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의 전쟁과 전차
중국의 3대 대전
관도대전 조조:원소 극소:10만 ->조조 승리, 북방 승리의 기초 다짐
적벽대전 조조:주유,유비 20만(혹은 83만,100만):5만 ->손권,유비연합군 승리,삼국 정립으로 이어짐
비수대전(이건 남북조 시대이긴 하지만.)
부연:서석,사현 97만:8만 동진 승리,북방 재혼란 상태로
중국의 고대시대
상(은)나라 군대 구성
갑골문으로부터 알 수 있는 상나라 대의 군대는 큰 제후국에 군사 3000여명,중앙정부에 1만명 이상의 편재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3과 5는 당시 군사를 나누는 일반적인 수였다.또한 상왕의 군대에는 우,중,좌의 3여가있었고 여마다 1만의 군대가,여 밑에 3개의 사가 있었다. 좌마,우마,중마 각300명씩이 있었는데 이는 상나라 때는 기병이 아직 없었고 대신 전차부대가 있었는데, 각 여에 100량의 수레와, 100명의 마부가 있었다.
횡대로 편열할 때는 좌,중,우 또는 동,중,서로 나누었고, 종대일 때는 상,중,하로 나누었던 것 같다. 종대일 때의 각 행은 1000명이었다. 특수한 때는 5행 5000명을 상,중,하로 나누어 좌,우로 배열하여 대행이라고 칭했다.
상나라때의 군대편재는 십진법을 주요 단위로 삼았고, 대개 중앙전부의 여가 1만명 단위이고 제후국들은 많아야 몇십 량 정도였을 것이다. 은과 서주 초기에는 전차마다 10명의 병사가 뒤따랐으나 후대에 이르러 [한서]에 따르면 1 대의 전차에 갑병3,보병72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고대 중국의 전투조직은 처음에는 혈족으로 단위를 삼았다. 같은 혈족의 사람들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며 평상시는 함께 생산활동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공동으로 적에 대항했다.왕족, 혹둁느 다자족이란 말은 그 때 왕의 친혈연과 여러 왕자족으로 구성된 전투 단위를 가르켰다. 여는 소집단과 대적하는 1만명의 부대이며 많은 씨족들로 구성된 큰 집단으로 이들 사이에는 서로 혈연 관계가 없었다.
은 : 주의 전쟁
주의 문왕은 동서로 주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으며 덕망이 깊은 왕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동남쪽의 풍에 천도하여 동쪽으로 영역을 넓히려 했으나 그 전에 사망했다. 문왕은 살아있을때 후에 그의 아들 무왕을 크게 도울 태공망(강태공,여상,...)을 얻는다. 여상은 강족이며 주의 시조인 후직의 어머니도, 무왕의 비도 강족이다. 희족(주나라)와 강족은 서로 관계를 맺고 은나라 토벌에 강족의 힘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강족은 은의 공격을 받아 잡힌뒤 제사의 희생으로 참수되곤 했으므로 은에 대한 원한이 높았을 것이다.
그 무렵 은은 희하 유역의 인방이란 나라의 반역 토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서 군비가 증가하여 백성의 불만이 높았다.무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족과 신하들을 이끌고 은의 토벌에 나섰다. 무왕은 여러 제후들과 함께 은의 수도로 향했으며 은의 주왕도 군대를 보내어 수도근처의 목야에서 접전했다. 주의 군대는 사기가 크게 올랐으나 은나라 내부는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해 완패하게 되었다.
주와 은의 전투는 그때까지 중 가장 큰 대결전이었다.[일주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 무왕은 상(은)과 그 동맹국과의 여러 전투에서 10만 7779명을 죽이고 30만 230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 중에는 은의 동맹국 군사가 많았을 것이다. 이때는 왕과 제후의 관계는 엄격하지 않아서 제후들은 평상시는 자유로이 국가를 운영하고 필요한 경우만 왕을 돕기 위한 군대를 파견하거나 조공을 바쳤다.
