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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명사전

by 8866 2009. 11. 1.

                      

중국의 지명사전
 

 

감숙성(甘肅省) 
 
감주(甘州):감숙성의 북서부에 있는 도시. 성내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곳으로 감숙, 신강성간의 관로 연변에 따라서 발달되었으며 상업이 번창하다. 명승고적 가운데 굉인사(宏仁寺)라고 부르는 큰 절은 유명하다.
 
거연(居延): 감숙성 북서부에 있는 염호(鹽湖). 옛날에는 거연택(居延澤) 또는 거연해(居延海)라 하였다. 모양은 초생달과 같았으며 처음에는 하나의 호수였으나 현재는 동서 2호로 나뉘어져 있다. 이 지역은 중국의 북서변을 자르는 사막지대이나, 예로부터 북방 민족의 근거지로 통하는 요로여서 흉노에 대한 전진거점이 되었다. 이능(李陵)이 흉노와 사투를 벌여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기련산(祁連山): 일명 남산(南山)이라고도 불리우는 천하의 명산이다. 위치는 감숙성 장액(張掖)현 서남방에서 시작하여 청해성 성계(省界)까지 뻗쳐 산맥의 길이는 수천리나 되며 서쪽으로는 아이금산(阿爾金山) 산맥과 연결되어 있다. 그 산맥의 마디마디에는 마치 손가락을 세운 듯한 봉우리들이 구름을 뚫고 하늘을 떠받들고 있었으며, 깎아지른 벼랑은 병풍을 연상케한다. 벼랑과 벼랑 사이에 좁다랗게 파여진 계곡은 지옥의 입구처럼 좁고 길고 음산하다.
 
기산(祁山): 감숙성 남동부에 있는 산. 진령(秦嶺) 산맥에 연결되어 있는 험준한 곳으로 삼국시대에 위, 촉이 싸우게 되자 제갈공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었다. 사마진(司馬晋)때에도 공방전이 있었으며, 송-금의 양군이 싸운 일도 있었던 역사상 유명한 곳이다.
 
난주(蘭州): 감숙성의 성도. 본래 한나라의 금성(金城)현이었다. 진(晋)나라때는 금성군이었고 오호십육국 때는 걸복건귀(乞伏乾歸)가 금성왕이 되어 여기에 도읍을 정하였다. 북위때 금성군을 난주라고 개칭하였고 시가는 황하의 남안, 아간하(阿干河)의 동쪽에 위치하며, 주위에 산봉이 많다. 성길사한릉.
 
돈황(敦煌): 감숙성의 서북부에 있는 도시. 사주(沙州)라고도 한다. 안서(安西)의 서남 약 112킬로, 당하(黨河)에 면한 교통 중심지이다. 한무제가 돈황군을 설치한 이래 서역의 중요한 근거지로 중국 서방의 입구격이 되어 여러 종족이 교차한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이 특히 유명하게 된 것은 돈황의 동남 30킬로에 있는 바위로 된 명사산(鳴沙山)에 불교의 대석굴사원군이 있어 그중의 장경굴에서 수많은 고문헌, 회화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돈황 석굴은 일명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하며 명사산의 산허리에 2단 또는 3단으로 되어 있는 석굴군으로 약 480개에 달한다. 366년 낙준(樂? )이란 승려가 창시하여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오대, 송, 원에 이르기까지 만든 석굴로 내부는 4벽과 천병에는 벽토를 발라 전체에 벽화를 그렸다. 2,415존의 불상 및 벽화는 각 시대의 양식을 대표하며 고서, 고경권, 고화등도 많이 발견되었다.
 
맥적산(麥積山): 감숙성 천수(天水)현에 있는 산. 현성 동남 약 45킬로에 위치하고, 강의 양안 절벽에는 불교의 석굴이 위아래로 잇달아있어 그 수가 194이다. 이 석굴들은 대개 북위시대에 시작하여 서위, 북주, 수, 당,송, 원, 명, 청의 시대에도 만들어졌고 또 보수되었다. 맥적산이란 이름은 먼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보릿단을 쌓은 듯한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칠불감(七佛龕)을 비롯하여 수많은 암굴이 있다.
 
무위(武威): 난주의 북서 240킬로 지점에 있는 교역도시로서 하서(河西) 및 청해의 양모를 집산하고 부근에서는 보리의 생산이 성하다. 오호십육국시대에는 5왕조의 도읍지였고 사적이 많다. 당나라 이후에는 양주(凉州)의 국도였던 까닭에 양주라고도 불리운다.
 
병령사(炳靈寺): 감숙성 영정(永靖)현내 황하 북안에 있는 석굴. 이 절은 상사(上寺)와 하사(下寺)로 되어 있고, 서로 2킬로 떨어져 있다. 상사에는 주요한 석굴이 2개밖에 없으나, 하사에는 200여개의 석굴이 있어서, 낭(廊)이나 구도(構道)로 연락되어 있었으나 황폐화되어 현재는 동굴 35, 벽감(壁龕) 88개가 남아있고, 북위의 굴 5, 감 1로 되어있다. 내부에는 약 400체의 석불과 약간의 벽화가 있고, 송-명 시대에 다시 그려진 것도 있다. 제 80호굴의 마애(磨崖)에 파여진 북위시대의 조자원(曹子元)의 조상기(造像記)가 가장 옛것이지만 이곳의 석굴은 더 옛 시대에 개설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소관(蕭關): 감숙성의 동부, 고원(固原)현의 동남에 있는 옛적 관. 4관중(關中)의 하나로 서북의 험악한 땅이다.
 
양관(陽關): 감숙성 돈황현의 남서 약 80킬로, 당하(堂河) 서쪽에 있는 고관. 전한 무제때 두었던 것으로서, 옥문관(玉門關)과 함꼐 서역 남북도 (南北道)에 통하는 중요한 관이었다.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에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이라 한 것은 이 관을 가리킨다.
 
양주(凉州): 감숙성 서북부에 있는 도시. 본래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의 땅이었으나 한무제때 예속되었고, 후한에 들어와 처음으로 양주라고 불리게 되었다. 난주에 다음가는 감숙성 제 2의 도시로 행정 뿐만 아니라 군사상으로도 중요하다. 고적이 많고 특히 대운사(大雲寺)의 거종(巨鍾), 경운사(慶雲寺)의 고탑이 유명하다. 무위라고도 불리운다.
 
연지(燕支): 감숙성 장액에 있는 산으로 대황산(大黃山)을 가리키며 , 인지(인脂), 알씨(閼氏), 언씨(焉氏) 등으로도 쓴다.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며 한나라 곽거병(藿去病)이 출병한 곳이다.
 
옥문(玉門): 감숙성 옥문현에 있는 도시, 소륵하(疏勒河)의 상류 동안에 위치하며 농산물이 풍부하고 거대한 유전이 있다.
 
옥문관(玉門關): 무제시대에 만들어진 관. 서역의 옥(玉)이 여기를 통해서 한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돈황의 서북 80킬로 되는 곳에 있다. 양관과 함께 서역으로 통하는 문호로서, ,옥문관을 지나면 북도(北道)로, 양관을 지나면 남도(南道)로 통하였다. 육조시대에 들어가서 동쪽의 안서(安西)로 옮겨졌다.
 
임조(臨조 ): 감숙성 임담(臨潭)현의 서안에 있어서 서역으로 가는 요소로 이름만 들어도 전장(戰場)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임하(臨夏): 감숙성 서남부에 있는 대하(大夏)강 북안의 도시. 구명은 하주(河州)라고 하였다. 회교도의 중요 중심지로 성내에는 한족, 성외 향진(鄕鎭)에는 회교도가 거주한다. 유목을 한다.
 
주천(酒泉):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주요한 오아시스. 곽거병 장군이 무제로부터 하사받은 술을 전군의 병사들에게 나누어 마시게 하려고 샘물에 술을 부었다는 고사에서 그 지명은 유래한다.
 
평량(平凉): 감숙성 동부의 도시. 난주, 서안(西岸) 사이의 요지로 부근은 농업, 목업이 발달하였으며 광업과 상업이 성하다. 고원(固原), 해원(海原) 일대의 모피, 기타 각종 산물의 집산지인데, 이것들을 서안을 경유하여 화북방면으로 수출한다.
 
하하(夏河): 감숙성 서남부의 소도시. 구명은 라브랸(拉卜랸). 황하 상류의 풍부한 농목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소북경(小北京)이란 명칭이 있는 상업도시이다. 라브란절(寺) 중심의 종교도시로 라마교 승려가 2,500명이 있다.


하남성(河南省)

 

개모석(開母石)
우가 환원산( 轅山)에서 치수를 할 때였다. 산을 파고 있을 때 아내인 도산씨(塗山氏) 여교(女嬌)가 왔으므로 우는 지금부터 식사를 하겠으니 북이 울릴 때까지 오지 말라고 일렀다. 우는 힘든 공사를 빨리 끝내기 위해 흑웅(黑熊)으로 둔갑하여 전신의 힘을 모아 산에다 길을 내기 시작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길을 닦던 중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는 바람에 그만 잘못하여 뒷발로 움켜쥐고 있던 돌이 굴러 떨어졌다. 돌은 정확하게 북의 한 가운데를 때려 북소리가 나고 말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교는 부리나케 점심을 차려 남편을 향해 달려왔다. 그녀는 우가 거대한 흑곰을 변해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달아났다. 그녀는 숭산(嵩山) 아래까지 달아나 돌로 변해 버렸다. 그녀는 마침 임신중이어서 우는 돌을 쪼개어 아이를 끄집어냈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계(啓)였다. 계란 벌어지다의 뜻을 담고 있다. 하남성 숭산에는 계모를 모신 묘가 있다. 개모묘(開母墓) 입구 전면 양측에는 석궐이 있고 표면에는 사람과 동물의 상이 새겨져 있다.

 

개봉(開封)
옛날에는 변경( 京), 대량(大粱), 변량( 粱)이라고 불렀다. 황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대의 4왕조와 북송의 수도였다. 하남 대평야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교통, 상업의 중심지이고, 용정(龍井), 상국사(相國寺), 주선진(朱仙鎭) 등 명승지가 많이 있다.

 

공현(鞏縣)
하남성의 도시로 하(夏)의 걸왕(桀王)의 궁전이 있던 곳이다. 걸왕은 백성의 고혈을 짜서 요대(瑤臺)라는 초호화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요대에는 천하의 각종 진귀한 보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미녀로 가득 채웠다. 또한 요대 안에 연못을 파서 술로 가득 채우게 한 다음 배를 뛰워 주지(酒池)를 만들고 놀이를 즐겼다. 하걸의 궁전에는 요대외에도 행궁(行宮)과 별원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유비산(幽秘山) 계곡에는 장야궁(長夜宮)이 있었는데 그와 귀족 남녀들은 매일 이곳에서 먹고 마시면서 몇 달 동안이나 국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와 흙먼지를 잔뜩 몰아쳐 불야성을 이룬 장야궁으로 불어닥쳤다. 마침 운이 좋았던 걸은 그곳에 없었지만 천지를 뒤덮은 흙먼지는 삽시간에 장야궁과 계곡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교애산(交崖山)
숭산의 남쪽에 있는 산.

 

관림(關林)
낙양의 남쪽에 있는 관우의 무덤. 관우는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서민 신앙의 중심이며 관제묘(關帝廟)가 도처에 있다.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촉의 유비, 관우, 장비의 설화가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말기쯤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송에서 원에 걸쳐 연극 등으로 한창 다루어지게 되자, 의인(義人) 관우의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관우는 원래 무인이었기 때문에 지배자들도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官)의 측에서 신격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은 북송말 휘종(徽宗)의 숭녕연간(嵩寧年間;12세기)부터인데 역대 조정에서 잇달아 칭호가 증정되어 청의 도광(道光)연간에는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靈祐仁勇威顯關聖大帝)라 불리기에 이르렀다. 관우는 문(文)의 성인 공자와 나란히 무(武)의 성인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므로, 그 묘도 공자의 묘가 공림(孔林)이라 불리고 있는데 대하여 관림(關林)이라 불리고 있다. 관우는 손권에게 패하여 참수되어 그 목은 조조에게 보내어진 후, 낙양의 남쪽 교외에 장사지내어 졌다. 그 목을 매장한 무덤은 분명치 않은데 명나라 시대에 만든 관림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목을 매장한 무덤이라는 것이다. 관우가 죽은 날로 되어 있는 3일에는 이 관림 앞에 장이 선다. 이 장에는 하남성의 수만의 사람들이 모여 성황을 이룬다.

