 우리나라 회화에 전래되어 미친 영향이 크니 조선중기, 즉 16C중엽~ 17CD에 걸쳐 김제, 김명국, 이징, 이정 등 절파계가 유행했던 것이 그것이다.
오파는 절파에 대립되는 문인 남종화파이다. 이들은 명초에 원파, 절파의 극성으로 공백이었다가 심주의 출현으로 세력을 회복한 문인화파로서, 오파의 융성에 의해 절파와 원파의 쇠락을 가져왔다. 오파 4대가로 심주, 문징명, 동기창, 진계원을 들 수 있다. 심주는 명매 문인화의 선구자로서 산수, 인물, 화조등 각종 화법에서 명대 제 일인자였다. 송, 원의 명작을 연구하고 원4대가를 따라 시정과 화의가 가득한 히화를 창작하였으며, 문징명과 같은 남종 문인화의 시조로서 이론과 실기를 겸하였으니 '무종실록'을 편찬하였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동기창은 고고한 인품과 <상남폄북론>으로 더더욱 유명하다. 그는 산수화의 남북종론은 펼쳐 남종화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는데, 이사훈을 종으로하는 절파등을 북종으로 분류하여 공격하였고 왕유를 시조로 하는 남종화를 추앙하였다. 그의 주장은 많은 이들에게 감화를 주고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그가 화가이기 이전에 서화에 뛰어난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화풍 자체는 온화하고 기백이 없었으며, 이러한 남북종론의 폐단으로 화가들에게 흑백논리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인화의 전통을 확립하여 한국과 일본에 미친 영향이 크다.
이후 명 말에 오파는 분열하였고 새로운 형태의 문인화로서 서위, 진흥수 등이 등장하였다. 특히 명 말기 정치적 혼란과 명, 청의 교체기에는 새로운 정복왕조인 청에 대한 반항과 시대적 암울을 구도법에서 시작하여 형식주의와 전형주의를 부정하는 4승유민들로 이어졌다. 명의 유민화가로서 팔대산인, 석도, 석계, 홍인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개성주의자들로서 시각상의 충실함으로서 과감히 이탈하여 비정통적 필법을 위해 개성적, 형이상학적, 자주적인 순사를 그렸으니 근대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 그림은 청말 양주팔괴와도 성격적 연계성이 있다.
도자기는 송대까지 성행한 양질(良質)의 청자 ·백자 ·천목(天目:찻잔의 일종) 종류는 쇠퇴하고, 화려한 무늬를 입힌 청화백자(靑華白磁) ·적회(赤繪) ·진사(辰砂) 종류를 만들게 되었다. 명초에 육조(六朝) 이래의 유명한 자기 생산지인 징더전[景德鎭]에 어기창(御器廠:官窯)을 설치하여 명대의 자기를 대표하는 명품은 거의 이곳에서 만들어냈는데, 청화백자 ·진사는 선덕제 때에, 적회는 가정시대에 각각 그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건축은 명초에 난징[南京]에 축조한 황성 ·궁성이 지금은 없어졌으나 이를 본뜬 베이징의 궁성이 남아 있어 현재도 베이징 경관(景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天壇)도 이 시대에 축조되었고, 불교건축으로는 부다가야 대탑(大塔)의 형식을 본뜬 금강보좌(金剛寶座)가 세워져 대정각사(大正覺寺:五塔寺)의 탑(1473 건립)이 그 유구(遺構)로 남아 있다.
대표 건축물
자금성, 종루, 고루, 비홍탑(무지개), 명대 성곽, 졸정원(어리석은자가 정치한다)
회 화
오파는 고답주의 화풍으로 송인의 화풍을 모방하여 화의가 면밀하였다.
절파는 직업화풍
절파와 오파의 비교
-중국회화는 남북조 이래 당, 오대, 송을 거치면서 자연에의 관심과 사의성와 이상성의 추구라는 과점에서 오랜 발전을 거듭해왔다. 특히 송대는 이러한 측면에서 사의와 사실의 완벽한 조화로 중국회화사상 가장 찬란한 업적을 세웠고, 원대에는 더욱더 추상적 발전을 거듭하여 남종문인화라는 장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명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사의와 이상성의 추구라는 측면이 어느정도 도식화, 내지 형식화 되었고, 이리하여 진정한 사의의 기본정신이 결핍되어지던 시기이다.
