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남풍현)
한자의 음과 훈(訓)을 빌어 국어를 표기하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하나로 실용적인 산문에 쓰인 국어나 국어적인 표현을 가리킨다. 역대
문헌에서는 이서(吏書), 이도(吏道), 이도(吏刀), 이토(吏吐), 이문(吏文), 이찰(吏札) 등으로 불렸다. ‘吏’는 서리(胥吏)를 뜻하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讀, 道, 頭, 吐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구결(口訣)의 토와 같은 어원으로 구두(句讀)의 ‘讀’가 변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이에 따르면 이두는 국어의 조사와 어미를 나타내는 토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체언, 용언, 부사들도 있으므로 실용적인 산문인
이두문에 쓰이는 국어의 보조어나 국어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다. ‘이서’, ‘이찰’, ‘이문’은 서리들이 쓰는 문장이란 뜻이니 결국
이두가 들어 있는 문장이란 뜻이다. 이상의 설명은 이두에 대한 협의의 개념이다.
한편 조선조 초기의 기록에는 차자표기 일체를
가리켜 이두라고 한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20세기초의 학자들은 향가도 이두문학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두에 대한 광의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두, 향찰, 구결 및 그밖의 차자표기들은 용도, 문체, 표기법 및 그 역사에서 차이가 있으므로 구별하여 쓰는 것이 편리하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이두의 개념은 협의의 이두이다.
이두를 정리하여 놓은 문헌은 《고금석림 古今釋林》의 나려이두(羅麗吏讀), 《전율통보
典律通補》에 실린 이문(吏文),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의 어록변증설(語錄辨證說), 저자를 알 수 없는 《이문 吏文》, 《이문대사
吏文大師》, 《이문잡례 吏文잡例》, 《유서필지 儒胥必知》 등이다. 이들은 17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것인데 이두에 한글로 독음을 달아
놓고 간혹 뜻풀이도 하였다. 이 이두의 몇 예를 기능별로 분류하고 독법과 간단한 뜻풀이를 붙이면 다음과 같다.
(1) 명사
進賜/나@[ㅿㆍ]리: 나으리. 件記/@[ㅂㆍㄹ]긔: 물건의 이름을 열거한 목록. 衿記/깃긔: 분배재산의 목록. 告目/고목: 상사람이
양반에게 올리는 글. 題音/뎨김: 소장이나 청원서에 대하여 내리는 관청의 판결문. 流音/흘림: 조세를 징수할 때 서리가 대장에서 베껴낸 초안.
役只/격기: 손님 치르기.
(2) 대명사
吾/나: 1인칭. 汝/너: 2인칭. 矣身/의몸: 제 자신(自身).
他矣/남의,뎌의: 남의, 저 사람의.
(3) 조사
주격 : 亦/이, 是/이, 익只/이기, 敎是/이시.
속격:
矣/의(유정물체언), 叱 /ㅅ(무정물체언).
대격: 乙/(으)ㄹ.
처격: 良中/아@[ㅎㆍㅣ], 中/긔, 희(@[ㅎㆍㅣ]).
여격: 亦中/여희, 矣中/의긔.
조격: 以/(우)로.
공동격: 果/와,과.
특수조사: 隱/(으)ㄴ,
叱段/@[ㅼㆍㄴ], 乙良/란(랑은), 乃/(이)나, 式/식, 乙用良/을@[ㅄㅡ]아, 佳叱/갓(뿐), 沙/사,@[ㅿㅏ](야),
耳亦/@[ㅼㆍ]녀(뿐).
(4) 동사
望良/@[ㅂㆍ]라-, 使內/브리-, 進叱/낫드러, 當爲/당@[ㅎㆍ]-, 除良/덜어,
知遣/알고, 無去乙/업거늘, 別爲/별@[ㅎㆍㄴ], 退是, 退伊; 믈리(연기하여).
(5) 어미
관형형: -在/견,
-乎/온, -臥乎/-누온.
부사형: -良/야, (餘)良/(남)아, -遣/고.
연결형: -乎矣/오@[ㄷㆍㅣ], -昆/곤,
-去沙/거@[ㅿㅏ], -去等/거든, -去乃/ 거나, (敎)矣/(이샤)되, -白如乎/@[ㅅㆍㄼ]다온, -良結/@[ㅅㆍㄼ]아져.
종결형: -如/다, -齊/제, -亦在/여견, -白乎乙去/@[ㅅㆍ]올거.
(6) 부사
强亦/구틔여,
無亦/업스여, 茂火/더브러, 粗也/아야라.
이상의 이두를 표기한 글자들을 용자(用字)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음독자(音讀字): 告目 件記 衿記 題音.
② 훈독자(訓讀字): 進賜 流音 矣身 望良 爲.
③ 음가자(音假字): 題音 役只
矣身 亦 果 乙 段.
④ 훈가자(訓假字): 是 良中 如 茂火.
음독자와 훈독자는 한자의 본의미를 살려서 차용한 것이고
음가자와 훈가자는 한자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 음이나 훈을 표음기능으로만 사용한 것이다.
