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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족,조선족,오르첸족,다우르족,만족

by 8866 2006. 2. 28.
1)한족(汉族) han ethnic minority group
 
 

 

 

1.중국의 한족은 인구가 가장 많으며 역사적으로 주로 황하와 장강. 주강삼각주유역과 송료평원에 살고 있었다. 한이라는 칭호는 동한 시기부터 시작하였다.

2.한족은거주지역이 넓어 생활습관과 언어 그리고 복장 등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3.소주일대의 부녀들은 전통적인 오복을 입는다.

머리에는 흑색의 천을 두르고 백색비단의 목둘레. 허리에는 채색의 허리띠를 메고 있다.

 

2)조선족 (朝鮮族) Korean ethnic minority group

 


 

 인구 : 중국의 조선족은 현유인구가 1,920,597명이며 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 요녕성에 분포돼 있고 일부가 내몽골자치구와 내지 일부 성시에 분산돼 살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족의 주요 집거구이다. 만랴오닝(遼寧), 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에 주로 위치하고 있고, 그 외에도 북경(北京), 천진(天津), 신장(新疆), 상해(上海), 성도(成都), 광주(廣州), 서안(西安), 제남(濟南), 항주(杭州) 등의 대도시와 중소도시에 분산되어 있다. 그래도 길림성의 연변 조선족 자치구가 중국 조선족의 주요 집거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은 18세기 초반부터 19세기 말 사이에 조선반도로부터 속속 이주해온 민족으로서 중국에서 생활한지가 지금까지 이미 300여 년이 된다.

 언어와 문자 : 거의 모든 조선족이 조선어를 사용한다. 자체의 언어와 문자를 갖고 있으며 기독교와 유교를 숭상한다. 조선어의 귀속문제를 중국 학술계에서 아직 정론을 나오지 않았지만 알따이어계(阿爾泰語系)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조선족은 대다수가 농업생산에 종사하며 특히 벼 재배에 장기가 있다. 연변지역은 우리나라 동북의 주요 벼 생산지이다.

조선족은 돌과 나무구조의 온돌 집에서 생활했으며 김치와 시고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다. 노래하고 춤추기를 즐기며 여성들은 널뛰기, 그네뛰기를 즐기고 남성들은 씨름과 같은 운동을 즐긴다.

조선족은 어른을 존중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훌륭한 전통이 있으며 소백한 흰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이라고도 불린다.

 종 교 : 대표적인 하나의 종교는 없고, 토테미즘과 조상숭배부터 유교, 도교, 불교로 변해왔고, 현재는 기독교와 천주교의 신도가 가장 많다.

 기 타 : 다른 민족에 비해 문화, 교육, 위생의 수준이 높다는 것으로 인해 자부심이 대단하며, 조선어의 출판이나 신문, 잡지, 방송 등 활동이 활발하다.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은 1990년 현재 총 1,920,579명으로, 주로 길림성(1,181,964명) 흑룡강성(452,398명) 요녕성(230,378명)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나머지는 내몽고자치구와 북경 천진 상해 항주 성도 제남(濟南) 서안 무한(武漢) 등지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 중 전중국 조선족의 40%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 길림성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는 중국 내 조선족의 최대거주 지역으로 약 80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조선족은 대부분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한국어와 한글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극소수의 조선족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중국의 조선족은 300여년 전에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한반도로부터 몇 차례의 대규모 이주를 거쳐 중국의 동북지구에 정착한 후에 서서히 형성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이다.

1616년 만족 조상 노이합적(努爾哈赤: 누르하치)이 여진의 각 부족을 통일한 후 후금(後金)을 세우고 그 세력을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등지로 확장해나갔다. 1636년 그의 아들 황태극(皇太極)은 국명을 청(淸)으로 고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명왕조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을 침공하였다. 무력에 못이긴 조선의 국왕은 청나라에 화의를 청하여 강화도에서 동맹을 맺고,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양국은 각자 자기의 영토를 지키면서, 영원히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을강조하였다.

