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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판

조선족의 미래

by 8866 2007. 6. 25.

 

무중력지대에서의 이방인의  삶

 

장혜영

 

 정체성은 특정 공간에 문화적 중력장을 장치하여 직선가속운동을 진행하는 구성원들의 원심력에 제동을 걸며 곡선등속운동의 방위적 복귀를 강행하는 곡률화 작업을 수행해 왔다. 문화와 혈연의 동질성은 중심의 권위를 정당화하여 불가항력의 구심점으로 격상되었고 주변의 선택 자유를 봉쇄하며 한계적 경계의 틀 안에에 수용, 통제해 왔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결속과 탈 중심, 탈 권위, 탈 계급 등 정치지형도의 구조적 재 배치로  초강력 중력장이 해체되고 전통가치가 진공되면서 공동체는 분해의 위기를 배당받는다.

 이방인은 혈연, 문화, 신앙, 이데올로기가 설치한 경계를  전제로 정의된 정치학적 개념이다. 물론 통시적 의미에서 경계는  영토의 물리성을 지칭한다. 이른바 이방인이라함은 생물학적 유기체를 일탈하여  타자의 권역으로 경계를 이월한 법적, 도덕적 행위자를 의미한다. 서식지가 타자의 영위권이라는 불리함 때문에 이방인의 셋방살이는 시초부터 보퉁이 인생의 나그네 운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게다가 내지에서는 배신감이, 타지에서는 이질감이라는 윤리적 당위는 양쪽 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악연의 서막을 연다. 

 이중적 인격체라는 혐오의 시선 아래 가치공유의 대가 지불로 이식공동체와의 합류가 수락되며 간신히 발을 붙이기 시작했지만 자유가 거느리고 온 지구화, 개인화의 폭풍으로  혈연적, 가치적 경계가 무너지면서 이방인을 이방인으로 정의하던 문화, 정치적 규제도 동시에 해금되었다.

 교통, 통신 분야의 첨단기술 업그레이드는 거리의 장애로 소통불능이던 거대세계를 무릎을 맞댄 하나의 동네로 반경을 좁히며 물리적 영토의 경계를 해제했고 선택권을 할양받은 현대적 개인들의 욕구는 계급, 민족, 가족의 일체성에 반발하며 문화적 영토의 경계를 철거했다. 이제 유동성은 이방인의 특수성이라는

범주로부터  "현대인의 뿌리 없는 삶"의 특징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광의적 의미에서 이방인의 존재는 부재의 현존 즉 어디에도 없으면서  누구나 다 이방인은 셈이다.

 영토의 물리적 측면만을 정체성의 기반으로 인지하던 군생공동체는 사이버라는 새로운 가상영토를  정체성의 다른 한 접안공간으로 특설하며 분산적 공동체를 편성하고 있다. 지반과 격리된 채 공중부양하는 무중력지대에서의 개인들의 삶이 시공의 규제를 해탈하여 어디에서나 상륙할 수 있는 21세기의 신대륙-사이버공간은 물리적 영토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생존 공간의 복합적인 이중 구조를 구축한다.

 한편 혈연과 문화의 동질성으로 결집되던 이방인공동체는 수직적권력체계로부터 노동시장과 지식시장의 수요에 부응하는 수평적 균등체제로 이완되고 가치공유의 구심력으로 정체성을 확보하던 일원화질서로부터 개인의 가치와 취향에 훈육되는, 탄력 있는 다원화 질서로 그 지형도가 재편되는 대세의 흐름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행, 한국기업의 진출로 해체의 윤리적 문턱을 넘어선 조선족사회 구성원들의 불특정 방위 이동은 이방인 특유의 보퉁이 인생 터전을 장쾌한 홍수인양 거침없이 지평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인간의 운명을 교체하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무능한 나는 그저 순리를 따를 뿐 낡은 질서의 포로가 된 채 도포를 걸친 양심적 도덕군자가 되어 이 시대문명의 소외된 뒷골목에 허름한 "민속촌"을 개설하여 조선족사회를 과거에 반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경계 너머의 신비세계에 도전장을 던진 모험가들을 소환하여 오막살이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전시할 만큼 잔인하지도 못하다. 전통의 수호가 "민속촌"개설 명분이라면 한두 개의 마을을 지정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공동체 전체를 "민속촌"으로 개조하고  우리만 그 속에서 문명 앞에 과거의 유물로 전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우리사회의 민속촌화가 이것의 존속을 전제로  득실을 배당 받는 일부 계층의 사익 충족의 제물이 된다면 더구나 신중한 대응이 요청된다.

 운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설령 주사위를 던진 자가 우연이라 할지라도  결과는 필연을 강제할 것이다. 지역사회의 공중분해와  구성원들의 양자量子운동은  역동적 개혁발전을 추진하는 인적 자원을 보장한다. 권력이나 윤리적 명분으로 이 자원을 고갈시키는 순간  수 많은 기업들이 하루 아침에 파산을 선고하는 연쇄반응이 발생할 것임이 틀림없다.

 조선족사회의 와해가 곧 우리 민족 전체의 붕괴인 듯 위기론을 고양하는 데는 학술적 자세이거나 학자적 양심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바닥에 탯줄을 묻은 이해관계가  본의 아닌 무의식의 조종간을 작동시키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사회와 운명을 함께 했던 지성인들은  공동체의 지정학적 문화지형도를 면밀히 검토하고  분산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역사적 태동에 부합하도록 기존 문화장치들을 재 정비, 재 분배하는 고난도 기술적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특히 노른자위 땅인 해변도시와 기업 밀집분포 지역을 중심으로 점 조직화하는 개척자들이 새로운 환경에 조속히 정착할 수 있도록 후속 조치를 취해 포괄적 문화장치배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개혁은 그림자처럼 항상 뒤에 불안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닌다. 기존의 질서를 철거하는 마찰음 때문이다. 무중력지대에서의 뿌리 없는 이방인의 삶은 더구나 불안하다. 그렇다고 위험수위가 정상수치를 돌파한 것은 아니다. 불안이야말로 현대적 삶의 피할 수 없는 가시적 일상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자유의 대안에 이르는데 반드시 경유해야 할 징검다리이다. 불안이 가속운동이 유발하는 증후군이라면 안전은 등속운동 내지는 감속운동이 분비하는 증후군이다. 안전의 내면에는 질서의 광기에 순종하고 자아 의지를 포기하는 만성 자살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위험이 잠복해 있다.

 격변기의 지성인의 선택은 역사적인 행위이므로 판단의 신중함과 현명함이 요청된다.

 무중력지대의 이방인사회에는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다. 지정학적 위치변화를 예측하기 어렵다. 어느 날 청도나 대련이 연변을 대신하여  조선족사회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 전통사회의 중추를 이루던, 농경사회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황혼세대가 자연의 섭리를 극복할 수 없는 한은 말이다.

 현대인의 뿌리 없는 삶! 그들에게 가능성은 불안의 대해만큼이나 무한하게 열려 있다.

 우리도 이제는 지역적인 옹졸함과  편협함, 이방인의 콤플렉스와 이중 성격에서 탈피하여 세계를 무대로 삶의 지평을 넓혀 갈 움심을 품어야 한다.

 

 출처:흑룡강신문 "조선족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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