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대 공양왕(恭讓王,1389~1392)
공양왕은 제20대 왕 신종의 6대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瑤)이다. 처음에 정창부원군으로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추대 되어 고려 마지막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공양왕이 즉위 후, 이성계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
공양왕의 휘는 요이니 정원부군 균의 아들이다 신종의 칠세손으로 모는 국대비 왕씨이며 충목왕 원년 이월오일에 탄생하였다. 성품이 자인하고 유나하여 우유부단하였다. 처음 정창부원군으로 봉하였다. 신창 원년 십일월정축에 대호군 김저가 우와 더불어 난을 일으키기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저를 옥에 내리고 무인에 우를 강릉으로 옮겼다.아태조(이성계)가 판삼사사 심덕부 찬성사 지용기 정몽주 정당문학 설장수 평리 성석린 지문하부사 조준 판자혜부사 박위 밀직부사 정도전 과 함께 흥국사에 모여 크게 병위를 벌리고 의논하기를 「우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닌지라 가히 종사를 받들수 없으며 또한 천자의 명이 있으니 마땅히 가를 폐하고 진을 세울것이다. 정창군 요는 신왕(신종)의 칠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세울 것이다」하니 조준은 말하기를 「정창군은 부귀로 생장하여 다만 치재할 줄만 알고 치국할 줄은 모르니 가히 세움직하지 못하다」하였고 성석린은 말하기를 「임금을 세움에는 마땅히 어진이를 가릴 것이오 반드시 그 족속의 친소를 논할 것이 아니라」고 하므로 이에 종친 수명의 이름을 써서 덕부 석준을 보내어 계명전에 나아가 태조에게 고하고 135)탐주하니 과연 정창군의 이름을 얻었다 다음날 새벽 아태조가 덕부 등 팔인과 함께 공민왕의 정비궁에 나아가 병장으로 호위하매 종친 백관이 모두 이에 따랐다. 비의 교지를 받들어 창을 강화로 추방하고 왕을 영립하니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사퇴하거늘 비가 손수 인(옥새)을 내어주었다. 그 교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상승하여 써 종묘와 사직을 받들어 왔는데 불행히 공민왕이 훙서하고 후사가 없으며 당시의 종척과 군신들이 의논하여 종실의 어진이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이에 권신 이인임이 오래 국병을 잡음으로 록유하여 불의를 많이 행하고 은을 팔아 자기의 죄를 면할 것을 도모하여 역적 신돈의 아들 우를 공민왕의 후사라 #모명하고 소생모를 죽여 그 입을 막고는 질녀를 시집보내어 그 총을 굳게하니 신인이 분함을 쌓은지 십오년이었다. 우는 이에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국인의 원망을 사고 군사를 일으켜 중국(하)를 어지럽게 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었으니 이는 정히 왕씨의 사를 회복할 때이거늘 대장 조민수가 인임의 친척으로 상상이 되어 인임의 사모를 이어 우의 아들 창을 세우니 악으로써 악을 이음이나 권병를 잡고 있으므로 형세가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홍무 이십이년 구월간에 문하평리 윤승순 등이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와 성지를 흠봉하니 약절컨데 고려 군위에 있어 왕씨(공민왕)가 시해되고 후사가 끊어진 뒤로부터 비록 왕씨를 가자하여 이성으로서 왕을 삼았으나 삼한을 세수하는 양모는 아니다 과연 현지한 배신이 그 위에 있어 군신의 분이 정해지면 비록 수십세를 조회하지 않아도 또한 무엇을 근심하랴 하였으므로 이를 흠봉하여 이에 국론에 물었더니 종척과 대소 신료가 모두 말하기를 종친 정창부원군 요는 곧 태조 정파인 신왕의 칠대손으로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공민왕의 후사로 삼을 것이라 하므로 요를 명하여 왕위에 나아가 써 종묘와 사직을 받들게하고 그 우와 창은 폐하여 서인을 삼노라 아아 136)자홍을 폐하고 대왕이 한가의 사를 회복하여 써 사백백년 태평의 업을 터닦았으니 지금으로써 옛을 보매 그 이치는 한가지로다. 아아 너희들 유중은 여의 지회를 체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사기 원년 십일월 기묘에 왕이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우 창을 강하아여 서인으로 삼고 이림 및 자 귀생 녀서 류염 최렴 외손녀 로구산 질 리근을 원지에 유배하고 정양군 우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장단에 진하여 비상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왕이 우구하여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여의 평생에 의식 사령이 다 족하거늘 이제 짐(부하)이 이와같이 무거우니 할 바를 알지 못하겠노라」하며 드디어 체읍하였다. 경진에 정전에 거둥하여 조가를 받고 청정하였다. 모 왕씨를 높여 복령궁주로 삼고 비 노씨를 봉하여 순비를 삼고 장자 정성군 석으로 세자를 삼고 경내를 사(유)하였다. 이색으로 판문하부사를 변안열로 영삼사사를 심덕부로 문하시중을 삼고 아태조(이성계)로 수문하시랑을 왕안덕으로 판삼사사를 정몽주 지용기를 문하찬성사로 조인벽을 판의덕부사로 설장수를 정당문학으로 성석린으로 문하평리를 조준으로 지문하부사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위로 판자혜부사로 정도전으로 삼사우사로 이고로 사헌집의로 송문중으로 상호군 겸 사헌집의를 삼았는데 문중은 일찍 나주목사가되어 청렴하지 못한 이름이 있었으므로 137)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임오에 제가 박박태자 및 아들 육십노와 화자(환자) 복니를 소환하였다 처음 제가 운남을 토벌할 때 박박태자 및 아들 육십노를 제주에 유배하더니 이에 이르러 소환한 것이다. 갑신에 왕이 친히 태묘에 관제하고 즉위하고 고하였으며 예가 필하매 백관이 전을 올려 진하하였으나 환궁하여서도 오히려 추양하며 남면하여 앉지 않거늘 이색이 나와 말하기를 「상이 이미 즉위를 고하고 이제 또 남면하지 않는다면 신민의 바람에 답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청종하여 아태조(이성계) 및 심덕부에게 이르기를 「여가 본래 덕이 없으므로 재삼 사양하여도 얻지 못하고 대위(왕위)에 욕거(맥)케 되었으니 경은 잘도모하라」하며 잠연히 눈물 흘렸다. 병술에 공신을 향연하고 아태조(이성계)와 심덕부에게 마 일 필씩을 사하였다. 김저가 옥중에서 폭사하매 시체를 저자(시)에서 참하였다 때에 저의 공사가 많이 순군관에 관연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죽음을 의심하였다.이에 문하평리 정지 이거인과 전판후덕부사 류혜손 이을진 과 전밀직 이유인 류번 조호 안주등 이십칠명을 류배하니 저의 모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정해에 왜가 구례 등처에 침구하거늘 김종연으로 전라도원수를 삼았다. 기축에 조방흥을 참하였다. 경인에 순안군 방 동지밀직사사 조반을 경사( 명경)에 보내어 즉위를 고 하였는데 주하기를 「고려국 정창부원군 신 왕요는 삼가 아뢰나이다 신은 본국 시조 왕건의 정파인 신왕(신종) 탁의 칠대손으로 전항의 명분을 세습하였으나 별로 재덕이 없으므로 경구하며 자처하여 천년(천수)을 다할 것을 기하였더니 홍무 이십이년 십일월 십오일에 대소의 종척과 신료 한량 기로 등이 성지의 사의를 흠봉하고 함께 중국에서 국사를 의논하되 「공민왕이 아들없이 훙서 한 뒤에 권신 이인임 등이 세운 바 신우 부자는 실로 이성이므로 왕씨의 사에 주가 없을 수 없다」하여 이에 신으로 종족의 족속에서 가장 가깝고 또 장이라하여 품계하여 공민왕비 안씨의 명을 받들고 신으로 하여금 국사를 권지하여 써 제사를 받들게하니 신은 진퇴가 량난하여 #조신할 곳이 없나이다. 그윽히 보건데 홍무 칠년에 이인임 등이 마음대로 이성을 세운뒤로 정교가 #리방하고 습속이 부박하였사오니 신은 이들로 하여금 점차로 성화에 탁마되어 진실하고 순박함을 회복케 하기를 원하오니 성자하시와 신이 친조하여 면주함을 허하여 일국의 백성을 안정토록하여 주시기를 흠망하나이다」하고 아울러 계본을 황태자에게 올리고 또 도평의사사는 예부에 구신하여 주계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이날이 동지이므로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궐(제궐)을 향하여 요배하였다. 신묘에 진을서로 전라도절제사를 삼고 왕승귀를 양광도절제사를 삼았다. 십이월 을미에 삭에 이색 및 아들 종학의 직을 파하고 조민수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무술에 권근을 영해에 옮겼다(사). 기해에 간관이 우 창을 주하기를 청하고 또 이색 이인임 등의 죄를 논하여 인임의 집을 138)저하고 색의 부자 및 이숭인 하륜 환관 리분을 류배하고 조민수를 삼척에 권근을 김해에 옮기고 문달한의 직첩을 거두었다. 임인에 우의 모 의릉을 철하였다. 무신에 사재부령 윤회종이 상소하여 우 창을 죽이기를 청하거늘 왕이 여러 재상에게 력간하니 모두 묵연하였는데 아태조(이성계) 가 홀로 말하기를「이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강릉에 안치하고 조정(명)에 알렸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신등이 있으매 우가 설사 난을 일으키고자 한들 무슨 근심이 있겠나이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우는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마땅히 그 139)자급할 것이라」하고 지신사 이행에게 명하여 교지를 내리고 정당문학 서균형을 강릉에 보내어 우를 베고 예문관 대제학 류구를 강화에 보내어 창을 베게하였다. 경술에 종실이 왕을 향연하였다. 임자에 교하기를 「공손히 생각건대 아태조가 개국한 이래로 자손이 상승하여 잘 종사를 받들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불행하게 아들이 없이 훙서 하니 적신 이인임이 정권을 전천코자하여 유얼을 빈립하고 거짓으로 신우를 왕씨라 칭하여 세워서 왕으로 삼으니 우는 이에 완흉 광패하여 장차 요양을 릉범코자 하거늘 시중 이(태조구휘)등이 사직의 대계로서 군중을 달래어 회군하고 왕씨를 세우고자 의논할새 주장 조민수가 인임의 당으로써 다시 권병을 마음대로하여 그 간모를 이어(계) 이에 중의를 막고 우의 아들 창을 세우니 왕씨가 절사하여 신인이 함께 분노하기를 십유육년인지라 홍무 이십이년 십일월 오일에 시중 이(태조구휘)가 분충 창의하여 이에 심덕부 정몽주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조준 정도전 등으로 더불어 위로는 천자의 명령을 받들고 종친 기로 문무신료와 모의하고 품계하여 공민왕 왕비의 명을 받들어 우 창 부자를 폐하고 여로써 왕씨의 최친이라하여 하여금 조종의 계통을 계승케하니 여가 비록 과덕하여 부하에 견딜수 없으나 이(태조구휘)등은 명분을 바르게하여 다시 일으켜 왕실을 재조하니 그 공은 실로 태조개국공신의 아래에 있음이 아니로다 140) 대려를 난망하노니 벽상에 도형하고 부 모 처에게는 작을 봉하고 자손에게는 음직케 할것이며 영세토록 유면할 것이니 주자는 시행하라」고 하였다. 