명대의 화단은 절파와 오파라는 양대세력의 대립과 함께 수 많은 파벌과 선대의 명작을 임모함이 유행하여 이를 통해 다양성과 독창성의 추구보다는 전대의 전통을 종법으로 하는 아류로서 성행하였다.
절파는 절강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직업화가의 화풍이다. 대진을 중심으로 오위, 남영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직업화가의 기술을 표면화 시켰으며, 고도의 회화적 기량을 선보였다. 남송원체화풍과 마하파 양식을 계승하였으며 이를 더욱 웅위하고 장엄한 예술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기교적 회화는 결과적으로 감정이 없고 과장된 표현만 남았고, 작가들의 자유적 표현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오파 문인화가들은 절파를 '광태사학'이라 칭하여 배척하였다. 절파는 이렇듯 중국회화의 이상주의 성격의 결핍을 초래하였고, 기품이 떨어졌으나 회화기법상 공적이 크며, 화원과 원파화가들 뿐만 아니라 한국화단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6C 강희안에게서 처음 엿보인 절파의 잔영은 17C화단에서는 김명국, 윤정립, 이정, 김제, 이경윤 등 조선의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주며 커다란 유행이 되었다.
오파는 대개 남종화에 속하며 심주, 문징명 등에 의해 융성하여 절파와 원파의 쇠락을 가져왔다. 심주는 명대 문인화의 선구자로서 명대 제 일인자였고 문징명등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문징명 역시 남종화 유행에 지대한 공로를 했으나 무엇보다도 걸출한 인물은 동기창일 것이다. 동기창은 <상남폄북론>을 통해 최초로 남북분종론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북종화를 천한 것으로 업신 여기고 왕유를 시조로 하여, 형호/관동, 동원/거연, 미불부자, 소동파, 문동, 목계/옥간, 원4대가등의 남종화를 전통이라 주장하여 문기와 서권기 넘치는 문인화를 숭상하였다.동기창은 그의 높은 학식과 인품으로 인해 더욱 세인의 추앙을 받아 그의 영향은 대단했는데, 특히 총대 사왕, 오,운이나 한국화안에 미친 영향이 크다. 조선후기 이인상, 강세황, 심사정, 김유성, 이재관뿐 아니라 말기 김정희, 조희룡, 허유, 전기등은 모두 남종화 계열에 속하는 이들로서 조선화단에서의 남종화 유행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와같이 명대의 절파와 오파는 각기 대립된 양식으로 발전하였던 화풍으로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만, 조선에서 이 대립적 화풍을 수용함에 있어서는 철학적, 사상적, 위받침 없이 양식적 외면을 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남종화풍의 수용자 중에 화원화가들도 적지 않았고, 강희안과 같은 높은 문기의 소유자가 절파풍 회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명대화단의 위와같은 대립적 양상은 결국 오파의 승리로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기창에 의한 남북분종론은 역대 회화를 정리하였다는 측면에서 어느정도 의의가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파 중심의 남종화론은 이후 화가들에게 독선주의와 사고주의 및 형식주의에 빠지게 하여 사의의 기본정신의 결여를 초래하였고 청대화다느이 매너리즘도 이와 같은 측면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것은 19C조선 화단의 추사파의 득세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와도 비슷한 맥락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오파(동기창: 상남폄북론- 사실적 북종화(절파), 사의적 남종화(오파))
남종화(정신적이고 미적가치 높다하며 숭상함) - 북송- 동원 거연, 이성, 범관, 미불, 원말4대가(오진, 황공망, 예찬, 왕몽), 명말 4대가(진계유, 심주, 문징명, 동기창)
북종화(직업화가, 천박, 미적가치 떨어진다고 배척) - 이사훈, 이당, 유송년, 마원, 하규
<남화의 특색>
1. 강남 지방의 온화하고 기름진 기후풍토를 배경으로 하고 발전한 예술.
2. 재야파의 비전문적 문인, 선승, 사대부 중심의 이상적 혁신파의 예술.
