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벽화
고대인들은 현실세계와 사후세계가 같다고 인식하였다.
현실세계의 집을 양택, 사후세계의 집을 음택이라고 불렀다..
무덤을 살아있을 때와 비슷한 집구조로 만들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 산이므로 산 모양으로 만들었음
예) 이집트 피라미드, 경주 고분
나중에 현실과 사후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음
무덤의 크기는 죽은사람을 권위와 재위년도에 비례함
*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바다에 던지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덤을 만드는 국력낭비를 막지 위함이다.
* 고려시대는 불교숭상으로 무덤의 의미가 없어지고, 조선시대는 검소를 강조한 사회였으므로 고분이 작아짐
* 이집트의 무덤의 크기는 왕의권력과 재위기간에 비례함
* 이집트는 고왕국시대에 피라미드를 만듬. 이후에는 만들지 않고 동굴에 시체를 두고 신전을 따로 만들었음
삼국의 고분의 양식
고구려 : 돌방무덤(석실분), 방이크다, 중국 북조와 가까이 지냄
백제 : 돌방무덤(석실분), 고구려에서 나왔으므로 고구려와 비슷, 이후에 중국남조의 영향으로 벽돌무덤(적축분)
벽돌무덤의 대표적인 예) 무녕왕릉 : 벽돌자체에 문양을 넣어서 쌓아 올림
무녕왕릉 벽돌무덤 : 벽돌자체에 문양을 넣어서 쌓아올림
신라 :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각분)
관(館)< 곽(槨) < 실(室) 크기의 순서이다. 신라는 경우에는 관으로 곽을 올리고 곽안에 순장품을 넣었음 (따라서 자작나무껍질로 그림, 토우을 넣음)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구조임. 이것은 신라만의 특이한 구조이다. 따라서 벽화가 없었고 도굴의 가능성이 매우 적었음
* 신라 진흥왕이 순장제도를 금지하였음
* 한반도의 중심은 한강이였음.... 나라의 국력은 인구수에 비례함.. 한강주변엔 비옥한 농토와 물로 인하여 인구수가 많았음
따라서 서울지역을 점령한 국가가 중요
고구려 고분벽화
제작기법 : 벽이나 천정에 직접그리는 조벽지법, 벽면에 회칠을 하여 고르게 한 후에 그리는 화장지법으로 구분
화장지법은 습지벽화법(프레스코법), 회분이 마른 후 그위에 그리는 건지벽화법(세코법) 이 있음
주제와 내용
- 벽면에는 현실세계 묘사(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도)
장식무늬는 불교의 극락정토를 의미하는 연꽃무늬, 동심원 무늬, 보륜무늬, 인동무늬 등이 혼합적으로 사용
사신도는 사방의 방위신으로 무덤 안에 그려질때에 동: 좌청룡 서:우백호, 남:전주작, 북 : 후현무 순서로 그려진다.
- 천정에 그려진 벽화의 주제는 천상의 세계를 의미한다.
천정에 그려진 주제는 하늘나라 상징, 불교계통, 도교계동으로 구분됨
하늘나라 상징(해:삼족오, 달:두꺼비, 별자리, 선인, 천인)
불교계통 : 연꽃문, 여래와 보살, 비천과 기악천 등 도교계통 : 용, 기린, 학등을 탄 선인과 불로초, 신선 등 이상향을 표현
고구려 전기 (3세기 말~ 5세기 초)
- 대표적인 무덤 :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
- 68자의 묵서명 절대연대인 357년
- 천정은 말각조법, 주인공의 내외 초상이 그려져 있음
- 행렬도, 생활도, 부엌, 창고 등이 그려 있음
덕흥리 고분
- 공적생활 공간을 표현한 전실
(초상화와 내조하례도)
- 사적공간을 표현한 널방인 후실
중기(5세기 중엽~ 6세기 초)
대표적인 무덤 : 쌍영총, 각저총, 무용총
쌍영총
- 기둥이 2개, 사신도가 장식문양으로 등장, 불교적 요소 가미
각저총
- 씨름하는 그림으로 두 역사의 힘과 동작을 잘 표현
무용총
- 느린템포의 춤동작을 표현하였음
- 신분에 따라 인물의 크기가 다름
- 고구려는 기마민족의 기질로 매우 역동적임.. 따라서 북한은 매우 동적이며, 남한 정적임
후기(6세기 중엽 ~ 7세기 전반)
대표적인 무덤 : 강서대묘, 진파리 1호분, 통구사신총
강서대묘
- 동물 그림이 실체가 아니라 초현실적인 존재로 표현 (사신도)
- 청룡, 현무(몸의 거북이, 얼굴은 뱀)이 매우 역동적임
- 연꽃문양, 인동무늬가 있음
- 현실과 사후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
진파리 1호분
- 수하현무도 (나무 아래있는 현무그림)
통구사신총
- 통구 사신초는 거북과 그것을 휘감고 있는 뱀의 뒤틀린 몸을 동적으로 표현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
1. 힘차고 율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고구려 회화는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되는데 고구려적인 특징은 6세기경부터 현저, 후기인7세기에 절정
3. 천정은 영혼의 세계 즉 천상의 세계로 묘사, 벽면은 현실세계 묘사
* 백제의 고분벽화는 고루려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고구려에 비해 부드럽고 세련되었으며, 완만한 동감을 보여주고 있음
고구려는 매우 역동적이다.
