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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교통

by 8866 2009. 10. 22.

조회 : 499  


신라의 교통  길과 수레를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하다

자동차생활 2002년 11월호

 

158년 신라 아달라왕은 소백산 남쪽 부근 죽령을 통과하는 길을 넓게 닦았다. 한강유역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과

 함께 소금의 운반에 이용하는 한편 중국행 뱃길과 연결하려는 의도였다. 이밖에도 왕도인 경주와 정복한 각지방 행정 중심

지를 연결하는 신라의 도로망은 정치·군사·경제·문화교류·행정의 대동맥이 되어 신라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다지는 기반이

되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중앙선이 통과하는 죽령역

                         진천 근방의 신라 때 다리 `용교` 

                          경주의 곧게 뻗은 관도들

                        신라 관도의 배수로 유적 

                         신라의 수레 벽화 

                      신라 초기의 짐수레  


 

부국의 밑바탕이 된 신라의 길

 

둘째로 오래된 길, 죽령 교통로

계립령 교통로를 낸 아달라왕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58년 소백산 남쪽(희방사) 부근의 죽령을 통과하는 길을 개통시켰다.

원래 이 죽령길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 와 살던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북을 왕래하기 위해 뚫은 오솔길이었으나 아달라

왕이 다시 넓게 닦았다는 것이다. 다른 전설에는 아달라 왕의 부하장수였던 죽죽(竹竹)이 좁고 높은 고갯길을 넓게 열었다

하여 죽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가 이 죽령길을 서둘러 뚫은 것은 한강유역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도 있었

다. 하지만 무엇보다 생활에 절대 필요한 소금을 서해로부터 얻기 위한 소금길과 한강에서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기

위한 뱃길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컸다.

서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일조시간이 길며 갯벌이 발달했기 때문에 신라가 접하고있는 동해안이나 남해안보다 소금

만들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소금 산지인 서해안의 소금은 질이 좋아 한강유역은 물론

북부 고구려와 백제의 남부지방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라는 무엇보다 죽령을 지나는 길이 필요했다. 서해의 소금을

배에 싣고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북한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내려와 충주호를 지나 단양까지 온 소금을 육로로 수입하고

교역도 활발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넓게 뚫리기 전의 죽령길은 고구려와 교역을 하기 위한 상인들의 길이었다. 서기 500년 소지왕 때부터는 고구려와 대결

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신라는 545년 무렵 죽령 교통로를 거쳐 단양(적성)으로 진출했다. 진흥왕 때인

551년에는 고구려 영토였던 강원도 지역 10개 군을 쟁취한 뒤 강원도 내륙까지 깊이 진출하여 경주∼죽령∼충주∼재천

∼원주∼춘천∼금화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개척했다. 이 길은 신라가 고구려를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으로 가기 위한 추풍령 교통로 개척

신라가 경주에서 서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압독국(지금의 경북 경산)을 정복한 시기인 파사왕

 23년(102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3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역의 교통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 죽령 쪽의 소문국(召文

國. 경북 의성), 계립령 쪽의 사벌국(경북 상주), 추풍령 쪽의 감문국(甘文國. 경북 김천)등 진한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면

서 이들 지역과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뚫었다.

서기 450년 신라의 한 장군이 추풍령의 변경을 지키던 고구려 장군을 살해한 사건 때문에 양국은 점차 적대관계로 변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13대 자비왕 때인 470년부터 경주∼영천∼대구∼선산∼상주∼추풍령∼옥천 교통로를

개척하여 곳곳에 군사적 요새를 쌓아나갔다. 추풍령 교통로는 경제적인 목적보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 이들 두

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 큰 길이었다.