계축에 서해도관찰사 김남득이 왜부를 바쳤다. 을묘에 제 우로 령삼사 종부사사를 삼고 조준으로 문하평리 판상서사사를 삼고 성석린으로 문하평리 겸사헌부대사헌을 삼고 윤소종 이첨으로 좌우상시를 삼고 남재로 판전교 겸집의를 삼고 정희로 장령을 삼고 장자숭으로 좌헌납을 삼고 김이음으로 지평을 삼고 위조의 관직을 모두 개하하고 또 관제를 고쳤다.경신에 시중 심덕부와 아태조(이성계)가 왕을 향연하였다. 계해에 왕이 효사관에 나아가 우 창을 벤 것으로써 태조에게 고하였는데 축문에 이르기를 「141)조선의 말엽에 나라가 142)치수처럼 나뉘어 칠십팔이 되오매 약자는 토하고 강자는 탄하여 써 143)웅국으로 병합되니 전쟁이 쉬지않았나이다 성조(태조)께서 용흥하사 천과가 향하는 곳에 군도가 삭평되니 김전(신라말왕 즉경순왕)가 빈복하고 견훤(후백제왕)이 래정하며 신검(견훤의 자)이 목을 바치니(수수) 통일(후삼국의)이 이룩되어 자손이 상전하기 사백오십칠년으로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 없이 돌아가매 적신 이인임이 국정을 천단 하여 이에 신돈의 비첩 반약의 소생인 우를 세워 써 임금으로 삼고 족제 이림의 딸을 시집보내어 아들을 낳아 창이라 하니 부자가 상계하여 국조가 중절하였나이다 근자에 창이 경사(명경)에 조회코자 청하니 예부(명의 예부)의 자문에 이르기를 성지를 흠봉하매 고려의 군위는 절사하였으니 비록 왕씨를 가자하였으나 이성으로써 (임금을) 삼음은 삼한 세수의 량모가 아니로다. 과연 어질고 지혜있는 배신이 있어 군신의 분이 정해지며 비록 수십년동안 조회하지않아도 또한 무엇을 걱정하며 해마다 래조한들 또한 무엇이 싫으랴 동자(창을 말함)는 반드시 경사에 올것이 없노라고 하였는데 자문이 이르매 이림이 상상으로서 이것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나이다. 십일월 기묘에 시중 이(태조구휘)가 분충창의하여 왕씨를 흥복할제 덕부 몽주 용기 장수 석린 위 준 도전 팔장상이 그 모책을 찬정하고 종친 백료로 더불어 공민왕 정비의 궁에 나아가 함께 비의 교를 받들고 천자의 명을 선포하여 우의 부자를 폐하고 신이 태조의 후예 신왕(신종)의 칠대손이므로 하여금 정통을 승습케하여 월육일 갑신에 백관을 거느리고 반정을 조묘에 고하였나이다 우창을 그대로 두고 천자의 명을 기다리는데 간신 은충 등이 우 창을 밸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춘추의 법에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벨 수가 있는 것으로서 죽이고 뒤에 아뢴다 하였으니 144)법사(사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며 계속하여 사재부령 회종이 상언하기를 이흉(우창)은 조종의 죄인인지라 왕씨의 신자에게는 불공재천의 수이니 하루도 왕씨의 땅위에 둘 수없나이다고 하므로 신이 그 말에 느껴 그글을 도당에 내렸더니 모두 간신들의 의와 같이 할 것을 청하므로 신은 이에 우를 강릉에서 베고 창을 강도에서 베어 이미 그 죄를 바르게 하였으므로 145)제명히 날(진)을 가려 감히 성조 진전에 고하나이다 처음 우가 이미 섰을 때 재상 속명이 그 진(공민왕의 진자란 뜻)이 아님을 말하니 인임이 이를 추방하였고 돈의 첩 반야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는 곧 나의 소생이라하니 인임이 이를 죽였나이다 김유 최원이 제에게 말하기를 우는 왕씨가 아니라고 하였다가 모두 도륙 당하니 국인이 그 화를 두려워하여 아버지는 아들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여 세월이 이미 오래 되매 아는 자는 점점 적어지고 또 그 인친이 중외에 근거하여 뽑아 없앨 수 없던 것인데 이제 흥복한 것은 실로 우리 조상의 음조하신 공에 의한 것입니다. 아아 이성이 이미 제거되고 종사가 이미 존속하게 되었으니 어기지 않으며 잊지않고 성조의 성헌을 좆음이 이에 신의 진심할 바입니다 우럴어 생각컨데 성조께서는 추성공신울 종시보전하사 146)국사에 열서하여 만세에 147)귀감이 되도록 하소서 한가지라도 좇지않음이 있으면 신은 효손이 아니오니 오직 바라건대 재천하신 령은 신의 정성을 살피시고 신의 뜻을 도와 신으로 하여금 실추함이 없이 홍업을 잘이어 써만세를 열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또 고상공신문에 이르기를 「148)탕이 이윤을 거용하여 우의 구복을 찬승하였고 태갑이 유종의 미를 거둠은 149)이윤의 훈계를 자뢰함이며 (150)이)척이 태무를 도와(상) 상제를 감동격케하였나이다 151)태공이 응양152)하여 천자가 153)종주하매 154)주공으로 더불어 왕실을 협보하니 제에 봉을 줌은 155)맹부에 간직되어 있나이다 그 후손 156)환공이 천하를 157)일광하여 존주하니 158)탕사는 육백년이요 주는 그 력수보다 더하여 국조가 장구함이 후세에 미찰 자 없음은 실로 이윤과 려망(태공)의 보필또한 공을 잊지 않음과 그 자손의 159)상현의 충을 얻음에 유인함이외다 한은 160)삼걸을 자뢰하였는데 장량이 제자의 사가 되었으되 하여금 도를 논하게 하지않고 그 벽곡함을 청허하였으며 소하는 도필리로 이에 상국이 되었으나 또한 옥에 갇혔고 한신은 족멸되고 경포는 반역하여 화살이 제의 몸을 맞혔으되 나라에 그렇다할 사람이 없어 재전에 중절되니 유씨도 거의 진이 될뻔하였나이다 그 상주의 개국공신인 161)아형 162)상부로 후사를 보필케하여 써 지치(리)에 이르게 한것과 비교해 보며 얼마나 서로거리가 먼 것이오니까 성조께서 배(현경) 홍(유) 신(숭겸) 복(지겸) 유(검필) 최(의) 육공의 공에 보답하여 형상를 그려 대어하고 대묘에 배향하여 춘추로 어기지 않았는데 삼십일전하여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훙하니 국조가 중절하였나이다 공민의 장일에 무지개가 해를 거듭 둘렀고 우가 처음163)증제하는 저녁에 소리개(오)가 대실(태묘의 중앙의 실)에서 울고 천지가 진동하였으며 이듬해 삼월 의릉(충숙왕)의 기진에 대풍이 비와 함께 불고 벼락과 번개에 또한 우박이 내렸고 우가 습작할때에 미쳐 대풍이 조묘(종묘)로부터 일어 북쪽으로 향(지)하매 대실의 취두가 부러지고 묘문이 넘어지고 조묘 침원의 송수가 태반이나 뽑히고 쥐가 대실의 주욕을 먹었으며 이듬해 어름이 불탔고 거년 육월에 창이 설 때 마가 전국보를 차니 갑이 부서지고 열쇠가 부러져 보가 튀어나와 땅에 구르니 조종이 이성을 노하사 그 제사를 흠향치 않고 위를 동하여 이를 끊임이니 비록 면전에서 명하고 귀에 대어 말함인들 어찌 이에서 더하오리까 인임이 이미 우를 세우고 우의 모 반야을 죽여 써 그입을 막을새 사평문이 허물어졌고 고골을 묻으며 말하기를 이가 공민왕의 궁인으로 실은 우의 모가 된다고 하니 구악이 불탐으로 이를 바꾸니 또 불탔나이다 재상 (김)속명을 쫓고 김유 최원을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를 잃어 말이 신씨에 걸치면 깜짝 놀라 실색하며 족형으로써 서로 경계하였다나이다 우 창의 친인과 심복 조아가 중외에 근거하여 제거하기 어려움이 산악를 뽑기와 같더니 시중 이(태조구휘)가 지충으로 분발하여 흥복을 수창하니 심덕부 정몽주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이 이에 따라 찬동하여 드기어 이흉(우 창)을 제거하니 아 조종 삼십일대 배천의 제사가 다시 계속하게 되었나이다 옛날에 164)문왕은 사인이 아니었더라면 주를 세울수 없었을 것이고 165)무왕은 구인이 있어 이에 대훈를 모으게 되었나이다 이제 이 흥복은 실로 성조의 음우에 의한 것이오나 또한 생각하니 이(태조구휘) 등의 충성은 일월을 뚫고 공정은 삼한에 현저하여 크게 순하니 하늘이 위에서 도우고 크게 신하니 사람이 밑에서 복종하였던 까닭에 능히 인임과 우 창의 166)양육(난익)한 사람으로 하여금 번연히 효순케하여 저자(시)는 거리(사)를 바꾸지 않고 사람들은 놀란 빛(변색)이 없이 167)아침이 다하기 전에 왕씨에게로 돌아왔나이다 이에 (성)조의 진에 나아가 공을 고하고 상을 행하며 읍을 사하는 바 이(태조구휘)에게는 군을 봉하고 세습케하고 덕부 이하는 충의군을 봉하여 모두 승습을 허하여 대대로 그 록을 받게 하고 형상을 전각에 그리며 공을 비석에 새겨 168)대려로 맹세하고 조묘에 간직하겠아오니 원컨데 성조는 후사왕과 169)구인의 후손을 도와 동심동덕으로 경천외민하여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생령을 보전하여 함께 천록을 누려 써 영세토록 하소서 구인의 자손이 비록 대역죄를 범하더라도 170)말감토록 의의하고 다시 그 후사를 구하여 작을 이어 #봉사케하여 대대로 끊어짐이 없도록하여 써 구인의 공에 보답할 것이외다 후사왕이 중흥의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구인의 후손으로 하여금 혹 작 읍을 잃게 하면 성조는 이를 죽여 나라를 향유함이 없도록 하시옵고 구인의 후손이 그 조부의 충성을 잊고 간사함을 품어 교사하여 가문을 흉케하고 국가를 해케하면 성조는 이를 죽이시고 그 작 읍은 다시 다른 자손에게 주어 구인으로 하여금 영세토록 171)혈식케 하소서 신이 구인을 사사로이 함이 아니오 실로 구인은 만사의 계를 내어 몸을 사직에 맡겨 왕씨를 흥복하여 우리 조사로 하여금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도록 하였나이다 그 종친 기로 문무신료는 중흥 반정할 즈음에 거짓을 버리고 참을 향하여 나를 어려움에서 막아 주었느니 신은 심히 이를 가상히 여기오니 원컨데 성조는 길이 그 후손을 보우하사 하여금 우리 왕실의 번병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고 구공신록권을 사하니 아태조(이성계)로 분충정난 광복섭리좌명공신을 삼아 화령군개국충의백으로 봉작하고 식읍 일천호에 식실봉 삼백호 전 이백결 노비 이십구를 사하였으며 심덕부는 청성군충의백으로 봉작하여 전 일백오십결과 노비 십오구를 사하였으며 정몽주 #장수 등 칠인은 모두 충의군으로 봉작하여 각기 전 일백결 노비 십구를 사하였다 그 록권은 개국공신 배현경의 예에 의하여 중흥공신이라 칭하고 부모 첩을 봉작하며 자손을 음직하되 직자는 삼등을 초수하고 직자가 없으면 생질 녀서에게 이등을 초수하며 자손의 정안에는 모두 중흥공신 모의 기세손을 칭하고 유사를 영세에 미치도록하고 구사 칠명과 진배파령 십명에게는 초입사를 허한다고 하였다. 갑자에 구공신이 전을 올려 사은하였다.
경오 이년 춘 정월 을축 삭에 왕이 군신을 거느리고 멀리 제에게 하정하고 인하여 정전에 거둥하여 중외의 하정을 받고 군신을 향연하였다. 신미에 대묘에 제사(유사)하였다. 계유에 예관이 사대의 고비를 추봉하고 원을 세워 사관둘 것을 청하오매 드디어 적경원을 창설하였다. 을해에 왕이 정비를 향연하였다. 병자에 비로소 경연을 열고 심덕부 및 아태조(이성계)로 령경연사를 삼고 정몽주 정도전으로 지경연사를 삼고 김사형 박의중으로 동지경연사를 삼고 이행 성석용 민개 이사위로 참찬관을 삼고 윤소종 이담으로 강독관을 삼고 우홍득 한상경 신원필로 검토관을 삼아 사번으로 나누어 진강케 하였다. 아태조(이성계)로 팔도군마를 거느리게 하고 군영을 설치하여 번을 나누어 교대로 숙위시키고 군자로써 름급하였다. 기묘에 모 복녕궁주의 부를 세워 숭녕부라고 하였다. 헌사가 청하기를 「대간으로 하여금 시정의 득실을 면계하도록 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경진에 변안열을 베었다. 임오에 문하평리 윤호 류만수 첨서밀직 우홍수 동지밀직 유광우 상의문하부사 최윤지 밀직부사 류룡생 판자혜부사 정희계 자혜부윤 리(공민왕구휘)(방과) 밀직부사 김인찬 지신사 이행 밀직사 강회백 지밀직 윤사덕등에게 공신호를 사하니 행은 고사하였다.급전도감이 처음으로 명품의 전적을 반급하였다. 갑신에 판전농사사 왕강으로 경상도수군도체찰사 겸방어영전염철사를 삼았다.
