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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술

[스크랩] 중국미술의 특징과 역사

by 8866 2007. 7. 4.

중국 역대의 회화·조각·공예 등 각종 예술 분야.
[개요]

중국미술 전반에 걸쳐 공통적이면서도 특히 회화와 조각에서 두드러진 특색은 자연주의적 조형이념과 이상주의적 조형이념의 상극과 조화이다. 중국인이 조상 또는 회화를 제작할 때 하나의 모델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할 바 없으나, 자연경관을 전체로서 다루어 그것을 충실하게 화폭에 재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상조각에서도 인체가 모델이 되면서 현실의 인간이나 인간상 일반을 묘사하는 제작태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늘 이상화되고 때로는 관념적으로 다루어진 자연 또는 인간의 재현을 지향하고 있다.

중국미술에서도 전체와 부분의 조화, 아름다운 균형, 부분의 명료함과 전체의 안정이 무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달성된 시기를 각 장르별 미술의 고양기로서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이상적인 고전(古典)으로서 동경의 대상으로 삼아 추구하려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북송시대의 산수화는 중국회화에서 질적인 면의 정점을 형성했다고는 하나, 당시의 화가들은 그 전체상을 포착하여 그 내적 양식의 본질을 추구하기보다는 부분적인 표현기법이나 형식의 추구에 머물렀다. 중국의 미술가들은 때때로 공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시문(詩文)의 세계와 같이 감상자의 입장에서, 조형예술 안에서 정서성을 기대하는 경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형식미 또는 형식미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집요한 조형성의 표출을 가능한 한 강렬하게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어떤 시기의 중국회화 가운데 한정된 장르 안에서는 시적 정취를 감상자에게 추구·체험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정서성을 추구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념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중국미술은 형식미를 추구하기에 급급했다고도 할 수 있다. 형식미의 추구는 때때로 자연주의적·이상주의적 조형에 대한 의욕을 약화시키는 결과도 초래했다.

불상의 기본적인 모델은 인간이고 초상화나 불교회화도 인간 표현 그 자체이며, 마을이나 야산 또는 호숫가나 냇가에서 노니는 인간도 화제(畵題)로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화론(畵論)은 초상화가 궁극적으로 묘사해내는 것이 인간의 내면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들의 경우에는 살아 있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번민하면서 자연도 자신의 현실세계에 대한 도피처로 생각했던 데 비해, 미술가들의 경우는 인간 중심의 사고나 조형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 회화의 조형이념
  • 중국회화의 역사는 질그릇에 물감을 칠해 그린 때부터만 해도 4,000년이나 되며, 이름 있는 화가가 남긴 그림만 해도 약 1,600년이 된다. 중국회화의 형식과 내용이 현격하게 풍부해진 당대(唐代) 이후 관념적인 조형은 '대상의 이상화'로서 작용하며, 자연적 조형은 자연주의의 표현으로 치환할 수 있는 조형현상이 되었다. 중당(中唐)에 흥성한 수묵화는 중국회화의 전통적인 선묘형식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뚜렷하게 변용시킨 데서 성립하며, 명말(明末)의 직업화가 가운데 다수가 문인화가적인 성향을 지향했던 것은 자연주의적 조형보다도 관념적·환상적 자연경치의 재현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디까지나 자연대상의 이상화라는 이념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의 조화를 최상의 조형활동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매우 파행적인 회화로 다루어지고 있다.

    중국회화, 특히 산수화는 숙명적으로 비자연주의적인 조형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림을 배우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작품과 과거의 명품을 모사하는 것이 선행했던 까닭이다.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은 회화 제작의 기본이념으로서 6가지 원칙을 생각해냈는데, 그중 하나가 '전모이사'(傳模移寫)이다. 이 글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지만, '옛 그림을 모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것은 기법의 습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화가의 제작을 규제하여 작품의 유형화를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것을 타파하고 자신의 표현의지와 묘사기법을 찾아내는 것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산수화는 대부분 현실에서 보여지는 자연과 전혀 비슷하지 않게 되었다.

    화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조형의욕을 단적으로 화폭에 표현하고 싶어한다. 다른 한편 화가들은 초상화로 대표되듯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그려야만 하는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같은 경우에도 중국의 화가는 단순히 얼굴 모습이 비슷한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았으며, 늘 인간 전체 또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표현을 문제로 삼았다. 날카로운 대상 관찰과 깊이 파고드는 사실성은 단순히 초상화 분야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산수화가 역시 광활한 중국의 명산과 대천을 편력했지만 자연을 그대로 화폭에 재현시키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묘사형식의 제약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현실의 자연을 더욱 미화시키고 이상적인 산수화를 제작할 숙명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경관과 괴리되지 않은 채,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화된 자연을 화폭에 재현시키는 것을 회화 창작의 최종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중국회화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럽 미술의 인상주의나 표현주의 같은 운동이 없었으며, 추상적인 표현법도 흥성하지 못했다. 늘 자연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박한 사실주의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관적·주의적(主意的)인 창작태도를 제1의 의(義)로 삼았던 수묵화의 범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표현활동이 활발했던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원대(元代)의 회화표현에서 이같은 현상을 찾을 수 있다. 당시의 산수화는 결코 이상주의나 자연주의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묵과 색채의 대비라든가 다양한 묘선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구조 또는 율동감의 강조 등으로 감상자의 시각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도 있었다.