당시의 군사력은 제후들의 영토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의 은 공격시 주의 군사력은 300량의 전차와 3000중무장 병사와 4만5천보병뿐이었다. 주가 자국의 군사력보다 10배나 많은 인원을 패퇴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동맹국들의 지원때문이었다. 아마 주의 군사력이 은보다 강하다고 여긴 은의 동맹국들이 은을 배반했을 것이다. 또한 춘추시대 제나라는 33000명만으로 다른 나라를 모두 제압할 수 있었다. 이로 보아 500여년 앞선 상나라 상비군은 이보다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은의)주왕은 패하자 수도의 녹대(보물을 모아둔 곳)에서 몸을 태워 자살했고 주의 무왕은 그 시체에 활을 쏘고 도끼로 목을 베어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려 왕이 됨을 선포했다.(약 bc 1050년)
춘추시대
서주 이래 중국은 주왕>제후>경대부>사>서인이라는 계층화가 있었다. 대부까지는 귀족으로 토지를 가지며 지배층에 속한다. 춘추시대엔 대부들이 제후를 대신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이 시대엔 종래의 가문을 대신하여 새로운 실력자가 생겨나고 있었다.일국 내에서도 귀족 사이에 토지나 재산을 두고 다툼이 일어나 내란으로까지 번지는 경우가 잦았다. 춘추시대 전반에 제후국들의 영지가 낙양 부근의 주왕실보다 강했던 것과 같은 양상이 각국의 내부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 중 하나는 춘추시대에는 명목적으로 주왕의 권위가 온전했고 서주 이래의 예적 질서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시대에는 또한 분열에서 통일로 향하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었다. 춘추시대 초기 170여개의 제후국은 점차 패자에게 통합되어 전국시대에는 진,초,제,연,한,위,조의 7개 대국으로 병합되었다.
춘추시대에 비로소 철기가 나와 급속히 보급되었다. 먼저 주조 철기가 나왔는데, 서아시아 최초의 철기가 단철이고 주철이 나온게 14c경임으로 미루어 보면 (즉 시기적으로 주철과 단철의 순서가 세계적 철의 역사와 반대라는) 중국의 제철 기술을 독자적인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시대에는 단철의 기술도 나타난다. 주철은 높은 온도(풀무질을 해서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를 필요로 하고 형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으나 부서지기 쉬워 무기보다 농구로 많이 쓰였고 대신 청동기가 쓰였다. (지금 남아있는 월왕 구천의 청동검이 아직도 사람을 벨 수 있다는군요)춘추전국시대 전설에서 오,월에서 명검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간장, 막야, ...모두 청동검입니다.)은대에도 청동제 무기는 많이 만들어졌었으나 단철 기술의 개발로 강인한 성질을 이용해서 검,창,방패도 모두 철로 만들게 되었다.
진, 초의 전쟁
보통 평왕이 즉위한 bc770부터 진이 3국으로 갈라진 bc453까지를 춘추시대라 한다. 진은 주의 성왕의 동생을 산서성 익성현 근처에 봉한 것이 그 시초이다. 초는 남방에 세력을 지니고 차차 북쪽의 제후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초의 북진은 제 환공, 진 문공에 의해 두 차례 저지되었으나 재차 침공을 시작해 대세는 진과 초의 대립이라는 형세로 기울어졌다.
약소국들은 진과 초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어느 한 쪽에 복종했는데,특히 교통상 요지에 위치한 정은 양국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필의 싸움
bc597 초는 정을 구원하려 한 진의 군대와 싸우게 되었는데, 이것이 필의 싸움으로 여기서 진은 대패하여 초 장왕의 위세가 올라갔다. 이후 장왕은 제와 연합하고 정,진(이 나라는 陳으로 강대국 진晋이 아닙니다), 노,송 등 중원의 제후국들도 모두 초를 따르기 시작했다.
