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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고려의 교통

by 8866 2009. 7. 28.

 

                고려의 교통

 

 

                   고려 조운과 역로

 

  고려 조운로

 

고려의 교통

 

도로로 이어진 고려의 행정구역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기 위해 군사용 도로를 많이 개척했다. 물론 앞선 고구려나 백제, 신라가 이미 만든 길도 이용하면서 고려의 목적에 맞는 군사용·경제 유통용 도로로 다시 다듬고 뚫었다. 이 길을 거쳐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 노획물이나 지방의 생산품을 개경으로 빠르게 운반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해 국토가 한반도 전역으로 넓어지자 가장 먼저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전국을 양광도·경상도·전라도·서해도·교주도 등 5도(道)로 나누고, 개경(개성)·서경(평양)·동경(경주) 등 거대 도시는 3경으로 편성했다. 그런 다음, 5도의 각 지방행정 중심지를 연결하는 국도(國道)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서기 980년 경종 대에는 전국을 더욱 일사불란하게 통치하고 중앙정부의 왕명과 물자와 사람의 소통을 쉽고 빠르게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에 12목(牧. 광주·양주·충주·청주·나주·승주·상주·진주·황주·해주·전주)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는 마을의 크기기에 따라 주(州)·군(郡)·현(縣)을 각각 두었다. 그밖에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군사적 요충지인 안북(안주)·안변(영흥)·안동(김해)·안남(영암) 등 네 곳에 도호부도 만들었다. 이어 서기 995년 성종 14년에는 전국을 10개 도(방도·관내도·중원도·하남도·영남도·강남도·산남도·해양도)로 나눴다.
고려의 행정조직인 3경 10도 12목 4도호부는 지금의 국도에 해당하는 22개의 역로(驛路)로 긴밀하게 이어졌다.

 

고려시대 완성한 22개 역로망

 

성종 때에 역로라는 이름을 얻은 22개 국도는 국가의 기간 정보망으로 가치가 있었고, 이와 함께 민간경제유통을 위한 주요 교역로 역할도 했다.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에는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다.
고려의 역로는 지형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라안의 전 역로가 하나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 까닭은 강과 높은 산들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강에 다리를 놓거나 높은 산에 굴을 뚫을 수 있는 기술도 없었을 뿐더러, 그 비용을 충당할 재정도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22개 역로는 수도인 개성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뻗어 나갔다.

금교도(金郊道): 개성에서 황해도 중부를 관통해 곡산까지 연결하는 도로인데 이 사이에는 정류장 격인 16개의 역참(驛站)이 있었다.
산예도( 猊道): 개성에서 황해도 서남해안을 따라 해주를 거처 옹진을 연결하는 도로인데 10개의 역참을 두었다.
도원도(挑源道): 개성을 출발해 장단∼철원∼평강을 거쳐 회양까지 연결하는 도로인데 21개의 역참을 두었다. 청교도(靑郊道): 개성으로부터 장단∼파주∼고양∼양주를 거처 서울을 지나 인천까지 가는 도로인데, 이 사이에는 15개의 역참을 두었다.
파령도(巴領道): 황해도 황주군의 자비산 고개에서 황주, 중화를 지나 평양에 이르는 길로서 11개의 역참이 있었다.
흥교도(興郊道): 평남의 영변에서 박천∼순안∼평양을 지나 용강까지 가는 길로서 12개의 역참을 두었다.

흥화도(興化道): 평북 서해안 박천에서 선천∼의주를 거쳐 삭주까지의 길로서 29개의 역참을 두었다.
운중도(雲中道): 평양에서 동북부의 순천, 개천, 운산을 지나 창성에 이르는 길과, 회천에서 맹산을 거쳐 원산까지의 길로서 이 두 역로에는 43개의 역참을 두었다.
삭방도(朔方道): 함남의 영흥에서 원산∼안변을 지나 강원도의 고성에 이르는 길로서 42개의 역참이 있었다.
평구도(平丘道): 서울에서 경기도 여주∼원주∼충북∼충주∼제천∼영월까지의 길과, 제천 에서 단양∼영주∼봉화까지의 길로서 이 두 길에는 30개의 역참을 두었 다.
춘주도(春州道): 서울에서 양주∼포천∼가평을 거쳐 춘천까지의 길과, 춘천에서 홍천을 지나 횡성에 이르는 길로서 24개의 역참을 두었다.
명주도(冥州道): 강원도 양양에서 강능을 지나 삼척, 울진까지의 길로서 28개의 역참을 두었다.
광주도(廣州道): 서울에서 과천∼이천∼장호원∼충주를 지나 연풍에 이르는 길로서 15개의 역참을 두었다.
충청주도(忠淸州道): 수원에서 전의∼공주∼부여에 이르는 길과, 수원에서 죽산∼진천∼청주를 지나 문의까지의 길, 그리고 수원에서 아산∼예산∼홍천을 거쳐 해미까지의 길로서 34개의 역참이 있었다.
전공주도(全公州道): 전주에서 공주까지의 길로 21개의 역참이 있었다.
승라주도(昇羅州道): 전남 나주를 중심으로 전남지방에 분포된 역로인데 30개의 역참을 두었다.
산남도(山南道):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협천∼진주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을 두었다.
남원도(南原道): 전북의 임실에서 남원과 전남의 구례, 곡성을 지나 순천까지의 길로 12개의 역참을 두었다.
경주도(慶州道): 경북 경주에서 영천을 거쳐 대구까지의 길과, 경주에서 영덕 평해까지 연결되는 길로 23개의 역참이 있었다.
금주도(金州道): 경북 청도에서 경남의 밀양∼김해∼언양을 지나 울산까지의 길로서 31개 의 역참을 두었다.
상주도(尙州道): 경북 문경서 예천, 상주를 지나 선산까지의 길인데 25개의 역참이 있었다.
경산부도(京山府道): 경북 김천을 중심으로 북의 영동, 옥천과 남의 성주 그리고 상주를 지나 보은까지 연결하는 길로서 25개의 역참을 두었다.