을유에 연복사 승 법예가 왕에게 달래어 말하기를 「연복사에 오층 탑전 및 삼지 구정이 있는데 퇴폐한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지금 다시 탑전을 세우고 지 정을 파면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할 것입니다」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상호군 지인봉과 대호군 권완으로 조성도감의 별감을 삼아 이를 영건토록 하였다.정해에 우사의 이서성균제주 김자수 대호군 우성범 사재부령 윤회종 좌헌납 장자숭 전농사승 조용 사설서령 윤사영 고공좌랑 강회계로 세자시학을 세웠다.양광 전라 경상 해도 및 연해처에 모두 만호를 두었다. 경인에 조민수를 원지에 옮기고 권근을 장 일백하여 흥해로 옮겨 류배하였다. 임진에 시중 심덕부를 경기 평양도병마도통제사를 삼았다. 이 달에 왕이 인왕불을 별전에 모시고(치) 매일 조석으로 예배하였으며 무릇 재이가 있으면 곧 기양를 행하였다. 이월 을미 삭에 명하여 이색의 직을 깍고 조민수 권근을 변지로 옮겼다. 기해에 왕의 탄생일이므로 죄인을 놓아주었는데 오직 이림 이색 조민수 이을진 권근 이숭인등만은 사하지 않았다. 경자에 세자가 서연을 열고 문하평리 조준 상의문하 서균형 상의밀직제학 이지 밀직사 강회백을 사전를 삼았다. 밀직부사 왕가인을 요양으로 돌려보냈다 가인은 해양부천호 만승의 아들인 바 도사가 이문하여 기취(일으켜 데려가는것)하므로 돌려보낸 것이다. 임인에 대간이 한양부윤 김백흥 및 군기소윤 원상을 순군에서 국문하였다. 을사에 대간의 면계하는 법을 파하였다. 위조(우왕 창왕의 조)가 가증한 선왕 선비의 시를 깍았다. 계축에 김백흥이 옥중에서 죽으니 왕이 옥관이 엄형으로 치사한 것인가 의심하여 지경연사 정몽주에게 이르기를「무릇 죄인을 국문함에는 마땅히 서서히 그 정을 살필것이어늘 이제 순군이 이 법률에 의하지않고 문득 참독을 가하여 무고한 사람이 죽는지라 내가 심히 민망히 여기노라 하물며 재상은 비록 중죄가 있다 하더라도 죽음(사)을 내리는 것이 사가하거늘 한 번 죄망에 걸려들면 함부로 고략을 가하여 혹은 옥중에서 죽고 혹은 저자(시)에서 참하니 내가 일찍기 심히 이를 싫어하였던바 오늘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을 소냐」하고 드디어 원상을 석방하였다. 익비와 신원필에게 전지를 사하였다. 임술에 유구로 양광도도관찰사를 삼고 조운흘로 계림윤을 삼고 최단으로 한양윤을 삼고 황보림으로 평양윤을 삼았다. 계해에 교하기를「자고로 위국의 길은 문교와 무비를 한쪽도 가히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근년 이래로 법제가 퇴폐(릉이)하여지고 인재가 나지 않아 도적이 흥행하니 내가 써 두려워하노라 대저 벽옹에 임하여 로숙을 배하고 농사의 틈(극)에 무를 강함은 옛 제도인지라 내가 문묘를 배알하여 써 유학을 장려하고 전함을 순시하여 군용을 관찰코자 하노니 유사는 계문하고 시행토록하라」고 하였다. 삼월 갑자 삭에 사헌부가 상소하기를「위조의 빈오한 무리가 토전과 장획으로써 권세(권문세가)에 헌납하여 악성이 상국에 까지 들리게 하였으니 징벌하지 않을 수없나이다 청컨데 그 직을 깍고 급전을 허하지 말아 써 후래를 징계하소서」하매 답하지 않았다. 경오에 홍영통으로 령삼사사를 삼고 우현보로 판삼사사를 삼고 왕안덕으로 강원군을 삼고 우인렬로 계림윤을 삼고 이근 정홍으로 좌 우상시를 삼고 이황으로 문하사인을 삼고 김약항을 기복시켜 사헌장령을 삼고 전빈으로 좌정언을 삼았다. 병자에 장차 장단에 행차하려하더니 간관 이서 등이 간하여 이를 중지케하였다. 기묘에 양릉에 배알하고 드디어 예성강에 이르러 전함의 화전 연습을 관람하였으며 경진에 창 현 현 삼릉을 배알하고 환궁하였다. 신사에 전판사 김귀의 처가 중과통하였으므로 함께 저자(시)에 오일간 세우고 장형하였다. 갑신에 예조판서 윤소종을 금주(#산)에 추방하였다. 경인에 아태조(이성계)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하 사월 갑신 삭에 중관을 아태조집에 보내 간병하고 억지로 일어나게하고 교서를 구공신에게 사하여 포미하고 구마 일필 백금 오십량 백견 각 오단을 사하고 아태조와 심덕부에게는 김대 일 요를 가사하고 인하여 내전에서 위연하였는데 아태조에게 사교하기를 「아아 비상한 변을 제거하는 자는 반드시 명세의 재를 기다리는 것이요 만세의 공을 세우는 자는 반드시 무궁한 보를 누리는 것이다 옛날 아태사가 아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일하고 태실(종묘)에 배#된지 우금 오백년에 가깝도다 왕자에 이인임이 음으로 현릉(공민왕)을 영전(노국공주영전)의 역으로 유도하여 상상이 되고 원망을 상에게 돌리더니 마침내 갑인의 변(공민왕의 ##)에 이르게 하였고 후사가 없으매 인임은 이에(171)려)불위가 진을 도적질하는 계책을 써서 현릉조의 요승 신돈이 낳은 아들 우를 사칭하되 현릉 궁인의 소출이라하여 세우니 현릉의 모후가 불가하다 하고 재상 이수산이 종친 세우기를 청하였으나 인임이 좆지 않으니 국인이 실망하고 황무가 사방을 가려 일광이 보이지 않았으며 우가 주상으로 현릉을 장사지낼 때 무지개가 태양을 둘렀고 그가 #(제)를 주제할 때 소리개(오)가 태실(종묘중앙의 실)에서 울고 뢰성이 요란하고 땅이 진동하였으며 그가 현릉의 고(부) 의릉(충숙왕)의 기일에 제할 때 대풍이 불고 비 벽력 번개와 또 우박이 내렸으며 그가 습작할 때 바람이 조묘 침원의 송백을 뽑고 대실의 경두가 부러지고 묘문이 넘어지고 어름이 불탔으니 이는 조종의 령이 위를 동하여 써 우를 끊음이로다 우의 모 반야를 죽여 써 그 입을 막으니 사평의 신문이 스스로 허물어졌고 고골을 장하여 우의 모라 일컬으니 구악이 하루에 두 번 불탓으니 이는 하늘이 만세에 우가 반야의 아들임을 보임이로다 우가 선지 이년에 그모의 명씨가 정해지지 못하매 재상 김속명이 말하기를 천하에 그 아비를 분변치 못하는 자는 혹 있어도 그어미를 분면치못한 자는 나는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다가 거의 피륙되려 하더니 현릉의 모후가 힘써 구하여 죽음을 면하였고 김유가 제에게 우는 왕씨가 아니라고 말하고 돌아왔다가 죽음을 당하니 국인 한심하여 입을 다물었다 (결#)우의 처는 인임의 질녀로 창을 낳으니 이에 왕씨가 흥복할 희망은 끊겼도다 인임이 국권을 전천하여 생령에 독통하기 십오년이요 우또한 광패하여 요동을 치기를 꾀하여 삼한의 백만생령을 들어 미란시키려 하니 경은 조민수의 부(우군도통사)로서 가다가 군이 압록강을 지날 때 경은 사직 존망의 계로 제장을 달래어 회군하니 이는 경이 이미 172)해골이 된 우리 백성에게 살을 붙여줌이라 종사가 구허되지 않음은 오직 경을 자증하도다 경은 용이 삼군에 으뜸이고 위는 양부에 높았으며 공명은 세상을 덮되 자랑하지 않고 즐겨 강목연의를 읽어 유후(장량) 강후(주발) 무후(제갈량) 양공(방현령)의 충에 감동하였도다 그러므로 회군할 무렵에 흥복을 의논하매 민수도 또한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미 돌아와서는 그족되는 인임과 이림에게 당여하여 경의 의논을 막고 창을 세워 스스로 #제(재상)이되니 왕씨의 흥복은 한 번 큰 기회를 잃었도다 경이 은인하여 직에 나아가 공의로써 민수를 개유하고 이에 대간의 선을 극히 하여 써 기강을 떨치고자 하매 이에 헌사가 민수를 빈람하고 법을 굽힌것으로써 탄핵항 쳐 물리쳤도다 경은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고 어진를 구하기를 목마르듯이 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하여 무릇 백성의 털끝만한 이익이라도 반드시 일으키고자 하고 털끝만한 손해도 반드시 제거하려 하며 언로를 열어 하정에 달하고 173)일민을 거용하여 공도를 펴니 예전의 174)포저 175)분경의 풍조와 관을 팔고 옥을 파는 풍습이 일조에 변하여 (초)야에는 남아있는 어진이가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행위)가 없게 되었으며 사신을 보내어 부월을 주어 지방관을 관찰하여 출척케하니 번진이 감히 도적(구)을 기르지 못하고 목수가 감히 백성을 해롭히지 못하며 군소의 사설을 물리치고 제도의 사전을 혁파하여 백성을 탕화속에서 건져내어 부수의 성에 오르게 하며 176)규전 채지(채읍)의 제도를 써서 경전(기내)의 사자에게 전을 급하여 군자를 넉넉하게 하고 왕실의 수위를 엄하게 하였도다. 작을 주되 사사로이 하지 않고 벌을 주되 노하여서가 아니니 경의 성심은 광명정대함이니 청천의 백일과 같아서 우부 우부도 다같이 보는 바로서 그 영위하는 바가 왕씨를 흥복하는 터전이 아님이 없도다 기사년 겨울에 창이 조회하기를 청하여 보낸 바 윤승순이 예부의 흠봉한 성지와 자문을 싸가지고 왔는데 이르기를 「고려 군위의 후사가 끊겨 이성으로 써 왕씨를 가장(가)하니 삼한을 세수하는 량모가 아니로다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이 위에 있어 군신의 분한을 정한다면 비록 수십년을 조회하지 않은들 또한 무엇을 걱정할 것이며 해마다 조회한들 무엇을 싫어하랴 동자는 반드시 경사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는 성천자께서 현릉(공민왕)이 사해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무렵에 솔선하여 신을 칭하여 천하로 하여금 천명의 돌아감이 있음을 알게하여 크게 좌운의 공이 있음을 생각하신 까닭으로 그 후사 끊어짐을 민망히 여기시고 왕씨의 신자에게 부흥을 바람이 간절함이로다 창의 외조 이림이 가재로서 성지를 감추고(비) 발표하지 아니하매 흉모가 불측하여 신씨의 변이 조석간에 있을 것으로써 왕씨는 이미 정중의 고기(어)가되어 존망이 호흡간에 있었는데 경이 만사를 불고하고 몸소 대의를 잡아 아 왕씨를 위하여 만세의 책을 정하매 덕부 몽주 용기 장수 석린 준 위 도전의 팔장상이 서로 좆아 이를 협찬하였도다 십일월십오일에 천자의 지를 현릉의 정비의 좌전에서 선포하고 여를 종저에서 맞이하여 현릉의 뒤를 잇게하니 한사람도 형벌치아니하고 하루아침도 마치기 전에(불숭조) 십유육년간 177)남면한 신씨를 제거하니 그 인친 지당으로 삼한에 근거 반결한 것들이 둘러서서 보고는 담이 찢어지고 얼굴이 바뀌어 향순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니 사람은 안색을 변함이 없고 날은 양춘과 같았도다 위로는 삼십일대 상승한 차서를 잇고 아래로는 천만억세의 무강한 휴경을 열게 되었으니 경의 흥복의 공은 178)강후 179)오왕의 견줄바 아니로다 경의 대대로 충의를 쌓아 왕실에 마음을 두니 덕이 두텁고 빛이 흐림이 경의 몸으로부터 발하였도다 문을 경으로 하고 무를 위로 함은 왕좌의 재요 나라만을 위하여 집을 잊음은 사직의 신이로다 천지 조종의 독생하는 바요 삼한 안위의 주의하는 바이니라 현릉의 지우를 만나 180)홍적을 섬멸하여 양경(개경 서경)을 수복하였고 #승(신돈)을 쫒아내어 왕실을 안정시켰으며 181)납씨(납합출)를 격주시켜 위를 사막에 떨치고 왜적을 패하게 하여 서해를 보전하고 인월(전라남도운봉인역)을 쳐 182)부상(일본)을 섭복케 하였도다 경은 현릉의 지우에 감격하고 종묘의 절사함을 슬피여겨 맹세코 183)해를 우연에 취하려 하니(취일어#연) 지성은 천지에 관징하고 지충은 조종에 통달하며 지공 지정함은 삼한의 마음을 감복함이 있고 지인 지은은 만성의 기쁨에 맺음이 있으니 하늘은 대순을 도우고 사람은 대신을 도우는 터이므로 흥복함이 이같이 쉽게 된것이니 경은 이에서 진실로 현릉의 지우에 보답한 것이로다 옛날 주공이 훈노하매 동(노국이 산동에 있으므로 동이라함)에 후(제후)케하였으니 여는 경의 충성을 가상하여 184)모를 나누어 세봉하고 형상을 그려 공을 새기며(도형명공) 자손을 무궁토록 유사할 것이니 여는 원자를 거느리고 비궁(묘)에 고할 것이다 아아 경의 우리 조민을 살리고 우리 종사를 잇게하여 우리 삼한을 재조한 공을 부전(넉넉하지 못한)의 포상으로써 어찌 만의 일 이나마 갚으리오 경은 중흥의 원신이 되어 이름을 배태사(배현경)에 짝하고 임무는 185)상의 아형보다 무거우니 경을 세우고 기를 베풀어(입경진기) 만세의 정표를 삼고 한편 준언한 사람을 구하여 우리 조정을 무겁게 하고 여의 량덕을 도울 것이며 우리 사직을 보전하여 하늘로 더불어 극함이 없도록하여 만년토록 함께 186)증상을 누리게 하면 여의 양덕도 빛이 있을 것이며 경의 자손도 경의 충량을 본받아 영세토록 잊지않고 우리 후사왕의 187)고굉이 되어 나라와 더불어 다 휴경케 될것이니 진실로 아름답지 않으랴」고 하였다 무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색을 함창에 정지를 횡천에 이림을 철원에 이귀생을 고성에 옮기고 우인열을 청풍에 류배하고 이을진 이경도를 장형하였다. 임인에 회군한 제신의 공을 록하고 하교하기를 「위왕 신우가 불도를 자행하다가 무진년에 이에 최영으로 더불어 요양을 범하고자하여 장차 국가로 하여금 죄를 천조에 얻게하여 사직의 존망이 아차할지경에(간불용발) 수문하시중(태조)이(태조구휘)가 전시중 조민수로 더불어 먼저 대의를 창도하여 제장을 달래어 책을 정하고 회군하여 사직을 안정시키니 공로가 중대하여 188)대려토록 잊기 어렵도다 그 동심협력자로 문하시중 심덕부 전판삼사사 왕안덕 문하찬성사 지용기 평리 배극렴 윤호 전평리 정지 평리상의 류만수 지문하부사 박위 상의지문하부사 최윤지 평양윤 황보림 전밀직사사 이무 이빈 우대언 조인옥 응양군상호군 남은 봉복군 승 신조 판자혜부사 경보 전황주목사 조희고 전원주등처병마절제사 경의 판의덕부사 이화 판자혜부사 최단 광주등처병마절제사 최운해 지밀직사사 이두란 륙려 개성윤 이승원 지밀직사사 윤사덕 경상도도절제사 구성로 동지밀직사사 박영충 화령윤 정요 동지밀직사사 황희석 유광우 밀직부사 김인찬 장사길 전충주등처병마절제사 최공철 전강릉등처병마절제사 왕빈 전계림윤 박가실 전밀직부사 김천장 진주 등처병마절제사 정자의 전개성윤 이백 이조판서 조온 전의주목사 정송 전판서 이덕림 전의주만호 백영우 천호 장철등 사십오명에게 공신을 사하나니 유사는 계문하여 시행할지어다 고령삼사사 변안렬 삼사좌사 조인벽 완산군 이원계 지신사 박총 판자혜부사 안경 진주등처병마절제사 김상 한양윤 김백흥등은 비록 이미 몸은 죽었으나 공은 가히 잊을수 없으며 예조판서 윤소종 판전교사사 남재 등은 회군할 즈음에 사직의 대계로써 고례를 인원하여 계책을 찬성하였으니 또한 가상한 일이로다 포상의 전을 유사는 일일이 거행하라」고 하였다 계묘에 선왕 선비의 존시를 가상 하였다 병오에 모 복녕궁주 왕씨를 높여 자예정명익성사제혜덕삼한국대비로 삼고 전을 정명이라 하였다. 