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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고구려와 중한의 관계 및 귀속

by 8866 2009. 11. 2.

 

고구려와 중한의 관계 및 귀속

출처: 고구려발해학회


                                          孫 進 己(瀋陽東亞硏究中心)


현재, 사람들이 모두 고구려의 귀속에 대해 아주 큰 흥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상 고구려의 귀속은 단지 역사상에서의 고구려의 정치귀속을 가리키는 것이고, 하나의 멀고먼 지난 역사문제이며 근근이 하나의 학술문제이다. 근년에 와서 일부 사람들이 고구려귀속과 기타 허다한 문제를 함께 뒤섞어 문제의 복잡을 가첨하였다. 나는 이 문제를 똑똑히 연구하려면 반드시 기타의 허다한 관련문제와 일일이 갈라놓고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것은, 선입견을 타파하여 고구려를 고려로 오늘의 조선인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선입견을 타파하지 않으면 토론할 여지가 없다.
둘째, 역사상의 귀속과 현실의 계승을 나누어야 한다. 역사상의 귀속은 당시 역사상의 고구려가 누구의 관할에 속하고, 아니면 하나의 독립국인가를 가리킨다. 역사상의 귀속은 오늘 현실의 계승과 無關하고, 오늘 현실생활 속에서 고구려의 역사문화유산을 누구에게 계승되는 것과는 다른 하나의 문제이다. 이 계승은 고구려가 멸망된 뒤에 장시기 역사가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고, 지금의 중조국계로 결정되는 것이며 응당 중조(한) 쌍방이 공동으로 계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셋째, 고구려가 역사상에서 中朝(韓)와의 관계이다. 이는 여러 방면의 허다한 문제를 언급하게 되지만, 이런 여러 방면이 모두 고구려의 역사귀속과 유관한 것이 아니며, 나중에는 고구려의 귀속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를 연구하려면 이런 문제를 모두 고구려의 역사귀속과 함께 놓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고구려의 귀속이다. 당시 역사상의 고구려의 귀속은 다만 고구려가 당시 역사상에서 하나의 독립국인가 아니면 모 나라의 속국 혹은 모 나라의 지방정권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점을 확정하였다하여도, 이를 근거로 하여 현실 속의 각 국의 계승관계를 개변시키지는 못하며, 고구려의 원래의 토지와 인민들이 지금 누구에게 귀속되면 누구에게 귀속되는 것으로써 누구도 역사발전으로 형성된 현황을 개변하지는 못한다.
이 몇 개 문제의 관계와 각 문제의 성질을 똑똑히 나누고 토론하면 문제가 아주 잘 풀린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많은 부동한 문제가 함께 엉키고 그 위에 또 선입견, 현실의 이해까지 가첨되어 일단 감정이 움직이면 냉정할 수 없게 되며 문제가 똑똑히 토론될 수 없게 된다.


        一 .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선입견을 배제하여야 한다.

 

장시기이래, 일부 사람들의 심목 속에는 고구려가 곧 고려이고 고려가 곧 조선이라는 일종 습관성적인 견해가 이미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의문이 없는 설법이 아니다. 이 설의 유래는 아주 오래나, 이 설법은 전면적이 아닌 설법이다. 왕씨 고려가 고씨 고려의 계승자인가? 나는 변중(邊衆)의 문장의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닌 것이다."("王氏高麗幷不是高句麗的繼承者")라는 설법을 동의하지 않는다.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왕씨 고려가 고구려의 3분의 1의 토지와 4분의 1의 인민을 계승하였기에, 왕씨 고려가 고구려를 하나도 계승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왕씨 고려가 고구려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다른 3분의 2의 토지와 4분의 3의 인민은 중국에서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렇다면 고구려가 단지 조선(한국)인의 선인이라고만 말할 수 없고, 그리고 고구려도 중국인의 선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는 하지 못한다.
지난 몇 연간에 일부 사람들이 고구려의 실지를 회복하자고 하기에 나는 아주 괴상하게 생각하였다. 고구려의 토지는 단지 조선(한국)에 거주하는 고구려인의 후예만 계승하여야 하고 중국에 거주하는 고구려인의 후대들은 계승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는 실제상 형제가 분가한 것과 같아, 분가하여 천여 년이 된 뒤에 한 집의 자손이 다른 한 집 자손의 재산을 점유하겠다고 하면서, 또 실지 수복이라는 미명으로 말하는 것을 종래로 들어본 적이 없다. 누가 누구에게 잃었는가?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잘 경영하고 이미 다른 사람에게 계승한 재산을 탐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또한 천여 년의 융합을 거쳐 중국에 있던 고구려인은 이미 중국의 각 민족과 융합되었고 조선(한국)에 있던 고구려인은 이미 조선(한국)의 인민과 융합되었기에 누가 능력이 있어 천여 년 전의 고구려인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고 고구려국가를 다시 세우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역사가 장시기 발전하여 형성된 현황을 승인하고 각자가 자기가 얻은 고구려유산을 계승하여야 하지 누구도 독점하려고 하여서는 안 된다. 이런 선입견을 버리지 않으면 마음 편하게 공동이 고구려역사를 연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二. 역사귀속과 현실의 계승을 분명히 나누어야 한다.

