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침 주력부대는 조선족 6만5천명
이 글은 중국에서 출생하여 한국전쟁 때 인민군 6사단에 복무했던
김중생 씨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김중생 씨는 현재 한국국적을 올리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6.25 남침의 주력부대는 조선의용군을 주축으로 하는 6만5000천명의 조선족이었다는 것은 독립투사 김동삼 선생의 손자 金中生씨를 통하여 밝혀졌다.
조선의용군의 뿌리는 조선혁명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3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민족주의 인사와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뒤섞여 있으면서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양세봉 장군 이후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로 그 뒤의 맥을 이었으며 이 중 공산계들이 이탈하여 조선의용군으로 중국공산당 아래로 들어갔다.
이들 조선의용군이 6.25 이전에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주력부대로 재편되어 남침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은 1938년 10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항일무장독립부대를 결성하게 되는데 중국국민당 지도부와 연계하여 한중 연합체 성격의 무장부대의 필요성에 의하여 탄생한 것으로 조선혁명군의 뒤를 잇는 조선의용대가 이것이다.
중국국민당 산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족청년 122명을 중심으로 출범하였으나 1942년 좌익계열 대원들이 의용대본부가 있던 중경을 떠나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공산당 영향권으로 들어가버리면서 김원봉 계열은 광복군으로 참여하고 화북지역으로 떠난 좌익계는 중국공산당의 지원 하에 조선의용군으로 편제를 갖추어 중국공산당의 지휘계통을 따랐다.
이들은 일본패망 뒤에도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았으며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을 준비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만주로 이동시켜 현지 조선족을 입대시켜 규모를 확장하여 후에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국민당군과 싸우게 된다
이들이 6.25 이전에 북한으로 이동되어 인민군의 최전방에서 남침의 선봉대 역할을 맡았다.
김일성은 6.25 이전에 1950년에 두번에 걸쳐서 모택동에게 밀사를 보내어 조선족 부대의 파병요청을 한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김중생씨를 통하여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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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모두 10만명의 조선족이 한국전쟁에 참전
조선의용군의 6·25 참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홀대와 무관심을 안타깝게 생각한 김중생씨는, 3년에 걸친 작업 끝에 지난해 8월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이라는 책을 펴냈다. 김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의용군 출신 퇴역군인 100여명을 수소문해 만났고, 중국과 국내에서 발표된 관련 논문과 저술을 통독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 출판된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은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에게도 주목받는 새로운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김씨는 이 책을 쓰면서 일본 패망 이후 만주로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이 850명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동안 학계에서 정설처럼 여겨져온 ‘400명’의 배가 넘는 규모다.
김중생씨 작업의 결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6·25 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의용군 가운데 200여명의 명단을 최초로 정리해낸 것이었다. 그는 이들의 신상을 ▷1945년과 46년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두차례로 나눠 개별입북한 경우 ▷1949년부터 2년간 부대를 인솔하고 입북한 경우 ▷휴전후 중국으로 돌아온 경우 ▷입북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경우 등으로 구분해 정리했다.
김중생씨는 또한 참전 조선의용군의 주요 지휘관들의 출생년도 등 개인 신상은 물론 의용군 시절 및 북한 입국 전후의 행적 등도 상세히 밝혀냈다. 이처럼 꼼꼼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김씨는 “6·25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주력부대였던 21개 연대 가운데 47%가 만주에서 건너온 조굼퓻諭봉막?채워져 있었다”고 밝혔다.김중생씨는 6·25전쟁에 참여한 전체 조선족 규모를 10만명 안팎으로 추산한다. 이 가운데 개전 이전에 북한으로 건너간 경우가 6만5,000명에 달한다는 것이 김씨의 얘기다.
북한은 전쟁중이던 1950년 겨울부터 이듬해에 걸쳐 인민군 총참모본부 군사동원국 소속 장교들이 중국 현지로 건너가 조선족들을 상대로 모병(募兵)하기도 했다. 김중생씨는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때 하얼빈·옌지(延吉)·무단장(牧丹江) 등에서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조선족이 1만명 안팎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유엔군 참전으로 북한군이 수세에 몰리자 중공군이 개입하기에 이른다. 중공군은 한꺼번에 수십개 사단을 전선에 내보냈다가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새로운 부대로 교체하는 방법으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총 108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냈다. 이때 참전한 중공군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漢族)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배치될 때 반드시 조선족 통역요원이 동행했다고 한다. 1개 사단에 150명 정도의 통역이 배치된 것으로 추산하면 중공군을 따라 참전한 통역요원만도 2만5,000명이나 된다. 때문에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중 북한에서 활동한 전체 조선족의 규모는 10만명에 달하리라는 것이 김중생씨의 분석이다.
