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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작가 박경리

by 8866 2008. 7. 11.

소설가 박경리(朴景利1926.10.28∼20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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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류소설가. 경상남도 충무에서 출생.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했으나, 한국 전쟁 중 부군이 납북된 후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1955년 소설가 김동리에 의해 단편 <계산(計算)>,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이 [현대문학]에 추천, 등단하였다. 1957년부터 문학활동에 들어가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장편 <표류도(漂流島)> 등 문제작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1957년 부정과 악에 강렬한 고발 의식을 보여 준 <불신시대>를 발표하여 제3회 현대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여류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체로 한국 전쟁 때 남편을 잃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거나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전쟁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아들 작품에서는 전쟁 미망인들의 삶, 또는 그들의 눈을 통해 사회 현실의 훼손된 국면들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1959년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고독한 여인의 심적 방황을 그린 장편 소설 <표류도>를 발표하여 제3회 내성 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장편 소설의 집필에 주력하였다. 이후 <내 마음은 호수>, <은하>, <푸른 은하> 등의 신문 연재소설을 발표하는 한편, 1962년에는 전작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하였다. <김약국의 딸들>은 이전의 전쟁 미망인을 즐겨 등장시킨 자전적 사건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였고, 공간적 배경도 전쟁터가 아닌 통영으로 바뀌었으며, 제재와 기법면에서 다양한 변모를 보인 전환기적 작품이다.

   <김약국(金藥局)의 딸들>(1962) 이후,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확대해 나갔다. 1964년에는 한국 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생활인으로서의 시각과 전쟁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의 시각을 통해 예리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담은 전작 장편 <시장과 전장>을 간행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에 제2회 한국 여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가을에 온 여인>, <늪지대>, <타인들>, <환상의 시기>등을 연재하였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 동안 한국근대사를 겪어나가는 각개 인물들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부각시킨 대하소설 <토지(土地)>(집필기간 26년)를 써서 한국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972년 <토지>로 월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하동의 대지주 최 참판네 일가를 중심으로 한말에서부터 식민지 시대를 거쳐 조국 광복에 이르는 민족사의 변천을 형상화하고 있는 <토지>에서 보여주는 광대한 스케일과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관한 작가의 독특한 시각은 우리 소설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단편 <흑백 콤비의 구두> <하루> <단층(單層)>, 중편 <재혼의 조건>, 장편 <노을진 들녘> <파시(波市)> <신교수(申敎授)의 부인> 등과 시집 <못 떠나는 배>, 에세이집 <Q씨에게> 등이 있다. 인촌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742∼9 현거주지 주위에 박경리문학기념관이 있다. 시인 김지하는 그의 사위이다.

   현대문학신인상(1957), 내성(來成)문학상(1959), 한국여류문학상(1965년), 월탄문학상(1972), 인촌상(1990), 보관문화훈장, 칠레 가브링엘라밋트랄기념메달(1996), 금관문화훈장(2008) 수상.

 

【문학인생】

   민족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 <토지>의 작가. <토지>가 없는 한국 문학사를 상상해 보면, 박경리란 인물이 우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박경리의 어린 시절은 각박했다. 열네 살에 네 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해, 열여덟에 박경리를 낳은 아버지는 박경리가 태어나자마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런 아버지를 박경리가 좋아했을 리 없고, 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진주여고를 다닐 때는 학비를 보내주기로 했던 아버지가 학비 부담을 어머니에게 미루자, 아버지를 찾아가 따지다 맞은 일도 있다. '여자가 공불하면 뭣하나. 시집가면 그만이지' 하는 말에, '당신이 공부시켰어요? 그만두라 마라 할 수 있습니까?'라고 서슴없이 '당신'이라 부르며 대들자, 아버지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박경리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문학은 그 시절 박경리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자 희망이었다. 책을 미칠 정도로 좋아해 누가 책방에 돌려주는 책이 있으면 싹싹 빌어서라도 책을 손에 넣고선 밤새 읽고 돌려주곤 했다. 하룻밤새 책 세 권을 읽고 새벽녘에 새빨개진 눈을 껌뻑거리던 기억도 생생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전매국에 근무하던 남편과 만나 결혼해 어두웠던 가정사의 그늘에서 벗어나는가 했으나, 그 남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고, 6ㆍ25 때 월북하면서 다시 홀로 되고 말았다. [평화신문]과 [서울신문]의 문화부 기자를 거치며, 기자가 부족해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던 그는 일년 뒤 힘들다는 이유로 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69년 <토지>를 집필하면서 그는 일년간 세상과 철저히 담을 쌓고 살았다. 원래 <토지>는 지금처럼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로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얘기를 토대로 한 권 분량으로 써서 탈고까지 마친 후에야 세상에 공개하기로 작정했던 작품이었다. 독하게 마음 먹고서 전화도 끊고 신문도 끊고 원고 청탁도 일체 받지 않은 채 원고지를 채워 나가던 그는, 그러나 어머니와 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가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했다.

