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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

[스크랩]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4

by 8866 2008. 2. 17.
‘국제철도 종단항’ 둘러싼 최초의 부동산 투기 소동
한 달 만에 1000배 뛴 땅값…“나진에선 개도 지폐 물고 다닌다”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만주와 일본을 잇는 신설 철도 연결 항구.’ 1920년대 후반,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겠다는 야심에 불타던 일본은 함경북도에 인구 40만의 거대 물류기지를 개발하겠다고 선포한다. 후보지로 거론된 청진과 웅기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지만, 최종 선정된 곳은 지도에도 없던 오지마을 나진. 그 와중에 빚어진 엄청난 땅 투기 열풍은 조선반도 전체를 달구고, 전 재산을 투자해 미친 듯 땅을 사들인 사람들은 ‘쪽박’과 ‘대박’, 극과 극의 길을 가는데….

조선총독부가 길회선 종단항 예정지로 발표한 나진만에 대한 ‘동아일보’ 1932년 11월13일자 르포기사. 기사 위쪽 사진은 지도에 이름조차 표시되지 않았던 오지 나진만의 당시 전경이다. 왼쪽은 나진 주변에 대한 부동산 투자로 수백배 차익을 남긴 동일상회 두취 김기덕.

1925년 가을, 함경북도 청진 동일상회 두취(頭取·대표이사) 김기덕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외딴 포구 나진을 향해 출장길에 올랐다. 나진은 함경북도 토박이인 김기덕조차 처음 듣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궁벽한 오지였다. 청진에서 출발해 지도에 ‘신안’이라 표시된 미지의 포구 나진까지 가려면 해안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100km를 내달려야 했다.

‘오늘 하루도 녹록지 않겠는걸. 대체 나진이 뭔데 청진, 웅기랑 맞먹는다는 걸까.’

얼마전 사업상 알고 지내는 일본인 관리로부터 길회선(吉會線·옌지-회령 철도) 종단항(終端港·철도종착역과 연결된 항구) 후보지가 청진, 웅기, 나진 세 곳으로 압축됐다는 정보를 건네들은 뒤부터 줄곧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의문이었다.

‘청진이야 인구 4만의 중견도시인데다 함경북도 최대의 항구이니 당연히 유력한 후보지일 테고, 웅기야 병합 이후 일본이 총력을 기울여 건설한 군항이니 청진과 자웅을 겨뤄봄 직한데, 황무지나 진배없는 나진은 도대체 왜 후보지에 낀 것일까. 청진, 웅기와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나진이 종단항으로 유력하다는 뜻 아닌가.’

김기덕은 일단 나진이 어디에 붙어 있고 어떻게 생긴 곳인지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른넷이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회한 사업가는, 나진까지 가는 네댓 시간의 여정 동안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종단항 후보지에 슬그머니 나진을 끼워넣은 일본의 속셈이 뭘까 숙고하고 또 숙고했다.

김기덕은 1892년 함경북도 부령군의 가난한 농부 김형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인근 경성군의 함일학교에서 얼마간 신학문을 닦은 후 열여덟 살에 혈혈단신으로 청진에 가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강제합방을 한 해 앞둔 청진의 상권은 이미 일본인 상인들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김기덕은 이와타(岩田)라는 일본 상인의 상점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일했다. 근면하고 명석한 김기덕은 잔심부름꾼 생활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해 열심히 일본어 실력을 닦았다.

강제병합 후 청진에 축항(築港) 공사가 시작됐다. 항만의 시공을 맡은 일본 상선회사는 통역과 잔심부름을 맡을 소년을 구했다. 이태 동안 김기덕의 성실한 태도를 눈여겨보아온 이와타는 김기덕을 상선회사에 추천했다. 처음엔 일개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얼마 후 정규직 측량 보조기사로 채용됐다. 1년 후에는 ‘보조’자도 떼버리고 측량기사로 승진했다.

 

함경북도 토지왕 김기덕

 

서글서글한 성격의 김기덕은 누구와도 잘 어울렸지만, 특히 일본인 간부들의 총애를 받았다. 1913년 청진항 측량이 끝나자 측량기사들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김기덕을 아끼던 간부들은 귀국 선물로 그의 일본행을 주선했다. 오사카로 건너간 김기덕은 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간장 도매상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2년 남짓 일본 상인들의 상술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학교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생생한 현장학습을 했다.

1915년 스물네 살 김기덕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청진으로 돌아와 꿈에 그리던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지인들과 ‘공동무역상사’라는 회사를 차린 후 청진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조선의 곡물과 목재를 수출하고 연해주의 해산물과 잡화를 수입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사업인 만큼 국제무역은 그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줬다. 이와타의 상점에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간 지 10년도 안 돼 김기덕은 함북에서 손꼽히는 부호로 성장했다.

 

가장 유력한 길회선 종단항 후보지였던 청진항. 함경북도 최대의 항구였지만 다롄에 필적하는 대항구로 확장되기에는 만의 크기가 협소했다.

1917년 안정적으로 성장하던 김기덕의 사업에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일본 돈 1엔당 1.2~1.3루블에 거래되던 루블화의 환율이 러시아의 정치적 동요에 따라 급격히 오르내렸다. 김기덕은 제정(帝政) 러시아와 볼셰비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루블화의 수요가 격증할 것이라고 오판하고 루블화를 공격적으로 매집했다.

수백만 루블을 매집하고 루블화가 반등하기를 기다리던 그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됐다는 소식이었다. 루블화의 환율은 0.7루블, 0.6루블, 0.5루블… 날마다 폭락하더니 급기야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무모한 환투기의 실패로 김기덕은 러시아와의 국제무역에서 모은 수십만원의 현금을 하루아침에 고스란히 날려버렸다. 10년 남짓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찾아온 첫 시련이었다. 그러나 서른 살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김기덕은 조선은행에 전 재산을 담보로 잡히고 50만원을 대출받았다.

 

비록 빚은 빚이로되 50만원이나 졌다면 그의 수완을 알 것이다. 더욱이 조선은행 같은 빚지기 어려운 중앙은행에서 50만원의 거액을 빌려 쓴 것은 오늘날까지 희귀한 일이다. (‘재계의 괴걸 홍종화·김기덕 양씨’, ‘삼천리’ 1932년 12월호)

 

조선은행이 ‘한낱’ 조선인에게 20만원 남짓한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선뜻 50만원을 빌려준 데에는 총독부 국장의 압력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김기덕은 대출 알선을 부탁하기 위해 총독부 국장에게 1만원짜리 순금 괘종시계를 선물했다고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본인 관리들을 누구보다도 잘 요리한 조선인 사업가였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국형 정경유착’의 선구자였다.

어쨌거나 현재 가치로 10억원 상당의 뇌물로 500억원 상당의 현금을 확보한 김기덕은 파산 직전에 몰린 사업을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공동무역상사를 ‘동일상회’로 확대 개편해 만주, 연해주, 조선을 잇는 삼각무역을 개시했고, 회령에 백산상회를 차려 목재와 물화를 수집하는가 하면, 무산과 청진에는 각각 목재회사를 설립했다. 함경선 부설공사에서도 김기덕은 조선은행 대출 때와 비슷한 방식의 수완을 발휘해 철도국에 다량의 침목과 전신주를 납품했다. 그러나 김기덕의 ‘본업’은 무역과 목재가공업이 아니었다.

 

김기덕은 조선은행에서 대출받은 50만원을 밑천으로 땅 장사를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60억톤의 석탄과 3억그루의 목재, 10만정보의 미개간지와 무진장의 해산물을 지닌 함북을 점차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함북의 토지가격도 점차 올랐다. 예민한 눈을 가진 김기덕은 이 점을 깨닫고 상공업의 부지가 될 만한 곳을 택해 싼 값으로 사서 비싼 값으로 되팔았다. 그리하여 일약 백만장자라는 명성을 들었다. (‘재계의 괴걸 홍종화·김기덕 양씨’, ‘삼천리’ 1932년 12월호)

 

탁월한 안목을 가진 ‘부동산 투자자’ 김기덕이 1925년 가을 비포장도로 100km를 달려 외딴 포구 나진을 찾아간 이유는, 과연 길회선의 종단항이 될 만한 곳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청진과 웅기가 유력한 종단항 후보지라 하더라도, 나진이 종단항이 될 확률이 단 1%라도 남아 있는 한 투자를 신중히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해의 다롄’

 

일본은 섬나라다. 섬나라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려면 일본과 대륙 양측에 각각 대규모 항구가 필요했다. 근대 이후 일본은 대륙과 교역하기 위해 세 가지 간선을 개척했다. 첫째는 쓰루가(敦賀)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철도로 이어지는 ‘동해항로’, 둘째는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부산, 신의주를 경유해 펑톈(奉天)으로 연결하는 ‘조선철도’, 셋째는 모지(門司)에서 다롄(大連), 남만주철도로 이어지는 ‘황해항로’였다.

거리만 보면 최적의 노선은 쓰루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동해항로였다. 그러나 동해항로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이 겨울에 얼고 러시아 영토라서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가장 안전한 노선은 1910년 이후 완전히 일본의 통제 하에 놓인 조선철도지만, 이동거리가 너무 길고 철도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물류비가 비싸지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대륙과 교역할 때 일반적으로 황해항로를 이용했다.

 

종단항 결정 직후의 나진 풍경을 묘사한 1932년 11월의 잡지 기사.

길회선은 세 간선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안이었다. 쓰루가에서 소련의 지배하에 놓인 위험천만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대신 종단항과 길회선을 통하면 창춘, 옌지까지 안전하고 거리상으로도 더 짧게 갈 수 있다. 모지와 다롄을 연결하는 황해항로와 비교하면 이동 거리를 무려 30% 이상 줄일 수 있었다. 황해항로로 사흘 걸리던 여정이 길회선을 이용하면 이틀이면 주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길회선이 완공되면 일본과 대륙 사이의 교역은 대부분 종단항을 통해 이뤄질 것이 분명했다. 이론상으로 길회선 종단항은 남만주철도 종단항 다롄보다 경제적·정치적·군사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터였다. 인구 100만의 다롄보다 더 크고 부유한 도시! 그것이 길회선 종단항의 장밋빛 미래였다.

1909년 중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그때까지 조선 땅이던 간도와 길회선 부설권을 맞바꿨을 만큼, 일본은 길회선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길회선이 착공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어느 항구를 종단항으로 삼을 것인지는 결론을 보지 못했다. 16년이 지난 1925년에야 겨우 청진, 웅기, 나진 세 곳의 후보지를 발표할 만큼 종단항 건설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어느 항구로 결정하든 조금씩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결국엔 청진이 종단항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지만, 청진이 종단항으로 최적의 입지조건이었다면 그처럼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을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청진은 1925년 당시 함경북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으나 청어와 정어리잡이 고깃배들이 이용하는 어항으로 개발됐다. 함경북도에서 나오는 목재를 원만히 반출하기에도 협소한 청진이 만주와 중국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물자를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입지조건상 조선의 지방항구로는 손색이 없지만 8000t급 대형 선박 수백척이 한꺼번에 정박해야 하는 국제적 대항구가 되기는 역부족이었다.

웅기는 한일강제합방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항으로 개발된 항구였다. 항만시설이 청진에 비해 새것이라는 이점이 있었지만, 청진과 마찬가지로 항만이 협소하고 물살이 세다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청진에 비해 도시기반시설도 부족했다.

청진과 웅기가 종단항 후보지로 10여년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나진이 제3의 후보지로 선정된 것은 청진, 웅기 등 기존의 항구가 그만큼 종단항으로서 경쟁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진은 만철(만주철도)과 항만협회 기사들이 10여 년 동안 함경북도 해안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천혜의 항구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나진만은 관동령의 비탈이 낮아짐에 따라 해면이 넓어진다. 동남으로 터진 나진만의 어귀에 형이냐? 아우냐? 대초도와 소초도가 무슨 약속이나 있듯이 바깥 바다의 파도를 가로막고 있다. 만(灣)의 가장자리에서 바깥 바다를 볼 수 없어 바다라기보다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동에서 북, 북에서 서, 좌우로 말발굽모양으로 휘어진 해안선을 안고 나진동, 간의동, 신안동, 명호동, 유현동이 붙어 있고, 바깥 바다를 내다볼 여지도 없이 만 가장자리는 나지막한 평원한 지대다. 인위적 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천연적으로 생긴 나진만은 1년에 900만톤의 화물을 처리할 대항만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항만 해면의 면적이 2000만평에 가깝다 하거니와 만 가장자리에서 한번 바라보면 타원형으로 생긴 해면은 맑은 날이 아니면 광활한 해면을 전부 시야에 끌어들일 수 없을 만치 크고 창창하다. (‘종단항 나진 답사기’, ‘동아일보’ 1932년 11월13일자)

 

1925년 가을 답사를 위해 나진을 방문한 김기덕은 한눈에 나진이 항구로서 가진 무궁무진한 잠재력에 매료됐다. 나진만을 가득 채울 수백척의 대형 선박과 나진동, 간의동, 신안동, 명호동, 유현동 일대를 가득 채울 30만~40만의 인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물과 허허벌판뿐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폐가인지 사람 사는 집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허름한 초가집이 10여 채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신안면에 들어와 간의동에서 면사무소와 주재소, 보통학교를 본 이후 사람 사는 것 같은 마을은 한 곳도 볼 수 없었다.

 

웅기 시가 전경. 종단항 예정지 나진과 1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리적 이점 덕분에 돈벼락을 맞은 이 거리 양편에는 ‘떴다방’이 가득 찼고 브로커와 투기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아무리 천혜의 항만이라고 하나 이 험한 길로 어떻게 토사와 시멘트를 나르고, 무슨 수로 사람을 불러 모아 먹이고 재우면서 인구 30만~40만을 수용하는 대도시를 건설할까? 경성 인구가 30만인데….’

김기덕은 적잖이 우려됐지만, 일본의 기술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동행한 비서에게 바깥 바다와 나진만 사이에 놓인 대초도와 소초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섬 두 개 보이지? 당장 저 땅 몽땅 사들여! 그리고 나진 부근 토지가 매물로 나오면 논이건 임야건 황무지건 가리지 말고 사들여!”

나진 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김기덕은 내친김에 나진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웅기까지 둘러봤다. 입지조건만 놓고 볼 때 웅기는 나진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항만이었다. 웅기의 매력은 항만이 아니라 나진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나진은 지역이 협소하기 때문에 나진이 종단항으로 결정되면 시가지는 웅기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김기덕은 동일상회의 본사를 웅기로 옮기고 나진과 웅기의 토지를 전력을 다해 사들였다. 오늘날 그가 웅기에 300만평, 나진에 150만평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 유수의 대지주가 된 것도 이유 없는 일이 아니다. 김기덕은 말하자면 나진에 오늘이 있을 것을 벌써 7~8년 전에 꿰뚫어본 것이다.
나진의 지세를 아는 이는 짐작하리라. 내항 30리나 되는 바다를 고요히 싸안고 있는 천연의 방파제 노릇을 하는 것에 대초도와 소초도가 있다. 대초도는 약 80만평, 소초도는 약 40만평 되는 섬이다. 이 섬 두 개를 김기덕은 전부 샀던 것이다. 120여만평에 달하는 섬 2개는 온전히 김기덕의 소유이다. 이곳에는 다른 사람의 땅이라고는 한 평도 없다. 실로 옛날 전설에 나오는 ‘섬의 왕’인 격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총독부의 수용령에 의해 수용되지 않은, 장차 40만명이 들어앉을 시가지가 될 간의동, 신안동에 수십만평의 토지를 가졌고, 장차 공업지대로 개발될 웅기와 서수라(西水羅) 해안과 온성대안(穩城對岸)의 회막동에 약 300만평의 토지를 가지고 있다. 모두 합치면 450만평의 대토지가 김기덕의 소유인 것이다. (‘재계의 괴걸 홍종화·김기덕 양씨’, ‘삼천리’ 1932년 12월호)

 

대초도와 소초도 땅 120만평을 사는 데 김기덕이 지급한 돈은 고작 2만원 남짓. 농사는커녕 풀 한 포기 키우기 어려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돌산 황무지인 까닭에 평당 1, 2전이면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살 수 있었다. 대대로 살 사람이 없어 팔지 못하고 마음 썩이던 대초도와 소초도의 옛날 지주들은 1000원씩, 2000원씩 뭉칫돈을 받아들고 뒤로 돌아서서 김기덕을 손가락질했다.

“젊은 녀석이 정신이 나갔지. 그 섬이 어디 농사가 되는 땅인가, 땔나무가 나오는 땅인가. 하고많은 논밭 놔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초도를 사는가.”

“그러게 말이야. 그것도 조선은행에서 이자 내고 빌린 돈으로 산 것이라지. 꼬박꼬박 이자 물면서 돌섬 산 돈 갚으려면 제아무리 김기덕이라도 속이 터질 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대초도와 소초도의 옛날 지주들은 아름다운 나진만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대초도와 소초도를 볼 때면 황무지를 ‘거금’을 받고 외지인에게 떠넘긴 자신의 탁월한 선택을 기특하게 여겼다. 적어도 1932년 8월23일 아침까지는 그랬다.

 

불꽃 튀는 종단항 쟁탈전

 

1932년 8월23일,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은 담화를 발표했다.

 

“지난 20여 년간 심혈을 기울여 건설하고 있는 길회선의 종단항이 오늘로서 결정되었다. 그간 종단항 입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청진, 웅기, 나진이 후보지로 경합을 벌였고, 청진과 웅기 두 항구를 병용해야 한다는 의견과, 청진을 주항으로 삼고 나진을 보조항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 나진과 웅기 두 항구를 병용해야 한다는 의견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많았다. 다양한 의견을 검토하여 총독부와 만철이 숙고한 결과 길회선 종단항은 나진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오늘부터 만철이 중심이 되어 나진에 대규모의 축항설비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나진이 유일한 종단항이라는 것은 아니다. 장래 북만주의 개발이 진전하여 북만주와 북조선을 연결하는 대규모 산업단지가 구축되는 때에는 도저히 현재의 웅기, 청진 두 항만만 가지고는 물자를 처리하기 곤란하다. 길회선이 개통하여 2, 3년간은 웅기, 청진 두 항구를 함께 사용하면 족할지 모르나 10년, 15년의 후에는 포화상태에 이를 것이 명백하다. 그때를 대비해 만철은 나진에 대규모 축항공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진이 출현한다고 즉시 청진, 웅기 두 항구가 몰락하는 것은 아니다. 나진의 번영은 곧 청진, 웅기의 번영을 의미한다.” (‘길회선 종단항 나진으로 결정’, ‘동아일보’ 1932년 8월25일자)

이로써 일본이 길회선 부설권을 확보한 지 33년, 청진·웅기·나진 세 후보지가 발표된 지 7년 만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길회선 종단항은 나진으로 최종 확정됐다. 후보지가 발표된 1925년 이후 7년간 종단항 입지를 놓고 ‘국론’은 갈기갈기 찢겼다. 청진과 웅기 두 항구를 개축해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총독부의 주장과, 나진에 대규모 신규 항만을 건설해야 한다는 만철과 군부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사이 청진 주민과 웅기 주민의 유치 경쟁은 감정대립으로까지 비화했다. 길회선 종단항이 청진으로 확정됐다거니, 웅기로 결정됐다거니 하는 뜬소문과 오보도 줄을 이었다.

 

3일 오후, 경성에 머물고 있는 전 대의사(지금의 국회의원) 나카노(中野實吉)는 만철측이 청진을 길회선 종단항으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각지에 미묘한 분위기가 일고 있는데, 청진에서는 도처에서 화제가 되어 도시 전체가 긴장과 환희에 휩싸여 있다. (‘길회선 종단항 청진으로 결정’, ‘중외일보’ 1928년 10월10일자)

 

청진이 종단항으로 결정됐다는 오보가 나가면, 이내 자세히 알아보니 웅기가 종단항으로 유력하다는 또 다른 오보가 잇따랐다.

 

길회선 종단항은 청진을 주로 하고 웅기를 종항으로 하기로 결정한 소문이 많으나 조선에서 이 방면에 전문으로 연구하는 편에서는 종단항의 주종은 고사하고 화물의 대량은 웅기에서 출발하리라고 본다. (‘길회선 종단항은 청진보다 웅기 유력’, ‘중외일보’ 1928년 10월14일자)

 

청진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가면 웅기 주민이 동요하고, 웅기가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가면 청진 주민이 동요했다. 나진으로 종단항이 최종 결정되기 6개월 전에도 웅기가 종단항으로 결정됐다는 소문이 돌 만큼 종단항 입지 문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최근에 와서 길회선 철도 종단항 문제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물의거리가 되고 있는 웅기읍 일원 신안면 일원 방면은 실로 지가가 폭등했다. 그렇게 된 것은 대자본가들이 웅기 부근 토지를 매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토지가격이 급등현상을 보이자 무지한 촌민들은 대대로 자기들의 전 재산으로 목숨을 걸고 있던 소유 토지를 전부 매각해 가지고 일시에 낭비해버리고 서북간도 등지로 유리 표랑하는 처참한 현상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토지 브로커들은 날이 갈수록 활기를 띠고 있다. (‘웅기읍 토지 폭등’, ‘동아일보’ 1932년 1월17일자)

 

1931년까지만 해도 종단항의 입지는 청진이냐 웅기냐 아니면 청진과 웅기 병용이냐의 문제로 좁혀지는 듯했다. 만철과 군부에서 제기한 나진에 종단항을 신규로 건설하는 문제는 일찌감치 논의선상에서 배제되는 듯했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논의는 180도 뒤집어졌다.

만주 전역이 일본의 실질적 지배하에 떨어지면서 길회선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대규모 만주 개발 계획이 입안됨에 따라 청진, 웅기 두 항구만으로는 만주에서 쏟아질 엄청난 물자를 처리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급변한 국내외 정세 덕분에,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졌으되 건설비용 문제로 논의선상에서 배제되었던 나진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나진에 불어닥친 ‘땅바람’

 

나진이 길회선 종단항으로 결정됐다고 발표되자 인구 100여 명의 한미한 어촌에 불과하던 나진은 일약 전 조선, 전 아시아적 명소로 떠올랐다. 나진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단지 그곳에 동양 굴지의 대항구가 들어선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철에서 축항공사를 위해 첫 삽을 뜨기도 전, 조선·일본·만주·중국에서 투기꾼이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종단항 나진항!’이 발표되자 곧 토지의 매매가 성행하여 소위 땅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토지 매매 대금의 수수는 자연스럽게 금융기관이 있는 웅기에서 행해졌다. 따라서 토지 매매는 간혹 나진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웅기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웅기가도(街道) 좌우에는 토지 매매인 중개인으로 가득 찼다. 여기에다 나진에 돈벼락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남들이 돈 버는 판이라도 구경하자고 돈과는 인연이 먼 사람들까지 견학삼아 산보를 나서서 그야말로 웅기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진 잡화’, ‘조선일보’ 1933년 2월3일자)

 

웅기는 비록 종단항에 선정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황무지 나진과 가장 가까운 도시인 덕분에 덩달아 돈벼락을 맞았다. 종단항 발표 이전 한 평에 1~2전, 비싸야 20~30전 하던 나진의 땅값은 발표 직후 2~4원, 한 달 후에는 20~40여 원까지 치솟았다. 한 달 사이에 ‘1000배’ 이상 치솟은 것이다.