이두는 한문이 이 땅에 수용된 지 오래지
않아 사용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선인들이 남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도 그 어순이나 어말어미의
표기에 쓰인 ‘之’자에서 이두적인 요소가 나타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之’는 한문의 ‘也’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신라와 고대일본에서도
널리 사용된 것이다. 이밖에 고구려의 이두문으로는 4종의 평양성벽석각문(平壤城壁石刻文)이 있다. 정확한 기록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金正喜)는 장수왕대(長壽王代)로 추정하였으므로 이에 따르면 446년과, 449년에 새긴 것이 된다. 446년으로 추정되는 석각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 小兄 文達節 自此西北行涉之(병술 12월 중에 한성의 후부 소형인 문달이
지휘하였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걸쳐 축성하였다.)
이 문장은 자연스러운 한문도 못되고 그렇다고 우리말의 문체도 아니다.
한문문체에 우리말의 요소가 가미된 속한문(俗漢文) 또는 변체한문(變體漢文)이라고도 불리는 초기적인 이두문이다. 여기에 쓰인 中자와 節자도
후대에는 이두로 발달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之’자가 여기에도 쓰였다. 백제도 이러한 이두문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다만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 이 계통의 문체가 있어 그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삼국시대 자료는
서봉총은합우명(瑞鳳塚銀合우銘, 451?), 영일냉수리비명(迎日冷水里碑銘 503?), 임신서기석명(壬申誓記石銘, 552 또는 612),
남산신성비명(南山新城碑銘, 591?), 등 10여점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국어의 어순만으로 쓰여져 있거나 한문의 어순과 국어의 어순이 혼합되어
쓰였고 후대의 이두에 계승되는 글자들이 사용되었다. 특히 임신서기석은 한자를 완전히 국어의 어순으로 배열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이두문이라 할 만하다. 남산신성비명도 임신서기석명과 같이 완전히 국어의 어순으로 표기된 것이다. 남산신성비명의 첫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辛亥年二月二十六日 南山新城作節 如法以 作後三年崩破者 罪敎事爲 聞敎令誓事之(신해년 2월 26일 남산신성을 지을 때에 만약 법으로
지은 후 3년에 붕파하면 죄주실 일로 삼아(국왕에게) 보고하라는 교령에 따라 다짐하는 일이다).
여기서 후대의 이두에 해당하는
것을 다수 확인할 수 있으니 作, 節, 者, 以, 敎, 事, 爲, 令, 之 등이 그것이다. 이 시대의 이두문에는 이밖에도 후대의 이두에 해당하는
글자들이 더 있으나 그들이 한자의 원뜻에서 벗어나 사용된 것은 발견되지 않고 표의자들만 사용되어 토(吐)라고 할만한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도 속한문의 성격을 띤 초기적인 이두문이 쓰였다. 감산사미륵보살조상명(甘山寺彌勒菩薩造像銘, 719),
창녕인양사탑금당치성문(昌寧仁陽寺塔金堂治成文, 810), 중초사당간석주기(中初寺幢竿石柱記, 827)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한자를 완전히 국어의
어순으로 배열하고 이두에 해당하는 글자들도 사용하고 있으나 한자의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용법으로 쓰인 토는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 분명한 토를
보여주는 이 시대의 최초의 이두문은 감산사아미타불조상명(甘山寺阿彌陀佛造像銘, 720)이다. 여기에 종결어미로 쓰인 哉가 토인데 이 차자는
화엄경사경조성기(華嚴經寫經造成記, 755)에선 연결어미로 쓰이기도 하여 후대의 이두로 널리 쓰인 齊에 계승된다. 이 글자가 토임이 확인되면서
초기적인 이두문에서 국어의 조사나 어미에 해당하던 한자들도 토로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밖에도 새로운 토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 토의
발달로 국어의 조사나 어미를 표기할 수 있는 길이 트여 자연스러운 국어 문장의 표기가 가능해졌으므로 이 때부터 본격적인 이두문이 발달한 것으로
본다. 현재 신라시대에 토가 쓰인 이두문은 16점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화엄경사경조성기는 그 본문이 391자나 되는 긴 글이면서 자연스러운
국어문장으로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다. 한 귀절을 소개하고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經之 成內 法者 楮根中 香水散 生長令內(經의
造成한 法은 닥나무뿌리에 香水를 뿌리어서 生長시키며)
이는 각 구성소를 완전히 국어의 어순으로 배열한 것이며 토(之, 內, 者,
中, , 令內)는 그 사이에 들어가서 문법적 기능을 하고 있다. 또 經, 法, 香水, 生長과 같은 한자어를 제외하면 모두 고유어를 표기한
것이다. 이들 한자어도 차용어이므로 결국은 완전한 국어를 표기한 것이 된다. 이 조성기에 쓰인 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사
: 者/(으)ㄴ 以/(으)로 中/긔 那/(이)나 /금.
어미 : -之/다 -內之/다 -在如/겨다 -內如/다 -哉/재 -/며
-內/-@[ㄴㆍ],ㄴ,어 -內賜/@[ㅅㆍ]- -賜乎/@[ㅅㆍ]온 -者/(며)ㄴ (令)只者/시긴기타: 爲/@[ㅎㆍ]- 令/시기- 等/@[ㄷㆍㄹ].