  • 재료
  • 중국회화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화견(畵絹)·종이·벽·묵·화구 등의 소재이다. 이러한 소재가 회화의 외면적 양식을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며, 회화활동의 발전이 소재의 진보와 표리관계를 이루는 경우도 적지 않다. 회화제작용 종이는 오대(五代:907~960) 이후 급속하게 발달했다. 남당(南唐)의 저명한 징심당지(澄心堂紙)를 비롯해서 훌륭한 종이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송대에도 징심당지·곡백지(鵠白紙) 등 질 좋은 종이가 제작되었다. 종이 외에 마(麻)가 사용되기도 했는데, 표면이 거칠어서 세밀한 회화제작에는 부적합하고 미묘한 묵조의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수묵화에도 어울리지 않아 일찍이 화견으로 대체되었다. 양질의 화견은 송대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종이와 비단천은 각각 소재로서 특색이 있는데, 종이가 수묵화에 적합한 데 비해 비단천은 저채화(著彩畵)에 어울린다. 벽화는 육조·당·북송 시대에 가장 성행했다. 사원이나 도관(道觀:도교사원)에 그려진 벽화 외에 감상용 또는 실내장식용으로서 산수화나 화조화(花鳥畵)도 그려졌다. 회화제작의 화면 소재로는 이밖에도 칠기의 표면을 장식하는 칠회(漆繪)가 있으며, 기와나 돌 등에 음각했던 화상전(畵像塼)이나 화상석(畵像石)도 있었다.

    중국회화의 재료로서 중요한 것으로는 각종의 안료를 들 수 있는데, 안료의 제조법은 송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안료가 색채의 혼탁을 피하여 미묘한 색채와 색조를 나타내게 된 것은 북송시대 이후이다. 중국회화는 전통적으로 묘선을 존중하는 경향이 지속되었는데, 그 묘선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나 화조화 등에서 안료와 염료를 사용한 것도 보이지만 주로 에 의해 이루어졌다. 먹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었으며, 제작기법은 당대에서 오대(五代)에 걸쳐 급속하게 발달했다. 중당시대에 산수화가 발생한 것은 먹의 성질이 지니는 미묘한 해조표현(諧調表現)의 가능성을 추구한 결과로서 먹의 발달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또한 붓은 당연히 먹과 병행해서 발달했다.


  • 화가의 지위
  • 중국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직접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 화가의 사회적 신분의 변화이다. 사회적 신분의 변화는 화단의 주류와 비주류 형성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시대의 지도적 양식의 성립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육조시대에는 회화사상의 의미와 중요도에서 사대부화가의 비중이 오히려 궁정화공보다 컸으며, 이것은 새로운 회화양식의 전개와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궁정화공은 재야의 직업화공에서 선발되는 것이 통례이며, 궁정작화기구가 성대해졌을 때는 직업화공의 제작활동도 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송대는 직업화가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문인화가가 생겨났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원대는 여기화공(余技畵工)이 성행한 시대이며, 명대 전반기는 직업화가가 우위에 있었고 후반기는 문인화가가 두드러졌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직업화가와 문인화가 또는 사대부화가의 구별과 그 작품의 우열을 논하기 시작한 것은 원대 초기이며, 명말의 동기창(董其昌:1555~1636)에 이르러 이론화되었다.