신라는 추풍령 교통로를 개척한 뒤 계속 북쪽으로 이어나가 6세기 중엽인 진흥왕 때 비로소 추풍령∼보은∼진천∼이천∼

하남∼서울을 연결하는 한강 하류 교통로를 열었다. 현재 추풍령에서 서울 한강 하류까지 신라가 개척한 교통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진천과 중평 사이 길목에는 신라가 축조한 길이 28간의 석판다리인 용교가 있고, 중평 길 양쪽에는 길을

닦기 위해 삭토한 헌적이 발견되었다. 또 진천과 괴산을 잇는 길에 있는 두타산 정상에는 이 길을 지키기 위해 만든 두타

산성의 유적도 발견되었다.

추풍령 교통로는 중국을 오가는 길로서도 중요했다. 신라는 특히 중국의 선진 문물에 욕심이 커서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25대 진흥왕 때에 경주∼진천∼서해안 남양만을 잇는 교통로를 개척

하기 위해 553년부터 남양만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 백제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6세기 말에는 경주∼상주∼보은

∼청주∼진천∼직산∼남양만(담항성)의 중국행 교통로를 완전히 개척하여 서쪽 길도 확보했다.

중국사기인 <송고승전>에 보면 원효와 의상대사가 당으로 유학 가기 위해 이 길을 거쳐 남양만에 이른 뒤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 중류 교통로의 개척

 

신라가 한강 유역과 북쪽으로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한강 하류에 있던 백제의 소국 6개를 정복한 진흥왕 14년(553)이

었다. 이 무렵에 경주∼상주∼보은∼중평∼농교∼진천∼이천∼하남∼서울의 교통로가 완성되었다. 이때부터 삼국을 통일

할 때까지 신라는 임진강과 한탄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대치했다.

경주∼상주∼한강의 교통로를 개척한 신라는 계속하여 한강 북쪽 고구려와 연결하는 교통로를 뚫는 데는 그렇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고구려가 남침하기 위해 개척한 길과 신라가 고구려의 침투를 방어하기 위해 개척한 교통

로가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 모두 이 교통로를 개척할 때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길을 뚫었던 덕분이다. 임진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는 길은 서울∼한강 중류∼아차산∼의정부∼법원∼적성∼동두천 서북의 감악산∼임진강으로 이어

졌다.

감악산에 있던 칠중성은 고구려의 남침을 방어하는 데에 중요한 성일 뿐만 아니라 평양∼서울간 교통을 보호하는 역할

까지 맡았다. 이 칠중성 앞의 임진강은 강폭이 좁고 여울이 얕아 건너다니기 쉬워 신라의 대 북쪽 진출 교통로가 되었다.

고구려로서도 중요한 대남 교통로로 초기부터 이용하던 자연적 길을 조금씩 정비해서 쓰던 교통로였다. 고구려가 선덕

왕 때 2회, 무열왕 때 4회 등 여러 번 집중적으로 이 칠중성을 공격했던 기록을 보더라도,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

인지 잘 알 수 있다.

 

고구려로 가기 위한 한강 상류 교통로의 개척

 

신라는 한강 하류와 중류를 잇는 교통로를 6세기 후반까지 완성한 뒤, 완만한 계곡과 구릉지 같은 자연조건과 고구려의

교통로를 활용하여 서울∼의정부∼포천∼한탄강∼철원∼원산∼함흥 길을 개척했다. 이 길도 삼국통일 전에는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한 군사용으로, 중요 지점에 많은 성을 쌓아 보호했다. 포천의 반월산성, 성동리산성, 고모리산성(노고산),

철원의 아차산 등이 그것이다. 서울서 함흥에 가려면 이들 산성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었다. 나중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길을 동북관도로 지정하여 함흥 가는 길로 자주 이용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라가 6세기말까지 개척한 교통로는 한반도의 동북부와 중부 일대를 쟁취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왕도인 경주와 정

복한 각지방 행정 중심지를 연결하는 도로망은 정치·군사·경제·문화교류·행정의 대동맥으로 쓰여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를 굳힘으로써 신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특히 중요 교통로는 국가가 관도(官道)로 지정하고, 5세기부터 이를 이용한 우역(郵驛)제도와 관도 관리기구까지 시행하

면서 삼국통일을 위한 대비를 해나갔다.