이를 표기한 차자들을 용자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음가자 : 只/기 那/나 /며 賜/@[ㅅㆍ] 哉/재.
훈독자 : 爲/@[ㅎㆍ] 令/시기 在/겨 等/@[ㄷㆍㄹ] 者/(으)ㄴ 以/(으)로 中/긔 之/다
훈가자 : /금
如/다 乎/온.
이들의 표음은 15세기 국어와 후대 이두의 독법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內’는 우리말의 동사를 나타내는 차자의 뒤에
쓰이는데 선어말어미, 명사형어미(관형형어미), 부사형어미 등 다양한 기능으로 쓰여 그 어형을 추정할 수가 없다. 한자 동사를 우리말로 읽음을
지시하는 부호일 가능성도 있다. 훈독자 爲, 令, 在, 等, 者, 以, 中, 之는 삼국시대의 초기적 이두문에서부터 쓰여오던 것인데 以, 中, 之
등은 훈가자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令只/시기’는 ‘只/기’가 ‘令/시기’의 말음을 첨기한 것이어서 이 시대에
말음첨기법(末音添記法)이 발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금’은 자의 뒷부분을 딴 약체로 이두의 토에 구결에 쓰이는 약체자가 이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대의 이두가 구결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향찰이 발달하는 과정상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주격,
목적격 등의 조사가 쓰이지 않았으며 어미의 표기도 불완전하여 이 표기법이 곧 향찰표기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시대의 이두문은
금석문, 고문서, 목간(木簡)에 쓰인 것으로 현재 모두 21점이 전한다. 그 대부분은 불가의 조성기이고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에 소장된 문서들은
장적(帳籍), 출납대장(出納臺帳), 비망기와 같은 실용문이어서 이두문이 쓰인 범위를 짐작하게 하여 준다.
고려시대의 이두문은
고달사원종대사탑비음명(高達寺元宗大師塔碑陰銘, 977) 등이 아직도 초기적인 이두문이 쓰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의 이두문은 현재
60여점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 가장 이른 이두문이면서 토가 쓰인 것은 명봉사자적선사능운탑비음명(鳴鳳寺慈寂禪師凌雲塔碑陰銘, 941)이다. 이는
명봉사의 중창기(重創記)인데 그 토표기는 신라시대보다 현저하게 정밀하여져 국어를 거의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을만치 발달되어 있다.
정토사조탑형지기(淨兜寺造塔形止記, 1031)는 연대가 이른 11세기의 것이면서도 장문의 내용을 담고 있고 이두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어
이두표기가 이 시대에는 완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이후의 탑이나 불상 등의 조성기에서는 이두문의 사용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이두의
사용범위가 한문에 밀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 고려시대까지는 이두문의 어순이 거의 완벽한 국어의 어순이었다. 조선조로 들어오면서는 한문에다가
구결의 토를 단 듯한 문체도 종종 나타나고 있어 이 시대의 이두문에 한문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말하여 준다.
조선시대의 이두문은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하여 고려시대나 신라시대에 이두문의 양상과 사용된 범위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초의 이두 자료인
《대명률직해》(1395)와 《양잠경험촬요 養蠶經驗撮要》(1415)는 한문으로 된 방대한 저술을 이두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언해(諺解)와 맥이 닿는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1541)은 한문을 한글과 이두로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한글과 이두를 쓰는 계층이 달랐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조선조의 이두는 주로 문서로 사용되었다.
개국공신녹권(開國功臣錄券, 1395), 병조조사첩(兵曹朝謝帖, 1409)은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를 이두로 기록한 것이다. 신하나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문서인 상언류(上言類), 정사류(呈辭類), 장계류(狀啓類)도 이두로 쓰였고 관(官)과 관 사이에 주고 받는 첩정문(牒呈文),
관문(關文), 형조의 문서인 추안(推案), 근각(根脚), 민간에서 관에 올리는 원정류(原情類), 소지류(所志類), 이에 대한 관의 회답인
제사(題辭), 민간인 상호간에 주고받는 문권류(文券類)인 명문(明文), 성급문(成給文), 화해문기(和解文記), 유서(遺書), 고목(告目),
절목(節目), 단자(單子) 등이 이두로 쓰였다. 이러한 이두문은 고려시대에도 이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조에서는 이두의 사용범위가 한문과
한글에 밀리어 좁아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두를 정음(한글)으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 그 창제목적의
하나였다. 그러나 정음창제는 한문, 이두, 한글의 공존을 가져와 이것이 나중에는 사회적인 계층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 즉 선비들은 한문,
중인(中人)들은 이두, 부녀자나 서민들은 한글과 결부시키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두가 사회적인 계층과 결부됨으로써
《유서필지》에서는 서리들이 사용하는 이두문을 ‘이서지체(吏胥之體)’라고도 불렀다. 훈민정음 창제 후 이두는 그 존재가치를 상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훈민정음 이전부터 써내려오던 관습으로 인하여 사용되어 오다가 사회적으로 서리계층이 형성되면서 그들의 문어로 굳어져 19세기말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로 대체될 때까지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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