경술에 밀직부사 류원정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노왕의 상을 진위하였다 경신에 리을진 이경도를 원지에 류배하고 왕안덕을 풍주에 우홍수를 인주에 원상을 광주에 류배하였다. 임술에 덕녕공주와 노국대장공주를 대묘에 부제하였다. 윤월 계축 삭에 양광도도절제사 왕승귀가 왜첩을 바쳤다. 갑자에 지신사 이행과 우대언 조인옥을 파(면)하였다 병인에 구공신이 상서하여 사직하였다. 경오에 구공신에게 일을 보도록 명하였다. 대간이 그 간언이 통하지 않으므로 사직하였다. 신미에 우사의 이서를 좌천하여 광주목사를 삼고 겸집의 남재로 철원부사를 삼고 집의 전백영으로 수원부사를 삼고 장령 권담으로 남원부사를 삼고 김약항으로 지곡주군사를 삼고 기거사인 서언으로 지순창군사를 삼고 지평 송우로 지성주군사를 삼고 경습으로 지수안군사를 삼고 헌납 함전림으로 지춘주군사를 삼고 장자숭으로 평양판관을 삼고 정언 전빈으로 지숙주군사를 삼고 이연보로 좌상시로 삼고 김진양과 이확으로 좌우사의를 삼고 이실로 좌헌납을 삼고 정탁으로 좌정언을 삼고 최원으로 겸집의를 삼고 안경검으로 집의를 삼고 허주 최긍으로 장령을 삼고 조용 조겸으로 지평을 삼고 또 민개로 지신사를 삼았다. 이행을 청주에 류배하였다. 갑술에 육십노가 제주로부터 왔다. 을해에 찬성사 정몽주를 명하여 연위케하니 육십노가 말하기를 「탐라산의 마가 상국에 알려진지 오래인데 내가 탐라에 있은지 이미 오 육년이 되어도 마의 좋은 것이 심히 적은지라 그러므로 지금 경사에 조회(조)하는데 한 필의 마도 폐백할 것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거늘 몽주가 이를 왕에게 계문하니 왕이 이르기를 상국이 자주 우리에게 마를 바치라고 함은 탐라(제주도)가 있기 때문이다. 육십노가 말한바가 이와 같다면 아국에 양마가 있고 없음은 알림을 기다릴 것 없이 상달될 것이다」고 하였다. 무인에 형조판서 한상질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지금 대간이 언사로 외부에 폄출되어 있아오니 청컨대 경관을 주어 써 언로를 여소서」하니 청종하지 않았다. 기유에 장녀를 봉하여 숙녕궁주로 삼고 이여를 정신궁주로 삼고 삼녀를 경화궁주로 삼았다. 정도전으로 정당문학을 삼고 김사형으로 밀직사겸대사헌을 삼고 이첨으로 좌부대언을 삼고 아태종(이방원)으로 우부대언을 삼고 한상질로 우상시를 삼았다. 경진에 왕안덕을 소환하였다. 신사에 왕이 정전에 거둥하여 육십노를 향연하였다. 기축에 육십노와 화자(환자) 복니가 경사로 갔다. 왕이 경연에 거동하니 강독관 성석연이 189)정관정요를 진강하여 말하기를 「태종(당태종)이 직언 듣기를 좋아하였으나 신하가 위를 두려워하여 능히 말을 다하지 못하니 태종이 이를 깊이 알고 반드시 부드러운 얼굴롤 받아들이며 군신이 어찌 나를 위하여 말하지 않느냐고 하였으니 대저 옛 성군은 천하의 총명으로서 자기의 총명을 삼는 고로 반드시 190)추효?의 말이라도 채택하였나이다, 원컨대 상은 널리 묻고 널리 찾아서 재량하여 쓰시옵소서, 위조의 신우가 광폭하여 간언을 거절하고 부도한 (짓)을 많이 행하였는데 때에 신이 헌납이 되어 간의 권근으로 더불어 극간하였더니 우가 심히 취하여 신 등을 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빨리 망한 소이입니다」라고 하였다. 오월 계사 삭에 왕방 조반 등이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와 계하기를 「예부가 신등을 불러 이르되 너희 나라 사람에 윤이 이초란 자가 있어 제에게 와서 호흔하여 말하기를 고려 이시중(이성계)이 요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으나 요는 종실이 아니라 그 인친입니다. 요와 이(태조구휘)는 병마를 동원하여 장차 상국을 범코자 꾀하였는데 재상 이색 등이 불가하다하매 곧 이색 등 십인을 잡아 살해하고 우현보 등 구인을 잡아 멀리 류배하니 그 폄소에 있는 재상 등이 가만히 우리들을 보내 와서 천자께 고하나이다」하고 인하여 친왕으로 천하의 병을 동원하여 와서 치게하기를 청하였다 하면서 이에 이 초의 기록한 바 색 등의 성명을 내어보이고 말하기를 「네가 빨리 나라에 돌아가 왕과 재상에게 말하여 이의 서중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고 와서 보고하라 하였나이다」과 하였다. 무술 야에 김종연이 도망하였으므로 경내를 크게 수색하고 드디어 우현보 권중화 경보 장하 홍인계 윤유린을 순군옥에 내리고 아울러 최공철 등 십일인을 옥에 내리고 또 이색 이림 우인렬 이인민 정지 이숭인 권근 이종학 이귀생 등을 청주옥에 가두었다. 신축에 윤유린이 옥중에서 죽으니 저자(시)에서 효수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엿다. 병오에 왕강으로 밀직부사 겸전라경상양광삼도수군도체찰사를 삼고 한상질롤 예문관제학을 삼고 유량으로 형조판서를 삼았다. 신해 일본 관서구주절도사 원료준이 주능 등을 보내와 토물을 바쳤다. 정사에 최공철이 옥중에서 죽고 홍인계도 또한 이어 죽으니 모두 저자에서 효수하였다. 육월 갑자에 적경원이 낙성되었다. 을축에 「 청주에 대수가 지고 또 전달에 우설이 있었으므로 심덕부와 아태조를 불러 죄수을 방면할 것을 의논하고 이조판서 조온을 청주에 보내어 하교하기를 「왕방 조반이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와 전언하기를 예부가 신 등을 불러 본국에서 도망간 두 사람과 대문토록 하였는데 한 사람은 윤이로 파평군을 사칭하고 한 사람은 이초로 중랑장을 칭하였다. 이들이 말하기를 「본국이 이색 등 십인을 잡아 살해하고 우현보 등 구인을 멀리 류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장차 중국을 침범코자 하므로 그 폄소에 있는 재상들이 이 등을 시켜 경사(명경)에 나아가 진고케 한 것이라고 하고 인하여 친왕이 천하의 병을 동원하여 와서 치기를 청하였으나 이에 의거컨대 윤이 등이 말한 바와 같다면 그 시킨(교령) 사람의 죄는 반역에 걸리는 것이니 응당 추명해야 할 것이므로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구문케 하였더니 윤이의 친(족)인 유린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먹지 않고 죽었으며 동모한 최공철은 죄에 자복하고 김종연은 도망하여 아직 잡히지 아니하였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정상을 밝힐 못한지라 굳이 191)방신을 가하면 혹시 그릇됨에 빠질 자가 있을까하여 나(여)는 심히 민망히 여기노라 장차 이들 중(상항인등)에서 이미 문초에 자복한 자를 제외하고는 마땅히 각처에 안치하였다가 뒤에 실상히 들어남이 있으면 나(여)도 감히 사를 두지 않으리라」고 하니 국인이 크게 기뻐하였다. 다음 날에 또 오래 비가 옴으로 경성과 외방의 이죄 이하의 죄수을 석방하고 외방에 대처되어 있는 자는 경중을 논하지 말고 모두 다 본향에서 #의를 좇게하여 경성에서 방면된 죄수가 무릇 백오십여인이었다. 기사에 이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유에 헌부가 전랑장 김수가 조성감역관이 되어 재목 등물을 도적하였다고 탄핵하므로 이를 류배하였다. 병자에 정당문학 정도전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성절을 가하고 예문관제학 한상질은 천추를 하하고 또한 진하기를 「이와 초의 무망은 신이 감히 먼저 #실을 분변치 못하겠사오니 빌건대 흠차의 한 관원을 보내어 와서 구문토록 하시고 인하여 신에게 경사에 나아가 면주할 것을 허하소서」라고 하였다 무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기묘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양광도관찰사가 왜적이 침구하였다고 보고하므로 산성 수축할 것을 의논하였다. 경진에 태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동지밀직사사 안숙노를 보내어 연왕을 빙문하였다. 왜인이 양광도에 침구하여 음죽 음성 안성 죽주(죽산) 괴주(괴산)에 이르렀으므로 지밀직사사 윤사덕 자혜윤 이(공민왕구휘)(방과) 밀직부사 유용생 김용초 의덕부윤 곽충보를 보내어 이를 잡게 하니 적을 영주(천안) 도고산하에서 만나 적 백여급을 베고 포로된 남여와 두필(우마)을 취하여 돌아왔다. 신묘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임오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문하부랑사 등이 상류하기를 「전하가 즉위한 처음에 곧 무일로 자기하시고 대언 성석용에게 명하사 무일편을 써서 바치라 하시니 일국 신민이 기뻐(흔흔) 하지 않음이 없더니 요사이는 해(일)가 사(구-일일시) 오시(일일-일시)가 되어 이에 잡시고 혹은 연회가 야분에 이르니 신 등은 실망(결망)하니이다. 원컨대 지금으로부터 아침 일찍 청정하시고 야연을 하지 마소서」 하니 왕이 이를 청납하였다. 계미에 아태조(이성계)가 식읍을 사퇴하매 청허하지 않았다. 병술에 왕이 적경원에 행차하여 무자의 사친(부모 조부모 증조 부모 고조부모)의 작시를 추상하고 신주를 적경원에 모셔 모제 우로 하여금 주사케하였다. 경인에 김진양을 파면하였다. 추 칠월 신묘 삭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우 이백유로 좌우상시를 삼고 최운사로 좌사의을 삼고 이반으로 우헌납을 삼고 권훈으로 좌정언을 삼았다 경내를 대사하고 교하기를 「리(다스림)는 효를 세움보다 먼저함이 없고 예는 명분을 바르게 함보다 큼이 없도다 내(여)가 부도(큰 모유)를 이어받아 삼가 구전을 좇노라 공손히 생각건대 조종 삼십일대의 묘는 비궁을 수리하여 길향을 엄하게 하고 보책을 천상하여 수칭(특수칭호)을 올렸으며 고 승이하 사대의 친은 고관을 봉하여 원(적경원)을 설치하고 모제에게 명하여 주사케 하였으니 위로는 존조하는 대의를 받들었고 아래로는 경친하는 사은을 폈도다. 명분이 이미 바르게 되매 언에 순하고 효가 이미 서매 도에 합하니 신인이 이로써 기뻐하고 종사가 이로써 영회스럽게 되었도다 만세의 휴경이 실로 이에 기인하나니 이 성거로 인하여 마땅히 관대한 사조를 선포함직 하도다. 아아 원조를 추모하고(부모의) 장제를 신중히 하면 덕이 반드시 돈후에 돌아감을 기할 것이요 허물을 사하고 죄를 용서하면 인이 써 호생에 미칠(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신에 태백이 낮에 나타나니 왕이 두려워하여 문금을 엄하게 할 것을 신명하였다. 강독관 유백유가 경연에서 말하기를 「인명은 지중한 것이매 경홀히 죽일 것이 아니오니 마땅히 삼복하여 계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근자에 대간이 이색 등을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옛날 192)구를 쏜 자가(사구자) 도리어 충신이 되었으니 사람이 죄가 있어 내가 이를 용서하면 어찌 감열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으랴」고 하였다. 경자에 유원정이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제가 이와 초의 무망을 알고 멀리 률수현에 귀양보냈나이다」고 하였다. 신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그 달(월)이 끝나도록 계속하였다. 을사에 평리 배극렴으로 양광도찰리사를 삼아 한양 궁궐의 수리를 감독케하였다. 기유에 연복사 근방의 민가 삼십여호의 철거를 명하고 그 담(원장)을 넓혀 삼지 구정을 팠다. 계축에 좌헌납 이실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 전하가 ##의 설을 믿고 한양에 천도코자 함이 이미 불가하거든 황차 지금 추곡을 아직 거둬들이지 않았는데 인 마가 밟으며 반드시 민원을 살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힐문하기를 「비록에 이르되 만약에 천도하지 않으며 군신이 폐케된다 하였거늘 너희는 어찌 홀로 불가하다고 고집하느냐」고 하였다. 팔월 임술에 우현보 권중화 경보 장하를 원지에 류배하였다. 을축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안종원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안익으로 삼사좌사를 삼고 왕긍# 대호군 우성범으로 단양군을 삼고 좌랑 강회이로 진원군을 삼았다.정묘에 밀직 이두란 장사길을 보내어 서해도에서 왜를 치게 하였다 기사에 왕이 문묘에 알견하고 대사성 송문중에게 령하여 시 칠월편을 강하게 하고 드디어 적경원에 행차하였다가 다음날 친히 사친에게 #제하고 돌아와 국대비를 향연하였다. 왜인이 전라도에 침구하매 도절제사 이무가 쳐서 물리치고 이십칠급을 참하니 의주를 사하였다. 을해에 순비 생일이므로 이죄 이하를 유사하였다. 정해에 김윤후 등이 류구로부터 돌아오니 중산왕 찰도가 또 그신 왕지 등을 보내어 신이라 칭하여 표를 올리고 우리 피로인삼십칠명을 돌리고 인하여 토물을 바쳤다. 구월 경인 삭에 일식(개기식)하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진에 간관 정우 최운사 이반 권훈 등을 파하였다. 