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의미의 공간
  • 자연과 인간
세계사

일본서기 (번역본)

by 8866 2009. 5. 2.

 


     
 일본서기 번역(한국관련)   
 
 

日 本 書 紀 上

 

 

 

<<日本書紀>> 권 1.神代 上, 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素잔鳴尊이 奇稻田媛과 결혼하고자 하여 청하니 脚摩乳. 手摩乳가 “바라건대 먼저 저 뱀을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 결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 뱀은 머리에 각각 石松이 나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山이 있어 매우 무섭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를 죽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素전鳴尊이 꾀를 내어 독한 술을 빚어서 그에게 먹였다. 뱀이 취하여 잠이 들자 素잔鳴尊이 뱀을 韓서劍으로 머리와 배를 베었다. 그 꼬리를 잘랐을 때 칼날이 조금 이지러졌다. 그래서 그 꼬리를 가르고 들여다 보니 따로이 칼 한자루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草艸+雉劍이라 하였다. 이 칼은 옛날에 素잔鳴尊이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尾張國에 있다. 素잔鳴尊이 뱀을 베었던 칼은 지금 吉備神部에 있는데 出雲國의 파川가의 산이 바로 이곳이다.


<<日本書紀>> 권 1, 神代 上, 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素잔鳴尊의 하는 짓이 매우 버릇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千座置戶의 벌을 내리고 마침내 쫓아 내었다. 이때 素잔鳴尊은 그의 아들 五十猛神을 데리고 新羅國에 내려가 曾尸茂梨란 곳에 살았다. 말하기를 “이 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 하고는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出雲國 파川가에 있는 鳥上峯에 도착했다. 그때 그곳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큰 뱀이 있었다. 素잔鳴尊이 天蠅斫劍으로 그 큰 뱀을 베어 죽였다. 뱀의 꼬리를 베었을 때 칼날이 이지러졌으므로 꼬리를 쪼개어 보니 꼬리 가운데 한자루의 神靈스러운 칼이 있었다. 素잔鳴尊이 “이것은 내가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다” 하고는 五世孫 天之葺根神을 보내어 하늘에 바쳤다. 이것은 지금의 이른바 草艸+雉劍이다.

처음에 五十猛神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나무의 種子를 많이 가지고 왔다.그러나 韓地에는 심지 않고 모두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筑紫로부터 大八洲國안에 심어 푸른 산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五十猛命을 일컬어 功이 있는 神이라 하는데, 紀伊國에 모셔진 大神이 바로 이것이다.


권 1 神代 上,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素잔鳴尊이 “韓鄕의 섬에는 金銀이 있다. 만약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으면 좋지 않다” 하고는 수염을 뽑아 뿌리니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서 뿌리니 이것이 전나무가 되었고 꽁무니의 털은 비자나무가 되었으며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의 쓰임새를 정하여 이르기를 “삼나무와 녹나무 이 두가지 나무는 배 만드는데 쓸만하고 전나무는 祥瑞로운 궁전을 짓는 재목으로 쓰며 비자나무는 천하 백성들이 장사지낼 때 죽은 이를 눕히는 도구로 쓸만하다. 또 모름지기 먹을 수 있는 80종의 나무를 모두 심어라” 하였다.

이때 素잔鳴尊의 아들 五十猛命과 그의 누이 大屋津姬命 그 다음인 과(木+瓜)津姬命, 무릇 3명의 神 역시 나무종자를 널리 퍼뜨릴 수 있었으므로 명을 받들어 紀伊國으로 건너갔다. 그후 素잔鳴尊은 熊成峯에 살다가 마침내 根國으로 들어갔다. 棄戶를 우리말로 須多杯라 하고 피(木+皮)는 磨紀라 한다.

 

권5 御間城入言五十瓊殖天皇 崇神天皇


65년 가을 7월 任那國이 蘇那曷叱知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任那는 筑紫國에서 2,000여 里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으며 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권6 活目入言五十狹茅天皇 垂仁天皇


2년 이 해에 任那人 蘇那曷叱知가 자기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先皇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蘇那曷叱知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一說은 다음과 같다. 御間城天皇(崇神天皇) 때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한 척의 배에 타고 越國 笥飯浦로 그곳을 角鹿이라 이름하였다.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意富加羅 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都怒我阿羅斯等, 또 다른 이름은 于斯岐阿利叱智干岐이다. 日本國에 훌륭한 임금이 있다고 전해 들었으므로 귀화하려 합니다. 穴門에 도착했을 때, 그 나라에 伊都都比古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는데 臣에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시 두 왕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사람됨을 자세히 보니 기필코 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곧 다시 그곳을 물러났으나 길을 몰라 섬과 포구를 오랫동안 맴돌다가 北海로부터 돌아 出雲國을 거쳐 이 곳에 왔습니다”고 말하였다. 그 때 천황의 죽음을 만나 (이곳에) 머물러 活目天皇(垂仁天皇)에게 벼슬하여 3년에 이르렀다. 천황이 都怒我阿羅斯等에게 “너희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자, “매우 바랍니다”고 답하였다. 천황이 阿羅斯等에게 “네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다면 선황을 뵙고 모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본국의 이름을 바꾸되 御間城천황의 이름을 따서 바로 너희 나라 이름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赤織絹을 阿羅斯等에게 주어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라 이름을 彌摩那國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이에 阿羅斯等은 받은 赤絹을 자기나라의 郡府에 간직하였는데, 신라인들이 듣고 군대를 일으켜 와서 그 적견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한을 맺은 시작이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都怒我阿羅斯等이 자기나라에 있을 때에 황소에 농기구를 싣고 농막에 가려했는데, 황소가 갑자기 없어져 그 자취를 찾아보니 발자취가 한 郡家에 머물렀다. 당시 한 노인이 “너희가 찾는 소는 이 郡家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郡公 등이 ‘소가 짊어진 물건으로 미루어 보니 반드시 죽여서 먹으려는 것이다. 만약 그 주인이 찾아 오면 물건으로 배상하자’하고 곧 죽여서 먹었다. 만약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지 물으면 재물을 바란다고 하지 말고 郡에서 제사지내는 神을 얻고자 할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郡公 등이 와서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가”라고 하자, 노인이 기르쳐준 대로 대답하였다.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었다. 흰 돌을 소 값으로 주었으므로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었더니, 그 神石이 아름다운 童女로 변하였다. 이에 阿羅斯等이 크게 크게 기뻐하여 동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阿羅斯等이 다른 곳에 간 동안 동녀가 갑자기 없어졌다. 阿羅斯等이 크게 놀라 자기 부인에게 “동녀가 어디로 갔소”라고 물으니, “東方을 향해 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곧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멀리 바다에 떠서 日本國에 들어갔다. 그가 찾던 동녀는 難波에 나아가서 比賣語曾社神이 되었고 또 豊國의 國前郡에 이르러 다시 比賣語曾社神이 되어, 이 두 곳에서 함께 제사를 받았다].

 

권6 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垂仁天皇

3년 봄 3월 신라 왕자 天日槍이 귀화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羽太玉 1개, 足高玉 1개, 鵜鹿鹿 赤石玉 1개, 出石小刀 1자루, 出石鉾 1자루, 日鏡(청동거울) 1개, 熊神籬 1개 등 7가지였는데, 但馬國에 보관하여 항상 神物로 삼았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天日槍이 작은배를 타고 와서 播磨國에 정박하여 肉粟邑에 있었다. 그 때 천황이 三輪君의 시조 大友主와 倭直의 시조 長尾市를 播磨에 보내어 天日槍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天日槍이, “저는 신라 국왕의 아들인데, 日本國에 聖皇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동생 知古에게 주고 귀화하였습니다”라 대답하고, 물건을 바쳤는데 葉細珠, 足高珠, 鵜鹿鹿 赤石珠, 出石刀子, 出石槍, 日鏡, 熊神籬, 膽狹淺大刀 등 8가지였다. 이에 (천황이) 天日槍에게, “播磨國 肉粟邑이나 淡路島 出淺邑의 두 읍 중에서 너의 마음대로 살도록 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 때 天日槍이, “신이 장차 거주할 곳에 대하여 만일 天恩을 내려 신이 원하는 곳을 허락하신다면, 신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지급받고자 합니다”라고 아뢰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天日槍이 菟道河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으로 近江國 吾名邑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다시 近江으로부터 若狹國을 거쳐 서쪽으로 但馬國에 이르러 거주처를 정하였다. 近江國 鏡村谷 陶人은 바로 天日槍을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天日槍은 但馬國 出嶋의 사람 太耳의 딸 麻多烏와 결혼하여 但馬諸助를 낳았다. 諸助는 但馬日楢杵를 낳고 日楢杵는 淸彦을 낳았으며 淸彦은 田道間守를 낳았다.]

 

88년 가을 7월 기유 초하루 戊午 여러 신하들에게 조칙을 내려, “짐이 듣자하니 신라 왕자 天日槍이 처음 올 때에 가지고 온 보물이 但馬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귀하다고 여겨 神寶로 삼았는데, 짐이 그 보물을 보고자 한다”라 하고, 그 날 사자를 보내 天日槍의 증손 淸彦에게 조칙을 내려 바치도록 하였다. 淸彦이 조칙을 받고 스스로 神寶를 받들어 바쳤다. 羽太玉 1개, 足高玉 1개, 鵜鹿鹿 赤石玉 1개, 日鏡 1개, 熊神籬 1개 등을 바쳤으나, 오직 出石이라는 小刀에 대해서는 淸彦이 갑자기 이를 바쳐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도포 속에 숨겨놓고 자신이 차고 다녔다. 천황이 小刀를 숨겨놓은 것을 알지 못하고 淸彦을 총애하고자 하여 御所에 불러 술을 내렸다. 이 때 칼이 도포로부터 나와 드러나니, 천황이 보고 친히 淸彦에게, “네 도포 안에 있는 칼은 어떤 칼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淸彦이 칼을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바친 神寶와 같은 종류의 물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천황이 淸彦에게, “그 神寶를 어찌 달리 둘 수 있겠느냐”라고 이르므로, 이에 바치니 모두 神府에 보관하였다. 그 후 얼마있다가 寶府를 열어보니 小刀가 없어졌다. 이에 사람을 시켜 淸彦에게, “네가 바친 칼이 홀연히 없어졌는데, 혹시 너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 淸彦이 “어제 저녁에 칼이 저절로 臣의 집에 이르렀다가 오늘 아침에 사라졌습니다”라고 대답하므로, 천황이 두려워하며 다시 찾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 出石刀子가 저절로 淡路島에 이르렀는데 그 섬 사람들이 ‘神’이라 이르고 칼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다. 이는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낸다. 옛날 한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但馬國에 정박하였는데, “너는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신라 왕자인데, 이름은 天日槍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但馬에 머물러 그 나라 前津耳[일설에는 前津見이라 하고, 또 일설에는 太耳라고 한다.]의 딸 麻拕能烏와 결혼하여 但馬諸助를 낳았는데 이가 淸彦의 할아버지이다.

 

90년 봄 2월 庚子 초하루 천황이 田道間守를 常世國에 보내어 사시사철 나는 香菓[이는 우리말로 箇俱能未라고 이른다.]를 구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垂仁天皇 後紀

(천황이 죽은) 다음 해 (景行天皇 2년) 봄 3월 辛未 초하루 壬午(12일) 田道間守가 常世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가지고 온 것은 사시사철 나는 香菓 8竿 8縵이었다. 田道間守가 이에 슬피 울며 탄식하여, “天朝의 명을 받들어 먼 이국땅에 가서, 만리의 파도를 넘고 멀리 弱水를 건넜다. 이 常世國은 神仙이 사는 신비한 구역으로서 俗人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이로써 왕래하는 가운데 10년이 지났는데, 어찌 홀로 큰 파도를 넘어 다시 본토로 돌아올 줄을 기약했으리오. 그러나 聖帝의 神靈에 힘입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제 천황이 이미 돌아가셔서 다녀왔음을 보고할 수 없으니 臣이 비록 살았다고 하나 또한 무엇이 보탬이 되리오”라 말하고, 천황의 능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뭇 신하들이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田道間守는 三宅連의 시조이다.

 

 

?日本書紀? 권 8 足仲彦天皇 仲哀天皇

 

(8년) 가을 9월 乙亥 초하루 己卯 群臣에게 詔勅을 내려 熊襲을 토벌하는 것을 의논케 했다. 이 때 神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 주기를,“천황은 어찌 熊襲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가. 그곳은 힘없고 쓸모없는 나라이니 어찌 군대를 일으켜 칠 만하겠는가. 이 나라보다 더욱 寶物이 많은 나라가 있으니 비유하면 처녀의 눈썹과 같고 津의 건너편에 있는 나라이다[碌은 우리말로 麻用弛枳라고 한다] 눈부신 금과 은, 비단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이 나라를 杼衾新羅國이라고 한다. 네가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낸다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그 나라가 반드시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또 웅습도 복종하게 될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천황의 배와 穴門直踐立이 바친 水田, 이름하여 大田이라 이름하는 것 등의 물건을 폐백으로 하라”고 하였다. 천황이 神의 말을 듣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 문득 높은 산에 올라 멀리 大海를 바라보았으나, 넓고 멀기만 할뿐 그 나라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천황이 神에게 “제가 두루 살펴 보았으나 바다만 있고 나라는 없었습니다. 어찌 텅빈 곳에 나라가 있겠습니까. 어떤 神이길래 헛되이 저를 속이십니까. 또한 우리 황실의 여러 천황들이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어찌 남은 신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신이 또한 황후에게 신탁하여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분명하게, 내려다 보아 내가 본 나라인데 어찌 없다고 하며 내 말을 비방하느냐. 그런데도 너는 이같이 말하고 마침내 믿지 않으니 너는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지금 황후가 비로소 태기가 있으니 그 아들이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천황은 여전히 믿지 않고 웅습을 억지로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9년) 이 해 신라 정벌로 말미암아 천황을 장사지낼 수 없었다.

 

권 9 氣長足姬尊 神功皇后

 

9년 봄 2월 足仲彦天皇(仲哀天皇)이 筑紫의 橿日宮에서 죽었다. 이 때 황후는 천황이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고 신의 재앙임을 알아 재물이 많은 보배로운 나라를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群臣과 百寮들에게 명하여 죄를 빌고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고 小山田邑에 齌宮을 다시 지었다.

여름 4월 壬寅 초하루 甲辰 북으로 火前國 松浦縣에 이르러 玉嶋里의 작은 냇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가 바늘을 구부려 낚시바늘을 만들어 밥알을 미끼로 하고 치마의 실을 풀어서 낚시줄로 하여 물 가운데의 돌 위로 올라가 낚시를 던지고 “짐은 서쪽의 財國을 얻고자 합니다. 만약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물고기가 낚시를 물게 하소서”라고 빌었다. 인하여 낚시대를 드니 비늘이 잔 고기가 걸려 있었다. 이 때 황후가 말하기를 “보기 드문 것이다.”[希見은 우리말로 梅豆邏志라 한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곳을 梅豆羅國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松浦라고 하는데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 나라 여인이 매년 4월 상순에는 물속에 낚시를 던져서 銀魚를 잡는 것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남자는 비록 낚시질을 하더라도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황후는 신의 가르침이 징험이 있음을 알아서 다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하였다. 이에 神田을 정하여 이를 경작시켰다. 그 때에 儺河의 물을 끌어다가 神田을 기름지게 하고자 하여 도랑을 팠는데, 迹驚岡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어 도랑을 팔 수 없었다. 황후가 武內宿禰를 불러 칼과 거울을 받들고 하늘과 땅의 신에게 기도하여 도랑이 통하기를 구하게 했다. 그러자 천둥과 번개가 쳐 바위를 깨뜨려 물을 통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도랑을 裂田溝라 하였다. 황후는 橿日浦에 돌아와서 머리를 풀고 바닷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신의 가르침을 받고 皇祖의 靈을 힘입어 滄海를 건너가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머리를 바닷물에 씻는데 만약 영험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곧 바다에 들어가 씻었더니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어졌다. 황후는 나뉘어진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인하여 군신에게 “무릇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다. 安危와 성패는 반드시 여기에 있다. 지금 정벌할 곳이 있는데 이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맡겨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가 그대들에게 있게 되므로 이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다. 나는 부녀자이고 不肖하지만 잠시 남자의 모습을 빌려 웅대한 계략을 일으키고자 한다. 위로는 하늘과 땅의 신의 靈을 힘입고 아래로는 群臣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험한 파도를 건너 선박을 정돈하여 재물이 많은 땅을 얻고자 한다.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그대들과 함께 功을 얻게될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만 죄가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이런 뜻이 있으니 이를 함께 의논하자”고 하였다. 群臣이 모두 “황후가 천하를 위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또 죄가 신하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시니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을 9월 庚午 초하루 己卯 여러 나라로 하여금 선박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게 했다. 이 때 軍卒들이 잘 모이지 않았으므로 황후가 “반드시 신의 마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大三輪社를 세우고 칼과 창을 바치자 軍衆들이 저절로 모였다. 이에 吾瓮의 海人 烏摩呂로 하여금 西海로 나가서 나라가 있는지 살펴 보도록 했다. 돌아와서 “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磯鹿의 海人 名草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며칠 뒤 돌아와서 “서북쪽에 산이 있는데 구름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습니다. 대개 나라가 있는 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吉日을 점쳐서 출발하기까지 며칠이 남았는데, 이 때 황후가 친히 斧鉞을 잡고 3軍에게 명령하기를 “징과 북소리가 절도가 없고 깃발이 뒤섞여 어지러우면 곧 士卒들이 정돈되지 않는다. 재물이 많기를 탐하고 사사로이 妻子의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적이 적더라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며 적이 강하다고 해서 굴복해서도 안된다. 폭력으로 부녀자를 범한 자를 용서하지 말고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 전쟁에 이기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요, 도주하는 자는 당연히 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神이 가르치기를 “和魂은 왕의 몸에 붙어서 목숨을 지킬 것이고, 荒魂은 선봉이 되어 군선을 인도할 것이다”라 하였다[和魂은 우리말로 珥岐瀰多摩라 하고 荒魂은 우리말로 阿邏瀰多摩라고 한다]. 神의 가르침을 얻고나서 拜禮하고, 依網吾彦男垂見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주재자로 삼았다. 이 때 마침 황후의 산달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빌며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낳게 해주소서”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 伊覩縣의 길가에 있다. 이리하여 荒魂을 軍의 선봉으로 하고 和魂을 청하여 王船에 모셨다.

겨울 10월 己亥 초하루 辛丑 和珥津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고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겠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둘 바를 모른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에 넘친 일을 듣지 못했다. 만약 天運이 다했다면 나라가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바다에 가득차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났다. 북과 나팔소리가 나니 산천이 모두 떨었다. 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며 싸울 뜻을 잃었다.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어니 동쪽에 神國이 있는데 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神兵일 것이니 어찌 병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곧 흰 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 圖籍을 봉인하여 왕의 배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인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하늘과 땅과 같이 길이 엎드려 飼府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틈없이 봄 가을로 말의 털을 씻는 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가 먼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의 해가 다시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阿利那禮河가 오히려 거꾸로 흐르고, 냇돌이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봄 가을의 조공을 거르고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않거나 게을리하면 하늘과 땅의 신이 함께 토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신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황후는 “처음에 금은의 나라를 주겠다고 한 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3軍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財國을 얻었고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했으니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의 결박을 풀고 飼部로 삼았다. 드디어 그 나라안에 들어가 보물 창고를 봉하고 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워 후세의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 창은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있다. 이에 신라왕 波沙寐錦은 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金‧銀‧彩色‧綾‧羅‧縑絹을 배 80척에 싣고 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調를 日本國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高麗와 百濟의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軍勢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軍營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內官家屯倉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12월 戊戌 초하루 辛亥日 譽田天皇을 筑紫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낳은 곳을 宇瀰라고 불렀다.[일설은 다음과 같다. 足仲彦天皇이 筑紫 강일궁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이 沙麽縣主의 祖인 內避高國避高松屋種에게 신탁하여 천황에게 “천황이 만약 보배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실제로 주리라”고 깨우쳐 주었다. 다시 말하기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황후에게 바쳐라”고 하였다. 곧 신의 말을 따라 황후가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주기를 “지금 천황이 바라고 있는 나라는 비유하면 사슴의 뿔과 같아서 실속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 천황이 타고 있는 배와 穴戶直踐立이 바친 水田, 즉 大田이란 것을 폐백으로 하여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내면 미녀의 눈썹과 같은 金‧銀이 많은 눈부신 나라를 천황에게 주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황이 신에게 “비록 신이라고 하지만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어디에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또 내가 탄 배를 신에게 바치면 나는 어느 배를 타야하는가, 그러나 어떤 신인지도 모르니 그 이름을 알고 싶다”고대답 하였다. 이 때 신이 그 이름을 일컫기를 “表筒雄, 中筒雄, 底筒雄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 신의 이름을 일컫고 또한 거듭하여 “나의 이름은 向匱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천황이 황후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婦人이다. 어찌 速狹騰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신이 천황에게 “왕 그대가 이같이 믿지 않으니 반드시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지금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얻게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천황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그 뒤 황후가 신의 가르침을 따라 제사지냈다. 즉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이 때 신이 (황후에게) 머물며 인도하였으므로 배를 따라 파도가 일어 멀리 신라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이 나와서 맞이하여 무릎을 꿇고 왕의 배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臣은 지금 이후로 일본국에 있는 신의 아들에게 內官家가 되어 조공을 끊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또 일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軍船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이에 군대를 따라갔던 신 表筒男‧中筒男‧底筒男 세 신이 황후에게 “우리 荒魂을 穴門山田邑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때 穴門直의 조상인 踐立과 津守連의 조상인 田裳見宿禰가 황후에게 “神이 머물고자 하는 땅을 반드시 받들어 정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踐立을 荒魂을 제사지내는 神主로 삼고 穴門山田邑에 祠堂을 세웠다. 신라를 친 이듬해 봄 2월에 황후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穴門豊浦宮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천황의 널을 거두어 바닷길로 서울을 향했다. 이 때 麛坂王‧忍熊王이 천황이 죽고, 또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고 천황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5년 봄 3월 癸卯 초하루 己酉日 신라왕이 汙禮斯伐과 毛麻利叱智 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微叱許智伐旱을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許智伐旱을 꾀어 “사신 汙禮斯伐과 毛麻利叱智 등이 나에게 ‘우리 왕이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에 연루시켜 처자를 모두 종으로 삼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데 잠시 본토에 돌아가서 그 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라 속이게 하였다. 황태후가 곧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葛城襲津彦을 딸려 보냈다. 함께 對馬에 도착하여 鉏海의 水門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毛麻利叱智 등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微叱旱岐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사람 모습을 만들어 微叱許智의 자리에 두고 거짓으로 병든 사람인 채하고 襲津彦에게 “微叱許智가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襲津彦이 사람을 시켜 병자를 돌보게 했는데, 속인 것을 알고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에 나아가 蹈鞴津에 이르러 草羅城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이 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오늘날의 桑原과 佐糜‧高宮‧忍海 4읍의 漢人 등의 시조이다.

 

46년 봄 3월 乙亥 초하루 斯摩宿禰를 卓淳國에 보내었다.[斯麻宿禰는 어떤 姓氏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때 卓淳王末錦旱岐가 斯摩宿禰에게 “甲子年 7월에 백제인 久氐‧彌州流‧莫古 세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君王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久氐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러자 久氐 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갖춘 뒤에 가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만약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알려 주십시요’라 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에 斯摩宿禰는 從者 爾波移와 卓淳人 過古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肖古王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綵絹 각 1필과 角弓箭 및 鐵鋌 40枚를 爾波移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귀한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만 있을 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使者에게 부쳐서 바친다”고 하였다. 이에 爾波移가 일을 받들고 돌아와서 志摩宿禰에게 보고했다. 바로 卓淳으로부터 돌아왔다.

 

47년 여름 4월 백제왕이 久氐‧彌州流‧莫古를 보내어 조공하게 했다. 이 때 신라국의 調使가 久氐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와 태자 譽田別尊이 매우 기뻐하며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지금 와서 조공하니, 천황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슬프도다”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하였더니 신라의 공물은 진기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백제의 공물은 적고 천하여 좋지 않았다. 이에 久氐 등에게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된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沙比新羅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 달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 久氐 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久氐 등은 두려워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겨우 天朝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때 황태후와 譽田別尊이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천신에게 기도하여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여 일의 사실 여부를 조사시키며, 누구를 신라에 파견하여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라 하였다. 천신이 “武內宿禰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고 千熊長彦을 사자로 삼으면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千熊長彦은 어떤 성씨의 사람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일설에는 武藏國人이니 지금의 額田部 槻本首 등의 시조라고 한다. ?百濟記?에 職麻那那加比跪라고 한 사람은 대개 이 사람인 듯하다]. 이에 千熊長彦을 신라에 보내어 백제가 바치는 물건을 훔친 것을 질책하였다.

 

49년 봄 3월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沙白‧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요”라 하였다. 곧 木羅斤資와 沙沙奴跪에게[이 두 사람은 그 姓을 모르는데 다만 木羅斤資는 백제 장군이다] 精兵을 이끌고 沙白‧蓋盧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와 왕자 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比利‧辟中‧布彌支‧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父子와 荒田別‧木羅斤資 등이 意流村[지금은 州流須祇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古沙山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 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久氐 등을 딸려서 보냈다.

 

50년 봄 2월 荒田別 등이 돌아왔다.

여름 5월 千熊長彦과 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久氐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久氐 등이 “天朝의 큰 은택이 멀리 우리나라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왕이 기쁨에 넘쳐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비록 만세까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多沙城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驛으로 삼게 했다.

 

51년 봄 3월 백제왕이 또 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千熊長彦을 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이 때 백제왕 父子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貴國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보다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을 수 있으리요. 성스러운 왕이 위에 있어 해와 달같이 밝고 신이 아래에 있어 산악과 같이 굳세니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끝내 두 마음이 없을 것이오”라 아뢰었다.

 

52년 가을 9월 丁卯 초하루 丙子日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土物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55년 백제 肖古王이 죽었다.

 

56년 백제왕자 貴須가 왕이 되었다.

 

62년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襲津彦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百濟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壬午年에 신라가 貴國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加羅國을 쳤다. 가라국왕 己本旱岐와 아들 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 등이 그 人民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旣殿至가 大倭로 가서 “천황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流離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木羅斤資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加羅에 모여 그 社稷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沙至比跪가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와 스스로 숨어 있었다. 그 누이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比跪가 몰래 使人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릴지 어떨지를 물어 보았다. 누이는 꿈에 가탁하여 “오늘 밤 꿈에 沙至比跪를 보았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比跪가 어찌 감히 오느냐”라고 하였다. 누이가 천황의 말을 전하였더니 比跪는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

 

64년 백제국 貴須王이 죽었다. 왕자 枕流王이 즉위하였다.

 

65년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권 10 應神天皇 (譽田天皇)

 

(卽位前紀) 譽田天皇(應神天皇)은 足仲彦天皇(仲哀天皇)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氣長足姬尊(神功皇后)이다. 天皇은 (神功)皇后가 新羅를 정벌하던 해인 庚辰年(仲哀天皇 9년) 겨울 12월에 筑紫의 蚊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물을 깨달아 보는 것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하는 행동은 절도가 있었고 성스러운 모습은 남다름이 있었다. 皇太后가 섭정한 지 3년 되던 해에 皇太子가 되었다[그 때 나이가 3세였다]. 처음 천황이 뱃속에 있을 때, 하늘과 땅의 신이 三韓을 주었다. 태어났을 때 굳은살이 팔뚝 위에 나 있어서 마치 그 모양이 화살통(병:ほむた)과 같았는데, 이것은 황태후가 男裝을 하고 화살통을 매고 있던 모양과 비슷하였다[肖는 우리말로 阿叡라 한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譽田(ホムタ)天皇이라 하였다[옛날 사람들은 병(화살통)을 「褒武多」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 天皇이 太子가 되었을 때 越國에 가서 角鹿의 笥飯大神에게 제사하였는데, 그 때 大神과 太子가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서 大神을 去來紗別神이라 부르고, 太子를 譽田別尊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大神의 본래 이름은 譽田別神이고, 태자의 원래 이름은 去來紗別尊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다른 데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잘 알 수 없다].

 

(3년) 이 해 百濟의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日本)의 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木菟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7년 가을 9월 高麗人・百濟人・任那人・新羅人이 함께 來朝하였다. 그 때 武內宿禰에게 명하여 여러 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때문에 이 연못을 이름하여 韓人池라 불렀다.

 

8년 봄 3월 百濟人이 來朝하였다[?百濟記?에는, “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日本이) 우리의 枕彌多禮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直支를 天朝(일본조정)에 보내어 先王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9년 여름 4월 武內宿禰를 筑紫에 보내어 백성을 감찰하게 하였다. 이 때 武內宿禰의 동생 甘美內宿禰는 형을 폐하고자 천황에게, “武內宿禰는 항상 천하를 엿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筑紫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홀로 筑紫를 나누고 三韓을 불러들여 나에게 조회하도록 한 다음 장차 천하를 지배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라고 참소하였다. 이에 천황은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武內宿禰를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武內宿禰는 탄식하며·····.

 

14년 봄 2월 百濟王이 縫衣工女를 바쳤다. 眞毛津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오늘날 來目衣縫의 始祖이다.

 

(14년) 이 해 弓月君이 百濟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臣은 우리나라 120縣의 人夫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新羅人이 방해하여 모두 加羅國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葛城襲津彦을 파견하여 弓月의 人夫를 加羅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15년 가을 8월 壬戌 초하루 丁卯 百濟王이 阿直伎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輕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阿直伎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때문에 말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廐坂이라고 한다. 阿直伎는 또 經典을 잘 읽었으므로 太子인 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天皇은 阿直伎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王仁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上毛野君의 조상인 荒田別과 巫別을 百濟에 보내어 王仁을 불렀다. 阿直伎는 阿直岐史의 始祖이다.

 

16년 봄 2월 王仁이 왔다. 太子 菟道稚郞子는 스승으로 모시고 王仁에게서 여러 典籍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王仁이라는 사람은 書首 등의 始祖이다.

 

(16년) 이 해 百濟의 阿花王이 죽었다. 天皇은 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東韓은 甘羅城・高難城・爾林城이다].

 

(16년) 8월 平群木菟宿禰・的戶田宿禰를 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詔를 내려, “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반드시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新羅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木菟宿禰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新羅의 국경에 다다르자, 新羅王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自服하였다. 그래서 弓月의 人夫를 거느리고 襲津彦과 함께 돌아왔다.

 

25년 百濟의 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木滿致가 國政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天皇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百濟記?에는, “木滿致는 木羅斤資가 新羅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功으로 任那에서 專橫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貴國(日本)에 갔다가 돌아와 天朝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天朝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28년 가을 9월 高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리고 表를 올렸는데, 그 表에 “高麗王은 日本國에 敎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太子인 菟道稚郞子는 그 表를 읽고 노하여 高麗의 사자를 꾸짖었다. 그리고 그 表文이 무례하다고 하여 表를 파기하였다.

 

31년 가을 8월 여러 신하들에게 詔를 내려, “官船 가운데 枯野라고 하는 것은 伊豆國에서 바친 배이다. 그런데 이 배는 썩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官用으로 쓰인 功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여야 그 배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詔를 받고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그 배의 材木을 땔감으로 하여 소금을 굽게 하였다. 그래서 500광주리(籠)의 소금을 얻어 여러 나라에 두루 나누어 주고는 배를 만들게 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서는 한꺼번에 500척의 배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을 모두 武庫의 水門에 모아 놓았다. 이 때 新羅의 조공 사신이 모두 武庫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新羅 사신의 숙소에서 갑자기 불이 나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타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人을 책망하였다. 新羅王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뛰어난 匠人을 바쳤다. 이들이 猪名部 등의 始祖이다·····.