  • 감상과 수집
  • 중국회화의 양식과 예술적 가치의 변화는 향수자나 감상자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 불교 융성기에는 불전(佛傳)과 교설(敎說)을 그림으로 풀어주는 변상도(變相圖)가 성행했는데, 신앙이 계층을 가리지 않고 확대될 때는 회화 역시 설명적이 되어 이해의 용이함을 추구했다. 그결과 통일적인 화면구성과 교묘한 공간표현보다는 모티프 하나하나의 명료성을 추구했으며, 화면은 단순해지는 경향을 나타냈다. 또 당대 회화가 사실성을 추구하면서도 청록산수(靑綠山水)로 대표되는 화려함과, 점경(點景)으로서의 누각, 전사(殿舍)를 선호한 것은 향수자인 귀족의 기호에 영합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신선산수(神仙山水)로 대표되는 이상향으로서 묘사되고 있는 점은 세속적인 욕구의 강렬함이 자신들의 세계와는 대극(對極)에 있는 초세속적인 세계를 희구한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수집가와 감상자의 회화를 향유하는 방식이 동시대의 회화제작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명대 중기에 문징명(文徵明:1470~1559)을 중심으로 한 오파(吳派)의 성립도 단순한 문인화가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회화제작을 하지 않은 사람들, 즉 향수자를 포함한 광범한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직업화가 또는 그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문인화가가 구매자인 동시에 향수자였던 수집가와 감상자의 미적 기호에 많이 좌우된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대수집가는 화가의 후원자가 되고 그 저택이 화가나 감상자의 공간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중국회화의 지방성
  • 중국회화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자연적으로 발전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 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회화양식 또는 묘사형식에 있어서 지방성 문제이다. 중국회화의 지방성은 화북(華北)과 강남(江南)으로 양분되어 있는데, 이것에 역행한 최초의 인물은 〈산수결 山水訣〉의 저자인 남송의 이징수(李澄)이다. 동기창의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은 지방성을 부인한 것이기는 하나, 화북·강남의 두 화풍이 북송에 존재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같은 지방적 특색도 송나라 황실의 남도(南渡)에 의해 서서히 해소되었지만, 북방을 영유했던 금(金)의 회화에는 지방성이 강했으며 이것이 원대의 회화형식을 한층 복잡하게 했던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원대에는 남송시대보다 더 지방의 특색이 약했지만, 명대가 되면서 화원(畵院)을 중심으로 저장[浙江]·광둥[廣東]·푸젠[福建]의 각 양식이 특색을 지니게 되어, 쑤저우[蘇州]를 중심으로 하는 문인화파(吳派)와 대립했다. 그러나 이들 양대 화파는 명말에 융합하여 사회적 신분제 안에서나 제작태도에 있어서 동질화되었다. 명말에서 청초(淸初)에 나타난 많은 화파에는 각각의 지방명이 붙어 있지만 오히려 지방적 특색은 줄어들었다.


    중국 화론(畵論)은 육조시대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성행한 서론 또는 시문의 평론에 영향을 받은 것도 많으며 한편으로는 음악용어까지 흡수했다. 오대(五代)가 되면서 화론은 구체적인 제작방법론으로 발전되었다. 형호(荊浩)가 〈필법기 筆法記〉에서 제시한 '6요'(六要)는 '6법론'(六法論)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전통적인 묘선형식과 수묵형식의 융합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더불어 회화의 각 장르 사이에서 산수화의 위치가 높아졌다. 예술적인 가치에 있어서 정점에 달했던 북송말의 산수화와 더불어 산수화론도 곽희(郭熙)의 〈임천고치 林泉高致〉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 화론은 산수화가 내포하는 정신적인 면과 제작할 때의 자연주의적인 관조태도가 제시되고 있다. 특히 산수화에서 기본적인 구도형식으로서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을 화가의 시점 위치의 변화에서 다루었다. 이 '3원'은 오래도록 산수화의 구도형식을 규정하게 되었다. 이후 남송·원 시대를 거쳐 명말의 동기창이 출현할 때까지 독창성이 풍부한 회화론이나 평론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대에 주목할 만한 것은 화보류의 제작이었다. 화보류는 그림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작화의 유형화·비개성화의 경향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 역사
  • 중국회화의 시원은 은·주·춘추전국 시대로까지 소급된다. 그러나 은·주 시대의 작품은 극히 적으며 춘추전국시대의 작품 역시 많은 편이 아니다. 따라서 옛 문헌에서 보이는 당시의 회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전국시대의 청동기 중에는 그 표면에 정교한 금은상감을 입힌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후세의 묵선을 연상케 하는 유창한 선의 움직임이 있으며, 정교한 추상화와 적절한 사실성이 혼재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회화의 미적 수준과 양식을 유추할 수 있다(→ 선진미술).

    진·한 시대는 이미 그 전 시대부터 원시적인 단계를 벗어나고 있었으며, 입체감이 나타나는 공간표현이나 인물 등 대상의 생동감과 미세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후한말에는 채옹(蔡邕) 등 서화(書畵)에 능한 인사가 나타나 문학적인 제재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시대가 되면서 회화 유품의 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화상석과 화상전에는 단순히 인물뿐만 아니라 자연경치까지 묘사되어 있다. 이 시대의 화제(畵題)는 일월성신·복희(伏羲)·여와(女)·신선·4신(四神)·영수(靈獸)로부터 3황5제·공자·노자 또는 유교적 감계도(鑑戒圖)와 풍속도까지 확장되었다. 특히 공신상으로 대표되는 초상화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고도의 사실성이 요구되었다(→ 진한미술).

    위·진 시대에는 제재·묘사 형식에서 한대 회화의 전통을 계승·지양했다. 유교적 성격이 강한 감계도가 여전히 많이 제작되었는데, 사전설화도(史傳說話圖)와 함께 실용적인 회화로서 성행했다. 또한 불교의 성행과 함께 불화의 제작도 활발해졌으며, 노장사상이 보급됨에 따라 자연애호의 기풍이 높아지면서 산수화가 독립된 회화로 자리잡은 것도 이무렵이다. 남북조시대의 회화에서는 산수화의 발달이 특히 주목된다. 불화·초상화 및 궁전의 장식화가 실용적인 회화라면, 산수화는 비실용적이면서 다분히 오락적이고 감상적인 성격이 강하다(→ 위진남북조미술).