1604년 청나라 군대가 중원으로 쳐들어가자 이때 여진의 각 부락도 그들을 따라서 함께 남하하여 여진인들이 살던 지역은 텅 비게 되었다. 통일 초기에 청나라 통치 계층은 이 지역의 개발을 돌아볼 틈이 없었지만, 충분한 논의를 거친 다음 1677년에 강희제(康熙帝)는 명령을 내려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수천리 지역을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 안에서 작물 재배, 인삼 진주 채취, 벌목 수령 등을 엄격히 금지시켰으며, 많은 금산(禁山)에 황제의 사냥터를 설치하여 다른 민족의 이주 정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고 조선왕조의 학정에 시달린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은 사방을 떠돌아다니다가 그들 중의 일부는 생존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금지구역 안으로 몰래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난민들의 끊임없는 유입은 청나라 정부와 조선 사이의 외교 분쟁을 유발시켰으며,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국은 협의를 거쳐 공동으로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1712년 5월 양국은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청나라 정부는 국경 지대에 성벽을 쌓고 초소와 검문소를 설치하였으며, 봄 가을에 국경 지대를 순찰하여 법을 어기고 들어와 몰래 경작하는 자가 발각되면 집과 전답을 몰수하여 없애고 국경 밖으로 추방하였다. 조선정부에서도 국경 지대에 군대를 배치하여 국경을 봉쇄하고 그곳을 넘어가는 자에 대해서는 극형으로 다스렸다.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이 금지구역에 몰래 들어와 정착하는 것을 양국 정부 모두 엄격한 방법으로 통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잠입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 금지구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무역상들이었다. 청왕조 초기에 압록강 상류의 평안도와 함경도는 토지가 척박한 데다가 잇따른 자연재해로 흉년이 계속되어 생활필수품도 매우 부족하였다. 이에 궁지에 몰린 조선의 농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압록강 상류를 몰래 건너 중국 동북의 장백(長白) 임강(臨江) 집안(輯安) 및 외남북로(外南北路) 일대로 들어왔다. 같은 시기에 두만강 남쪽에 살던 조선 빈민들도 무산(茂山) 회령(會寧) 종성(鍾城) 등지에서 두만강 상류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처음에는 아침에 들어와 경작을 하고 저녁에 돌아갔으나, 뒤에는 매년 청명절을 전후하여 농기구와 종자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가을에 작물을 수확하여 그것을 가지고 돌아갔으며, 마지막에는 아예 전가족이 이주하여 오랫동안 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에 대하여 청정부에서는 그들을 추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결국 실효를 거두지못했다. 특히 1845년(道光 25년) 이후 양국 정부의 통제가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타서 국경을 넘어와 정착한 조선 빈민들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1840년의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중국은 점점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하였다. ≪중러애휘조약(中俄愛琿條約)≫ ≪북경조약≫ 등의 불평등조약의 체결로 동북 지역은 세계 자본주의 열강의 상품 판매 시장이자 원료 약탈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왕조도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약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하였다. 1860년부터 1870년에 이르는 10년간 조선의 북부 지역에는 수해와 한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죽음의 기로에 선 조선의 이재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들어왔다. 기록에 의하면 1870년을 전후하여 집안현(輯安縣, 지금의 集安市)으로 이주해 온 조선 이재민의 수는 무려 1000호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임강(臨江) 집안과 혼강(渾江) 유역에는 모두 조선의 이재민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청왕조와 조선 정부에서는 국경 봉쇄 조치를 취하였지만 끊임없이 들어오는 조선 이재민들을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었으며, 청왕조의 지방 관리들도 어쩔 수 없어 그들의 정착 생활을 묵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극도로 피폐해진 청나라 정부에서도 고갈된 재정 상황을 만회하기 위하여 많은 논란을 거친 끝에 광서(光緖) 원년(1875년)에 이르러 봉천성(奉天省, 지금의 요녕성과 길림성 동남부)의 봉쇄령을 해제하였다. 그 이듬해는 이 지역에 봉황직례청(鳳凰直隷廳)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안동현(安東縣, 지금의 丹東市)을 두었다. 1877년에는 관전현(寬甸縣) 회인현(懷仁縣, 지금의 桓仁)과 도씨현(道氏縣) 등을 증설하여, 안동현과 관전현을 변외남로(邊外南路)로 삼고 봉황직례청에 예속시켰으며, 회인현과 통화현(通化縣)을 변외북로(邊外北路)로 삼고 흥경청(興京廳)에 예속시켰다. 이와 동시에 무민국(撫民局)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개간을 지원하였다. 청왕조는 봉쇄령을 해제하고 변방 이민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조선의 이재민들이 중국의 동북 경내로 이주하는 데 합법적인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1883년 3월 청나라 정부에서는 동쪽의 무역로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조선 정부와 ≪봉천동변민교역장정(奉天東邊民交易章程≫을 체결하였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장정의 체결은 양국의 국경 무역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동북 이주로를 더욱 확장시켰다. ≪조선족간사(朝鮮族簡史)≫의 통계에 의하면, 1897년 통화 회인 관전 흥경(興京, 지금의 요녕 新賓縣) 등지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8722호, 37000여명으로 모두 28개의 면(面, 지금의 鄕級 행정단위) 단위에 소속되었다. 1903년 봉천성에서는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촌(村)과 영(營)을 향(鄕)과 갑(甲)으로 개편하고 향약제(鄕約制)를 시행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중국으로 이주해 오는 조선인들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1911년에 이르러 변외북로(邊外北路)의 장백 임강 집안 등지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수는 12100여호, 52100여명이었고, 변외남로(邊外南路)의 안동 봉성(鳳城) 관전 등지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수는 1490여호, 6850여명이었다.

