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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파스칼

by 8866 2009. 1. 13.

파스칼(1623∼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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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 6. 19 프랑스 클레르몽페랑~1662. 8. 19 파리.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종교철학자·작가.

파스칼, Jean Domat가 붉은 크레용으로 그린 소묘(1649경)

근대 확률이론을 창시했고, 압력에 관한 원리(파스칼의 원리)를 체계화했으며, 신의 존재는 이성이 아니라 심성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적 독단론을 설파했다. 직관론에 바탕을 둔 그의 사상은 장 자크 루소와 앙리 베르그송 및 실존주의자 등 후세의 철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포르루아얄 시절

아버지 에티엔 파스칼은 클레르몽페랑에 있는 세무 법원 판사였다. 1626년 어머니가 죽고 1631년 파스칼의 가족은 파리로 이사했다. 존경받는 수학자였던 에티엔은 파리로 옮겨온 뒤에는 자식 교육에만 전념했다. 2세 아래인 누이 자클린이 문단에서 신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동안, 파스칼은 수학분야에서 그에 못지않은 천재성을 발휘했다. 1640년 그는 종합 사영(射影) 기하학에 관한 지라르 데자르그의 저서를 연구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원뿔곡선론 Essai pour les coniques〉을 썼다. 이 책은 수학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위대한 합리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 같은 사람조차도 시샘할 정도였다. 1642~44년 파스칼은 아버지(1639년에 루앙 시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음)의 세금 계산을 도우려고 계산기를 착안하여 발명했다. 파스칼의 동시대인들은 이 기계만으로도 파스칼이 명성을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기계는 최초의 디지털 계산기였기 때문이다.

1646년까지만 해도 파스칼 일가는 겸손을 신앙으로 여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가톨릭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러나 우연한 사건으로 파스칼은 보다 심오한 종교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플 때 두 사도를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포르루아얄 수도원 원장이었던 생시랑 신부의 수도원 생활과 사상에 얀센이 창시한 얀센주의의 엄격한 도덕과 신앙을 도입했다. 얀센주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17세기 형태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주의였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고 신의 예정설을 채택했으며, 구원의 열쇠는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고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도원은 얀센주의 종파의 본산이 되었다. 속세에서 신에게로 완전히 전향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첫번째 사람은 파스칼 자신이었으며, 그는 1646년 가족들까지 설득하여 얀센주의적 신앙생활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의 편지들을 보면 그가 오랫동안 가족의 정신적 조언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세계와 금욕 생활 사이에서 겪는 내적 갈등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금 과학적 흥미에 빠져든 파스칼은 갈릴레오와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기압계 원리를 발견한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의 이론을 검증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수은 기압계를 만들어 파리와 클레르몽페랑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서 기압을 측정하여 대기압에 관한 실험을 검증하고 확대시켰다. 이 실험결과는 유체동역학과 유체정역학에서 좀더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지는 데 길잡이가 되었다. 또한 실험 과정에서 파스칼은 주사기를 발명했으며, 파스칼의 원리(밀폐된 유체에 주어진 압력은 그 압력이 주어진 범위에 관계없이 모든 방향에 같게 전달됨)를 바탕으로 유압 프레스를 고안해냈다. 1647~48년 진공문제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더욱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과로로 병이 났고, 의사들은 더 이상 연구에 몰두하지 말고 기분을 전환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여전히 과학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기간(1651~54)에 그는 액체평형에 관해서, 공기의 무게와 밀도에 관해서 또 산술 3각형에 관해서 논문을 썼다. 특히 산술 3각형에서는 확률 계산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1653년말에 종교적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파스칼은 1654년 11월 23일 밤에 '은총의 불'을 경험하고, 이것이야말로 새 삶의 시작을 알리는 신의 계시라고 믿었다. 이듬해 1월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비록 은둔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냈고, 저서를 발표할 때도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가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 Les Provinciales〉와 〈명상록 Pensees〉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두 저서를 집필한 것은 그가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입문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이다.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