    이 시대의 회화는 약 30년간 지속된 수대 이후, 당대를 문학사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초당(618~712)·성당(713~765)·중당(766~835)·만당(836~907)의 4시기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통례이다. 당대는 중국회화사에서 몇 가지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인데, 그 하나가 진·한 이래 묘선의 발달이 정점에 달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발견한 것이다. 둘째, 감상용 회화가 완성되어 주로 화조산수화에서 전통형식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셋째, 중국회화사상 최대의 변화인 일격(逸格)의 수묵화법이 발생하여 중국회화의 양식을 다른 지역의 회화와 확연하게 구분시켜주는 단서를 만든 것이다(→ 수·당미술).

    오대· 시대

    당말·오대 및 북송 초기의 화풍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성립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다. 이 시기의 회화양식의 변용은 크게 3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중당의 수묵화풍이 종래의 묘선제일주의의 묘법과 결합한 것이다. 묵법과 선묘법의 결합은 산수화를 비롯한 많은 회화 장르에서 새로운 화풍의 전개를 가능하게 했다. 둘째, 화북과 강남 또는 서촉(西蜀)과 남당이라는 지방특색이 산수화와 화조화에 나타나 후대 중국회화의 방향을 결정했다. 묵법의 발달은 보수적인 형호의 산수화를 변모시켰을 뿐만 아니라, 강남 화풍의 창시자인 동원(董源)과 거연(巨然)의 산수화에도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북송말에 이르러 중국 화단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소동파(蘇東坡)·문동(文同)·승중인(僧仲仁) 등의 문인과 승려에 의한 일과예(一科藝)로서의 묵희(墨戱)·묵죽(墨竹)·묵매화(墨梅畵)가 성립되었다. 남송의 회화계는 화원화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북송회화에 비해 너무 남송적 분위기에 안주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 많으며, 북송말에 완성된 산수·화조·일과예로서의 묵희를 계승한 것이거나 또는 그 아류로 파악할 수 있다(→ 송대 회화).

    금·원 시대

    대의 회화에 관해서는 확증할 수 있는 유품이 없어서 전모를 파악할 수 없으나 산수화는 북송의 화북 산수화풍이 계승되었으며, 문인화가의 묵희도 행해졌다. 일례를 들자면 산수화에는 양방기(楊邦基), 묵희에는 왕정균(王庭筠)이 있다.

    원대 회화의 일반적인 경향은 남송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북송회화의 양식을 재인식하려는 기운이 강했으며, 궁정화원제가 없었기 때문에 재야의 문인화가·승려화가·직업화가가 활약했다. 그러나 사회적인 신분 차이가 각각의 화풍 전개와는 결합되지 않았으며, 문인화가의 직업화가 또는 직업화가의 문인화가로의 경향이 뚜렷했다. 원체계(院體系) 산수화는 자연경치와 더욱 유리되어 한층 더 형식화되었으며, 북송회화로의 회귀는 이성(李成), 곽희와 동원, 거연의 산수화풍을 종종 한 화풍으로 뒤섞는 결과가 되었다. 본래 공간표현과 구도형식 및 원근법 등은 각각의 특유한 필묵기법 및 모티프와 결합하여 이성·곽희, 동원·거연의 두 산수화풍을 형성하고 있지만, 원대의 화가들은 이것을 분해하여 자유롭게 조합하려고 시도했다. 원초의 문인화가였던 조맹부(趙孟)가 그 좋은 예이며, 이같은 화법상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은 이들이 원4대가이다. 이들에 의해 원대회화의 특색이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시대는 선승화가(禪僧畵家)에 의한 도석인물화도 활발하게 제작되었지만, 원말의 대표적 선승화가 인타라(因陀羅) 외에 대부분의 작품은 작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제작 그 자체는 더 정교해졌으나 표현내용은 송대에 비해 빈약해졌다. 이 시기에는 또한 직업화가에 의한 불화 제작도 왕성했다. 화조화의 경우에는 원초의 전선(錢選)의 복고주의에 의해 북송시대 조창(趙昌)의 사생주의(寫生主義)가 재인식되기는 했지만, 그후 뛰어난 화조화가가 출현하지 않았으며 원말에는 왕연(王淵)에 의해 묘선본위(描線本位)의 장식적 화조화풍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원대의 화훼잡화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고 문인화가의 수묵이 더 큰 특색을 이룬다. 묵죽으로는 이간(李)·양유한(楊維翰)·가구사(柯九思)·고안(顧安)·오진(吳鎭)의 작품, 그리고 묵매로서는 오태소(吳太素)·추복뢰(鄒復雷)·왕면(王冕) 등이 일가를 이루었다.