계사에 사헌규정 이감등 구인을 폄하여 현감무를 삼았다 때에 왕이 궁중 부사에게 상사함이 절도가 없어 창고에 예비저축이 없는지라 감이 풍저창의 분대이므로 이에 말하기를 「집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먼저 절용할 것이어늘 하물며 국군이 함부로 사인에게 사하여 써 창고를 텅비게 함이 가하리까 환관은 항상 내주에서 먹고 또 록봉을 받는데 이제 또 쌀(미)을 주면 그 명목은 비록 다르다할지라도 그 비용은 한가지외이다」 하고 이에 썩은 보리를 주니 환관이 호소(소)하는지라 왕이 노하여 도당에 명하여 죄를 다스리고 감의 가노를 잡아 가두게 하니 규정 등이 의논하기를 「대관으로서 가노가 잡아 갇히게 되는 것은 예전엔 있지 아니한 바이다」하고 모두 병을 칭하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 폄이 있었다. 내시를 연복 락산 왕륜 등사에 보내어 제를 설하고 복을 빌었다 왕이 즉위한 이래로 매월일 삭망에는 반드시 궁중에 승을 초청하여 경을 구하고 매 사시에는 반드시 십삼소에서 기은하는데 도장이라 하고 법석이라 하고 별기은이라하여 신불에 첨사하니 대신과 대간이 매양 론하였아나 듣지 않았다. 갑오에 성석린으로 삼사좌사를 삼고 안원으로 형조판서를 삼고 진의귀로 우상시를 삼고 홍길매으로 우사의를 삼고 류정현으로 집의를 삼고 홍보 이래로 모두 장령을 삼고 이원으로 지평을 삼고 송우로 우헌납을 삼고 윤규로 우정언을 삼았다. 을사에 양릉(신종)에 배알하고 인하여 효신전에 제하고 천도할 것을 고하였다. 병오에 한양으로 천도하는데 판삼사사 안종원과 문하평리 윤호에게 명하여 송경에 유수케하고 또 백관에게 령하여 분사케 하였다 이날 저녁에 큰풍우와 진전이 있어 인축에 #사자가 있었다. 경술에 어가가 한양에 이르니 양광도도찰관사 류구가 채붕을 맺고 백희를 진하여 맞이하려 하거늘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그만두게 하고 이에 입어하였다. 병진에 밀직부사 강은을 경사(명경)에 보내어 종마 오십필을 바쳤다. 무오에 문하평리 김남득과 밀직제학 이실을 경사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동 십월 기미 삭에 문하평리 최윤지로 송경수성절제사를 삼았다. 전상의첨서 우홍수를 보내어 아태조(이성계)에게 193)선온을 사하였다. 때에 태조가 병으로 써 청고하고 관문온정에 가게된 까닭이었다. 정묘에 간관이 류구가 백성에게 후감하여 힙써 미열(아첨하여 환심을 사는것)을 구한다고 탄핵하니 이를 파면하고 서균형으로써 가름(대)하였다 무진에 렴문계정사로서 허주를 서해도에 김약항을 강원도에 남재를 양광도에 이근을 경상도에 오사충을 전라도에 분유하였다. 갑술에 육십노가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와 제주로 다시 갔는데 일년을 지나 사망하였다. 을유에 강독관 유백유가 경연에서 서경의 무일편을 강하는데 환과를 194)혜선한다는데 이르러말하기를 「환과는 천하의 궁민으로 고할곳 없는 자인지라 옛적 성인은 반드시 이것을 걱정하였나이다. 지금 윤수태라는 자가 있어 나이 구십육인데 아들의 나이 또한 육십구로 늙어서 능히 봉양하지 못하고 오직 한 비자가 있어 돈(화)을 벌어 조석의 자량을 공봉하오니 빌건대 미곡을 사하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이 이같을진대 그 마음에 반드시 지키는 바가 있을 것이다」하니 대답하기를 「수태가 일찍 말하기를 나이 삼십이 못되어 왼다리가 195)불인하더니 하루는 천마산사 약사전에 나아가 맹세하기를 부처님이 만약 나의 병을 고쳐주시면 불전을 지어 드리겠나이다고 하였더니 꿈에 한 중이 말하기를 너의 병은 고칠 수 있으나 능히 불전을 지을수 있겠느냐 라고 하더니 꿈을 깨매 병이 곧 낫는지라 드디어 불전을 짓고 삼매참법석을 설하여 락성하였던 까닭으로 이와같이 장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그렇구나 나(여)도 일찍 중궁의 병으로 약사법석을 설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한중을 보았더니 병이 곧 낫는지라 부처님이 어찌 허망하리요」하니 백유가 대답하기를 「유도 또한 심히 불을 배척하여서는 불가함니다 유가 불을 배척하는 바는 그 인군이 불을 믿고 정사에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십일월 기축 삭에 전랑장 곽흥안이 도당 경력사의 인을 위조하여 준비색과 군자사에 엽부하고 의복, 미두를 받아 기첩에게 주었던 바 이 일이 발각되어 참하였다. 신묘에 아태조(이성계)가 상서하여 사직하니 왕이(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지 않거늘 태조도 또한 울며 사하였다. 임진에 우현보 이색 권중화 경보 장하를 유노하여 경외에서 편의에 따르도록 허하고 우인렬 정지 권근 이숭인 이림 이귀생은 외방에서 편의에 따르도록 허하였다. 시중 심덕부가 휘하 선공판관 조유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갑오에 아태조(이성계)가 시중(직)을 사하기를 재삼하매 드디어 아태조로 영삼사사를 삼고 정몽주로 수문하시중을 지용기로 판삼사사를 배극렴 설장수로 모두 문하찬성사를 아공정왕(이방과)으로 판밀직사사를 삼았다. 헌부에서 상소하기를 「본조 고사로는 후비의 부를 세우고 관속을 설하되 좌우사 윤 승 주박 사인일 따름이었는데 공민왕이 명덕태후를 봉숭하여 부를 세워 숭경이라고 하고 관료를 판사 윤 소윤 판관이라 하니 그 존숭을 극한 바입니다 이제 숭녕부는 고제에 의하여 좌우사와 윤 등의 관속을 설하였는데 의덕 자혜 양부는 아직도 숭경부의 예에 따르니 고제에 어긋남이 있나이다. 청컨데 모두 숭녕부의 예에 의하도록 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신축에 헌부가 말하기를「이제 중외의 군사는 이미 령삼사사 이(태조구휘)(성계)로 이를 도총하게 되었아오니 청컨대 여러 원사들의 인장을 다 거드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계묘에 팔관회를 설하고 또 각사를 송경에 분견하여 팔관회를 행하였다. 급전도감이 상계하기를 「외관원 향역리 진척 원주 의 전수 및 풍저 광흥창의 납세의 수를 정하소서」라고 하였다. 각도의 장수를 파하고 군인을 방환하였다. 병오에 안숙로가 연으로부터 돌아오니 연왕(뒷날 명의 성조)의 답서에 이르기를 「서고려국사 및 국인 배신 등에게 치의하노니 근자에 예물을 가지고 왔으나 어찌 감히 쉽게 받으리요 고인 말하기를 신자는 외교를 할 수없다하였도다 그러나 물리치면 반드시 남의 뜻을 어겹게 함이로다. 그러므로 물품은 보유하고 사신은 돌려보내며 삼가 부황에게 상문하여 삼한의 뜻을 통할 것이다. 반드시 명이 있으면 이에 회보할 것이니 국인 배신 등은 살필지어다」라고 하였다. 신해에 정당문학 정도전 등이 경사(명경)로부터 돌아와 성지를 선유하니 「윤이 이초가 여국을 모란한 일은 짐이 이미 불신하고 일찌기 단죄하였으니 여국이 다시 무엇을 걱정하고 의심하리요」라고 하였다. 임자에 심덕부 휘하의 진무 조언 등 오인을 옥에 가두었다. 을묘에 최윤지로 서북면체찰사를 삼았다. 무오에 조유를 교형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조언 등을 원지에 류배하고 심덕부를 파면하고 다시 아태조(이성계)로 문하시중을 삼았다. 지용기를 삼척에 박위를 풍주에 정희계를 안변에 윤사덕을 회양에 이빈을 안협에 류배하였다. 십이월 신유에 심덕부를 토산에 류배하였다. 계축에 아태조가 상전하여 사하기를「오직 덕을 헤아려 위을 줌은 이는 군상의 명이도 총으로써 공에 거하지 않음은 곧 인신의 의에 합당하나이다 만약에 영화를 부러워하여 나아가기를 탐한다면 혹 화를 빨리하여 허물을 부를(초) 것이니 이러므로 196)소공은 성만하면 있기 어려움을 근심하였고 197)채택은 말하기를 성공한 자는 가(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아조의 시중의 임은 실로 주가의 가재의 관으로 방국을 균정함이 이미 어렵고 음양을 변리함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신은 국량이 좁고 얕으며 학문이 성글고 거칠어 가성(신씨)이 독을 류포할 때 군사를 일으켜 중화를 어지럽히는 거둥이 있어 신인이 함께 분노하고 종사가 거의 기울어지므로 이에 제장과 더불어 돌아와 천자의 명을 공경스러히 받드니 찬위의 종자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정파의 전통이 능히 흥복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이에 조종의 음조이요 진실로 신의 힘으로 능히 할 바 아니온데 특히 작명의 은을 입히가 인하여 중외의 일을 거느리게 하오니 198)수의의 화에 도움됨이 없고 항상 199)복속의 근심을 품어 왔는데 금년 봄에 윤이 이초가 도망하여 중국으로 들어가 몰래 천자를 롱락하여 친왕으로 천하의 병을 움직이기를 청하고 사직을 옮기고자하여 김종연이 그 모수가 되었다가 스스로 곤혹하여 숨으니 이는 왕실의 안위에 관계됨이요 신신의 리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에 사람이 있어 숨겨주고 또 고의로 놓아주어 오직 불궤만 가만히 서로 더불어 모려하니 생각컨대 신을 총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 하겠아오니 생각이 이에 이르매 송구스럽기만 하나이다 근자에 우상(우규)을 면하여 스스로 마음에 다행하다고 생각하옵는데 이제 또 신을 시중으로 제배하지니 명이 하늘로부터 내리매 몸둘 곳이 없으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가 재조되고 문물이 중흥하니 스스로 굉장한 재질이 아니면 어찌 족히 국정을 찬양하며 중덕이 있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인정을 진복하리오까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지성을 량찰하시어 신의무거운 짐(중부)을 풀어주시면 신은 삼가 마땅히 어지이에게 길을 비껴주고 직을 비웠다(광직)는 허물을 남김이 없이 늙음을 집에서 보내면서 오로지 축리(임금의 수복을 비는것)의 성간을 바치도록 하겠나이다」 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고 비답하기를 「200)난을 다스려 정으로돌림(발난반정)은 실로 201)명세의 재인 것이요 202)도를 논하여 나라를 경리(논도경방)함은 반드시 203)대천의 상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신의 거취는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것이다 오직 경은 뜻(지)을 풍상에 가다듬고 기를 광악에 모아(종) 오직 옛날부터 공은 왕실에 있었고 지금에는 덕이 생민에게 입혀졌도다 납씨를 삭수(삭북의 변방)에서 쫓고 왜구를 사경에서 섬멸하였도다 선왕이 훙서한 이래로 위신이 그간에 가절하여 유렵에 황란하고 주색에 탐닉하여 살육을 자행하고 완흉을 크게 마음대로 하더니 군사를 일으켜 장차 화하를 범하기에 이르렀도다 경은 밝게 역순을 알고 창의하여 돌아와서는 종친과 여러 신서들로 더불어 모의하고 드디어 위성을 폐출하고 과궁(과인)를 추재하여 방기로 하여금 거의 위태로움에서 다시 안정케하고 종사로 하여금 거의 단절에서 다시 계속케하니 공을 계교학고 덕을 헤아리건대 고령에 빛나도다 마땅히 길이 아가를 보필하여 영향을 후사에게 전할 것이어늘 어찌 군소들이 가만히 간모를 함부로 할줄을 기하였으리요 이는 실로 나(나의 부덕)에게 있는 것이요 경 때문이 아니니 깊이 나를 책하는 뜻을 가지고 장차 그 형장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데 경이 갑자기 전장을 올려 직임을 면코자 하니 경은 비록 생각하기를 자세히 하였을 것이나 나의 소망인즉 그렇지 않으니 원수와 고굉은 이미 동일체인지라 산하의 대려를 감히 내 마음에 잊으리오 고사함을 번거로히 하지 말고 속히 그대의 직을 천수하라 청하는 바는 마땅히 윤허하지 않을 것이다」하였으며 또 중관을 보내어 의 주를 사하고 돈유하니 아태조(이성계)가 궐에 나아가 사은하고 드디어 직에 나아갔다. 국사를 충주에 옮겼는데 이보다 앞서 죽주 칠장사에 간직하였다가 이번 여름에 왜적이 침입하였으므로 옮긴 것이다. 계유에 김종연을 잡았는데 다음 날 옥중에서 죽었다. 을해에 형조판서 안원 등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근본은 인심을 얻음에 있고 사람을 얻는 요체는 사정을 살핌에 있으니 이는 왕정의 마땅히 먼저 할 바입니다 대저 사람은 정에 발하면 할에 나타나나니 그 말을 듣고 그 정을 추구하면 때의 이난과 정의 득실을 따서 가히 알것입니다 신 등이 그윽히 여의를 듣건대 천행할 무렵에 손실이 많았다고 합니다 수종한 자는 업을 버리고 천사함에 #부하였고 유거하는 자는 처소를 잃어 초#에 의지하니 피차라 소연 하였던 것입니다 요전 천행할 처음에 술사가 논하기를 위로 천#가 자주 나타나고 아래로 지괴가 매양 일어나니 이는 모두 지덕의 쇠함에서인 것인 바 남경에 순행하며 화를 가히 늦출 것이라 하더니 이제 주필한지 미구에 짐승이 많이 인물을 상하고 사람은 혹 가만히 불궤를 모의하며 변괴도 또한 쉬지 않으니 술사의 논과 지덕의 설을 어찌 가히 믿으오리까 만약 참에 그 수가 있어 마땅히 피양하여야 한다 하면 그 술수가에 맡겨서 먼 복을 맞이하기 보다 덕정을 닦아 천계를 삼가함만 같지 못할것입니다 원컨대 전하는 위로 천시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를 헤아려 곧 서울(경국)로 돌아가시면 시종은 처소를 얻는 낙이 있을 것이요 민서는 실소의 탄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전하는 재처하옵소서」 라고 하니 왕이 도당으로 하여금 의의 하게 하였다. 병자에 민개 이사위 조온 으로 밀직부사를 삼고 성석린으로 지신사를 삼고 안원으로 좌부대언을 삼고 유정현으로 우부대언을 삼았다. 무인에 김종연을 지해(사지를 분해)하여 제도에 조리 돌리고 그 당 이방춘 등 칠인을 참하였으며 박가흥 이중화 김식을 원지에 류배하였다. 경진에 조민수가 창녕에서 졸하였다. 계미에 한상질을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병마도절제사를 삼고 강회중으로 사헌집의를 삼고 이감으로 지평을 삼았다.