 

37년 봄 2월 戊午 초하루 阿知使主・都加使主를 吳나라에 보내어 縫工女를 구하게 하였다. 阿知使主 등은 高麗國을 지나서 吳나라로 가고자 하여, 먼저 高麗에 도착하였으나 (吳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高麗에 구하니, 高麗王은 久禮波와 久禮志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吳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吳의 왕은 工女 兄媛・弟媛・吳織・穴織 등 4명의 여자를 주었다.

 

39년 봄 2월 百濟의 直支王이 누이 新齊都媛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新齊都媛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와서 귀화하였다.

 

卷 11 仁德天皇 (大鵻鷯天皇)

 

(卽位前紀) 大鵻鷯天皇(仁德天皇)은 譽田天皇(應神天皇)의 네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仲姬命이며 五百城入彦皇子의 손자이다. 天皇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용모가 아름다왔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질고 너그러우며 자애로왔다. (應神天皇) 41년 봄 2월에 譽田天皇이 죽었다. 그 때 太子 菟道稚郞子는 왕위를 大鵻鷯尊에게 양보하며 帝位에 오르지 아니하였다. (中略) 이 때 額田大中彦皇子는 倭의 屯田과 屯倉을 장악하려고 屯田司인 出雲臣의 조상 淤宇宿禰에게, “이 屯田은 원래 山守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내가 다스릴 것이다. 너는 주관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淤宇宿禰가 太子에게 이 일을 아뢰자 太子는, “너는 곧 大鵻鷯尊에게 말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淤宇宿禰는 大鵻鷯尊에게, “臣이 맡고 있는 屯田을 大中彦皇子가 방해하여 다스리지 못하게 합니다”하고 아뢰었다. 大鵻鷯尊은 倭直의 조상인 麻呂에게, “倭의 屯田이 원래 山守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臣은 모릅니다. 臣의 아우 吾子籠만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 때 吾子籠은 韓國에 파견되어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大鵻鷯尊은 淤宇宿禰에게, “네가 직접 韓國에 가서 吾子籠을 불러 와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빨리 가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淡路의 海人 80명을 뽑아서 뱃사공으로 하였다. 이에 淤宇宿禰는 韓國에 가서 즉시 吾子籠을 데리고 왔다·····.

 

(11년) 이 해 新羅人이 朝貢하였다. 따라서 이 役事에 동원하였다.

 

12년 가을 7월 辛未 초하루 癸酉日 高麗國이 鐵로 만든 방패와 鐵로 만든 과녁을 바쳤다.

 

(12년) 8월 庚子 초하루 己酉 高麗에서 온 사신들을 朝廷에서 향응하였다. 이 날에 群臣 및 百官들을 모아놓고 高麗에서 바친 鐵로 된 방패와 과녁에 활을 쏘아 보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과녁을 쏘아 꿰뚫지 못하였으나 的臣의 조상인 盾人宿禰만이 鐵로 된 과녁에 활을 쏘아 통과시켰다. 이 때 高麗에서 온 사신들이 그것을 보고 그 활쏘는 솜씨의 훌륭함에 두려워하며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다음날 盾人宿禰를 칭찬하고 的戶田宿禰라는 이름을 내렸다. 같은 날에 小泊瀨造의 조상인 宿禰臣에게 이름을 내려 賢遺臣이라 하였다[賢遺는 우리말로 左가能려里라 한다].

 

17년 新羅가 朝貢하지 않았다.

 

(17년) 가을 9월 的臣의 조상인 砥田宿禰와 小泊瀨造의 조상인 賢遺臣을 (新羅에) 보내어 朝貢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이에 新羅人은 두려워하여 貢物을 바쳤다. 貢物은 비단 1,460필 및 여러가지 물품을 합하여 모두 80척이었다.

 

41년 봄 3월 紀角宿禰를 百濟에 보내어 처음으로 나라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 이 때 百濟의 왕족인 酒君이 무례하게 행동하였으므로 紀角宿禰는 백제의 왕을 질책하였다. 그러자 百濟王은 두려워하여 쇠사슬로 酒君을 묶어서 襲津彦에게 딸려보내어 바쳤다. 酒君은 (일본에) 와서 곧 石川錦織首許呂斯의 집으로 도망가 숨었다. (酒君은) 속여 말하기를, “天皇은 이미 나의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의지하여 살고 싶다”고 하였다. 오랜 뒤에 天皇은 드디어 그의 죄를 용서하였다.

 

43년 가을 9월 庚子 초하루 依網의 屯倉에 있는 阿弭古가 기이한 새를 잡아서 天皇에게 바치며, “臣은 항상 그물을 쳐서 새를 잡는데 아직까지 이와 같은 새는 잡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이하게 생각되어 그것을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天皇은 酒君을 불러 새를 보이며, “이것이 무슨 새인가”하고 물었다. 酒君은, “이와 같은 새는 百濟에 많이 있습니다. 길들여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빨리 날아서 온갖 새들을 잡습니다. 百濟 사람들은 이 새를 ‘俱知’[이것은 지금의 매이다]라고 부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 새를) 酒君에게 주어 길들이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酒君은 가죽으로 만든 낚싯줄을 그 발에 매고 작은 방울을 그 꼬리에 달아서 팔뚝 위에 올려 놓고 天皇에게 바쳤다. 이 날 白舌鳥野에 행차하여 사냥을 하였다. 그 때 꿩이 많이 날아 올랐는데 매를 놓아 잡도록 하니 잠깐 사이에 수십 마리의 꿩을 얻었다.

 

53년 新羅가 朝貢을 하지 않았다.

 

(53년) 여름 5월 上毛野君의 조상인 竹葉瀨를 (新羅에) 보내어 조공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가는 도중에 흰사슴을 잡았으므로 돌아와 天皇에게 바치고 다시 날을 받아 출발하였다. 잠시 후에 또다시 竹葉瀨의 아우인 田道를 보내면서 詔를 내려, “만약 신라가 대항하거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라”고 하고, 날랜 병사를 주었다. 新羅는 군사를 일으켜 맞섰다. 이 때 新羅人은 매일 싸움을 걸어 왔다. 그러나 田道는 요새를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그 때 신라 군졸 한 명이 진영 밖으로 나온 것을 붙잡아다가 동정을 물으니, “힘 센 사람이 있어 百衝이라 하는데 그는 날래고 용감하여 항상 軍의 오른쪽 선봉이 되고 있다. 그러니 기회를 엿보아 왼쪽을 공격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新羅軍이 왼쪽을 비워놓고 오른쪽을 방비하였다. 이에 田道는 날랜 기병을 계속하여 보내 그 왼쪽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新羅軍이 무너지자, 그 틈을 타 병사를 풀어 수백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4邑의 백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58년) 겨울 10월 吳國・高麗國이 함께 朝貢하였다.

 

<<日本書紀>> 권 13, 雄朝津間稚子宿녜天皇[允恭天皇].

 

3년 봄 정월 辛酉 초하루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뛰어난 醫員을 구하였다. 가을 8월 醫員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천황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천황이 기뻐하여 의원에게 후한 상을 주어서 자기 나라에 돌려보냈다.

 

42년 봄 정월 乙亥 초하루 戊子 천황이 죽었다. 이때 나이는 若干이었다. 이에 신라왕은 천황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배 80척으로 조공하고 아울러 각종 樂人 80명을 바쳤다. 이들은 對馬島에 도착하여 큰 소리로 울고 筑紫에 이르러 또 큰 소리로 울었다. 難波津에 이르러 모두 흰옷을 입었다. 조공물을 받쳐들고 또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難波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울부짖기도 하고 춤추고 노래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屍身을 모셔둔 곳에 參禮하였다.

겨울 11월 신라의 弔問使들이 問喪의 예를 마치고 돌아갔다. 신라인은 늘 京城 근방에 있는 耳成山, 畝傍山을 좋아하였다. 琴引坂에 도착하여 그곳을 돌아보며 “우네메하야 미미하야(내 사랑하는 우네메여 미미여)”라고 하였다. 이는 민간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아직 익숙지 않았던 까닭에 畝傍山을 ‘于泥口+羊(우네메)’라 잘못 말하고 耳成山을 ‘水+彌 水+彌(미미)’로 잘못 말한 것이다. 이때 왜의 飼部에 속해있던 사람이 신라사람을 따라갔는데, 이 말을 듣고 의심하기를 신라사람이 采女와 정을 통했다고 여겨 돌아와 大泊瀨 皇子에게 아뢰었다. 황자는 곧 신라의 使者들을 모두 가두고는 사실여부를 캐물었다. 이때 신라 使者들이 “采女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서울 근방에 있는 두 산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잘못된 말인 것을 알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신라인들은 매우 원망하여 다음부터는 바치는 물건의 종류와 배의 수를 줄였다.

 

<<日本書紀>> 권 14,大泊瀨幼武天皇[雄略天皇].

 

2년 가을 7월 백제 池津媛은 천황이 장차 同寢하려는 것을 거스리고 石川楯[옛 책에는 石河股合首의 조상 楯이라 한다]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大伴室屋大連에게 명하여 來目部를 시켜 부부의 四支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百濟新撰>>에는 “己巳年에 蓋鹵王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阿禮奴足+危(궤)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慕尼夫人의 딸 適稽女郞을 잘 꾸며서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5년) 여름 4월 백제 加須利君[蓋鹵王이다]은 池津媛[適稽女郞이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采女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 나라의 이름을 失墜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軍君[昆支이다]에게 “네가 마땅히 日本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軍君이 “임금님의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임금님의 부인을 저에게 주시면 그런 다음 떠나라는 명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加須利君은 임신한 부인을 軍君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따라서 이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 조정에 파견되는 명을 받들었다.

6월 丙戌 초하루. 임신한 부인이 과연 加須利君의 말처럼 筑紫의 各羅嶋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嶋君이라 하였다. 이에 軍君은 곧 한 척의 배로 嶋君을 나라에 보내었는데, 이가 武寧王이 되었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主嶋라 일컬었다.

가을 7월. 軍君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百濟新撰에 “辛丑年에 蓋鹵王이 아우 昆支君을 보내어 大倭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 兄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7년) 이해 吉備上道臣田狹이 궁중에서 侍從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稚媛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미인들 중에서 내 아내만한 이가 없다. 빼어나게 아름다와 온갖 좋은 점을 갖추었고 환히 빛나고 온화하여 여러가지 좋은 용모를 구비하였다. 화장도 필요 없으며 향수를 바를 것까지도 없다. 넓은 세상에서 견줄만한 이가 드무니 이 시대에 홀로 빼어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귀를 귀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곧 자기가 稚媛을 얻어 시중드는 여자로 삼고자 하여 田狹을 任那 國司로 삼았다. 얼마 지난 후 천황이 稚媛과 동침하였다. 田狹臣은 稚媛에게 장가들어 兄君과 弟君을 낳았다.[다른 책에서는 “田狹臣 아내의 이름은 毛媛인데 葛城襲津彦의 아들 玉田宿녜의 딸이다. 천황이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 남편을 죽이고 자기가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田狹은 이미 任地에 가 있었는데, 천황이 그의 아내와 사통하였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얻고자 신라에 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이 때 신라는 ‘中國’을 섬기지 않고 있었다. 천황이 田狹臣의 아들 弟君과 吉備海部直赤尾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懲罰하라”고 하였다. 이때 西漢才伎 歡因知利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韓國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만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歡因知利를 弟君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弟君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신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로 변하여 忽然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弟君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弟君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백제에서 바쳐 데리고 올 재주있는 사람들을 큰 섬안에 모아놓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몇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任那國司 田狹臣은 弟君이 (신라)를 치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기뻐하며 몰래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弟君에게 警戒하여 “너의 목이 얼마나 단단하기에 다른 사람을 치는가. 전하는 말을 듣건대 천황이 나의 아내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있다고 한다.[자식에 대해서는 윗글에서 이미 보았다]. 이제 禍가 나에까지 미치기는 발을 들고 서서 기다리는 것 만큼이나 순식간일 것이다. 내 아들인 너는 백제를 차지하고 앉아 일본에 통하지 않도록 하라. 나는 任那를 차지하고서 역시 일본에 통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弟君의 아내 樟媛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君臣의 義를 중히 여기며,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 더하고 절의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그 모반을 미워하여 몰래 남편을 죽여 집안에 숨겨 묻어두고 海部 直赤尾와 함께 백제에서 바친 손재주 좋은 기술자를 거느리고 큰 섬에 있었다. 천황은 弟君이 죽은 것을 알고 日鷹吉士堅磐固安錢 [堅磐은 우리말로 柯陀之波라 한다]을 보내어 함께 복명하게 했다. 마침내 倭國 吾礪 廣津[廣津은 우리말로 比慮岐頭라 한다]邑에 안치하였으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천황이 大伴大連室屋에게 詔를 내려 東漢直국에게 명하여 新漢 陶部 高貴, 鞍部 堅貴, 畵部 因斯羅我, 錦部 定安那錦, 譯語 卯安那 등을 上桃原,下桃原,眞神原의 3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어떤 책에는 “吉備臣弟君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漢手人部,衣縫部,肉人部를 바쳤다”고 한다].

 

8년 봄 2월. 身狹村主靑과 檜외民使博德을 吳나라에 사신보냈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高麗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사람을 말몰이(典馬) [典馬는 우리말로 于麻柯比라 한다]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城[어떤 책에서는 都久斯岐城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을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王이 膳臣斑鳩[斑鳩는 우리말로 伊柯屢俄라 한다], 吉備臣小梨, 難波吉士赤目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膳臣 등이 아직 軍營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膳臣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 하였다. 膳臣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軍中에 令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地道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膳臣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라는 것은 高麗와 新羅를 말한다]. 膳臣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매우 약한데 매우 강한 나라와 부닥쳤다. 官軍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업신여김을 당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장차 다른 사람의 영토가 되었다면 이는 아마 이번 전쟁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 어찌 天朝를 배반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권 14 雄略天皇

 

9년(465) 3월 천황이 新羅를 직접 정벌하려고 하였다. 神이 천황에게 “가지 말라”고 경계하니, 천황이 이로 말미암아 가지 않았다. 그리고 紀小弓宿禰·蘇我韓子宿禰·大伴談連[談은 우리말로 箇陀利라고 한다]·小鹿火宿禰 등에게 칙명으로 “新羅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여러 대에 걸쳐 신하를 칭하며 조빙을 어기지 않았고 공물도 잘 바쳤다. 짐이 천하를 다스림에 미쳐 몸을 對馬의 밖에 두고 자취를 匝羅 밖에 감춘 채 高麗의 조공을 막고 百濟의 城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다시 조빙을 이미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음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리같은 사나운 마음이 있어 배부르면 나는 듯 달려가고 굶주리면 붙좇는다. 그대들 네 卿을 대장으로 삼으니 王師를 거느리고 가 쳐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紀小弓宿禰는 大伴室屋大連으로 하여금 천황에게 호소해주도록 하면서 “신이 비록 미약하지만 삼가 칙명을 받들겠습니다. 다만 지금 신의 아내가 목숨이 다할 무렵이 되어 신을 돌볼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公은 이 일을 갖추어 천황께 아뢰어 주십시오”라 하였다. 大伴室屋大連이 갖추어 아뢰니 천황이 듣고 슬피 탄식하면서 吉備上道의 采女 大海를 紀小弓宿禰에게 하사하여 그를 따라가서 돌보게 하였다. 드디어 수레를 밀어 (군대를) 보냈다. 紀小弓宿禰 등이 곧 新羅에 들어가 이웃 郡을 함께 공격하였다[行屠는 함께 가서 함께 공격한다는 것이다]. 新羅王은 밤에 官軍이 사방에서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관군이) 㖨의 모든 땅을 얻었음을 알고 수백 騎와 함께 어지러이 도망갔다. 그러므로 크게 패배시키고 小弓宿禰는 (新羅軍을) 쫓아가 陣 속에서 적장을 베었다. 탁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紀小弓宿禰는 또한 군사를 거두어 大伴談連 등과 만나 군대를 다시 크게 일으켜 남은 무리와 싸웠다. 이날 저녁 大伴談連과 紀岡前來目連이 모두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談連의 시종으로 같은 姓인 津麻呂는 나중에 진영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주인을 찾았다. 진영에서 찾지 못하자 나와서 “우리 주인 大伴公은 어느 곳에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사람들이 “너의 주인 등은 적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알려주며 주검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津麻呂는 그 말을 듣고 땅을 구르면서 “주인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혼자 살겠는가”라 소리치고 적에게 나아가 함께 죽었다. 얼마 후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가니 관군도 따라서 물러났다. 大將軍 紀小弓宿禰는 병에 걸려 죽었다.

여름 5월 紀大磐宿禰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음을 듣고 新羅를 향하면서 小鹿火宿禰가 관장하던 兵馬와 船官 및 小官들을 장악하고 명령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므로 小鹿火宿禰는 大磐宿禰를 매우 원망하여 韓子宿禰에게 거짓으로 “大磐宿禰가 저에게 ‘내가 다시 韓子宿禰가 장악한 관리들을 뺏는 것이 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원컨데 굳게 지키십시오”라고 고했다. 이로 말미암아 韓子宿禰는 大磐宿禰와 틈이 벌어졌다. 이 때 百濟王은 日本의 장수들이 작은 일 때문에 틈이 벌어졌음을 듣고 韓子宿禰 등에게 사람을 시켜 “나라의 경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왕림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韓子宿禰 등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갔는데, 강에 이르러 大磐宿禰가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 때 韓子宿禰가 뒤에서 大磐宿禰의 말안장 뒤를 받친 나무에 활을 쏘았다. 大磐宿禰가 놀라 돌아보며 韓子宿禰를 쏘니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세 신하들이 앞에서 서로 다투었으므로 길에서 행렬이 어지러워져 百濟 왕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때 采女 大海가 小弓宿禰의 관을 따라 日本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大伴室屋大連에게 근심스럽게 상의하기를 “저는 장례치를 곳을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좋은 땅을 골라주십시오”라 하니, 大連이 곧 아뢰었다. 천황이 大連에게 명령하여 “大將軍 紀小弓宿禰는 용처럼 뛰어 오르고 호랑이처럼 노려보며 8方을 널리 바라보았고, 반역자들을 불시에 토벌하고 사방의 적들을 물리쳤다. 그러므로 몸은 만리 밖에서 수고로웠고 목숨이 三韓에서 떨어졌으니, 매우 불쌍히 여겨 장례를 담당할 사람을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그대 大伴卿과 紀卿 등은 같은 나라 가까운 곳의 사람으로서 유래가 오래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大連이 명령을 받들어 土師連小鳥로 하여금 田身輪邑에 무덤을 만들어 장례지내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大海가 기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韓奴 室·兄麻呂·弟麻呂·御倉·小倉·針 6 口를 大連에게 보냈는데, 吉備上道의 蚊嶋田邑 家人部가 이들이다. ···

 

11년(467) 가을 7월 百濟國으로부터 도망해 온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이름을 貴信이라고 하였다. 또 貴信은 吳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磐余의 吳琴을 타는 壃手屋形麻呂 등이 바로 그 후손이다.

 

15년(471) 秦의 백성을 臣·連 등에게 분산시켜 각각 원하는 바에 따라 부리도록 하고 秦造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秦造酒가 매우 근심스럽게 여기며 천황을 섬겼다. 그러므로 천황은 그를 총애하여 詔를 내려 秦의 백성을 모아 秦酒公에게 주니, 공은 이에 180種의 勝을 거느리고 庸調로 絹縑을 바쳐 朝廷에 가득 쌓았다. 그러므로 姓을 하사하여 禹豆麻佐라 하였다[일설에는 禹豆母利麻佐라 하였는데, 모두 가득 쌓은 모양이다].

 

16년(472) 가을 7월 詔를 내려 뽕나무 재배에 적당한 國縣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또 秦의 백성을 분산하여 옮겨서 庸調를 바치도록 하였다.

 

20년(476) 겨울 高麗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百濟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倉下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高麗의 장수들이 왕에게 “百濟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百濟國은 日本國의 官家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百濟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蓋鹵王 乙卯年(475) 겨울 狛의 大軍이 와서 大城을 7일 낮밤을 공격하였다. 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21년(477) 봄 3월 천황이 百濟가 고구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를 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百濟국은 비록 거의 망해 倉下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汶洲王은 蓋鹵王의 동생이다. ?日本舊記?에서는 “久麻那利를 末多王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久麻那利는 任那國의 下哆呼唎縣의 別邑이다].

 

23년(479) 여름4월 百濟의 文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兵器를 주고 아울러 筑紫國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東城王이 되었다.

*이 해 百濟에서 바친 調賦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筑紫의 安致臣·馬飼臣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高麗를 쳤다.

8월 庚午 초하루 丙子 천황의 병이 더욱 심해져 관료들과 하직하고, 또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다. (천황이) 大殿에서 죽었다.··· 이 때 新羅를 정벌하러 갔던 장군 吉備臣尾代의 행렬이 吉備國에 이르러 집을 지나갔다. 뒤를 따르던 500蝦夷들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천황이 죽었으니 때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로 모여 이웃 郡을 침략하여 노략질하였다. 이에 尾代가 집으로부터 와서 蝦夷와 娑婆水門에서 만나 싸우며 활을 쏘니 蝦夷들이 뛰어오르거나 엎드려서 능히 화살을 피해 벗어나므로 끝내 쏘아 맞힐 수 없었다.···

 

권15 弘計天皇 顯宗天皇

 

3년(487) 봄 2월 丁巳 초하루 阿閉臣事代가 명을 받들고 任那에 사신으로 나아갔다. 이 때 月神이 사람에게 의탁하여 “나의 조상 高皇山靈은 이미 天地를 녹여 만든 공이 있었으니, 백성의 땅으로 月神인 나를 받들어야 한다. 만약 청에 따라 나에게 바친다면 복과 경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事代가 이로 말미암아 서울로 돌아와 갖추어 아뢰니 歌荒樔田으로써 받들었으며[歌荒樔田은 山背國 葛野郡에 있다], 壹伎縣主의 선조인 押見宿禰가 사당에 모셨다.

*이 해 紀生磐宿禰가 任那를 점거하고 高麗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三韓의 왕노릇하려고 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神聖이라고 칭하였다. 任那의 左魯·那奇他甲背 등이 계책을 써서 百濟의 適莫爾解를 爾林에서 죽이고[爾林은 高麗의 땅이다], 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百濟의 왕이 크게 화가 나, 領軍 古爾解·內頭 莫古解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帶山城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生磐宿禰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膽力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트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이 左魯·那奇他甲背 등 300여 인을 죽였다.


億計天皇 仁賢天皇

 

6년(493) 가을 9월 己酉 초하루 壬子 日鷹吉士를 보내 高麗에 사신으로 보내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다.

* 이번 가을 日鷹吉士가 사신으로 파견된 후에, 어떤 여인이 難波의 御津에 살았는데 곡을 하며 “어머니에게도 兄이요 나에게도 형이며, 어린 풀같은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 하였다[어머니에게도 형이요 나에게도 형이며라 한 것은 우리말로는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이다 .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고 한 것은 우리 말로는 阿我圖摩播耶라 한다. 어린 풀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옛날에 어린 풀로 부부를 비유하였으므로 어린 풀을 남편이라 여겼던 것이다]. 곡소리가 매우 슬퍼 사람들의 腸을 끊는 듯하였다. 菱城邑 사람 鹿父[녹부는 사람 이름이다. 사람들은 父를 柯曾이라고 부른다]가 듣고 앞으로 나아가 “어찌 슬피 우는 것이 이처럼 심한가”라 하니, 여인이 답하기를 “가을 나무의 슬픔이 더하여 두 배로구나(雙은 둘이다). 받아들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鹿父가 “그렇다”라 하며 말하는 내용을 알았다. 동반자가 있었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찌 알았습니까”라 물으니, (녹부가) 답하기를 “難波玉作部鯽魚女[鯽魚女라 한 것은 우리 말로 浮儺謎라 한다]가 韓白水郞전[韓白水郞전이라 한 것은 우리 말로 阿羅摩能波陀該이니, 전은 보리밭을 경작하는 것이다]에게 시집가서 哭女를 낳았고, 哭女[哭女라 한 것은 우리 말로 儺俱謎라 한다]는 住道人 山杵에게 시집가서 飽田女를 낳았다. 韓白水郞전과 그 딸 곡녀는 모두 일찍 죽었는데, 住道人 山杵가 앞서 玉作部鯽魚女와 간통하여 추(麤의 약자)寸을 낳았다. 麤寸은 飽田女를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 이 때 麤寸이 日鷹吉士를 따라 高麗를 향해 출발하였으므로 그 처인 飽田女가 배회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마음의 갈피를 잃고 상심하여 곡소리가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장을 끊을 듯하였다”라고 하였다.···

* 이 해 日鷹吉士가 高麗로부터 돌아와 工匠 須流枳·奴流枳 등을 바치니, 지금의 大倭國 山邊郡 額田邑 熟皮高麗가 그 후예이다.


 


 

 

 

 

 

 

 

 

 

 

 

 

 

 

日 本 書 紀 下

 

 

 

 

 

 

 

 

?日本書紀? 권 16 小泊瀨稚鷦鷯天皇 武烈天皇

 

(3년 11월) 이 달 백제의 意多郞이 죽어서 高田언덕에 장사지냈다.

 

(4년) 이 해 백제 末多王이 無道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마침내 제거하고 嶋王을 세우니 바로 武寧王이다[?百濟新撰?에 이르기를 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함께 제거했다. 武寧王이 즉위하였는데 諱는 斯麻王이고 琨支王子의 아들이니 末多王의 異母兄이다. 곤지가 왜로 갈 때에 筑紫嶋에 이르러 斯麻王을 낳았다. 섬으로부터 되돌려보냈는데 서울에 이르지 못하고 섬에서 낳았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지금 各羅의 바다 가운데 主嶋가 있는데 왕이 태어난 섬이어서 백제인들이 주도라 부른다. 지금 생각컨대 嶋王은 곧 蓋鹵王의 아들이고 末多王은 琨支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異母兄이라고 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


(6년) 겨울 10월 백제국이 麻那君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천황은 백제가 해가 지나도록 조공의 직무를 닦지 않았다고 하여 붙잡아 놓고 보내지 않았다.

 

(7년) 여름 4월 백제왕이 斯我君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전에 調를 바친 사신 麻那는 百濟國主의 骨族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斯我를 보내어 조정을 섬깁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아들이 있어 法師君이라 하였는데 곧 倭君의 선조이다.

 

권 17 男大迹天皇 繼體天皇

 

(2년) 12월 남해의 耽羅人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

 

3년 봄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百濟本記?에 久羅麻致支彌가 일본으로부터 왔다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任那의 日本 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으로 도망하여 호적에서 빠진지 3‧4代 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백제로 옮기고 호적에 넣었다.

 

6년 여름 4월 辛酉 초하루 丙寅 穗積臣押山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어 筑紫國의 말 40필을 주었다.

(6년)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任那國의 上多唎‧下多唎‧娑陀‧牟婁의 4현을 청했다. 多唎國守 穗積臣押山이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는) 아침 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어느 나라의)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주어서 나라를 합치더라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태로울 것인데, 하물며 다른 곳이 된다면 몇년이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 아뢰었다. 大伴大連金村이 이 말을 다 듣고 같은 계책을 아뢰었다. 이에 物部 大連麤鹿火를 조칙을 선포하는 사신으로 삼았다. 物部 大連이 難波館을 향하여 출발하여 百濟客에게 조칙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그의 妻가 진실로 간하기를 “무릇 主吉大神이 처음에 바다 밖의 金銀의 나라 고려‧백제‧신라‧임나 등을 胎中의 譽田天皇에게 주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大后 息長足姬尊과 大臣 武內宿禰가 나라마다 처음으로 官家를 두어 바다 밖의 蕃屛으로 삼았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고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만약 떼어서 다른 곳에 주면 본래의 구역을 어기게 되니 길이 이어질 비난이 어찌 입에서 떠나겠습니까”라 하였다. 大連이 응답하기를 “가르쳐 준 것이 이치에 맞으나 天勅을 거스를까 두렵다”라 하였다. 그 처가 간절하게 “병이라고 핑계대고 선포하지 마십시오”라 하자 大連이 이를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바꾸어 조칙을 선포하고 내리는 물건과 制旨를 붙여서 表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大兄皇子가 전에 다른 일이 있어서 나라를 내려주는데 관여하지 않았는데 뒤늦게 조칙을 선포한 것을 알고 놀라서 뉘우치며 고치고자 하였다. 令을 내려 “胎中의 천황 때부터 官家를 두었던 나라를 경솔하게 번국의 요청에 따라 갑자기 줄 수 있느냐”라 하였다. 이에 日鷹吉士를 보내어 百濟客에게 조칙을 바꾸어 선포했다. 使者가 답하여 아뢰기를 “아버지 천황이 편의를 도모하여 칙으로써 주는 것을 이미 마쳤습니다. 아들인 皇子가 어찌 천황의 조칙을 어기고 함부로 고쳐서 명령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이는 가짜일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진짜일지라도 큰 막대기를 가지고 때리는 것과 작은 막대기를 가지고 때리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프겠습니까”라 하고 드디어 파기했다. 이 때 혹 떠도는 말로 “大伴大連과 哆唎國守 穗積臣押山이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7년 여름 6월 백제가 姐彌文貴장군과 州利卽爾장군을 穗積臣押山[?백제본기?에는 委意斯移麻岐彌라 하였다]에 딸려 보내어 五經博士 段楊爾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伴跛國이 저희 나라 己汶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天恩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7년) 가을 8월 癸未 초하루 戊申 백제 태자 淳陀가 죽었다.

(7년) 겨울 11월 辛亥 초하루 乙卯 朝庭에서 백제의 姐彌文貴장군과 斯羅의 汶得至, 安羅의 辛已奚와 賁巴委佐, 伴跛의 旣殿奚와 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恩勅을 선포하여 己汶과 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이 달 伴跛國이 戢支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己汶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8년) 3월 伴跛가 子呑과 帶沙에 성을 쌓아 滿奚와 이어서 봉수와 軍倉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爾列比와 麻須比에 성을 쌓아 麻且奚와 推封에 걸치게 했다. 士卒과 兵器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9년 봄 2월 甲戌 초하루 丁丑 백제의 使臣 文貴장군 등이 물러가기를 청했다. 이에 명을 내려 物部 連[이름은 빠졌다]을 딸려 보내어 돌아가게 했다[?백제본기?에는 物部 至至連이라 하였다].

이 달 沙都嶋에 이르러 伴跛人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物部 連은 水兵 5백명을 이끌고 곧바로 帶沙江으로 나아갔으며 文貴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

여름 4월 物部 連이 帶沙江에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伴跛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했다. 옷을 벗기고 가지고 간 물건들을 빼앗고 막사를 모두 불태우자, 物部 連 등이 두려워 도망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汶慕羅에 머물렀다[汶慕羅는 섬 이름이다].

 

10년 여름 5월 백제가 前部의 木리不麻甲背를 보내어 物部 連 등을 己汶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끌어서 나라로 들어왔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옷과 斧鐵‧옷감을 내어 國物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놓고 은근하게 위로했으며 상과 祿이 매우 많았다.

가을 9월 백제가 州利卽次將軍을 보냈는데 物部 連을 따라 와서 己汶의 땅을 내려준 것을 사례하였다. 따로 五經博士 漢高安茂를 보내어 博士 段楊爾와 교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戊寅 백제가 灼莫古將軍과 일본의 斯那奴阿比多를 보내었는데 고려의 사신 安定 등이 따라와 來朝하여 우호를 맺었다.

 

17년 여름 5월 백제의 王 武寧이 죽었다.

 

18년 봄 正月 백제의 태자 明이 즉위했다.