흥경은 조선인들이 비교적 일찍 이주해 온 지역의 하나이다. 그들은 대부분 집안 회인과 통화 등지에서 이주해 왔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다시 무순(撫順) 본계(本溪) 청원(淸源) 등지로 퍼져나가 정착하였다. 동북의 대도시 봉천(지금의 沈陽) 지역 내의 조선인들은 주로 1906년 이전에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해 왔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에 일제의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과 애국 독립투사들이 다시 봉천 일대로 많이 들어왔다.

연변은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지역이다. 19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의 정세는 대내외적으로 혼란에 빠지고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아 많은 빈민들이 재난을 피하여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왔다. 1875년 청나라 정부에서 봉쇄령을 해제하고 이민정책을 시행하였다. 1881년 길림 장군 등은 남강(南崗, 지금의 延吉市) 등의 황무지에 이민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에 혼춘(琿春)에 초간총국(招墾總局)을 설치하였다. 1882년 돈호지현(敦化知縣)을 설치하고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1885년 청나라 정부에서는 두만강 이북의 길이 700리, 너비 45리에 이르는 지역을 전간구(專墾區)로 삼았다. 그리고 1883년에 설립한 화룡욕(和龍 , 지금의 龍井縣 智新鄕) 광제령(光霽嶺, 지금의 龍井縣 光開鄕) 서보강(西步江, 지금의 琿春縣 三家子鄕 古井村) 등지의 통상국잡(通商局 )을 월간국(越墾局)으로 고치고 조선인의 이민 업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1891년 길림 장군은 혼춘 이민총국과 월간총국을 월간총국으로 통합하고 남강으로 이전하여 하얼바령(哈爾巴嶺) 이동의 광활한 지역을 남강 초간국 관할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조치들은 연변 지역 개발에 대하여 많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정부에서는 전문 기구를 설립하여 조선인들을 모집하고 황무지를 개간함으로써 국고 수입을 늘린 동시에 지방 관리들과 지주들도 갖은 방법으로 재원을 늘려나갔다. 그들은 숙식과 농기구 종자 등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조선인들을 고용하거나 황무지를 그들에게 임대하여 개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좋은 조건으로 조선인들의 이민은 갈수록 더욱 늘어났으며, 그들은 두만강 유역 등지에 촌락을 세우고 중국 경내의 고정적인 하나의 민족 성원이 되었다.

1890년 중국의 동북 지역에 일찍부터 눈독을 들인 제정러시아는 의화단운동이 동청철로(東淸鐵路)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것을 구실로 군대를 동원하여 중국을 침략하였으며, 이로써 연변과 조선 북부 지역은 제정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 북부의 많은 조선인들은 외세의 치욕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연변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1909년에 이르러 연변에 정착한 조선인 수는 34133호, 184867명으로 늘어났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에 많은 파산한 농민들과 항일투사들이 연변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10년 9월부터 1911년말까지 이주해 온 사람만 19000여명에 달한다.

봉쇄령의 해제와 함께 조선인들은 시베리아와 연변에서 북만주로 이주하여 동녕(東寧) 영안(寧安) 해림(海林) 목릉(穆 ) 등지에 조선 간민촌(墾民村)을 세웠다. 1900년 동청철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제정러시아는 시베리아와 조선에서 많은 조선인 근로자를 모집하였다. 철로가 완공된 후에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하얼빈 일면파(一面坡) 횡도하자(橫道河子) 목릉 등 동청로 동쪽의 모단강(牡丹江)과 목릉하(穆 河) 유역에 거류하였다. 우수리강 연안의 무원(撫遠) 요하(饒河) 호림(虎林) 보청(寶淸) 밀산(密山) 등지의 조선인들은 먼저 시베리아에서 이주해왔고, 그 후에 다시 계속하여 동만주 남만주 한반도에서 이주해왔다. 치치하르(齊齊哈爾)의 조선인들은 한반도 북부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이주해왔고, 만주의 조선인들은 19세기말 영고탑(寧古塔)에서 눈강(嫩江) 유역을 거쳐 이주해왔다.