 

1932년 8월 중순. 함경북도 경성군에 갔다가 일주일쯤 뒤에 청진을 거쳐 웅기항에 이르렀다. 이때 웅기의 전 시가지는 “땅!” “돈!” 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몇 해를 두고 청진이냐 웅기냐 나진이냐 하여 수수께끼처럼 이어져오던 길회선 종단항 문제가 필경 나진으로 결정되어 8월23일로서 정식발표가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토지 열풍이 휘몰아쳤다.
“자 이제 됐다!” 하고 와글와글 모여드는 것은 모두 다 브로커 무리다. 여관마다 대만원. 거리에는 밤낮없이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실로 공전의 대활기!
나진은 웅기에서 남쪽 30리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포구로 산이 좌우에 둘러 있고 인가가 적은 황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만 해도 거기의 토지 시가가 한 평에 불과 2~ 3전이던 것이 지금은 일약 10~20원까지 올랐다. “아아 나진 근처에 땅마지기나 있었던들 두말할 것 없이 부자는 떼어놓은 것을!” 하며 탄식을 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아닌게아니라 거기에 수십만평씩이나 가진 청진의 김기덕, 나남의 홍종화 같은 행운의 대지주들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네들이 그만한 토지를 장만할 적에는 그리 큰 힘이 든 것도 아니다. 만평이라 해야 100여 원가량이면 족했던 것이다. 또 그곳 빈농들이 지세 체납으로 말미암아 차압을 당하게 될 때 기십전 되는 지세나 물고 거저 가질 수도 있었다. 이러든 것이 오늘날 와서 천 배, 만 배나 오를 줄이야 꿈엔들 어찌 생각했으랴. (‘나진만의 황금비’, ‘동광’ 1932년 11월호)

인구 4만의 도시 청진이 인구 100명도 안 되는 나진에 밀려 종단항 유치에 실패하자, 청진 주민들은 일치단결해 ‘종단항 탈환 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당시의 청진 시가.

 

종단항 건설을 위한 측량이 시작되기도 전에 땅값부터 폭등했다는 뜻에서 나진, 웅기에서는 ‘땅바람’ ‘토지바람’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조선, 일본, 만주, 중국에서 달려온 브로커들은 아무나 붙잡고 땅 가진 것 있으면 팔아달라고, 혹은 좋은 땅 있는데 사겠냐고 말을 걸었다. 어떤 땅은 하루에 10여 차례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웅기는 도시 전체가 흡사 ‘야바위판’이었다. 웅기에 가면 담뱃값도 100원짜리 지폐로 내고, ‘팁’도 100원짜리 지폐로만 주고, 개도 1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나진 땅을 둘러싼 전설도 여럿 나왔다. 나진의 늙은 어부는 몇 평 안 되는 땅을 팔아 1만여 원(현재 가치 10억여 원)을 수중에 쥐고 집에 돌아와서 지폐 뭉치를 베개에 넣고 자다가, 평생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라 너무 기쁜 나머지 실성을 했다.

 

어떤 이는 수년 전에 나진에다 수만평 되는 밭을 사두었더니 수확은 적고 지세만 물게 되는 것을 성가시게 여겨 종단항이 발표되기 바로 몇 달 전 매입 원가에서 얼마 밑지고 다 팔아버렸다. 그것이 지금 시가계획도에서 가장 중요지로 최고가이며 멀지 않은 장래에 매 평 200원씩 될는지도 모른다 한다. 그 사람은 후회막급이라 하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다 한다.
이러한 비극이 있는 반면에 또 희극도 있다. 어떤 브로커가 한 1000평 땅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 땅을 팔라고 권하며 매평 8원씩 주겠다 하는 것을 땅임자는 통틀어 8원이라는 줄 잘못 알고 승낙했다. 그 땅이 밭이 아니고 산판이므로 종단항 발표 이전에는 비싼 값으로도 매평 5리(0.5전)였다. 땅임자가 땅값을 받으러 갔을 때 8000원을 내어주는 고로 하도 어이없어 “무엇을 이렇게 주오?” 하고 물으니 브로커가 대답하기를 “여보 아까 한 평에 8원 씩으로 계약하지 않았소? 그러니 모두 8000원이면 맞지 않소?”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땅임자는 넋 잃은 사람같이 아무 말도 못하고 돈을 가지고 덜덜 떨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서는 이내 실성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한다. 겨우 30원의 자금으로 일주일 만에 2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번 청년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 같은 참말. 이것도 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다. (‘나진만의 황금비’, ‘동광’ 1932년 11월호)

 

김기택은 몇십호(戶) 되지 않던 나진 원주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면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면서 월급 30원을 받았다. 그에게는 자기 땅, 종중 땅 합쳐 100만평의 땅이 있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 땅을 다 팔아봐야 서울에 집 한 채 사기 어려웠다. 그러나 종단항이 결정된 후 그는 하루아침에 천만장자가 됐다. 그밖에도 웅기의 김영근은 40만평, 나남의 홍종화는 50만평의 나진 땅을 샀다가 수백만원을 벌었다.

그러나 나진 땅바람의 최대 수혜자는 누가 뭐라 해도 대초도, 소초도를 몽땅 소유한 토지왕 김기덕이었다. 웅기의 토지 300만평을 제외하고 나진 토지 120만평만 평당 10원씩 환산해도 120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2만원 남짓 투자한 돌섬이 7년 만에 무려 600배의 수익을 안겨준 것이다. 1932년 당시 1200만원 정도의 자산을 소유한 조선 사람은 ‘토지대왕’ 민영휘 후작이 유일했다.

 

인구 10만 규모로 추정되는 오늘날의 나진항. 1991년 북한은 이 지역 일대를 경제특구로 지정해 해외투자 유치를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최근에는 중국에 50년간 항만시설 사용권을 넘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대초도와 소초도가 시가의 10분의 1 가격에 해군에 수용된 이후 김기덕은 청진 생활을 정리하고 경성으로 이주했다. 비록 수용가가 시가의 10%에 불과했다고는 하나, 그가 대초도, 소초도로 확보한 현찰은 무려 120만원에 달했다. 경성으로 돌아온 그날 김기덕은 전 재산을 잡혀 조선은행에서 당겨 쓴 50만원의 부채를 상환했다.

 

‘종단항 탈환’ 청진 시민 궐기대회

 

나진이 돈잔치를 벌이고 있는 동안 청진 주민들은 대재앙을 맞았다. 청진은 가장 유력한 종단항 후보지로 토지 투기가 기승을 부리던 곳이었다. 종단항이 나진으로 결정된 이후 땅값이 폭락하자 빚을 끌어와 땅 투기에 나섰던 이들은 알거지가 됐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투기꾼이 속출했다. 청진에 사는 김씨는 누거만의 황금을 뿌려 청진 땅 수백만평을 사놓고 ‘로스차일드’의 꿈을 꿨다. 그러나 그는 나진이 종단항으로 결정됐다는 전보를 받고 혼절해 와병 사흘 만에 “종단항, 종단항”을 연이어 부르다가 세상을 떠났다.

1925년 세 곳의 후보지가 발표된 이후 4만 청진 시민은 사실상 종단항 유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종단항으로 웅기나 나진이 유력하다는 소문이라도 나돌면 즉각 진정단을 조직해 총독부로 파견했고 ‘종단항 유치 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총독부로서는 일치단결한 청진 주민이 무서워서라도 종단항으로 청진을 배제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처럼 간절히 소망하던 종단항을 한낱 조그만 어촌인 나진에 빼앗겨버리자 청진 주민은 집단적인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거리는 온통 눈물바다가 됐고 도시는 활기를 잃어 초상집처럼 숙연했다. 종단항 발표 이틀 후인 1932년 8월25일 오후 7시 청진공회당에서 열린 ‘종단항 탈환 청진 부민 궐기대회’에는 무려 700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인구 4만의 도시에서 2% 가까운 주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나진에 ‘강탈당한’ 종단항을 되찾아오기 위해 모였다.

 

공직자 유지 등 20여 명은 부민의 생명선인 종단항을 탈환하여 청진을 사수하자는 비분한 열변을 토한 후 비장한 결의로 결의문을 귀족원, 추밀원의 각 의장을 위시하여 척무성, 총독부 등 각 관계당국에 타전하는 동시에 5명의 진정원을 선출하여 즉시 상경 총독부에 진정키로 했다. 전 부민이 일치단결로 종단항을 탈환하기 위해 매진키로 결의한 후 오후 11시 반경에 폐회했다.
길회선 종단항이 나진항으로 결정된 것은 기대 많던 청진항으로서는 치명상이라 하여 부민대회에서는 제1, 제2, 제3, 제4의 진정 위원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그 선발대로 제3 진정위원 조동운, 차운철, 세토(瀨戶茂一郞), 니시하라(西原義一) 등 5명은 금 27일 아침 상경했다. 당일은 토요일이라 총독부 관계자들에게 대한 진정은 후일로 미루고 우선 천하의 여론을 환기코자 진정위원 5인은 경성 부내의 각 신문사를 방문하고 적극적 성원을 구했다. 이와 전후하여 제1번, 제2번으로 상경한 황종국, 니시하라, 오카모토 등 4명도 빠른 시일 내에 도쿄에 건너가서 중앙 정계 관계자들에게 진정하리라 한다. 총독부 진정원들은 말하되,
“문제의 종단항은 청진 웅기를 도외시 않고 두 항구 병용주의를 총독부 수뇌부가 누누이 언명한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번 그를 나진으로 결정해버린 것은 4만에 가까운 우리 청진 부민들의 여망을 너무도 무시한 것이며 당국의 신뢰를 너무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다수 부민의 장래 복리를 위하여 어디까지든 항쟁할 결심입니다.” (‘격분한 청진 시민대회’, ‘동아일보’ 1932년 8월28일자)

 

청진은 함경북도의 중심항구로 발전해온 도시였다. 4만 주민 절반의 생계는 항만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나진에 인구 30만~40만의 대도시가 세워진다는 것은 청진 주민으로서는 생계에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10년 안에 함경북도 중심항구로서 청진의 위상은 급속히 퇴락할 것이고 주민의 반수 이상이 나진으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됐다. 문제는 이주할 때 집이며 논밭 등을 사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위협 앞에 조선인, 일본인의 구분, 민관의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1932년 청진은 생존권을 매개로 완벽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그것도 자발적으로 구현했다. 종단항 탈환을 위한 청진 주민의 노력은 이듬해 겨울까지 지속됐다. 나진에 땅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친 지 6개월이 지난 1933년 1월, 나진만에 얼음이 떠다니는 괴사건이 발생했다. 나진은 한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곳인 만큼 겨울철 결빙의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호시탐탐 ‘종단항 탈환’을 노리던 청진 주민은 이러한 호재를 놓치지 않았다.

 

요사이 함경북도 나진 일대의 주민들은 조선인, 일본인 불문하고 청진 발간의 ‘북선일보’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달하여 ‘북선일보’를 타도해야 한다느니, 불매운동을 단행한다는 등 여러가지 비난이 자자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지난 13일, 14일 양일간 혹한에 나진항의 내항 30리가 전체 결빙되어 3일간 배가 통하지 못하였으니 나진의 종단항 문제는 이에 수포에 돌아갈 것이다”라는 삽화기사가 지난 16일, 17일, 18일부 ‘북선일보’에 사흘간 연재되었으므로 이에 분개한 것이다.
나진 주민들은 지난 19일 고사여관에 임시 긴급회의를 열고 대표를 선출하여 만철과 함께 조사한 결과 ‘북선일보’가 보도한 내항 30리 결빙과 기선 불통 기사는 허무맹랑한 날조 기사이고 사실은 항구 주변에 얼음성애가 약 두어 자 넓이로 앉았고 명호동 방면으로부터 바람에 떠내려온 얼음성애가 서로 엉겼다가 다음날 북풍에 다시 물러나간 것뿐이라 한다. 요컨대 이는 종단항의 나진 결정에 불만을 가진 청진 소재 ‘북선일보’가 나진의 종단항 건설을 방해하고자 그와 같은 허무한 기사를 게재하여 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것이라 한다. (‘결빙설, 나진주민 분기’ ‘동아일보’ 1933년 1월30일자)

 

종단항 건설 문제로 함경북도에서는 10여 명의 백만장자, 100여 명의 십만장자가 출현했지만 지역감정은 극도로 악화됐다. 총독부는 청진에 대규모 공단을 건설하고 항만과 철도를 확장하는 당근책으로 흉흉해진 청진 주민의 민심을 가까스로 수습했다.

 

나진의 추억

 

“관변에 있는 유력자를 통해 비밀리에 나온 말일세. 서해안에 제2의 나진이 생긴다네. 지금은 관청에서만 알 뿐이지만, 항만 용지는 비밀리에 매수되었네. 머지않아 당국자로부터 공표가 있을 것일세. 어때?” “대관절 어딘가?” “그걸 낸들 아나. 그 모씨라는 이만 알지. 날더러 만원이라도 자본을 끌어오면 자기는 설계도를 복사해낸 사람이라 거기서도 어디어디가 요지인지 아니까, 그 요지만 산단 말이지. 그리고 많이도 바라지 않아. 비용 죄다 제치고 순이익의 20%만 달라는 거야.” (‘복덕방’, ‘조광’ 1937년 3월호)

 

소설가 이태준이 소설 ‘복덕방’에서 묘사한 토지 브로커의 활약상이다. 나진의 땅바람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아 불과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투기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 나진 일대 웬만한 곳의 땅값은 서울 땅값보다 비쌌다. 1000배씩, 1만배씩 올랐던 땅값은 10분의 1, 100분의 1로 떨어지고 나서야 진정됐다. 인구 40만의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는 만철의 예상과는 달리 광복 직전까지 나진은 인구 4만의 소도시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청진의 인구는 4만에서 8만으로 증가했다.

나진의 투기 열풍은 3년 만에 종말을 고했지만, ‘나진의 추억’은 영원했다. 총독부는 조선 곳곳에 길을 닦고, 공장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했다. 그때마다 개발이 있는 곳에 투기가 있다는 ‘나진의 추억’은 따라다녔다.

 

북선제철소의 청진 유력설이 떠돌고 각계의 중요인물이 속속 들이닥치자 청진 나남 양 도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정도로 토지 투기열이 맹렬하여 경향 각처의 토지 브로커가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토지 브로커가 퍼뜨리는 유근무근의 억측이 성행하여 그들의 수중에서 요리되어 땅값은 날개 돋친 듯 날이 갈수록 폭등하고 있다.
청진-나남 간 일등도로 연변을 중심으로 한 수성평야의 주요지대는 금년 여름보다 10배 이상 폭등했다. 지금까지 황무지나 모래벌판으로 세상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던 토지가 매평 3~4원에서 7~8원까지 거래되고, 갖은 협잡까지 끼어 도리어 지방 발전상 지장이 크리라 하여 일반 시민들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매도, 매수측은 유언비어에 주의하야 자중해야 할 것이다. (‘토지광시대 도래’, ‘조선일보’ 1936년 11월12일자)

 

‘투기적 투자자’

 

농사짓던 땅이 공장지대로 바뀌고 비포장도로로 연결된 마을에 아스팔트가 깔리면 토지 가치는 그만큼 증대한다. 근대화는 곧 지가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0여 년간 개발이 얼마나 지가를 올려놓는지 수도 없이 목도했다. 나진 토지바람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었던 집단적 땅 투기 열풍이었고, 브로커와 투기꾼이 합심해서 끌어올린 땅값도 사상 최대였을 것이다.

아무리 투기가 위험하다고 역설해도 근본적으로 투기를 막지 못하는 이유는, 투기를 통해 돈을 번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투기를 막기 위해 개발을 멈출 수 없듯 투기로 벌어들인 돈을 한푼도 남김없이 환수할 방법도 사실상 없을 것이다. 투기와 투자는 백지 한 장 차이이기 때문이다. 나진만을 에워싸고 있는 돌섬 두 곳을 사서 일약 천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김기덕은 투기꾼일까, 예리한 안목을 가진 투자자일까. 아마도 ‘투기적 투자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투기를 막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투기로 돈 버는 것이 배가 아파서가 아니다. 투기가 너무나 위험천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기를 막기 위해 발상을 전환해봄 직도 하다. 어지간히 연구하고 노력하지 않고서는 투기로 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이다. 나진에서 돈 번 사람은 수백 명을 헤아리지만, 그 몇백배, 몇천배의 투기꾼들이 청진에서 알거지로 전락했다. 전 재산에 목숨을 걸고 투기하고 싶은가? 나 같으면 꼬박꼬박 주는 월급 받으며 그냥 성실하게 살겠다.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부산, 인천, 원산 담보로 미국 병사 20만 빌려 천하를 얻으리라”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일본인 상점 점원과 요리사로 일하다 결국에는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에 올랐고, 강제합방 이후에는 20년간 중추원 고문을 지낸 당대의 실력자 이하영. 구한말 신분의 한계를 드라마틱하게 뛰어넘어 선도적인 기업가로 세상을 떠난 이 사내의 유일한 자산은 ‘짧은 영어실력’이었다. 우연히 만난 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조선에서 영어 할 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된 그가 황제의 밀명을 받아 워싱턴 사교계에서 펼친 ‘술과 춤의 외교전’, 기울어가는 나라 조선의 소극(笑劇) 같은 마지막 몸부림.

1887년 12월 미국으로 출발한 최초의 주미공사 일행. 큰 사진은 1926년 월남 이상재가 ‘별건곤’에 기고한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 갔던 이야기’ 기사.

1949년 5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전직 일본군 소좌(소령) 이종찬을 소환했다. 1937년 일본 육사(49기)를 졸업한 이종찬은 남태평양 뉴기니 전선에서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조선인이 일본군 장교로 임관된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일본군 최전방 야전부대를 지휘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종찬은 광복 이듬해 남태평양 전선에 동원됐던 조선인 병사들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다. 그러나 이종찬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은 것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고위 장교로 근무했다는 개인적인 이력 때문이 아니었다.

이종찬의 조부 이하영은 대한제국 시기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역임하고, 강제합방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뒤 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를 무려 20년간 중임한 인물이었다. 흐지부지 끝난 반민특위였지만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부의장·고의·참의를 역임한 자, 칙임관 이상 관리만큼은 죄질이 나쁜 친일파로 분류하고 엄중히 조사했다.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까지 지낸 이하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친일파였다.

그러나 ‘친일파 후손’과 ‘친일파’는 국민 정서상으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법적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반민특위의 조사는 이종찬이 과연 친일파인지 ‘무고한’ 친일파 후손인지 확인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1929년 이하영이 사망한 후 작위는 ‘법적’ 큰아들인 이규원에게 상속됐고, 이규원은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둔 1945년 4월 사망했다. 이종찬은 이규원 자작의 큰아들이자 법적 상속자였다.

이규원이 사망할 당시 이종찬은 남태평양 뉴기니 전선에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부친의 임종은 물론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을 만큼 전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동맹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함락되고 히틀러마저 자살한 마당에 일본 혼자 전세를 뒤집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최전방 야전부대 지휘관 이종찬에게 당면문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와중에 고향집에서 편지가 왔다.

 

“습작(襲爵)을 할까요?”

 

“총독부에서 습작 절차를 밟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습작 여부를 묻는 동생 이종호의 편지였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야전 군인에게 한가하게 습작 여부를 묻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열대의 전선에서 땅개처럼 구르다 패전을 목전에 둔 군인에게 자작 작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설령 작위가 탐났다 해도 전쟁 중인 지휘관이 대리인을 시켜 습작 절차를 밟는 것 또한 남 눈에 좋게 비칠 리 없었다. 이종찬은 대충 끼적거려 답장을 보냈다.

“습작하지 말라. 내 힘으로 살겠다.”

이종찬은 분명히 자신의 의사를 밝혔지만, 서울의 가족들은 총독부에 가서 ‘일본이 망하게 생겼으니 습작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대놓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서울의 가족들은 습작 서류도, 습작 포기 서류도 제출하지 않은 채 독촉이 오면 해결할 요량으로 차일피일 미뤘다. 패전을 코앞에 둔 총독부도 남의 집안 습작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어물어물하는 사이 일본은 패전하고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이종찬은 광복 이듬해 꾀죄죄한 패잔병 몰골로 귀국했고, 3년간 초야에 묻혀 자숙의 시간을 보내다 반민특위에 소환됐다.

 

이하영의 손자 이종찬 장군. 평생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해 참군인의 표상으로 존경받았다.

반민특위 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종찬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반민특위는 자진해서 습작을 거부한 이종찬의 ‘결단’에 찬사를 보내며 이종찬은 친일파의 ‘무고한’ 후손일 뿐 친일파는 아니라는 면죄부를 줬다. 한 달 후, 이종찬은 대한민국 육군대령에 임관돼 육군본부 제1국장에 보직됐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이종찬의 일본 육사 동기동창 채병덕 소장이었다.

반민특위의 조사, 육군대령 임관 등 어수선한 시기를 보내는 동안 이종찬에겐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2년간 교제해온 여인과 결혼하려 했지만 모친이 완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육군대령에 임관돼 군 최고 수뇌부에 들어갔다곤 하나 이종찬의 나이 이제 고작 서른다섯이었다. 스물두 살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줄곧 중국으로, 남태평양으로 야전을 떠돌다보니 사랑할 시간도 결혼할 시간도 없었다.

귀국한 이후 재야에서 낭인으로 떠돌던 시기 이종찬은 표자영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표자영은 분단 이후 북한에서 월남해 이종찬의 숙모가 경영하던 ‘성남 그릴’에서 회계 일을 보고 있었다. 이종찬은 의지할 데 없는 딱한 처지의 표자영을 동정했고, 동정은 이내 사랑으로 발전했다.

이종찬은 입대 후 모친에게 표자영과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모친 윤씨는 대한제국 시기 군수를 지낸 뼈대 있는 가문의 고명딸이었다. 보수적인 모친은 이종찬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표씨 가문의 지체가 이씨 가문과는 걸맞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효성이 지극한 이종찬이었지만 가문의 지체가 걸맞지 않아 결혼에 반대한다는 모친의 뜻만은 좇을 수 없었다.