 

21년 여름 6월 壬辰 초하루 甲午 近江毛野臣이 군사 6만을 이끌고 任那에 가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南加羅‧㖨己呑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 때 筑紫國造 磐井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꾸물거리다가 해를 넘겼다. 일을 이루기 어려울까 염려하며 늘 틈을 엿보았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磐井의 居所에 뇌물을 보내어 毛野臣의 군대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磐井이 火와 豊 두 나라에 세력을 뻗쳐 직무를 닦지 못하게 했다. 밖으로는 海路를 끊어 고려‧백제‧신라‧임나 등의 나라에서 해마다 조공을 바치는 배를 꾀어서 이르게 하고, 안으로는 임나에 파견되는 毛野臣의 군대를 막고 무례하게 말하기를, “지금 使者가 된 사람은 전에 나의 동료로서 어깨를 맞대고 팔꿈치를 부딪치며 같은 그릇에 함께 밥먹던 자이다. 어찌 별안간 사신이 되어 나로 하여금 자기 앞에 스스로 엎드리게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드디어 싸우고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교만하게 스스로 뽐내었다. 이 때문에 毛野臣은 길이 막혀서 중도에서 지체했다. 천황은 大伴大連 金村과 物部大連 麤鹿火‧許勢大臣 男人 등에게 “筑紫의 磐井이 반란을 일으켜 西戎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누가 장수가 될 만한가”라고 조칙을 내렸다. 大伴大連 등이 모두 “正直과 仁 勇은 兵事에 통하는 것입니다. 지금 麤鹿火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습니다”라 아뢰었다. 천황이 “좋다”라고 하였다.

 

23년 봄 3월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穗積押山臣에게 이르기를 “무릇 조공하는 使者는 늘 嶋曲[바다 가운데 섬의 굽은 해안을 말한다. 속칭 美佐祁라고 한다]을 피하느라 매번 風波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加羅의 多沙津을 臣들이 조공하는 나루길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押山臣이 듣고 아뢰었다.

이 달 物部 伊勢連父根과 吉士老 등을 보내어 (多沙)津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이에 加羅王이 勅使에게 이르기를 “이 津은 官家를 둔 이래로 臣의 조공하는 나루터였습니다. 어찌 갑자기 바꾸어서 이웃나라에 줄 수 있으며 처음에 봉해 주었던 것을 어길 수 있습니까”라 하였다. 勅使 父根 등이 이 때문에 바로 줄 수 없어서 大嶋로 되돌아 왔다가 따로 錄史를 보내어 결국 扶余에게 내려 주었다. 그러자 加羅가 신라와 한 편이 되어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王女를 아내로 맞아 드디어 자식을 두었다. 신라가 처음에 왕녀를 보낼 때에 100人을 함께 보내어 왕녀의 從者로 삼았다. 받아서 여러 縣에 나누어 두고 신라 衣冠을 착용하게 했다. 阿利斯等이 복장을 바꾼 것에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어 되돌아 가게 했다. 신라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생각을 바꾸어 왕녀를 되돌아 오도록 하려고 “전에는 너희들의 요청을 받아 우리가 문득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와 같으니 왕녀를 돌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加羅의 己富利知伽[자세하지 않다]가 “夫婦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식이 있으니 버리고 어찌 가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신라는) 마침내 길목의 刀伽‧古跛‧布那牟羅의 3城을 쳐부수고 또 북쪽 경계의 5城을 쳐부수었다.

이 달 近江毛野臣을 安羅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령을 내려 신라에게 南加羅와 㖨己呑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하였다. 백제는 장군 君尹貴와 麻那甲背‧麻鹵 등을 보내어 安羅에 가서 조칙을 받게 했다. 신라는 번국의 官家를 없앤 것이 두려워서 大人을 보내지 않고 夫智奈麻禮와 奚奈麻禮 등을 보내어 安羅에 가서 조칙을 듣게 했다. 이에 安羅는 새로이 높은 堂을 세워서 勅使를 오르게 하고 國主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국내의 大人으로서 堂에 올랐던 사람은 한둘 정도였다. 백제의 사신 장군 君 등은 堂 아래에 있었는데 몇달간 여러번 당 위에 오르고자 하였다. 장군 君 등은 뜰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여름 4월 壬午 초하루 戊子 任那王 己能末多干岐가 와서 조회하였다[己能末多란 대개 阿利斯等이다]. 大伴大連金村에게 아뢰기를 “바다 밖의 여러 번국들은 胎中天皇이 內官家를 두었을 때부터 본토를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봉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臣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大伴大連이 요청한대로 아뢰었다.

이 달 사신을 보내어 己能末多干岐를 보냈다. 아울러 임나에 있는 近江毛野臣에게 명령하여 “아뢴 바를 알아 보고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毛野臣은 熊川에 머물면서[어떤 책에는 任那의 久斯牟羅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러 모았다. 신라왕 佐利遲는 久遲布禮를 보내었고[어떤 책에는 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라 하였다] 백제는 恩率 彌騰利를 보내어 毛野臣이 있는 곳에 가서 모이게 하고 두 왕은 참석하러 오지 않았다. 毛野臣이 매우 화를 내며 두 나라 사신을 꾸짖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이다[어떤 책에는 큰 나무의 끝은 큰 나무로 잇고 작은 나무의 끝은 작은 나무로 잇는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두 나라의 왕이 몸소 와서 천황의 명령을 받지 않고 가벼이 사신을 보내는가. 이제 비록 너희 왕이 스스로 와서 명령을 받겠다 하더라도 나는 조칙을 선포하지 않고 반드시 쫓아가서 물리칠 것이다”라 하였다. 久遲布禮와 恩率 彌縢利가 마음 속으로 두려워 각각 돌아가서 왕을 부른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그 上臣 利叱夫禮智干岐로 바꾸어 보냈는데[신라에서는 大臣을 上臣이라 하는데 어떤 책에는 伊叱夫禮智奈末이라 하였다]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조칙을 듣기를 청했다. 毛野臣이 멀리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무리가 수천 명인 것을 보고, 熊川으로부터 任那의 己叱己利城으로 들어갔다. 伊叱夫禮智干岐는 多多羅原에 머물며 공경하여 돌아가지 않고 세 달을 기다리며 조칙을 들으려고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다. 伊叱夫禮智가 거느린 士卒들이 마을에서 걸식하고 있었는데 毛野臣의 從者 河內馬飼首御狩와 마주쳤다. 御狩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숨어서 걸식하는 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주먹으로 쳤다. 걸식자가 보고 “삼가 세 달을 기다리며 勅旨를 듣고자 했으나 아직도 선포하려고 하지 않고 칙을 들으려는 사신을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上臣을 죽이고자 함임을 알겠다”라 하였다. 이에 所見을 모두 上臣에게 아뢰었더니 上臣은 4개의 村[金官‧背伐‧安多‧委陀가 4개 촌이다. 어떤 책에는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를 4개 촌이라 하였다]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多多羅 등의 4개 촌을 노략질하게 한 것은 毛野臣의 잘못이다”라 하였다.

 

(24년) 가을 9월 임나의 사신이 “毛野臣이 드디어 久斯牟羅에서 집을 짓고 2년[어떤 책에 3년이라고 한 것은 가고 온 해를 센 것이다]을 머물며 다스리기를 게을리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인과 임나인이 자식 때문에 자주 다투었으나 해결하기 어려웠고 처음부터 판결할 수도 없었습니다. 毛野臣은 즐겨 誓湯을 설치해 놓고 ‘진실된 사람은 문드러지지 않을 것이고 거짓된 사람은 반드시 문드러질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탕에 던져져 데어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吉備의 韓子 那多利‧斯布利[大日本人이 蕃女를 취하여 낳은 자식을 韓子라 한다]를 죽이고 人民을 괴롭혔으며 끝내 화해시키지 못하였습니다”라 아뢰었다. 이에 천황이 그 행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불러 들였으나 오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河內母樹馬飼首御狩로 하여금 서울에 나아가 “臣은 王命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울로 되돌아 간다면 힘써 갔다가 헛되이 돌아가는 것이 되니 부끄러워 편안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國命을 이루고 조정에 들어가 謝罪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요”라 아뢰게 하였다. 使者를 보낸 후 다시 스스로 꾀하기를 “그 調吉士는 또한 皇華의 使者이니 만약 나보다 먼저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면 나의 罪過는 반드시 무겁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調吉士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伊斯枳牟羅城을 지키게 했다. 이에 阿利斯等은 (毛野臣이) 사소한 일만 일삼고 맡은 바 임무에 힘쓰지 않는 것을 알고 歸朝할 것을 자주 권했으나 오히려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阿利斯等은 毛野臣의) 행적을 다 알아서 배반하려는 마음이 생겼으므로 久禮斯己母를 보내어 신라에 가서 請兵하고 奴須久利를 백제에 보내어 청병했다. 毛野臣이 百濟兵이 온다는 것을 듣고 背評[背評은 지명인데 또한 能備己富里라고도 한다]에서 맞아 토벌했는데 부상하거나 죽은 자가 반이었다. 백제는 奴須久利를 붙잡아 형틀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놓고 신라와 함께 성을 에워쌌다. 阿利斯等을 책망하며 꾸짖기를 “毛野臣을 내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毛野臣은 城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으므로 사로잡을 수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편리한 곳을 찾아 한 달을 머물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는데 久禮牟羅城이라 한다. 돌아올 때 길목의 騰利枳牟羅‧布那牟羅‧牟雌枳牟羅‧阿夫羅‧久知波多枳의 다섯 성을 쳐부수었다.

겨울 10월 調吉士가 임나로부터 와서 “毛野臣은 사람됨이 거만하고 거칠며 다스리는 것을 익히지 않아 끝내 화해시키지 않고 加羅를 소란하게 했습니다. 거침이 없고 마음대로 하여 환난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라 아뢰었다. 그리하여 目頰子를 보내어 불러 들였다[目頰子는 자세하지 않다].

이 해 毛野臣은 소환당하여 對馬에 이르렀는데 병에 걸려 죽었다. 장례를 치를 때 강을 따라 近江으로 들어 왔다. 그 처가 “枚方을 통하여 피리를 불며 오른다. 近江의 毛野의 젊은 남자가 피리를 불며 오른다”라고 노래하였다. 目頰子가 처음에 임나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노래를 바쳤는데 “韓國을 어떻게 말했길래 目頰子가 왔나, 옛날에 온 壹岐를 건너서 목협자가 왔나”라 하였다.

 

(25년) 겨울 12월 丙申 초하루 庚子 (천황을) 藍野陵에 葬事지냈다[어떤 책에는 천황이 28년 甲寅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25년 辛亥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거기에 “辛亥年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安羅에 이르러 乞乇城을 쌓았다. 이 달에 高麗는 그 왕 安을 죽였다. 또한 일본의 천황과 太子‧皇子가 함께 죽었다고 들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한다면 辛亥年은 25년에 해당한다. 뒤에 校勘하는 자는 알라].

 

권 18 廣國押武金日天皇 安閑天皇

 

元年 5월 백제가 下部의 修德 嫡德孫과 上部의 都德 己州己婁 등을 보내어 常例의 調를 바치고 따로 表를 올렸다.

 

권 18 武小廣國押盾天皇 宣化天皇

 

2년 겨울 10월 壬辰 초하루 天皇은 신라가 任那를 침략하였으므로 大伴金村大連에게 명령하여 그 아들 磐과 狹手彦을 보내어 임나를 돕게 했다. 이 때 磐은 筑紫에 머물며 國政을 잡고 三韓에 대비하고 있었다. 狹手彦은 가서 임나를 평정하고 또 제를 구원했다.

 

 

권 19 欽明天皇

 

(卽位前紀) 天國排開廣庭天皇(欽明天皇)은 男大迹天皇(繼體天皇)의 嫡子이다. 어머니는 手白香皇后라고 하는데, 천황이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두었다. 천황이 어릴 때 꿈에 어떤 사람이, “천황이 秦大津父라는 자를 총애하면, 커서 반드시 천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사람을 보내어 널리 찾으니, 山背國 紀郡의 深草里에서 찾아냈다. 姓과 이름이 과연 꿈꾼 바와 같았다. 이에 매우 기뻐하며, 아직까지 없던 꿈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그대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고 물으니, (秦大津父는) “없었습니다. 다만 臣이 伊勢에 가서 장사하고 돌아오는데, 산에서 두마리의 이리가 서로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에 맞딱뜨렸습니다. 곧 말에서 내려 입과 손을 씻고 기도하며, ‘너는 귀한 신인데 거친 행동을 즐기고 있다. 만일 사냥꾼을 만나면 잡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여, 억지로 싸움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피묻은 털을 씻어주고 놓아 보내 다같이 생명을 보전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반드시 이것이 그 보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까이에 두어 섬기게하고 총애함을 날로 새롭게하니, 크게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천황이 즉위하자 大藏省에 임명되었다.

 

(원년) 2월 百濟人 己知部가 투화하였다. 倭國 添上郡 山村에 살게 하니, 오늘날 山村의 己知部의 선조이다.

 

(원년) 8월 高句麗・百濟・新羅・任那가 함께 사신을 보내고, 아울러 공물을 바쳤다. 秦人, 漢人 등 여러나라에서 투화하여 온 사람을 불러모아, 國郡에 안치하고 호적을 편성하였다. 秦人의 戶數가 총 7,053戶였다. 大藏掾을 秦伴造로 삼았다.

 

(원년) 9월 乙亥 초하루 己卯 難波祝津宮에 행차하였다. 大伴大連金村, 許勢臣稻持, 物部大連尾輿 등이 따라갔다. 천황이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新羅를 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物部大連尾輿 등이, “적은 군사로는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지난번 男大迹天皇(繼體天皇) 6년에 百濟가 사신을 보내 表를 올려 任那의 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의 네 縣을 청하였는데, 大伴大連金村이 表에서 청한 대로 구하는 곳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의 원망이 여러 해 동안 쌓여 갔으니 가볍게 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때 大伴大連金村은 住吉의 집에 있으면서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 나아오지 않았다. 천황은 靑海夫人 勾子를 보내 은근하게 위문하였다. 大連은 두려워하여 사죄하면서, “臣이 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여러 臣 등이 臣이 任那를 멸망시켰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두려워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장식한 말을 사신에게 주어 후하게 접대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靑海夫人이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명령을 내려, “오랫동안 충성을 다하였으니, 여러 사람의 말을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드디어 허물삼지 않고 총애함이 더욱 깊었다.

 

(2년) 여름 4월 安羅의 次旱岐 夷呑奚・大不孫・久取柔利 등과 加羅의 上首位 古殿奚, 卒麻의 旱岐, 散半奚의 旱岐의 아들, 多羅의 下旱岐 夷他, 斯二岐의 旱岐의 아들, 子他의 旱岐 등이 任那의 日本府의 吉備臣[이름이 빠졌다]과 더불어 百濟에 가서 함께 詔勅을 들었다. 百濟의 聖明王이 任那의 旱岐들에게, “日本의 천황이 명령한 바는 오로지 任那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任那를 다시 일으키겠는가. 어찌 각기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마음을 받들어 펼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任那의 旱岐 등이, “전에 두세번 新羅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도모하려는 뜻을 다시 新羅에 이른다 하여도 여전히 대답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任那를 재건하는 일은 대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공경하게 (왕의) 敎旨를 받드려 하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任那의 경계는 新羅와 접해 있어서 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卓淳) 등이라 함은 㖨己呑, 加羅를 말한다. 卓淳 등의 나라와 같은 패망의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聖明王은, “옛적에 우리 선조 速古王, 貴首王의 때에, 安羅・加羅・卓淳의 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통교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어, 子弟의 나라로 여기고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新羅에게 속임을 당하여 천황을 노엽게 하고 任那를 한에 사무치게 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下部 中佐平 麻鹵, 城方 甲背昧奴 등을 보내어 加羅에 나아가 任那의 日本府에 모여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음을 두고 任那를 재건하려고 하는 일을 아침 저녁으로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천황이 명령을 내려, ‘속히 任那를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과 함께 계책을 모의하여 任那 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잘 생각하여야 한다. 또 任那의 경계에서 新羅를 불러, (조칙을) 받들 것인가의 여부를 물어야겠다.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 아뢰고 삼가 교시를 받들자. 만일 사자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新羅가 틈을 엿보아 任那를 침략해 오면 나는 마땅히 가서 구원할 것이니 근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잘 방비하고 삼가 경계하기를 잊지 말라. 또한 그대들은 말하기를, 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新羅가 혼자 강하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㖨己呑은 加羅와 新羅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任那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卓淳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新羅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살펴보니 三國의 패망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옛적에 新羅가 高麗에 구원을 청하여 任那와 百濟를 쳤으나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 新羅가 어찌 혼자서 任那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任那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2년) 가을 7월 百濟는 安羅의 日本府가 新羅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前部 奈率 鼻利莫古, 奈率 宣文, 中部 奈率 木리眯淳, 紀臣 奈率 彌麻沙 등을 보내[紀臣 奈率이라는 사람은 아마도 紀臣이 韓의 여자를 얻어 낳은 자로, 百濟에 머물러 奈率이 된 사람일 것이다. 아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모두 이와 비슷하다], 安羅에 가서 新羅에 온 任那의 執事를 불러 任那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安羅 日本府의 河內直이 新羅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百濟本記?에는 ‘加不至費直・阿賢移那斯・佐魯麻都 等’이라고 하였으나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왕은 任那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速古王, 貴首王이 옛날의 旱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우리는 그대를 子弟로 여기고, 그대는 우리를 父兄으로 생각하며, 함께 천황을 섬기고 함께 강적에게 항거하며,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왕실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선조가 엣날에 旱岐와 화친할 때의 말을 생각하면 해와 같이 밝음이 있다. 그 후 이웃과 삼가 우호를 닦아서 드디어 다른나라와 (관계가) 돈독하게 되었으니, 은혜가 골육보다 더하였다. 처음을 잘하고 끝도 좋아야 한다는 것은 과인이 항상 원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가벼이 헛된 말들을 하고 몇 해 사이에 한탄스럽게 뜻을 잃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옛날 사람들이 ‘후회막급이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이로구나. 위로 하늘에 다다르고 아래로 지하에 이르기까지 이제 神에게 맹세컨대, 옛날의 허물을 고치겠으며, 하나도 숨김 없이 행할 바를 밝히겠다. 정성이 신령에 통하고 깊이 자기를 책하는 것은 역시 취할 만한 바가 있다. 듣건대 先代의 뒤를 계승한 자는 조상이 남긴 궤범을 이어받고, 선조의 업을 번성하게 하여 공훈을 이루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지금 先世의 화친한 우호를 받들고 삼가 천황이 명령한 말에 따라, 新羅에게 빼앗긴 나라인 南加羅와 㖨己呑 등을 취하여 본래대로 돌이켜 任那에 옮기고, 길이 父兄의 나라가 되어 항상 日本을 섬길 것이다. 이는 과인이 먹어도 맛이 없고 자도 자리가 편안치 못한 바이다. 지난 일을 뉘우쳐 오늘날을 경계하는 것이 힘써 생각할 바이다. 新羅가 감언으로 속이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그대들은 망령되이 믿었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빠졌었다. 바야흐로 지금 任那의 경계는 新羅와 접하고 있으니, 항상 방비를 하여야 한다. 어찌 경계를 게을리할 것인가. 속이는 함정에 빠져 국가를 망하게 하며,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까 두려우니, 과인이 이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어 편안히 지낼 수 없다. 저으기 들으니 任那와 新羅가 계책을 꾸미는 자리에 벌과 뱀이 괴이함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그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대개 괴이한 조짐은 행동을 경계하는 것이며, 재난과 이변은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다. 곧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이고 조상이 징조를 보이는 것이니, 화가 이르른 다음에 후회하고, 멸망한 후에 부흥하기를 생각하여도 누가 미칠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가 나를 따라 천황의 명령을 들으면 任那를 일으킬 수 있으니,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본래의 땅을 길이 보존하고 원래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고 싶다면, 그 계략이 여기에 있으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聖明王이 다시 任那의 日本府에, “天皇이 명령하여,‘任那가 멸망하면 너희는 의지할 데가 없어질 것이고, 任那가 일어나면 너희는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마땅히 任那를 일으켜 세워 옛날과 같게 하여, 너희의 도움으로 삼고,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삼가 조칙을 받들고 나니 송구스러운 마음이 가슴에 가득차서,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任那를 융성시킬 것을 기약하였다. 영원히 천황을 섬기기를 지난날과 같이 할 것이며, 먼저 앞의 일을 생각한 후에 편안히 쉴 것이다. 이제 日本府가 (천황의) 조칙에 따라 任那를 구하면, 이는 천황이 반드시 칭송하는 바가 될 것이며, 그대 자신도 당연히 포상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日本府의 卿 등은 오랫동안 任那國에 머물러 있고, 新羅의 경계와 가까이 접하고 있어서, 新羅의 정세를 역시 알 것이다. (新羅가) 任那를 해치고 日本을 막으려고 모의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단지 올해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가까이는 百濟를 경계하고, 멀리는 천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新羅는) 거짓으로 조정(日本)을 섬기고 거짓으로 任那와 화해했다. 이와 같이 (新羅가) 任那의 日本府를 기쁘게한 것은 아직 任那를 빼앗지 못했으므로 거짓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제 그 틈을 염탐하고 그 방비하지 못함을 엿보아, 한 번 군사를 일으켜 (任那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천황이 조칙을 내려 南加羅, 㖨己呑을 세우라고 권한 것은 단지 수십년 동안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新羅가 한결같이 명을 듣지 않는 것은 卿들도 아는 바이다. 천황의 조칙을 삼가 믿고 任那를 세우려고 하는 데 어찌 이와 같은가. 卿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任那國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卿들은 그것을 경계하고 남에게 속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2년) 가을 7월 百濟가 紀臣 奈率 彌麻沙, 中部 奈率 己連을 보내어 下韓과 任那의 정사를 아뢰고, 아울러 表를 올렸다.

 

4년 여름 4월 百濟의 紀臣 奈率 彌麻沙 등이 물러갔다.

 

(4년) 가을 9월 百濟 聖明王이 前部 奈率 眞牟貴文, 護德 己州己婁와 物部 施德 麻奇牟 등을 보내어, 扶南의 재물과 奴 2口를 바쳤다.

 

(4년) 겨울 11월 丁亥 초하루 甲午 津守連을 보내어 百濟에 명령하기를, “任那의 下韓에 있는 百濟의 郡令과 城主는 日本府에 귀속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詔書를 가지고 가서 선포하여, “그대가 여러번 表를 올려 꼭 任那를 세우겠다고 말한 것이 10여년이 되었다. 表에서 아뢴 바는 이와 같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대저 任那는 그대 나라의 棟梁이다. 만일 동량이 부러지면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짐의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모름지기 빨리 세우도록 하라. 그대가 만약 빨리 任那를 세운다면, 河內直[河內直은 이미 윗글에 보인다] 등은 자연히 물러나게 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 날 聖明王이 조칙을 듣기를 마치고 三佐平과 內頭 및 여러 신하에게, “조칙이 이와 같으니, 또한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하고 두루 물었다. 三佐平이, “下韓에 있는 우리 郡令과 城主 등은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빨리 조칙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4년) 12월 百濟의 聖明王이 다시 앞서의 詔書를 群臣들에게 널리 보이며, “천황의 조칙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上佐平 沙宅己婁, 中佐平 木리麻那, 下佐平 木尹貴, 德率 鼻利莫古, 德率 東城道天, 德率 木리眯淳, 德率 國雖多, 奈率 燕比善那 등이 함께 의논하여, “臣들은 품성이 아둔하고 도무지 지략이 없습니다. 그러나 任那를 세우라고 명령하셨으니, 빨리 칙언을 받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任那의 執事와 각국의 旱岐들을 소집하여 함께 계책을 모의하고 表를 올려 뜻을 말하십시오. 또 河內直・移那斯・麻都 등이 여전히 安羅에 있게 되면 아마도 任那는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表를 올려 本處로 옮겨달라고 구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聖明王이, “群臣이 의논한 바가 심히 과인의 마음에 맞는다”하고 말하였다.

 

(4년 12월) 이 달 (百濟가) 施德 高分을 보내어 任那의 執事와 日本府의 執事를 불렀다. 모두, “정월 초하루를 지내고 가서 듣겠다”라고 대답하였다.

 

5년 봄 정월 百濟國이 사신을 보내어 任那의 執事와 日本府의 執事를 불렀다. 모두, “신에게 제사지낼 때가 이르렀으니 제사를 마치면 가겠다”라고 대답하였다.

 

(5년 정월) 이 달 百濟가 또 사신을 보내어 任那의 執事와 日本府의 執事를 불렀다. 日本府와 任那가 모두 執事를 보내지 않고 지위가 낮은 사람을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가 任那國을 세울 것을 함께 모의하지 못하였다.

 

(5년) 2월 百濟가 施德 馬武, 施德 高分屋, 施德 斯那奴次酒 등을 任那에 사신으로 보내어 日本府와 任那의 旱岐 등에게, “나는 紀臣 奈率 彌麻沙, 奈率 己連, 物部連 奈率 用奇多를 보내어 천황에게 조회하고 알현하였는데, 彌麻沙 등이 日本에서 돌아와 조서를 선포하여, ‘그대들은 거기에 있는 日本府와 함께 빨리 좋은 계획을 세워 짐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라. 너희들은 경계하여 다른 사람의 속임에 빠지지 말라’라고 하였다. 또 津守連이 日本에서 와서[?百濟本記?에서는 津守連己麻奴跪라 하였다. 그러나 방언이므로 정확하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조칙을 전하고 任那의 정사를 물었다. 그러므로 日本府와 任那의 執事와 함께 任那의 정사를 의논하여 천황에게 아뢰려고, 사자를 보내어 부른 것이 세 번이나 되는데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의 정사를 도모할 계획을 함께 의논하여 천황에게 아뢰지 못하고 있다. 이제 津守連을 머무르도록 청하고, 따로 빠른 사자로써 상황을 갖추어 천황에게 아뢰고자 한다. 3월 10일에 日本에 사자를 보내겠다. 이 사자가 도달하면 천황은 반드시 그대들을 문책할 것이다. 그대 日本府의 卿과 任那의 旱岐들은 각기 사자를 보내어 내가 보내는 사자와 함께 천황이 베푸는 조서를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따로 河內直[?百濟本記?에는 河內直과 移那斯와 麻都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방언이므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에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대의 악행만을 들어왔다. 그대의 선조들도[?百濟本記?에는, ‘그대의 선조 那干陀甲背, 加獵直岐甲背’라고 하였다. 또한 ‘那奇陀甲背, 鷹奇岐彌’라고도 하였는데, 방언이므로 잘 알 수 없다] 모두 간악함을 품고 거짓되이 말하였다. 爲哥可君[?百濟本記?에 爲哥岐彌이고 이름은 有非岐라고 하였다]이 그 말만을 믿어 국난을 걱정하지 않으며, 내 뜻을 어기고 포악한 일을 마음대로 자행하다가, 이로 말미암아 쫓겨났으니 오로지 그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대들은 任那에 와서 살면서 항상 나쁜 짓을 행하였다. 任那가 나날이 해를 입는 것은 오로지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는 비록 하찮다고 할지 모르나, 비유컨대 작은 불이 산야를 태우고 마을로 번지는 것과 같다. 그대들이 악행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任那는 패망할 것이고, 마침내는 바다 서쪽 여러나라의 관가로 하여금 길이 천황의 곁에서 섬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게 아뢰어 그대들을 옮겨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도록 청하겠다. 그대 또한 가서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또 日本府의 卿과 任那의 旱岐 등에게, “任那國을 세우는 일은 천황의 위엄을 빌리지 않고서는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천황에게 가서 군사를 청하여 任那國을 도우려 한다. 병사들의 양식은 내가 운반해야 하겠으나, 군사의 수를 아직 모르고 군량을 운반할 곳도 역시 혼자 결정하기 어렵다. 한 군데에 모여서 같이 可否를 의논하고, 그 좋은 것을 택하여 천황에게 아뢰기를 원하나, 여러 번 불러도 그대들이 오지 않아 의논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日本府가 답하여, “任那의 執事가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보내지 않았던 까닭으로 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황에게 아뢰기 위하여 보낸 사신이 돌아와서, ‘짐이 印奇臣[방언이므로 알 수 없다]을 新羅에 보내고, 津守連을 백제에 보내겠다. 그대는 칙을 들을 때를 기다리고, 혼자 수고로이 新羅・百濟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합니다. 조칙이 이와 같았는데 마침 印奇臣이 新羅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을 듣고, 좇아 보내어 천황이 말씀하신 바를 물었습니다. 조칙에는 ‘日本府의 臣과 任那의 執事는 新羅에 가서 천황의 칙언을 들으라’하였고, 百濟에 가서 명을 들으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후에 津守連이 이곳을 지날 때, ‘지금 내가 百濟에 파견되는 것은 下韓에 있는 百濟의 郡令・城主를 내보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직 이 말만을 들었고, 任那와 日本府가 百濟에 모여서 천황의 칙언을 들으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않았으니 任那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에 任那의 旱岐들이, “사신이 와서 부르므로 곧 가려고 하였으나 日本府의 卿이 떠나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못했습니다. 대왕은 任那를 세우려고 자세한 것까지도 지시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기뻐함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5년(544) 3월 백제에서 奈率 阿乇得文‧許勢의 奈率 奇麻‧物部의 奈率 奇非 등을 보내어 表를 올려 말하였다. “奈率 彌麻沙‧奈率 己連 등이 臣의 나라에 이르러 詔書를 받들어 ‘너희들은 저 日本府와 함께 좋은 계책을 꾀하여 빨리 任那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니, 너희는 경계하여 저들(신라)에게 속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津守連 등이 신의 나라에 이르러 勅書를 받들어 任那를 세우는 일을 물었습니다. 삼가 勅에 따라 감히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함께 도모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百濟本記?에는 召烏胡跛臣을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的臣인 듯하다.] 日本府와 任那를 불렀으나 모두 대답하기를 ‘새해가 이미 왔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므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부르니 모두 대답하기를 ‘이미 제사지낼 때가 되었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나,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불렀는데, 미천한 자를 보낸 까닭으로 함께 도모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任那가 부름에 나아오지 않은 것은 본심이 아니라, 阿賢移那斯‧佐魯麻都[두 사람의 이름이다. 이미 윗 문장에 보인다.]가 간교하게 속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릇 任那는 安羅를 兄으로 삼아 오직 그 뜻을 좇고, 安羅人들은 日本府를 하늘로 삼아 오직 그 뜻을 따르므로[?百濟本記?에는 安羅를 아버지로 삼고 日本府로써 근본을 삼았다고 하였다.], 이제 的臣·吉備臣·河內直 등은 모두 移那斯·麻都의 지휘를 좇았을 따름입니다. 移那斯·麻都는 비록 小家의 미천한 자이나 日本府의 정치를 오로지 제멋대로 하며 또 任那를 제압하여 (길을) 막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함께 꾀하여 天皇에게 답변을 아뢸 수 없었으므로, 己麻奴跪[아마도 津守連인 듯하다.]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특별히 나는 새와 같이 빠른 사신을 보내어 天皇에게 받들어 아뢰기를, ‘만일 두 사람[두 사람은 移那斯와 麻都이다.]이 安羅에 있어 간특하고 아첨하는 일을 많이 행하면 任那도 세우기 힘들 것이며, 바다 서쪽의 여러 나라도 반드시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두 사람을 옮겨 그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日本府와 任那에게 조칙을 내려 任那 건설을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신이 奈率 彌麻沙·奈率 己連 등을 己麻奴跪에게 딸려 보내어 표를 올립니다.’ 이에 조칙을 내려, ‘的臣 等[等이라 한 것은 吉備弟君臣·河內直 등을 말한다.]이 신라를 왕래한 것은 짐의 뜻이 아니다. 옛날 印支彌[자세하지 않아 모른다.]와 阿鹵旱岐가 있을 때 신라의 핍박을 받아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못하였는데, 백제는 길이 멀어 그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다. 的臣 등이 신라를 왕래함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고 짐은 일찍이 들었다. 만일 이미 任那를 세웠다면 移那斯·麻都는 자연히 물러났을 것이니 어찌 족히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이 조칙을 듣고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신라가 천조를 속이고 칙명을 따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신라는 봄에 啄淳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久禮山 수비병을 내쫒아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安羅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斯羅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移那斯·麻都가 남의 경계를 넘어 경작하다가 6월에 도망하였습니다. 印支彌의 뒤에 온 許勢臣의 때에는[?百濟本記?에는 “우리가 印支彌를 머무르게 한 뒤에 온 旣洒臣의 때”라고 하였으나 모두 자세하지 않아 모른다.] 신라가 다시 남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安羅는 신라의 핍박을 받아 농사짓지 못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신이 일찍이 듣건대 신라는 매년 봄과 가을에 군사와 무기를 많이 모아놓고 安羅와 荷山을 습격하고자 한다 하며, 또는 加羅를 습격하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서신을 얻고서 문득 군대를 보내어 任那를 굳게 지키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자주 날랜 군사를 보내어 필요할 때마다 가서 구하였습니다. 이로써 任那가 때에 따라 농사를 짓고 신라가 감히 침범하여 핍박하지 못하였습니다. ‘백제는 길이 멀어 능히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는데, 的臣 등이 신라를 왕래하면서부터 바야흐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뢰었으니, 이는 위로는 천조를 속이는 것으로서 매우 간특한 일입니다. 사실의 명확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천조를 속이니 그 밖에도 거짓됨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的臣 등이 여전히 安羅에 거주하고 있다면 임나의 나라를 건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마땅히 일찍 물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매우 두려워 하는 것은 佐魯麻都가 비록 韓의 출신으로서 지위가 大連에 이르러 일본 執事의 사이에 섞여 명예롭고 권세있는 자리에 들어섰지만, 이제는 오히려 신라 奈麻禮의 冠을 썼다는 것입니다. 곧 몸과 마음으로 귀부하여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기 쉽습니다. 행한 바를 자세히 보면 도무지 두려워 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악행을 아뢰고 모두 글을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아직도 다른 나라의 관복을 입고 날마다 신라의 땅에 나아가 公·私의 일로 來往하면서 도대체가 꺼려하지 않습니다. 무릇 啄國의 멸망은 다른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啄國의 函跛旱岐가 加羅國에 두 마음을 품어 신라에 내응하고 加羅는 밖에서 싸움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망한 것입니다. 만일 函跛旱岐로 하여금 내응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啄國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반드시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啄淳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만일 啄淳國의 왕이 신라에 내응하여 적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 나라가 패망하게 된 화근을 살펴 보면 모두 안에서 응하여 두 마음을 품은 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麻都 등이 신라에 마음을 두어 드디어는 그 나라의 옷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내왕하면서 속으로 간악한 마음을 굳혀왔습니다. 이에 任那가 이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까 두렵습니다. 任那가 만일 멸망한다면 신의 나라가 고립되어 위태할 것이니, 朝謁하고자 생각하나 어찌 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황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멀리 헤아리시어, 속히 본래 있었던 곳으로 옮기셔서 任那를 안정시키십시오.”