   한 차례의 절필을 포함한 우여곡적 끝에 1994년에야 끝난 이 대장정은 원주시 단구동 옛 집에서 완성되었다. 1997년 이 지역이 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토지>의 산실이 헐릴 위기에 처하자, 문화계 및 지역인사들이 나서고 토지개발공사가 협조하여 3천평 짜리 '토지문학공원'으로 영구보존 되었다.

   여기에는 박경리가 <토지>를 써낸 커다란 앉은뱅이 책상이며, 글이 막힐 때면 건너가 괜히 뒤척거리던 '고추말리는 방', 기자가 오면 '빠꼼히' 내다보고 내쫓곤 하던 현관 바로 옆으로 난 창문 등 모든 공간과 가구가 쓰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외에도 그가 살던 집을 중심으로 <토지>의 작품무대인 경남 하동의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섬진강, 그리고 용두레벌(용정)이 작품 속 분위기 그대로 복원되어, '토지문학공원'을 구성하고 있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존엄을 침해받으면 견디지 못한다는 박경리는 이런 점에서 <토지>의 등장인물 중 최치수를 자신의 분신으로 꼽는다.

 

【경향】박경리는 장ㆍ단편소설을 많이 썼으며 삶의 본질을 비극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연보】

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시 명정리서 박수영(朴壽永)씨 장녀로 출생. 본명 박금이(朴今伊).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 졸업

1946년  1월 30일 김행도씨와 결혼. 딸 김영주씨 출생

1950년  12월 25일 남편과 사별

1955년  김동리의 눈에 띄어 8월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 추천.

1956년  단편 <흑흑백백> 추천, 등단

1957년  단편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1958년 [평화신문] 근무

1958년  첫 장편 <연가>를 [민주신보]에 연재, 단편 <벽지>, <암흑시대> 등 발표

1959년 [서울신문] 근무. 장편 <표류도>를 [현대문학]에 연재. 이 작품으로 제3회 내성문학상 수상.

1962년  전작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발표

1963년  장편 <파시> 연재

1965년  장편 <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 수상. 장편 <녹지대> 연재

1966년  단편 <집>, <인간>, <평면도>, 연작 <환상의 시기> 발표, 수필집 <Q씨에게>간행

1968년  단편 <우화>,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 발표

1969년  대하소설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 1969년 9월부터 1972년 9월까지

1970년  단편 <밀고자> 발표, 장편 <창> 연재

1972년  <토지> 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 수상. <토지> 2부를 [문학사상]에 연재. 1972년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1973년  4월 딸 영주씨, 시인 김지하와 결혼

1974년  장편 <단층> 발표

1977년  <토지> 3부를 [독서생활](1977년 1∼5월), [한국문학](1977년 6월∼1978년 1월)에 연재 수필집 <호수>, <거리의 악사>(민음사) 간행

1979년  <박경리 문학전집> 전16권(지식산업사) 간행

1980년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

1983년  <토지> 4부를 [정경문화]에 연재. 1983년 7∼12월

1985년  수필집 <원주통신>(지식산업사) 간행

1987년  <토지> 4부를 [월간경향]에 연재. 1987년8월∼1988년 5월

1988년  시집 <못 떠나는 배>(지식산업사) 간행

1990년  제4회 인촌상 수상.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동광출판사) 간행

1991년  8월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 시작

1992년  9월 1일부터 <토지> 5부를 [문화일보]에 연재 시작

1993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나남출판) 간행

1994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94년 집필 26년만인 8월 15일 <토지> 16권 탈고(脫稿).

