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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스크랩] 원정설(袁靜雪) : 나의 부친 원세개

by 8866 2007. 4. 24.

 

나의 부친이 임시총통선서를 한 후 다시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청황실은 중남해를 내놓았다. 우리는 다시 당시 철사사후통 육군부(지금의 중국인민대학 기숙사)에서 중남해로 이사했다. 나의 부친은 이때부터 중남해에 들어가 거주했고, 다시는 신화문(중남해의 정문)을 나서지 않았다. 이것은 "동흥루(東興樓)"의 폭파사건으로 인한 거리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중남해로 이사간후 얼마되지 않아, 집안에서는 의외의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폭탄을 중남해로 던졌는데, 다행히 폭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친으로 하여금 더더구나 가볍게 외출하지 못하도록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부친은 살아서 신화문을 들어섰지만, 죽은 다음에야 들려서 신화문을 나갈 수 있었다.

 

나의 부친은 당시 계속 거인당(居仁堂) 안에 거주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당시 회인당(懷仁堂)에 거주했다고 썼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의 사무실은 거인당의 아래층 동쪽에 있는 큰 방이었다. 아래층 서쪽은 손님을 만나고 회의하고 식사하는 곳이었다. 이외에 거인당의 전원에는 '대원경중(大圓鏡中)'이라는 방이 있었다. 역시 손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그가 어떤 장소에서 손님을 만날지는 손님의 신분이나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르게 대우했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손님은 '대원경중'에서 만났다. 친한 손님은 거인당 아래층의 서쪽에서 만났다. 가장 친한 손님은 사무실에서 만났다. 만일 손님이 신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만나는 곳이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장작림을 만난 것은 하나의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장작림은 당시 27사단의 사단장이었고, 그는 동북에서 북경으로 부친을 뵈러 왔따. 그의 신분이나 그의 부친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그저 '대원경중'에서 만나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부친은 그에 대한 우대를 표시하기 위하여 파격적으로 사무실에서 그를 접견했다. 당시 사무실내의 북쪽에는 다보격자(多寶格子)를 놔두었다. 격자안에는 약간의 골동품을 진열해두었다. 그 중에 하나가 사융합자(絲絨盒子)인데, 안에는 네개의 황금시계를 놓아 두었다. 시계마다 진주로 둘러싸여 있었고, 시계의 뒷면에는 법랑으로 만든 작은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정교했다. 당시 내 부친은 장작림과 쇼파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장작림은 말하면서, 자주 그의 자리에서 가까이 있던 그 네개의 금시계를 쳐다보았다. 부친은 이 상황을 보고는, 그가 이 시계를 좋아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부친이 장작림을 보낸 다음에 계속 웃으면서 윗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시계를 준 경위를 얘기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그는 정말 세상이 넓은줄 모르는 것같다. 그가 좋아한다면 내 기꺼이 줄 수 있다" 그리고는 가가대소를 하였다.

 