    명대의 회화는 말기에 이르기까지 원대 회화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원말의 혼란에 의해 강남지방이 황폐해지면서 일찍이 화가들의 후원자였던 부호·사원·도관 등은 쑤저우를 필두로 그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영락연간(永樂年間:1403~24)에 이르러 궁정화원제가 정비될 때까지 명대 화단은 주로 중앙보다는 재야에 있었으며, 그리 두드러지지 못했다. 이 시기가 명대 미술의 제1기이다.

    선덕연간(宣德年間)에서 천순연간(天順年間)에 이르는 시기(1426~64)는 명대 회화의 제2기에 해당되는데, 화원을 중심으로 하는 절파계(浙派系) 화가가 융성했다. 절파의 회화는 저장[浙江] 지방 형식에 특유의 거친 수묵화법에 원대의 이성·곽희파의 화풍과 남종화법 등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져 필묵의 기운이 거칠고 호방하다. 이것으로 원대 회화의 특색이 더욱 강조되었다.

    명대 회화의 제3기는 성화연간(成化年間)에서 가정연간(嘉靖年間) 중반 시기(1465~1540경)를 가리키는데, 그 전반기에는 절파와 오파(吳派)가 병존했고 그 후반기에는 문인화파가 융성했다. 특히 오파의 문인화는 성화연간에서부터 홍치연간(弘治年間:1465~1505)까지 활약한 심주(沈周)에 의해 그 기초가 놓여졌다고 할 수 있다. 오파 문인화의 형성기에 나타난 원파(院派)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제4기(1567~1643)의 명대 화단은 보수적인 회화활동과 새로운 창작활동이 병존했다. 화풍뿐만 아니라 매화(賣畵) 방면에 있어서도 직업화가와 문인화가의 동질화 현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동기창에 의한 방고주의(傍古主義)와 전형주의(典型主義)가 제창되었다. 한편 문인화가들은 원대의 묵매도와 묵죽도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작을 계속했다(→ 명대 미술, 명원파).

    청조의 문인화파는 관학화(官學化) 경향을 보였다. 청대에는 동기창의 의고주의와 전형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말의 자유로운 회화표현은 후퇴하여 각각 하나의 형태에 꿰어맞추는 경향을 드러냈다. 청대 회화는 강희연간(康熙年間:1662~1722)을 정점으로 형식화가 진행된다. 강희·건륭 연간에는 풍속인물화나 산수화 등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화풍이 일률적이며 화가의 개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청조의 화원은 가경·도광 연간(嘉慶道光年間:1796~1850) 이후 급속하게 쇠퇴했다. 다만 재야 화단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누동(婁東)·우산(虞山) 두 파 화가들의 화풍에도 강렬한 개성이 보이지 않으며 진부한 정형화를 드러내고 있다(→ 청대회화).

    현대

    청말 이후에는 전통화법에만 만족하지 않고 널리 해외에서 전형을 구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미술전문학교 졸업생에게 많았으며 이들을 학교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신해혁명 이후의 최초의 예술가가 된 치바이스[齊白石]는 전통적인 회화인 국화(國畵)에서 규범을 찾았던 사람이지만, 해파(海派)의 천헝커[陳衡恪:1876~1923]에게 인정받아 국립 베이징예술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서유럽에 유학했던 인물로는 황빈훙[黃賓虹:1863~1955]·쉬베이훙[徐悲鴻:1895~1953] 등이 있는데, 이들의 화풍은 현재의 국화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타이완으로 간 저명화가로는 '남장북푸'[南張北溥]로 불린 장다간[張大干]·푸루[溥儒]가 있다. 루쉰[魯迅]의 지도에 의한 목판화의 보급도 주목을 끌지만, 인민공화국의 회화운동을 지탱시킨 것은 1942년의 이른바 〈옌안 문예강화 延安文藝講話〉이다. 화단은 문화대혁명에 의해 한동안 정체되었지만, 위페이안[于非闇]·판톈서우[潘天壽]·우쭤런[吳作人]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중국에서 조각의 시초가 언제라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은·주 시대의 청동기에 새겨진 조수나 인물의 표현을 시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만 동기 자체가 공예와 조각이 분화되지 않은 것이므로 정확하게 조각작품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으며, 전국시대의 명기(明器:무덤에 시신과 함께 묻는 기물) 인물상이 중시되었다.