 

금촌(金村)
하남성 낙양 부근의 고을. 전국시대 후기의 유물인 목곽분(木槨墳)이 여기에 있으므로 유명하다. 여기에 나온 동, 은기, 조상, 칠기, 옥기, 거울, 무기, 미구 등은 모두 귀중한 유물로서 그 중에서도 금은상감(金銀象嵌)은 정묘의 극치이다.

 

기산(箕山)
하남성 등봉(登封)현. 아래에 영수(潁水)가 흐른다. 요임금이 나라를 물려주려고 하자 허유(許由)는 화를 내며 자기의 더러운 귀를 씻었다고 한다. 이때 마침 그의 친구였던 소부(巢父)라는 자가 물을 먹이기 위해 소를 끌고 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허유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의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소에게 물을 먹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지금도 기산에는 허유의 묘가 있으며 그 산밑에는 소부가 소를 몰던 흔적이 남아 있고, 영수 가에는 독천(犢泉)이라고 하는 샘이 있으며, 돌에는 송아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기현(杞縣)
하남성 동부의 도시. 개봉의 남동부 50킬로에 위치한다. 주나라때에 기국(杞國)으로 되었으나 송 대에 옹구읍(雍丘邑)이라고 불렀다가 12세기경에 다시 기현으로 개명되었다. 목화가 잘 되나 황하의 홍수와 북서 계절풍 때문에 작황은 좋지 않다.

 

낙수(洛水)
하남성 서부의 강. 섬서성의 동부 진령산맥에서 발원하여 동류하여 하남성을 지나 황하로 들어간다. 공현 북서에서 황하에 합류한 하류는 배가 다닌다. 지류로는 이수(伊水), 간수(澗水) 등이 있다. 유역은 한민족의 가장 오래된 활동지로서 우공(禹貢)을 비롯한 고서에서 종종 그 이름이 나오며 더욱이 연안에는 낙양과 같은 고도가 있어 사적상으로도 유명하다. 낙수의 여신은 복희의 딸인 복비(宓妃)인데 낙수를 건너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어 낙수의 여신으로 화했다고 한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낙빈(洛嬪)이라고도 한다.

 

낙양(洛陽)
주나라때는 낙읍(洛邑)이라 불렀고, 동한의 고도이며 중국의 오대고도중의 하나다. 동으로는 호로(葫虜)를 장악했고, 서쪽으론 함곡(函谷)을 봉쇄하고, 남으로는 이락(伊洛)과 접하였고 북쪽에는 대강 황하가 유구하게 흐르고 있어 지형이 험준하고 견고하여 옛부터 전쟁이 터지면 병가(兵家)들이 서로 다투는 곳이었다. 성 동쪽의 백미사는 한의 명제때 건립된 것이다. 또한 성의 남쪽에는 이궐(伊闕)이 있는데 그 산벽에는 불상의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천불암(千佛巖)이라 칭한다. 그리고 성의 북쪽 망산(邙山)에는 거총이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고대의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 아주 많은 곳으로 지금은 고적의 명승지로 정해진 곳이다. 천진교(天津橋), 관제총(關帝塚), 용문(龍門) 등 명소가 많다.

 

남양(南陽)
하남성 서부에 있는 도시. 개봉의 남서 약 270킬로 거리에 있어 백하(白河)의 서안에 닿는다. 견직물업을 옛날부터 유명하다. 부근 산악지대에는 석재를 원료로 하는 석세공(石細工)과 자수가 있다. 유수(劉秀;후한의 광무제)가 여기에서 병을 일으켜 후한을 세웠다. 하남성 남서부의 중심도시이다.

 

대별산(大別山)
하남, 호북, 안휘 3성의 성경계를 북서에서 남동으로 뻗은 산맥. 남양분지의 동쪽에서 호광(湖廣)평야의 북동을 거쳐 양자강 북안에 이르게 된다. 양자강 유역과 준하 유역으로 갈라져 있는 관계로 회양산(懷陽山)이라 부른다. 또는 회산(懷山)이라고도 한다. 해발 1,000미터 이상 되는 곳이 많다.

 

동관(潼關)
동관은 황하개에 위치한 큰 성시중의 하나였다. 섬서성과 산서성, 하남성의 요충지였다. 성은 산허리에 세워져 있는데 아래로 굽어 도는 황하를 끼고 있어 옛부터 여느 병가(兵家)에서도 침을 흘리며 쟁취하고자 하는 땅으로 유명했다.

 

동백산(桐栢山)
하남성 동백현 서남에 있는 산. 우는 치수를 하려고 세 번이나 이곳에 들렀는데 이곳은 바람이 워낙 센데다 번개가 잦아 돌과 나무가 울음소리를 낼 정도라고 한다. 그것이 요물의 장난임을 안 우는 화가 나서 회수(淮水)와 와수(渦水) 사이에서 무지기(無支祈)라는 수괴(水怪)를 잡았다고 한다.

 

동작대(銅雀臺)
하남성 임장(臨 )현의 서남쪽 16킬로에 있는 업도( 都)의 유지. 위나라 조조의 근거지로 시작하여, 후에 조(趙)나라 석호(石虎)가 축영한 다음, 파괴, 재건을 거듭하여 최후에는 북주(北周)가 파괴하였다. 북제(北齊)의 석사(石獅)등이 있다. 큰 동작을 주조하여 다락 꼭대기에 놓았다.

 

망릉대(望陵臺)
업(임장현)에 있는 삼국시대의 조조가 지은 대. 조조는 임종때 유언하기를 백관(百官)은 이 대에 올라 서쪽에 있는 자기의 능(陵)을 바라보라고 하였다. 업성의 동쪽에는 장수( 水)가 흐른다. 장수는 황하의 지류다.

 

맹진(孟津)
하남성 낙양의 동쪽에 있는 나루터. 황하 남안에 있으며 맹진(盟津)이라고도 한다. 맹현의 서남에 있다. 주무왕이 이곳을 건너 목야(牧野)로 전진했다고 한다.

 

목야(牧野)
하남성 기현(淇縣) 남쪽의 지명. 주(紂)가 무왕에게 크게 패한 곳이다.

 

박( )
하남성 상구(商丘)현 서남일대. 성탕(成湯)이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 국호를 상(商)이라 하였다고 한다. 후에 도읍을 다시 은(殷)으로 옮기고 국호도 은이라 칭하였다.

 

박랑사(博 沙)
하남성 무양(武陽)현의 고적. 진나라 무양성 남쪽에 있다. 장양이 역사 창해(滄海)로 하여금 철퇴로 시황제를 저격케한 곳으로 유명하다. 황하의 북안이다.

 

백마사(白馬寺)
중국 최초의 불사(佛寺). 그 유적은 하남성 낙양의 교외에 있다. 후한의 명제(明帝)가 사자를 서역에 보내어 불도를 구하게 했는데 그들은 대월지국(大月支國)에서 중인도(中印度)의 불상경전을 말에 싣고 낙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8년 후에 이곳에 절을 세우고 백마사라고 하였으며 스승들을 초빙하여 역경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백마사에는 13층 석탑이 유명하다.

 

복양( 陽)
하남성의 동북 구석에 있는 도시. 옛 이름은 개주(開州). 중국의 옛 전설에 나오는 오제의 일인인 전욱( 頊)의 장지(葬地)이다.

 

복우산(伏牛山)
진령 동부산맥. 하남성 숭현(嵩縣) 서남의 복우산, 일명 천식산(天息山)이 주봉이며, 동남으로 뻗어 있다. 편마암으로 이루어지고, 하남성 서부의 분수령이다.

 

봉선사(奉先寺)
용문 서산(西山)이 중턱에 봉선사의 대불(大佛)이 있다.

 

북망산(北邙山)
북망산은 낙양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옛부터 왕족들의 시골이 많이 묻힌 까닭에 죽음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산이다. 마른 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북망산 기슭은 매우 황량하여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밤이 되면 북망산 기슭 일대는 한없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싸늘한 밤바람이 무성한 잡초를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일어났다. 여인의 눈썹같은 초생달이 검푸른 하늘에 한폭의 그림처럼 걸려있는 북망산의 밤.

 

상구(商丘)
하남성의 도시. 개봉의 동남 약 130킬로에 있고 옛부터 농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춘추시대 송의 국도였고, 또 한의 양국(梁國), 당의 송주(宋州), 남송 이후의 귀덕부(歸德府)의 주도이기도 하였다.

 

소림사(少林寺)
하남성 등봉(登封)현 숭산에 있는 임제종(臨濟宗)의 대가람. 고루(高樓)는 원대의 초조암(初祖庵), 본전은 송대의 목조건축이며 후자의 내부에는 인왕(仁王), 용 등을 부각한 석주가 있다. 그밖에 다수의 당송이후의 석비, 동위의 삼존불, 북제의 조상이 있다. 북위 효 문제때 건립되었다.

 

선대(仙臺)
한 문제가 쌓은 것으로 하남성 서단에 있다. 문제는 노자(老子)를 즐겨 읽었는데 모르는 곳이 있었다. 때마침 하상공(河相公)이란 선비가 노자를 역시 애독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처소까지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 바, 하상공은 노자주본(注本)을 주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문제는 이곳에 대를 쌓고 하상공을 제사 지냈는데 이것이 선대가 된 내력이었다.

 

성선각(聖善閣)
낙양에 있는 불각. 누군가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지은 것.

 

소평진(小平津)
창주(滄州) 염산(鹽山)현의 경계에 있는 천자의 사냥터. 하남성 맹진의 북쪽, 황하에 면한 나루터의 두 곳이 있다.

 

숭산(嵩山)
옛적에는 외방(外方)이라 했으며, 또 숭고(嵩高)라고도 일컫는 숭산은 오악 가운데 중악(中岳)이라 손꼽히는데 그곳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었다. 가운데 봉우리는 준극(埈極), 동쪽은 태실(太室), 서쪽은 소실(小室)로 일컬어진다.
소실 북쪽 기슭에 소림고찰이 자리잡고 있는데 웅장하고 거대한 전각과 승방이 즐비하여 건평이 거의 삼만 평에 달할 정도였다. 이곳이 바로 소림파의 근본 소재지이다. 평소 종소리는 허공에 퍼져 뭇 산봉우리를 감돌며 메아리치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된 생각을 말끔히 가시게 했다.

 

하북성(河北省)

 

갈석파(碣石坡)
정확한 위치는 불명, 연나라 소왕(昭王)이 이곳에 갈석관(碣石館)이란 건물을 지어 유명한 대철학자 추연(鄒衍)에게 가르침을 청한 곳.

 

거교(鉅橋)
하북성 곡주(曲周)현 동북. 하나라 걸왕때 곡창이 있었다. 걸은 이곳이 넘치도록 곡물을 긁어모았다고 한다.

 

경산(景山)
하북성 북경 자금성 북쪽에 있는 언덕. 표고 50미터. 성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며, 서쪽에 라마의 탑이 솟아있다.

 

고원(沽源)
하북성 최북부의 현. 난강(난江)의 상류인 상도강(上都江)의 동안에 위치한다. 북동은 다륜(多倫), 남서는 장가구(張家口)로 통하는 관도의 요지로 축산물, 약재의 집산지. 동쪽 80킬로 지점에 있는 상도강의 북안에는 원나라의 유적이 있다.

 

노구교(蘆溝橋)
영평강(永平江)에 있는 다리. 북경 서남쪽의 교외에 있으며 대리석으로 되어있다. 금나라때 세운 것으로 매우 아름답다.

 

노룡새(盧龍塞)
하북성 동쪽 끝 노용현(盧龍縣)에 있던 요새. 삼국시대에 북평 사람 전주(田疇)는 북방 오환족(烏丸族)을 정벌하기 위한 조조의 군대를 노용새를 통과하는 지름길로 안내하여 대승리를 얻게 하였고 이 공으로 조조는 그에게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어찌 노용새를 팔아 상록(賞祿)을 얻겠는가."하여 거절했다는 고사가 있다.

 

대고(大沽)
하북성 동부의 항구도시. 해하(海河)의 하구 남안에 있다. 북안의 당고(塘沽)와 하구를 포함하며 천진의 보조항이다. 부근에서 장로염(長蘆鹽)을 산출한다.

 

독락사(獨樂寺)
하북성 계현( 縣)에 있는 요시대의 목조사원. 단층 기련조(寄 造)의 산문(山門)과 중층(重層) 모옥조(茅屋造)의 관음각(觀音閣)으로 되어 있고 본존의 소조(塑造) 11면 관음대상 등은 이 시대 초기의 것이다.