 

신라의 우역과 관도 제도

 

우역의 설치와 운영

우역이란 임금이 상주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왕도와 지방행정 중심지 사이를 잇는 통신과 교통수단을 뜻한다. 임금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나라에 바치는 조공물 등을 도보나 가마를 이용하여 운반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우역제도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고조선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기원전 12세기인 중국 주나라 초기에 생긴 것

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중앙집권제도가 실시된 뒤 나라의 문서를 지방에 전달하고 조공을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

국도(國道)를 닦고 이 길을 오가는 관리들에게 숙박, 식사, 말, 수레, 배 등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 무렵 중국

과 인접하여 문물교역이 활발했던 고조선 말기에 이 제도가 도입되었고, 고조선이 멸망한 뒤 고구려가 이어받은 것으

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에 우역제도가 도입된 것은 소지왕 9년인 487년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에 보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중요 교통로에 역 이름 다섯 개가 나온다. 신라

의 우역제도는 소지왕 이전부터 실시했지만 소지왕 시대에 이를 더욱 확대하여 역과 관도의 정비를 담당하는 관청과

관리관인 유사(有司)까지 두었다. 신라가 우역제도를 발달시킨 목적은 관도를 통하여 군사와 통치를 하기 위한 것이었

다. 초기에는 이 길을 이용할 수 있는 신분이 따로 정해져 있었는데, 나라의 명령이나 조공을 전달하는 전담 관리, 군인,

지배층 계급들이었다.

 

신라 관도의 규모

 

관도는 신라 수도인 경주와 지방 행정지역을 연결하는 국가 관리의 교통로다. 이 길은 군사나 군수품의 이동, 국가의

우역제도 시행, 경제 교류와 교역을 위해 필요한 수레를 이용할 목적으로 나라가 정비하거나 건설한 도로다. 기록상으

로는 아달라왕 시대인 150년대에 개척된 죽령로와 계립령로를 관도의 효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역제도를 시행하고

국민들에게 수레의 이용을 권장한 소지왕 9년(487)이 본격적으로 관도를 정비하고 확장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신라 관도의 규모나 구조, 노선의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적이 충분히 발견되지 않아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경주와 대구

지역에서 발견된 소규모 도로유적을 살펴서 당시 도시 안팎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도로유적 가운데 황룡사 남쪽 외곽의 동서도로는 가장 오래된 관도다. 이 길은 상·하층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단

단히 다져서 마무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상층에서 70cm 아래에 있는 도로지반을 10cm쯤 되는 자갈과 황갈색 점토

를 혼합하여 다져 올린 위에 다시 30cm두께로 흙갈색 점토를 포설하고 상층도로 표면은 황갈색 사질토를 5cm 두께

로 덮었다. 하층도로 양쪽에는 돌을 쌓아 만든 배수구까지 있어 매우 발달된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다. 황룡사 동쪽 외곽

에 있는 동서로도 남쪽 외곽 동서로처럼 상·하층 구조에다 직경 5cm쯤 되는 자갈과 점토로 다져진 두께 5m짜리 도로다.

이 도로는 남쪽 도로보다 늦은 6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분황사 남쪽 동서로도 상·하층 구조로 축조되었다. 퇴적층 위에 10cm쯤 암갈색 점토를 깔고 그 위에 잔자갈과 갈색 점토

를 혼합하며 10cm를 덮고 다진 다음 상층 노면을 황갈색 사질토와 잔자갈이 섞인 모래로 단단히 다져 마무리했다.