반대 의사를 거두어달라고 모친을 간절하게 설득할 때마다 되돌아오는 것은 “다시는 그런 소리 입에도 담지 말라”는 호된 질책이었다. 모자간의 언쟁은 매일 같이 이어졌다. 언쟁이 잦아지자 참다못한 이종찬은 3대에 걸쳐 이어져온 집안의 묵약을 깨뜨렸다.

 

가문의 내력

 

“어머님이 지체, 지체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집안은 어떻습니까.”

분위기는 일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세상사람 모두 알고 있지만, 집안사람만큼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가문의 내력을 내뱉은 탓이었다. 이종찬의 조부 이하영이 구한말 미국공사와 일본공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낸 고관대작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씨 집안이 뼈대 있는 양반 집안이었느냐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종찬의 조부는 고관대작이었지만 그의 증조부는 경상도 동래의 구차하고 한미한 촌부에 불과했다. 이씨 집안이 지체 높은 양반 행세를 한 것은 불과 3대에 지나지 않았다. 한미한 집안 출신 이하영이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를 틈타 출세에 출세를 거듭하는 것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던 윤치호는 이하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하영씨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 거리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며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알렌 박사의 요리사로 일했다. 그런 다음 외부대신에 올랐고, 자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본래 그는 편지 한 장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양반가문 출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점잔을 빼며 처신했다. (‘윤치호 일기’, 1929년 2월28일자)

 

부산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던 이하영은 어떤 계기로 알렌 박사와 알게 된 것일까. 알렌 박사의 요리사는 어떻게 해서 한 나라의 외교를 좌지우지하는 외부대신에 오른 것일까. 편지 한 장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던 이하영을 조선 조정이 중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태평양 횡단선의 다섯 사내

 

1887년 12월10일, 영국 국적의 태평양 횡단 여객선 오셔닉(Oceanic)호가 요코하마 부두를 출발했다. 오셔닉호는 하와이를 거쳐 19일 후 태평양 건너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오셔닉호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을 이 항해는, 조선 조정에는 실로 크고도 위대한 모험이었다. 승객 대부분은 태평양을 오가며 차(茶)를 사고파는 상인이었다. 일등실 승객 중에는 동양인도 있었고 서양인도 있었지만, 단 다섯 사나이를 제외하면 모두 말끔한 양복 차림이었다. 문제의 다섯 사나이는 높고 검은 비단 모자(紗帽)를 쓰고, 가슴에 알록알록한 장식이 달린 검은 비단옷(黑團領)을 입고, 바닥에 나무를 덧댄 가죽신(靴子)을 신고 있어 복색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외부대신 시절의 이하영.

범상치 않은 다섯 사나이는 그런 기이한 옷차림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할 기세였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차림새는 그들만 못하지만 다섯 사나이와 동행임이 분명한 승객이 이등석에 2명, 삼등석에 3명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이한 복장의 다섯 사나이와 동행한 미국인 의사 알렌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일등실 승객들에게 그들이 미국에 부임하는 초대 조선공사 일행이라고 소개했다. 다섯 사나이는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삼등서기관 이상재, 번역관 이채연, 그리고 이종찬의 조부인 이등서기관 이하영이었다.

서양인들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였지만 박정양 공사 일행은 목숨을 걸고 비장한 각오로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었다. 아니, 임금과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박정양이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된 것은 1887년 8월18일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체결로 조선과 미국은 외교관계를 맺었다. 1883년 5월 푸트(Foote)가 초대 주(駐)조선 미국공사로 한양에 부임한 이래 4년간 주조선 미국공사는 다섯 명이나 교체되었지만, 조선 정부는 주미 조선공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보낼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1882년 임오군란 이래로 조선의 종주권을 강력히 주장하는 청나라의 집요한 내정간섭과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고종이 미국과 유럽에 공사 파견을 시도할 때마다 청나라는 구구한 이유를 들어 반대했지만 본심은 하나였다.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라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것이었다. 저장성이나 산둥성이 미국으로 공사를 파견할 수 없듯, 속국인 조선 역시 미국으로 공사를 파견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청나라 역시 구미 열강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처지여서 흑심을 품고 조선으로 오겠다는 구미의 공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조선이 구미로 보내는 공사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했다. 고종이 박정양을 주미공사로 임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조선 청국공사 위안스카이가 조선 정부의 공사 파견을 반대한 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조선은 약소국이며 자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전권공사를 파견할 수 없다. 둘째, 조선은 경제적으로 빈약한 나라이기에 전권공사를 파견하더라도 재정난으로 중도에 철수할 것이다. 셋째, 조선과 미국은 교류가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전권공사를 파견해도 할 일이 없다.”

청나라는 이처럼 완강하게 공사 파견에 반대했지만 고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9월23일, 고종은 박정양을 친히 불러 유지(諭旨·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를 내렸다.

 

대조선국 대군주는 종이품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박정양을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특파하는 바이다. 짐은 충실하고 부지런하고 총명하여 늘 가까이 두고 신임하는 경에게 명하노니 미국 수도에 주차(駐箚)하여 국서를 진정하라. 아울러 상대국에 통상교섭 일을 잘 할 것이며 우의를 돈독히 할지어다. -대조선 개국 496년 팔월 초칠일.

 

청나라가 조선의 미국공사 파견을 방해한다는 소식은 열강들, 특히 당사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외교 분쟁으로 비화됐다. 조선과 미국, 청의 외교적 교섭은 박정양이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된 지 석 달이 지난 11월에야 타결됐다. 청나라는 소위 ‘영약삼단(約三端)’을 이행한다는 조건으로 박정양의 미국 파견을 허락했다. 영약삼단이란 ‘첫째, 조선공사가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알현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외무성과 백악관을 방문한다. 둘째, 공적 행사나 사적 연회에서 조선공사는 마땅히 청국공사 다음에 입장하고 아랫자리에 앉아야 한다. 셋째, 중요한 사무는 먼저 청국공사와 협의한 후 그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 관례를 무시한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박정양 일행에게는 “짐의 뜻을 잘 헤아려 처신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영약삼단을 이행하지 말고 훗날 조선에 돌아와서는 나라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라는 말이었다.

 

선상의 기연

 

이하영은 1886년 스물아홉 나이에 외아문(外衙門)의 주사로 벼슬길에 올라 상서원 주부,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국록을 먹은 지 1년 만에 주미공사관 이등서기관이 되어 미국 땅을 밟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1884년 9월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난징(南京)호’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을 방문한 의사 알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하영은 한낱 미천한 장사꾼에 불과했다.

 

1884년 9월 장로교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알렌은 1905년 5월까지 21년간 조선에 머물면서 의료, 선교,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하영은 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인 1858년 경남 동래군 기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이 매우 구차해 동생 이준영과 함께 기장에서 동래장을 내왕하면서 찹쌀떡 행상을 다녔다. 끼니나마 때울 요량으로 통도사에 동자승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1876년, 그의 나이 열아홉 때 부산이 개항되자 혈혈단신 부산으로 이주해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집안이 한미하고 가난한 탓에 한문은 물론 한글조차 깨치지 못했지만, 점원으로 일하는 동안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깨닫고 밤낮으로 일본어와 일본 상인의 상술을 익혔다. 그렇게 8년을 열심히 살다보니 일본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고, 장사 밑천도 어느 정도 마련됐다. 개항 초기다보니 아직 조선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1884년 스물일곱이 된 이하영은 고용살이를 청산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사업은 평소 알고 지내던 평양 출신 상인과 동업으로 일본과 조선을 왕래하며 무역을 하는 것이었다. 이하영은 제2의 임상옥을 꿈꾸며 동업자와 함께 나가사키로 건너갔다.

그러나 믿었던 동업자는 낯선 도시 나가사키에서 동업 밑천을 몽땅 챙겨 도주해버렸다. 8년 동안 모은 전 재산을 장사 한번 해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날린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이하영은 하늘을 원망하며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가 올라탄 배는 상하이를 출발해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향하는 여객선 난징호였다.

난징호에는 이역 땅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조선으로 향하는 또 한 명의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의료선교사 알렌이었다.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한 알렌은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지원해 중국 선교사로 발령 받았다.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한 알렌은 난징과 상하이를 거점으로 의료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년 동안 넓디넓은 중국 땅을 발바닥에 땀나도록 쫓아다녔지만 선교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반서양적, 반기독교적 편견으로 가득 찬 중국인들을 상대로 선교 사업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국의 비위생적인 환경은 출산을 앞둔 아내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중국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알렌에게 동료 의사인 핸더슨 박사가 조언했다.

“중국에서 겉돌 게 아니라 조선으로 가는 게 어때? 조선은 개신교 선교사가 아직 들어가지 않았어.”

조선이 개신교 선교의 불모지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알렌은 곧장 뉴욕에 있는 장로교 선교본부에 조선으로 선교지를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 조선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찾고 있던 선교본부는 알렌의 신청을 신속히 승인했다. 1884년 9월, 알렌은 상하이에서 난징호에 올랐다. 근대 조선의 외교를 좌지우지한 두 ‘58년 말띠’ 동갑내기의 극적 만남에 대해 이하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갑신년(1884) 가을이다. 나는 이역 땅에서 비범한 사람을 만났다. 어떤 일이 있어 일본 나가사키에 갔다가 배편으로 귀국하는 길에 선상에서 알렌이라는 미국인 의사를 만났다. 서양의학을 선전하기 위해 동양에 파견되었다는 알렌은 초면인 나를 몹시 따뜻하게 대했다. 처음 청국 상하이에 와서 얼마를 지내다가 껄끄러운 인정 풍속에 쫓겨 역시 미지의 나라 조선을 찾아오는 알렌으로서는 조선 사람인 나를 따뜻하게 대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외국인이라면 모조리 호랑이나 표범같이 여기던 당시의 나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처음 만났으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친밀해진 우리는 인천 부두에 내렸다. 나는 알렌이 조선에서 최초로 사귄 지우(知友)이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이하영과 알렌이 처음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어나 영어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1882년까지 조선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83년에 단 한 사람이 생겼는데, 바로 윤치호다. 윤치호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다가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통역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윤치호조차 일본에서 겨우 넉 달 배운 영어로 통역노릇을 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윤치호는 영어 통역 초기에는 일본어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이중 통역했다.

1883년 민영익을 수반으로 하는 보빙사(報聘使) 일행은 워싱턴 방문길에 중국어-영어, 일본어-영어, 조선어-중국어, 조선어-일본어를 구사하는 4명의 통역을 데리고 갔다. 체스터 아더 미국 대통령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면, 한편으로는 중국어-영어 통역이 중국어로 옮기고 그것을 받아 조선어-중국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어본-영어 통역이 일본어로 옮기고 그것을 받아 조선어-일본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겨서 두 가지 이중통역을 종합하면 민영익 일행이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했다. 난징호 선상에서 이하영과 알렌은 아마도 일본어-영어 통역을 매개로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나가사키에서 빈털터리가 된 이하영은 어차피 부산으로 돌아가봐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귀국길 선상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귄 김에 무작정 그를 따라나섰다. 1884년 9월20일, 난징호가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닿을 때만 해도 이하영이나 알렌이나 앞길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렌에게 맡겨진 첫 보직은 주조선 미국공사관 무급 의사였고, 이하영에게 맡겨진 첫 보직은 무급 의사 알렌의 요리사였다.

 

갑신정변, 그리고 권력과의 만남

 

미국공사관이 알렌에게 제공한 것은 가족과 함께 살 집이 전부였다. 알렌의 요리사로 일하는 동안 이하영은 알렌에게 영어를 배웠고 알렌은 이하영에게 조선어를 배웠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크게 쓰일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알렌이 조선에 들어온 지 석 달째 되던 1884년 12월4일 밤, 누군가 황급히 알렌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제 저녁 산책을 끝낸 후 10시30분에 집으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자마자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외국인이 나를 불렀다. 거실로 나가보니 주조선 미국공사관 스커더 비서였다. 스커더는 죽어가는 사람의 응급치료를 위해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급히 와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우정국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저녁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불길이 번졌으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왕비의 조카이자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도가 민영익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자객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알렌의 일기’ 1884년 12월5일자)

 

알렌이 ‘개신교 선교사상 가장 획기적인 날’로 명명한 그날 밤, 우정국 개국 축하만찬 석상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알렌은, 온몸에 자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의 목숨을 극적으로 구해냈다. 알렌이 민영익의 치료를 위해 며칠밤을 지새우던 동안 곁에서 같이 밤을 새운 조선인이 있었다. 바로 이하영이었다.

 

알렌이 민영익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갑신정변 때였다.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의 곤봉에 맞아서 사망설이 나돌 정도로 중상을 당했다. 한의(韓醫)들이 백방으로 치료를 해보았지만 차도가 없어 양의(洋醫)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즉시 나를 찾아와서 의논했다. 나는 알렌을 민영익에게 안내했다. 민영익은 건강을 회복한 후 알렌과 친교를 맺게 되고 미국을 친근하게 여기게 되었다. 알렌의 자국 찬미가 민영익과 나에게 미국을 존경하게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죽어가던 민영익을 회생시킨 것을 계기로 알렌은 세도가 민씨 가문과 조선왕실의 신임을 얻어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됐다. 미국공사관 무급 의사로 조선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일약 어의(御醫)로 승차(陞差)한 것이었다.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을 세워줄 것을 건의해 승낙을 받아냈다. ‘개신교 선교 사상 가장 획기적인 날’ 민영익이 개화당 자객의 칼에 맞지 않았다면 쉽게 받아내기 어려웠을 승낙이었다. 이듬해 4월, 조선왕실은 최초의 근대식 병원 광혜원(개원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하고 알렌을 의사로 초빙했다. 알렌은 조선에서 사귄 최초의 지우 이하영이 새로 설립된 제중원의 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알렌에게 영어를 배운 지 1년 만에 이하영은 더듬거리면서 몇 마디씩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영어통역관 윤치호는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1883년 조선 정부는 외국과 교역에 필요한 영어통역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영어교육기관을 설치했지만, 졸업생들의 영어실력은 영 신통치가 않았다. 덕분에 이하영의 더듬거리는 영어는 당시 조선 안에서 조선인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어였다.

알렌은 이하영을 자신의 통역으로 삼았다. 알렌의 더듬거리는 조선어와 이하영의 더듬거리는 영어로 두 ‘58년 말띠’가 한참 동안 씨름하면 대충 뜻은 전달됐다. 알렌은 진료를 위해 고종을 알현할 때도 이하영이 함께 가길 원했다. 그러나 벼슬이 없는 이하영은 관복을 입고 어전에 나갈 수 없었다. 사정을 들은 고종은 배운 것도 변변치 않고 집안도 한미한 이하영에게 외아문 주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더듬거리는 영어실력 하나로 출세의 탄탄대로에 들어선 것이다.

 

해프닝, 해프닝, 해프닝

 

박정양 공사 일행은 안내책임을 맡은 참찬관 알렌과 그의 하인 김노미까지 도합 11명이었다. 1887년 12월10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이래로 조선공사 일행에게 선상 생활과 미국 생활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사고와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알렌은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었다.

 

출항한 지 6일 동안 폭풍우가 계속되는 악천후였다. 공사 일행은 모두 배멀미로 고생했다. 그들은 일등석 티켓을 5장만 가지고 있었지만 다같이 일등석 객실에서 머물렀고 객실에서 식사도 같이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등석 티켓을 두 장 더 구입해야 했다. 싸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강진희와 더러운 사내(dirty man) 이상재는 하인에게 식사를 타오게 해서 박정양 공사와 함께 객실에서 식사했다. 번역관 이채연은 얼간이였고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나마 이하영과 이완용이 일행의 나쁜 인상을 상쇄시켜 주었다.
일행은 항상 선실을 어지럽혔고, 징 달린 신발로 심하게 바닥을 긁고 다녔다. 몸에서는 똥 냄새가 풍겼고 선실에서 줄담배를 피워댔다. 일행의 선실은 씻지 않은 몸 냄새, 똥 냄새, 오줌 냄새, 조선 음식 냄새, 담배 냄새 등이 어우러져 무시무시한 냄새가 났다. 승객들은 매우 친절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공사 일행이 사라져준다면 매우 감사해할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박정양 공사의 방을 찾아 인사를 했지만, 악취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알렌의 일기’ 1887년 12월26일자)

1888년 초 주미공사 일행이 묵었던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 일행은 팰리스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지진이 난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와이에 가까워오자 날씨가 몹시 무더워졌다. 공사 일행의 씻지 않은 몸과 빨지 않은 옷에서 나는 냄새는 더욱 고약해졌다. 오셔닉호는 12월2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지만, 삼등실에 탑승한 중국인 승객이 천연두를 앓아 하선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공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19일 동안 배 안에 머물러야 했다. 오셔닉호는 화물칸에 실린 짐만 부린 채 다음날 새벽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출항했다.

12월28일 공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역시 천연두 승객 때문에 사흘간 배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천연두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하선을 허락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외교 사절을 무작정 배에 가둬둘 수도 없었던 항만당국은 1888년 1월1일 일등실 승객에 한해 하선을 허락했다. 보름 넘게 공사 일행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던 일등실 승객들은 뜻하지 않게 조선공사의 음덕을 입자 만세를 부르며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샌프란시스코 거리 곳곳에는 공사 일행을 환영하는 태극기가 게양됐다. 삼등서기관으로 공사를 수행한 월남 이상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상투잡이 공사 일행인 우리가 조선을 떠날 때에 공사관에 게양할 태극기를 미리 준비한 것은 물론 우리가 타고 가는 기선에도 객실에도 태극기를 꽂았다. 눈치 빠른 선주는 미리 태극기를 준비하여 식당이나 우리가 출입하는 문 입구에다 게양했다. 미국에 상륙할 때에도 부두, 정거장, 찻간, 호텔까지 태극기를 게양해 환영의 뜻을 표했다. 도처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볼 때 반갑기도 했거니와 미국인의 외교술이 발달된 것도 감복했다. (이상재,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 갔던 이야기’, ‘별건곤’ 1926년 12월호)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흘을 머문 공사 일행은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4년 전 민영익을 수반으로 하는 보빙사 일행이 갔던 길과 동일한 여정이었다. 공사 일행이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주미 조선공사 일행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할 일정을 협의했다. 국서 전달은 단순한 공사 부임인사가 아니었다. 조선이 미국과 대등한 독립국임을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의식이었다.

1888년 1월17일로 국서 봉정식 일정이 잡히자 주미 청국공사는 초조해졌다. 공사 파견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와 조선 정부가 합의한 ‘영약삼단’에 따르면, 박정양은 국서를 봉정하기 전에 청국공사를 알현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백악관에 가서 국서를 봉정해야 했다. 국서 봉정식이 하루하루 다가와도 조선공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참다못한 청국공사는 조선공사관에 참찬관을 보내 넌지시 영약삼단을 준수할 것을 종용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혹시 조선 정부가 영약삼단에 대해 일러주지 않던가요?”

박정양은 번역관 이채연 편으로 짤막한 글을 보냈다.

“미국으로 떠날 때 위안스카이 공사가 조정에 영약삼단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삼단을 준수하라는 훈령은 받지 못했소이다.”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는 지진이 났다고 놀라고,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는 앞가슴이 깊게 팬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을 기생으로 착각할 만큼 물정 어두운 박정양이었지만, 자신의 소임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박정양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외교적으로 인정받고 임금 대신 목을 내놓기 위해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맞지 않는 미국에 찾아온 것이었다.

이 의연하고도 현명한 외교적 수완이 전적으로 박정양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박정양은 공사로 임명된 후 병을 핑계 삼아 공사직을 사절할 만큼 겁 많고 소심한 인물이었다. 박정양의 유일무이한 미덕은 자기보다 똑똑한 참모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점이었다. 국서 봉정식을 둘러싸고 급박하게 돌아간 조선, 청국, 미국 사이의 외교전에서 이하영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백의사절 일행은 수륙만리 머나먼 길을 무사히 마치고 워싱턴에 당도했다. 부임 즉시 국서 봉정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미국정부는 예상 밖으로 냉정한 태도로 국서를 즉시 받지 않고 10여 일 후로 미루었다. 배짱 좋은 나는 외무차관 저택으로 방문해 직접 만나 담판을 벌여 진상을 알아냈다. 신임 조선공사의 국서 봉정을 연기하게 된 이유는 조선은 청국의 속령(식민지)인 줄 알았는데 새삼스럽게 공사가 왔다니 내막을 잘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처리했다간 국제분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조선의 입장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해 겨우 이해를 얻어냈다.
득의양양하게 일행이 기다리는 임시공관으로 돌아오니 박정양 공사는 의관을 갖추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 알고 보니 중국 공관으로부터 위문 사자(使者)가 왔다 갔다는 것이었다. 박정양 공사는 이런 황공한 일이 있느냐며 답례를 가겠다고 우겼다. 이에 일행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결과 박정양 공사가 섣불리 청국 공사관에 갔다가 만일 청국공사가 국서 봉정식에 동행하기를 직접 요구라도 하면 피할 도리가 없다는 이유에서 통역관 이채연을 대신 보내 사례하기로 결정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전권대신 민영익 일행이 체스터 아더 대통령을 공식접견하는 장면을 담은 ‘뉴스페이퍼’ 1883년 9월29일자 보도그림. 민영익 일행은 아더 대통령에게 큰절로 인사했지만, 4년 후 박정양 일행은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악수로 인사를 나눴다.

 

말단직원이 일약 대사로

 

1888년 1월17일,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 이상재, 통역관 이채연 등은 상기된 표정으로 백악관을 향했다. 41개국 공사가 주재하는 미국측으로서는 의례적인 신임장 제정행사였을 뿐이지만, 조선으로서는 독립국임을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국서 봉정식이었다. 영약삼단을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국서를 봉정하고 난 후 청나라가 어떻게 나올지는 그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공사 일행 전원의 목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잘못하다간 1886년 그랬던 것처럼 자칫 고종을 폐위시키려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험이 따른다고 언제까지나 속국으로 지낼 수만은 없었다.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사 일행은 이상재를 제외하고 차례로 매국노로 변절했지만, 국서 봉정식이 거행된 그날만큼은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선 투사들이었다. 백악관 정문을 통과해 봉정식이 거행될 방에 들어설 때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국무장관 베이아드와 국무차관 브라운을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번쩍번쩍 빛나는 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을 한 국왕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던 공사 일행은 방금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뒤늦게 보통사람이 입는 양복을 입고 행사장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클리블랜드 대통령임을 알게 된 박정양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와 충성의 표시로 세 번 배례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대통령 수행원들이 박정양의 돌출행동을 제지하고 일으켜 세우자 박정양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서를 넣어온 상자의 열쇠를 찾지 못해 며칠 동안 준비한 취임사를 횡설수설 망쳐버렸다.