1994년  <박경리의 원주통신-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문학선 <환상의 시기>, <가을에 온 여인> (나남출판) 간행. 10월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올해의 여성상' 수상. 12월 유네스코 서울위원회 '올해의 인물'로 선정

1995년  3월 연세대 원주캠퍼스 객원 교수로 임용.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현대문학사) 간행

1996년  3월 제6회 '호암상 예술상' 수상. 4월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기념 메달' 받음. 5월 토지문화재단 창립 발기인 대회

1997년  연세대학교 용재 석좌교수로 임용. 사단법인 토지문화관 이사장

1998년  토지문화관 착공, 1999년 6월 9일 개관

1999년  장편 <표류도>(나남출판) 간행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주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에 선정

2000년  시집 <우리들의 시간>(나남출판) 간행

2002년  1월 <토지> 재발간(전 21권. 나남출판)

2003년  1월 <만리장성의 나라> 재출간(나남출판). 1월 9년만의 신작소설 <나비야 청산가자> [현대문학] 4월호에 연재 시작(3차례 연재 후 중단. 원고지 440매 규모). 4월 문화와 환경전문 계간지 [숨소리] 창간(2004년 말 폐간). 7월 청소년용 <토지> 12권으로 완간(이룸). 7월 첫 장편동화 <은하수> 출간(이룸). 1960년에 쓴 장편 연애소설 <성녀와 마녀> 출간(인디북)

2005년  11월 팔순잔치

2007년  5월 만화가 오세영 작 만화 <토지> 7권 출간(마로니에북스) 5월 13년만의 신작 산문ㆍ소설집 <가설과 망상> 출간

2008년  3월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설> 등 신작시 3편 발표.

 

【시집】<못 떠나는 배>(1988.지식산업사) <도시의 고양이들>(1990.동광출판사) <우리들의 시간>(2000.나남출판)

 

【소설】<계산>(1955.현대문학) <흑흑백백>(1956.현대문학) <전도(剪刀)>(1957.현대문학) *<불신시대>(1957.현대문학 신인상 수상작) <영주(玲珠)와 고양이>(1957.현대문학) <벽지(僻地)>(1958.현대문학) <암흑시대>(1958.현대문학) <연가>(1958.민주신보.장편) <표류도>(1959.최초 장편.내성문학상 수상작.현대문학) <성녀(聖女)와 마녀(魔女)>(1961.장편.여원) <내 마음은 호수>(1961.장편.조선일보) *<김약국의 딸들>(1962.장편) <노을진 들녘>(1962.장편.경향신문) <가을에 온 여인>(1963.장편.한국일보) <재혼의 조건>(1963.중편.여상) *<시장과 전장>(1964.장편.현암사.여류문학상 수상작) <풍경A>(1964.현대문학) <풍경B>(1965.사상계) <흑백 콤비의 구두>(1965.신동아) <파시(波市)>(1965.장편.동아일보) <녹지대>(1965.장편) <환상의 시기(時期)>(1966.한국문학) <집>(1966) <인간>(1966) <평면도>(1966) <거리의 악사(樂士)>(1966) <신교수(申敎授)의 부인>(1967.장편.조선일보) <하루>(1967.사상계)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1968.월간문학) <우화>(1968) <밀고자>(1970) <창>(1970.장편) <단층>(1974.장편) <토지>(1969∼1994.대하소설.월탄문학상 수상작) <나비와 엉겅퀴 1>(1978)

 

【수필】<거리의 악사>(1977)

【수필집】<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1995) <기다리는 불안>(1966.현암사) <Q씨에게>(1966.현암사) <호수>(1970) <원주통신>(1985.지식산업사) <박경리의 원주통신: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1994) <우리들의 시간>(2000)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2003) <생명의 아픔>(2004)

【동화】<은하수>(2003.장편)

【기행문】<만리장성의 나라>(1990)

【작품집】<환상의 시기>(1994.나남출판) <가을에 온 여인>(1994.나남출판)

【전집】<박경리 문학전집>(1979.전16권.지식산업사)

【저서】<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1995.현대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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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다는 것은 고통> - 동아일보(1979. 11. 23)