1) 두소 = 두는 일두의 양이요 소는 일두이승을 넣는 죽기를 말한 것이니 전용되어 사 람의 기량이 적은데에 비유함. 론어에 「두소지인 하족산야」라 하였음.
2) 시사 = 돼지와 뱀은 탐욕하고 간악한 동물로 욕심이 많고 흉폭한 악인을 이에 비유한 것 임. 좌전 정공 사년조에 「오위봉시장사 이천식상국」이라 하였음. (여기에는 홍두적을 지칭한 것임)
3) 승지번 = 파리가 울타리에 앉아 더럽힘을 말한 것인데 전용되어 녕인의 선악을 교난 함에 비유한 것이나 시경 소아 청승편에 「영영청승 지우번」이라 하였고 전에 「승지위충 한백사흑 한흑사백 유녕인변난선악야」라 하였음. 여기에서는 최유등의 참소를 가리킨 것임.
4) 지족 = 그칠줄을 알고 족한줄을 알아서 분에 안정하는 것. 노자 사십사에 「지족불욕 지 지불태」라 하였음. 여기에는 지족의 계를 지키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는 뜻임.
5) 보불 = 고대 천자예복의 자수. 서경 익직편에 「종이 조 화 분말 보불 치수」라 하였고 전 에 「보약부형 불위양이상배」라 하였음. 여기에서는 천자예복의 휘황찬란한 광채가 보이 는듯하다는 뜻임.
6) 여강여릉 = 송수의 축사로 쓰이는 바 시경 소아 천보에 「여강여릉」이라 하였음. 본서 제이책 육구구혈(주이)참조.
7) 사서 = 신전에 서식하는 쥐는 사때문에 없애기 어려운 것인 바 군주의 측근에 있는 간신 을 이에 비유한 것임. 안자 춘추에 「경공문왈 치국하환 안자대왈 환부사서(중략) 서지소 이불가득살자 이사고야 부국역유인언 인주좌우시야 차역국지사서야」라 하였음.
8) 풍정동 거용사기지유 = 풍정은 군주의 위령에 비하고 사기는 불정배에 비한 것이니 즉 원제의 엄숙한 위령 앞에는 부정배의 존유가 용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9) 일월청명 수절부운지폐 = 일월은 군주의 총명에 비하였고 부운은 소인배에 비한 것이니 즉 원제의 일월같은 총명을 소인배가 엄폐하지 못함을 의미한 것임. 예컨대 기철 석기등 의 처치를 가리킨 것인듯.
10) 적참확굴심모응양 = 확굴은 자벌레의 굴신을 말한 것이요 응양은 매의 비양을 말한 것이니 즉 자벌레의 굴신같이 잠시 칩복하여 있은지언정 마음은 매의 공중에 비양함과 같이 유유히 무용을 떨치겠다는 뜻임.
11) 호고 = 호구이니 호는 하의 뜻이고 구는 수의 뜻인 바 호구는 본래 구십세의 칭으로 원 로 장로를 말함. 좌전 희공 이십이년 「수급호구 획칙취지」의 주에 「호구 원로지칭야」라 하였음.
12) 호기동희 = 사월팔일 연등이 가까워지면 그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기를 가지고 노래부르며 집마다 다니면서 곡식과 천을 구하던 행사.
13) 호야 = 여러 사람이 힘주어 일할 때 내는 소리.
14) 구재 = 고려시대 사학의 하나로서 일명 문헌공도라고도 한다. 문종조에 최충이 벼슬을 그만둔 뒤 후진의 교육을 위하여 개설한 사숙인데 과거응시자들은 이 학숙으로 많이 몰 려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학반을 구로 나누게 되었으니 그 명칭은 락성 대중 성명 경업 호도 솔성 진덕 대화 대빙이었으며 학과는 오경(역 시 서 예 춘추)과 삼사(사기 한서 후한서)를 중심으로 하고 시 부 사 장의 학을 가하였다. 그리고 매년 하기에는 하과 즉 하기강습회를 열었는데 특히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도중의 과거급제자로서 학식이 많고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을 강사로 삼아 생도를 가르치게 하였다. 최충이 죽은 뒤에 는 그 시호에 따라 이 학당을 문헌공도라 하여 과거응시자의 준비기관이 되었다.
15) 심왕독타불화는 충선왕(심왕)의 양자인 고(충렬왕의 서자 강양공 자의자)의 손임.
16) 공북 = 공은 향이요 북은 북진이니 즉 중성이 북진에 향함과 같이 사방의 인민이 천자 의 덕에 돌아옴을 말한 것임. 론어 위정편에 「자왈 위정이덕 벽여북진거기소이중성공 지」라 하였고 집주에 「북진북극 천지추야 거기소불동야 공 향야 언중성사면선요이귀향 지야 위정이덕칙무위이천하귀지 기상여차」라 하였음. 본서 제이책 육구칠혈(주삼) 참조
17) 교방 = 음악 가무를 가르치는 곳. 본서 제일책 일칠일혈(주일)참조.
18) 목호 = 본책 제구구혈(주삼)참조.
19) 초소 = 본책 제구삼혈(주일)참조.
20) 오왕 = 명태조 주원장은 처음에 오왕이라 칭하였음.
21) 악운악운 종고운호재 예운예운 옥백운호재 = 악이란 종고를 말한 것인가 예란 옥백을 말한 것인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종고와 옥백 이외에 정신적 요소가 있 다는 뜻임. (론어 양화편 참고)
22) 비반 = 비는 분의 뜻이니 비반은 분사와 같음. 주례 지관 름인조 「름인 장구살지수 이 득국지비반」의 주에 「비 독위분」이라 하였음.
23) 전운 = 전복의 의미로서 즉 정상상태를 잃을 정도로 송구스럽다는 뜻임.
24) 관생 = 녀서를 말한 것임. 고사성어고 외척편에 「췌서왈관생」이라 하였으니 췌서는 즉 녀서를 가리킴.
25) 월첩 = 월하의 승첩이라는 뜻이니 백거이의 「야진군판」에 「봉명벌지사 무문월첩 용찬사 지계 방사소정」이라 하였음.
26) 방소 = 방은 방숙으로 주선왕의 현신이니 시경 소아 채사편에 「방숙원로 극장기유」라 하였고 집전에 「선왕지시 만형배반 왕명방숙남정」이라 하였고 소는 소호를 가리킨 것이 니 주선왕때에 회이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으니 동대아 강한편에 「강한지호 왕명소호 식 벽사방 철아강토……우강간리 지우남해」라 하였음.
27) 곽이 = 곽은 곽자의니 당의 화주의 인으로 현종시 삭방절도가 되어 안사의 난을 평정하 고 분양군왕의 봉을 받음 이는 이광필이니 당의 숙종시의 절도사로서 안사의 난을 평정 하고 대종시 임회군왕의 봉을 받음(곽자의의 사적은 당서 백삼십칠권 참고. 이광필의 사적은 당서 백삼십육권 참조).
28) 표를 올리고 출정한 제갈량의 고사를 든 것임.
29) 비추만속 = 꼴을 날리고 곡식을 이끈다 함은 마초(추)와 군량을 급속히 운송함을 말한 것이니 한서 주부언전에 「사천하비추만속」이라 하였고 주에 「사고왈 운재추속 령기질지 고운비추 만위인차선야」라 하였음.
30) 주도투하지음 = 적은 술을 하수에 던져 여러 군사와 같이 나누어 마신다는 뜻. 소서에 「긍자량장지용병 유궤단료자사투제하 여사졸 동류이음」이라 하였음.
31) 의흥협광지정 = 광은 면이니 날이 추운 때에도 군왕의 따뜻한 무위를 입으면 솜에 싸인 것과 같이 추운 것을 잊는다는 뜻. 좌전 선공십이년조 「 자벌소……신공무신왈 사다인 한 왕순삼군 부이면지 삼군지사 개여협광」의 두주에 「광 면야 언설이망한」이라 하였음.
32) 다다익변 =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잘 처리함을 의미한 것으로 훌륭한 장재가 있음을 말 한 것이니 한서 한신전의 「상왈여공하여 왈 여신다다익변이」라 한데에서 유래하였음.
33) 오왕 = 장사성은 처음에 성왕이라 자칭하다가 뒤에 또 오왕이라 일컬었음.
34) 팔번 = 팔방의 번지. 당서 서성전찬에 「동지고려 남지진랍 서지파사 토번 견곤 북지돌 궐 계단 말갈 위지팔번」이라하였음.
35) 설손 = 회골인으로서 원의 조정에 벼슬하다가 부((철독)상을 당하여 대녕에 우거하더니 홍두적이 그곳에 밀어매들 공민왕 칠년에 고려로 귀화하여 고창백 부원후에 피봉된 명 인임.
36) 병록응도 = 록은 도록 도는 도참을 말한 것이니 즉 도록을 잡고 도참에 응한다는 뜻으 로 천자될 운명에 당함을 말한 것임. 장형의 동경부에 「고조응록수도 순천행주」라 하였 음.
37) 체원거정 = 원은 선덕의 의요 정은 정도의 의니 즉 선덕을 체득하여 정도에 따라 정사 행함을 말한 것임. 춘추 은공 원년 춘정월 주에 「범인군즉위 욕기체원이거정」이라 하였 음.
38) 정신 = 묶은 것을 고친다는 의미로서 역경 잡괘의 「정 취신야」에서 유래하였으니 정은 비린 것을 익히고 여문 것을 연하게 하는고로 혁신의 의가 있음. 참동계에 「어정지수 정신개고」라 하였음.
39) 솔비 = 서로 이끌고 봉사한다는 뜻이니 서경 무성 「화하만맥 망불솔비 공천성명」의 공 전에 「면복채장일화 대국일하 급사이 개상솔 이사봉천성명」이라 하였음.
40) 기경지간 = 기는 기의 의요 경은 귀향의 의니 즉 대국에 귀향하는 정성을 말한 것임.
41) 삼소 = 좌소(백악산) 우소(백마산) 북소(기달산)를 말한 것으로 고려사절요 명종 사년 하오월조에 「제 좌소백악산 우소백마산 북소기달산 치연기궁궐조성관」이라 하였음.
42) 의주 = 길흉행사 례의절차의 기록을 말한 것임. 후한서 율력지에 「참안의주자 고왕교 금」이라 하였음.
43) 당시의 동녕부는 요동지방에 있었음.
44). 정성=혼정신성의 약언으로 어버이에게 효성함이니 저녁에는 어버이의 침상을 안정하고 새벽에 성문함을 말함 예 곡예상 「범위인자지예 동온이하청 혼정신성」주에 「정 안정기상임야 성 문기안부하여」라 하였음.
45). 사미=신분에 상응하지 않는 사치. 한서 지리지에 「가취송사사미」라 하였음.
46). 김경록=천추금경록 또는 해동금경록이라고도 하는 고려사서로 처음 충렬왕초에 정가신이 편찬하였고 후에 민지가 왕명으로 증보하려다 못한 것을 후에 권부가 증보하여 세대편년절요라 개제하니 호경대왕에서 원종까지 전칠권에 세사도를 붙었다 이때에 와서 공민왕은 이 금경록을 다시 증수하라고 명한 것이다.
47). 편배=배역(례)에 편입하는 형의 일종
48). 책성=좋은 성적올리기를 최촉하는 일. 회남자 주술훈에 「인주지술 처무위지사 이행불언지교 청정이부동 일도이불요 인순이임하 책성이불노」라 하였음.
49). 고독염매죄=고독은 좌전 소공 원년조 ‘근녀실 질여고’소에 「이독약약인 령인불자지자 위지고독」이라하여 몰래 독약으로 해인함을 말하고 염매는 사도로써 사람을 주살함을 이름이니 염은 정자통에 「인기실 심구신난칙염」이라하고 매는 설문에 「매(매)노물정야」라 하였음.
50). 자문=자금 자궐 자궁 자미와 같이 자궐을 말함.
51). 평리=변리하여 공평하게 다스림을 말함. 후한서 노공전에 「노위평리곡직 개퇴이자책 철경상양」이라 하였음.
52). 용후=임금의 후설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말함.
53). 내상=궐내의 재상이란 의미에서 한 말.
54). 숙닉=은폐되어 있던 구악. 닉은 옥편에 「음간야」라 하였고 찬고에 「닉 #통 백# 중악야」라 하였음.
55). 대대=대악. 서경 강고 「원악대대 신유불효불우」전에 「대악지인 유위인소대악」이라 하였음.
56). 황구미수=장수를 축하는 말. 시소아 남산유대 「악지군자 하불황구」라 하고 또 「악지군자 하불미수」라 하였음.
57). 유각기정=높고 큰 뜰을 말함이니 시경 소아 사천편의 「식식기정 유각기영」의 전에 「식식 언평정야 유각 언고대야」라 하였음.
58). 기상=일월을 그린 기의 명칭.
59). 증상=증은 동제 상은 추제이니 이아 석천에 「추제일상 동제일증」이라 하였음.
60). 성선=모친을 말함이니 시경 패풍 개풍장 「모씨성선」이라 하였음.
61). 보거=특별한 기능과 학식또는 공적있는 자를 그 상궁이 주청하여 적임에 등용함을 말함. 즉상관이 속관을 보증추천함을 말함.
62). 방략=죄인을 매를 쳐서 고문하는 것. 사기 이사전에 「조고치사 방략천여」라 하였음.
63). 경화=교화를 가로막는 일. 우집 별마가에 「령남봉화난자수 하시지금유경화」라 하였음.
64). 황극=대중 지정의 뜻으로 제위를 말하기도 함. 홍범 구주의 중심에 위치하여 「오 황극 황건기유극운운」하였음.
65). 구유=구주 또는 구주를 무유한다는 뜻. 서경 함유일덕 「유구유지사」의 채전에 「구유 구주야」라 하였음.
