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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평론의 죽음 (문일평)

by 8866 2009. 5. 8.

영화평론의 죽음 (문일평)

 

영화평론, 아니 영화평론가는 죽었다. 뇌사상태에 빠진 영화평론가들은 진작 이 사망선고를 받아들였어야했다. 한국영화는 더 없는 호황을 누리는데 한국에서 영화평론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사회부에서 막 문화부로 옮겨온 기자도 이제 더 이상 영화 평론가들의 고견을 구하지 않고 영화잡지 편집장은 영화평론가 대신 소설가나 영화감독이나 에세이스트에게 영화 칼럼을 청탁한다. 영화평론가가 <조폭마누라>나 <보스상륙작전>을 고전적인 논리로 비난하면, 관객들(또는 영화사 관계자로 추정되는 이들)은 조폭처럼 달려들어 육두문자로 평론가를 코너로 몰아 붙이고 그의 기본적인 자질에 시비를 걸며 붓을 꺾으라고 협박한다. 감독들은 돈을 쥔 관객들을 두려워하지만, 녹슨 펜을 쥔 영화평론가는 더없이 만만한 상대로 여긴다. 그들은 영화평론가의 언어가 관객들을 더 이상 동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영화평론가가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고양이를 부탁해>가 빼어난 영화라고 거짓말을 보태가며 설득해도 관객들은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색즉시공>에서 임창정의 차력 쇼를 보며 박장대소를 하던 관객은, 영화평론가가 정색 하고 쓴, 영화 속 웃음의 전략에 관한 분석 글을 독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이해하는데, 영화에 관한 해석은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의 관객들에게 그 영화평론가의 분석은 무성영화 배우의 대사이며, 유령의 언어다. 관객들이 이렇게 난독중에 빠진것은, 그 글이 난해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귀에 무의미한 언어이며 다른 차원에서 소통되는 언어로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석에 있는 나도 끼워준다면) 나를 포함한 영화평론가들은 <디 아더스> 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여주인공처럼, 아직도 자신이 유령이라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창문을 검은 천으로 가려 빛을 막고 저택 안을 창백한 얼굴로
거닐며 고집을 부리고 있다. 위기를 맞은 타 업종 종사자들(이를테면 소설가나 인문 학자들)의 침입을 목격하거나 관객들이 일침을 가할 때면, 평론가들은 그것을 '타자 (디 아더스)'의 위협으로 오인한다. 아직 반전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영화평론가들은 자신이 타자임을, 유령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평론가의 수난시대.


오래 전부터 문학평론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신음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어왔지만 사실
그것은 문학의 총체적 위기에 휩쓸린 결과일 뿐이었다. (영화평론가에 비한다면) 문학
평론가들은 지금 신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영화감독과는 달리) 소설가를 소설
가라고 불러주는 것도, 그 소설가에게 문학상을 안겨주며 상금을 쥐어주고 날개를 달아
주는 것도, 또 문학 대중의 취향을 역으로 결정하는 것도 그들이다. 문학의 입지가 좁
아지고 대중들의 문자 해독력이 급격히 퇴화되면서 문학평론가들의 '전문성'은 더욱 공
고해졌고 '순수 문학판'은 몇몇 '권력을 쥔'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짜여지게 되었다. 한
국문학의 좌표는 이들 평론가들이 그려내고, 평론가가 작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
작가는 대중들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그런데 영화 평론가들의 사정은 정확히 이와 반대다. 탈 충무로 시대에 한국영화계로
흘러든 자본은 대중들 주위로 더욱 밀도 있게 집적되었고, 대부분의 영화들은 철저히
대중들의 쾌락 코드 위에 포개졌다. 평론가들 에게는 상대적으로 '낯선' 영화들이 등장
한 셈이다. 평론가들은 이러한 영화들을 앞에 놓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원고지 매수를
채우는것이 곤혹스러워졌고, 그러는 사이 영화에 대한 독해력은 평론가와 대중들 사이에서
'하향 평준화' 되었다. (관객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는 말은 그래서 틀렸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평론가들을 우롱하는 관객들이 등장했고 영화평론가들의 수난시대가
열렸다.


이제 영화평론가는 (변별력 있는) 난해한 문제가 출제되지 않는 평준화된 고등학교에
멍하니 앉아 있는 우등생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혹시 오해할지도 몰라 노파심에서 하는
예긴데, 이 '우등생'은 우열 관계와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은유다.) 관객과 일간지 문화부
기자와 영화평론가는 모두 같은 성적을 내고 있다. 저녁 여덟시 오십분에 열리는 일반 시
사에서 영화를 본 열혈 관객이 인터넷에 거칠게 올린 글과, 오후 두 시에 열리는 언론 시사
에 참석한 평론가가 공들여 쓴 글을 명확히 구분할 만한 근거는 사라졌다.