빈번한 이주와 왕래를 통해서 조선인들은 중국 동북의 만족 한족 등과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섞여살게 되었다. 이주 초기에 조선인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하였으나, 만족과 한족을 비롯한 주변 민족의 도움과 자체적인 노력으로 점점 생활은 개선되어 나갔다. 이로부터 오랜 풍파를 거치면서 그들은 동북의 각 민족 백성들과 함께 생존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족은 풍부한 투쟁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반제 반봉건과 관료자본주의 투쟁을 하면서 많은 생명과 선혈로써 중국사의 한 장을 수놓았다.

1930년대부터 동북의 강산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이 지역에 살고있던 조선족들도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1933년부터1935년 사이에 연길현(延吉縣)에서만 2만여명이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중국 항일세력과 조선족의 연합을 막기 위하여 강제 수용소 정책을 추진하자 조선인들을 삶의 터전인 집과 땅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일제의 잔혹한 통치 앞에서 영웅적인 조선족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중공연변구위(中共延邊區委)와 함께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930년 봄부터 1932년 봄까지 그들은 연변지구에서 "5 30폭동" "8 1길돈(吉敦)폭동"과 추수(秋收) 춘황(春荒) 등의 투쟁을 연속적으로 전개하여 일제의 오만한 기세에 많은 타격을 가했다. 유명한 항일부대인 동북항일연합군 속에서 조선족 지휘관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1개의 군급 편제 단위 속에는 모두 조선족 항일지사가 있었다. 그 중에서 제1군과 제7군은 절반 이상이 조선족 항일지사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에서 일본군을 맞아 생사를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의 이러한 영웅적인 투쟁은 중국항일혁명사상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외에도 조선족들은 의복과 식품을 제공하거나 정찰 통신 업무를 맡는 등 다른 방법으로도 항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항일전쟁 중에 조선족들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일제를 물리치기 위하여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서로를 지원하면서 감동적인 사적을 많이 남겼다. 예를 들면, 1931년 3월 하순, 중공 동만특위(東滿特委) 서기 동장영(童長英)의 병세가 위독한 상태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에게 발견되었는데, 그때 동장영이 잘 걷지를 못하자 그의 간호사이던 조선족 여인 최숙정(崔淑貞)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은 채 동장영을 업고 이리저리 피해다녔으나 결국 혼자의 힘으로 역부족이어서 두 사람은 최후의 탄알을 쏘고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리고 1938년 가을, 냉운(冷雲) 안복순(安福順) 등 8명의 조선족과 한족 항일연합군 부녀단의 여전사들은 극악무도한 적군들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일어났다가 탄약과 식량이 다하자 함께 오사혼하(烏斯渾河)로 몸을 던져 영광스럽게 목숨을 바쳤다. 이 8명의 여인이 강물에 몸을 던진 비장한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오면서 각 민족이 일제에 대항하여 함께 싸운 상징이 되었다.

≪조선족간사(朝鮮族簡史)≫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족들은 항일전쟁에 물질적으로 최대한의 지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적으로도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10여만명의 조선족들이 어렵고도 힘든 전투에 참가하여 만여명의 조선족 전사들이 항일전선에서 목숨을 바쳤는데, 연변 조선족자치주만 하더라도 1713명의 조선족 항일 열사가 있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 중국에는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5만여명의 조선족들이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하여 해방전쟁에 참가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에서만 참전 용사가 52051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 85%가 조선족이었다. 그들은 이 전쟁에서도 용감하게 선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전선의 지원과 구호 활동 등에서도 조선족들은 눈부신 활약을 하여, 연변지구에서만 전선을 지원한 사람들이 222300명에 달했다.

 

3)오로첸족 (鄂伦春族 Oroqen ethnic minority group

 
 

 인 구 : 7.004(1990). 오로첸족은 주로 내몽골자치구동북부의 오로첸자치기,  모리따와기(莫力達瓦旗), 아영기(阿榮旗), 흑룡강성의 타하(塔河), 후마(呼瑪), 쉰크(遜克), 가음(嘉蔭)현과 흑하시에 분포됐다.

 오로첸족이 생활하고 있는 대소흥안령은 중국동북지역, 흑룡강류역의 두 개 큰 산맥으로서 도처에 원시림이 무성하다. 여기에는 검정귀버섯, 버섯, 개암 등 토산물과 약재가 풍부하며 많은 진귀한 짐승들이 자라고 있다. 오로첸족은 세세대대 이 망망한 림해에서 수렵에 의해 생활을 유지해왔다. 50년대에 이르러서야 삼림에서 나와 반농경 반수렵의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종 교 : 샤머니즘, 각종 자연물을 숭배하며 모든 만물에 혼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언어와 문자 : 스스로의 언어가 있으나 문자는 없다. 언어는 알타이어계, 문자는 일반적으로 한문이 통용되고 있다. 그들은 자체의 언어가 있지만 문자는 없다. 그 언어는 알따이어계(阿爾泰語系)만--퉁꾸스어족(滿--通古斯語族)퉁꾸스어지에 속하며 많은 사람이 한어, 오원크어, 따우르어에 능통하다. 오로첸족은 한문을 통용한다.