백제는 매우 세련되었다. 먹는 것이 풍부해지면 사람들은 여유로워 진다. 우아함이 있다.
신라는 신비롭다 촌스럽다. 선진문명(중국)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음...
평안도 지역의 고분벽화
황해도 지역의 고분벽화
평양 지역의 고분벽화
중국집안 지역의 고분벽화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 장군총
고구려 장군총의 전경. 고구려 옛 수도 집안에 있는
장군총은 초기 피라미드형과 아주 유사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1호분
장천 1호분 전실 서쪽벽을 가득 채웠던 생활풍속도 부분.
`두차례의 도굴로 고구려 생활사 연구의 보고라던 장천1호분 전실 벽화들이
완전히 뜯겨져 나가 백지상태가 됐다`고 지안시 박물관 관계자들이 밝혔다.
중국 지안시 장천1호분 벽화 중 전실의 귀부인 나들이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1고분 삼삭형 천장 받침돌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 1호분 전실 왼쪽 벽의 생활 풍속도.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묘실 정면의 천장으로 올라가는 부분.
탑 모양으로 차츰 좁혀 올라가는 다섯개의 계단에 온 세상을 담은 듯,
각종 동식물과 인물 형상이 가득 그려져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벽화에 등장하는 수렵도.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밑 층급받침돌 벽화의 용을 탄
신선도와 태양의 상징인 세발 까마귀, 소머리 형상을 한 농사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의 벽화 그림.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천장 벽화중에 말 그림.
오른쪽에 세계의 선으로 연결된 것은 별이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고구려인들의 습속을 그린
그림의 한 장면인데 화살촉이 석류처럼 생겼다.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①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밑 층급받침돌 벽화의 용을 탄
신선도와 태양의 상징인 세발 까마귀, 소머리 형상을 한 농사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천장 받침돌 그림.
학과 용을 타고 승천하는 신선과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묘실 벽면의 부채를 든 귀부인의 인물도.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받침돌의 용그림.
용의 몸뚱아리가 적-황-청의 보색대비로 그려져있으며 비늘은 지금도 선명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②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묘실 천장 받침돌에 그려져있는 달의 신.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수레바퀴 만드는 신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하늘을 나는 신선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고구려 벽화 중 `해의 신.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 천장 밭침돌 벽화에 등장하는 농사의 신.
소머리에 벼이삭을 들고 질주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의 묘실 천장과 계단식 천장받침돌 벽화.
오회분 4-5호묘는 사신총과 함께 7세기 고분에 속한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의 묘실 입구로부터 묘실 전체를 담은 사진.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배치상태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①
삼실총 제1실 남쪽벽의 행렬도.
삼실총 제1실 천장 고임면에 있는 주작(남쪽을 지키는 신) 그림.
도굴당한 뒤 고분 입구에 두껍게 시멘트를 바른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삼실총의 최근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벽화의 신수 백호의
머리 부분과 용의 몸통부분이 결합된 형상.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에 삼실총에 나오는 새 그림.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②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고구려 여인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인물상.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제3실 서쪽 입구 벽의 역사(力士)상.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긴 칼을 찬 무장이 묘실의
무덤 주인을 보호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남자 인물상.