 

역로의 관리제도와 역의 임무

 

고려의 역로에 관한 모든 의무를 시행하고 관리하는 최고부서는 지금의 행정자치부와 비슷한 상서성(尙書省) 아래의 병부(兵部)에 속한 공역서(供驛署)였다. 공역서는 전국 22역로와 여기에 설치된 525역을 비롯해 각 역에 종사하는 역원들을 관리했다. 이런 모든 업무는 지금의 감사격인 역승(驛丞)이 총괄했는데, 모든 역원들에게 암행어사 같은 무서운 존재였다.
각 역에는 역의 우두머리인 역장이 있었고, 그 밑으로 문서정리와 인원·말의 보충을 담당하는 역리(驛吏), 그리고 말이나 발로 뛰어 다음 역으로 관청의 문서를 전달하는 역정(驛丁)이 있었다.

가장 힘든 일을 많이 하는 역정은 ‘육과채계’라는 제도에 따라 국토방위와 행정상 중요한 지역을 연결하는 역로에 더욱 많이 배치되었다. 왕도인 개경과 서경(평양)을 연결하는 역로에 설치된 1과 역들에는 역마다 역정을 75명 배치했고, 북쪽 국경지역 역로의 역들은 2과 역으로 취급해 역정을 60명씩 두었다.
3과역인 동해안쪽 역들은 45명, 개경∼철원∼통천을 잇는 4과 역들은 35명, 철원∼횡성 사이 5과 역에는 역정이 12명이었고, 횡성∼강릉을 잇는 6과 역에는 역정을 7명씩 배치했다. 각 역에서는 역로를 오가는 조정의 출장을 관리하고 외국 사신들을 위한 말을 빌려주거나 숙식을 맡았다. 또한 자기 역에 도착한 왕명이나 공문서를 다음 역으로 재빨리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역에서 여행자에게 말을 빌려주는 데에는 처음에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원종 15년(1274)에 규정한 기준을 보면 2품 이상의 관리는 여행기간 동안 말을 10마리까지 빌려서 바꾸어 탈 수 있었다. 3품 벼슬아치는 7마리, 하급 관리는 한 마리를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역마제도가 문란해져 허가 없이 관리의 식구들이나 역원들이 역마를 마음대로 타고 돌아다녔다. 이를 막기 위해 충렬왕 2년(서기 1276년)에는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허가증인 포마차자(鋪馬箚子)를 발행하는 차자색(箚子色)이라는 관청을 두어 엄격히 관리했다. 그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충렬왕 4년(1278)에는 국왕이 직접 차자를 내려주기도 했다.
역을 통해 중앙정부와 지방행정기관 사이에 왕의 명령이나 지방수령들의 보고서들을 전달하는 데에도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왕의 명령서나 중앙관청의 공문서는 가죽 주머니에 넣어 역정이 릴레이식으로 다음 역으로 말을 타고 신속히 전달했다. 공문서 전달을 하지 않거나 게을리 하는 역정은 감독인 역승이나 그 역의 우두머리인 역장이 그 이유를 밝힌 다음 엄한 벌을 주었다.
공문서는 중요성과 시급함에 따라 전달하는 방법이 달랐다. <고려사>에는 현령전송(懸鈴傳送)과 피대전송(皮袋傳送) 두 가지 방법이 나온다. 피대전송은 보통 공문서를 가죽 주머니에 넣어 보통 속도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령전송은 특급 공문서를 가장 빠른 속도로 전달하는 방법이다.
현령전송도 세 가지로 나뉘었다. 가장 급한 3급은 가죽주머니에 방울 3개를, 다음으로 급한 2급과 상대적으로 덜 급한 1급은 각각 방울 2개, 1개를 달았다. 그런 다음 말에다가 현령이라 쓴 깃발을 달고 역에서 역으로 번개같이 전달했다.
그런가 하면 오가는 역로의 거리도 등급에 따라 달랐는데, 현령전송을 예로 들어보면 낮 시간이 긴 2월부터 7월까지는, 3급은 6개 역, 2급과 1급은 각각 5개 역과 4개 역을 하루 동안 달리도록 했다. 역간의 평균 거리가 30리였기 때문에 가장 급한 3급 공문서는 하루에 180리를 이동한 셈이다. 또한 낮 시간이 짧은 8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는 3급은 5개 역, 2급과 1급은 각각 4개 역과 3개역을 하루에 달려 전달토록 했다.

 

역의 운영 방법

 

역을 운영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역의 인원과 운영 규모에 맞는 ‘공해전’이라는 농토를 지급했다. 역은 국가로부터 받은 공해전으로 농사를 지어 수확한 농산물을 이용해 역을 운영했다. 각 역에서 일하는 역원들의 보수와 출장관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역마를 사들이는 일 등 역에 필요한 경비를 모두 공해전으로 해결했다.