 

과거에 나는 이미 역사귀속과 현실의 계승은 두 개의 부동한 문제라고 여러 번 서술하였다. 역사계승은 당시의 역사시기에 고구려가 누구에게 귀속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현실계승은 이후의 발전 중에서 고구려의 토지와 인민을 어느 나라가 계승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앞의 문제는 당시의 고구려정권이 정치상에서 누구에게 관할되었는가에 의해 결정되고, 뒤의 문제는 이후의 장시기 발전하여 형성된 오늘의 국계에 의해 결정된다. 고구려가 멸망 된지 이미 천여 년이나 되기에, 고구려 당시의 귀속을 오늘의 현실계승의 의거로 하여 사용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역사상의 고구려귀속을 토론하는 것은 다만 역사상의 학술문제일 뿐이고 당시 역사의 진면모를 밝히는 것뿐이지, 현실의 계승과는 이미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이는 이미 어떠한 현실의 정치이익에 언급되지 않으며, 어떠한 사람도 고구려 역사상의 귀속에 대한 부동한 인식을 근거로 하여 현실정치에 대해 어떠한 요구를 제출할 수 없다.
현실계승에 대해 세계 각국에는 하나의 통용하는 원칙이 있다. 즉 현재 어느 한 나라의 영토 내의 일체 사람들이 활동한 역사와 그들이 창조한 문화유산은 당연히 이 나라와 인민에게 계승되며, 여러 나라는 다른 국가의 영토상의 역사를 본국의 역사에 써넣을 권리가 없다. 역사상에서 본국에 속한 적이 있으나, 이 토지가 이미 타국에 합법적으로 점유되어 일정한 기한이 도달되고 아울러 쌍방의 정부에서 협약을 맺고 승인을 하면 곧바로 그렇게 처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역사상 로마제국이 비록 절반이나 되는 유렵을 점유하였지만, 오늘의 이태리는 당초의 프랑스, 영국을 이태리의 역사에 써넣을 수 없다. 프랑크왕국은 오늘의 프랑스, 독일, 이태리를 포괄한 적이 있었으나, 오늘의 프랑스 역사에서도 독일과 이태리의 역사를 프랑스의 역사에 써넣지 않았다. 오늘의 미국인 중에는 비록 극소부분의 고대 인디안인들의 후대가 있지만, 오늘 미국 땅 위의 고대 인디안인의 역사와 문화유산은 모두 오늘 미국역사의 일부분임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현실계승도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오늘 중조변계의 형성은 이미 장시기의 역사가 있다. 당현종(唐玄宗)이 패강(浿江)이남의 원 고구려의 땅을 신라에 하사하였고, 요성종(遼聖宗)이 또 압록강이동의 원 고구려의 땅을 하사할 때에 여진인들이 거주하는 수백 里의 땅을 고려에 주었고, 금태조(金太祖)는 또 고려가 保州 등지를 점유하는 것을 윤허하였고, 명성조(明成祖)는 또 도문강(圖們江)이남의 당시 여진의 소유인 원 고구려의 땅을 조선에 주었기에, 오늘의 중조변계가 형성되었고 아울러 양국 정부가 일단 다시 협약을 맺고 이 변계를 승인하였다. 그러므로 양국 인민들이 각자 땅에서의 역사와 문화유산의 계승권에 대해 명확히 구분하였다. 하여 오늘 중국 토지 위에서의 고구려인 및 그 역사문화는 중국에서 계승하게 되었고 오늘 조선(한국) 토지 위에서의 고구려인 및 그 역사문화는 조선(한국)에서 계승하게 되었는데, 중국은 대개 고구려 토지의 3분의 2와 인민의 4분의 3을 계승하게 되었고, 조선은 대개 고구려 토지의 3분의 1과 인민의 4분의 1을 계승하게 되었다. 무슨 이유가 있기에 조선(한국)에서 계승한 3분의 1의 토지 위의 4분의 1의 후대로써 중국의 고구려 4분의 3의 후대의 고구려의 3분의 2의 토지에 대한 계승권을 배제하려고 한단 말인가? 오늘 고구려인은 이미 독립 된 민족이 아니고, 이미 오늘의 중국과 조선의 각 민족 중에 융합되었다. 그러므로 중조 각 민족은 당연히 이 역사유산을 나누어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 남은 고구려인은 오늘의 중국인 중에서 단지 소수를 차지하고 조선에 남은 고구려인은 오늘의 조선족 중에서도 단지 소수를 차지할 뿐이다. 중국은 漢族을 주체로 하여 형성되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신라인을 주체로 하여 형성되었다. 물어보고 싶은데, 여기에 계시는 학자들 중, 고구려인의 후대가 얼마나 있는지, 대부분이 신라의 후예가 아니고 또 누구인가.