부친의 침실은 거인당의 위층의 동쪽에 있는 큰 방이었다. 그는 둘째언니와 나를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 둘을 윗층 서쪽 끝에 있는 방에 머물도록 하였다. 우리 집의 다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도 그가 지정해주었따. 대체적인 상황은 나의 어머니인 우씨와 둘째부인, 큰오빠부부 그리고 큰오빠의 첩과 아이들 그리고 넷째오빠부부는 모두 복록거(福祿居)에 거주했다. 큰부인, 셋째부인, 둘째오빠부부, 셋째오빠부부, 그리고 어린 동생, 누이들은 만자랑(卍字廊) 뒤에 있는 4개의 원자(院子)에 거주했다. 다섯, 여섯, 여덟, 아홉째부인의 네 명과 그들의 아이들은 모두 거인당 뒤에 있는 한 루(樓)에 거주했다. 이 루는 거인당에서 천교(天橋)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의 "대전주비처(大典籌備處)"는 각 형제들에게 모두 '황자복(皇子服)'을 만들어 주었다. 하루는 넷째오빠, 다섯째오빠, 여섯째동생, 일곱째동생, 여덟째동생의 다섯 명이 '신화궁'내에서 각자 '황자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 보면 알겠지만, 다섯째오빠의 금화(金花)장식은 다른 형제들과 좀 달랐다(이 사진은 현재까지 내가 보관하고 있다), 그저 둘째오빠의 것만이 다섯째오빠의 것과 같았다. 이것은 나의 부친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이 두 사람중에서 둘째오빠가 나이가 많고, 수시로 부친을 대신하여 바깥에 나가서 일을 했으므로 부친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의 부친은 그를 편애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셋째부인의 장남일 뿐아니라, 큰부인에게 양자로 들어가서 그녀가 아주 좋아하는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오빠가 나중에 '태자'로 옹립하려는 목소리가 가장 컸다. 큰오빠는 이 말을 듣고는 이렇게 얘기했다. "만일 대야(大爺, 원세개)가 둘째를 세우려고 한다면, 나는 둘째동생을 죽여버리겠다". 이로 인하여, "신화궁" 내에서는 인심이 흉흉했었다. 하루는 내가 큰오빠가 한 말을 부친에게 말했고,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안에 '혈적자(血滴子, 옹정황제가 형제등 정적을 암살할 때 썼다는 암기)'가 나오게 생겼다"고.  부친은 내 말을 들은 후에 그저 간단하게 "쓸데없는 소리(胡說)"라고 두 글자만 말하였다. 그리고 아무런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옹정이 황제위를 빼앗은 참극에 대하여 그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리는 없을 것이다.

 

태자를 세우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원인은 둘째오빠를 모시자는 목소리가 제일 높았지만, 다섯째오빠의 '황자복'도 역시 조금 다른 '금화'를 장식한 것이었다. 다섯째오빠는 둘째부인의 장남이다. 만일 다섯째오빠를 태자로 세운다면 둘째부인은 장래 황제의 모친이 된다. 그리고 장래의 황태후가 된다. 그러나 다섯째부인은 자신이 부친의 가장 총애를 받는 부인이었으므로 자연히 그 자리를 자신이 앉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부친에게 그의 장남 즉 여섯째를 태자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부친을 모시는 시녀들이 그런 말을 흘려주었을 뿐아니라, 나도 다섯째부인이 부친의 앞에서 여섯째의 여러가지 뛰어난 점을 칭찬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나의 부친은 이런 내외의 협공앞에서 어찌 머리가 어지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바로 이때, 집안의 몇몇 부인들이 부친의 당시 곤경을 알지 못하고, "비(妃)", "빈(嬪)"의 명칭을 가지고 그의 앞에서 싸움을 벌이곤 해서 그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였다. 사정은 이렇다. 그가 황제제도를 결정한 후, 나의 모친 우씨는 당연히 '정궁낭낭(正宮娘娘)'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여러명의 부인들은 부친이 1, 2, 3, 5의 네 부인은 모두 "비(妃)"로, 6, 8, 9의 세 부인은 모두 "빈(嬪)"으로 하였다. 이런 방법에 대하여 '빈'으로 봉해진 세 부인은 불만이었다. 마침 원소절의 저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거인당의 아랫층에 모여 원소(元宵)를 먹고 있었다(그 때 부친과 우리 집안에서는 모두 탕원을 원소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바깥에서 탕원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부친에게 얘기했다. 부친은 袁과 元 은 발음은 같지만 글자가 다른데 기휘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원소가 나오자 부친은 먼저 좌석에 앉아 먹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 앉아서 먹으라고 하였다. 이때, 여섯째부인이 먼저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만일 부친이 그녀를 '비'로 봉해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창덕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여덟째부인, 아홉째부인도 같은 요구를 했다. 다섯째 부인은 옆에서 한마디 했다. "너희들 소란피우지 말아라. 너희 모두 비로 해라. 부르고 싶은대로 부르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그 세 사람은 여전히 입이 나와 있었다. 부친은 이 상황을 보고 젓가락을 내려 놓으면서 탄식을 했다. "너희 싸우지들 말라. 너희 모두 창덕으로 돌아가려면, 내 영구차를 보낼 때 같이 돌아가라." 말을 마치고 사무실로 걸어가 버렸다. 이어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명을 내려 황제제도의 시행을 늦출 것이라는 영이 떨어지고, "대전주비처"는 취소되었다.