오로첸족의 가장 유명한 수공예품은 봇나무껍질로 만든 여러 가지 장식품 및 봇나무껍질로 만든 배이다. 이런 수공예품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도안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그들의 수렵문화의 전통적 특색을 충분히 전시했다.


중국 동북 흑룡강 부근 산림에 거주하고 있다. "어룬춘"은 자칭으로서 그 의미는 두가지의 해석이 있는데 첫 번째는 '순록을 타는 사람들' 이고 둘째는 '산꼭대기에사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 번째의 견해를 지지하는 편이다.

 기 타 : 어룬춘족의 주요 교통수단은 말이며, 수렵과 목축을 위주로 살고 있다. 노래와 춤을 즐기는 민족이며, 그들은 고기를 먹고 가죽옷을 입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수렵문화로 인해 창조된 '신인주'라는 곳에 거주하였다. 그것은 우산과 비슷한 형식으로 펼치는 주택으로 겨울에는 짐승의 털을 덮어 보온을 했다. 그러나 1953년에 와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와 같은 주택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4)다우얼족 (达斡尔族 Daur ethnic minority group 

 

 

흑룡강(黑龍江)과 내몽고(內蒙古), 신장(新疆)에 거주하고 있다. 동북의 풍요하고 아름다운 지역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다우얼족은 농업을 위주로 한 목축업과 어업생산도 하고 있다. 주요 분포지는 내몽고, 치치할시와 신강탑성(塔城)이다.

 인 구 : 121,463(1990)

 언어와 문자 : 다우얼語 (알타이어系 몽고어族). 문자는 없다. 대부분이 중국어를 사용하고 소수가 몽고 문자나 하사커 문자를 사용한다. 다우얼족은 문자가 없고 한문, 만족문 및 몽고문을 사용하며 언어는 알타이어계 몽고어족 다우얼족어이다. 다우얼족이 쓰는 방언은 3가지가 있다. 이 민족은 오랜시기 여러 민족들과 생활해 왔기에 한, 몽고, 위글어, 하싸크, 어원크족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종 교 : 샤머니즘으로 자연숭배와 토테미즘, 조상숭배를 한다. 그리고 소수의 라마교가 있다.

 기 타 : 達斡爾(다우얼)'의 이전 명칭인 '達胡爾(다후얼)'이란 단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원나라 때인데 그후 '達呼爾(다후얼)', '達古爾(다구얼)', '達糊里(달후리)' 등으로 음역되어 중국의 각종 문헌에 등장한다. 이들은 언어, 혈통, 습관 등으로 보아 遼(요)나라 때의 契丹(거란)족의 후예로 판명되고 있다.

다우얼족의 마을은 보통 산의 경사면을 따라 개울을 향하여 건축되어 있으며 가옥들은 가느다란 가지들을 엮어서 만든 담으로 둘러 쌓인 마당을 가지고 있다. 집들은 대부분 벽돌로 지어졌으며 초가집도 있다.

전통적인 체육활동으로는 필드하키, 말타기, 활쏘기 등이 있다. 그 중 필드하키는 가장 유명하여, 다우얼족이 있는 지방을 '필드하키의 고향'이라고도 부른다.

여성복식 

오른쪽 여밈의 長袍 위에 조끼 착용.

축제시에는 여러 색으로 수놓은 絹,緞子로 만든 袍에 조끼를 착용.

머리는 틀어 올려 꽃장식. 수놓은 緞子靴를 신음.

남성복식

말타기에 편리하도록 아래 부분에 트임이 있는 長袍를 착용.

襟과 모든 가장자리에는 八寶文으로 선장식. 허리에 폭이 넓은 腰帶를 함

머리에 흰색 포를 두르고, 손에 노루가죽 장갑을 낌.

 

5) 만족 (满族) Manchu ethnic minority group

 



 

동북3성과 랴오닝(遼寧)성에 가장 많이 분포하여 있으며, 그 외에도 북경(北京),천진(天津),신장(新疆), 상해(上海), 성도(成都), 광주(廣州), 은천(銀川),서안(西安)등의 대도시 및 중소도시에 두루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넓게 분산했지만 또 작게 모여 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5개의 만족자치현과 약간의 만족마을이 있다.