파스칼이 신부들의 도덕과 정책에 대해 쓴 〈루이 드 몽탈트가 시골의 한 친구와 예수회 신부님들에게 보낸 편지 Lettres ecrites par Louis de Montalte a un provincial〉(18통, 이 저서는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음)는 앙투안 아르노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앙투안 아르노는 교리논쟁에 불을 붙인 저서를 발표함으로써 신학 교수단의 심판을 받은 얀센주의의 옹호자이자 예수회 교단의 적이었다.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에 실린 편지에서 파스칼은 예수회의 해이해진 도덕률을 비난했는데, 도덕률의 해이는 예수회가 포르루아얄과 벌인 논쟁 과정에서 드러난 약점이었다. 파스칼은 예수회 수사들의 대화와 저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여, 때로는 비웃고 때로는 분개하면서 그들을 깎아내리고 있다. 은총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2통의 편지에서 파스칼은 중재자의 지위를 제안했는데, 이 덕분에 포르루아얄은 1668년 '교회의 평화'에 서명함으로써 얀센주의자들이 시달림을 받아온 종교적 갈등에 잠정적인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는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그 인기는 이후 계속 유지되었다. 그 비결은 우선 그 형식 덕분이다. 과장되고 장황한 수사학이 이 책에서 처음으로 다양하고 간결하고 꼼꼼하고 명확한 문체로 바뀌었다. 프랑스 문학 비평의 창시자인 니콜라 부알로가 인정했듯이 이 작품은 프랑스 근대 산문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이 상류사회와 개신교도 및 회의주의자들한테까지도 인기를 얻은 것은 예수회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그들의 구미에 맞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영국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영국 국교를 위협할 때마다 이 책을 더욱 폭넓게 읽히게 했다. 하지만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는 가톨릭 교회에 도움을 준 측면도 있다. 가톨릭은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자체의 약점을 없앴기 때문이다. 그리고 1678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가 직접 나서서 교리 논쟁 과정에 제기된 명제의 절반을 폐기했는데, 이때 폐기된 명제들은 파스칼이 비난한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는 매년 종교의 회복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앙투안 아르노의 논문 〈영성체를 자주 행하는 문제에 대하여 De la Frequente communion〉(1643)에 제시된 사상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데 이바지했다. 아르노는 이 논문에서 방탕한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짓더라도 잦은 영적 교감으로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항의했다. 그후 이 생각은 프랑스 교회가 1685년 낭트 칙령(프랑스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칙령)을 폐지한 데 대한 반발을 느낄 때까지 아무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명제로 남아 있었다. 예수회 교단이 주로 교회 당국에 대한 복종과 정통성에 관심이 있는 반종교개혁을 표방하는 반면,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는 기독교적 사랑을 통한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의 결합을 강조하는 정신적인 접근방식을 옹호했다.

파스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에 따라 불공평하게 적용되는 도덕률의 이중 기준을 거부하고, 강제성이 없는 권고와 강제성을 가진 훈계의 구별을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삶과 밀착되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복음주의자의 이상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제휴했다. 이런 의견은 결코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파스칼은 모든 이기심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신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완전무결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에 대한 갈망을 떠나서는 어떤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의 열렬한 확신을 부여했다. 파스칼이 생각하기에 도덕성과 영성(靈性)은 결코 떨어질 수 없었다.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에서는 파스칼 자신의 정신적 발달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처음 몇 통의 편지에서는 조롱하는 말투가 자비롭다기보다는 건방지고 신랄하지만, 그후부터 그의 종교의식은 갈수록 점점 더 세련된다.