봉정식이 진행되는 동안 알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렸고, 공사 일행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지 못해 어안이 벙벙했다.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안을 주지 않으려고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최대한 점잖게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국서 봉정식은 이렇듯 코미디처럼 진행됐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정부에 박정양의 영약삼단 위반을 강력히 항의했고 관련자 전원의 처벌을 요구했다. 청나라 정부의 위협과 압력에 시달리던 조선 정부는 공사 일행을 차례로 소환했다. 급기야 1888년 11월에는 전권공사 박정양마저 소환했다. 박정양이 이완용, 이채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자 주미 조선공사관에는 서기관 이하영만 남게 됐다. 조선 정부는 관직에 오른 지 불과 2년밖에 안 된 이하영을 주미 서리공사로 임명했다. 외교부 말단직원으로 들어간 지 단 2년 만에 주미대사로 수직상승한 셈이었다.

이하영은 서기관으로 미국에 부임하기 전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바 있었다. 부산, 인천, 원산 세 부두를 담보로 200만달러를 차관해 그 돈으로 미국 병사 20만명을 빌려오라는 것이었다. 고종은 20만 미국 병사로 조선 땅에서 청국 세력을 몰아냄은 물론 중원까지 밀고 올라가 천하를 손에 쥐려는 황당하고도 원대한 꿈을 품었다.

 

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陽江)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단독 국서 봉정에 성공한 이후 이하영은 고종의 밀명을 완수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워싱턴 공사관에 혼자 남아 서리공사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그 첫 결실을 보았다. 뉴욕은행은 200만달러의 차관을 통보했다. 차관의 절반인 100만달러를 인출해 책상 위에 쌓아놓고 보니 외교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20만 미국 병사를 끌고 인천부두에 상륙할 날도 머지 않은 듯했다.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 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왔다.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성공을 굳게 믿은 나는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 비탄과 함께 커다란 걱정이 일어났다. 원병을 빌릴 것을 구실로 얻은 차관 중 이미 소비한 16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것이다. 백 가지 계책을 세워보아도 도무지 대책이 없어 파리 쫓으면서 낮잠만 자고 있노라니 하루는 외무대신(국무장관)이 관저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안색이 붉어졌다. 이를 어찌하리오. 가나마나 차관반환을 독촉하러 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지라 떨리는 다리로 초청한 장소로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저에는 채권자인 뉴욕은행 두취(대표이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황공히 앉아 외상의 입만 쳐다보며 최후의 처분을 기다렸다.
외상은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리만치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위로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하고 회유 같기도 한 어조로 자국의 정책인 먼로주의를 자세히 설명한 끝에, 귀국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유감천만이라면서 결론으로는 차관 중 이미 소비된 금액은 미국 정부에서 대신 갚을 터이니 남은 금액은 즉시 상환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전액을 잃을까 우려하여 남은 돈이나마 돌려 받으려는 약은꾀를 미워할 짬도 없이,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고 즉석에서 승낙했다. 나는 미국의 관대한 태도에 감복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경할지언정 믿고 따를 나라는 못 되는 줄 깨닫게 되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이하영은 끝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서라도 나라로부터 받은 수모를 갚고자 했던 고종의 꿈을 이뤄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밤낮으로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어 미국 사교계에서 향락과 사치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2년 남짓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영어도 유창해지고 춤 솜씨도 늘었다. 초대받은 연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귀부인과 어울려 춤추기를 즐겼다. 상투를 튼 채 조선 버선에 구두를 신은 이하영이 댄스홀에 나타날 때면 금발 미녀들이 그를 에워싸고 갈채를 보냈다. 밤을 새워 술 마시고 금발 미녀들과 껴안고 춤추고 나면 근심과 우울은 모두 사라졌다.

 

조정의 급전

 

이하영은 부산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시절 한 차례 결혼한 적이 있다. 1880년에는 큰아들 이규삼까지 얻었다. 이규삼은 1921년 아편을 흡입하다 체포되어 자작이자 중추원 고문인 아버지 망신을 톡톡히 시켰다. 당시는 이혼이 공식적으로 성립되던 시대는 아니었지만, 미국 공사관에 부임할 때 이하영은 첫 부인과 사실상 이혼한 상태였다. 서리공사 이하영이 워싱턴 사교계에서 인기를 한몸에 끌다보니 그에게 구애하고 청혼하는 금발미녀도 나타났다.

 

이하영은 미국 어느 유명한 부호 따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 그 색시로부터 약혼을 간청받았다. 이하영도 갓 서른을 넘긴 청춘이었던 만큼 끌리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국법은 외국인과 결혼을 엄금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하루는 그 색시의 모친이 이하영에게 청하기를 자기 맏사위가 이태리 현직 육군 장관인데, 그를 시켜 사정을 이태리 황제께 아뢰어 조선 국왕의 칙허(勅許)를 얻도록 주선할 터이니 내 딸과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고 졸랐다. 능란한 화술을 자랑하는 이하영도 한참동안 대답이 궁색해 어쩔 줄 몰랐다. (문일평, ‘한미 50년사’, 1945)

‘동아일보’ 1922년 9월21일 1면에 실린 대륙고무주식회사 출범 광고. 명실공히 ‘귀족 마케팅’의 효시라 할 만하다.

 

그렇듯 서리공사 이하영의 인생 황금기는 이어졌다. 그 옛날 춥고 배고프던 찹쌀떡 장수시절도 잊었고, 알렌의 식사를 차리며 눈칫밥을 먹던 시절도 잊었고, 외아문에서 상관 비위나 맞추던 시절도 모두 잊었다. 1889년 6월 이하영이 자신이 누구인지, 이역만리 워싱턴에 왜 나와 있는지를 거의 잊었을 때쯤, 급거 귀국하라는 조선 조정의 급전이 날아들었다. 아무리 미국생활이 행복하다 해도 그가 살아가야 할 무대는 조선이었다.

1889년 이하영은 이완용에게 주미 서리공사 자리를 물려준 뒤 1년 6개월의 짧지만 ‘성공적인’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후 이하영은 웅천 현감, 흥덕 현감을 거쳐 5년 만에 정3품 외아문 참의(외교부 차관보)로 승차했다. 한성부 관찰사(서울시장)와 일본 주재 공사를 거쳐 1904년 마흔일곱의 나이에 외부대신(외교부 장관)에 올랐다.

영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외국인과 사교능력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기에, 이하영은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그 시절에도 미천한 신분의 한계를 뚫고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아무리 조선이 양반이 지배하는 나라라 해도 공맹(孔孟)의 법도만 갖고 서구 열강을 상대로 외교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우용택의 외부대신 구타 사건

 

관운이 트이면서 재산도 엄청나게 불었다. 서대문 합동에 있는 그의 99칸짜리 저택은 큰 한옥 외에 양옥이 따로 있었고 사랑채와 행랑채가 딸려 있었다. 행랑채엔 수십 가구의 하인이 살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이하영 자신이 남의 집 행랑채에 사는 일개 요리사였으니 격세지감이었다. 대지 1500평에 달하는 집안엔 조그마한 인공 동산까지 만들어놓았다. 국록만 받아 가지고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부였지만, 어디서 생겼는지 이하영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이하영은 외부대신으로 부임한 이후 당면한 외교적 현안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하던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의 어로권을 넘겼고, 일본 헌병대에 한성의 치안권을 넘기더니, 급기야 내륙 하천의 항해권마저 일본에 넘겨줬다. 도로 사정이 열악한 시절 원거리 상품운송에는 주로 내륙 하천이 이용됐다. 내륙 하천 항해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은 국가의 기간도로망을 송두리째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905년 8월21일, 아침부터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외부대신 이하영은 찜통더위 속에 관복을 걸치며 입궐 준비를 서둘렀다. 이하영이 입궐 준비를 끝냈을 때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초라한 행색의 경상도 선비가 찾아왔다. 선비는 ‘경상도 의성 땅에 사는 우용택’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곤 대뜸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쳤다.

“네가 동래 천무(賤巫)로 대신까지 되었으면 나라에 갚음이 있어야지 나라를 팔다 못해 하천까지 팔아먹느냐. 장차 또 무엇을 팔 테냐? 저 역적을 죽여라.”

호통이 끝나기 무섭게 우용택은 이하영의 옆구리를 차고 뺨을 후려갈겼다. 이하영은 황급히 하인들을 불러 겨우 봉변에서 벗어났다. ‘외부대신 이하영 구타 사건’ 덕분에 우용택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한동안 고초를 겪었지만, 친일매국노를 따끔하게 혼내준 강개지사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친미파로 정계에 입문한 이하영은 철두철미한 친일파는 아니었다. 외부대신 시절 일본에 이권을 넘기는 데 앞장섰지만, 법부대신으로 옮겨가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을 때는 처음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보다 한발 늦게 찬성으로 의사를 번복해 천만다행으로 ‘을사오적’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

이하영이 처음부터 을사늑약에 찬동했다면 역사는 그의 이름을 ‘을사육적’에 올렸을 것이다. 이하영은 늦게나마 을사늑약을 찬성한 까닭에 강제합방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 자리를 얻었다.

강제합방 이후 이하영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다.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 자리를 얻었다 하나 실권이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하영은 고무와 가죽을 섞어 만든 일본식 고무신을 개량해 전체를 고무로 만든 조선식 고무신을 개발했다. 조그맣게 시작한 고무신 사업은 날로 번창해 1922년 예순다섯 나이에 자본금 50만원(현재 가치 500억원)의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첫 사업에 실패한 지 40여년 만에 시도하는 두 번째 사업에서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것이었다.

 

대륙고무신의 ‘귀족 마케팅’

 

이하영은 주식회사를 조직하면서 박영효 이윤용 등 다수의 귀족을 주주로 참여시키고, 자신의 차남인 이규원, 이근택 자작의 장남인 이창훈 등을 이사진에 포함시켰다. 경영진의 구성부터가 ‘귀족스러운’ 회사였던 만큼 주력상품인 ‘대륙고무신’ 역시 처음부터 공격적인 ‘귀족 마케팅’에 나섰다.

 

순(純)고무 경제화의 원조, 대륙고무
본인이 경영한 대륙고무가 제조한 고무화를 출시하니 이왕(순종) 전하께서 어용하심을 얻어 황감함을 금치못하며, 왕자 공주님들께서도 널리 애용하시고, 또 나인들, 일반 고객들이 각별히 애용하셔서 날로 달로 발전하여 이번에 주식회사 조직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고무 업계의 원조로서 더욱더 매진하여 조선은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진출하겠사오니, 더욱 애용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다른 회사가 조악(粗惡)한 제품을 본사의 제품이라고 사칭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많사오니 본사상표 ‘大陸’에 주의하시옵소서.
1922년 9월 대륙고무주식회사
사장 이하영
(‘동아일보’ 1922년 9월21일자 광고)

 

대륙고무의 귀족 마케팅은 적중했다. ‘만월표고무신’ ‘별표고무신’ ‘거북표고무신’ 등 수십 개의 브랜드가 난립한 고무신 업계에서 ‘대륙고무신’은 최고의 명품브랜드로 시장을 석권했다. 최고의 인지도를 자랑하다 보니 시장에는 다량의 ‘짝퉁’이 유통됐고, 이 때문에 지방에서는 판매의 어려움을 겪을 지경이었다.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에서는 평양 서선(西鮮)고무공장을 걸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상표위반죄로 고소했다. 서선고무공장에서 작년 6월부터 대륙고무회사의 상표와 언뜻 보아 알지 못할 만치 비슷한 상표를 만들어 사용한 까닭이다. 이와마(岩間) 대륙고무회사 전무취체역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웬일인지 서조선 지방의 주문이 자꾸 줄어감으로 더욱 선전을 하고자 출장원을 많이 보냈는데, 그 출장원들이 가짜 상품을 발견하여 상표를 변경하라고 여러 번 일렀으나 종시 듣지 아니함으로 할 수 없이 고소한 것이올시다.” (‘시대일보’ 1926년 6월6일자)
대륙고무는 성장을 거듭해 광복 이후까지 최고의 고무신 브랜드로 사랑받았다. 찹쌀떡 장수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이하영은 일본인 상점 점원, 미국인 집 요리사를 거쳐 조선 최고의 외교관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1929년 고무신공장 사장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천한 시절 결혼한 첫 부인에게 얻은 큰아들 이규삼이 아편중독자가 되어 경찰서 출입이 잦았다든지 토지의 소유권을 놓고 친조카와 송사를 벌이는 등 불미스러운 일도 없지 않았지만, 이하영은 대체로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젊은 시절 남들보다 한발 앞서 익힌 일본어와 영어 실력 덕분이었다.

 

돌고 도는 역사

 

이하영의 손자 이종찬은 임관 이듬해인 1950년 6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6·25전쟁을 맞았다. 석 달 후 준장으로 진급했고, 1951년 6월 소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이기붕은 이종찬의 모친을 찾아가 한 나라의 육군참모총장을 총각으로 늙어가게 할 수 없다고 간곡히 설득했다. 이종찬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진해에서 표자영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1952년 5월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종찬에게 전방부대 1개 사단을 임시수도 부산으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파병을 거부했다. 파병 거부를 계기로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목숨을 걸고 실천한 ‘참군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지만, 최고통수권자 이승만에게는 엄청난 수모를 당했다. 이승만은 그해 여름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클라크 장군을 각계 인사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 할아버지가 구한말 외부대신을 지낸 사람인데 그 사람이 바로 ‘한일합방’ 때 도장을 찍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오.”

이하영이 한일강제합방 때 도장을 찍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지만,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이승만으로서는 그렇게 욕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전쟁 중인 군대를 동원하려 한 대통령이 그것을 막고자 한 참모총장에게 외국인 앞에서 그런 능욕을 줄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독립운동가가 독재자로, 친일파의 후손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종찬은 같은 해 7월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유학 형식으로 미국으로 쫓겨났다.

이종찬은 1983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했지만, 1960년 예편 후 이탈리아 주재 대사와 두 차례 유정회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돌고 도는 것이 역사이다.

 

 

 

 

 

 

평양 ‘백 과부’, 이 여인이 사는 법
“돈은 써야 값을 하지, 안 쓰려면 모아 뭐해”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아낙네는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 평양에서 손꼽히는 갑부가 되었다. 과부라고 우습게 보고 덤벼든 강도와 협잡꾼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쓰지 않던 그는, 환갑을 맞은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을 위해 돈을 펑펑 쓰기 시작하는데…. 여자에게는 이름이 없던 시절에 태어나 말년의 공덕으로 ‘선행’이라는 이름을 얻고 장안의 조화(弔花) 값을 들썩이게 만들 정도로 세인의 존경을 받기까지, 한 여인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

백선행의 삶을 다룬 ‘신여성’ 1933년 2월호 기사와 평양공회당 건축계획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7년 3월16일자(왼쪽).

1933년 5월13일, 평양 대동강 기슭의 3층 석조건물 ‘백선행기념관’에는 아침부터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화창한 봄날 토요일이었음에도 대동강 강변에는 상춘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는 일제히 휴교하고 전교생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15만 평양시민은 살아생전 고인의 아름다운 행적을 추억하며 한마음으로 영면을 기원했다.

이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社會葬)은 오후 1시 정각 ‘백과부집’ ‘백선행기념관’ 등으로 불리는 평양공회당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사재(私財) 14만6000원(현재가치 146억원)을 쾌척해 백선행기념관을 세운 ‘백 과부’ 백선행이었다. 오전 11시 박구리 자택에서 발인한 그의 영구는 오후 1시 정각 영결식장인 백선행기념관에 도착했다. 오윤선의 집례로 거행된 백선행의 영결식은 이훈구의 애사, 200여 통에 달하는 조전(弔電) 낭독, 각 학교 학생대표의 애도가 합창, 묵념 등의 순으로 한 시간 남짓 이어졌다.

장지인 당상리로 향하는 장의행렬은, 광성보통학교 900여 명, 숭인상업학교 500여 명, 숭현여학교 450여 명, 창덕보통학교 200여 명 등 각 학교대표 2200여 명을 선두로 각 사회단체 대표 등 1만여 명이 참례했다. 300여 개의 화환, 조기, 만장이 늘어선 장의행렬은 길이가 5리에 달했다. 평양시내 중심가에서 보통강 건너편에 이르는 연도에는 10만여 시민이 도열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평양시민 3분의 2가 참석한 ‘백선행 여사 사회장’은 오후 5시30분 남편 안재욱의 묘소에 합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백선행은 과부생활 70년 만에 오매불망 그리던 남편 품으로 돌아갔다.

 

과부 2대

 

1848년 헌종 15년에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난 ‘백 과부’는 이름이 없었다. 조선시대 여성치고 이름 가진 여성은 흔치 않았다.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성상을 ‘백 과부’로 불렸다. 환갑이 넘어서야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선행’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겼다.

아버지 백지용은 평양 박구리(?九里·현재의 중성동)에 살던 가난한 농민이었다. 그나마 외동딸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모친 김씨는 죽은 남편이 남긴 가난과 고독 속에서 하나뿐인 딸을 애지중지 길렀다. 편모 슬하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성장한 백씨는 열네 살에 가난한 농민 안재욱에게 출가했다.

모친 김씨는 사위에게 모녀의 일생을 의탁하려 했으나 병약한 사위는 결혼 직후 병석에 누웠다. 백씨는 어려운 살림에도 좋다는 약이면 백방으로 구해 써보았지만 남편의 병세는 날마다 악화되었다. 죽음에 임박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칼로 그어 흐르는 피를 입에 떨어뜨려도 보았으나, 남편은 겨우 닷새를 더 버텼다. 안재욱은 아내에게 아이 한 명 안겨주지 못한 채 결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열여섯 살이 된 백 과부는 남편을 잃고 다시 과부 어머니를 찾아 친정으로 돌아왔다. 개가하여 팔자를 고치라는 동네 사람의 권유도 있었으나 스무 살 전의 과부는 세 번 남편을 갈지 않으면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미신이 주는 공포와 어머니 과부의 신세를 생각하여 과부 모녀는 죽기까지 떨어지지 않기로 맹세하고 새 생활을 개척했다. 우선 그날그날 먹을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으로 새 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1’, ‘동아일보’ 1933년 5월10일자)

 

백선행이 재산을 모을 당시의 일화를 담은 ‘동광’ 1931년 1월호 ‘철창 속의 백선행’.

과부 모녀는 아침에 밥을 지어 저녁까지 먹고 해 짧은 겨울에는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버텼다. 나무 한 단, 쌀 한 톨이라도 살뜰히 아꼈다.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하다보니 과부 모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듯 악착같이 10년을 버티자 150냥짜리 집 한 채와 현금이 1000냥 남짓 생겼다.

구차한 살림살이를 겨우 면하게 된 그 때 모친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봉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모친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서러운 일이지만, 모친의 상여 뒤를 따를 상주 한 사람 없는 게 더 원통한 일이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찾아온 친척들은 백 과부에게 사후 양자를 들여 상주로 삼으라고 권했다.

장례도 장례지만 제사가 더 문제였다. 모친이 죽은 해는 조선 왕조의 수명이 37년이나 남은 1873년이었다. 딸자식은 상주(喪主)도 제주(祭主)도 될 수 없었다. 생전에 따뜻한 밥 한 공기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한 모친은 제삿밥조차 대접받지 못할 처지였던 것이다. 백 과부는 친척들의 권유에 못 이겨 조카뻘 되는 친척을 모친의 사후 양자로 삼아 장례를 치르게 했다.

 

양자의 음모

 

그러나 양자는 장례나 제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상속 문제를 들고 나왔다. 사후 양자라도 아들은 아들이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 상속은 아들의 당연한 권리였다. 양자는 모친의 전 재산은 아들인 자신이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과부는 그때서야 속은 것을 알았다. 모친과 함께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마련한 150냥짜리 집과 현금 1000냥을 어려운 시절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던 친척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백 과부는 끝까지 반항했다. 그러나 양자의 배후에는 유산을 나눠먹기로 약속한 문중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끝까지 반항한 값으로 소녀 과부로 개가치 않고 어머니를 모시어 임종한 것이 기특하다는 이유로 살고 있는 150냥짜리 집만은 백 과부의 소유로 인정받았다. 현금 1000냥은 문중의 대여섯 사람이 나눠먹었다. 백선행 여사는 지금껏 친척들이 나눠먹은 재산기록을 보관할 만큼 그때 일을 원통하게 여긴다. (‘철창 속의 백선행’, ‘동광’ 1931년 1월호)

 

10년 고생 끝에 모은 재산과 모친을 일시에 잃고도 백 과부는 오히려 용감했다. 재산을 빼앗은 양자 일파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집을 떠나자 백 과부는 문간에 콩을 뿌렸다. 악귀를 쫓을 때 하는 평안도 풍속이었다.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조선의 인습도, 파렴치한 친척도 악귀처럼 몸서리가 쳐졌다. 스물여섯 젊디젊은 과부 백씨는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섰다.

앞뒤 마당에 봉선화를 심어 꽃을 따고 씨를 받아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장터에 내다팔고, 질동이를 머리에 이고 음식점을 순회하며 잔반을 얻어다가 돼지를 길렀다. 뽕밭을 가꾸어 누에를 치고, 물레와 베틀을 장만해 밤새도록 실을 뽑아 무명과 명주를 짰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대 한창 나이에도 얼굴에 분 한번 바른 적이 없었고, 자기 손으로 짜는 옷감이건만 화사한 옷 한 벌 지어 입지 않았다. 단오에도 동산에 한 번 올라가지 않고 1년 365일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했다. 모친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시 10년을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살다보니,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그때부터 백 과부의 재산은 기름 부은 불꽃처럼 불어났다. 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은 땅을 늘리는 데만 썼다.

1883년 과부생활은 벌써 20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백 과부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여섯이었다.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가까운 친척도 없는 백 과부의 삶은 적막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고집 그만 부리고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개가하라는 이웃들의 권유는 듣는 자리에서 흘려버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귀를 씻었다. 이제 와서 개가할 것이었다면 20년 전 수절(守節)을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20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어도 사진 한 장 없는 남편 얼굴만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2년 남짓한 결혼생활이래야 병든 남편 수발이 전부였지만, 서른여섯 해 인생에 그때만큼 행복한 시절도 없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백선행기념관에서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해 성황리에 개최된 백선행 여사 찬하회 광경. ‘동아일보’ 1930년 11월10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한때는 나에게도 남편이 있었다.’

과부라고 손가락질당할 때마다 남편을 향한 사랑을 한순간도 저버리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고단한 삶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백 과부는 한식과 추석 때면 어김없이 남편의 무덤을 찾았다. 야속하게 떠났어도 그리워할 기억이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결혼생활의 기억은 아름답게 윤색되었고, 남편에 대한 사랑은 커져만 갔다.

백 과부는 키가 크고 몸집이 벌어진 억센 여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억세다 해도 여자는 여자였다. 조선에서 젊은 여자가 남편도 없이 홀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아침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백 과부가 돈푼이나 만진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사내가 재산을 ‘날로’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사악한 사내들 눈에 혼자 사는 젊은 과부의 돈은 임자 없는 돈이나 마찬가지로 비쳤다.