역에서 일하는 역원들과 이들의 식구를 ‘역민(驛民)’이라 불렀는데, 보수로 받는 공해전에서 나온 농산물도 역 운영과 역민들의 생활에 다 쓸 수 없었다. 더구나, 국가는 공해전을 지급 받는 역민들로부터 곡물을 세금으로 받아들였다. 이래서 외국사신이나 관리들이 빈번하게 내왕하는 역로의 역민들은 이중부담을 지고 혹사를 당했다. 게다가 조정이나 지방의 권문세도가들이 공해전이나 농산물을 강탈하는 일도 많아 이중삼중으로 역민들은 고통을 당했다.
고려는 국가가 설치한 국영 역 말고도 전국 각 사찰에서 민간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역과 역 사이에 역과 비슷한 원(院)이라는 민간용 쉼터를 세웠다. 이곳은 주로 상인들과 신도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했는데, 나라의 허락을 받고 설치해 사찰에서 관리했다.
원은 백성들의 침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생산한 농산물이나 가공상품들을 판매 거래하는 유통거점 역할도 같이 담당했다. 신도들이 절을 찾을 때에 침식을 제공하기 위해 세운 것이 차츰 상업화되어 고려 후기에는 국영 역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들이 세곡선(稅穀船)과 세곡창고를 자주 약탈해서 바닷길로 개경까지 세곡을 운반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정부는 육지로 수송하도록 대책을 마련했다. 공민왕 5년(1356년)에 전국 각 조창에서 개경으로 세곡을 수송하는 도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원관(院館)을 설치해 세곡 수송을 돕도록 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 사원에서 민간용으로 설치한 원을 많이 활용했기 때문에 원의 기능이 한층 강화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산과 강이 가로막은 험한 역로들이 많아 세곡 수레가 개경까지 제대로 갈 수 없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최초의 가로수와 역로의 폐단

 

삼국시대부터 각 지방으로 연결되는 길을 뚫고 나면 행객들이 쉬어가도록 가로수를 심어 조경을 했다. 고려 제6대 성종 때(960)에는 서울에서 경상도, 전라도로 내려가는 삼남대로 (三南大路)나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는 서북로, 강원도를 거쳐가는 동북로 등의 중요 역로에 가로수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의 가로수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요즘 TV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는 ‘무인시대’에 나오는 이의민도 한몫 거들었다. 고려 19대 명종 때(1170)부터는 백성들도 역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라의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인 중서문하성의 총책임자인 이의민이 본격적으로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이 그를 ‘새길(新道)재상’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중엽으로 들어서면서 역로 주변의 마을이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노방잔읍(路방殘邑)’이다. 역로 가에 있는 읍이나 성은 높은 벼슬아치들의 갈취 때문에 망한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역민들이 관리들의 행패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없어지거나 도망가버려 역로 제도가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조정의 관리들이 오갈 때에는 ‘노문(路文)’이라는 공문서를 역이나 읍·군으로 띄우면서 말과 관리들의 식사를 대접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높은 관리 한 사람이 오면 그에 딸린 종이나 가마꾼 같은 수행원들이 자그마치 몇 십 명씩 따라붙는다.
이 사람들을 모두 대접하다 보니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까닭에 역로 주변의 백성들은 멀리 떠나버려 읍이나 성이 계속 사라져갔다. 이를 보다 못해 문신 조 준이 임금께 역호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취지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최초의 도로 표지인 장승의 등장

 

장승은 고조선 초기의 부락사회에서 생겨나 고려시대 후기까지 잡귀, 전염병, 재앙을 막아 마을을 평화롭게 만드는 신앙적인 상징이었다. 풍수지리적으로는 마을의 허약한 부분을 보호해 태평하도록 만드는 ‘비보(裨補)기능’으로 쓰기도 했다.
장승을 이정표로 쓰도록 한 사람은 앞에서 임금에게 역의 기능을 되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한 조 준이다. 그는 공양왕 때인 1390년경 고려의 문신으로서 왜구토벌에 공을 세우고 부원군이라는 최고 벼슬까지 지냈다. 토지제도에 해박했던 그는 토지제도를 개혁시킬 때 우역제도를 더욱 발전시킬 목적으로 장승을 이정표로 쓰도록 했다.
이때부터 전국 국도 22곳에 설치된 역마다 ‘지로(指路)’라는 길 안내 팻말이 세워졌다. 또한 각 역로가 지나는 마을에는 입구에 반드시 장승을 세우도록 했다. 장승에는 거리를 안내하는 이정표를 기록해 다음 마을의 이름과 그곳까지 가는 거리를 표시하도록 했다. 이것이 도로 행선지 표지판의 시초라고 하겠다.