겨울 10월 백제의 사신 奈率 得文‧奈率 奇麻 등이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였다.[?百濟本記?에는 “겨울 10월 奈率 得文‧奈率 奇麻 등이 日本으로부터 돌아와 ‘河內直‧移那斯‧麻都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이에 대한 칙은 없었다’고 말하였다”라 하였다.]

11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日本府 臣과 任那 執事를 불러, “천황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奈率 得文‧許勢의 奈率 奇麻‧物部의 奈率 奇非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日本府 臣과 任那國 執事는 마땅히 와서 勅을 듣고 함께 任那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日本의 吉備臣, 安羅의 下旱岐 大不孫과 久取柔利, 加羅의 上首位 古殿奚‧卒麻君‧斯二岐君‧散半奚君의 아이, 多羅의 二首位 訖乾智, 子他旱岐, 久嗟旱岐가 이에 백제에 나아왔다. 이 때 백제왕 聖明이 대략 詔書를 보이며, “내가 奈率 彌麻佐‧奈率 己連‧奈率 用奇多 등을 보내어 일본에 조공하였는데, (천황이) 조칙을 내려 ‘조속히 任那를 건설하라’고 하였다. 또 津守連이 칙을 받들어 任那를 만드는 일을 물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대들을) 불렀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任那를 세울 수 있겠는가. 각각 자신의 계책을 말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吉備臣‧任那旱岐 등이 “무릇 任那國을 세우는 일은 오직 대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왕을 따르고자 하니 모두 갖추어 아뢰어 (천황의) 勅을 듣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聖明王이 이들에게 일러, “任那라는 나라는 우리 백제와 예로부터 子弟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이제 日本府 印岐彌[任那에 있던 日本 신하의 이름이다.]가 이미 신라를 토벌하고 다시 장차 우리(백제)를 치려고 하며, 또 신라의 허망한 거짓말을 즐겨 듣는다. 무릇 印支彌를 任那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탈하여 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자세하지 않아 모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라는 무도하며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거스려 卓淳을 멸망시켰다. 충직한 나라를 속히 회복코자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후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어 (日本府의 臣과 任那의 執事를) 오게 하여 함께 恩詔를 받들어, 任那의 나라를 일으켜 맥을 잇고 옛날처럼 길이 형제가 되기를 바랬다. 가만히 듣건대 新羅‧安羅 두 나라 사이에는 큰 강이 있어 적을 방비하기 좋은 곳이라 한다. 내가 이를 차지하여 6성을 수축하려고, 삼가 천황에게 3천 병사를 청하여 매 성마다 5백명씩 배치하고 아울러 우리 병사들이 (신라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걱정스러운 것은 久禮山의 5城이 거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는 점이다. 卓淳의 나라는 또한 다시 부흥시켜야 할 것이니, 청한 병사는 내가 옷과 식량을 지급할 것이다. 이를 천황에게 주청하고 하는 계책이 첫째이다. 오히려 南韓에 郡令과 城主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을 거스려 貢調의 길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바라는 바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강적(고구려)을 물리치려는 것이니, 무릇 그 흉칙한 무리들이 누구인들 부용하려고 꾀하지 않겠는가. 북쪽의 적(고구려)은 강대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니, 만일 南韓에 郡令‧城主를 설치하여 방호시설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 강적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신라를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핍박하여 임나를 위로하고 휼문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해 조빙할 수 없을까 두렵다. 이를 천황에게 주청하고자 하니 그 책략의 둘째이다. 또 吉備臣‧河內直‧移那斯‧麻都가 오히려 任那國에 있기 때문에, 천황이 비록 조칙을 내려 任那를 세우라 하였으나 이를 시행할 수 없었다. 이 4명을 옮겨 각각 그 本邑에 돌려보낼 것을 천황에게 아뢰어 청하는 것이 그 계책의 셋째이다. 마땅히 日本 臣‧任那 旱岐 등과 더불어 모두 받들어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사뢰고 恩詔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吉備臣과 旱岐 등이, “大王이 말한 세 가지 책략은 또한 우리의 뜻과 같을 뿐입니다. 이제 돌아가 日本 大臣[任那에 있는 日本府의 大臣을 일컫는다.], 安羅王‧加羅王에게 공경히 아뢰고 모두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주청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진실로 천년에 한번 올 정도의 기회로,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계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6년 봄 3월 膳臣 巴提便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여름 5월 백제가 奈率 其릉‧奈率 用奇多‧施德 次酒 등을 보내어 표를 올렸다.

가을 9월 백제가 中部 護德 菩堤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吳나라의 財貨를 日本府의 臣과 여러 旱岐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이 달에 백제가 丈六佛像을 만들어 願文을 지었는데, “대개 듣건대 丈六佛을 만들면 功德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이제 공경히 (이를) 만드니 이 공덕으로 천황께서 매우 훌륭한 德을 얻으시고 천황께서 다스리시는 彌移居國이 모두 福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늘 아래 모든 중생들이 모두 해탈하기를 원하여, 이를 만듭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1월 膳臣 巴提便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신이 사신으로 파견되자 처자도 뒤따라 백제의 바닷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濱은 바닷 가이다.] 해가 저물었으므로 머물러 숙박하였는데, 아이가 홀연히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큰 눈이 내려 새벽녘에서야 비로소 찾아나서니 호랑이 발자국이 연이어져 있었습니다. 신이 이에 칼을 차고 갑옷을 입고 찾아나서 바위 동굴에 이르렀는데, 칼을 빼어 ‘삼가 왕의 명을 받들어 뭍과 바닷길에 수고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느라 어려웠으며, 풀섶을 깔고 가시와 함께 잤던 것은 자식을 사랑하여 아비의 업을 잇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오직 네가 위맹한 신일지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한 가지일 것이다. 어젯 밤에 아이가 없어져서 뒤쫓아 찾아 나서 이에 이르렀다.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아니하므로 원수를 갚고자 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호랑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입을 벌려 물려고 하니, 巴提便이 갑자기 왼손을 빼어 그 호랑이의 혀를 잡고 오른손으로 찔러 죽이고 가죽을 벗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해 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에 高麗國 細群과 麤群이 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細群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細群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에 狛國의 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7년 봄 정월 甲辰 초하루 丙午 백제의 사신 中部 奈率 己連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에 좋은 말 70필과 배 10척을 내려 주었다.

여름 6월 壬申 초하루 癸未 백제가 中部 奈率 掠葉禮 등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이 해 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百濟本記?에는 “高麗가 정월 병오에 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狛王에게는 세 夫人이 있었는데 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中夫人이 世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麤群이었다. 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細群이었다. 狛王(고구려왕)의 질병이 심해지자 細群과 麤群이 각각 中夫人과 小夫人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細群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8년 여름 4월 백제가 前部 德率 眞慕宣文‧奈率 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下部의 東城子言을 보내어 德率 汶休麻那를 교대하게 하였다.

 

9년 봄 정월 癸巳 초하루 乙未 백제의 사신 前部 德率 眞慕宣文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 “청하는 구원병을 반드시 보내어 구원할 것이니, 마땅히 빨리 가서 왕에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여름 4월 壬戌 초하루 甲子 백제가 中部 杆率 掠葉禮 등을 보내어 “德率 宣文 등이 칙을 받고 臣의 나라에 이르러 ‘청하는 구원병을 때에 맞춰 보내겠다’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은혜로운 조칙을 받고 기쁘고 즐겁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馬津城의 전투에서[정월 신축에 高麗가 군대를 이끌고 馬津城을 포위하였다.] 사로잡은 포로가 ‘(고려가 馬津城을 공격한 것은) 安羅國과 日本府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밝히고자 하여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으므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공하신 천황(可畏天皇)께서[西蕃들은 일본 천황을 모두 황공하신 천황(可畏天皇)이라 일컫는다.] 먼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청했던 구원병을 잠시 멈추시고 臣의 보고를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법식에 따라 올린 글을 보고 근심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日本府와 安羅가 이웃의 어려움을 구하지 않은 것은 짐이 또한 매우 싫어하는 바이다. 또 그들이 몰래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짐이 명하였다면 스스로 보냈을 것이지만 명하지 아니 하였는데 어떻게 갔겠는가. 원하건대 왕은 흉금을 터놓고 안심하여 편안하게 마음을 가라 앉히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任那와 함께 지난번의 칙에 따라 힘을 다하여 모두 북쪽의 적을 막고 각각 봉토를 지키라. 짐이 마땅히 약간의 사람를 보낼 것이니 安羅가 도망한 빈 땅을 채우도록 하라”고 하였다.

6월 辛酉 초하루 壬戌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칙을 내려, “德率 宣文이 돌아 간 후에 잘 도착하였으며,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狛賊(고구려)의 침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마땅히 任那와 함께 힘써 도모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윤7월 庚申 초하루 辛未 백제의 사신 掠葉禮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겨울 10월 370명을 백제에 보내어 得爾辛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

 

10년 여름 6월 乙酉 초하루 辛卯 將德 久貴‧固德 馬次文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 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 “延那斯‧麻都가 몰래 사사로이 高麗에 사신을 보낸 것은 짐이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허실을 물을 것이며, 청한 군사는 청원에 따라 멈추겠다”라고 하였다.

 

11년 봄 2월 辛巳 초하루 庚寅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百濟本記?에는 “3월 12일 신유에 일본의 사신 阿比多가 배 세 척을 거느리고 都城 아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짐이, 施德 久貴‧固德 馬進文 등이 올린 表의 뜻에 따라 하나하나 교시하였으니,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자세하게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大市頭가 돌아 온 뒤로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지만, 이제 다만 보고한 말을 밝히고자 하여 사신을 보낸다. 또 다시 짐이 듣건대 奈率 馬武는 왕의 아끼는 신하로서 위의 말을 받아 아래에 전하는데 왕의 마음에 매우 흡족하도록 하며 왕을 잘 보좌한다고 한다. 만일 국가가 무사하여 오랫동안 官家가 되어 길이 천황을 받들려고 한다면 마땅히 馬武를 大使로 삼아 조공토록 하라”고 하였다. 다시 조칙을 내려 “짐이 듣건대 북쪽의 적이 강하고 사나우므로 화살 30具를 내리니 한 곳 정도는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 庚辰 초하루 백제에 있는 일본왕의 사람이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百濟本記?에는 “4월 1일 경진에 日本 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하였다.] 백제왕 聖明이 왕의 사람에게 “任那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고, 延那斯‧麻都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와 않을 것인지를 오로지 칙에 따르겠다”라 말하고, 高麗奴 6口를 바치고, 따로 왕의 사람에게 奴 1口를 주었다.[모두 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奴이다.]

乙未 백제가 中部 奈率 久斤‧下部 施德 灼干那 등을 보내어 狛(고구려)의 포로 10口를 바쳤다.

 

12년 봄 3월 보리 씨앗 1,000斛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이 해 백제 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新羅‧任那를 말한다) 高麗를 정벌하여 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平壤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권 19 欽明天皇)

 

13년(552) 5월 戊辰 초하루 乙亥 百濟‧加羅‧安羅가 中部 德率 木리今敦‧河內部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가 新羅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任那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지금 百濟王‧安羅王‧加羅王이 日本府의 신하들과 함께 사신을 보내 아뢴 것을 다 들었다. 역시 任那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하나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황공하신 천황의 靈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百濟 聖明王[다른 이름은 聖王이다]이 西部의 姬氏 達率 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釋迦佛金銅像 1軀와 幡蓋 약간, 經論 약간 권을 바쳤다. 따로 表를 올려 (佛法을) 유통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찬양하여, “이 법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周公과 孔子라도 오히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법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福德과 果報를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위 없는 菩提를 이루게 하니, 비유하자면 사람이 隨意寶를 품고 있으면 필요한 바에 따라 모두 뜻대로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오묘한 법의 보배도 그러하니 기원한 것이 뜻대로 되어 부족한 바 없습니다. 또 멀리 天竺으로부터 三韓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따르고 받들어 지녀 존경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왕 臣 (聖)明은 삼가 陪臣 怒唎斯致契를 보내 황제의 나라에 받들어 전하니, 畿內에 유통하시어 부처가 ‘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다’라고 授記한 것을 이루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날 천황은 표를 보고 뛸듯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조칙을 내려 “짐이 예로부터 이와 같이 미묘한 법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짐이 혼자 결정할 수 없다”라 이르고,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서쪽 번국이 바친 불상은 모습이 단아하고 엄숙하다. 일찍이 전혀 없었던 것이니, 예배해야 되겠는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蘇我大臣 稻目宿禰가 “서쪽 번국 여러 나라가 한결같이 모두 예배하는데, 豊秋 日本이 어찌 홀로 거스리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物部 大連尾輿‧中臣連鎌子가 “우리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항상 天地 社稷의 180神을 제사지내고 절하여 섬긴 때문인데, 바야흐로 이제 바꾸어 번국의 신을 섬긴다면 國神의 노여움을 부를까 두렵습니다”라고 함께 아뢰었다. 천황이 “원하는 사람인 稻目宿禰에 맡겨 시험삼아 예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대신이 무릎 꿇고 받아 기뻐하며 小墾田의 집에 안치하고 삼가 出世間의 業을 닦아 因으로 삼았으며, 向原의 집을 깨끗한 마음으로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그 후 나라에 돌림병이 돌아 백성들이 죽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많아졌으나 치료할 수 없었다. 物部 大連尾輿·中臣連鎌子가 함께 “지난날 臣의 계책을 따르지 않으시더니 이렇게 병들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오래지 않아 바로 돌이킨다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불상을) 빨리 던져 버려 삼가 후일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라 아뢰었다. 천황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有司가 이에 불상을 難波의 堀江에 던져 버리고, 또 가람에 불을 놓으니, 다 타버려 남은 것이 없었다. 이 때 하늘에는 바람과 구름이 없었는데 갑자기 大殿에서 불이 났다.

*이 해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尼彌方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14년(553) 봄 정월 甲子 초하루 乙亥 百濟가 上部의 德率 科野次酒·杆率 禮塞敦 등을 보내 군사를 청했다.

*戊寅 百濟의 사신인 中部의 杆率 木리今敦과 河內部의 阿斯比多 등이 (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6월 內臣[이름은 빠져 있다]을 百濟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말 2필, 同船 2隻, 활 50張, 화살 50具를 주었다. 조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고 하고, 다른 조칙을 내려 “醫博士·易博士·曆博士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야 한다. 지금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바로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 卜書·曆本과 여러가지 藥物도 보내라”고 하였다.

가을 7월 辛酉 초하루 甲子 樟勾宮에 행차하였다. 蘇我大臣 稻目宿禰가 명령을 받들어 王辰爾를 보내 船賦를 세어 기록하였다. 바로 王辰爾를 船長으로 삼고 성을 船史라 내려 주었으니, 오늘날 船連의 선조이다.

8월 辛卯 초하루 丁酉 百濟가 上部의 奈率 科野新羅, 下部의 固德 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 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內臣 德率 次酒·任那 大夫 등을 보내 바다 밖 여러 彌移居(みやけ: 官家)의 일을 아뢰었습니다. 엎드려 은혜로운 조칙을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들으니 新羅가 狛國(고구려)과 함께 모의하여 ‘百濟와 任那가 자주 日本에 나아가니, 생각컨대 군사를 빌려 우리나라를 치려는 듯하다. 이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은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日本의 군대가 떠나기 전에 安羅를 공격해 빼앗아 일본과의 통로를 끊자’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획이 이와 같으니, 신 등이 이를 듣고 두려운 마음을 깊이 품었습니다.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아룁니다. 천황께서 빨리 前軍과 後軍을 보내 서로 이어 와서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가을까지는 바다 밖 彌移居를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보낸 군대가 신의 나라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은 신이 마땅히 공급할 것이고, 任那에 도착하여도 다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만약 (任那가)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신이 도와 충당하여 부족하고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的臣이 삼가 천황의 조칙을 받들고 와서 신의 나라를 위로하고 일찍부터 늦게까지 쉬지 않고 모든 일에 힘썼습니다. 이 때문에 바다 밖의 蕃들은 그의 훌륭함을 칭송하여 ‘틀림없이 영원히 바다 밖을 깨끗이 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모하여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任那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황께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任那를 진정시키기 바랍니다. 또 바다 밖의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한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천황에게 받아 강한 적을 막았으니, 천황께서 활과 말을 많이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겨울 10월 庚寅 초하루 己酉 百濟의 왕자 餘昌[明王의 아들 威德王이다]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高麗國을 향했는데, 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餘昌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頸鎧를 입은 자 1騎, 징을 꼽은 자[鐃자는 자세하지 않다] 2騎,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騎 모두 합해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창이 “姓은 (高麗 왕실과) 同姓이고 관위는 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百濟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百濟는 高麗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高麗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百濟軍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高麗王을 東聖山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15년(554) (봄 정월 戊子 초하루) 丙申 百濟가 中部의 木리施德文次, 前部의 施德 曰佐分屋 등을 筑紫에 보내 內臣·佐伯連 등에게 묻기를 “德率 次酒·杆率 塞敦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신 등은[신 등은 內臣을 말한다]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말할 뿐 자세하지 않았습니다.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자세한 내용을) 약간이나마 들어 미리 軍營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또 따로 ‘이제 들으니 황공하옵신 천황의 조칙을 받들어 筑紫에 나와서 보내줄 군대를 살펴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기쁨은 이루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보다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줄 군대를 정월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에 內臣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2월 百濟가 下部의 杆率 將軍 三貴와 上部의 奈率 物部烏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德率 東城子莫古를 바쳐 전에 番을 섰던 奈率 東城子言을 교대하고, 五經博士 王柳貴로 固德 馬丁安을 대신하고, 僧 曇慧 등 9인으로 승 道深 등 7인을 교대하였다. 따로 명령을 받들어 易博士 施德 王道良, 曆博士 固德 王保孫, 醫博士 奈率 王有릉陀, 採藥師 施德 潘量豊·固德 丁有陀, 樂人 施德 三斤·季德 己麻次·季德 進奴·對德 進陀를 바쳤는데, 모두 청에 따라 교대하였다.

3월 丁亥 초하루 百濟의 사신인 中部의 木리施德文次 등이 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여름 5월 丙戌 초하루 戊子 內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百濟에 나아갔다.

겨울 12월 百濟가 下部의 杆率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百濟王 臣 明과 安羅에 있는 倭臣들, 任那 여러 나라의 旱岐들은 아룁니다. 斯羅가 無道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고구려)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官家)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有至臣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東方의 領인 物部 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有至臣이 데리고 온 백성 竹斯 物部 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新羅뿐이라면 有至臣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狛이 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毾㲪 1領, 도끼 300口, 사로잡은 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餘昌이 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耆老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餘昌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新羅國에 들어가 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明王은 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新羅는 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新羅에서 佐知村의 飼馬奴 苦都[ 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苦都는 천한 奴이고 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明王이 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는 “新羅가 明王의 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이 明王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이 (筑紫)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鞍橋는 우리 말로 矩羅이(くろじ)라 한다]. 이 때 新羅 장수들이 百濟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日本 天皇이 任那의 일 때문에 여러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百濟官家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日本書紀>> 권 19.(欽明天皇)

 

16년(555) 봄 2월. 백제 왕자 餘昌이 왕자 惠[왕자 惠는 威德王의 아우이다]를 보내어 “聖明王이 賊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15년에 신라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천황이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使者를 보내어 나루에서 맞이하여 위문하였다. 이에 許勢臣이 왕자 惠에게 “이곳에 머물고자 하는가. 또는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라고 묻자, 惠가 “천황의 덕에 기대고 의지하여 돌아가신 父王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만약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셔서 兵器를 많이 주신다면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제가 가고 머무르는 것은 오직 명을 좇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잠시 후에 蘇我臣이 찾아와 위문하며 “聖王은 하늘의 道와 땅의 이치에 통달하였고 名聲은 4방 8방에 퍼졌습니다. 길이 평안함을 지키고 바다 서쪽 蕃國을 통솔하여 千年萬年 천황을 받들어 모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 하루 아침에 멀리 승하하시어 물처럼 돌아올 수 없게 되어 묘실에 안치되리라고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고 슬픔이 얼마나 크십니까. 무릇 性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슬퍼하지 않겠습니까.혹시 어떤 허물이 이러한 화를 이르게 했는가. 지금 어떤 방도로 나라를 안정시키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惠가 대답하기를 “ 저는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어 큰 계책을 알지 못하니 어찌 하물며 화와 복이 말미암은 바와 나라가 존속하고 망하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蘇我卿이 “ 옛날 大泊瀨天皇 때 그대의 나라가 고구려로부터 침략을 받아 위험하기가 鷄卵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했습니다. 이에 천황이 神祗伯에게 명하여 공경히 神祗로부터 계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祝者가 이에 신의 말에 의탁하여 ‘나라를 세운 신을 請해 모셔와 장차 망하려는 임금을 가서 구하면 나라는 반드시 평온해지고 사람들은 잘 다스려져 편안해질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神을 청하여 가서 구원하였으므로 社稷이 평안해졌습니다. 무릇 나라를 세운 신이란 하늘과 땅이 나뉘어 구분되고 풀과 나무가 말을 할 때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만들어 세운 신입니다. 지난번에 그대 나라에서는 (祠堂을) 돌보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지금이라도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 神宮을 수리하여 神靈을 받들어 제사지내면 나라가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대는 나의 말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8월 백제 餘昌이 여러 신하들에게 “少子는 이제 돌아가신 父王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여 修道하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前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하십니까. 모름지기 道理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耆老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으시다면 나라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餘昌이 “좋다”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云云하였다.

 

17년(556) 봄 정월 백제 왕자 惠가 돌아가기를 청하자 兵器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히 상으로 물품을 내려 주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阿倍臣,佐白連,播磨直을 보내어 筑紫國의 水軍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별도로 筑紫火君[<<백제본기>>에는 筑紫君의 아들 火中君의 아우라 한다]을 보내어 용감한 군사 1,000명을 이끌고 彌..[彌..는 나루터 이름이다]에까지 호위하여 보내어 뱃길의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겨울 10월 蘇我大臣 稻目宿녜 등을 왜국 高市郡에 보내어 韓人 大身狹屯倉[韓人이라 한 것은 백제이다],高麗人 小身狹屯倉을 두고 紀國에 海部屯倉을 두었다.[어떤 책에는 “곳곳에 있던 韓人들로써 大身狹屯倉의 田部로 삼고 高麗人으로써 小身狹屯倉 田部를 삼았다”고 한다.이는 곧 韓人, 高麗人으로써 田部를 삼았던 까닭에 屯倉이라 이름한 것이다]

 

18년(557) 봄 3월 庚子 초하루 백제 왕자 餘昌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威德王이다.

 

21년(560) 가을 9월 신라가 彌至己知 奈末을 보내어 調賦를 바쳤는데 평상시보다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奈末이 기뻐하며 돌아가서 “調賦를 바치는 使者는 나라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바인데 나의 議論은 가볍고 비천한 것이고, 使者는 백성의 운명이 달려있는 사람인데 뽑아쓰는 것은 비천하고 낮은 사람입니다. 王政의 폐해는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바라건대 좋은 집 자제를 뽑아 使者로 삼으시고 비천한 사람을 使者로 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22년(561) 신라가 久禮叱 及伐干을 보내어 調賦를 바쳤다. 司賓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예우가 평상시보다 덜하였다. 及伐干이 분하고 한스럽게 여기며 돌아갔다.

이해 다시 奴지 大舍를 보내어 지난번의 調賦를 바쳤다. 難波의 大郡에서 여러 蕃國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掌客 額田部連과 葛城直 등이 백제의 아래쪽 열에 서게 하여 인도했다. 大舍가 화를 내고 돌아가 館舍에 들지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 穴門에 이르렀다. 이때 穴門館을 수리하고 있었다. 大舍가 묻기를 “어떤 손님을 위하여 짓는가”라고 하자 工匠 河內馬飼首押勝이 거짓으로 “西方의 무례한 짓을 문책하러 보낼 사자가 머물 숙소이다”라고 말하였다. 大舍가 나라에 돌아가 그가 말한 것을 고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阿羅의 波斯山에 성을 쌓고서 일본에 대비하였다.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任那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任那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등 모두 열나라이다].

여름 6월 조칙을 내려 “신라는 서쪽의 오랑캐로 작고 보잘것 없는 나라이다. 하늘을 거스리고 예의가 없어 우리의 두터운 은혜를 져버리고 나의 官家를 깨트렸으며 나의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나의 郡縣을 멸망시켰다. 우리 氣長足姬尊은 거룩하고 총명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시며 뭇 人民을 힘써 보살피시고 온 백성을 먹이고 길렀다. 신라가 窮해져가는 것을 애달피 여기시고 신라왕이 장차 목베일 것을 온전히 두었으며 신라에게 요충의 땅을 주었고 신라를 남달리 번영하게 해주시었다. 우리 氣長足姬尊께서 신라에 대하여 무엇을 가볍게 대우했으며 우리 백성이 신라에 무슨 원한이 있었는가. 그러나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임나를 凌辱해 멸망시켰고 강한 잇빨과 갈고리 같은 손톱으로 잔인하게 백성을 죽였다. 간을 꺼내고 발목을 끊어도 마음에 흡족해하지 않고 뼈를 드러내고 주검을 태워도 혹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任那의 귀족과 백성 이하 모두는 칼을 다 쓰고 도마를 다하도록 이미 살륙당하고 膾쳐졌으니 어찌 온 천하가 왕의 신하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사람 곡식을 먹고 다른 사람 물을 마시면서 누가 차마 이것을 듣을 수 있겠으며 누가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태자.대신이 형제 친척에게 피눈물을 흘리고 원한을 머금고 부탁하여, 蕃邦을 지키는 임무를 맡음에 머리를 부수는 것이 발꿈치에까지 이르도록 은혜롭게 하고 대대로 前朝의 덕을 받아 후대의 지위를 맡았으니 쓸개를 마시고 창자를 꺼내어 함께 간악한 역적을 죽여 천지의 큰 아픔을 씻고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도 신하와 아들의 도리를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다고 함에 있어서랴”라고 하였다.

가을 7월 己巳 초하루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調賦를 바쳤다. 그 사신이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켰다는 것을 알고 나라(일본)의 은혜를 저버린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감히 돌아가기를 청하지 못하고 마침내 머물러 本土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국가의 백성과 같은 例로 대우하였는데, 지금 河內國 更荒郡 盧+鳥 慈+鳥野邑 신라인의 先祖이다.

이 달에 大將軍 紀男麻呂宿녜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차(口+多)리(口+利)에서 출동하고, 副將軍 河邊臣瓊缶는 居曾山으로부터 출동하도록 하여 신라가 임나를 공격한 상황에 대하여 문책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임나에 도착하여 薦集部首登이를 백제에 보내어 군사계책을 약속케 했다. 登이는 처가에 묵었는데, 봉인한 서신과 활과 화살을 길에 떨어트렸다. 신라가 군사계획을 모두 알고 갑자기 군사를 크게 일으켰으나 얼마 후에 패하였으므로 항복하여 歸附하기를 빌었다. 紀男麻呂宿녜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군사를 돌려 백제의 군영에 돌아갔다. 軍中에 명을 내려 “무릇 이겨도 패하는 것을 잊지 말고 편안할 때도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지금 처해 있는 땅은 들개와 이리와 같이 사나운 무리들과 이웃해 있으니 가볍고 소홀히 하여 변란이 일어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으랴. 하물며 또 태평한 시대에도 칼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법이니, 무릇 군자가 무기를 갖추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깊이 경계하고 이 명령을 받드는데 힘쓰라”라고 하였다. 병졸들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河邊臣瓊缶는 홀로 나아가 이곳 저곳에서 싸워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신라가 문득 흰 깃발을 들고 무기를 던져버리고 항복했는데, 河邊臣瓊缶는 원래 軍事에 밝지 못하여 마주 대하여 흰기를 들고 헛되이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신라 장군이 “장군 河邊臣이 지금 항복하려고 한다”고 하고는 진군하여 역습하여 싸웠다. 매우 날쌔고 빠르게 공격하여 깨트렸는데, 맨 앞선 부대는 敗한 바가 매우 많았다. 倭國造手彦이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의 垓자에까지 뒤쫒아와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首彦은 날랜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성의 해자를 뛰어 건너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久須尼自利”[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라고 탄식하였다. 이에 河邊臣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와 들에 급히 군영을 만들었다. 이때 병졸들은 모두 서로 속이고 업신여기며 우르러 따르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스스로 군영에 나아가 河邊臣瓊缶 등과 그를 따라왔던 부인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장군이 河邊臣에게 “너의 목숨과 부인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아끼는가”라고 묻자 “어찌하여 한 여자를 아껴 화를 취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라 대답하고 첩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은 마침내 벌판에서 그 여자를 간음하였다. 여자가 후에 돌아가니, 河邊臣이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 “옛날에 당신이 저의 몸을 가볍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로 만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승락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坂本臣의 딸인데 이름을 甘美媛이라 한다.