대구지역에서 발굴된 도로는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관도 가운데 가장 길고 큰 도로로서, 길이 38m에 폭이 2m나 된다. 도

로 하부에는 암갈색 점토를 깔고 그 위에 깬 돌과 자갈을 깔아 표면을 단단히 다졌다. 도로 유적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닌

흔적이 두 줄로 나 있는 것을 보면 신라의 관도는 주로 수레가 오가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수레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

록 배수구까지 설치하여 단단히 쌓아 올린 것을 보면 토목기술과 포장기술이 매우 발달했던 듯싶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도로유적들은 도시 안의 도로뿐이어서 도시와 지방을 연결하는 관도도 기술적으로 잘 건설했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금 수준이 떨어질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수없이 많은 노선들을 도시 도로처럼 축조하자면 경제

적 부담이 크고 엄청난 인력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의 교통로를 수레나 군사들이 쉽게 왕래할 수 있도

록 넓히고 보수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경주에서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다리도 많이 놓았을 텐데, 이를 뒷받침하는 다리 유적은 지금까지 하나만 발견

되었다. 추풍령 교통로의 진천과 중평 사이에 놓인 28간 짜리 석판다리인 ‘용교’가 그곳이다. 기록을 보면 많은 다리가 있

었던 듯하다. <삼국유사> 흥법(興法)편 아도기라기에는 경주의 서천(西川)에 놓았다는 ‘금교’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기이(紀異)편 도화녀 비형랑기에도 경주의 서쪽 황천에 놓았다는 ‘귀교(큰다리)’ 이야기가 있어 관도에 많은 다리를 건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건설하거나 정비한 관도는 병부(兵府)가 관리했으나 눌지왕 이후에는 승부(乘府)라는 전담 부서를 두어 관도의

개보수·건설·확장공사는 물론 우역을 위한 숙식시설과 말의 대여를 맡겼고, 유사(有司)라는 최고 책임자까지 두었다.

 

수레의 보급에 앞장섰던 신라왕

유물이나 여러 기록을 보면 신라는 수레를 많이 이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레 유물은 실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여러

 고분에서 토기로 만든 수레가 발견되었다. 신라 제13대 미추왕(262∼284) 능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수레모양 토기가

있다. 이 토기는 높이가 12.5cm에 바퀴 지름이 12.3cm의 두 바퀴 수레인데,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적재함이

달려 있다. 또 경주 25호 고분에서 출토된 차형(車型) 토기는 매우 발달한 신라 중기의 수레 모양을 나타낸다. 바퀴 살이

16개인 것을 보면 신라의 귀족이나 장수들이 탔던 전차(戰車) 가운데 하나였던 듯하다.

그밖에 수레가 조각된 기와도 출토되었다. 이 기와에는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좌우에 늘어뜨린 바퀴 달린 연(輦)이 조각

되어 있다. 연은 왕이 타는 호화로운 가마로서 신라시대 왕들은 궁궐 안이나 도시 내를 행차할 때 바퀴 달린 연을 탔다.

문헌상의 기록도 많다. <삼국사기>에는 제18대 실성이사금 15년(416)에 동해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크기가 수레에

가득 찼다고 했다. 기록상으로 처음 수레를 언급한 것인데, 이때 잡은 고기를 ‘한 마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래나 큰

상어인 듯싶다. 고기가 너무 커서 사람이 손으로 운반하지 못해 수레에 싣고 간 모양이다.

신라가 백성들에게 수레 이용을 권장했던 것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명백히 나타난다. 제19대 눌지왕은 재위 22년째

인 438년에 귀족은 물론 백성들에게 국가적으로 우차법(牛車法)을 만들어 수레 이용을 가르쳤다고 했다.

제22대 지증왕은 재위 6년 무렵인 505년부터 백성들에게 수레 이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 귀족과 백성들의 수레 이용

을 규정한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기도 했다. 수레를 승용과 짐수레로 나누고 승용 수레는 왕족인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귀족까지만 탈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 또 수레의 치장이나 말의 치장도 계급에 따라 다르게 했다. 왕족

인 진골이 타는 수레는 가장 좋은 목재를 쓰고 화려한 치장을 했고, 그 밑으로 내려갈수록 간소하게 단장했다.