그러나 현실의 계승은 다른 문제이고 역사상의 귀속은 또 별도의 다른 문제이다. 현실 중에서 고구려의 역사문화를 중조 양국에서 공동으로 계승하였으므로, 역사상의 귀속도 그렇게 劃分하여야 한다고 말하여서는 안 된다. 當初에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역사의 전기는 중국에 속하고 후기의 평양천도이후는 조선에 속하며, 압록강 북쪽은 중국에 속하고 이남은 조선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바로 현실의 계승으로 역사상의 계승을 대체한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상 오늘의 국계는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 역사가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고, 고구려가 생존하고 있을 시기에는 오늘의 중조국계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 고구려의 압록강 북쪽과 압록강 남쪽은 모두 하나의 정권에 속하고, 당시의 고구려가 역사상에서 양국에 분별되어 귀속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의 고구려가 역사상에서 구경 누구에게 귀속되었는가를 확정하자면, 오직 당시의 고구려정권이 정치상에서 누구의 관할에 귀속되었는가를 이용하여 정하여야 한다. 즉 중국 역사 중의 각 왕조정부에 귀속되었는가? 아니면 조선(한국) 역사상의 각 朝代정부에 귀속되었다는 것으로써 정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漢魏부터 隋唐까지의 예속관계와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예속관계가 유무한가를 밝히는 것으로 정하여야 한다. 만약 역사사실이 증명되어 고구려가 당시에 역대의 중국황조에 예속되었다면 고구려는 역사상에서 당연히 중국에 속하고, 만약 역사사실이 증명되어 고구려가 당시에 신라에 예속되었다면 당연히 조선(한국) 역사상의 지방정권인 것이다.
1993년, 집안에서 소집한 한 차례의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박시형(朴時亨) 등은 중국학자들이 고구려를 중국의 것이고 오늘의 국토를 의거로 하여 말한다고 비평한 일이 생각난다. 그러나 실제상 오히려 상반되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당시에 의거한 것은 상반대로 바로 역사상 당시의 고구려가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예속관계였고, 박시형 등이 도리어 바로 고구려는 고려이고 조선의 선인이라는 등 현실계승을 이용해 이유로 삼아 고구려를 조선의 것이라고 증명하였고, 당시 역사상에서의 고구려의 실제귀속을 의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약 조선(한국)의 학자들이 진정 고구려의 귀속을 토론하려면 현실계승으로 역사귀속을 대체하지 말기를 바라며, 당시에 고구려가 조선의 전신인 신라에 귀속되었다는 증거를 진짜로 내놓아야 한다.
일부 조(한)의 학자들은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고구려가 오늘의 조선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자가 옳은지, 고조선이 오늘의 조선과 등호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잠깐 불문하자. 그러나 고구려가 건립하기 전에 누구에게 귀속되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으로 곧 고구려가 건립한 후에 누구에게 귀속된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이는 두 개의 부동한 문제로서, 하나는 고구려가 건립하기 전에 누구에게 귀속되었는가를 설명하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가 건국한 후에 누구에게 귀속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은 후자를 토론하고 있다. 命題를 바꾸어 전자로써 후자를 대체할 수 없으며 이 둘도 호상 증명할 수 없다. 가령 고구려가 건립하기 전에 조선에 속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하더라도 이로 하여 고구려가 건립된 후의 실제귀속을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구려가 건립된 후의 실제귀속은 응당 고구려가 건립된 후에 누구의 관할에 귀속되는 것으로써 결정된다.