관련자료와 퇴역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계해낸 이같은 자료를 종합하고 김중생씨가 내린 결론은 “조선의용군이 밀입북하지 않았더라면 6·25 전쟁은 아예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상당기간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민군에 끌려간 독립운동가의 손자
....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그가, 역사의 물줄기에 휩쓸려 6·25 전쟁에 인민군으로 참전하게 되고, 그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독립운동 유공자 후손으로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어떻게 보면 김중생씨의 인생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33년 중국 하얼빈에서 출생한 김씨는 하얼빈시 인근의 조선족 집단거주지인 취원창에서 우리의 초등학교 과정인 국민우급학교를 졸업하고 중학 과정인 보습과에 진학하게 된다. 1946년 들어 국공내전(國共內戰)이 격화되면서 이 학교가 문을 닫게 되는데, 이때 김씨는 하얼빈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의용군 제3지대에 ‘입대’하게 된다.
당시의 의용군은 만주지역으로 진출한 이후 중학생 정도만 돼도 ‘통신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확군(擴軍)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김씨가 의용군에 들어간 이유는 하얼빈 주둔 의용군이 운영하던 연합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루 2시간씩의 정치학습을 받는 것이 교육의 전부였지만 그래도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끼며 지냈다는 것이 김씨의 회고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통신병’으로 적을 두면서 1년 정도 공부하던 김씨는, 그러나 집안이 부농(富農)으로 낙인찍혀 전재산을 몰수당하는 수난을 겪고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김씨는 건강이 악화된 부친을 대신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家長) 역할을 해야 했다.
그렇게 2년 정도 농사에 매달려 집안 형편도 조금 좋아지기 시작하자 김씨는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동기들이 이미 고등학교에 다니던 상태에서 뒤늦게 중학교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는 것. 이때 김씨가 떠올린 것이 바로 ‘평양유학’이었다. 당시만 해도 만주 조선족들 사이에서는 평양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소문나 있었다고 한다.그가 먼 집안 친척이 현지에 살고 있다는 것만 믿고 단신으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월이었다. 평양 시내의 사동직업학교에 진학해 두달 남짓 공부하고 있던 어느날, 요란한 호각소리와 함께 전교생은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날 소년 김중생은 300명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차에 태워져 황해도 사리원으로 향한다. 차가 도착한 곳은 재령에 있는 인민군 6사단 15연대 신병훈련소였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그는 이곳에서 1달 정도 신병훈련을 받고 바로 부대에 배치된다. 김씨가 졸지에 인민군이 돼 배치받은 6사단은 중국 선양(瀋陽)을 무대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후신(後身)이었다. 부대원들은 만주에서 유학왔다 붙잡혀온 17살짜리 신병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이도 어리고 전투경험도 없었던 그에게는 전투부대 대신 중대장 연락병이라는 보직이 주어졌다.
인민군 15연대에서 맞이한 6·25 전쟁
김씨가 소속된 부대에서 비상소집 훈련이 실시된 것은 6·25를 정확히 보름 앞둔 6월10일 저녁이었다. 이날밤 인민군 6사단은 재령에서 개성의 서쪽에 있는 연백으로 絹옳杉? 옹진반도 건너편으로, 지도상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 바로 윗부분이었다.
부대 이동후 장교들은 연일 회의를 하고 지형정찰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지만 사병들은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10여일을 보내고 난 어느날 밤, 부대의 정치장교가 사병들을 모아놓고 엄숙한 목소리로 훈시하는 것이었다.