   박경리는 작가가 된 것이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언가 얘기하고 싶고 답답하다 보니 쓰게 된 건데 후회는 안 하지만, 허무하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고달플 때 쉬고 싶다는 기분, 부엌일을 정신없이 한다든지 나무를 심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쓰지 않을 때도 항상 무거운 강박 관념에 쫓기는 게 이 생활이니까. 하지만 피나는 노력을 하고도 평가를 못 받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오히려 감사해야지요. 전력투구를 다 했나 하는 회의와 함께 아무튼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는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여건에서 여자가 소설가로 입신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가정을 가진 여성이 작품을 많이 못 쓰는 건 당연해요. 그런 점에서 박완서씨 같은 분은 참 용해요. 쉽지 않은 일인데, 언젠가 박재삼(朴在森)씨를 만났더니 날더러 결혼생활에 묻혔더라면 글을 못 썼을 거라고 해요.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성격이 외곬이 돼서 가정과 문필 생활은 양립하지 못했을 거라 믿습니다.”

   이 말 끝에 그는 예술가에게 원초적 고통과 가난의 의미를 부연했다. 쉬운 말로 고통은 작가의 밥이고 가난은 창작 행위의 추진력이라는 것이다. 평탄한 생애를 보낸 ‘멘델스존’의 음악이 아주 고우나 그건 드문 예이고 역시 격정을 호소하는 ‘베토벤’이랄지 간질병자였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강렬한 충격을 받는다. 예술가의 태반은 이런 영육(靈肉)의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이라는 견해다. 비록 한 인간으로서는 고달플지라도.

   데뷔 초기, 박경리도 가난했다. 고향 통영에서 살다 진주여고를 마치고 서울서 결혼, 5년만에 6ㆍ25를 만나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환도 후 다시 서울에서 은행원을 거쳐 [평화신문]과 [서울신문] 기자로 잠시 일했다. 운수업을 하던 부친은 피난지 부산에서 돌아가시고 이 무렵부터 어머니와 어린 딸을 데리고 자신이 완전히 가장이 되어 생활을 이끌어갔다. 원래는 누구에겐가 의지하는 성격이었는데, ‘운명적으로 맡겨진 역할’에 따라 기상도 강해지고, 못 하나 박는 일까지도 도맡아야 했다. 남자가 가면 한번으로 끝날 일도 여지이기 때문에 세 번 네 번 걸음을 해도 잘 안 되는 관청 일 따위로 심신이 피로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존심은 더 강해지고 모멸 당해서는 안되겠다는 의지를 키워 갔다.

   출세작인 <계산>이 [현대문학]에 발표된 게 이 무렵, 친구가 다리를 놓아줘서 알게 된 김동리의 추천이었다. 처음엔 발표하겠다는 뜻도 없이 쓴 시를 보였다. 그런데 시보다는 소설을 써 보라고 권유해서 <불안 지대>라는 단편을 썼고, 김동리가 이걸 <계산>으로 개제(改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표가 되었다.

   그 뒤 같은 [현대문학]에 쓴 <표류도>의 연재 고료만으로 생활했다.

   “애를 데리고 가난하게 살던 때라 방 한 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 시절이 정신적으로는 건강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고료는 많이 받아도 정신적으론 그때보다 좀 불건강한 것 같기도 하고...”(발췌)

 


<원주 토지문학공원 관광명소로 탈바꿈> - [연합뉴스](2008. 1. 2)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 씨의 옛 집터에 조성된 토지문학공원 일대가 문학 및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원주시는 1999년 단구동 일대 1만641㎡에 조성된 토지문학공원에 지난 해 모두 5만5천여명의 관람객이 찾아 2006년보다 1만1천여명이 증가했다고 2일 밝혔다. 토지문학공원은 박경리 선생의 집필도구 등을 기증받아 옛 집(211㎡) 1층에 집필실을 복원하고 2층에는 선생의 뜻에 따라 문인들의 사랑방을 마련했다. 특히 영상물을 상영할 수 있는 공간 등의 주제관을 설치해 박 선생의 삶과 문학정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자료전시관과 연못, 조경시설, 주차장, 휴식터를 비롯해 '토지'에 등장하는 평사리 마당과 홍이 동산 등을 조성해 문학공원으로 만들었다.

   시는 최근 토지문학공원 인근에 위치한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건물을 매입해 토지자료관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시는 3월 중 리모델링에 들어가 소설 토지의 완간 일인 8월 15일에 맞춰 준공할 계획인 토지자료관에는 1층은 기념품 구입처와 인터넷 부스, 자료보관실 등이 들어서고 2-3층은 토지와 관련한 사료, 영상물 등을 전시할 예정이다. 또 4층은 편안하게 책을 읽는 방으로 꾸미고 5층은 세미나와 강연회 등이 가능한 학습실로 활용할 방침이다.