3. 평민적 지사, 도승들의 절개와 지조를 나타내는 야일사상의 예술
4. 유연한 필치의 담채, 또는 수묵을 사용한 사의적 화풍
5. 시문회화를 아울러 표현하는 종합예술
6. 피마준, 절대준, 해삭준 등을 많이 사용
<북화의 특색>
1. 화북 지방의 험악하고 극렬한 기후풍토를 배경으로 발전한 예술
2. 원체파의 전문적 궁정화가 중심의 아카데믹한 전통파 예술
3. 왕후,귀족 중심의 생활을 장식화하는 부귀사상의 예술
4. 강경한 필치에 의한 농채, 또는 수묵을 사용한 사실적 화풍
5. 회화만을 주제로 하는 단일 예술
6. 부벽준과 구륵법, 구작법 등을 자주 사용
남종화(정신적이고 미적가치 높다하며 숭상함) - 북송- 동원 거연, 이성, 범관, 미불, 원말4대가(오진, 황공망, 예찬, 왕몽), 명말 4대가(진계유, 심주, 문징명, 동기창)
북종화(직업화가, 천박, 미적가치 떨어진다고 배척) - 이사훈, 이당, 유송년, 마원, 하규
동기창 - 창조적 재해석으로 표현상의 변형 양식 추구
심주 - 오파의 창시자. 그림 속에 자신의 인생과 철학을 부여하는 새로운 산수화 창출.
높은 산을 스승의 높은 덕으로 상징하는 그림 ‘여산고도’,
문징명 - 남종 문인화 그림을 전국적으로 확대함.
서위 - 형태마져 부숴버린 것인 후대 추상화의 시원으로 보고 있음. 화훼잡가, 대나무
명말 사승려 화가 : 팔대산인(수묵화의 간결함의 극치), 석도(황산에 머무르며 산의 풍경을 그림), 점강, 석계
당삼채와 경덕진요의 특징 요약
경덕진요 : 명대 왕실기물 전문 생산하는 관요인 어기창 설치 화려하고 귀족적이며 도자기의 황금 시대,
청나라 (1644-1912)
청초의 화단은 보수파로서 이민족의 정복왕조에 순응하는 권위주의적이고도 비타협적인 성격을 띄는, 또 동기창의 명대 문인화풍을 무조건 옹호, 모방, 계승하려는 사왕, 오, 운의 세력과 명조의 충성을 고집하고 청조에 저항하는 현실도피적이고도 전위적, 현실적, 개성적인 화파인 혁신파 유민화가와의 대립과 갈등시기이다.
명이 망하고 청으로의 정권교체의 정치적 변화는 당시의 지식인이던 문인화가들의 생활 기초를 흔들었고 이들은 망국의 슬픔으로 민족주의 경향의 회화창작을 당분간 지속하였다. 그러나 정권이 안정되자 명의 유민화가들의 개성파 회화는 사라지고 정복왕조에 순응하는 권위적 화풍이 안이하게 화단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사왕, 오, 운이다.
이들 육대 산수화가의 화풍은 별다른 비판없이 매너리즘에 빠진 청대 화단에 유행하여 청 말기에 이르기까지 독창적 창작 의식은 결여된 채 대개 지속되었다. 그러나 청 말기에 다시한번 새로운 화풍의 진척이 화조화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것은 본격적인 중국회화의 근대화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청초의 육대 산수화가는 왕휘, 왕감, 왕원기, 왕시민의 사왕과 오력, 운수평이다.
왕시민은 청 초 화단의 제일인자로서 청조의 산수와 명대의 산수를 연결시킨 공로자이다. 왕감은 원의 유풍을 풍기며 동원과 거연을 따랐다.
왕휘는 우산파를 형성하여 남북종 화법을 융합하였고 왕원기는 폭이 넓고 뜻이 깊은 산수를 그리고 자연주의적 사회관을 가져 루동파를 형성하였으나 종법에 지나치게 치우쳐 오히려 독창적 창작의식이 결여 되었다. 오력은 기독교로서 개성적, 고립적 화풍으로 후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운수평은 본래 왕휘를 닮은 산수화가였으나 화훼화로 전향하여 청대제일의 화훼화가가 되었으니 중국 몰골화법의 주류로서 이를 현대에까지 전해주고 사의적이고 형태가 간결하며 색채가 선명한 화훼르 그렸다.