 

마릉(馬陵)
춘추시대 위나라의 땅. 하북성 대명(代名)현의 남동에 마릉성이 있다. 진(晋)나라의 경공(景公)이 제후들과 이곳에서 회동하여 전국시대에 위(魏)나라의 장군 방연(龐涓)이 제(齊)나라의 장군 전기(田忌), 손빈(孫 )에게 패해 자살한 곳이다.

 

만수산(萬壽山)
북평 서북쪽에 있는 산. 구명은 옹산(甕山). 건륭제가 축조한 이궁(離宮)이 있으며, 곤명호반(昆明湖畔)에는 청의원(淸 園)이 있다.

 

만수산이궁(萬壽山離宮)
북평 서북쪽에 있는 청조의 이궁. 서태후(西太后)의 환력(還曆)기념으로 건륭제가 축조한 것이다. 큰 산악과 주위 5킬로에 이르는 곤명호를 포함하였으며 그 호수속에 이궁을 볼 수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인수전(引壽殿), 옥란당(玉欄堂), 동전(銅殿), 불향각(佛香閣), 유리탑(琉璃塔) 등 주요 전각이 있다.

 

명십삼릉(明十三陵)
하북성의 서북부 천수산(天壽山) 부근에 있는 명조 역대의 능. 북평 명승지의 하나. 장릉(長陵), 헌릉(獻陵), 경릉(景陵), 유릉(裕陵), 경제릉(景帝陵), 무릉(茂陵), 태릉(泰陵), 강릉(康陵), 영릉(永陵), 소릉(昭陵), 정릉(定陵), 광릉(廣陵), 덕릉(德陵), 사릉(思陵) 등 14개 능 중 창평(昌平)현에 있는 13개 능을 가리킨다.

 

묘봉산(妙峯山)
중국의 산. 북평의 북서 약 40킬로 지점에 있는 산. 묘고봉(妙高峯)이라고도 하며 앙산(仰山)의 주봉이다. 양산은 봉우리마다 용립(聳立)해 있는 명승지이나 특히 묘봉산이 저명한 것은 산정(山頂)에 벽하원군묘(碧霞元君廟)가 있기 때문이다. 묘는 명대에 세워진 것으로 매년 음력 4월 1일부터 15일에 걸쳐서의 개장(開帳)때에는 산에 올라 참배하는 무리가 매우 많고 특히 6,7,8의 3일간은 매일 수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무령총대(武靈叢臺)
하북성 한단(邯鄲)에 있는 대. 전국시대 조(趙)나라 무령왕이 군사연습을 관람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라 한다.

 

방산(房山)
하북성 북평의 서남에 있는 현. 원(元)대 이후 방산현이라 칭한다. 현성은 북평의 서남 90리. 농산물을 집산하고 물산이 풍부하다. 명승, 고적이 많고 명승으로 대방산(大房山), 석경산(石經山), 상방산(上方山)이 있고 고적으로는 금(金)태조의 예릉(睿陵), 세종의 흥릉(興陵), 선제(宣帝)의 덕릉(德陵), 운거사(雲居寺), 상방사(上方寺)등이 있다.

 

백하(白河)
옛 이름은 고수(沽水). 음산산맥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하북성의 평야를 동남으로 흘러 발해만에 흘러 들어간다. 해하수계(海河水系)의 하나. 옛부터 수해가 많다.

 

벽운사(碧雲寺)
하북성 북평 교외 향산(香山)에 있는 절. 사전(寺殿)에 의하면 원나라 시대에 창립되어 명나라때 중수하였다 한다. 사역(寺域)이 넓고 본당(本堂) 뒤에는 서장승이 만들었다는 모형을 본딴 대리석조의 금강보좌(金剛寶座)가 있다.

 

북당하(北塘河)
하북성에 있는 강. 상류는 만리장성 부근 연산(燕山)산맥에서 발원하는 사하(沙河)와 합류하여 이하(梨河)라고 하며, 그 하류를 북당하라 하는데 백하와 같이 그 동방평야를 흘러 북당구(北塘口)에 이르러 발해로 흐른다. 수운이 편리하며 열하지방의 수모, 수피 등이 이 강을 통하여 천진으로 반출된다.

 

북평(北平,  =북경<北京>)
화, 만, 몽(華滿蒙)의 지장점(指掌點)에 있는 군사요지로서 멀리 전국시대의 연(燕)이래 요, 금, 원, 명, 청의 중국 역대의 고도이며 성내외에 많은 상점이 모여 번화하다. 성내외에는 경산(景山), 만수산, 옥천산(玉泉山)등의 전망이 좋은 산이 있고 성내에는 습찰해(습刹海),  북해, 중해, 남해, 하화지(荷花池)등의 못이 있다. 천연의 고도인 이곳은 명승고적이 많다.
자금성(紫禁城)은 명, 청때의 왕궁이며 대화전(大和殿), 동육궁(東六宮)등의 궁전과 외성의 남문인 영정문(永定門)의 동쪽에는 천단(天檀)이 있는데 남쪽에 환구( 丘), 황궁우(皇穹宇), 기년전(祈年殿)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또 황성은 북문인 지안문(地安門)의 북쪽에 있는 고루(鼓樓), 종루(鍾樓)는 원대의 도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 동쪽 교외의 이화원( 和園), 옥천산 벽운사, 향산, 서산, 팔대처(八大處), 와불사(臥佛寺)등이 있어 특히 풍경이 아름답다. 또 서북의 명십삼릉, 거용관(居庸關;찰합미성이 있음)등의 고적이 있다. 북평의 옛 이름은 계( ), 주나라때 소공(召公)을 계에 봉하여 국명은 연이라 했다.
성 북서쪽에 극락사, 남서쪽에 백운관(白雲觀), 대령사(大寧寺) 동남족에 석조사(夕照寺), 옥청관(玉淸觀), 쌍룡암(雙龍庵)등이 있다. 북서에 낭랑묘(娘娘廟)도 유명하다.
성은 모두 구문(九門)이 있으며, 구문은 동의 동직문(東直門), 조양(朝陽)문. 서의 서직문(西直門), 부성문(阜城門). 남의 숭문문(嵩文門), 정양문(正陽門:永定門), 선무문(宣武門:和平門). 북의 덕승문(德勝門), 안정문(安定門:地安門)이다.

 

산해관(山海關)
하북성 동북경계, 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도시. 옛 이름은 유관(楡關)이다. 화북(華北), 동부 왕래의 요충지이다. 바다에 임하고 있어 형세가 견고하여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칭한다.

 

상도(商都)
하북성 북서부에 있는 현. 본래는 찰합미성에 속하였다. 만리장성의 외측, 내몽고 고원의 고원 가운데에 있어서 유목지역의 중심지이다. 장가구(張家口)에서 장북(張北)을 거쳐 외몽고에 이르는 통로이며 서남의 집녕(集寧)에도 통한다.

 

상건하(桑乾河)
북평의 서쪽 교외에서 천진을 거쳐 발해로 흐르는 강으로 하류는 영정하(永定河)다.

 

서릉(西陵)
하북성의 서방, 역주성(易州城)의 서쪽 30지리(支里)에 있는 청의 능묘. 세종의 태릉(泰陵)과 덕종의 능이 있다. 동릉(東陵)에 대한 칭호이다.

 

서산(西山)
북경의 교외에 있는 산. 높거나 험하지 않으면서도 천하에 그 경치가 이름 높은 곳이다. 서산의 경치는 사계절마다 특색이 있다고 전해진다. 서산의 겨울경치를 표현하는 말은 동계설화표무(冬季雪花飄舞). 완여은색세계(宛如銀色世界)라는 말이 있다. 겨울 서산은 눈꽃이 춤추듯 날아다녀 그 모습은 바로 은세계다. 특히 서산에는 절이 많아 오백사찰이 있으며 그중 팔대사(八大寺)가 유명하며 팔대사중 하나가 대비사(大悲寺)다.

 

서하(西河)
하북성에 있는 강. 자아하(子牙河), 청수하(淸水河) 그밖의 같은 성의 중부에 있는 여러 강의 총칭으로, 하류는 합쳐서 천진에서 백하에 연결된다. 그 여러 물줄기의 대부분은 수운에 이용되고 면화, 잡곡 등을 천진으로 반출하는 요로이다.

 

석가장(石家莊)
하북성 서부의 도시.원래 정정(正定)현의 작은 촌이었으나 청대이후 급격히 상업이 성행하였다.

 

선화(宣化)
하북성 서북부에 있는 도시. 장가구의 남쪽에 있다. 무주(武州) 또는 선부진(宣府鎭)의 별명이 있다. 계명산(鷄鳴山)에 탄전이 있고 연통산(煙筒山)에 철광이 있다.

 

양자강(揚子江)
통칭 장강(長江)이라고도 부릉다. 청해성 파안합라(巴顔哈喇)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데 상류를 금사강(金沙江)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사행(蛇行) 동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유역 면적이 막대하여 큰 분지와 큰 평야를 형성하며 상류에 사천분지, 중류에 호광분지, 강서분지, 하류에 강절(江浙)평야를 발달시키고 연안에 많은 우각호(牛角湖)가 있다.

 

어양(漁陽)
하북성 계현 근방으로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 곳이다.

 

역수(易水)
하북성 북부를 흐르는 강. 북역수, 중역수 등이 있다. 모두 역주 남쪽을 흐르며, 하류는 백양정(白羊淀) 또는 대청하(大淸河)로 흘러 들어간다.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로 하여금 진왕을 암살케 하기로 하고, 이곳까지와서 송별을 할 때 형가가,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장사거혜불복반(壯士去兮不復返)'이라고 비장한 노래를 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린 곳으로 더 유명하다.

 

영산진(靈山鎭)
하북성 곡양(曲陽)현에 잇던 북송의 정요(定窯)의 산물지. 간자(澗磁)에 있으며 정요는 투명성 아백색(牙白色)의 백자로 무늬는 유려한 선으로 편절조(片切彫)가 많다.

 

영정하(永定河)
하북지방 백하의 대지류. 상건하, 노구(蘆溝)라고도 한다. 고래로 범람이 심하여 유역이 자주 바뀌어졌다.

 

용흥사(龍興寺)
하북성 정정(正定)현에 있는 절, 자씨각(慈氏閣), 전륜장(轉輪藏), 마니전(摩尼殿)은 북송의 전반기에 성립한 것이다. 대비각(大悲閣)의 42비(臂),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관세음보살은 높이 22미터로서 중국 제 1의 동상이다. 내진내벽(內陣內壁)의 벽조각이 훌륭하다. 관세음, 보현, 문주 등은 송나라 초기의 대표적 절작들이다.

 

원명원(圓明園)
청나라의 명원의 하나. 북평의 북서교외, 만수산 동쪽에 있었던 명나라의 폐원을 청나라의 세종제가 성조제(成祖帝)로부터 얻어 정사한 이궁을 말하나 또한 고종제(高宗帝)의 건륭 초기에 만든 동쪽의 장춘원(長春園), 남동의 기춘원(綺春園;후에 萬春園으로 개명)의 2 이궁을 합친 3원을 보통 원명원이라 부른다. 원명원은 가장 긴 부분으로서, 동서 1.6킬로, 남북 1.3킬로, 장춘원은 사방 약 800미터, 기춘원은 동서 1.1킬로, 남북 900미터이며, 어느 것이나 작은 많은 못이 있고 그 사이에 중국풍의 전정(殿亭)이 산재해 있어 풍경이 아름답다. 장춘원의 북단에는 유럽식의 분수, 정원, 건물이 있다.

 

이화원( 和園)
북평의 만수산에 있는 청조 황실의 어원(御園). 건륭연간에 옥천(玉泉)의 저수를 끌어서 옹산호(甕山湖)에 들어가게 하였고, 이를 곤명호(昆明湖)라 개칭하였으며, 호반의 작은 산을 만수산이라고 하였다. 광서(光緖) 연간에 서태후가 이 고지에 토목을 진훙시켜 이를 이화원이라 하였다. 북평 교외의 명소이다.

 

자금성(紫禁城)
북평 내성에 있는 명, 정의 궁전. 성조가 세운 것을 후에 개축하였다. 외조(外朝), 내정(內廷)으로 나누어, 오문(午門), 태화문(太和門), 태화전,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건청문(乾淸門),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곤녕문 등이 있으며 서예공예품 다수를 수장하고 있다.

 

장릉(長陵)
명의 성조(成祖) 영락제의 능. 하북성 창평(昌平)현의 북쪽 13킬로에 있는 천수산 남쪽에 있다. 명의 13능 중 으뜸이다.

 

정정(正定)
하북성 서부에 있는 도시. 면화, 곡류, 가축의 집산시장이며, 거대한 불상을 안치한 대불사(大佛寺;興陵寺)가 있다.