   원주시 관계자는 "자료관이 설치되면 한국문단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토지'의 모든 것을 집대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일대를 박경리 선생의 문학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문학 및 관광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박경리 뇌졸중 입원..의식 불명> - [연합뉴스](2008. 4. 25)

   '토지'의 작가 박경리(82)씨가 뇌졸중과 지병 악화로 입원 치료 중이다. 25일 토지문화관 관계자과 지인 등에 따르면 박씨는 원주에 머물다 지난 4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박씨는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이나 병세가 다소 호전돼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최근 병실을 찾은 시인 이근배 씨는 "의식은 없지만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면 알아들으시는 것 같다고 가족들이 전했다"며 "상태가 다소 호전되긴 했으나 여전히 위중한 상태"라고 전했다. 박씨는 지난해 7월 폐암 판정을 받았지만 본인이 치료를 거부하고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요양하면서 지내왔다.

   박씨는 최근 월간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하기도 했다

 


<'토지' 작가 박경리씨 타계> - [연합뉴스](2008. 5. 5)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朴景利)씨가 5일 오후 2시45분께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2세.

   지난해 7월 폐암 선고를 받은 박씨는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투병하다 4월4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달 말 한 차례 고비를 겪은 후 의식불명 상태에서 산호 호흡기에 의존해 왔으며, 이날 오후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산소 호흡기가 제거된 뒤 곧 숨을 거뒀다.

   딸과 사위, 외손자들을 비롯해 소설가 박완서, 최일남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최유찬 연세대 교수, 김병익 문학과지성 상임고문, 이상만 정보문화사 사장 등이 임종을 지켜봤다.

   1926년 10월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씨는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이 소설가 김동리에 의해 추천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 [현대문학]에 <토지> 1부를 연재하기 시작한 후 [문학사상], [월간경향], [문화일보] 등으로 매체를 옮기며 1994년 8월 집필 25년만에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하소설 <토지> 전 5부를 탈고했다.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서울, 만주, 일본 등을 무대로 격동의 근대사를 살아가던 민중의 삶을 그린 <토지>는 한국 문학사의 가장 큰 수확으로 여겨진다.

   1980년부터 원주시 단구동,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했으며 1998년부터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왔다. <토지> 탈고 이후 9년만인 2003년 현대문학에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도 했으나 세 차례만 실은 채 미완으로 남겼다. 이후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만에 발표하며 시 창작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1950년 남편 김행도(金幸道)씨와 사별했으며 유족은 외동딸인 김영주(62)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67) 시인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5일 동안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씨는 "8일 오전 8시 영결식을 하고 원주로 가서 토지문화관에 들른 후 원주시 단구동 자택터인 토지문학공원에서 노제를 진행하고 이튿날 통영 장지에서 장례를 치를 것"이라고 밝혔다. 박씨는 이어 "거인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충격이 컸다"며 "정부에서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통영시측에서 미리 준비했던 산양읍 미륵산 기슭에 묻히게 된다.

 


<故 박경리의 굴곡 많은 생애> - [연합뉴스](2008. 5. 5)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박경리(朴景利) 소설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는 여인의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씨는 자신의 작품 속 여인들만큼이나 굴곡 많은 생애를 살았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박씨의 말처럼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문학을 단련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통영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19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金幸道)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곧 이어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고 외동딸 영주를 홀로 키우며 녹록지 않은 20대를 보낸다. 셋방살이를 하며 은행에 다녔던 박씨는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두세 편의 습작 시를 보여주는데 이때 시인은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후 김동리는 박씨에게 "시보다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여 쓴 단편 소설 <계산>이 김동리의 추천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8월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돼 본격적으로 등단한 후 한해 뒤인 1957년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주로 단편을 발표한 박씨는 1958년 첫 장편 <연가> 이후 <표류도>, <성녀와 마녀>,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굵직굵직한 소설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내성문학상, 한국여류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도 오르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한국 문학 최대 걸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하기 시작하는데 '토지' 1부를 집필할 무렵 그에게 시련이 잇따라 닥친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암과 사투를 벌여야했던 것. 1971년 9월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그는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병마를 이겨낸 후에는 사위 김지하 시인의 투옥으로 또 한번 마음고생을 겪는다. 그러나 어떤 시련도 창작에 대한 열정은 막지 못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 원고를 썼던 것이다. (중략)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1973년 토지 1부 자서)