11명으로 구성된 행렬도의 10번째 위치하는 것으로 봐서 평민으로 보인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평민 복장 여인.
오늘날의 애교머리를 닮은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재미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는 고구려 평민들의 전형적인 복식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총의 묘실에서 연도 쪽을 바라다 본 면의 그림.
삼각형 천장 받침대가 만나는 부분을 귀면 판석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전형적 옷차림의 고구려여인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의 벽화.
쪽구들에 앉은 부인들과 맨바닥에 의자를 놓고 걸터앉은
남편이 상위에 차린 음식을 즐기며 담소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묘실 왼족 벽면의 말과 마부.
말의 등에는 안장이 놓여있고 마부의 손엔 채찍이 들려있다.
서역인과 고구려인이 씨름하는 모습을 그린 각저총 벽화.
[고구려 고분벽화] 북한 송죽리 고분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1600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인의 모습.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훼손으로 인해 주위는 떨어져나갔다.
[고구려 고분벽화] 쌍영총
평남 남포시 쌍영총의 8각기둥과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1호분
황해도 안악 제1호분 벽화의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덕흥리 고분
평남 대동군 덕흥리 고분의 주두.
현재 북한에 있는 덕흥리 고분 전실 벽화.왼쪽에 묘지 주인공이
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방에 앉아 있는 보습을 그렸다.
위에는 주인공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이름이 진이고,
요동태수와 유주 자사 등을 지냈으며 77세에 죽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
현재 북한에 있는 안악 3호분의 마구간 그림.
주인공의 생활 면모를 그린 동쪽 측실 벽화 가운데 하나다.
마구간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대륙을 달리던 고구려인들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수산리고분 현실 북쪽 벽에 그려진 귀신 얼굴모양 부채.
묘지 주인공 부부의 시종들이 들고 있던 것으로, 부채
혹은 햇빛가리개의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귀신밑으로 S자 비슷한 손잡이까지 달려있는 것이 특징.
고구려 벽화에서 보는 유일한 형태이다.
안악 3호분 전실 동쪽 벽면에 있는 수박놀이하는 역사(力士) 그림.
상투를 머리 뒤로 묶고 아랫도리 일부만을 가린채 금방이라도 한번 맞붙을 기세다.
역사들의 체구와 몸짓을 다소 희화적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고구려 안악 3호묘 왕비복식
고구려 유물들 ①
금동여래입상
평양 동암리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복그림일부로 보이는 파편조각.
고구려 유물.
일본 나라 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된 고구려 승려 화가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법륭사 금당벽화 비천도 진본.
서기 756년 일왕 성무(聖武) 사후 작성된 법륭사 헌물장의 일부.
왼쪽에서 네번째 줄 아랫부분에 '고구려 비단(高麗錦)'이란 구절이 보인다.
고구려 유물들 ②
1940년 평양에서 병기창공사를 하던 중 발견한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상'(왼쪽)과
6세기쯤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반가사유상'
1998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흉상.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 주거지로 추정되는
마리아노브카 토성에서 나온 삽 등 철제 유물들
옛 고구려 영토였던 중국 동북평원의 왼쪽에 위치한
대싱안링의 고구려시대 흔적인 돌절구.
일제 어용학자들이 식민사관에 근거로 이용한 광개토대왕비,
일본인들이 비문을 조작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복제품 진품운 평양박물관
경복궁내 신축한 국립중앙박물관이 1996년 12월 13일 개관을 앞두고 6일 미리 공개됐다.
사진은 고구려실에 전시한 금동투조장식 복제품.
진품은 평양 진파리 1호분에서 발굴돼 현재 평양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높이 14cm, 너비 23cm. 고구려하면 대륙적이고 강인한 것만을 연상하지만,
이 유물은 고구려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을 지닌 국가였는가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보장왕21년(서기662년)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평양 부근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을 격파했다.
고구려 소수림왕의 삽화.
갑주를 입은 고구려 보병의 복장을 고증을 거쳐 재현한 모습.
부부의 緣은 이승까진가… 덩그러니 독수공방>
서역에서 온 불승(佛僧)으로 보이는 2명의 손님을 접대하는
묘 주인의 모습이 그려진 중국 지린성 지안현의 무용총 안칸 안쪽 벽의 벽화.