“우리 인민군은 방어만 하는 군대가 아니다. 계급혁명은 때로는 무력도 불사해야 할 때가 있고, 무력해방이 최선인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내일 새벽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들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이날 자정부터 38경비단이 뒤로 빠지고 그 자리를 6사단 병력이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새벽 4시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김중생씨는 공격 개시 명령과 함께 산등성이를 내려오다 국군이 쏜 포탄 파편에 맞아 손등을 다치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전쟁 시작 30분만에 개성 후방인 금천에 있는 야전병원으로 실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소속된 인민군 6사단은 사단장 이름을 따서 ‘방호산 사단’으로 더 잘 알려진 부대였지요. 6·25때 가장 빠른 속도로 남진(南進)해 남한의 가장 깊숙한 지역까지 쳐내려온 부대가 바로 방호산 부대였습니다. 야전병원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20일 정도 쉬고 있는데, 우리 부대가 벌써 대전을 해방시키고 금강도 건넜다는 소식이 들어오더군요. 부상이 심하지 않은 일부 군인들이 ‘여기 있다가는 부산이 해방되는 모습을 구경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병원을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같이 따라 나섰지요.”
김씨가 부대에 합류한 것은 8월 초순이었다. 이때 김씨의 부대는 진주에서 미 2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호남쪽을 우회해 거칠 것 없이 내려오던 6사단은 진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미군은 진주 병참기지를 수호하고 마산과 부산을 방어하기 위해 진주방어선에 엄청난 화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천하의 방호산 사단도 사력을 다하는 미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40일이 넘는 장기대치를 하고서도 더 이상 진격의 여지를 찾지 못한 6사단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직후인 9월말 후퇴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월등한 화력 앞에 병력손실도 엄청나, 하급장교와 고참 사병의 절반이 전사하고 말았다. 김씨는 “전쟁 초반에 부상당해 후송되지 않았더라면 내 운명도 그때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북으로 쫓겨 올라가던 6사단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재차 남진을 시작해 원주까지 진격하게 된다. 이때부터 38선을 경계로 밀고 밀리는 지루한 싸움을 거듭한 끝에 휴전을 맞이하게 된다. 김씨는 휴전 후에도 함흥지역 해안경비를 담당하는 6사단 소속으로 3년여를 더 인민군에 근무하다 1957년 중위로 전역한다.
소식 끊긴 북한 잔류 조선의용군
휴전후 북한은 중국으로 귀환하기를 원하는 경우 조선족들의 출국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중령 이하의 조선족들은 아무 제한 없이 출국을 허락하던 북한은, 그러나 병력이 자꾸 줄어들고 국가적으로 인적자원이 감소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1957년부터는 초급장교로까지 귀환 금지 대상을 확대했다.
제대후 온성의 탄광에서 근무하던 김중생씨도 이 규정에 걸려 하얼빈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숙부(叔父)를 통해 ‘홀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귀환하지 않으면 생계가 곤란하다’는 중국 당국의 서류를 발급받은 끝에 북한을 떠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한에 남은 조선족들의 그후는 어떠했을까.
“북한 당국은 전쟁 와중에 이미 연안파의 우두머리격이던 무정을 면직시켰습니다. 남로당 숙청 후에는 박일우·방호산 등도 직위를 박탈했습니다. 김일성은 1956년 8월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자신에 대한 공개비판이 제기되는 데 충격을 받은 후부터 당과 군에 두루 진출해 있던 연안파를 광범위하게 제거해 나갔습니다. 연안파 출신 인민군 간부들의 친척이 지금도 중국에 많이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은 1958년 이후 북한에 남은 연안파 간부들과는 편지조차 불가능해진 상태입니다. 대다수 고위 간부들이 숙청됐을 것으로 추정만 할 뿐, 그후 조선족들의 신상이 어떻게 처리됐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3년여의 전쟁 기간까지 합쳐 북한에서 8년 가까이 생활하고 중국으로 돌아온 김중생씨는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1958년 9월 가목사사범대학교 역사학과에 진학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아성현에 있는 중학교에서 역사교사로 근무했다.교직생활 도중 문화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숙청 대상으로 몰려 교내에 연금되기도 하고 농촌으로 내려가 강제노동을 하는 등 시련기를 보낸 그는 1974년 복직돼 한국으로 영주귀국하기 직전까지 다시 교단에 섰다.교사생활을 하던 지난 1987년, 김씨는 뜻밖의 초청장을 하나 받게 된다. 독립기념관장 명의의 고국방문 초청장이었다.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사태를 계기로 전국민적 관심과 성금을 모아 독립기념관을 건립한 정부는 기념관 개관식을 보다 뜻깊게 치르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고 하더군요. 그 가운데 하나가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운동 유공자의 후손을 개관식에 초청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제가 초청 대상에 들어간 것이었지요. 이 행사에 참석하면서 난생 처음 고국땅을 밟게 됐죠. 참 감회가 깊더군요.”