함께 사로잡혔던 調吉士伊企탄은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잠뱅이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일본으로 향하게 하고 “일본 장군은 내 엉덩이를 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부르짖는다(叫)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소리쳤다. 비록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舅子 역시 그의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伊企탄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빼앗기 어려운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특히 여러 장수들이 가슴 아파하는 바가 되었다. 그의 아내 大葉子도 역시 잡혔는데 비통하게 노래하기를 “韓國의 城위에 서서 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며 일본으로 향하네”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和答하기를 “韓國의 성위에 서서 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어 보이며 난파로 향하네”라고 하였다.

8월 천황이 대장군 大伴連狹手彦을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狹手彦은 이에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쳐서 깨트렸다.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狹手彦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왕궁에 들어가 진귀한 보물과 갖가지 재화,七織帳,鐵屋을 모두 얻어 돌아왔다.[옛 책에 “鐵屋은 고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며 織帳은 고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七織帳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2벌,금으로 장식한 칼 2자루,무늬를 새긴 구리종 3개,五色幡 2竿,미녀 媛[媛은 이름이다] 및 그의 시녀 吾田子를 蘇我稻目宿녜 大臣에게 보내었다. 이에 大臣은 두 여자를 맞아 들여 처로 삼고 輕의 曲殿에 살게 했다.[鐵屋은 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을 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겨울 11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물건을 바치고 아울러 調賦를 바쳤다. 사신은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킨 것을 일본이 분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감히 돌아가기를 청하지 못하였다.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본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백성과 같은 例로 취급하였는데, 지금의 攝津國 三嶋郡 직(土+直)盧 신라인의 선조이다.

 

26년(565) 여름 5월 고려인 頭霧리(口+利)耶陛 등이 筑紫에 投化하였으므로 山背國에 안치하였다. 지금의 畝原,奈羅,山村의 고구려인 선조이다.

 

30(569)년 봄 정월 신묘 초하루 조칙을 내려 “田部를 헤아려 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나이가 10여세가 되었는데도 호적에서 빠져 課役을 면제받는 사람이 많다. 마땅히 膽津(膽津은 王辰爾의 조카이다)을 보내어 白猪田部의 丁籍을 살펴 정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31년,570) 여름 4월 甲申 초하루 乙酉 泊瀨柴籬宮에 거동하였다. 越人 江渟臣裙代가 서울에 와서 “고려 사신이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 배 댈곳을 잃고 헤매다가 물결 따라 떠다니던 중 홀연히 해안에 다다랐는데, 郡司가 숨겨두었으므로 제가 밝히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조칙을 내려 “내가 왕업을 이은 지 얼마 안된 때에 고려인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처음으로 越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비록 물에 빠지고 떠다니는 고생은 하였지만 아직 목숨은 온전하니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계책이 널리 미치고 지극한 덕이 우뚝 높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진 교화가 주위에 통하였고 큰 은혜가 넓고 넓은 것이 아니겠는가. 담당 관서는 마땅히 山城國 相樂郡에 客館을 세워 깨끗이 정돈하고 후한 재물로 돌보라”고 하였다.

이달에 (천황이) 수레를 타고 泊瀨柴籬宮으로부터 이르렀다. 東漢氏直糠兒와 葛城直難波를 보내어 고려 사신을 맞이하여 불렀다.

5월 膳臣傾子를 越에 보내어 고려 사신을 대접했다.[傾子는 우리말로 가(舟+可)타部古라 한다]. (고려) 大使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膳臣이 바로 천자의 使者인 것을 알고, 道君에게 “네가 천황이 아니라는 것은 과연 내가 의심한 대로구나. 너는 이미 膳臣에게 엎드려 절하였으니 백성이라는 것을 더욱 알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앞서 나를 속여 調를 취하여 자신이 가졌으니 마땅히 그것을 빨리 되돌려 달라. 번잡하게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膳臣이 듣고서 사람을 시켜 그 調를 조사하게 하여 모두 그에게 주었다. 서울에 돌아와 복명하였다.

7월 壬子 초하루 고려 사신이 近江에 도착하였다.

이달에 許勢臣猿과 吉士赤鳩를 보냈다. 難波津에서 출발하여 狹狹波山에서 배를 끌고와 飾船을 장식하고 이에 近江의 북쪽 산에 가서 맞이하였다. 마침내 산 뒤쪽의 高위(木+威)館에 인도하여 들이고 東漢坂上直子麻呂와 錦部首大石을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또 相樂館에서 고려 사자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32년(571) 봄 3월 戊申 초하루 壬子 坂田耳子郞君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이달 고려가 바친 物品과 表文을 아직 받들어 아뢰지 못하였다. 수십일이 지나도록 좋은 날을 점쳐 기다렸다.

여름 4월 戊寅 초하루 壬辰 천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로 불러들였다. (천황이)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封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가을 8월 丙子 초하루 신라가 조문사 未叱子失消 등을 보내어 빈소에서 (천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달 未叱子失消 등이 돌아갔다.

 

 

 

 

 

 

 

 

 

 

 

 

 

 

 

 

 

 

권 20 渟中倉太珠敷天皇 敏達天皇

 

(元年 여름 4월) 이 달 百濟大井에 宮을 만들었다. 物部 弓削守屋大連을 옛과 같이 大連으로 삼고, 蘇我 馬子宿禰를 大臣으로 삼았다.

5월 壬寅 초하루 천황이 皇子와 大臣에게 “高麗 使人이 지금 어디에 있는냐”고 물었다. 大臣이 “相樂館에 있습니다”라 대답하였다. 천황이 듣고 매우 슬퍼하며 탄식하기를 “슬프도다. 이 使人들의 이름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천황에게 아뢰었었다”라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를 相樂館에 보내어 調로 바치는 물건을 조사하여 기록하고 서울로 보내게 했다.

丙辰 천황이 고려에서 올린 表를 大臣에게 주었다. 여러 史를 불러 모아서 풀이하 게 하였는데, 이 때 여러 史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도 읽지 못하였으나 船史의 조상인 王辰爾가 능히 읽고 해석하였다. 이 때문에 천황과 大臣들이 모두 讚美하여 “부지런하구나 辰爾여, 훌륭하구나 辰爾여, 그대가 만약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누가 읽고 해석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부터는 宮中에서 近侍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東西의 여러 史에게 “너희들이 배운 바는 어찌하여 나아감이 없느냐, 너희들은 비록 많으나 辰爾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라 하였다. 또 고려가 올린 表에 까마귀 날개에 쓰여진 것이 있었는데 글자도 날개처럼 검었으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辰爾가 이에 밥김에 날개를 쪄서 비단으로 날개를 찍어 그 글자를 베껴냈더니 朝庭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6월 高麗 大使가 副使 등에게 “磯城嶋天皇(欽明天皇) 때에 너희들은 나와 상의한 바를 어기고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함부로 국가의 調를 나누어 천한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찌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겠느냐. 만약 우리 국왕이 안다면 반드시 너희들을 꾸짖을 것이다”라 하였다. 副使 등이 서로 “만약 우리들이 나라에 이르렀을 때 大使가 우리의 허물을 말한다면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몰래 죽여서 그 입을 막아야 한다”라 하였다. 그 날 저녁 모의가 새어나갔다. 大使가 이를 알고 복장을 갖추고 혼자 몰래 가다가 (相樂)館의 뜰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 한 사람이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서 大使의 머리를 치고 물러 났으며 다음에 또 한 사람이 곧바로 대사를 향해 와서 머리와 손을 때리고 갔다. 그런데도 大使는 묵묵히 서서 얼굴의 피를 닦았다. 다시 한 사람이 칼을 들고 급히 와서 大使의 배를 찌르고 갔다. 이 때에 대사는 두려워서 땅에 엎드려 빌었는데 뒤에 한 사람이 나타나 죽이고 갔다. 다음날 아침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東漢坂上直子麻呂 등이 그 까닭을 물었다. 副使 등은 “천황이 大使에게 妻를 내려 주었는데 大使가 칙을 어기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無禮하였으므로 臣들이 천황을 위하여 죽였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有司가 禮로써 거두어 葬事지냈다.

가을 7월 高麗 使人이 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2년 여름 5월 丙寅 초하루 戊辰 고려 使人이 越의 海岸에 정박했는데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朝庭에서는 자주 길을 잃는 것을 의심하여 향응을 베풀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吉備海部直 難波에게 칙을 내려 고려의 사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가을 7월 乙丑 초하루 越의 海岸에서 難波와 고려의 사신들이 서로 의논하여 送使 難波의 船人 大嶋首磐日과 狹丘首間狹을 고려 사신의 배에 타게 하고, 高麗人 두 사람은 送使의 배에 타게 했다. 이같이 서로 바꾸어 타서 간사한 마음에 대비하도록 했다. 함께 배를 출발하여 몇 里쯤 갔을 때 送使 難波가 파도를 두려워 하여 高麗人 두 사람을 붙잡아 바다에 던져 넣었다.

8월 甲午 초하루 丁未 送使 難波가 돌아와서 復命하기를 “바다에 큰 고래가 배와 노를 가로막고 부술듯 하였으므로 難波 등은 고래가 배를 삼킬까 두려워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듣고 속이는 말임을 알고는 官에서 사역시키고 (吉備)國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년 여름 5월 庚申 초하루 甲子 高麗 使人이 越의 海岸에 정박했다.

가을 7월 己未 초하루 戊寅 高麗 使人이 서울에 들어와 “신들은 지난 해에 送使를 따라서 귀국했습니다. 신들은 먼저 저희 나라에 이르렀는데 저희 나라는 使人의 禮에 준하여 大嶋首磐日 등에게 향응을 베풀었으며 고려국왕은 따로 두터운 禮로써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送使의 배는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삼가 使人과 磐日 등을 보내어 저희 使人들이 돌아오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라 아뢰었다. 천황이 듣고 難波의 죄를 책하여 “朝庭을 속인 것이 하나요, 이웃나라의 사신을 물에 빠뜨려 죽인 것이 둘이니, 이같은 큰 죄는 놓아서 되돌려 보낼 수 없다”라 하고 그 죄를 처단했다.

(겨울 10월) 戊戌 船史 王辰爾의 아우 牛에게 조칙을 내려 津史라는 姓을 내렸다.

11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4년 2월) 乙丑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쳤는데 여느 해보다 더욱 많았다. 천황은 신라가 任那를 세우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皇子와 대신에게 “任那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여름 4월 乙酉 초하루 庚寅 吉士 金子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吉士 木蓮子를 임나에 사신으로 보냈으며, 吉士 譯語彦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6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쳤는데 보통 때보다 매우 많았으며, 아울러 多多羅‧須奈羅‧和陀‧發鬼 4邑의 調를 바쳤다.

 

(6년) 여름 5월 癸酉 초하루 丁丑 大別王과 小黑吉士를 보내어 백제국의 宰로 삼았다[王의 신하로서 명을 받들어 三韓에 使臣으로 갈 때 스스로 宰라고 칭한다. 韓의 宰가 된다고 하는 말은 대개 옛날의 典範인 듯하다. 지금은 使라고 하는데 나머지는 모두 이를 따른다. 大別王은 어디 출신인지 자세하지 않다].

겨울 11월 庚午 초하루 백제국왕이 돌아오는 사신 大別王 등에게 딸려서 經論 약간 卷과 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의 6인을 바쳤으므로 難波의 大別王寺에 安置했다.

 

8년 겨울 10월 신라가 枳叱政奈末을 보내어 調를 바치고 아울러 佛像을 보냈다.

 

9년 여름 6월 신라가 安刀奈末과 失消奈末을 보내어 調를 바쳤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11년 겨울 10월 신라가 安刀奈末과 失消奈末을 보내어 調를 바쳤는데 받아들이지않고 되돌려 보냈다.

 

12년 가을 7월 丁酉 초하루 조칙을 내려 “나의 아버지 천황 때에 신라가 內官家의 나라를 멸망시켰다[天國排開廣庭天皇(欽明天皇) 23년에 任那가 신라에게 멸망당하였으므로 신라가 우리 官家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다]. 아버지 천황이 임나를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돌아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朕은 神의 謀策을 도와 任那를 부흥시키고자 한다. 지금 백제에 있는 火葦北國造 阿利斯登의 아들 達率 日羅가 어질고 용맹스럽다고 하므로 朕은 그 사람과 함께 계획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紀國造 押勝과 吉備海部直 羽嶋를 보내어 백제에서 불렀다.

겨울 10월 紀國造 押勝 등이 백제로부터 돌아왔다. 조정에 復命하기를 “百濟國主가 日羅를 소중히 여겨 바치려고 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이 해 다시 吉備海部直 羽嶋를 보내어 日羅를 백제에서 불렀다. 羽嶋가 백제에 가서 먼저 사사로이 日羅를 보려고 혼자 집 문 근처에 갔다. 얼마 후 집안에서 韓婦가 나와서 韓語로 “너의 몸을 나의 몸 안으로 들여 보내라”고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羽嶋가 곧 그 뜻을 깨닫고 뒤따라 들어갔다. 이에 日羅가 나와서 손을 잡고 자리에 앉게 하고 비밀스럽게 말하기를 “내가 저으기 들으니 百濟國主는, 天朝가 臣을 보낸 뒤에 억류하여 되돌려 보내지 않을까 의심한 까닭에 (저를) 소중히 여기고 바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칙을 선포할 때 마땅히 엄하게 하여 매우 급하게 부르십시요”라 하였다. 羽嶋가 그 계책에 따라 日羅를 불렀더니 百濟國主는 天朝를 두려워 하여 감히 칙을 거스리지 못하고, 日羅와 恩率 德爾‧余怒‧奇奴知‧參官 柁師 德率 次干德 水手 등 약간인을 보냈다. 日羅 등이 吉備兒嶋 屯倉에 이르자 朝庭에서는 大伴糠手子連을 보내어 위로하고, 다시 大夫 등을 難波館에 보내어 日羅를 찾아보게 했다. 이 때 日羅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문 앞에 이르러서 곧 政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한탄하기를 “檜隈宮御寓天皇(宣化天皇) 때에 우리 君 大伴金村大連과 국가를 위하여 바다 밖에 사신으로 갔던 火葦北國造 刑部靫部 阿利斯登의 아들 臣 達率 日羅는 천황의 부름을 받고 두려워하며 來朝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갑옷을 벗어 천황에게 바쳤다. 阿斗桑市에 館舍를 지어 日羅를 머물게 하고 바라는대로 공급해 주었다. 또 阿倍目臣과 物部贄子連‧大伴糠手子連을 보내어 日羅에게 國政을 물었다. 日羅가 대답하기를 “천황이 천하를 다스리는 바의 정치는 반드시 백성들을 보호하고 기르는데 있습니다. 어찌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멸망에 이르려하십니까. 그러므로 지금 논의하는 자들로서 조정에 있는 臣‧連의 두 造로부터[二造란 國造와 伴造이다]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유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십시요. 이렇게 3년을 하면 양식과 병사가 풍족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즐겁게 하여 물불을 꺼리지 않고 國難을 함께 구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선박을 많이 만들어 津마다 줄지어 두고 客人들이 보게 하여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십시요. 그리고 유능한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그 국왕을 부르되 만일 오지 않으면 太佐平‧王子 등을 부르십시요. 그러면 저절로 복종할 마음이 우러나올 것이니, 그런 뒤에 죄를 물어십시요”라 하였다. 또 “백제인이 꾀하여 ‘배 3백 척으로 筑紫에 가 살고자 합니다’라 하였는데 만약 그것이 진실로 청하는 것이라면 겉으로는(筑紫를) 내려주십시요. 그러면 백제는 새로 나라를 세우려고 반드시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을 배에 싣고 올 것입니다. 국가에서는 이 때를 대비하여 壹伎‧對馬에 伏兵을 많이 두었다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 죽이십시요. 오히려 속임을 당하지 말고 중요한 곳마다 튼튼한 요새를 쌓으십시요”라 아뢰었다. 이에 恩率‧參官이 나라로 되돌아 갈 때에[옛 책에는 恩率을 한 사람, 참관을 한 사람이라 하였다] 몰래 德爾 등에게 “내가 筑紫를 지나갈 때 쯤을 헤아려 너희들이 몰래 日羅를 죽인다면 내가 왕에게 모두 아뢰어 높은 벼슬을 내리도록 하고 자신과 처자식들에게도 후에 영예를 내리도록 하겠다”라 하였다. 德爾‧余奴가 모두 허락했다. 參官 등은 드디어 血鹿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 日羅는 桑市村으로부터 難波館으로 옮겼다. 德爾 등은 밤낮으로 서로 모의하여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에 日羅의 몸에서 빛이 나 불꽃같았으므로 德爾 등은 두려워서 죽이지 못하였다. 드디어 12월 그믐에 빛을 잃기를 기다려 죽였다. 日羅가 다시 살아나서 “이는 내가 부리던 奴 등의 짓이지 신라가 아니다”라는 말을 마치고 죽었다[ 마침 이 때에 신라 사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황이 贄子大連과 糠手子連에게 명하여 小郡의 서쪽 부근 언덕 앞에 거두어서 장사지내게 하고, 그 처자식과 水手 등은 石川에 살게 했다. 이에 大伴糠手子連이 논의하여 “한 곳에 모여서 살면 변고가 생길까 두렵다”라 하였으므로 처자식들은 石川 百濟村에 살게 하고 水手 등은 石川 大伴村에 살게 했다. 德爾 등을 붙잡아 下百濟 河田村에 두고 몇몇 大夫를 보내어 그 일을 따져 물었다. 德爾 등이 죄를 자백하여 “진실로 이는 恩率‧參官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우리들은 그 밑에 있기 때문에 감히 거스릴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때문에 옥에 가두고 조정에 복명했다. 葦北에 사신을 보내어 日羅의 권속을 다 불러 德爾 등을 주어서 뜻대로 죄를 판결하게 했다. 이 때 葦北君 등이 (德爾 등을) 받아서 모두 죽여 彌賣嶋에 던져버리고[彌賣嶋는 대개 姬嶋이다] 日羅를 葦北에 移葬시켰다. 그 후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이 “恩率의 배는 바람을 만나 바다에 빠졌고, 參官의 배는 津嶋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라 하였다.

 

13년 봄 2월 癸巳 초하루 庚子 難波吉士木蓮子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마침내 任那에 갔다.

가을 9월 백제에서 온 鹿深臣[이름이 빠졌다]이 彌勒石像 1軀를 가지고 있었고 佐伯連[이름이 빠졌다]이 佛像 1軀를 가지고 있었다.

이 해 蘇我馬子宿禰가 그 佛像 2軀를 청하고 鞍部村主司馬達等과 池邊直氷田을 보내어 사방에서 수행자를 찾게 했다. 이에 오직 播磨國에서 승려로서 환속한 자를 찾았는데 이름이 高麗 惠便이었다. 大臣이 스승으로 삼았다. 司馬達等의 딸 嶋를 得度시켰는데 善信尼라 한다[나이 11세였다]. 또 善信尼의 제자 2인을 득도시키니, 한 사람은 漢人夜菩의 딸 豊女로 禪藏尼이고, 또 한 사람은 錦織壺의 딸 石女로 惠善尼이다[壺는 都符라 한다]. 馬子는 홀로 佛法에 의지하여 세 비구니를 공경했는데 세 비구니를 氷田直과 達等에게 맡겨서 衣食을 공급하게 했다. 집 동쪽에 佛殿을 경영하여 彌勒石像을 안치하고 세 비구니를 청하여 齌會를 크게 열었다. 이 때 達等이 齌食할 때에 佛舍利를 얻어서 舍利를 馬子宿禰에게 바쳤다. 馬子宿禰는 시험삼아 舍利를 모루에 놓고 쇠망치로 후려 쳤더니 모루와 쇠망치는 부서졌지만 舍利는 훼손할 수 없었다. 또 舍利를 물에 던졌더니 舍利는 마음으로 원하는 바에 따라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馬子宿禰와 池邊氷田‧司馬達等은 佛法을 깊이 믿고 修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馬子宿禰가 또 石川宅에 佛殿을 지었는데 佛法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4년 3월) 丙戌 物部 弓削守屋大連이 스스로 절에 나아가 胡床에 걸터앉았다. 그 탑을 무너뜨리고 불을 놓아 태워 버렸으며 또 佛像과 佛殿을 불태웠다. 태우고 남은 불상을 모아서 難波의 堀江에 버리게 했다. 이 날 구름도 없었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大連은 비옷을 입고 馬子宿禰와 그를 따라 수행하는 승려들을 꾸짖고, (또) 욕보이려는 마음이 생겼다. 이에 佐伯造御室[다른 이름은 於閭礙이다]을 보내어 馬子宿禰가 공양하는 善信 등의 比丘尼를 불렀다. 이 때문에 馬子宿禰는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슬피 울며 比丘尼 등을 불러내어 御室에게 맡겼다. 有司가 곧 尼 등의 법복을 벗기고 가두어 海石榴市亭에서 채찍으로 쳤다. 천황이 임나를 세우려고 생각하여 坂田耳子王을 뽑아 사신으로 삼았다. 이 때 마침 천황과 大連이 갑자기 종기를 앓게 되어 보낼 수 없었다. 橘豊日皇子(뒤의 用明天皇)에게 명령하여 “아버지 천황의 조칙을 거스릴 수 없다. 임나의 정치를 힘써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종기가 생겨 죽은 사람들이 나라에 가득찼는데 종기를 앓는 자들이 “몸이 불타고 매맞고 부러지는 듯하다”고 하면서 울부짖으며 죽었다. 늙은이나 젊은이들이 몰래 서로 “이는 佛像을 불태운 죄이다”라고 말하였다.

 

권21 泊瀨部天皇 崇峻天皇 卽位前紀

用明天皇 2년 (6월) 甲子 善信阿尼 등이 大臣에게, “出家의 길은 戒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백제에 가서 受戒法을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달 백제의 調使가 와서 조알하였다. 大臣이 사신에게, “이 비구니들을 데리고 너희 나라에 가서 戒法을 배우게 하여 다 마치면 보내라”고 말하였다. 사신이, “신 등이 저희 나라에 돌아가 먼저 국왕에게 아뢴 뒤에 보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崇峻天皇 원년‧‧‧이 해 백제국에서 사신과 승려 惠總‧令斤‧惠寔(穴+是) 등을 보내어 佛舍利를 바쳤다. 백제국이 恩率 首信‧德率 蓋文‧那率 福富味身 등을 보내어 調를 진상하고 아울러 佛舍利, 승려 聆照 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 등과 寺工 太良未太‧文賈古子, 鑪盤博士 將德 白昧淳, 瓦博士 麻奈文奴‧陽貴文‧능貴文‧昔麻帝彌, 畵工 白加를 바쳤다. 蘇我馬子宿禰가 백제 승려들을 초청하여 受戒의 법을 묻고, 善信尼 등을 백제국 사신 恩率 首信 등에게 부탁하여 보내어 學問을 배우도록 하였다. 飛鳥衣縫造의 선조 樹葉의 집을 허물어 비로소 法興寺를 지었다. 이 땅은 飛鳥眞神原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또한 飛鳥苫田이라고도 일컫는다.

 

3년 봄 3월 학문을 배우러 간 비구니 善信 등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櫻井寺에 머물렀다.

이 해 출가한 비구니는 大伴狹手彦連의 딸 善德‧大伴狛의 夫人‧新羅媛 善妙‧百濟媛 妙光, 또 漢人 善聰‧善通‧妙德‧法定照‧善智聰‧善智惠‧善光 등이다. 鞍部 司馬達等의 아들 多須奈도 같은 때에 출가하였는데, 이름을 德齊法師라 한다.

 

4년 가을 8월 庚戌 초하루 천황이 군신에게 조칙을 내려, “짐이 任那를 세우고자 생각하는데, 경들은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군신들이, “任那官家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모두 폐하께서 조칙한 바와 같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겨울 11월 己卯 초하루 壬午 紀男麻呂宿禰‧巨勢猿臣‧大伴囓連‧葛城烏奈良臣으로 대장군을 삼았다. 각 氏의 臣連으로 裨將과 部隊를 삼아 2만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筑紫에 머물게 했다. 吉士 金을 신라에 보내고, 吉士 木蓮子를 任那에 보내어 任那의 일을 물었다.

 

권22 豊御食炊屋姬天皇 推古天皇

推古天皇 원년 여름 4월 庚午 초하루 己卯 廐戶豊聰耳 皇子(聖德太子)를 皇太子로 삼아 攝政하도록 하고, 정치를 모두 위임하였다. (그는) 橘豊日天皇(用明天皇)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 皇后는 穴穗部間人 皇女이다. 황후가 임신하여 해산일에 궁 안을 순행하며 여러 관사를 감찰하고 있었다. 馬官에 이르러 마굿간 문에 당도하였는데 힘들이지 않고 홀연듯이 아이를 낳았다. 태어나면서 말을 잘하고 성스러운 지혜가 있었다. 장성하여서는 한꺼번에 열 사람의 송사를 들어도 능히 판별하지 않음이 없었고, 아울러 앞날의 일도 미리 알았다. 또 고려의 승려 慧慈에게서 內敎를 익혔고, 博士 覺哿에게서 外典을 배워, 아울러 모두 통달하였다. 아버지 천황이 사랑하여 궁의 남쪽에 있는 上殿에 거처하도록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일컬어 上宮廐戶豊聰耳太子라고 하였다.

 

3년 5월 戊午 초하루 丁卯 고려 승려 慧慈가 귀화하자,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해 백제의 승려 慧聰이 왔다. 이 두 승려는 불교를 널리 펴서 모두 三寶의 棟梁이 되었다.

 

4년 겨울 11월 法興寺를 짓는 것을 마쳤다. 이에 大臣 男善德臣을 寺司로 삼았다. 이 날 慧慈‧慧聰 두 승려가 처음으로 法興寺에 주석하였다.

 

5년 여름 4월 정축 초하루 백제왕이 왕자 阿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癸酉 초하루 甲午 吉士 磐金을 신라에 보냈다.

 

6년 여름 4월 難波 吉士 磐金이 신라로부터 돌아와, 까치 두 마리를 바쳤다. 이에 難波社에서 기르도록 하였더니, 나무가지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가을 8월 己亥 초하루 신라가 공작 한 마리를 바쳤다.

 

7년 가을 9월 癸亥 초하루 백제가 낙타 한 필, 나귀 한 필, 양 두 마리, 흰 꿩 한 마리를 바쳤다.

 

8년(600) 봄 2월 신라가 任那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자, 천황이 任那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이 해 境部臣을 대장군으로 삼고 穗積臣을 부장군으로 삼아,[모두 이름은 빠졌다.] 만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任那를 위하여 신라를 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곧바로 신라를 향하여 바다를 건너 갔다. 신라에 이르러 5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에 신라왕이 두려워 하여 흰 기를 들고 장군의 깃발 아래에 이르러 서서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 6城을 떼어 주며 항복을 청하였다. 그 때 장군이 함께 의논하여, “신라가 죄를 알고 항복하니 억지로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 하고, 곧 (천황에게) 아뢰었다. 천황이 다시 難波 吉師 神을 신라에 보내고, 또 難波 吉士 木蓮子를 任那에 보내어 일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에 新羅‧任那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치고, 表를 올려 “하늘에는 神이 있고 땅에는 天皇이 있으니, 이 두 신을 제외하고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앞으로는 이후로 서로 공격하지 않겠으며, 또 배와 노를 마르지 않도록 해마다 반드시 조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곧 사신을 보내어 장군을 불러 들였다. 장군들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신라가 또 任那를 침략하였다.

 

9년 3월 甲申 초하루 戊子 大伴連囓을 고려에 보내고, 坂本臣糠手를 백제에 보내어 “급히 任那를 구원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가을 9월 辛巳 초하루 戊子 신라의 간첩 迦摩多가 對馬에 이르렀다. 이에 잡아들여 (천황에게) 올리니 上野에 유배하였다.

겨울 11월 庚辰 초하루 甲申 신라를 칠 것을 의논하였다.

 

10년 봄 2월 己酉 초하루 來目皇子를 신라를 치는 장군으로 삼고, 여러 神部와 國造‧伴造 등 및 군사 2만 5천명을 주었다.

여름 4월 戊申 초하루 장군 來目皇子가 筑紫에 도착하였다. 이에 嶋郡에 나아가 주둔하여, 선박을 모으고 군량을 날랐다.

6월 정미 초하루 기유 大伴連囓‧坂本臣糠手가 함께 백제로부터 도착하였다. 이 때 來目皇子는 병들어 누워 결국 (신라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겨울 10월 백제 승려 觀勒이 왔다. 이에 曆本과 天文‧地理書 및 遁甲‧方術書를 바쳤다. 이 때 書生 3,4명을 선발하여 관륵에게 배우도록 하였다. 陽胡史의 선조인 玉陳은 曆法을 익혔고, 大友村主 高聰은 天文‧遁甲을 배웠으며, 山背臣 日立은 方術을 배워, 모두 배움에 성취가 있었다.

윤10월 을해 초하루 기축 고려 승려 僧隆‧雲聰이 함께 와서 귀화하였다.

 

11년 봄 2월 癸酉 초하루 丙子 來目皇子가 筑紫에서 죽었다. 이에 驛使를 보내어 아뢰니, 천황이 듣고 크게 놀라 皇太子와 蘇我大臣을 불러, “신라를 정벌하는 대장군 來目皇子가 죽었다. 그가 큰 일에 임하고도 완수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슬프도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周芳娑婆에 빈소를 차리고, 土師連猪手를 보내어 장례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猪手連의 후손을 “娑婆連”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뒤에 河內의 埴生山의 산등성이 위에 장사지냈다.

여름 4월 壬申 초하루 다시 來目皇子의 형 當摩皇子로 신라를 정벌하는 장군을 삼았다.

가을 7월 辛丑 초하루 癸卯 當摩皇子가 難波로부터 배를 출발하였다.

丙午 當摩皇子가 播磨에 도착하였다. 그 때 같이 간 妻 舍人姬王이 赤石에서 죽었다. 이에 赤石의 檜笠 산등성이 위에 장사지내고 當摩皇子가 돌아왔다. 마침내 (신라를) 정벌하지 못하였다.

 

13년 여름 4월 辛酉 초하루 천황이 皇太子‧大臣 및 여러 왕과 신하에게 조칙을 내려, 함께 誓願하여 銅‧繡丈六佛像 각 1구씩을 처음으로 만들게 하였다. 이에 鞍作鳥에게 명하여 불상을 조성하는 工人으로 삼았다. 이때 고려국 大興王은, 일본국 천황이 불상을 조성한다는 말을 듣고 황금 300兩을 바쳤다.

 

16년 여름 4월 小野臣妹子가 大唐으로부터 도착하였다. 당나라에서 妹子臣을 ‘蘇因高’라고 불렀다. 대당의 사신 裴世淸과 下客 12인이 妹子臣을 따라 筑紫에 이르렀다. 難波 吉士 雄成을 보내어 대당의 사신 裴世淸 등을 부르고, 당나라 사신을 위하여 다시 새 館舍를 難波 高麗館의 위에 만들었다.

6월 壬寅 초하루 丙辰 사신들이 難波津에 정박하였다. 이 날 飾船 30척으로 사신들을 강 입구에서 맞이하여 新館에 안치하였다. 이에 中臣宮地連烏摩呂‧大河內直糠手‧船史王平을 掌客으로 삼았다. 그러자 妹子臣이, “(臣이) 돌아올 때에 당나라 황제가 서찰을 신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백제를 지나올 때에 백제인이 조사하여 빼앗았으므로 올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군신들이 의논하여, “무릇 사신이란 비록 죽을지라도 소임을 잃지 않아야 하는 법인데, 이 사신은 어찌 그렇게 태만하여 대국의 서찰을 잃어버렸는가”라 하고, 유배형에 처하였다. 그 때 천황이 칙을 내려, “妹子는 비록 서찰을 잃어버린 죄가 있으나, 경솔하게 이를 처벌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 대국의 사신들도 이를 듣고 또한 좋지 않다고 하므로, 죄를 용서하여 처벌하지 않았다.