66). 도칭명자=명옥진은 원말에 사천(촉)지방에 웅거하여 제라 칭하고 국호를 하라 하였으며 옥진의 뒤에 그의 아들 승이 또한 하제라 칭하더니 이때에(서기일삼칠일)명에 토평되었던 바 명태조는 명승을 한왕 진우진의 아들 이와 함께 고려에 보내어 살게하여 그 자손을 번연케되었다. 여기에서 명자를 도칭하였다는 것은 명옥진 부자가 하제라 칭한 것을 참월한 것이라하여 그와같이 말한 것임.
67). 랑비도륜=당랑거철과 같음. 본서 제일책삼오혈(주십이)참조.
68). 검각탄도=검각의 탄탄한 길. 검각은 장안에서 촉에 들어가는 길에 당하고 있는 대검 소검 이산의 요해로 각도가 통해 있어 음준한 곳으로 유명함. 수경 양수주에 「소검수 북서거대검삼십리 연산절험 비각통어 고위지검각야」라 하였고 장재 검각명에는 「유촉지문 작고작진 시일검각 벽입천인」이라 하였음.
69). #여(수)=#여퇴를 흐르는 물. #여퇴는 암석명으로 사천성 봉절현의 서남 양자강의 구당협구에 흘립한 대암석으로 그 부근은 수류가 격단하여 주행이 어렵다 함. 혹은 음예퇴 영무석 연와석 유예퇴라고도 한다. 수경 강수주에 「강중유고석 위음예석 동출수이십여장 하칙몰」이라 하였음.
70). 제봉=제해지봉. 동제인이 사는 해외국의 봉토. 즉 고려를 말함. 본서 제일책 일오오혈(주칠)참조.
71). 호배양휴=호배는 인신이 군왕에게 배예함을 말함. 양휴는 양휴의 오로 양휴는 양기가 만물을 양육함이니 예옥조의 「성기전실양휴」소에 「양 양야 휴 양야 언군사의노기기새만신중 사기식출외 포발여성양지 기생양만물야」라고 하였음.
72). 염한=한의 별칭. 한은 화덕으로 왕이된 때문에 염한이라고 함. 위서 진사왕식전에 「식봉옹구왕 조경사헌시왈 수선염한 임군만방」이라 하였음.
73). 고협이입학=북을 쳐서 수업 시작을 알리고 상자(협)에서 서적을 꺼내어 공부를 시작함을 말함이니 본서 제일책 일이일혈(주십육)참조.
74). 요리=의리와 인정이 박함을 말함. 요리 요박 경박과 같은 말. 피일휴 주중십영 주천시에 「옥액시요리 김사내조박」이라 하였음.
75). 변노=변화 향상한다는 뜻이니 론어에 「제일변 지어노 노일변 지어도」에 유래한 말. 본서 제일책 일오구혈(주일)참조.
76). 관주=상국의 문물을 관광한다는 말. 본서 제일책 일0구혈(주사) 참조.
77). 호향=본서 제이책 일사칠혈(주십일)참조.
78). 우상=학교명 유우씨의 상이란 말. 예 왕제 「주인양국노어동교 양서노어우상 우상재주지서교」 주에「 우상 역소학야 주입소학어서교 상지언양야 국지소학 위유우씨지상제 시이명상운」이라 하였음.
79). 주신=주자와 같은 말로 국자학생을 이름. 한서 예악지에 「자경대부사고이하 개선유도덕지인 조석습업이교자국자학 경대부지자제야......」라 하였음.
80). 화인지축=화의 봉인이 요에게 축복하였다는 설에서 나온 것이니 장자 천지편에 「요관호화 화봉인왈 희 성인 청축성인 사성인수 요왈사 사성인부 요왈사 사성인다남자 요왈사운운」이라 하였음.
81). 팽선지훈=국정을 처리함에 있어서 소어를 요리함에 너무 손을 대면 못쓰게 되기 쉬움과 같이 정사를 너무 번잡하게 하면 못쓴다는 교훈. 노자 육십 「치대국자 약팽소어 이도리천하 기귀불신」의 하상공주에 「선 어야 팽소어불거장 불거린 불감요 공기미야 치국칙하난 치신번칙정산」이라 하였음.
82). 함벽청명=강복하는 예. 함벽은 어벽과 같은 말로 면박어벽하고 청명함을 말함. 좌전 희공 육년조 「허남면박어벽 대부쇠경 사여친」의 주에 「박수어후 유견 기면야 이벽위질 수박고어지 친 관야 장수죄사 고쇠경」이라 하였음.
83). 기구지업=부조의 소업. 예 학기의 「양치지자 필학위구 양궁지자 필학위기」의 소에 「적세선치지가 기자제견기부형세업 도주금철 사지유합 이보치파기 개령전호 고자제잉능학위포구 보수속피 편편상합 이지완전야.... 선위궁지가 사간색요굴조합성기궁 고기자제역도기부형세업 잉학취유화연 요지성기야」라 하고 성언고사 부모유에 「승조부소업 위기구지업」이라 하였음.
84). 주광=면류관에 달아 귀(이)가에 드리우는 술이니 전용하여 군총을 뜻함. 본서 제일책 삼삼일혈(주일)참조.
85). 명복=제후가 작위와 같이 천자로부터 받는 위계에 상당한 관복. 시 소아 채색 「복기명복 주황불사황」의 집전에 「명복 천자소명지복야」라 하고 예 왕제에 「명복명차 불죽어시」라 하였음.
86). 어장칙해의=군주가 장수를 어거함에 있어 자기 옷을 벗어 장수를 입혀 사력을 다하게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 사기 유음후전에 「한왕 해의의아 추식식아」라 하였음.
87). 팽선지급=국정을 처리하는데 시급한 일. 팽선은 소어(선)를 요리함에 너무 잔손질을 하면 안되는 것과 같이 국정을 처리함에 번잡하여서는 안된다는 비유에서 국정처리의 뜻으로 쓰임. 노자육십에 「치대국자 약팽소선 이도리천하 기귀불신」의 하상공주에 「선 어야 팽소어 불거장 불거린 불감요 공기미야 치국번칙불란 치신번칙정산」이라 하였음.
88). 성중애마=애마는 몽고어로 부대의 칭인데 성중애마는 부대의 일종임.
89). 번유=번은 번병 유는 유지로 황실의 번병을 유지하는 제후왕을 말함.
90). 총석=은총의 사물.
91) 상수=술(주)을 올려 축복하는 것.
92) 무자=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것. 북제서 봉륭지전에 「빈위본주 유심무자 리민추사 입비공덕」이라 하였음.
93) 제목=임관 발령의 목록.
94) 자제위=공민왕 이십일년(일심칠이) 궁중에 설치한 관아로 노국공주 사후 녀자 대신에 젊고 아름다 운 청년을 뽑아 왕의 좌우에 시종케 하고 대언 김흥경으로 총관케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 아 궁중강기가 문란하여지고 마침내 왕의 시역까지 있게 되었다.
95) 북원= 원 순제 지정이십팔년(일삼육팔) 팔월 명병이 대도(연경)를 함락하므로 북방 개평으로 달아났다가 익년 육월 다시 화림으로 도망하여 이후로 북원을 칭하였음.
96) 정요위=명의 요동지방에 대한 경략기관으로서 요양에 설치되었음.
97) 대보잠=당 태종 즉위초 장온고가 지은 규감. 전편 압운으로 되어 있음. 당서 사언전에「 직중서성 장온고상대보잠 기사연체탁대리승」이라 하였음.
98) 위질=위는 치 질은 지로 초사자가 예물을 군전에 바침을 말함. 그 예물에는 죽은 꿩(치) 을 쓰는데 이것은 군을 위하여 필사의 충관을 표하는 것임. 사기 중니제자열전의「유복위 질」주에「색은왈 복건주좌전운 고자시사 필선서기명어책 위사지질어군 연후위신 시필사 절어기군야」라 하였음.
99) 황추=먼 변두리 지방. 황변과 같음. 고려를 겸하하여 칭하는 말.
100) 고협=북을 쳐서 상학을 알리고 상자에서 책을 내어 공부 함을 이름이니 본서 제일책 일이일혈 (주십육)참조.
101) 호시=부모를 이름이니 시 소아 료아동에「무부하호 무모하시」라 하고 석문에「호 뢰야 시 시부야」라 하였음.
102) #상=타격을 몹시 받아 빈사장태에 이르름을 말함이니 즉 원조의 가렴주구를 뜻함.
103) 연비어약=솔개가 날고 고기가 뜀은 자연의 속성을 자악함이니 시경에서는 임금의 덕화 가 큼을 말한 것이고 중용에서는 도리의 작용이라고 하였다. 시 대아 한록동의「연비려 천 어약간연」의 전에「연치지류 조지탐악자야 비이지천 유악인원거 불위민해야 어도약 우연중 유민희락득소」라 하였음.
104) 봉지도출=봉황이 이르고 하도가 나옴은 상서가 나타남을 말함. 조식 양의편에「제자화팔 극 양만물 화음양 음양화 봉지하락상」이라 하고 서경 고명편 전에「하도팔괘자 복의씨 왕천하 용마출하 수칙기문 이서팔괘 위지하도」라 하였음.
105) 홍조=조화의 홍은으로 즉 군은을 의미함. 본서 제이책 사일구혈 (주오) 및 칠사오혈의 (주일) 참조.
106) 괘오=남의 속임에 넘어가 일을 그르침을 말함. 사기 진희전에「리인위희소괘오겁략자 개 사지」라 하였음.
107) 사이=사방의 이족으로 즉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말함.
108) 환우=천하 세계란 말. 본서 제일책 삼구혈 (주사) 환해 참조.
109) 불곡=부선의 뜻으로 임금이 스스로를 비칭하는 말. 본서 제이책 삼0구혈 (주이) 참조.
110) 조정=정월에 조정에 사후함을 말함.(일설에는 참내하여 정교를 품수함을 말함이라 함) 좌전 양공 이십구년조에「춘왕정월 공재초 석불조정우묘야」라 하였음.
111) 란익=조류가 날개로써 알을 품음과 같이 비호한다는 말. 좌전 애공 십육년조에「자서일 승여란 여익이장지」라 하였음.
112) 보리=나라를 편히 다스림을 말함. 본서 제이책 사이구혈 (주십) 참조.
113) 양전=토공을 바치는 것. 서경 강왕지고「감집#전 개재배계수」의 전에「감집양지소출이 전지야」라 하였음.
114) 낭발=진퇴유곡으로 낭패하는 모양. 촉지 법정전에「당사지시 진퇴낭발」이라 하였음.
115) 준분=빨리 달려가는 것. 본서 제이책 사0오혈 (주육) 참조.
116) 축수어강릉=수명이 산과 언덕처럼 오래 가기를 빈다는 말. 본서 제이책 육구구혈 (주이) 참조.
117) 삼양=정월(음력)을 가리킨 것이니 이괘의 삼 양효, 이 수괘「삼인래 경지 종길」소에「 이일음이위삼양지주」라 하였고 서경 홍범「삼일 목」소에「정월 위춘 목위야 삼양기생, 고삼위목수」라 하였음
118) 인정=하력 또는 하력의 세수(음정월) 인원과 같음. 백호통 삼정에「십일월지시 양기시양 근주황천지하 만물개적적자성양지기야 고주위천정 색상적야 십이월지시 만물시아이백 백 자음기 고은위지정 색상백야 십삼월지시 만물시달 부갑이출 개흑 인득가공 고하위인정 색상흑」이라 하였음.
119) 오계=오대 즉 당 송사이에 일어난 후량 후당 후보 후한 후주를 말함. 송사 지리지서에「 당실기쇠 오계질흥 오십여년 갱이팔성 우현분렬 막지능일」이라 하였음.
120) 비례=조잡한 예물. 예기 방기「부이비폐예」석문에「비 박야」라 하였음.
121) 충정=뜰에 가득한 공물. 본서 제이책 이삼일혈(주삼) 참조.
122) 천산=공물 또는 예물을 헌상하는 일. 천은 진헌의 뜻이고 산은 계모의 뜻.
123) 자조선지계토=옛적 조선이 개국함으로부터란 말.
124) 후도=제후가 지켜야 할 법도. 본서 제이책 일구구혈 (주삼) 참조.
125) 질녀지류이운운=여기 질녀는 충혜왕의 딸 장령공주를 말한 것이니 장령공주는 일찌기 원의 노왕에게 시집갔다가 원이 망하매 북평에서 실종되었던 바 공민왕의 요청에 의하여 명 태조가 그를 찾아서 본국으로 돌려 보냈음.
126) 패금=비단 무늬같이 참소를 얽는 것. 본서 제이책 육오일혈 (주일) 참조.
127) 고존=국가의 보존을 공고토록 하는 것. 서경 중#지고「추망고존 방내기창」의 전에「유 망도 칙추이망지 유존도칙보이고지 왕자여차 국내창성」이라 하였음.
128) 오계=본책 제이오칠혈 (주칠)참조.
129) 전복∙수복=왕기 밖에 오복이라 하여 오백리씩 구획하여 후복 전복 수복 요복 황복이라 하였다함. (복은 복사 천자의 뜻임) 서경 익직편 참조.
130) 소빙=제후가 해마다 대부를 보내어 천자 또는 제후를 빙문하는 일. 이에 대하여 대빙은삼년에 한번씩 빙문함임. 예기 왕제에「제후지어천자야 비년일소빙 삼년일대빙 오년일조」라 하였음.
131) 조정=정월의 조회 본책 제이오칠혈(주일) 참조.
132) 누한당이불거=이는 앞서 명제의 조에서 말한 한당의 침략을 가리킨 것임.
133) 번선=번국의 소임이라는 뜻. 본서 제이책 구혈 (주일) 참조.
134) 후도=제후가 지켜야 할 법도. 본서 제이책 일구구혈 (주삼) 참조.
135) 탐주=인사를 선정하기 어려울때주산대를 뽑아 결정하는 방법을 말함. 후한서 호광전에 「순제욕립황후 이귀인유총자 사인 막지소건 의욕탐주 이신정선」이라 하였음.
136)자홍폐이대왕복한가지사=한의 려태후가 집정할제 혜제가 붕하매 궁인의 아들홍을 혜제의 자라하여 위에 세웠더니(소제)려태후가 붕하매 한고조의 구신인 진평 주방등이 소제늘 폐하고 고조의 자인 대왕 항을 영립하니 대왕 곧 문제임.
137)고신=사령서.