 

이 때 국내의 상황은: 한편으로는 채약이 이끄는 호국군이 빠른 속도로 사천남부의 일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귀주와 광서도 독립을 선포했다. 진영정은 스스로 양광호국국 총사령관이 되었다. 호국군의 이름이 크게 떨쳐졌다. 다른 한편으로, 부친이 장악한 북양에도 이 때 분화가 시작되었다. 특히 그의 수하의 두명의 장수인 단기서, 풍국장이 한 명은 바깥에서 수수방관하고, 한명은 더 이상 부친의 명을 공손히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강서, 절강, 산동, 호남 4개성의 장군과 연합하여 황제제도의 취소를 발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부친은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는 할 수없이 친히 서세창, 단기서, 여원홍의 세 사람을 중남해로 불렀다. 그리고는 공동으로 황제제도를 취소하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황제제도취소의 전보원고는 이미 완성되어 발송하려고 하고 있었따. 갑자기 부친이 다시 전보원고를 다시 가져오라고 했다. 서세창, 단기서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다시 중남해로 들어와 부친에게 물었다. "왜 전보를 회수하셨습니까? 혹시 이렇게 하시고 싶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까." 부친은 그저 이렇게 말했다. "난 그저 그 안의 문구를 몇개 바꾸려고 한 것이다" 이어서 그들에게 내주고 반포하게 하였다. 보기에 부친은 아마도 후회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시 생각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침 서세창, 단기서 두 사람이 와서 재촉하니까 그저 적당히 얼버무리고 그냥 물러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울분이 병이 되어, 결국은 사망하고 만다.

 

나의 부친은 미신을 믿었다. 그는 팔자를 믿었고, 풍수를 믿었다. 어떤 사람이 부친의 팔자를 봐준 적이 있다. 그의 명이 "귀불가언(貴不可言, 말할 수 없기 고귀하다)"고 한 바 있다. 그리고 우리 항성 고향의 묘지는 한편이 용이고, 다른 한편이 봉이다. 용봉이 어울려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 일대의 제왕이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말들은 나의 부친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홍헌칭제"를 한 것도 아마 이런 것을 생각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고,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이때의 풍국장의 태도는 살펴볼 만하다. 풍국장은 소참에서 병사를 훈련시킬 때부터, 부친을 따라서 일을 해왔다. 나중에 부친이 계속 발탁하여, 민국초년이 되어서는 선무상장군, 독리강소군무가 되어 동남지방을 갖게 되었고, 중병(重兵)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하루는 부친이 저녁에 위층에 올라온 후, 몇몇 부인들을 보았다. 나는 둘째언니와 그의 침실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물었다. "오늘 풍화보(馮華甫)가 왔다" 나는 그 때 화보가 풍국장의 자인줄 몰랐다. "풍화보가 누구예요?" 그러자, 부친은 풍국장이 누군지 설명한 후에 나와 둘째언니에게 물었다. "너희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러자 둘째언니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세가(世哥, 오라버니)", 부친은 웃으면서 말했다. "세가가 아니라 사가(四哥, 넷째오빠. 世와 四는 중국어발음이 유사함)라고 불러야지"라고 하였다. 이런 칭호로 보아서, 부친이 풍국장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풍국장과 우리의 선생님인 주지(周砥)가 결혼한 일을 얘기해보자. 주지는 자가 도여(道如)이고, 집은 천진에 있었다(천진사람은 아니다). 일찌기 둘째언나와 나의 한문을 가르쳤다. 우리가 중남해로 이사들어왔을 때, 그녀는 이미 만자랑에서 과정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셋째부인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는 노처녀였고, 일찌기 시집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 때, 풍국장은 홀아비가 되었다. 그는 다시 부인을 취하려고 하였으며, 그의 아들에게 북쪽에 가서 사람을 물색하도록 시켜놓았다. 그런데, 아들은 부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씨집안과 말해놓고 남경으로 돌아가서 부친에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풍국장은 "내가 이 나이에 새로 결혼해서 뭐하겠느냐"고 하면서 응락하지 않았다. 주지선생의 제수는 여섯째부인과 사이가 좋아서, 북경으로 와서 부친에게 말을 해달라고 하였고, 부친이 나서서 일이 정해졌다. 이후 부친은 대신 혼수를 준비해주고 나를 보내서 무씨성의 보모를 딸려보녔다. 이외에 남자하인들로 하여금 주선생을 남경까지 호송하도록 하여 결혼시켰다. 결혼이후 주선생은 가끔 북경으로 돌아왔고, 우리 집을 친정집저럼 왔다갔다했다. 우리는 그녀를 "넷째언니"로 고쳐 불렀다.