   <토지>는 이후 [문학사상](2부), [주부생활], [독서생활], [한국문학](이상 3부), [마당], [정경문화], [월간경향](이상 4부) 등 여러 매체를 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 1994년 8월 문화일보를 통해 사반세기만에 전 5부로 완간됐다. 3부를 마친 후 1980년부터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강원도 원주로 근거지를 옮겨 마지막 순간까지 원주에 머물렀고, 1991년부터는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도 시작했다.

   <토지> 완간 이후에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는 작품 활동은 최소화한 채 토지문화관 건립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오랜 침묵 끝에 2003년 현대문학에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스스로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 이 소설은 건강 악화로 연재 세 차례 만에 원고지 440여 매 분량으로 중단돼 안타까움을 남겼다. 미완성 소설과 산문들을 묶어 지난해 13년 만에 새 작품집 <가설을 위한 망상>을 내놓은 박씨는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만에 발표하며 시 창작 의욕을 밝히기도 했으나 그 세 편의 시는 결국 박씨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됐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고인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예측했던게 아닐까.

   "그 세월, 옛날의 그집 / 그랬지 그랬었지 /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 중)

 


<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의 작품세계> - [연합뉴스](2008. 5. 5)

   - 출판인들이 뽑은 우리 나라 대표 소설가, 네티즌 선정 20세기를 가장 빛낸 여성, 독자들이 꼽은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

   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경리(朴景利)씨는 명실상부한 한국 문단의 큰 나무였다. 작가로서의 이러한 명성은 한국 문학의 최대 수확이라고 일컬어지는 '토지' 한편으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대작 <토지>의 육중한 무게에 다소 눌렸으나 토지를 전후해, 그리고 토지 사이사이 발표됐던 20여편의 장편 소설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도 문단에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는 "<토지>는 결코 평지돌출이 아니었다"며 "주제의식과 서술방법 그리고 작가적 역량의 면에서 <표류도>나 <김약국의 딸들>은 이미 <토지>의 출현을 예고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 단편과 <성녀와 마녀> : 박씨는 등단 초기 단편을 주로 쓰다 장편으로 옮겨갔는데 초기 작품들은 비교적 작가의 개인적 삶과 밀착돼 있다.

   최유찬 연세대 교수는 "<계산>, <불신시대> 등 초기 단편소설은 작가의 신변 문제나 생활 속의 부조리를 심리적 사실주의의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남매와 노모를 부양하는 여주인공 순영이 문학을 통해 상처를 달래는 내용의 초기 단편 <암흑시대>를 비롯해 초기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들이 주로 등장했다.

   작가가 쓴 첫 장편 연애소설로, 1960년 여성지 [여원]에 연재될 당시 파격적 자유연애 스토리로 화제를 모았던 <성녀와 마녀> 역시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과 개인적인 삶,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했던 박경리 초기 문학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부유하고 유망한 작곡가 수영이 자존심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 형숙과 자신만을 바로보는 정숙한 여자 하란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의 이 소설은 연재 당시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사실상 묻혀있다가 43년 만인 2003년에 첫 출간됐다.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작가는 새로운 질서와 도덕의 도래를 알면서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성녀와 마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를 통해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 세대와 세대의 갈등, 옛 도덕과 새 도덕 사이에서 겪어내는 분열증과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 박씨는 1960년대 많은 장편소설을 썼는데, 이중 연재가 아닌 전작 장편으로 출간됐던 <김약국의 딸들>(1962년)과 <시장과 전장>(1964년)은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은 1993년 재출간돼 다시 한번 인기를 끌었으며 2004년 TV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남 통영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약국의 딸들'은 김약국의 다섯 딸과 그의 아내 한실댁을 중심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성을 그린 작품이다.