 

日本書紀 卷22 推古天皇

 

(16년) 이 해 新羅人이 많이 귀화하여 왔다.

 

17년 여름 4월 丁酉 초하루 庚子 筑紫大宰가, “百濟의 승려 道欣, 惠彌를 비롯한 열 사람과 俗人 75명이 肥後國의 葦北津에 머물고 있습니다”라 아뢰었다. 이 때 難波吉士 德摩呂, 船史 龍을 보내어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는가”라고 물으니, “百濟王의 명으로 吳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 나라에 난리가 나는 바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폭풍을 만나 바다 가운데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큰 행운으로 聖帝의 변경에 도착하게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7년) 5월 丁卯 초하루 壬午 德摩呂 등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곧 德摩呂와 龍 두 사람을 다시 보내어 百濟人들을 돌보아 본국으로 보내는데, 對馬에 이르러 道人 등 11사람이 모두 머물기를 청하자, 表를 올려 머물게 하였다. 이에 元興寺에 있게 하였다.

 

18년 봄 3월 高麗王이 승려 曇徵과 法定을 바쳤다. 曇徵은 5經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 수 있었으며, 아울러 연자방아를 만들었다. 대개 연자방아를 만드는 일은 이 때에 시작된 듯하다.

 

(18년) 가을 7월 新羅의 사신 沙㖨部 奈末 竹世士가 任那의 사신 㖨部 大舍 首智買와 함께 筑紫에 이르렀다.

 

(18년) 9월 사신을 보내어 新羅와 任那의 사신을 불렀다.

 

(18년) 겨울 10월 己丑 초하루 丙申 新羅와 任那의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날에 額田部連 比羅夫에게 명령하여 新羅의 사신을 맞이하는 莊馬(かさりうま)의 長으로 삼고, 膳臣 大伴을 任那의 사신을 맞이하는 莊馬의 長으로 삼았다. 그리고 阿斗河 근처의 숙소에 머물게 하였다.

 

(18년 10월) 丁酉 사신들이 조정에 배례하였다. 이에 秦造河勝과 土部連菟를 명하여 新羅사신을 인도하는 사람으로 삼고, 間人連鹽蓋와 阿閉臣大籠을 任那사신을 인도하는 사람으로 하였다. 모두 인도하여 南門으로 들어와서 뜰 한가운데 섰다. 이 때 大伴昨連, 蘇我豐浦蝦夷臣, 坂本糠手臣, 阿倍鳥子臣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나아와 뜰에 엎드렸다. 그러자 양국의 사신들은 각각 두번씩 절하고 사행의 뜻을 아뢰었다. 이에 4명의 大夫가 일어나 大臣에게 나아가 아뢰니, 大臣은 자리에서 일어나 政廳 앞에 서서 들었다. 다 마치고 사신들에게 祿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18년 10월) 乙巳 사신들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河內漢直贄를 新羅사신과 함께 먹는 사람으로 삼고, 錦織首久僧을 任那사신과 함께 먹는 사람으로 하였다.

 

(18년 10월) 辛亥 사신들이 의례를 마치고 돌아갔다.

 

(19년) 가을 8월 新羅가 沙㖨部 奈末 北叱智를 보내고, 任那가 習部 大舍 親智周智를 보내어 함께 조공하였다.

 

(20년) 이 해 百濟에서 귀화하여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얼굴과 몸에 모두 얼룩 반점이 있었다. 혹 白癩病者일까.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긴 것을 싫어하여 바다 가운데의 섬에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저의 얼룩진 피부가 보기 싫다면 얼룩소나 말을 나라 안에서 기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또 저에게는 조그만 재주가 있는데 山岳의 모형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를 머물게 하고 써주시면 나라에 이로움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헛되이 바다의 섬에 버리려 하십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 말을 듣고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남쪽 뜰에 須彌山의 모형과 吳橋를 만들 것을 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사람을 路子工이라 불렀다. 다른 이름은 芝耆摩呂라 한다. 또 百濟人 味摩之가 귀화하였는데, “吳나라에서 배워서 伎樂의 춤을 출 수 있다“고 말하였다. 곧 櫻井에 안치하고, 소년을 모아 伎樂의 춤을 배우게 하였다. 이 때 眞野首弟子・新漢濟文 두 사람이 그것을 배워 그 춤을 전하였는데, 이들이 지금의 大市首・辟田首 등의 선조이다.

 

23년 가을 9월 犬上君御田鍬와 矢田部造가 唐에서 돌아왔다. 百濟의 사신이 犬上君을 따라 來朝하였다.

 

(23년) 11월 己丑 초하루 庚寅 百濟사신에게 향응을 베풀었다.

 

(23년 11월) 癸卯 高麗의 승려 慧慈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24년) 가을 7월 新羅가 奈末 竹世士를 보내어 佛像을 바쳤다.

 

26년 가을 8월 癸酉 초하루 高麗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리고 “隋 煬帝가 30만의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우리에게 격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포로인 貞公・普通 두 사람과 북・피리・쇠뇌・抛石 등 10종류의 물건과 토산물 및 낙타 1필을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29년 봄 2월) 이 달 上宮太子(聖德太子)를 磯長陵에 장사지냈다. 이 때에 高麗의 僧 慧慈 上宮太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황태자를 위하여 승려들을 모아 齋會를 열었다. 그리고 몸소 경을 강하는 날에 서원하여, “日本國에 聖人이 있어 上宮豐聰耳皇子라 하였다. (그는) 진실로 하늘이 낸 분으로, 聖人의 덕을 지니고 日本의 나라에 태어나셨다. 夏 禹王・殷 湯王・周 文王의 덕(三統)을 두루 갖추고 옛 聖人의 큰 계획을 이었으며, 佛・法・僧 三寶를 공경하고 백성의 재난을 구원하셨으니, 그는 진실로 大聖人이셨다. 지금 太子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나는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마음은 똑같아 쇠라도 끊을 수 있는 정도이다. 혼자 사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나는 내년 2월 5일에 반드시 죽어서, 上宮太子를 淨土에서 만나 함께 중생을 교화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慧慈는 기약한 날이 되어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두 나라의 사람들은, “上宮太子만 聖人인 것이 아니라 慧慈 또한 聖人이었다”라고 말하였다.

 

(29년) 이 해 新羅가 奈末 伊彌買를 보내어 조공하고, 表로써 使行의 뜻을 아뢰었다. 무릇 新羅가 表를 올리는 것은 대개 이 때부터 시작된 일인 듯하다.

 

31년 가을 7월 新羅가 大使 奈末 智洗爾를, 任那가 達率 奈末智를 보내어 함께 來朝하였다. 불상 1구 및 금탑과 사리, 또한 큰 觀頂幡 1구와 작은 幡 12條를 바쳤다. 이에 불상은 葛野의 秦寺에 두고, 그 나머지 사리와 금탑, 觀頂幡 등은 모두 四天王寺에 들였다. 이 때 唐에서 학문을 닦던 승려인 惠齋・惠光 및 醫 惠日・福因 등이 모두 智洗爾 등을 따라 돌아왔는데, 惠日 등은, “唐나라에 머물며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학업을 달성하였으므로 불러들여야 할 것입니다. 또 저 唐나라는 법식이 두루 정비된 보기 드문 나라입니다. 모름지기 항상 왕래하여야 합니다”라고 함께 아뢰었다.

 

(31년) 이 해 新羅가 任那를 공격하여 任那가 新羅에 복속되었다. 이에 天皇은 장차 新羅를 치고자 大臣들에게 묻고 여러 卿들과 의논하였다. 田中臣은, “서둘러 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먼저 상황을 살펴서 (新羅의) 반역을 알아 본 뒤에 공격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시험삼아 사자를 보내어 그 사정을 엿보게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中臣連國은, “任那는 원래 우리나라의 內官家였는데 오늘날 新羅人이 그것을 쳐서 소유하였습니다. 청컨대 군대를 정비하여 新羅를 정벌하고 任那를 취하여 百濟에 부속시키십시오. (그것이) 新羅에 소속되어 있는 것보다 이익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말하였다. 田中臣은, “그렇지 않습니다. 百濟는 배반함이 많은 나라로 길가는 잠깐 사이에도 오히려 속임수를 씁니다. 무릇 그가 청한 바는 다 잘못된 것이므로 (任那를) 百濟에 부속시켜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결국 정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吉士 磐金을 新羅에 보내고 吉士 倉下를 任那에 보내어 任那의 일을 묻게 하였다. 이 때 新羅의 國王은 8명의 大夫를 파견하여 新羅國의 일을 磐金에게 아뢰고 또한 任那國의 사정을 倉下에게 아뢰었다. 그리고 “任那는 작은 나라이지만 천황의 부용국이다. 어찌 新羅가 함부로 그것을 영유하겠는가. 평상시 대로 內官家로 정할 것이니 원컨대 걱정하지 말라”라고 약속하고, 奈末 智洗遲를 吉士 磐金에게 딸려 보내고, 또한 任那人 達率 奈末遲를 吉士 倉下에 딸려 보내어 두 나라의 調를 바쳤다. 그러나 磐金 등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 해에 大德 境部臣雄摩侶・小德 中臣連國을 大將軍으로 하고, 小德 河邊臣禰受・小德 物部依網連乙等・小德 波多臣廣庭・小德 近江脚身臣飯蓋・小德 平群臣宇志・小德 大伴連[이름은 빠졌다]・小德 大宅臣軍을 副將軍으로 하여, 수 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新羅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 때 磐金 등은 모두 항구에 모여서 배를 띄우려 바람과 파도를 살피고 있었는데, 바로 이 때에 군대를 실은 배가 바다를 가득 채우며 수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두 나라의 使人은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고 깜짝놀라 돌아가 머무르며, 대신에 堪遲 大舍를 任那의 조공 사신으로 삼아 바치게 하였다. 이 때에 磐金 등은, “이렇게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이전의 약속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任那의 일은 이번에도 성공할 수 없게 되었다”라 서로 말하고, 배를 내어 건너갔다. 장군들은 처음에 任那에 도착해 의논하여 新羅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新羅 국왕은 많은 군대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미리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장군들이 함께 의논하여 表를 올리니, 천황이 허락하였다.

 

겨울 11월 磐金・倉下 등이 新羅에서 귀국하였다. 이 때 大臣이 그 상황을 물으니, “新羅는 (천황의) 명령을 받들고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나란히 사자를 파견하여 (新羅・任那) 두 나라의 調를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실은 배가 이르른 것을 보고 조공사신은 다시 돌아가 버렸으므로 다만 調만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大臣은 “후회스럽구나, 너무 빨리 군대를 파견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이번에 군사를 일으킨 일은 境部臣과 阿曇連이 일찍이 新羅의 뇌물을 받았던 까닭에, 大臣에게 권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자의 뜻을 미처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정벌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처음에 磐金 등이 新羅로 건너가던 날 항구에 도착할 즈음에 장식한 배 한 척이 바닷가에서 맞이하였다. 磐金이 “이 배는 어느 나라의 영접선인가”하고 물으니, “新羅의 배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磐金이 또 “어찌하여 任那의 영접선은 없는가”라고 물으니, 곧바로 任那를 위하여 배 한 척을 더하였다. 新羅가 영접선을 2척으로 하는 것은 이 때부터 시작된 일인 듯하다.

 

32년 여름 4월 丙午 초하루 戊申 어떤 승려가 도끼를 가지고 祖父를 쳤다. 이 때 천황은 그 말을 듣고 大臣을 불러 놓고 詔를 내려, “대저 출가한 자는 머리숙여 三寶에 귀의하고 갖추어 계율을 지녀야 한다. 어찌 뉘우치고 꺼리는 바 없이 경솔하게 악역을 저지르겠는가. 이제 짐이 듣으니 어떤 승려가 祖父를 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절의 승려들을 모두 모아서 심문하고 만약 사실이라면 중벌을 내리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모든 승려들을 모아 심문하고 악역을 행한 승려 및 여러 승려들을 모두 벌하려 하였다. 그 때 百濟의 승려 觀勒이 表를 올려, “대저 佛法은 西國(印度)로부터 漢(中國)에 이르러 3백년이 지나 百濟國에 전해져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백 년이 되었을 때에, 우리 왕은 일본천황이 지혜가 깊고 사리에 밝다는 것을 듣고 불상과 경전을 바쳤는데 아직 백 년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승려가 아직 법과 계율을 잘 익히지 못하여 문득 악역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승려들은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악역을 범한 자를 제외한 나머지 승려들은 다 용서하고 벌하지 말아 주십시요. 이것은 큰 공덕일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이에 그 말을 좇았다.

 

(32년 4월) 壬戌 승려 觀勒을 僧正으로 삼고 鞍部 德積을 僧都로 삼았다.이 날에 阿曇連[이름은 빠졌다]을 法頭로 삼았다.

 

33년 봄 正月 壬申 초하루 戊寅 高麗王이 僧 惠灌을 바쳤다. 이에 僧正에 임명하였다.

 

 

 

 

 

 

 

 


 

<<日本書紀>> 卷23, 息長足日廣額天皇[舒明天皇]

 

(2년,630) 3월 丙寅 초하루 高麗의 大使 晏子拔, 小使 若德과 백제의 大使 恩率 素子, 小使 德率 武德이 함께 조공하였다.

(가을 8월 癸巳 초하루) 庚子 고려 백제의 사신에게 朝堂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9월 癸亥 초하루 丙寅 고려와 백제의 사신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해 難波의 大郡과 三韓館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3년,631) 3월 庚申 초하루 백제왕 義慈가 왕자 豊章을 들여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4년(632) 가을 8월 唐이 高表仁을 파견하여 三田사를 보내주었는데, 함께 對馬島에 다다랐다. 이때 學問僧 靈雲과 僧旻 및 勝鳥養, 신라의 送使 등이 그를 따랐다.

 

(7년,635) 여름 6월 乙丑 초하루 甲戌 백제가 달솔 柔等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乙未 초하루 辛丑 백제 사신에게 朝堂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10년,638) 이해 백제, 신라, 임나가 나란히 조공하였다.

 

(11년,639) 가을 7월 조칙을 내려 “금년에 큰 궁궐과 큰 절을 만들어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百濟川 옆을 궁궐터로 하여 서쪽의 백성은 궁궐을 짓고 동쪽의 백성은 절을 지었다. 또 書直縣을 大匠으로 삼았다.

가을 9월 唐에서 학문을 배우던 승려 惠隱, 惠雲이 신라의 送使를 따라 서울에 들어왔다.

겨울 11월 庚子 초하루 신라 사신에게 朝堂에서 연회를 베풀고 冠位 1級을 주었다.

(12월) 이달 百濟川 옆에 9층탑을 세웠다.

 

(12년,640) 겨울 10월 乙丑 초하루 乙亥 당에서 학문을 배우던 승려 淸安, 학생 高向漢人玄理가 신라를 거쳐 이르렀다. 백제,신라의 조공사신이 함께 따라 왔는데, 그들에게 각각 官爵 1級을 주었다.

(10월) 이달 百濟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13년(641) 겨울 10월 乙丑 초하루 丁酉 천황이 百濟宮에서 죽었다. 丙午 (百濟)宮의 북쪽에 시신을 모셨다. 이것을 百濟大殯이라 한다.

 

 

<<日本書紀>> 卷24, 天豊財重日足姬天皇[皇極天皇]

 

(元年, 642, 봄 정월 丁巳 초하루) 乙酉 백제에 사신으로 갔던 大仁 阿曇連比羅夫가 筑紫로부터 驛馬를 타고 달려와 “백제국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弔問使를 받들어 보냈는데, 저는 조문사를 따라 함께 筑紫國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례식에 奉仕하고자 하여 혼자서 먼저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매우 어지럽습니다”라고 하였다.

2월 丁亥 초하루 戊子 阿曇山背連比羅夫, 草壁吉士磐金, 倭漢書直縣을 백제 조문사의 處所에 보내어 그쪽 소식을 물었다. 조문사가 대답하기를 “백제국왕이 저희들에게 ‘塞上은 항상 나쁜 짓을 하므로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주기를 청하더라도 日本 조정에서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제 조문사의 從者 등이 “지난해 11월 大佐平 智積이 죽었습니다.또 백제 사신이 崑崙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翹岐와 누이동생 4명,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壬辰 고려의 사신이 難波津에 다다랐다.

丁未 여러 대부들을 難波郡에 보내어 고려국에서 바치는 금은 등과 아울러 물건을 살피게 하였다. 사신이 물건을 바치고는 “지난해 6월 아우 왕자가 죽고 가을 9월에 大臣 伊梨柯須彌가 대왕과 伊梨渠世事 등 800여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아우 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자기와 같은 姓氏인 都須流金流를 大臣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戊申 고려,백제의 사신에게 難波郡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大臣에게 조칙을 내려 “津守連大海는 고려에 보낼 사신으로 삼을 만하고 國勝吉士水鷄는 백제에 보낼 사신으로 삼을 만하다[水鷄는 우리말로 俱毗那라 한다]. 草壁吉士眞跡은 신라에 보낼 사신으로 삼을 만하며, 坂本吉士長兄은 임나에 보낼 사신으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庚戌 翅岐를 阿曇山背連의 집에 안치하였다.

辛亥 고려,백제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癸丑 고려 사신과 백제 사신이 함께 돌아갔다.

(3월 丙辰 초하루) 辛酉 신라가 登極을 축하하는 사신과 弔問使를 보냈다.

庚午 신라 사신이 돌아갔다.

여름 4월 丙戌 초하루 癸巳 大使 翹岐가 그의 從者를 데리고 조정에 배알하였다.

乙未 蘇我大臣이 畝傍家에서 백제 翹岐 등을 불러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말 1필과 鐵鋌 20개를 주었다. 오직 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5월 乙卯 초하루 己未 河內國 依網屯倉 앞에 翹岐 등을 불러 활로 사냥하는 것을 관람케 하였다.

庚午 백제국 調使의 배와 吉士의 배가 함께 難波津에 다다랐다[무릇 吉士는 앞서 백제에 사신으로 간 사람이다].

壬申 백제 사신이 調를 바치고 吉士가 복명하였다.

乙亥 翹岐의 從者 한 사람이 죽었다.

丙子 翹岐의 아들이 죽었다. 이때 翹岐와 그의 처는 아들이 죽은 것을 두려워하고 꺼려 喪에 결코 나아가지 않았다. 무릇 백제와 신라의 풍속에 죽은 사람이 있을 경우, 비록 부모 형제 부부 자매라 할지라도 절대로 스스로 보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자애롭지 못한 것이 심한 정도가 어찌 禽獸와 다르겠는가.

戊寅 翹岐가 그의 처자를 데리고 百濟大井家에 옮겨갔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들을 石川에 장사지냈다.

(가을 7월 戊寅 초하루) 乙亥 백제 사신 大佐平 智積 등에게 朝堂에서 연회를 베풀었다[어떤 기록에는 백제 사신 대좌평 智積과 그의 아들 達率(이름은 빠졌다),恩率 軍善이라 하였다]. 이에 건장한 장정에게 명하여 翹岐 앞에서 씨름을 하게 했다. 智積 등은 연회가 끝난 후 물러나와 翹岐의 門前에 절하였다.

(8월 甲申 초하루) 乙丑 백제의 사신 參官 등이 돌아감에 큰배와 同船 3척[同船을 母慮紀舟라 한다]을 주었다. 이날 한밤중에 서남쪽에서 천둥소리가 울렸으며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參官 등이 탄 배가 해안에 부딪혀 부서졌다.

丙申 백제의 볼모 達率 長福에게 小德의 관위를 주고 中客 이하에게는 官位 1급씩을 주었다. 물건을 내려 주었는데 각기 차등이 있었다.

戊戌 백제 參官 등에게 배를 주어 떠나 보냈다.

己亥 고려 사신이 돌아갔다.

己酉 백제,신라 사신이 돌아갔다.

9월 癸丑 초하루 乙卯 천황이 大臣에게 조칙을 내려 “나는 큰 절을 짓고자 한다. 마땅히 近江과 越의 丁을 징발하라”고 하였다[百濟大寺이다]. 또 여러 나라에 할당하여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10월 癸未 초하루) 丁酉 蘇我大臣이 蝦夷에게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몸소 위문하였다. 이날 신라 조문사의 배와 登極을 축하하는 배가 壹岐島에 다다랐다.


(2년,643) 3월 辛亥 초하루 癸亥 難波의 백제 客館과 민가에 화재가 났다.

(여름 4월 庚辰 초하루) 庚子 筑紫의 大宰府에서 역마를 달려 아뢰기를 “백제 국왕의 아들 翹岐와 아우 왕자가 調使와 함께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6월 己卯 초하루 辛卯 筑紫의 大宰府에서 역마를 달려 아뢰기를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來朝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卿들이 듣고서 “고려는 己亥年부터 조공하지 않다가 금년에야 조공하는구나”라고 서로 말하였다.

辛丑 백제에서 調를 바치는 배가 難波津에 다다랐다.

가을 7월 己酉 초하루 辛亥 몇명의 대부를 難波郡에 보내어 백제국의 調와 바치는 물건을 살피게 했다. 이에 대부가 調使에게 “백제국에서 바치는 調는 종전의 예에 비하여 조금 모자란다. 대신에게 보내는 물건은 지난해에 돌려보낸 品目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이며, 여러 卿들에게 보내는 물건은 전혀 가지고 오지 않았다. 모두 종전의 사례에 어긋나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大使 達率 自斯와 副使 恩率 軍善이 그 물음에 대하여 모두 “지금 즉시 갖추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自斯는 볼모인 달솔 武子의 아들이다.

이해 백제 太子 餘豊이 벌통 4개를 가져와 三輪山에 놓아 길렀으나 끝내 번식시키지 못하였다.

 

(4년,645) 여름 4월 戊戌 초하루 고려에서 학문을 배우던 승려 등이 “같이 공부하던 鞍作得志가 호랑이와 친구가 되어 그 術法을 배웠습니다. (草木이) 마른 산을 푸른 산으로 만들기도 하고 혹은 누른 땅을 흰 물로 만들기도 하는 등 각종 기이한 術法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또 호랑이가 그에게 針을 주며 ‘삼가하고 삼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라. 이것으로 치료하면 낫지 않는 병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과연 말한 바와 같이 치료하면 낫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得志는 항상 그 針을 기둥 안에 숨겨놓았습니다. 후에 호랑이가 그 기둥을 부러트리고 그 針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고려국은 得志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 마음이 있음을 알고 毒을 써서 죽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6월 丁酉 초하루 甲辰 中大兄이 倉山田麻呂臣에게 몰래 이르기를 “三韓이 調를 바치는 날에 반드시 卿으로 하여금 그 표문을 낭독하도록 하겠다”고 하여 마침내 入鹿을 목베고자 하는 모의를 드러내 말하였다. 麻呂臣이 허락하였다.

戊申 천황이 太極殿에 납시었는데, 古人大兄이 곁에서 모셨다. 中臣鎌子連은 蘇我入鹿臣의 사람됨이 의심이 많아 밤낮으로 칼을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俳優를 시켜 꾀를 내어 그것을 풀도록 했다. 入鹿臣이 웃으며 칼을 풀고 자리에 들어갔다. 倉山田麻呂臣이 나아가 三韓의 표문을 낭독했다. 이에 中大兄은 衛門府에 경계를 내려 일시에 12곳의 출입문을 모두 닫아 (사람들이) 왕래하지 못하게 했으며 衛門府를 한 곳에 불러 모아 祿을 주려고 하였다. 이때 中大兄은 스스로 긴 창을 잡고 大極殿 옆에 숨어 있었으며 中臣鎌子連 등은 활과 화살을 가지고 그를 도와 호위하였다. 海犬養連勝麻呂로 하여금 칼 두 자루가 들어있는 상자를 佐伯連子麻呂와 葛城稚犬養連網田에게 주며 “힘써 노력하여 재빨리 목을 쳐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子麻呂 등은 물을 마셔 음식을 삼키려 하였으나 오히려 토하였다. 中臣鎌子連이 꾸짖어 힘을 내게 하였다. 倉山田麻呂臣은 표문을 거의 다 읽어가는 데도 子麻呂 등이 오지 않은 것이 두려워 땀이 흘러 몸을 흠뻑 적셨고 목소리가 어지럽고 손이 떨렸다. 鞍作臣이 이상하게 여겨 “무었 때문에 떨고 있는가”라고 묻자 山田麻呂가 “천황 가까이 있으므로 두려워 저도 모르게 땀이 흐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中大兄은 子麻呂 등이 入鹿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야아” 하고는 곧 子麻呂 등과 함께 不意에 칼로 入鹿의 머리와 어깨를 베어 상처를 입히니 入鹿이 놀라 일어났다. 子麻呂가 손을 놀리고 칼을 휘둘러 그의 한 쪽 다리를 상하게 했다. 入鹿이 굴러서 천황의 자리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천황의 자리에 있게 되는 분은 하늘의 아들입니다. 저는 죄를 알지 못하니 살펴서 밝혀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천황이 크게 놀라 中大兄에게 詔를 내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中大兄이 땅에 엎드려 “鞍作은 皇族을 모두 없애고 장차 천자의 자리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어찌 天孫을 鞍作이 대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蘇我臣入鹿의 또 다른 이름은 鞍作이다]. 천황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궁전으로 들어갔다. 佐伯連子麻呂와 稚犬養連網田이 入鹿의 목을 베었다. 이날 비가 내려 물이 뜰에까지 넘쳤으므로 거적으로 鞍作의 시체를 덮었다. 古人大兄은 이것을 보고 자기의 宮으로 달려 들어가 사람들에게 “韓人이 鞍作臣을 죽였다[韓의 政務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내 마음이 아프다”하고는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下略)

권 25 天萬豊日天皇 孝德天皇

 

大化 元年(645) 가을 7월 *丙子 高麗·百濟·新羅가 함께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 백제의 調使가 任那의 사신을 겸하여 임나의 조를 바쳤다. 다만 백제의 大使인 佐平 緣福만이 병에 걸려 (難波)津의 館에 머물러 있고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巨勢德太臣이 고려의 사신에게 詔를 내려 “明神御宇日本天皇의 詔旨이다. 과거는 짧으나 앞날은 길다. 그러므로 천황이 보낸 사신과 고려의 神의 아들이 받들어 보낸 사신은 온화한 마음으로 서로 이어 왕래할 만하다”고 하였다. 또 백제 사신에게 詔를 내려 “明神御宇日本天皇의 詔旨이다. 과거 우리의 먼 조상의 시대에 백제국은 內官家가 되었으니, 비유하자면 세 개로 묶은 그물과 같았다. 중간에 임나국을 백제에 속하도록 주었고, 후에 三輪栗隈君東人을 보내 임나국의 경계를 살피게 하였다. 그러므로 백제왕은 칙명에 따라 그 경계를 다 보여주었으나, 調에 빼놓은 것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調를 돌려보냈다. 임나에서 나는 물건은 천황이 환히 아는 것이니, 앞으로는 나라와 (그 나라에서) 나오는 물건을 갖추어 적어야 할 것이다. 너희 좌평 등은 얼굴도 바뀌지 않고 왔으니, 빨리 분명하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이제 거듭 三輪君東人·馬飼造[이름이 빠져 있다]를 보낸다. 또 명하여 鬼部의 達率인 意斯의 처자 등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8월 丙申 초하루) 癸卯 사신을 大寺에 보내 僧尼들을 불러 모으고 조를 내려 “磯城嶋宮御宇天皇(欽明天皇) 13년(552, 성왕 30)에 백제의 明王(聖王)이 우리 倭에 佛法을 전했다. 이 때 모든 신하들이 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蘇我稻目宿禰가 홀로 그 법을 믿었다. 천황이 이에 稻目宿禰에게 명하여 그 법을 받들게 했다. 譯語田宮御宇天皇(敏達天皇)의 시대에 蘇我馬子宿禰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석가의 가르침을 존중하였고, 다른 신하들은 믿지 않아 이 법도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천황이 馬子宿禰에게 명하여 그 법을 받들게 하였다. 小墾田宮御宇天皇(推古天皇)의 시대에 馬子宿禰가 천황을 위해 丈六繡像·丈六銅像을 만들고 불교를 드날렸으며 僧尼를 공경하였다. 나는 다시 바른 가르침을 숭상하고 큰 도리를 널리 열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沙門 狛大法師·福亮·惠雲·常安·靈雲·惠至·[寺主]僧旻·道登·惠隣·惠妙를 10師로 삼는다. 특별히 혜묘법사를 백제사의 사주로 삼는다. 이 10사들은 마땅히 뭇 승려들을 가르침으로 인도하고 석가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것을 법답게 해야 한다. 무릇 천황으로부터 伴造에 이르기까지 세워야 할 절을 세울 수 없는 경우 내가 모두 도와 짓겠다. 이제 寺司들과 寺主를 임명하니, 여러 절을 순행하여 僧尼·奴婢·토지에 대한 사실을 조사하여 모두 아뢰라”고 하였다. 곧 來目臣[이름은 빠져 있다]·三輪色夫君·額田部連甥을 法頭로 삼았다.

 

大化 2년(646) 2월 甲午 초하루 戊申 ··· 高麗·百濟·任那·新羅가 함께 사신을 보내 調賦를 바쳤다.

9월 小德 高向博士 黑麻呂를 신라에 보내 인질을 바치게 했다. 드디어 임나의 調를 (바치는 것을) 그만두었다[黑麻呂의 다른 이름은 玄理이다].

大化 3년(647) 봄 정월 戊子 초하루 壬寅 조정에서 활을 쏘았다. 이 날 高麗·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賦를 바쳤다.

*이 해 ··· 신라가 上臣 大阿飡 金春秋 등을 보내고 博士 小德 高向 黑麻呂·小山中 中臣連押熊을 보내 와서, 孔雀 1쌍·鸚鵡 1쌍을 바쳤다. 그리고 春秋를 인질로 삼았다.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談笑를 잘하였다.···

 

大化 4년(648) 2월 壬子 초하루 三韓[삼한은 高麗·百濟·新羅를 이른다]에 學問僧을 보냈다.

* 이 해 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

 

大化 5년 5월 癸卯 초하루 小花下 三輪君色夫·大山上 掃部連角麻呂 등을 新羅에 보냈다.

*이 해 新羅王이 沙㖨部 沙飡 金多遂를 보내 인질로 삼았다. 따라 온 사람은 37명이었다[僧 1명, 侍郞 2명, 丞 1명, 達官郞 1명, 中客 5명, 才伎 10명, 譯語 1명, 여러 傔人 16명, 모두 37명이다].

 

白雉 元年 2월 庚午 초하루 戊寅 穴戶國司 草壁連醜經이 흰 꿩을 바치며, “國造首의 同族 贄가 정월 9일에 麻山에서 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것을 百濟君에게 물으니, 백제군이 “後漢 明帝 永平 11년(68)에 흰 꿩이 여기저기에 나타났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沙門들에게 물으니, 사문들이 “귀로 들어보지도 못하고 눈으로 본 적도 없는 일입니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시어 민심을 기쁘게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道登法師는 “옛날 高麗가 절을 짓고자 하여 살펴보지 않은 땅이 없었는데, 바로 한 곳에서 흰 사슴이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드디어 이곳에 절을 세우고 白鹿薗寺라고 이름하고 佛法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또 흰 참새가 한 절의 田莊에 나타났으므로 온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또 唐에 보냈던 사신이 다리가 셋인 죽은 새를 가지고 오니 나라사람들이 또 좋은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비록 대수롭지 않은 것인데도 오히려 상서로운 일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흰 꿩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

甲申 조정의 의장대가 元旦에 모이는 儀禮와 같았다. 좌우의 대신과 百官들이 紫門 밖에서 네 줄로 늘어섰다. 粟田臣飯蟲 등 4명이 꿩을 태운 수레를 잡고 앞서서 갔다. 좌우의 대신들은 백관과 百濟君 豊璋·그 아우 塞城·忠勝·高麗의 侍醫 毛治· 新羅의 侍學士 등을 거느리고 中庭에 이르렀다.···

여름 4월 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어떤 책에는 “이 천황 때에 高麗·百濟·新羅 3국이 해마다 사신을 보내 바쳤다”고 하였다].