<자동차생활, 2002년 11월호 - 저작권자 (주)자동차생활,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신라의 수레와 해상교통 극동의 해상권을 장악하다

자동차생활 2002년 12월호

 

9세기 들어 통일신라는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정치적 혼란기를 맞았지만 해상무역은 크게 발전했다.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백성들이 자유롭게 해상으로 진출, 일본·중국을 상대로 활발하게 교역을 해나간 덕분이다. 이 시기 신라가 최대의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한 데에는 장보고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 극동해상의 교역권을 장악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신라의 짐수레

신라의 수레바퀴 토기

신라 귀족 여인의 수레

신라 왕족의 수레

장보고의 군선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탔던 신라 사신선

장보고의 해양선

수레의 모양과 가마의 용도
신라 귀족 중에는 수레를 모는 기술이 특출한 사람이 있었다. 제29대 태종 무열왕(604∼661)의 둘째 아들로서 신라의 장군이며 외교관에다 유학(儒學)의 대가였던 김인문이 활쏘기와 수레운전에 능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귀족이 수레와 짐수레를 끌고 다녔을 리 없지만 아마도 전장에서 사용하는 전차(戰車)를 잘 몰고 활쏘기에 능했던 것을 말한 듯하다.

한편 신라에서는 가마가 이용되었다. 고구려에서도 가마를 이용한 것 같으나 구체적인 사료가 없고 다만 여인들이 주로 탔으며 수레만큼 많이 이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가마를 이용했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데, 왕이나 귀족 여인들이 주로 탔다. 신라 31대 신문왕(681∼691)은 즉위 3년째 되던 683년에 일길찬(정승급) 김흠운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기 위해 가마와 비단을 가득 실은 수레를 처가에 보냈고, 결혼식 잔치용으로 15수레 분량의 쌀·술·기름·꿀·간장·된장·생선포와 135 수레 분량의 식혜, 150수레 분량의 벼 등 도합 300대의 수레로 물건을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귀족 여인들은 주로 가마를 탔음을 알 수 있고, 신문왕이 이렇게 많은 수레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에서 수레사용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특히 신라중기(600) 이후에는 육상교통과 수레, 말, 가마 등을 관장하는 승부(乘府)가 궁궐 안에 생겨 이처럼 많은 수레를 동원할 수 있었다.

신라 수레의 모양은 무덤에서 나온 수레형 토기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퀴살이 12∼16개인 두 바퀴 수레가 주종을 이루었고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을 수 있는 사각함이 두 바퀴 사이 차축 위에 설치되어 있다. 귀족용 수레는 계급에 따라 치장, 의자, 의자 깔개 등이 다르지만 모양은 2륜 수레로 통일한 듯하다. 백성들이 사용하는 화물 운반용 수레도 2륜 수레인데 승용과 화물운반용을 겸하는 간소한 수레로서 끄는 동물이 다를 뿐이다. 귀족 수레는 주로 승용이라 빠른 말 1∼2필이 끌었고, 짐수레는 힘이 센 소가 끌었다.

수레의 적재량은 얼마나 될까하는 문제는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에 보면 문무왕(661∼668) 2년 1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포위하고 있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지원하기 위해 김유신 장군이 수레 2천 대를 동원, 쌀 4천 석과 벼 2만2천 섬을 실어 경주에서 평양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한 대가 쌀 2석과 벼 11섬 등 13가마니를 운반할 수 있었으니 꽤나 큰 수레였다.