        三. 고구려와 중국, 조선(한국)의 역사상에서의 관계

 

지금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귀속문제를 토론할 때에 항상 고구려와 중국, 조선(한국)의 역사관계(일부 사람들은 고구려의 역사지위라고 말한다.)의 여러 방면의 문제를 고구려의 귀속과 함께 놓고 토론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민족원류, 고구려가 누구의 땅 위에서 건립되었는가, 고구려인민의 流動, 고구려토지의 변화, 고구려와 중국, 신라, 백제의 관계 등등이다. 이런 문제는 고구려와 중조(한)의 역사관계를 요해하는 것에는 당연히 아주 중요하고, 우리들이 고구려의 역사지위를 확정하는 것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당시의 정치귀속을 모두 결정하지는 못한다. 이런 문제와 고구려귀속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하여 아래에 이런 문제에 대하여서도 일일이 토론을 가하려고 한다.
첫 번째 관계이다. 고구려민족은 어느 나라의 민족에서 기원하였는가? 혹은 어느 나라의 민족에 더욱 접근하는가?
최근에 한국의 신문에 한 사람이 문장을 발표하여 고구려와 신라, 백제는 동일한 민족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어느 때에 한 민족으로 되었다고 증명하는 어떠한 史實을 종래로 보지 못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확실히 일부 유민들이 신라민족 중에 융합되어 들어간 것은 있다. 하지만, 이 이전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이미 한 민족이라고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들 세 민족은 부동한 내원이 있고, 부동한 지구에서 형성되어 근본 동일한 민족이 아니다. 신라는 진인(秦人)과 한인(韓人)의 결합에서 기원하였고 한반도의 동남부에서 형성되었다. 백제는 貊(夫餘)인과 韓人에서 기원하였고 반도의 서남부에서 형성되었다. 고구려는 맥(부여)인, 高夷와 대량의 漢人에서 기원하였고 중국 대륙(오늘의 吉林省과 遼寧省의 변계)에서 형성되었지, 반도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고구려가 조선반도에로의 진입은 그가 민족으로 형성된 후의 수백 년의 일이다. 당시에 신라, 백제도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수백 년이 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사이에 낙랑군, 대방군을 간격을 둔 고구려가 어떻게 되어 신라, 백제와 동일 민족이 되었는지 잘 모를 바이다?
또 일부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구려민족은 고조선족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조선전사』(『朝鮮全史』)에서는 "고구려국가를 건립한 기본 민족은 고대조선족 중의 한 갈래인 貊族이다."고 말하였다. 이것도 史實에 부합되지 않는다. 고조선족은 商人, 良夷와 穢人에서 기원하였고 조선반도의 서북부에서 형성되었다. 고구려인은 맥인, 고이와 漢人에서 기원하였고 중국의 대륙에서 형성되었다. 맥인은 중국 동북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한 종족이로서 종래로 고조선족 중의 한 갈래가 되지 않았다. 고구려인이 고조선인의 원래 거주한 지역에 들어온 시기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의 4백년 뒤이다. 고조선인은 4백년 사이에 이미 낙랑군의 한족에 융합되어 들어갔다. 고구려인은 근본 고조선인의 후예가 아니고 완전히 부동한 민족이다.
또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穢, 貊, 韓은 하나의 고조선 類型人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첫째로는 이를 근본 증명할 수 없다. 穢, 貊, 韓은 세 개의 기원과 분포가 근본 다른 종족이다. 둘째는 가령 한 발을 뒤로 물러나, 확실히 고대에 하나의 고조선 유형인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分化되어 부동한 종족으로 된 후에도 동일한 민족으로 할 수 있는가를 증명할 수 없다. 민족과 종족은 근본적으로 두 개의 부동한 개념이다. 셋째, 고대 인종유형이 형성될 때에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고, 이런 고대 인종유형이 있다고 하여도 정치귀속과 관계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민족의 기원에서 고구려와 조(한)의 관계를 탐구해 보면 실로 그러만한 深切한 관계가 없다. 도리어 고구려인은 민족의 기원상에서 중국과 오히려 지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貊人, 夷人, 漢人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중국의 민족이고 종족이다. 맥인(부여인)은 장시기 이래 중국의 동북지구에서 생활한 종족이며 장시기 중국의 역대 정부의 관할에 귀속되었고 후에도 대부분 모두 중국의 각 민족 중에 가입하였다. 夷人은 줄곧 중국의 동부 연해지구에서 생활한 중국 동북의 한 종족이다. 漢人은 중국의 주체민족이다. 그리고 漢人은 고구려민족 중에서 아주 큰 비례를 차지하였고 날이 감에 따라 주요 성분으로 되어갔는데, 이것도 부인할 수 없는 史實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고구려가 민족의 기원상에서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할 뿐이지, 고구려의 정치귀속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오늘의 연변의 조선족은 조선에서 기원하였지만, 지금은 중국의 땅 위에서 거주하고 중국정부에서 관할하기에 중국인이다. 그가 조선에서 기원하였다고 하여 조선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에서 허다한 중국인이 조선에 건너가 생활하였다. 그들이 중국에서 기원하였다고 하여 중국에 귀속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일찍 조선족에 융합되어 조선에 귀속된다. 미국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국에서 기원하였으나, 오늘의 그들은 미국인이고 영국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민족의 기원은 다만 하나의 역사연원관계를 증명할 뿐이지, 이후의 고구려의 귀속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두 번째 관계이다. 고구려가 어느 나라의 땅 위에 건립되었는가?