 

白雉 2년(651) 여름 6월 百濟·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와 물건을 바쳤다.

*이 해 新羅의 貢調使 知萬 沙飡 등이 唐나라의 옷을 입고 筑紫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함부로 풍속을 바꾼 것을 싫어하여 꾸짖고 돌려 보냈다. 그 때 巨勢大臣이 “지금 신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 정벌하는 상황은 모든 힘을 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難波津으로부터 筑紫海 가운데까지 서로 이어지도록 배를 가득 띄우고 신라를 불러 그 죄를 묻는다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청하였다.

 

白雉 3년 (여름 4월) 이 달 ··· 新羅·百濟가 사신을 보내 調와 물건을 바쳤다.

 

白雉 4년 6월 百濟·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와 물건을 바쳤다.

 

白雉 5년 2월 唐에 보낸 押使 大錦上 高向史玄理[어떤 책에는 “여름 5월에 唐에 押使 大花下 高向玄理를 보냈다”고 하였다]·大使 小錦下 河邊臣麻呂·副使 大山下 藥師惠日·判官 大乙上 書直麻呂·宮首阿彌陀[어떤 책에는 “判官 小山下 書直麻呂”라 하였다]·小乙上 岡君宜·置始連大伯·小乙下 中臣間人連老[老는 우리나라에서는 於喩(おゆ)라 한다]·田邊史鳥 등이 2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여러 달 머물다가 新羅道를 통해 萊州에 이르렀다. 드디어 서울(長安)에 이르러 天子를 뵈었다. 東宮監門 郭丈擧가 日本國의 地里(지방)와 國初의 神의 이름을 자세히 물으므로, 물음에 따라 모두 답하였다. 押使高向玄理가 唐에서 죽었다[伊吉博得은 “學問僧 惠妙가 당에서 죽었다. 知聰은 바다에서 죽었고, 智國도 바다에서 죽었다. 智宗은 庚寅年에 新羅의 배를 따라 돌아왔다. 覺勝은 당에서 죽었고, 義通은 바다에서 죽었다. ···”고 하였다].

*가을 7월 甲戌 초하루 丁酉 西海使 吉士長丹 등이 百濟·新羅가 보낸 사신과 함께 筑紫에 이르렀다.

*이 해 高麗·百濟·新羅가 함께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권 26 天豊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원년(655) 가을 7월 己巳 초하루 己卯 難波의 조정에서 北[北越]蝦夷 99명, 東[東陸奧]蝦夷 95명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아울러 百濟의 調使 150명에게도 베풀었다. ···

*이 해 高麗·百濟·新羅가 함께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百濟의 大使는 西部의 達率 余宜受이고, 副使는 東部의 恩率 調信仁으로 모두 100여 명이었다]. ··· 新羅는 따로 及飡 彌武를 볼모로 삼고 才伎者 12명을 바쳤는데, 彌武는 병이 들어 죽었다.

 

2년(656) 가을 8월 癸巳 초하루 庚子 高麗가 達沙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大使는 達沙이고 副使는 伊利之로 모두 81명이었다].

*9월 高麗에 大使 膳臣葉積·副使 坂合部連磐鍬·大判官 犬上君白麻呂·中判官 河內書首[이름은 빠져 있다]·小判官 大藏衣縫造麻呂를 보냈다.

*이 해(656, 보장왕 15, 의자왕 16, 무열왕 3) 飛鳥의 岡本에 다시 宮 터를 정했다. 이 때 高麗·百濟·新羅가 함께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 (그들을 위해) 이 궁터에 紺色 장막을 치고 연회를 베풀었다. ··· 西海使 佐伯連저(栳-匕+丁)繩[관위와 계급은 빠져 있다]·小山下 難波吉士國勝 등이 百濟로부터 돌아와 鸚鵡 1 쌍을 바쳤다. ···

 

(3년, 657) 이 해 사신을 新羅에 보내 “沙門 智達, 間人連御廏, 衣網連稚子 등을 너희나라 사신에 딸려 唐에 보내려고 한다”고 말하였는데, 新羅가 그 말에 따라 (그들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沙門 智達 등이 돌아왔다. 西海使 小花下 阿曇連頰垂·小山下 津臣傴僂[傴僂는 우리 말로 俱豆磨(くつま)라 한다]가 百濟로부터 돌아와 駱駝 1마리, 당나귀 2마리를 바쳤다. ···

 

4년(658) (가을 7월) 이 달 沙門 智通·智達이 칙명을 받들어 新羅의 배를 타고 唐나라에 가서, 玄奘法師가 있는 곳에서 無性衆生義를 배웠다.

이 해 ···出雲國이 “북쪽 바닷가에 물고기가 죽어서 쌓여 있는데, 두께가 세자쯤 된다. 그 (물고기의) 크기는 복어만하고 참새같은 부리와 바늘같은 비늘을 지녔는데, 비늘의 길이는 여러 치(寸)이다. 세속에서는 ‘참새가 바다에 들어가 변해서 물고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름을 雀魚라 한다[어떤 책에는 ‘경신년(제명천황 6년, 660) 7월에 이르러 百濟가 사자를 보내, 唐과 新羅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義慈王과 왕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일본)는 병사들을 서북 경계에 진을 치게 하였다. 城柵을 수리하고 산천을 나누어 막을 징조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또 西海使 小花下 阿曇連頰垂가 百濟로부터 돌아와 “百濟가 新羅를 정벌하고 돌아왔는데, 그 때 말이 혼자 절의 금당을 돌면서 밤낮으로 쉬지 않았는데, 오직 풀을 먹을 때만 멈추었다[어떤 책에는 ‘경신년에 이르러 적에게 멸망할 조짐이었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5년(659) 가을 7월 丙子 초하루 戊寅 小錦下 坂合部連石布, 大仙下 津守連吉祥이 唐에 사신으로 갔다. 그리고 道奧蝦夷의 남녀 2명을 당의 천자에게 보였다[伊吉連博德의 書에서는 “같은 천황 시대에 小錦下 坂合部石布連, 大仙下 津守吉祥連 등이 두 척의 배로 吳唐의 길을 통해 사신으로 갔다. 기미년(659) 7월 3일에 難波 三津浦로부터 출발하였다. 8월 11일에 筑紫 大津浦를 출발하였다. 9월 13일에 사신의 행렬이 百濟 남쪽 해안의 섬에 이르렀는데, 섬의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14일 인시에 두 배가 서로 이어 大海로 나왔다. 15일 해가 질 때에 石布連의 배가 역풍을 만나 南海의 섬에 표류했는데, 섬의 이름은 爾加委로 섬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곧 東漢長直阿利麻·坂合部連稻積 등 5명이 섬사람의 배를 훔쳐 타고 도망하여 括州에 이르렀다. 주현의 관리들이 보내주어 洛陽京에 도착하였다. 16일 밤에 吉祥連의 배가 越州 會稽縣 須岸山에 도착하자, 동북풍이 불었는데 바람이 매우 심했다. 22일에 행렬이 餘姚縣에 이르러, 타고 온 큰 배와 여러 調度物은 그 곳에 남겨두었다. 윤10월 1일에 행렬이 越州 부근에 이르렀다. 15일 驛馬를 타고 서울(장안)에 들어갔다. 29일 달려가 東京(낙양)에 이르렀는데, 천자가 동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을 마친 후 勅旨로 ‘국가가 내년에 반드시 海東을 정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 倭의 사신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드디어 西京에 숨겨 특별한 곳에 가두어 두었다.··· 고통을 겪은 지 해가 지났다···”고 하였다].

*이 해 ··· 또 高麗의 사신이 羆皮(말곰 가죽) 1장을 가지고 그 값을 綿 60斤이라 부르니, 市司가 웃으며 피해갔다. 高麗畵師 子麻呂가 同姓의 손님들을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는 날에 官의 말곰 가죽 70장을 빌려 손님의 자리로 하니, 사신들이 부끄러워 하며 물러났다.

 

6년(660) 봄 정월 壬寅 초하루 高麗의 사신 乙相 賀取文 등 100여 명이 筑紫에 이르렀다.

여름 5월 辛丑 초하루 戊申 高麗의 사신 乙相 賀取文 등이 難波館에 이르렀다.

이 달 ··· 또 온나라 백성들이 까닭없이 무기를 들고 길을 왔다갔다 했다[國老가 “百濟國이 땅을 잃을 징조인가”라고 하였다].

가을 7월 庚子 초하루 乙卯 高麗의 사신 乙相 賀取文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高麗의 沙門 道顯의 日本世紀에 “7월에 云云, 春秋智가 大將軍 蘇定方의 손을 빌려 百濟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百濟가 스스로 망하였다. 임금의 大夫人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 注에 “新羅의 春秋智는 (고구려의) 內臣 蓋金에게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唐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나라 풍속의 衣冠을 버리고 천자에게 아첨하기를 청하여, 이웃나라에 화를 끼치게 하는 이러한 의도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伊吉連博德의 書에 “경신년(660) 8월 백제를 이미 평정한 후 9월 12일 본국(唐)에서 사신들을 풀어주었다. 19일에 西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10월 16일 東京에 돌아와 비로소 阿利麻 등 5인을 만나 볼 수 있었다. 11월 1일에 將軍 蘇定方 등이 사로잡은 百濟王 이하 太子 隆 등 여러 왕자 13명, 大佐平 沙澤千福·國辨成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朝堂에 바쳤다. 급히 인도하여 천자에게 나아가니, 천자는 은혜로운 칙명으로 보자마자 풀어주었다. 19일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하사하였다. 24일에 동경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9월 己亥 초하루 癸卯 백제가 達率[이름은 빠져 있다]·沙彌 覺從 등을 보내었는데, 와서[어떤 책에는 도망해 와서 어려움을 고했다고 하였다] “금년 7월에 신라가 힘을 믿고 勢를 이루어서 이웃나라를 친하게 여기지 않고, 당나라 사람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포로가 되고 백성들도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어떤 책에는 ”금년 7월 10일에 唐의 蘇定方이 수군을 거느리고 尾資津에 주둔하였다. 新羅王 春秋智가 兵馬를 거느리고 怒受利山에 주둔하여 백제를 협공하여 서로 3일을 싸워 우리 왕성(부여)이 함락되었다. 같은 달 13일에 처음으로 왕성을 깨트렸다. 怒受利山은 百濟의 동쪽 경계이다].이에 西部 恩率 鬼室福信이 매우 화가 나서 任射岐山[어떤 책에는 北任敍利山이라 하였다]에 웅거하고, 達率 餘自進은 中部 久麻怒利城[어떤 책에는 都都岐留山이라 하였다]에 웅거하여 각각 한 곳에 진을 치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았다. 무기가 전의 싸움에서 다 없어졌으므로 막대기를 들고 싸워 신라군을 물리쳤다. 백제군이 그 무기를 빼앗았으므로 얼마 후 백제군사들이 다시 날쌔져, 唐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福信 등이 드디어 같은 나라사람들을 모아 함께 왕성을 지켰다. 나라사람들이 그들을 높여 ‘佐平 福信, 佐平 自進’이라고 한다. 오직 福信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고 아뢰었다.

*겨울 10월 百濟의 佐平 鬼室福信이 佐平 貴智 등을 보냈는데, 와서 唐의 포로 100여 명을 바쳤으니, 지금의 美濃國 不破·片縣 2郡의 唐人들이다. 또 군대를 빌고 구원을 청했다. 아울러 王子 餘豊璋[어떤 책에는 佐平 貴智·達率 正珍이라 했다]을 청하여 “唐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벌레같은 적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 영토를 흔들어 우리의 사직을 전복시키고 우리 임금과 신하를 포로로 하였다[百濟王 義慈, 그 妻 恩古, 그 아들 隆 등, 그 신하 佐平 千福, 國辨成, 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蘇將軍에게 사로잡혀 唐에 보내졌다. 아마도 이것은 까닭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 그런데 百濟國은 멀리서 천황께서 돌보아주시는데 힘입어 다시 (백성을) 모아 나라를 이루었다. 이제 百濟國이 천황을 시위케 했던 왕자 豊璋을 맞아 장차 國主로 삼기를 원합니다”고 운운하였다. 조칙을 내려 “군대를 빌고 구원을 청하는 것을 옛날에 들었다. 위험에 빠진 것을 도와주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항상 법도에 나타나 있다. 百濟國이 곤궁에 빠져 와서 우리나라에 귀의하며 ‘본국에 화란이 있으나, 의지하여 알릴 곳이 없다. 창을 베고 자며 쓸개를 핥는다. 반드시 구원해 달라’고 멀리서 와 표를 올려 아뢰니 뜻을 빼앗기 어렵다. 장군들에게 나누어 명하여 여러 길로 함께 나아가게 하라. 구름처럼 모이고 번개처럼 움직여 함께 沙喙에 모여, 악한 무리들을 베고 저 위급한 나라를 도우라. 마땅히 有司들은 함께 참여하여 예를 갖추어 출발시켜 보내라”고 운운하였다[왕자 豊璋 및 처자와 그 숙부 忠勝 등을 보냈다. 그들이 떠난 때는 7년조에 보인다. 어떤 책에는 ”천황이 豊璋을 세워 왕을 삼았으며 塞上을 세워 輔로 삼고, 예를 갖추어 떠나 보냈다].

*12월 丁卯 초하루 庚寅 천황이 難波宮에 행차하였다. 천황은 福信이 청한 뜻에 따라 은혜롭게 筑紫에 행차하여 구원군을 보낼 것을 생각하고, 처음 이곳에 와서 여러 軍器를 갖추었다.

*이 해 百濟를 위해 장차 新羅를 정벌하려고 駿河國에 배를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배를) 다 만든 후 續麻郊에 끌어왔을 때, 그 밤중에 까닭없이 배의 머리와 꼬리가 흔들렸다. 뭇사람들이 마침내 패할 것을 알았다. 科野國에서 “파리떼가 서쪽으로 향해 巨坂을 날라서 지나갔는데, 크기가 10아름 쯤이고 높이는 하늘까지 닿았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군이 패배할 징조임을 알았다. 童謠가 있었는데, “まひらくつのくれつれをのへたをらふくのりかりがみわたとのりかみをのへたをらふくのりかりが甲子とわよとみをのへたをらふくのりかりが”라 하였다.

 

7년 정월 丁酉 초하루 丙寅 御船이 서쪽을 정벌하려고 비로소 바닷길로 나아갔다.

甲辰 御船이 大伯海에 이르렀다.

庚戌 御船이 伊豫熟田津의 石湯行宮에 머물렀다[熟田津은 우리나라에서는 儞枳柁豆(にきたつ)라 한다].

3월 丙申 초하루 庚申 御船이 돌아와 娜大津에 이르렀다. 磐瀨行宮에 머물렀다. 천황이 이곳의 이름을 바꾸어 長津이라 했다.

*여름 4월 百濟의 福信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그 왕자 糺解를 맞아가기를 청했다[釋 道顯의『日本世記』에서는 “百濟의 福信이 글을 올려 그 임금 糺解를 東朝(일본)에 구했다”고 하였다. 어떤 책에는 “4월에 천황이 朝倉宮으로 옮겼다”고 했다].

(5월) 丁巳 耽羅가 처음으로 왕자 阿波伎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伊吉博得의 書에서는 “신유년(661) 정월 25일에 돌아와 越州에 도착했다. 4월 1일에 越州로부터 길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왔다. 7일에 행렬이 檉岸山 남쪽에 도착했다. 8일 닭이 울 무렵에 서남풍을 타고 大海로 배를 몰았다. 바다에서 길을 잃어 표류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8박 9일만에 겨우 耽羅 섬에 도착했을 때 바로 섬사람 왕자 阿波伎 등 9명을 불러 위로하고, 함께 客船에 태워 천황의 조정에 바치게 했다. 5월 23일에 朝倉의 조정에 바치니, 耽羅가 조정에 들어온 것이 이 때에 시작되었다. 또 智興의 시중드는 하인인 東漢草直足嶋의 참소를 당해 사신 등이 총애하여 내리는 칙명을 받지 못했다. 사신 등이 원망하여 하늘의 신에게 아뢰니, 足嶋를 벼락쳐 죽였다. 당시 사람들이 ‘大倭 天神의 과보가 가깝다’고 하였다].

11월 壬辰 초하루 戊戌 천황이 죽었으므로, 飛鳥의 川原에 관을 안치했다. ···[『日本世記』에 “11월에 福信이 사로잡은 당나라 사람 續守言 등이 筑紫에 이르렀다”고 했다. 어떤 책에는 “辛酉年에 百濟의 佐平 福信이 바친 포로 106명을 近江國 墾田에 살게 했다”고 했다. 庚申年에 이미 福信이 唐의 포로를 바쳤다고 했으므로, 지금은 注로 두니 결정하라].

권 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卽位前紀 (齊明天皇 7년(661) 7월) 이 달 蘇將軍이 突厥 왕자 契苾加力 등과 수·륙 두 길로 高麗의 城 아래에 이르렀다. 皇太子가 長津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점차 바다 밖 軍政을 다스렸다.

8월 前將軍 大花下 阿曇比邏夫連·小花下 河邊百枝臣 등과 後將軍 大花下 阿倍引田比邏夫臣·大山上 物部連熊·大山上 守君大石 등으로 하여금 百濟를 구원하게 했다. 그리고 무기와 5곡을 보냈다[어떤 책에는 이 끝부분에 이어서 “따로 大山下 狹井連檳榔·小山下 秦造田來津으로 하여금 百濟를 지키게 했다”고 하였다].

9월 皇太子가 長津宮에서 織冠을 百濟 왕자 豊璋에게 주고, 또 多臣蔣敷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大山下 狹井連檳榔·小山下 秦造田來津을 보내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에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豊璋이 나라(백제)에 들어갈 때 福信이 맞이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12월 高麗가 말하기를 “오직 12월에만 高麗國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浿水가 얼어붙는다. 그러므로 唐의 군대가 雲車·衝輣으로 북과 징을 시끄럽게 치며 공격해 왔다. 高麗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唐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唐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 안고 곡을 하였다. (고려군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빼앗을 수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釋 道顯은 ‘(金)春秋의 뜻으로 말하면 바로 高麗를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으니 이 무렵 백제의 침입이 잦아 고통이 심했으므로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라 하였다.

이 해 ···또 日本에서 高麗를 구하러 간 軍의 장수들이 百濟 加巴利의 해안에 배를 대고 불을 피웠다. 재가 변해 구멍이 되어 작은 소리가 났는데 화살이 날며 우는 소리와 같았다. 어떤 사람이 “高麗·百濟가 끝내 망할 징조인가”라고 하였다.

 

원년 봄 정월 辛卯 초하루 丁巳 百濟의 佐平 鬼室福信에게 화살 10만개, 絲 500斤, 綿 1천 斤, 布 1천 端, 부드러운 가죽(韋) 1천 장, 볍씨(稻種) 3천 斛을 주었다.

3월 庚寅 초하루 癸巳 百濟王에게 布 300端을 주었다.

이 달 唐人과 新羅人이 高麗를 정벌했다. 高麗가 우리나라에 구원을 청했으므로 軍將을 보내 䟽留城에 웅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唐人들이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新羅가 서쪽 진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름 4월 쥐가 말 꼬리에 새끼를 낳았다. 釋 道顯이 점을 쳐 “北國의 사람들이 장차 南國에 의지할 것이다. 아마도 高麗가 망하고 日本에 속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5월 大將軍 大錦中 阿曇比邏夫連 등이 水軍 170척을 거느리고 豊璋 등을 백제국에 보내주었다. 칙명을 내려 “豊璋 등으로 하여금 그 왕위를 잇게 한다. 또 福信에게 金策을 주어 그 등을 두드려 위로하고 爵祿을 상으로 준다”고 하였다. 이 때에 豊璋 등은 福信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칙명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6월 己未 초하루 丙戌 百濟가 達率 萬智 등을 보내 調와 물건을 바쳤다.

겨울 12월 丙戌 초하루 百濟王 豊璋, 그 신하 佐平 福信 등은 狹井連[이름은 빠져 있다]·朴市田來津과 의논하기를 “이 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避城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朴市田來津이 혼자 나아가 “避城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州柔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避城에 도읍하였다.

이 해 百濟를 구원하기 위해 무기를 수리하고 선박을 갖추었으며, 軍粮을 비축하였다.

 

2년 봄 2월 乙酉 초하루 丙戌 百濟가 達率 金受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新羅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安德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州柔에 돌아와 살았으니, 田來津이 헤아린 바와 같았다.

이 달 佐平 福信이 唐의 포로 續守言 등을 올려 보냈다.

3월 前將軍 上毛野君稚子·間人連大蓋, 中將軍 巨勢神前臣譯語·三輪君根麻呂, 後將軍 阿倍引田臣比邏夫·大宅臣鎌柄을 보내 2만 7천 인을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했다.

여름 5월 癸丑 초하루 犬上君[이름은 빠져 있다]이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高麗에 알리고 돌아왔다. 石城에서 糺解(豊璋)를 보았는데 糺解가 福信의 罪를 말했다.

6월 前將軍 上毛野君稚子 등이 新羅의 沙鼻岐奴江 2개의 성을 빼앗았다. 百濟王 豊璋은 福信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이 때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 할 바를 알지 못했으므로 여러 신하에게 “福信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하고 물었다. 이에 達率 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福信이 곧 執得에게 침을 뱉으며 “썪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가을 8월 壬午 초하루 甲午 新羅는 百濟王이 자기의 훌륭한 장수를 목베었으므로 곧장 百濟에 들어가 먼저 州柔를 빼앗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百濟(왕)는 적이 계획한 바를 알고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듣건대 日本國에서 구원하러 온 장수인 廬原君臣이 씩씩한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미리 도모하기를 바란다. 나는 직접 가 白村에서 기다려 연회를 베풀고자 한다”고 하였다.

戊戌 적의 장수가 州柔에 이르러 그 王城을 에워쌌다. 唐의 軍將이 戰船 170척을 거느리고 白村江에 늘어섰다.

戊申 日本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唐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日本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唐은 굳게 진을 치고 지켰다.

己酉 日本의 장수들이 百濟王과 더불어 날씨를 살피지 않고 서로 “우리들이 선두를 다투어 싸운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 하였다. 다시 日本의 어지러운 隊伍와 中軍의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唐의 군대를 쳤다. 唐(의 선박들)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日本의) 官軍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朴市田來津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 때 百濟王 豊璋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高麗로 도망했다.

9월 辛亥 초하루 丁巳 百濟의 州柔城이 비로소 唐에 항복했다. 이 때 나라사람들이 서로 “州柔가 항복하였으니, 일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百濟의 이름이 오늘에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다만 데(弓+ 一)禮城에 가서 日本의 軍將들과 만나 서로 현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처음부터 枕服岐城에 있던 妻子들로 하여금 나라를 떠나려는 마음을 알게 하였다.

辛酉 牟데(弓+ 一)로 길을 떠났다.

甲戌 日本의 수군 및 佐平 余自信, 達率 木素貴子, 谷那晋首, 憶禮福留와 국민들이 데(弓+ 一)禮城에 이르렀다. 다음날 배를 띄워 비로소 日本으로 향했다.

 

3년(664) 3월 百濟王 善光王 등을 難波에 살게 했다.···

여름 5월 戊申 초하루 甲子 百濟에 주둔하고 있던 (唐의) 장군 劉仁願이 朝散大夫 郭務悰 등을 보내 表文을 담은 函을 올리고 물건을 바쳤다.

겨울 10월 乙亥 초하루 郭務悰 등을 떠나 보내라는 칙명을 선포했다. 이 날 中臣內臣이 沙門 智祥을 보내 郭務悰에게 물건을 하사하였다.

戊寅 郭務悰 등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달 高麗의 大臣 蓋金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들은 화합하기를 고기와 물과 같이하고 爵位를 다투지 말라.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웃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월 甲戌 초하루 乙酉 郭務悰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4년(665)( 봄 2월) 이 달 百濟國의 官位와 계급을 대조하였다. 그리고 佐平 福信의 공 때문에 鬼室集斯에게 小錦下를 제수했다[그 본래의 관위는 達率이다]. 다시 百濟의 백성 남녀 400여 인을 近江國 神前郡에서 살게 했다.

(3월) 이 달 神前郡의 百濟人에게 토지를 지급했다.

가을 8월 達率 答㶱春初를 보내 長門國에 성을 쌓게 했다. 達率 憶禮福留, 達率 四比福夫를 筑紫國에 보내 大野·椽 2城을 쌓았다. 耽羅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庚午 초하루 壬辰 唐이 朝散大夫 沂州司馬 上柱國 劉德高 등을 보냈다[等은 右戎衛郎將 上柱國 百濟禰軍, 朝散大夫 柱國 郭務悰을 말하는데 모두 254명

이다. 7월 28일에 對馬에 이르렀다. 9월 20일에 筑紫에 이르렀고, 22일 表가 든 函을 올렸다].

*11월 기사 초하루 신사 劉德高 등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12월 무술 초하루 신해 劉德高 등에게 물건을 하사했다.

*이 달 劉德高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5년(666) 봄 정월 戊辰 초하루 戊寅 高麗가 前部 能婁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이 날 耽羅가 왕자 姑如 등을 보내 貢物을 바쳤다.

여름 6월 乙未 초하루 戊戌 高麗의 前部 能婁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겨울 10월 甲午 초하루 己未 高麗가 臣 乙相 奄鄒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大使는 臣 乙相 奄鄒이고 副使는 達相遁, 二位 玄武若光 등이다].

이해 겨울 京都의 쥐들이 近江을 향해 옮겨 갔다. 百濟의 남녀 2천여 인이 東國에 살았는데, 승려와 속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癸亥年부터 3년 동안 모두 官食을 주었다. 倭漢 沙門 智由가 指南車를 바쳤다.

 

6년(667) 봄 2월 壬辰 초하루 戊午 ···이 날 皇孫 大田皇女를 능 앞의 묘에 장사지냈다. 高麗·百濟·新羅가 모두 장례지내는 길에 슬픔을 표했다.···

가을 7월 己未 초하루 己巳 耽羅가 佐平 椽磨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高麗의 大兄 男生이 (평양)성을 나와 나라를 순행하였다. 이 때 성 안의 두 동생이 옆에서 도와주던 士大夫들의 못된 말을 듣고 가로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男生이 唐으로 도망하여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기를 계획하였다.

11월 丁巳 초하루 乙丑 百濟에 주둔하고 있는 장군 劉仁願이 熊津都督府 熊山縣令 上柱國 司馬 法聰 등을 보내고, 大山下 境部連石績 등을 筑紫都督府에 보냈다.

己巳 司馬 法聰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小山下 伊吉連博德·大乙下 笠臣諸石을 送使로 삼았다.

윤11월 丁亥 초하루 丁酉 錦 14필, 纈 19필, 緋 24필, 紺布 24端, 桃染布 58端, 斧 26, 釤 64, 칼 62개를 椽磨 등에게 주었다.

 

7년(668) 여름 4월 乙卯 초하루 庚申 百濟가 末都師父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庚午 末都師父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가을 7월 高麗가 越의 길로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 풍랑이 거세었으므로 돌아갈 수 없었다.···

가을 9월 壬午 초하루 癸巳 新羅가 沙㖨(部) 汲飡 金東嚴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丁未 中臣內臣이 沙門 法辨·秦筆을 사신으로 삼아 新羅의 上臣 大角干 庾信에게 배 1척을 주고, 東嚴 등에게 딸려보냈다.

庚戌 布勢臣耳麻呂를 사신으로 삼아 新羅王에게 調을 운반하는 배 1척을 주고 東嚴 등에게 딸려보냈다.

겨울 10월 唐의 大將軍 英公이 高麗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高麗 仲牟王이 처음 건국했을 때 천 년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어머니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700년 정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나라가 망한 것은 700년의 끝에 해당한다.

11월 辛巳 초하루 新羅王에게 絹 50필, 綿 500근, 韋 100매를 하사하여 金東嚴 등에게 딸려 보냈다. 東嚴 등에게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乙酉 小山下 道守臣麻呂·吉士 小鮪를 新羅에 보냈다. 이 날 金東嚴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이 해 沙門 道行이 草薙劒을 훔쳐 新羅로 도망하다가, 도중에 바람과 비를 만나 길을 잃고 돌아왔다.

 

8년(669) 3월 己卯 초하루 己丑 耽羅가 왕자 久麻伎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丙申 耽羅의 왕에게 5곡의 종자를 주었다. 이 날 왕자 久麻伎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9월 丁丑 초하루 丁亥 新羅가 沙飡 督儒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이 해 ··· 또 佐平 餘自信·佐平 鬼室集斯 등 남녀 700여 인을 近江國 蒲生郡에 옮겨 살게 했다. 또 唐이 郭務悰 등 2천여 인을 보냈다.


9년(670) 가을 9월 辛未 초하루 阿曇連頰垂를 新羅에 보냈다.

 

10년(671) *(봄 정월 己亥 초하루) 丁未 高麗가 上部 大相 可婁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辛亥 百濟에 주둔하고 있는 장군 劉仁願이 李守眞 등을 보내 표를 올렸다.

이 달 大錦下를 佐平 余自信·沙宅紹明[法官의 大輔이다]에게, 小錦下를 鬼室集斯[學職頭이다]에게, 大山下를 達率 谷那晉首[兵法에 익숙하다]·木素貴子[兵法에 익숙하다]·憶禮福留[兵法에 익숙하다]·答㶱春初[兵法에 익숙하다]·㶱日比子贊婆羅金羅金須[藥을 안다]·鬼室集信[藥을 안다]에게, 小山上을 達率 德頂上[藥을 안다]·吉大尙[藥을 안다]·許率母[5經에 밝다]·角福牟[陰陽에 익숙하다]에게, 小山下를 다른 達率 등 50여 인에게 제수했다. 동요에 “귤의 열매는 각각 다른 가지에 열리나 구슬로 삼아 실에 꿸 때는 같은 한 실로 꿴다”라는 것이 있다.

2월 戊辰 초하루 庚寅 百濟가 臺久用善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6월 丙寅 초하루 己巳 百濟의 3部 使人이 청한 군사에 대해 선포했다.

庚辰 百濟가 羿眞子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이 달 ··· 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 따로 물소 1마리, 산닭(山鷄) 1마리를 바쳤다.

가을 7월 丙申 초하루 丙午 唐나라 사람 李守眞 등이 百濟의 使人 등과 함께 마치고 돌아갔다.

8월 乙丑 초하루 丁卯 高麗의 上部 大相 可婁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겨울 10월 甲子 초하루 庚午 新羅가 沙飡 金萬物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11월 甲午 초하루 癸卯 對馬國司가 사신을 筑紫의 大宰府에 보내 “이달 2일에 沙門 道久·筑紫君薩野馬·韓嶋勝娑婆·布師首磐 4인이 唐으로부터 와서 ‘唐의 사신 郭務悰 등 600인, 送使 沙宅孫登 등 1400인 모두 합해 2000인이 배 47척에 타고, 함께 比知嶋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지금 우리들이 사람과 배의 수가 많아 갑자기 그 곳(일본)에 도착하면 아마도 그 곳을 지키는 防人들이 놀라 활을 쏘며 싸우려 할 것이라 여겨, 이에 沙門 道久 등을 보내 미리 와서 조공하는 뜻을 아룁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壬戌 ···이 날 新羅王에게 絹 50필, 絁 50필, 綿 1000근, 韋 100매를 주었다.