 

철창 속의 여인

 

그해 팽한주가 평양 부윤(府尹)으로 부임했다. 악명 높은 탐관오리였던 팽한주는 박구리에 사는 백 과부가 기백석 추수의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죄 없는 여인을 잡아다 하옥했다. 홀로 사는 여자가 돈을 모은 게 죄였던 것일까. 팽한주는 백 과부에게 갖은 누명을 씌운 후, 재산을 바치면 풀어주겠노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20년간 과부로 남 못 당할 곤란과 풍상을 겪은 평안도 여성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못하는 짓이 없던 팽한주 부윤으로서도 고집 세고 뻣뻣한 백 과부의 재산만은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백 과부는 옥중에서 10여 일이나 고생하다 그대로 방면되었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2’, ‘동아일보’ 1933년 5월11일자)

 

탐관오리만 백 과부의 재산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과부 혼자 사는 집에는 수시로 강도가 침입했다. 백 과부는 강도의 완력 앞에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뒷머리와 앞이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때 생긴 얼굴 흉터는 늙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백 과부는 현금을 벽지 안쪽이나 이불 속 등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백 과부를 때려눕힌다고 숨겨놓은 돈을 찾을 수는 없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백 과부는 찌르라고만 할 뿐 돈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백 과부 집에 숱한 강도가 침입했지만, 엽전 한 닢 훔쳐나간 강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위문 간 사람들이 “가지고 계신 돈을 조금 내어주셨으면 이런 곤욕을 보시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하며 채근하면 백 과부는 항상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다 못 나눠주는 돈을 밤중에 달려들어 사람 때리고 중상 입히는 놈에게 어찌 주겠나? 내 목숨이 없어져도 돈만 남아 있으면 그 돈이 좋은 일에 귀하게 쓰이게 될 것을 아는데, 눈을 뜨고 내 손으로 그런 나쁜 놈에게 내어줄 수야 있나.”

강도의 침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백 과부는 ‘목숨’과 목숨보다 귀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문 중문 방문 부엌문 들창 장지 등 집안 곳곳을 굵은 철창살로 에워쌌다. 백 과부는 그 철창살 속에서 돈 궤짝을 부둥켜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한번 백 과부의 손에 들어간 돈은 좀처럼 세상 구경을 하기 어려웠다. ‘수전노 백 과부’ ‘철창살 속 암사자’라고 험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백 과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난한 시절과 마찬가지로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돈을 모았다.

혼자 사는 과부가 나이 들어 험한 꼴 보지 않으려면 돈이라도 악착같이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백 과부는 ‘그 돈이 있으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겠다’는 이웃들의 손가락질에도 아랑곳없이 무서울 정도로 돈에 집착했다. 그러나 백 과부는 그 시절 흔히 보는 수전노들과는 달리 고리든 저리든 단 한 번도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지는 않았다. 돈을 벌되 되도록 깨끗이 벌려고 노력했던 것이었다.

 

환갑에 얻은 이름

 

북한 주간지 ‘통일신보’ 2006년 7월1일자에 실린 백선행기념관과 백선행 동상.

1908년, 백 과부가 태어난 지 한 갑자(甲子)가 흘렀다. 과부생활 45년 동안 앳되고 뽀얗던 얼굴은 강도에게 맞은 흉터와 깊게 팬 주름으로 거칠어졌지만, 끼니를 걱정하던 곤궁하던 살림살이는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나아졌다. 이웃들은 환갑을 맞아 백 과부가 떠들썩하게 잔치라도 벌일 줄 알았다. 그런 일에 돈을 쓰지 않는다면 돈 모은 보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일인 음력 11월19일이 가까워와도 백 과부 집에서 잔치를 준비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에이, 수전노 같으니라고. 그래 물려줄 자식 하나 없으면서 그 많은 재산 쌓아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죽나.”

부잣집 환갑잔치에 가서 오랜만에 고깃국 한 그릇 얻어먹고 목구멍의 거미줄이라도 긁어내려던 이웃들은 백 과부의 인색함에 치를 떨었다. 아무리 돈이 아까워도 그러는 게 아니라고 어르고 달래도, 백 과부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박복한 여자가 잔치는 벌여 무엇 하느냐’며 황소고집을 꺾지 않았다.

‘우주가 한 바퀴를 돌아’ 찾아온 환갑 생일날 아침, 백 과부는 여느 때처럼 보리쌀이 반이나 섞인 거친 밥으로 요기를 했다. 아침식사를 대충 때운 후 장롱 깊숙이 아껴둔 새 옷을 꺼내 입고 오랜만에 곱게 단장을 했다. 주름진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풍상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었지만, 단장하는 백 과부의 가슴은 47년 전 새색시처럼 설다.

이른 아침 곳곳에 철창살이 쳐진 박구리 자택을 서둘러 나선 백 과부는 대동군 객산리 남편의 묘소로 향했다. 다 쓰러져 가는 나무다리를 건너 남편의 묘소에 도착한 백 과부는 여느 때처럼 정성스럽게 벌초를 하고 제를 올렸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객산리 마을에 들러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을 전했다.

“나무다리를 허물고 돌다리를 놓아주겠소.”

객산리 나무다리는 낡아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었을뿐더러 교각도 몹시 낮아 큰 비라도 내리면 물이 넘쳐 다리 구실을 못하기 일쑤였다. 백 과부는 서울에서 석공기술자를 불러와서 목교가 있던 자리에 넓고 튼튼한 석교를 놓았다. 객산교(客山橋·손메다리)를 준공하기까지 든 3000원 남짓의 비용을 모두 백 과부가 부담했다. 당시 3000원은 떠들썩한 환갑잔치 100번은 벌일 수 있는 돈이었다. 백 과부의 선행을 전해들은 이웃들은 인색하다고 손가락질한 것을 머리 숙여 사과했다.

객산리 사람들은 백 과부의 음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과부’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조선의 윤리와 법도가 아직 굳건하던 헌종 시절 태어난 백 과부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백 과부는 사람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평생을 과부로 수절하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그렇듯 허튼 욕심 부리지 않은 백 과부였지만 딱 한 번 교활한 거간에게 속아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백 과부는 돈이 모이면 어김없이 땅을 샀다. 땅이 늘어나다보니 추수도 늘었고, 추수가 늘다보니 더 빨리 땅을 넓힐 수 있었다.

1917년 백 과부는 평양에서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강동군 만달산 부근의 토지가 좋다는 거간의 말만 믿은 채, 평당 7~8원을 주고 수천평의 땅을 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땅은 석회질이 많아서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황무지였다. 1~2전을 받고도 팔기 어려운 박토(薄土) 중에 박토였다.

 

백 과부가 단돈 2전도 하지 못하는 황량한 박토를 어떤 흉악한 중개자에게 속아서 평당 7~8원을 주고 샀다는 소문은 당시 평양에서 일대 화제가 되었다. 백 과부가 밤낮으로 돈만 모으다가 망하게 생겼다고 조소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어찌 꿈엔들 알았으랴.
그 후 한 2~3년이 지나서 일본인이 그 지역에서 시멘트 원료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부근 토지를 모조리 평당 3~4원을 주고 매수했다. 백 과부에게도 물론 토지를 팔라고 매매 교섭을 했다. 총명한 백 과부는 그 말을 듣자 즉각적으로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리들보다 눈 밝은 일본사람들이 부리나케 들어와서 제발 토지를 팔라는 데는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백 과부는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강한 자여! 그대는 여자니라’, ‘신여성’ 1933년 2월호)

 

1933년 5월13일 평양에서 거행된 백선행 사회장 광경을 담은 ‘신동아’ 1933년 6월호.

백 과부가 속아서 산 박토를 팔라고 사정한 일본인은 일본 최대 시멘트 회사의 사장 오노다였다. 백 과부의 땅을 사지 않고는 시멘트 공장을 도저히 세울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매수호가가 백 과부가 산 가격의 2~3배가 되었어도 백 과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만하면 팔아버리시죠’하고 권하자 백 과부는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남의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내 땅을 내가 안 팔겠다는데 누가 말려.”

땅값은 매일같이 치솟았다. 평당 30원. 다른 사람이 판 가격보다 10배나 올랐어도 백 과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노다는 결국 평양 부윤을 찾아가 사정했다. 평양 부윤이 주선하여 성사된 매매가격은 평당 70원. 백 과부가 속아서 산 가격보다 10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이 거래 한 건으로 백 과부의 재산은 30만원(현재 가치 300억원)으로 불어났다. 동네 부자에서 평양 굴지의 대재산가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평양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어도 백 과부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온 손님에게 냉면을 대접했다가 찌꺼기를 남기는 이가 있으면 “여보시오! 거 아깝지도 않소?” 하며 따로 보관해두었다가 나중에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 그러나 학교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천금도 아끼지 않고 지원했다.

 

평양에서 부인 재산가로 첫손가락을 꼽는 박구리 백선행 여사는 지난 25일 평양사립보통학교 중에서 가장 크고 장족의 세(勢)로 발전해가는 광성학교에 자기의 소유 토지 중 대동군 예포리에 있는 논 1만800여 평과 밭 3000여 평 합계 1만4000여 평(시가 1만3000원가량)을 그 학교의 기본금으로 기증했다. 광성보통학교는 감격하여 그 재산을 기초로 재단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여사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교내에 여사의 기념동상을 세울까 혹은 기념비를 세울까를 놓고 목하 교직원들 사이에 의논이 분분한 중이다. (‘80과부의 교육열’, ‘동아일보’ 1925년 2월28일자)

 

광성보통학교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무어(문요한) 박사가 세운 학교였다. 교육령 시행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해 정식으로 인가를 받지 못하면 졸업생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다. 백 과부는 한평생 학교는커녕 서당 한 번 다녀보지 못했고 한글은커녕 숫자조차 읽고 쓰지 못했다. 굵기가 다른 수수깡에다 손톱으로 표시해 금전의 출납을 기록했는데, 그런 식으로 30만원의 거금을 관리하면서도 한 번도 계산이 틀린 적이 없었다.

 

글 모르는 교육자

 

하지만 문자의 도움 없이도 그럭저럭 재산 관리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글 모르고 못 배운 것이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기독교 신자가 된 백 과부는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바동바동 모은 재산을 기독교계 학교에 아낌없이 기부했다. 이후 백 과부는 광성보통학교에 추가로 13만여 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여 총독부의 엄격한 심사를 뚫고 재단법인 인가를 받아냈다.

 

얼마 전 평양 사립 광성보통학교에 1만3000원의 재산을 기부하여 여러 돈 있는 사람을 놀라게 했던 평양부 백선행 여사는 이번에 또다시 평양 장로교회가 경영하는 사립 숭현여학교에 현금 3만원 가치에 상당하는 대동군 추자도에 있는 전답 2만6000여 평을 기부했다. 학교 당국에서는 물론이요 일반 사회에서는 백 여사의 열성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하다더라. (‘백 여사 특지’, ‘동아일보’ 1925년 10월26일자)

 

1925년 광성보통학교와 숭현여학교에 거금을 희사한 백 과부는 1927년에는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창덕보통학교에 6000원 상당의 토지를, 1930년에는 숭인상업학교에 1만3000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해 재산법인 설립의 기초를 닦았다. 글도 모르고 자식도 없는 백 과부가 학교 경영권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단지 조선의 젊은이들이 가난해서 못 배우는 설움만큼은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피땀 흘려 모은 18만원 상당의 재산을 조건 없이 기부한 것이었다.

그렇듯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 덕분에 글 한 자 읽지 못하는 백 과부는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축사할 때마다 백 과부는 자신의 인생철학이 담긴 진심 어린 당부를 잊지 않았다.

 

“너희들은 조선의 아들이요 딸이다. 졸리다고 자지 말고, 놀고 싶다고 놀지 말고, 공부하기 싫다고 책 덮어두지 말고, 언제든지 부지런히 책과 씨름을 해라. 상급학교 올라가서 어려운 공부를 더 잘해야 우리나라가 잘된다.”

하기 싫어도 열심히 일해야 부자가 될 수 있듯, 공부를 잘하려면 싫은 공부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 과부가 학교에 큰돈을 기부하자 친지들이 그렇게 마구 쓰다간 얼마 못 버틴다고 충고했다. 그때마다 백 과부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쓰지 않으려면 돈은 모아서 뭐하나.”

 

백선행기념관

 

1925년 이후 면전에서 백 과부를 백 과부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도 나이거니와 가슴 깊숙이 우러나는 존경심 때문에 차마 과부라고 ‘하대’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던 시절에 태어나 이름 없이는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시대까지 살다보니, 환갑 때 백선교를 놓고 얻은 이름 아닌 이름 ‘선행’이 어느 순간 정식 이름처럼 통했다.

일흔 살 이후 백선행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사회사업가로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25년 숭현예배당에서 ‘백선행 여사 교육 열성 찬하회’를 시작으로 백선행의 미거(美擧)를 기리는 찬하회와 기념비 제막식, 동상 제막식 등이 꼬리를 물고 개최됐다. 1928년에는 근우회 평양지회 주최로 ‘백선행 여사 위안 야유회’까지 열렸다. 야유회가 열린 기림리 공설운동장에는 2000여 명의 여성이 운집해, 그때까지 평양에서 가장 많은 여성이 참여한 행사로 기록됐다. 백선행은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의 은혜를 입고 그를 어머니, 할머니로 섬기는 사람은 수만, 수십만을 헤아렸다. 1928년 백선행 여사가 타계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떠돌자 평양 시내 장의용 꽃값이 들썩일 정도였다.

 

최근 수일 전부터 어떠한 방면에서 나온 말인지 백선행 여사가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풍설이 돌기 시작하여 평양 부내의 사람들은 물론 멀리 사오십 리 밖에서까지 문상 오는 사람이 많아서 그 집안사람은 이 헛물켜는 문상객을 돌려보내느라 정신이 없다. 시세에 눈 밝은 꽃 장사들은 관에 사용되는 꽃은 자기에게 주문하여달라고 간청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풍설의 출처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수일 전에 박 과부란 사람이 죽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전된 듯하다더라. (‘근거없는 소문으로 조상객의 헛물켜기’, ‘동아일보’ 1928년 3월21일자)

 

1928년까지 평양에는 조선인이 집회를 열 만한 공회당이 없었다. 부립공회당은 사실상 일본인의 전유물이었기에 야외 집회가 아니면 조선인은 정치 집회를 실내에서 개최할 수 없었다. 조만식, 오윤선이 백선행을 찾아가 조선인 중심의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뜻을 전하자 백선행은 흔쾌히 현금 4만원을 내주었다. 남편 제사를 모시게 할 생각으로 뒤늦게 들인 양자 안일성이 유산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자 백선행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지 누가 말려서 하지 않겠느냐. 나는 평생 남의 말이란 들어본 적이 없다.”

공회당은 1927년 3월 기공해 1929년 5월 개관했다. 백선행은 6만5000원의 공사비를 전액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재단법인 설립을 위해 추가로 8만5000원의 자본금을 출연했다. 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백선행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새로 지은 공회당의 공식명칭을 ‘백선행기념관’이라 선포했다.

이후 ‘박희도 사건’ 등 일부 불미스러운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지만(‘신동아’ 2005년 9월호 500쪽 ‘중앙보육학교 박희도 교장의 여제자 정조유린 사건’ 참조), 백선행기념관은 광복 직전까지 평양 시민의 집회와 문화행사장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1930년 11월8일 교육계·실업계·학생계 대표 300여 명이 참가한 ‘백선행 여사 찬하회’에서 우기선 윤산온 이기찬 조만식 등의 축사가 끝난 후 백선행은 다음과 같은 답사를 남겼다.

 

“내가 쓰다 남은 돈이 있어 돌집 한 채 짓고 몇 학교에 돈을 좀 내었기로 그다지 훌륭해서 찬하회를 한다니 세상 사람들은 부질없기도 하오. 사회에 돈을 내는 뜻? 무식한 늙은이에게 뜻 같은 게 있을 리 있나. 자손 없는 백 과부, 돈 남기고 죽어서 친척 녀석들이 재산 싸움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그런 험한 꼴이 어디 있나. 그러니 내 생전에 세상에 좋다는 사업에 썼으면 좋은 일 아니겠나?” (‘고 백선행 여사 일생3’, ‘동아일보’ 1933년 5월12일자)

창덕보통학교, 숭현여학교, 광성보통학교 교정에는 백선행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백선행기념관에는 동상이 들어섰다. 백 과부는 환갑에 이르기까지 악착같이 모은 돈을 여생 26년 동안 한푼도 남김없이 쓰고 가려 했다. 그 기간 백선행이 사회에 기부한 금액은 31만6000여 원. 사치를 일삼고 기생집 출입이 잦았던 양자 안일성에게는 여러 필지로 쪼개진 수천원 상당의 땅을 조금 남겼을 뿐이다. 자신이 죽고 난 후 자식이 땅을 팔더라도 한꺼번에 다 팔아서 빨리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어머니로서의 마지막 배려였다.

 

행복한 돈 쓰기

 

백선행은 언제나 근검절약하고 안락과 사치를 멀리했지만, 딱 한군데만큼은 사치를 부렸다. 바로 남편의 묘소였다. 평양 굴지의 부자가 된 후 백선행은 남편의 묘소 주변 5만여 평의 임야를 사들이고 노송을 옮겨 심어 울창하게 가꿨다. 2만여 평의 묘답(墓畓)을 사고 화려한 기와집을 지어 묘지기가 살면서 지키고 가꾸게 했다. 창덕보통학교 교정에 고궁 정자와도 비슷한 모양의 묘상각(墓上閣)을 지어 봄가을 제향에 참석할 인사들의 휴식처로 제공했다. 남편의 묘역을 왕릉만큼 화려하게 꾸미고 화강암 지대석을 쌓아 남편 봉분을 올리고 바로 옆에 자신이 묻힐 봉분 자리를 마련했다.

백선행은 1933년 5월8일 새벽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사회사업가로 존경받던 백선행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남편과 합장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70년 전 죽은 남편을 평생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2년 남짓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백선행이 한 일이라곤 병든 남편의 병 수발이 전부였다. 백선행이 70년 전 죽은 남편을 사랑은 했겠지만, 그 사랑은 보통 사람들이 배우자에게 느끼는 사랑과는 다른 차원이었을 것이다. 백선행의 70년 수절은 남편을 사랑했을 경우에만 가치를 지닌다. 사랑하지도 않은 남편을 위해 70년 동안 수절했다면 그런 인생이야말로 덧없고 의미 없는 인생일 것이기 때문이다. 70년 전 죽은 남편을 향한 백선행의 사랑은 인생의 의미를 지키기 위한 발버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백선행은 사회만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동안, 백선행은 사회로부터 엄청난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사회적 존경과 찬사 대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해도 백선행은 자신을 위해 돈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평생 길들인 입맛이 있는데 매끼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고 맛있을 리 없고, 좋은 집에 산다고 마음 편할 리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비싼 음식 비싼 옷이라도 내게 맞지 않으면 비싼 돈 주고 불편을 사는 어리석은 일이다.

백선행은 한평생 악착같이 모은 전 재산을 학교와 사회를 위해 쓰면서 심리적 포만감과 행복을 느끼면서, 사회적 존경과 찬사를 덤으로 받았다. 돈이란 백선행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써야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지는 말아야 한다. 백선행의 행복한 돈 쓰기는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돈은 백선행처럼 써야 돈 값을 한다.

 

 

 

 

 

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유전
“사고 또 사라, 반드시 오를 날 있으리니!”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따는 날이 있으면 잃는 날도 있는 법. 오늘도 많은 이를 한숨짓게 만드는 주식투자와 선물거래처럼, 식민지시대 초기자본주의는 한 꺼풀만 벗기고 나면 투전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미두시장을 인천에 만들어 팔도의 ‘꾼’들을 끌어 모았다. ‘고위험 고수익’의 이 제로섬 게임에서 투자하는 족족 대박을 터뜨려 신(神)으로 추앙받던 청년갑부 ‘반지로’. 그러나 순간의 판단착오로 전재산을 날리고 나이 서른에 중풍을 얻어 “쌀값이 오른다”고 중얼거리며 시장을 전전하다 생을 마감하는데….

반복창의 흥망성쇠를‘김복천’이라는 가명으로 기술한 ‘삼천리’1929년 7월호의 ‘백만장자가 몰락한 신화’와 인천의 미두취인소(작은 사진).

1921년 5월28일, 마로니에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화창한 토요일. 인천역은 아침부터 성장(盛裝)을 한 신사숙녀들로 북적거렸다. 스물두 살 청년 백만장자 반복창의 결혼식 하객들이었다. 오전까지 일과가 있었음에도 요시마쓰(吉松憲郞) 인천부윤을 필두로 한 인천의 관계와 재계 유력인사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모두 모였다. 인천역에는 2등객차만 연결한 결혼식 하객 전용 임시급행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경인선을 달리는 열차의 일반석은 3등석이었다. 인천에서 힘깨나 쓴다는 조선인, 일본인이 총망라된 하객을 접대하기 위해 반복창이 2등석 특별열차를 통째로 대절한 것이었다.

인천에서 출발한 임시급행열차가 경성역에 도착하자, 이번엔 대기하고 있던 수십대의 자동차가 하객을 맞았다. 당시 서울 시내에 운행 중이던 자동차는 다 합쳐도 200여 대에 지나지 않았다. 인천에서 출발한 하객들은 신발에 흙 한 번 안 묻히고 결혼식이 열리는 장곡천정(長谷川町·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까지 갈 수 있었다.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조선호텔 앞 태평통(태평로)의 풍경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화려한 결혼, 초라한 최후

 

‘미두왕’ 반복창과 ‘원동(원서동) 큰 재킷’ 김후동의 결혼식은 오전 11시30분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요시마쓰 인천부윤이 몸소 축사까지 낭독한 반복창의 결혼식은 유럽의 왕실 결혼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결혼식 당일 비용만 3만원(현재가치 30억원)에 달했다. 이날 반복창의 결혼식은 20여 년 후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호화 결혼식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김팔연 : “서울서 결혼식을 호화롭게 한 이가 누구일까?”
복혜숙 : “반복창일걸. 본명보다 반지로(潘次郞)라는 일본 이름이 더 유명하지요. 미두를 해서 30만원인가 하는 거금을 벌었는데 부자가 되고나서 처음 한 일이 큰집 짓고 좋은 색시 얻어서 장가든 것이었어요. 인천 해안에다가 아방궁 같은 큰집을 짓고 신부를 골랐는데 인천이 좁다고 서울에 올라와서 여학교를 죄다 뒤졌거든. 그중에서 경성여자고보에 다니는 김후동이란 처녀를 골랐다는구만. 김후동이가 누군가 하니 저 유명한 ‘원동 재킷’의 언니였지요. 나도 보았는데 얼굴이 그냥 꽃이에요. 참말 미인이거든.”
이서구 : “그렇지. 나도 보았는데 선녀 같았어요. 그 여자가 조선서 처음으로 치마 끄트머리에 수를 놓아 입었지. 그 여자가 시작이었어. 김후동은 바이올린도 잘했지. 반복창의 결혼식은 인천서 신사 다수를 초청해 조선호텔에서 거행했는데 인천부윤이 축사도 하고 떠들썩했었지.” (‘장안 재자가인, 영화와 흥망기’, ‘삼천리’ 1939년 1월호)

 

1921년 5월,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린 반복창은 그로부터 18년 후인 1939년 10월 인천 송림리(송림동) 나무집 곁방에서 불혹의 나이에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반복창이 죽은 날은 마침 인천 미두시장이 문을 닫기 직전이어서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미두로 흥망성세를 다 맛본 풍운아 반복창이가 미두시장과 함께 저세상으로 가버렸다”고.

