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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병자호란

by 8866 2006. 2. 8.
저는 병자호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꼭 12월 10일까지 해야되요. 제발 알려주세요.


1.병자호란
 
조선의 친명 배금 정책과 함께 명의 장수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섬)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후금은 크게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자신만이 이등공신에 책봉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반정 실패 후 그는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서인정권을 응징할 것을 종용하였다.
 
인조 4년(1626년), 왕자 시절부터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던 홍타이지(태종)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정책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호전적인 홍타이지는 조선의 친명 정책과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문제삼으면서 조선에 쳐들어 왔다. 그는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을 걸고 3만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정묘호란, 인조 5년, 1627년)
 
전쟁이 시작되자 후금군은 의주, 정주, 선천, 곽산 등지를 거쳐서 황해도 평산까지 육박해오면서 일부는 가도를 공격하였다. 이 사이 용골산성과 의주지방에서 정봉수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항전하였지만 후금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였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조선 정부 내에서 화의론이 대두하였고 후금 또한 장기 출병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국간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후금은 강화 교섭 3일만에 ‘강화서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강화서약으로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兄弟之盟:형제의 나라)`을 맺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후금은 승전국으로서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식량을 내어 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명을 정벌할 병선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홍타이지는 내몽고를 정벌하는 한편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을 공격하면서 기세를 떨쳤다. 그리고 조선에 대하여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신하의 나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조선을 `아우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만드려는 굴욕적인 요구였다. 당시 척화파의 강경론을 대표하는 홍익한은 이렇게 상소하였다. `신은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오직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랑캐를 섬긴다는 말은 어찌된 일입니까?` 이렇듯 후금의 무리한 군신관계 요구로 척화론(斥和論:강화를 배척, 즉 싸우자는 주장)이 대두하고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어갔다.
 
인조 14년(1636년),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하여 왕자 대신 및 척화 주장자들을 잡아 보내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미 척화론이 대세를 이룬 조선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명을 정벌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같은 해 12월 1일 만주, 몽고, 한인의 혼성병력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 침략을 재개하였다.
 
팔기군을 주력으로 하는 여진족의 기병은 우수한 기동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안주까지 쳐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뾰족한 방어 대책을 찾지 못한 채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놓고 피난처를 정하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 12월 14일 개성 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통과했음이 알려지자 인조는 종묘와 비빈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세자와 대신들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그러나 이미 청군이 경기 지방까지 들어와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고 말았다.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이 차단되자 인조는 급히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강화도 피난 계획을 세우고 식량과 군비를 강화도에 집중시켰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로 인해 남한산성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당시 성내의 식량으로는 두 달을 버티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식수난은 더욱 심각했다.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조선에 불리해져 갔다. 체찰사 김류가 포위망을 뚫어 보려 하였으나 청군의 매복 공격으로 대파당하자 사기마저 크게 꺾이게 되었다. 전국에 근왕병을 모집하였으나 이것마저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마침내 강화도마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와 조선 정부는 전의를 상실하였다. 결국 청의 요구대로 척화 강경론자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을 결박지어 청의 진영으로 보내고 항복의 뜻을 전하였다. 항복 교섭은 조선 측의 주화론자(主和論者:강화를 주장하는 사람) 최명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조 15년(19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현재의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치루었고 청군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김상헌 등 척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묶어 심양으로 돌아감으로써 병자호란은 끝이 났다.
 
2.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요충지로 기능해 온 장소이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병자호란 丙子湖亂
 
1636년(인조 14)에 청이 조선을 침략해 일어난 전쟁. 이 전쟁에서 조선이 패함으로써 명과 관계를 끊고 청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외교 질서가 수립되었다.
 
  (1)배경-압록강 북쪽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통일운동을 크게 일으켜 1616년에는 누르하지가 후금을 세웠다. 조선은 여진족이 처음 발흥하던 광해군 때까지는 중립 외교정책을 펴며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금의 세력이 점차 강해져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그 후 후금은 만주 대부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는 군신의 관계를 맺자고 요구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에 도와준 명의 은혜를 저버릴수 없으므로 청과 화의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을 휩쓸었고 현실적으로도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을 바칠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 드릴 수 없었다. 후금은 1636년 4월에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태종이 황제를 칭했으며 11월에 조선의 왕자 대신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를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그러나 조선은 그 것을 받아드릴수 없었다.
 