왼쪽 2명이 불승이고 가운데 시중드는 작은 남자를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묘 주인이다.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안악 2호분 안칸 북벽 벽화 배치도.
특이하게도 남편은 보이지 않고 안주인만 등장한다.
묘주인의 생활상을 그린 중국 지린성 지안현 장천 1호분 앞칸 왼쪽 벽화.
가운데 큰 나무 아래에서 벌어지는 축제에는 남자들만 등장한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고분 벽화
구고려 옛 수도 만주 집안현 부근의 고분군
평양 부근의 고분군
고구려의 무덤벽화는 중국의 돌방 무덤이 새롭게 도입됨에 따라 나타나게 되었는데 판석으로 된 벽면에 그리는 것이었다. 원래 회벽에 그리는 것이나 후에는 돌면위에 직접 그리는 것들도 나타났으며 회를 사용한 경우보다 보존 상태가 좋다. 고구려 벽화는 현재 80여기에 이르고 있는데(집안 지역 20기, 평양 및 안악 지역 65기) 한 무덤 안에 수많은 장면이 있다. 무덤벽화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풍물과 의식세계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복식의 표현이나 풍속의 표현 등은 우리의 옛 문화 전통을 살피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벽화를 그리는 방법에는 벽에 직접 그리는 조벽지법(粗壁地法)과 회칠을 하여 벽면을 고른 후 그리는 화장지법 (化粧地法)이 있다. 초기와 중기에 만들어진 벽화는 화장지법 중 회가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습지벽화법(프레스코법)으로 그려져 세월이 흘러도 처음의 명도와 채도가 잘 유지되는 효과를 지닌다. 반면 후기에 만들어진 벽화는 조벽지법으로 그려져 선명도는 매우 높으나 외부 공기에 노출되거나 습기의 침투를 받으면 안료가 탈색되는 경향이 있어 이미 발굴된 고분 벽화의 경우 보존상의 문제가 있다. 채색 안료로는 녹청석, 군청석, 진사, 자토, 황토, 금과 같은 광물질을 물에 개어 썼다.
굴식 돌방 무덤 측면도
안악 3호분 평면도
초기 고분은 여러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벽화가 그려지는 전형적인 무덤들은 대체로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굴식 돌방 무덤이다. 이런 무덤 속의 연도(현실로 이르는 통로길)와 현실 벽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측면 모사도. 무덤은 죽은자가 거처하는 집이다.
모줄임 천장 구조. 돔 형식의 무덤은 못만들고 대신 천장을 차츰 줄여서 천장을 좁혀나갔다.
발해의 고분들도 고구려와 유사한 모줄임 천장 구조를 갖고 있어서 발해 문화가 고구려를 계승한 증거로 삼는다.
초기의 돌무지 무덤에서는 벽화가 그려지지 않았다. 사진에서와 같은 전형적인 돌무지무덤은 그림을 그릴 벽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군총처럼 돌을 반듯하게 깎아 만든 돌무지무덤의 경우는 현실에 벽화를 그릴 수 있는 여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 즉 돌무지 무덤의 경우는 거의 벽화가 없다고 보면 된다.
안악 3호분 주인공 그림
묘실의 구조가 웅장하고 벽화의 내용이 풍부하며 기년 묵서(紀年 墨書)가 씌여져 있어 고분의 축조 시기와 벽화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이 고분은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전망이 좋은 구릉 지대의 등마루에 자리 잡고 있다. 분구는 방대형이고 크기는 남북의 길이가 약 33m, 동서의 길이가 약 30m, 높이 약 6m이다. 묘실은 잘 다듬어진 돌을 써서 반지하에 축조하였는데, 방형의 연실(연室), 방형의 전실(前室), 전실의 동서에 달린 두 칸의 장방형 측실(側室), 방형의 현실(玄室), ㄱ자 모양으로 된 회랑(回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묘실로 들어가는 연실 입구는 큰 판석으로 막았다.