 

사십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전 인천 경제력의 30%나 차지하던 조선취인소 인천미두부는 청산시장(淸算市場)으로서 앞으로 십여 일만 지나면 조종(弔鐘)을 울리게 된다. 인천에 미두시장이 생긴 이래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미두왕으로 한때 그 이름을 떨친 반지로도 사십 평생을 미두시장과 떨어지지 못하더니 미두시장의 조종과 함께 지난 18일 오전 8시 세상을 떠났다. 반지로는 오십만원이란 거대한 돈을 미두시장의 방망이 소리 한 번에 주머니에 넣었다가 또 한 번의 방망이 소리에 오십만원은 간 곳이 없어지자 정신병에 걸려 이십년 동안이나 신음을 하면서도 바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고 며칠 전까지도 미두시장을 기웃거렸다. 반지로가 미두시장과 같이 세상을 떠나게 되니 그와 미두시장과의 인연은 죽음까지도 함께하게 된 셈이다. (‘취인소와 함께 사라진 인천의 반지로’, ‘조선일보’ 1939년 10월23일자)

 

당시의 미두시장 입회장면을 묘사한 ‘동아일보’1939년 11월9일자 기사와 이를 풍자한 만화(위).

“인천 바다는 미두로 전답을 날린 자들의 한숨으로 파인 것이요, 인천 바닷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 고인 것이다”는 말이 유행할 만큼 파란 많은 곳이 미두시장이었다. 그러나 44년 미두사(米豆史)에서 반복창만큼 미두로 큰 환희와 좌절을 맛본 사람도 드물었다. 미두에 성공해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었다가 미두에 실패해 재산과 가족은 물론 정신까지 빼앗긴 반복창의 기구한 삶은 미두시장 흥망의 역사 그 자체였다.

반복창은 인천에 미두시장이 개설된 지 4년 후인 1900년, 강화도 이방(吏房)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지방관아의 실무책임자였던 만큼 어린 시절 반복창은 풍족한 환경에서 지냈다. 그러나 1910년 강제합방 이후 부친이 직장을 잃자 반복창의 가정은 급속히 기울었다. 호구지책으로 부친은 장사를 시작했지만 손대는 족족 큰 손해를 보았다.

거듭되는 사업실패로 화병까지 얻은 부친은 반복창이 열두 살 되던 해에 빚만 잔뜩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현직에 있을 때 부친에게는 의형제까지 맺은 절친한 친구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부친이 아전에서 쫓겨나고 사업에 실패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자, 그 많던 친구 중 어느 누구도 반복창의 가족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부친을 잃은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열두 살 소년 반복창은 생활전선으로 내몰렸다. 강화도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가 아라키(荒木)라는 일본인 집에 아이 돌보는 하인으로 들어갔다.

 

아라키 중매점의 ‘반지로’

 

개항 직후 화륜선을 몰고 인천으로 건너온 아라키는 한강 수로를 따라 인천과 한양을 오가면서 곡물을 운송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1896년 인천에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미두시장)’가 들어서자 ‘아라키중매점’이라는 미두 중매점을 차렸다. 오늘날로 치면 ‘취인소’는 선물(先物)거래소, ‘중매점’은 선물회사에 해당한다.

미두시장은 쌀과 콩을 현물 없이 10%의 증거금만 가지고 청산거래 형식으로 사고팔던 곳이다. 처음에는 쌀 외에도 콩, 면화, 명태 등이 거래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쌀 한 품목만 남았다. 기간을 두고 쌀을 거래하는 시장이라고 해서 ‘기미(期米)시장’이라고도 불렀다. 미두시장에서 현물거래가 이뤄지는 쌀도 있었지만, 전체 거래량의 0.5%에도 못 미쳤다. 원래는 미곡의 품질과 가격의 표준화를 꾀하기 위해 설립된 시장이지만 실제로는 공인된 ‘도박장’처럼 운영됐다.

미두의 최소 거래단위는 100석이었다. 쌀을 사거나 팔려면 중매점에서 ‘미두통장’을 개설해 10%의 증거금을 예치해야 했기에 미두를 하려면 최소한 100원은 있어야 했다. 그때 돈 100원이면 평범한 월급쟁이 두세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거래를 체결한 당월 말에 청산하는 ‘당한(當限)’, 다음달 말에 청산하는 ‘중한(中限)’, 다음다음달 말에 청산하는 ‘선한(先限)’ 세 가지 형태의 거래방식이 있었는데, 거래는 가격의 변동폭이 큰 ‘선한’에 집중됐다.

결제일에는 쌀과 현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차액만큼 현금을 주고받는 것으로 청산이 이뤄졌다. 결제일이 되기 전이라도 쌀값이 등락해 증거금이 10%에 못 미치면 부족한 만큼 채워넣어야 했다. 만일 채워넣지 못하면 다음날 반대매매로 청산됐다. 가령 쌀 100석을 300원의 증거금으로 석당 30원씩에 샀다면 쌀값이 3원만 오르내려도 두 배를 벌거나 깡통을 차게 되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 거래였다.

열두 살 소년 반복창은 아라키의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그 자신도 자랐다. 그렇게 2년을 지낸 후 반복창은 아라키중매점의 ‘요비코(呼子·미두 시세를 전하는 아이)’로 들어갔다. 열네 살 소년 요비코 반복창의 주 임무는 중매점에 모여 앉은 미두꾼에게 인천과 오사카의 미두시세를 소리를 질러 전달하는 것이었다.

미두시세는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 날씨, 거래량, 정치, 경제적 변인 등에 두루 영향을 받았지만, ‘오사카도지마취인소(大阪堂島取引所)’의 미두시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산 쌀의 가장 큰 소비지가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과 오사카 사이에는 전화선이 깔리지 않아 모든 연락은 전보를 통해 이뤄졌다. 미두 거래는 오전에 열리는 전장(前場)에서 10회, 오후에 열리는 후장(後場)에서 7회로 하루에 총 17번 이뤄졌는데, 쌀값이 오르다가도 오사카 시장에서 쌀값이 떨어졌다는 전보가 날아오면 다음 거래에서는 상승세가 꺾이기 일쑤였다.

거래 성립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 한 번에 기백, 기천원이 오가는 곳이 미두시장이었다. 미두꾼에게 시세를 외치고 다니면서 반복창은 언젠가 자신도 미두로 일확천금을 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철들면서 보고들은 게 미두뿐이다 보니 반복창에겐 미두가 세상의 전부였다. 아라키는 먹는 것 자는 것 제하고 반복창에게 월급조로 한 달에 6원씩 주었다. 터무니없는 박봉이었지만 미두 밑천이라 생각한 반복창은 허투루 쓰지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

밑천만 있다고 미두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복창은 일과가 끝나면 괘선(罫線·그래프)을 그려가며 밤을 새워 그날그날의 시세를 연구했다. 보통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그였지만 독학으로 일본어를 깨쳤고 경제학사 뺨칠 만큼 해박한 경제지식을 쌓았다.

1918년, 아라키는 열아홉 살 반복창을 ‘바다지(場立·중매점의 시장대리인)’로 발탁했다. 축하의 의미로 ‘지로(次郞)’라는 일본식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반복창은 아이 돌보는 하인으로 들어간 지 6년 만에 아라키중매점의 2인자 ‘반지로’로 꿈에도 그리던 미두시장에 데뷔했다.

 

아라키의 협잡과 파산

 

반복창이 ‘바다지’로 승진한 직후 4년을 끌어오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후복구 사업이 본격화하자 일본 경제는 유례없는 대호황을 누렸다. 소득이 늘어나 쌀의 소비가 증가한데다 그해 가을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했다. 시세변동이 거의 없어 한동안 소강국면을 보이던 미두시장이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선물시장인 미두시장은 어차피 ‘제로섬게임’이었다. 쌀값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딴 사람의 이익과 잃은 사람의 손해를 합치면 결과는 언제나 ‘0’이었다. 오르고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변동폭이 얼마나 큰지가 중요했다. 쌀값의 폭등세나 폭락세는 그만큼 ‘대박’과 ‘쪽박’의 가능성이 커짐을 의미했다.

 

하루 사이에 쌀값이 10원씩 20원씩 오르내리자 노름판은 더 커진 셈이었다. 인천미두취인소에서 하루에 백만 석의 거래량을 넘긴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미두판의 호황은 굉장했다. 구름같이 금시 잡힐 듯 잡힐 듯이 눈앞에서 뻔히 보이는 황금을 못 잡는 수만의 팔도(八道) 미두꾼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다. 하루 열일곱 번이나 바뀌는 미두시세에 미두꾼의 마음인들 얼마나 초조했으랴. (‘흥망의 환무 반세기(5)’, ‘동아일보’ 1939년 11월16일자)

 

최소 거래단위가 100석이었던 만큼, 쌀값이 하루에 10~20원씩 오르내린다는 것은 미두시장에 참가한 사람은 하루에 최소 1000~2000원씩 따거나 잃었다는 말이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하루에 ‘최소’ 1억~2억씩 따거나 잃은 셈이다. 100~200석 단위로 거래하는 ‘마바라’(잔챙이 미두꾼)가 그럴진대, 천석 만석 단위로 거래하던 큰손들은 어떠했겠는가. 시세 변동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 한 번에 미두꾼들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했다.

투기적 거래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던 아라키가 하늘이 내린 이 기회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화륜선을 부리던 뱃사람이었던 만큼 아라키는 천기(天氣)를 잘 보았다. ‘천기상장(天氣相場·날씨 시세)’이라는 미두 용어가 있을 만큼 비가 오고 안 오고는 미두시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년 중 ‘천기상장’이란 미두꾼이 한몫 보는 대목인데, 아라키는 비 오고 안 오는 천기를 잘 보는데다가 바다 생활을 오래한 만큼 그 성질이 자못 대담무쌍해서 여름 한철 천기상장은 가위(可謂) 독무대로 휘저었다. 그러나 비 오고 안 오는 것이 시세와 전혀 상관없는 봄 겨울 시세를 천기를 본다고 맞출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여름철 천기상장 맞추던 대담함으로 봄겨울 시장에 들이덤볐으니 그것이 어림이나 있겠는가. 팔면 오르고 사면 떨어져 나중에는 증거금이 부족해 야단이 났다. (‘미두꾼의 흥망성쇠기’, ‘조광’ 1939년 9월호)

 

파산 위기에 몰린 아라키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1월, 3개월간의 폭등세를 멈추고 쌀값이 폭락하자 ‘쌀값은 결국 오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아라키는 반등에 대비해 투기적으로 쌀을 매수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쌀값 폭락세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어리석은 조선인들. 오냐, 그래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

아라키는 쌀값이 떨어지면 사고, 또 떨어지면 더 사는 식으로 ‘매수’에 돈을 걸었다. 만석씩, 이만석씩 사다 보니 어느덧 매수해놓은 쌀이 10여만석에 달했다. 혼자서 10만년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쌀을 매수해놓고 쌀값이 반등하기를 초조히 기다렸지만, 쌀값은 찔끔 오르다가 크게 떨어지기를 거듭했다. 매시간 전보로 날아오는 오사카 미두시세도 절망적이기만 했다.

‘당대 최고의 호화 결혼식’이었던 반복창과 김후동의 혼인을 풍자한 만화.

‘최후의 방법을 써야만 하는가.’

손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아라키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오사카도지마취인소 직원에게 전보를 쳤다.

‘시세와 상관없이 무조건 올랐다고 타전해주게.’

전보 시세조작은 당시 인천 미두시장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일이었다. 아라키의 조작으로 오사카에서 쌀값이 오르든 내리든 인천에는 오사카의 쌀값이 올랐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아라키는 거짓 전보로 협잡을 하여 인천 시장을 통으로 삼키려는 불타는 야심에 자꾸만 샀다. 진인사 대천명이란 이에 적용될 문구이런가. 인천 시세는 거짓 전보에도 아랑곳없이 떨어지기만 했다. 인천 시장의 미두꾼들은 아라키가 사면 팔고 또 사면 또 팔았다. 아라키는 억센 미두꾼들에게 여지없이 패배했다. 오사카의 거짓 전보도 보는 체 마는 체 인천 시세는 자꾸 떨어지기만 했다. 인천 미두꾼들의 줄기찬 매도 공세로 도리어 인천 시세가 오사카 시세를 끌어내렸다. (‘흥망의 환무 반세기(5)’, ‘동아일보’ 1939년 11월16일자)

 

교활한 일본인 미두꾼에게 연전연패하던 조선인 미두꾼이 오랜 만에 거둔 호쾌한 승리였다. 하지만 ‘승리의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승리는 거뒀으되 딴 돈을 받을 수 없게 된 탓이었다. 아라키는 인천미두취인소 이다(飯田) 사장과 결탁해 현찰 대신 수표로 증거금을 예치했다. 물론 아라키의 수중엔 수표를 결제할 현찰이 없었다.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전보 조작까지 실패하자 아라키는 취인소에 예치한 180만원 상당의 수표를 부도내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어차피 미두 대금은 거래 쌍방이 직접 결제하는 것이 아니라 취인소를 거쳐서 결제됐기 때문에 ‘매도’에 투자한 미두꾼들은 아라키가 도주하든 자살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취인소에 비싼 수수료를 괜히 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발생했다. 자본금이 고작 4만5000원에 불과한 인천미두취인소가 아라키가 부도낸 돈 180만원을 메워넣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미두시장은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실컷 잃다가 좀 따면 이 꼴이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앉은 미두꾼의 마음은 얼마나 타고 아팠을 것인가. 원통한 나머지 인천 바다에 투신자살한 사람까지 있었으니 자기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생긴 재앙(自作之孼)이라기보다 신문화에 짓밟힌 과도기 조선의 인적 희생으로서 애처로운 비극이었다. (‘흥망의 환무 반세기(5)’, ‘동아일보’ 1939년 11월16일자)

 

아라키의 180만원을 포함한 300여 만원의 부도수표를 떠안은 인천미두취인소는 3·1운동으로 어수선하던 1919년 3월 영업정지를 당했다. 이다 사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취인소 간부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도주한 아라키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사카 미두시장을 기웃거리다가 빼돌린 재산마저 모조리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에 돌아갔다.

당시 조선은 인구의 80%가 농민인 농업국이었다. 원활한 경제운영을 위해서는 쌀값을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쌀의 공정시세를 결정하는 곳이 바로 미두시장이었다. 방만한 경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총독부로서도 이제 막 달아오른 미두시장을 폐쇄상태로 놔둘 수는 없었다. 1919년 6월, 영업정지 석 달 만에 미두시장은 자본금을 100만원으로 늘려 다시 문을 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미두시장이 다시 열릴 날만 학수고대하던 팔도의 미두꾼들은 다시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청산대금을 결제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금융사고를 낸 지 불과 석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파리떼처럼 모여든 미두꾼 중 누구도 주문을 내면서 돈을 못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확천금의 꿈에 취해 목청껏 ‘얏다(판다)’ ‘돗다(산다)’를 외쳤다. 중매점에 죽치고 앉은 각양각색의 미두꾼들 사이에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앳된 얼굴의 청년이 있었다. 반복창이었다.

 

‘미두신(米豆神)’ 반지로

 

중매점 주인 아라키가 180만원의 거금을 부도내고 야반도주했던 것은, 반복창이 중매점을 대리해 취인소에 나가 중매점으로 들어온 매매주문을 넣는 ‘바다지’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이었다. 벼락출세를 즐길 여유도 없이 실업자로 전락한 것이었다. 게다가 도망간 주인 탓에 미두시장마저 문을 닫았다. 배운 기술이라곤 미두가 전부였는데, 직장도 잃고 이직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이었다. 실업자가 된 반복창은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미두시장이 열리길 고대했다.

 

반복창의 부인 김후동과 그의 아들딸. ‘동아일보’1926년 1월22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미두시장이 다시 열리자 반복창은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 미두시장을 뒤흔든 아라키중매점 바다지라는 경력이면 다른 중매점에 취직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40~50원 월급이나 받자고 온종일 남의 주문 대신 넣어주는 바다지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수중엔 8년간 이를 악물고 모은 400~500원의 예금이 있었다. 빠듯하지만 잔챙이 미두꾼 ‘마바라’로 나설 정도는 되었다. 반복창은 고심 끝에 밑천을 날리면 그때 가서 취직하기로 하고 미두꾼으로 나섰다.

큰 손해도 없이, 그렇다고 큰 이익도 보지 못한 채 6개월이 흐른 1920년 1월, 몇 달 동안 지루한 보합세를 이어가던 쌀값이 갑자기 치솟기 시작했다. 아라키를 도산시킨 ‘1918년 겨울장’보다 더 큰 장이었다. 쌀값은 하루에도 몇 원씩 화끈하게 오르내렸다. 큰 규모의 중매점은 하루 수수료가 만원을 넘길 정도로 거래량이 폭증했다.

‘칼 물고 뜀뛰기’ 하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투기장에서 반복창은 연전연승의 신화를 이어갔다. 한 섬에 55원씩 1만섬을 사서 73원씩에 팔아 한 번 거래로 18만원을 벌기도 했다. 마치 귀신이 붙은 것처럼 맞추기를 몇 달. 반복창의 재산은 어느덧 40만원으로 불어났다. 한 달 월급이 5~6원에 불과하던 요비코가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천지가 온통 반복창 이야기로 들끓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의 신의 조화라. 반지로는 이상하게도 팔아도 먹고 사도 먹고 거짓말같이 시세를 잘 맞췄다.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그가 출입하는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과 조선은행 인천지점에는 각각 20만원씩 거금이 예금되었다. 그를 따르는 부하가 매일 30~40명에 달해 그를 미두신(米豆神)으로 추대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 강화도에 가 산도 사고 전답도 사며 인천 부도정(敷島町·지금의 중구 선화동)에 있는 일본인 창기도 조건 없이 여덟 명이나 속신(贖身·양민으로 만듦)시켜 주었다. (‘나르는 새도 못 따르던 지난날의 반지로’, ‘매일신보’ 1930년 2월15일자)

 

스물한 살 청년 반복창은 미두꾼으로 나선 지 1년 만에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미두계의 패왕’으로 이름을 떨쳤다. 반복창이 중매점에 나타났다는 소식만 들려도 미두시세가 몇 원씩 오르내렸고, 그가 한번 팔고 사면 오사카 미두시장 시세까지 출렁거렸다.

득의양양해진 반지로는 인천 외리(용동)에 400평 집터를 사고 20만원을 들여 조선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서양식 저택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굽어보면 인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올려다보면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이 펼쳐지는 인천 최고의 집터였다. 땅 사고 도면 그리고 지반 다지는 데만 9만원을 들였다. 어른 키 두 배는 됨직한 높고 튼실한 돌담이 완공되어 갈 때쯤, 반복창은 저택의 안주인을 찾아 나섰다. ‘미두신’으로 추앙받던 반복창이 배우자로 간택한 여성은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원동 큰 재킷’ 김후동이었다.

 

‘원동 재킷’

 

김후동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미인이었다. 반복창과는 동갑이었지만 살아온 환경은 너무 달랐다. ‘돈’과 ‘미모’라는 확실한 경쟁력이 없다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부였다. 김후동은 경성여고보에 다닐 때는 바이올린 연주를 잘해 음악회 독주를 도맡아했다. 얼굴이 꽃같이 아름다운데다가 치마 끝자락에 수를 놓아 입고 다녀 뭇 남성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가는 곳이면 어디든 꽃다발과 연애편지를 든 남학생들이 쫓아다녔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협박도 무수히 받았다.

 

미인이라 하면 얼굴만 고와서 되는 것이 아니요 태도만 어여뻐서 되는 것도 아니다. 얼굴과 태도가 다 맞아야 비로소 미인 소리를 듣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완벽한 미인이 드물어서 얼굴이 예쁘면 대개는 미인이라 한다. 그러나 처녀시절 김후동 씨야말로 얼굴과 태도와 수족까지 어디 한군데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발뒤꿈치까지 끌리는 그의 검고 윤기 있는 머리는 그의 아름다움을 돋우었다. (‘반복창 씨 부인 김후동 씨’, ‘동아일보’ 1926년 1월22일자)

 

여고보까지 졸업한 미모의 신여성이 보통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미두중매점 요비코 출신 졸부와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김후동은 ‘원동 재킷’ 김화동의 언니였다. 김후동의 명성은 기껏해야 서울 학생들 사이에서나 알려졌을 뿐이지만, 김화동의 명성은 조선 팔도에 자자했다. 김후동이 지역구 명사였다면 김화동은 전국구 명사였던 셈이다. 김화동이 그처럼 유명해진 것은 미모도 미모려니와 1921년 1월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원동 재킷’김화동과 그녀의 정조를 유린한 박석규.

1919년 봄 여학교 기예과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김화동은 옷맵시에 남달리 신경을 썼을 뿐 도드라지게 튀는 여학생은 아니었다. ‘원동 재킷’이라는 별명은 졸업 후 처음 맞는 겨울에 얻었다. 김화동은 여덟 살에 부친을 잃고 두 살 터울의 언니 김후동과 함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다행히 부친이 남겨준 유산이 있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다.