〈명상록〉

파스칼은 마침내 기적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교리의 증거에 대한 명상 결과인 〈그리스도교 변명 Apologie de la religion chretienne〉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 저서는 그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1657년 여름부터 1658년 여름까지 그는 대부분의 기록과 단편을 모았는데, 나중에 편집자들은 이것을 〈명상록〉이라는 부적절한 제목으로 출판했다. 〈명상록〉에서 파스칼은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인간을 위대함과 비천함이 뒤섞인 이해할 수 없는 혼합물, 본질적으로 진리와 최고선을 갈망하면서도 진실할 수 없고 최고선에 도달할 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철학이나 세속주의가 설명하지 못하는 이런 모순을 설명하는 종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회의론자의 무관심은 '내기'를 통하여 극복되어야 한다고 파스칼은 말했다. 즉,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회의론자가 신을 믿는다 해도 전혀 손해볼 것이 없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회의론자는 신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에게 도달해야 한다고 파스칼은 주장했다. 예수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알리러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피조물인 인간은 조물주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색인 : 회의주의, 파스칼의 내기). 이 저서의 제2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우화적 해석론을 성서의 상징에 적용시키고 있다. 즉 율법학자가 쓴 구절을 재검토하고, 진정한 종교의 지속성과 모세의 과업,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역할에 관한 증거를 개관한 다음, 마지막으로 원시 교회와 예언의 성취를 묘사하고 있다. 〈명상록〉은 영성에 관한 논문이다. 파스칼은 성인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개종시키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파스칼의 〈명상록〉은 시대의 시련을 견뎌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주로 자신이 아는 몇몇 개인들을 상대로 쓴 것이다. 그는 방탕한 친구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저자들(미셸 드 몽테뉴, 회의론자인 피에르 샤롱,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인 피에르 가생디, 영국의 정치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한테서 설득력 있는 논거를 찾았다. 파스칼에게 회의론은 하나의 단계에 불과했다. 특히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비참함은 오로지 타락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있으며 인간이 타락의 결과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는 파스칼의 주장과는 별도로, '인간은 무한히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파스칼의 또다른 주장을 활용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명상록〉의 제1부를 위해 제2부를 희생했고, 철학을 지키기 위해 성서 해설을 놓쳤다. 바울로와 마찬가지로 파스칼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제2의 아담이었다. 끝으로 파스칼은 자신의 심리적 분석이 그 자체만으로는 '부조리의 철학'을 배제하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부조리의 철학'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계시에 관한 '일련의 사실'로 이런 분석들이 수렴하는 것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수렴은 너무 놀라운 것이어서, '괴로워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qui cherche en gemissant)에게는 신의 섭리로 보일 정도다.

파스칼은 다시 과학 탐구에 몰두했다. 그 계기는 '포르루아얄의 신사'들이 〈기하학원론 Elements de geogmetrie〉을 쓰는 데 그의 도움을 요청했고, 둘째, 당시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던 문제인 사이클로이드 곡선(한 원이 미끄러지지 않고 일직선 위를 굴러갈 때, 그 원둘레 위의 한 점이 그리는 곡선의 궤적)에 대해 그가 발견한 것을 발표하라는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금 명성을 얻은 그는 자부심을 느꼈지만, 병에 걸리자 이전의 마음가짐을 되찾았고,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성직자 찰스와 존 웨슬리 형제가 나중에 그토록 높이 평가하게 된 〈개종을 위한 기도 Prayer for conversion〉를 썼다. 병 때문에 정상적으로 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그는 그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과 금욕적이고 헌신적인 생활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제문집'(교회 당국의 요구에 따라 누구나 성사[聖事]를 받기 전에 반드시 서명해야 하는 얀센주의의 5가지 명제를 비난한 서류)이 불러일으킨 논쟁에 참여했다. 포르루아얄의 신학자들과 의견 차이가 심해지자 그들과 관계를 끊지는 않았지만 그는 결국 이 논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파스칼은 1662년 8월 19일 끔찍한 고통을 겪은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이 고통은 아마 위궤양이 악화되어 암세포가 뇌척수막까지 전이한 데 따른 뇌척수막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죽을 때 얀센주의자가 아닌 교구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

평가

파스칼은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에서는 유창한 시사 평론가의 면모를 보였고, 〈명상록〉과 개인 기록에서는 영감을 받은 예술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 풍부한 재능 때문에 혼란된 삶을 살았다. 그가 미분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의 지나치게 경직된 정신적 기질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의 일부는 인간과 신의 신비로운 관계를 마치 기하학 문제처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가 재능의 다양성에서 얻은 이익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의 종교적 저술이 그토록 엄밀한 것은 과학적인 훈련 덕분이다. 구체적 개념에 대한 그의 애착은 〈명상록〉에서 그토록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맹렬한 공격 방법을 거부하겠다는 그의 결심에는 물론,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에 가득 차 있는 일련의 인용문에도 드러나 있다. Macropaedia(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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