    한대에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조각작품으로서 커다란 석조(石彫)가 출현했는데, 분묘와 사당 앞에 제작된 석인(石人)과 돌짐승 등이 대표적이다. 전한대의 것은 약간 단조로우며 양감도 부족하다. 오히려 한대 석조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것은 묘실 내부의 부조화상(浮彫畵像)이다. 한대부터 성행한 분묘에 매장하는 토우(土偶:明器)도 조소예술로서 중요하다. 동기·옥기(玉器)에서 보여지는 공예조각까지 덧붙여서 한대 조각의 특색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상징적인 표현이 사실적인 표현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뿌리 깊은 중국 고대의 조소 정신의 전통에 새로운 소재의 불교조각이 들어온 것이다. 중국 목조사원의 창립은 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5호시대에는 4세기 중엽에 간쑤 성[甘肅省] 둔황[敦煌]에 석굴사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둔황 막고굴(莫高窟:千佛洞)에 그보다 동쪽에 있는 치롄 산맥[祁連山脈]을 따라 몇 개의 석굴이 5호시대에 만들어지면서 시안[西安]으로 향하는 불교조각의 동점(東漸) 통로가 확립되었다. 통로 위에 위치한 간쑤 성 융징 현[永靖縣]의 빙링 사[炳靈寺] 석굴에서 420년(西晉 建弘 1)에 만든 소상(塑像)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조상인데, 얇은 옷을 통해 느껴지는 몸의 기복과 유창한 옷무늬의 표현에는 중부 인도로부터 서역(西域) 조상양식의 계보가 엿보인다.


  • 북위시대
  • 5호를 통일한 북위 최초의 대표적인 불상 유품은 443년(太平眞君 4)에 만들어진 금동불입상인데, 유품으로 미루어보아 북위 조각사는 이 불상에서 시작된다. 그 사실적인 구조에 서방양식의 영향이 농후한 이 금동불입상은 조상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태무제(太武帝)의 불교탄압(446경) 직전의 작품이지만, 불교탄압 이후 서방양식의 영향이 한층 강해졌다는 사실은 태안연간(太安年間:455~459) 이후의 석불에서도 명백하다. 북위의 국가적 대사업으로서 산시 성[山西省] 다퉁 시[大同市]에 화평연간(和平年間:460~465) 초기부터 운영된 윈강[雲崗] 석굴사원은 북위의 석굴·석상 조각의 기점이 되었다. 이것은 군주와 부처의 일치를 설파하는 북위 불교의 특색을 보여준다. 한편 이 시대는 금동상의 조상도 성행했는데, 467년(皇興 1)에 높이 14m의 석가입상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현존하는 유품도 기교적으로 뛰어나면서 소박한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다만 태화연간(太和年間:477~499) 후기가 되면 광배(光背)나 대좌(臺座)의 형식과 장식도 한층 정비되는 한편 차츰 형식화 경향이 나타난다. 489년(태화 13)의 이불병좌(二佛竝坐) 금동석가다보상이 그 분기점이 되며, 나아가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걸쳐 북위의 조각은 석불·금동불과 함께 중요한 전환을 이룬다(→ 북위조상).


  • 동위·서위 시대
  •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뉘면서 뤄양[洛陽]의 공인(工人)도 두 나라로 나뉨에 따라 지방도시의 조상이 급격하게 성행했다. 그리고 북위 후반기 허난[河南] 동쪽의 작풍이 동위에도 이어져서 천평양식(天平樣式)을 형성하여 대략 무정연간(武定年間:543~549)까지 지속되었다. 동위시대에 특히 지역적인 성격을 가진 것은 허베이 성[河北省] 딩 현[定縣]을 중심으로 성행한 흰 대리석 조각으로, 그 출발은 북위의 5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북제부터 수·당 시대까지 이어진다. 30~80㎝의 작은 조상이 많은데, 커다란 거신광(擧身光)을 등에 진 일존입상(一尊立像)은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서위의 조각에 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시안 장라이[將來]의 석조삼존불좌상(石造三尊佛坐像)은 중후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며, 황화석(黃華石)의 특질을 잘 살렸다. 더불어 소감상(小龕像) 소사면상(小四面像) 가운데도 훌륭한 작품이 많다.


  • 북제·북주 시대
  • 북주시대의 중요한 조각은 톈룽 산[天龍山], 샹탕 산[響堂山]의 두 석굴조상이다. 둘 다 땅딸막한 원통 모양의 체구에다 얼굴도 둥글지만, 전자는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반면 후자는 모서리가 남아서 약간 딱딱한 느낌을 준다. 두 조상 모두 얇은 옷으로 인해 몸에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북제 조각의 전반적인 특색이기도 하다. 북제 조상양식이 발전하게 된 것은 업[]타이위안[太原] 등 지방도시에서 조상이 융성해지면서 북위의 오랜 전통을 탈각하고 새로운 조형감각이 육성된 것이지만 외래양식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북주도 천화연간(天和年間:566~571)에 참된 북주양식을 정립했다. 어린애와 같은 온순한 느낌에 옷은 차츰 얇아지고 상반신을 벗은 경우도 많은데, 보살상은 호화로운 영락(瓔珞)을 두르고 있다. 건덕연간(建德年間:572~577)에 이르러 여래상의 체구는 양감이 증가되고 보살상은 유연함이 더해졌으며, 황화석의 성행은 북주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 제·양의 돌짐승과 석불
  • 한대에 성행했던 무덤 앞의 돌짐승 조각은 남조에 계승되었으며, 남조 조각의 일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찍이 송대에 시작되었지만, 남제의 명제(明帝) 싱안링[興安陵]의 돌사자에는 후한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그에 반해 양대의 것은 소수묘(蕭秀墓)의 돌사자처럼 전체적으로 양감이 맑고 세련되었다.