이러한 6대 산수호가들은 동기창 이후 확립된 전형주의를 추구하여 고인의 화풍을 모방할 뿐 개성과 시취발견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무성격, 형식주의 경향은 순치, 건률연간을 통해 청대화단의 기주적 세력을 이룩하였으며 청대화단의 개성발현은 건륭이후 양주팔괴 중심으로 회복되었다.
건축 : 원명원(황제의 별궁 무릉도원 별천지),
이화원(호수에서 퍼낸 흙으로 만수산을 만듬),
천단 기년전(왕들이 해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전, 중국 최대의 제사 건물)
회 화
사왕, 오운
사왕 - 왕시민, 왕감, 왕휘, 왕원기(색중에 먹이 있고, 먹중에 색이 있다),
오운 - 오력: 카톨릭신자, 산수화의 대가, 서양화기법인 명암법, 투시법, 흑백대비기법 사용
운수평 : 몰골법을 계승 발전
사왕, 오, 운 →왕원기, 왕감, 왕휘, 왕시민, 오력, 운수평
①왕시민: 명조 산수를 청으로 연결
-산림속에 은거하며 시화를 즐김
-어려서 동기창, 진계유의 회화풍을 배우고 학문을 좋아하였고, 많은 서화를 감상하고 시를 짓는 등 회화 감상력이 어려서부터 뛰어남
-황공망을 습득한 후 신운의 작품 남김
-청수한 것이 장점, 웅장 웅회한 것이 결점
②왕 감: 동원, 거연을 따름, 원의 유풍을 즐김
-고화를 철저하게 임모한 후 자기세계 해탈
-묵이 진하고 빛이 나며 수목은 울창하고 번잡하나 난하지 않음
-언덕은 매우 깊고 요원
③왕 휘: 우산파 →남북종화법 융합
-왕시민에게 서화를 배웠는데 왕시민이 <왕시민이 스승이 되는 것인가, 왕 시민이 그에게 배우는 것인가? >
→즉 천재적 소질이 있음을 말함
-명말 만력 ~ 청초 강희 (300년간) 동안 중국 산수화의 수령역할 →우산파
-화풍 - 초년 : 수윤
-중년 : 침착
-노년 : 유창
-왕시민, 왕감의 영향, 도움을 많이 받음 (송, 원의 명작을 감상케 하고 강
-남지방의 아름다운 대자연을 구경시킴)
-강희 황제의 명으로 < >그림
(58세때 - 황제가 크게 기뻐함)
④왕원기: 루동파 →자신을 화종의 종파라 부르며 다른 파를 배척→ 지나치게 종법에 치우쳐 독창적 창작 의식 결여
-동원, 거연, 예찬, 황공망 추구
-왕시민의 손자로 조부의 필법을 깊이 이해, 황공망의 화법을 추구하여 일 가를 이룸
⑤오 력: 기독교로서 개성적, 고립적 화풍으로 후대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⑥운수평: 왕휘를 닯은 산수화가 → 화훼로 전향
-중국 몰골화가의 주류로서 이화법을 현재까지 전해준 공로자
(본래 중국 몰골화는 삼국시대의 장숭요가 발전시켰으며 청대의 운수평이 더욱 발전시킨 것)
-볼래 훌륭한 산수화가(왕휘닮음) → 화훼로 전향
-원칙상 항공망을 종사로 하나 독창적인 필력이 있음
-상주파 : 몰골화조화류 →청대 제일의 화조화가
-상생중시, 사의적, 형태 간격, 색채 선명
-사생의 의의를 부활시키고 화조화를 산수화와 같은 지위로 부상시킴
※ 이들은 모두 동기창 이후 확립되고 절대화된 화풍을 기본적 지도 양식으로 삼는 오파의 계승자들로 동기창에 의해 추진된 전형주의 추구 → 엣사람의 그림을 임모하여 정동된 화면을 얻는 대신 남화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개성과 시취를 발현을 기대할 수 없었다.