 인 구 : 9.846.776(1990)

 언어와 문자 : 만語(알타이어系 만-통구스어族). 1599년 누얼하치에 의해 몽고문자를 이용한 "만"문자가 만들어졌으나, 한족과 동화되면서 약간의 단어와 몇 마디 말 외에는 모두 소멸되었다. 만문은 16세기말 몽고문자를 참조하여 창조되었다. 그리고 경제, 문화, 생활상에서 한족과 왕래가 밀접했기에 만족인들은 한문을 잘 이용했다.

 종 교 : 만족은 처음부터 다신교인 샤머니즘을 믿었었고, 지금까지도 민간에서는 샤머니즘을 신봉하고 있다.

 의식주 : 만족은 원래 농업과 수렵, 채집 등 여러 가지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식생활도 오곡을 비롯해 돼지고기와 각종 야채등 많은 부식들과 간식꺼리가 있다. 그리고 남녀 할 것 없이 술과 담배를 즐긴다. 만족은 주로 농업생산에 종사했으며 성시에 살고 있는 산재민들은 대부분 공업과 문화과학사업에 종사했다. 역사발전 중 만족인민들은 조국의 창립과 문화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만족(즉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지역에 살았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1990년 현재 만족 인구는 982만여명이다. 주요 분포지는 동북 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요녕성(遼寧省)이 4,952,859명으로 가장 많다. 그 나머지는 하북 내몽고 영하(寧夏) 감숙 복건 산동 신강 등의 성구(省區) 및 북경 천진 상해 성도 광주 항주 서안 등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만족은 원래부터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어는 알타이어계 만주퉁구스어족 만주어지(滿語支)에 속한다. 현재 대다수의 만족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그들의 공식 언어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사료에 의하면 만족의 조상은 2천여년전의 숙신(肅愼) 및 이후의 읍루(相婁) 물길(勿吉) 말갈(靺鞨)과 여진 등의 고대 민족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남북조수당 시기에(4~7세기) 숙신읍루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민족 명칭을 물길 말갈이라 했다. 물길은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도 신속히 증가하여 수십개의 부락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속말(粟末) 흑수(黑水) 백산(白山) 등 7개의 큰 부락연맹이 있었다. 그 후 사서에서는 물길을 다시 말갈이라 고쳐 불렀다.

7세기 말에 대조영(大祚榮)은 속말 말갈을 중심으로 송화강(松花江) 상류,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 지방정권인 "진국(震國)"을 세웠다. 713년 당왕조는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다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진국"은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발해국의 정치 군사 제도는 당왕조를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한자를 사용하였다. 국왕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당왕조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당 고종(高宗) 때에 발해국은 당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의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를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이와 동시에 여러 차례 당의 수도 장안(長安) 태학(太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중원지역의 정치 경제제도와 우수한 과학기술 문화의 영향으로 발해국의 농업과 수공업은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제철과 견직은 대단히 유명하였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즉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당왕조는 흑수(黑水, 즉 흑룡강) 말갈 지역에 흑수군(黑水軍)을 조직하고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여, 흑수 말갈 각 부의 수령에게 도독(都督)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 집권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728년에 다시 그 도독에게 황족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 겸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에 제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들을 감독 보좌하게 하였다.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된 흑수부는 흑룡강 유역에 세워진 당왕조의 직속 지방기구가 되었다.

요(遼)가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에 발해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 나날이 흥성하던 흑수 말갈부는 그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발해국을 뒤이어 번성을 누린 흑수 말갈을 거란인들이 "여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 이 명칭은 점점 말갈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세기 초엽에 유명한 아골타(阿骨打)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요를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들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요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과 대치하였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원(元)을 세우자 여진인들은 원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왕조는 흑룡강성 의란(依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하류 및 우수리강(烏蘇里江)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풍속을 따르며 다스리는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5만호부(五萬戶府)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뒤에는 흑룡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를 설치하고 계속하여 두 개의 천호부(千戶府)와 한 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하였다. 당시에 이 여진인들은 대체로 원시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원대 말기에 이르러 원래의 여진 사회는 해체되고 노예제 사회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초에는 명왕조가 동북지구를 관할하면서 여진의 각 부도 모두 명왕조에 귀속되었다. 명왕조는 여진인의 분포 지역 내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여진 각 부의 수령들을 각각 도독 도지휘사(都指揮使) 지휘첨사(指揮僉使) 천호(千戶) 백호(百戶) 진무(鎭撫) 등의 관직에 임명하고 칙서(勅書) 인신(印信) 의관 금전을 하사하였으며, 조공과 마시장의 시간과 대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노아간위(奴兒干衛)의 여진 수령 홀자동노(忽刺冬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흑룡강과 항곤하(恒滾河)가 합류하는 특림(特林) 지방에 중앙 왕조 직속의 지방행정과 군사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 한족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명대에 여진인들은 점점 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장소 이동의 과정 중에 그들은 건주(建州) 해서(海西) 동해(東海)의 3부로 나누어졌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해서여진은 이주한 후에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살면서 북으로 송화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동해여진(명나라에서는 그들을 野人女眞이라고도 불렀음)은 건주 해서 이동과 이북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정착한 후에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동해여진은 그러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완만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제 문화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그들 부락 사이의 빈번한 전쟁으로 서로를 침탈하고 살육하는 참혹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였다. 건주여진 좌위(左衛)의 수령 노이합적(努爾哈赤)은 역사적 조류에 부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여진의 각 부를 점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통일 과정 중에 노이합적은 군사 정치와 생산기능을 갖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은 청대(淸代)의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되었다.