세력이 약화된 진은 노,위의 구원에 응하여 제를 제하 중류 근처에서 대패시켜 다시 북방에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진 초의 압박을 받는 소국들의 평화에 대한 요구가 강해져 bc579에 송의 대부 화원의 설득으로 진,초가 부전 조약을 맺었다.
bc576 초가 정,위를 쳐서 다시 조약이 깨지고 진 초사이에 언릉 근처에서 대회전이벌어졌다. 여기서 진은 대승했고 초 공왕은 부상했다. 이뒤에도 싸움이 반족되어 재차 각국에서 화평 요구가 일어나 송의 재상 향술이 개인적 친분 관계를 이용해 bc546에 제후국들이 화평을 약속하고 진, 초는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했다. 이때문에 소국들은 조공을 바치는 종속적인 입장을 인정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지만 이후 십여년간 화평이 유지되었다.
오,월의 전쟁
중원에선 진,초가 서로 싸우는 가운데 bc6 중반 강남 지방에 오와 월의 두 세력이나타났다. 오는 주 문왕의 백부,태백과 그 동생 중옹이 왕위를 막내에게 양도하고 남방에서 세운 나라라고 한다. (전설속의 일이며 실제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
19대 수몽때 오는 강성해져 진과 연합해 초를 위협하게 되었다.오왕 합려는 초의 방명객 오원(오자서)와 병법가 손자를 등용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강성해졌다. bc506에 초에 쳐들어가 초의 수도 영까지 점령했으나 원정을 틈탄 남쪽의 월의 공격을 받아 급히 귀국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오자서는 초를 점령하자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살해한 초 평왕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에 채찍질해 원한을 풀었다 한다.
bc496 월에서 오를 침공했던 왕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즉위했다. 오왕 합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옛 원한을 갚으려 월에 쳐들어갔다. 구천은 준리에서 맞아 싸웠고, 결사대(죄수부대를 적 앞으로 보내 자결하게 하고 여기에 적군이 관심을 쏟고 있는 새에 습격하여 승리)를 이용하여 승리했다. 패배한 오왕 합려는 부상으로 곧 사망했으며 유언으로 아들 부차에게 원수를 갚아줄 것을 당부했다. (여기에서 원한을 잊지않기 위해 땔나무 위에서 잤다는 '와신'상담이란 말 ) 부차는 초로부터의 망명 귀족 백비를 재상을 삼아 군대를 훈련시켰고 bc494년 월군을 공격하여 수도를 향했다. 구천은 5000의 군사와 농성했으나 포위당해 끝에는 항복했다. 오자서는 그를 죽일 것을 진언했지만 구천에게 뇌물을 받은 백비의 권고로 부차도 구전을 용서했다.
월에게 항복을 받아낸 부차는 점차 교만해져 월에서 미인계로 보낸 미인 서시에게 빠지고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이후 bc488에 노를 쳐 속국으로 삼고 bc484에는 노와함께 제를 쳐서 예릉에서 승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진과의 충돌로 bc482에 황지에서 진 정공과 싸워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군대가 나라를 비운 사이 또 월군의 침략으로 오의 태자 우가 살해되고 말았다. 월왕 구천은 범려와 종을 기용해 국력을 기르고 설욕의 기회를 기다렸던것이다.(부차밑에서 노예 생활할 때부터 복수를 다짐하며 쓸개를 수시로 씹었다는 데서 역시 와신상담의 '상담' 실제로 그랬는지는 역시 알 수 없다는군요)부차는 이 습격을 당한 후 겨우 수도를 회복하지만 매년 계속 월의 공격을 받아 국력이 크게 꺾이고 말았다.더구나 부차는 3년에 걸친 포위전 끝에 bc473에 자결을 강요당해(이 때는이미 손자는 오를 떠났고 윌의 침공 전에 오자서는 월의 술책으로 교만해진 부차에게 자결을 강요당해 죽은 뒤였습니다) 죽고 오는 완전히 멸망당했다. 구천은 이후 제후들에게 패왕이라 불렸으나 구천의 사후에는 월의 힘도 약해졌다.