<자동차생활, 2003년 06월호 - 저작권자 (주)자동차생활

 

 

    역참 통행증인 차자

 

           역로를 통해 세곡을 수송하는 수레

 

           고려의 역참

 

           도로 이정표로 쓰인 고려의 장승들

 

                     고려의 22개 역로

 

고려의 조운로

 

고려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였으므로 조세를 미곡·잡곡·면포·마포 등 현물로 조달했다. 그중에서도 주로 곡물이 세납의 대상이었다. 조세로 징수되는 곡물은 물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무거웠으므로 조운은 대규모의 운송 작업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수레가 발달하지 않아 세곡의 운송은 대개 선박에 의존해야 했다. 즉 전국 각지의 고을 단위로 징수한 세곡을 그 인근의 강변이나 해안에 설치한 창고에 모아두었다가, 일정한 시기에 선박을 실어 서울로 운반했다. 이때 세곡을 실어나르는 선박을 조선(漕船), 조선이 항해하는 뱃길을 조운로(漕運路), 조선이 출발하는 강변이나 해안에 설치한 창고를 조창, 서울의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를 경창(京倉)이라고 했다. 조운을 조전(漕轉)·조만(漕輓)이라고도 했으며 운영 주체에 따라 관선조운(官船漕運)·사선조운(私船漕運)·운송 화물의 성격에 따라 관조(官漕)·사조(私漕), 운송경로에 따라 해운·수운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수운은 수참(水站) 또는 참운(站運)이라고도 했다. 국가 재정을 거의 세곡에 의존했으므로 조운을 매우 중요시 여겨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집약적인 형태로 조직·운영했다.

조운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제도화되었다. 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관선조운제에서는 국가가 설치한 조창, 국가가 마련한 조선,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군(漕軍)이 필수적이었다. 고려는 지방 통치를 위해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10세기초 정종 때 이를 토대로 강변 또는 해안에 조창을 설치했다. 이때 세워진 조창이 충주의 덕흥창(德興倉) 등 12조창이다. 그후 문종 때는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安瀾倉)을 설치했다. 각 조창은 판관(判官)이라는 감독 관리가 주재했는데, 이들은 외관(外官)으로서 중앙정부가 직접 파견한 관리였다. 조창은 일종의 행정 구획으로서 촌락을 기본 구조로 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했다. 그러나 행정기능을 보유하지는 않아 인근 군현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세곡의 수납·운송이라는 기능면에서만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조창에는 판관 외에도 향리·초공(梢工)·수수(水手)·잡인(雜人) 등 조선에 승선하거나 세곡 수납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조창에서는 각기 부근 관할구역의 세곡을 추수가 끝난 뒤 징수하여 보관했다가 이듬해 2월부터 5월에 걸쳐 개성 부근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이를 위해 연해안의 조창에는 세곡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을 각기 6척씩, 그리고 한강 유역의 조창에는 세곡 200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0척 또는 21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13세기말 이래 왜구의 노략질, 군현제의 개편 등으로 점차 그 운영이 부실해져가다가 마침내 1376년 우왕 때는 조운제를 폐지하고, 세곡을 육운(陸運)하게 했다. 그러나 육운은 수송이 어렵고, 도중에서 도적들의 약탈이 자주 자행되어 국가 재정이 약화되었다. 이같은 사태는 결과적으로 고려의 지배력을 약화시켜 그 쇠망을 촉진시켰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계층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과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체제를 정비했다. 여기에 나타난 것이 토지제의 개혁과 조운제도의 복구였다. 우선 육로로 운송되던 세곡을 다시금 조운하게 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했다. 1392년 조선왕조를 세운 뒤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할 때도 조운에 적합한가에 특히 유의했다. 아울러 운영 관리에도 세심히 배려하여 〈경국대전〉에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의 조창은 9개소로서 그중 3개소가 한강 연안에, 2개소가 예성강 연안에, 그리고 4개소가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로 연변에도 5개의 조창이 설치되었지만, 그들의 운송역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정부가 역점을 둔 것은 연해안에 설치한 조창에서의 해운이었다. 해운의 대상인 전라도·충청도 지역의 세곡이 국가재정의 태반을 지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운의 주요항로가 있던 서해안·남해안은 섬이 많은 다도해로서 항로의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태안의 안흥량(安興梁), 임천의 남당진(南堂津), 강화의 손돌항(孫乭項) 등은 특히 안 좋아 조선이 좌초되고 난파되는 일이 흔했다. 안흥량은 난행량(難行梁)이라고 할 정도였는데, 태안반도의 돌출부에 위치하여 해안선의 굴곡이 심할 뿐 아니라 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해난사고가 연례행사처럼 일어났다. 1403년(태종 3) 경상도 조선 34척, 1414년 전라도 조선 66척, 1455년(세조 1) 전라도 조선 54척의 침몰은 그중에서도 큰 사고였다. 이같은 조선의 침몰은 국가 재정상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조군의 확보 문제와 아울러 인명사고로 인한 사회적 문제도 컸다. 그리하여 1403년에는 경상도 세곡을 충주의 경원창(慶源倉)에 납부하게 했다가, 1465년에는 가흥창(可興倉)에 납부하게 하여 이를 한강의 수로를 통해 운송하게 했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 연해안 지역의 세곡은 수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전라도 지방의 세곡은 다른 지방에 비해 그 양이 훨씬 많았는데, 15세기초에는 약 7만 석, 16세기 중엽에는 10만여 석, 기근이 심했던 17세기 중엽에는 4만여 석으로서 총세액의 절반을 넘고 있었다. 또한 세곡의 운반을 위해서는 법성포 앞바다의 칠산량, 안흥량 등지를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이에 1512년(중종 7) 위험 부담을 다소라도 줄이기 위해 최남단의 영신창을 폐쇄하고, 그 수세구역의 일부를 법성창으로 이관시키고, 법성창의 수세구역 일부를 덕성창으로 이관시켰다. 그러다가 17세기 중엽부터 대동법의 실시로 운송물량이 늘어나면서 함열에 성당창을 새로 설치했다. 하지만 안흥량에서의 사고가 그치지 않자 조선 후기에는 사선에 의뢰하여 세곡을 운송하게 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세곡의 운송은 국가재정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정부가 직영하는 관선조운체제를 따랐다. 따라서 집권력이 강했던 초기에는 관선조운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창의 정비와 함께 조선·조군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선박의 건조·관리를 위해 사수감 또는 전함사라는 관청을 두었다. 그리고 선박의 건조는 한강 연안, 선재가 풍부한 안면도, 완도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1401년에는 250여 척의 조선을 건조하여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3도에 분배해주기도 했다. 1413년에는 조운에 쓸 평저선 80척을 건조했고, 1460년에는 변산과 완도에서 조선 100여 척을 건조했다. 세조 때 건조된 조선은 매척에 큰 소나무 17~18조가 소요되는 대선으로서, 그 규모에 비해 매우 경쾌했고, 비상시에는 해전에 사용하게 했다. 이를 위해 선장(船匠)과 목공 등 300명이 동원되었다. 조선에 싣는 세곡의 양은 해운의 경우 매척마다 500~600석, 수운의 경우 200석 내외였다. 정부는 조군의 확보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조군은 부역의 일종으로 조운업무에 동원되었다. 신분은 본래 양인이었으나, 업무가 고되고 천했으며 세습이어서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에 속했다. 또 조군은 업무가 과다하고 위험부담이 컸으며, 온갖 잡역에 동원되기 일쑤여서 가급적 그 일을 피하려고 했다. 16세기에는 조군의 기피현상으로 관선조운제가 거의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16세기 이후에는 사선(私船)들이 세곡을 운송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고려시대에도 민간선운업자들이 사선을 가지고 세곡운송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에도 그 업무를 계속 맡았다. 사선은 태종 때의 경우를 보면, 강화도 세곡 7만 석 가운데 2만 석을 차지했다. 그후 1414년 전라도 조선 66척이 침몰하는 것을 계기로 사선의 세곡 운송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15세기 중엽에는 조운의 주류를 이룬 때도 있었다. 세조 때 관선조운제가 강화되면서 사선의 활동은 위축되기도 했으나, 16세기에 왜구에 대한 해상전술이 바뀌어 큰 선박을 소형으로 개조하면서 다시 세곡운송을 주도하게 되었다. 사선은 관선에 비하여 조선술·항해술이 뛰어나 수로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접근하여 농민들은 조창까지의 운송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사선의 활동은 대동법의 실시로 보다 활발해졌다. 관선이 전세곡의 운송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위정자들은 막대한 운송물량이 예상되는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이미 사선의 동원을 예상하고 있었다. 세곡 운반에 참여한 사선은 경강선(京江船)과 지토선(地土船)이었다. 경강선은 한강 유역에 근거지를 두고 어로·선상 활동에 종사하면서 세곡 운송에 참여했는데, 조선 후기에는 본격적으로 세곡 운송을 주도했다. 운송업을 하나의 영업분야로 개척한 경강선인들은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기술과 자본의 확대에 힘쓰는가 하면, 위정자들과도 결탁하여 그 이권(利權)의 확보에 노력했다. 그들은 선가(船價)라는 합법적 대가 외에도 화수(和水)·고패(故敗) 등 불법적 활동을 통해 영리를 꾀했다. 경강선은 대체로 매척에 1,000석의 세곡을 실었는데, 2,000석 이상을 적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각 고을에 있던 지토선은 주로 대동미 운송에 참여했는데, 18세기 이후에는 영업권을 경강선에 넘겨 주었다. 조선 후기 영조 때는 사선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관선조운을 다시 강화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치수사업