난생 처음 고국 방문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헤이룽장(黑龍江)성 공안당국 관계자가 김씨를 찾아온다. 이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공식 초청을 받고 갔다왔던데, 그 배경이 뭐냐”고 묻는 것이었다.
독립기념관 개관식 참석 계기돼 永住귀국
이에 김씨는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돼서 할아버지인 김동삼 선생이 일제시대때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사실, 자신이 참석했던 행사가 어떤 의미의 행사였는지 등을 상세히 얘기해 주었다. 전후 사정을 듣고 돌아간 공안 관계자가 며칠후 다시 찾아왔다. 김씨를 다시 찾은 이 당국자는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한국으로 영주귀국할 의사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당국자가 그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당시 중국 사회의 분위기와 관련이 깊었다. 김중생씨의 얘기다.
“덩샤오핑(鄧少平)이 당과 군의 최고 실력자로 떠오른 후 중국은 한국을 경제발전의 모델로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덩샤오핑은 각 성(省)에 ‘한국과 경제적 유대를 맺도록 각자 노력하라. 이러한 노력을 벌이는 데는 어떤 정치적 부담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훈시를 내려놓았습니다. 국교관계가 없다는 점을 의식하지 말고 최대한 한국과 연결고리를 맺어 경제발전에 이익이 되도록 힘쓰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헤이룽장성에서는 나를 한국에 정착시킨 후 나를 고리삼아 한국기업 등과의 연결을 희망했던 것입니다.”
김씨를 찾아온 공안당국자는 “당신은 한국에 가면 훌륭한 조상 덕택에 관료나 기업인을 접촉할 기회가 많을 것이니 거기에 정착해 헤이룽장성에 도움이 되게끔 한번 사업을 해보라”고 얘기했다. 이 관계자는 “교사생활하다 퇴직해 봐야 잘 살지도 못하지 않느냐”며 노골적으로 한국으로의 이주를 권유했다.
김씨가 “달리 배운 기술도 없는데 이 나이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하자 공안 당국자는 “일단 가서 살아보고 도저히 못살겠으면 돌아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는 것.
결국 김씨는 헤이룽장성 정부측로부터 “살아 보다 안되면 다시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고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된다.
김중생씨가 영주귀국 가능성을 타진해 오자 이를 더 반긴 것은 우리 정부였다. 북방외교에 전력투구하며 중국과 수교를 위해 노력하던 6공화국 정부는 김씨의 귀국을 ‘독립유공자 후손 영주귀국 1호’라는 정치적 이벤트로 격상시켰다. 입국 및 국내 정착에 필요한 절차를 최대한 신속히 처리해 주었고, 아파트 등 재정적 도움까지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이 김씨 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할 정도였다.
국민적 관심 속에 고국으로 이주한 김씨는 귀국후 삼성물산 해외사업부 중국 담당 고문으로 특채되기도 했다. 김씨는 이사대우를 받으면서 1997년 2월까지 삼성물산에 근무했다.
김씨는 귀국 직후부터 개인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 실태에 대한 공부를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군 문제에 대한 연구 실태를 알게 됐다. 김씨는 “중국처럼 연구를 가로막는 사회 분위기도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연구가 축적돼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터라 실망이 컸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기회가 되면 역사의 공백을 메워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6·25를 체험한 적도 없는 젊은 학자들이 외국 학자의 무책임한 학설을 흉내내 ‘북침론’을 주장할 때 정말 황당함을 느꼈다”는 김중생씨는 “6·25 전쟁은 김일성이 조선족을 끌어들여 자행한 명백한 남한 침략 전쟁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이용만 당하다 사라져갔고, 그 후로도 역사의 외면을 당하는 조선족 출신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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