1616년에 노이합적은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고 금나라(즉 後金)를 세웠다. 여진 각 부의 완전한 통일을 따라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바탕으로 일부의 동해여진과 다른 민족을 흡수한 사람들은 오랜 공동생활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635년에 황태극(皇太極)은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버리고 만주(滿洲)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만족(滿族)이라 칭하게 되었다.

1635년 황태극은 여진이라는 이름을 "만주"로 고쳤는데, 이것은 만족 민족공동체가 정식으로 형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듬해에 황태극을 황제라 칭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만족 정권인 대청(大淸)을 세웠다. 1644년 청나라는 군대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와 단시간내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통치 계층은 명왕조 멸망의 교훈을 받아들여 일련의 행정 개혁 조치를 취하고, 이로써 계층간의 갈등과 민족간의 갈등을 완화하여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1667년 강희제(康熙帝)는 조서를 내려 권지(圈地)를 영원히 폐지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부역을 정돈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켰다.그리하여 백성들은 전보다 더 좋은 생산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다시 사회 경제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의 인구 경지면적 농업과 수공업은 모두 현저하게 증가되거나 향상되어 자본주의의 기틀이 더욱 많이 잡혀갔다.

강희제의 집권 중반기에는 국내외적으로 적대 세력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다. 만족 백성들은 조국의 이익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고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통일을 유지하고 변방을 강화하기 위한 전쟁에 가담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희제는 전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삼번(三藩)"의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만족 중심의 팔기군(八旗軍)을 친히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정러시아와 연합하여 내외몽고를 침공한 갈단( 爾丹)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에 이르는 70여년간에 걸친 투쟁으로 마침내 즁갈(爾) 귀족집단의 분열 책동을 분쇄하였다.

일찍이 17세기 중엽에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흑룡강 유역을 끊임없이 침입하였다. 1685년 강희제는 만족 도통(都統) 팽춘(彭春)을 파견하여 팔기군과 수군을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였으며, 그 후 1689년 중 러 쌍방은 평등의 원칙 위에서 네르친스크(尼布楚, Nerchinsk)조약을 체결하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8세기에 대영제국의 통치자는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네팔의 통치자로 하여금 티베트지역의 봉건 영주와 연합하여 티베트 중부지방을 침공하게 하였다. 건륭제는 만족 대학사(大學士) 복강안(福康安)에게 군대를 거느리고가서 그들을 진압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에 복강안은 티베트지역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네팔군을 격파하고 티베트지역을 안정시켰다. 19세기 초에 영국 식민주의자는 과거의 실패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장격이(張格爾)를 시켜 여러 차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을 침공하게 하였다. 도광제(道光帝)는 만족 대학사 장령(張齡)으로 하여금 신강 경내의 만족 한족 군대와 동북 팔기군을 거느리고 달려가 그것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에 장령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장격이을 생포함으로써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중국 영토에 대한 야욕을 분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반란 세력 토벌을 통하여 중국의 통일을 강화하고 광대한 영토를 공고히 하였다. 이것은 비록 각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이룩한 결과이지만 18세기 후반에 만족이 발휘한 역량은 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청왕조의 통치자들은 부패하고 무능하여 자본주의 열강들은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처럼 제멋대로 날뛰었으며, 이러한 참상을 목도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에 국가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자유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만족과 다른 소수민족 백성들은 함께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예를 들면, 제1차아편정중 중에 좌령융복(佐領隆福)은 만주 팔기군을 거느리고 절강 사포(乍浦) 관음산(觀音山) 기슭의 천존묘(天尊廟)를 사수하면서 영국 침략군의 공격을 다섯 차례나 격퇴하고 많은 적군을 살상하였으며, 276명의 만족 방위군도 대부분 전사하였다. 강소(江蘇) 진강(鎭江)을 방어하던 팔기군 1500여명은 10배나 많은 침략군과 성능이 우수한 총 포를 맞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혈전을 불사하여 한치의 땅도 내주지 않았다.