 

고려조는 918∼1122년(태조∼예종)까지의 약 200년간 정치와 경제체제를 정비·강화하는 한편, 밖으로는 송과 통교하여 선진문화를 섭취하면서 거란과 여진족에게는 평화유지에 힘썼으나, 후반기에는 왜구 및 북방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내구와 안으로는 쉴 사이 없는 정치적 변란 등으로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였으니 수리사업이 활발할 수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973년(광종 24년)에 진전의 개간을 하명했고, 1053년(문종 7년) 8월에는 나성 동남족 언덕에 올라 도읍의 허결한 곳을 보수함과 동시에 홍수진 뒤를 역부 3,000∼4,000명을 징발하여 제방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시대의 치수나 수리는 자연을 극복해 보려는 의지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의 개조를 내용으로 하는 국토개발이 활기를 띨 수는 없었다. - 물과 한국인의 삶 中에서..

 

고려시대에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노새나 나귀를 사용했다.

임진왜란당시 조선 기병 중에는 나귀를 탄 군인도 있었다고 한다.

 

북방항로 北方航路

 

송과 고려간의 해상교통로는 경동로(京東路)의 등주(登州)에서 개성(開城)에 이르는 북방항로(北方航路)와 양절로(兩浙路)의 명주(明州)에서 개성에 이르는 남방항로(南方航路)를 주로 이용하는 그리 멀지않은 거리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해도로는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淮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 등이 있는데 모두가 갈 수 있다”고 하였다.”
북방항로는 고구려 말기부터 고려의 문종 이전(1074년)까지의 한반도와 중국을 왕래하던 해로이며 두 차례의 변화가 있었으나 대체로 북방항로 범위 내에서 운항이 이루어졌다.
이 항로는 산동의 등주고항(登州古港)에서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묘도군도(廟島群島 : 장산렬도-대사도(大謝島)-귀음도(龜歆島)-말도(末島)-오호도(烏湖島))를 거쳐 발해해협을 뚫고 요동반도의 여순 부근 노철산(老鐵山)에서 동쪽으로 항로를 바꾸어 청니포(青泥浦)-도화포(桃花浦)-행화포(杏花浦)-석인왕(石人汪)-오골강(烏骨江)을 지나면서 황해를 건너 다시 남쪽으로 오목도(烏牧島 : 현재의 신미도)를 지나 대동강 입구의 초도(椒島)에 도달해서 개경(開京)부근의 예성강(禮成江) 입구의 벽란도(碧瀾渡)에 도착하는 항로이다.