짐 운반용 수레가 큰 것이었다는 증거는 바퀴자국 유적에서도 알 수 있다. 경주 황룡사 동쪽에 있는 왕경지역의 신라시대 도로유적에서 폭이 90cm쯤 되는 수레의 두 바퀴자국이 발견되었고, 충북 보은군의 삼년산성 서문 터에서도 폭이 165cm쯤 되는 바퀴자국이 발견된 것을 보면 수레도 소형과 대형이 있었던 것 같다. 큰 수레 바퀴자국의 폭이 160cm를 넘는 것을 보면 수레의 전체 너비는 180cm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 사람이 옆으로 나란히 앉을 수 있을 만큼 커서 이런 수레는 소 또는 말 두 필이 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이렇게 귀족이나 서민 할 것 없이 두루 쓰던 수레는 모양이나 크기가 달라서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고구려처럼 상당한 대우를 받았고 국가에서 수레기술을 적극 장려해 제조기술이 매우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해상왕 장보고를 배출한 신라의 해상교통

내륙수상교통
내륙의 강을 이용한 신라의 수상교통은 삼국통일 이전 삼국시대인 4세기까지는 영토가 경상북도에 국한되었고 이 지역은 깊고 긴 강이 거의 없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제법 길고 큰 강이 있었다면 경주에서 포항의 영일만으로 연결되는 형산강뿐이었다.

형산강 역시 깊고 넓지 않아 주로 강 연안 길로 왕래했기 때문에 나룻배나 노를 저어 가는 강선(江船)교통은 그리 발달하지 못한 것 같다. 신라초기의 내륙수상교통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땟목배나 나무둥치를 파서 만든 반구조선 정도를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신라의 내륙수상교통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낙동강지역의 가야국과 한반도 중부의 한강유역으로 영토가 확장되면서부터였다. 6세기 들어 신라는 중, 남부 지역을 통일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깊은 한강, 낙동강, 섬진강 등을 수상운수에 적극 이용했다. 통일신라로 들어와서는 이러한 내륙의 강들이 수상운수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어 조공물 수송과 내륙의 농산물들을 각지로 수송하는데 최대한 이용되었다.

신라가 강을 내륙수상운수에 이용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에 들어 있다. 제14대왕 유레이사금 6년(286) 5월에 배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때는 신라초기라 형산강을 통해 조공물을 경주로 수송하기 위한 강선(江船)을 만들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제22대 지증왕 6년(505) 11월에 강에서 배를 수송용으로 적극 이용하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신라인들이 강이나 호수에서 어떤 배를 이용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유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배가 그 일부분을 짐작케 할 뿐이다. 이 배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길이 5.9m에 폭 1.5m의 소나무로 만든 반구조선으로 돛이 없는 노선이다. 아마도 안압지에서 왕의 유람선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상교통
삼국 중에서 해상교통과 무역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했던 나라가 신라였다. 삼국 중기까지는 백제가 발달했으나 신라는 6세기 들어 삼국을 통일하면서 당나라와 일본·신라를 연결하는 해상교통과 함께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한 해상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라의 해민(海民)들은 3세기경부터 한반도 남해의 낙동강 어구를 거처 흑산도로, 황해를 건너 중국(진나라시대)으로 흘러 들어가 산동반도에서 장강(양자강)어구 사이 중국해 황해 연안에 퍼져 살기 시작했는데, 6세기 초 한반도의 한강일대인 중부지역과 동부지역을 통일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던 당나라 초부터 본격화되었다.