이러한 사정이 심화되면서, 평론은 저널리즘 지면에서 상아탑의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
했다. 평론가들은 대중영화 속에 감춰진 이데올로기를 노출시키고, 지극히 단순한 텍
스트에서 너무나 복잡한 징후를 읽어냈다. 즉 자신앞에 놓인 쉬운 문제가 출제된 배경을
폭로하고 다른 답도 가능하다고 객관식 문제에 주관식으로 답하며 '평준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하향평준화 시대에 평론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
다. 물론(나를 제외한) 평론가들이 치졸하게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관객들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하는 전략을 취했을 리는 없다. 단지 대중들이 자본과 영화를 장악한 시대
에, 넓은 지면, 그 현기증 나는 백지를 채울 만한 언어가 마땅히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
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평론가들의 언어는 이 시장에서
점점 낯설고 무의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알아듣기 힘든 방언으로, 또 형식적인
언어논리만을 갖춘 무덤의 언어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자연히 평론가들의 글은 가독성을
잃어갔다. 글이 난해해서 읽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감독들에게, 제작자들
에게 무의미하고 공허한 글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잡지가 끝없이 창간되어 작은 시장
을 더 작게 나누어 먹고, 일간지로부터 인터넷 영화 사이트에 이르는 각종 매체에서 영
화에 관한 글들이 과잉 생산되는 상황에서, 정작 평론가들의 생경하고 따분한 언어는 관
객들의 귀에 좀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결국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50 % 에 달하는 호황
기에 평론가는 아무도 원치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탑골공원의 쓸쓸한 노인이
되고말았다.


'전문가' 라는 갑옷을 빼앗긴 영화평론가들.


평론가라는 직업은 19세기 유럽에서 '대중' 이라는 무리가 구체화되면서 출판업이 급속
도로 발전한 결과로(출간되는 서적들이 과포화 상태를 이루면서), 그리고 신문 등의 정
기간행물이 널리 읽히기 시작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물론 그 이전에도 평론가
는 존재했지만, 그것이 직업으로 제도화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다. 취향에 있
어 균질한 집단인 대중은 무섭게 쏟아지는 서적들 중 누군가가 몇 권을 추려내주길 원했
다. 거간꾼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신문의 한 구석을 그 거간꾼들이 차지하기 시작했
고 그들은 점차로 지면을 넓혀갔다. 이후로 어느 시기 어느 예술 장르에서든 이 거간꾼
이 소외된 적은 없었다. 검증된 상품을 소비하고 싶어하는 대중의 욕망은 보편적인 것이
기 때문이다. 개중들은 거간꾼을 원했고 거간꾼들은 자신의 쓰임새를 분명히 알고 있었
다. 곧 평론가들은 자신의 영역을 전문화해나갔고 대중들은 그러한 평론가들을 전적으
로 신뢰했다.


하지만 20세기를 지나면서 영화계라는 이상한 시장에서 스필버그의 <죠스>가 개봉된
이후에(자본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대학 비평과 저널리즘 비평의 거리가 한없이
멀어지면서 평론가라는 직업의 내용은 점차로 수정되기 시작했다. 영화라는 '문화' 상품
이 문화 '상품' 이 되고 영화가 공산품처럼 소비되기 시작하면서 또 투자한 만큼 산출되
는 (돈 놓고 돈 먹는) 투기성 산업으로 자리잡아가면서 '영화'의 의미는 변질되었고 평
론가의 성격도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더구나 시장이 좁은 한국에서 호황을 누리게 된 영화계의 자본과 이 시장의 진정한 주
인으로 등극한 대중이 은밀하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평론가'는 전혀 다른 직종으
로 여겨지게 되었다. 개발시대를 맞은 황무지 서울의 건축업자와 마천루로 과포화된 서
울의 건축업자가 전혀 다른 뉘앙스로 들리는 것처럼, 90 년대 이전의 영화 평론가와 90
년대 초중반 영화 붐이 일기 시작할 무렵의 평론가, 또 한국영화 점유율 50 % 시대의 평
론가는 각각 서로 다른 직업이다. 명칭만 같을 뿐, 실제로 각 시대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세부적인 역할의 내용이 각기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대의 평론가에게는 '전문성'이라는 갑옷이 없다. 아놀드 하우저
의 다소 고루한 정의에 따르면 전문가로서의 비평가란 "보평타당한 가치척도들을 대변"
하고 "그때그때 현실적인 예술적 기호들의 원칙들을 발전, 통용"시키는 사람이다. 그런
데 지금 이 땅의 평론가가 대학교 정문을 나서는 순간, (저 인용부호로 묶은) 두텁고 단
단한 갑옷은 갑자기 녹이 슬고 부식돼버린다. 단순히 평론가가 게을러서, 즉 책상머리
를 지키지 않아서 전문성을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분명 시대가 그것을 앗아가버렸다.