 

홍헌황제제도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을 때, 한번은 풍국장이 남경에서 부친을 뵈러 온 적이 있다. 오는 길에 황제제도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았다. 부친은 그의 말투를 듣고는 그가 황제제도를 하지 말라고 권유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나는 몸이 아주 좋지 않다. 여러 아들도 모두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 내가 어디 그런 맘을 먹겠는가" 이렇게 해서 그의 입을 막았다. 부친은 그 날 저녁에 위층에 올라온 후에 계속 이렇게 말하였다. "풍화보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풍화보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황제제도가 공개된 후, 풍국장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부친이 죽은 후,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풍국장은 부친이 홍헌칭제를 한 데 대하여 시종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어떤 사람은 부친이 마지막에 코너에 몰린 것은 바로 풍국장이 서세창, 단기서, 양사이등의 사람들과 연락해서 계책을 세워, 부친이 계속 총통에 머물러 있도록 해서, 북양파의 세력을 보존하려 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부친이 홍천칭제를 할 때, 우리 집에는 이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다. 나의 모친은 가장 기뻐했다. 그녀는 그녀가 '낭낭(황후)'가 된다고 했다. 하루는 '대전주비처'에서 '황녀복'을 보내왔다. 둘째언니와 나는 부친이 구두로 '공주'에 봉한다고 하였었다. 그러나, '공주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모친은 둘째언니부터 '황녀복'을 입게 하고 그녀와 함께 사진을 찍도록 하였다. 이 날,  5, 6, 7, 8, 9째 여동생과 큰오빠의 두 딸 모두 7명은 모두 새 옷을 입었다. 오로지 나는 황제제도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었다.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권했고, 모친이 강요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일상복을 입었다. 사진을 찍을 때, 모친은 한가운데 앉고, 여러 '황녀'는 좌우를 둘러쌌다. 보기에 꽃옷에 비단비녀까지 아주 득의만면한 모습이었다. 여러 부인들 중에 위에서 이미 얘기한, 6, 8, 9째부인이 '비'의 지위를 놓고 싸운 문제와 다섯째부인이 여섯째오빠를 태자로 세우려 한 것을 빼고는 다른 사람들은 뭐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보기에 그녀들은 부친이 황제에 오르는 것에 모두 찬성하는 것같았다.