고구려가 오늘의 조선(한국)의 先人인 삼한, 신라, 백제의 땅 위에서 건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기본상 쟁론할 필요가 없는 史實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구려가 고조선의 땅 위에서 건립되었기에 응당 조선에 속한다고 말한다. 고구려는 오늘 중국 대륙의 요녕성과 길림성변계의 新賓, 桓仁, 集安 등 곳에서 건립되었고, 고조선은 당시에 漢과의 분계는 浿水부근이었고 패수를 넘으면 곧 漢의 변방이었다. 패수가 대동강 혹은 청천강인지를 막론하고 고구려는 고조선의 범위 내에 있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후한서   예전』(『後漢書   穢傳』)에서의 "예 및 옥저, 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다."("穢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고 한 것을 근거로 하여 고구려가 고조선의 땅 위에서 건립되었다고 증명하고 있다. 『한서   조선전』(『漢書   朝鮮傳』)의 기재에서 보면, "처음 연나라 때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었다."("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고 하였다. 고구려는 당연히 이 때에 조선에 속할 수 없었다. 이 때에 조선에 속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조선도 연의 일부분이었다. "秦이 연을 멸망시키고 遼東外 에 귀속시키었다."("秦滅燕, 屬遼東外 ") 고구려는 당연히 이 시기에도 조선에 속할 수 없다. "한이 흥하여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새를 다시 고쳐 패수에 이르는 곳을 변계로 하였다."("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 고구려는 압록강이북에 있어 이 시기도 당연히 조선에 속하지 않았다. 이렇게 내려가면 오직 "이 때가 마침 효혜 고후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만이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였다. …… 이로 하여 만은 군위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 임둔도 모두 와서 신복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會孝惠高后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保塞外蠻夷毋使盜邊. ……以故滿得以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고 하는 이 때에 고구려의 선인은 조선에 依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요동태수가 만을 외신으로 약속해서부터 기원전 128년에 漢武帝가 창만군(蒼滿郡)을 설치할 때까지 고구려는 위씨 조선에 귀속한 시간은 많아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는다. 아울러 이 시기의 위만은 여전히 한의 외신이기에 고구려가 조선의 땅 위에 건립되었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또 일부 사람들은 『한서   조선전』의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 네 군을 설치하였다."("遂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 四郡")고 하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위에서 이미 말하였지만 漢이 위씨 조선을 멸망시킬 때, 위씨 조선의 북쪽 변계는 단지 패수까지 이르렀기에 어떻게 패수이북의 현토군을 포괄할 수 있단 말인가? 위에서 말한 것은 다만 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무제가 동북 및 조선의 군현을 세우지 않은 곳에 네 개의 군을 증설한 것을 말할 뿐이다.
실제상, 고구려가 흥기한 땅의 귀속은 매우 명확한 것이다. 漢에 속한 현토군은 그 전에 창해군(滄海郡)에 속하였고, 더 그 이전에는 수십 연간 위씨 조선에 속한 적이 있었고, 더더욱 전에는 진의 遼東外 와 燕에 속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고구려는 중국의 땅 위에 건립된 것이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땅에 진입한 시기는 기원 4세기이고, 고조선이 이미 멸망한 뒤의 4백여 년의 일이다. 이 때는 고구려가 이미 건국하여 근 4백 년이 된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어떻게 고조선의 땅 위에 건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고구려가 어느 국가의 땅 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 것은 다만 고구려와 중국의 일종 淵源과 일종의 역사관계를 설명할 뿐이고 고구려가 건립하기 전의 귀속을 말하는 것이지, 고구려가 건립된 후의 귀속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고구려귀속을 설명하려면 그래도 고구려 존재기간의 정치상에서 어느 나라에 예속되었는가를 가지고 정하여야 한다.
세 번째 관계이다. 고구려민족의 유동은 어떠하였는가?