 

정형(井 )
하북성 서부의 현. 태행산맥의 동쪽 기슭, 석가장(石家莊)의 서쪽 38킬로에 있으며 서쪽에는 낭자관(娘子關)이 있다. 석탄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정형산(正 山)
하북성 태행산맥 중의 한 산. 하북성 서부의 험요(險要)로서 알려졌으며, 산 위에는 저명한 정경각이 있다. 한나라때 한신, 장이(張耳)등이  조(趙)를 칠 때, 한신이 기병(奇兵)으로 조나라 군사를 격파한 곳이다.

 

운 남 성 (雲南省)

 

개원(開遠): 운남성 남쪽의 현. 명나라 때는 아미(阿迷)라고 불렸다. 곤명, 하구(河口)의 중간에 있다. 기후가 따뜻하고 서강(西江) 상류의 여강(濾江)연안은 농업이 발달하고     과수원으로 적합하다.

고구(箇舊): 운남성 남부의 도시. 원나라 이전에는 은의 산지였으나 지금은 중국 제 1의 주석산지이다. 작은 분지이다.

 

곡정(曲靖): 운남성 동부에 있는 도시. 당나라 때 남녕주(南寧州), 미현(味縣)을 설치하고 명,청때는 곡정부라 하였다. 농산물로 유명하다.

 

곤명(昆明): 운남성의 저명한 도시. 전지( 池) 북안. 옥석과 구리의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곤명지(昆明池): 운남성 운남부에 가까운 대호. 전지( 池), 전남택( 南澤)이라고도 한다. 해발 2천미터의 높은 곳에 있으며 물이 맑고 풍경이 뛰어나다. 보도하(普渡河)를  거쳐 북으로 흘러 양자강으로 들어간다.

난창(瀾滄): 운남성의 서남부에 있는 현. 현성은 만로하(漫路河)의 상류에 있다. 일대에 백이족(白夷族)이 살고 있다. 절의 산지로 유명하다.

 

난창강(瀾滄江): 운남성에 있는 강. 녹창강(鹿滄江)이라고도 한다. 발원지는 티벳(서장)의 탄리산맥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운남성으로 흘러들어가서 난창강이 되고 이 하류가             인도차이나로 들어가서 메콩강을 이룬다. 이 강은 급격한 산협(山峽)을 흘러내리             기 때문에 그 광경은 시, 회화에 흔히 볼 수 있으나 선박의 왕래는 몹시 불편하             다. 강의 깊이는 곳에 따라 1킬로가 되는 곳도 있다.

 

등충(謄衝): 운남성 서부에 있는 도시. 등월(謄越)이라고도 한다. 황사(黃絲), 사향을 수출한다.

 

대리(大理): 운남성 서부의 현. 옛이름은 태화(太和). 월남과 미얀마의 공로이며 대리석의 산출로 유명하다.

 

창산(倉山), 이해( 海)등의 명승지가 많다.

 

몽자(夢自): 운남성 동남부의 도시. 개구에서 나는 주석을 수출하며 부근의 산물을 집산하여 상업이 성하다.

 

무정(武定): 운남성 북쪽의 도시. 본래는 만이(彎夷)의 땅이었으나 원나라 때 예속되어 무정로(武定路)와 화곡주(和谷州)를 두었고 명나라때 무정부로 개명되었다. 운남, 사천, 서강 3성의 교통요지이다.

 

사모(思茅): 운남성 서남부의 도시. 한족(漢族)과 이족(族:族)과의 접주(接住) 지대.

 

소통(昭通): 운남성의 도시. 금사강(金沙江: 양자강의 상류)의 지류와 지류 사이에 있는 고지(高地)에 위치하며 표고는 1,950미터이다.

 

애뇌산(哀牢山): 애뇌산은 운남성에 위치한 절산이다. 산세는 험악하여 계곡은 깊고, 봉우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사시사철 밤낮없이 구름과 안개에 덮혀있는 봉우리는 그 전모를 눈으로 불 수가 없었으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천길 절벽 사이에는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험함 골짜기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구비구비 거복을 이룬 산줄기는 백리나 뻗쳐있고, 온 산은 나이를 알 수 없는 거목으로 끝없이 뒤덮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천 수만년을 두고 인적이 드문 이 숲속에는 독사와 맹수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운귀고원(雲貴): 운남, 귀주 두 성의 대부분과 광서, 호남, 사천성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 서편은 대리, 서편 창힐산(蒼 山)의 단층애, 동편은 원강(沅江). 서부는 높고, 동남부가 얕다.

월강( 江): 운남성 동북부에서 발원하여 귀주, 광서, 광동 3성을 거쳐 남해에 이르는 강. 주강(珠江)이라고도 한다. 주류는 서강(西江), 유정(流程) 약 1천 킬로. 화남(華南) 최대의 강으로 수리(水利)는 양자강에 다음 간다.

 

홍하(紅河): 운남성 중부에서 발원하여 남동으로 흘러 동경(東京)만에 들어가는 강. 지류에 흑하(黑河)가 있다.

 

이해( 海): 운남성 대리의 동방에 있는 대호. 해발 2천미터의 고지대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게 뻗쳐져 있다. 어족이 풍부하다.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
절강성 동북부의 도시. 쌀농사가 성하고 상업이 발달하였다. 남방의 협석진( 石鎭;海寧)은 쌀시장으로 유명하다.

 

갈홍정(葛洪井)
서호(西湖) 근처의 우물. 옛날에 이 갈홍정 속 돌독에서 마름열매와 같은 단(丹)이 몇 개 나온 일이 있는데, 먹어 보아도 아무런 맛이 없어 버려두었던 바, 시어옹(施漁翁)이라는 사람이 그 중 하나를 주워 먹고 105세까지 살았다는 말이 있다. 차를 끓이는 물로는 최상으로 친다.

 

건덕(建德)
절강성 서부, 전당강 상류 연안의 도시. 옛 이름은 엄주(嚴州). 안휘성 남부 및 본성 서부에서 나는 오동나무, 기름, 치, 목재의 집산지이다.

 

교단(敎壇)
절강성 갱주(갱州)의 남쪽 십리지점 오구산(烏龜山)의 서록(西麓)에 있는 천제에게 제사 지내는 단. 이 아래에 남송 중기의 정부에서 직영하는 청자요(靑滋窯)가 있다. 교단하신관요(敎壇下新官窯)라고 한다.

 

귀주(귀州)
절강성 남서부 전당강의 상류지방에 있는 도시. 시가는 전당강의 상류 귀항(귀港)에 연하고 수,륙교통의 중심지로 상업이 성하다.

 

금화(金華 )
절강성 중부의 도시. 동양(東陽), 영강(永康) 두 강의 회합점에 있다. 수륙교통의 요지로 북쪽의 북산(北山)은 명승지로 유명하다.

 

난계(蘭谿)
절강성 전당강의 중류에 있는 도시. 당나라 이후는 난계현성이었으며, 성의 내외에 시가가 있고 남문 밖, 북문 밖, 동문 밖은 번성한 상업구역이다. 집산품은 쌀이 제일 많다. 교통은 수운이 발달하여 복건, 영파(寧波)와 상거래를 한다.

 

난정(蘭亭)
절강성 소흥현 서남에 위치한 난저(蘭渚)에 있는 정자. 진나라때 왕희지가 41인의 문사를 모아놓고 그 낙성식에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한 잔' 이란 풍류를 남겼다.

 

대진도(大陣島)
절강성의 동쪽과 대만에서 약 3백킬로 떨어진 해상에 있는 섬. 상대진, 하대진의 두 섬이 있고 그 주위에 사산(蛇山), 상여(上여), 죽여(竹여) 등 작은 섬이 있으며 이것을 총칭해 대주열도(臺州列島)라 한다.

 

막간산(莫干山)
절강성 항주에서 북서쪽에 있는 산. 간장(干將)과 막사(莫邪)가 검을 만든 곳이라 한다. 간장은 춘추시대 오의 칼 만드는 장인이고 막사(혹은 막야)는 그의 처였다. 이 부부가 오왕 합려(闔閭)를 위하여 칼을 만들었는데 간장이 칼을 만들면 그의 처는 철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머리털과 손톱을 깎아 화로속에 쇠와 함께 넣어 달구어서 명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만든 두 칼을 음양법에 따라 양으로 된 칼은 간장, 음으로 된 칼은 막사라 하였다 한다.

 

민절산지( 浙山地)
절강성 항주 부근에서 관동성에 이르는 연해지역. 산지가 바다에 박두하고, 갑(岬)과 섬무리가 교착하여 대표적인 침수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좋은 항구가 많다.

 

백제(白堤)
서호의 북쪽에 고산(孤山)이란 섬에서 동쪽으로 약 2킬로쯤 호수를 가로지르는 산책길을 백제라 한다. 당대 시인 백거이가 이 지방 지사로 있을 때 쌓은 것이라고 전하다.

 

보타산(普陀山)
절강성 주산열도(舟山列島)에 있는 불교의 영지. 범명은 보타락가(補陀洛伽). 중국명은 소백화(小白華), 매잠산(梅岑山). 관음보살의 영지로 풍경이 좋고 산 모양이 8각이다. 사천 아미산. 산서 오대산. 안휘 구화산과 더불어 불교의 사대 명산중의 하나이다. 보제사(普濟寺), 법우사(法雨寺), 혜제사(慧濟寺) 등이 있으며 조음동(調音洞)이 유명하다.


상산만(象山灣)
절강성 동쪽에 있는 해만. 내륙에 40킬로나 만입하였고, 넓이는 6.4킬로나 된다. 동쪽은 상산반도로 둘러있다. 만안에 몇 개의 작은 도시가 있어 선박의 출입에 편리하다. 물이 깊어 옛날부터 중국 해군의 근거지를 만들려고 기도하였던 곳이다.

 

사명산(四明山)
절강성 영파(寧波)의 남서에 있는 산. 천태산(天台山)에서 기맥하여 북동으로 달리어 만봉(彎峯)을 이룬다. 도교에서 이 산을 존경하여 제 9동천이라 한다. 송나라 진종(眞宗)때 천태종의 지례(知禮)는 명주(明州)의 연경사(延慶寺)에서 살고, 산가적류(山家嫡流)의 법문을 홍의(弘宜)하고 산외파(山外波)의 학장과 논난항쟁하여 그 이름이 나타나 사명존자(四明尊子)라 칭하여 졌다. 한다.

 

산음(山陰)
절강성 소흥현. 여기에 살던 도사 하나는 왕희지의 글씨가 탐이 나서 입수하려 했으나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왕희지가 좋아한다는 거위를 보내 환심을 사서 황정경(黃庭經)을 쓰게 했다 한다. 부근에 있는 경호(鏡湖)의 경치가 뛰어나다.

 

서시석(西施石)
춘추시대 이름난 미인인 서시가 비단을 세탁했다는 돌로 회계산(會稽山)의 산성에 남아 있다.

 

서호(西湖)
절강성 항주에 있는 호수. 서자호(西子湖)라고도 한다. 예 서적에는 명성호(明聖湖), 전당호(錢塘湖), 상호(上湖) 등으로 불린다. 당이후 이미 세상에 알려졌으며 송대에 와서 특히 유명하여 졌다. 소식이 각종의 시설을 베풀었다고 전하여 진다. 항주성의 옆에 있으며 둘레는 언덕으로 둘리었고 이른바 서호십경을 비롯하여 경치가 매우 좋으며 또한 영은사(靈隱寺), 천축사(天竺寺) 등의 절, 고적이 많고 항시 유람객이 끊이지 않는다. 서호십경이란 평호추월(平湖秋月), 소제춘효(蘇 春曉), 단교잔설(斷橋殘雪), 뇌봉석조(雷峯夕照), 남병만종(南屛晩鐘), 곡원풍하(曲院風荷), 유흔문앵(柳痕聞鶯), 삼담인월(三潭印月), 쌍봉압운(雙峯押雲), 화항관어(花港觀魚)이다.

 

석교(石橋)
절강성 천태산(天台山) 깊은 골짜기에 걸려 있다는 돌다리로, 생사를 초월한 사람만이 건널 수 있다하여 생사교(生死橋)로 불리운다.

 

성과사(聖果寺)
향주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절로서 수나라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선하령(仙霞嶺)
절강, 강서, 복건의 성계에 있는 산. 전당강의 상원(上源), 신강(信江), 민강( 江)의 상원, 남포 계(南浦溪)의 분수령을 형성한다. 침식에 의하여 생긴 안부(鞍部)는 강서와 복건 사이의 관문이다.