전국시대
구분
춘추시대 이후 bc221의 진시황의 중국통일까지 261년간을 가리킨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그 시작은 주 경왕이 죽은 bc475 부터라고 한다. 12제후,7강국이 진에 의해 통일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아시다시피 이 시대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주 천자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춘추시대에도 초 장왕이 그런 징후를 보인 일이 있기는 합니다)
무기,군대
춘추시대의 군대는 봉건적 사병의 성격이었으며 국군이라 불릴 것은 아니었다. 주의 군대는 귀족이 전차를 타고 전투의 주체가 되어 징집된 보병이 뒤를 따르는 것이었으나 전국시대에는 보병이 주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귀족전문 전사 대신 징집된 상비군이 주력이 되고 장군이 이를 통솔했다.
춘추시대까지의 무기는 주로 청동제였으나 전국시대부터는 구리보다 다량으로 생산되는 철을 써서 철제무기의 보급이 이루어졌다. 주로 긴자루를 가진 창(모,극)과 종래의 완력을 쓰는 활을 개량한 노를 쓰게 되었다. 노는 사정거리와 강도가 월등하여노 부대가 각국에 편성되었다.
수공업 기술의 진보로 공성장비인 운제(구름 사다리)같은 것도 개발되었다. 무기의 진보로 춘추시대 중기 전까지만 해도 한 전쟁에 전차700(1전차:30 보병일 때), 2~3만군사 정도가 고작이었다. 전국시대에는 많은 경우 4000전차, 즉 30만~100만군사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북방 흉노의 기병을 본따 중국도 기병을 쓰기 시작했다.이들은 아직 수도 많지 않았고 기습이나 선봉에 쓰이는 등 주력은 아니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소수의 군대로 하루,이틀 정도로 결판은 냈으나 전국시대에는 역시 기술의 진보로 야전,공성전을 수행했으며 규모도 켜졌으며 공성전의 경우 1~2년의 장기전도 잦았다.
합종책,연횡책
강성해진 서방의 진(秦)에 나머지 6국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합종) 것과 진과 결합하는(연횡)등의 의견이 나왔다. 소진은 6국 연합의 합종책을 주장했고 장의는 이들을 진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연횡책을 주장했다.
전술
외교정책의 격화와 군사기술 발전으로 전술도 변화했다. 은주시대부터 도시는 성벽에 싸여 있었는데, 이들은 흙으로 된 토루였다.(그래도 칼륨 성분으로 쉽게 녹아내리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전국시대에는 점차 공성전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성무기,방어무기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국경선에도 성벽이 만들어졌다.
제의 전쟁
진의 압박으로 서쪽 대신 동쪽으로 세력 확장 방향을 옮긴 위는 bc343에 조의 공격을 받은 위(衛)를 윈조하기 위해 조의 근거 한단을 포위했으나 이듬해 조의 원군으로 온 제의 군사 손빈에게 계릉에서 패했다. 이듬해 위는 한을 공격했지만 이때도 원군인 제의 손빈 군대에게 마릉에서 패배했다. (이 자는 병법가 손자(손무)의 손자입니다. 손빈병법을 남겼는데 그것이 허구일 것이라고 여겨지다가 최근에 실제로 발굴되어 사실임이 밝혀졌죠. 빈은 일종의 별명으로 동문인 방연의 시기로 그에게 첩자로 몰려 슬개골을 제거당하는 형벌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었습니다. 이후 제에 중용되어 제가 구원 요청을 받자 동맹국으로 가는 대신 공격측인 위의 수도를 공격해 위군이 물러나게 했습니다. 이 때 위의 총사령관이 방연이었는데, 제나라 군사를 추격하는 그를 방심하게 하기 위해 손빈은 후퇴하면서 군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점점 솥의 흔적을 줄여서 계속 탈영병이 나오는 것처럼 속였습니다. 마침내 마릉에 이르러서 방연은 손빈의 복병에 걸려서 죽고 맙니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병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
이후 위와 제는 공동으로 패자를 칭하게 되었고, 위왕, 선왕의 재위기간에는 제가 가장 융성할 수 있었다. 제는 연을 공격하여 한때 하북 거의 모두를 차지하는 듯 보였으나나 선왕의 사후에는 점차 그 세력이 쇠락하기 시작했다.