(12월 癸亥 초하루) 己卯 신라에서 調를 바치러 온 사신 沙飡 金萬物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권 28 天渟中原瀛眞人天皇 上 天武天皇

 

원년(673) 봄 3월 壬辰 초하루 己酉 內小七位 阿曇連稻敷를 筑紫에 보내 (天智)천황의 죽음을 郭務悰 등에게 알렸다. 이에 郭務悰 등이 모두 喪服을 입고 세 번 슬픔을 나타내는 예를 행하고 동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壬子 郭務悰 등이 두 번 절하고 國書가 든 함과 信物을 바쳤다.

여름 5월 辛卯 초하루 壬寅 갑옷과 활, 화살을 郭務悰 등에게 주었다. 이 날 郭務悰 등에게 준 물건은 모두 합해 絁 1673필, 布 2852端, 綿 666근이었다.

(여름 5월 辛卯 초하루) 戊午 高麗가 前部의 富加抃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庚申 郭務悰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6월 辛酉 초하루) 己丑 천황이 和蹔에 가서 高市皇子에게 명해 군인들을 호령하게 했다. 천황이 다시 野上에 돌아와 머물렀다. 이 날 大伴連吹負가 몰래 留守司 坂上直熊毛와 의논하고 한두 명의 漢直들에게 “내가 高市皇子를 사칭하고 수십 騎를 데리고 飛鳥寺의 북쪽 길로 나아가 군영에 도착하면 너희들이 내응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百濟의 집에서 무기를 정비하고 남문으로 나왔다.···천황이 크게 기뻐하여 吹負를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1월 戊子 초하루 辛亥 新羅의 사신 金押實 등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그 날 祿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12월) 戊午 초하루 壬申 배 1척을 新羅의 사신에게 주었다.

癸未 金押實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권 29 天渟中原瀛眞人天皇 天武天皇 下

 

2년(674) 윤6월 乙酉 초하루 庚寅 大錦下 百濟沙宅昭明이 죽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밝은 슬기를 지녀 당시 사람들이 秀才라고 칭하였다. 이에 천황이 놀라며 은혜를 베풀어 外小紫位를 추증하고 本國의 大佐平의 위계도 거듭 추증하였다.

壬辰 耽羅가 왕자 久麻藝·都羅·宇麻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己亥 新羅가 韓阿飡 金承元, 阿飡 金祇山, 大舍 霜雪 등을 보내 등극을 축하했다. 아울러 一吉飡 金薩儒, 韓奈末 金池山 등을 보내 天智天皇의 喪을 조문하였다[혹은 調를 바치러 온 사신이라고 하였다]. 그 送使 貴干寶·眞毛가 承元과 薩儒를 筑紫에까지 호송하였다.

戊申 貴干 寶 등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고 祿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곧 筑紫로부터 나라로 돌아갔다.

(가을 8월 甲申 초하루)癸卯 高麗가 上部의 位頭大兄 邯子·前部 大兄 碩干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新羅는 韓奈末 金利益을 보내 高麗의 사신을 筑紫에까지 호송하였다.

戊申 등극을 축하하는 사신 金承元 등의 中客 이상 27인을 서울에 불렀다. 그리고 大宰에 명하여 耽羅의 사신에게 조칙을 내려 “天皇이 새로이 천하를 평정하고 처음 즉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축하하는 사신 이외에는 부르지 않는 것은 너희들이 직접 본 바이다. 또 날씨가 춥고 물결이 험해지니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면 도리어 너희들의 근심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빨리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국왕과 사신 久麻藝 등에게 처음으로 작위를 주었다. 그 爵은 大乙上이었고 또 錦繡로 장식하였는데, 그 나라의 佐平의 관위에 해당한다.곧 筑紫에서 귀국하였다.

9월 癸丑 초하루 庚辰 金承元 등에게 難波에서 연회를 베풀었다.여러가지 음악을 연주하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겨울 11월 壬子 초하루 金承元이 마치고 돌아갔다.

壬申 高麗의 邯子와 新羅의 薩儒 등에게 筑紫大郡에서 연회를 베풀고 각각 祿을 차등있게 주었다.

 

3년(675) 봄 정월 辛亥 초하루 庚申 百濟王 昌成이 죽었다. 小紫位를 추증하였다.

 

4년(676) 봄 정월 丙午 초하루 大學寮의 여러 學生, 陰陽寮, 外藥寮 및 舍衛의 딸, 墮羅의 딸, 百濟王 善光, 新羅의 仕丁 등이 藥과 진기한 물건 등을 바쳤다.

(2월) 이 달 新羅가 왕자 忠元, 大監 級飡 金比蘇, 大監 奈末 金天沖, 第監 大麻 朴武摩, 第監 大舍 金洛水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그 送使 奈末 金風那, 奈末 金孝福이 왕자 忠元을 筑紫에까지 호송했다.

(3월 乙巳 초하루)戊午 金風那 등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그들은) 곧 筑紫로부터 돌아갔다.

(3월) 이 달 高麗가 大兄 富干, 大兄 多武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新羅는 級飡 朴勤修, 大奈末 金美賀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여름 4월) 이 달 新羅의 왕자 忠元이 難波에 이르렀다.

가을 7월 癸卯 초하루 己酉 小錦上 大伴連國麻呂를 大使로 삼고, 小錦下 三宅吉士入石을 副使로 삼아 新羅에 보냈다.

8월 壬申 초하루 耽羅에서 調를 바치러 온 사신인 왕자 久麻伎가 筑紫에 이르렀다.

丙申 忠元이 예를 마치고 돌아갔다. 難波에서 배를 출발하였다.

己亥 新羅와 高麗 두 나라에서 調를 바치러 온 사신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고 차등있게 祿을 주었다.

9월 壬寅 초하루 戊辰 耽羅의 王인 姑如가 難波에 이르렀다.

 

5년(677) 2월 庚午 초하루 癸巳 耽羅의 사신에게 배 1척을 주었다.

이 달 大伴連國摩呂 등이 新羅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7월 丁卯 초하루) 甲戌 耽羅의 사신이 돌아갔다.

(겨울 10월 乙未 초하루) 甲辰 大乙上 物部連摩呂를 大使로 삼고, 大乙中 山背直百足을 小使로 삼아 新羅에 보냈다.

(11월 乙丑 초하루) 丁卯 新羅가 沙飡 金淸平을 보내 國政을 물었다. 아울러 汲飡 金好儒, 弟監 大舍 金欽吉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그 送使 奈末 被珍那, 副使 奈末 好福이 淸平 등을 筑紫에까지 호송하였다.

이 달 肅愼의 7인이 淸平 등을 따라 이르렀다.

丁亥 高麗가 大使인 後部의 主簿 阿于, 副使인 前部의 大兄 德富를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新羅는 大奈末 金楊原을 보내 高麗의 사신을 筑紫에까지 호송하였다.

 

6년(678) 2월 癸巳 초하루 物部連摩呂가 新羅로부터 이르렀다.

3월 癸亥 초하루 辛巳 新羅의 사신 淸平과 이하의 사신 13인을 서울에 불렀다.

(여름 4월 壬辰 초하루) 乙巳 送使 珍那 등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그들은) 곧 筑紫에서 돌아갔다.

(5월 壬戌 초하루) 甲子 大博士 百濟人 率母에게 칙명으로 大山下의 관위를 주었다. 인하여 30戶를 봉하였다.···

戊辰 新羅人 阿飡 朴刺破와 그의 從者 3인, 승려 3인이 표류하여 血鹿嶋에 도착하였다.

(8월 辛卯 초하루) 丁巳 金淸平이 귀국하였다. 표류해 온 朴刺破 등도 淸平 등에게 딸려 본토로 돌려 보냈다.

戊午 耽羅가 왕자 都羅를 보내 조공하였다.

 

7년(679) (봄 정월 戊午 초하루) 己卯 耽羅人이 서울로 향했다.

이 해 新羅의 送使 奈末 加良井山, 奈末 金紅世가 筑紫에 도착해서 “新羅王이 汲飡 金消勿, 大奈末 金世世 등을 보내 올해의 調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臣 井山을 보내 消勿 등을 호송하게 했는데, 바다 가운데에서 함께 폭풍을 만나 消勿 등은 모두 흩어져 간 곳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井山 (저 혼자)만 겨우 해안에 도착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消勿 등은 끝내 오지 않았다.

 

8년(680) 봄 정월 壬午 초하루 丙戌 新羅의 送使 加良井山, 金紅世 등이 서울로 향했다.

2월 壬子 초하루 高麗가 上部의 大相 桓父, 下部의 大相 師需婁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인하여 新羅가 奈末 甘勿那를 보내 桓父 등을 筑紫에까지 호송하였다.

9월 戊寅 초하루 癸巳 新羅에 보냈던 사신 등이 돌아와 조정에 인사하였다.

庚子 高麗에 보냈던 사신과 耽羅에 보냈던 사신들이 돌아와 함께 조정에 인사하였다.

(겨울 10월 戊申 초하루) 甲子 新羅가 阿飡 金項那, 沙飡 薩라(艸+纍)生을 보내 조공하였다. 調로 바친 물건은 金·銀·鐵·鼎·錦·絹·布·皮·말·개·노새·駱駝 따위의 10여 종이었다. 또 따로 바친 물건이 있었다. 天皇·皇后·太子에게 金·銀·칼·旗 따위를 바친 것도 각각 많았다.

 

9년(681) (2월 丙午 초하루) 壬申 新羅의 仕丁 8인이 본토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풀어 祿을 차등있게 주었다.

(여름 4월 乙巳 초하루) 己巳 新羅의 사신 項那 등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고 각각 차등 있게 祿을 주었다.

(5월 乙亥 초하루) 丁亥 高麗가 南部의 大使 卯問, 西部의 大兄 俊德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新羅가 大奈末 考那를 보내 高麗의 사신 卯問 등을 筑紫에까지 호송하였다.

6월 甲辰 초하루 戊申 新羅의 사신 項那 등이 귀국하였다.

(11월 壬申 초하루)乙亥 高麗人 19명이 본토로 돌아갔다. 이들은 後岡本天皇(齊明天皇)의 상을 당하자 조문하러 온 사신들로 머물러 있다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乙未 新羅가 沙飡 金若弼, 大奈末 金原升을 보내 調를 바쳤다. (日本)말을 익힌 자 세 사람도 若弼을 따라 왔다.

 

10년(682)(여름 4월 己亥 초하루) 乙卯 高麗의 사신 卯問 등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고 祿을 차등있게 주었다.

(5월 己巳 초하루) 甲午 高麗의 卯問이 돌아갔다.

6월 己亥 초하루 癸卯 新羅의 사신 若弼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고 祿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가을 7월 戊辰 초하루) 辛未 小錦下 采女臣竹羅를 大使로 삼고, 當摩公楯을 小使로 삼아 新羅國에 보냈다. 이 날 小錦下 佐伯連廣足을 大使로 삼고, 小墾田臣麻呂를 小使로 삼아 高麗國에 보냈다.

(8월 丁卯 초하루) 丙子 三韓의 사람들에게 조칙을 내려 “과거에 10년 간의 調稅를 면제해 주었는데, 이미 (그 기간이) 끝났다. 또 더하여 귀화한 첫 해에 함게 온 자손도 아울러 役의 부과를 모두 면제한다”고 하였다.

丙戌 ···이 날 若弼이 귀국하였다.

9월 丁酉 초하루 己亥 高麗·新羅에 보낸 사신들이 함께 와서 조정에 인사했다.

(겨울 10월 丙寅 초하루) 乙酉 新羅가 沙喙(部)의 一吉飡 金忠平, 大奈末 金壹世를 보내 調를 바쳤다. 金·銀·銅·鐵·錦·絹·사슴 가죽, 細布(가는 베) 따위가 각각 많았다. 따로 天皇·皇后·太子에게 바친 金·銀·霞錦·幡·皮 따위도 각각 많았다.

이 달 ···新羅의 사신이 와서 “국왕이 돌아가셨다”고 알렸다.

12월 乙丑 초하루 甲戌 小錦下 河邊臣子首를 筑紫에 보내 新羅의 사신 忠平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11년(683) (봄 정월 乙未 초하루) 乙巳 金忠平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2월 甲子 초하루 乙亥 金忠平이 귀국하였다.

(5월 癸巳 초하루) 戊申 高麗에 보냈던 大使 佐伯連廣足, 小使 小墾田臣麻呂 등이 천황이 계신 곳에서 사신 다녀온 일을 아뢰었다.

6월 壬戌 초하루 高麗王이 下部의 助有 卦婁毛切와 大古昻加를 보내 方物을 바쳤다. 新羅가 大那末 金釋起를 보내 高麗의 사신을 筑紫까지 호송하였다.

(8월 壬戌 초하루) 甲子 高麗의 사신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12년(684) (봄 정월 己丑 초하루) 丙午 ··· 이 날 小墾田의 儛와 高麗·百濟·新羅 3국의 음악을 조정에서 연주했다.

(가을 7월)이 달 처음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가물었다. 百濟의 승려 道藏이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왔다.

(9월 乙酉 초하루) 丁未 倭直·栗隈首···百濟造·語造, 모두 38氏에게 姓을 하사하여 連이라 했다.

겨울 10월 乙卯 초하루 己未 三宅吉士·草壁吉士·伯耆造·船史·壹伎史·娑羅羅馬飼造·菟野馬飼造···阿直史·高市縣主·磯城縣主·鏡作造, 모두 14氏에게 姓을 하사하여 連이라 했다.

(11월 甲申 초하루) 丙申 新羅가 沙飡 金主山, 大那末 金長志를 보내 調를 바쳤다.

 

13년(685) 2월 癸丑 초하루 丙子 金主山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3월 癸未 초하루) 乙巳 金主山이 귀국하였다.

(여름 4월 壬子 초하루) 辛未 小錦下 高向臣麻呂를 大使로 삼고, 小山下 都努臣牛甘을 小使로 삼아 新羅에 보냈다.

5월 辛亥 초하루 甲子 귀화해 온 百濟의 僧尼 및 속인, 남녀 합해 23인을 모두 武藏國에 안치했다.

戊寅 三輪引田君難波麻呂를 大使로 삼고, 桑原連人足을 小使로 삼아 高麗에 보냈다.

(겨울 10월 己卯 초하루) 辛巳 ···이 날 縣犬養連手繈을 大使로 삼고, 川原連加尼를 小使로 삼아 耽羅에 보냈다.

(12월 戊寅 초하루) 癸未 唐에 보냈던 學生 土師宿禰甥·白猪史寶然과 百濟의 戰役 때 唐의 포로가 된 사람인 猪使連子首·筑紫三宅連得許가 新羅를 거쳐 왔다. 新羅는 大那末 金物儒를 보내 甥 등을 筑紫까지 호송하였다.

 

14년(686) 2월 丁丑 초하루 庚辰 唐人, 百濟人, 高麗人 모두 147인에게 작위를 주었다.

3월 丙午 초하루 己未 金物儒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그는) 바로 筑紫에서 돌아갔다. 그리고 표류해 온 신라인 7口를 物儒에게 딸려 돌아가게 했다.

(여름 4월 丙子 초하루) 壬辰 新羅人 金主山이 돌아갔다.

(5월 丙午 초하루) 辛未 高向朝臣麻呂·都努朝臣牛飼 등이 新羅로부터 돌아왔다. 그리고 學問僧 觀常·靈觀이 따라 왔다. 新羅王이 물건을 바쳤는데, 말 2필,개 3마리, 鸚鵡 2마리, 까치 2마리와 여러가지 물건이었다.

(8월 甲戌 초하루) 癸巳 耽羅에 보낸 사신들이 돌아왔다.

(9월 甲辰 초하루) 癸亥 高麗國에 보낸 사신들이 돌아왔다.

庚午 귀화해 온 高麗人들에게 祿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겨울 10월 癸酉 초하루 丙子 百濟의 승려 常輝에게 30戶를 봉했는데, 이 승려는 나이가 100세였다.

庚辰 百濟의 승려 法藏과 優婆塞 益田直金鍾을 美濃에 보내 白朮을 달이게 했다. 그것을 인하여 絁·綿·布를 주었다.

(11월 癸卯 초하루) 丙寅 法藏法師와 金鍾이 白朮 달인 것을 바쳤다. 이 날 천황을 위해 招魂祭를 지냈다.

己巳 新羅가 波珍飡 金智祥과 大阿飡 金健勳을 보내 정치를 물었다. 그리고 調를 바쳤다.

 

朱鳥 원년(686) 봄 정월 壬寅 초하루 癸卯 ···이 날 攝津國 사람 百濟新興이 白馬瑙를 바쳤다.

이 달 新羅의 金智祥에게 연회를 베풀기 위해 淨廣肆 川內王·直廣參 大伴宿禰安麻呂·直大肆 藤原朝臣大嶋·直廣肆 境部宿禰제(魚+制)魚·直廣肆 穗積朝臣蟲麻呂 등을 筑紫에 보냈다.

*(여름 4월 庚午 초하루) 壬午 新羅의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기 위해 川原寺의 伎樂을 筑紫에 옮겼다. 그리고 皇后宮의 私稻 5천 束을 川原寺에 바쳤다.

*戊子 新羅가 바친 調를 筑紫에서 올려 보냈는데, 細馬 1마리, 노새 1마리, 개 2마리, 조각한 금 그릇과 金·銀, 霞錦·綾羅, 虎豹皮, 藥物 따위와 100여 종이었다. 또 智祥과 健勳 등은 따로 물건을 바쳤는데, 金·銀, 霞錦·綾羅, 金器, 屛風, 鞍皮, 絹布, 藥物 따위 각 60여 종이었다. 따로 皇后·皇太子와 여러 親王들에게 바친 물건도 각각 많았다.

5월 庚子 초하루 戊申 ···이 날 侍醫인 百濟人 億仁이 병이 들어 죽으려 하므로, 勤大壹位를 제수하고 100戶를 봉했다.

戊辰 金智祥 등에게 筑紫에서 연회를 베풀고 祿을 각각 차등 있게 주었다. (그들은) 곧 筑紫에서 물러갔다.

(9월 戊戌 초하루) 丁卯 ···이 날 百濟王良虞가 百濟王善光을 대신하여 祭文을 지었다.

 

권 30 高天原廣野姬天皇 持統天皇

 

卽位前紀 朱鳥 원년(686) 겨울 10월 戊辰 초하루 己巳 皇子 大津이 반란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皇子 大津을 체포하고 아울러 皇子 大津을 잘못 인도한 直廣肆 八口朝臣音橿, 小山下 壹伎連博德과 大舍人 中臣朝臣臣麻呂, 巨勢朝臣多益須, 新羅의 沙門 行心 및 帳內礪杵道作 등 30여 인을 체포했다.

丙申 ···또 조서를 내려 “新羅의 沙門 行心이 皇子 大津이 반란을 꾀하는데 참여했으나, 짐이 차마 법을 더 적용하지 못하겠다. 飛驒國의 伽藍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윤12월 筑紫의 大宰가 高麗·百濟·新羅 3國의 남녀 百姓과 僧尼 62명을 바쳤다. 持統天皇 원년(687) (봄 정월 丙寅 초하루) 甲申 直廣肆 田中朝臣法麻呂와 大貳守君예(艸+刈)田 등으로 하여금 新羅에 사신으로 가서 天皇의 喪을 알리게 했다.

3월 乙丑 초하루 己卯 投化한 高麗人 56명을 常陸國에 살게 했다. 땅을 나누어 주고 곡식을 주어 生業에 편안히 종사하게 했다.

丙戌 투화한 新羅人 14명을 下毛野國에 살게 했다. 땅을 나누어 주고 곡식을 주어 生業에 편안히 종사하게 했다.

여름 4월 甲午 초하루 癸卯 筑紫의 大宰가 투화한 新羅의 僧尼와 남녀 백성 22명을 바치니, 武藏國에 살게 했다. 땅을 나누어 주고 곡식을 주어 生業에 편안히 종사하게 했다.

(9월 壬戌 초하루) 甲申 新羅가 왕자 金霜林, 級飡 金薩慕와 級飡 金仁述, 大舍 蘇陽信 등을 보내 國政을 아뢰고 또 調賦를 바쳤다. 學問僧 智隆이 따라 왔다. 筑紫의 大宰가 바로 천황의 죽음을 霜林 등에게 알리니, 그날로 霜林 등이 모두 喪服을 입고 동쪽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세 번 哭을 하였다.

12월 辛卯 초하루 庚子 直廣參 路眞人迹見을 新羅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칙사로 삼았다.

 

2년(688) (봄 정월 庚申 초하루) 壬午 천황이 돌아가셨음을 新羅의 金霜林 등에게 조칙으로 말하니, 金霜林 등이 세 번 哭을 하였다.

2월 庚寅 초하루 辛卯 大宰가 新羅의 調賦를 바쳤는데, 金·銀·絹·布, 가죽, 구리, 철 따위의 10여 가지였으며, 아울러 따로 바친 불상과 여러가지 채색 비단, 새·말 따위 10여 가지, 그리고 霜林이 바친 金·銀·彩色, 여러가지 진기한 물건 등 80여 가지 물건이었다.

己亥 霜林 등에게 筑紫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戊午 霜林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5월 戊午 초하루 乙丑 百濟의 敬須德那利를 甲斐國에 옮겼다.

(가을 7월 丁巳 초하루) 丙子 百濟의 沙門 道藏에게 명해 비가 내리기를 청하도록 했다. 오전이 지나지 않아 온 나라에 비가 두루 왔다.

(8월 丁亥 초하루) 辛亥 耽羅의 왕이 佐平 加羅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9월 丙辰 초하루 戊寅 耽羅의 佐平 加羅 등에게 筑紫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3년((689) (봄 정월 甲寅 초하루) 辛酉 新羅에 갔던 사신 田中朝臣法麻呂 등이 新羅로부터 돌아왔다.

여름 4월 癸未 초하루 庚寅 투화한 新羅人을 下毛野에 살게 했다.

壬寅 新羅가 級飡 金道那 등을 보내 瀛眞人天皇(天武天皇)의 죽음에 조문하고 아울러 學問僧 明聰·觀智 등을 보냈다. 따로 金銅阿彌陀像·金銅觀世音菩薩像·大勢至菩薩像 각 1軀와 綵帛·錦·綾을 바쳤다.

5월 癸丑 초하루 甲戌 土師宿禰根麻呂에게 명해 新羅의 弔使 級飡 金道那 등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太政官의 卿 등이 칙명을 받들어 2년에 田中朝臣法麻呂 등을 보내 大行天皇(天武天皇)의 죽음을 알렸다. 당시에 新羅人이 말하기를 ‘新羅의 칙명을 받드는 사람은 원래 蘇判의 지위에 있는 사람을 썼다. 이제 다시 그렇게 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法麻呂 등이 천황의 죽음을 알리는 조서를 선포하지 못하였다. 만약 그 전의 일을 말하자면, 옛날 難波宮治天下天皇(孝德天皇)이 돌아가셨을 때 巨勢稻持 등을 보내 喪을 알리던 날에 翳飡 金春秋가 칙명을 받들었다. 그런데 蘇判으로 하여금 칙명을 받들게 했다는 것은 이전의 일에 어긋난다. 또 近江宮治天下天皇(天智天皇)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一吉飡 金薩儒를 보내 조문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級飡을 보내 조문하니, 또한 이전의 일에 어긋난다. 또 新羅가 원래 ‘우리나라는 日本의 먼 조상 때부터 배를 나란히 하고 노를 말리지 않으며 받드는 나라가 되었습니다’고 아뢰었는데, 지금은 1척의 배 뿐이니 또한 옛 법도에 어긋난다. 또 ‘日本의 먼 조상 때부터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었습니다’고 아뢰었는데, 충성을 다하여 본래의 직분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깨끗한 마음을 해쳐 거짓되이 요행히 잘 보이기를 구하였다. 그러므로 調賦와 따로 바친 것들은 모두 封해 돌려보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먼 조상 때부터 너희들에게 널리 자비를 끼친 덕은 끊어서는 안될 것이니,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하며 두려워하며 그 職任을 거행하여 법도를 따른다면 조정에서 다시 널리 자비롭게 대할 것이다. 너 道那 등은 이제 칙명을 받들어 너희 왕에게 잘 말하라”고 하였다.

(6월 壬午 초하루) 辛丑 筑紫의 大宰 粟田眞人朝臣 등에게 명령하여 學問僧 明聰·觀智 등이 新羅의 師友에게 보낼 綿 각 140斤을 주었다.

乙巳 筑紫의 小郡에서 新羅의 조문사 金道那 등에게 (연회를) 베풀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가을 7월 壬子 초하루 ··· 이 날 新羅의 조문사 金道那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4년(690) (2월 戊申 초하루) 戊午 新羅의 沙門 詮吉과 級飡 北助知 등 50명이 귀화하였다.

壬申 귀화한 新羅의 韓奈末 許滿 등 12명을 武藏國에 살게 했다.

(5월 丙子 초하루) 乙酉 百濟의 남녀 21명이 귀화했다.

(8월 乙巳 초하루) 乙卯 귀화한 新羅人들을 下毛野國에 살게 했다.

(9월 乙亥 초하루) 丁酉 唐에 갔던 學問僧 智宗·義德·淨願과 軍丁인 筑紫國 上陽咩郡의 사람 大伴部博麻가 新羅의 送使 大奈麻 金高訓 등을 따라 돌아와 筑紫에 이르렀다.

(겨울 10월 甲辰 초하루) 戊午 사자를 보내 筑紫의 大宰 河內王 등에게 조서를 내려 “新羅의 送使 大奈麻 金高訓 등에게 연회를 베풀되, 學生 土師宿禰 등을 보내주었던 送使의 예에 따르라. 그들을 위로하여 물건을 주는 것은 한결같이 조서에 의거하라”고 하였다

乙丑 軍丁인 筑後國의 上陽咩郡人 大伴部博麻에게 조서를 내려 “天豊財重日足姬天皇(齊明天皇) 7년 百濟를 구원하기 위한 싸움에서, 너는 唐軍의 포로가 되었다. 天明開別天皇(天智天皇) 3년에 이르러 土師連富杼·氷連老·筑紫君薩夜麻 ·弓削連元寶의 아들 등 4명이 唐나라 사람들이 꾀하는 바를 아뢰려고 생각했지만, 옷과 식량이 없었기 때문에 이룰 수 없음을 걱정하였다. 이 때 博麻가 土師富杼 등에게 ‘나는 너희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옷과 식량이 없기 때문에 함께 갈 수 가 없다. 원컨대 내 몸을 팔아 옷과 식량에 충당하라’고 하였다. 富杼 등이 博麻의 계책에 따라 조정에 돌아올 수 있었다. 너 홀로 다른나라에 머문 것이 지금까지 30년이었다. 짐은 (그대가) 조정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며 자신을 팔아 충성을 드러낸 것을 아름답게 여겨 務大肆 및 絁 5필, 綿 10屯, 布 30端, 稻 1천 束, 水田 4町을 준다. 그 水田은 증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며, 3族의 課役을 면제하여 그 공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11월 甲戌 초하루 庚辰 送使 金高訓 등에게 상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12월 癸卯 초하루 乙巳 送使 金高訓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5년(691) (봄 정월 癸酉 초하루) 己卯 公卿에게 음식과 의상을 주었다. 正廣肆 百濟王余禪廣, 直大肆 遠寶·良虞·南典에게는 넉넉히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乙酉 封을 더해주었는데, 皇子高市는 2,000戶로 앞의 것과 합하면 3,000호 ···正廣肆百濟王禪廣은 100호로 앞의 것과 합하면 200호, 直大壹布勢御主人朝臣과 大伴御行宿禰는 80호로 전과 합하면 300호이다. 그 나머지 사람에게도 封을 더해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여름 4월 辛丑 초하루 ···大學博士 上村主 百濟大稅에게 1천束을 주어 학업을 권면하였다.

5월 辛未 초하루 辛卯 百濟淳武微子의 壬申年의 공을 포상하여 直大參을 주었다. 그리고 絁·布를 주었다.

9월 己巳 초하루 壬申 音博士인 唐나라 사람 續守言·薩弘恪, 書博士인 百濟 사람 末士善信에게 은 20兩을 사람마다 주었다.

? 12월 戊戌 초하루 己亥 醫博士 務大參德自珍, 呪禁博士 木素丁武·沙宅萬首에게 사람마다 은 20兩을 주었다.

 

6년(692) 2월 丁酉 초하루 丁未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3월 3일을 맞아 伊勢에 가려고 하니, 이 뜻을 잘 알아 옷과 물건들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陰陽博士 沙門 法藏과 道基에게 은 20兩을 주었다.

겨울 10월 壬戌 초하루 壬申 山田史御形에게 務廣肆를 제수했다. (그는) 전에 沙門이 되어 新羅에서 학문을 배웠다.

11월 辛卯 초하루 戊戌 新羅가 級飡 朴億德·金深薩 등을 보내 調를 바쳤다. 新羅에 보내는 사신 直廣肆 息長眞人老·務大貳 川內忌寸連 등에게 祿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辛丑 新羅의 朴憶德에게 難波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祿을 주었다.

(12월 辛酉 초하루) 甲申 大夫 등을 보내 新羅의 調를 伊勢, 住吉, 紀伊, 大倭, 菟名足 5社에 바쳤다.

 

7년(693) (봄 정월 辛卯 초하루) 乙巳 正廣參을 百濟王善光에게 추증하고 아울러 賻儀 물건을 주었다.

2월 庚申 초하루 壬戌 新羅가 沙飡 金江南과 韓奈麻 金陽元 등을 보내, 와서 왕의 喪을 알렸다.

己丑 표류해 온 新羅人 牟子毛禮 등 37명을 憶德 등에게 딸려 주었다.

(3월 庚寅 초하루) 甲午 大學博士 勤廣貳 上村主百濟에게 食封 30戶를 주었다. 儒道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乙巳 新羅에 보내는 사신 直廣肆 息長眞人老·勤大貳 大伴宿禰子君 등과 學問僧 辨通·神叡 등에게 絁·綿·布를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또 新羅王에게 부의 물건을 주었다.

6월 己未 초하루 高麗의 沙門 福嘉에게 조서를 내려 환속시켰다.

(11월 丙戌 초하루) 壬辰 耽羅의 王子와 佐平 등에게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8년(694) (3월 甲申 초하루) 己亥 조서를 내려 “7년 계사년에 醴泉이 近江國 益須郡 都賀山에서 솟았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益須寺에 머물러 묵으며 치료하여 차도가 있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 醴泉을 징험한 사람인 葛野羽衝과 百濟土羅羅女에게 각각 絁 2필, 布 10端, 鍬 10口를 주었다.

 

9년(695) 3월 戊申 초하루 己酉 新羅가 王子 金良琳, 補命 薩飡 朴强國 등과 韓奈麻 金周漢, 金忠仙 등을 보내 國政을 아뢰었다. 또 調와 물건을 바쳤다.

(가을 7월 丙午 초하루) 辛未 新羅에 보내는 사신 直廣肆 小野朝臣毛野, 務大貳 伊吉連博德 등에게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9월 乙巳 초하루) 庚戌 小野朝臣毛野 등이 新羅를 향해 출발했다.

 

10년(696) (봄 정월 甲辰 초하루) 甲寅 直大肆를 百濟王南典에게 제수했다.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시아역사  (0) 2009.05.22
베트남역사연표(일본측 쟈료)  (0) 2009.05.11
러시아역사연표(중문)  (0) 2009.02.14
미국역사지도  (0) 2009.01.14
소련의 영토확장도  (0) 2009.01.0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