 

소흥(紹興)
절강성의 도시. 항주만 남쪽에 위치한다. 춘추시대 월(越)의 도성이었고 회계(會稽)라고도 불리웠던 운하(運河)의 거리. 부근은 쌀의 생산이 풍부하고, 찹쌀로 만든 소흥주(紹興酒)는 유명하며 중국명주의 1이다. 회계산, 구천의 묘와 난정 등의 명승이 있고 많은 사원이 있다. 성 교외에 우가 장사 지내여졌다는 대우릉(大禹陵)이 있다.

 

봉황산(鳳凰山)
항주 교외에 있는 산. 풍광이 수려하고 성과사 등 유적이 많다. 특히 산 아래에 남송때 설치된 수내사요(修內司窯)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수내사는 장작감(將作監)에 속하며 요무(窯務)에 종사하는데 환관 소성장(邵成章)의 감독하에 청자기 중에서 가장 우수한 청자기를 구웠다고 한다.

 

아육왕산(阿育王山)
절강성 영파의 동쪽에 있는 산. 육왕산이라고도 한다. 서진(西晋) 무제의 시대에 유살하(劉薩하)가 아육왕(이소카왕)의 8만 4천탑 중의 하나인 것을 여기서 발견한데서 기인한다. 유송(劉宋)시대에는 여기에 사탑(寺塔)이 건립되었고, 양나라의 무제가 중수하여 아육왕사라고 불렀다. 조송(趙宋)시대에 소동파와 친교가 있던 대각회련(大覺懷連)이 내주한 후부터 천하의 명찰로 되었다.

 

악왕묘(岳王廟)
서호의 한 귀퉁이에 악왕묘가 있다. 이것은 남송의 무장인 악비(岳비)의 묘다. 악비는 금과 싸워 승리하였고 뒤에 진회(秦檜) 때문에 형벌을 받아 죽었다. 서른 아홉에 죽기 직전,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넉자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악비는 사후에 악왕으로 추봉되었고, 오래도록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안탕산(雁蕩山)
절강성의 가장 남단에 있는 산. 남안탕산과 북안탕산으로 나위며 남안탕산은 평양(平陽)현, 북안탕산은 낙청(樂淸)현에 위치한다. 고래의 명산으로 기봉(奇峯)과 폭포, 동부(洞府)가 많아 삼절(三絶)이라 불리우며 구름이 짙고 산의 높은 곳에는 호(湖), 낮은 곳에는 깊은 담(潭)이 많다. 환상만태한 곳으로 이름이 높다.

 

영은사(靈隱寺)
항주의 운림사(雲林寺)라는 절. 대웅전 앞에 8각 9층탑이 유명하다. 무림산(武林山)에 있다. 옛날 해리(해理)라는 고승이 이곳에 올라 그 절경을 찬탄하며 '천축의 영취산(靈鷲山)이 날아온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하여, 이후 비래봉(飛來峯)이라 불리어 온다.

 

완사(완沙)
절강성 제기(諸 )현 저라산(苧蘿山) 기슭에 시냇물이 흘러 그곳에서 서시가 동리 아낙네들과 어울려 빨래를 하기도 했었는데 지금도 서시가 빨래하던 돌이 남아 있다.

 

월계(越溪)
약야계(若耶溪)를 말한다. 절강성 소흥현 동남쪽에 있는데 서시가 이곳에서 연꽃을 따기도 하였다고 한다.

 

영파(寧波)
절강성 동부 용강(甬江) 하류에 발달한 도시. 옛 이름은 명주(明州)라고 한다. 당대 이래의 대외 통상 교통으로 중요한 항구이며 영소(寧紹)평야, 주산열도의 산물의 집산지이다. 영파 사람들은 옛날부터 상술(商術)이 뛰어나 지금도 전국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부근의 천동산(天童山), 아육산(阿育山)은 명승지로 유명하다.

 

온주(溫州)
절강성 남부의 항구도시. 영가(永嘉)라고도 한다. 구강( 江) 유역의 화물을 집산하고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온주귤, 차, 고치 등의 산지로 유명하다.

 

용정(龍井)
절강성 항주의 서남쪽, 풍황령(風篁嶺) 밑에 있는 도시. 용홍(龍泓)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나는 용정차는 천하에 유명하며 진짜는 구하기가 힘이 들다고 한다.

 

용천(龍泉)
절강성의 서남부에 있는 도시. 중국 최대의 청자의 생산지이다. 기원은 늦으나 세계를 시장으로 하여 수출하였고 남송 이후의 유품이 많다. 특히 아름다운 분청색(粉靑色)의 다듬잇돌은 청지의 최고품이다. 송나라때 장생일(章生一), 장생이(章生二) 형제가 이곳에서 함께 그릇을 구웠는데, 뒤에 형제가 분리되어 형의 요를 가요(哥窯)라 하고 동생의 것을 장요(章窯) 혹은 용천요(龍泉窯)라고 불렀다. 가요에서는 침수(砧手)의 청자를, 용천요에서는 천룡사수(天龍寺手)의 청자를 구웠다고 한다.

 

전당강(錢塘江)
절강이라고도 하며 절강성을 흐른다. 하류의 양안에는 산이 많아 조수가 사나우며, 특히 음력 팔월에는 한층 맹렬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매년 가을, 오자서(伍子胥)의 혼백이 큰 조류가 되어 이 강을 거슬러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산열도(舟山列島)
절강성 동쪽 항주만 남쪽에 있는 제도(諸島). 중심은 주산도의 정해(定海)현이다. 어업이 주이며 보타산은 관음보살의 영장이다.

 

천관탑(千官塔)
항주 연하동(煙霞洞) 입구에 있는 오월시대의 탑. 높이 이 장에 8각 7층의 탑은 그 주변에 무수한 관인소상(官人小像)이 있어 천관탑이라 불리운다.

 

천목산(天目山)
절강성 항주의 북서쪽, 임안(臨安)현에 있는 산 이름. 산세가 험하고 끝이 뾰족하여 마치 하늘의 눈과 같아서 천목이란 이름이 붙었다. 동천목산과 서천목산으로 나뉘며, 여기에서 출산되는 차는 천지(天池)와 용정(龍井) 다음으로 좋은 것이라 한다.

 

청전(靑田)
절강성 청전현. 이곳에서 산출되는 동석은 청전석이라 하며 완구(玩具)와 인장을 만드는데 쓰이며 특히 청전석 중에서도 옥과 같이 형결(螢潔)하여 등불빛처럼 찬란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등광석(燈光石)이라고 한다고 한다. 등광석은 옥보다도 더 비싸며 질이 아름답고 새기기가 쉬워 인장으로는 최고의 재질로 알려져 있다.

 

항주(抗州)
옛날 호림(虎林)이라 불리우던 오(吳), 월(越), 전(錢), 무(武), 숙(肅)의 오대국의 서울이었던 곳이다. 그 후에는 송나라의 고종황제가 도읍을 남으로 옮겨 임안(臨安)으로 개칭하였다가 그 후 항주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곳엔 전당강이 굽이쳐 흐르고 남쪽으로는 운하가 통하고 있었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고 산수가 빼어나서 뛰어난 인물들이 속출했다. 항주성 서쪽에 있는 서호는 청산이 병풍처럼 둘러섰으며 호숫물이 어찌나 맑은지 십 여장이나 되는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그 경치의 아름다움이란 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이름난 풍류객들이 모여들었다. 풍류객들만이 아니라 선비, 고승들도 그 절경에 도취되어 발길이 끊어질 새가 없었다. 진정 극락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성 동남쪽 연하동에 호포사(虎包寺)가 특히 유명하다.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抗)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강소의 소주와 함께 명승지로 알려져 있으며, 진(秦)때는 전당, 수 양제때 운하 개설 후 항주로 명명되었다.

 

호주(湖州)
절강성의 서북, 태호 남안의 도시. 일명 오흥(吳興)이라고 한다. 잠사업의 중심지이고 직물, 호추(湖 )의 특산지이다. 또 명산물 호필(湖筆)이 나온다. 북동에 있는 남심진(南 鎭)은 잠사의 거래가 성하며 이 성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다. 남서의 막간산(莫干山)은 절경으로 유명한 피서지이다.

 

회계산(會稽山)
절강성 소흥현의 남동에 위치한 명산.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가 싸워 이 산에서 구천이 쓰라린 고난을 참고 부차를 이겨 회계의 굴욕을 씻었다. 산기슭에 대우릉(大禹陵)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우가 군신들을 회계산으로 불러모았다고 한다. 군신들은 우가 지정한 시각에 회계산에 모였다. 그러나 오직 방풍씨(防風氏)만이 늦게 도착해서 우는 그를 죽여버렸다. 그 뒤 2천년이 지나 춘추시대 오왕 부차가 월나라를 칠 때 월왕 구천이 살고 있던 회계산을 포위한 적이 있었다. 전쟁은 산까지 무너뜨릴 정도로 치열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무너진 산 속에서 이상한 두개골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뼈도 아니고 그렇다고 짐승의 뼈도 아니었다. 그것은 얼마나 컸는지 수레에 싣고 와 당시의 대학자였던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우의 신화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제야 사람들은 그것이 방풍씨의 두개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회계산은 원래 모산(茅山)으로 불려졌던 산인데 우가 천하의 제신을 모아놓고 치수를 상의하고 공공(共工)을 토벌한 뒤 회계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회계(會稽)란 회계(會計)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곧 모아놓고 계획을 의논한다는 뜻이었다.
우는 남방을 순시하다가 회계산에 이르러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그의 신하들은 그를 그곳에 장사 지내어 지금도 대우릉이 남아있다. 회계산은 우혈(禹穴)이라고 하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전설에는 우가 들어간 구멍이라고 한다.


섬서성(陝西省)

 

감천(甘泉)
섬서성 돈화현( 化縣) 감천산에 있는 궁. 진이 세우고 한무제가 증축하여 피서지로 쓰이던 별궁.

 

경조(京兆)
섬서성 장안일대를 차지하는 행정구획. 한나라 무제때 설치, 경조윤(京兆尹)을 둔 이래, 수, 당, 송, 금을 통하여 원초에 이르기까지 행정구획이었으나 원초에 봉천로(奉天路)로 개명하였다. 경조는 천자 소재의 땅이라는 뜻.

 

경하(涇河)
섬서성 위하(渭河)의 지류. 경수(涇水)라고도 한다. 감숙성 농산( 山)에서 발원하여 위하평야를 거쳐 위하로 흐른다. 역사상 유명한 진(秦)의 정국거(鄭國渠), 한의 백거(白渠)는 경하를 이용하여 구축한 관계시설이다. 지금의 간거(幹渠)와 지거(支渠)와의 총 길이는 300킬로.

 

고장(高掌)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화산과 수양산(首陽山:중조산)은 원래 한 산이었다고 한다. 황하신이 손으로 밀고 발로 차서 두 산으로 쪼개고 물이 통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손자국과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곤명지(昆明池)
장안 상림원(上林苑) 안에 있다. 그 안에는 한 대에 돌로 만든 고래인 석경(石鯨)을 만들어 놓았는데 크기는 삼장으로 천둥이 칠 때는 꼬리나 지느러미를 흔들며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과부산( 父山)
화산의 옛 이름. 전설에 의하면 옛날 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할 때 동원하였던 여덟 필의 준마를 유명한 어자(御者)(말몰이꾼)인 조부(造父)가 잡아 주목왕(周穆王)에게 바쳤다고 한다. 산의 북쪽으로는 수백리에 달하는 광대한 수풀이 있고 거의 복숭아 나무로 도림(桃林)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가 바로 고대의 유명한 도림새(桃林塞)라고 한다.

 

곽거병묘( 去病墓)
한나라 무제때의 명장인 곽거병의 묘. 무제는 그를 총애하여 그가 죽자 장안의 서북쪽에 조영중이던 자신의 능묘인 무릉(茂陵) 옆에 그가 활약한 무대였던 기련산(祁連山)의 모양을 본뜬 분묘를 만들어 주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그 분묘 옆에는 오늘날에도 흉노를 발로 짓밟고 있는 말의 석상등이 남아 있다.

 

관중
진나라가 도읍한 섬서의 장안일대는 동은 함곡(函谷), 서는 산(散) 남은 요(嶢) 혹은 무(武), 북은 소(蕭)의 4개관문에 둘러쌓여 있어 관중(關中) 혹은 관내(關內)라 불렀다.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記)에 "관중은 산하(山河)가 막히어 사색(四塞)하고, 땅은 비옥하여 도읍하여서 패(覇)가 될 지니라."라고 적혀 있다. 진, 한, 당의 각 왕조가 도읍했으므로 사적이 많다. 일명 진천(秦川).