138)저택=역적의 집을 파괴하여 웅덩이를 만드는 일. 한서 왕망전에「저기궁실 이위오지 수료주언관포생지」라 하였음.
139)자급=자승자박 또는 자업자득이란말. 좌전 은공 원년조의 「공왈 무용장자급」의 주에 「화장자급야」라 하였음.
140)대려=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맹약을 잊지 않는다는 뜻. 본서 제일책 일일일혈 (주삼) 참조.
141)조선지계=삼한의 말기를 말함. 즉 삼국지 동이전에 전하는 마한 오십사국 진한십이국 변한십이국 합칠십팔국을 이름.
142)치수=평양을 말하는 바 보잘것없이 적은 것의 이름이니 즉 나라가 보잘것없이 적게 나누어진 것을 뜻함 예기 유행 「수분국여치수 불신불사 기규위유여차자」주에「수분국여치수 언군분국이록지 시지경여치수의 팔양왈치」라 하였음.
143)병위삼웅운운=삼웅국으로 병합되었다는 것이니 이것은 라 려 제 삼국분립을 가자하여 후삼국(신라 태봉 후백제)의 분립을 말한 것임.
144)사사=송옥을 주관하는 사법관. 주예 추관 사사에「사사지직 장국지오금지법」이라 하였음.
145)제명=제는 제계 명은 명결로 심신을 제계결청한다는 말. 중용「사천하지인 제명성복 이승제사」소에 「제계명결 성식여복 이승제사」라 하였음.
146)포재국사=국사에 열서한다는 말. 맹자 리루상 사문왕 주에「문왕지정 포재방책」이라 보임.
147)귀감=모범. 규범 사마광가훈에「차선현지격언 내후인지귀감」이라 하였음.
148)탕왕=은왕조의 시조. 성탕. 자성으로 이름을리라 하고 기선은 계 제예의 아들이라 함. 하의 말왕 걸은 남소에 추방하고 천자가 되었음.
149)이윤=탕왕의 현상. 처음 탕왕이 걸에게 천거하였으나 등용하지 않아 탕왕에게로 돌아와 걸을 치고 은왕조를 열게 하였다. 탕왕의 붕후 외병 중임을 거쳐 태갑이 왕위에 올라 불명하므로 동궁으로 쫓았다가 삼년후 회개하므로 다시 봉귀하여 왕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한 사람.
150)이척=은 태무의 현상으로 태무에게 덕을 닦아 정사에 근면할것을 간하여 은도를 다시 부흥시켰음.
151)태공=동해상인으로 주문왕(서백)의 지우를 받아 호를 태공망으라 하고 문왕의 사상부가 되어 주실을 도와 은을 감하여 주무왕의 패업을 성취케하고 제후로 피봉되었음. 사기 제태공세가에「서백(문왕)렵..과우태공어위지양여어대설왈 자오선군태공 왈당유성인적주 주이흥 자진시야 오태공망자구의 고호지왈태공망 재여구귀립위사」고 하였음.
152)응양=매가 공중에 높이 날아 웅위를 떨치는 모양으로 용맹한 장군 용맹한 군수를 이름
152)응양=매가 공중에 높이 날아 웅위를 떨치는 모양으로 용맹한 장군 용맹한 군수를 이름
함임. 시 대아 대명의「유사상부 시유응양」의전에「응양 여응지비양야」라 하였음
153)종주=주대의 왕도 또는 왕기로 천하가 종으로 삼는 곳이니 풍 호 락읍을 모두 종주라고함. 즉 서경 주관편의 종주는 풍을 말한 것이고 동 다방편의 종주는 호경을 말한것이고 예기 제통편의 종주는 락읍을 말한 것이다.
154)주공=주문왕(단)의 자 무왕의 제.무왕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성왕을 도와 문물제도를 마련하여 후세의 규범을 남겼다. 본서 제일책 육십구혈(주사) 참조.
155).맹부=맹약서를 간직하여 두는 부고. 즉 사맹부.좌전 희공 오년조「훈재왕실 장어맹부」주에 「맹부사맹지관」이라하고 소에「이훈수봉 필유맹요 기사당장어사맹지부야」라 하였음.
156).환공=제 환공으로 춘추 오패의 한사람. 본서 제일책 칠구혈 주이 참조).
157).일광=일광천하 즉 천하를 크게 바로 잡음을 말함이니 본서 제일책 사이구혈(주이) 참조.
158).탕사=은왕조의 연대수. 이아 석천에「재 세야 하일세 상일사 주일년 당우일재」라 하고 소에「사 손염일 취사시제사일글(?)」이라 하였으며 학의행의소에 「상인상귀 이사위중」이라 하였음.
159).상현=자손이 선대의 성현을 본받음이니 곧 현철한 후손을 말함. 본서 제일책 칠오혈(주이) 참조.
160).삼걸=한고조 유방을 도와 창업을 성취시킨 소하 장량 한신을 이름.
161).아형=은대의 재상.아는 의 형은 평이로 탕왕이 이윤에게 의뢰하여 치평할수 있었음에 유래함.
161).아형=은대의 재상.아는 의 형은 평이로 탕왕이 이윤에게 의뢰하여 치평할수 있었음에 유래함.
서경 태갑상의 「유사왕 불우아형」의 주에 「아형 상지관명 언천하지소의왕야 역왈 보형 혹왈 이윤지호」라 하였음.
162).상부=아버지와 같이 존경한다는 칭호인 바 주 태공망 여상을 사상부라 한데서 유래함.본서 제일책 이구혈(주일) 참조.
163).증증=증은 제명이니 예기 제통「권대명 시우증이정」의 소 및 국어(노어)증장제희공」 의 주참조
164).문비사인 무이조주=주문왕에게 사인의 현신이 없었더라면 주업을 이룩할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 사인이라고 함은 굉요 산의생 태전 남궁괄.서경 군석편에 「유문왕상극수화아유하 역유유약괵숙 유약굉요 유약산의생 유약태전 유약남궁괄.....무왕유자사인 상적유록」이라 하고 전에 「문왕몰무왕립 유차사인 서기보상무왕 도유천록 괵숙선사 고왈사인」이라 하였음.
165).무유구인=주 무왕에게 구인의 현신이 있었다는말. 구인은1십난(치)중 녀자인 문모를 제한 구인즉 주공 단 소공 석 태공망 필공 영공 태전 굉요 산의생 남궁괄을 말함인 듯. 서경 태서중「여유난신십인 동심동덕」석문에「십인 주공 단 소공 석 태공망 필공 영공 태전 굉요 산의생 남궁괄 급문모」라 하였음.
166).난익=조류가 날개로써 알을 덮어 부화하듯이 양육함을 말함. 좌전 애공 십육년조에「승여난 여익이장지」라 하였음.
167).불숭조=려명에서 조식시까지도 못되어라는 뜻. 숭조는 종조이니 시 #풍 체동「조제우서 숭조기우」전에 「종 숭야 종단지식시 위종조」라고 하였고 위지 량무전에「불숭조이결」이라 하였음.
168).대려=황하수가 요대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려석같이 갈렸다 하더라도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맹서.본서 제일책 일일일혈(주삼) 참조.
169).구인=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한 구인의 공신.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170).말감=죄를 과함에 있어 중을 피하고 경을 취하는것.
37.혈식 =모혈의 생을 종묘에 바쳐 제사함이니 자손이 영속하여 제사가 불절함을 말함.사기 봉선서의「주흥이읍태 립후직지사 지금혈식천하」주에「정의왈 안사고운 제유생뢰 고언혈식」이라 하였음.
171).불위도진지계=여불위가 임신한 자기의 애희를 바쳐 진시황(정)을 낳았다는 설에서 나온 말임.
172).민오민어기골야=이미 죽어서 해골된 것 같은 우리 생민을 소생시켜 살을 붙여주었다는 말뜻.
173).일민=절행을 고수하고 세상에서 은둔하여 사는 사람.론어에 「일민 백이 숙제 우중 이일 주장 유하혜 소연」이라 하고 집해에「일민자 절행초일야」라 하였으며 집주에 「일 유일 민자 무위칭」이라 하였음.
174).포저=꾸러미를 싸 보내는 것을 말함이니 여기에서는 회뢰를 뜻함. 순자 대략의 「탕한이도왈 포저행여 하이불우 지사극야」주에 「화회필이물포리 고총위지포저」라 하였음.
175).분경=사행심을 품고 다투어 록과르 구함을 말함.본서이책 사삼칠혈(주이)참조.
176).경대부사에게 주는 사전 오십무 규형으로 구분되었으므로 규전이라고함. 맹자 십문공 상의「경이상 필유규전 규전오십무」 주에 「고자 경이하지어사 개수규전오십무 소이공제사 규 혈야 사전 고위지규전 소위유사무전 칙역불제 언출사무혈전야」라 하였음.
177).남면=임금 노릇을 함. 군자 남면이치란 말에 유래함.
178).강후=한 패인 주발의 봉작. 주발은 고조를 따라 기병하여 천하통일에 공을 셰웠고 제여가 유씨를 도모하려할 때 발은 제여를 주륙하고 한실을 안정시키니 문제때 우승상이 되었다. 시는 무. (사기 오칠 전한서사십 참조).
179).오왕=오왕은 한 고조의 자인 제왕등 오인을 가리킨 것으로 문제를 영입하는데 공이 있었음.
180).홍적=홍건적.원말 중국에서 일어난 적당으로 홍건으로 징장을 한까닭에 명칭한 것임. 공민왕8년 사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으나 격퇴되었고 공민왕십팔년에는 십여만명의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하고 만행을 자행하였다.공민왕은 안동(복주)으로 몽진하고 정세운 등으로 반격케하여 이를 평정하였는데 이때 이태조도 친병을 거느리고 크게 립공하였다
181).납씨=납함출.원의 유신으로 고려말기 요동에서 행성승상을 칭하고 웅거하여 고려 동북면(쌍성=영흥)지방을 다시 휘하에 넣으려고 수만의 군사를 투입하였으나 동북면병마사 였던 이태조에게 패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뒤에 명에 투항하였다.
182).부상=신목으로 동해중에 다생하여 양수가 동근으로 상의상존하므로 부상이라 하며 일출처라고 하였는데 산해경해외동경여기에서는 부상국 즉 일출국이라 하는 뜻으로 일본을 말한 것임 .남사 이맥전에 「부상국 재중 국지동 기토다부상목 고이위명 부상엽이동 초생여등 국인식지」라고 하였음
183).취일어우연=해(일)를 우연에서 취한다는 말은 우연에 빠진 해를 구한다는 말이니 즉 이미 멸절한 왕씨 왕조를 도로 복구한다는 뜻임.우연은 해가 빠지는 곳으로 상상한 곳이니 초사 원유에「수령현어우연」이라 하고 회남자 천문훈에 「일입우우연지범 시위황혼」이라 하였음.
184).분모=제후를 분봉한다는 뜻이니 본서 제이책 사육구혈(주이)참조.
185).아형=상의 관명인데 이윤이 해직에 있었음.
186).증상=증은 동제이니 이아 석천에 「동제왈 증」이라 하였고 춘추번로 사제에 「동왈 증」이라 하였으며 상은 추제이니 이아 석천에 「추제왈 상」이라하고 손주에 「상 상신곡」이라 하였음.
187).고굉=가장 믿을 수 있는 보좌신을 고굉지신이라고 함. 서경 익직편의 「제왈 신작고굉 이목」의 소에 「군위원수 신위고굉이목 대체여일신야」라 하였음.
188).대려=영원히 변치 않는 맹세라는 뜻.본서 제 일책 일일일혈(주삼)참조.
189).정관정요=당태종이 여러 신하들과 정치상의 문제를 론의문답한 것을 오경이 사십편으로 분류 편찬한것.본서 제 일책 팔삼혈(주오)참조.
190).추효?=초동목수 징천한람. 맹자 양혜왕 하의 「문왕지유 방칠십리 추효자왕언 치면자왕언」주에 「추효자 취추신지천인야」라 하였음.
191).방신=고문.설문통훈정성에「방범방궁 필약이고격지 고역위방 태」라 하였음.
192).사구자 반위충신=춘추시대 제의 관중의 일이니 관중은 일찍이 공자 소일(뒷날 항공)인 공 의 정적 공자 규를 섬기다가 군위다툼에 있어 관중은 소일을 쏘아 그 대구를 맞친 일이 있으나 뒤에 소일 승리하여 제군이 되고 관중을 임용하여 패업을 이룩하였다.
193).선온=임금이 하사하는 주찬.
194).혜선=가난한 사람에게 시혜하는 일. 서경 무일편의 「혜선환과」전에 「가혜선핍환과지인」이라 하였음.
195).불인=수족을 못쓰는 것을 말함.후한서에「반초매소상서왈 형년칠십 양수불인」이라 하였음.
196).소공=주의 소공 석이니 서경 군석편 참조.
197).채택=전국시대의 (연인)유설가임.
198).수의공수=수공지화와 같은 말로 수의공수하여 무위화민한다는 뜻 서경 수명의 「여소자수공앙성」의 채전에 「수의공수 이앙기성이기」라 하였음.
199).복속=속(솟)중의 물건을 뒤업는다는 말이니 재상이 그 임에 불감하여 패사함을 비유함. 역정에「정절족복공속」이라하고 후한서 사필전에 「필상봉사왈 금지사공 유사공유조 단단수선여개소찬 치관지인 필유절족복속지흉」이라 하고주에「역왈 정절족복공속 정이유삼공 속정실야 절족복속 언불승기임」이라 하였음」.
200).발난반정=란세를 다스려서 치평을 회복함을 말함. 공양전 애공 십사년조에「발난세 반제정 막근어춘추」라하고 주에 「발 유치야」라 하였음.
201).명세지재=명세는 명세와 같은 말로 세상에 유명한 영걸을 말함이니 곧 영걸의 재질을 가진 자. 본서 제일책 칠오혈(주구)참조.
202).논도경방=도를 논히고 나라를 경륜한다는 말. 론도는 도술을 담론함을 이름이니 서경 주관에 「립태사 태전 태보 자유삼공 론도경방 변리음양」이라 하였음.
203).대천지상=하늘에 대신하여 논도경방하고 변리음양하는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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