 

우리 집안에, 이 일에 가장 열심인 사람은 큰오빠였다. 그가 이렇게 열심인 것은 '태자'가 되고자 함이었고, '차기황제'가 되고자 함이었다. 그는 비록 장애가 있었지만, 야심이 컸다. 그래서 그는 '부친을 속이고 나라를 망친다'는 죄명을 얻는 것도 무릅쓰고, 가짜판의 <<순천시보>>를 만들어냈고, 그리고 형제간의 정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태자로 삼으면 둘째를 죽여버리겠다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원래 부친은 그에 대하여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적출이고, 종법제도에서 보면 '적자이면서 장자를 태자로 세운다'는 원칙에 부합하였다. 그는 태자는 자신이 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사로이 '대황자인(大皇子印)'이라는 황금도장까지 새겼다. 아부를 잘 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서신을 보낼 때 '대황자전하'라고 썼다. 그도 이를 사양하지 않았따. 그는 자기의 세력을 심었다. 당시 '주안육군자' 및 일부 정객들과 자주 왕래했다. 이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의형제인 양사기(楊士琦, 양사기는 부친의 심복이고 당시 정사당의 좌승이었다), 그리고 양도(楊度), 심운패(沈雲沛), 설대가(薛大可)등이 모두 부친의 앞에서 '적장자로 당연히 태자를 삼아야 한다'고 말하게 하였다. 종합적으로 큰오빠는 정치상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황제제도에 가장 열심이었다.

 

둘째오빠의 태도는 그와 전혀 달랐다. 둘째오빠는 구시대에 낭만적인 재자(才子)형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의 칭호가 자기의 머리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큰형이 그를 죽여버릴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듣자, 그는 마음 속으로 아주 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나와 상의한 적이 있는데, 만일 부친이 일단 등극하면, 우리는 영국으로 도망쳐서 유학을 하자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첫째, 셋째부인의 귀에 들어갔고, 둘째오빠는 불려갔고, 그녀들은 울면서 말렸다. 둘째오빠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부친이 황제를 칭하기 전에, 북경성내에 여러 청원단이 나타났다. 그 중에는 기녀청원단, 거지청원단등도 있었다. 둘째오빠는 이런 사람들과 자주 교류하였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둘째오빠가 벌인 일이라고 하였다. 사실 큰오빠가 외부에 연결한 사람들이 일으킨 일들이었다.

 

부친의 딸들중에 나는 유일하게 황제제도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이고, '황녀복'을 입고 사진을 찍지 않은 사람이며, 일찌기 둘째오빠와 영국으로 도망쳐 유학이나 하자고 했던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정치적으로 독보적인 견해를 지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자유를 좋아하고, 더욱 심한 속박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현재 우리는 원래 밥이나 먹는 감옥에 살았고, 매일 일어나면 책읽고, 밥먹고, 잠자는 세가지 일밖에 한 적이 없ㄴ즌데, 황제가 되려고 하면 견딜 수 있겠는가" 나는 공주, 황녀가 해야하는 예절을 배우고 싶지 않았다. '대전주비처'에서 공주, 황녀들의 예절을 교육시키려고 두 명의 여자사범대학 졸업생을 보낸 적이 있다. 한명은 녹씨이고 다른 한 명은 양씨였다. 그녀들은 시범을 보이면서 설명했다. 우리는 그녀들의 설명에 따라 한번, 또한번 연습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매일 아침에 부친에게 인사드릴 때, 과거 치파오를 입었던 여자들처럼 세번 문안인사를 했다. 문을 들어서면서 한번, 앞으로 몇 걸음 나와서 한번, 마지막으로 부친의 면전에서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야 할 때는 두 다리를 동시에 꿇으면서 다시 절했다. 서로 말할 때에는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한 다음에 하였고, 그리고 '어제 잠에 잘 주무셨습니까'라고 하여야 했다. 이런 번잡한 예절을 우리는 하루 배우고 하루는 울면서 안배우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부친이 이미 황제의 보좌에 올라 있어서 배우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정국이 변화하여 얼마되지 않아 그만두어도 되게 되었다.

 

 

 

출처 : 중국,북경,장안가,에서
글쓴이 : 중은우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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