중국으로 이주한 신라인들은 5세기말부터 산동반도의 동주에 신라관, 문등현에 신라소, 희하 하류의 초주등에 신라방 등 신라의 집단촌을 차차 늘려가면서 해상무역과 상인들의 숙박, 교통을 돕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국내의 세력을 이용해 6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의 삼한을 통일한 신라인들은 남해를 돌지 않고 서해의 직항로를 통해 중국과 무역은 물론 왕래를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중국과의 활발한 해상교류는 항해술과 선박제조기술 발달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정식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제22대 지증왕 13년(521)부터다. 이 해에 신라 조정에서는 처음으로 서해에 배를 띄워 당에 친교사신을 파견했고, 같은 해 울릉도를 병합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를 보면 신라가 해상교통에 자신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6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의 배가 늘고 백성들의 해상교통이 왕성해지자 해상 운수를 통제하기 위한 선부(船府)가 제26대 진평왕 5년(583) 1월에 설치되었다. 신라와 당나라간의 해상교통이 가장 왕성했던 때는 당나라 무덕왕 4년(621)이었다. 이때 신라와 당은 두 개의 서해항로를 이용했다. 신라서 당으로 갈 때에는 한강하구나 남양만에서 산동반도로 직항하거나 전남 영암부근에서 흑산도를 거쳐 상해 아래 항주만을 통해 갔다고 <조선통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당에서 신라나 일본으로 갈 때는 산동반도 해안을 타고 북상해 발해만을 거쳐 여순→대련→압록강 입구를 지나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남양만이나 당진부근에서 육로를 따라 신라의 경주로 들어가거나, 남양만을 지나 남하해 완도의 청해진을 거쳐 부산→경주로 들어갔고, 일본항로는 부산을 출발해 남지나해로부터 북상하는 흑조(黑潮) 해류를 타고 대마도로 향해 규슈→일본으로 이어졌다고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당나라 이전의 중국과 신라의 해상교통은 어떤 루트로 이루어졌을까. 3세기후반 초기에는 요동반도 연안 항로를 개척해 왕래했다. 산동반도 북부해안의 봉래에서 요동반도의 남단 여순을 거쳐 요동반도 동해안으로 북상, 압록강 입구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으로 오는 해로였다. 이때는 항해술과 배가 황해로 직항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주로 이 항로를 이용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가 많아 어려운 항로였고 이에 따라 중국과의 원활한 교역을 위해서도 신라는 삼국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6세기 이후 고구려가 요동반도 연안해로를 본격적으로 막아 황해를 횡단하는 직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이는 고구려의 봉쇄도 있었지만 그만큼 항해술과 배가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한반도 서해의 남양만과 중국 산동반도를 직결하는 황해 직항로를 이용해 항해 시간과 경비를 절약했다.

첫 황해 횡단항로는 4세기경 중국의 위나라가 개척해 사용했다. 원래는 육로를 통해 한반도 여러 나라들과 왕래했는데 4세기 초 요동반도를 공손씨 일파가 점령하고 세력을 키우면서 위와 한반도간의 육로를 막아 할 수 없이 황해횡단 해로를 개척한 것이었고, 삼국시대에 와서는 고구려가 해로뿐만 아니라 당나라간의 육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신라는 위나라가 개척한 황해해로를 다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일본의 유명한 승려인 엔닌(圓仁, 794∼864)이 838년부터 847까지 9년 6개월 동안 당나라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에 신라의 해상교통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겨 신라의 해상교류가 발달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의 해상교통은 대개 세 시대로 나뉜다. 신라건국부터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사신파견으로 중국과 국교를 맺고 세력을 강화하던 ‘견사 해운시대’가 처음이고, 그 다음이 5세기 초부터 통일신라시대 동안 일본·중국과 무역이 왕성했던 ‘해상교역시대’다. 그리고 마지막이 신라 말기 해상왕 장보고가 동남아해상 교역을 장악하던 시기다.

신라가 극동의 해상권을 최대로 장악한 시기는 통일신라말기였다. 통일신라 후기에 접어들면서 신라내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정치적 혼란기가 찾아왔고,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개인활동이 자유로워진 백성들이 마음대로 해상으로 진출해 대한해협과 황해·동지나해를 무대로 일본·중국과 해상무역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정치적으로 쇠퇴할 무렵이었지만 민간의 해상활동은 더욱 강해져 극동의 해상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
9세기 들어 신라가 해상교통·해상교역·항해술·조선기술에서 최대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한 데에는 해상교역의 대가였던 장보고(張保皐, ?∼846)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 근방에 해상진출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병력을 이용해 동양 삼국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면서 극동해상의 교역권을 장악했다.