 

구맥(九陌)
한나라 서울 장안의 성 안에 있던 동서남북에 통하는 아홉 큰 거리.

 

기(岐)
섬서성 기산(岐山)현 이북 일대. 주나라를 세운 문왕이 처음 국도로 정한 곳이라고 한다.

 

낙수(洛水)
섬서성의 중부에 있는 강. 정변(定邊)현의 백어산(白於山), 동성의 서북으로 발원하여 황하로 흘러간다.

 

남전(藍田)
장안 동남의 명승. 경옥(硬玉)의 산지이므로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농관( 關)
섬서성 농주( 州)의 서쪽에 있는 관. 지금은 대진관(大震關)이라 부른다. 농산 아래의 요애(要隘)에 설치되어 한나라때부터 서방과 통하는 요충지의 하나로 되었다.

 

농주( 州)
섬서성의 서부에 있는 도시. 명나라와 청나라때 농주라고 불리웠고 현재는 농현이라고 한다. 농주는 봉상(鳳翔)의 서북쪽에 있고 이 시의 서북은 농산산맥을 넘어 감숙성에 통하는 요충지대가 되어 있다. 농업과 축산이 발달하였고 말과 양은 옛부터 명산지로 알려졌다. 그 밖에 여러 가지 한약재가 산출되고, 부근에 임연성(臨衍城), 영신성(永信城), 농관등이 있어 역사상 유명한 곳이다.

 

대산관(大散關)
섬서성 보계(寶鷄)현 남동부에 있는 옛 관소. 일명 산관(山關)이라고도 하며 봉현(鳳縣)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 관소는 한 대이래 군사상 요지로 유명하며 섬서, 사천 두 성 사이의 교통로에 해당하는 관계상, 특히 삼국시대에는 위, 촉 양국의 교전지로서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

 

동관(潼關)
섬서성 동부에 있는 현. 화산의 동북 기슭에 있으며 황하의 급굴곡점에 있다. 산서, 하남, 섬서의 3성의 교통요지이다. 위수분지로 들어가는 곳은 서북 관계 수출입 화물을 옮겨 싣는 중계지이다.

 

마외파(馬嵬坡)
장안의 서북쪽, 위하 북안의 지명.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양귀비와 함께 이곳에 왔다가 강압에 못 이겨 양귀비가 죽은 곳. 양귀비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명봉령(鳴鳳嶺)
장안의 서쪽에 있는 산.

 

무릉(茂陵)
장안의 서북 40킬로에 있는 전한의 황제 무제의 묘. 근처는 황제들의 묘가 열 한 개나 있으나 그중 가장 크다. 저변의 길이는 240미터, 높이 46.5미터로, 외형은 사각형이고 꼭대기 부분은 평평하다. 무제 즉위 다음해부터 건조하여 53년이나 걸려서 완성시켰다.

 

보경사(寶慶寺)
섬서성 서안의 남문 내 보경사에 있는 불전과 전탑 벽면에 있었던 석제의 부조 불상. 이들 부조는 본디 당시대에 같은 장안의 광택방(光宅坊)에 있었던 광택시 안, 특히 측천무후의 조영에 걸린 누각칠보대(寶대) 등의 내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원래는 130석여(石餘)가 있었다고 한다.

 

보계(寶鷄)
섬서성의 서부 위수평야의 서쪽 끝에 있는 도시. 옛 이름은 진창(陳倉). 감숙, 섬서, 사천의 3성의 물자교류의 중심지이다.

 

보제사(菩 寺)
장안의 평강방(平康坊) 남문의 동쪽에 있는 절. 수나라때 농서공( 西公) 이경도(李敬道)와 중 혜영(惠英)의 상주로 이 절을 세웠다 한다. 마지의 아랫쪽에 있어 향적사와도 가깝다. 안록산의 난때 왕유(王維)가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봉상(鳳翔)
섬서성 위하유역에 있는 도시. 섬서성 서부의 중요 시장이며 감숙성 동부와의 사이에 성행하고, 한구와도 거래가 있다.

 

삼문협(三門峽)
산서의 용문산과 인접해 있는 계곡. 우는 황하를 가로막고 있던 산을 몇조각으로 나누어 지류를 만들었는데 산사이를 흐르는 물이 마치 세 개의 문을 지나는 것 같다고 하여 삼문(三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삼문에는 각기 고유명칭이 있는데 귀문(鬼門), 신문(神門), 인문(人門)이 그것이다. 화산삼문협잡기(華山三門峽雜記))에 보면 이곳의 풍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하 양안의 절벽에 서서 하곡을 내려다보노라면 멀리 상류 쪽에서 힘차게 들려오는 황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은 동쪽으로 갈수록 수세가 급해지는데 삼문협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중간에 서 있는 두 개의 석도(石島)에 부딪혀 물길은 순식간에 세 가닥의 급류로 변하고 만다. 이들 급류는 다시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양안에 돌출해 있는 바위에 부딪혀 순식간에 한 가닥으로 모이게 되며 넓이가 1백 20미터쯤 되는 계곡을 박차고 나가는데 우뢰같은 소리가 협곡을 진동시킨다.'
이곳에는 우의 치수를 말해주는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우가 삼문협을 뚫을 때 팠던 우물이라는 칠구석정(七口石井)이 그것인데 그래서 삼문협을 칠정삼문(七井三門)이라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귀문도(鬼門島)의 절벽 꼭대기에는 두 개의 둥근 원이 마치 한쌍의 말발굽처럼 파여 있는데 그 크기가 우물보다 크다. 이것을 마제와(馬蹄窩)라고 한다. 옛날 우가 지주(砥柱)를 뚫을 때 말이 삼문(三門)을 뛰어넘으면서 앞발로 이곳에다 발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삼문협의 상류에는 우묘(禹廟)도 있는데 옛날 삼문협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향을 피우고 자신들의 소원을 우에게 빌었다고 한다. 또 폭죽을 터뜨리면서 실컷 먹고 마신 다음 급류를 저어가는데 도중에는 화살같이 뾰족한 바위가 많아 순간적인 판단으로 생사가 갈릴만큼 위험한 곳이다. 따라서 현지에는 '나루터에는 불러도 대답없는 사공, 울다 지친 과부'라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옛날 용감했던 중국 사람들의 피눈물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서안비림(西安碑林)
서안의 문묘(文廟) 뒤쪽에 모아놓은 석비군(石碑群)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개성석경(開成石經), 현종황제 어주효경비(御注孝經碑), 안진경(顔眞卿)등의 석비를 세운데서 비롯되었다. 명, 청대에 수차 수리를 하여 당, 송 이후 근대까지의 석비와 저명한 서가(書家)의 법첩(法帖)을 석각한 것을 500여개 모았다.

 

삭성(削城)
화산기(華山記)에 산 4면이 절벽으로 되어 깎아 만든 것 같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소릉(昭陵)
당태종의 능으로서 장안의 서북쪽 예천(醴泉) 근처에 있다.

 

소응(昭應)
섬서성 임동(臨潼) 여산(여산(驪山))의 서북쪽 기슭에 있다. 원래는 회창(會昌)이라고 하였으나 현종황제때 여산 화청궁의 조현각(朝玄閣)에 노자가 강림하였다는 말이 전해져서 이것이 길조라고 하여 이래 소응이라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소릉육준(昭陵六駿)
예천의 서북, 구준산(九峻山)에 있는 소릉의 석조(石彫). 처음에는 현무문(玄武門)에 있었으나 지금 서(西) 제 1석은 미국에, 다른 5석은 서안의 비림에 있다. 높이 1.5미터, 넓이 1.8미터의 각각 한 필의 말을 부조하였다. 유래는 태종이 전쟁에서 승용한 애마를 추억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한편 마찬(馬讚)의 제자(題字)는 구양순(歐陽詢), 은중용(殷仲容)이 쓴 것이라 한다.

 

신풍(新豊)
장안의 북동쪽에 있는 술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

 

아방궁(阿房宮)
진시황제의 궁전. 궁지는 섬서성 장안의 서북, 위수의 남쪽에 있다. 그 규모는 2층으로 아래층에는 5장의 깃발을 세울 수가 있고 위층에는 일만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이다. 시황제는 위수의 남쪽에 상림원(上林苑)에 조궁(朝宮)을 짓고자 하여, 먼저 그 전전(前殿)인 아방궁을 지은 것이라 한다. 동서의 길이가 약 990미터, 남북의 길이가 약 152미터다. 당시 이 궁전의 노작(勞作)에 당하였던 형도(形徒)의 수는 70만명에 이르렀으며, 그 밖에도 여러 궁궐을 만들어 관중(關中)에는 3--개, 관외에는 4백여개 그리고 함양부근 2백리 안에 세운 궁전은 270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사를 당한 인가가 8만호나 되었다고 한다. 아방궁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항우에 의하여 불태워져 버렸다.

 

여산(驪山)
섬서성 서안부에 있는 산. 여산(廬山), 회창산(會昌山)이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이 높다. 주나라때 여융(驪戎)이 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온천을 이용하려고 각도(閣道)를 만들었고 당의 태종은 온천궁을 지었고, 현종은 온천궁을 화청궁(華淸宮)으로 고치었다.

 

여산릉(驪山陵)
섬서성 임동현에 있는 여산 기슭에 있다. 사기에 의하면 시황제는 70만명을 동원하여 38년 걸려서 이 능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는 75미터, 봉상(봉상(封上))의 한변이 560미터의 방형(方型)묘이며 주위에는 3,000미터나 되는 흙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묘내에는 궁전이 있고, 문무백관의 자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궁중에서 엄선된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고, 묘도둑이 접근하면 노시(弩矢)가 저절로 발사되도록 되어 있었다. 묘실의 천장은 천체를 본떠서 야광(夜光)의 옥(玉)을 박은 밤하늘이 보이고, 중국의 지형을 본뜬 바닥에는 수은의 강이 흐르고 있다. 묘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인어(人魚)의 고(膏)를 쓰는 촉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공사에 종사한 공장(工匠)들은 능묘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조리 묘내에 갇혀 버렸다고 사마천은 적고 있다.

 

용지(龍池)
장안 흥경방(興慶坊)의 한 민가에 작은 못이 있었다. 이 못이 점점 커져서 아주 넓게 되어 늘 구름이 일고 용이 노는 것을 본 사람까지 있었다. 드디어 당의 현종이 이곳에 흥경궁을 짓고 용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위교(渭橋)
장안 북방을 흐르는 위수에 놓은 다리. 서역에 통하는 요로로 횡교(橫橋), 중위교(中渭橋)라고도 부른다.

 

위하(渭河)
감숙, 섬서의 두 성에 걸쳐 흐르는 강. 위수(渭水), 위천(渭川)이라고도 한다. 감숙성 위현의 조서산(鳥鼠山)에서 발원하여 남동으로 흘러 섬서성에 들어와 봉상, 서안, 조읍(朝邑)을 거쳐 동쪽으로 동관을 돌아 황하에 이른다. 도중에 견수(견水), 경수(硬水)의 지류를 합친다. 옛날에 흑룡이 이 물을 마셨다 하여 음룡천(飮龍川)이라고도 한다. 주의 문왕은 위하의 북쪽에 있는 반계(盤溪)에서 사냥하다가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呂尙)을 만났다. 그는 여상을 군사로 임명하여 주의 국권을 맡겼다. 이때 여상의 나이는 팔십 세였다.

 

유림(楡林)
섬서성의 북부에 있는 도시. 본래 한나라의 구자(龜滋)현 및 수나라 초기의 정덕진(靜德鎭)이었고 명나라때에 유림채(儒林寀)를 두었는데, 그것을 다시 유림위(楡林衛)로 고치고 청나라때 부와 현을 두었다. 산물은 보잘것이 없고 토량도 각박하고 기후까지 한랭하고 우량도 적다. 주로 모피의 집산만이 성하다.

 

산서성(山西省)

 

관작루( 雀樓)
산서성 평양(平陽)부 포주(浦州)의 성북에 있는 3층 루각. 동남으로 중조산, 눈 아래 황하가 굽어 보이는 명승지.

 

규수( 水)
산서성 영제(永濟)현 남방. 순 임금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순은 야생코끼리를 길들여 밭을 갈았다고 하는데 규( )지에 위(爲)변이 있는 것도 그가 코끼리를 훈련시켰다는 전설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대(代)
산서성 북부 호다( 다)강 연안에 있는 소도시. 오대산의 서북서 50킬로에 있으며 부근은 농산물 시장이 선다. 전국시대 이래 조(趙)나라의 영토이었던 곳이다. 안문관월(雁門關越)의 소도시로 대원, 대동(大同)의 사이에서 번영하였다.