여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에 들어갈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기보다 어린아이들 밑에 들어가서 배우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해서 그만두었다. 공부하지 않는 것은 좋았지만 집안에 처박혀 빈둥거리자니 갑갑증이 생겼다. 아침 밥 숟가락을 놓으면 김화동은 놀거리를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연애를 상징하는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연녹색 치마에 붉은 해당화빛 단을 대어 입고, 좀 갸름하고도 고와보이는 어여쁜 얼굴을 화려하게 단장하고, 옆으로 넘긴 트레머리에 일부러 두세 줄 머리털을 이마 앞으로 넘겨놓고, 굽 높은 구두를 발끝으로 디디고, 가는 허리를 맵시 있게 가누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양은 목석의 심장이 아닌 이상 누구이든지 그 요염한 아리따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점점 그가 아리땁다는 소문과 늘 속 빈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닌다 하는 풍설이 점점 널리 퍼진 결과 원동에 사는 재킷 입고 다니는 어여쁜 여학생이라 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거의 다 짐작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동 ‘재킷’의 애사(1)’, ‘조선일보’ 1921년 1월23일자)

 

김화동의 바깥출입이 잦아질수록 ‘원동 재킷’이란 명성도 높아만 갔다. 김화동이 대문을 나서면 미모에 넋을 잃고 막무가내로 구애하는 순진한 남학생, ‘학생 밀매음’이라 단정하고 돈으로 정조를 사고자 하는 호색한, 일부러 툭 건드려 보는 불량청년, 어디서 구했는지 사진기를 들고 나타나 사진을 찍자 하는 한량 등 각양각색의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대문 앞에는 날이면 날마다 연애편지가 수북이 쌓였다. 김화동이 다니는 교회에는 반갑지 않은 가짜 신도가 들끓었다. 그러나 김화동은 그런 관심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에겐 사랑을 바칠 남자가 아니라 도쿄 유학을 보내줄 남자가 필요했다.

 

김화동은 무엇보다도 돈 있는 남자! 자기를 도쿄 유학생으로 만들어줄 남자를 애타게 기다렸다. ‘사랑 구걸 편지’ 속에서도 천마디의 사랑한다는 사연보다 돈이 많으니 일본에 같이 가자는 한마디의 사연을 기다리고 고대했으나, 그를 사랑한다는 청년 중에는 그러한 팔자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3)’, ‘조선일보’1921년 1월25일자)

 

1920년 봄 동대문 밖 이근호 남작의 별장에 ‘삼성무극교’라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문을 열었다. 삼성무극교는 별장에다 ‘어린 벗’이란 잡지사와 정동양행이라는 여성의류업체까지 차렸다. 김화동은 정동양행에서 일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어린 벗’의 부인기자로 들어갔다. 일본 유학을 가겠다는 헛된 꿈을 접고 기자 일에 재미를 들이려 할 때, 자기를 추천해준 친구가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참 세상에 별일도 많더라. 우리 집에 뚜쟁이가 찾아와서 그러는데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고 있는 어떤 청년이 인물 곱고 재주 있는 여학생을 구하는데 마음만 맞으면 일본에 데려가서 같이 공부를 하겠다더라.”
이 소리를 들은 김화동은 가라앉으려던 가슴이 다시 뒤숭숭해졌다.
“애 그러면, 그 뚜쟁이 집은 어디야?” 물으니 친구는 “뚜쟁이를 찾아가고 싶은가 보구나. 그렇지만 그 남자 돈은 있어도 품행은 썩 좋지 못하다더라”며 까르르 웃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5)’, ‘조선일보’ 1921년 1월27일자)

 

김화동은 친구에게 주소를 얻어 뚜쟁이를 찾아갔다. 뚜쟁이는 일본대학에 유학 중인 전라도 정읍의 유명한 재산가 박석규가 참한 신붓감을 찾고 있다며 그의 사진까지 꺼내 보여주었다. 김화동은 박석규가 한 번 결혼했다가 상처했다는 말에 마음이 꺼림칙했지만, 찬밥 더운밥 따질 처지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뚜쟁이는 김화동에게 30원을 쥐어주며 사진을 찍어오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 편지와 함께 일본으로 보내니 얼마 후 박석규가 답장을 보내왔다. 마음에 드니 일본으로 건너오라며 ‘친절하게도’ 100원짜리 지폐까지 함께 보냈다.

김화동은 다니던 잡지사에 사표부터 내고 도항 수속을 밟았다. 일본에 건너가려면 무엇보다도 여행증명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김화동처럼 여행목적이 불분명한 사람에게는 좀처럼 여행증명서를 교부하지 않았다. 고심 끝에 김화동은 평소 친분이 있는 총독부 관리에게 찾아가 “모교의 추천으로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었는데,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관리는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여행증명서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김화동은 교부받은 여행증명서와 박석규가 보내준 100원을 모친과 언니에게 보여주며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떠난다고 말했다. 1920년 7월, 김화동은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꿈에도 그리던 일본으로 떠났다. 김화동이 일본으로 떠난 후 김후동은 감사 인사차 동생의 모교를 찾아갔다. 동생의 은사로부터 ‘김화동을 관비유학생으로 추천할 의사도, 추천한 일도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김후동은 동생이 모친과 자신을 속인 것을 깨달았다. 경찰에 요청해 동생의 소재파악에 나섰지만, 비극을 막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감언이설로 김화동을 일본에 불러들인 박석규는 김화동이 일본으로 건너오자 단지 욕정을 푸는 대상으로만 대했다. 결혼을 하거나 공부를 시켜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한 달간 욕정을 한껏 풀고는 싫증난다며 다른 여성을 찾아 집을 나갔다. 얼마 후 혼자 남겨진 김화동에게 박석규의 조카가 찾아왔다.

 

“나의 당숙은 본시 한 여자를 데리고 석 달을 못 사는 사람이고, 고향에는 정식 아내와 아들까지 있으니 하루 속히 당숙의 품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원동 ‘재킷’의 애사(9)’, ‘조선일보’1921년 1월31일자)

 

김화동은 피눈물을 흘리며 도쿄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귀향 경비는 박석규가 구애할 때 사준 시계와 반지를 팔아 마련했다. 모친과 언니에게는 박석규와 한집에서 산 것은 사실이지만 결단코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한 달 남짓 지나자 김화동의 배가 불러왔다. 모친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며 가기 싫다고 버티는 김화동을 억지로 등 떠밀어 박석규에게 돌려보냈다.

 

두 번째로 박석규를 찾아간 김화동은 “생사를 그대에게 맡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석규는 냉소를 지으며 “그처럼 호기 있게 가더니 다시 온 이유가 무엇이오. 바라건대 이 어리석고 못난 박석규보다 더 나은 사람을 구해 재미나게 사시오”하고 말했다.
치욕을 당한 김화동은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다시 찾아온 줄 아오. 내 몸에는 그대의 혈육이 자라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며 꾸짖었다.
박석규는 독기를 품은 웃음을 지으며 “툭하면 서방을 내버리고 달아나는 계집이 밴 자식을 세상에 제 자식이라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공연히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그대가 밴 아이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편안히 사시오”라 말할 뿐이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11)’, ‘조선일보’ 1921년 2월2일자)

미두시장의 폐해를 다룬 ‘반도시론’1918년 11월호의 ‘백해무익한 인천미두취인소를 폐지하라’.

 

김화동은 하는 수 없이 분을 삭이며 재차 집으로 돌아왔다. 임신 7개월에 접어든 1921년 1월 김화동의 아이가 유산되었다. 의사는 약을 먹어 낙태를 한 것 같다고 했지만, 김화동은 간질이 있는 친척과 같은 방을 쓰는데 그날 밤 별안간 환자가 발작을 일으키며 자신의 배를 난타해서 유산한 것이라고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아이가 유산되면서 김화동은 적어도 미혼모라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모면할 수 있었다. ‘원동 재킷’의 가슴 아픈 사연은 5단짜리 장문의 기사로 무려 12회 연재되면서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동안 김화동은 대문과 방문을 걸어 잠그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원동 재킷’ 김화동이 유산한 지 불과 석 달 후, ‘원동 큰 재킷’ 김후동은 미두왕 반복창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2등석 특별열차를 대절하고, 서울 시내에 돌아다니는 자동차 3분의 1을 동원한 초호화판 결혼식이었다. ‘원동 큰 재킷’의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 모두 ‘원동 재킷’이 지난 여름 한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돌담 안의 네 칸짜리 움막

 

1921년 5월 반복창은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였다. 400원 밑천으로 40만원 재산을 일구기까지 그가 들인 시간은 고작 1년 남짓이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스물두 살 청년이 앞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재산을 1000배나 불린 것은 행운이 따랐다 쳐도,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온다한들 자기가 갈고 닦은 실력이면 1년에 10배씩은 불릴 자신이 있었다. ‘천천히’ 1년에 10배씩만 불려 나가도 3년 후면 조선 최고, 10년 후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천 외리에 짓고 있는 저택의 돌담 공사도 거의 끝나가고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도 아내로 얻었다.

그러나 결혼 직후 인생계획을 ‘조금’ 수정할 일이 생겼다. 1920년 1월 큰 장이 시작된 이래로 1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시세예측에 실패한 적이 없던 그가 실패를 경험한 것이었다. 손실을 입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이 구겨진 게 문제였다. 반복창은 그동안의 교만을 반성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매도와 매수에 신중을 기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중에 신중을 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측은 자꾸만 빗나갔다. 사면 떨어지고 팔면 올랐다. 1921년 한 해 동안에만 10만원 상당의 손실을 입었다. 현금 흐름이 좋지 않아 집 공사도 잠시 중단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복창은 인생계획이 1~2년쯤 늦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듬해 더 큰 손실을 보았고, 그 이듬해에는 완전히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인천 외리에 짓고 있던 저택의 규모도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인천 외리에 짓던 반지로의 집은 실패를 볼 때마다 설계를 줄이고 줄이다가 나중에는 소위 만리장성 같다는 굉장한 돌담과 사백 평의 커다란 집터에 지어진 집은 네 칸짜리 움막이 되어버렸다. (‘눈물과 웃음의 40년사’, ‘조선일보’ 1939년 5월14일자)

 

1923년 생계마저 어려워지자 반복창은 아라키가 그랬던 것처럼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한창때 그를 ‘미두신’으로 추앙하며 따르던 부하가 30~40명에 달했지만, 실패를 거듭한 이후에는 정우석, 박용하 둘만 남았다. ‘신’이 그처럼 처참하게 무너졌는데 ‘사제’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세 사람이 남은 돈을 다 합쳐도 최소 거래 단위인 100석을 살 수 있는 밑천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재기하려면 어떻게든 투자자를 찾아야 했다.

 

천안군 동리 김세제는 군수를 지내면서 십여 년 전 약 오십만원의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김세제의 아들 김동한은 호세이대학까지 졸업한 지식인이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까닭에 일찍이 무뢰한의 유인에 빠져 약 이십육만원을 낭비했다. 미두로 거액의 손실을 본 정우석과 박용하는 반복창과 공모하여 김동한을 찾아가 인천에서 미두취인을 하면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고 권유했다. 자금은 현금이 아니라도 상관없고 그의 부친 김세제의 약속어음만 있으면 되는데 약속어음을 발행할 때 쓸 도장은 새로 새기면 된다고 교사했다. 마침 금전이 필요하던 김동한은 호쾌히 승낙하고 4월11일 아침에 인천에 도착했다.
반복창 일당은 미리 계획한 대로 김동한을 아리타(有田初吉)가 경영하는 ‘기쿠모도’(菊筏登)란 요릿집에 데리고 가서 술과 기생으로 온갖 유흥을 제공했다. 이튿날 13일에는 김동한이 위조한 김세제의 악속어음 이만원으로 기타지마(北島)중개점에서 미두통장을 개설했다. 기타지마중개점은 신용이 불확실한 약속어음만으로는 증거금이 될 수 없다고 추가로 오천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약 10일간 통장은 반복창이 보관하고 그 사이 김동한이 다른 데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집 한 채를 오십원에 세내 일본 게이샤 지요(千代)와 동거시켰다.
반복창은 미두거래를 하려면 현금 이만오천원이 필요한데 달리 구할 방법이 없다며 친모 명의의 외리 가택을 김동한에게 팔만오천원에 사라 하되 대금은 현금이 아니라도 김세제의 약속어음으로 결제해도 된다고 했다. 팔만오천원의 약속어음을 받고 매매계약을 맺은 후 가등기만 하자고 해 수속을 마쳤다. 처음 의도했던 미두취인은 유명무실로 돌아가고 또 집을 사면 이만오천원을 대겠다고 한 것도 거짓말로 드러났다.
한편으로 유흥비의 독촉은 심해져서 지난 10일에 반복창 일당은 인천을 떠나 서울 관훈동 김동한의 첩 집으로 피신했다. 그동안 김동한과 반복창 일당이 쓴 유흥비가 모두 일만여 원에 달해서 요릿집 주인 아리타로부터 결국 고소를 당했다. (‘투기업자 말로, 반복창의 대사기’, ‘매일신보’ 1923년 5월26일자)

 

1923년 5월 사기혐의로 구속된 반복창은 같은 해 10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실형을 선고받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미두 자금을 대줄 투자자는 영원히 찾지 못했다. 밑천이 없어 미두시장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이후에도 반복창은 미두시장 근처를 기웃거리며 ‘합백꾼’들과 어울렸다. ‘절치기’라고도 부르는 합백은 많으면 1~2원, 적게는 10~20전씩 걸고 쌀값이 오르는지 내리는지를 맞추는 ‘사설 미두’였다. 한때 미두왕으로 군림했던 반복창은 한동안 ‘합백 대장’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한번 거래로 18만원을 벌던 반복창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한 영락이었다.

‘원동 큰 재킷’ 김후동의 처지가 ‘원동 재킷’ 김화동의 처지보다 나았을 때는 결혼 직후 몇 달간뿐이었다. 신혼의 단꿈이 채 깨어지기도 전에 반복창은 무일푼으로 전락했다. 김후동은 자신이 반복창의 백만금 재산에 눈이 멀어 결혼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무일푼으로 전락한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낳아주어야 했고, 결혼 생활 재미가 어떠냐는 질문에는 애써 행복한 척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투기의 말로

 

벌써 김후동 씨는 두 아이의 어머니요, 며칠 안 돼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 들으니 그의 남편 반복창씨가 미두에 많이 실패하여 부부끼리 여러 가지 근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란 세상에 돌고 도는 것이니 잃은들 얻은들 무엇이 그리 신통하리오. 오직 신통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맺힌 세 개의 사랑의 열매인가 하노라.
“어머니 된 감상 말이에요?”
하고 그는 그 애교 있는 얼굴에 웃음을 듬뿍 띠면서
“아이 낳기 전에는 남편이 제일인 것 같더니 아이 낳은 후부터는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처녀 시절에는 자식이 무엇이 그리 중할까 그랬더니 막상 낳고 보니깐 그렇지 않아요.” 하고 사랑스러운 아들딸을 양쪽에 앉히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앉았다. 그의 얼굴 가운데는 어머니로서의 만족한 빛이 가득했다.
(‘반복창씨 부인 김후동씨’, ‘동아일보’ 1926년 1월22일자)

 

김후동은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바로 그 이듬해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모두 맡기고 이혼했다. 반복창은 미두로 돈도 잃고, 청춘도 잃고, 아내까지 잃고 나서도 미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거듭된 실패와 상실감으로 나이 서른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정신마저 이상해졌다. 지팡이 없이는 걷기조차 힘든 불구자가 되었지만 매일같이 미두시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쌀값이 오른다” “쌀값이 떨어진다” 중얼거렸다.

중일전쟁이 3년째에 접어든 1939년, 일본은 쌀을 전수물자로 분류하고 쌀과 쌀값을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쌀의 공정시세를 결정하는 미두시장의 기능이 유지되기 어려워진 것이었다. 반복창은 1938년 10월18일 세상을 떠났고, 미두시장은 그로부터 20일 후인 11월7일 이 땅에서 영영 사라졌다.

반복창도 죽고 미두시장도 사라졌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반복창’이 살아 있고 무수히 많은 ‘미두시장’이 성업 중이다. 반복창은 미두시장에서 가장 극적인 승리를 맛본 진정한 미두왕이었지만, 그런 반복창조차 부를 누린 시간은 2년에 불과했다.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명치정 주식시장 사람들
“자본금? 필요 없어! 여기는 배포 하나로 일확천금 하는 데야”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밤에는 신문을 만들고 낮에는 단기 주식투자에 열중했던 문학평론가 김기진, 주식으로 날린 돈을 채워 넣으려다 인생을 망친 전도유망한 은행원, 배포 큰 투자와 빠른 판단으로 거부(巨富)를 일군 유일한 조선인 조준호. 1930~40년대 경성의 주식시장 ‘조선취인소’에서 벌어진 초기 금융자본주의의 난투극을 들여다보자.

1922년 명치정에 건립된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 1932년 인천미두취인소와 합병돼 조선취인소로 이름이 바뀐다. 큰 사진은 조선취인소 주변풍경을 묘사한 ‘삼천리’ 1938년 8월호 ‘황금이 끓는 전시하 명치정 주식가’ 기사.

1933년, 문학평론가 김기진은 가혹한 한 해를 보냈다.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김기진은 그해 1월, 극심한 경영난을 겪던 ‘조선일보’가 금광 재벌 방응모에게 인수되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1924년 ‘매일신보’ 기자를 시작으로 ‘시대일보’ 기자,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역임한 10년 경력의 중견 언론인이었지만, 김기진의 나이 이제 고작 서른하나였다. 젊은 혈기에 사표는 던졌으나 뾰족한 호구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33년 한 해 동안 김기진이 만진 돈이래야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평론을 기고해 받은 원고료 기십원이 전부였다.

이듬해 1월 ‘ML(마르크스 레닌)당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은 형 김복진이 만기 출소했다. 김기진에게 조각가 김복진은 형이기 이전에 도쿄 유학 시절부터 프롤레타리아트 예술운동을 함께한 동지였다. 미술계와 문학계에서 막중한 영향력을 가진 형제였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초라한 ‘전과자’와 ‘실업자’ 신세일 뿐이었다. 한 달 후, 근 1년간 집에 눌러앉아 빈둥거리던 김기진에게 ‘조선일보’ 서무부장으로 있다가 지난해 그와 함께 퇴사한 김웅권이 찾아왔다.

“이보게 팔봉(김기진의 아호), 3년 전 우리가 총독부 광산과에 출원한 평남 안주의 금광이 허가되었네. 출자할 친구도 한 사람 구해놓았으니 허구한 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니라 안주로 내려가서 금광이나 하세. 그깟 신문 같은 것에 미련을 갖고 서울에 있느니보다 산골에 가서 노루 피나 먹는 것이 낫지 않겠나.”

김웅권의 동업 제의를 받은 김기진은 주저없이 승낙했다. 1934년 4월16일, 김기진과 김웅권 두 사람은 서울을 떠나 평남 안주의 궁벽한 산골로 떠났다. 금광으로 떠나는 찻간에서 김기진은 장차 산에서 큰 재수가 터지면 돈 백만원 움켜쥐고 보란 듯이 신문사를 하나 차리겠다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금광에서 주식시장까지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금광으로 달려간 김기진은 낮이면 광부들과 어울려 금을 찾고 밤이면 소설 ‘청년 김옥균’을 써서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고단한 일과를 보냈다. 조선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소개한 작가가 금광을 하러 떠났다는 소식은 문단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일찍이 김기진씨는 ‘개벽’지에 시대적 고뇌상을 담은 여러 편의 수필을 실어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붉은 쥐’‘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등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은 소설을 발표하고, 날카로운 필봉으로 문예월평을 쓰면서 문단의 중요한 평론가로서 대우받는 동시에 필자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또 문학청년으로서 김기진 씨를 만나고 싶던 차에 김기진 씨를 논하게 되니 외람된 생각도 나거니와, 그때 그와 같은 정열을 가지고 나섰던 선배가 금광으로 일확천금의 이상을 안고 출발하였다니 세사와 인심의변천에 새삼스럽게 무상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민병휘, ‘김기진론’, ‘삼천리’ 1934년 9월호)

 

프롤레타리아트 예술운동의 선구자였던 김기진은 정어리 공장, 금광, 잡지사, 인쇄소 경영에 차례로 실패하고 명치정 주식시장에서 동신주 투기로 일확천금을 꿈꾼다.

1년 동안 실업자 신세였다곤 하나 끼니를 거르거나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만큼 궁핍하지는 않았다. 백면서생 김기진이 금광을 하러 나선 이유는 궁핍이 아니라 허무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를 알면 알수록 문단이나 신문사가 주는 얄팍한 권력과 명예가 하찮게 다가왔다. 세치 혀로 아무리 야유하고 비판해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 할수록 흔들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 혼자 고고한 척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을 조롱해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욕망을 감추고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 세상과 부딪쳐보는 것이 정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보다 강한 게 펜이라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펜보다 황금이 강했다.

문인으로나 언론인으로서의 명예는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욕망을 좇아 시작한 금광이었건만, 금광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첫 삽을 뜬 지 두 달이 지나도록 금광에서는 노다지는커녕 금싸라기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자금을 대던 투자자는 더 파봐야 손실만 커질 것으로 판단하고 일찌감치 손을 털었다. 투자자를 잃은 김기진과 김웅권은 스스로 운전자금을 융통해야 했다. 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로 돌아온 김기진에게 집에서 정양하고 있던 김복진이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금광은 접은 것이냐?”
“돈 주선하러 왔는데 돈만 마련되면 다시 금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얘 기진아, 네 금광이 어디 있는지 내가 가르쳐주랴? 여기 있다. 이 책상 위에 있다! 여기서 네가 원고지 한 장 쓰면 한 척 두 장 쓰면 두 척 이렇게 너는 네 광맥을 파고들어가는 거야. 이걸 버리고 어디로 가니?”
(김기진, ‘우리가 걸어온 30년(4)’, ‘사상계’ 1958년 11월호)

 

자금을 마련할 길도 막막하고, 형의 고언(苦言)에 깨달은 바도 있어 김기진은 금광사업을 정리했다. 노다지를 캐내 신문사를 차리겠다는 행복한 꿈은 불과 넉 달 만에 뜬구름처럼 사라졌다.

금광에 실패한 후 김기진은 일확천금의 꿈을 접고 ‘청년조선’이라는 잡지사를 차렸다. 밑천이라곤 살림살이를 저당 잡히고 마련한 약간의 자금과 문인 겸 언론인으로 10여 년 살면서 확보한 인맥이 전부였다. 1934년 10월에 ‘청년조선’ 창간호를 간행하고, 부동산값 폭등으로 돈벼락이 떨어진 나진으로 직접 광고영업을 나가 7000원 상당의 축하광고를 유치했다. 잡지 제작비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인쇄비를 줄이기 위해 광고료를 털어 ‘애지사’라는 인쇄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운(時運)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1934년 12월 ‘청년조선’ 2호 제작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김기진은 ‘전주 사건’이라 알려진 사회주의 문인 검거 사건에 연루돼 구금됐다. 보름 남짓 혹독한 신문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풀려나 사무실에 나가보니, 동업자가 잡지사와 인쇄소의 자산 일체를 매도하고 도주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청년들에게 사회과학지식을 전파하면서 안정적으로 생활비도 벌겠다는 계획은 반년 만에 또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1935년 3월, 실직과 연이은 사업 실패로 실의에 젖어 있는 김기진에게 ‘매일신보’ 이상협 부사장이 입사를 제의했다. 김기진은 1924년 ‘매일신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총독부 기관지 발행사에 다니는 것이 꺼림칙해서 몇 달 만에 월급이 반밖에 안 되는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긴 바 있었다.

