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 김일성, 주보중, 주보중의 아내 왕일지王一知
88국제여단
부대의 대외번호는 8461번이다.
중국에서는 동북항일련군교도대 또는 88중국여단이라 하고 88특별저격여단이라고도 한다.
소련측에서는 88여단이라 부르고 북쪽에서는 국제연합군이라 부른다.
당시 로마넨코 (원동군 제 35군 정치부장)는 88국제여단의 소련군정치장교였는데 임시계급 대위인 제1대대장 김일성의 상관이었다.
소련측의 대표자 왕신림王新林(익명. 본명은 밝혀지지 않음.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제2왕신림, 제3왕신림으로 불렸다.)이 교체되는 혼란을 겪었다. (이 왕신림이 혹시 김일성의 회상기에 등장하는 소련측 책임자 소르낀 장령이 아닐까?)
여단 사령부
여단장: 주보중(2로군 사령관) 소좌(후에 중좌로 승진).
정치부여단장: 이조린(3로군 사령관) 소좌.
부여단장: 시린스키소좌.
여단 참모장: 샤마르첸코 소좌.
여단 부참모장: 최용건 대위.
제1교도영 (제1대대. 1로군을 기초로 편성 됨. 1로군에 조선인이 가장 많음. 88여단 에 조선인이 가장 많을 때는 300명인데 김일성휘하나 1로군 소속의 조선인 병사가 180명이나 되었음.)
대대장: 김일성 대위.(1로군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위지휘관)
정치부대대장: 안길 대위.
부대대장: 마리체프 (대위?)
제2교도영 (제2대대. 2로군 2지대를 기초로 편성됨)
대대장: 왕효명. (대위?)
정치부대대장: 강건 상위(후에 대위로 승진)
부대대장: 아다모프 (대위?)
제3교도영 (제3대대. 3로군을 중심으로 편성됨)
대대장: 아직 도착하지 않은 허형식.
정치부대대장: 아직 도착하지 않은 3로군의 김책 (대위)
부대대장: 사포지나크 (대위?)
제4교도영 (제4대대. 2로군 5지대를 중심으로 편성 됨)
대대장: 시세영 (대위?)
정치부대대장: 계정 (대위?)
부대대장: 지레노프 (대위?)
*부언: 여기에 연해주당지 고려인 화교들을 부대원으로 대거 흡수하여 여단규모에 미달하는 인원수를 보충했다.
제1대대장 김일성은 직속조선인부하가 많은데다 제1로군 지도부가 모두 일본군에 의해 희생되고 살아남은 지휘자 가운데 직책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사실상 1로군을 대표하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주보중은 1,2,3로군을 골고루 대하는 원칙에서 김일성을 각별히 대우했다고 한다. 중요한 문제는 이조린, 최용건, 김일성과 주로 상의했으며 조선인과 상의할 민감한 문제가 있으면 김일성과 얘기했다고 한다. 이밖에 중시받은 조선인 간부는 강건상위와 최현상위였다.
88여단의 조선인이 많을 때는 300명좌우였는데 이중 180명이 김일성부대원이거나 1로군소속이였다. 김일성과 1로군은 가장 먼저 소련국경을 넘어 희생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김일성이 해방후 각광받게 된 원인.
1.조선인이 많은 지역에서 활동. 최용건과 김책은 그의 선배이지만 조선인이 적은 한족지역에서 활동해 조선인들에게 적게 알려졌고 조선인 부하도 적었다.
2.보천보전투를 통해 국내에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3.성격이 활달하고 리더십이 있었다. 그대신 김책은 사리판단이 공정하고 신중하여 중국측에 명망이 높았지만 소련으로 들어온 시간이 늦고(1943년 1월에 88여단에 합류. 김일성은 1940년에 소련으로 입경) 성격이 내성적이었다.
4. 최용건과 김책이 중국측에 인망이 높다는 사실은 소련측에 거부감을 주었다. 중국측보다는 자기들과 가까운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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