연의 전쟁(장군 악의)
연은 계성 (북경시 근처)에 군거한 제후국으로 하북을 거점으로 주로 북방으로 전진했다. 제는 연의 침략을 받자 bc284년 제후국들에 원조를 요청하여 장군 악의가 5 국의 연합군이 총지휘를 맡았다. 연합군은 제의 수도 임치까지 점령하고 제는 겨우 몇 성만을 유지하는 상황이 몇 년간 이어졌다. 제에서 그 동안 소왕이 죽고 혜왕이 즉위했는데,그는 악의를 의심하여 본국으로소환시켰다. 이로 인해 연합군이 해산되고 제는 예전의 영역을 수복했다. 이 두 나라는 경제적으로 같은 권역에 들어 있어서 상대방의 지역을 점령 지배할 수 있었다.
진, 전한 시대
연 외에도 조나라도 중원진출을 꾀했다. 하지만 주변국들의제압에 성과가 없었다. 조의 무령왕은 북방민족의 기마전술을 도입해 기동력이 뛰어난 군대를 갖추고 서북으로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세력확대는 북방을 향한 것으로, 중원에 영향력이 큰 나라는 서쪽의 진나라였다.
진은 상앙의 개혁으로 부국강병에 성공했다. 진은 다른 6국보다 군사력만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강력했다. bc246진시황이 즉위하여 한,조,위,초,연,제를 차례로 멸망시켜 bc 221에 통일을 완수했다.
시황제는 제후에게 군비를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전국에 황제가 임명한 군수나 현령을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 통일과정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로 민정에 익숙하지 못해 강압적인 통치를 추진하여 진에 대한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시황제는 무기를 몰수하여 녹여 거대한 인상과 악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마음대로 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면서 저항이나 반란을 방지하려 하였다.
원래 진에서는 병농일치제를 택하고 상업을 억제하고 있었으나 통일 이후에도 고시는 규모를 줄이고 상인들을 개척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초,한의 싸움(항우,유방)
진의 통일 이후 그 압제에 맞서 최초로 봉기한 것이 진승과 오광의 난이다. bc209년 900명 노역부들을 이끌고 낫이나 가래로 무기를 삼아 일어났으나 나중에는 수레600량, 기병 1천,보병 수만의 대부대가 되었다. 진승은 스스로 장초국의 왕이 되어 참여를 호소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승은 곡물이 저장된 형양을 포위하는 동시에 수도 함양에 진격했다. 이에 정부는 장군 장함을 보내막게 했다. 장함은 죄수들에게 사면을 약속하고 반군과 싸우게 하니 원래 농민 출신인 진승군은 대패했다. 게다가 내분이 일어나 오광이 살해당하고 진승도 부하들의 독립으로 원조를 받지 못하고 패주하다 살해되었다. 이후로도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랐으며 조정에서도 환관 조고가 승상 이사를 무고하여 죽게 하고 2세황세 호해에게 자결을 강요하였다. 조고는 결국 3대 황제 영에게 죽었으나 각지에서 정부군이 패하고 있는 진은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진승의 봉기에 호응하여 일어난 세력 중 항우와 유방이 있었다. 항우는 초나라 장수 항연의 일족으로 명문 출신이며 숙부 항연과 함꼐 회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지략가 범증을 만나 군사로 삼고 그의 진언을 따라 초나라 왕손을 찾아내 왕으로 세웠다. 각지의 반란군은 항우의 군사적 재능을 알고 항우의 휘하에 들어왔고 정부군 장군인 명장 장함과 왕리도 그에게 귀순했다.
유방은 패의 농민 출신으로 유협 생활을 하다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관리 소하,조참과 백정 번쾌를 중심으로 3000여 세력으로 거병했다. 이후 세력을 늘리면서 항우와 연합했다.
원래 먼저 수도 함양에 입성하는 자가 관중 지방의 왕이 되기로 했었는데, 유방이 항우가 조의 반란군의 원조를 위해 떠난 사이 먼저 함양을 함락시켰다. 진의 황제 영이 항복하여 bc207에 진은 멸망했다. 유방은 진의 가혹한 통치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3개의 법만을 정하겠노라고 약속하여 민심을 얻었다.