안악 3호분. 묘주도
벽화 주제로 생활 풍습이 크게 유행하는 5세기 전반까지는 신분과 계급에 따라 사람의 크기와 복장이 뚜렷이 구분된다. 묘주인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들의 크기가 주인의 8분의 1에 불과하게 표현된 경우도 있으며 입은 옷의 무늬와 빛깔의 다양성, 소매나 가랑이의 너비와 길이 등이 사람마다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생활 풍속도가 쇠퇴하는 5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람 크기에 의한 신분 계급적 표현은 약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그림은 얼굴은 넓고 길며 진한 눈썹이 높게 붙고 가늘고 긴 눈매와 긴 콧등, 잘 다스려진 팔자 수염을 가진 이 고분의 유일한 정면상이다. 정면상을 취한 것은 무덤 주인의 지위를 신격화한 의도로 생각된다. 주인공 초상 좌우에는 각각 2 명의 신하가 서 있는데 왼쪽 신하들 머리 위편에 기실(記室), 소사(小史)라는 붉은 글씨가 씌여 있고 오른쪽 신하들 위에는 성사(省史), 문하배(門下拜)라는 붉은 글씨가 씌여 있다.
수산리 고분. 주인공 부부
주인공 부부가 시종과 시녀를 거느리고 교예를 구경하고 있다. 중앙에서 왼쪽에는 시종이 받쳐 든 대가 굽은 박쥐 모양의 검은 양산 밑에 서서 교예를 구경하는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검은 색 관을 쓰고 깃?끝동?단에 검은 선을 붙인 누런 겉옷을 입었으며 팔자 수염?턱수염을 기른 둥근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다. 주인공 바로 뒤에 시동이 양산을 받쳐 들고 서 있으며 그 뒤에는 검은 긴 저고리에 점무늬 바지를 입은 시종이 뒤따르고 그 뒤에는 어린 시녀가 뒤에서 받쳐든 검은 양산 밑에 서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구경하는 주인공 부인이 그려져 있다. 신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정하다보니 시종이 들고 있는 양산이 너무 커 부담스럽다
이란 페르세폴리스 유적 (기원전 5~6세기)
몸의 크기를 통해 위계 질서를 나타내고자 한 것은 고대 사회 유적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수산리 고분. 부인상
어린 시녀가 뒤에서 받쳐든 검은 양산 밑에 서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구경하는 주인공 부인이 그려져 있다. 부인은 큰 머리를 하고 풍만한 둥근 얼굴에 붉은 점을 찍어서 화장을 하였으며 옷깃?도련?소매 끝에 무늬를 수놓은 붉은 선을 단 검은 긴저고리를 입고 그 밑에 색동치마를 입고 있다. 양산을 받쳐 든 앳된 소녀의 자연스러운 표정이 인상적이다.
우리 복식의 특징은 아한대성 기후로 삼한사온이 계속되는 자연조건과 북방 유목 민족인 계통의 문화 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무용총에 보면 저고리 소매와 바짓부리는 좁게 되어 있고 속옷부터 겉옷인 포(袍)에 이르기까지 여러겹 몸을 싸는 형식으로 아한대성 기후에 적합하게 되어 있으며, 계절에 따라 의복 재료를 달리하여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상체의 옷인 저고리와 하체의 옷인 바지와 치마가 떨어져 꽤 활동적이며, 앞쪽을 튼 카프탄 형식으로 북망 몽고인이 많이 입는 호복(胡服)계통의 옷이다.
기본 복식인 저고리는 남녀 상하가 모두 착용한 웃옷으로 길이는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통소매이며 저고리의 깃 여밈, 소맷부리, 도련 같은데에 선을 둘렀다. 저고리의 여밈은 처음에는 합임(合?)이다가 차츰 우임(右?)으로 고정되어 갔는데 이것이 우리 한복의 특징이다. 여밈의 정착에 띠를 썼다. 바지는 북방 유목 민족에게 꼭 필요했던 복식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착용하였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바지는 남녀 모두의 기본적인 하의로 겉옷이나 치마 아래에 입었다.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귀족 계급에서는 바지통이 넓고 긴 대구고를 입었고 하류층에서는 바지통이 좁고 길이가 짧은 궁고를 입었는데 노동복으로도 사용되었다. 치마는 저고리와는 달리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 치마 길이가 길며 끝단까지 길게 주름잡혀 있으며 색동치마가 벽화에 보인다. 이런 색동치마는 일본 다카마쓰 벽화에까지 보인다.
덕흥리 고분. 우교차 뒤를 따라가는 2 명의 여인의 옷도 색동치마이다.