과거 일부 사람들의 심목 중에는 일종의 착각이 있었는데, 고구려인의 후대가 곧 고려인이고 오늘의 조선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생각을 다듬기만 하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이토록 큰 땅이 중국에 계승되었고 그 위의 사람들은 모두 조선반도로 도망간 것이 아니고 당연히 중국에 남았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할 때에 평양으로부터 천이해온 20여 만의 고구려인들도 당연히 중국에 남았다. 이 계산을 자세히 헤아려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그 인민은 69만여 호, 300여만 명이 있었는데, 전부 唐에 계승되었다. 단지 안승(安勝) 등이 일부분 고구려인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당현종(唐玄宗)이 압록강이동의 여진의 땅을 고려에 하사하여 줄 때에 또 일부분이 묻어갔다. 金나라 초기에 고려가 압록강 남쪽의 保州의 땅을 취하는 것을 윤허하였고, 明成祖가 圖們江이남의 땅을 조선에 주어 또 일부 고구려유민을 가져가게 되었다. 우리들의 짐작으로 계산하면, 그 중 고구려족 사람이 약 20만으로, 고구려족 인구 총수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만약 고구려 통치 하의 조선반도 북부의 예인, 한인, 신라인, 백제인을 더 가하여 넣어도 그 정도가 많지 않기에, 고구려의 모든 인구 300여만 중에서 차지하는 비례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고, 중국에 남은 고구려인이 그래도 다수를 차지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숫자는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으며 또한 너무 정확하게 요구할 필요도 없다. 이 사람이 적게 계산하고 저 사람이 많이 짐작하는 것은 모두 긴요하지는 않다. 여러 분들이 다만 이 점을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즉 고구려인민의 流動은 두 개 방면으로 나누는데, 바로 오늘의 조선족과 중국의 각 민족이다. 조선이 독점하고 있다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고구려민족과 인민의 유동은 고구려인민의 이후의 흐름과 어느 나라에서 계승하는가를 말하는 것이지, 고구려가 당시에 누구에게 귀속되었는가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영국인의 상당 일부분이 미국으로 흘러갔지만, 누구도 이로 하여 영국이 당초에 미국에 귀속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두 개의 부동한 시기의 두 개의 부동한 문제이다. 당시의 고구려의 귀속은 이후의 유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당시의 고구려가 정치상에서 누구의 관할에 귀속되었는가를 가지고 결정되는 것이다.
네 번째 관계이다. 고구려가 멸망된 후의 토지의 귀속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의 문헌이 아주 똑똑하게 기재하였다. 먼저 전부가 당에 귀속되었다가, 이후에 당, 발해, 신라에 분별되어 나누어 점유되었다. 발해는 이후에 아주 큰 부분을 점유하였고 발해가 멸망한 후에 이 부분의 땅은 遼의 소유에 귀속되었다. 그 이후에는 선후하여 金, 元, 明, 淸, 中華民國, 中華人民共和國에 귀속되어 계승되었다. 고구려남부의 땅은 선후하여 신라, 고려, 조선에 귀속되어 계승되었다. 지금, 변계를 나눔이 아주 똑똑하여 원래의 고구려의 땅에서 중국 경내에 있는 것이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조선 경내에 있는 것이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얼마 전까지, 일부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옳은가 아닌가는 문제를 가지고 언제나 쟁론이 끊임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발해 왕실은 고구려인이기에,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발해 왕실의 대씨(大氏)는 粟末靺鞨인이기에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나는 전자의 설법에 동의한다. 계승관계는 왕실의 혈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땅과 인민으로 결정한다. 발해가 고구려의 대부분의 땅과 상당 부분의 인민을 계승하였으므로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동시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말하면 또 무슨 관계가 있는가? 고구려도 중국 당시의 지방정권이며, 그리고 발해가 곧 고구려의 드넓은 땅과 인민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요, 금, 원, 명, 청을 거쳐 중국의 오늘에 계승되었고, 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땅과 인민들이 중국에 귀속되어 대부분 계승되게 되었다. 나는 중국이 응당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긍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과 조선의 학자들이 무엇 때문에 도리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다투어 말하는 지를 나는 생각이 잘 통하지 않는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하여 발해가 조(한)의 것으로 된다는 것이 아님을 그래 그들이 모른단 말인가. 만약 그들이 고구려를 조(한)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발해는 조(한)에 속하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후, 도리어 중국의 요, 금, 원, 명, 청에 넘겨주었기에 고구려로 하여금 중국에 귀속되어 대부분 계승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계승을 쟁론하려면, 관건은 발해가 누구를 계승하였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해가 누구에게 계승되었는가에 있다. 