제2차아편전쟁 중에 제정러시아 식민주의자는 청왕조의 통치력이 북방에까지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100㎢에 달하는 동북 변경 지역을 강제 점령하였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중국인들의 분개를 불러일으켜 당시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족과 한족 백성들은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 제정러시아의 칠략과 식민통치에 대하여 장기간 용감하게 투쟁하였다.

1894년 중일갑오전쟁이 발발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였다. 일본 침략군이 중국의 요동(遼東) 지역을 점령하여 그 세력을 신속히 확장시켜나가자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족, 한족,조선족 등의 백성들은 함께 들고일어나 민간자위단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요양(遼陽) 방어전쟁 중에 만족 한족 백성들의 합동작전으로 한 달 동안 일본군의 침공을 네 번이나 물리치고 일본 침략군의 봉천성(奉天城) 진입 계획을 무산시켰다.

1900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 일어나 그 세력이 하북 산동과 동북 3성에서 신속히 확산되어 갔다.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던 만족과 한족 백성들은 모두 이 혁명의 대열에 몸을 던졌다. 그 중 북경 의화단의 기세가 가장 드높았는데, 그들은 유명한 서십고(西什庫)교회 전투에서 막강한 역량을 과시하였다. 만족 병사 은경(恩慶)은 총으로 시비를 걸어온 독일 공사 클링더(克林德)를 사살하였다. 비록 의화단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자와 청왕조 봉건 통치계층의 연합으로 진압되었지만, 광대한 만족 한족 백성들이 보여준 반침략에 대한 결심과 영웅적인 기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찬양되고 있다.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중국 역사상 대단히 흭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수한 만족 백성들의 호응과 지지를 받았으며, 그들 중에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있다. 만족에게 있어서 신해혁명은 하나의 거대한 사변이었다. 그것은 청왕조의 종말을 선고함과 동시에 한족과 만족 백성들을 짓누르고 있던 봉건군주전제제도와 부패한 팔기제도를 제거하여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만족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 18사변"을 조작한 후에 대대적으로 중국을 침입하였으며, 이로써 광대한 동북지역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 곳에 살고있던 200여만명의 만족 백성들과 각 민족 백성들은 모두 일본군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식민통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국가와 민족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만족 귀족 집단의 대표자 부의(溥儀, 청대 마지막 황제)는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일본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滿洲國)"의 꼭두각시 황제에 올랐다.

이 꼭두각시 정권이 성립되자 백성들은 그것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만족 백성들은 의용군 항일회 혁명유격대 등의 각종 항일조직에 가담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35년에 동북항일연합군이 설립되자 그들은 길심철로(吉沈鐵路) 연선 연변지구 송화강 중하류와 목단강(牧丹江)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그 지역의 만족 백성들도 한결같이 들고일어나 항일을 위한 혁명 대열에 가담하였다. 왕광녕(王光寧) 포거괴(鮑巨魁) 진한장(陳翰章) 관화신(關化新) 이준산(伊俊山) 등은 모두 항일연합군의 유명한 만족 지휘관들로서 항일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7.7사변"은 항일전쟁의 전면적인 발발을 의미한다. 중국공산당은 단호한 항전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팔로군(八路軍)을 거느리고 항일 근거지를 개척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수많은 만족 백성들은 팔로군과 신사군(新四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팔로군 소속의 만족 지휘관과 병사들은 적의 후방까지 깊숙히 침투하여 항일 근거지를 세우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만족 출신의 뛰어난 지휘관 관향응(關向應)은 하룡(賀龍)과 함께 진서북(晋西北)을 수복한 후에 진수(晋綏) 항일 근거지를 개척하였으며, 1938년에는 하룡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기중(冀中)으로 진격하여 기중평원(冀中平原) 항일 근거지를 공고히 하였다.

각 민족 백성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진하여 항일전쟁의 승리를 쟁취하였으며, 그 후 중국공산당은 동북 해방구 백성들을 영도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인민대중의 생산력과 혁명성을 적극적으로 고취시켰다. 해방구의 만족 백성들은 항일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전선을 지원하였으며, 일본군 점령 지역의 만족 백성들도 항일전쟁의 승리가 있기까지 여러 가지 형식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만족은 다른 소수민족과 함께 사회주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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