    수대의 불상은 입체감에 호소하고 있는 점에서는 제(齊)·주(周)의 불상과 같지만 양감이 더해지면서 한층 발전했다. 다만 육체의 사실적인 면에서 당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은 오히려 제·주의 조각에 가깝기 때문이며, 수대 전반기는 제·주 특히 북주시대와 동일한 범주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높다. 현존하는 수대의 유품은 석굴조상 또는 다른 것도 개황연간(開皇年間:581~600)의 것이 대부분이며, 후반기의 것은 잘 알 수 없다. 다만 개황연간에도 말기에 이르면 보살상은 석상이나 금동상을 불문하고 상당히 유연한 자태를 보이면서 영락도 요란스러워지며, 여래상은 차츰 비만한 체구가 된다. 당초에도 수대 후반과 마찬가지로 자료가 불충분하고 유품으로 미루어보아 거의 공백기간에 가깝다. 양자의 차이는 당의 조상이 수의 조상보다 국제적인 성격을 한층 분명하게 띠고 있다는 점이다. 현장(玄奬)이 귀국한 639년(貞觀 13)경에는 불상의 제작도 활발해졌으며, 인도 불상의 사실적 수법도 한층 더 이입된 것으로 보인다. 당대 최초의 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 639년의 석조불좌상은 당 불상의 단정함과 유연함을 보이는데, 장안(長安) 조각의 전통과 동시에 그 양식이 성립하게 된 데는 서방 조상양식과의 관련을 고려해야 한다. 초당의 가장 중요한 조상은 룽먼 석굴[龍門石窟] 펑셴 사[奉先寺] 동굴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인데, 이 웅대한 부처도 그 간소한 조각에 의해 참으로 청정한 느낌을 준다. 측천무후시대(則天武后時代:690~705)에는 불상 융성을 배경으로 조상양식이 급격히 진전되었으며, 인도 불상의 사실적 수법이 이입되면서 중국 불상은 육체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이 한껏 강조되었다. 불상 이외의 조각으로서 중요한 석조로는 측천무후시대의 고종 건릉(乾陵)의 석인 및 돌짐승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천마(天馬)는 성당(盛唐)의 뛰어나게 아름답고 화려한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다. 불교조각도 현종시대(玄宗時代)가 되면서 비만한 체구에 차츰 형식화 경향이 나타났으며, 천보연간(天寶年間:742~755)에 한층 더 심해졌다.


  • 오대· 시대
  • 오대는 당과 송 사이에 낀 일종의 과도기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의 양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욕이 왕성하여 일종의 생기가 느껴지는 시대이다. 소재가 다채롭기도 하지만 형식이나 양식에 있어서 다양화된 것도 그 특색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강북 지방에는 상당기간 당의 양식이 잔존한 데 비해 강남 지방에서는 뛰어나게 아름답고 세련된 송대 양식의 싹이 엿보인다. 송대의 석굴조상은 오대와 마찬가지로 강남은 항저우[杭州] 근교의 석굴군, 쓰촨[四川]은 그 동남부의 마애군(磨崖群)에 있는 것을 들 수 있지만, 그밖에 간쑤 지방의 둔황 막고굴에도 오대부터 송에 이르는 시기의 조상이 보이며, 마이지 산[麥積山] 석굴의 송대 조상과 함께 소상조각으로서 귀중하다. 그러나 가장 주목되는 것은 쓰촨 성 다쭈 현[大足縣] 마애에 있는 남송의 조상으로, 특히 보현·관음상은 1142~45년(紹興 12~15)이라는 제작연대가 명확한 남송 초기의 기준작이다.


    [공예]

    중국의 금속공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은·주 시대의 청동기이다. 이 청동기들은 주로 종묘에 올리는 제기(祭器)인데, 제작연대는 은대 중기로 추측된다. 중국 청동기의 최전성기는 은·주 시대로 무려 1,300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수나 종류도 많았다. 청동기의 종류와 장식무늬는 다양하며, 그 형태나 용도에 따라 식기·주기(酒器)·성수기(盛水器)·악기(樂器)·병기(兵器)·잡기(雜器) 등으로 대별된다. 이것들의 형태는 신석기시대의 양사오 문화[仰韶文化]와 룽산 문화[龍山文化]의 토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것이 청동기로 발달하여 더욱 복잡하게 바뀌었다. 청동기는 모두 주조제품이며, 총체적인 장식무늬는 화려한 양주(陽鑄) 무늬였다. 초기에는 비사실적인 괴수문(怪獸文)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여기에 기하학적 무늬, 나중에는 구상적인 동물무늬와 화상문(畵像文)이 출현했다. 최근에는 이들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품에다 출토지의 명확한 새 자료를 첨가하고 있다. 출토지는 중국 각지에 분포하며 특히 서주에서 전국시대에 이르는 유품이 많다.