 

대동(大同)
산서성의 북부. 옛 이름은 운주(雲州), 평성(平城). 북위의 옛 서울. 군사, 경제, 교통의 요지이며 상건(桑乾)분지의 농축산물의 집산지이다. 사적(事蹟)이 많고 서남쪽에는 탄전지대이며 서쪽 15킬로에 있는 운강석굴(雲崗石窟)의 불상이 유명하다.

 

벽제천(  泉)
산서성 대동부의 염주에 있는 샘. 여기서 호인(胡人)들이 말에 물을 먹였다고 한다.

 

분수(汾水)
산서성을 남쪽으로 가로질러 황하로 들어가는 강. 분하(汾河)라고도 한다. 황하지류중 최대의 것으로 산서성의 북부, 관잠산(管 山)에서 발원하여 정락(靜樂), 태원등을 지나 황하에 합류한다. 수정(水程)은 길지만, 뱃길은 강주(絳州)까지 통한다. (???PAGE 55)

 

분양(汾陽)
산서성의 서북, 태원분지 서단의 도시. 교통의 중심지이며 부근은 토지가 기름지고 농산물이 풍부하다. 섬서성의 북부, 산서성의 남부에서 산출되는 물자의 집산지이며 분주(汾酒)를 특산한다.

 

불궁사(佛宮寺)
산서성 웅현에 있고 요나라때 건조된 절. 8각 9층 목탑이 있고, 첫층에 상계(裳階)가 있어 그 1변은 1,239센티이다. 높이는 약 115미터에 이른다. 중국의 목조건물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응(應)현에 있다.)

 

석불사(石佛寺)
산서성 대동의 서쪽 교외에서 약 11킬로 떨어진 운강(雲崗)의 암벽에 있는 석굴. 석굴사라고도 한다. 수백의 석굴이 있는데 제 1, 제 2, 제 3의 3구로 나뉘며, 큰 것은 제 1구에 4굴, 제 2구에 9굴, 제 3구에 7굴이 있어서 이들의 상하 죄우에는 무수한 소감(小龕)이 이루어졌고, 그 내부에는 무수한 석불이 조각되었는데 그 길이는 약 450미터에 달한다. 북위 문제때 사문(沙門) 운요(雲曜)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서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계속하여 판 것이라 한다.

 

부강(釜岡)
산서성 태원현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양신 염제는 약초에 관심이 많아 그 자신이 각종 약초의 맛을 보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하루에도 70번씩 중독이 되었다고 한다. 부강에는 그 당시 그가 약을 맛보았다고 하는 솥이 있다.

 

성양산(成陽山)
산서성 태원현에 있다. 염제(신농씨:神農氏)가 자편( 鞭)이라고 하는 일종의 신비한 채찍을 사용하여 각종의 약초를 채찍질하였다고 한다. 이들 약초는 채찍질을 가하게 되면 독성의 여부나 약효등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성양산에는 그가 약초를 채찍질했다고 하는 곳이 있다. 그래서 이 산을 신농원약초산(神農原藥草山)이라고도 부른다.

 

수양산(首陽山)
산서성의 남부에 있는 산. 수산(首山), 뇌수산(雷首山), 중조산(中條山), 포산(蒲山), 역산(曆山)등의 이명이 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밑에서 굶어 죽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산신은 길신(吉神) 태봉(泰逢)이다.

 

안문(雁門)
관소의 이름. 산서성 북부, 대(代)현의 서북인 안문산 위에 있다.

 

안읍(安邑)
산서성 남부의 성. 운성(雲城)이라고도 한다. 부근에는 유명한 하동염(河東鹽) 산지가 있어서 그 소금의 집산지이다. 우의 도읍지였던 안읍과 위(魏)의 도읍지였던 안읍은 모두 이 근처이다.

 

망향대(望鄕臺)
안읍의 성남 문밖에 있는 누각. 우임금의 부인인 도산(塗山)의 여교(女嬌)가 안읍에서 고국을 그리워하여 우가 누각을 지어주고는 적적하거나 무료할 때 이곳에 올라 고향을 그리워 하게 했다고 한다.

 

명조(鳴條)
산서성 안읍현. 하의 걸(桀)왕이 탕왕에 쫓겨 총희 말희( 喜)와 함께 피신한 곳.

 

살호구(殺虎口)
산서성 삭평(朔平)의 북방 20리 지점에 있는 도시. 만리장성의 한 관문으로 험요(險要)하다.

 

안탑사(雁塔寺)
산서성 의씨(依氏)현에 있다. 쌍탑이 유명하다.

 

오대산(五臺山)
산서성 북동부에 있는 불교의 명산. 최고봉은 북대(北臺)의 두봉(斗峯)으로 삼천사십척이라 한다. 문수보살이 수도하던 청량산(淸凉山)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며 아미산, 보타산(普陀洛伽:보타락가)와 구화산과 함께 불교 4대영산으로 꼽힌다. 오대란 중대의 취암봉(翠岩峯), 동대의 망해봉(望海峯), 남대의 천수봉(천繡峯), 서대의 괘월봉(掛月峯), 북대의 두봉을 말하며 대회진(臺懷鎭)의 현통사(顯通寺)가 유명하다.

 

운강석굴(雲崗石窟)
산서성 대동의 서방 약 20킬로 지점에 있는 북위의 석굴. 대동의 석불로서 유명하다. 무주강(武周江)의 남쪽에 있는 단애에 새긴 것으로 대소 40수 개의 석굴이 동서 1킬로에 걸쳐 산재하여 있다. 제 1기는 대굴, 제 2기는 중굴. 제 1기 초기의 석불은 풍부한 육체로 얼굴 표현도 야성적이다. 소박한 생활력의 표현, 건축적 구조, 장식적 의장은 서방적이다. 석질은 백사암(白砂巖)이다.

 

용문산(龍門山)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에 있는 산. 예로부터 등용문, 신가백배(身價百培)라는 말로 유명하거니와 용문산이라고 불려진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강이나 바다에서 노닐던 고기떼는 매년 일정한 시간만 되면 이곳 용문산의 절벽 밑에까지 모여들어 높이뛰기 시합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절벽을 넘으면 승천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여전히 물고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용문의 근처에 이어동(魚里魚洞)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는데 이곳에는 잉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동굴에서 빠져나와 3개월 동안이나 역류를 거슬러 용문의 상류로 가게 되는데 용문을 넘으면 용이 될 수 있지만 넘지 못하면 그냥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용문산은 여량산(呂梁山)의 산맥과 접하였는데 이 산이 마침 황하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우임금이 용문산을 두조각으로 동강내고 말았다. 그러자 이 산은 마치 대문을 연 듯 강의 양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황하는 절벽사이를 급류를 형성하면서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장치(長治)
산서성 동남부의 도시. 로안(潞安), 상당(上黨)이라고도 한다. 당삼(黨參:上黨産의 약용인삼), 못(못)은 옛부터 특산이다.

 

천룡산(天龍山)
산서성 태원의 서남 17킬로 지점에 있는 동위에서 북제, 수, 당, 대를 걸쳐 조영된 석굴. 진사진(晉祠鎭) 서쪽의 산중에 있다. 동위의 건조에 대하여서는 불명하나,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여 용문의 석굴이 일시는 쇠퇴되었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 2동, 제 3동이 가장 고식으로 동위식인데 북제의 굴은 제 10동과 제 16동이고 3벽에 아취모양의 공감(公龕)을 부조하고 5존상이 들어 있다.

 

태원(太原)
산서성의 성도. 분하(汾河)상류에 있는 천연적 요새지로 양곡, 태원, 문수, 교성등 인근 십현을 관할하는 관청소재지이며, 하북, 산서지방 일대의 요충지이다. 시가는 14킬로의 성벽으로 둘러 싸였으며 그 안에 내성도 있다. 춘추시대로부터 진양(晉陽)으로 알려졌고 성내에 진사(晉祠), 낭자관(娘子關)등의 명승지가 있다. 거리는 산지사방에서 모여드는 객상, 유람객들 그리고 온갖 사람과 수레와 기마로 붐비고 길 양옆은 주루, 찻집, 형형색색의 점포등 번잡하고 호화롭기 그지 없었다. 특히 성의 남쪽에 있는 취선루는 유명한 객점이다. 양곡(陽曲).

 

태행산(太行山)
산서성 진성(晉城)현 남방의 태행산을 주봉으로 하여 서는 분수(汾水), 동은 갈석(碣石)에 이르는 산맥. 거의 남북으로 달리고, 산서성과 하남, 하북 두 성의 경계를 이루고, 만리장성 근방에서 대흥안령의 남단으로 연결된다.
회남자(淮南子)에서 오행지산(五行之山)이라 불리며, 열자(列子)에서 대형(大形)이라 불리운 천하의 허리라고 일컬어지는 수 천리의 대산맥이다.
태행산은 전설에 의하면 왕옥산(王屋山)과 맞붙어 있었는데 통행이 불편하여 과아씨( 娥氏)의 두 아들이 태행산은 삭동(朔東)으로, 왕옥산은 옹남(雍南)으로 갈라놓았다는 우공이산(愚公離山)의 신화가 있다. 태행산 일천리(太行山一千里)라 할만큼 거대하다.

 

평양(平陽)
산서성 남부에 있는 도시. 웅대한 성곽이 있으나 성내는 논밭이 많다. 이곳은 옛날 요임금이 도읍한 곳이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그 사묘(社廟)가 있다.

 

평정(平定)
산서성 동부의 도시. 상, 하의 2성이 있으며 성 경계의 요지였다. 도자기가 성하며 정요(定窯)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풍릉도(風陵渡)
산서성 남서 경계의 도시. 황하를 사이에 두고 동관(潼關)과 대립한다. 황하에 주교(舟橋)가 있어 왕래가 손쉽다.

 

항산(恒山)
오악중의 북악. 내장성(內長城) 혼원(渾源)현에 있으며 높이는 이천이백십구척. 최고봉은 천봉령(天峯嶺). 태상노군(太上老君), 옥황대제(玉皇大帝), 원시천존(元始天尊)을 모시는 도관이 많고 현공사(縣空寺)가 유명하다.
 산기슭에 북악묘(北岳廟)가 있고 일명 상산(常山)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거대한 새가 한 마리 살고 있는데(새매) 네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이 광야와 하늘임을 어미가 알고 있어 더 이상 그들을 곁에 둘 수도 없어 슬피 울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그의 울음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고 한다.

 

해현(解縣)
산서성이 있는 현. 황제가 치우를 쫓아가 죽인 곳이라 한다.

 

사천성(四川省)

 

가릉강(嘉陵江): 사천성에 있는 양자강의 주요 지류 중의 하나. 상원(上源)은 감숙성의 남동부에서 발원하는 서한수(西漢水)인 백룡강(白龍江), 사천성 합천(合川) 부근에서 거강(渠江) 및 부강( 江)을 합하며 중경의 북동부에서 양자강에 이른다. 뱃길이 편하다.

 

강진(江津): 사천성의 남동부 양자강 남안에 위치한 도시. 양자강의 지류인 기강( 
?江)과의 합류점에 있어서 양자강의 수운에 의하여 중경과 여주(濾?州)로 통하며, 사천성 동부의 양조업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검각(劍閣): 사천성 검각현에 있는 요지. 섬서, 사천 사이를 통하는 관도상에 있다. 검문산을 넘기 위해 산골짜기에 높이 건너질러 놓은 다리로 대검산과 소검산 사이의 잔도이다. 삼국시대 제갈량이 이를 설치하고 위와 싸웠다. 당대 이후에는 여기에 검문관(劍門關)을 설치하였다. 험난한 촉도(蜀道)중에서도 최고의 험지로 알려져 있다.

 

검문산(劍門山): 사천성의 북단 가까이, 장안에서 성도에 이르는 가도(街道)에 솟아있는 산.

 

공동산(  山): 사천과 감숙의 성계에 있는 산. 옛날 황제(黃帝)가 은자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구당협(瞿塘峽): 장강 삼협 중의 하나. 양쪽 기슭이 가파르고 그 절벽 사이를 급류가 흘러 위험한 곳.

 

기주(夔州): 사천성의 동북끝, 호북성과의 경계에 있는 도시. 협곡이며 양쪽 기슭 절벽 사이로 양자강이 흰 물거품을 내밀며 흐르는 곳이다. 양자강 북쪽에 위치하며 호북성과의 통상지이다. 명승고적에는 백제성(白帝城), 공명팔진(公明八陳)의 언덕, 와룡산(臥龍山)등이 있다. 봉절(奉節)이라고도 한다.