지금 한국영화는 '주문생산 시스템'으로 제작된다. 대중과 자본의 거리가 완전히 무너
져서, 대중이라는 동질의 집단이 암시적으로 주문하고 자본은 공산품을 찍어내듯이 고객
중심주의 정책에 의거하여 친절한 상품을 내놓는다. 이 직거래 장터에서 평론가는 완전
히 소외돼 있다. 자본과 대중의 직거래가 성사됐기 때문에 거간꾼이 쓸모없어진 것이다.
요즘 대중들이 영화평놀가들의 존재를 철저히 비하하는 이유도 평론가보다 대중들이 영
화와 더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 - 평론가 - 자본 (제작자)을
잇는 전통적인 삼각형이 평론가를 소외 시키는 이상한 모양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 시대의 새로운 패트론(patron)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중들은 선주문하
고 제작자들과 영화감독들은 성실하게 주문받은 대로 영화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시
대의 패트론은 냉혹하다. 작품이 자신의 쾌락에 봉사하지 않으면 단호하게 '후원'을 중
단하고 돌아선다.) 한국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가 상대적으로 퇴조한것도, 일본영화가
한국 시장 공략에 완전히 실패한 것도, 모두 이 주문생산 시스템과 관련 있다. 모두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신인감독들이 줄지어 등장하고 이들의 영화가 신인답지 않게 하나
같이 진부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생산 시스템이 낳은 겨로가다. 이렇게
대중이 영화를 직접 주문하는 시대에 평론가가 퇴출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새로 짜인 영화계의 구조는 평론가에게 전문성을 휘발시켰고 대중들은 평론가의 언어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전문화'란 원래 근대로 막 접어들던 시기의 유럽에서 성장 세력이었던 중류계급이 귀
족계급에 맞서 자신의 노동에 관해 위엄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요즘 한국의 영
화평론가가 과연 자신의 노동에 관해 위엄을 주장할 수 있을까. 어느 영화광이 (취미 삼
아) 인터넷 게시판에 영화 감상문을 올리는 행위와 영화평론가라고 불리는 내가 (원고료
를 받고) 주간지에 글을 쓰는 노동사이에는 어떤 형식상의, 또는 실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칼 드레이어를 전공한 영화과 교수가 일간지에 <조폭 마누라>에 관한 글을 쓴마면 이때
과연 그 '전문성'이라는 무기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또 프리챌 영화 커뮤
니티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필부'들이 쓴 글과는 과연 구분이 가능할까.


문자가 무력해진 시대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는 영화 붐이 일기 싲가했고 이때 영화평론가들은 그 누구보
다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과 같은 영화들이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했고 시네마테크를 표방한 비디오테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낯선 고전
영화들이 줄지어 소개되었다. 또 '대중' 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되었고 그들의 영화에 대
한 인식이 거의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이때 누군가 교통정리를 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당
연히 그것은 영화평론가의 몫이었다. 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이 <벤허>나 <바람과 함
께 사라지다>가 아닌 <시민 케인>과 <전함 포템킨>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
고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나 레오스 카락스의 <나쁜피>를 어떤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
지 이야기해줄 통역사도 필요했다. 그와 더불어 거듭난 한국영화의 의의를 규명해줄 목
소리도 필요했다. 관객들은 스타 브로마이드를 부록으로 선사하는 영화잡지가 아닌, 영
화에 관한 실질적인 가이드를 필요로 했다. [씨네21]이나 [KINO]는 이러한 맥락에서 창
간되었다.