장보고는 해상교역을 활발히 하는 동안 당나라와 일본의 사신·승려·유학생들의 왕래에 배를 제공하고 정부간 교류와 통신을 대신 해주는 한편 선박 건조와 수선 그리고 조선기술자들까지 도와주어 신라·당·일본으로부터 정치적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지방의 가난한 어민출신으로 소년 때부터 활과 창쓰기 등 무예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어민 출신답게 수영과 자맥질(잠수)도 잘했다고 한다. 그런 장보고에게는 소년시절부터 무예나 수영에서 뒤지지 않는 정년(鄭年)이란 죽마고우가 있었다. 철이 든 궁복(장보고의 소년 때 이름)과 정년은 가난에서 벗어나 출세하고 싶어 소년의 몸으로 당나라로 들어가 수련을 쌓은 후 청년이 되자 강서성에서 이지역을 통치하던 총독인 무녕군의 군대에 입대, 뛰어난 무예와 총명함으로 무녕군 중소장(武寧軍 中小將)의 벼슬을 받아 장군으로 출세했다.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출세했던 때 신라는 왕족간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가 혼란했던 통일신라 말기였다. 이 틈을 타서 한반도 삼면 근해에는 해적들이 자주 출몰해 해상 무역선은 물론 백성들을 괴롭히고 신라사람들을 붙들어 당나라로 끌고 가 노예로 팔아 넘기는 극심한 행패를 부렸지만 쇠퇴하는 신라정부는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이를 본 장보고는 특히 당에서 신라백성들을 노예로 매매하는데 분개해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교역을 보호하기로 결심한 후 828년 당나라 장군 자격을 포기하고 귀국해 해적 토벌 군사기지 겸 해상진출의 근거지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다. 이어 당시 신라 임금이었던 제42대 흥덕왕(826∼836)에게 해적 소탕을 위해 군사 1만을 요청했다. 당에서 장군으로 출세했고 해상활동에 두각을 나타냈던 장보고를 알고 있던 왕은 골치 아픈 해적을 소탕해준다는 그에게 쾌히 군사를 주고 청해진대사(감독관)로 임명, 해적을 소탕해 신라의 해상권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장보고가 신라·당·일본 등 삼국해안의 해적을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은 1만의 군사와 그의 뛰어난 무예도 큰 바탕이 됐지만 그를 도와 준 두 세력도 큰 도움이 됐다. 한 세력은 한반도 서남 장보고의 고향 완도일대의 해민이었고 또 하나는 중국 산동반도 장강하구, 요동반도 해안, 경항 대운하유역에 일찍부터 건너가 살던 신라인들의 집단부락 세력들이다. 이들을 규합해 황해와 서남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극동해상교통을 지켜, 중국·신라·일본의 3국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보고의 해상왕국시대가 16년이라는 짧은 세월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은 그의 정치 관여 때문이었다. 왕위를 강제로 빼앗은 민애왕은 김명을 격파하고 장보고는 그가 돕던 왕족 김우징을 839년에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신무왕은 감사하다는 표시로 감위군사라는 직위를 장보고에게 내리고 진해장군이라 불렀다. 그러나 신라조정의 신무왕 반대파 귀족과 왕족들이 장보고의 부하인 염장을 시켜 서기 846년 그를 암살하고 신무왕을 몰아냈다. 이후 문성왕이 제위 13년(851)에 청해진을 없애버려, 삼국바다의 교통·무역·군사를 장악하던 해상왕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장보고가 그의 해상활동 근거지로 삼았던 청해진을 완도에 설치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이를 증명할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2001년 4월 학계 사적발굴 조사단이 완도 갯벌에서 지름 10cm의 잡목 500여 개가 바다로 향해 33m쯤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잡목행열이 청해진의 선박 접안 시설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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