 

남충(南充): 사천성 중부의 도시. 옛날에는 안한(安漢), 순경(順慶)이라고 하였다. 가릉강과 관도가 만나는 곳이며 남북 물산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내강(內江): 사천성 남쪽에 있는 도시. 근처에 타강( 江)이 흐르며 사탕수수가 많이 산출된다.

 

노수(瀘水): 사천과 운남성의 경계를 흐르는 큰 강으로 금사강(金沙江)이라 한다. 일찍이 제갈공명이 남만정벌 때 건넜던 강으로 유명하다.

 

대천산(戴天山): 이백의 고향인 창명(彰明;자료집에는 장명으로 나와있음)현의 북쪽 오십리 지점에 있는 산.

 

대강산(大康山) 혹은 대광산(大匡山)이라고도 한다. 이백은 한때 이 산에 있는 대명사(大明寺)에서 공부한 일이 있다.

 

대파산(大巴山): 사천, 섬서의 성경계를 서북 동남으로 달리는 산맥. 구룡산맥이라고도 한다. 미창산(米倉山), 대파산이 주요봉이며 한중분지의 북산면은 급하고, 남산면은 밋밋하다. 유명한 촉의 잔도가 이 산맥의 일부에 있다.

 

동천(潼川): 사천성의 부강( 江) 연안에 있는 도시. 시가는 부강과 그 지류인 흑수강(黑水江)과의 회류점에 있다.

 

두견촌(杜鵑村): 사천성 비( )현에 있는 마을. 두견새가 유달리 많다고 한다. 촉의 전설상의 군주였던 망제(望帝)가 죽어 두견새로 변해 두견촌의 서산(西山) 부근에서 울곤 한다고 한다.

 

만현(萬縣): 사천성 동부 양자강 북안의 항구. 옛 이름은 만주(萬州), 사하자(沙河子). 동부 사천성과 귀주성 북부의 산물을 집산하며 특히 동백기름 시장으로 유명하며 부근에 철광산과 탄광이 있다.

 

맹도사(孟 祠): 무산의 아래에 있는 사당. 우임금의 아들인 계(啓)의 신하, 맹도는 현인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죽자 백성들은 그를 무산에 묻어주고는 후에 산 아래에 이 사당을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려주었다고 한다.

 

면주( 州): 사천성의 도시. 뱃길이 좋으며 상업이 성하다. 면주( 綢)라고 하는 직물과 식염을 산출한다. 명승고적에는 역대 시인들을 모신 사현당(思賢堂)이 유명하며, 서북에 있는 칠곡산(七曲山)에는 천불애(千佛崖)와 문창궁(文昌宮)이 있는데 문창궁은 중국 전체의 문창궁의 종본(宗本)이 되어 있다.

 

몽산(蒙山): 사천성 서부에 있는 산. 청의강(靑衣江)이 그 동방을 흐른다. <서경(書經)>에 우공(禹貢)이 채몽여평(蔡蒙旅平) 운운한 것은 이것이라 하며, 후대의 사서에도 기록된 바 많고 특히 당송이래 명다를 산출한다. 현재도 다생산은 많으며 주로 성내에서 소비한다.

 

무담산(武擔山): 사천성 성도의 서북부에 있는 산. 촉한의 소열제(昭烈帝)가 무담산 남방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전하여지며, 그보다 옛날 무도(武都)에 있는 한 장사가 화신하여 여자가 되었는데 촉나라 왕은 이 여자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하고 죽으매 오정(五丁)이라는 사람을 시켜 무도에서 흙을 져다가 성도의 곽중(郭中)에 묻고 무담이라고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무산(巫山): 사천성 동부의 호북성 경계에 있는 산. 태양신 염제(炎帝)의 딸인 요희(瑤姬)가 죽어 무산에서 운우(雲雨)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침이면 아름다운 구름으로 변해 산과 골짜기를 마음대로 활보하다가도 저녁만 되면 비로 변하여 자신의 슬픔을 알린다고 한다. 그 뒤 전국 말년에 와서 초나라의 회왕(懷王)이 운몽(雲夢)을 여행하다가 고당(高唐)이라고 하는 대관(臺館)에 투숙하게 되었다. 정열과 낭만의 신이었던 그녀는 친히 고당으로 내려와 마침 낮잠을 자고 있던 희왕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희왕은 그 꿈이 슬프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고당 부근에다 그녀를 기리는 사당을 짓고 조운(朝雲)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뒤 희왕의 아들인 양왕(襄王)이 다시 이곳으로 여행을 오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우화를 들은 그는 요희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 겨로가 그도 그날 밤에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양왕의 어전 시인이었던 송옥(宋玉)은 희왕과 양왕이 꾸었던 그 꿈을 <고당부(高唐賦)와 신녀부(神女賦)라는 두 편의 부로 읊었다. 요희를 무산신녀(巫山神女)라고 한다.

 

민강(岷江): 사천성에 있는 큰 강. 양자강 지류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고래로 이것이 양자강 본류로 알고 있었다. 발원지는 민산(岷山)이며 남쪽으로 흘러서 성도, 가정(嘉定)등을 거쳐 서주( 州)에 이르러서 양자강으로 합치고 뱃길은 관(灌)현 이하에서만 이루어진다. 황제시대 때 진몽씨(震蒙氏)의 딸이 황제의 귀중한 보석을 훔쳐서 삼키고는 이곳에서 투신자살하였다. 그 뒤 그녀의 혼은 말의 머리에다 용의 몸뚱이를 한 기상(奇相)이라는 괴물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이곳의 수신이 되었고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문천(汶川)이라고도 한다.

 

백제성(白帝城): 사천성 봉절(奉節)현의 백제산 위에 있는 산성. 전한말 왕망(王莽)이 천자자리를 뺏을 때 각지에서 일어난 영웅 중 촉을 근거로 한 공손술(公孫述)이 백색을 국색으로 하여 이곳을 백제성이라고 명명하여 중요시했다. 또 삼국시대 촉의 유비가 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이곳에 이르로 제갈양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복룡담(伏龍潭): 사천성 관현의 서문밖에 있는 못. 원이름은 이퇴(離堆). 촉의 전설 상 군주였던 이빙(李氷)이 치수를 하면서 만들었는데 후에 얼룡(孼龍)을 이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굉장히 깊다고 한다.

 

부강( 江): 사천성에 있는 큰 강. 가릉강 지류의 하나. 감숙성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민강과 백룡강의 중간을 동남으로 흘러 합전현에 이르러 가릉강과 합친다.뱃길이 대단히 편리하여 상류의 중패(中 ?)까지 작은 배가 통할 수 있고, 이것으로 중패에서 집산되는 약재를 반출한다. 중류에는 대화진(大和鎭)이 있다.

부주( 州): 사천성 동남부에 있는 도시. 시가는 중경의 동방, 오강(烏江)의 강구(江口)에 따라 한 면은 양자강에 임한다. 아편재배가 성하다.

 

삼협(三峽): 양자강 상류 사천성 봉절의 백제성에서 호북성의 의창(宜昌)의 남진관(南津關) 사이를 통과하는 대협곡의 총칭.구당협, 무협, 서릉협의 3협을 포함하여 귀협(歸峽), 우동협(右洞峽), 명월협(明月峽), 온탕협(溫湯峽) 등의 오백리에 달한다. 서안을 절벽을 이루고 하도(河道)는 좁고 굴곡이 심하고 물결이 급하며 경치가 좋다. 서릉협은 황묘(黃 ), 등영(燈影), 황우(黃牛), 우간마폐(牛肝馬肺), 병서보검(兵書寶劍), 철관(鐵棺)협으로 되었고 구당협은 하마(下馬), 장군(將軍), 보자탄(寶子灘), 황장배(慌張背), 흑석탄(黑石灘)으로 이루어졌으며, 무협은 구룡(九龍), 우구(牛口), 석문(石門), 청죽표(靑竹標), 설탄(洩灘; 자료집에는 예탄으로 되어있음)으로 되어 있다. 우가 무산삼협을 치수할 때 수로를 열고 있던 용 한 마리가 그만 잘못하여 협곡을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 협곡은 하등의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우는 화가 나서 절벽에서 우둔한 그를 죽여 다른 용들에게 경종을 울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무산에는 착개협(錯開峽)과 참룡대(斬龍臺)가 남아 있다고 한다. 삼협으로부터 칠백리 사이에는 양쪽 언덕으로 산이 연달았고 높은 바위가 첩첩히 쌓였는데 하늘의 해를 가리울 정도고, 내내 원숭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골짜기에 퍼진다고 한다.

 

병서보검협(兵書寶劍峽): 무산 삼협중 서릉협 가운데 하나. 수심이 깊고 물살이 유달리 빠르다. 촉의 제갈공명이 이곳에 병서와 보검을 집어넣은데서 유래되는 명칭이라 한다.

 

성도(成都): 사천성의 성도. 사천성의 서부, 성도분지의 남동부에 있으며 시기는 높이 9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촉한 유비의 황성, 제갈공명의 유허지(遺噓址; 자료집에는 휴허지) 외에 무담산, 만리교(萬里橋),

 

사마교(駟馬橋), 금관성(錦官城), 청양궁(靑羊宮) 등이 있다. 전설상의 땅이며 천지의 중심인 도광(都廣)이 성도라는 말이 있다. 면성(綿城)이라고도 하며 무후사(武候祠)가 있다.

 

수정(綏定): 사천성 동부의 도시. 달현(達縣)이라고도 한다.

 

아미산(峨嵋山): 사천성 서부에 있는 산. 암동령굴(巖洞靈窟)이 많고 불교의 대령장(大靈場)의 우심, 복호(牛心伏虎), 만년(萬年)등 저명한 사적이 있으며 명승지로 유명하다. 절강 보타산, 산서 오대산, 안휘 구화산과 함께 불교 사대명산의 하나로 손꼽힌다. 성도 남쪽 천리 지점 사천성 아미현에 있으며 높이는 3천 미터. 가을 개인 날에는 양쪽으로 마주 솟은 산이 마치 여자의 눈썹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만불정(萬佛頂), 금정(金頂), 천불정(千佛頂) 청음각(淸音閣), 홍춘평(洪椿坪), 세상지(洗象池), 구로동(九老洞), 금정사(金頂寺:永明華藏寺), 성적사(聖積寺)등이 있다.

 

염여퇴(  堆): 구당협 입구에 있는 큰 바위. 거북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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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五津): 촉지에 흐르는 양자강에는 다섯 나루터가 있는데 오진은 백화진(白華津), 만리진(萬里津), 강수진(江首津), 섭해진(涉海津),강남진(江南津)을 말한다.

 

옥루산(玉壘山): 사천성 관현에 있으며 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옥루산이 강물을 막는 바람에 사천 일대가 온통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일어나 망제(望帝)가 별령(鼈龍)을 시켜 옥루산에 통로를 뚫어 민강을 따라 흐르게 한 다음 그 물을 평원의 지류로 흘려보내 홍수를 다스렸다고 한다. 토번(吐番)과 국경을 이루고 있어 침략을 자주 당함.

 

유주( 州): 사천성 남부에 있는 도시. 파현(巴縣)이라고도 한다. 가릉강과 양자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수운의 요충지이다.

 

완화계(浣花溪): 당나라 때의 명기이며 여류시인인 설도(薛濤)가 은퇴한 곳. 성도의 서쪽에 있으며 그곳에서 많이 나는 질좋은 종이에 작은 모양의 붉은 빛깔로 부전(附箋)을 만들어 이것으로 촉나라 명사들과 시를 증답하였다고 한다. 이런 식의 전지(箋紙)가 후세에 내려오면서 설도전이라고 불리며 많이 유행하였다.

 

자공(自貢): 사천성 남부, 자류정(自流井)과 공정(貢井)을 합병한 도시. 소금을 많이 산출하여 주민의 반이 염업에 종사하여 염도라고도 한다.

 

진잔(秦棧): 진(장안 일대)에서 촉으로 가는 사이에 있는 잔도(棧道). 잔도는 절벽 사이에 나무를 걸쳐서 만든 길.

 

청계(淸溪): 아미산 동남쪽에 있는 거리 이름.

 

충주(忠州): 사천성의 동부, 양자강의 좌안에 있는 도시. 본래 한대의 임강(臨江)현이며, 당나라때 충주를 두고, 송나라에 이르러 이것을 함순부(咸淳府)로  승격시키고, 원대에는 다시 충주로 되고, 명대에도 그대로 두었다가 청조에 이르러 충주 직례주(直隷州)를 설치하여 그 밑에 풍도( 都)기타 3현을 관할하고 있다. 부근에는 치평사(治平寺), 사현당(四賢堂), 파대(巴臺), 서루(西樓), 병풍산(屛風山) 등의 명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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