 

남방항로 南方航路

 

북송시대 양국이 이용한 해상교통로는 북방항로보다 남방항로를 더 많이 이용하였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교통로에 대한 위협과 양국에 대한 침략에 그 주요한 원인이 있다. 또한 계절풍과 같은 자연환경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송대 연안지역에 발달한 무역항과 쉽게 접할 수 있었다는 유리한 점도 작용하였다.
1046년 5월 송 인종은 “신라,고려국의 과거 입공은 그 배들이 등주를 통해 왕래하였다. 듣건대 여진과 삼한이 이미 거란에 합병되어 왕래할 수 없으니 경동(京東)의 제군(諸郡)들은 어찌 응하려 하는가? 등주로 내려가 해외 국가들을 방문할 수 있는 원근을 찾아 방법을 강구하라” 하였다.
양국간의 남방해상로 이용 시기는 1074년(송 신종 희령 7 : 고려 문종 28) 고려에서 사신 김양감(金良鑑)을 파견하여 거란과의 관계를 이유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여 채택되었다. 이는 실제 가까운 길을 버리고 먼 길을 선택한 것이지만 송의 신종은 이에 동의하였다. 이것이 남로이다.
송의 선박들은 명주로부터 한반도 남서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북쪽으로 항해하여 예성강 강가에 도달하였는데 이때 계절풍과 같은 순풍을 만나면 5일 만에 도착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권3, 봉경(封境)에 의하면 “해로의 경우는, 하북,경동,회남,양절,광남,복건 등에서 모두 갈 수 있다. 지금 국도를 세운 곳도 등주,내주와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1078년 이후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 모두 명주 정해에서 출발하여 북쪽을 향했는데, 항해할 적에는 하지가 지난 뒤 남풍을 탔다. 바람이 순조로우면 불과 5일 만에 고려의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계절풍을 이용한 양국간의 왕래는 『문헌통고(文獻通考)』권325, 고구려(高句麗 : 高麗)조에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남북행에서 각기 순풍을 만나면 순조롭게 지나갈 수 있었다. 양응침(楊應忱)이 무신년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올 때, 9월 계미일에 삼한을 출발하여 무자일에 명주 창국현에 도착하였으니 겨우 6일이 걸렸을 뿐이다”이다 하여 양국간의 해상교통로는 자연환경을 잘 이용하였음 알 수 있다.
남방항로의 구체적인 여정을 보면 『송사전(宋史筌)』고려전(高麗傳) 원풍(元豐) 3년조에
“명주에서 출발하여 편풍(便風)을 만나면 항해 시작 3일 만에 큰바다에 이르고 또 5일이면 흑산도에 도착하고, 7일이면 예성강에 도착한다. 예성강은 두 산 사이에 있는데 급류가 흘러 내려 급수문이라 부른다. 또 3일이면 해안에 도착하는데, 벽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을 통해 육지에 올라 험한 산골짜기 40여리를 지나면 고려의 수도에 도착한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
당시 송에서는 명주지방이 고려와의 관계에 주로 이용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명주를 출발하여 동북으로 향하여 흑산도에 도착한 후 다시 항해하여 예성강에 도착한 후 육지로 고려 수도인 개성에 들어갔다.
고려에서 송으로 돌아오는 노선과 소요되는 날짜에 대해서 『고려도경』권39, 예성강(禮成江)조에 의하면,
“돌아오는 일정은 다음과 같다. 7월 13일(갑자)에 순천관을 출발하여 15일(병인)에 다시 큰 배에 올랐다. 16일(정묘)에 합굴에 이르렀고, 17일(무진)에 자연도에 도착하였고, 22일(계유)에 소청도와 화상도를 지났다. (중략) 8월8일(무자)까지 모두 14일간 바람에 막혀 가지 못하다가, 그 뒤 동북풍이 불어 조류를 타고 큰 바다로 출항하였다.(중략) 10일(경인)에는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 정오에 다시 군산도로 돌아갔다. (중략) 23일(병인)에 중화의 수주산이 바라보였고, 24일(계묘)에 동서서산(東西胥山)을 지나서 25일(갑진)에 낭항산에 들어와 담두(潭頭)를 지났다. 26일(을사) 아침에 소주바다(소주양)를 지나서 밤에 율항에 정박하였다. 27일(병오)에 교문(蛟門)을 지나는데 초보산(招寶山)이 보였고, 정오에 정해현에 도착하였다. 고려를 떠나서 명주땅에 도착하는데 무릇 바닷길로 42일이 걸렸다”
이상에서와 같이 고려에서 송에 이르는 항로는 예성강을 출발하여 많은 연안 도서지방을 거쳐서 한국 남단의 흑산도를 거쳐 절강성 연안의 정해(定海),명주에 도착한다. 그 후에 북송의 수로를 이용하여 개봉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자연적인 환경을 이용하지 않으면 훨씬 많은 날짜를 소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국간에 남방항로로 변경한 후 사절의 왕래에는 계절풍이 부는 시기에 편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상세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명주 -정해현-초보산-호두산-칠리산-교문-심가문-매령산-봉래산-반양초(이상 중국령)-협계산-백수-오서-흑산도-월서-죽도-고점점-군산도-부용산(덕흥)-홍주수(보령)-마도(해미)-알자점-우심서-자연도(인천)-급수문-벽란정-개성부(이상 고려령)