    거울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비롯되는데, 거울 제작의 역사는 다른 금속공예와는 달리 단절 없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중국 거울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미 서주말(BC 8세기) 무렵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의 거울은 정교하고 얇으며, 거울 뒷면에는 얇고 세밀한 주출(鑄出) 무늬가 새겨져 있다. 출토지는 당시의 초나라 땅이다. 진대의 거울은 전국시대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와문풍(渦文風)의 지문(地文) 위의 무늬가 일련의 괴수문으로부터 기하학적인 무늬로 되었다가 TL형 무늬[方格規矩紋], 수대문(獸帶文), 신수문(神獸文)으로 변하면서 한대의 거울로 이행되었다(→ 진한미술). 전한대에는 성운문(星雲文)·내행화문(內行花文)·초엽문(草葉文)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전한과 후한 사이의 왕망시대(王莽時代:8~25)는 기간은 짧았지만 이 시기에 TLV 거울이 출현했다.

    수·당대에는 거울의 양식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으며, 형태와 뒷면의 무늬도 획기적으로 전환되었다. 수대의 거울에는 아직 전대의 전통이 남아서 4신(四神)과 12지(十二支)의 동물무늬가 있으며, 중후한 느낌을 준다. 요컨대 수대의 거울은 육조와 당이라는 두 시대의 과도기적인 산물로 볼 수 있다. 당대의 거울은 형태와 장식의장(裝飾意匠)에서 실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형태도 원형(圓形)·방형(方形)·능형(稜形)·화형(花形) 등의 변화가 있으며, 주출무늬도 중국 전통의 반룡·봉황·기린 등의 동물무늬 외에 공작·앵무새 등 서방의 무늬도 나타났다. 식물무늬에는 보상화(寶相華)·당화(唐花)·당초(唐草) 등이 나타났다. 장식기법도 주출무늬뿐만 아니라 금은상감·평탈(平脫)·칠보(七寶) 따위의 호화로운 수법이 사용되었다.

    은기(銀器)

    당대에는 은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사산조(朝) 페르시아의 화폐가 은본위였고 은기의 제작도 활발했기 때문에, 교역을 통해 당대에 그 영향을 끼쳐 은기 유품이 많다. ·원대에는 금속공예 특히 금은기의 유품이 적지만, 최근 쓰촨 성에서 주목할 만한 은기들이 발견되었다. 이 은기들은 형태가 송대의 자기와 공통되는 점이 있다. 원대에는 안후이 성[安徽省] 허페이[合肥]에서 출토된 금잔·은잔·은접시 등 많은 금은기가 있었다. ·청대에는 금속공예가 매우 저조했던 시기였으나 솥·향로·화병 등이 있었다.


  • 공예
  • 중국에서는 매우 오래 전부터 칠이 사용되었는데, 죽간(竹簡)에 칠로 쓴 칠서(漆書)가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순(舜) 임금은 식기에 검은 칠을 입혔으며, 우(禹) 임금은 제기의 바깥쪽에는 검은 칠을 입히고 안쪽에는 붉은 칠을 입혔다고 한다. 또한 주대에는 수레마다 칠을 입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시대

    중국의 칠공예는 당대에 이르러 현저하게 발달했다. 장식에 따라 나전(螺鈿)·평탈·칠회(漆繪)·밀타회(密陀繪)·유색(油色)·금은회 등이 있다. 무늬는 매우 변화가 풍부하며, 당대 문화 형성에 사산조 페르시아, 비잔틴 제국, 인도 등의 영향이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종류도 몹시 많아 동식물 무늬, 인물 무늬, 기하학 무늬, 당초문 등이 있다. 무늬의 구성도 회화적인 것, 대칭적인 것, 선회식(旋回式), 방사식(放射式), 산포식(散布式) 등 여러 가지가 있다.

    · 시대

    송대의 칠기는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근래 송대 무덤에서 발굴된 민무늬[無文] 칠기에는 제작연대·제작지·제작자 등이 기록된 것이 있다. 명문(銘文)에는 간지만을 기록한 것이 많으며, 대부분이 북송대의 것이다. 제작지로는 항저우의 것이 가장 많다. 민무늬 칠기는 송대의 백자나 청백자와 상통하는 점이 있으며, 단정한 형체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송대 공예의 일단을 보여준다. 원대에는 부호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제작하면서 인물문 등을 입힌 세밀한 것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格古要論〉), 실제 원대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나전기 가운데는 매우 정교한 것이 보인다.

    · 시대

    칠공예는 명대에 눈부시게 발달했으며 조칠·나전 외에 칠회·밀타회 등 많은 종류의 기법이 발달했다. 청대에도 이들 기법이 계승되어 한층 세밀화되었지만, 기법과 무늬가 복잡해져 공예적인 멋은 잃었다.
    출처 : 글가치[Geulgachi)
    글쓴이 : imaginerNZ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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