이 당시는 가히 영화평론가의 시대라 할 만했다. 케이블 TV 에는 <유지나 vs 이용관>
같은 갑론을박의 프로그램이 새롭게 시도되었고 정성일은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이상한 말투로 영화가 품은 낯선 아우라를 전파를 통해 재현했다. 또 일간지에
실린 영화평론가들의 글은 지금과는 달리 '유효'했다. 이렇게 영화들 간의 질적인 차이
를 읽어내고 그 가치체계의 좌표를 그려내는 일은 영화평론가가 맡았었다. 막 새로운 영
화들과 조우한 대중들에게는 영화들 간의 콘텍스트가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90년대 초중반은 아직 문자의 힘이 살아 있는 시기였다. 그 당시에 영화평론이
수월하게 읽힐 수 있었던 것은 문학과 대자보의 시대였던 80년대, 그 시대에 위용을 자
랑하던 인쇄매체의 위력이 당시까지 잔상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중문화의 시
대'였던 90년대 중반에 많은 80년대의 젊은 지식인들이 대거 '문화계'로 전향한 예를 흔
히 목격할 수 있었다. [리뷰]와 같은 종합 문화비평 계간지가 서태지의 얼굴을 표지에
내걸며 창간되었고 대중문화에 관해 글을 쓰는 온갖 장르의 평론가들이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한 시기였다. 영화에 관한 저작들을 (어느 저자의 표현을 빌면) "개나 소나" 써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어느 장르에서든 그들은 문자언어로 소통했고 대부분 '평
론'이라는 형식을 통해 대중문화에 접근했다. 즉 영화평론은 영화에 관한 이상스런 열기
뿐 아니라 여전히 문자언어를 구사하는 지식인들이 문화계로 유입되는 전반적인 움직임
에 탄력을 받아 활발하게 읽히고 쓰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문자는 더없이 무력하다. 모두 알다시피 무섭게 세상을 점령
한 영상언어로 인해 사람들은 문맹화되었다. 관객들은 영화에 관한 글들을 살펴 읽는 대
신 <출발! 비디오여행>이나 <접속! 무비월드>를 즐겨 시청한다. 아니면 마우스를 클릭해
영화의 트레일러를 감상하거나 웹 페이지를 검색해 영화에 접속한다. (물론 웹 사이트에
도 문자가 널려 있지만 그것은 평론의 문자와는 명백히 다른 종류의 언어다.) 당장 컴퓨
터 앞에 앉아 영화 전편을 전송받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거간꾼의 문자언어를 참
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DVD 를 재생시키면 감독이 옆에 앉아 영화를 함께
보며 상세히 주석을 달아주는 시대에, 즉 텍스트와 해설이 결합하여 패키지로 제공되는
시대에 영화평론가의 의미 없는 문자들이 관객들의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영화가 일상화된 시대의 영화평론


영화는 지금 지나치게 일상화되었다. HD TV 와 5.1 채널의 사운드 시스템이 점점 신체
의 일부가 돼가고 있다. 이제 대중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쥐고 신체를 무한히
확장하여 움직이는 이미지를 자신의 눈앞에 마음대로 끌어온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는
좁혀지고 관객들을 환각 속에 빠트리던 영화관의 아우라는 휘발 되었다. 관객들은 멀티
플렉스 영화관에서. 또 홈 시어터 시스템을 갖춘 안방에서 TV채널을 돌리듯이 영화를 선
택하고 소비한다. 극장 건물 이마에 내걸렸던 손으로 그린 거대한 간판은 멀티플렉스
시대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처럼 손에 리모콘이나 마우스만을 쥐고 영화와 조우하는 관객들은 자신에게 암호문
처럼 보이는 글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다. TV 채널을 돌리는데 어떤 중개인도 개입
하지 않듯이, 마치 리모콘 버튼을 누르듯 가볍게 영화를 소비하고 흘려버리는 이들에게
는 영화평론이 더없이무의미한 텍스트다. 과장된 영화광고나 화려하게 편집된 트레일러
가 이들에게는 더욱 가깝고 의미 있는 중개자다. 이들이 영화와 맺는 관계의 양상을 고
려할때, 기껏해야 일간지 문화면이나 패션 잡지에 덤으로 실리는 몇 줄짜리 가이드만으
로도 충분하다. 멀티플렉스 매표소 앞에 선 연인이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클래식> 중
어느 영화를 볼 지 결정하기 위해 굳이 3000 원 짜리 영화 주간지를 구입해서 거기에 실
린 지루한 영화평론을 참고 읽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
이 올라간 후에 집으로 돌아와, 암호문 같은 글을 읽으며 감동을 되새기거나 자신의 시
각과 대조하는 등의 수고를 기울이지도 않을 것이다. '영화 보기'가 'TV 시청' 과 유사
한 성격의 이상으로 변해가면서 영화평론이 설 자리는 사라져버렸다.