1개월 후에 도착한 항우는 함곡관을 무력으로 돌파하고 세력이 우세한 그는 약속과는 달리 유방을 한중의 왕으로 봉해 서촉지역으로 쫓아내고 항장 장함 등에게 관중지역의 왕으로 봉해 감시하게 했다. 항우는 19왕국을 만들과 초 희왕에게 의제라는 존호를 헌상하며 자신은 스스로 서초국의 왕이 되어 패왕이라 칭했다.
이렇게 진 멸망 후의 수습이 끝난 후 유방은 관중을 단념한 듯이 보이게 했으나 bc296년 8월에 관중으로 기습해 장악했다. 유방은 삼장의 법 등으로 관중의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고 있었으며 항우가 희왕을 살해한 것을 알려 대의명분도 얻고자 했다. 이후 항우와 유방간의 전쟁이 수년간 계속되었다.
대개는 세력이 더 크고 뛰어난 전술을 발휘하는 항우가 이겼으나 그는 점차 인심을 잃은 반면 유방은 넓은 도량으로 장수들을 받아들여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점차 항우의 장수들은 유방에게 귀순했고 한의 군사 한신의 계략으로 모사 범증도 항우를 떠나 이내 세상을 떠났다. 드디어 bc202에 한신의 계략으로 (십면매복의 계, 사면초가) 해하에서 포위당해 크게 패했다. 항우는 강동 출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후퇴하다 자결하였다.
유방은 여러 장수를 제압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한을 건국했다.
후한,삼국시대
전란의 시대를 겪으면서 당시 중국에는 유랑민이 많이 생겼는데, 이들의 구성 단위가 촌,오이다. 오는 후한정부가 강족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적인 목적으로 오후를 설치한 데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전한시대의 기록에도 외적방어에 이용되었다고 나와 있다.
오는 또한 일반민이 내란에 대처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하기도 했다. 왕망시대에 관중일대가 기아상태가 되어 혼란에 빠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영보(오와 같은 것)을 조직하여 자위태세를 갖춰 반란군도 이에 관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광무제는 내란 평정후 이들 조직을 파괴하고 귀농시키는 정책을 택했으나 후한 말에서부터 다시 사람들은 오를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했다. 난을 피하는 유랑민들은 행을 조직해 이동하다가 일정한 지점에 도착하면 오를 만들었다. 그 규모는 일정치 않았으며 대개 천연의 장벽을 이용했다.
곤양대전 왕읍:유수(광무제) 42만(혹은 100만):8천
중국 역사상 가장 적은 병력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격퇴한 전투
전한 말기 왕망은 신 왕조를 창립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많은 개혁을 실시했으나 오히려 사회 불안을 일으켰고 한해와 기근이 일어나자 민중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
다.
북방의 반군은 적미군이고, 남방의 반군은 한 한실의 후예인 유수와 그 형 유연이 일으킨 무리이다. 유수는 경제의 후예로 사람들의 추대로 무리를 이끌고 반왕망 운동에 나섰다. 무리 중 역시 한실의 후예인 유현(경시제)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것은 호족들이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황제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적미군은 10만으로 불어나 계속해서 왕망이 보낸 정부군을 격퇴하고 있었고, 경시제군은 남양에서 북상하고 있었다. 왕망의 동생 왕읍이 총사령관이 되어 대군을 맏기고 63가의 병법가들과 맹수를 부리는 거인 대장도 동행시켰다.
왕망군은 행군하면서 엄청난 모굽 물자와 특수한 기구 등을 내보이며 상대에게 공포를 심었다. 경시제군은 이에 놀라 곤양성 안으로 숨었다. bc23년 왕읍의 대군은 곤양성을 포위하고 맹공격을 퍼부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고 전차의 충돌로 성벽지하도가 패였다. 곤양성을 지키고 있던 유수는 13기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어 원군을 데리러 갔다.
왕읍의 군사들은 대군이나 군량 보급도 엉망이고 명령 계통도 서지 않았다. 63가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전부를 동원하였으니 서로 자기의 작전을 관철시키기 의해 싸울수 밖에 없었
다.