혁신파 유민화가 : 시대 상황에 대한 반항의식 표현
석도 : 승려로 명 왕족 출신, 사물의 외양이 아니라 영혼을 보고 같음과 같지 않음의 사이을 나타내야 함. 화법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고 주관적으로 그림. - 여산관폭도
①개성파 화가 중 가장 뛰어난 거장
②가장 위대한 비젼과 훌륭한 기교의 소유자
③창작력 풍부, 다작 →적극적 생활 (팔대산인과는 대조적)
④예술세계 : 자연으로부터 감각적 인상을 받아들이고 천지에 감추어진 힘을 이해하고자 노 력한 데서 성립
⑤자신의 이해와 사상을 천명함에 있어 기존의 양식에 의존치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 창출
⑥작품에서 늘 변화와 혁신 추구 → 창조적 예술 정신으로 충만
⑦황산파 → 우리나라 진경산수와 비슷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갈필로 그대로 표현
실경산수 → 이상화된 초형상적으로 의인화하여 개성적, 파격적, 근대적으로 표현하는 것
홍인, 매청
⑧팔대산인 보다 훨씬 유기적 성격
⑨다양한 시각적 자극 제한 → 질서잡힌 형태의 체계
⑩<화어록> → 1획의 중요성 강조
유, 불, 도 삼가 사상 혼재
현학적 깊이가 난해
일획 → 만획의 근원, 만물에 형태를 부여하는 수단
만가지 형상을 그리는 원인
→ 도가적 신비주의 자연 사상의 영향 받음
→ 정신 수련, 자연의 규명, 화면 구성과 기교, 전통계승과 창조 등
여러 가지 표현 기교로 회화 예술에 적용
풍부한 창조정신 반영
화가란 자연에 대한 감수와 천지조화의 이치에 대한 인식작용을 종중해야
하며 옛 사람의 화법에 속박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한 획의 이치를 무궁 한 변화를 그대로 화폭에 그려야 한다.
선의 작용을 지나치게 강조
팔대산인 : 명 왕족출신, 승려가 되어 미치광이 생활을 함. 하상화도, 물꼬기(눈 동그랗게)
①명말청초에 중국회화를 근대화시킨 인물
②왕가의 자손 → 승려가 됨 : 기인, 광인의 외로운 삶
③심주, 서위를 이어 문인 수묵화계 → 신문인화풍 개척자
④시문, 서화, 전각
⑤필법이 자유분방, 격식구애 없다, 독특한 개성 지님 → 일품화가
⑥노장사상에 영향
⑦괴로움과 절규 끝에 새로운 세계를 창출한 예술세계 → 천진하고 순박
⑧단순하고 세려된 수묵사의 화조화 많다.
→현실성, 전형성 강조, 형대적 감각, 대담성
⑨자유분방한 대담한 필치, 자연스런 여백처리, 농담의 수묵
⑩간결미→형의 단순화라는 중국 문인화의 변형
⑪현대적 감각
⑫청말 양주팔괴, 오창석, 제백석의 근원
청 중기 : 북방의 직업화가로 상인들에게 인기,
양주팔귀 : 이선, 김농(금석학공비), 고상, 정섭(변치 않는 사람을 상징, 그림가격 매김, 이방응, 나빙, 왕사신, 황신
개성을 중시, 감흥의 솔직한 표현을 목표, 면적인 표현. - 왕진, 조지겸, 오창석, 제백석까지 영향을 미침.
양주팔괴 (18C)
①각자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주장, 신선미, 개성미, 다양성
②부정의식, 절대적 고독성, 자조성, 풍자성
③석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우연의 법 (생활 가운에서 관찰을 통해 소재를 찾음)
④석도, 팔대산인 등 개성파 화가들의 영향
⑤금농: 추상적, 상징적 화풍의 매화, 단선화된 필치에 의한 사실성 →근대성 시사
득특한 서체 창안
정섭: 난, 죽 (죽 →새성적인 구성)
이선: 가장 근대에 접함
나빙: 그림 소재가 다양
황진: 풍경화가
고봉한
이방응: 송 + 사군자
왕사진; 수선, 묵매
⑥지나친 부의 낭비, 극단적인 사치, 서구열강의 침입
→19C에 단절, 몰락
→20C해상파에 의해 소생
누각 계화도: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이상주의를 꿈꾸며 그린 그림.
궁정회화 : 낭세녕 : 이탈리아 선교사, 서양화기법(명암법, 원근법)영향 받음.
청 말기 : 신흥 예술 후원자 - 사실적 화풍의 화조와, 기명절지화, 영모화가 유행함.
해파, 허곡, 임웅, 임백년(민영익, 대중적이고 쉬운 주제), 조지겸( 장승업과의 관계), 개기(사녀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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