10여 년 세월이 흘렀어도 ‘매일신보’는 여전히 총독부 기관지였다.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사회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가 정상적인 직장을 가질 기회는 흔치 않았다. 내일이라도 출근하라는 이상협 부사장에게 김기진은 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신문사에서 직위는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오전에는 출근을 하지 않고, 오후 늦게 출근해서 조간신문 편집만 맡을 수 있게 양해해주십시오.”

밤낮이 바뀌는 생활을 해야 하는 조간신문 편집은 기자들이 기피하는 보직이었다. 이상협 부사장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기진은 ‘조선일보’ 사회부장 자리를 박차고 나온 지 2년 만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김기진은 생계를 위해 밤에는 어용신문 기자 노릇을 하더라도, 낮 시간만큼은 ‘보람 있게’ 쓰고 싶었다.

 

내가 낮에는 출근을 않고 밤에 출근해 조간신문만 만들겠다는 조건을 붙인 까닭은, 낮에는 명치정(명동)에 있는 주식취인소(증권거래소)에 나가 앉아서 투기를 해볼 결심이었던 까닭이다. 정어리 공장도 해보았고 금광도 해보았지만, 이런 것은 막대한 자본과 전문적 기술과 10년 이상의 세월을 요하는 거창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주식 매매만은 큰 자본이 필요치 않고 오직 총명한 판단만으로 짧은 시일 내에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기진, ‘나의 회고록(12)’, ‘세대’ 1965년 9월호)

조선취인소의 입회 장면.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한 5년간, 김기진은 매일 오전 9시5분 전 명치정 주식중매점(증권회사)에 나가 시세판을 지켜보다가 오후 3시 후장(後場)이 끝나면 신문사로 출근해 새벽 한두 시까지 조간신문을 편집하는 고단한 일과를 이어갔다. 그 와중에도 일본인이 저술한 ‘상장학(上場學)’ 서적을 모조리 구해 읽었음은 물론, 주가의 고저등락을 청색과 적색 2가지 색으로 그려놓은 괘선지를 벽에 붙여놓고 추세를 연구했다.

김기진은 5년 동안 다른 종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동신주(東新株·주식회사 도쿄취인소 신주권)’ 한 종목만 사고 팔았다. ‘동신주’는 명치정 주식시장 최고의 ‘화형주(花形株·블루칩)’로서 조선취인소 전체 거래량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각광받았다. 인기만큼이나 주가 역시 탄력적이어서,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을 때는 174원 하던 주가가 하루아침에 25원 폭등할 만큼 투기성이 강했다.

 

1935년 봄부터 1940년 여름 동신주 거래가 일본 전국에서 금지될 때까지 5년 동안 나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취인소 근방에서 살았다. 5년간의 성적으로 원금의 15배까지 만들어본 것이 나의 최고의 성적이었다. 동신주의 주가가 폭등하기 직전에 그 기미를 예감하고서 주식을 사놓은 뒤에 가격이 돌연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이놈을 추격하면서 주식 숫자를 두 배씩 늘여가니 불어난 금액이 어느덧 원금의 15배에 달했다. 주가의 움직임은 미묘한 것이어서 연구하면 할수록 흥미진진했다. 동신주만 사고판 이유는 일본 전국에서 수천만명의 대중이 매매하는 주식인 고로 어떤 특정한 개인의 힘으로 그 가격을 올리거나 떨어뜨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동신주 주가는 일본 전국에 산재한 고객의 지혜가 결집된 소산이었다. (김기진, ‘나의 회고록(12)’, ‘세대’ 1965년 9월호)

 

김기진이 한번 거래로 15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단기취인’이라는 독특한 거래방식 덕분이었다. 단기취인은 10주 단위로 매매를 체결하고 다음날 대금을 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보(日步) 제도’를 두어 소정의 이자와 수수료만 내면 결제를 무기한 연기할 수 있게 했다. 실물 주식과 현금이 오가는 경우는 드물었고, 주가의 등락만큼 차액을 지급하는 청산거래가 대종을 이루었다. 10%의 증거금으로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진 돈의 10배까지 주식을 사고팔 수 있었다. 주가가 10%만 오르내려도 매매자는 ‘깡통’을 차거나 두 배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장기취인, 단기취인, 실물취인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거래제도가 있었지만, 실제 거래의 90% 이상은 단기취인에 집중됐다.

단기취인에 상장된 종목은 1부 7종목, 2부 20종목, 도합 27종목이었다. 1부에 상장된 종목은 조취(주식회사 조선취인소), 조신(조취 신주), 동신(주식회사 도쿄취인소 신주), 대신(주식회사 오사카취인소 신주), 연취(주식회사 다롄주식상품취인소) 등 일본 각지의 거래소 주식과 일산(일본산업주식회사), 종신(종연방적주식회사 신주) 등 일본 굴지의 거대기업이었다. 2부를 대표하는 종목은 일로(일로어업주식회사), 제인(제국인견주식회사), 조석(조선석유주식회사), 북지(북선제지주식회사), 척신(동양척식주식회사 신주) 등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됐기 때문에 거래소 주식이 거래소에서 매매됐다. 오늘날로 치면 나스닥(NASDAQ) 주식이 나스닥에 상장된 것과 같은 이치다. 조취, 동신 같은 거래소 주식은 일본의 경제상황과 국제정세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해 증시의 바로미터 노릇을 했다.

조선과 관련 있는 기업은 ‘국내주’로, 관련 없는 기업은 ‘일본주’ ‘만주주’ 등으로 분류됐지만, 국내주라도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 기업이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기업으로 큰 축에 속하는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김연수의 경성방적, 이종만의 대동광업 등도 단기취인 상장회사에 비하자면 자본금 규모가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았다.

김기진이 동신주 투기에 열을 올리던 1930년대 후반은 부침이 심한 시대였다. 중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파장은 고스란히 주가에 반영됐다. 시시각각으로 타전되는 전황에 따라 주가는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 주가는 장제스가 하야한다는 소식에 폭등하고, 국가총동원령이 발동된다는 소식에 폭락했다. 중국군의 반격 소식에 폭락하고, 일본군의 광둥성 점령 소식에 폭등했다. 주가의 폭등과 폭락세가 이어지면서 벼락부자와 알거지가 속출했고, 명치정에는 투기꾼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세계대전의 여파로 사회는 몹시 불안하고 음습했지만, 명치정 날씨만큼은 화창했다.

 

구라파의 풍운은 드디어 도처에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로 주식시장은 노한 불길처럼 대전경기(大戰景氣)를 구가하고 있다. 동신주는 독일과 폴란드가 충돌하면서 오늘까지 35원이나 오른 셈이고 영국의 선전포고로 오늘 아침 단번에 25원이나 폭등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500원까지 올랐던 주식이니 지금의 170원쯤은 문제가 안 되는 판이다. 구라파의 전쟁 덕분에 졸부가 된 이는 한두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도 속출할 듯하다. 중매점도 대만원이고 주식시장도 대활황이다.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주식판은 뜻하지 않은 기쁨에 잠겼다. (‘명치정 주식가에 인산인해’, ‘동아일보’ 1939년 9월5일자)

유망한 은행원이 은행돈을 빼돌려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절도범으로 전락한 사연을 소개한 ‘조선일보’ 1937년 4월18일자.

 

김기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명치정 주식중매점에 출근한 5년간은 1920년 8월14일 명치정에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1932년 ‘조선취인소령’ 제정 이후 ‘인천미두취인소’와 합병되어 ‘조선취인소’로 개편)이 개장한 이래 가장 큰 시세를 분출하던 시기였다. 비록 한때 한번 거래로 15배의 수익을 올린 적도 있는 ‘슈퍼개미’였지만, 1940년 주식에서 손을 떼면서 결산했을 때 주식 투기로 벌어들인 소득은 전무했다. 김기진은 동신주 투기를 끝냄과 동시에 ‘매일신보’에 사표를 냈다. 명치정 주식시장의 주식거래는 1945년 8월13일까지 이어졌고, 이틀 후 김기진은 친일문학가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직함을 지닌 채 광복을 맞았다.

 

동일은행 2만원 도난 사건

 

1937년 4월14일, 오전 업무가 시작되자 동일은행 본점 출납계 직원 유신재는 당일 은행에서 사용할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두 블록 떨어진 조선은행 본점으로 향했다. 거금을 운반하는 일이었지만 매일 하는 일이다보니 별다른 긴장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걸어서도 5분이면 닿을 거리를 보안을 위해 경호원 두 명을 대동하고 업무용 차량을 타고 다녔다. 조선은행 출납창구에 전표를 내미니 직원은 100원권 지폐를 100장씩 묶은 돈다발 아홉 뭉치를 내주었다. 여러 번 헤아려 금액을 확인한 후 붉은색 현금수송 트렁크에 넣었다. 서울시내 고급주택 아홉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지만 트렁크에는 절반도 차지 않았다.

동일은행으로 돌아온 유신재는 빳빳한 신권 9만원이 든 트렁크를 출납계 주임 류인명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은행금고에서 조선은행으로 보낼 동전을 정리하고 있던 류인명은 유신재가 돌아온 것을 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유군, 금고 쪽에 일손이 부족하네. 얼른 가서 도와주게.”

유신재를 금고로 보낸 후 류인명은 트렁크를 열어 현찰이 제대로 들어있는지 눈대중으로 확인하고 곧 금고로 돌아갔다. 동전 정리를 끝낸 후 유신재는 묵직한 동전 꾸러미를 들고 조선은행으로 떠났고, 류인명은 다른 직원과 함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한참 자리를 비웠던 류인명이 나타나자 창구 직원 남궁호가 트렁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창구에 현찰이 부족합니다. 이 돈을 가져다 써도 될까요?”

“잠깐만. 내가 경황이 없어서 아직 세 보지를 않았어.”

류인명은 그때서야 유신재가 가져온 현찰을 트렁크에서 꺼내 헤아려보았다. “하나, 둘, 셋…일곱.” 돈다발을 한 뭉치씩 꺼내니 일곱 뭉치가 나왔다. 돈다발을 헤아리던 류인명도, 지켜보던 남궁호도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두 뭉치가 모자랐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한 장씩 헤아려보았지만, 역시 7만원뿐이었다. 은행 안에서 현찰 2만원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어처구니없는 금융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주식시장의 조선인 미다스 조준호의 활약상을 소개한 ‘동아일보’ 1938년 9월27일자 기사(왼쪽)와 그가 설립한 동아증권주식회사 본사.

10시30분부로 동일은행 본점은 업무를 중지하고 사라진 현금을 찾아 나섰다. 금고를 열어 잔고를 확인하고, 서랍을 뒤지고, 몸수색을 하는 등 조용했던 은행은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남대문경찰서에서 출동한 수사대는 조선은행에 동전을 입금하고 돌아온 유신재와 운전수, 경호원 등 현금수송 관계자 전원을 체포했다. 경찰이 직접 나서 수색해도 사라진 2만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었다. 애초부터 트렁크 안에는 7만원밖에 없었거나 범인이 출납계 주임 책상 위에 놓인 트렁크에서 2만원을 훔친 후 잽싸게 은행 밖으로 빼돌렸거나. 수십 명의 행원과 고객으로 북적이는 은행 안에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트렁크에서 돈을 꺼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동일은행 업무는 점심시간 이후에야 재개됐다. 은행 업무는 정상화됐지만, 2만원의 행방과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유신재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고 범행을 입증할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9만원을 인출한 직원이 2만원을 빼돌리고 7만원이 든 돈가방을 출납계 주임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긴 했다. 유신재가 그처럼 어수룩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후 업무가 종료된 이후 동일은행은 조선은행에 현금 10만원을 입금했다. 조선은행 출납 담당자는 동일은행이 입금한 10만원 돈다발에서 사건해결의 결정적 단서를 발견했다. 당일 오전 조선은행에서 인출한 현금 2만원이 봉인도 뜯지 않은 채 되돌아온 것이었다. 사라진 2만원은 은행 밖으로 빼돌려진 것이 아니라 은행 금고로 들어간 셈이었다. 사건 직후 동일은행 금고 속의 현금은 장부와 일치했으므로 사건 발생 이전 동일은행 금고에는 2만원이 비어 있었을 것이었다. 범인은 횡령한 돈을 메우기 위해 트렁크에 든 돈을 훔쳤을 개연성이 컸다.

사건 발생 나흘 후, 범인이 밝혀졌다. 범인은 현금수송 직원 유신재가 아니라 출납계 주임 류인명이었다.

 

류인명은 은행 돈 2만원을 횡령하고 호시탐탐 자신이 축낸 돈을 보충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사건 당일 유신재가 9만원이 들어 있는 트렁크를 출납계 주임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때, 류인명은 마침 동전 이만일천원 가량을 조선은행으로 보내려고 금고 곁에서 있었다. 류인명은 유신재에게 금고로 가 동전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라고 말하곤, 유신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돈을 세는 척하며 트렁크 문을 열었다. 트렁크 속에서 만원짜리 돈다발 두 뭉치를 슬그머니 꺼내 가지고 자기 책상 위에 있는 손금고 속에 넣어두었다가 은행 금고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그 동안 자기가 축낸 은행 돈 2만원을 보충했다. (‘동일은행 2만원 사건 해결’, ‘조선일보’ 1937년 4월18일자)

 

류인명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일은행 사환으로 들어가서 12년 만에 본점 출납계 주임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세 아들의 아버지이자 촉망받는 은행원이던 그가 한낱 절도범으로 전락한 것은 명치정 주식시장에 발을 잘못 담근 탓이었다. 류인명은 분에 넘치게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요리점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월급쟁이 생활로는 미래가 없음을 깨닫고 주식으로 일확천금을 할 허튼 꿈을 꾸었다. 수년 동안 은행 돈을 돌려 주식에 투자했으나 번번이 낭패를 보았다. 실패를 거듭하자 돌려쓴 은행 돈이 2만원에 달했다. 메워넣을 방법을 찾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다가 자기 책상 위에 놓인 돈 가방을 보자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주식왕’ 조준호

 

명치정 주식시장에 발을 디딘 사람이 류인명처럼 모두 신세를 망친 것은 아니었다. 일본 회사 주식이 상장되고, 일본인이 설립하고 운영한 명치정 주식시장이었지만, 그곳에서 가장 큰 부를 이룩한 인물은 조선인이었다.

1934년 조선취인소 증권거래원 허가를 받은 조선인 조준호는 동아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주식계의 제왕으로 등극했다. 동아증권은 일본인 중매점보다 한발 늦게 영업을 시작했지만, 각지에 통신망과 연락망을 완비하고 오사카에 직통전화를 가설해 도쿄와 오사카 주식시장 시세를 어느 중매점보다 신속히 전달함으로써 설립 첫해부터 명치정 제일의 중매점으로 맹위를 떨쳤다. 설립 이후 광복 직전까지 매매고 수위를 놓치지 않았다. 조선취인소 전체 매매고의 10% 이상이 동아증권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장 수완가로 또한 실업가로 장안에 명성이 자자한 동아증권주식회 사장 조준호씨는 투기계에 발을 디딘 지 불과 3년 만에 치밀한 두뇌와 민첩한 이지의 날카로운 소산으로 수십년 동안 주식계에서 활약하던 백전노장 취인원을 발아래 꿇리고 동충서돌 종횡무진의 활약을 거듭하여 이제 주식계에서나 미두계에서나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 200만 원에 달하는 회사 자본도 잘 운용하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저 유명한 2·26사건(1936년 2월 일본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이래로 금일까지 조준호씨가 명민한 두뇌로써 주식과 미두로 불과 6~7개월 만에 20만원이라는 거대한 금액의 이득을 보았다고 한다. 20만원! 20만원의 거액을 벌어들일 때 그 속에 묻힌 조준호 씨의 고심은 누구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자중하고 건재하여 금융가에서 조선인을 대표하여 이름을 떨치기바란다. (‘조준호 씨 20만원 이득설’, ‘삼천리’ 1936년 12월호)

 

조준호는 1903년 대한제국 고위관료를 지낸 조중정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강제합방 후 자작 작위를 받은 세도가 조중웅이 조중정의 육촌형이었다. 명문거족의 후예로 태어난 조준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으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롭게 자랐다.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1924년 도쿄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25년 재정난에 빠진 ‘시대일보’에 1만원을 출자해 홍명희 사장과 함께 전무이사로 신문사 경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대일보’는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문을 닫았다.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경한 조준호는 웅대한 포부와 이상을 품고 문화사업에 투신하여 동양문화 건설의 주역이 되고자 ‘시대일보’에 사재를 투자하고 제일선에 서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언론계는 조준호가 몸담기에는 너무나 좁은 무대였다. 조준호는 꿈을 이룰 수 없는 언론계를 떠나 실망을 부둥켜안고 미주(美洲)로 건너갔다. (‘실업계 투사 조준호씨 면모’, ‘동아일보’ 1938년 9월27일자)

 

‘시대일보’ 폐간 후 집안의 사업체를 돌보던 조준호는 1927년 미주 시찰을 떠났다. 1905년 이후 중지된 중남미 이민사업을 재개할 뜻을 품고 떠나는 현지 답사였다.

 

시내 숭삼동 회사원 조준호씨와 제약회사 취체역(이사) 남주희씨, 전 중앙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 김춘기씨 세 명은 미국을 거쳐 브라질을 시찰하기 위해 지난 10일 오전 10시 부산행 급행열차를 타고 장도에 올랐다. 일행의 시찰목적은 브라질 이민상황을 자세히 보는 데 있다고 한다. 브라질에서 2개월 동안 체류한 후 구라파를 시찰하고 1년 후에 귀국할 것이라 한다. 일행을 대표하여 조준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으로 이민이라 하면 남북 만주밖에 모르는 실정이라 해외의 발전을 볼 수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저와 두 사람이 의논하고 먼저 가서 일체 상황을 보고 온 후에 다소간 구체적 계획을 세워볼까 합니다.” (‘조준호씨 남미 시찰’, ‘동아일보’ 1927년 2월12일자)

 

1929년 남미 시찰과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준호는 의욕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30년 미국 윌사 석유회사의 국내 독점 판매권을 얻어 ‘조선윌사석유회사’를 설립했고, 1931년 이발기구를 제조 판매하는 ‘동아이발기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34년 동아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에는 명치정 주식시장의 ‘주식왕’으로 명성을 떨쳤다. 1935년에는 주식시장에서 성공한 여세를 몰아 인천에 미두취인점까지 차렸다. 조준호는 주식과 미두를 중개만 한 것이 아니라 200만원 상당의 자금을 직접 운용했다.

 

증권취인점을 경영하는 수단과 조직이 그와 같이 호대하면서 주밀한 것은 증권계에서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동아증권의 사장인 조준호 자신이 시장에 뛰어들어 엄청난 자금을 움직여 매매를 조종하고 있는 광경은 참으로 호방하면서 기민하다. 최근의 실례를 볼지라도 지난 7월 중순경 주요 주식이 참락에 참락을 거듭하여 ‘종신’이 200원대가 무너지고 ‘동신’도 120원대가 무너지려 할 때 조준호는 모두가 투매하는 와중에 초연히 뛰어들어 종신을 200원 내외에서, 동신을 120원 내외에서 쏟아지는 매물을 전부 소화했다. 주식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들도 그러한 용기는 없었으나 조준호만은 대담하게 매집하여 종신과 동신이 급등했을 때 엄청난 차익을 얻었다. 행운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조준호가 그만치 시세의 흐름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실업계 투사 조준호씨면모’, ‘동아일보’ 1938년 9월27일자)

 

조준호는 조선 굴지의 수재를 처남으로 두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무국장과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을 지낸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 사회주의자 이강국이었다. 고정간첩 김수임의 연인으로 알려진 이강국의 본부인은 조준호의 여동생이었다. 조준호는 이강국의 독일 유학비용을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귀국한 이강국을 동아증권 이사로 임명했다.

황금이 들끓는 명치정 주식시장이었지만, 주식으로 300만원 이상의 부를 축적한 인물은 조준호 단 한 사람뿐이었다. 조준호는 광복 직후 주단포목을 매점해 수백만원의 폭리를 취한 사실이 발각되어 구속되는 비운을 맛보지만, 한 달 만에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효시가 되었다. 조준호의 재산은 서울 명동의 사보이호텔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확천금의 비책

 

일확천금의 꿈은 유구한 연원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투기의 위험성을 알지만, 또 누구나 한번쯤 일확천금을 꿈꾼다. 일확천금은 과연 가능할까.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사람이 지천에 있는데 비결이 없을 리 없다. 70년 전 잡지에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일확천금의 비책이 기록돼 있다.

 

투기시장에서 기십만 원 기백만 원의 자금이 없이 큰 성공을 거두려거든 사람노릇 해가면서 꿈꾸어서는 안 된다. 부모처자를 생이별하고 알몸으로 제 한 몸이 되어 아무 거리낌 없이 홀가분하게 한 후에 기십원이든지 기백원을 만들어가지고 발을 들여놓는데 그날부터는 아주 마음을 지독하게 먹어야 한다.
부모처자까지 떼놓은 터라 취인소 문전을 돌베개로 삼고 세상을 떠날 최후의 비통한 장면까지 생각한 사람이라야 한다. 투기에는 끈기가 날실이 되고 배포 큰 것이 씨실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지독한 결심을 한 터라 기십원 기백원이 없어진대야 겁날 것이 없으니까 대담해지고, 30원 폭으로 오를 때도 적은 이익을 탐하지 않고 버텨 큰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까닭이다. 이 말이 점잖지 않은 말 같지만 그만한 지독한 마음이 있어야만 성공하는 확률이 높아진다.
그럴 용기가 없는 사람은 행여 투기시장에 발을 놓지 말라! 조선취인소 금기 배당이 1할 하고도 3분이란다. 취인소가 고율 배당하고 30여 취인원이 영업해가지고 취인소 사원, 각 취인원 점원, 외교원 등이 무슨 돈으로 먹고사는 줄 아는가? 그나 그뿐이냐. 조취 증권시장을 통해 매년 적어도 수백만원이 도쿄 오사카로 유출한다. 도대체 어디서 이 돈이 나느냐 하면 일확천금 하러 명치정 주식판으로 인천 미두판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바치는 돈인 것을 짐작하면 일확천금의 꿈도 깨어질 것이 아니냐? (‘일확천금은 가능하냐?’, ‘조광’ 1936년 1월호)

 

‘적은 밑천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꾸려거든, 사람 노릇을 포기하고 죽을 각오를 하라.’ 편안한 침대에 누워 천장만 쳐다보며 돈벼락이 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출처 : 연어알
글쓴이 : 북극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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