유수가 3000기를 데려와 기습을 가하자 성내에서도 호응했다.왕읍의 40만 정부군은 명령계통과 질서가 엉망이 되어 1만여의 경시제군에게 유린당했다. 때마침 폭풍우로 범람한 하천에 익사한 군사도 1만이 넘었다.
이후 관망하던 사람들까지 반왕망파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후한 말기,삼국시대
삼국분립
황하유역의 조조를 계승한 조비, 양자강 상류의 유비, 양자강 중,하류의 손권은 각각 독립하여 삼국정립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근거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며 서로 항쟁했다.조위는 둔전제,수리사업 등을 행해 화북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고 대대로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병호제를 시행했다. 또한 관리선발제인 구품관인법을 만들어 문벌귀족 성립의 시작이 되었다.
촉은 북쪽으로부터의 명문가와 토작호족의 연합정권이었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운남과 귀주의 이민족을 평정해 인도네시아반도 등아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해 군수 보급에 대비했다. 227년 그는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치고 북벌에 나섰으나 보급 문제 등으로 실패하고 위의 사령관 사마의와 대치하다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263년 위의 권력을 장악한 사마소의 대군에 유선이 항복하여 촉은 멸망했다.
오는 강동 토착호족과 협력하며 양자강 중,하류와 베트남 지역까지 미쳤다. 근거는 건강(남경 지역)이며 군사상 요지에서 점차 정치도시, 경제중심지로 발젼했다. 오는 강남지역 개발에 힘썼으나 태자가 요절한 후 손권의 후계를 둘러싼 싸움으로 280년 진(사마의의 손자가 이 때는 이미 위를 찬탈을 했습니다.그래도 사마의는 태조로 추존되었으니..)
삼국의 국력은 주수(형주,익주,서주 등등.. 대체로 땅 비교 라고 보는것이 좋겠군요)가 위:오:촉이 9:3:1, 호수는 7:5:3, 구수(인구)는 4:2:1로 오,촉은 지역에 비해 호구 파악이 위보다 뒤졌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실력은 6:2:1정도라고 여겨지며 위가 가장 강성했다.(사실은 이게 더 뒤로 가야 하겠지만 대략적인 시대 설명이기에 앞데 놓았습니다.)
군웅 출현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것은 정부군 이외에 호족들이 조직한 군사집단의 힘도 켰다. 이후 산동의 조조, 하북의 원소, 감숙의 동탁 등이 후한의 제위를 두고 패권을 다툰 군웅들이다.
AD189 영제가 세상을 떠나고 하태후가 섭정이 되어 실건이 그의 오빠 하진에게 넘어갔다. 하진은 환관들을 죽이려고 동탁을 불러들였지만 그 전에 환관들에게 발각되어 오히려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진의 부하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환관을 주살하고 동탁은 혼란을 이용해서 새 황제를 세우고 도성에 들어왔다.
동탁의 횡포가 심해지자 원소를 맹주로 한 군벌의 연합이 낙양까지 쳐들어왔다. 동탁은 낙양을 초토화시키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잿더미가 된 도성에 다다른 제후들은곧 해산했다. 조조는 황건의 난 때의 중앙 8교위 중 한명이었다. 그는 난세의 큁웅이라 불렸으며 무장으로 도 유능했으며 유민을 정착시키거나 항복한 적병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웠고 또한 다른 군웅과 동맹을 맺었다
관도대전
연주를 근거로 실력을 키우던 조조는 역시 8교위 중 하나였으나 하북에서 큰 세력을 가진 원소와 대립하게 되었다. 허도에서는 조조암살음모가 실패해 유비가 도주하여 원소와 동맹을 맺었다. 원소는 북방을 위협하던 군웅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나서 세력을 확장하는 조조와 자웅을 겨루려고 하였다. 200년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했다. 원소는 총 10만이고 조조는 2만여 병사를 가졌다. 군사력으로 원소는 조조보다 강했으나 원소 자신이 교만하고 군 내분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원소군은 1,2차 전투에서 각각 두명의 상장 안량과 문추를 관운장에게 잃고 사기가 떨어져 갔다. 조조는 원소군이 군량을 모두 잃고 동요하는 사이 총공격을 가해 원소군의 예봉을 꺽고 주장 장합이 조조에게 투항하고 10만의 군사 중 7만 이상이 전사하는 대패를 겪었다. 204년 원소가 병사하고 아들들이 저항했으나 내분으로 모두 패배해 원가의 세력은 완전히 멸망했다.