   김만수 군산대 교수는 "김약국의 어떤 딸도 내 딸들이기에 소중하다는 것,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이 지극한 모성의 원리야말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일 것"이라며 "작가가 몰두한 생명운동의 근원을 '김약국의 딸들'에서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6ㆍ25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인 <시장과 전장>은 중학교 교사인 남지영과 남로당 당원인 하기훈의 이야기를 나란히 서술하면서 전쟁 속 개인들의 삶을 보여준 소설이다.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에 충실한 지영과 이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훈을 통해 이념을 위한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의 비애를 그려냈다. 최유찬 교수는 "이 작품은 남북 어느 한쪽의 시선에 기울지 않고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성과 외에 작가의 생명 사상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며 "전쟁이란 집단의 횡포 앞에서 유린되는 개인의 존엄과 행복, 그리고 그 억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싹트고 있는 생명의 싹이 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완성 <나비야 청산가자>와 시 : 토지 완간 이후 소설 창작을 중단했던 박씨는 2003년 9년 만에 신작 소설을 내놓았다.

   [현대문학] 4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나비야 청산가자>는 토지가 끝난 시점인 1945년 이후 50년의 세월을 그린 작품으로 박씨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던 작품이다.

   한 인터뷰에서 "지식인에게 전하는 나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표현하기도 한 이 작품은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연재 세 차례만에 원고지 440여 매 분량으로 중단됐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해연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농장에서 일했던 마름의 아들 석호와 결혼해 남남보다 먼 사이로 지내는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농장일꾼 정서방이 자신의 딸과 석호의 간통 현장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담아내려던 박씨의 시도는 안타깝게 미완성으로 끝난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우뚝 선 박씨였지만 첫 습작은 시로 시작했고 소설을 내놓는 간간이 시집을 묶어내기도 했다. <우리들의 시간> 등의 시집에 실린 진솔한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박씨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또 생태와 환경에 대한 애착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박씨가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한 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되면서, 공교롭게도 박씨의 문학 인생은 시로 시작해 시로 끝을 맺게 됐다.

 


<"한국문학의 큰 기둥 사라졌다"> - [연합뉴스](2008. 5. 5)

   5일 타계한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에는 첫 날부터 문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조문행렬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딸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 시인, 외손자 원보, 세희씨가 빈소를 지킨 가운데 박완서, 황석영, 박범신, 이근배, 이문재, 도종환, 공지영, 윤대녕, 조정래, 윤흥길, 백가흠, 천명관, 윤성희 등 문인들이 빈소를 찾아 애도의 뜻을 전했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 정몽준 국회의원, 양숙진 현대문학 주간, 최열 환경재단 대표,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김성훈 상지대 총장, 정창영 연세대 전 총장 등 각계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 씨는 "평화롭고 곱게 돌아가셨다"고 임종 당시를 전했다. 박씨는 "항상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이었다"고 고인을 회고하면서 "형님이자 어머니, 대선배였다"고 말했다 소설가 황석영 씨는 "한국문학의 큰 기둥이 사라졌다.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우리 후배들이 그 빈자리를 메워야하는데 그럴 수 있을 지 걱정"이라고 전했다. 황씨는 "선생님이 성격이 그렇게 편하신 분은 아닌데 나는 김지하 시인과의 인연도 있고 해서 사랑을 많이 받은 편"이라며 "토지문화관을 보면서 나도 그런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설가 공지영 씨는 "편안하게 가셔서 하나도 슬프지 않다"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공씨는 1996년 원주로 박씨를 찾아갔던 당시를 회고하며 "그때 책상 옆에 놓인 조그만 손재봉틀을 보여주시면서 문학에서 실패하면 삯바느질할 각오로 글을 쓴다고 말씀해주셨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공씨는 이어 "중학교 때 처음으로 토지 1부를 밤새워 읽은 이후 토지를 거의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었다"며 "작가되기 전부터 너무 좋아해서 작가된 이후 강석경 선배의 소개로 만났는데 둘 다 성격이 데면데면해서 항상 조심스러웠다가 이제야 당당하게 선생님을 찾아뵙는다"고 말했다. 도종환 시인은 "문학으로 한 생을 살아오신 어르신이고 다시 뵙기 힘든 어르신"이라며 "그 정신 이어받아 한 생애 다 바쳐 문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토지문화관에 4개월간 머물며 집필했던 소설가 천명관씨는 "박경리 선생님이 작가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싫어하셔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우리 같은 '객들'에게 손수 밥을 챙겨주시고 반찬을 만들어 내려보내주시던 마나님 같으신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소설가 조정래 씨는 "우리 문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신 분"이라며 "홍명희의 '임꺽정' 이후 대가 끊겼던 대하소설의 맥을 이어주셨다"고 평가했다. 조씨는 "선생님의 타계는 우리 문학계에도 큰 손실"이라며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후배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써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준 국회의원도 빈소를 찾아 "좀 더 건강하게 오래 사셨어야 했는데 안타깝다"며 "돌아가신 왕회장님이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셔서 자주 교류하셨다"고 전했다.