  (2)경과-1636년 12월에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침입했다. 조선에서는 의주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적을 맞았으나 청군의 선봉은 그 곳을 피해 별동대를 한양으로 진격시켰다. 조선 조정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가 14일에 적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보고를 받고 김경징을 검찰사 장신을 주사대장에 임명하여 강화도를 지키게 한 후 윤방과 김상용의 책임하에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빈강씨 원손 봉림 대군 들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또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한양을 지키게 하고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이미 홍제원에 도달해 길을 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 뒤 이조판서 최명길이 청군 진영에 나가 침입한 이유를 따지며 진격을 막는 동안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상성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는 신경진 구굉 구인후 이서 이시백 등이 수비군을 지휘했는데 군사는 1만 3천이였고 양신은 50일분이 남아있었다.
청군은 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다음해 1월 1일에는 청 태종이 2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직접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조선군은 성 밖에서 여러 차례 적과 싸워 때로 이기기도 했지만 전세에 영향을 미칠수는 없었다. 허나 각도에서 의병이 일어나 시기가 늦어 남한산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3)결과-전쟁 동안에 조선에서는 화의를 맺자는 주장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이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최명길이 주도한 주화론이 김상헌과 정온이 이끈 척화론을 누르고 대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청의 요구가 조선 왕이 직접 항복 의식을 치르고 척화 주모자를 결박해 오라는 강경한 것이여서 말성이던 중 1월 21일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세자빈과 대군이 포로로 잡히자 결국 항복하기로 했다. 1월 30일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의식을 갖추어 항복했다. 청군은 돌아가면서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등을 볼모로 잡아갔다. 또한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4)영향과 의미-조선의 지배층은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자 명에 대해 의리를 지키고 청을 정벌하겠다는 북벌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 네ㅐ정의 독자성을 침해박지 않는 정도에서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줄곧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동안 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론과 종묘사직을 보호하고 백성의 희생을 줄이려면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화론이 맞섰다. 이 주장들은 국가 운영에서는 서로 보완적이었지만 개인으로 서는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문제였다.
 
 
남한산성 南漢山城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돌로 쌓았으며 사적 제57호이다. 남한산은 한강을 중심으로 북한산과 마주보며 서울을 감싸고 있어 한강유역의 군사 요충지이다. 따라서 여러성에서 축조되어 '산성의 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뒤 기원전 6년에 위례성에서 이 곳으로 천도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한 남한산성의 시작은 7세기 이후로서 신라 문무왕 때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 그 바탕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광해군 때 북방의 방비를 목적으로 성을 쌓았고 그 뒤 인조 때 여러 차례 다시 쌓아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랑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의 성으로 완성했다. 이때 광주읍 치소를 이곳으로 옮겼다. 공사에는 전국의 승군을 동원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지만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가지 시설이 확장했다.
  남한산성은 단지 수도를 지키는 목적만이 아니라 유사시에 왕이 거처하며 정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궁궐과 유사한 시설을 갖추었다. 인조 때부터 순조 때까지 상궐 73칸 반 하궐 154칸의 행궁 여러 누각 객관인 인화관 종묘와 사직을 옮길 우실 각종 창고와 관아 들을 갖추었으며 수어청 제승헌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 같은 군사시설도 설치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40여일의 항전 끝에 인조가 청에게 치욕스런 항복을 한 뒤 대부분 시설이 소실되었다.
 1960년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하여 지금은 둘레 8km 높이 7.5km의 성벽이 복원되었다. 성 내부에는 동.서 남루 장대 돈대 암문 우물.보.누 같은 방어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사찰 성황당 현절사 등의 사당 영월정을 비롯한 정자 온조왕묘 등이 있다.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36.44km(제곱)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초기 백제의 유적이 많아 역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그럼 잘해가세요
 
중요한 것만 뽑아 적어 드렸습니다.



 
출처 : 블로그 > 15억궁궐내부 | 글쓴이 : 이세혜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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