영화 소비방식의 변화


급격하게 변해가는 지형 위에서 영화평론은 꿋꿋하게도 예전의 형식을 고수하거나 이
상한 방식으로 왜곡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군중들은 저쪽으로 모두 옮겨갔는데 영화평론
가들은 고집스럽게 제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더욱 자폐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영화평론가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의 언어가 허공에서 공허하고
쓸쓸하게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현재 가장 잘 팔리는 영화잡지인)
[씨네 21]의 독자들이 고전적인 스타일의 영화평론으로 채워지는 '영화 읽기'와 같은 코
너 대신 고종석, 김영하, 김규항, 주인석 등 타 업종 종사자들이 써내는 칼럼을 즐겨 읽
는다는 사실을 영화평론가들은 잘 알고 있다. 또한 평론가나 전문기자가 아닌 어느 일
간지 영화 담당 기자의 홈페이지 일일 방문자 수가 (순전히 그가 써낸 글 때문에) 댄스
그룹 HOT 나 SES 의 팬 사이트 방문자 수보다 많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품위 없고 경박스러운 예를 들어 설명해야 할 만큼 영화평론가들은 벼랑 끝으
로 내몰린 상황이다. 영화평론가들은 관객들과 소통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평론가들은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영화들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화'
라는 명사의 함의가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영화평론가들은 사려 깊게 고려하지 않
았다. 아마도 '영화평론의 죽음'은 예전의 언어로 요즘의 '영화'를 설명할 때 발생하는
오류의 결과일 것이다. 자신이 언어를 생산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평론가들
은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그것을 인정할 새가 없었다. 이곳의 상황은 총체적으로 너무
빨리 변해버린 것이다.


절박한 갈림길에 놓인 영화평론가.


지금 우리의 영화평론은 대중의 욕망과 시장의 논리를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영화'
의 옛 영토를 돌려달라고 시위를 벌일 것인지를 두고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는 영화평
론의 논쟁사에서 매우 고전적인 주제이기도 하지만 지금 한국영화계의 상황이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까닭에 이는 영화평론가들에게 매우 절박한 갈림길이 되었다. 상
황은 예정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점을 평론가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덥
석 시장의 흐름에 몸을 내 맡길 수 없는 것이 평론가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사실 둘 중 어느 입장을 택하든 영화평론의 생존 여부와는 무관하다. 상업영화를 적
극적으로 옹호한다고 영화평론이 회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자본의 흐름을 부정하고
대세를 거스른다고 영화평론이 무덤속에 묻히는 것도 어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저널리즘 비평이 취하고 있는 언어로는 결코 대중들과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대중들과 소통 가능한 언어를 골라내는 일이 관건이다. 자본과 영상 이미지가
하듯이 평론가도 대중을 유혹해야 한다. 평론가들은 보다 관능적이고 정치적인 언어를
구사해 대중과의 적극적인 접촉을 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허공을 막연하게 부유하는
무능한 거간꾼의 언어를, 시장이 장악한 이 땅 위에 발 딛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일단
대중이 모인 광장으로 나가 단상 위에 올라서야 한다. 그제서야 시장의 논리에 저항해
'영화'의 옛 영토를 재탈환하거나 한층 고양된 시장을 개척하는 등의 기도가 가능해진다.
지금과 같이 평론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영화시장의 흐름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파리 1 대학 철학 교수인 이브 미쇼는 몇년 전에 [예술의 위기] 라는 저서에서 현대
예술이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무의미한 형식을 고수하고 있으므로 '예술'이 죽어
야 진짜 예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역설한바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영화평론도 이
브 미쇼가 말하는 현대예술처럼 죽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 인지도 모른다. 지금 영
화평론은 관객들에게 정보를 효율적으로 제공하지도, 소비를 위한 손익계산서를 솔직하
게 작성하지도, 불량한 영화를 향해 설득력 있는 비판을 가하지도 못하고 있다. 앞서 나
열한 여러가지 상황들이 평론의 위상을 모호하게 뒤틀어놓았고 저널리즘 비평은 소란스
런 한국영화의 부흥 속에서 길을 잃었다. 현재 뇌사상태에 빠진 평론의 숨을 끊어놓은
후에야 이 시대에 유효한 새로운 비평의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길
잃은 언어를 안락사시키는 방안을 우리는 지금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려해야하는 상황이다

 

 

 이 글은 2004년에 계간 '영화언어'에 영화 평론가 문일평씨가 쓴 글입니다. 
  한번 읽어볼 만한 글이어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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