고대 중국의 전차
아마도 인간이 고대에 최초로 사용한 대형 육상기동전투장비는 전차일 것입니다.
모든 문명권과 기록을 통틀어 최초의 대형전투장비는 이 전차이며,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고대 이집트, 중국, 인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다른 문명권에 이르기까지 이 전차는 보편적으로 사용된 장비입니다.
전차의 등장 이유는 고대의 말이 지금에 비해 매우 덩치가 작았던 것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큰 준마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유전자 변이와 의도적인 교배를 통해 생산되었다고 하며 원래는 힘이 없고 덩치가 작아 사람이 타도 현재 타는 허리 부분이 아니라 엉덩이 쪽으로 타야 했다고 할 정도이며, 기동력과 체력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병이라는 병과가 전쟁터에서 가치를 지닐 수가 없었고, 쓸만한 기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말 여러마리를 함께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탄생된 것이 전차입니다. 최초의 전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주변 문명에서 등장했다고 하며 처음에는 말 두마리나 세마리에 마부 한사람, 전사 한사람이 탑승하는 형태로 먼 거리에서는 활을, 가까운 거리에서는 창과 도끼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검은 제조기술 문제로 장검을 만들 수가 없어 단검이 전부였습니다.
이후 필요에 따라 말 네마리에 마부 한사람, 전사 두사람을 태우는 형태로 발전하며 전차와 말을 장갑화시키기도 하고 경전차를 연락 및 보조용도로도 사용하며 보급용 전차, 말 십수마리가 끌고 대형의 누대를 장치한 지휘용 전차까지 각 문명권에서 다양하게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시대부터 전차를 사용하였습니다. 고대의 전쟁터에서는 자유민만이 전쟁에 참여할수 있었고 노예는 참여가 불가능했는데 전쟁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자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며 대다수의 군인은 곧 귀족이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영지나 도시를 기반으로 그 생산력을 통해 전차와 그것에 배속되는 보병 및 보급부대를 자체적으로 준비했고 전차는 곧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지금의 기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전차는 고대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는데 4마리의 말과 거대한 전투용 수레, 철저하고 명확하게 훈련된 전사로 구성된 이 장비는 방패와 창을 든 고대의 전열을 단숨에 흩어 버릴 만큼 강력했으며 전차를 상대할수 있는 것은 전차뿐이라고 생각되었고 전차의 시대가 끝나가던 중국 진나라의 전국 통일 시절에도 역시 전차병을 제일로 쳐서 최고의 갑옷과 최상의 장비를 지급했습니다.
전차의 멸망은 말이 품종개량되어 기병이 양성되기 시작하면서 시작됩니다. 전차의 출현 이유가 나약한 말의 효과적인 사용임을 생각해 보면 이미 말이 강력해진 상황에서 그 존재 이유는 30%이상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전차는 한번 돌격하면 방향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고 너무 거대하여 밀집대형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또 말처럼 운동성이 민첩하지도 않았으며 다양한 지형에 적응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 기병을 양성하는데 비해 전투손실이 크고 가격이 너무 비쌌습니다. 더이상 기병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는 면이 별로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군사문화는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서 전차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여러번 이루어집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경우 전차를 대형화하고 바퀴와 축에 칼날을 달아 파괴력을 강화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밀집 보병을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중국의 경우에는 흉노를 비롯한 기마 민족의 침공으로 기마병을 대량 양성하며 전차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전차는 지휘용, 보급용 이외에는 의장용 뿐으로 계속해서 실전에서 물러나 후한대에는 전투용 전차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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