다까마스 고분(高松塚) 벽화. 색동치마 입은 여인들
나라시대 다까마쓰 고분에 그려진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구려 벽화에서 나타났던 것과 유사한 색동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 문화와의 연관성을 추측해보게 한다.
안악 3호분. 주인공상
장방형 평상 위에 평좌를 틀고 앉아 있는 주인공은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붉은 맞섶 겉옷에 검은 띠를 띠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귀신 얼굴을 그린 갈색 털부채를 들고 있다.
주인공의 모자 복원
안악 3호분의 외관(外冠)은 백색의 거친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여서 왕만이 썼다는 백라관일 것으로 생각된다. 백라관은 내관을 완전히 덮는 형태가 아니라 내관의 후반부만을 덮는 커다란 상자 모양의 관모임을 알 수 있다. 감신총, 팔청리 고분에 그려진 주인공의 외관도 백라관으로 보이며 이와 유사한 형태의 관모로는 중국의 무관(武冠)이 있다. 이 백라관은 나중에 새장 (籠)모양과 같이 관모가 높고 깊어지는 농관(籠冠)으로 변한다.
안악 3호분 주인공의 도깨비 부채
수산리 고분의 유사한 부채
수산리 고분 벽화의 주인공 부부를 시중드는 시종들이 들고 있는 부채에도 도깨비 얼굴이 나타나 있다. 그 시대의 부채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안악 3호분, 부인상
장방 안 평상 위에 팔짱 끼고 앉아 있는 주인공의 부인은 큰 머리를 하고 윗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흰구름 당초 무늬를 놓은 자줏빛 긴 저고리에 누런 빛 끝동을 달았고 녹색선을 둘렀으며 소매에는 흰 한삼을 달아 손을 감추어지게 하였다. 밑에는 누렇게 보이는 긴 통치마에 잔주름을 잡아 붙인 치맛단이 보이며 옆으로 비스듬히 꿇어 앉은 데에 띠와 치마 고름 같은 것이 그 앞에 산란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묘주와는 달리 정면으로 그리지 않고 약간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그림을 그린 이가 귀부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관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묘주와는 달리 눈썹이 올라가고 볼과 턱에 살이 찐 풍만한 모습이며 눈과 입은 매우 작게 묘사되어 있다. 머리는 높게 올리고 끝을 땋아 둥근 테처럼 돌린 다음 양끝을 좌우로 늘어 뜨렸으며, 머리를 중간에서 졸라매고 거기서 좌우로 늘어뜨린 장식이 옆으로 내려와 있다. 머리에 꽂은 붉은 장식품이 이채롭다.
쌍영총. 부부상과 앞쪽의 신발 모습
삼국 이전에 이미 풀과 가죽을 이용한 신을 신었다. 고구려에서는 목이 짧은 이(履)와 신목이 길고 밑창이 두꺼운 화(靴)를 신었다. 쌍영총에서는 목이 긴 화가 보이며, 무용총 수렵도의 기마인은 백색화를 신고 있다.
이 그림에서 부부가 평상에 앉아 있고 그 평상 앞에 각각 화(靴)가 놓여 있는데 부인상 앞에 놓인 화는 측면을 보이게 했고 주인공상 앞에 놓인 것은 후측면을 보이게 했다. 화의 형태는 요즘의 반장화와 같은 형태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 계급은 화를 신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여자들의 코신 복원
가야. 신발 모양의 토기
집안 12호분. 적을 치는 무사와 그 모사도
철갑옷과 투구, 징 박은 신발, 창과 칼로 완전 무장한 고구려 무사가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못이 박힌 신발을 확인할 수 있다.
복원한 무사의 금동 신발
# 고구려 고분 벽화 자료는 명덕외고 박건호 선생이 전국역사교사모임을 통하여 발간한 [슬라이드 똑딱](1998년) 을 활용한 것입니다. 무단 복제하여 상업적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개인용 연구 성과물로 삼는 행위를 금합니다.
*Kamshin-ch'ong Tomb *Samshil-ch'ong Tomb *쌍영총
*Anak Tomb No.2 *Anank Tomb No.3 *오괴분 4호묘 *장천 1호분
예복 차림의 여자
얹은머리한 여자
푼기명머리한 여자
얹은머리한 여자
방아간
부엌
Wife
우물
달의 신
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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