 

고려의 조운선

 

 

 

 초마선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물을 운송하기 위한 조운선의 일종으로, 세곡 1,000 석 이상을 실을 수 있는 규모의 배.

조운(漕運)이란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곡물로 거두어 선박을 이용하여 임금이 살고 있는 수도로 운반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에서 조운제도가 처음으로 확립된 것은 고려 초기이다. 고려는 949년경에 남도에 12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세곡을 서해안 해로와 남한강 및 북한강의 수로를 통하여 예성강으로 들여와 개경으로 운반했다. 이때 조운선의 용도로 쓰인 것이 바로 초마선(哨馬船)이다.

◎고려시대 조운창
고려시대 설치된 조운창은 아래와 같다.
강운 : 1.충주의 덕흥창 2.원주의 흥원창
해운 : 3.아산의 하양창 4.부성의 영풍창 5.보안의 안흥창 6.임파의 진성창
7.나주의 해능창 8.영광의 부용창 9.영암의 장흥창 10.승주의 해룡창
11.사천의 통양창 12.합포의 석두창

그리고 조운창에 따라 조운선의 척수를 정하고 세곡(稅穀)의 적재량을 제한하였다. 덕흥창은 평저선 20척, 흥원창은 평저선 21척으로 하고 세곡은 200석으로 적재를 제한하였다. 평저선이란 배밑이 편평한 배를 말하는데 한강의 평저선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의 광선, 즉 늘배(넓은 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외의 해운창은 초마선 6척, 세곡 1,000석으로 적재를 제한하였다.

 

초마선의 특징

초마선이란, 조운선에 붙여진 이름인데 일반적인 해선(解船)과는 달라서 세금으로 거둔 벼를 많이 싣기 위하여 삼판의 널쪽을 더 늘려 배를 건조함으로써 배의 선창 깊이를 50%정도 더 깊게 만든 것이다.

초마선의 배의 선형 및 기본 만듦새는 완도에서 출토된 고려선과 같다.
배밑은 통나무로 되어 있어 편평하고 삼판(舷板)은 두꺼운 널판으로 턱을 따고 겹쳐서 무으어 올렸으며 이물비우와 고물비우는 넓적한 판자로 가로 대어 막았다. 세곡 1,000석을 적재하는 한선식(漢船式) 바닷배라면 배의 길이는 약 20m, 너비는 약 7m, 배의 깊이는 약 3.5m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돛대는 2개를 세우며, 돛은 부들풀로 짠 자리돛(風席 ; 풍)을 매어 달게 된다.

초마선이라는 배의 이름은 고려 태조의 군선들을 조운선으로 용도를 바꿔 사용하면서 개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운선의 용량은 조선 후기까지도 대체로 1,000석 정도로 제한했는데, 곡물이 매우 무거운 화물이기 때문에 1,000석 이상을 탑재하면 접합부가 이완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초마선의 적재량이 조선 후기 조운선의 용량과 동일한 점은 고려의 조선기술이 그만큼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운선 외에 연안 수군의 각 진(陣)에 보급하는 군수물자와 군량의 해상 운송은 예성강의 병선 180척이 담당하였다.

 

고려시대 함선

 

 

 

고려시대에 북방 여진족 방어를 위해 만들었던 함선.

 

고려 중기 현종(顯宗) 2년(1011년)부터 숙종(關宗) 2년(1097년)까지 87년 동안 함경도 지방을 비롯하여 경상도 동해 연안에 여진족(女眞族)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고려는 도부서(都府署) 또는 선병도부서(船兵都府署)를 여러 곳에 두어 이들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이 도부서의 임무는 대체로 수군을 이끌고 해상에서 침입하는 여진족을 방어했던 수군방어본부(水軍防禦本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동북 방면의 도부서에 배치된 전선이 바로 과선(戈t船)이었다. 이 과선에 관해서 “고려국 배의 몸체는 높고 크다. 배 안은 넓고 안을 두겹으로 만들고 위에 망루를 좌우 각 네 곳에 세웠다. 따로 떨어진 곳에 노질을 하는 노군이 5~6명이 있다. 한쪽 뱃전에 각각 7~8척의 노가 있다. 이물을 철로 만든 뿔로 쌌는데, 이는 적선과 충돌할 때 쓸모가 있었다. 또 큰 돌을 배 안에 쌓아두고, 적선에 이 돌을 던져 때려 부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현종 10년(1019년) 3월에는 여진족이 병선 50여 척으로 동해를 건너 일본의 큐슈(九州) 북쪽 해안에 도착하여 쓰시마(對馬島), 이끼시마(壹岐島)를 습격하고 다음 달에는 하까다(博多) 지방의 연해를 침략하고 귀환하는 것을 고려 전함 1,000여 척이 공격하여 격살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고려 수군의 해상 활동은 견고하고 성능이 좋은 함선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기에는 검선이 있었는데, 이것은 뱃전에 단검을 빈틈없이 꽂아 놓아 적이 배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고려 말기 우왕(禮王) 때 손광우가 왜구와 싸우다가 다쳐서 검선을 타고 위기에서 빠져 나왔다는 기록이 처음 보인다. 이 검선은 고려 중기의 과선을 본 따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누전선

 

 

 여몽 연합군이 일본의 하까다를 공략 할 때 참전하였던 누전선을 일본의 화가가 보고 그린 그림이다. 고려시대 함선의 형태와 구조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고려시대 왜구의 극성으로 등장한 전함.