만약 고구려가 당초에 중국의 것이었으나, 발해가 계승한 후에 모두 신라, 고려, 조선에 넘겨주어 계승하게 하였다면, 그 결과는 고구려가 또한 조선에 계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보면, 누구도 중국이 고구려의 대부분 땅을 계승한 사실을 개변하지 못한다. 과거에 고구려의 일부분 땅을 조선으로 하여금 계승하게 한 것이 고구려의 유일한 계승자로 된다면 말이 통하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하지만, 고구려의 땅이 이후에 누구에게 계승되는가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의 문제를 가리킨다. 이는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는 기간의 역사귀속과는 또 두 개의 부동한 문제로서, 고구려가 멸망된 후의 토지의 출처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는 기간의 정치귀속을 근본 증명하지 못한다.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는 기간의 귀속은 여전히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는 기간에 고구려가 누구의 관할에 귀속되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다섯 번째 관계이다. 고구려가 문화상에서 중, 조, 한과의 관계이다.
먼저, 언어 상에서 보자. 어떤 사람들은 고구려어와 조(한)어는 동일한 민족의 언어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한)어는 신라에서 발전하여 왔다. 고문헌에서 고구려어는 신라와 같다고 기재하지 않았다. 역사 서적 중에서 본 고구려의 어휘와 신라의 어휘는 차별이 아주 크다. 현재의 언어학의 연구는, 고구려어가 속하는 夫餘語는 韓語와의 관계가 비록 근사하지만 동일한 종류의 언어가 아니라고 한다. 고구려어는 비록 漢語와도 동일한 종류의 언어가 아니지만 고구려의 족인 중에 아주 큰 漢族의 성분이 가입하였고 그리고 경상적으로 漢族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어 중에는 대량의 漢語 어휘가 삽입하였다. 예를 들어 官名 중의 國相, 大主簿, 大使者 등이다. 그리고 일종의 고구려어와 漢語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어휘가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지명 중의 卒本水, 曷思水, 骨句川, 慕本原, 倭山, 紇升骨城 등이고 관직 중의 大加, 相加, 琉璃王 등이다. 그리고 이후에 가입한 漢族이 더욱 많아짐에 따라 高句麗族은 동시에 고구려어와 漢語를 아울러 말하는 하나의 민족으로 되었고, 漢字를 고구려의 서면언어로 하여 관방에서 통용하였다. 이렇게 보면, 언어문자 상에서 고구려는 중국에 더욱 접근한 것이 매우 뚜렷하다.
다음, 습속 상에서 보면, 고구려의 습속은 허다한 방면에서 신라, 백재와 서로 근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서로 근사함은, 그들이 동원동족이기 때문이고 더욱이 고구려가 신라, 백제의 습속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신라, 백제가 고구려의 습속의 영향을 받았고 더욱이는 그들이 공동으로 중국 중원의 습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복식은 기본상 漢族의 복식과 상동하고 머리양식도 結髮하여 상투를 하였으며, 음식의 내용도 漢族과 기본상 상동하였고 거주도 漢族과 대체로 상동하였다. 혼상은 비록 早期에는 일부 원시습속을 보류하였지만은, 후기에 와서는 기본상 한족의 혼상습속의 영향을 받았다.
그 다음, 신앙에서 보면, 고구려는 조상숭배와 物靈숭배를 보류하였고 이후에는 또 중원으로부터 불교, 도교를 인입하였고, 이를 신라와 백제에 전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고구려의 문학예술은 기본상 漢 문화예술의 모식을 접수하였다. 이른바 고구려벽화무덤은 기본상 중국 漢, 魏 벽화무덤의 영향을 받았고 고구려 시는 漢學으로 쓴 四言, 五言, 七言 등이다.
그러므로 총적으로 말하면, 문화상에서 고구려의 문화는 더욱 漢族에 접근하였기에 근일에 와서 일부 사람들이 고구려 문화의 주체는 漢 문화라고 제출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는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고구려 문화와 漢 문화의 밀접한 관계로 고구려의 귀속을 확정하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문화관계와 정치예속은 두 가지 일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문화의 서로 근사함은 정치상에서는 도리어 동일한 국가에 속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인과 영국인이다. 일부 문화가 부동하지만 도리어 동일한 국가에 속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56개 민족이다. 고구려의 귀속은 나중에는 여전히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는 기간의 실제 정치관할로 결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고구려의 각 방면에서 중조(한)와의 관계를 열거한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어느 방면에서 보더라도 중국과의 관계는 모두 조(한)에 비교해 가깝다는 것을 설명하고, 둘째는 고구려와 중조한 각 방면의 역사관계를 모두 고구려의 귀속 즉 고구려와 중조(한)의 정치관계와 함께 놓고 토론하면, 이는 어떠한 문제도 설명하지 못하고 도리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四. 고구려의 역사귀속