   문국현 의원은 "정말 큰 별이고 아직도 더 할일이 많으신데…"라고 아쉬움을 전하며 "생명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이 문학에서나 생활에서나 묻어나셨다"고 말했다. 일찍부터 빈소를 지킨 최열 환경재단 대표는 "박경리 선생님은 훌륭한 문인이시기도 하지만 넓게는 20세기의 생명사상가"라며 "박경리 선생님의 생명 사상을 기리는 상이나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피곤한 모습의 김지하 시인은 "이렇게들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 외에는 취재진들에게 말을 아낀 채 조문객들을 맞았다.

   이날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 한승수 국무총리,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 등도 화환을 통해 조의를 표했다.

 


<박경리 선생과 원주의 `인연'> - [연합뉴스](2008. 5. 5)

   박경리 선생이 30년 가까이 살아 온 원주는 대하소설 제목인 '토지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지난 1980년 원주시 단구동 742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한 선생은 1994년 8월 15일 이곳에서 '토지' 전 5부 16권을 탈고하는 26년에 걸친 집필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선생은 1980년 김지하 시인의 부인이자 딸인 김영주씨가 시댁이 있던 원주에서 어린 자식을 데리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는 고생을 하자 이를 도와주기 위해 내려와 단구동 한적한 곳에 텃밭과 집을 마련했다.

   이 집은 선생이 시내를 벗어나 흥업면 매지리의 양지 바른 산기슭에 토지문화관을 건립해 옮겨가면서 1999년 원주시가 인수해 31억원을 들여 토지문학공원을 조성하게 된다. 이 일대 1만641㎡에 조성된 토지문학공원은 선생의 집필도구 등을 기증받아 옛 집(211㎡) 1층에 집필실을 복원하고 2층에는 선생의 뜻에 따라 문인들의 사랑방을 마련했다. 특히 영상물을 상영할 수 있는 공간 등의 주제관을 설치해 박 선생의 삶과 문학정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자료전시관과 연못, 조경시설, 주차장, 휴식터를 비롯해 '토지'에 등장하는 평사리 마당과 홍이 동산 등을 조성해 문학공원으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지난 해 모두 5만5천여 명의 관람객이 찾는 등 명소로 자리잡았다. 시는 또 지난해 말에는 토지문학공원 인근에 위치한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건물을 14억6천만원에 매입해 리모델링을 거쳐 토지자료관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소설 <토지>의 완간일인 8월 15일에 맞춰 문을 열 계획인 토지자료관에는 1층은 기념품 구입처와 인터넷 부스, 자료보관실 등이 들어서고 2∼3층은 토지와 관련한 사료, 영상물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또 4층은 편안하게 책을 읽는 방으로 꾸미고 5층은 세미나와 강연회 등이 가능한 학습실로 활용할 방침이다. 선생은 1999년 6월 매지리에 지상 4층 규모의 토지문화관을 건립하고 후배 문학인에게 창작 및 집필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는 대회의실과 세미나실을 비롯해 야외무대와 26개의 집필실, 12개의 창작실을 갖추고 문인들이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선생은 2003년 토지문화관 옆에 5개의 창작실을 갖춘 매지사를 건립한데 이어 2006년에는 10개의 창작실을 갖춘 지상 2층 규모의 귀래관을 추가로 지어 예술 및 문학인에게 제공하고 있다.

   원주시는 이곳에서 매년 토요문학 강좌가 열리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문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창작 집필실 운영지원 사업 등을 통해 문학의 산실로 조성해 나갈 방침이다. 시는 또 토지문화관으로 이어지는 진입로 1㎞ 구간을 '박경리 길'로 지정하고 소설 1부 첫 장면과 5부 마지막 장면, 탈고일이 겹치는 8월 15일을 '토지의 날'로 제정하는 등 원주를 토지의 도시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원주시 관계자는 "토지자료관이 설치되면 한국문단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토지'의 모든 것을 집대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토지문학공원과 토지문화관 일대를 선생의 문학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문학 및 관광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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