 

누전선은 고려 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으로, 고려말 여몽 연합군과 일본의 해전을 그린 자료 속에 흔적이 남아 있다.

누전선을 비롯한 고려 전함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판은 굵은 통나무 여러 개를 그대로 사용하여 다용골 저판을 이루고 있으며, 삼판과 비우 쪽을 5치 이상 두꺼운 널로 쌓아 올렸다. 삼판에는 참나무 배못인 피새를 S자 모양으로 때려서 넣고 끝을 쐐기로 박아 마감하였으며, 배의 횡강력(橫强力)을 위해 장쇠(長釗를 좌우의 양 삼판마다 네모 구멍을 뚫어 꿰어 걸고 쐐기로 마감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이물비우를 통나무 바깥쪽의 둥근 모양을 그대로 살려 삼판보다 더 두꺼운 널을 대어 박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강한 파도를 만나거나 바위에 부딪혀도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고려 전함의 견고함은 여몽연합군의 1,2차 일본 원정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범해소록>에서는 “크고 작은 함선들이 다 파도 때문에 부서졌으나 지고 부딪혀 깨졌으나 유독 고려의 전선은 배가 견고하여 온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원나라의 정우승도 세조에게 고려 전함의 견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강남(남송)의 전선은 크기는 크지만 부딪히면 깨진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배를 만들도록 하여 재차 일본을 원정하면 승리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전함이 견고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제작방식 때문이다.
1. 고려 전함의 선형이 방주(舫舟)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안전성이 있고,
2. 선체는 두꺼운 판재를 썼으면서도 자연스런 유선형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3. 이물비우와 고물비우는 자연 목재를 그대로 썼으나 파도를 타고 넘는 능파성(凌波性)이 우수하였고,
4. 배밑을 기다란 창과 같이 생긴 참나무 장삭(제주도에서는 장삭이라고 하고, 경기지방과 서남해안에서는 가새라고 한다)으로 좌우에서 어긋나게 매겨서 때려 박았으며,
5. 5치(약 15cm) 이상이 되는 삼판과 이물비우, 고물비우에 참나무 배못인 피삭(피새라고도 한다)을 S자 모양으로 때려 박아 배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평전선

 

 

 

여몽 연합군이 일본의 하까다를 공략할 때 참전하였던 평전선을 일본의 화가가 보고 그린 그림이다. 고려 시대의 함선의 형태와 구조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고려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으로 누전선과 기본구조가 같음.

 

평전선은 기본 구조와 모양이 누전선과 동일하다. 다만, 누전선은 누각을 설치하고 평전선은 누각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고려 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으로, 고려말 여몽 연합군과 일본의 해전을 그린 자료 속에 흔적이 남아 있다.

평전선을 비롯한 고려 전함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판은 굵은 통나무 여러 개를 그대로 사용하여 다용골 저판을 이루고 있으며, 삼판과 비우 쪽을 5치 이상 두꺼운 널로 쌓아 올렸다. 삼판에는 참나무 배못인 피새를 S자 모양으로 때려서 넣고 끝을 쐐기로 박아 마감하였으며, 배의 횡강력(橫强力)을 위해 장쇠(長釗를 좌우의 양 삼판마다 네모 구멍을 뚫어 꿰어 걸고 쐐기로 마감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이물비우를 통나무 바깥쪽의 둥근 모양을 그대로 살려 삼판보다 더 두꺼운 널을 대어 박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강한 파도를 만나거나 바위에 부딪혀도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고려 전함의 견고함은 여몽연합군의 1,2차 일본 원정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범해소록>에서는 “크고 작은 함선들이 다 파도 때문에 부서졌으나 지고 부딪혀 깨졌으나 유독 고려의 전선은 배가 견고하여 온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원나라의 정우승도 세조에게 고려 전함의 견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강남(남송)의 전선은 크기는 크지만 부딪히면 깨진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배를 만들도록 하여 재차 일본을 원정하면 승리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전함이 견고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제작방식 때문이다.
1. 고려 전함의 선형이 방주(舫舟)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안전성이 있고,
2. 선체는 두꺼운 판재를 썼으면서도 자연스런 유선형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3. 이물비우와 고물비우는 자연 목재를 그대로 썼으나 파도를 타고 넘는 능파성(凌波性)이 우수하였고,
4. 배밑을 기다란 창과 같이 생긴 참나무 장삭(제주도에서는 장삭이라고 하고, 경기지방과 서남해안에서는 가새라고 한다)으로 좌우에서 어긋나게 매겨서 때려 박았으며,
5. 5치(약 15cm) 이상이 되는 삼판과 이물비우, 고물비우에 참나무 배못인 피삭(피새라고도 한다)을 S자 모양으로 때려 박아 배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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