 

고구려의 역사귀속을 논증함에는 실제상 오직 한 가지 문제에 언급되는 것이다. 즉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는 시기에 정치상 누구의 관할을 받았는가에 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중국 역사의 皇朝의 관할을 받았는가? 아니면 조선 역사상의 역대 정권 신라, 백제의 관할을 받았는가? 혹은 그가 독립된 국가인가에 있다.
고구려가 건립된 초기에는 漢의 현토군 관할 하의 한 개의 후국이고, 후에 왕국으로 승진하였는데, 문헌에 명확한 기재가 있어 쟁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시에 신라, 백제와 중간에 한, 위의 낙랑군, 대방군을 두고 있어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전기에는 조선(한국) 역사상의 정권의 관할에 속할 수가 없었다.
후기에 고구려가 비록 중국의 중원의 전란을 틈을 타 중국의 허다한 군현을 점령하였지만, 고구려는 시종 중국의 역대 정부가 책봉한 고구려왕의 직을 접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책봉한 征東大將軍 등 중앙관직과 營州刺史, 平州刺史, 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 등을 접수하였다. 물어보고 싶은데, 세계역사 상에서 한 독립국가의 元首가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한 나라의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접수하기를 바라는 사례가 있는가? 이런 관계를 어떻게 국가와 국가의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가?
국제 상에서 소련의 연방공화국과 자치공화국의 수뇌들이 소련의 중앙관직을 겸임하였을 것이고, 英聯邦이 임명한 각 식민지의 수뇌도 영연방관직을 겸임한 적이 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선후(選侯)도 중앙관직을 겸직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모두 독립국가라고 부르지는 못한다. 고구려와 중국 중앙황조의 이런 관계는 왕씨 고려 초기에도 한 시기 유지하다가, 후에 遼나라에 예속된 후에야 비로소 다시 遼의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겸직하지 않았고 다시는 遼金의 지방정권의 형태로 출현하지 않았다. 이 때에는 다만 속국일 뿐이고, 소국과 대국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明淸시기에는 조선과 明淸의 관계는 다만 조선국왕의 책봉을 접수하는 것뿐이고 명청의 기타 관직을 겸임하는 것이 더는 없었다. 그리하여 역시 다만 속국일 뿐이고 지방정권은 아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 중앙황조에 대한 관계는 소국과 대국의 관계가 아니고 지방정권과 중앙정부의 관계가 명확하다.
이 밖에, 고구려는 왕이 중앙황조의 책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 이하의 각급 관리도 중앙황조의 책봉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고고 발굴된 "晉高句麗率善邑長", "晉高句麗率善仟長", "金高句麗率善佰長" 등 印이다. 이는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물어보고 싶은데, 본국의 각급 관리들도 타국에서 책봉한 직무를 접수하는 독립국가가 있는가? 이는 단지 지방정권과 중앙정부지간의 관계이지, 국가와 국가지간의 관계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구려가 일찍 漢나라의 군현을 진공한 적이 있고, 또 수당과 싸운 적이 있으며, 가끔 여러 번 중국의 중앙황조의 관할에 불복한 적이 있어, 이런 것들은 모두 고구려가 독립된 국가이고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하고 있다. 장시기의 역사발전 중, 고구려는 복종하기도 하고 반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로 되는 것은 고구려가 건국한 7백여 연간에 복종이 위주인가, 아니면 반란이 위주인가를 보아야 한다. 만약 반란을 주로 하였다면, 당연히 고구려는 하나의 독립국가라는 것을 승인하여야 한다. 그러나 역사사실이 증명하다시피, 고구려는 복종을 주로 하였고 책봉을 접수하고 빈번이 조공하고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을 위주로 하였기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하지만, 신라가 말기에 중국 중앙황조의 중앙관직과 지방관직을 접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신라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되나, 신라의 모든 역사에서 보면, 신라가 중국이 책봉한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접수한 시간이 그 모든 역사 중에서 짧은 한 단락의 시간만을 차지하기에, 우리들은 신라와 중국은 모든 면에서 보면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고 단지 속국일 뿐이라고 본다.         

 

자료출처: 고구려발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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